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 나타난 '경건'(eusebeia)
I. 들어가는 말
신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는 '경건'이다. '경건한 사람,' '경건 생활,' '경건 훈련,' '경건회' 등 참으로 '경건'이란 용어는 신학교 안에서 신학도들의 신학적인 사고와 신앙적인 삶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불가피한 개념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장로회 신학 대학교의 '교훈(校訓)'이라고 할 수 있는 '경건과 학문'(pietas et scientia)의 순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신학교 안에서 행해지는 학문의 연마는 경건을 그 토대와 전제로 한다. 그 경우 경건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경건을 정의하지 않고는 '경건함,' '경건하지 못함,' '경건 없음,' '왜곡된 경건,' '거짓 경건' 등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자는 성경에서의 '경건' 개념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성경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기준이요 토대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먼저 신약성경에 사용된 '경건' 용어의 용례를 일별하고, 그 다음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경건'에 대한 중심 용어인 eusebeia가 사용된 모든 본문을 문맥 안에서 요약적으로 석의(釋義)한 후, 그 '경건' 개념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신약 성경적인 경건 개념을 해명하고 실천적 경건의 이론적인 토대를 찾고자 한다. 신약성경에는 본 논문에서 조사하고자 하는 eusebeia 외에 '종교적인 경건'을 나타내는 thrēskeia 라는 용어가 네 번 사용되었으나 본 논문은 이 용어보다 훨씬 자주 또 폭넓게 사용된 eusebeia에 국한하여 조사하고자 한다.
II. 신약성경에 사용된 '경건' 용어의 용례
'경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유세베이아'(eusebeia)는 신약성경에서 항상 하나님이나 어떤 신성에 관련되어 사용된 sebō의 중간태인 sebomai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용어와 관련된 여러 가지 형태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총 40회 사용되었다. 동사형 eusebeō는 대격의 목적어와 함께 단 두 번 사용되었는데, 한번은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다"(섬긴다)는 뜻으로(행 17:23), 다른 한번은 부모에 대하여 "효를 행하다"(딤전 5:4)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형용사 형태인 eusebēs는 모두 네 번 "경건한"의 의미로, 그것도 다른 첨가어 없이 사용되었는데, 두 번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율법을 전체적으로 지키지는 않으나 회당에 호감을 가진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sebomenos ton theon) 고넬료에 대하여 사용되었고(행 10:2, 7), 나머지 두 번은 율법에 대하여 경건한 아나니아(행 22:12)와 마지막 날 심판 받을 불의한 자에 대조적으로 묘사된 경건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각각 한번씩 사용되었다(벧후 2:9). 그리고 부사 형태인 "경건하게"(eusebōs)는 단지 목회서신에서만 두 번 나타나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핍박을 받는 자의 삶을 묘사할 때(딤후 3:12)와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묘사할 때(딛 2:12) 사용되었다. 그밖에 '경건'에 대하여 '경건치 않음'(asebeia)이 6회(롬 1:18; 11:26; 딤후 2:16; 딛 2:12; 유 15, 18), '경건하다'에 대하여 '경건치 않다'(asebeō)가 2회(벧후 2:6; 유 15), '경건한'에 대하여 '경건치 아니한'(asebēs)이 9회(롬 4:5; 5:6; 딤전 1:9; 벧전 4:18; 벧후 2:5; 3:7; 유 4, 15[두 번]) 반의어(反意語)로 사용되었다.
