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재물 주제에 관한 연구
1. 들어가는 말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누가복음이 재물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학자들 사이에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1) 그러나 한편으로 안타깝게도, 공관복음의 두 책인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재물 주제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많은 연구가 없어 왔다. 물론 재물 주제가 복음서 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은 분명 아니지만, 인간 생활에 있어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부임에 틀림없는 재물에 대한 논의는 매우 유익한 연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을 보여주고 있는 복음서에서 주님이 재물에 대하여 주신 교훈이나 재물과 관련하여 보여주신 태도에 대한 연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값진 가르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제까지 많은 연구가 되어왔던 누가복음을 제외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비록 그것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이 재물 주제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결과를 누가복음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공관복음의 재물 주제를 총체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본 연구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특별히 공관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재물 관련 기사 하나를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부자 청년의 기사(記事)]이다(막10:17-31 / 마19:16-29 / 눅18:18-30). 이 기사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기록되어있는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세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모두 나타나고 있기에 그 중요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영생의 길을 알고자 하는 부자 청년에게 먼저는 성경(당시는 舊約)에 나타난 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청년은 이를 어려서부터 다 지켰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주님께서는 그에게 부족한 한가지를 지적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가진 재물을 다 판 후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따르다 또는 좇는다"(akoloutheo)란 말은 당시 유대교 문헌 등에서도 확인된 바와 같이 그 자체가 제자 됨을 의미하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한 개인에게 특별히 "좇으라"는 명령을 한 경우는 전부 두 번인데, 여기에서와 레위, 즉 마태에게 대해서이다. 여기서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한가지 주목해야 될 것은, 공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재물관계 자료의 대부분이 사실상 제자도(弟子道)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먼저 마가복음 1장 16-20절에서 예수님은 네 명의 첫 번째 제자들, 즉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와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다. 그 때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1장 18절에 의하면 배와 그물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나섰다. 누가복음 5장 1-11절에서 누가는 동일한 사건을 묘사하면서 11절에서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기록하였다. 누가복음 5장 27-28절을 보면 레위, 즉 세리 마태를 부르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부르시자 레위는 엮시 최초의 네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좇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마가복음 10장 28절에서 베드로가 "주여, 우리는 우리의 다 가진 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최초의 네 제자와 마태 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모든 제자들도 가족과 재산 등 자신의 소유 전부를 버리고 주님을 좇았던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33절에서 "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진 바 모든 소유 및 재물을 무조건 포기해야 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부자 청년의 기사]를 통해 균형을 찾게 된다. 즉, 이 기사에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이 무조건 재물을 포기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 후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무조건적인 재산의 포기가 제자도의 요건(要件)이 아니라, 그 재산의 의미 있는 포기, 곧 구제(救濟)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살아 생전에 주님을 따르고자 했던 역사적 제자들에게 재물 문제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요구하셨던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러면 재물 주제와 관련하여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2. 마태복음
일반적으로, 마태복음에는 재물 주제와 관련된 말씀들이 많지 않으며, 또한 누가복음에서 자세하게 발견되고 있는 바 부자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약화시키는 말씀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2) 재물 주제에 관한 마태의 견해를 얻기 위하여, 아래에서 우리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재물 주제와의 비교를 통하여 마태복음에서 드러나는 현저한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마가복음과의 비교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재물 주제의 견지에서 마태복음을 마가복음과 비교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1) 마가복음에 보존되어 있는 탐욕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마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15.19)3);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막7.21-22).
(2) 탐욕의 생략은 주께서 십계명을 소개할 때도 마가복음에는 보존되어 있는 반면에 마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다: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19.18-19//막10.19). 즉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속여 취하지 말라"는 구절이 마태복음에는 빠져있다. 마태복음에서 탐욕에 관한 언급이 이처럼 생략되어 있는 것은 재물 주제를 다룸에 있어 마태가 마가보다 온화(溫和)하다, 즉 부(富)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3)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부르신 기사와(마19.16-22//막10.17-22) 부자의 천국 들어감에 관한 말씀에서, 우리는 또한 마태와 마가 사이에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마태가 '소유'(19.21)와 '부자'(19.23)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마가는 '네 있는 것'(10.21)과 '재물이 있는 자'(10.23)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마태는 마가처럼 직접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역시 부자에 대한 비판의 정도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보여진다.
