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세례와 시험
김세윤 교수
1.예수의 세례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의 메시야적 사역을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마3:13-17/막1:9-11/눅3:21-22).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는 장명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을 암시하며 그때 예수께서 공관복음의 기록과 같은 체험을 했음을 암시한다(1:29-34).
(1)세례요한
세례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종말이 다가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대비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다. 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목욕을 함으로써 구원받을 준비를 하였다는 유대교의 전승(고전10:1 이하참조)과 그때의 이스라엘은 종말에 구원받을 하나님 백성의 전형이었다는 유대교의 신념에 따라서 임박한 종말에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을 목욕으로 준비시코야 한다고 본 것 같다.
요한은 또 에스겔에 기록된 예언의 영향도 받은 것같다. 에스겔 36:25절 이하에는 두 부분으로 된 예언이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종말에 그의 백성을 물로써 목욕시켜 청결케 하겠으며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영(하나님의 영)과 새로운 심장을 주신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에스겔의 예언중 첫 부분을 담당하도록 위임받은 것으로 보고 물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그이 세례운동을 통하여 죄를 회개하고 목욕하고 청결하게 되므로써 임박한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모으려 했던 것같다.
요한은 또 자기의 뒤를 이어 에스겔 예언의 둘째 부분을 담당할 메시야적 인물을 소개하였는데 그는 이 인물을 당시 유행하던 메시야적 칭호들을 사용하여 부르지 않고 자기 위에 ‘오시는 분’(마3:11/11:3/눅3:16/요1:27)이라 부르고 자기보다 ‘더 강한 분’(막1:7/눅3:16/3:11)이라 부른다. 요한은 이 메시야적 인물이 ‘성령과 물로 세례를 줄 분’으로서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심판을 할 것이고 모든 악의 세력들을 심판의 불에 태워버릴 것이며 하나님의 정한 백성들에게 성령을 퍼부을 분(마3:13/눅3:17/마1:8)이라고 소개하였다.
요한이 메시야적 인물을 이렇게 소개한 것을 보고 어떤 학자들은 그가 ‘다니엘’의 환상 중에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나는데 하늘의 존재(단7:13)를 기대한 것으로 본다(J.베커, F.노이게바쉬,R.페슈).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오시는’ 분(단7:13)이며 심판관(단7:9이하) 이며 불로 심판며(단7:11) 하늘의 존재, 곧 하나님의 아들(김세윤)로서(막1:11/ 요한보다 더 강한 분이며 요한이 그의 신끈을 풀기조차 감당못할 분 막1:8) 이며 요한 ‘뒤에 오시는 분’(마3:11.막1:7/요1:27과 마11:16-19/눅7:31-35 비교) 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직후 첫째로 하늘이 열리고 둘째로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예수 위에 내려왔으며 세째로 하늘로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도 세례요한의 증거의 형식을 빌려 간접적으로 공관복음서의 이와 같은 증언을 확인하고 있다.
(2)하늘이 열리고....
많은 유대인들이 요한의 선포에 응하여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나왔을 때 예수께서도 그들과 더불어 요한에 의해 요단강 속으로 침례되었다(막1:9). 그뒤 예수께서 물 위로 나오자마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자기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하늘이 ‘갈라지고’ 그로부터 성령이 내려왔다는 마가의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비는 이사야 63장 19절 하반절(70인역, 맛소라 텍스트에서는 64:1)을 연상테 하여 예수의 세례가 이 예언서의 기도를 성취하게 하는것으로 마가가 암식하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는 환상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을 때 주어지는 것으로(예:겔 1:1) 곧 하나님의 계시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으로서 유대묵시문학과 신약(예:요1:51/행7:56/10:11/계4:1)애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수는 또 열린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다. 구약과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명에로 부름받은 그의 종에게 임하는데 특히 선지자로 부름받은 자에게 임하여 그가 선포한 말씀을 영감받게 한다는 전승이 있다. 이 전승에 비추어 볼때 성령이 예수께 임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 당시 유대교에서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와 더불어 성령의 역사가 단절되고 종말에야 성령이 다시 임한다고 믿었으며(욜2:28-32) 이사야 42:1절이나 11장 2절을 메시야적으로 이해하여 종말에 주께서 그의 종이나 다윗의 가지에 성령이 임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사48:16/61:1). 이러한 중간사시대의 유대전승이 비추어보면 하늘에 열리고 그곳에서 성령이 내려와 예수 위에 임했다는 것은 우선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둘째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자기의 종말의 사자로 불러 성령으로 기름부었으며 세째로 자기의 종말론적 과업을 수행하도록 성령의 힘으로 무장시키셨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내려왔다는것이 어떠한 특별한 상징설을 지니는가에 대해서 여걸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많은 학설이 제기된바 있는데 그 중 창세때 물위에 휘돌았다는 하나님의 영(창1:2)을 랍비들이 비둘기 새끼들 위에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떠있는 새로 비유하여 이해했다는 점에 비추어 본문의 기사가 예수의 세례를 성령에 의한 새 창조의 시작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설과 본문의 비둘기는 노아가 홍수 뒤 처음 내보낸 비둘기(창8:8-12)에 대한 은유로서 예수의 세례와 더불어 심판의 시대가 지나고 은혜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등이 응미롭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이 완전한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비둘기가 어떤 특별한 상징성을 지니지 않고 다만 비둘기가 사뿐히 내려앉듯이 예수 의에 성령이 사뿐히 임하셨음을 나타낼 뿐이라고 본다.
