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사회의 구조
신약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당시의 지배국가인 로마제국의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전체로서 구조에 대한 이해는 게자 알폴디(Gega Alfoldy)가 제안한 구조적 모델(1985:125)이 도움을 준다.
로마사회의 구조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서술될 수 있다
(1). 먼저 상류계층(원로원과 기사계급)과 하류계층이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이다.
(2). 그리고 두 번째로 특기할 점은 도시와 시골 사이의 뚜렷한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은 상류계층의 사람에게보다는 하류계층의 사람들에게 보다 명료하게 나타난다.
(3). 하류계층은 지배계층에 예속되어 충성을 표시하는 다양한 그룹들로 나뉘어져 있다.
(4). 상류계층은 그 가운데 법적 신분과 실제적 권세 사이를 구분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서열들이 존재한다((황제->원로원->군대장군들(기사계급)->귀족들->부호 자유인들))
(5). 황실관료와 지방관료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있다.
(6). 가이사 집의 사람들(familia Caesaris)은 일반 사회 구조와는 별개의 삶을 사는데 이들은 오직 황제와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그 모든 특권을 누린다. 별 볼일 없는 황제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 배후에 있는 황제의 권위와 힘이란 말할 수 없이 크다.
위의 로마 사회 구조에 비해 기독교 공동체의 사회적 위치는 공동체의 대다수가 하류계층의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 지방의 상류계층의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러나 이 사람들은 소수그룹이었다. 물론 이들 상류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을 미치기도 하였다. 이들 신앙 공동체는 그들이 독특한 사회구조 속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사회구조 속에서 그들의 절대적 충성은 가이사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에게로 집중되어 있고 그 분께 전적으로 예속되어졌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공동체를 형성하여 주님의 군사로 주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띄었다. 가이사의 집의 사람들과 부활하신 주님의 공동체는 모두 다 일반 사회구조 바깥에 존속하여 서로 판이하게 다른 구조적 모습을 띄고 있었다. 전자는 세속권세의 중심(황제 가이사(Caesar)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면 후자는 이러한 세속적 권력의 중심과는 멀리 떨어진 채 '하늘과 땅의 모습 권세를 가지신 주님'(Kyrios)와 밀접하게 관련(예속)되어 있다.
2. 로마제국의 행정형태
1) 로마황제(Emperor)
아우구스투스 황제 전의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정치였다. 그러나 로마의 작은 해외정복으로 인해 원로원은 점점 그 세력을 잃게 되고 결국 주전 31년의 악티움 전투에서 옥타비안이 안토니를 대파함으로써 공화정치는 쇠퇴해졌다.
옥타비안은 휘하에 60개의 군단을 보유하였고 원로원은 그를 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확증함으로서 그는 군과 의회와 원로원을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된다. 얼마 후 그는 로마의 국가 종교의 대제사장(pontifex maximus)가 된다. 그리고 전쟁과 평화를 수행하고 조약을 협의하는 권력을 지닐 뿐만 아니라 로마 외의 각 도에 군대를 주둔하게 하는 총독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진다. 그는 명실상부한 왕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옥타비안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Augustus) 즉 숭배 받는 신의 칭호를 가진다. 원로원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황제의 자문회로서 역할을 한다. 비록 원로원이 많은 행정책임을 맡고 있지만 실제적인 권력은 군의 최고 사령관인 황제에게 있다. 물론 원로원이 가진 권력 중에 황제를 확증하는 것이 있지만 이 일은 거의 전황제의 유언이나 군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처럼 공화정치의 원조인 원로원은 황제의 시녀로 전락하고 마침내 황제는 점점 절대권력을 가진자(신적 존재)로 나타나면서(Julius Caesar; Augustus; Claudius; 등등) 황제숭배의 정책이 속국들에게 강요되고 이로 인해 황제들은 점점 타락해 감을 본다. 결과적으로 원로원이 황제를 신적 인물로 추앙하여 신전을 지어 그를 숭배하도록 결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의 역사가운데 절대권력의 절대타락을 본다.
