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목회사역
- The Pastoral Ministry of Jesus in the Synoptic Gospel -
들어가는 말
Ⅰ. 예수의 목회사역의 시대적 배경
예수님의 목회사역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이 사역했든 시대의 배경을 이해하고 분설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목회사역은 헬라-로마시대의 배경을 가진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이 시대를 배경하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은 유다 종파로 시작된 기독교가 불과 두 세기만에 어떻게 헬라=로마지역 전체로 발전된 종교로 확정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기독교 복음이 가지는 내적 능력과 본질적인 요소가 당시 헬라-로마세계의 문화와 종교에 깊이 파고들면서 새로운 가치관과 변화를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A. 헬라-로마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변화
헬라-로마시대는 언어적으로 코이네(Greek)언어가 사용되었다. 알렉산더 대제가 사앙 후 헬라 제국은 분열되었으나, 군사적으로는 로마 정부가 무력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룩하게 됨으로 힌에 의한 정치적 안정이 형성되었다. B C 27년 Augustus에 의해 시작된 로마는 서쪽으로는 Spain, 남쪽으로는 Egypt, 동쪽으로는 Syria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제국을 형성하게 되었고 wprrdml 통합으로 인해 지중해 연안으로 모여든 Diaspora 유대인들은 새로운 정치 및 문화적 환경 아래에서 그들이 믿고 신뢰해오던 종교로부터 새로운 신학적인 변화를 감수해야만 했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심각한 신핫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질적인 문화으 충돌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애 적응하기 위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들은 엄청난 고난과 박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 중에 가장 비극적인 현상은 그들이 믿고 았던 유일신 사상과 실재적 삶의 괴리현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B. 다양한 혼합주의 사상 발생
헬라-로마제국 시대에는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을 위한 다양한 철학사상과 종교들이 등장하게 된다. 혼합주의 양상은 초월적인 것을 주장하는 스토아 철학이 있었다. 혼합주의 양상은 초월적인 것을 주장하는 스토아 철학이 있었다. 이사상은 세상이 로고스에 의해 지배되고 아직도 로고스의 부분들이 세계에 퍼져있다는 범신론적 유물론사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내부에 로고스의 씨가 들어있기 때문에 로고스에 순응하여 살게 되면 평화를 얻을 수 있고 평등하게 살수 있다는 것이다. 즉 평등주의 사고를 발견한다. 기존문화와 가치체계를 거부하고 삶과 행동으로 실재 삶을 실천하는 견유학파(Cynics)도 있었고 플라톤의 영육의 이원론사상도 있었다. 플라톤주의는 당시헬라-로마세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사상은 몸은 영혼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그리고 물질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라는 관렴론적 철학사상을 뜻한다. 이사상은 영지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영지주의는 지중해 연안에 널리 유포된 종교현상으로 이세상은 열등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악한 것이며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그노시스(gnosis)를 얻어야 하는데, 이러한 그노시스는 영지주의적인 구속자가 위로부터 내려와서 죽고 올라가는 구속자 신화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 외에도 미드라스, 이시스 등의 신비종교들이 들어와서 다른 형태의 종교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들은 비밀스런 입회식과 구원을 위한 불멸성 그리고 신성에 참여하는 연합 사상 등을 강조함으로 많은 회원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외에도 헬라-로마시대는 자유로운 삶의 양식의 변화로 과거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다른 가치관을 설정하기 위한 새로운 혼란과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결혼하지 않고 서도 사는 풍토, 음식규례에 대한 도전, 체식주의자들의 등장, 금식주의자, 성적인 해방, 동성애 등 자유주의의 극단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극도로 개인주의 사상으로 기존의 가치들은 개인에 의해 선택되어야만 했다.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가치관이 한꺼번에 들어와서 함께 공존해야만 했고 능력이 없으면 도태되는 극단의 존재 양식으로 변모했다.
