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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제 1권 1-41편

스펄젼의 시편 35편 강해

by 은총가득 2022. 7. 4.

   스펄젼의 시편 35편 강해

   

개요

  

주제

다윗의 시.” 우리가 이 시편에 관해 알 수 있는 내용은 이것이 전부이지만, 내부적 증거에 의하면 이 시편의 저작 시기는 다윗이 사울에 의해 이 언덕과 저 골짜기로 추격당하던 시련의 때인 듯하다. 당시 그 잔인한 왕에게 아첨을 떨던 자들은 그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무고한 다윗을 비방하였다. 혹은 다윗이 잦은 반역들로 인해 소란스러웠던 노년 시기에 이 시편을 지었을 수도 있다. 전반적으로 이 시편은, 억압과 적의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자가 담대한 마음과 분명한 확신 가운데 하늘에 호소하는 내용이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우리도 여기서 다윗의 여호와를 분명 만나뵐 수 있다.

  

구성

이 시편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구분 양식은 그 삼중적 특성에 착안하는 것이다. 즉 불평, 기도, 찬양의 약속 등이 세 차례에 걸쳐 평행을 이루며 반복되는 것이다. 

첫 부분은 1절에서 10절까지며, 

둘째 부분은 11절에서 18절까지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19절에서 28절까지에 해당한다. 각 부분은 감사의 노래로 끝맺는다.

  

  

강해

  

1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2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3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4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5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6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7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8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9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10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를 공박하는 자들을 공박하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들과 싸우소서. 나를 위로하는 자들을 위로하소서. 만일 그들이 법정에서 소송을 제기하면, 여호와여, 거기서 그들과 만나사 그들 자신의 무기로 그들을 치소서. 하나님의 모든 성도는 이러한 특권을 지닐 것이다:형제를 고소하는 자는 그 성도들의 변호자 되신 여호와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만일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술수뿐만 아니라 폭력을 쓰려고 시도한다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상대해 주소서. 주의 권능으로 그들의 힘을 물리쳐 주소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모든 자들을 위해 그렇게 하신다. 그들을 위해 그분은 중재자와 옹호자가 되신다. 그들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무엇이든 그분으로부터 얻을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당하든지 그들은 효과적으로 보호받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반드시 여호와의 손에 맡기도록 하자. 사람의 도움은 헛되지만, 하늘로부터의 중재는 항상 놀라운 효력을 발휘한다. 여기서 소원으로 간구되고 있는 사항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의 약속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들은 심판 때에 하나님의 변호를 들을 것이며, 전쟁 때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2.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생생한 은유를 통해, 여호와께서 전투를 위해 무장하고 나서시며 또한 그분의 종과 그분의 대적들 사이에 개입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 방어 무기들은 섭리를 통한 그분의 크고 작은 보호들을 시사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여호와께서 일어나신다는 것은 위험에 처한 그분의 종을 열정적으로 보호해 주심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시적 이미지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을 얼마나 절실하게 자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기자가 생각하기에 그분은, 곤경에 처한 그분의 종을 위해 진정으로 역사하시는 실제적이며 진실한 인격이셨다. 

  

3.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대적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여호와는 마치 긴 창을 지니신 것처럼 그들을 밀어붙이실 수 있다. 곤경을 저지하는 것은 결코 사소한 연민의 행동이 아니다. 어떤 용감한 전사가 창을 들고 좁은 길을 막아서서 자기보다 약한 동료들이 순조롭게 탈출할 때까지 상대방 군대를 저지하듯이, 종종 여호와께서는 신자가 호흡을 가다듬기까지 혹은 대적들로부터 완전히 달아날 때까지 그의 대적들을 막아 서신다. 또한 그는 시온의 대적들에게 다른 할 일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교회에 안식을 베푸신다. 여호와께서 박해자들의 길을 가로막으시며 창 끝으로 그들을 저지하시고 또한 쫓기는 성도에게 그들의 추격을 피할 시간을 주신다는 것은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개념인가!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여호와께서는 대적을 저지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으로 하여금 전능자의 날개 아래에서 안전하며 또한 안전할 것이라고 직접 말하도록 하심으로써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전을 내적으로 확신하는 일은 혹독한 핍박 가운데 처한 자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 한마디가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진정시킨다.

  

4.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여기에는 악의가 전혀 없다. 비방당하는 자는 단지 공의를 갈망하며, 이러한 간구는 자연스럽고도 정당하다. 하나님의 선하신 영에 인도되어, 시편 기자는 의인을 미워하는 모든 자들에게 임할 영원한 혼란을 예고한다. 복음의 대적들에게 돌아갈 몫은 수치스러운 실망일 것이며, 이 점에 대해서는 가장 온유한 마음을 지닌 그리스도인도 달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우리는 죄인들도 사랑하고 그들의 유익을 구하겠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대적들로 볼 때 우리는 그들을 혐오 대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며 그들의 술책이 수포로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고지식한 감상은 여기 사용된 강한 어투에 반발할 수 있지만, 모든 선한 자들은 해악을 끼치는 자들의 파멸을 진심으로 바란다. 

  

5.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그들은 공격을 감행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신속했지만, 이제 신속하게 달아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양심의 불안으로 인해 낙담할 것이며, 그리하여 지극히 약한 환난의 바람이 불어도 이리저리 뒤흔들릴 것이다. 불신자들의 성품은 무가치하고, 그들의 행위는 가벼우며, 그들에게는 견고함과 안정감이 결여되어 있다. 스스로를 겨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이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무자비한 자들에게 이러한 저주가 실현될 때, 그들은 영원토록 쉼을 얻지 못하며, 마음의 평안이나 영혼의 휴식이 없고, 연이어 공포에 직면하며, 연거푸 고통당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두려움에 떨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타락한 천사들이 그들과 함께 지낼 것이며, 선한 천사들은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다. 박해를 즐기는 자들은 보응하는 영들의 추적을 받을 것이다. 시편 기자가 묘사하는 전체 장면을 살펴보라:먼저 사나운 대적이 저지당하고, 그 다음에 물러나며, 그러고는 황급히 도망간다. 그러고 나서 불같이 무서운 사자들의 추격을 받는다. 그 사자들의 추격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그 대적의 행로는 어두컴컴하고 위험스러워지며 파멸이 그를 압도한다.

  

6.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기에는 그 얼마나 두려운 일들이 암시되고 있는가! 빛도 없고 설 땅도 없으며, 사나운 보복자가 바짝 뒤쫓아 온다! 하나님의 대적들에게 정해진 운명은 그 얼마나 비참한가! 오늘은 그들이 호통치며 설쳐댈 수 있지만, 오래지 않아 그들의 처지가 그 얼마나 판이하게 바뀔 것인가!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그는 결코 돌이키지 않고, 그들에 대한 보응을 실행하는 일을 맡은 신실한 종자처럼 황급히 그들을 쫓을 것이며, 당당한 공의의 이름으로 그들을 체포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리는 자들에게는 화가 임할 것이다. 그들에게 임하는 파멸은 신속하고 분명하다.

  

7.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이 마귀의 종들을 고발하는 주요 취지들을 제시한다. 

"무고히." 그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들을 공격하거나 혹은 그들을 자극하지도 않았는데, 그들 자신의 자발적인 악의로 말미암아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겼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잔꾀와 속임수로 시합에 임하는 것과 같다. 종종 순진한 사람들은 숨겨진 함정 속으로 떨어져 그물에 걸린 짐승과 같은 처지에 직면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상대방의 적의가 부당하며 자신 측에서의 의도적인 공격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다윗은 본절에서 자신의 대적자들이 자신에 대해 "무고히" 음모를 꾸몄다는 점을 두 차례에 걸쳐 확언한다. 그물을 만들고 함정을 파는 일은 시간과 수고를 요하며, 만일 악인이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릴 수만 있다면 그는 이 일들을 흥겹게 추진할 것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공정한 전투를 치루지만,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은 비열하고 무자비한 궤계를 선호하며, 따라서 그들의 성격과 뿌리를 입증해 준다. 우리 모두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덫과 함정들은 아직도 악의 세력들이 좋아하는 무기들이기 때문이다.

  

8.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이 무서운 저주는 자주 성취되어 왔다. 하나님의 심판들은 종종 갑작스럽고도 상징적으로 실행된다. 죽음은 핍박자의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곧바로 들이닥친다. 심판의 번개가 그 은신처로부터 튀어나와, 단 일격에 악인들을 영원히 쳐부술 것이다.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종종 하나님은 동해보복법을 매우 탁월하게 적용하신다. 덫을 놓은 사람들은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매고 만다. 그들이 돌을 던지지만, 그 돌은 자신의 머리에 떨어진다. 사탄이 스스로 계략을 꾸미지만 자신의 석탄으로 자기 손가락을 태우는 경우가 얼마나 잦은가! 분명 지옥의 고통 중 하나는, 사람들이 한때 반역적인 마음으로 애용했던 술책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일 것이다. 그들은 저주하고서 저주를 당한다. 그들은 가시를 걷어 차고서 자기 자신을 찢는다. 그들은 화염을 쏟아내며, 그것이 그들을 안팎으로 불사른다.