끝으로 본 연구 논문의 조사 대상이 되는 명사 형태인 '경건'(eusebeia)은 경건의 대상에 대한 자세한 언급 없이 사도행전 3장 12절에서 한 번, 목회서신에서 열 번, 베드로후서에서 네 번 사용되었으나, 공관복음서나 초기의 바울서신, 그리고 요한의 문헌에서는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의 '경건' 개념을 알고자 하려면, 위에 언급된 각 구절에 사용된 eusebeia 용어가 석의(釋義)적으로 해명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III. 신약성경에서 '경건' 용어가 나타나는 본문의 요약적인 석의
1. 사도행전에서의 '경건' 용어
사도행전에서 eusebeia 용어는 3장 12절(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에 대하여 어찌 기이하게 여기며 어찌하여 너희가 [우리]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으로[eusebeia/] 그를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에서 단 한번 나타난다. 이 구절에 사용된 '경건'은 결코 어떤 기독교적인 신앙이나 삶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경건'이 '능력'(dynamis)과 나란히 사용됨으로써 그것은 이교적 신앙에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어떤 능력을 암시한다(행 14:11-13 참조).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개인의 능력과 경건으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한다. 사도들은 결코 이적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사칭(詐稱)하는 초능력을 지닌 담지자(擔持者)가 아니다. 이러한 '경건'의 비(非) 기독교적인 특성은 이 용어의 형용사형인 '경건한'(eusebēs)이 이방인 고넬료(행 10:2)와 그 집안 사람에게도(행 10:7) 사용되었다는 데서 나타나며, 아덴 사람들의 종교성을 나타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행위에 대하여 사용된 동사형 '위하다'(eusebein)에서도(행 17:23)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 세계에서 euseb-어군(語群)에 속하는 용어들은 인간의 행동에 역점이 주어진 도덕적인 덕목으로 여겨졌으며 또한 인간의 경건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격적인 대상이 아니라 위대한 규정이며 하나님이 아니라 신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도덕주의(moralism)와 관련되어 있는 경건 개념은 원시 기독교의 초기 단계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는 특히 바울의 경우 '경건한 사람들'(eusebeis) 대신에 '성도들'(hagioi)이나 '택함 받은 사람들'(eklektoi)이, '경건'(eusebeia) 대신 '믿음'(pistis)이나 '사랑'(agapē)이 나타나는데서 인식될 수 있다.
2. 목회서신에서의 '경건' 용어
신약성경에 나타난 '경건'(eusebeia) 용어의 대부분은, 즉 15회 중 10회가 목회서신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eusebeia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특정한 방식의 생활 태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이 열 구절들에 사용된 '경건' 용어의 용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 디모데전서 2장 2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된다. 그것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en pasē eusebeia kai semnotēti)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요구된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에게 정적(靜的)인 시민성이 요구되는 문장으로는 신약성경 안에서 유일한 구절이다. 여기서 헬라 세계의 윤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단정함'(semnotēs)과 함께 사용된 '경건'은 "모든 종류의 경외하는 태도"를 의미하며, 인간의 행동에 대한 전체적인 태도로 확대된다. 이러한 경건과 단정함으로 사는 삶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을 위하여 영위된다.
2.2 디모데전서 3장 16절
엄청나게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ephanerōthē)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edikaiōthē) 천사들에게 보이게 되시고(ōphthē) 열방에 전파되시고(ekēruchthē) 세상에서 믿겨지시고(episteuthē)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anelēphthē)
초대교회의 전승 단편으로 '그리스도 찬가'(Christushymnus)인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운명을 성육신(成肉身), 의롭다고 인정받으심, 나타나심, 전파되심, 믿기심, 그리고 올리우심의 여섯 단계로 구분되게 각 행에 하나의 단순과거 수동태 동사가 사용된 여섯 행으로 묘사한다. 이 단순과거 수동태 동사는 모두 그 배후에 그 행위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여 나타나시고 올리우신 분으로 세상에 전파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경건의 비밀"(to tēs eusebeias mystērion)로 소개된다. 즉 경건은 그리스도 사건 안에 뿌리내려져 있다. 여기서 '경건'은 "철저하게 특별히 기독교적인 하나님과의 결합에 일치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일상 생활 안에서 동반되는 품행"으로 이해된다.
