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배경사
차례
제1부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
제1장 헬라주의 시대에 있어서 유대교의 정치사
1. 페르샤 지배하의 팔레스틴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틴
3. 시리아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틴과 막카비 독립전쟁
4. 하스모네어 왕국
5.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틴
6. 유대 전쟁과 바르 코흐바의 폭동
제2장 신약성서 시대에 유대교 안에 있었던 종교 운동과 정신적 조류
1. 묵시문학
2. 팔레스틴 유대교 안에 있던 집단들과 유대교들
a. 사두개파 사람들
b. 바리새파 사람들
c. 혁명당원들
d. 엣세네파 사람들
e. 테라페우테스 교단
f. 쿰란 공동체
3.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제3장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인의 생활과 신앙
1. 팔레스틴과디아스포라에서의 유대인의 사회적 상황
2. 예루살렘의 성전 의식
3. 회당
4. 성서, 율법, 전승
5. 하나님과 인간
6. 미래적인 구원
제2부 신약성서의 헬라주의적-로마적 배경
제1장 기원후 1세기의 로마 제국의 정치와 사회
1. 시이저의 지배하에 있는 로마 제국
2. 기원후 1세기의 로마 제국의 사회적 상황
3. 황제 숭배
제2장 신약성서 시대의 헬라주의적-로마적 세계 안에서의 종교 운동과 정신적 조류
1. 희랍과 로마의 신들
2. 민속신앙과 운명 사상
3. 밀의 종교들
4. 통속 철학
제3장 영지주의
1. 영지주의의 근본적인 구조
2. 전 그리스도적 영지주의의 증거로서의 코르푸스 헤르메티쿰
3. 기원후 1세기의 영지주의 전파
제1부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교
제 1 장 헬라주의 시대에 있어서 유대교의 정치사
1. 페르샤 지배하의 팔레스틴
유대교의 역사는 바벨론 유배시대 부터 시작된다. 페르샤는 대대적인 이주를 강요 하거나 어디에서나 단 하나의 국가 종교만을 신봉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페르샤 정부는 직무상의 거래를 위하여 그들 자신의 거래가 아니라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던 아람어를 사용 하였다. 5세기에 바벧론에 살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유대인 공동체를 건설 하자는 강한 충동이 일어 났다. 느헤미야와 에스라에 의하여 다른 민족 들과의 어떠한 결합도 용납되지 않도록 되었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들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 하였으며 그들과는 어떠한 교역이나 거래도 하지 않았다. 유대인 가역사가 요세푸스는 사마리아인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에서 비로서 가라짐에 성전을 건설하도록 재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아마도 그들의 성소 건축은 그 이전에 이루어진 같다. 예수의 시대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교제 하지 않았다. 원시 공동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생겨난 분열을 극복 하였으며 복음을 사마리아에 전 파 하였다.
2. 알렉산더 대왕과 팔레스틴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샤의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파 하였으며 이 승리로 인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유대인 공동체가 누리 던 권리의 상황에 대한 지배권의 변화에 따라서 외적인 변화는 전혀 일어 나지 않았지만 온 나라 안에 희랍인들이 들어 오게 됨에 따라 그들 내부의 생활은 깊은 영향을 받았다. 언어와 더불어 헬라주의 문명이 또한 이 땅에 들어 왔다. 산헤드린에서는 예루 살렘의 영향력 있는 가문의 우두머리들인 사제들과 장로들이 대제사장을 지지하였다. 대제사장의 사회로 유대 민중들이 처한 모든 세상적인 용무와 종교적인 용 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회합한 이 유대인 최고 관청 을 의미 하는 것이다.
3. 마카비 독립전쟁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로서 시리아 왕의 법률과 명령이 철저히 시행하도록 노력 하였다. 대제사장의 직위는 매매할 수 있는 정치의 대상이 되어 버렷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쿠스가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예루 삿렘 성전을 강탈하였을때 어떠한 저항도 할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공동체가 아무런 저항없이 선조들의 신앙을 버릴 수는 없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곤궁에 빠진 공동체에 대하여 위로하는 말로 쓰여 졌다. 여기에는 박해와 고난이 하나 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곧 종말이 와야 하는 마지막 대의 표징으로 이해되었다. 박카비는 망치와 같은자를 뜻하는 듯 하다. 기원전 164년 12월 25일에 제단이 새롭게 봉헌되고 일주일 동안에 축제로서 율법에 합당하게 예배가 다시 드려졌다. 막카비의 성과에 많은 유대인들이 만족해 했다. 그의 동생 요나단이 후계 자가 되어 사령관과 우두머리 일뿐 아니라 대제사장이기도 했다. 이제 예루살렘 은 이방 지배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시몬은 방으로도 독립을 얻을 수가 있었다. 기원전 140년에 국민들에 의하여 하스모네어 왕조가 세워 졌다.
4. 하스모니아왕국
아버지가 죽고 난후 아들인 아리스토불이 권력을 장악 하였다. 죽고 새로운 지배자 얀네우스는 800명의 폭도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한 후 십자가에 메달아 죽엿다고 한다. 이는 임종 하면서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리아에게 바리새인과 다시 화해 하도록 충고했다고 한다. 기원전 67년 그녀가 죽고 합법적인 아들 히르칸 2세가 법에 따라서 왕위를 이어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리스토블 2세가 왕위를 놓고 그와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아랍 제국의 운명과 팔레스탄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로마의 월등한 세력이 뛰어 들었다.