  

9.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구출된 다윗은 모든 영광을 정의의 심판관께 돌리며, 자기 자신의 용맹성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대적들로부터 하나님께로 관심을 돌이켰으며, 깨트려질 수 없는 깊은 기쁨을 여호와 안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그 기쁨에 한껏 골몰한다.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파멸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기뻐한다. 기도 응답을 받은 기쁨은 항상 찬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자신의 거룩한 기쁨을 더 많이 드러낼수록 좋다. 우리가 그러한 기쁜 감정을 억누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10.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마치 혀로써는 하나님께 충분한 찬양을 드리기에 부족한 것처럼, 다윗은 모든 지체들로써 말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인체로부터 감사의 노래가 울려나오게 한다. 대적들에 의해 부러뜨려질 수도 있었던 뼈들이 이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 모든 뼈들이 감사를 표할 것이며, 자기 백성의 구주이신 여호와께 비길 수 없는 탁월한 영광을 돌린다.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설령 살갗과 뼈가 찢기고 손상을 입을지라도, 내 해골은 여전히 여호와를 높일 것이다. 하나님은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옹호자시며 진정한 의협심을 가진 분이시다. 하나님의 겸비하심, 공의, 자애, 권능, 그리고 긍휼 등이 그토록 많이 임한 곳에서는 당연히 가장 숭고한 노래가 불리워야 한다. 독자들이여, 여러분은 죄와 사탄과 죽음으로부터 구원되고서도 구속주께 찬양을 돌리지 않겠는가? 여러분은 가련하고 연약했지만, 적절한 때에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찾으사 해방시키셨다.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라.

  

11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12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13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4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같이 하였도다

15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 아니하도다

16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17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18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1.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이는 불신자가 사용하는 오래된 술책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우리 주님께 닥쳤듯이 우리에게도 발생한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사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윗을 비방하는 자들은 항상 많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그에게는 반란 의사가 조금도 없었으며,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충성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대적하여 역모를 꾸민다고 고소했다. 그는 결백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지적된 잘못을 알지도 못했다. 우리의 손이 너무도 깨끗하여 더러운 것이 묻은 자국도 없다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12.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이는 마귀적인 방법이다. 사람들은 옛 파괴자(사탄을 지칭함역자 주)의 가르침을 잘 익혀서 그것을 매우 완벽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다.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그들은 그에게서 위안을 강탈해 갔고, 만일 하나님의 손길을 통한 특별한 구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의 생명마저 빼앗았을 것이다. 악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의인의 영혼까지 벌거벗기려 할 것이다. 그들은 동정심을 알지 못한다. 인간 속에 자리잡은 악의의 한계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13.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다윗은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울의 건강이 쇠약해졌을 때 애통해 하였고, 마치 친한 벗이라도 되듯이 슬퍼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 상복을 입었다. 병약한 주군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너무도 아팠다.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그는 자신의 대적을 위해 기도했으며, 그 병든 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겼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범죄로 인해 그러한 재앙이 임한 것처럼 자백하며 간청했다. 이는 다윗의 고귀한 영혼을 보여 주는 반면에, 그토록 잔인하게 그를 핍박했던 자의 비열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기도는 결코 잃어버린 바 되지 않는다. 만일 기도가 중보의 대상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그 축복은 중보 기도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수증기를 올려보낸 지점에만 항상 소나기가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어느 곳엔가에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간구의 기도는 누구에겐가 은총의 소나기를 내리게 한다. 만일 우리의 비둘기가 우리 대적들 가운데 머물 곳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평화의 올리브 가지를 입에 물고서 우리 품으로 다시 날아올 것이다. 이 시편 전체를 통해 의인과 그의 대적들이 그 얼마나 예리하게 대조되고 있는가! 우리는 그 경계선을 확연하게 보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4.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나는 부지런히 그의 시중을 들었고, 그를 따뜻하게 위로했으며, 또한 그의 입장을 깊이 동정했다. 이는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여 사울을 괴롭혔던 악령을 쫓아내었던 시절에 대한 언급일 수 있다.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같이 하였도다." 그는 애곡하는 자들처럼 머리를 숙였다. 그가 느낀 슬픔은 자연적인 슬픔 중 가장 심한 것이었다. 대개 어머니란 가장 깊은 애정의 대상이며, 어머니를 잃었을 경우 가장 예리한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다윗의 슬픔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오늘날 그러한 동정심을 가진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복음 아래에서는 율법 아래에서보다 훨씬 더 온유한 사랑이 존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더 많이 가지고 또한 그들에게 닥치는 무수한 곤경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낸다면, 우리는 훨씬 더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될 것이다. "가장 잘 사랑하는 자가 기도를 가장 잘한다."

  

15.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내가 다리를 절뚝거릴 때 그들은 기뻐했다. 나의 불구 상태가 그들에게는 희롱거리였다. 내게 위험이 가까워 오자, 그들은 나의 패배를 기대하며 노래를 불렀다. 선한 사람이 다리를 저는 모습은 악인을 그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그들은 "이제 그가 파멸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즐거워한다.

  

"서로 모임이여." 마치 매와 독수리들이 죽어가는 양 주위로 몰려들듯이, 그들은 나의 파멸을 통해 공통의 기쁨을 발견하고, 나의 슬픔을 즐기며, 또한 함께 모여 잔치를 벌였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어 궁리하고 입으로 거짓을 발한다.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채찍을 맞아야 마땅한 자들, 곧 발바닥을 두들겨 맞을 필요가 있는 자들이 함께 와서 음모를 꾸미며, 은밀한 모임을 가졌다. 병든 사자 곁을 서성거리는 들개들처럼, 그 치사하고 비열한 자들은 한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자를 조롱하며 모욕했다. 불구자들이 사악한 패거리에 합류하기 위해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왔다. 악의 세력들은 서로 의견을 얼마나 잘 맞추는가! 사람들은 그 얼마나 열성적으로 마귀를 섬기는가! 그들은 큰 힘이 없어도 마귀 섬기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그 모든 일은 나의 등 뒤에서 이루어졌다. 온 세상이 혼란 속에 휩싸여 누가 그렇게 했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 아니하도다." 선한 사람의 성품을 갈갈이 찢는 것은 너무도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에, 중상하는 자들이 일단 손을 펼치면 그 손을 거두려 하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악의적인 험담들과 비교하면, 자신의 먹이를 찢는 개떼의 모습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 복음을 사랑하는 자들이 옛적처럼 찢김을 당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유순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 덕분이다.

  

16.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흥을 돋우기 위해 연회장 주위를 돌아다니며 히죽거리는 직업적인 어릿광대와 같이, 그들은 선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 그들의 조롱은 단순히 웃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고 거센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처럼, 혹은 한 조각 빵을 얻기 위해 조롱하는 사람들처럼, 고용된 이 악인들은 사울의 식탁에서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다윗을 핍박했다. 더욱이 그들은 이새의 아들이 자신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던 까닭에 그에게 악의를 품었다.

우리 주님은 이 구절의 말씀을 매우 강력한 어조로 사용하셨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고 버림받은 자의 모습이 여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갈보리와 십자가를 둘러싼 야비한 패거리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는 듯하다.

  

17.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어찌하여 바라보고만 계십니까? 어찌하여 당신의 종에 대해 그렇듯 무심하십니까? 주께서는 무관심하시나이까? 주님은 우리가 멸망당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여호와께 궁금증을 털어놓을 수 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친숙함을 허락하신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때가 정해져 있지만, 자신의 성마름으로 인해 종종 구원이 몹시도 더디게 임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그 시점이 정해져 있으며, 그 무엇도 그것을 지연시키지 못할 것이다.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그들의 수많은 계교들과 그들의 허다한 공격들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내 유일한 것을." 유일하고 소중한 내 영혼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그의 대적들은 젊은 사자들처럼 사납고 교활하며 또한 강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아가리들로부터 그를 구하실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맡긴다.

  

18.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목할 만한 구원 사례들은 기록으로 남겨져야 하며, 그 명성은 기림을 받아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나타난 사례들을 전해 들어야 한다. 그것은 가장 큰 집회에 합당한 주제이다. 한 신자의 체험은 우주적인 집회에서 주제 삼기에 적합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사례들을 발표하지만, 선한 사람들은 자신이 체험한 은총들을 선포해야 한다.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나는 친구들과 대적들 가운데서 내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우리는 찬양개인적 찬양, 공적 찬양, 영속적인 찬양이라고 하는 세금을 하늘에 계신 왕께 매일 바쳐야 한다. 그래서 두번째로, 다윗의 기도는 찬양으로 마감된다. 모든 기도가 그러해야 하듯이.

