예수와 인자
목차
들어가는 말
Ⅰ. 공관 복음서의 인자 용법
Ⅱ. 인자의 어의적 (Semantic) 논의
1. 일상적인 인자 용법
1.1. 사람 일반을 가리키는 총칭적 의미
1.2. ‘나 ’의 완곡한 표현 (Circumlocution for I)
1.3. 관용적 의미 (Idiomatic sense)
1.4. 평가
2. 종말론적인 인자 개념
2.1. 다니엘의 인자 같은 이
2.2. 다니엘 인자의 전승사적인 발전
2.2.1. 에디오피아 에녹서의 비유
2.2.2. 4 에즈라
2.2.3. 다니엘의 인자 전승과 신약성서의 인자
Ⅲ. 예수의 인자 용법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예수의 자기 이해 내지 자의식, 이 문제만큼 역사의 예수 연구에서 논란이 되는 주제도 없다 . 많은 비판적인 역사가들은 예수가 어떠한 그리스도론적 지존 칭호도 자기에게 부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아들, 주님, 사람의 아들 등. 사실 방법론적으로 예수의 자의식을 가늠해 보는 시도라는 것이 기껏해야 연구자 자신의 심리적 투사의 수준이기가 십상이고, 이런 방법론은 예수와 초대 교회 그리고 20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와의 삼중적 차이를 무시한 낭만주의적 예수 그리기의 소산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자의식 수준에 우리 스스로를 정립시키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객관적인 예수의 자의식이 투영될 만한 소지를 발굴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사실 예수의 지존 칭호 중에서 가장 역사적 신빙성이 있는 것이 사람의 아들이다. 비록 대사제 앞에서는 인정하였지만 메시아라는 칭호는 예수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기를 부담스러워한 것이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역사의 진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나 고백자의 입에서 발설되는 표현이고 예수 자신이 이 표현을 쓴 일은 없다.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가 발설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그것은 지존 칭호가 아니라 그의 압바 칭호에 연계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선 자 곧 아들의 입장 (le Fils vis-a-vis du Pere)을 본시 말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제 남은 것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인데 이것의 비 (非 )역사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지만 역사적 예수에게서 그 표현의 기원을 보는 학자들이 훨씬 더 많다.
진정성의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해석들에 이르기까지 과연 인자는 히긴스 (Higgins)와 후커 (Hooker)의 논문 제목들이 암시하듯 미완의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일까 ? 이 용어에 관한 놀랄 만한 해석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현금의 신약학계에는 인자가 그 표현의 수수께끼적인 특성으로 인해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론을 위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데 이견이 없다. 예수의 사신과 행적 안에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기 때문에도 이 칭호는 예수의 인격과 그분의 사명에 관련된 신비를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열쇠로 보인다. 만일 인자가 참으로 죽음을 넘어서까지 예수의 인격과 사신을 전달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면, 바로 거기서 그리스도론의 기원을 보리라 희망할 수 있지 않을까? 인자라는 개념에 힘입어 소위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심연이 실은 과장된 문제임을 보여 주고 그 간격을 나름대로 해소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인자는 부활 사건 이전과 이후의 예수의 동일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아닐까? 본 논문은 장차 인자와 예수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한 일종의 예비적 고찰로서 인자 논의에 대한 최근의 학계 동향에 주목하면서 그 개념의 유다교적 배경을 고찰하고자 한다.
Ⅰ. 공관 복음서의 인자 용법
불트만 이후 학계는 공관 복음의 인자 용법을 일반적으로 세 가지 그룹으로 구별하여 왔다.
첫째로 현재 활동하는 인자에 대한 말씀이 있다 . 마르코 복음은 인자가 죄를 용서하는 권능 (마르 2,10)과 안식일을 위반하는 권세 (2,28)가 있음을 말한다 . 어록에서는 인자가 국외자로서 머리 누일 곳도 없고 (Q 9,58) 먹보요 술꾼이라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Q 7,34).
둘째 그룹으로는 인자의 고난 및 죽음 그리고 부활을 언급하는 본문들을 들 수 있다 . 그 대표적인 예로는 마르코 복음서에 나오는 세 차례의 수난 예고들이다 (마르 8,31; 9,31; 10,33). 루가의 고유 자료에도 인자의 수난과 부활이 언급된다 (24,7). 그리고 마르 9,12; 14,21.41(병행 구절들 , 마태 26,2 와 루가 22,48 에서는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이 인자의 고난만을 회상한다 . 한편 마르 9,9(병행구절 )에서는 고난에 대한 언급 없이 부활만을 예고한다. 그런데 어록 전승에서는 인자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는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세 번째 그룹으로 인자를 다니엘 7,13 과의 연관성 안에서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인물로 제시하는 구절들이 있다 . 게르트 타이센은 다음과 같이 세 범주로 미래적인 인자의 말씀을 구분한다.
1) 종말론적인 상관성 (Eschatologische Korrelative): 여기서 인자는 과거의 인물과 유형론적인 관계에 있다. 인자는 요나와 직접 비교되고 (Q 11,30), 인자의 날은 과거 노아의 시대 (Q 17,26) 및 롯의 시대 (Q 17,28)와 상관된다 . 하늘을 비추는 번개와 인자가 비교되기도 한다 (Q 17,24). 종말론적인 상관성에 관련되는 로기아는 주로 어록 자료에 속해 있다.
2) 종말론적인 권리 문장 (Rechtssatz): 마르 8,38 은 나와 미래의 인자를 뚜렷이 대조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Q 12,8 도 이와 동일한 내용을 전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는 다니 7,13 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
3) 미래에 인자를 보는 것에 대한 진술 (Aussagen vom zukunfitigen ‘Sehen’ des Menschensohns): 예수는 자신을 재판하는 산헤드린의 심판관들에게 인자의 도래를 예고한다.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 오른편에 앉아 있고 또 하늘의 구름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르 14,62). 이 부분은 다니 7,13 을 직접 언급하는 것이다. 미래에 인자를 보는 것은 마르코 복음의 소묵시록에서보다 강렬한 묵시적인 색채로 나타난다 (마르 13,26). 이 밖에도 마태 10,23; 13,41; 16,27.28; 19,28; 24,30.39; 25,31 그리고 루가 18,8; 21,36 등이 미래의 인자에 대한 로기아다.