5.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틴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에 들어 갔으며 또한 지성소를 실제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지성소에서 아무것도 탈취하지 않았으며 곧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명하였다. 방해 받지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성전 공동체 뿐만 아니라 제국내에 있는 회당 공동체에도 보장 되어 있었다. 헤로데스는 로마의 지지아래 권력을 다시 잡은 것처럼 로마의 도움으로 지위를 확고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교활하고 잔인 하였으나 과감한 결단을 하고 단호이 행동하는 대담하고 재치있는 사람이었다. 디아스포라에게도 헤로데스는 유대교의 보호자로 등장했으며 회당 공동체의 독립적인 생활을 장려하였다. 소위 통곡의 벽 이라는 건물이 헤로데스 시대의 성전 건물로 남아 있고 안토니아 성의 기초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예수 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총독으로 있었다 (기원26-36).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그의 직무 수행은 뇌물, 폭력, 약탈, 불법, 무례, 제판없는 사형집행, 지속적인 잔학으로 이루어 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헤로대스는 그의 이복동생의 아내 헤로다아스로 부터 살로메가 태어났다. 세례요한은 영주의 불의를 적나라 하게 밝혔기 때문에 체포 되었으며 헤로디아스의 포악한 적대감으로 박대를 계속받다가 결국 처형 되었다. 헤로데스 안티파스는 예수가 살았던 지역의 영주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여우라고 불렀으며 예루살렘으로 갔다. 필립푸스는 로마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하게 하였던 첫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아그랍파는 로마에 체제하면서 칼라굴라 는 기원37년 그에게 필립프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주 었다. 헤로데스 아그립바는 바리새인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를 박 해하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였으며 베드로를 체포하였다. 기원 52년 부터 펠릭스가 총독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으로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호의를 얻어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올랐다.
6.유대 전쟁과 바르 코흐바의 폭동
안토니아성이 점령되어 이제 온 도시가 유대인들의 손에 들어 왔다. 네로 황제는 그의 가장 뛰어난 용장 베스파시안을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지휘 하도록 파견하였다. 요세푸스는 그의 주민들과 함께 요타파타에서 항쟁을 하였으나 고수할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도성을 둘러싼 세 성벽 주변을 모두 돌파하여 방어자들의 격노한 항거를 곧장 밀어 버렸다. 성전은 최후의 전투에서 불타 버렸다. 티투스는 지성소가 파괴되기 이전에 지성소에 침입할 수 있었다. 성전과 도성이 파괴 됨으로서 유대교는 가시적인 중심점을 상실 하였다. 기원 73년 아마도 74년 초일 수도 있다. 마사다가 함락 됨으로 쵤후의 항거는 분쇄 되었다.
기원 2세기에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한번 더 로마의 멍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드리안 황제대에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은 갑작스런 봉기가 일어났다. 또한 예루살렘의 성전터에 쥬피터 성전을 세우도록 명령 하였다. 바르코흐바가 메시아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체포 되엇으며가 많은 사람들이 처형 되었다.그러나 요새는 로마인들에 의하여 점령되고 바르코흐바는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아로써 그가 메시아라는 전설은 사라졌다. 기원 4세기에 와서야 그 들에게 슬픔의날에는 도성에 들어가서 헤로데스의 성전 가운데 남아있는 벽에서 통곡의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허용 되었다.
제2장 신약성서 시대에 유대교 안에 있었던 종교 운동과 정신적 조류
1.묵시문학
a. 묵시 문학의 기본구조
수많은 흥망성쇠, 전쟁, 재난들로 점철되어 있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유대교도들은 언제 하나님이 그의 약속들을 실현 시킬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점점 더 긴 박한 물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기원전 2세기 초에는 기원후 2세기 초까지의 시대에 생겨난 묵시문학에는 이러한 대망이 중심적인 주제가 되어 있다.
묵시문학은 역사의 흐름이 좋게 변화 되는 것을 기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무서운 경악 속에서 종말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 이세상이 멸망으로 타락 했는가 하는 문제가 묵시 문학가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버렸다. 고난으로 가득찬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형벌하시는 행위를 우리는 알고 있다. 개별적인 문헌안에 있는 표상들과 진술들의 다양성에도 불고 하고 도처에서 알게 되는 묵시 문학의 기본 구조는 이원론을 통해서 결정 된다. 즉 이 세상이 지나가고 저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묵시문학은 구약성서 전통을 충분히 담고 있으며 종말을 향한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유배 이후에 생긴 예언 문헌에는 심판과 구원, 새 하 늘과 새 땅을 자주 중요한 문제로 되어 있다. 묵시 문학가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유산으로서 이해되는 이러한 사상에 관계를 맺는다.
b. 묵시 문학의 저작물
묵시 문학에서는 근본적인 해석을 알아야 하는 형상과 비유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고 있다. 묵시 문학서들의 서술에 의하면 그러한 환각의 가치가 인정되 는 구약성서의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의 문헌들을 덥어 봉인을 했다. 가장 오래된 묵시적 문학은 다니엘의 이름으로 전해졌다. 에녹의 이름으로 두구가의 이름이 전해 지는데 한권은 이디오피아 말로, 다른 한권은 슬라브 말로 전해진다. 이 책은 창조에서부터 멀지 않은 심판의 위험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성실과 끌까지 버티는 인내를 호소함으로 끌난다.
에스라의 이름으로도 묵시 문학적 문헌이 기록 되어 있다. 그것은 왜 예루살렘 이 포기되어되었고 멸망 되었느냐고 하는 고통스러운 물음에 대답을 하고 싶어한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초까지 시대에 생긴 많은 유대교 문헌들 안에는 묵시적 문학자료들이 사용된 짧고 긴 단편들이 발견된다. 12족장의 유언장에는 교훈적이고 권면하는 부분들이 묵시 문학적 내용으로 된 단편 들과 함께 결합 되어있다.