  

19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20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21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22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23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24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25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26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27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28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19.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그의 진지한 기도 내용인즉, 그들이 까닭 없이 적의를 보이므로 그들이 그의 어리석음이나 죄 혹은 파멸 등을 기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눈을 깜박이는 것은 그들의 희생 제물이 파멸에 처한 것을 자축한다는 비열한 표현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경멸하는 자에게 보내는 조롱하는 몸짓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증오심을 일으키는 것은 악인의 표시이며, 의인은 까닭 없이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하나님은 부당한 대우를 받는 모든 이들의 보호자 되시며, 모든 압제자들의 대적이시다.

  

20.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그들은 화평을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 자신이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들이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화평을 도모하는지에 대해 판단하지 못한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오는 법이다. 폭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반란자라고 비난한다.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다윗은 기꺼이 질서를 존중하는 백성이 되고자 했지만, 그들은 그를 반란자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그는 올바른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마치 늑대들 가운데 있는 양들처럼 전혀 해악을 끼치지 않는 선한 사람들에게 반역자의 낙인을 찍는 것은, 오래전부터 대적이 사용해 온 술책이다. 해악을 끼칠 마음을 먹으면 곧 그렇게 된다. 비양심적인 패거리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가리켜 가이사에게 반역을 일으키려 하는 자로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중상모략을 동원하여 다윗의 집을 고발하기란 한층 더 쉬웠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왕 되신 예수님의 왕권을 옹호하는 자들이 교회의 적, 가톨릭 지지자, 무신론자들의 친구, 반역자, 혹은 빨갱이 등으로 불리우는 경우가 있다. 빌링스게이트(런던의 어시장으로서, 거기서는 상스러운 욕지거리가 난무했다역자 주)와 바벨론은 같은 부류이다.

  

21. "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마치 그들이 그를 삼키려는듯이, 심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을 수도 있다. 그들의 사악한 비난에는 한계가 없었으며, 온갖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는 마치 그 모든 비난들 중 일부는 맞아떨어지리라고 믿는 것 같았다. 

  

"하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있지도 않은 결함이나 재난을 찾아내기를 기뻐하거나, 혹은 악행을 보았노라고 거짓 맹세하기를 기뻐한다는 것이다. 악의의 눈은 애꾸이다. 그것은 자신이 대적하는 자의 모든 미덕은 보지 못한다. 대체로 마음에 원하는 바가 눈에 보이는 법이다. 자기 눈에 티끌이 있는 사람은 태양 속에 점이 박힌 것으로 본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서 환호성을 지르는 자는 못된 나귀와 같지 않은가! 선한 사람의 실패에 대해 하이에나처럼 웃는 자는 그 얼마나 마귀 같은가! 악의는 어리석은 것이다. 악의 품은 자들이 잔치를 벌일 때 그들의 억양과 몸짓은 너무도 변덕스럽고 허례허식적이다.

  

22.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여기에 위로가 있다. 우리의 천부께서는 우리의 모든 슬픔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결코 꺼지지 않는 성도의 촛불이다.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모욕당하는 것을 오래도록 참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택하신 자를 위해 보응하시지 않겠는가?

  

"잠잠하지 마옵소서." 오 여호와여, 주의 대적들과 저의 대적들을 질책하소서.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내 성품을 정케 하시고, 내 마음을 위로하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화염 속을 저와 동행하소서. 제가 형틀에 매였을 때 내 편에 서소서. 하나님의 다정하신 임재는 핍박받는 자들을 위한 신령한 강심제이다. 반면에, 그분의 부재는 그들에게 있어 가장 뼈저린 고통이다.

  

23. "떨치고 깨셔서." 분발하소서. 주께서 이 모든 파렴치 행위들에 대해 무관심한 분이 아니심을 증명하소서. 

  

"나를 공판하시며." 홀을 잡으시고 큰 재판을 여소서. 공의를 수호하시며 억압에 대해 보응하소서. 잠든 사람들처럼 지체하지 마소서.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 친근한 사이임을 주장한다. 그는 두 손으로 그분을 붙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송사를 의로우신 재판관께 맡긴다. 그는 소송이 진행되고 진술이 실시되며 심리가 이루어지고 또한 판결이 나게 되기를 간청한다. 자신의 양심이 그토록 깨끗하여 담대히 그와 같은 호소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2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여기서 앞의 호소가 반복된다. 원고는, 공의로운 판결이 진행되자마자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의 기쁨이 그칠 것이라고 느낀다. 의로우신 여호와가 재판장석에 앉으실 때, 억압자들의 그릇된 행실과 교만한 자의 오만과 어리석은 자의 우거지상 등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25.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의 입이 먹이를 삼키고자 할 때 그들로 실망하게 하소서. 성도들은 악의 세력의 먹이가 되기에는 너무도 귀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양들을 핍박자들의 늑대 같은 아귀에다 넘겨주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목소리를 가다듬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의 입술에서는 조소가 새어나올 것이다. 그들은 너무도 확신에 가득 차 있고 너무도 거만하다. 그들은 중요한 사항을 빠트리고 있다:그들은 자신의 계획한 바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에 대해 거의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새는 날아갈 것이며, 그들 자신이 덫에 걸릴 것이다. 본문의 기도는 하나의 약속이다. 악인들의 입술이 기쁜 탄성을 발하기도 전에, 그들은 낙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말이 제지당할 것이며, 그들의 바람들이 실망에 부딪힐 것이고, 또한 그들의 교활한 속임수가 노출될 것이다. 

  

26.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이 수고하여 마련한 간교한 술책들의 영원한 결말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다. 비록 그들이 "자긍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실 것이다. 그들이 주의 백성을 모욕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로 수치를 당케 하실 것이다. 그들이 혼란을 조성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혼란에 빠트리실 것이다. 주께서 그들의 멋진 정장을 벗기시고 불명예스러운 누더기 옷을 주실 것이며, 그들의 모든 즐거움을 울부짖음으로 변하게 하시고 또한 이를 갈게 하실 것이다. 진실로, 성도들에게는 기다릴 여유가 있다.

  

27.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다윗은, 자신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나마 그를 위해 주었던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풍성한 상급이 베풀어지기를 원했다. 온유한 심령을 지닌 자들은 여호와의 백성의 선한 소원과 기도로 말미암아 큰 유익을 얻는다. 예수님도 자신의 취지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상을 베푸신다. 그리스도 편에 선 모든 자들이 승리의 환호를 외칠 날이 도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에는 전투가 마감되고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완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그들은 다윗을 여호와의 종으로 여겼으며,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은총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직함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직함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우리의 형통을 기뻐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큰 상급은 없다. 참된 형통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가 항상 최선의 판단을 내리지는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최선의 유익이 돌아오도록 모든 일들을 착오없이 주관하실 것이다.

  

주의 종들을 통해 분명히 고백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최선이라고.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다윗은 그들의 기쁨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게 하고자 했다. 그들은 다윗에게 찬사를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을 위해 환호를 질러야 했다. 그러한 환호성은 시간과 영원을 통해 줄곧 지속될 수 있다. 

  

28.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기서는 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부단한 찬양을 서원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감사하며 노래할 것이며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 그러한 결심은 우리 모두에 의해 실행되어야 할 사항이다!

 

 

주해

  

 35편 전체. 보나(Bonar)는 이 시편에 대해, "무고히 미워하는 자들에 대한 의로우신 분의 무서운 선언"이라는 머리말을 붙인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주 예수님은 영원토록 친히 아버지를 찬양하실 것이며, 그분의 ''를 강조하실 것이다. 그 의는 구속주를 미워했던 자들의 운명을 통해 그리고 그분을 영접한 자들의 구원을 통해 드러났고 또한 드러날 것이다. 그분께 속한 자들은 이 모든 일들에 온전히 참예할 수 있으며, 특히 공의에 대한 그들의 견해가 지금보다 한층 더 분명하고 온전해질 그날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날에는, 사무엘이 어떻게 아각을 찍어 쪼갤 수 있었는지를, 그리고 이스라엘의 경건한 군대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의 남녀와 아이들을 어떻게 철저히 진멸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35:4)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고통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서 '할렐루야' 찬양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19:1, 2). 이제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 시편의 매 구절을 사용하되, 심판주께서 이를 언급하실 때와 같은 정신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그분과 더불어 세상을 판단한다는 느낌을 갖는다(고전 6:2). 모든 사건들과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 기록된 말씀이 모두 성취될 그날에 이 말씀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앤드류 보나(Andrew A. Bonar).