2.3 디모데전서 4장 7-8절
7세속적이고 늙은 여자들이 말하는 신화를 버려라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습하라 8왜냐하면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을 가지고 있어 범사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경건'이 7절에서는 "세속적이고 늙은 여자들이 하는 신화"와 대립되어 있고, 8절에서 는 "육체의 연습"과 대조적으로 묘사된다. 이로써 참된 경건이 문제가 된다. 참 경건은 "신화"(mythoi)가 아니다. 여기서 '신화'란 현대적인 의미에서 또는 종교사적인 의미에서 세상과 인간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거짓되고 어리석은 "허탄한 이야기"(딤후 4:4)이다. 그러니까 참 경건은 어떤 말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운동을 하듯이 행함으로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gymnazein)이 요구된다. 또 참 경건은 "육체의 연습"과 다르다. "육체의 연습"(hē sōmatikē gymnasia)이란 디모데전서 4장 3절 상반절(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금욕적인 수련(修練)을 의미한다. 참 경건은 이런 영지주의적인 금욕적인 수행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과 소망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딤전 4:6, 10). 육체의 연습은 인간 자신에게 전체적인 유익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약간의 유익(pros oligon ōphlimos)을 줄 뿐이다. 그러나 경건의 연습은 그렇지 않다. 부분적인 유익뿐 아니라 전체적인 유익(pros panta ōphelimos)도 가져다 주며, 지금의 삶에 있어서(zōēs tēs nun)뿐 아니라 다가올 삶에 있어서도(zōēs tēs mellousēs) 유익을 가져다준다.
2.4 디모데전서 6장 3-6절
3누구든지 다르게 가르치며 건전한 말씀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일치한 교훈에 착념하지 아니 하면 4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병들어서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그로부터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오며 5 이성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빼앗기게되어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함께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3절에서 경건은 "건전한 말씀"(hygiainontes logoi)과 관련되어 있다(딛 2:8 참조). eusebeia 용어를 통하여 규정된 품행은 거짓 교사들이 '다르게 가르치는 교훈'(heterodidaskalia)과 '건전한 교훈'(hygiēs didaskalia)을 구분하고 '거짓 교훈'을 '바른 교훈'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교회 안에서 이단적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에 대하여 경계할 것을 촉구하는 권면의 맥락에서 '바른 교훈'은 항상 "경건에 일치한 교훈"(hē kat' eusebeian didaskalia)이다. 대격과 함께 사용된 전치사 kata는 고린도전서 15장 3절의 "성경대로"(kata tas graphas)나 로마서 2장 16절의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kata to euangelion mou)처럼 어떤 규범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경건은 바른 교훈의 규범으로 여겨진다. 이 경건에 부합된 교훈은 "병든"(nosōn) 교훈과 대립되는 "건전한"(hugiainōn) 교훈이다. 이 교훈은 스스로에게서 어떤 행동이 행해지게 하는 교훈이며, 단순한 지적이해에서 해명되는 교훈이 아니라 그 교훈을 입증하는 실천적인 삶에서 비로소 밝혀지는 교훈이다.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은 교만해서 아무 것도 알고 못하며 병들어서 말싸움을 일 삼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바른 삶이 따르지 않는다. 거짓 교사들의 경우 잘못된 삶과 거짓 교훈이 하나가 된다. 이들로부터 나온 품행이 4절 하반절에서 디모데전서에서 두 번째로 나타나는 '악덕 목록'(Lasterkatalog)에 열거된다. 거짓 교사들의 변론(zētēseis)과 언쟁(logomachiai)으로부터 투기(phthonos)와 분쟁(eris)과 비방(blasphēmiai)과 악한 생각(hyponoiai ponērai)이 나오게 되며, 그들의 이성(nous)이 부패하게 되고 결국 진리를 빼앗기게된다. 이들은 스스로 '경건'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익의 수단"(proismos)으로 생각하고 다툰다. 아마도 "경건의 부패는 많은 세상적인 것들을 함께 식탁에 가져왔던 교회의 식사나 성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문제는 경건이 무엇과 관련되느냐에 따라 유익함의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경건'이 '돈을 사랑하는 탐욕'(philagria)과 결합하면(딤후 6:10) 그 경건은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그와 달리 '자족하는 마음'(autarkeia)과 결합하면 그것은 실제로 좋은 "이익 거리"가 된다. 견유(犬儒)학파의 주(主) 덕목이었던 autarkeia를 바울은 '넉넉한 수입'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고후 9:8). 그러나 여기서는 이 용어가 자족(自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자족과 함께 한 경건"(hē eusebeia mata autarkeias)은 큰 '이익 거리'(porismos)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경건이 자족함과 결합하게될 때 경건은 범사에, 또 지금의 세상과 다가올 세상에 유익이 된다(딤전 4:8 참조). 특히 가르치고 권면하는 교회의 직분자에게는 자족과 함께 한 경건의 연습의 요구된다. 이 '자족'은 재산이나 소유 포기가 아니라 "무소유와 부유함 사이에 있는 중간 길과의 타협"을 의미한다. 세상 재물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이 취하는 이러한 중용(中庸)의 입장 안에 그리스도인의 시민성이 잘 나타나 있다.