이렇게 예수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종말의 사자 또는 메시야로서 성령이 충만한 분이었으며(눅4:1/막1:12/마4:1 참조) 성령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일을 하였고(마12:28/눅11:20) 요한의 예언에 따라서 성령세례의 시대를 연 것이다.
(4)하늘로부터의 선포.
성령이 예수께 임한 뒤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들렸다. 이 음성은 예수가 방금 본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와 자기 위에 임하는 사건의 의미를 해석해 준다. 랍비들은 성령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던 시대가 지난 후에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하고 하늘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메아리, 곧 ‘바트콜’‘소리의 딸’을 듣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문의 하늘로부터의 음성을 ‘바트콜’로 이해하기도 하나 마가와 누가가 기록한 바에 의거하면 ‘바트콜’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예수께 직접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그 하늘의 음성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 독일의 신약학자 J.예레리아스는 이 선언은 이사야42:1절만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구절과 시편2장 7절로 구성된 혼합인용으로 본다. 시편 2:7은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하는 다윗의 자손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로 선언함으로써 그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한 약속(삼하7:12-16)대로 다윗의 아들을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자기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출4:22)을 대표하고 그들 위에 그들의 진정한 왕인 여호와 하나님 대신 통치하도록 하신 것이다.
세례 때 예수께 선포된 하늘의 음성은 이 시편2:7절의 전반부를 인용한 것으로 두 가지 특기할 만한 것들이 있다. 하나는 시2:7에서는 ‘나의 아들’이 ‘너’의 앞에 나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다윗의 자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가 주어짐을 강조하지만 예수께 선포된 하늘의 음성은 ‘너는’이 강조되어 앞에 나오고 ‘나의 아들이다’가 뒤따름으로서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강조되어 있다. 또 다른 한가지 특기할 것은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가 아들이나 딸에 부가될 때는 ‘사랑하는’의 의미를 넘어서 ‘유일한 ’이란 뜻을 띠게 되어 예수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들의 왕보다도 더 독특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 아들임을 나타낸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에서 나타난 하늘로부터의 선포가 이스라엘을 ‘나의 아들, 나의 장자’로 선포하는 출애굽기 4:22절을 연상케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언약백성 이스라엘의 숙명을 대표적으로 대신 성취하실 분임을 암시한다고 본다. 또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나의 사랑하는(즉 유일한) 아들’이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묶은 이삭을 두고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창22;12)’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한 것이 그 자손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한 것으로 보는 유대교 신학에 비추어 예수가 이삭의 후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바쳐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사무엘하 7:12-16절의 전승을 이어받은 시2:7이 여기에 인용됨으로서 에수가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그들 위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하도록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아 왕위에 등극하고 대관을 받은 것이다.
삼하7:12-16에 나타난 나단의 예언에 의하면 다윗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게 되리라는 것이데 이 예언이 구약과 유대교에서 메시야적으로 해석되고(탈굼 슥6:12-13) 예수가 이 점에 유의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임무중 하나가 성전을 짓는 것으로 본 것 같다. 그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독특한 태도와 그이 성전을 새로 짓겠다는 선포(막14:58-62/마26:61-64)가 이 결론을 뒷받침한다(김세윤).
세례받은 예수에게 하신 하나님의 선포의 후반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이사야 42장 1절의 인용이다. 사42:1은 이사야 42-53장에 나오는 주의 종의 노래로 알려진 대목들(사61:1-3도 참조)의 시작으로서 주께서 자기가 택한 종에 대하여 기뻐하며 그에게 성령을 주어 무장시키고 임무를 위임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예수의 세례 때 이사야 42:1의 예언에 따라 예수에게 성령이 내리고 예수에 대한 하늘의 선포(시2:7)와 더불어 이사야 42:1의 말씀이 인용되었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이 시편 2:7뿐 아니라 이사야의 주의 종의 노래들에 의해서도 결정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또는 예수가 이사야에 그려진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한 것이다.