  

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1) 당신이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므로 세상이 당신을 정죄하는가? 당신이 줄곧 선행을 추구함으로 인해 비난과 경멸을 당하는가? 세상이 당신을 가리켜 너무 까다롭고 특이한 체하며 또한 바리새인적 위선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가? 하지만 이 모든 상황 중에서도 만일 당신의 양심이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는다면,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교정받는다면, 만일 당신이 자신의 구원을 추구함에 있어 그분의 영광을 목표로 삼고 교회를 분란케 하는 자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선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계속 경건에 매진하며, 칭찬받아 마땅한 수고를 하면서 스스로 낙심하지 말고, 여호와께서 당신의 심판관이시며(고전 4:4)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안다"(딤후 1:12)는 사실을 생각하며 위로로 삼으라. (2) 당신은 허물 많은 세상 법정에서 부당한 판결을 받았는가? 진리와 의가 제자리를 이탈하였는가? 공평함이 무시되고, 빈곤이 만연해 있는가? 그렇다면 잠시 인내심을 갖고서, 낙심에 빠져드는 당신의 영혼을 격려하라. 당신의 결백한 사정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그분께 최종적으로 호소할 자유가 당신에게 있다:"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3) 아니면 당신은 악인들의 손에 의해 상처를 입었는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 손해 배상을 위한 소송도 제기할 수 없을 정도인가? 니므롯( 10:68)이 당신을 억압하는가? 라반( 31:19)이 당신을 속이는가? 탐욕스러운 지주가 당신을 괴롭히는가? 그렇다고 해도 불법적인 과정을 통해 당신 자신의 손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라. 현재적인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당신 자신의 소송건에 대해 스스로 재판관이 되려고 하지 말라. 다만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제시한 가르침을 종종 기억하라:"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살후 1:6). 아이작 크레이븐(Sermon at Paul's Cross, 1630).

  

1. "다투시고." 보다 문자적인 번역은 '법정에서 다투시고'이다. ,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보응해 달라는 간구이다. 다니엘 크레스웰(The Psalms of David according to the Book of Common Prayer:with Critical and Explanatory Notes, 1843).

  

2. "방패와 손 방패." "방패"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마겐"(@gm)이며, 단지 방어만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방패를 가리켰다. 그리고 "손 방패"로 번역된 "치나"(hnx) "마겐"보다 갑절이나 무거운 것으로서, 보병이 들고 다녔다. "마겐"은 보다 가볍고 다루기가 쉬웠으며, 기병대용으로 쓰였다. 로마인들의 경우로 보자면, "치나"는 장방형의 큰 방패에, 그리고 "마겐"은 작은 방패에 각각 해당했다. "치나"로 불리운 방패는, 그 중앙에 큼지막한 볼록장식이 되어 있었고 단검이 꽂혀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고대의 전투에서 방어용 및 공격용 무기로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제임스 앤더슨(James Anderson).

  

3.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사울과 다윗의 시대에는 창이 인기 있는 무기였다(대상 11장 참조). 용사는 창 하나만을 들고 좁은 통로를 지키고 서서 상대편 군대를 저지함으로써, 자기 동료들에게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고대 동양의 전투에서는 이런 부류의 무용이 매우 탁월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웅적 수호자가 되어 주사 대적들의 공격을 멈추게 하시기를 원했다. C. H. S.

  

3. "빼사." 히브리어 원어상으로는 '텅빈'이라는 뜻이다. 이는 칼을 뽑은 칼집의 상태를 암시한다( 15:9  26:33). 헨리 에인즈워스(Henry Ainsworth).

  

3.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다음 사항들에 주목하라. (1) 우리는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다윗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결코 기도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베드로는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책무를 우리에게 지우려 하지 않았다:"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트집을 잡으려 드는 자들의 외침을 중단시키기 위해, 바울은 직접적으로 그 점을 증거하였다:"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알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정죄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나는 우리가 그 점을 확신할 수 있음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가톨릭교도들은 이 점을 부인하며, 정반대로 가르친다. ,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유감스럽고도 무분별한 교리가 과연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주는가? 하나님께서 많은 이들을 위해 쉽게 만드신 것을 만일 그들이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면,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49:6). (2) 가장 훌륭한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굳건하게 다지기를 원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 많이 알고자 노력하였다.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41:11). 하지만 그는,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라고 간구한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은 아무리 공고히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3. "내 영혼에게······이르소서." (1) 하나님은 '당신의 음성으로' 친히 말씀하기도 하신다. 따라서 그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확신을 심어 주셨다( 15:1). 만일 하나님이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면, 지옥이 두려워 떨 것이다. (2) 그분은 '당신의 사역'을 통해 말씀하기도 하신다:우리에게 주어지는 실제 은총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또한 정죄당하지 않을 것임을 드러낸다.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41:11). (3) 그분은 '당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실 수도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8). (4) 그분은 '당신의 성경'으로 말씀하실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편지이며, 그분의 특허품이다. 또한 구원의 모든 특권들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 구원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16:16). (5) 그분은 '당신의 사역자들'을 통해 말씀하실 수도 있다. 그분은 그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후 5:19). (6) 그분은 '당신의 성령'을 통해 이를 말씀하실 수도 있다:"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4:6). 이 모든 음성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자들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고 말씀하신다.

"." 영혼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없으며, 영혼의 위로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이를 통해 ""라고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를 배우자. 루터는 이르기를, 대명사들 속에 탁월한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마귀들에게도 흔한 믿음이다. 불량자들도 택함받은 자의 명단이 기록된 책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이 거기 기록되어 있다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는다. 잔칫집 대문 앞에서 굶주린 거지가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주인이 "이 음식이 당신을 위해 마련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머물 곳 없는 비참한 사람으로서는, '여기에 내가 거할 곳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멋진 도시를 지나가며 갖가지 웅장한 건물들을 보는 것이 자그마한 위로가 된다. 사파이어, 에메랄드, 감람석 등과 같은 귀한 보석들로 치장되고, 기초와 성벽들을 순금으로 만든,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도( 21), 그곳에 거할 곳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영혼에게는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주가 아니시라면, 그분의 충족스러운 공로도 당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시편 기자와 마찬가지로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119:57)라고 말할 수 있는 영혼은 복되다. 우리 모두 등잔에 기름을 채우자. 이는, 우리가 기름을 사려 하거나 구걸하거나 혹은 빌기 위해 이리저리 다닐 때 이미 문이 닫힘으로 인해 어리석은 자들처럼 혼인 잔칫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꼴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라고 기도하라.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그리고 언제 주시는가? 누가? '여호와께서!' 다윗은 여호와께 기도한다. 그는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왜냐하면 다른 그 누구에게도 구원이란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13:9). 세상은 실패하고, 육신도 실패하고, 마귀는 죽인다. 오직 여호와만 구원하신다. 무엇을? '구원을.' 구원이란 특별히 좋은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다. 하나님이 에서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네게 소유권을 주겠다"고 하셨다. 사울에게는, "내가 네게 왕국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룟 유다에게는, "내가 네게 사도직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분이 다윗에게는, "내가 네 구원이 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하다. 누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바로 '네게.' 단순한 사람과 그리스도인은 서로 별개의 피조물이다. 이성과 외적 축복을 지닌 자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란 오직 믿음을 지닌 자요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예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풍성한 구원이 되시지만, 누구나 그 구원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해 천국을 잃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 '지금.' 이는 "나는······이라"는 현재형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내가 너희를 구속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포로 상태의 이스라엘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네 구원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소망의 실현이 지연되면 심약해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류시키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다음 사실만큼은 지체되지 않게 해주십사 하고 기도해야 한다:"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토머스 애덤즈의 글에서 요약함.

  

4.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여기서 다윗은 대적들에게 화가 닥치기를 기원하기 시작한다. 데오도레트에 의하면, 다윗이 저주를 발하였다기보다는 예언을 하였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때에라도 그런 식의 기원을 한다면, 우리는 다음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먼저, 우리의 동기가 선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개인적 보복 차원에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셋째, 우리가 그런 식의 언급을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영의 인도에 따라야 한다. 존 트랩.