위의 자료를 개괄해 볼 때 세 가지 매우 특이한 현상이 다음과 같이 지적될 수 있다 . 복음서에 82 번이나 등장하는 인자라는 말이 늘 예수의 언사로만 사용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이채롭다. 사도 7,56 과 묵시 1,13 과 14,14 을 제외한다면 인자 표현은 오직 복음서에만 나타나고 있다. 이미 샤를르 페로가 정확히 지적하였듯이, 인자는 예수의 언사 안에 결코 주어의 빈사로 등장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두 번째로 지적됨직하다. 예수는 인자 표현을 늘 삼인칭의 양식으로 사용할 뿐 ‘나는 인자로다 ’라는 식의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는다 . 세 번째로 인자 표현의 빈번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의 어디에도 이 용어에 대한 설명이 없다 . 마치 청중들이 그 용어에 대한 예비적 이해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인자라는 말이 과연 메시아를 지칭하는 전문 용어로 이미 숙지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예수의 ‘나 ’를 지칭하는 완곡어법일까? ? υ?ο? το? ?νθρ?που의 의미는 진정 무엇일까? 과연 예수는 이 표현을 이상에서 분류된 세 가지 범주로 모두 사용하였을까 ? 만일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 해도 , 예수와 인자와의 관계는 왜 동일시되지 않고 언제나 삼인칭으로 그 간격이 유지되고 있을까 ?(예컨대 마르 14,62; Q 12,8)하는 질문이 다시금 제기된다. 예수는 자신과는 다른 어떤 인물의 도래를 기다렸는가?
한편 왜 어록에는 수난과 부활의 인자 전승이 전무한가 ? 이러한 부재 현상은 퇴트 (H. Todt)가 설명하듯 B 그룹의 전승들은 후대의 것으로 파루시아 (Parusia)의 예수와 종말론적인 인자가 동일시된 뒤 다시금 지상의 예수에게 적용된 후 수난과 부활 전승에까지 확대된 결과일까? 이런 추론의 방식으로 일부 학자들은 어록의 종말론적 인자에서 출발하여 마르코의 수난의 인자에 이르기까지 인자론의 전승사적 발전을 추적함으로써 아울러 공관 복음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이런 식의 단순 발전 논리로 인자론이 갖는,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놀라울 만큼의 일관된 특이 현상을 충분히 해명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인자 표현이 제기하는 문제의 지평을 먼저 당대의 언어 관습에서 재조명하기 위해 먼저 일상적인 인자 용법에 대한 학계의 최근 논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Ⅱ. 인자의 어의적 (Semantic) 논의
1. 일상적인 인자 용법
1.1. 사람 일반을 가리키는 총칭적 의미
언어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어 ? 는 히브리어의 ??? ?? 또는 아람어의 ???? ??를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한 5,27 을 제외하고는 ? υ?ο? το? ?νθρ?του가 늘 이중 관사로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표현은 아람어 ??? ??의 강조 형태인 ???? ??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인자는 본시 칭호가 아니며 사람 일반을 지칭하는 데 쓰이고 있다 . 구약성서에서 ??? ??은 시편 8,5 과 80,18 에서 보듯 인간의 위대함을 지시하면서도 초월적인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근원적인 한계를 보다 더 강조하는 일종의 시적인 표현으로 등장한다 . 에제키엘서에는 ??? ??이 하나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부르는 호격으로 무려 90 번 이상이나 나온다.
아람어로 씌어진 문헌에서 ??? ??는 사람 일반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 예컨대 창세 13,16 의 ???를 쿰란의 위경 창세기는 ??? ??로 번역하였다 (1QApGen 21,13).
(그리고 나는 어느 인자도 셀 수 없는 땅의 먼지처럼 너의 자손을 많게 하리라 ).
외경 그리스어로 전해지고 있는 구약성서의 외경 중에 ? υ?ο? ?νθρ?που가 복수 형태로 27 회 나타나고 , ?? υ?οs ?νθρ?που(요셉의 유언 )와 ?? α?μα υ?ο? ?νθρ?που(요셉과 아세넷 18,9)라는 단수 표현이 2 번 검색된다 . 특기할 만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 υ?ο? το? ?νθρ?που라는 이중 관사의 용법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복수로 사용된 경우 이 표현은 단순히 사람 일반을 지칭하는 평범한 의미로 사용되었고, 단수인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비교의 대상으로 씌어졌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자처럼 (?? υ?ο? ?νθρ?που) 당황하실 수 없고 또 (그분은 ) 인자처럼 두려워하실 수도 없다 (요셉의 유언 2,5). 한편 요셉과 아세넷 18,9 에 의하면 아세넷의 뺨 위에 인자의 피와 같이 붉은 색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인자처럼 ”이라는 표현은 모두 보통 사람을 지칭하는 셈어적 표현이다. 이처럼 단지 하나의 관사를 지닌 외경의 ? υ?ο? ?νθρ?που는 복음서의 ? υ?ο? το? ?νθρ?που와 비교하여 볼 때 문법적 차이와 함께 의미론적 차이를 노정하고 있다. 그리고 외경의 인자 표현 양식에는 발언하는 자를 지칭하는 완곡어법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
1.2. ‘나 ’의 완곡한 표현 (Circumlocution for I)
일찍이 1557 년 테오도르 베자는 인자가 자신을 에둘러 완곡하게 표현하는 어법이라고 해석하였다 . 베자의 이론은 벨 하우젠 (J.Wellhausen)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 마침내 1967 년 베르메스 (G.Vermes)가 인자 연구의 역사에서 인자의 완곡어법에 대한 새로운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 베르메스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아람어에서 강조어법의 ???????는 ??????처럼 한 사람 또는 어떤 사람을 지칭한다 . 그는 또 ??????가 ????가듯이 ??????는 갈릴래아 아람어에서 ?이 탈락되어 ??????로 쓰인다고 주장하였다. ‘bar nasha’는 ‘hahu gabra’(이 사람 )처럼 ‘나 ’를 가리키기 위한 완고한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자는 이로써 자신을 겸손하지 못하게 강조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탈무드의 아람어 텍스트 (Berakot 5c, Ketubot 35a, Berakot 3b, Shabbat 3a)에서 베르메스는 갈릴레아 아람어에서 ‘bar nasha’가 일인칭의 완곡어법으로 쓰인 용례들을 지적하였다. 그 실례를 들어 보자.