2.5 디모데전서 6장 11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는 디모데는 앞 단락의 목록 안에 열거된 악덕들을 피하고(pheugē)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diōke)는 권면을 받는다. 이때 디모데가 추구해야할 '덕 목록'(Tugendkatalog)에서 '경건'은 '의' 다음에 그리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praupathia) 앞에 나타난다. 그것은 '경건' 용어만이 목회서신에서 유일한 필수적인 중심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경건함'(eusebeia)은 '근신함'(sōphrosunē)과 '의로움'(dikaiosynē)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3대 기본 자세이다. 경건뿐 아니라 이 구절에 열거된 기본 자세들은 기독교적인 기본 가치를 목표로 삼는 삶의 자세들이다. 이때 경건 다음에 언급된 믿음(pistis), 사랑(agapē), 인내(hypomonēv)는 바울의 경우 자주 나타나는 '3화음'(Trias)인 믿음(pistis), 사랑(agapē), 소망(elpis)과 동일하다(살전 1:3; 5:8; 고전 13:13; 롬 5:1-5; 갈 5:5-6 참조). 이미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이나 로마서 5장 3-5절에서 인내는 소망에 직접 관련되어 있어 인내가 소망을 대체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인내"는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기독교적인 실존(소망)의 기본적인 종말론적인 방향설정에 대한 구체화"이다. 이 '3화음'에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단어(hapaxlegomenon)인 온유(praupathia)가 덧붙는다. 온유는 바로 앞에 언급된 인내에 대한 해석이다. 그것에 있어서는 온순하고 부드러운 친절함의 문제가 아니라 불의 앞에서 냉정하게 대처하는 침착함의 문제이다. 다시 이 논문의 주제인 '경건'으로 눈을 돌리면, 이 구절에 언급된 '경건'은 '덕 목록'의 제일 앞에 놓여 있는 '의'와 관련하여 그 의미가 밝혀져야 한다. '의'가 사람이나 그 주변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올바르고 적절한 자세라면(딤후 2:22; 3:16; 4:8 참조), '경건'은 "하나님에 속해 있음에 의해 각인(刻印)되어있는 삶의 자세"이다.
2.6 디모데후서 3장 5절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이니 이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은 "경건의 모양"(morphōsis eusebeias)만을 보여줄 뿐 실제로는 "경건의 능력"(dynamis eusebeias), 곧 "경건이 삶을 형성하는데 미치는 영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여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딤후 3:2-4)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이다(딤전 6:5). 이렇게 볼 때 거짓 교훈은 잘못된 삶으로 인도하며 이 둘은 서로 공속(共屬)되어 있다. 디모데는 이 '악덕 목록'에 나열된 악덕으로부터 돌아서라는 권면을 받는다.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동사인 "돌아서라"(apotrepou)는 디모데전서 6장 11절과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 사용된 '악덕'을 "떠나라"(pheuge)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2.7 디도서 1장 1-2상반절
1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이 사도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 택함 받은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2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밝히는데, 그의 사도직은 다른 그리스도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지식"(epignōsis alētheias)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지식"은 영지주의적인 '지식'(gnōsis)에 대하여 반(反) 영지주의적인 '온전한 지식'(epignōsis)을 의미한다(딤전 2:4; 4:3; 딤후 2:25; 3:7). 이 지식은 "진리의 지식"이며 그것은 경건함에 속해 있는 것이며 경건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됨의 두 번째 목적을 위해 말하는 kata는 이 '지식'이 경건함으로 인도한다는 것, 곧 성찬시 현존하시는 올리우신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그것은 확실히 디모데전·후서의 "성만찬 경건"과 관련되어 있다(딤전 3:16; 2:2; 4:7-8; 6:3, 5-6, 11; 딤후 3:5 참조).