이사야 42-53장에 나오는 ‘주의 종의 노래들’을 보면 ‘주의 종’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선택되고 성령으로 무장되어(사42:1/61:1)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모으며(사42:7/49:5-6/61:1이하) 새 언약을 세우며(사42:6/49:8) 스스로를 백성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드리며(사52:13-53:12)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전달하는 (사42:6/49:6) 등의 임무를 가진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예수의 생애를 살펴보면 바로 이런 임무들을 수행하려 노력한 것 같다. 예수가 그의 세례 때 하나님으로부터 시편2:7절의 말씀과 사42:1절의 말씀의 혼합인용으로 선포됨을 체험했기에 그는 시2:7절을 비롯하여 구약의 여러 곳과 중간사시대의 유대문서 여러 곳에 나타난 나단의 예언의 전승(삼하 7:12-16)이 낳은 당대의 주된 메시야 사상 곧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위를 회복하고 이방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풍요를 가져올 정치적 왕으로서의 메시야 사상을 배격하고 자기의 하나님 아들됨과 메시야적 과업을 이사야 후반부에 그려진 주의 종을 감당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5)하나님의 아들.
위에서 논한 대로 예수가 그의 세례 때 ‘너는 나의 사랑하는(유일한) 아들이다’는 하나님의 선포를 통하여 아주 독특하며 지극히 긴밀하고 개인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받는 체험을 하였다면 동시에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체험하였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집작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사실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라고 인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J.예레미야스의 연구에서 밝히 드러난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원래 어린아이가 자기의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그로부터 확대되어 아버지의 친구나 선생님에게도 쓰이기도 했지만) 우리말의 아빠와 비슷한 뜻을 지닌 αββα를 사용한 예가 없는데 예수는 기도할 때 항상 하나님을 아주 독특하게 αββα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 도 하나님을 αββα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하나님을 이렇게 αββα라고 부르는 데서 우리는 예수가 그의 세례 때 체험한 하나님과 자기의 독특하고 긴밀한 관계를 헤아려볼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알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경외하고 순종하려는 의지를 지녔음이 그와 같은 말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또 마11:27(=눅10:22)에 기록된 예수의 말이 예수가 세례 때 한 체험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본다(J.예레미야스,W.그림).
천지의 주재이신 αββα! 지혜롭고 지식 있다는 사람들에게는 이것들을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내 보이시니 당신을 찬양합니다.
옳소이다 αββα! 그것이 당신이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a)모든 것이 나의 아버지로부터 내게 맡겨졌다.
b)아버지 외에 누구도 아들을 알지 못하며
c)아들과
d)아들이(아버지를) 계시하기를 원하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는 세례 때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았을 때,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것을 위임받은 하나님 자기 아버지의 전권대사로 파송되었음을 깨닫고(27a) 둘째로 자기의 하나님과의 서로를 아는 긴밀한 부자관계는 독특한 것임을 이해하고(27b,c,d) 세째로 하나님이 그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듯 말하며 모든 것을 그에게 계시하기에(27 b,c) 네째로 자기자 하나님 자기 아버지의 계시자로서 사람들에게 그를 계시하도록 파송된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27d). 신약성경에 반영되어 있는 초대교회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과 복음선포는 이와같은 내용을 그 근본적인 의미로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이 예수께서 그의 세례 때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자기 이해에서 연유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복음서들의 기사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세례때 예수가 성령으로 메시야적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세움을 받았다는 복음서들의 기사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과격한 비판학자들이 간혹 있다. 이러한 부저적인 견해는 여러가지 근거들을 들어 반박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막11:27-33절(=마21:23-27/눅20:1-8)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쫗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지를 둘어 덮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치 아니하신 후(막11:15-16), 유대의 최고통치기관인 산헤드린에서 대표들이 나와서 예수께 물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들을 하느냐? 누가 네게 그런 권세를 주었느냐?’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당시 랍비들을 토론방식에 따라 반대 질문으로 답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요한이 거짓선지자로서 스스로 꾸며낸 것으로 보는가 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이 반대 질문은 요한의 세례가 자기의 권세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 때만 의미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토론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예수가 성전에서 둘러엎으실 수 있는 자기의 권세를 요한의 세례에 연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자기의 권세를 받았기에 그의 권세의 성격과 원천을 묻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요한의 세례운동을 하나님게로부터 위임받은 진정한 선지자의 운동으로 보는가, 아니면 거짓 선지자의 운동으로 보는가가 중요한 것이었다. 오직 전자일 때만 예수가 그들에게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선지자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았다는 증언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헤드린의 대표들은 예수의 이 반대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고 피해버렸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자기의 권세의 성격과 원천을 직접적으로 밝히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막12:1-12/마21:33-46/눅20:9-19)로 간접적으로 자기의 권세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임을 밝혔다.