C. 쇠퇴하는 유대주의
외경문헌에 나타난 한 기록을 참고하면 “그때 내마음속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바벨론에 거하는 자들의 행위가 더 나은 것입니까? 왜 그 나라가 시온을 지배하는 것입니까? 내가 여기에 와보니 수없이 많은 불경건한 행위들을 보게 되었고 내가 30년 지나면서 많은 죄인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낙담이 됩니다. 주께서 죄 지은 자를 참으시고 악한 행위를 하는 자를 보전하시고 오히려 주의 백성은 파괴하시고 당신의 원수를 보전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주의 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아니하셨습니다. 바벨론의 행위가 시온의 행위보다 더 낫단 말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말고 또 주님을 아는 나라가 있습니까? 아니면 야곱의 족속처럼 당신의 계명을 믿는 족속이 또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들의 보답은 나타나지 않고 그들의 수고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내가 여러 나라를 여행해보니 비록 그들이 주의 계명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부유하게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죄과와 세계의 거주민들의 죄과를 저울에 달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 쪽으로 추가 기울일 것인지는 분명하게 들어날 것입니다. 언제 이 땅의 거민이 주님 보시기에 죄를 범치 아니하였습니까? 어떤 나라가 그렇게 주의 계명을 잘 지켰습니까? 주의 계명을 지키는 개인을 발견하실 수는 있겠으나 민족 중에서는 없을 것입니다”(에스라 4서 3:28). 오경문학은 정경적인 가치는 없다할지라도 마틴 루터에 의하면 읽을 가치는 있는 것이라 했다.
구약 시편 중에서도 정직히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억울함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의 교만함과 부요함에 대한 호소들을 볼 수 있게 된다(시 37편, 시73편).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은 이스라엘의 특유의 신앙으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으로 후손들에게는 약속의 땅이 주어지게 되고 언약백성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면 만국을 다스리는 강대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을 버리면 심판과 멸망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바벨론 후기 포로 시대 때부터 유대인의 신앙과 가치관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불타버리고 그들은 포로가 되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었으나 압제와 고통 후 그들의 역사의식이 변화되고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가 무너지고 말았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정말 유일신 하나님이신가? 고통을 당하는 그들의 역사는 패배의 역사요 저주의 역사였다. 그들의 선민사상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고 구원을 보장받은 민족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그들은 흩어져 살게 되면서부터 많은 이방인들을 만났다. 이방인을 원수처럼 대하고 살아야 되는 것이 그들의 습관처럼 되었다. 유대적 원리에 의하면 이방인을 상종도 하지 말아야하고 식사도 같이할 수 없다. 이러한 환경에 처한 유대주의는 점점 더 신학적인 변천과 함께 점점 쇠태의 길에 서게 된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유일신 사상과 현실의 차이 때문에 그들은 이제 신학적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D. 기독교의 부흥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나타난 기독교는 새로운 복음의 가치관과 함께 헬라-로마시대의 철학과 종교정신과 싸우면서 힘을 잃은 유대종교에 새로운 구원관과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산 경험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원래 기독교의 출발은 유대교를 그 뿌리로 하고 있다. 원시 기독교는 처음부터 기독교라는 종교로 출발하지 않았다. 유대인에 의해 유대종교라는 종교 안에서 독특성과 새로움과 특성을 가지고 출발했다.
첫째, 기독교가 가진 내적 특성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사역 전체에서 우리는 새로운 복음으로서의 특성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님은 유일신 하나님을 배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든 묵시종교의 이원론적 구조를 변화 시침으로 종말론 사상이 미래적인 마지막 날의 심판뿐만 아니라 종말론의 현재성을 함께 강조하고 하므로 묵시종교의 특징을 새롭게 적립시키고 있다. 묵시적 종말론이 이세상의 도피가 아니라 이 땅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책임감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역사의 무책임을 강조하지 않았고 역사의 무책임은 결국 인간의 책임이 될 수 있음으로 그러므로 선한 역사를 만들어 가야하고 이것은 무력이 아닌 사랑과 용서로 성취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마 18:35).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음을 선포하면서 유일신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울 것을 말씀하고 있다.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서야 저희 나라가 어찌 서겠느냐?(마 12:26).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동안 사탄과 싸우셨다(막 1:13).
둘째 기독교가 가진 내적 특성은 새로운 제자도를 들 수 있다. 핍박과 굶주림 속에서 원수를 선대하고 재물에 대한 집착에도 수정을 가하고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단절성을 강조하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종말론적 우주관과 묵시사상에 근거한 기독론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소외된 공동체로 전재 했으나 종교적으로는 기존체계를 부정하고 독특한 체계를 소유하고 있었다. 기존의 유대적 성격에 대한 거부분만 아니라 선택된 민족의 우월성에 대하여도 분파성을 극복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예수는 민족적 이거나 종교적 문화적 편견을 넘을 수 있는 창의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적 종교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고 세계적 참 종교로 자리 잡게 할 수 있었다.