“랍비 시므온 벤 요하이가 말했다. ‘이스라엘이 토라를 수여받을 때 내가 만일 시나이산에 있었다 , 나는 자비로우신 그분께 바르 나샤 (??????)를 위해 두 개의 입을 만들어 달라고 청했을 것이다 . 하나는 토라 연구를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먹고살기 위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만일 세상이 하나의 입이 발설한 고발로 말미암아 힘들게 버텨 나갈 수 있을 정도라면 두 입이 고발하게 되면 얼마나 참담하겠는가’”(예루살렘 탈무드 , berakot 3b).
베르메스는 ‘bar nasha’가 여기서 시므온 벤 요하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완곡어법의 해석은 아람어 수정본 (예루살렘 탈무드 , Shabbat 3a)에서 ‘사람의 아들 ’이 ‘이 사람의 아들 ’로 대체 됨으로써 입증된다고 주장하였다 . 베르메스는 아람어의 이러한 용례를 복음서에 적용시키는데 , 예컨대 마르 2,10 의 인자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다. 예수는 인자가 땅위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지나치게 자만스레 보일 수 있는 ‘나 ’라는 직설적 표현을 회피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고 말하는 군중의 반응 (마르 2,12)은 예수의 에두른 표현이 이해되어 이런 일이 예수 한 개인에게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베르메스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소개되는 마르 2,28 의 인자 역시 완곡어법의 용례로 이해한다. 마태 16,13(사람의 아들이 누구라고 사람들이 말하더냐 ?)의 병행구들인 마르 8,27 과 루가 9,18 에서는 인자 대신 ‘나 ’가 등장한다. 베르메스는 사람들 (bene nash)과 사람의 아들 (bar nasha) 사이의 대비가 본시 관용구적 표현이었다면 , 마태오의 전승이 본래적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 그리고 베르메스는 화자 자신을 에둘러 표현하는 인자의 용법은 역사적 예수에게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 다니 7,13 의 종말론적 인자를 표상하는 용례는 모두 초대교회의 미드라쉬적인 구약성서 독서법이 만들어 낸 창작이라는 것이다. 베르메스의 완곡어법 이론은 슈바르츠 (G.Schwartz), 헤어 (D.R.A.Hare) 등에 의하여 수용되고 발전되었다. 랍비 문헌에 나타난 완곡어법의 예는 타르굼에서 발견된다. 창세 4,14 에서는 카인이 ‘나는 숨을 곳이 없나이다 ’라고 말하지만 타르굼 네오피티 4,14 에서는 ‘오 주여 , 바르 나쉬는 당신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나이다 ’라고 전한다 .
1.3. 관용적 의미 (Idiomatic sense)
베르메스의 이론이 미묘한 상황에서 ‘나 ’를 지시하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 관용적 용례는 화자를 간접적으로만 포함시키는 총칭적 의미를 부각시킨다 . ‘bar nasha’의 해석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이러한 강조점의 전환은 주로 케이지 (Casey), 린디스 (Lindars), 바우캄 (Bauckham), 풀러 (Fuller) 등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 케이지는 ‘bar nasha’ ‘bar nash’ ‘bar enasha’가 랍비 문헌에서 의미상의 구별 없이 사용되었으며 , 모두 다 사람 일반을 가리키되 화자를 직접적으로 지시하거나 화자와 관련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그는 구체적인 실례로서 Sifre 3,14-17; 팔레스타인 탈무드 (Berakot) 2.8.5b; 에프라임의 유언 (lines) 121 ~124 을 제시하였다 . 케이지에 의하면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때로는 ‘bar nash’, 때로는 ‘bar nasha’라는 표현으로 일반적인 의미의 진술을 하였다는 것이다 . 예컨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 ”(Q 9,58)는 말씀에서 예수는 자신의 처지를 일반화하여 말한다고 본다 . 이렇게 해서 케이지는 예수의 삶과 죽음을 그리는 12 개의 로기아 (마르 2,10.28; 8,38; 9,12; 10,45; 14,21; 마태 8,20; 11,19; 12,32; 루가 12,8; 22,48)를 진정한 것으로 인정한다 . 일단 그리스어로 번역된 뒤 이 관용적 용법의 인자는 다니 7,13 과 연루되어 칭호로 재해석되었고 새로운 로기아들이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린다스는 ‘bar nasha’의 관용적 용례가 화자 자신을 포함하여 일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씌어졌다고 주장하였다 . ‘bar nasha’가 내 처지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례는 9 개의 로기아 (Q 7,34; 9,58; 11,30; 12,8.10; 마르 2,10; 8,31; 9,31; 10,34)에서 발견되며 린다스는 이들만이 진정한 예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였다 . 그 역시 케이지와 더불어 ‘bar nasha’가 희랍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다니 7 장의 인자 개념과 관련되어 그리스도론적 칭호가 되고 , 그로부터 종말론적 인자 로기아들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 그러나 바우캄은 ‘bar enash’가 자신을 포함하여 일정한 부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린다스의 해석을 비판하고 ‘bar enash’는 비규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한 사람 내지 어떤 이를 가리키는데 예수는 바로 이러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결국 자기 자신만을 배타적으로 가리켰다고 본다 .
1.4. 평가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인자는 무엇보다 인간 일반을 의미하고 , 혹은 나를 가리키는 완곡어법으로 사용되며 , 아울러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 대부분의 학자들은 랍비 문헌에서 인자는 순전히 나를 가리키기 위해서만 쓰인 적은 없으며 항상 일반적인 의미와 결합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
그러나 인자의 완곡어법에 관련하여 증거 자료의 연대 문제가 논란이 된다 . 피츠마이어 (Fitzmyer)는 특히 ‘나 ’의 완곡어법적 용례를 랍비 문헌에서 인용한다는 것은 문헌의 연대가 매우 후대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1 세기 팔레스타인 아람어의 경우에 적용시키기가 어렵다고 비판하였다 . 그는 선언하기를 예수 시대의 문헌 중에서 쿰란의 아람어 문헌에는 ‘bar enasha’가 ‘나 ’의 완곡어법으로 쓰인 예가 없다는 것이다 . 그러나 랍비 문헌의 연대 문제만으로 신약성서의 인자 표현이 지닌 특성을 약화시켜서 해석할 일은 아니다 .