2) 로마의 행정구역(provinces)
로마의 황실행정의 가장 비근한 예가 총독의 활용이다. 이러한 모습은 신약에서 자주 나타난다. 복음서의 유대상황으로부터 계시록의 일곱교회의 정황에 이르기까지 로마 바깥에 둔 행정구역들(provinces)은 로마의 해외소유권에 대한 확증으로 여기에는 두 가지 행정적 형태가 있다. 원로원식 행정과 황실행정 전자는 원로원에 의해 총독이 임명되고 업무는 주로 민정의 일에 해당되며 그 임기는 1년으로 하지만 후자는 황제에 의해 총독이 임명되고 그 업무는 주둔하는 군대를 통솔한다. 주로 로마제국의 국경과 변방의 소요지역들에 이러한 황실행정구역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정구역들과 함께 해외에 조그마한 분봉왕국들(Client kingdoms)이 있는데 이들 분봉왕국들은 로마에 의해 직접 통치는 받지 않지만 여전히 로마에 예속된 것으로서 팔레스타인이 그 비근한 예에 속한다.
3) 정복 식민지와 자유도시들
로마제국 바깥에 위치한 행정구역들 내에 로마의 행정에 직접적으로 예속되지 않은 정치형태가 두 가지가 있다. '정복식민지의 자치구들'(colonies)과 '자유 도시들'(free cites) '식민지의 자치구들'(colonies)은 해외에 사는 로마시민들의 자치구로서 이것은 로마식으로 조직되어져서 로마법을 따르지 그곳의 지방총독의 법적 제도나 세금제도에 예속되지 않는다. 특히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하는 땅(전략적 지역)에 군인들을 주둔시켜 이러한 자치구를 만들었는데 빌립보나 루스드라와 비시디아 안디옥 그리고 고린도(주전 44년)와 드로아며 가이사라(주후 70년 이후)와 예루살렘(주후 135년 이후)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Polhiss 1994:529f). 사도행전의 빌립보 기사(행 16:19-40)가 이점을 잘 반영해 준다.
'자유도시들' (free states)은 자치구의 표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특권들이 있었다. 헬라의 독립국가도시의 이상에 기초하여 로마가 '자유롭게' 인정한 헬라도시들로서 상당한 자치권이 부여 되었다. 원리적으로 자유도시는 자체적 법을 가지고 자체적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권한이 있으며 황실군대가 도시에는 주둔해서는 안되며 행정관이 도시를 법적으로 통괄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로마가 속국들과 좋은관계를 유지하여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주어진 것이다 자치구보다는 훨씬 다양성이 유지된다. 이러한 자유도시 들로서는 시리아의 안디옥, 데살로니가, 아덴이 좋은 예가 된다.
그 외에도 자유도시는 아니지만 상당한 특권과 지역적 자율성을 가진 도시들이 있는데 에베소가 이에 속한다(행 19장 특히 30,32,35,38절을 보라). 이러한 도시들이 갖는 행정구조로서는 의회(assembly), 시의회 (council), 시의회 사무관(town clerk), 행정관(proconsul)이 있다. 여기서 실제적 권한은 시의회와 그 관료들(서기를 포함), 그리고 행정관의 손에 있다.
