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백성의 회복을 위한 내면세계의 회복 No. 16 버림받은 마음(소외감) ⑤
버림받은 마음(소외감)의 원인 ③ - 또 다른 요인들
(4) 일관성 없는 행동
태어난 후 살아가면서 인간은 관계를 갖게 됩니다. 특히 가족 간에 갖는 관계는 버림받음과 깊이 연관이 되게 마련입니다. 대개 가족 간에는 마음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마음 문을 열고 만나는 가족에게서 실상은 가장 많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여기서 부모님이 일관성 벗이 자녀들을 대하는 경우 상당수의 자녀들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대개의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잘해준 것만을 기억합니다. 잘못한 것은 기억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자식들도 부모가 잘해준 것은 기억을 못하고 잘못한 것만 기억을 합니다. 한 번 폭발하여 무지 야단맞은 것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분노가 폭발 잘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에게 잘 해주는 것이 오히려 두렵습니다. 언제 또 폭발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폭발하며 말합니다. “야, 임마,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말을 안 듣는 거냐?” 그러나 아이에게는 부모가 잘해준 것이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폭발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일관성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에게서 정신병자가 많이 생깁니다. 목소리 크게 내지 마십시오. 정말 목소리를 크게 내어야할 필요가 있으면 서서히 높여 가야합니다.
체벌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미리 경고를 주십시오. 벌을 미리 예비하면 그만큼 상처가 적습니다. 아이가 미리 벌을 준비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왜 벌을 받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옐로우 카드나 용서로 안 되니까 야단치는 것을 분명히 하십시오. 폭발은 교육이 아니라 버림받음입니다. 상처입니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행동이나 말은 부모와 자식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치유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직장 상사의 일관성 없는 말과 행동은 부하 직원들에게 불안심리를 형성시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일관성 없는 사람들과 함께 근무하거나 사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상처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하여 사는 법을 배우십시오.
(5) 과잉보호
사람들은 흔히 보호 속에 살면 버림받음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받을 만큼의 보호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보호는 개인에게 해가 됩니다. 과잉보호란 개인이 독립체로서 자립하고 성장해야 하는데 계속되는 보호로 성장에 방해가 되는 필요이상의 보호를 말합니다. 보호가 있어야할 시기에 보호가 없는 것도 버림받음이지만 보호가 줄어들 시기에 굉장한 보호가 있다면 그것도 버림받음의 원인입니다.
요즈음 젊은 부부들은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자녀들을 과잉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리스도인들은 자식들이 삐뚤어지게 자랄까봐 과잉보호를 일반인보다 더 많이 합니다. 교회 밖 세상이 무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 과잉보호 합니다. 왜 믿지 않는 사람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녀들을 과잉보호를 하는 걸까요? 이유는 부모들의 충족하지 못한 욕구 때문입니다. 부모들의 결핍부분 때문에 합니다. 주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들이 과잉보호를 합니다. 특히 어머니가 어려서 아버지가 안 계셨다던지, 아버지가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해서 어머니가 고생했을 때, 대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결혼하면 강한 남자나 생활력이 있는 남자하고 결혼하리라.” 이런 경우,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강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강한 남자하고 결혼해서 꽉 쥐여 살면서 고생하는 경우가 그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욕구가 너무 강해 남자가 눈에 안차는 경우입니다. 남들이 보면 남자가 그 정도면 아주 괜찮은 데도 눈에 안찹니다. 인정을 못해요. 남자가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구박합니다. 회사에서 조금만 꾸지람을 듣고 와도 무슨 남자가 그 모양이냐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무슨 남자가 쫀쫀해가지고 어디에 쓰겠느냐고 야단을 칩니다. 남자도 집에 오면 위로받고 싶은데 격려는커녕 아내는 화를 냅니다. 피곤한 자신에게 정신차리라고 소리칩니다. 남자는 기가 죽습니다. 무능해 집니다. 적응력이 떨어집니다. 남자가 비실해 집니다. 부인은 답답합니다. 그러다가 자식새끼를 바라봅니다. “아하, 요녀석은 조금 빠릿빠릿하군. 요녀석을 잘 키워야겠다.” 이런 생각 속에서 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한을 아이에게 풀기 시작합니다. 3학년 아이에게 5학년 것을 배우게 합니다. 온갖 것을 다 가르칩니다. 엄마의 결핍부분을 자식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자들은 아버지에게서 보았던 부도덕한 부분을 남편이나 자식에게서 보면 무지하게 화를 냅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아니, 당신도 사람이야!” 화를 냅니다. 남편이나 아이가 완벽해 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얘들이 거짓말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무질서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여자의 마음속에 치유되지 못한 아픔이 있기 때문에 자식에게서 그런 것들이 보이면 용납을 못합니다.