모울 (Moule)이래 학자들은 신약성서의 모든 저자들이 ‘bar enasha’ 또는 ‘bar nasha’를 모든 전승층과 편집구에서 ? υ?ο? το? ?νθρ?που라는 비관습적인 형태로 번역하였음을 주목하였다 . 그리스어의 이 이중의 관사는 화자를 명시적으로 지칭하고 이 인자라는 의미를 강조해준다 . 왜 , 그리고 어떻게 , 이러한 동일한 번역이 세 개 (요한 5,27; ?τι υ?ο? ?νθρ?που?στ?ν; 계시 1,13.14 υ?ο? ?νθρ?που)의 예외를 제외하고 신약성서 전체를 관통하여 이루어졌을까 ? 이 현상은 이중의 관사를 지닌 인자가 부활 이후 교회 안에서 다니엘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으리라는 가설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니 7,13 의 ??? ???는 관사 없이 비규정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예외적인 현상은 복음사가들이 자신을 지칭하기 위해 예수께서 사용하신 ??????의 특수성을 보존하려 했다는 해석을 정당화시킨다. 비록 ‘나 ’라는 관용어법이 예수 당대의 아람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의 ??????를 예수의 ‘나 ’로 해석하는 것이 합. 이런 경우 피츠마이어의 입장은 수사적 기교에서 예수가 보여 준 언어 창조 능력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범주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예컨대 식탁의 봉사자들이라는 말이 그 당시 경멸의 대상이었으나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첫 번째 사목적 명칭이 되었다. 따라서 ‘나 ’의 완곡어법은 필요한 경우에 자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예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의 ‘나 ’라는 완곡어법을 청중들이 늘 잘 이해한 것은 아니다 . 예컨대 마르코는 어록 12,10 의 ??????를 잘못 이해하여 ‘사람의 아들들 ’이라고 (마르 3,28) 번역하였고 , 반면에 어록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이 용어의 본래 의미를 충실하게 전달하였다 . 그리고 마태오 (9,9) 역시 예수의 ??????를 비규정적 의미 (το?? ?νθρ?ποι?)로 해석한 청중들의 반응을 전하고 있다 . 그래서 복음사가들은 ??????를 알아듣기 쉽게 예수의 나 (ego)로 굳이 수정하는 경우를 보여줄 만큼 (가끔씩은 그 반대 방향으로 수정되기도 한다 ) 청중들은 이 탁월한 예수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나 ’는 단순한 완곡어법의 수준으로 제한될 수 없다 . 그렇지 않다면 예수의 ?????? 안에 담긴 특별한 그 무엇을 반영하는 ? υ?ο? το? ?νθρ?που의 성격을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한편 완곡어법적 용례나 관용구적 해석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자의 일상적인 의미에만 의존하기에 지상 생애의 인자와 종말론적 인자 사이에서 후자를 그리스도론적 창작으로 배척하는 일종의 배타적 선택에로 떨어지고 만다 . Q 12,8; 17,22; 마르 13,26; 14,62 등의 종말론적 인자 개념은 그것이 어떤 사람 , 특히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관용적 용법이 아니기에 자동적으로 그 역사성이 거부되고 마는 것이다 . 그러나 종말론적 인자 로기아에서 예수는 마치 자신과는 구별되는 것처럼 미래의 인자와 거리를 유지하는 그 비상한 모순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
결국 예수의 ??????는 다니엘서의 인자와 관계가 있다 . 앞에서 우리는 마치 인자 개념이 이미 숙지되어 있는 듯 인자에 대한 설명이 복음서 안에 완전히 부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 그리스어 ? υ?ο? το? ?νθρ?που의 이중의 관사는 화자 그 자신을 지칭할 뿐 아니라 다니엘의 ‘사람 같은 이 ’도 함께 지시하고 있다 . 만일 베르메스의 이론이 당시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 논문이 발표되던 그 당시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 1967 년에 발표된 이 논문은 다니엘서와 에티오피아 에녹서의 비유들에 나타난 묵시주의적 인자 개념을 회의하던 경향과 맞물려 있었다 . 쿰란 문헌 중에 에녹의 비유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다니 7,13 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예수 시대에 아직 묵시주의적 인자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하였다 . 1967 년 라이베스타르트 (Leivestard)는 도발적인 제목이 달린 논문을 발표하였다 .「묵시적 인자는 하나의 신학적 유령인가 ?」일 년 후 빈터 (P.Winter)는 “묵시주의적 인자의 본래 자리는 이란이나 유다 지방 또는 우가리트에서가 아니라 바로 독일의 대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고 말했다 . 그러나 어느 진지한 학자도 이처럼 가벼운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 먼저 다니엘의 인자에 대해서 , 그리고 묵시문학에서의 인자 개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
2. 종말론적인 인자 개념
2.1. 다니엘의 인자 같은 이
다니엘서의 “인자 같은 이 ”는 칭호가 아니라 일종의 서술이다 . 이러한 서술 양식은 랍비 문헌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배경에서 비롯한 것인 만큼 매우 특별한 그 의미론적 배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 그러기에 ‘인자 같은 이 ’라는 표현의 의미는 다니엘서의 후반부 (7-12 장 )가 사자들의 부활이라는 주제와 함께 구성하고 있는 고유한 묵시적 배경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 다니엘서 후반부는 통일적인 원형을 보여 주고 있는데 다니엘서의 인자에 대한 메시아적인 사변과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련된 일체의 유다적 묵시주의의 원천을 형성하고 있다 . 라코크 (A.Lacocque)에 의하면 다니엘서 후반부 (B)는 묵시적 틀 안에서 은유적 언어와 신화적 시와 더불어 하나의 유형론적인 통일성을 제시하고 있다 . 이러한 일반적인 입문이 다니엘 B 의 두 가지 근본 주제인 ‘인자 같은 이 ’와 ‘죽은 이들의 부활 ’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본다.