이렇게 막11:27-33절은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음과 그 세례때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받았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J.예리미야스,김세윤).
막11:27-33절은 또 예수께서 자기의 성전에서의 소란피움을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했다고 은근히 밝히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재판받을 때 성전을 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주장했다는 죄목(막14:58.마26:61)과 그것과 연관되어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죄목(막14:11-62/마26:63-64.눅22:67-70)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함을 알게 된다. 간단히 결론을 말하자면 예수는 세례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자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의 한 중심인 나단의 뿌리인 나단의 예언(삼하7:12-16)의 전승에 의해 스스로를 이해한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를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메시야)로서 성전을 새로 짓는 임무를 가진 것으로 보고 당시 유대인들의 예배의 중심이었던 타락한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죄를 요서하고 불결한 자들을 청결케하는 등 성전의 기능을 스스로 성취하며 타락한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파괴될 것을 예언하며(막13:2/마24;2/눅21:6) 자기 스스로 성전을 새로 지을것을 약속하였던 것이다(막14:58)
예수가 새로 짓는 성전은 손으로 만든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막14:58) 성전의 기능(주로 속죄의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서으로 지탱하는 것)을 성취하는 뜻으로 스스로를 속죄와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드려(막14:22-24) 창조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였다. 이렇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단의 예언에 따라 성전을 새로 세우는 임무를 완수하려 하였는데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속죄와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드려 다시 말해서 이사야에 예언된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특사42:6/49:6/53:10-12 등) 그(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의 임무를 완수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죽음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곧 예수가 세례 때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시편2:7과 사42:1절의 혼합인용으로 된 하나님의 선포로부터 얻은 자기이해의 표현이었다.
(7)결론
예수는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며 그의 종말의 구원의 역사를 담당하는 메시야직으로 부르심을 체험했다. 그는 그때 자기가 하나님을 유독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독특한 아들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전적으로 위임받은 그의 전권대사로 파송되었으며 그러기에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깨달았다. 그는 또 나단의 예언의 전승에 따라서 스스로가 다윗의 아들로서,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이지만(삼하7:12-16/시2:7 등)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메시야(왕)라기 보다는 니사야에 예언된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메시야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그의 구원의 의지와 힘을 계시하며 궁극적으로 주이 고난받는 종으로서 스스로를 속죄와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로 바쳐 종말의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곧 하나님의 나라:새로운 성전;하나님의 자녀들)를 창조하려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의 자기칭호 ‘그 사람의 아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러기에 요한의 기대와도 긴밀히 연결되지만 여기서는 그런 것들을 더 자세히 논할 수 없다.
2.예수의 시험.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곧 성령의 인도로 광야(아마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 있는 광야)로 나갔음을 기록하고 있다(마4:1-11/막1:12-13/눅4:1-13). 이것은 광야가 맹수들과 악령들의 거처이기도 하지만(레16:10/사13:21/34:14)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호2:14-15) 종말에는 메시야가 그곳으로부터 오게 된다는(사40:3) 구약의 이해에 비추어볼 때, 예수가 세례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소명에 대해 묵상하고 하나님과 더 긴밀히 사귐을 나눔으로서 그의 메시야적 사역을 준비할만한 장소였음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예수는 40일동안 금식하며 하나님과 사귐을 꿰했는데 사단이 예수를 시험하며 이를 훼방하려 하였다.
마가는 예수가 광야에서 시험받은 사실을 간단히 적고 있으나 마태와 누가는 사단의 세가지 시험의 내용과 예수의 응답을 자세히 적고 있다. 그러기에 학자들은 마태와 누가와 마가의 짧은 기사와는 다른 또 하나의 예수의 시험기사를 그들의 공통자료(Q자료)로 마가의 기사에 덧붙여 쓰고 있다고 본다.
(1)마가의 이야기
마가는 예수의 시험의 내용을 적지 않고 1)예수가 성령에 인도되어 광야에서 40일동안 있으면서 사단에 의해 시험받았다는 것 2)예수가 들짐승과 함께 있었다는 것 3)천사들이 그에게 수종들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말들이 모두 성서의 상징어들로 되어 있어 그것들을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시험의 내용과 그 결과에 대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첫째로 ‘광야’의 상징적 의미는 이미 앞에서 썼거니와 ‘40’이라는 숫자는 구약에 하나님으로부터 벌받는 기간이나 금식하며 회개하면서 하나님과 긴밀히 사귀는 기간 등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이는 상징적 숫자이다. 그래서 가령 노아 때의 홍수가 40주야 동안 계속되었고(창7:12)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동안 헤메게 되었으며(출16:35/시95:10) 40녀 동안 블레셋 족속에 의해 고난을 받게 되고(삿13:1) 모세는 40주야 시내산에서 금식하며 하나님과 지냈고(출34:28/24:18/신9:9) 엘리야도 40주야 동안 광야를 지나 하나님의 산 호렙에 갔다(왕상19:8).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 시험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시험받은 것(신8:2/시95:10)을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그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시험에 실패하였다.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을 예수도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숙명에 대해 이스라엘과 같이 시험받은 것이다.