  

48, 26. 보복을 위한 이와 같은 간구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러한 간구들이 발견되는 시편들은 7, 35, 69, 그리고 109편 등 네 편이며, 거기서 이런 형태의 저주는 극에 달하며, 무려 서른 가지 이상의 저주들이 언급되고 있다. 과연 이들은 단지 격정적이고도 성화되지 못한 감정의 분출에 불과한가, 아니면 정당한 의분의 표현인가? 우리는 이들을 가리켜 "엘리야의 심령"에 의해 고무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는가? 그 심령은 사실 불신적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부드럽고 온유하신 성품과는 현격한 거리가 있다. 혹은 이들은 헌신된 심령을 나타내는 판에 박은 듯한 유형인가? 이들은 유대적일 뿐인가, 아니면 기독교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가? 많은 이들은 교훈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시편들 읽기를 꺼려해 왔다. 집회 중에 이 내용들을 함께 읽도록 요청받을 때, 그들의 입술은 우물거리며, 또한 나지막한 음성과 의심하는 마음으로 읽거나 혹은 그 문자적 의미와 다르게 폭넓은 의미로 이해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해의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하면서, 그러한 내용을 바람의 표현이 아니라 예언적인 언급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단순한 미래형 문장과는 충분히 구별되는 히브리어 기원문에서는, 저주라는 방식이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에 의하면, 그러한 내용은 영적 대적들에 대항하는 영혼의 고투 과정에서 합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라고 한다. 끝으로, 혹자는 그 내용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의로운 열심의 표현이라고 옹호하려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만일 우리가 그러한 열심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덜 순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냉담해져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한편 어려움이 대두하는 진정한 원인은, 우리가 구약과 신약간의 본질적인 차이에 주목하지 않고 또한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데에 있다. 율법 시대는 모든 면에서 신약 시대보다 엄격했다. 엘리야의 심령은, 비록 악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심령은 아니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10).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제자들도 동일한 심령을 소유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심령은 옛 경륜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대 민족은 보다 엄격한 학교에서 수련을 받았다. 그들은 우상 근절이라는 명목으로 엄격하고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그러한 훈련은 필수적이었지만, 보다 온유한 미덕을 조장하려 하지는 않았다. 옛 경륜하에서는, 심지어 의인도 눈 앞에 보이는 악이면 무엇이나 근절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으며, 우리가 보기에 지나치게 옹호적인 듯한 어투를 사용하였다. 그런 식의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소위 "종교적 관용"이란 나쁜 것일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보복을 직접적으로 금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컨대, 레위기 19:18에는 "원수를 갚지 말며"라는 언급이 나온다. "동포를"이라는 제한이 붙어 있긴 하지만. 그리고 신약에도 저주 사례들이 발견된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딤후 4:14). "회 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23:3).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시편에 나오는 다양하고 의도적이며, 또한 상세한 저주들과는 매우 차이가 난다. 그리고 헹스텐버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주님의 선언들은 시편 내용과 전혀 평행을 이루지 않는다. 전자는 개인들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사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3)고 하는 위대한 진리를 엄숙하게 언급한 내용이다. 결국, 어떤 특정 구절을 언급하든간에,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사용된 전반적인 어조는 분명 서로 다르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모세를 높이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5:43; 19:8). 반면에, 이 저주들이 개인적 보복에 대한 열망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노래하는 자는 자신의 대적들을 보면서 하나님과 교회의 대적들을 보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와 함께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그를 삼키므로, 그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모조리 근절되기를 기도한다. 따라서 이러한 저주는, 비록 그 방향이 그릇된 듯이 그리고 그 언급이 너무 지나친 듯이 보일 수 있지만, 의롭다.

반복하거니와, 어두운 구름이 구약 성도들의 시야를 가리워 내세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없게 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의 대적들에게 보복해 주시기를 원하는 시편 기자의 바람에 대한 변명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문제가 얼마나 깊이 자리잡고 있었는지는, 그것이 시편에 허다하게 언급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자명하다. 그들은 그 의가 밝히 드러나는 것을 보기를 원했다. 이 땅에서 의인이 분명히 높임을 받고 악인이 분명히 파멸을 당할 때에만 비로소 그 의가 입증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눈을 항상 현세적 보응에 고정시키고 불신자의 파멸을 바라며 기도할 수 있었다. 내세에서의 무서운 일들은 대체로 그들의 시야로부터 가리워진 상태였다. 만일 그들이 이들을 볼 수 있었다면, 분명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35:6) 혹은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69:28)라고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과 같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라고 기도할 것이다. 스튜어트 퍼론.

  

4, 8, 26. 다윗은 거명될 수 있는 그 어떤 공적 인물들에 못지않게 보복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울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 준 그의 행위는 시종일관 고귀한 성품을 반영하였고, 복수에의 열망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시므이의 쓰라린 비난을 참았던 그의 온유한 성품은 그가 왕좌에 오른 후에도 그 같은 심령 상태를 유지하였음을 입증해 주었다. 

다윗의 전()경력을 분별력 있게 그리고 공정하게 돌아보면, 강한 의지와 정열이 온유하고 관대한 성품과 결합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갑작스럽게 분개가 끓어오르는 중에도, 그는 섣불리 보복 행위를 서두르지 않았다. 사실이 그러했으므로, 만일 그가 은퇴하여 하나님과 깊은 친교를 나누는 시기에 지어진 시들 속에서 그의 핵심적인 성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이상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특히 이 시들에서 그가 자신이 지은 죄의 극악무도함을 예리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는 무자비한 대적들에 관해 이렇게 확언할 수 있었다:"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같이 하였도다"( 35:13, 14).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7:35). 우리는 그 저주들에 대해 이러한 호소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석을 내리기 전에 두 번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자와 후자는 거의 같은 심령 상태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윌리엄 빈니.

  

5. "겨와 같게." 문자적으로는 "엉겅퀴의 갓털 같게"이다. 존 모리슨(John Morison).

  

6.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참으로 무시무시한 길이다! 어둠만으로도 무섭지 않은가? 미끄러운 길만 해도 누가 피해 가지 않겠는가? 당신은 어둡고 미끄러운 길을 어떻게 가겠는가? 발을 어디다 딛겠는가? 무지라는 어둠과 허영이라는 미끄러운 길, 이 두 가지 폐단은 큰 징벌에 해당한다.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서 있을 수 없게 하소서. 왜냐하면 어둡고 미끄러운 길에 있는 사람은, 발을 움직이면 구덩이에 빠질 것이고 자기 발 앞에 전혀 빛이 없음을 알 때, 아마도 빛이 비추기까지 기다리고 있겠다고 결심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을 멸하기 위해 지키고 서 있다. 어거스틴.

  

6. "미끄럽게." KJV 난하주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처럼, "미끄러움"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공포심을 더욱 증가시키는 상황이다. 그것은 어두운 길일 뿐만 아니라 비로 인해 미끄러워진 길이기도 하다.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은 매 순간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할 위험 속에 처해 있다. 알버트 반스.

  

7. "저희가······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다윗의 말인즉 다음과 같다:그들이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다 그물을 덮어 숨겨서 내가 그리로 건너가는 순간 거기 빠지게끔 했다. 데이비드 킴치(David Kimchi).

  

8.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우리는 이를, 근동 지방에서 남풍에 의해 야기되는 매우 갑작스럽고 격렬하며 또한 파괴적인 '폭풍'에 대한 암시라고도 볼 수 있다. 존 길.

  

8.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아히도벨더러 제마음대로 행동하게 하심으로써,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파멸로부터 보호하셨다. 골리앗이 자신의 칼에 찔려 죽고 거만한 하만이 모르드개의 등자를 잡고서 그의 영예를 높이는 역할을 맡아야 했던 사실에 대해 누가 찬탄하지 않겠는가? 악인은 그들 자신의 행위에 의해 파멸당할 것이다. 의인을 향해 쏜 그들의 모든 화살이 그들 자신의 정수리에 떨어질 것이다. 막센티우스(Maxentius)는 콩스탕탱(Constantin)을 익사시키기 위해 거짓 교량을 만들었지만 그 자신이 익사당하고 말았다. 프랑스의 헨리 3세는 프랑스 개신교들에 대한 잔혹한 살상을 궁리했던 바로 그 방에서 찔려 죽었다. 또한 그의 형제인 찰스 9세는 성도들의 피를 흘리는 일을 즐기다가 자신의 피를 보아야 했다. 그가 피흘린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핍박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기 위해 마련해 둔 올가미와 함정 속에 스스로 빠지게끔 하는 것은 하나님이 흔히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이는 오랜 역사를 통해 입증되고 경험되어온 사실이다. 비록 로마와 그 동맹국들이 의인들이들은 바알에게 절하기보다는 차라리 화형당하는 쪽을 택한다 을 괴롭히기 위해 올가미와 덫을 놓고 함정을 파지만, 잠시 괴로움을 참으며 기다려 보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놓고 판 덫과 함정에 스스로 걸려들게 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토머스 브룩스의 글에서 요약함.

  

8.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을 거스리는 너 어리석은 자여! 다른 사람에 대해 악한 일을 도모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자신의 함정에 떨어지며, 가장 간교한 사람도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든 올무에 스스로 걸려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에, 간교함이 없는 성품을 지닌 자는 높다란 종려나무처럼 꼿꼿이 서게 되며 억압을 받을 때 더욱 활기차게 일어난다. 피에트로 메타스타지오(Pietro Metastasio, 16981782).

  

9. "내 영혼이 여호와로 즐거워함이여." 위험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사실을 노래하면서, 혹자는 그것을 운이나 자기 자신의 능력 탓으로 돌린다. 그 모든 구원을 하나님 덕분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려 주신 은총을 잊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내 영혼은, 알지도 못하는 어떤 존재로 인한 구원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한다. 그 문제를 한층 더 강력하게 조명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뼈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하는 일을 맡긴다. 마치 자신의 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자기 몸의 모든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과장법 섞인 문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너무도 강렬한 나머지 자신의 헌신의 실제성과 진실성을 선언함에 있어 근육이든 뼈든 무엇이나 다 사용하고자 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보여 준다. 존 칼빈.