다니엘 B 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일련의 상징들이 짐승들과 인자 같은 이 , 바다와 구름, 그리고 시원의 시간과 죽은 이들의 부활을 동반하는 종말의 시간이라는 대립 관계를 통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 이 거대한 상징주의 체계 속에서 ‘인자 같은 이 ’라는 표현은 그 의미의 전체 사정 범위를 헤아리는 데 엄청난 도전으로 다가온다. 네 마리의 짐승에 관한 상징 중에서 특히 네 번째 짐승은 곧 우주적인 물과 암흑 밤과 죽음의 원시적인 용을 모델로 묘사되고 있다. 예레 51,34 과 특히 레비아탄이라는 바다의 용이 야훼께 파괴되는 이사 27,1 에서처럼 이 바다의 짐승은 두들겨 맞고 화염 속에 던져졌다(7,11). 태고적의 분이 심판의 불로 이 원시적인 뱀을 사멸시킨 것은 새로운 창조의 행위와 맞먹는다 자연의 리듬을 끊지 않은 노아 홍수에 의한 심판과는 달리 불에 의한 심판은 옛 세상의 어떤 모습도 남기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 새 세상의 질서가 이처럼. 그들은 질서의 창출자들이 아니라 무질서의 생산자이다. 그러기에 새로운 세상이 등장토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로 시원에로 되돌아가야 하며 , 사람다운 왕 (Adam-King)을 즉위시켜야 한다 . 7,13-14 와 7,17-18 사이의 평행법을 통해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지존하신 이의 성인들의 백성을 대표한다 . 이 왕국의 새로움은 출애 19,6 와 마찬가지로 성인들의 집단성으로 표출된다 :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왕국 , 거룩한 국민이 되리라 ”(출애 19,6). 그러기에 모든 나라가 성인들의 왕국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학자들은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기원을 사람의 모습을 지닌 신현으로서 에제 1,26 이하 ; 8,2 이하에서 찾으려 시도하였다. 발츠 (H.R.Balz)는 다니엘서의 사람의 모습을 한 이에게서 에제키엘서의 신현 속에 표현된 하나님 영광의 현현을 본다. 그러나 이 사람의 모습을 한 이를 천사적인 존재, 특히 이스라엘의 수호천사 미카엘과 동일시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천사의 모습과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모습 모두는 하나님 자신에 기인하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모상이지 그 역은 아니. 다니엘의 현시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성인들의 백성의 종말론적인 고양이지 에제키엘 1 장의 신적인 존재를 위격화하거나 미카엘 천사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의 아들 모습을 한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들에게로 나아가지 않는다 . 그는 장엄하게 즉위하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 ???). 따라서 예상되는 운동의 방향은 아래로부터 위를 지향한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이 운동 방향은 바다의 짐승들이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구름의 존재는 신의 영역 (출애 34,5; 레위 16,2; 민수 11,25)을 의미하며 사람의 모습을 한 이는 종말의 시간에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신격화를 예시한다 . 성인들의 백성이 겪을 최종적인 영광은 12 장에 나타나는 죽은 이들의 부활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삶의 수혜자들은 신앙을 위해 순교한 이들을 지칭하는 ?????? 곧 현자 내지 교사들이다. 여기서 영원한 삶이 창공과 별들의 빛에 비교되고 있는데 이것은 7 장의 구름으로 표명된 신의 영역에로의 접근과 상응하고 있다. 사자들의 부활 이면에 아마도 이사야 53 장의 고난받는 종의 동기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 이사야서의 이 동기가 다니엘서에서 비록 명시적으로 취급되지는 않았어도, 순교자들의 최종적인 의화가 거룩한 순교자들의 백성을 대표하는 인자 같은 이의 영광스런 즉위로 강변되고 있는 것이다 .
2.2. 다니엘 인자의 전승사적인 발전
2.2.1. 에디오피아 에녹서의 비유
다니엘 인자의 해석을 위해 가장 중요한 문헌은 신약성서 다음으로는 에녹의 비유이다 . 이 작품의 편찬 연대를 추정하는 작업은 매우 어렵다 . 아람어 에녹서 1 부 (1 ~36 장 ), 3 부 (72 ~82 장 ), 4 부 (83 ~90 장 )가 쿰란의 단편 속에 나타나지만 비유 부분 (37 ~71 장 )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 밀릭 (J.T.Milik)은 비유가 쿰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점을 들어 저술 연대가 기원후 270 년까지 상향될 수 있고 본래의 문헌은 그리스어로 작성된 그리스도인들의 작품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에녹의 비유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에녹을 인자와 동일시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밀릭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 따라서 이 문헌은 유다인의 저작이고 저술 연대도 상한 시기가 기원후 70 년이고 하한 시기는 기원전 40 년 정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 하한 시기의 추정은 로마가 점령한 팔레스타인을 파르티아 군대가 침공한 사실을 암시하는 56,5 에 근거한 것이다 .
에녹의 비유에 묘사된 인자는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으로서의 ‘선택된 자 ’와 ‘의인 ’ 칭호를 활용한다 . 시편 2 장과 11 장도 인자의 메시아 개념을 구성하는 데 기여하였고 , 지혜 8 장은 지혜의 선재 개념을 제공하였다 . 이처럼 구약성서의 여러 개념을 종합하면서 에녹의 비유의 인자는 다니엘의 인자 개념을 새롭게 재해석하였다 . 에녹서의 인자는 메시아이며 (48,10; 52,4; 참조 : 시편 110), 종말론적인 심판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62,5; 69,29; 참조 : 이사 11,2.4), 선재하는 지혜 (지혜 8 장 )의 방식으로 계시를 전달하는가 하면 , 야훼의 숨겨진 종 (참조 : 이사 49,2)이기도 하다 . 이처럼 다양한 성서 전통을 종합하면서 에녹서의 이 메시아적인 인자는 마침내 선재하는 존재로까지 이상화되었다 .
