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백성의 회복을 위한 내면세계의 회복 No. 15 버림받은 마음(소외감) ④
버림받은 마음(소외감)의 원인 ② - 환경적인 요인
(2) 태어난 후의 버림받음
인간은 태어난 후, 사랑을 접해야만 합니다. 또한 접촉을 통해 인정과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버림받음의 기억과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에 부모님께서 몸이 아프셨거나, 일찍 돌아가신 사유로 상처를 받는 경우입니다. 인간은 태어난 후 부족하고 무력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손과 발이 되어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었던 환경으로 인해 상처를 받습니다. 어릴 적 결손과 가난, 질병 등은 버림받음의 상처로 남게 됩니다.
가끔 길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큰소리로 우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그 아이들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엄마! 엄마! 하면서 정신없이 길을 헤맵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얼굴입니다. 흔히 엄마들은 장난으로 숨기도 하는데 이런 장난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엄마들이 어린 아이를 두고 이런 짓궂은 장난을 합니다. 재미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엄마! 엄마! 우는 아이의 모습. 우리는 이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이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을 본 후에 통곡하며 울었다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한 주부는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다가 쓰레기통 안에 버려진 어린 아이 모습이 보여 자세히 보았는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 같은 물체를 성령께서는 자기의 모습으로 보게 역사하시기에 막 통곡하게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어릴 적 기억이 나는 것도 아닌데 성령께서 통곡을 시키신 것입니다. “종아, 저게 바로 네 모습이란다.”
간혹 우리는 기도하다가 감당할 수 없는 통곡 속에 빠져드는 경험을 합니다. 성령께서 통곡 속에다가 우리를 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으면서 대개 있습니다. 대개 예수를 알고 나서 곧바로 통곡하는 경험을 합니다. 어떤 이는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구 뒹굴면서 회개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처음 믿던 때가 머릿속에 떠오르곤 합니다. 특히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통곡했던 기억이 잘 떠오르곤 합니다. “하 참 신기하다.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울 수가 있었을까?” 의아해 합니다. 궁금하신가요? 답은 하나입니다. 성령께서 의식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죄를 깨달음으로 인한 통곡이었지만 배후에는 성령께서 본인도 알지 못하는 세계까지 드러내시면서 통곡시키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아시지요. 그는 배반 후에 통곡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예수를 배반했기 때문에 회개하며 울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는 않은 겁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본 것입니다. 자기-의로는 설 수 없는 자신, 어떤 선한 능력도 없는 자기 자신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다시피 베드로는 평소에 주님을 부모처럼 믿고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거기다가 베드로에게는 성령님의 특별한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음을 말할 때마다 자꾸만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차츰차츰 불안해졌습니다. 분리불안심리가 형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버림받음의 상처가 드러난 것입니다. 소외감, 분리감이 베드로를 자꾸 자극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베드로에게는 어릴 때부터 받았던 분리에 대한 상처들이 자극되어 떠올랐습니다. 베드로는 전과 달리 자주 흥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래 차분하고 보수적이었 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자극되면서 우왕자왕 합니다.
베드로의 분리불안심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절정에 다다릅니다. 그리곤 마침내 주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부인한다는 것은 완전한 버림받음을 의미합니다. 곧 주님과 완전히 분리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 후에 베드로는 생각했을 겁니다. “아, 내가 십자가를 주님과 함께 졌더라면 주님께로부터 버림받지 않았을 텐데.” 자신을 생각하기를, 두려움 때문에 부인하였고 이제는 주님과 완전히 등진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음에도 그가 고기 잡으러 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베드로의 통곡 속에는 죄책감과 함께 심한 버림받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어릴 적 큰 상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그가 더 이상 자기-의를 의지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이상하게도 생일만 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태어날 때,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 전도사 시절 중고등부 아이들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 아이들의 노래 가사 말이 너무 섬뜩해서 여기 적어봅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우리는 기도할 때, 다 기억을 못하지만 자신의 깊은 곳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속에 숨어있는 버림받음의 상처들, 어려서 받은 분리됨의 상처들을 고쳐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 주여 나를 고쳐주소서.
(3) 부모님의 영향
저희 세대 부모님들께서는 힘든 세상을 사셨던 분들입니다. 살기가 어려워 생존에 급급하셨던 세대를 살아오셨습니다. 일제 강압시대, 한국전쟁, 분단의 아픔, 가난 등등으로 대변되는 시대를 사셨습니다. 자녀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우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살기 바쁘다보니 부모님들은 속에 짜증이 가득 차 있었고 자녀들에게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의 기쁨이 부모의 기쁨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자식의 슬픔이 부모의 슬픔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냥 자기들끼리 자라는 거야” 아니면 “있으면 있는가 보다” 하시면서 자식들을 키우셨습니다. “밥이나 주고 학교나 보내면 되지” 하시면서 자식을 돌보셨습니다. 부모님들은 이처럼 짜증과 피곤함 속에서 자식들을 교육하셨기 때문에 자식에게 부정적이셨습니다. 인정을 하기보다는 지적을 잘 하셨습니다. 자신들부터가 칭찬보다는 꾸중을 들 으며 자라셨기 때문에 칭찬하실 줄을 잘 모르셨습니다. 간혹 우리들이 무얼 하려면 야단부터 치셨습니다. 늘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자랄 때만해도 식구가 많았습니다. 보통 5남매 아니면 7남매였으니까요. 어떤 부모님은 자식들이 누가 누군지를 잘 모릅니다. 누가 몇째인지 몇 학년인지 잘 모르셨습니다. 생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저희 세대들은 상처 아닌 상처 속에서 자랐습니다. 아니 어떨 때에는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상처를 상처로 생각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어릴 적 환경은 상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저희 세대들 어렸을 때, 자녀들은 일찍부터 밖으로 나돌았습니다. 집 밖에서 자기를 인정해 주는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일찍부터 인정받고 사는 법을 터득하였습니다.