셋째 기독교가 가진 내적 특성은 제의적 종교로부터 새로운 종교의 형으로 변형되었다. 죄와 실존적 죽음 문제에 대하여 해결을 시도하였다. 헬라-로마시계의 변화와 위기 속에서 유대교가 그 효력을 발휘치 못하고 있을 때 기독교는 거기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묵시사상의 새로운 종말론사상을 통해 특유의 자질을 형성하게 되었다.
Ⅱ.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목회 사역의 성격
복음서 연구에 대한 각 복음서의 특징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목회사역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학자들 가운데는 양식사의 연구방법을 통해 공관복음서는 몇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 예로 역사적 예수, 팔레스타인 교회, 헬라 교회, 그리고 제자들로 나눈다. 그리하여 역사적 예수는 소급될 수 없고 단순히 전승을 수집하여 배열하는 역할만을 저자들이 했기 때문에, 각 저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연구는 팔레스타인과 헬라교회의 상황을 규명할 수 있었으나 역사적 예수와 각 복음서 저자들이 가진 신학적 입장은 모두 무시되었다.
그러나 편집사 연구방법을 통해 저자들이 자료를 선정하고 저자자신들의 목적에 의해 자료들을 배열하고 자료들을 해석하는 신학적 동기가 있었음을 밝혔다. 그리하여 각 복음서의 신학적 특성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에 대하여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 복음서 저자들이 강조하는 복음서의 특성을 성경 본문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A.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원시 기독교 공돋체의 형태를 가장 잘 나타내준다. 특별히 13장에서는 우리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구체적 상황을 보게 된다(13:8-9). 예루살렘 성전파괴(13:14)는 이제 유대 전통에 대한 새로운 검토를 시작으로 제의적 종교로부터 새로운 종교형태로 변형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막 13:2, 8)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주피터 신상이 건설되었다는 것도 설명하고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막 13:14) 이러한 내용을 보면 마가복음은 묵시적 종말론을 그의 복음서 중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마가는 그의 복음에서 기독교가 죽음의 위협을 직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실존적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명하려 한다. 그리고 전텅적 제의적인 종교로부터 세로운 종교형태로 탈바꿈하고자 한다.
첫째 마가복음서 저자는 유대의 묵시적 신학으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가치관을 강조한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1-22) 그리고 종교의 외적 모습보다는 내적 자질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막 7:15-16). 반문화적 묵시주의 사상도 볼 수 있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막 6:8-9)에서 의식주에 대한 강한 거부와 함께 반문화적 성격을 보게 한다.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둘째, 마가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자로 표현한다. 마가는 베드로의 예수 이해에 대하여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그의 재해석으로 수난과 고난받는 인자의 죽음과 수난에 관해 말한다. 그가 여기 수난을 강조한 것은 죽음의 상황에 직면한 제자들에게 죽음까지도 받아 드려야 됨을 강조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셋째, 마가복음서에서는 갈릴리 신학을 중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이것은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것으로 그는 예수의 사역이 갈릴링[서 출발된 점을 상기시키고 부활하신 후에도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 14:28).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제국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고통을 겪었던 고로 저항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로마시대에도 반로마적 이었고 신적으로도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막 1:14). 마가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언급한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막 12:10). 백부장의 고백에서 절정을 이룬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9)
B. 마태복음
마가복음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특유의 묵시적 신학을 동원해서 기독교의 성격을 추구했다면 마태는 유대교에 대응하여 기독교의 유대적 정체성을 확립시키기 위해 많은 신학젂 노력을 기울인 복음서의 저자이다. 성전의 파괴로 인해 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파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로마정부와 결탁하여 정치적인 중재역할을 하던 사두개파는 더 이상ㅇ 중재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종교의 계급에 대해 환멸을 느꼈든 에센파도 로마와의 전쟁을 통해 멸망해 버리고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열심당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단지 바리새파만이회당을 중심으로 종교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유대교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바래새파는 얌니아의 결의에서 중요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유대교의 정경의 실현과 율법에 대한 해석을 체계화하여 랍비적 유대교로 발전시켰다.
무엇보다 그 결정들 가운데는 지금까지는 갈등관계에 있는 기독교를 이제부터는 적대관계로 전락시켰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회당으로부터 축출하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대관계를 마23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마태는 정체성을 확립해야하는 과제를 앉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태는 유대교와의 관계를 정립헤야만 했다. 유대교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 율법에 대한 해석을 위해 구전전승에서 이제는 기록된 미슈나로 발전되었고, 나중에 더욱 발전하여 게마라로, 이슈나와 게마라가 합하여 마침내 탈무드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대응하여 마태는 오경이 예수의 말씀으로 완성되었음을 알아 이것으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찾기로 하고 그의 복음서를 5경적 구조로 만들었다. 마태는 유대교가 토라를 중심으로 그 해석을 발전시켜나감을 목격하고 예수를 새로운 토라를 주는 인물로 묘사했다. 그의 지상 명령에서도 가르치는 것에 관에 관심을 가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 28:19-20)를 강조한다.