3. 베드로후서
Euseb- 어군은 사도행전과 목회서신이외에 베드로후서의 네 구절에서도 나타난다. 목회서신과 비교해 볼 때 거짓교사들의 일반적인 상황은 목회서신에서 등장했던 금욕 대신에 세상향락을 즐기고 율법을 거역하며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찬 어떤 '자유주의'(Libertinismus)가 나타남(벧후 2장 참조)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었다. 이런 변화된 상황 아래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도덕적인 실천행위로서 경건이 요구된다.
3.1 베드로후서 1장 3절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삶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베드로후서의 문안 인사말(1:1-2) 직후에 이어지는 첫 절인 본문에서 '경건'(eusebeia)의 용어는 '삶'(zōē)과 함께 등장한다. 이때 '경건'은 목회서신에서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만들어내는 생활방식으로서 기독교적인 삶"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경건"(eusebeia)과 함께 "신기한 능력"(theia dynamis), "덕"(aretē), 그리고 "앎"(epignōsis)과 같은, 전형적으로 헬라 세계의 용어들이 사용되었다. 이는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그리스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신자들의 용어와 거짓 교사들의 용어를 기독교 신앙의 빛 아래 적절하게 다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삶과 경건"은 그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어지는 것은 그것을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서 "그의 신기한 능력"이 주어진다. 이렇게 볼 때 "삶과 경건"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영위(營爲)되는 인간의 수평적인 삶과 수직적인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경건'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3.2 베드로후서 1장 5-7절
5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 단락에서 '경건'(eusebeia)은 믿음(pistis)에서 시작하여 사랑(agapē)으로 끝나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한 '덕 목록' 안에 언급된다. 그리스도인에 의해 실행되어야 하는 모든 덕목(德目)들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바울의 경우 믿음은 행함을 요구하며 행함은 믿음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믿음과 행함은 서로 공속되어 있고 통합되어 있다(갈 5:6 참조). 그리고 믿음에서 출발한 '덕 목록'은 사랑으로 끝난다. 즉 이런 구원의 '덕 사슬'의 정점(頂點)에 바로 전체 신약성서 윤리의 핵심 개념인 사랑이 서있다(갈 5:22-23).
믿음에서 시작된 덕 목록에서 믿음을 이어 도덕적인 선행의 총괄 개념인 '덕'(aretēv)이 뒤따르고, 덕을 이어 성서적으로 이해된 지혜, 곧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의미로 '지식'(gnōsis)이, 지식을 이어 성적(性的)인 자제(自制)를 포함한 넓은 의미로 사용된 전체 헬라 세계에서 높이 평가된 '절제'(enkrateia)가, 절제를 이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으로서 '인내'(hypomonē)가, 그 인내를 이어 올바른 행실 또는 "자비"의 뜻으로 사용된 '경건'(eusebeia)이, 경건을 이어 믿음의 형제 자매에 대한 책임적인 사랑의 뜻으로 기독교적으로 이해된 '형제 우애'(philadelphia)가 뒤따르며, 마침내 이 목록은 형제우애를 이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agapē)으로 끝난다.
이 단락에서도 베드로후서 1장 3절에서처럼 '경건'은 제의(祭儀)적인 경외함이 아니라 경건한 삶, 곧 경외함의 도덕적인 실천행위를 의미한다(벧후 3:11 참조).