마지막으로 쿰란 공동체의 신앙과 사유가 지나 칠 정도로 묵시 문학적인 표상에서 형성 되었다. 이들은 올바른 율법의 이해를 묻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하면서 기원전 2세기와 1세기에 유대교 안에서 형성 되었다.
2.팔레스틴 유대교 안에 있던 종파들과 유대교들
a.사두개파 사람들
사두개파의 주요 주장과 관심은 성전행정과 제사장 임무의 적법한 승계로서 이름의 의미와 어원을 사독(Zadok)에서 기원한 것으로 본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에 비해 종교적 견해는 보수적이었다. 종교문제에 관해 그들이 가졌던 유일한 지침은 모세오경이었다. 그들은 성전에서의 희생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첩경이라고 믿었다.
사두개파는 모세의 율법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구약의 예언서와 그 밖의 글들은 부차적인 위치에 있는것으로 분류한다. 특히 묵시 및 종말론적 사상은 토라와 부합되지 않는 사변이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며, 천사와 귀신, 악한 영, 죽은자의 부활등을 믿는 대중적 신앙을 거부했다.
사두개파의 영향력과 특권은 성전과 제사장직의 범위와 한계를 넘어서 대제사장이 주재하는 지역회의체였던 산헤드린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들은 유대인과 로마와의 접촉에 있어서 유대인의 공식 대변인이 되었으며, 가능하면 로마정부와의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모색했다.
사두개파는 주후 70년의 비극 이후 유대인의 종교생활과 사상의 주요 움직임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켰으며,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그날부터 사두개파는 유대인의 역사무대로부터 사라지고 만다. 그들의 토라이해는 너무 문자적이고 종교생활은 너무 성전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성전이 파괴되고 말자 그들의 존재이유도 사라져 버린것이다.
b.바리새파 사람들
바리새파는 하시딤의 직계후예로서 그들은 처음에 마카비 혁명에 가담했는데, 점차 마카비 혁명이 정치화되어 가면서 마카비들이 스스로 제사장이 됨으로 정치와 종교를 손아귀에 넣고 세속적인 방향으로 빗나가게 되자 여기서 하시딤의 무리들이 마카비에게서 이탈하여 나왔다.
바리새라는 말은 히브리어 페르쉼 내지는 아람어 페리솨이아, 즉 구별된 사람이라는 말에서 자라게 되었다. "분리"를 뜻하는 말로 세속적인 사람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두개파와 마찬가지로 바리새파는 모세의 토라를 하나님의 뜻의 최종적 계시로 간주했다. 그러나 사두개파와는 달리 그들은 예언서와 성문서(hagiographa)라고 불리우는 또다른 문서들도 존중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구전 토라의 존재와 그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 점에서 바리새파는 구전 토라를 비롯해서 문서화된 율법에 나타나지 않은 모든 가르침을 부인했던 사두개파와 극단적인 대립관계에 있었다.
바리새파가 가르친 교훈의 두가지 주요 주제는 "율법의 힘"과 "회개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미래는 정치적인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토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여하에 달려 있다고 보았으며, 바리새파는 구전 율법을 통해 성문토라를 변화하는 상황속에서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행동규칙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구전 및 성문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규범으로 삼아 야웨에게 순종하는 계약 백성을 만들어 내는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바리새파의 영향력은 회당과 가정에서 지배적으로 작용했으며,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공동체는 토라에 깊이 뿌리박은 신앙과 경건에 힘입어 성전이 파괴되는 충격을 견뎌낼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유대공동체의 원대한 통일성을 창출할 수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혹고한 공동체로 연합하였으며 율법의 계명을 정확하게 준수 할 수 있엇다. 바리새적인바 공동체에는 개개의 사제들, 특히 평신도들, 수공업자들, 농인들, 상인들에 속해 있었는데 그들은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유대와 갈릴리에서 살았다. 그들은 공동식사에 모였다. 율법을 알지도 못마하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였으며 그들과의 교제를 피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활과 행동은 참된 이스라엘 공동카테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일에 집중 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그들의 생활에 다가오는 메시아 시대를 허하게 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성취하도록 노력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 했다.
C. 혁명당원들
혁명당원들은 로마 황제의 지배에 복종하고 그를 주라고 부르기를 거부 하였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미래의 전환기를 참고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잇지 않았다. 로마인들에게는 혁명당원들이 도둑과 노상 강도 들이 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에 대하여 정열을 가지고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D. 에세네파
A.기원
에세네파는 주전 1,2세기 동안 유대 공동체내에서 발전한 그룹으로 그들에 대한 언급이 신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들의 존재는 필로와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글을 통해 알려져 있었으며, 1947년에 발견된 사해문서(쿰란문서)를 통해 에세네 운동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빛을 던져주었다.
에세네파는 바리새파와 마찬가지로 하시딤이 낳은 종교적 반대운동의 영적 후손으로 이들은 쿰란에 공동체를 세우고 일상적인 사회적, 종교적 생활로부터 철저한 단절을 시도하였다.
에세네파가 쿰란에 정착한 연대는 요한 히르카누스 (B.C. 135-104)의 재위기간으로 그들의 쿰란 은거는 하스몬 왕조의 점차적인 헬레니즘화 및 세속화 경향에 대한 반발과 하스몬 일가가 스스로를 대제사장이라고 불법적으로 자처하는 데 대한 거부의 상징이었다.