무엇보다 마태복음은 베드로를 부각시키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귀하게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7-19)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 해 준다.
또한 마태는 율법이해에서도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위에서 보는 대로 마태는 유대교와 깊은 갈등을 극복하면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킄 토라 이상 가는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를 위해 그는 마태복음을 기록했다.
C. 누가복음
예루살렘 멸망 이후 기독교의 중심이 어느 지역으로 옮겨지느냐에 대한 관심을 우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서의 비교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마태복음은 유대교와의 갈등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추구했다면 누가복음에서는 이제 유대의 한계를 넘어선 헬라세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기독교의 상황과 예루살렘과 로마를 연결하는 세계적 기독교 복음을 의도하고 있다. 마가복음과 비교해 보드래도 마가를 갈릴리를 신학적인 모티브로 삼고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그 출발점으로 해서 부활하신 후에도 먼저 갈릴리를 방문하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비교하면 누가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로마제국과의 관계성에 있어서도 같이 공존해야 되는 관계를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전 세계로 복음이 확장될 것에 관심을 가진다. 그럼으로 누가는 바울적인 경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바울을 화해하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세계 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갈등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알고 그가 쓴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와 바울의 살교를 같이 배열하고 각자의 능력을 존중하고 교회가 따라야 할 지도자로 묘사한다.
왜 누가는 예루살렘을 그처럼 강조하고 있는가? 누가는 누구보다 세계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신약 전체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를 누가복음에서만 61회나 사용하고 있다. 누가는 예로살렘을 예수님이 여기서 고난 받고 승천한 장소로 규정하면서 여기서부터 선교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행 1:8).
뿐만 아니라 바울의 소명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행 22:17-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21).
이처럼 누가는 예루살렘 성전을 세계선교의 중요한 출발지로 보았다. 그는 마가복음처럼 성전을 예수님을 반대한 장소로 보지 않고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잘 듣는 장소로 묘사했다. 그리고 누가복음서는 마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을 중요하게 말하고 있다. 제자들은 신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한다.
누가복음서에서는 또한 구속사적 관점에서도 율법과 예언의 시대로 세례요한 때까지의 역사를 취급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로 예수님의 세례, 죽음과 부활 승천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회 시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부터 재림 때까지를 다룬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들을 연결시키는 것도 이러한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된다. 사무엘, 세례요한, 세례요한과 예수, 예수와 바울, 예수와 스데반 베드로와 바울을 연결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에 나타난 목회적 특성으로 이방선교에 관한 배려이다.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균형 잡힌 관심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인종적인 기준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통해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예로 빌라도를 좋게 표현한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눅 23:4). 갈리오의 바울의 처결방식에서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행 18:14-15)등에서 로마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보는 대로 각 복음서는 나름대로의 복음서의 특성을 가지고 예수님의 목회적 사역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이해 없이 예수의 목회 사역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각 복음서의 독특한 특성뿐 아니라 복음서 기자들이 무엇을 의도하면서 기록을 남겼는지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의 독특한 성격과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분명한 방향성을 설정해 주었다.
Ⅲ.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목회사역의 내용
1장과 2장의 배경과 성격을 통헤 이제 예수님의 목회사역이 담고 있는 내용을 분석해 보도록 한다.
A. 예수의 세례와 요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소명이 세례요한의 세례와 어떻게 관계되는가?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가?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왜 동의했는가?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평가 절하하지 아니하고 왜 세례요한을 오히려 높이 평가했는가?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임재로붙처 시작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마 1:9-11, 막 1:14-15).”