  

10. "내 모든 뼈가." 이 말 속에는 온몸과 온 영혼으로 체험하고 표현해야 하는 최고의 기쁨에 대한 가장 생생한 묘사가 내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영혼(9)과 자신의 모든 뼈들이 이제 막 그 기쁨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으로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온 마음과 온몸으로 즐거워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기쁨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기쁨이었고, 그래서 각 뼈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했다. 헤르만 베네마(Hermann Venema, 16971787).

  

10. "내 모든 뼈가." 성경에서는 감정을 대체로 내장과 연관지으며, 뼈들은 대개 반응을 잘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간주된다. 이곳과 시편 51:8에서만 넘치는 기쁨을 뼈들과 연관시키고 있다. 일반적 경험에 의하면, 열정적 흥분 상태에 공감하는 것은 자신의 내장이다. 반면에 뼈들이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거의 자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상당히 시적이며, 표현하고자 하는 기쁨이 일반적이며 평범한 즐거움을 훨씬 넘어선 것임을 시사한다. 그 기쁨은 너무도 심원한 까닭에 인간의 신체 중 가장 무감각한 부분조차 그것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시편의 내용 속에는 기초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설령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보다 확실한 자극을 받는 부드러운 지체들뿐만 아니라 모든 뼈와 근육까지도 우리의 마음 상태에 대해 실제적이고도 진실하게 공감하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C. H. S., 프란츠 델리취(Franz Delitzsch) Biblical Psychology 속의 한 구절에서 암시받은 개념.

  

10. "내 모든 뼈가." , '내 속에 있는 모든 힘과 활력을 다 동원하여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혹은, '비록 내게 남은 것이 살갗과 뼈뿐이라 하더라도, 그토록 궁핍한 처지에 직면해 있다고 하더라도 주를 찬양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존 트랩.

  

10. 나는 피골이 상접한 상태이지만, 내 모든 뼈들이 그분을 찬양하고 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2:4). 토머스 핼리버턴(Thomas Halyburton, 16741711).

  

11.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당신은, 어찌하여 하나님이 악인들로 하여금 경건한 자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을 그들에게 뒤집어 씌우도록 허락하시는가 하고 말할 것이다. ,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그들의 악행을 막으실 수 있었고 또한 악인의 입을 제지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자녀들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실 수도 있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인즉 이러하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최선을 이루듯이, 그러한 일들도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작용한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 백성의 유익을 위함이며, 따라서 그분은 악인의 소망을 좌절시키신다:그들은 경건한 자들에 대하여 악한 계교를 꾸미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여 선을 이루신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50:20)라고 말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을 거짓 되게 비방하는 자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다섯 가지의 유익을 베푸신다. 첫째,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 그들을 겸손하게 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게 하신다. 그리하여 설령 그들이 그러한 비난을 들을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과 그들 사이에 잘못된 것이 과연 하나도 없는지를 살펴보게 하신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더욱 겸손하게 행하며, 더욱 여호와께 가까이 매달린다. 둘째, 이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더욱 자주 무릎을 꿇게 하사 당신을 찾게 하시며, 그들의 입장을 호소하게 하시고, 또한 그들의 결백을 분명히 밝히게 하신다. 악인이 거짓 되게 시편 기자를 비방했을 때, 그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아뢰었던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그분께 가까이 매달림에 있어, 그리고 악인들로 하여금 그의 파멸을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함에 있어 그분께로 나아가는 은혜의 보좌에서 그는 얼마나 탄식하였던가! 그러므로 악인이 이러저러한 죄에 빠지는 의인의 모습을 보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윗처럼 보다 진지하게 '여호와여, 나를 지켜보는 자들 때문에라도 저를 옳은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악인이 바라는 범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유익이다. 셋째,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악인이 바라는 죄악에 빠져들지 않게끔 막는 예방약으로 삼기 위해 악인의 비방을 이용하신다. 경건한 자들은 새롭게 된 성품뿐만 아니라 새로워지지 않은 성품도 갖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그토록 겸비케 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자신을 지킬 수 없을 것이며, 악인에 의해 비방당하는 죄악 가운데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경건한 이들은 거짓된 비방을 당할 때, '내게 대한 비방거리로 삼고 있는 바로 그 죄악 가운데 내가 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혀를 이용하사 그런 죄악에 대한 경고로 삼으신다. 악인이 자신에 의해 꾸며진 음모를 그처럼 기뻐하는 것을 볼 때, 경건한 이들은 '만일 악인이 까닭 없이 그렇듯 기뻐한다면 타당한 원인이 있을 경우에는 얼마나 더 기뻐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에, 나는 이를 경고로 삼아 그러한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한다. 장차 도래할 때를 위해, 나는 이제껏 범해 온 죄보다 그 특정한 죄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경계하며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는 나로 인해 그런 식으로 기뻐할 기회가 결코 없을 것이다. 내가 분명히 믿건대, '만일 하나님이 악인의 혀를 예방약으로 사용하게 해주시지 않았다면 내가 그 죄에 대해 그토록 경계하며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을 것이다. 나 자신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만일 하나님이 이런 방법을 통해 나의 길에다 온통 가시 울타리를 치지 않으셨다면 나는 그러한 죄에 빠져들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세번째 유익이다. 넷째, 하나님은 이 수단을 통해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좋은 평판뿐만 아니라 악평에도 직면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은총이 임하게 하신다:그분은 과연 그들이 모든 상황 속에서 당신께 가까이 매달리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신다( 44:1517). 다섯째, 이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그릇되게 비난받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장차 도래할 시기를 대비하여, 그들은 이웃에 대한 거짓된 평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되어진 일의 자초지종을 이미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 같은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리고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해를 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악인들을 그 백성의 종이 되게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주어진 은총에 슬은 녹을 깨끗이 닦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방심을 바로잡기 위해 악인들을 막대기와 채찍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 막대기가 맡은 바 역할을 끝내고 나면 그것은 불 속에 던져진다.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이 그 백성에 대한 악인의 거짓된 비방을 선으로 바꾸시는지를 알게 된다. 스바냐 스미스(Zephaniah Smyth)의 설교(The Malignant's Plot, 1647).

  

12.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다윗이 행한 선으로 말하자면, 그는 골리앗을 죽이고 일천 명의 블레셋인들을 쓰러뜨려 자신의 나라와 그 왕을 구원하였다. 하지만 사울과 그의 신하들은 그를 시기하여 죽이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든 선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그들의 병든 몸을 치유하시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시는 등비난과 핍박을 받으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셨다. 그분의 백성도 이런 식의 취급을 당하지만, 그러한 악은 결단코 징벌당할 것이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17:13). 존 길.

  

12.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그들은 그의 육신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으로부터 위안을 빼앗았다. 마치 자신의 기쁨이요 도움이었던 아들을 잃은 과부처럼, 그들은 그의 영혼을 앗아갔다(이것이 문자적 의미이다). 그들은 그의 재산을 빼앗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으며, 부당한 악의로써 그 사람 자신을 파멸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그의 이름과 명성에 타격을 가했는데, 그에게 있어 이것들은 그의 자녀들처럼 귀했으며 심지어 그의 영혼만큼 소중했다. 비방은 상대방 영혼에게 항상 상처를 입힌다. 또한 그것은 적대적인 태도를 갖게 하며, 마음의 평안을 어지럽히고, 고요한 명상을 즐기지 못하게 만들며, 또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훼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영적 성품을 빼앗기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C. H. S.

  

13.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이 구절에 관한 많은 해석들 중, 예배자의 자세에서 착안하여 유추한 해석이 내게는 가장 그럴 듯해 보인다. 그 자세란 머리를 자기 가슴쪽으로 숙이고 서 있는 형태로서, 모든 외부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관심을 돌이키고 마치 자신의 가슴에게 말하듯이 진지하고 간곡하게 간청하는 듯한 자태이다. 이와 같은 기도 자세는 유대인들과 회교도들 양자 모두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Koehler in Repertor. Lit. Orient 그리고 Reland de Relig. Mohammedica, 월포드(William Walford)에 의해 인용됨.

  

13절 하반절.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다:"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말하자면, 그들에 대한 바람이 나 자신에 대한 그것보다 못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유익을 위해 기도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하소서." 시편 79:12을 참조하라. 헨리 에인즈워스.

  

14. "모친을 곡함같이." 일부다처제인 동양의 가정에서는, 아들들은 대체로 자기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훨씬 더 긴밀한 정을 느낀다. 한 아버지에게서 여러 이복 형제들이 태어나며, 이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러나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각별한 애정을 느낀다. 그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그를 양육하며, 하렘(아내들이 기거하는 방역자 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다툼들 가운데서 그의 편을 들어 준다. 그들은 자기 어머니를 뜨겁게 사랑한다. 따라서 어머니와의 사별로 인한 애곡은 가장 비통스러운 부류에 해당한다. C. H. S.

