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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제 1권 1-41편

스펄젼의 시편 33편 강해

by 은총가득 2022. 7. 4.

 

 

스펄젼의 시편 33편 강해

  

개요

  

주제

이 찬양의 노래에는 저자에 대한 언급이나 머리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에 대해 딕슨은, “이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 지어진 것이라는 점과 그 기자들에 의해 성경 내용이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다라고 말한다.

이 신령한 노래의 주제는 여호와에 대한 찬양이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3절 의인은 그분을 찬양하도록 권고받는다. 

4, 5절 그분의 탁월하신 성품. 

6, 7절 창조를 통해 나타난 그분의 위엄. 

811절 여호와의 목적들이 섭리 가운데서 실현되므로 사람

들은 그분 앞에서 두려워함이 마땅하다. 

12절 그분의 백성은 복있는 존재들로 선언된다. 

1319절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그 백성을 돌보시는 그분

의 배려를 육신의 팔의 연약성과 대조하여 기린다. 

20, 21절 뜨거운 확신의 표현. 

22절 진지한 기도.

  

강해

  

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2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1. "너희 의인들아." 이는 너희의 특별한 의무이며 보다 큰 책임이다. 그리고 너희의 영적 특성은 그 일에 맞게 적응되어야 한다. 그런즉 누구보다도 먼저 그 일에 솔선하라. 의인도 항상 기쁜 것은 아니며, 자신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감동받을 필요가 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기쁨은 찬양의 핵심이다. 설령 우리 입술에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분을 높이는 일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분이 그러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영원토록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 속에는 끊임없는 기쁨이 넘쳐야 한다. 일시적인 위안을 즐거워하는 것은 위험스럽고, 자아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어리석으며, 죄악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천상적이다. 참된 성도는 장차 천상에서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늘을 체험하며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하나님은 되어가는 일들에 주의하고 계신다. 성도들이 성가대 복장을 갖출 때, 그들은 여호와의 눈에 아름답게 보인다. 피를 씻은 손에는 하프가 어울린다. 성결한 외모에 있어서는, 그 어떤 보석도 신성한 찬양보다 더 어울리는 장식물이 될 수 없다. 찬양은 사함받지 못한 전문 가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와 같다. 왜곡된 심령은 왜곡된 음악을 만들지만, 정직한 심령은 여호와의 기쁨이다. 찬양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입을 의복이며, 이 땅에서도 성도들이 그것을 입어 보는 것이 마땅하다. 

  

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찬양에로 고무시킬 수 있는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는 옛 경륜하에서 악기들이 사용된 사실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교훈이다. 이스라엘은 말하자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셈이며, 그들의 학습을 돕기 위해 아동용 도구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 성인이 된 오늘날에는, 현악기나 관악기 없이도 멜로디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이 악기들이 예배용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믿지만, 예배의 순수함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한다는 생각에서,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불법적이라고 확언하지는 않는다. 또한 만일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나 마르틴 루터가 잘 조율된 악기들의 도움으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더욱 잘 드릴 수 있었다면, 누가 그들의 권리에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우리는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찬양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방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다른 이들이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에게도 복음의 자유 안에서 살아갈 자유가 있지 않겠는가? 

  

"여호와께 감사하고." 이것은 가장 감미롭고 훌륭한 음악이다. 그 어떤 악기도 인간의 목소리를 대신하지 못한다. 악기란 노래를 도울 경우에만 허용된다. 왜냐하면 건반이나 현이 여호와를 찬미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여호와는 옥타브 전체를 원하신다. 이는 모든 가락이 그분의 것이며 모든 음악이 그분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악곡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는 자신이 지닌 힘을 모두 기울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모든 찬양은 그분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노래를 위한 노래는 전혀 가치가 없다. 우리는 왕께 조공을 바쳐야 할 뿐, 그것을 바람에 던져서는 안 된다. 예배자들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가? 여호와를 높여드릴 때에는 생각없이 옛 관행을 습관적으로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역량을 총동원시켜야 한다. 우리는 모든 찬양을 새 노래가 되게 해야 한다. 예배를 신선하게 유지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큰 일이다. 오래되고 낡은 찬양을 드리지 말고, 모든 찬양 가운데 생명과 영혼과 심령을 불어넣자.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새로운 은총을 받으며, 우리 주님의 사역과 말씀 속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소리로." 신령한 예배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드려져야 한다. 이 경우에는 점잖은 속삭임이 오히려 악평을 받는다.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 말을 듣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큰 기쁨을 요란하게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왕이 보이면 환호성을 지른다. 우리는 다윗의 아들께 호산나를 크게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무성의하게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비통스러운 일이다. 그분은 우리가 지닌 최선의 것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회중과 더불어 곡조를 맞출 수 있도록, 정해진 규칙에 따라 찬송을 부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는 가장 감미로운 음률과 가장 감미로운 음성 그리고 가장 감미로운 가사 내용으로 찬미를 드려도 부족할 뿐이다. 그분께 늘어진 리듬으로 찬양을 드리지 말며, 거치른 음색을 내거나 불협화음을 발하지 말자. 