(4) 더 나아가서, 마태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적 말씀들을 일부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과부의 가산(家産)을 삼킨다는 예수님의 비판을 생략하고 있으며(cf. 막12.40) 또한 과부가 전 재산인 두 렙돈을 성전에 바친 사건도 생략하고 있다(cf. 막12.41-44).
마가복음과의 비교에서 얻어진 이러한 차이점들은 첫 번째 복음서기자 마태의 사소한 변화라고 쉽게 경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복음서기자의 사상 및 의도의 반영(reflection)이라고 생각된다. 요컨대, 마태는 마가보다 부자와 재물 가진 자에 대해 덜 비판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에딘버러 대학교의 데이빗 밀랜드 박사는 마태복음의 이런 경향의 원인은 (상대적으로) "재물을 가진 부자들이 많은 안정된 공동체의 가치를 암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4) 마태 공동체가 상대적으로 부자들이 많은 안정된 공동체였다는 주장의 근거를 밀랜드 박사는 예수님의 제자 파송 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제자들을 전도를 위하여 파송하면서,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는 동전(銅錢; 돈=칼코스, 6.8)을 누가복음에서는 은전(銀錢; 돈=아르구리오스, 9.3)을 금지시킨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에다 금전(金錢; 크루소스; 10.9)을 더 추가하고 있다.
이처럼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금전을 추가시킨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마태 공동체 내에는 적어도 금전을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가진 부자들이 존재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특징을 감안할 때 마태가 속했던 공동체의 경제적 환경은 마가나 누가가 속했던 공동체보다 상대적으로 부요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다른 복음서기자들보다 부자와 가진 자들에 대해서 덜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금이든 은이든 동이든간에 주님께서는 주머니와 두 벌 옷과 신과 지팡이와 함께 이것들을 전도 여행시 가져가지 말도록 분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이런 것들을 모두 포기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 공동체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가진 바 모든 소유를 송두리채 포기해야 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는 이런 극단적인 재물에 대한 태도는 마태교회 내의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유랑 설교자 혹은 전도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둘째로, 재물 주제의 견지에서 마태복음을 누가복음과 비교해 보도록 하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할 때 부딪치는 문제 하나는 복음서의 출처 자료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약 학자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되, 두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자료들이 하나의 [공동 자료](a common source)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5) 이 밖에도 각자의 복음서만의 독특한 자료들도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의 중앙 부분, 소위 [여행 기사](the Travel Narrative)에 밀집되어 있는 여러 개의 비유들과 [탄생 기사], 마태복음의 [동방박사의 방문 기사]나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런 자료 문제와 관련하여서 길게 논하는 것은 이 소논문의 영역이 아님으로 논의를 생략하되, 한 가지 여기서 전제할 것은 자료 문제에 관한 한 학계의 일반적 경향은 있으되, 그것 역시 무조건 정설(定說)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두 복음서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파악하기 위해 현재의 형태를 근거로한 비교를 통하여 우리의 의도를 얻고자 한다.6)
재물 주제와 관련하여 두 복음서를 비교할 때 드러나는 주요한 차이점 하나는 마태가 재물 관련 말씀들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다(spiritualize)는 점이다.7) 일례로,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6.20)라고 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주장은, 누가복음에는 단지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눅6.21)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마태복음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라고 기록되어 있음으로하여 더욱 지지를 받게 된다. 이들 두 가지 차이점 이외에 마태가, 누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 온유한 자(5.5), 긍휼히 여기는 자(5.7), 마음이 청결한 자(5.8), 화평케 하는 자(5.9)를 추가한 것은 "사회적 불이익보다는 도덕적 덕목"에 마태가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8)
이러한 네 가지 도덕적 덕목을 추가함으로써 마태는 결국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는 부자들에 대한 네 가지 비판을 생략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눅6.24-26). 누가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부자들의 모습은,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받는 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이 네 종류의 묘사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가난한 자들의 모습과 직접적으로 대조되고 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받는 자'. 