  

14. "모친." 한번은 누군가가 마호메트에게 묻기를

 

우리가 가장 존중하며 애정을 기울이는 것이 누구와의 관계이냐고 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모친, 모친, 모친"이라고 대답

했다.

  

14절 하반절. '모친을 애도하며, 모친의 장례식 때 애곡하는 일.' 이 경우의 감정이 가장 격렬하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에게도 그런 경우에는 애곡이 허용되었다( 21:1, 2, 3). 헨리 에인즈워스.

  

15.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이웃의 파멸을 기뻐하지 말라. 불나방이 불 속에서 뛰며 춤추듯이, 수많은 악인들은 다른 이들의 시련을 즐거워한다. 다른 사람들의 시련을 즐거워하는 자는 마귀의 병에 걸린 상태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그러한 질병으로부터 구해내실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겸비케 된 자들을 모욕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하나님에 의해 공포의 잔을 마신 자들에게 의기양양해 하는 것은 매우 사악한 행동이다. 이웃의 파멸을 몰래 즐기거나 노골적으로 기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앙금이 그들을 위해 남겨져 있다는 사실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수금을 연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여 자신의 수금을 즐거이 연주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이를테면, 영지주의자 클레멘스의 경우처럼) 비참한 처지에 놓인 자에 대해 '내게 그러한 재앙을 내려 주사 그 가운데서 영광을 얻을 수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악한 심령 상태를 잘 증거해 준다.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17:5). 만일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재앙을 위로하는 대신 오히려 자축하는 자들은 가장 혹독한 징벌에 처해질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은혜의 율법뿐만 아니라 자연의 법칙도 거스르는 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은 비참한 처지에 놓인 자들을 긍휼히 여길 것을 가르칠 뿐, 그들의 처지를 기쁘게 여기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애곡을 자신의 음악으로 삼지 말며, 다른 이들의 눈물을 자신의 포도주로 삼지 말라. 만일 그런 식의 악한 마음을 품으면, 결국에는 징벌의 포도주를 들이키게 될 것이다. 토머스 브룩스.

  

15.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이는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예언이다. 만일 순서상 두번째라면, 단지 시편 22편에 이어 두번째일 따름이다. 불가타역을 보면 그 역사성을 더욱 긴밀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더불어 채찍들을 내게 내리쳤다." 오 주 예수님, 쟁기질하는 자들이 주의 등에다 쟁기로 갈아 긴 고랑을 팠습니다:그것은 우리를 위한 고랑들입니다. 그 고랑에는 이생을 위해 인내의 씨앗이 뿌려졌고, 내생을 위해 영광이 뿌려졌습니다. 거기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소망이 뿌려졌으며, 많은 물로도 식힐 수 없는 사랑도 뿌려졌습니다. 

"비류." 이들 중 가장 사악한 부류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18:11), 혹은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8:5)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나를 치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신들과 관련하여 기록된 이 말씀을 스스로 성취시켰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15:29). 루이스 드 그레나다(Lewis de Grenada, 15041588).

  

15.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종종 사람들은 자신의 대적에게 닥친 불운을 보고 안도감을 느끼며, 그래서 이미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자들에 대해서는 미움이나 핍박을 중단한다. 그러므로 다윗의 친구였던 자들이 고통 중에 쓰러져 있는 다윗을 보고서도 그토록 격렬하고 오만불손하게 그를 공박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잔혹스러운 심령 상태를 보여 주는 증거라 하겠다. 존 칼빈.

  

15. "비류." '바로 그 비류'(Prayer Book Version).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힘" '세게 얻어맞다'는 뜻인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칠십인역에서 그것은 "회초리들"로 번역된다. 그런가 하면 제롬처럼 이를 "치는 자들"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혀로 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레미야 18:18과 비교해 보라. 벅스토르프(Buxtorf)에 의하면, '다리가 뒤틀린' 혹은 '절름발이' 등의 의미일 수도 있다(삼하 4:4, 9:3 참조). 바로들 중 다리를 절었던 한 명에게 '느고'라는 별명이 붙여진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KJV 역자는 위의 견해들 중 맨 마지막 것에 따라 이 단어를 경멸의 의미로 이해한 듯하다. 다니엘 크레스웰.

  

15. 곤경 중에 처한 대적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 주었는지를 언급한 후에(14), 다윗은 이제 그의 대적들이 곤경 중에 처한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난폭하게 굴었는지 설명한다(15). "비류"란 신분상으로나 신용상으로 타격을 받은 비열한 자들을 가리키며, 때로는 노예나 악한 종들처럼 몽둥이나 채찍으로 맞기도 했다. 따라서 어떤 학식 있는 역자는 이 부분을, "나를 대적하여 모인 매맞을 자들"이라고 옮긴다. 말하자면, 채찍과 몽둥이로 맞아야 마땅한 비열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조셉 캐릴.

  

16.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같이." 어떤 이들은 성경을 가지고 장난쳐야만 즐거워한다. 약간의 기분 전환을 원할 경우에, 그들은 성도들을 농담의 주제로 삼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신성모독적인 농담을 지껄이기도 한다. 이것은 그들이 맥주 잔을 기울이며 주고받는 한담거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오만불손한 비난을 너무도 쉽게 내던진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통용어를 배웠을 것이며, 결국 그들은 자기 형제들을 욕되게 한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이 불한당임을 폭로한다. 주지하다시피,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어느 지역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각 지역마다 독특한 관용어가 있기 마련이다. 본문의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지옥의 언어를 사용하며 신앙을 경멸하는 자들의 출신지는 과연 어디겠는가? 어쩌면 그들은 그럴싸한 야유의 분위기를 통해 자신의 재치를 돋보이게 하려고 할 수도 있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한 그들은 너무도 기민하고 예리하게 움직인다. 이처럼 조롱하기를 좋아하는 이스마엘의 후예들은 마귀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 자리는 불법 가운데 있는 그들의 형제들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것으로서, 그들에게 적합한 자리이다. 거룩한 것을 조롱하며 또한 그것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심각한 죄악 가운데 빠진 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기란 매우 힘들다. 사람들이 심각한 것을 조롱할 때, 나아가 기뻐하며 조롱할 때, 그들은 지옥을 향한 대로에 접어든 셈이다. 정해진 때가 이르면 여호와께서 이를 징벌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당신께 속한 자들을 비난함으로써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올리버 헤이우드(Oliver Heywood).

  

16.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같이."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베하네페 리 미"(m~ l~ ypnjb). "마오그"(m~ l~), 성경의 다른 곳들 중 이 단어가 나오는 유일한 구절인 열왕기상 17:12에서는, ''을 의미한다. 따라서 게제니우스 등은, ? ?를 가리켜 부자의 상에서 먹는 식객들(문자적으로는 "떡 조롱자")이라고 해석하며, 그들이 재담과 익살로 손님들을 즐겁게 하고 대가로 식사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헬라어 "프소모콜라케스"(ywmokovlake"), "크니소콜라케스"(knisokovlake"), 그리고 중세 라틴어 "부켈라리"(buccellarii)도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비속한 자들 가운데서"로 해석될 수도 있다. 스튜어트 퍼론. (loafers<'빈둥거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역자 주>라는 영어 단어가 고대의 식객들과 어느 정도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지 않겠는가!) C. H. S.

  

16.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다윗은 자신을 식탁의 재담거리로 삼는, 그리고 애매모호한 농담으로 간을 맞추어야만 입맛이 돋구어지는 조롱자들의 죄를 더욱 가중시키며, 그들을 가리켜 "위선적인 조롱자들"(KJV 직역역자 주)이라 불렀다. 그들은 교활하게 조롱했으며, 그러한 조롱을 눈에 띄지 않게 포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자들은, 그들이 찬사를 늘어놓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증오하는 자들에 대해 가장 심한 경멸을 표할 때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러한 위선적인 조롱자들은 경멸하기 좋아하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악랄하다. 윌리엄 거놀.

  

16. "연회에서······조롱하는 자." 연회에서 주인이 어떤 사람을 싫어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가 그 자리에 있든지 없든지간에, 손님들은 '그를 조롱하며' 그에 대해 빈정거리는 어투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란 바로 이들을 가리킨다. 존 개즈비(John Gadsby).

  

17. 사탄은 곁길로 빠지는 우리의 모습을 염탐하자마자 곧장 하나님께 달려가 불평을 털어놓으며, 우리를 공박하는 고소장을 하늘의 성법원(1641년에 폐지된 민사 재판소로서, 불공평하기로 유명했다역자 주)에 가득 채운다. 평화의 대법관인 위대하신 주님, 우리의 옹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심한 곤경에 처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눈물을 병에 담으시며 우리의 거룩하고 간곡한 열심을 책에 기록하시듯이, 사탄은 우리의 죄악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며 우리에게 공의의 징벌이 임하기를 간청한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처럼 감정에 의해 좌우되거나 소송 교사자의 제의에 따라 분노하신다면, 우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수많은 거짓의 아비들 앞에서 단 한 분 진리의 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신다. 고소자가 어떤 비방을 가하든지간에, 심판관께서 무죄를 선언하신다. 우리는 반역으로 인해 지위를 상실하였고, 마귀는 분주하게 우리의 파멸을 구한다. 하지만 주께서 개입하사, 약속에 따라 그리고 대가 지불을 통해 예전의 은총을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하신다.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주 예수님, 당신의 소유된 우리를 지키소서. 사탄으로 하여금 주의 피로 사신 바 된 우리에게 무력이나 속임수로 해를 가하지 않게 하소서. 토머스 애덤즈.