B. 예수님의 치유사역
목회사역에 있어서 질병을 대면하고 대처하는 사역은 절실한 사역이다. 이런 면에서 치유사역은 예수님 사역의 핵심적 부분에 속한다. 이 치유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연결된다. 이것은 신학의 변두리가 아니고 중심부에 위치한다. 쭝요한 것은 신학적인 치유이어야 한다. 신학적 근거는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예수의 치유는 믿음에 의한 치유였다. 인간을 위한 긍휼과 사랑 때문에 실재적으로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적 문제도 해결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시도했다. 예수님의 목회사역 대부분은 복음전파와 가르치는 것, 그리고 치유사역이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같은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복음전파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한다면, 가르침이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내용이며 치유사역은 하나나님 나라를 현재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없는 치유사역은 다른 종교의 주술적 행위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C. 예수님의 상담사역
기존 종교는 전통과 권위, 그리고 율법적 요구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B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서 만나 주시고 대화하고 음식을 나누고 실재적 필요를 채워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건이 이것을 입증해 준다. 예수님의 목회상담은 개인적인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근본적인 치유사역으로 구원을 경험케 한다.
전형적인 구약신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새로운 이웃이 누구인가를 밝힌다. 새로운 이웃 개념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하면 문화적 범주에 드는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이웃 개념에 대한 새로운 신학이 정립되었다.
예수님의 상ㄷ감목회에 나타난 상담의 형태를 보게 되면 몇몇 주요한 범주를 보게 된다. 전통적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구원의 문제에 대한 갈등을 가진 니고데모(요한 3:1-2) 원수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예수님이 먼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함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든 원수사랑으로 이웃의 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인고가 사마리아인의 적대관계는 솔로몬시대까지 올라간다.
바벨론 포로후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의 참여를 거부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마리아인들이 로마의 정책을 고수함으로 유대인들과는 거리를 두는 관계가 되었고, 이방인과의 혼합결혼 때문에 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여기에서 원수가 이웃이 되어야한다는 신학을 새롭게 정립헤 주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경우 죄와 관련된 예수님의 목회상담이라 할 수 있다.
D. 예수님의 가르침의 목회 사역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핵심부분으로 남는다. 가르침의 사역은 그리고 양보할 수 있는 사역이 아니다. 잘 가르치지 못하고 잘 배우지 못하면 진리를 외곡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개인적 신앙형태를 불건전하게 변형시킨다. 교사로서의 예수님은 12제자들을 교육시켰고 많은 무리들을 가르치는데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부었다.
가르치는 사역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선교적 마지막 명령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부탁한 것이다. (마 28:19-20)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에는 진리와 인격이 일치하는 가르침으로 가르침과 인격이 분리되지 않은 가르침이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진리 그 자체였기 때문에 생명을 주거나 빛을 가르치는 차원이 아니고 그가 곧 생명이요 빛이라는 점이다. (요 1:1-5)
예수님은 그러면 무엇을 가르쳤는가? 요 7장 16-18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교훈 이것이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요 목표였다. 그러므로 참 가르침은 그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목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가 가르친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메시지였다.
E. 예수님의 설교사역
오늘날 현대교회들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설교는 오울 우리 목회에 9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 예수님의 설교사역과 오늘 우리들의 설교사역에서 반성해 볼 필요사항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딜 가시든지 복음을 선포하시고 배위에서나 산에서 그리고 성전에서 언제든지 설교로 사라믈을 설닥하였다. 마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복음전파 사역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직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기독론적 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포의 내용을 하나님 나라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님의 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의 묵시적 종말혼적인 현재적 성격과 미래적인 성격을 그리고 내적 외적 영적 묵시적 실재들을 어떻게 설명하고 설득시키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과제였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귀신 축출을 통해 임했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눅 17:21).
그래서 예수님은 늘 설교를 전달하기 위해 비유를 많이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비유적 형태의 것이 26개, 실재비유가 17개로, 명명된 것이 30개, 그래서 75개의 말씀으로 비유를 사용했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있을 때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해 주었다. (막 4:33-34)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메시지를 그 시대만을 위한 메시지로 남기지 아니하고 오늘 우리와도 상관되는 미래성을 위한 다양한 문학적 양식을 사용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 준 것이다.
F. 예수님의 예배사역
오늘의 교회 예배는 위기를 맞고 있다. 어떤 예배는 열광주의적이며 무질서한 예배가 있고 어떤 예배는 지나치게 형식에 치우쳐 무미건조한 예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어떤 예배는 쇼처럼 전락되어 인간중심적 예배도 유행하고 있다. 목회자는 예배를 인도하는 일을 가장 많이 한다. 예언자적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창의적이고 살아있는 영적에배와 공적예배를 인도할 책임이 주어져 있다.