  

4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5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분의 규례들은 자연스럽고, 윤리적이며, 영적이며, 또한 정직하다. 우리의 의이자 주님이신 그분의 성육신하신 말씀이 특히 그러하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들은 무엇이나 선하고 의로우며 탁월하다. 하나님의 우주에는 죄로 인해 조성된 것 이외에는 변칙이라는 것이 없다. 그분이 명령하신 말씀은 모든 것들을 선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고 그 신실성을 기억할 때,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그분의 행사는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 말씀에 진실하다. 그분은 악한 말을 하시지 않고 악한 행동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행위와 말씀은 자신과 그리고 가장 순수한 진리와 일치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전혀 없으며 그분의 행사에는 아무런 속임수도 없다. 창조와 섭리와 계시 안에 순전한 진리가 풍성하다. 진리를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것도 신성한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원칙을 마음에만 둘 뿐 실행에 옮기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그분을 더 많이 알수록, 우리의 선한 성품은 그분의 탁월하심을 더 많이 시인하게 된다. 고통을 베푸시는 그분의 사역조차 그분의 신실하신 말씀에 입각한 것이다. 

  

어찌 내가 부족함이나 재난이나 곤경이나 

혹은 고통을 불평하겠는가? 

그분이 내게 주신 축복의 말씀은 그 이상이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내가 알거니와, 구원의 상속자들은

많은 환난을 통해 자신의 주님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얼룩을 남기지 않는 펜으로 쓰시고, 결코 실언하지 않는 혀로 말씀하시며, 또한 결코 실패하지 않는 손으로 행하신다. 그분의 성호를 찬송하라.

  

5.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그분은 의로운 이론 및 실천을 열렬히 사랑하신다. 그분은 진실함과 의로움을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내밀한 영혼은 그 속에서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성품은 바다와 같고, 그분의 백성은 그 방울 방울마다 찬양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님의 의는 아버지께 특별히 귀한 것이며, 그 의로 인하여 그분은 그것을 전가받은 이들을 기뻐하신다. 반면에, 죄는 여호와께 무한히 혐오스러우며, 그 속에서 죽는 자들에게 화가 된다. 만일 그분이 그들에게서 아무런 의도 찾지 못하신다면, 그분은 그들을 공의롭게 다루실 것이며, 그 결과 엄중하고 최종적인 심판이 임할 것이다.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천문학자들, 지리학자들, 자연주의자들, 식물학자들, 화학자들, 그리고 광부들 등, 하나님의 행사를 연구하는 너희 모든 자들아 이리로 오라. 너희의 진실한 이야기들은 이 선언을 확증해 줄 것이다. 햇살 가운데 보이는 작은 곤충으로부터 대양의 거대한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주로부터 무엇인가를 하사받았다. 심지어 길없는 사막에도 발견되지 않은 어떤 은총이 반짝거리며, 대양의 동굴 속에도 사랑의 보화들이 숨겨져 있다. 땅에는 은총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가득할 수도 있지만, 항상 사랑이 충만해 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채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듯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죽어도 마땅하다. 만일 이 땅에 은총이 가득하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들보로 바치고 있는 하늘에서는 어떠하겠는가? 

  

6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 별들이 위치한 하늘, 그리고 궁창 혹은 지구 주위의 하늘 등, 이 모든 하늘들은 말씀을 통해 존재케 되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3)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반절에 나오는 성령에 관한 언급에 주목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입 기운"에 해당하는 말은 다른 곳에서 '성령'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신성의 세 위들께서 만물 창조에 있어 합력하신다. 가장 거대한 행성들과 가장 영예로운 천사들을 만드는 일이 하나님께는 너무도 쉬운 일이다. 한마디 말씀과 입 기운 한번으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는 일은 사람이 숨을 쉬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쉽다. 왜냐하면 사람은 독립적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그 콧구멍의 호흡을 창조주로부터 빌리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만물이 무한하신 지혜로 말미암아 구성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는 그분의 말씀이란 곧 그분의 명령이자 결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말씀이 결정을 내리셨고, 살아 계신 성령께서 여호와의 모든 피조물들을 존속시키신다.