B.성서해석과 성서에의 순종
에세네파는 성서를 이해하고 성서에 순종하는 일에 몰두하였으며, 사해문서를 통하여 에세네파의 독특한 성서해석 방식(페셔르 : pesher)을 엿볼수 있다. 에세네파는 성서 특히 예언서를 읽을때 그 책들 안에 담긴 말씀과 사건들은 바로 자신들의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가리킨다고 믿었으며, 자신들이 예언자들이 말한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다고 믿었고, 종말론적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C.쿰란 공동체의 규율과 일상생활
쿰란에 거주했던 에세네파는 엄격한 규율속에서 살았다. ("공동체의 규칙", "규율집")
이 공동체는 제사장, 레위인, 평신도등의 그룹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12명의 평신도와 3명의 제사장으로 구성되는 중앙회의는 일정한 분야에 대해 재판부의 역할을 담당했다. 쿰란 공동체의 일상생활에는 노동, 기도와 예배를 위한 모임, 율법연구, 종교적 의미를 갖는 식사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별히 공동체의 식사는 하나님의 최후승리가 실현될때 에세네파가 참여할 수 있을것으로 기대했던 성대한 메시야 잔치를 내다보고 행하는 일종의 종교의식이었다. 공동체에 가입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공동재산으로 내놓았다. 에세네파는 안식일, 유월절, 오순절, 속죄일등 유대인의 큰 종교적 명절들은 다 지켰지만,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키는 정규월력과는 달리 일력을 사용하였다.
D.입교와 의식과 교리
에세네 공동체의 정식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2년간의 초신자 교육기간을 거친후 "지식"에 대한 시험을 치루었다. 새로운 구성원들의 입교를 허가하는 의식은 연례적인 행사였으며, 그 때 기존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순종도에 대한 평가를 받고 서약을 갱신했다. 입교의식은 세례의 정결의식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그 때 피세례자는 성령에 의해 정결함을 받았다.
에세네파의 규율에 대한 열심은 세계에 대한 그들의 이원론적 해석과 그들의 소망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세네파의 이원론은 종말론적 이원론으로 삶이란 악한 영과의 전투로 보았으며 하나님의 군대와 함께하는 에세네파는 악의 군대의 종말을 결정짓는 전투에서 승리할 것을 믿었다.에세네 공동체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계획을 알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으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신의 목적 수행을 위해 특별한 역할을 맡겼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E.콤란 공동체의 종말론적 소망
다른 많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에세네파는 예언자의 출현을 메시야 시대의 전조로 간주해 이를 고대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는 아론의 메시야와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 전자는 제사장 계열의 메시야이며, 후자는 왕 계열의 메시야로 이스라엘 메시야는 공동체를 지휘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맡을 것이며, 아론의 메시야는 새로운 예루살렘의 새로운 성전 건설을 주도할 것으로 보았다. 종말론적 소망을 깊이 간직했던 에세네파는 현세계의 질서를 비관적으로 보았으며,자신들이 하나님을 유일한 왕으로 둔 제사장 백성이 되어야 하며 토라를 유일한 율법으로 가진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하에 에세네파는 자신들이 가진 목적이 요청하는 삶을 살기위해 콤란에 은거했다.
숫적으로 에세네파운동의 규모는 작았으나 유대 종교사상에 스며있었던 종말론적 소망과 묵시적 미래관을 전파하고 배양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E.테라페우테스 교단
테라페우스 교단은 마레오트 호숫가에 기도원같은 거주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명상적인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매일 성서를 연구하고 안식일에만 공동예배를 드렸다. 이집트의 디아스포라에서 독립적으로 발전된 엣세네파 운동의 지엽으로 볼 수 있다.
F.쿰란 공동체
(1)쿰란 텍스트에 관한 개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유대 사본의 발견사는 1947년에 유대 사막에서 살고 있던 아라비아 사람들이 많은 질그릇 항아리들 안에 두루마리가 담겨져 있는 동굴을 발견했을 때로부터 시작된다. 사해 해변가에 히르벧 쿰란이란 장소가 있는데 이 곳에서 유대인의 공동체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두루마리를 보관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항아리에 넣어두었으나 전쟁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고고학적인 판단을 통하여 이 때 발견된 사본들이 완성된 시대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는데 기원전 23세기 중엽에서 기원후 68년까지 그 공동체는 쿰란안에 살았다. 쿰란 동굴안에서 발견된 사본들과 단편 가운데 많은 성서 본문과 유대적인 텍스트들이 있다.
(2) 쿰란공동체의 신앙과 교리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규정들이 매일매일의 생활 조건들에 조화를 이루도록 율법을 해석하려고 노력한 반면에 쿰란 공동체에 있어서는 율법에 대한 어떠한 타협과 완화도 있을 수 없었다. 다만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 토라의 모든 요구를 실행하는 것만이 가할 뿐이었다. 이 공동체는 사제들에 의해 지도되었고 사제적 정결을 위해 언제나 쇄신을 하였다. 재산은 공동의 소유였으며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부정을 막기 위하여 결혼을 포기하였다.