3.3 베드로후서 3장 11-12상반절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luomenōn)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상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 구절은 전체 베드로후서에서 윤리적인 책임, 재림 기대,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세 주제가 얼마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경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그 복수 형태인 eusebeiai로 사용되었다. 복수로 사용된 eusebeiai는 이와 마찬가지로 복수로 사용된 "거룩한 행실"(hagiai anastrophai)과 함께, 목회서신의 용례와 다르게, "개별적인 행동의 총화(總和)"를 의미한다.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dei hyparchein)"는 어구는 이러한 요구의 불가피함과 절박함을 나타낸다. 거룩하고 경건한 행실들과 품행들은 다가오는 "주의 날"(3:10), 곧 "하나님의 날"(hē tou theou hēmera)의 심판과 함께 언급된다. 마지막 심판의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이제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들은 분명하게 경건의 삶과 행위를 실천함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경건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체화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구절에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은 복수로 언급되었다.
요약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난 '경건' 용어는 비(非) 기독교적인 그리스 세계에서 통용되던 인간의 행동에 역점을 둔 도덕적인 한 덕목이며, 목회서신의 경우 '경건'은 그리스도 사건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하나님께 속해 있음 내지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이다. 그리고 베드로후서에서 '경건'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올바른 행실의 총화이다. 사도행전을 제외하면 신약성경은 그리스 세계에서 사용되던 '경건' 용어의 기독교적인 수용을 보여준다.
IV. 신약성경에 나타난 '경건' 개념의 특징
1. 사도행전에 나타난 '경건' 용어의 특징
우선,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경건'은 비(非) 기독교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즉 사도행전은 '경건'이 그리스 세계 안에서 사용된 용례를 보여준다. 그리스 세계에서 이 용어는 부모나 죽은 자, 국가나 법 등에 대하여 "경외하는 제반 행동에 대한 표현," 곧 "가족적, 국가적, 그리고 국제적인 전체 삶을 고려하는 질서에 대해 … 경외하는 품행"으로 신들이 이 질서를 보증한다고 생각되었기에 간단하게 '경건'으로 통용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eusebeia는 "공동생활을 지탱하고 신들의 보호를 받는 질서들을 존중하는" 자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였다. 이러한 세상 질서에 대한 존중함과 이방신을 경외하는 종교심의 결합은 euseb- 어군(語群)에 속하는 단어가 나타나는 이방인 고넬료 기사(행 10:1-8 참조)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아덴 사람들의 종교적인 행위에서(행 17:16-31 참조)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eusebeia는 때로는 이교적인 신앙에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암시하기도 하였다(행 3:12; 14:11-13 참조).
2. 목회서신에 나타난 '경건' 용어의 특징
목회서신에서 eusebeia는 사도행전과 달리 기독교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 용어는 단순하게 보편적인 사회의 질서규정을 긍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독교적인 신앙과 삶의 행실이나 태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경건의 비밀"(딤전 3:16)이며, 그리스어인 '경건'은 기독론적인 근거 안에서 수용된다(딤전 3:16; 6:3; 딛 1:1). 이 '경건'은 믿음 안에서 "진리의 지식"(딛 1:1)과 "건전한 교훈"(딤전 6:3)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러니까 목회서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경건한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경건한 삶이다. 그러므로 이런 삶은 단순하게 세상 질서에 순응하는 고요한 시민적인 삶이 아니라, 오히려 때에 따라서는 그 반대의 삶이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eusebōs) 살고자 하는 자는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수도 있다(딤후 3:12). 한 마디로 말하면 경건은 그리스도 사건 안에 뿌리내려져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품행이다. 이러한 기독교적으로 특화(特化)된 경건은 목회서신에 나타난 '투쟁'의 주제(Motiv)에서도 입증된다(딤전 1:18; 6:12; 딤후 2:5; 4:7 등 참조). 그러니까 목회서신에 나타난 '경건'은 유대교에서처럼 율법으로써 규정되지 않으며, 그리스 세계에서처럼 어떤 '덕목'(德目)이나 '이상'(理想)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과의 관련성 안에서 바른 "교훈을 위하여 규범을 제공할 수 있는 일종의 품행"이며 규범성을 지닌 실천적인 삶의 표현이다. 환언하면 eusebeia는 "삶의 질서 안에 있는 예배"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모든 인간의 창조자요 구속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에서 나온 품행과 삶으로서 경건은 믿는 자들이 연습할 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유익을 줄 수 있으며(딤전 4:8; 6:6), 믿지 않는 "외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딤전 3:7; 6:1; 딛 2:5. 8. 10 참조).