그러면 이 인자는 누구인가 ? 예컨대 카코 (A.Caquot)는 71,14 에서 에녹과 인자가 동일시되었다고 해석한다 . 71,14 에서 천사가 에녹에게 이르기를 “너는 인자니라 . 너는 정의를 위하여 태어났고 정의가 너에게 머물렀도다 ” 하고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런 경우 에녹이 환시를 통해 본 인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 되는 셈이다 . 그러나 콜린스 (J.J.Collins)는 에녹이 결국 인자라는 등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71,14 의 선언 이후에도 에녹은 여전히 인자와 구별된 존재로 남아 있다고 지적하였다 . 70,1 은 “그 (에녹 )의 이름은 살아서 인자 옆에 들어올려졌다 ”고 말하기 때문이다 . 71,14 의 인자가 에티오피아어에서 비규정적으로 사용되었기에 그 의미는 단지 한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여기에 인자의 선재 (48,3) 개념을 결합하여 해석하면 탁월한 천상 존재인 인자는 에녹과 같은 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의인들의 초자연적인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에녹은 “너는 한 사람의 인자니라 . 너는 정의를 위하여 태어났고 정의가 너에게 머물렀도다 ”(71,14)고 선언되기에 이른 것이다 . 이것은 인자가 에녹 안에 육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그러나 이 육화는 배타적이고 유일무이한 경우가 아니다 . 에녹이 환시로 목격한 인자는 에녹 자신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인자는 지상적 정의에 대한 천상적 상대자인 것이다 .
에녹 62,14; 71,17 에 의하면 의인들은 인자와 더불어 평화와 정의를 누리게 될 . 에녹은 의인들 중에 첫 번째로 인자와 같은 방식으로 고양되어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 지혜와 폭력의 대조 (42 장 ), 의인들의 피와 천상에서의 성인들의 중재 기도 (47 장)는 에녹 그룹이 박해를 당하고 있는 상황을 밝혀 준다 . 이 그룹은 의인과 서기관의 전형인 에녹을 그들의 이상형으로 삼았다 . 에녹이 인자와 같은 처지로 고양된다 함은 이 그룹의 메시아니즘은 의로운 순교자들의 종말론적인 의화를 목표로 집단적인 성격을 지닌 가운데 익명 내지 가명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 에녹 성조를 모시는 이 그룹은 폭력에 직면하여 이와 직접적으로 대결하기보다는 단지 종말론적인 주장을 함으로써 정치적 메시아니즘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 다니 8 장에서처럼 죽은 이들의 보편적인 부활 (51 장 )과 의인들의 영원한 영광에 대한 개념은 비유의 종말론이 초역사에 희망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초역사는 지상의 차원을 말소하지 않는다 . 메시아는 지상에서 명령하며 권력을 행사한다 (52,4). 모든 악이 땅위에서 사라질 것이다 (69,29). 이 에녹의 그룹은 스스로가 천상의 인자를 지상에서 반영하는 존재라고 믿었으며 ,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하여 인자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을 희망하였던 것이다 .
2.2.2. 4 에즈라
4 에즈라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10,21)에 저술되었으며 인자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바다에서 올라오는 사람 (4,13)에 관한 환시를 통하여 다니 7 장을 반영한다 . ‘내 아들 ’(13,37)이라 불리는 사람은 메시아로 확인된다 (7,28). 그리고 스톤 (M.Stone)에 의하면 라틴어와 시리아어로 된 역본의 ‘아들 ’ 표현은 υ?ο?보다는 πα??를 전제한다 . 다른 역본들 (에디오피아 , 아랍 , 아르메니아 , 그루지아 )도 ‘아들 ’ 독법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 πα??는 야훼의 종 (ebed)을 암시한다 . 지극히 높으신 분은 피조물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 ‘종 -사람 ’을 오래 전부터 준비해 두셨다 (13,25). 사람은 시온의 산에서 (참조 : 시편 2 장 ) 그의 입에서 나오는 불로 (참조 : 이사 11,3-4; 1 에녹 62,2) 이방 민족들을 심판할 것이다 (13,12-13). 그러나 메시아는 400 년간 왕국을 다스리다가 모든 인간들과 함께 죽을 것이다 (7,28). 창조 이전의 과정처럼 칠 일간의 침묵이 지나면 보편적인 부활이 시작된다 . 부활의 과정에서 메시아는 어떠한 역할도 수행하지 않으며 , 그의 이름은 더 이상 거명되지 않는다 . 메시아니즘은 새로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며 이제 의인들이 별빛보다 찬연히 빛날 것이다 (8,52-54). 이처럼 4 에즈라에서 메시아니즘은 제한된 시간 범위 내에서 지상에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과제를 지니되 이 세상은 결국 보편적인 부활에 이어지는 최후의 심판에 의해 변형될 것이다 . 결국 4 에즈라는 변형된 세상 안에서 의인들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최종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로마의 지배하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충격을 당한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제공하고자 한다 .
소결론
에녹의 비유와 4 에즈라를 통해 나타난 다니엘의 인자 전승사를 일별하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
1. 성도들을 대표하는 다니엘의 인자는 에녹의 비유와 4 에즈라 안에서 개인적인 존재로 해석되었고 , 메시아요 종말론적인 심판관으로 동일시되었다 . 그러나 다니엘서에서 인자는 심판관의 역할을 부여받지 않았다.
2. 에녹의 비유와 4 에즈라는 다니엘의 인자를 선재 개념으로 이상화하였다 . 선재하면서 숨겨진 메시아 모티브는 야훼의 종 (이사 49,2)과 지혜전승 (지혜 8 장 )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 메시아 비밀의 개념을 제공한다 . 메시아는 숨겨져 있다가 심판 때 종말론적인 현현을 기다리는 와중에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계시된다 (1 에녹 62,7). 에녹이 한 사람의 인자라고 선언되는 것은 (71,14) 에녹 개인이 메시아로 등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에녹 공동체의 의인들을 인자와 동일시하고 그들이 영광스럽게 현양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인자는 선재하는 의인으로서 시원적이고 종말론적인 존재이다 . 따라서 에녹의 비유와 4 에즈라서 배후에 존재하는 그룹들에게 메시아는 튜다스나 에집트의 예언자 또는 기살라의 요한 등과 같은 거짓 예언자들이 주장한 대중적인 메시아니즘과 달리 초월적인 존재이다 . 아울러 2 바룩서에 등장하는 호전적인 메시아니즘 (72,6)과도 차별화된 이 메시아는 오직 말씀을 수단으로 취한다 (1 에녹 62,2; 4 에즈 13,10). 이 메시아는 현실의 폭력 앞에 스스로를 희생자로 느끼는이들 그룹의 평화주의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표명한다 . 종말론의 차원에서 도덕적으로 이상화된 메시아니즘은 선재하는 지혜와 정의의 화신으로서의 인자 안에서 그 결정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 에녹과 의인들은 선재하는 인자와 상봉하여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71,14 이하).