(3) 쿰란 텍스트와 신약 성서
신약성서에는 쿰란공동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비록 이들이 격리된 생활을 하긴 하지만 경건함과 교리의 모범은 유대교안으로 넓게 유포, 수용되었다. 그러므로 쿰란 공동체의 신앙과 교리가 초기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유사성이 있음 은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쿰란 공동체의 사상을 수용하 기도하고 거부하기도 하였다. 신약성서안의 많은 부분들이 쿰란공동체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 메시야 운동
당시에는 많은 메시야 사상과 운동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이 나와서 다윗의 왕조를 일으킬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또 어떤 자들은 묵시 문학적인 인자가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내려와서 사탄의 세력을 무찌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같은 메시야 사상은 예언자와 다니엘서에서 성장이 되어 나왔다고 할수 있다. 메시야 대망의 사상은 젤롯당이 가장 강했고 사두개인이 가장 약했는데 사두개인들은 인정은 했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에세네파의 메시아관은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것이었고, 바리새파는 민중과 생각을 같이하여 메시야만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상으로만 생각했다. 이와 같이 당시 유대나라에는 민족주의적인 운동이 팽배했으며,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운동이 일어났고 또 예수의 신국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7)율법학자들
율법학자들의 기원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재사장의 임무였다. 포로시대 이후의 유대교를 율법위에 확고하게 세워 놓은 에스라는 제사장이며 서기관이었다. 율법학자들의 지위가 발전된 것은 헬라주의와의 만남과 대결에서 온 결과였다. 헬라 정신의 강력한 영향에 대하여 독자적인 교훈을 율법 속에서 찾으려는 정신적인 도구와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기때문에 문답식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희랍인들에게 배웠다. 학자들은 전승을 보호하고 성서를 해석하여 적용하는데 정통하였기 때문에 현자, 율법교사, 대가 등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4) 유대신비주의
주후70년이전에 두드러지게 신비주의적인 세계관을 보였던 유대교내의 독립된 종파, 혹은 그룹이 있었다는 징후는 없지만 이 시대에 나온 쿰란과 그 밖의 지역의 문서들을 보면 개인의 신비체험을 위한 장소로서 야웨의 병거보좌 (Chariot throne)에 중점을 둔 특별한 유형의 신비주의가 있었다는 증거가 있으며, 이러한 전승은 유대교내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후에 예수와 바울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신비적 환상들은 지상의 어려움으로부터의 도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유대교내의 각 그룹이 토라와 유대 전승을 각양각색으로 해석했으며, 계약 백성으로서의 유대인의 독특성을 서로 다른 기준으로 보존하여 했다 할지라도 유대인 전체의 통일성을 자각시켜주는 두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토라에 대한 열의와 자신들은 아브라함과 야곱과 그의 열두아들의 후손이라는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생활과 사상의 통일성은 많은 이방인에게 매력을 주었으며 종교공동체에 속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유대인은 그러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타고났다"고 주장하므로 배타성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교 내에서 포괄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움직임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그 공동체는 다름아닌 그리스도교 교회로서 이 교회는 사해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새계약의 진정한 상속자로 간주했다. 이와같은 배경사의 빛 속에서 예수의 사상과 교훈을 연구해 볼때 더 입체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
3.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1)헬라주의적 세계 안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기원전2-1세기에 팔레스틴에서 치열하였던 전쟁이 빈궁과 고통을 가져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심한 고통때문에 떠나야만 했다. 후대에 와서 그들이 해 방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대로 외국에 남아 있었다. 헬라주의 세계에 살았 던 유대 사회는 그들의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야 했다. 그러나 율법에 따라 살려는 주장도 있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보다 신앙과 생활도 변화되었다. 팔레스틴에서는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종말적인 희망이 일어난 반면 디아스포라에서는 영혼 불멸이라는 익숙해진 헬라사상에 접합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헬라 정신에 대하여 개방하려고 했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규례에 신실해야 한다는 점을 결코 잊을 수도 없었고 잊어서도 안되었다.
2)70인역 성경(LXX)
헬라주의 세계에 있던 유디인 공동체가 율법위에 확고하게 설수 있기 위해서 는 히브리어로 되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랍어로 번역해야 하였다. 모국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필라델푸스 왕 톨레베우스 2세는 그의 궁중 도서관에 유대인의 율법의 희랍어 번역본이 없다는 사서 테메트리우스의 이야기르 듣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6명씩 보내어 율법을 희랍어로 번역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모인 72명의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서 작업을 시작하여 72일 만에 번역을 마쳤다. 이 번역본은 유대인 공동체안에서 아름답고, 경건하고, 매우 정확하다고 인정되었다. 이래서 72라는 숫자에서 우수리를 떼어내고 70이라는 정수로 채우면서 희랍어 번역본의 이름이 붙여졌다.
3)알렉산드리아의 필로
헬라주의적 회당과 마찬가지로 필로 역시 그의 사고와 행위 안에서 철학적 숙고의 도움을 얻어 유대교에 대한 합리적인 논증을 하려고 조력하였다. 필로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침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의로 보았으며 동시에 헬라 철학의 유산에 가장 깊이 빚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헬라철학의 유산과 모세의 율법을 일치시키려고 하였다. 율법서들은 필로에 의하여 비유적 해석의도움을 얻 훌륭 한 도덕 철학으로서 설명되었다. 필로는 또한 한분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을 철학자들의 학설 속에서 발견해 냈다. 필로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초기 기독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인들은 기독론을 형성하기 위하여 그의 로고스 사상을 받아들였다. 필로는 기독교 신학의 선구자가 되었는 데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성서적인 신앙을 지혜와 미덕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의 실현으로서 이해하기 위하여 어떻게 성서적인 신앙을 철학적으로 기초하여야 할 것인지를 필로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4)요세푸스
팔레스틴의 유대교 출신이나 후에는 디아스포라에서 생활하였던 요세푸스는 그의 책을 통하여 헬라주의 독자들에게 유대교를 변호하고 이스라엘의신앙을 변증 하려고 하였다. 요세푸스는 기원후 37년에 예루살렘에서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에 일정시간 소속되면서 차례로 그것을 알게되었다. 그는 로마에 정복당하고 오해를 받는 그의 민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저술활동을 하였다. 요세푸스는 비유대인 독자들에게 유대교에 대한 이해를 일깨우려고 했으며 합리적인 생활방식으로서 유대교를 그들에게 접근시키려고 하였다.