마태복음에서 이러한 부자들에 대한 비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은 결국 마태가 부자들에게 덜 비판적인, 달리 말하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산상설교에 덧붙혀서, 부자들에 대한 마태의 덜 비판적인 또다른 증거로서, 누가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구제에 대한 언급이 마태복음에서 결여되어 있음 또한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6) //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11.4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니느라"(마6.19-20) //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12.33). 이 두 경우에서 누가는 분명히 구제를 강조하는데 반해 마태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구제란 결국 가진 자 즉 부자들의 몫임을 기억할 때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명령은 부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일 터인데, 이런 명령이 없다는 사실은 일단은 부자들에게는 우호적인 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까닭에 마태복음에서 구제 명령의 침묵은 부자들에 대한 덜 비판적인 특징의 한 증거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재물 주제와 관련하여 마태복음을 누가복음과 비교할 때 얻어지는 결과는 마태가 재물 주제 관련 자료들을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아울러 실제적 가난과 궁핍에 대한 관심이 덜하며, 가진 자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인(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밖에, 재물과 관련된 마태의 특별자료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두 개의 비유가 있다; 하나는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마13.44)이고 다른 하나는 [진주 비유](마13.45-46)이다. 여기서 돈과 재물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것들을 팔도록 요구받고 있다. 물론 이들 비유의 주된 초점은 재물 문제 자체가 아니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가오는 천국은 "최고의 가치"9)이요 "지고선(至高善)"10)이므로 천국의 입성(入城)이 문제가 될 때에는 기존의 모든 가치나 재물은 상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구절 속에 재물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쉽사리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들 비유에서 재물과 부(富)에 대한 마태의 특별한 견해가 밝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좀더 풀이하자면, 재물과 부가 중요하기는 하되,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들어감에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믿는 신자의 우선적 가치는 돈이나 재물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어야 하고, 땅엣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앞서 잠시 살펴보았던 마태 공동체의 경제적 상황과도 연결되는 데, 마가나 누가의 공동체보다 상대적으로 보다 부요한 마태 공동체의 부자들은 재물과 부귀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말도록 권고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인해 천국의 입성(入城)이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비교하여 마태복음의 재물 주제를 정리함에 있어서, 우리는 마가나 누가의 공동체보다 보다 부요한 상황에 놓였던 공동체에 속했던 마태가, 첫째로 특별히 누가복음과 비교하여 드러난 것은 마태가 재물 관련 자료들을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둘째로 다른 복음서기자들보다 재물 문제와 부자들에 대하여 덜 비판적이란 사실을 발견했으며, 셋째로 아울러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3.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일반적으로 로마에서 로마관헌과 유대인들로부터 핍박받고 있는 신앙 공동체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이런 위기적 상황에서 마가가 참 예수님의 제자들의 자격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면서 제자도를 강조하게 된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13)
이처럼 제자도가 주된 주제로 강조되다 보니, 누가복음과 비교할 때 재물 주제는 상대적으로 적게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설령 있다 해도 제자도 주제에서 파생된 형태로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최초의 제자들의 부르심(1.16-20), 세리 레위의 부르심(2.13-14), 부자 청년의 부르심(10.17-31)14) 등이 바로 그러하다. 따라서 이들 기사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재물 자체에 대한 어떤 의미가 아니라,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의 일부로서 재물의 포기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직업, 재물, 가족 등이 불필요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의 요인이 될 수 있기에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기꺼이 이런 것들을 포기하도록 요청받았던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마가의 부에 대한 태도는 대단히 비판적임을 발견하게 된다.
마가복음에서 재물 관련 자료 속에 포함될 수 있는 두 개의 기사가 있는데, 하나는 마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는 [과부의 헌금 기사](막12.41-44)와 베다니에서의 [향유부음 사건]이다(막14.3-9). 그러나 이들 두 사건에 등장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는 재물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부차적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들 기사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직접적으로 재물 주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중에서도 생활비 전부를 넣은 과부의 헌금과 어렵게 모은 향유를 기꺼이 주님을 위해 허비한 여인의 행실에 대한 칭찬에 관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들 기사를 차례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과부의 헌금 기사를 검토하여 보자.