둘째로 예수가 들짐승과 같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분명히 에덴동산의 아담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를 낙원에 두시고 들짐승들과 새들을 만드셔서 그와 벗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그들을 다스리게 하셨다(창2:18-20).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아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고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그는 에덴에서 쫓겨났으며(창3:1-24) 유대 전승에 의하면 그때부터 인간은 맹수들에게 잡아 먹히는 두려움에 처하게 되었다(Apoc. Moses 10-11;Vita Adam 37-38). 그러기에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종말에 낙원이 회복되어 맹수들과 인간이 평화를 누리며 벗하게 될 것을 기대한 것이다(사11:6-8/65:25/호2:18-20/Apoc.Baruch 73:6). 아담은 사단의 시험에 실패하여 낙원을 잃어버렸지만 예수는 사단의 시험을 이겨 사단을 쳐부수었으므로 낙원이 회복된 것이다. 이렇게 여기서는 예수가 둘째 또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아담의 타락을 극복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에 평화(샬롬)가 지배하는 구원의 시대를 연 것으로 나타난다.
세째로 천사들이 예수에게 수종들었다는 말을 좀더 정확히 풀면 천사들이 예수에게 식탁에서(음식으로) 수종들었다는 뜻이 된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천사들의 음식을 먹고 살았다는 유대교의 전승(Vita Adam 4:1/ b.Sanh 59b)에 비추어 보면 이 말도 예수가 사단을 극복함으로써 낙원의 상태를 회복한 것을 나타내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올바른 관게가 회복되어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는 종말의 구원의 시대가 열린 것을 나타낸다.
유대교의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그들의 광야 생활 중 시내산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법의 계시는 두번째 창조의 사건과 같은 것이고 특히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계시 대 나타는 하나님의 영광은 첫 창조때 아담이 소유했으나 그의 불순종으로 잃어버린 영광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이렇게 회복된 영광과 그때 이스라엘에게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험에 져서 죄지음으로 또다시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종마에 메시야이 영도하에 새로운 출애굽의 해방과 구원이 이루어질 것인데 이것은 모세의 영도하에 이루어진 출애굽과 시내산의 계시의 사건과 같이 새창조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유대교 전승은 출애굽을 첫 창조와 비교하고 당시의 이스라엘을 아담과 비교하였으며 종말에 있을 메시야의 구원을 제2의 출애굽으로 기대하고 새창조로 기대한 것이다.
이 전승에 비추어볼 대 우리는 마가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시험기사 중 첫 마디와 둘째,세째 마디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다. 아담은 사단의 시험에 져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타락하여 낙원에서 쫓겨서 고통과 죽음의 시대를 열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은 아담이 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회복하는 구원을 체험했으나 그들도 아담과 같이 광야에서 시험에 졌으나 예수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여 사단을 극복함으로써 종말의 구원의 세대 즉 새창조의 시대를 연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이 회복되고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며 인간과 하나님의 피조물들간에 평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2)마태와 누가의 이야기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시험을 마가와 같이 시작하나 더 나아가 마가가 적지 않고 있는 시험의 내용과 예수의 응답을 적고 있다.
그들은 세가지의 시험에 대해 거의 일치하는 보고를 하고 있는데 작은 차이점들 중 보다 중요한 것은 둘째 시험과 세쩨 시험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마태에 의하면 1)광야에서 돌로 떡을 만들도록 2)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도록 3)높은 산에서 자기에게 절하여 세상의 나라들을 얻도록 하라는 순서로 시험했고 , 누가에 의하면 1)광야에서 돌로 떡을 만들도록 2)자기에게 절하여 세상의 나라들을 얻도록 3)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도록 하라는 순서로 시험했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마태복음에 있어서 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산상수훈 5:1 이하,산상대위임 28:16-20) 마태가 Q(마태와 누가의 공통자료)의 원래 순서를 바꾸어 여기 나타나는 시험의 산을 복음의 끝에 나타나는 대위임의 산과 대조시켰으며 예수가 만유 위의 주권을 사단에게 절하여 얻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얻게 됨을 극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더 많은 학자들은 마태가 Q의 원래 순서를 보존하고 있다고보고 누가가 그것을 바꾸었다고 본다. 누가복음의 대부분이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그의 메시야적 과업을 이루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도상에서 가르치고 행한 것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 사실이나(눅9:51 이하) 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이 구원사의 중심으로 묘사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실들에 비추어볼 때 누가는 이 시험 기사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의 시험과 예수의 사단에 대한 승리가 절정에 도달할 것으로 묘사하여 이 승리가 장치 예루살렘에서 있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최후의 승리의 징표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마태의 순저대로 세가지 시험들을 살펴보자.