제 3 장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인의 생활과 신앙
1. 팔레스틴과디아스포라에서의 유대인의 사회적 상황
주권이 로마인들의 수중으로 넘어 갔으나 그 밖에 전해져 오던 정치적, 법률적 상황이 바뀌지 않은 것은 로마 제국의 모든 식민지 안에서 시행된 로마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역시 로마 황제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주권을 계속하여 누릴 수 있었다. 고국에서 살고있던 유대인들의 경제적 상황은 철저하게 검소하였다. 예루살렘 소수 상류층과 갈릴리의 대 지주들만이 부유하였다. 유대인들은 통치권의 교체가 있었어도 일상생활은 변화되지 않았으며 다만 로마 당국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것만은 기억해 두어야 했다.
2.예루살렘의 성전 의식
거룩한 도시에 있는 성전은 예수의 시대까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예로부터 성전에 주어진 깊은 의미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문을 지나서 성전 구역에 이르면 먼저 이방인에게 개방된 바깥 뜰에 들어선다. 매일매일의 희생 제사와 많은 축제자들의 방문이 다양한 상행위가 바깥 뜰에서 벌어졌다. 이 방인은 성전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를 범하면 사형에 처해졌다. 예배는 남자들만이 참석하였다. 주랑현관에는 헌금함이 놓여 있었고 성전 앞에는 번 제 제단이 있었다 그 안에는 금향단과 일곱 촛대와 제삿상이 있었다. 지성소는 대속제일에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매일 희생 제사가 드려지고 대순례 축제때 수 많은 순례자들이 몰려 들었던 성전은 온 유대인에게 성소가 되었다.
초기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도 또한 성전을 하나님 숭배의 성소로 여겼다. 심한 고난의 시대에도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매일매일 방해되지 않고 정확하게 드려졌다. 로마인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포의 되었을 동안에도 성실하게 제사를 드렸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버림으로써 유대교는 분명한 중심점을 잃어 버렸다.
3. 회당
회당의 시초는 분명치 않으나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 바빌론으로 잡혀가 유배 생활을 해야 하였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들을 수 있는 장소를 세웠다고 생각되었다. 회당 건물은 대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긴 장방형의 집으로 건립되었다. 회당은 각 지역에서의 유대 공동체를 유지, 보존시 키는데 공헌하였다. 회당에서의 예배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 기도하고 성서를 낭독하며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대체로 예수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그의 특징에 있어서 비슷하게 남아 있는 예배의 과정은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첫번째 부분은 의식적인 면이 강하고 두번째 면은 교훈적인 면이 강하다. 회당은 교육의 장소인 학교였다. 그래서 학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회당은 동시에 교육과 예배를 위한 곳이었다. 때로 회당옆에 고유의 학당 이 따로 있기도 하였다. 회당에서 율법학자들이 율법을 연구, 해석, 전수하였다.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이었으며 자치단체의 일과 공동체의 생활 문제들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4.성서, 율법, 전승
유대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성서의 범위가 분명하 게 규정되어야 했다. 모세 5경은 기원전 4세기에 편집이 끝났으며 토라는 유대교에서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으며 토라의 영광과 존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구약 성서의 나머지 책들은 토라의 다음 서열에 놓였다. 왜냐하면 토라는 인간의 협력없이 이미 하늘에 있었으나 성서는 인간의 신적인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최고의 서열은 토라이며 모든 성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토라는 기록과 구전의 방법으로 전수되었다. 전승의 발전은 성서해석을 통하여 계속되었다.
5.하나님과 인간
유대교는 완성된 교의학이나 간결한 신론을 담고 있는 어떠한 신앙 고백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유대교에 있어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은 율법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 유대교의 확신에 따르면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는 오직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체득할 수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룩자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으며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임무가 주어졌고 인간은 종으로 주인께 몸과 마음을 바쳐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미지의 존재가 아니며 행위에 정확하게 일치하여서 보수를 청산하시므로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얻는 의로 인하여 생명의 길이 열린다고 본다.
6.미래적인 구원
이스라엘이 고백하는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세상의 주이시요 왕이시지만 그의 주권이 아직 세상 앞에 감추어졌으며 백성들에 의해서 인식되지 못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의 희망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스런 통치가 드러나게 될 미래를 향한 것이었다. 유대교 내의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언제 오느냐는 물음이 제기되었고 메시야 시대가 이미 선포되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표징을 구하였다. 랍비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율법을 엄격히 지킴으로 이스라엘 은 미래적 구원의 도래를 재촉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고 이방인을 몰아내고 영광스러운 나라를 세우실 지배자와 심판자로서 오실 것이라는데는 그들 모두가 일치하였다.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는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의 종말적인 대망속에 결합되지 않은채 서로서로 병행되어 있던 모든 명예로운 칭호들을 그들의 주님께 돌렸다. 유대교 안에 미래적인 구원에 대한 여러 사상이 등장하였으나 하나님의은혜로 저 세상에 있는 사람의 신앙과 행동 율법에 대한 순종 내지는 덕스러운 삶을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구원의 은혜를 받기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제2부 신약성서의 헬라주의적-로마적 배경
제1장 기원후 1세기의 로마 제국의 정치와 사회
알렉산더 대와이 정복을 통하여 이루어 놓았던 거의 무한대한 나라는 마케도니아 왕인 그가 젊은 나이로 죽자 곧 다시 붕괴되었다. 그렇지만 희랍어와 생활 습관은 알렉산더의 유산을 서로 분활하여 다스렸던 장군들의 지배영토 내에서 줄 어들지 않고 계속하여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1. 시이저의 지배하에 있는 로마 제국
결국 시이저가 그의엉적들을 누르고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 후 독재 정치를 펴다가 갑작스레 살해 당했다.(기원전44년) 시이저 살해자 제거를 위해 동맹했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마침내 로마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불화로 인해 전쟁을 하게 되어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후 로마제국을 다스렸다.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 아우구스투스란 명칭을 덧붙였다. 이는 선의 별칭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현명하고 적절하게 제국을 다스렸그므로 평화의 지배자로 환영을 받았다. 기원후 14년 그가 76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통치를 계승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열심히 전임자의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않은 의심과 엄격함으로 적을 만들었다. 그의 통치시에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세례요한 등장, 나사렛의 예수가 치욕적인 십자가형을 받았다.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어 칼리룰라가 계승, 통치하였다. 그는 자신을 신과 동일하게 높히려 했으며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자신의 입장을 세우려 했으나 많은 적으로 인해 궁중혁명으로 그의 통치는 끝났다.(기원후41년) 뒤를 이어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로 추대되어 다스렸는데 그는 양심적으로 통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통치시 로마에서 유대인들 끼리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으로 분쟁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
기원후 54년 클라우디우스는 그를 없애고 아들 네로를 왕좌에 앉히려는 부인 아그립피나에 의해 독살되었다. 통치권은 자연스럽게 네로에게 방해자는 생각없이 제거해버렸다. 그의 명으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난 이유는 생각없이 제거해 버렸다. 그의 명으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난 이유는 로마시의 대화제 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이 네로라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기독교인들을 범인으로 몰아 죽이도록 했다.