3. 4Q246 은 다니 7,14.27 에서 영향을 받았으나 ‘인자 같은 이 ’라는 표현 대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 ’이라는 표현을 쓴다 . 랍비 아키바는 다니 7,9 의 두 개의 옥좌에 대해 ,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 다른 하나는 다윗 가문의 왕 -메시아를 위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 이처럼 다니 7 장은 일 세기 유다교 안에서 메시아니즘의 관점으로 해석되었다 . 그러나 인자 표현은 에녹의 비유와 신약성서를 제외하고는 랍비 문헌이나 쿰란 두루마리에서 하나의 칭호로 사용되지 않았다 .
4. 인자 메시아니즘은 불경한 자들을 심판하고 폭력으로 타락한 현 질서를 변형시키는 부활과 새로운 창조의 과정에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 1 에녹서에 의하면 메시아니즘은 영원한 삶과 연결되어 있으나 4 에즈라서에서 메시아와 그의 왕국은 마침내 사라지고 다른 세상으로대체된다 . 에녹의 비유가 의인들의 영원한 생명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면 4 에즈라는 불경한 이방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메시아적인 재건을 먼저 주장한다 . 4 에즈라는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한 뒤에 씌어진 까닭에 영원한 생명이 의인들에게 주어지기에 앞서 다윗 가문의 천년왕국적인 메시아니즘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
2.2.3. 다니엘의 인자 전승과 신약성서의 인자
다니엘의 인자가 신약성서와 에녹의 비유 그리고 4 에즈라에 준 영향은 결정적이다 . 그러나 신약성서의 인자와 에녹의 인자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 에녹의 비유가 기원전 70 년 전에 씌어진 유다인들의 저작이라는 입장에 근거하여 초대 교회뿐 아니라 예수 자신이 에녹의 인자 개념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 그러나 에녹의 비유와 신약성서의 인자 간에 직접적인 관계를 논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며 신약의 인자는 자신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인자 전승사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인자 전승들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하여 지적해 보자.
1) 인자는 야훼의 종의 경우처럼 정의와 지혜의 전형이고 종말론적인 인물이다 . 인자는 메시아와 동일시되나 에녹의 비유에서는 그의 선재 사상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 아니다 . 인자 메시아니즘은 새로운 아담론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데 인자는 지상의 정의와 지혜를 대변하는 위격화되고 선재하는 천상적인 존재다 . 인자의 선재 개념은 에녹의 비유와 4 에즈라 그리고 요한 복음 안에 분명히 등장하나 다니엘서와 공관 복음에 나타나지 않는다 .
2) 다니 7 장은 복음서와 에녹의 비유 , 4 에즈라 그리고 랍비 문헌에서 메시아적인 맥락으로 해석되었다 . 그러나 인자라는 표현은 복음서와 에녹의 비유에서만 받아들여졌다 . 이제 질문은 인자가 1 세기 당시에 이미 메시아 칭호로 사용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 복음서에서 ? υ?ο? το? ?νθρ?που는 무엇보다 예수를 가리키면서 다니엘의 인자를 암시한다 (마르 8,38; 14,62). 에녹의 비유에서도 , 에녹이 목격한 사람의 모습을 한 이를 가리키기 위하여 ‘이 인자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62,5.14; 63,11; 69,29-29). 이 인자 표현은 복음서에서는 이중의 관사로 제한하고 에티오피아에서는 지시 대명사로 규정하고 있는 메시아 칭호가 아니라 ,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는 지칭임을 말해 준다 . 인자는 에녹의 비유에서 탁월한 의미의 의인으로서 지상의 실재에 상응하는 천상적인 존재를 가리키고 , 에녹은 이 인자 곁으로 고양된다 . 인자가 물론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것은 칭호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칭하는 방식인 것이다 . 메시아는 하나의 기능직을 의미하지만 다니엘의 인자나 에녹의 인자는 사람의 모습을 한 구체적인 개인을 가리킨다 . 그러기에 인자를 메시아 칭호로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 바로 그 때문에 복음서에서 예수를 가리키는 인자 표현이 후대에 그리스도 신앙 고백 안에 등장하지 않았고 전례 기도 안에도 사용되지 않았다 .
Ⅲ. 예수의 인자 용법
인자라는 표현은 초대 교회가 다니 7,13 을 미드라쉬적으로 해석하여 예수의 재림 사상을 표현한 후대의 산물이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여전히 있다 . 일부 학자들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인자 표현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기원했으리라는 판단은 언어학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가능하다 . 인자라는 말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모두 예수의 입을 통해서만 표현된다는 점과 그것이 결코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문이나 전례문에 그리스도론적 칭호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이 표현은 언제나 주어로 사용될 뿐 한번도 내가 사람의 아들이라는 식의 빈사로 사용된 점이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 신약성서 전승들간의 시간적 ,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 υ?ο? το? ?νθρ?που라고 하는 문법적으로 대단히 어색한 표현이 이처럼 일관되게 예수의 입에만 올려지고 있다는 점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의 단서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더욱이 이 표현의 주어적 사용은 사람들이 이미 이 표현을 알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서야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다 .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의 의미론은 과연 무엇인가 ?