4) 로마시민권(Roman Citizenship)
고대로마에서는 한 도시에 하나의 시민권만 허락되었다. 그러나 1세기에 이러한 규례가 바꾸어져 이중시민권이 인정되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다소시민임과 동시에 로마시민이었다. 이것은 제국의 통일성(unity)을 고려한 조치였다. 특히 로마의 시민권은 로마법에 예속되어 심문 없이 매질을 당한다거나, 십자가의 형벌과 같은 잔악한 벌을 면한 다거나 불법적 감금을 당하는 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시민권을 획득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는 시민인 두 부모로부터 출생하는 경우와 군인들은 제대 후 시민권이 주어지고 또한 새로운 자치구가 수립될 때 시민권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수여되기도 한다. 때론 노예가 자유인이 될 때 시민권이 부여된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는 황제가 시민권을 하사하는 경우이다.(행 22:28)
5) 세금제도(Taxation)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로마의 행정구역들은 다양한 세금들을 물어야 한다. 이들 세금 중 몇 몇은 로마 자체로부터 부과되는 세금들이 있다. 이중 가장 보편적인 세금은 인두세(poll tax)로서 여자와 종들을 포함하여 모든 성인들에게 부여되는 세금으로 이것은 행정구역의 살림살이를 위해 사용한다. 인두세를 책정하기 위해 정기적인 인구조사가 시행되는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구레네(Quirinius)총독에 의해 시행된 인구조사(눅 2:1)는 황제의 화상이 그려진 주화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서 갈릴리 유다에 의해 폭동으로 번졌다(행 5:37). 이 그룹은 열심당으로 발전하여 로마에 대해 지속적인 저항을 하였고 결국 주 후66-70년간 벌어진 유대전쟁(Jewish War)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논쟁을 벌였던 것(막 12:13-17)도 바로 인 인두세에 대한 열심당의 반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두 번째는 토지세(land tax)로서 이것은 황제의 보화로 원로원이 관리한다. 이 세금은 각 행정구역에 할당되어 오며, 수집은 지방관청에서 행하며 때론 고금리로 사채업자들에게 위임되기도 한다. 이 경우 상당한 남용이 수행되어지며 이런 까닭에 세관원은 부정직한 사람들로 악명이 높다(눅 19:1-10). 그 외에도 판매세, 상속세, 노예 해방세, 제사를 위한 제물들을 위해 내는 세, 상품 운송세, 관세등이 있다. 그리고 각 행정구역들마다 자치적인 세금들이 있다. 즉..관리세나 사용료 및 통관 관세 등이 그러하다. 특히 유대는 과다한 세금으로 인해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특히 헤롯의 꼭두각시 정부는 로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과다한 건축개발계획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엄청난 과세를 부과하였다. 이 외에도 유대인들은 십의 삼조를 종교세(10%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10%는 성전봉사에, 그리고 나머지는 구제비로)로 내었다. 이처럼 수입의 50%이상이 세금으로 나갔다. 그리고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 유대인들은 매년 반 세겔의 성전세(cf. 마17:24-27)를 내어야 하였고(아달월에 납부) 이것은 매일제사의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주후 70년 성전멸망이 된 후에도 베스파시안 황제는 이 세금을 모든 유대인들이 내도록 강요하여 그것을 그 위에 세워진 쥬피터의 신전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3. 헤롯 시대의 사회 구조와 계층
인구의 1-2%에 해당하는 황제와 총독과 분봉왕 그리고 산헤드린의 특권층의 사람들이 국가의 모든 부의 50%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밑의 부유층이 약 5%이며 그리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포함한 상인들,무역업자들, 예숙가와 도제들, 그리고 사채업자와 세관원들로 구성된 중산층은 인구의 10-15%에 해당되며 인구의 70-75%는 농부들과 어부들, 그리고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 10%는 소외계층의 버려진 사람들로서 굶주림과 생존에 허덕이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 통계는 지역에 따라 다소 변동적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대부분과 따르는 무리들은 가난한 하류층의 사람들이었다. 아마 목수로서 일한 예수의 가족은 중산층 중에서 제일 밑의 계층의 사람들로 이해된다(Blomberg 1997:69-61).