결국 모반이 일어나 자살하였고 이로인해 율리우스-클라디우스가의 통치가 끝났다. 팔레스틴의 베스파시안이 그의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권력을 장악하 였고 안정과 질서를 다시 찾았다. 기원후 79년에 그가 죽자 그의 아들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고 기원후 81년에 그의뒤를 이어 동생 도미티안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권력의 절대적임과 신성을 공공연히 나타냈다. 그는 절대 복종을 요구하였고 로마인들은 이러한 군주를 원치 않았다. 기원후 96년 반란이 일어나 도미티안이 죽자 플라비 황가의 시대는 끝났다. 도미티안이 죽은 후 원로원은 스토아적인 지 배자 네르바를 황제로 세웠다. 그후 트라얀, 하드리안, 안토니우두스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스토아 철학의 이상을 실현하려 노력했으나 단 절되었고 평화는 유지되지 못했다. 그러나 제국은 내외적으로 번영되었으며 헬라 주의적-로마적 문화는 별다른 방해없이 발전, 널리 보급되었다.
2. 기원후 1세기의 로마 제국의 사회적 상황
로마제국은 광범위한 국경을 무력으로 안전하게 방어하는 셰계적인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세계적인 국가 안에서 헬라적이고 로마적인 유산이 통일성을 가진 위대한 문화로 하빠성된 헬가주의적-로마문화는 별다른 지장이 없이 발전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정치적으로 무력한 희랍이 문화적으로는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고 헬라에서부터 그들에게 쇄도해오는 풍부한 정신적 자산에 거리낌 없이 개방하였다. 헬라의 문화는 언어, 자녀교육, 가정생활, 학문. 철학, 생산과 경제, 행정 등 모든 면에 적용되었다.
3.황제 숭배 사상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군주를 신의 아들로 여겨 숭배하였다. 얄렉산더 대왕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동부 제국가들을 통과하여 승리의 행군을 하게 되자 희랍인 들은 신국이라는 동양적 사상에 접하여 황제를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군주에 대한 숭배는 우선 예배적인 형태로 표현된 정치적 충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군주 숭배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분리되자 기독교인들은 회당에 참여하지 못 하였고 이로 인하여 황제 숭배를 강요 받았고 로마인과 계속 충돌하였으며 콘스탄틴 황제 밑에서 시이저가 그리스도에게 굴복하기 까지 교회는 박해와 고난을 받아야 했다.
제2장 신약성서 시대의 종교 운동과 정신적 사상
1.희랍과 로마의 신들
희랍인들이 숭배하던 신들은 자연 속에서 역사하는 힘과 능력을 형체화한 것들이었다. 희랍과 로마의 신들은 비슷했으며 사람이 사는 사회와 도시들은 각기 그들의 특별한 신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의 신들은 운명의 주인이지만 희랍과 로마의 신들은 인간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단지 죽지 않는다는 점과 커다란 힘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만 인간과 구별된다. 예배는 국가의 업무였기 때문에 국가의 번영을 위하여 월력의 정확한 순서에 따라서 시행되었으며 공직자들은 이를 장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민속신앙과 운명 사상
인간의 생활 과정과 운명은 지상적인 힘들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의 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별을 관찰하였는데 그것은 인간 개개인에게 주어진 숙명이 별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엇끼 때문이다. 로마 제국을 지배했던 세계주의적인 포용성은 사람들이 어떤 신들을 부르든지 어떤 종교를 따르려고 하든지 그것들을 그들의 재량에 맡겨 두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각자 자기를 위해서 만족해야만 하였던 자유로운 영역이 주어졌다. 미신적인 생각과 결합되었던 다소 분명하게 형성된 운명사상은 많은 사람들엑세 널리 퍼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좋은 운명이 주어지기를 바랐으며 자기와 자기에게 예속되니 사람에게 선한 것이 오리라는 전조를 얻으려 애썼으며 행복을 상징하는 튜게(운명 의여신)의 형상을 매우 사랑하였다.