  

17. "내 유일한 것." '풀의 개관'(Poole's Synopsis)에서 비평가들은 이 호칭을 영혼에 적용하여, '나의 유일한 것', '나의 고독한 것', '외롭고, 쓸쓸하며, 또한 빈궁한 소망' 등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22:21 참조).

"사자들에게서." 다니엘은 문자적 의미에서 사자굴에 던져졌고, 다윗은 영적 의미에서 그러했다. 사납고 잔인하며 화난 짐승들의 우리에 갇혀 어찌할 방도가 없을 때, 기도 외에는 무기가 없고 주님 외에는 도우시는 이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옥의 사자들에게 노출되어 있으며, 그 사자들의 포효가 그들을 심한 두려움 가운데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소중한"(KJV 직역역자 주) 영혼은 하나님께도 소중한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C. H. S.

  

19. "눈짓하지." 그에게 닥친 재앙으로 인해 그들이 눈짓으로 즐거움을 표하는 것을 가리킨다. 프란시스 바타블루스(Francis Vatablus, 1545).

  

19. "눈짓하지." 이는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그 악한 목적을 달성했을 때 경멸조로 서로 눈을 찡긋거리는 모습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해 줄 만한 영어 단어는 없다. 벤야민 바이스(Benjamin Weiss).

  

21. "우리가 목도하였다" (KJV를 직역하면, "우리의 눈이 보았다"이다역자 주.) '눈들'(복수형) 대신 ''(단수형)이라고 표현된 데 유의하라. 모든 악인들이, 마치 한 눈과 한 마음 그리고 한 머리를 가진 듯이, 일치단결하였음을 시사한다. 존 트랩.

  

21. 이런 것들을 악인들에게 누설하지 말자. 세속적이고 비열한 자들이 그 말을 엿듣고 자신을 격려하는 방편으로 삼지 않도록,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나지막한 음성으로 서로 이야기하자. 그 말들은 악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열한 죄인들이 성도들의 실책을 자신의 악행에 대한 변명이나 보증으로 삼는 것보다 더 흔한 일이 있겠는가? 예컨대, 술주정뱅이는 노아를 자신의 동지로 여기며, 노아의 벌거벗은 상태에 대해 함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의미로 이해한다. 그리고 부정한 관능주의자는 다윗의 경우를 인용하면서 마치 다윗이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후원하는 자이기라도 한 듯이 생각한다. 분명, 만일 천국에서 성도들의 온전한 기쁨을 뒤덮어버릴 수 있는 슬픔이 있다면, 그것인즉 죄악된 자들이 자신의 큰 죄와 사악함을 변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성도들의 이름과 사례를 언급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이런 일들이 교회내에 생기게 하신 것은 겸손하고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악을 사하실 수 있는지를 기념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일 누구든지 이를 통해 은총을 발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죄악에 대해 담대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소금 기둥으로 세우실 것이다. 에스겔 홉킨스(Ezekiel Hopkins).

  

21. 다른 사람의 실패를 기뻐하는 사람은 마귀의 승리를 기뻐하는 셈이다. 암브로스(Ambrose), Nichol's Proverbs에서 인용함.

  

21, 22.

  

그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경멸조로 비아냥거리며,

저런, 저런, 우리가 그것을 

목도하고 말았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오 주여! 당신도 그들의 행위를 보셨나이다.

그런즉 잠잠치 마시고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존 데이비스.

  

23.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외쳤던 말이기도 하다. 만일 도마가 우리 주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본문에서 다윗도 여호와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단어 배열 순서와 어투를 제외하면, 도마의 외침과 본문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그 의미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한 분이신 여호와를 두 측면에서 보며, 두 손으로 그분을 붙들되 한 마음으로 "나의"라고 외친다. 또한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장 겸손한 외경심으로 그분을 경배한다. 누엣(James Nouet)은 도마의 언급을 강해하면서, ", 귀한 고백이여, 전생애를 통해 그리고 죽는 그 시각에, 나도 그렇게 말하리라. 영원히 그렇게 말하리라"고 찬탄했다. C. H. S.

  

2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이는 참으로 소중한 말씀이다. 우상이나 부귀 혹은 탐욕을 자신의 신으로 섬기는 자들과는 반대로, 그는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는 '스스로 계시는 분'인 그 위대하신 존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소유했노라고 선언한다. 비록 다윗은 자신을 재판관으로 여겼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며, 심지어 그분의 의로우신 진노 앞에서도 꽁무니를 빼지 않는다. 이는 고귀한 말이며,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자기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대적들을 경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C. H. S.

  

25.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설령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요나를 삼켰던 고래처럼, 그들은 이내 메스꺼움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지옥의 악의에 의해 삼키움을 당할 수는 있었지만 소화되지는 않았다. C. H. S.

  

27. 핍박에 직면하여 성도들의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쏠리는지를 보라. 기도는 성도들이 핍박받는 시기에도 의지할 수 있는 무기다. 로마인들은 견디기 힘든 심한 궁지에 처하여 대적들과 싸우기 위해 기꺼이 신전에서 무기를 꺼내 왔으며, 그리하여 대적들을 물리쳤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 곤경과 핍박으로 인해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할 때, 그들은 기도와 눈물이라는 무기를 의뢰하며, 이를 통해 핍박자들을 이긴다. 토머스 브룩스.

  

28.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당신은 지친 상태이다. 하루 종일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자가 누구인가? 당신이 원할 경우에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방책을 내가 제안하겠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제대로 잘하라. 그리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찬양한 셈이다. 당신이 찬송가를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만일 당신의 마음이 그분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혀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찬송 부르기를 멈추고 물러나서 휴식을 취하는가? 그때 술취하지 말라. 그리하면 당신이 하나님을 찬양한 셈이다. 잠을 자러 가는가? 일어나 악을 행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을 찬양한 셈이다. 사업을 진행시키는가? 악한 방법을 사용하지 말라. 그리하면 당신은 하나님을 찬양한 셈이다. 밭을 가는가? 다툼을 일으키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을 찬양한 셈이다. 매사를 순전한 마음으로 행함으로써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키라. 어거스틴.

    

힌트

  

1. 우리의 변호자요 옹호자이신 예수님. 하늘 법정과 이 땅의 전투에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

  

2. 신실한 성도의 보호자로서 무장하신 예수님.

  

3. 대적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셨다. 주님이 어떻게 이 일을 행하시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또 무엇인가?

  

3절 하반절. 온전한 확신. 적극적이며 개인적이고, 영적이며 현재적이고, 신령하며 완전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확신.

  

3절 하반절. 확실한 천국. 토머스 애덤즈의 설교.

  

4. 마귀의 영원한 혼란.

  

6. 불신자의 끔찍스러운 인생 행로.

  

6. 악인의 행로에 놓인 세 가지 위험들. 그들의 길은 무지로 인해 어둡고, 유혹으로 인해 미끄러우며, 그들 뒤에는 보응하는 자가 따른다.

  

8. 졸지에 임하는 멸망, 이는 참으로 무서운 주제이다.

  

9.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을 기뻐함.

10. 비길 데 없으신 하나님, 비길 데 없는 그분의 은총. 이것이 주제이다. 철저한 회복을 체험한 심령. 이것이 노래하는 자의 마음이다. 여기에서 비길 데 없는 음악이 나온다. 깨트려진 수금으로 연주하는 음악.

  

11. 비방하는 자들의 비열함, 잔인함, 죄악됨, 그리고 그들의 공통성.

  

12. 어떻게 하여 영혼을 빼앗기는가?

  

13. 괴팍한 사람들까지 긍휼히 여기는 기독교적 동정심.

  

13절 하반절. 중보 기도의 개인적 유익.

  

13, 14. 병든 자에 대한 동정심. 시미언.

  

15. 고난받는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수치스러운 음모.

  

17.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

  

18. 공적 찬양의 의무, 축복, 그리고 그 시기적절함.

  

22.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호소하며, 그 말씀을 구하며, 그분의 임재를 요청하고, 그분의 개입을 간청하며, 또한 그 신실성에 의지함.

  

25. 불신자의 기쁨, 그리고 의인의 피난처.

  

26. 악인이 입는 죄수복.

  

27절 하반절.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형통이 무엇인가?

  

28. 복된 주제, 합당한 말, 끝없는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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