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과 신학 1

방언기도의 유익

by 은총가득 2020. 3. 23.


방언기도의 유익


방언기도의 유익① 
방언은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는 비밀 언어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을 통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와 증거는 바로 입술과 혀를 통한 영적인 

고백인 ‘방언의 말함’이다.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는 좀 더 분명해진다. 

령께서는 인간의 입술과 혀를 통해 나오는 말을 통해 인간 개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언기도에는 어떤 유익이 있을까? 방언기도의 유익에 대해 알아보자.

 방언은 성령충만의 확신을 준다. 성령이 감화, 감동의 역사로 우리의 마음에 임하신 것과 

성령침례를 받는 것은 서로 다른 체험이다. 왜냐하면 성령침례를 받으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증거가 나타났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 2:1∼4; 행 2:33; 막 16:17). 사람들은 “왜 방언을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방언을 말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확증이 마음속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방언은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는 비밀한 언어이다. 방언기도는 알아듣는 자가 없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방언을 하면서도 자신도 못 알아듣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영이 성령으로 더불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비밀의 언어요, 기도이기 때문에 사탄도 알아듣지 못한다. 

이처럼 방언을 말하면 기도하는 자와 하나님 사이에만 통하는 언어가 된다. 

성령은 각 사람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마귀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신다. 사탄이 그것을 미리 알면 먼저 가서 다 방해를 하기 때문에 방언이 필요하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기록된 이야기를 살펴봐도 마귀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가지고 오는 


천사들까지도 훼방하는 존재들이다. 21일간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첫날에 이미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마귀들이 21일동안이나 방해했다는 사실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질 때도 

그 마귀들이 얼마나 큰 훼방과 방해를 한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비밀한 언어로 기도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그 비밀의 언어가 바로 방언이다.

 방언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이다. 방언은 너무나 큰 시련을 당하여 기도조차도 못할 

고난에 처했을 때 유익하다. 우리는 삶에서 어느 정도의 고난을 당할 때는 기도로 이겨낼 수 있다. 

주 앞에 엎드려 “하나님, 고통당하고 괴롭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하며 탄식이라도 하면서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말도 안 되는 고난을 당하면 기도조차 나오지 않게 된다. 

누구나 살면서 그런 체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흔한 표현으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 경우를 당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아예 정신이 아뜩하고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게 된다. 분명히 마음은 기도를 해야 되겠는데 기도를 할 수가 없다.

 마치 숨이 넘어가는 것 같고 사람이 똑바로 정신을 차릴 수 조차 없는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다. 

그때는 성령님께 의지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방언을 통해 직접 기도해 주므로

 그 어려운 고난에서 해방되어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떻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할까? 성령의 기도는 바로 방언기도이다.

 방언을 통하여 아주 탄식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은 로마서 8장 26절로 27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약속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24시간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해도 성령께 맡기면 말할 수 없는

 탄식인 방언으로 기도해 주시므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우신다. 



방언은 마음을 청소하고 감춰진 상처를 치료

 방언은 자기 신앙의 덕을 세운다. 고린도전서 14장 4절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고 말한다. ‘덕’이란 말은 헬라어로 ‘호이코스 데모’인데 ‘호이코스’라는 말은 ‘집’이라는 뜻이고 ‘데모’라는 말은 ‘지어 올라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기 신앙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방언으로 계속 기도하면 자기 신앙의 집이 점점 더 강하게 지어진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방언을 많이 말하면 마음속에 믿음의 기운이 가득차게 된다. 마치 좋은 설교를 들으면 믿음의 덕이 세워져 믿음이 강하고 견고해지는 것처럼 방언은 다른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기도이다. 방언을 하면 할수록 자기 신앙의 집이 견고해 진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마귀는 우리의 신앙의 집을 자꾸 허물려고 한다. 그 순간 방언을 말하면 신앙의 집을 지키고 더 견고히 지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방언으로 기도함으로써 신앙의 덕이 가득차서 자기의 신앙도 견고해지고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굳센 신앙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방언은 마음의 곤비함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사야 28장 11절로 12절은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기록한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여 방언을 말할 때 우리가 듣기에는 입술 떠는 어린 아이의 소리 같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일종의 방법이다. 또한 방언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우리에게 상쾌함을 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상쾌함이 없고 여유와 기쁨을 잃은 채로 살아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에 다가오는 불안과 공포, 근심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말을 통해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청소해 주신다.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모든 불안, 초조, 절망, 미움, 원한, 상처 입은 것을 다 쓸어내어 청산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어둡고 컴컴한 방에 썩어져가는 것이 잔뜩 있던 것들을 청소하고 나면 방안이 상쾌해지고 즐거워지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미국의 어느 종교단체에서 발표한 것을 보니 방언하는 사람들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방언을 통해 정신질환을 유발할 수 있는 마음의 상처가 다 치료되고 청소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은 우리의 마음을 청소하고 감춰진 상처를 치료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축복이 된다. 