이 기사는 마태복음에는 없지만 누가복음에는 등장하고 있는데, 누가복음과 다른 한 가지는 누가복음에는 "여러 부자는 많이(polla) 넣는데"란 구절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눅21.1-4). 누가복음에는 없는 이 구절로 인해 마가가 부자를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직설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마가가 부자와 재물가진 자에 대해 덜 비판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15)
과부가 성전의 연보궤에 넣은 이 헌금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의 용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근거로하여 가난한 자도 구제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과부는 그 용도에 관계없이 그 헌금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인 것이다. 오히려 이 기사의 초점은 재물의 바른 사용, 즉 재물의 용도(用途)가 아니라 헌금드리는 정신 및 태도에 있다. 즉 부자들은 그 풍족한 중에 드렸지만, 가난한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었다. 이처럼 가난한 과부는, 비록 그녀 자신이 생활의 구차함으로 남으로부터 도움받아야 할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바쳤던 것이고 이로인해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둘째로, 향유부음 사건을 검토해 해보자(막14.3-9/마26.6-13/눅7.36-50/요12.1-8).
이 사건은 매우 드물게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 상황과 등장 인물이 꼭같지는 않으며, 또한 재물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도 않다. 마태와 마가는 이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 이틀 전에 발생한 것으로서 묘사하면서, 수난기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한편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유월절 엿새 전에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에서 이 사건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일부로 기록되어 있으며, 수난기사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런 까닭에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사복음서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이 기사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16)
그러나 비록 그 내용이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대체로 이 이야기의 구조가 같다고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첫째로, 마가가 "매우 값진"(막14.3; polutelou)이라고, 마태가 "매우 귀한"(마26.7; barutimoi)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향유의 값어치를 누가가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누가의 이런 생략은 우리로 하여금 누가가 의도적으로 향유의 가치를 축소시키거나 경시하고자 하였다는 인상을 갖게금 만든다. 재물 주제와 관련하여 여기서 발견되는 또다른 사실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여인이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을 보고 '제자들이'(마태복음)나 '어떤 사람들이'(마가복음)이 분을 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복음에는 전혀 그런 기록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상황과 관련된 논의와는 별도로, 우리는 여기서 어찌하여 누가가 재물 사용에 관련된 분노를 언급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외형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불필요한 낭비처럼 여겨지는 여인의 행실을 인정하고 칭찬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복음서 모두에서 삼백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 귀중한 향유는 또한 분명히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허비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사실이 가난한 자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상기하면서 구제를 누구보다도 강조하고 있는 누가에게는 불편하게 여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아마도 누가는 그 복음서의 성격과 부합하지 않는 구절들, 즉 향유의 비싼 값어치나 여인의 행실에 대한 제자들의 분개 등을 생략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게 되는 것이다.17) 반면에, 누가와는 달리, 이 구절들을 적고 있는 마가는 재물이 반드시 가난한 자들만을 위해서만 사용될 필요가 없으며, 또다른 중요한 목적,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도 마땅히 사용되어야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용도의 재물 사용 역시 예수님에 의해 인정과 칭찬을 받았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마가복음의 재물관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재물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마땅히 포기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이런 의미에서 마가는 재물 및 부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간주된다.
셋째로, 재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이 세 가지 항목 중 첫째와 둘째 항목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발견되는 것이지만, 셋째 항목은 마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특징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과부의 헌금 사건은 마태복음에서 빠져있고, 향유부음 사건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장사와 관련되거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의 견지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 모두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마가가 특별히 셋째 항목의 재물 사용에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 맺는 말
재물 주제와 관련하여 이제까지 우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재물 관련 자료들을 분석하여 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런 분석의 결과를 토대로 재물 주제와 관련하여 각 복음서의 특징들을 아래와 같이 발견해 내었다;
마가복음의 경우 재물 문제에 있어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포기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엄격함이 발견되며, 부자들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도를 찾아볼 수가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는 마가복음의 입장에서 약간 물러선 것으로 이해되는데, 즉 재물 주제가 영적으로 해석됨으로써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면서 부자들에 대해서도 덜 비판적인 태도가 발견되는 것이다.
반면 대체로 누가복음의 경우는 마가복음의 입장에서 좀더 나아가 부자들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면서 재물의 바른 사용, 즉 구제가 각별하게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재물 주제와 관련하여 복음서 기자들은 나름대로 그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에 적합하게 독특한 변화를 주고 있지만,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일치성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특별히 공관복음서 모두에 포함되어 있는 [부자 청년 기사]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나는데,
재물은
첫째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의미있게 쓰여져야 마땅한 것이며,
둘째로는 예수님과 복음 전파의 우선적 목적을 위하여는 언제든지 기꺼이 포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CPOR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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