과잉보호를 하게 되면 아이가 하는 것이 신통해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자기가 다 해버립니다. 아이가 실수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과잉보호 받는 아이에게는 선택권이 없어집니다. 여기다가 아이는 버림받지 않으려고,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으려고 어머니가 시키는 데로 다 합니다. 겉으로 보면 근사해 보이는 부모자식 간의 장면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두려움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아이에게는 부담스러운 짐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어머니에게 야단맞는데…” 생각하는 짐입니다. 인격이 성장하질 못합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화를 내는 어머니가 무섭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한, 남편에 대한 한을 푸니까 아이가 위축됩니다. 능력이 있는데도 모든 짐이 무겁게만 느껴집니다.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인격이 자꾸만 찌그러듭니다. 열등감이 생깁니다. 자신감을 상실합니다. 커가면서 어느 날 와르르 무너집니다. 1등을 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집니다. 갑자기 꼴찌로 전락합니다. 이를 본 엄마는 엄마대로 실망합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이에게서 엄마는 엄마대로 버림받고 아이는 아이대로 버림받습니다.
과잉보호는 이처럼 아이의 미성숙한 부분들을 받아들여주지를 않은 결과입니다. 아이를 인정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자식을 포로나 노예로 삼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과잉보호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커서 부모나 사회에 반발하게 됩니다. 평생 부모에게 덤벼듭니다. 과잉보호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어렸을 때 자신이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가 쉽습니다. “오, 주여, 내가 버림받았나이다,” 하나님께 나아오기가 쉬워집니 다. 그러나 과잉보호 속에서 자라난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버림받음이 무언지를 잘 모릅니다. 스스로 사랑을 많이 받은 줄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혼돈 속에서 살아갑니다.
과잉보호,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먼저 부모가 자신의 문제를 알아야합니다. 자식을 고쳐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콤프렉스를 고쳐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아이의 미성숙하고 실수하는 부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필요한 시기에 우리를 과잉보호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는 과잉보호는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과잉보호는 절대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반면 하나님의 과잉보호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과잉보호는 자녀에 대한 불신이 원인이지만 하나님의 과잉보호는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시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옆에 나타나시지 않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지하여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과잉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는 과잉보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 시 이스라엘의 믿음을 보시기 원하셨습니다. 점탐군을 보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에 나아갈 때 믿음이 가나안을 정복하도록 하셨습니다.
(6) 비교의식
비교의식이란 상대적인 거절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남자냐 여자냐, 첫째냐 둘째냐 하는 것으로 한쪽을 거절하는 의식입니다. 속담에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라는 말도 비교의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형제들끼리도 누가 잘되면 질투하다가 그 형제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죽일 듯이 험담합니다.
주변에서, 누구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처를 주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미움을 받았던 일들이 전에는 많이 있습니다. 남편에 대한 미움이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로 자식에게 폭발합니다. 어쩌다가 자식이 거짓말하다가 들통나면 그것도 아버지를 닮아서 거짓말한다고 야단합니다. 사실 아이 때 거짓말을 할 수 있는대도 “너도 아빠처럼 될래?” 소리칩니다. 아이는 놀래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미워하게 됩니다.
어떤 여자아이는 걸음걸이가 시어머니와 비슷하다고 매일 야단맞습니다. 어머니가 그 여자아이만 미워합니다. 걸음걸이 때문입니다. “어떻게 너는 네 할머니와 똑같으냐? 짤룩짤룩 걷는 게 에이 보기 싫어” 한대 때려도 될 일을 열대 때립니다. 보통 때리면 될 일인데 아주 세게 때립니다. 미운 시어머니 닮은 자식은 이유 없이 맞고 세게 맞습니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 그 집 아이보고 누구 닮았다는 이야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소리 듣는 아이는 크게 상처 입을 수도 있습니다. 분위기 보면서 말해야 합니다. 무난한 말은 이것입니다. “아빠 엄마 반반 닮았네.”
(7) 자범죄
자범죄 때문에 버림받음이 생겨납니다. 자범죄는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원죄와 달리 이 세상을 살면서 짓는 죄입니다. 자범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습니다. 자범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사람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죄를 가능한 짓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음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죄를 지으면 빨리 주님께 고백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밑에 가져가야 합니다. 버림받음이 우리 마음속에 생겨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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