 방언은 깊고 오랜 기도를 가능케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오래 기도해야 한다. 겨우 5∼10분 기도해서는 성령충만 할 수가 없다. 오래 기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반적인 언어로 하면 과연 얼마동안이나 기도할 수 있을까? 에베소서 6장 18절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하루 1시간 이상 3시간 가까이 기도하려면 할 말이 별로 없다. 자신을 위한 기도와 가족을 위한 기도, 교회를 위한 기도하고 나면 할 말이 없고 시계를 보면 기도 시작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은 것을 본다. 그런데 어떻게 1시간 이상 3시간을 기도할까? 바로 방언으로 기도하면 가능하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아는 말로 기도하다가 할 말이 없으면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한참 기도하다 또 은혜 받아 아는 말로 기도하고 또 지치면 방언으로 기도하고 이렇게 밤새도록 기도 할 수 있으며 하루 종일 기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며칠이고 계속 기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은 기도의 언어로서 굉장히 좋은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방언의 은사에 절제와 질서의 덕 더하면 귀한 복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너무 과식하면 몸에 해롭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성령의 은사인 방언도 질서 있게 절제의 덕이 함께 하면 정말로 귀한 복이 된다. 그러므로 설교시간이나 찬송하는 시간에 혼자서 고함을 치고 방언을 하는 것은 오히려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하는 천국의 비밀한 언어이기 때문에 절제와 질서의 덕을 더하여 기도하므로 다른 이들에게 시험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질서와 무절제로 자기 과시를 위해 방언을 하면 교회공동체와 하나님께 오히려 누를 끼치게 된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은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기록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4장 39절에서 40절에는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 중에 가장 많고 보편적인 것은 방언이다. 다른 은사들은 선택받은 자만 받는 경우가 많지만 방언의 은사는 성령 충만한 자들에게 주셨다.

 로버트 리어든의 「방언기도는 즐겁다」는 책에는 방언기도가 즐거운 7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첫째, 방언기도는 성령충만하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자꾸 마귀가 찾아와서 성령충만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 때 방언기도를 하면, “나에게는 증거가 있다. 나는 방언을 말한다. 사도들도 성령충만을 받고 방언으로 말했다. 그러므로 나도 방언을 말하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하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고백하게 된다. 성령충만의 증거인 방언으로 기도하니 신앙의 확신이 생긴다. 둘째, 방언기도는 영적으로 강한 사람을 만들어 준다. 영적으로 약한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점점 신앙의 덕이 쌓여 영적으로 강한 사람이 된다.

 셋째, 방언기도는 영적인 사건들을 분별하도록 한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마음이 날카로워져 우리의 기도의 칼날이 더욱 예리해진다. 그래서 날카롭게 마귀의 역사를 분별해 내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넷째, 방언기도는 영으로 하나님과 대화함으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대화하므로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이 더욱 확실해진다.

 다섯째, 방언으로 기도하면 언어 사용에 더욱 신중하게 되고 능숙해 진다. 방언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을 사용해 말하심으로 하늘의 언어를 할 수 있도록 혀와 입술이 훈련을 받아 우리의 입을 복종케 함으로 혀를 잘 다스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방언기도는 영적으로 새 힘을 주어 신앙생활에 신선함과 활력을 잃지 않게 도와준다. 오랜 신앙인들은 때때로 생동감이 없어진다. 누군가 박수를 치고 찬송을 하고 기뻐 뛰면 “우리도 옛날엔 그랬다. 그러나 세월 지나 봐라. 너도 다 우리처럼 된다”고 하며 신앙도 늙어 맥이 끊어진다. 그러나 방언으로 기도하면 항상 마음이 새롭고 상쾌해지므로 신앙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일곱째, 방언기도는 전도와 선교의 능력을 받게 된다. 오늘날 온 세계 선교사로 나가있는 사람의 대다수가 방언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방언을 하면 우리의 신앙이 새로워진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아야 한다. 방언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주고 상상을 초월하는 신앙의 힘을 얻게 한다.

 방언기도가 얼마나 신령하고 큰 유익을 주는 천국의 언어인지 말로다 형용할 수 없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4장18절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기록한 것처럼, 어느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말함을 감사했다. 그는 감옥에도 여행하면서도 그리고 천막을 만들면서도 방언으로 기도했다. 이처럼 방언은 자동기계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것처럼 방언을 하게 되면 저절로 늘 기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폭풍우처럼 불어와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사모하고 방언으로 기도함을 감사해야 한다.
      김에녹 목사 henoch9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