  

7.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마치 낟알이 타작 마당 위에 흩뿌려지듯이 한때 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제 그것들은 한지점으로 모여 무더기가 되었다. 위대하신 주님이 아니시라면 누가 그것들을 한통로 안으로 모이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분의 요구에 따라 물들이 다른 곳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홍해의 이적이 자연 속에서 매일 반복되고 있다. 왜냐하면 해와 달의 인력에 의해 해안으로 밀려드는 바닷물도, 만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경계 부분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이내 땅을 집어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깊은 대양은 하나님의 거대한 저장실이며 폭풍우를 가두어 두는 곳간이다. 거대한 물 저장소가 땅 내부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샘물과 우물물이 솟아난다. 절박한 필요 사항들이 그 얼마나 자비롭게 공급되는가! 이 본문이 구름과 우박과 눈과 비 등과 같이 땅의 수확을 풍성하게 해주는 은혜로운 보화들을 지칭할 수는 없을까? 이 엄청난 물은 잡동사니 창고에서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있지 않으며, 장차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곳간에 저장되어 있다. 천상의 요셉이 지니신 예지를 통해 우리는 풍성한 자비를 엿볼 수 있다. 그분의 곡식 창고는 땅의 궁핍한 시기를 대비하여 이미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저장물들이 보복용 무기로 사용되어 왔을 수도 있지만, 이제 그것들은 은총의 저장소 역할을 한다. 

 

 

 

 

 

8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11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여호와를 두려워한다. 시편 기자는 자연적 편견에 의해 눈이 어두워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여호와에 대한 예배를 아브라함의 씨에게만 국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 거하는 민족들에게도 여호와에 대한 충성을 요청한다. 만일 그들이 찬양하라는 지시를 받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최소한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도록 하자. 두려워 떨리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열등한 부류의 예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뇌성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무례한 신성모독자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성의 표시들로 뒤덮인 세상에서 설 자리가 없다. 온 땅은 무신론의 회당을 건립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한 곳도 제공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성호를 모독하는 자를 단 한 명도 용납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들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게 하고 유일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건하게 대하도록 하자. 여기서 바람으로서 언급된 사항을 우리는 일종의 예언으로 읽을 수도 있다:하나님에 대한 숭배가 우주적으로 행해질 것이다. 

  

9.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창조는 말씀의 결실이었다. 여호와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 여호와의 행사들은 쉽게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숭고하다. "이것은 어떤 말씀인가?" 이는 옛적의 놀라운 문의 사항이었고,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무로부터 창조가 이루어져 피조물들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처음 발해진 바로 그 권능이 이제 우주를 거주할 장소로 만든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목격할 수는 없었지만, 우주를 견고히 세우는 일에도 창조 당시만큼이나 숭고한 권능이 작용했을 것이다. 궁창들을 지으신 분의 확고한 말씀에다 자신의 전존재를 맡기는 법을 배운 사람은 복되다!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그분 자신의 뜻이 실현되는 동안, 그분은 대적들의 계교에 대처하고자 주의를 기울이신다. 그들이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분은 회의실에서 그들을 정복하신다. 또한 간교함으로 철저하게 무장하여 그들이 공격을 감행할 때, 그분은 그들의 속임수를 파하시며 그들의 음모를 무위로 끝나게 하신다. 이교도들의 어리석음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혜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권능에 굴복될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에서처럼 궤변과 거짓 철학이 진리를 대적하는 상황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는 그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그들의 핍박과 중상과 거짓들은 마치 화강암 벽에 붙은 민들레 씨앗과 같다. 그것들은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악을 억제하시며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위험 가운데 처해지지 않는다:극악무도한 간교함은 무한하신 지혜에 의해 간파당하며, 사탄의 적의는 무한하신 권능에 의해 제지당한다. 