①돌로 떡을 만들라.
40일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며 세례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소명에 대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할 끝에 예수는 배가 극히 고팠다. 이때 사단이 예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들이 되게 하라” 이 시험과 둘째 시험은 이렇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조건절로 시작함으로써 예수가 세례때 받은 하나님의 선포에 관한 것임을 알수 있다. 세째 시험은 그런 조건절을 시작하지는 안흥나 그 내용상 그것도 마찬가지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첫째 시험의 의미는 무엇인가?
1)어떤 이들은 이 시험을 당시 유대교에서 메시야 시대는 제2의 출애굽이 일어날 시대로서 첫 출애굽 시대에 일어났던 이적들이 또 일어나는 시대로 기대했던 점에 비추어 해석한다. 이 이적들 중 하나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첫시험은 예수로 하여금 돌들로 떡덩이들들 만듦으로서 메시야 시대에 기대되었던 만나의 이적을 행하여 만인이 인정하고 추종할 메시야(하나님의아들)가 되라는 것이라고 본다(T.W 맨슨, J.에레미야스,R.E.브라운) 예수가 광야에서 5000명을 먹였을 때 그 무리는 그가 메시야 시대의 만나의 이적을 행한 것으로 보고 그로 하여금 왕(곧 메시야)이 되도록 유혹하였는데 그가 그것을 뿌리쳤다는 요한복음의 기사(요6:31 이하)를 들어 이 해석의 옳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2)어떤 이들은 이 시험은 예수더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능을 하나님의 뜻을 쫓기보다는 스스로의 목적(베고픔의 해결 등)을 달성하는데 쓰라고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H.쉬르만,I.H.마셜,J.피츠마이어). 그렇다면 이 시험에서 사단의 의도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고자’한 아담같이(창3:5) 독립적인 권능을 가지고 자기의 뜻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메시야적 과업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려 한 것일 것이다.
예수는 이 시험에 신8:3을 인용함으로써 대항하였다. 신8장1-6절에서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데 실패하고 애굽의 고기와 가마와 떡을 염원하였을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순종하여 산다는 교훈을 주셨는가를 상기시키며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신8:3을 여기 인용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만나를 공급하여 주시리라는 그의 믿음과 그러기에 그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출4:22) 광야에서 하나님께 의존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여 떡의 문제로 인한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과 대조되는 종말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상이 잘 나타난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백성의 숙명을 완수하여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의 사랑하는(유일한) 아들임을 증명한 것이다.
이와같이 신명기 8:3을 인용한 예수의 대답은 앞의 두 해석중 후자가 더 옳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②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둘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말하고 시편 91장 11절 이하를 인용하였다. 여기서 성전 꼭대기란 보통 성전의 남쪽 외곽에 세워진 기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 기둥은 높은 절벽위에 세워져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지러운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험의 의미는 마귀가 시편92:11이하를 인용하고 예수께서 신6:16을 인용해 대응한데서 나타난다. 이것은 예수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리라는 약속을 지키시는지 안지시키는 지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예수가 첫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여 그의 메시야적 과업을 완수하겠다는 철저한 의지를 보이자 사단은 예수에게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신뢰할만하고 의존할만한가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에은 (출4:22) 출애굽의 구원과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시는(출16)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맛사와 므리바에서 물을 달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시험하였다(출17:1-7). 그래서 모세는 신6:16에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예수가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여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러므로 이 둘째 시험에서도 첫째 시험에서와 같이 하나님께 의존하는데 실패한 광야의 이스라엘과 성공한 예수가 대조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자기를 그의 아들로 부른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주된 뜻이겠으나 혹 부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지 모른다. 즉 마귀가 예수더라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과신하여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등의 무모한 짓을 하도록 충동하였는데 예수는 하나님의 관용을 시험하는 일이라고 일출해버렸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당시 모세가 출애굽 때 행한 표적들롸 비슷한 비범한 이적들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나선 자칭 메시야들이나 선지자들이 있었음에 비추어 이 두번째 시험을 마귀가 예수더러 성전 꼭대기에서 다치지 않게 떨어지는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그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J.피츠마이어). 어떤 이들은 이보다 더 나아가서 메시야가 성전 지붕위에 나타나리라고 기대한 일부 랍비전승에 의거해서 이 시험을 해석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시험 얘기에 관중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런 해석들은 옳지 않은 것 같다.