요약하면, 목회서신에 나타나 '경건' 용어에서는 그 종교적인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가 서로 공속(共屬)되어 있다. 이 용어 안에 신학과 윤리가 통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eusebeia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동 안에 근거를 두고 있는 신학적인 강세를 가지고 있으며(딤전 3:16; 딛 1:1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신학적인 강세와 일치하는 단정한 행동 안에서 나타나고 구체화되는 윤리적인 강세도 함께 가지고 있다(딤전 3:7; 딛 2:1-10 참조). 그러므로 목회서신에서의 '경건'은 세상질서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주어진 구원질서에 부합된 행동과 삶의 태도를 나타내며, 그런 자세와 태도로 행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품행이요 행실이다.
3.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경건' 용어의 특징
베드로후서에서도 eusebeia는 목회서신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사도행전과는 달리 기독교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실행되는 인간의 수평적인 삶과 수직적인 삶을 의미하는 "삶과 경건"은 그 기독론적인 근거 내지는 신론적인 근거(벧후 1:2, 11)와 함께 종말론적인 근거(벧후 3:11)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삶의 신학적 근거 외에 베드로후서에서는 목회서신보다 더 행위적으로 특화된 경건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후서 배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맞서고 있는 거짓 교사들은 목회서신의 거짓 교사들의 금욕주의 대신 자유방종주의를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에서 '경건'은 불경건한 행위 내지는 불법적인 행실의 반의어로 구체적인 '자비'나 '선행'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eusebeia의 복수 형태인 eusebeiai가 세부적인 개별행동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된 구절에서 분명하게 입증된다(벧후 3:11). 이런 경건의 행위는 종말 심판시 구원에 있어서 분명히 어떤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건의 행위가 믿음과 함께 제 2의 구원요소로 작용하는 '신인(神人) 협력설'(synergism)의 의미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믿음에 통합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베드로후서 역시 다른 모든 신약성경에서처럼 구원의 직설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벧후 1:9; 2:2 참조).
V. 나가는 말
위에서 조사한 대로 신약성경에서 '경건' 용어는 비(非) 기독교적인 용례를 보여주는 사도행전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면 모두 후기의 신약성경에 나타나는데, 믿음에서 난 행함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목회서신과 베드로후서에서 그리스어 eusebeia가 기독교적으로 새롭게 규정되었다.
곧 '경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직설법)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요구되며 또 그에 부합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의 행동과 삶(명령법)을 표현하는 신약성경의 후기 문서에 나타나는 용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웃과 주변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의 태도이며, 이러한 삶의 자세로 받은 바 구원의 선물에 합당한 삶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동에 대한 총칭어(總稱語)이다.
한국 교회는 경건한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한가? 그리고 한국 신학교의 신학도들은 경건한가? '경건'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삶과 행동에 관련되어 있는 포괄적인 용어라면 단순하게 성경 읽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종교적인 것만으로 그 경건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에 부합되게 일상생활 안에서 실천되는 '빛과 소금'(마 5:13-16 참조)의 의미를 지닌 윤리적인 삶과 행동이 없이는 그것은 다만 반쪽의 경건에 불과할 것이다. 무엇이 '참된 경건의 표지'(notae verae pietas)인가? 그것은 교회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에 있는 교회 밖의 "외인"들을 교화(敎化)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전파'와 '사랑의 섬김'이다. 이러한 실천적 경건만이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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