어떤 예배정신이 필요한가? 예수님은 그의 생애 삶 전부가 예배였다. 예배의 커다란 정의는 무엇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예수님의 경우 예수님의 전체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드리는 생애였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예배의 전 과정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 자체가 예배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그의 생애를 통해 이룩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에 있다. 요한 17:4-5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를 함께 가졌든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날흘 영화롭게 하옵소서”하나님께서 예수를 영화롭게 한다는 예배의 기독론적 근거를 여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참 예배는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는가? 예배으 생명력은 삶으로서 예배를 드리고 그러한 예배를 통하여 자신을 바치는 데에 생명력이 있다. 이러한 삶의 예배를 위해 기도의 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 당장 변화가 오지 않는대 해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기도가 예배를 뒷받침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지속젃인 기도생활을 했다.
G. 예수의 성례적 목회사역
오늘날 성만찬은 지나치게 형식회 되어 있고, 은혯가 상실된 마술적 성격이 부각된 성례전도 있다. 세례가 새로운 회개의 시작이라면 성만찬은 신자로 하여금 합당한 성장을 촉진시킨다. 성만찬은 예배의 부수적인 부분이 아니라 핵심적인 부분이 되어야 하며 말씀과도 긴밀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예수는 그의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 제자들과 그리고 죄인들과 하께 식사를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경험케 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은혜의 교제의 모임이 신학과 된 것이 성만찬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당하기 이전에 친히 주의 성찬제도를 마련하였다.
“저희가 떡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드레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 14:22-25) 예수와 함께 떡을 먹음으로 해서 새로은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게 된다.
이 떡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을 먹고 잔을 받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의 죽음에 참여하게 된다.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고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세례 역시 형식적인 의식으로 ᅟᅧᆫ질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세례를 통해서 인간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n 그러므로 세례는 성령의 임재와 새로운 신분으로 사는 개인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세례가 단순히 교회가입 회원을 위한 목적이라면 이것은 남용이요 문제를 발생하게 한다.
Ⅳ. 목회사역을 위한 교회의 기능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교회는 어떤 변혁의 목회적 기능을 가져야 되는가? 우리가 비록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옮겨진다 해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사명과 기능은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반역과 쾌락, 인간의 무책임, 나태함, 인간의 진리에 대한 불순종, 그리고 죄와 죽음의 문제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항상 동일한 목회적 기능에 충실해야만 한다.
비록 급속한 변화의 시대에 산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언재나 종말론적인 삶을 위한 목회적 기능의 수행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4가지늬 교회의 목회적 기을을 들 수 있다.
A. 말씀선포(Kerygma) - 생명을 주는 말씀 선포(설교)
B. 말씀의 교제(Koinonia) - 성찬을 통한 변화의 삶(삶의 변화)
C. 말씀의 교훈(Difdache) - 사도적 기독교 신앙 전수(가르침)
D. 섬김의 사역(Diakonia) - 성숙한 제자도(섬김)
맺는 말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목회사역에서 우리는 각 복음서 저자들을 통해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들을 볼 수 있었다. 예수의 목회적 사역을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사역하는 헬라-로마세계의 시대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분설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유대교가 이미 그 효력을 잃고 있을 때 기독교는 새로운 생명의 종교로 복된 소식이 되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유대 묵시사상의 변형을 통헤 새로운 내적 오;적 창조적인 기독교의 정체성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 복음서가 가지는 복음의 특성과 강조점즐을 통해 예수의 목회정신과 사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구했다.
예수의 목회사역 내용 중에서 그의 치유사역은 어두움의 세력과 빛의 세력의 종말론적 투쟁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표증으로 나타남을 볼 수 있었다. 기독교의 치유가 독특성과 정당성을 갖는 데에는 치유의 목적과 기능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
예수의 상담목회는 주로 개인과 그룹들을 향해 행해졌다. 새로은 생명으로 인격적인 성장을 위한 적극적인 하나의 목회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다양성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목회적 만남이 필요하고 그 만남을 통헤 전인적인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예수의 교육목회 사역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가르치지 이전에 우리가 가져야 할 인격의 그릇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성경의 바른 해석과 바른 적용에 충실해야 하며 가르침과 삶의 일치를 예수로부터 바울사도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목회의 핵심적인 설교의 갱신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예수님의 설교가 그 출발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였던 것처럼 우리의 설교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성경말씀으로 설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예배를 드리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명력 있는 예배를 위해 다같ㅇ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인을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세례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신학화된 세례가 요청된다. 그리하여 삶이 예배가 되고 삶이 설교가 되고 더욱이 질적인 성만찬을 통해 말씀의 사역과 전인적인 예배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예수의 목회 정신과 그의 사역을 본 받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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