③나를 경배하고 세상의 왕이 되어라.
두 시험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마귀가 예수를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 그에게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는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것들을 다 주겠다고 즉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게 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온 세상의 통치권은 물론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 그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로 하여금 그 통치권을 대신 행사하게 하였다(창1:28-30).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서 곧 사단에게 스스로를 종으로 만듦으로서 사단에게 세상의 통치권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사단이 세상의 신 또는 이 세상이 왕(고후4:4/요12:31/14:30/16:11/ 요일5:19/계13:2) 이 되어 이 세상의 창조자로서 우주의 진정한 통치자인 하나님께 대항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야 곧 그의 아드레게 자기의 대권을 주시어 사단의 세력을 걱어 온 우주를 평정하려고 계획하셨는데(시2:8/단7:14) 예수의 세례때 그를 자기의 아들로 선포하고 그에게 대권을 주어 이 계획을 수행하게 하신 것이다(사11:27/눅10:2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여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야 한다. 그런데 사단은 예수에게 고난과 죽음을 거치지 않고 쉽게 세상의 주가 되도록 해주겠다고 제의하였다.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렇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통성이 없는 거짓으로 세상의 신 노릇을 하는 사단의 거짓 약속이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 같이 되게’해주겠다는 사단의 거짓말을 들음으로서 사단의 종이 되었지만 예수는 이 거짓 약속들 단호히 거절하였다. 예수는 신6:13절을 인용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드리고 그분만 섬길것을 다짐하여 사단을 물리쳤다.
이렇게 세번째 시험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의 직분을 감당하려는 예수의 의지를 꺾으려는 시도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가 세상의 왕권을 거부한데서 좀더 구체적으로 그가 당시 유행하던 메시야 사상에 의해 이방민족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에게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 줄 군사적, 정치적 왕이 되라는 유혹을 받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사단의 꾀를 쫓는 것이라고 배격한 것으로 본다(J.예레미야스).
이시험에서는 예수가 주로 아담과 대조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가 신6:13을 인용한 것은 가나안의 신들에 매혹되어 방황한 광야의 이스라엘(신6:10-15/12:3-31)과도 부차적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④요약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이 새 시험들은 한결같이 세례 때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학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하고 순종하려는 의지를 약화시켜 메시야적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시도였다. 예수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높은 지위와 그에 딸린 권능을 이용하여 스스로의 뜻을 도모하고 세상의 메시야적 왕까지 될 수 있다는 제안을 마귀의 유혹으로 보고 물리치고 세례 때 그를 자기 아들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 곧 ‘주의 고난 받은 종’으로서 스스로를 속죄와 새언약을세우는 제물로 바쳐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여야 하는 메시야적 사명에 충실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기에 J.예레미야스는 예수의 시험기사의 진정한 의미를 예수가 그의 세례 때 받은 하나님의 소명에 ‘네 아버지의 뜻대로 주의 종의 역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소명에 충실하고자 하는 예수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의존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이스라엘과 더 멀리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며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은 자로서의 그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담과 대조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태와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의 시험기사는 마가복음에 없는 시험의 내용을 담고 있으나 예수의 시험의 이미에 대해서는 마가의 짧은 기사와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태초에 사단의 시험에 져서 인류를 사단의 굴레에 떨어뜨린 아담과는 달리 그 재아을 뒤집어야 했으나 하지못한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과도 달리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하고 순종하여 스스로를 속죄와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로 바쳐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의 소명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주의 고난받은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인류를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에서 속량하여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밑으로 데려오고 그렇게 하여 사단의 통치를 종결짓고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인류와 온 우주에 하나님이 창조때 의도한 샬롬을 회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소명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3)시험의 결과
예수는 세례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충실하고자 하는 결심을 보임으로써 사단의 시험을 극복했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에 의해 일격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례 때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성령의 힘으로 악령들의 괴수인 사단을 극복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막3:27(=마12:28/눅11:21-22)에서 예수그 그 시험때의 승리를 은유하고 있다고 본다.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신학자들)이 예수가 귀신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자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고 반박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 그의 세간을 털려고 할 때 먼저 그 힘센 자를 묶지 않고는 할 수 없다. 그를 묶은 후에야 그의 집을 털 수 있다” 이 비유로 예수는 그가 힘센자 사단을 묶었기데 그의 권속인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그가 사단으 언제 묶었단 말인가? 이것은 확실히 예수가 그의 시험 때 사단을 극복한 경험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예수는 그의 시험 때의 승리를 사다늘 묶은 거승로 보고 그후 그가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귀신 쫓아내기와 병자 치유 등의 사역은 사단의 집을 노략질하여 가는 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4)시험 사건의 성격