3.밀의 종교들
인간이 어떻게 음울한 운명으로부터 방어하고 자유롭게 되는지에 부분적으로나마 해답을 준것이 밀의종교였다. 이러한 밀교들은 인간에게 고통, 죽음에 대항하는 치유의 능력을 주어서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하였다. 여기서 비밀이라는 말은 특별한 예배 행위를 위하여 모여든 종교적 모임이 그들의 종교의 내용과 의미에 대하여 그 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누설되지 않도록 엄격히 침묵을 지킨다는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그들의 비밀스런 계율은 지극히 지킨다는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그들의 비밀스런 계율은 지극히 적은 부분만 전승되었다.
4.통속 철학
헬라주의 시대에 에피큐르는 향학이라는 것을 인간이 참된 지혜를 얻어 모든 생활속에서 옳은 것을 찾아 행할 수 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인간적인 건전함의 상태로 이해되었다. 에피큐르는 신의 존재는 부인하지 않았으나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신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에피큐르 철학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때문에 세상에서의 향락적 쾌락을 추구하였다. 퀴니크의 철학자들은 에피큐르 철학자와 달리 삶의 쾌락을 경멸하였다.
스토아 철학자들 역시 쾌락추구의 삶을 거부하였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인생의 과제를 배워 알게 하는 스토아 윤리의 실제적 방향은 퀴니크 학파의 이론과 관련을 맺고 있다. 스토아 사상은 헬라주의적 유대교에서도 받아 들여졌다. 이외에도 고대 후기의 정신적 생활에 영향을 끼친 다를 철학 학파에 피타고라스 철학파와 플라톤의 세계관이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금욕적인 생활을 견지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플라톤의 세계관 중 신론은 유대인에게 성서 텍스트로 채택되었다.
제3장 영지주의
1. 영지주의의 근본적인 구조
영지주의의 근본구조를 가능한 한 적절하게 표현하려고 한다면 도대체 영지주 의는 그들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무엇이 되려고 하였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영지라는 말은 인식을 의미한다. 지식은 인간에게 신인식을 전달해 주는 계시를 통하여 주어진다. 인간은 인식의 대상 즉 하나님 자신에 의해 감동되면서 이러한 인식을 체험하게 된다. 영혼은 황홀한 지경에서 그를 인식한다. 이 세상의 내적 관계는 세상의 기원이 밝혀질 때에만 이해되어질 수 있다. 영지주의는 세목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될수 있으나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는 특징들을 보여주는 우주 개벽설의 묘사로서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말한다. 창조는 순수 한 빛의 세계 가운데 있는 신의 영역으로부터 한 부분이 하층 세계로 떨어져서 물질과 결합함으로써 일어났다는 것이다. 세상이 하강을 통해 생겨난 것이기 때 문에 신의 본래적인 작품이 아니라 지금은 적대적인 세력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는 신의 소외된 작품이다. 인간관 역시 창조의 이해에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태초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신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속으로 던져졌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현재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구원론 속에서 구원에 대한 물음이 답변되고 있다. 세상 위 먼곳에서 통치하고 계신 신과 인간의 영혼속에서 쉬고 있는 신적 본체는 자연적인 근사성을 근거로 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영혼은 그가 본래 내려왔던 상계로 다시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 속에 숨겨진 신적인 핵심이 자유롭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의 본래적인 임무를 다시 받게 됨으로써 근원적으로 복귀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영지주의와의 싸움은 교회가 영지주의 이론에 대항하도록 창조론과 인간론, 그리고 구원론을 좀더 명백하게 표명하도록 교회에 도전하였다.
2. 전 그리스도적 영지주의의 증거로서의 코르푸스 헤르메티쿰
영지주의 사상은 18개의 논문을 모아 만든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이라는 책 안에 총괄되어 있다. 첫변째 논문은 거친 표현으로 영지주의 학설의 우주론, 인간론, 구원론을 총괄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세상의 기원, 인간의 창조 및 인간을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구원 등을 표현하기 위하여 짜 맞추어진 많은 신화론적인 전승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13번째 논문이 무엇보다도 주목을 끄는데 이 논문에서는 성례전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의 인식만을 생각하고 있다.
코르푸스 헤르메티쿰의 문헌들은 영지주의의 개념과 내용을 보다 명백하게 보여 준다. 인식은 정신적인 노력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신도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는 신의 계시로 말미암아 체험된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그의 본질에 따르면 철학적인 명상으로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서 잠자고 있는 신적인 불꽃과 결합되어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삶을 살아가 도록 하는 신적 능력으로 가득 찬 인간 전체의 변화로서 일어나는 인식이다.
3. 기원후 1세기의 영지주의 전파
기독교 복음을 어떻게 적절하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영지주의와의 만남 가운데서 결정되어질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인간의 삶과 구원의 의미에 관한 공개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서 복음이 명백하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영지주의 의 유창한 말과 개념들을 빌어서 인간에게 설교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지 주의의 말과 개념들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기독교의 선포가 내용적으로 변화되었 거나 변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우리가 복음의 진리와 독자성을 해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희랍인들에게는 희랍인이 될 수 있는지 개별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오린, 그리고 가끔 애써서 숙고한 후에야 비로소 결정될 수 있었다. 고대 교회에게 영지주의가 던진 도전으로 말미암아 - 유대인 이건 희랍인이건 - 모든 인간에게 빚지고 있는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 해와 해석을 하기 위하여 교회는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결 론
유대인들과 희랍인들에게 전해진 십자가의 복음만이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원을 열어 준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선포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대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언제나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언제나 사람보다 강하게 때문이다(고전 1:25).
<참고 문헌>
Forster, W. 신구약중간사. 문희석역. 컨콜디아사 1977.
Jeremias, J .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한국신학연구소번역실역. 한국신학연구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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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ell. D.S. 신구약 중간시대. 임태수역. 컨콜디아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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