1)산헤드린(Sanhedrin)
이미 우리는 앞에서 황제와 분봉왕들과 총독에 대한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입법, 사법, 정치, 그리고 종교의 최고 의결기관(council)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주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71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이다. 아마 산헤드린의 원조로서는 하시모니안 시대의 장로들의 의회일지도 모른다. 이들 산헤드린의 실세는 대제사장을 주축으로 하는 사두개인들로서 이들은 산헤드린의 법정스케줄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자들이다. 결국 로마는 대제사장을 자신들이 임명함으로써 산헤드린이 로마제국에 충성하게끔 만들어 놓고 그 대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사형권은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cf. 요 18:31)
2) 유대의 정치-종교적 집단들
(1). 에센파(Essenes: a Graecizing of Aramic hasayya, the "pious ones")
로마의 통치가 있기 전 즉, 예수님이 탄생하기 1c전에 맛디아의 손자며 마카비족의 족장인 요한 힐카누스는 독립된 유대왕국의 국경을 확장하고 유대인들을 위해 일련의 사회적 안정과 번영을 수립하여 갔다. 그러나 초기의 마카비의 독립투쟁(Maccabean revolt)을 지원하였고 그들의 하스모니안 왕조를 지원하였던 경건한 유대인 중에 일부(주로 제사장들)는 하스모니안 왕조의 정통성(사독계<겔40:46, 43:19, 44:15, 48:11>가 아님)와 윤리성(세속적 야심. 폭력. 사치와 방탕)이 결여된 대제사장직의 계승과 남용에 반대하여 광야로 은둔하여 배타적인 엄격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특히 이들은 예루살렘(불결과 타락한 장소)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비윤리적이고 타락된 행동과 삶에 실망하여 광야(정결한 고)로 들어가 스스로 '사독계 자손들'로 자청하며 소위 '빛의 자녀들'인 자신들에 대해 하나님의 종말론적 신원 하심을 기다리면서 엄격한 율법 준수와 정결 의식을 통해 갱신(renewal)을 추구하는 일종의 '반 문화 운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교리적으로 묵시록적 사상에 교도되어 있으면서 율법에 엄격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역사의 간섭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을 믿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께서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전쟁을 시작하실 때 하나님을 위하여 싸워야 하는 이스라엘의 선택받은 집단으로 생각하였다. 이들은 AD 68년의 예루살렘 멸망 때까지 광야에 남아 있었다.
(2). 바리새파(Pharisees: 히브리어로 "분리된 자들"을 의미)
에센파 같이 하스모니안 왕가의 비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인 대제사장직(왕과 대제사장직을 겸함)에 불만을 가졌지만 에센파와는 달리 유대사회 속에 남아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내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초기에는 요한 힐카누스의 아들인 알렉산더 얀네우스의 정책에 반대하여 무장분쟁에까지 이르지만 결국 알렉산더가 죽기 직전에 얀네우스의 정책에 반대하여 무장분쟁에까지 이르지만 결국 알렉산더가 죽기 직전에 극적 타협으로 화해한다.) '경건한 자들'로 불려지는 하시딤(Hasidim)의 사람들(평신도들)로서 주무대는 회당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율법준수에 대해서는 엄격했지만(하나님과 율법에게만 돌아가는 순종에 있어서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통치에 대해서 타협하며 이스라엘의 해방은 하나님의 손에 남겨두는데 만족했다(정치와 종교를 구분). 물론 개중에는 갈릴리 유다와 같은 과격한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며, 영혼불멸(몸의 부활), 미래의 상벌, 천사와 마귀의 존재, 그리고 예정과 자유의지의 병합을 믿었던 그 시대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다(Blomberg 1997:48). 성경에서는 위선으로 인한 그들의 율법적 열심히 비판의 이유였다(마 15장과 23장).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니고데모(요 3:1)와 아리마데 요셉(막15:43)이 바리새인이다.
(3). 사두개파(Sadducees: 히브리어로 "의로운 자들"을 의미)
귀족들과 소수 유능한 엘리트들로 구성된 조그마한 그룹으로 시작된 이들은 대부분이 제사장계통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헬라화에 반대하였던 그들의 초기 정책을 수정하여 하스모니안 왕가를 지원함으로써 기득권층이 되었다. 독립되었을 때나 로마의 통치하에서도 개혁운동이나 혁명운동에는 공감하지 않고(로마 정부와의)타협과 제휴를 통해 예루살렘내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야심과 이익을 챙겨 나갔다. 사독계 대제사장직이 안티오커스 4세의 통치 아래서 타협이 되어 야손(Jason)이 그의 동생 오니아스(Onias)를 뇌물을 통해 대제사장직에 앉히고 헬레니즘을 진작하는데 그 직위를 사용하였다. 마카비혁명이 성공하고 (사독계가 아닌) 하스모니안 왕가가 대제사장직을 인수하였을 때 일부 사독계 제사장들과 다른 귀족들은 예루살렘에서의 그들의 자산과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사두개파를 지지했다.
