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백성의 회복을 위한 내면세계의 회복 No. 19 굶주린 마음 ②
굶주린 마음과 기복신앙
거짓신앙체계는 종교적인 모양은 기득하나 그 실체가 없는 신앙관입니다. 거짓신앙체계는 기복신앙, 인본주의, 율법주의 신앙관을 말합니다. 이 중 기복신앙은 인간의 굶주린 마음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집니다.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인간 스스로 만든 신앙관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복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살피겠습니다. 흔히 복을 자주 말하면 기복신앙이라고 생각하며 복을 말하지 않으면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복신앙이란 복을 강조하건 하지 않건 상관없는 거짓신앙체계입니다. 왜냐하면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신앙관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신앙체계로서의 기복신앙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수단된 삶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복을 강조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기복신앙이란 우리의 신앙이 타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의 모양은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을 삼는 신앙관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창조주가 수단으로 전락된 삶입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이란 말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자원, 하나님의 방법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되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특징이 하나님 중심적인 삶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반면 신앙이 타락하면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타락의 본질 즉 죄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데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삶 또한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목적, 자기자원, 자기방법이 그것입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자원으로 살되 자기 방법대로 사는 삶이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전자가 구원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죄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매우 타락한 사람입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신앙 곧 하나님 중심적인 삶 가운데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의도하신 생명이 넘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면 그곳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게 됩니다. 있던 생명마저도 고갈되어 버립니다.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그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으로 부터 삶이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 그는 만일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삶에서부터 시작하면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할수록 참된 신앙은 자취를 감추며 거짓신앙체계가 전면에 나섭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거짓신앙체계가 판을 칩니다. 참된 신앙과 하나님과 올바르게 동행하는 삶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반면 거짓신앙체계와 신앙의 타락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거짓신앙체계에 있으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나 동행하는 삶을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만일 신앙이 회복되려면 거짓신앙체계를 벗어나는 일이 있어야 하며 참다운 신앙으로 돌이켜야만 신앙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기복신앙의 좋은 예가 예레미야서에 나옵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영적으로 볼 때 지극히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이 오랫동안에 걸쳐 그들의 타락을 경고하시고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이키시려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았던 결과 실제로 심판이 임했던 시대였습니다. 이를 보더라도 영적으로 소경된 시대였음을 알 수 있으며 시대말적인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간 시대입니다. 엄청난 시련과 고통이 임했던 시기였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어떻게 보셨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위 구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시대가 하나님을 버린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나를 버린 것과”가 뒷받침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스스로의 신앙을 만든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가 증거 합니다. 거짓신앙체계의 특징들이 가득하였던 시대임을 한 눈에 알아 챌 수 있습니다. 참고로 2장 말씀을 더 읽겠습니다.
[15]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 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하였으며 [17]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18] 그러므로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19]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여러분, 거짓신앙체계가 가득하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힙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을 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죄악의 본질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수가 없어집니다. 기복신앙의 문제점은 본인들은 모르기 때문에 심각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하나님을 버린 시대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임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만납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수많은 희생 곧 제사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엄청난 섬김과 예배,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레미야 6장에서 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시바는 학자들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개 중동부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내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인접한 예멘 남쪽을 말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엄청나게 먼 곳입니다. 원방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도를 지목합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거리나 가격이 문제 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분명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6장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절인 13절에서 심판하시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여기서 우리는 심판의 이유가 탐남과 심상히 상처를 치유하며 평강을 외치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의 모습들입니다. 우선 알 수 있는 사실은 당시는 거짓이 난무한 시대였다는 점입니다. 우선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모두가 다 거짓을 행했다고 위 구절은 전합니다. 아마 선지자를 작은 자로 비유하고, 제사장을 큰 자로 비유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제사장이 선지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단지 총체적으로 다 거짓을 행했다는 점을 부각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 등장하는 선지자나 제사장들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제사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을 행하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여기 나오는 거짓 선지자나 거짓 제사장들은 본인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외부 사람들 생각하기에도, 일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도 추앙받고 존경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정받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두고 거짓을 행했노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기복신앙의 모습이 거짓에 있기에 거짓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보고 거짓을 행했노라고 말씀하신 첫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거짓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은 백성들의 상처를 심상히 고친 거짓입니다. 심상히 여겼다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레미야 당시의 영적인 형편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버렸기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임재가 함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실재와 임재가 함께 있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있지 않으면 절대로 승리하는 삶은 살 수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영적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레미야서 전체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분위기는 엄청난 억압과 죄입니다. 생수의 근원을 버렸으니까요. 우상숭배가 만연하였고 가정들이 파괴되고 있었고 온갖 세상 사랑함이 삶 속에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말은 많았지만 하나님의 실재는 전혀 경험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백성들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마치 암이 온 몸에 퍼져 죽을 날만 기다리는 말기 암 환자의 모양새였을 것입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을 정도가 이사야 시대라면 예레미야 시대는 훨씬 더 병이 깊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설교했습니다. 암이 온 몸에 퍼져있는데 소독약 발라주며 나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거짓을 행했다고 말씀하신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평강을 외쳤다는 것입니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를 외쳤으며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그들이 거짓을 행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화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평강이나 평화 같은 말입니다. 그저 마음속의 평온한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평화 즉 평강이람 함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심으로서 우리 삶에 전 영역에서 하나님은 생명과 은혜와 실재가 넘치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평안이란 단어나 복이란 단어나 생명이라는 단어가 같은 맥락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버렸으니 무슨 하나님의 실재가 있었겠습니까. 생명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억압이 있습니다. 죄가 만연합니다. 국가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입니다. 심판을 코앞에 있고 죄악들이 난무하고 우상숭배가 가득합니다. 평안이 없어요. 그런데도 선지자들은 평안하다고 위로하며 백성들을 안위시킵니다.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소리칩니다.
문제는 이들이 나름대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평강을 외쳤다는 점입니다. 교리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에 다윗의 왕위와 자손과 나라에 영원한 평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지금 왕이시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기억하사 당연히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분명 평강이 없었는데도 그들은 한 결 같이 평강을 외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 이유를 탐남에서 찾습니다. 6장 13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여기서 탐남은 탐심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는 평강을 외쳐야 인기가 있었고 사역이 확장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그래야만 자신에게로 몰려왔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니은 거짓을 행했다고 말씀합니다. 평강을 외쳐야만 사람들이 몰려오고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사역의 확장을 위해서 영적 상태가 매우 심각한 상태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고립된 상태에서 인용하여 믿음으로서 평강을 외쳤습니다. 모든 일들이 잘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줄기차게 전했던지 성경도 반복적으로 평강을 기록합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왜 평강의 메시지를 듣기 원했을까요?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닌데 말입니다. 역시 탐심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에덴을 떠난 후 굶주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뿐이라고 말입니다. 기복신앙은 인간의 굶주린 상처를 하나님을 수단 삼아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채우는 신앙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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