샤를르 페로와 더불어 이 표현이 본래 자기를 에둘러 말하는 완곡어법에 속한다고 본다 . 이러한 ‘bar enasha’라는 아람어의 완곡어법이 랍비 문헌에도 등장하는 것을 베르메스의 연구에 힘입어 알 수 있다 . 이런 점에서 마르 2,10 에 사람의 아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말은 자기를 에둘러 표현하신 예수의 완곡어법에 속할 것이다 . 지상의 인자를 표현하는 여러 대목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르 2,27 의 안식일의 주인 , 루가 9,58 의 머리를 둘 곳조차 없는 인자 등 ). 그러나 문제는 완곡어법의 인자만이 진정한 예수의 말이고 종말론적인 인자의 말씀이나 수난과 부활의 인자 말씀은 초대 교회의 창작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 사실 적지 않는 유다교 학자들 그리고 유다교 문헌에 정통한 일부 그리스도교 성서학자들은 베르메스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한편 불트만은 예수가 한번도 자신을 인자와 직접적으로 동일시하지 않고 늘 삼인칭으로 사용한 것은 세말에 오기로 된 인자를 자신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 즉 예수는 자신과는 다른 인자의 도래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 따라서 그에게는 종말론적 인자의 말씀이 진정한 것이고 , 지상 생애의 인자의 말씀은 초대 교회의 회고적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나 이 문제는 과연 예수 당대에 인자라는 칭호를 가진 메시아가 세말에 나타나기를 고대하였던 유다교 내부의 메시아론이 존재했느냐 하는 것이다. 다니 7,13-14 에 등장하는 인자 표현이 쿰란 문헌이나 랍비 문헌에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 이 표현을 유일하게 담고 있는 에녹의 비유들 안에서도 어떤 천상적 존재에 대한 지칭이지 명칭은 아니라는 것이다 . 따라서 인자라는 표현의 메시아론이 예수 당대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 . 그렇다면 루가 12,8 에서처럼 예수가 자기와는 구별되고 인자라고 불리는 어떤 제 3 의 인물을 지칭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결국 예수는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인자라는 삼인칭으로 말하고 있었는가 ? 사실 자신의 미래의 운명을 삼인칭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완곡어법이 어디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다면 예수는 자신을 에둘러 표현하는 방법으로 인자라는 말을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의 수행 과정에서 ,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 아니 어떤 의미로 자초하고 자신의 죽음을 구약의 순교자들의 죽음처럼 다른 이들을 위한 통공 내지 구원의 의미로 해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 본시 부활 신앙을 바리사이들처럼 유다교의 종교적 유산으로 공유했던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전혀 예상치 못했거나 , 예상하더라도 허무 내지 무위로 그치리라고 보았을 리가 없다 . 따라서 예수는 당대의 유다교의 순교자 신학의 범주에 따라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희생주의적으로 기여하리라고 기대하고 , 이러한 자신의 미래적 운명을 삼인칭 형식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그릇에 담아 표현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 미래적 인자의 운명이 다니엘서 7 장의 인자를 연상시킴은 물론이다. 희랍어의 이중의 관사는 바로 다니엘서의 종말론적 인자를 지칭하는 효과이다.
인자는 그러기에 자신을 에둘러 표현하는 탁월한 방법으로 예수적인 어법이었을 것이고 , 초대 교회는 이 용법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확장적으로 예수의 다른 말씀에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인자의 모든 말씀이 역사성을 갖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 핵심적인 말씀에 예수의 진정한 의도가 담겨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그런데 사람의 아들의 의미론적 문제는 완곡어법이라는 일차적인 용법에 그치지 않는다 . 사람의 아들은 셈어에서 그저 사람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이 평범한 말이 전해 주는 의미론적 파장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다같이 사람이라는 동질성으로 묶어지고 그것이 연대적으로 확산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일종의 관용구로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집합적 연대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머리를 둘 곳이 없는 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은 결국 예수를 추종하겠다는 자의 운명을 예고해 주고 원한다면 그곳으로 초대한다는 페다고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한편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 역시 인간학적 확장 개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곳의 새로운 인간 현실을 지칭하는 말인가? 인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 그 나라의 일원이며,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하는 세말의 새로운 인간형의 전형인가? 그것은 새로운 아담으로서 , 묵시적 세계관이 꿈꿔온 새 하늘 새 땅에서 살아가게 될 새 인류를 함축하는가 ? 기실 사람을 의미하는 ‘bar enasha’가 희랍어를 사용하던 희랍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전혀 무의미한 말이었기에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서는 이 표현이 전혀 예수께 사용되지 않는다. 사도는 그의 서간문 (로마 5,14; 1 고린 15,22.45)에서 죽어야 할 죄 많은 존재로서의 옛 아담과 참된 생명을 지닌 둘째 아담을 구별하고 그리스도를 새 아담으로 부른다 .
나가는 말
예수는 산헤드린 앞에서 수수께끼 같은 방법으로 인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결코 메시아로 지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메시아적 업적들을 수행하였다. 그분은 메시아 직무 수행의 여정에서 나를 에둘러 지칭하는 완곡어법으로 삼인칭의 인자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다 . 대중적 메시아 운동과 연결된 온갖 오해를 회피하기 위해 ‘bar enasha’라는 수수께끼 같은 표현은 단순히 적절한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동원 가능한 유일한 표현 수단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 안에서 바로 다니 7,13-14 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서부터 그것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아들은 거대한 구원론적 기획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아들은 이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자로 그 나라의 현실과 그 도래를 선포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죄인들과의 친교로 축제화하고, 마침내 그 나라를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많은 이들을 위한 몸값으로 지불한다 . 그러나 그 나라의 도래는 인자가 이 지상에 심판자로 오는 때이다 (루가 12,8; 17,24).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사람의 아들의 오심에 밀접히 관련되어 그 완성이 유보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라는 긴장 관계 안에서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삼인칭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의미로 예수는 타인으로 남아 있는 자기이다(Soi-meme comme un autre). 예수의 사람의 아들이란 기획이 이처럼 종말론적이라면 바로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는 공동체의 성찬을 통하여 현존하고 제자들의 활동에 함께하는 현재의 주님이시다. 그러면서 예수의 종말론적 실존을 자신의 도래와 함께 결부되어 그 최종적인 의미가 도상에 걸려 있다. 이런 의미로 예수는 종말론적 약속의 실현에 자기 정체성이 유보되어 있는 과정적 , 도상적 실존이요 , 인자의 삼인칭 용법에 주목한다면 그는 자기 존재의 온전한 회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타자적 실존이기도 하다. ‘자기 ’와 ‘타자처럼 ’(Soi-meme comme un autre)과의 변증법적 역학 관계가 기실 인간 실존의 신비인바 ,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어법을 통해 예수를 추종하는 자의 운명도 이처럼 종말론적 실존임을 가르쳐 주고 더불어 이 길을 함께 가자고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 그것은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고 그 나라의 미래에 운명을 거는 소위 인자의 종말론적 운명에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가톨릭 신학과 사상 」제 44 호 , 2003 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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