인정받고 사는 법과 관련된 예화들을 소개합니다. 차남이 어느 날 산수 시험 100점을 받아왔습니다. 부모님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칭찬을 하셨습니다. 장남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부터 차남은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내 살길은 공부다!” 공부를 파고듭니다. 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에게 사람들이 자꾸 예쁘다고 칭찬합니다. 딸은 생각합니다. “그래 아빠도 다른 형제는 안 데리고 다녀도 나는 꼭 데리고 다니셔.” 더욱 예뻐지려고 기를 씁니다. 사실 공부를 잘 한다던가 예쁘다던가 하는 문제는 인생을 살면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이 30만 넘으면 그 얼굴이 그 얼굴입니다. 여자들은 참 이상해요. 다른 사람 착한 것은 좋아하면서도 자기 남편 착한 것은 못 봅니다. 맨 날 떼이기나 하고 주기만 하는 남편 꼴을 못 봅니다.
옛말에 “가운데 자식 덕 본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왜 그런 속담이 생겼을까요? 생각해 봅시다. 가운데 자식은 대개 일찍부터 밖에 나가서 사는 법을 배웁니다. 장남이나 막내는 부모님들이 맨 위니까 잘해주고 맨 아래니까 잘해줍니다. 가운데는 끼어 있어서 별 존재도 없이 자랍니다. 그러니 일찍부터 밖으로 돌아다닙니다. 집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밖에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밖에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법입니다. 집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가운데 자식은 바깥에서 일찍부터 사는 법을 터득하여 형제들 중에서 비교적 일찍 성공합니다. 그들은 분리의 아픔이 무언지 알고 있기에 부모님을 잘 모시려고 하는 태도를 가집니다. 특히 장남인 형이 부모님을 등한시하면 이런 태도는 더욱 끌어 오릅니다. 옛날 부모님들은 외모적인 조건 하나 때문에 자식의 인격전체를 무시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부모의 욕심과 기준에 맞추어 자식을 키우려들기에 그 기준에 못 미치면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전체가 버림받음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사회의 기준과 편견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실력이 있어서 한순간에는 사회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켰지만 언젠가는 자기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진 자에게 자기자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한순간에는 사랑과 존경을 받았을지라도 항상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요즈음에는 이러한 버림받음이 더 가속화되는 것 같습니다.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45년이 정년퇴직하는 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56세가 되도록 직장에 다니고 있으면 그 사람은 도둑놈이라는 의미가 ‘사오정 오륙도’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정년퇴직이라니요, 말도 되지 않는 현실이 지금 저와 여러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하나님의 보호막이 떠나 있는 것과 맞물립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여 세워지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젊을지 모르지만 젊음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똑똑할지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똑똑할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은 예쁘지만 언제까지고 예쁠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은 건강할지 모르지만 항상 건강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떻게 내가 항상 건강하고 항상 똑똑하고 항상 모든 지식을 알아야 하고 항상 착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어쩌다 거짓말하면 어쩌다 실수하면 어쩌다 약해지면 사회는 가차 없이 나를 버리고 내 자리를 타인에게 줍니다. 이것이 사회의 버림받음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는 합법적으로 인간을 버립니다. 지금은 사회가 나를 좋아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곧 내가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사회는 나를 버릴 것입니다. 아, 이 비참함, 이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 가수나 배우들을 보십시오. 눈부신 스타가 탄생하였지만 인기는 짧습니다. 요사인 길어야 1년이라고 합니다. 심심찮게 스타의 자살 소식을 접합니다. 왜요? 혹 사람들이 자기를 버릴까봐 그들 속은 불안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 이 사회의 주인공들은 40대나 50대입니다. 그러나 10년만 지나면 다음 세대에게 밀려납니다. 60이 되고, 70이 되면 그만큼 버림받습니다. 10년만큼 버림받고 20년만큼 버림받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늙고 병들면 버림받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병들어 보세요. 곧바로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괜히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버림받지 않으려고 돈에 집착합니다. 건강에 집착합니다. 하나를 잃어버리면 다른 것에 애착을 가집니다. 왜요? 다른 것을 가지고 인정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자식을 묶어두려는 부모들을 볼 때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인간은 반드시 버림받습니다. 차갑게 버림받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뒤에는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서 단물을 다 빨아먹으면 우리를 차버립니다. 지금 나를 올려주고 있으니까, 나를 인정하고 있으니까, 높여주니까 착각하면 안 됩니다. 마귀는 무서운 놈입니다.
일본사회는 참으로 부지런합니다. 타인에게 윤리적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쓸모가 없어진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냉정한 사회가 일본사회입니다. 비록 부모라 할지라도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버려집니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부모님이시기에 아무리 망나니라 할지라도 용납이 되는데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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