사두개인들의 기원은 제사장계와 귀족출신들로서 그들의 세력은 비록 산헤드린에 다수당이라 할지라도 살로메 알렉산더가 바리새파와 제휴할 때는 약화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그들 중 일부는 하스모니안 왕가에 충성하였고 그 충성은 헤롯에게까지 연장되고 이와 같이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위치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슬기롭게 로마정부와 결탁하여 그들의 야심을 채워나갔다. 즉 그들은 산헤드린 내에서의 자신들의 위치와 자산(기득권)과 성전에 대한 그들의 정치-경제적 장악을 유지하기 위해 로마정부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의 기득 층이었던 이들의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성전은 기득권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보고("강도의 굴혈"로서의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로 전환되었다. 특히 흩어진 이스라엘의 순례자들이 절기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 할 때 성전환전율을 마음대로 조작하였을 뿐 아니라 성전예배(제사제도)를 중심으로 한 정경유착으로 인해 많은 경제적 이익(비자금)을 챙겼다. 정치적 집단인 이들은 종교에 있어서는 대단히 보수적으로 남아 있었다. 특별히 율법에 구전 전승을 덧붙이는 것을 거부하였고 최종적인 권위는 오직 모세 오경에만 있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그들이 히브리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소위 토라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여겨진 사상들(몸의 부활, 천사론 등)은 배격하였다.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함께 그들의 정치적 운명도 끝장이 났다(종교를 이용한 부귀와 영화도 한 시대로 끝났다.)
(4). 열심당(Zealots: cf. Num 25:1-11)
요세푸스는 이들을 '네 번째 철학'(fourth philasophy)으로 불렀다.
하나님과 율법에 열심있는 극단적 행동(폭력과 투쟁)의 경건의 모델로서 구약에서는 브닌나(민 31:6 시106:28-31) 시므온과 레위(창 34:1-31) 엘리야(왕상 18:36-40) 예후(왕하 10:16-27)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극단적 열심의 경건을 따라 형성된 열심당은 마카비 혁명(167-142 BC)에서 로마-유대전쟁(66-74 CE)기간 동안 로마의 통치에 대한 저항과 반대를 위해 투쟁하는 열심있는 거룩한 혁명군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님("No lord but God"[JW 18:23])이시기 때문에 로마의 인구조사를 반대하며 또한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cf. 마 22:17)을 반대할 뿐 아니라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의 압제에 대해 자신들이 무장 투쟁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 해방(정 치적 독립)하게 하신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행동주의자들/폭도들로서 '갈릴리 유다(cf 행 5:37)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설이 있다. 성경에는 가나안 시몬이 열심당원이었고(눅 6:15 cf. 행 1:13) 십자가상의 두 강도들도 열심당원들로 추정된다(막 15:27). 종교적 열심에 있어서는 바리새인들과 비슷하지만 그러나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독립(해방)에 대한 갈망과 그에 대한 일사 각오의 투쟁은 그들과 다르다. 로마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유대사회 내에서의 종교 지도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남용과 타락에 대한 개혁을 추구한다(Hengel). 이들은 마카비의 기적을 자신들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군사적 힘으로 로마를 축출하려는 노력을 존귀하게 여기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확신이 비극적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는다.......예수님은 이와 반대로 철저한 무저항주의였다.
4. 가족(family)
신약시대에 가족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였다.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이었고 무자함은 일종의 저주로 여겨졌다. 어린아이들은 사회에서 전혀 자기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없었고 여인들 역시도 일종의 남자의 소유물로서 남자들은 바깥에서 생계를 벌어와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가사에 열심히 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남자는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지 않는 남자는 뭔가 잘못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이점은 후대의 랍비의 말을 들으면 이해가 된다. "아내를 가지지 않는 남자는 자원도, 도움도, 기쁨도, 축복도, 속죄도 없이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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