예수의 시험기사는 예수의 실제 경험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교회가 후에 지어낸 설화라고 주장하는 과격한 학자들도 더러 있지만(R.불트만) 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게 들려준 자기 체험에 근거한다고 본다(J.예레미야스,J. 뒤퐁,I.H.마셜,J.피츠마이서). 그러나 이 시험 기사가 문자 그대로 일어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기보다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고 선포된 후 광야에서 자기의 메시야적 과업에 대해 묵상하여 준비할 때 환상중에 한 체험을 극화하여 이야기한 결과일 것이다. 이 체험이 환상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것은 마4:8(=눅4:5)이 암시한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굽어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산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으며(마4:8) 설령 그런 산이 존재하여 예수가 그 산위에 올라갔다면 그 아래 나라들을 그에게 순식간에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눅4:5). 우리는 이 환상과 관련된 예수의 심리상태를 분석할 수는 없다. 다만 예수가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소명에 대해 묵상하고 그 사역을 준비할 때 이 환상에서의 체험과 같이 사단이 제시하는 길을 가도록 유혹을 받았는데 그것을 물리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여 자기의 메시야 사명을 완수하려 결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5)계속되는 시험과 투쟁.
예수가 광야에서 사단에게 일격을 가하고 그를 묶었다고 하나 사단은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사단은 예수의 사역기간에 줄곧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유혹하여 그의 메시야적 과업을 사단과의 투쟁으로 보고 사단의 세력을 꺽어 하나님의 주권(하나님 나라)을 확립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사실은 막8:27-33(=마16:13-23=눅9:18-22)에 잘 나타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를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하였다. 예수는 이 고백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어떤 메시야인가를 설명하였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 의해 버림받아 죽음을 당함으로써 자기의 메시야적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베드로는 이러한 예수께 반발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광양에서 시험때 외쳤던 것과 같이(마4:10)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네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누가’라고 꾸짖었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 예수가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메시야의 과업을 완성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을 설명하자 베드로는 예수께 이에 반하여 당시 널리 기대되었던 군사적 정복자,정치적 왕으로서의 메시야가 되기를 바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예수가 이런 바람을 나타내는 베드로의 음성을 하나님게로부터 그간 세례 때 받은 주의 ‘고난받은 종’으로서의 하난미의 아들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그를 광야에서 유혹하였던 사단의 목소리를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는 극단의 반응을 보인데서 이 시험이 예수께 얼마나 절실했는가를 짐작할 수있다. 그러나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를 통한 사단의 또한번의 유혹마저도 물리쳤다.
요6:15-과 7:1-4절도 비슷한 시험과 예수의 일관된 응답을 반영하고 있다. 히브리성의 기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시험받은 사실을 그의 제사장 기독론 전개에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한다(히2:17/4:15).
이렇게 한편으로는 그의 메시야적 사역 즉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내며 병자들을 치유하는 것을 통하여 사단의 세력을 꺾어갔다(막3:27/마12:29?눅11:21-22). 예수는 자기의 이 사단과의 투쟁에 자기 제자들도 참여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내며 병자들을 치유하도록 유대의 각처에 보냈던 70명의 제자들이 그에게 돌아와 그들이 성공적인 선교를 보고했을때 그는 말하기를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10:18)’고 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그의 제자들을 시험에 빠뜨리고(눅22:31) 끝내 유다를 조종하여 예수를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넘겨주도록 하고(눅22:3)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막14:32-42/마26:36-46/눅22:40-46) 십자가에 못박힌 뒤까지(막15:30-32/마27:4-44)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주의 고난 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하는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광야에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그 시험을 극복한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함으로써 ‘주의 고난받은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죽기가지 순종할 것을 다짐하였으며 드디어 십자가에 스스로를 속죄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로 바쳤다.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게 한 것이다(마28:18/롬3:4/빌2:9-11/히1장)
(6)예수 우리의 모범(?)
이상의 토론은 예수의 시험이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메시야적 사명을 완수하도록 부름받은 예수에게만 독특하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주로 기독론적-구원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시험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시험기사의 배격을 이루는 아담이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비슷한 시험을 받는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응답은 역시 그런 이차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가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번 사단의 시험에 대응한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익혀 그의 뜻을 잘 알아서 시험에 대처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예수의 시험기사의 이런 모범적 성격은 특히 마태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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