  

11.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분은 자신의 의도를 바꾸지 않으시며, 그분의 판결은 좌절당하지 않고, 그분의 계획은 필히 성취된다. 하나님은 자기 뜻의 계획에 따라 예정하시며,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의 계교는 한 순간도 그분의 판결을 돌이킬 수 없다. 사람들의 의도는 마치 거미줄이나 엉겅퀴 털처럼 앞뒤로 흔들리지만, 영원하신 의도는 땅보다 더 굳건하다.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사람들은 오고 가며,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를 따라 무덤으로 향하지만,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마음은 깨트려지지 않는 평온함 가운데서 움직이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확실한 결과를 야기시킨다. 자신의 뜻이나 계획이 대대로 실행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시대의 지혜가 다른 시대에는 어리석음으로 변하지만, 여호와의 지혜는 항상 지혜롭고 그분의 계획은 시대를 초월하여 줄곧 실현되어 간다. 자신의 의도를 실현시키시는 그분의 권능은 시대의 경과와 더불어 경감하는 법이 결코 없다. 애굽에서 바로에 대해 절대 권위를 행사하셨던 분은 오늘날에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다. 그분의 병거 바퀴는 지금도 여전히 위엄 있게 굴러가고 있으며, 그분의 영원하신 뜻을 잠시라도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2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2.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복이 있도다."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점에서 행복했다. 여호와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택함받은 민족의 복이었다. 다른 민족들이 우상 앞에서 엎드리는 반면에, 택함받은 백성은 그들을 비가시적인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분을 신뢰하도록 이끄는 영적 종교에 의해 드높여졌다. 여호와께 의탁하는 모든 이들은 가장 크고도 깊은 의미에서 복이 있으며, 그 축복을 뒤엎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그 모든 것의 근저에 택하심이 있다. 하나님의 선택이 그날을 지배한다. 여호와께서 어떤 백성을 자기 것으로 삼으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지 못한다. 이 얼마나 고귀한 선택인가! 우리는 천한 신분으로 택함받지 않았으며 천박한 목적을 위해 택함받지도 않았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이자 기쁨이 되도록 만들어졌다. 그토록 복된 존재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몫을 기뻐하자. 그리고 영광스러우신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자.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14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15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16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17구원함에 말은 헛 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18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여호와께서 위에 거하시면서 아래로 굽어살피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모든 일들을 보시되, 특히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을 감찰하며 배려하신다. 항상 우리 아버지의 눈길 아래에 있다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가장 좋은 친구의 시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지닌 가장 소중한 특권들 중 하나이다.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아담의 자손들 모두는, 그들의 외로운 시조인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감찰되고 있다. 얼어붙은 극지로부터 타는 듯한 적도에 이르기까지, 언덕이나 골짜기에서 혹은 오두막이나 궁전에서 거하는 모든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시야 안에 들어 있다.

  

14.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여기서 동일한 의미가 반복되고 있다:그것은 반복될 만한 가치가 있으며, 반복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대체로 그것을 잊기가 쉽기 때문이다. 큰 자들이 창문 가에 앉아 군중을 내려다보듯이,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피조물들을 주시하시며, 자신이 주시하신 것들 중 하나도 잊지 않으신다. 

  

15.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이 구절의 의미인즉, 모든 마음들이 한결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거지의 마음이든 왕의 마음이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는 물론, 원래 하나님이 모든 마음들을 동일하게 창조하셨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성향이나 기질은 너무도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은 한결같이 창조주께 자신의 생명을 빚지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을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옹기장이 앞에서 그릇이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를 헛되이 감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심사숙고하여 그들을 판단하신다. 그분은 외적 행위 속에서 은밀한 계획을 간파하시며, 외면상 선하게 보이는 것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밝히신다. 이러한 심사숙고는 심판의 전조가 된다. 심판 날에는 하나님의 판단 결과로 행복이나 화의 정도가 일일이 측정될 것이다. 인생이여, 네 길을 숙고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숙고하시기 때문이다!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죽을 운명인 인간의 힘은 허구이며, 그것을 신뢰하는 자들은 허수아비들이다. 하늘 법정에서 어떤 제국을 멸망시킨다는 판결을 내렸을 때에는, 빽빽하게 운집한 군사들도 그 제국을 존속시키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그 군주의 생명조차 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 중 가장 가련한 자 곧 친구도 없이 외로움에 떨고 있는 자도 보전하시지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파멸에 내어 주기로 결정하신 경우에는 일만 명의 군사들이라도 그에게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용사가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의 때가 다하면, 그의 팔의 힘이나 다리의 속력도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 가장 연약한 신자라도 여호와의 보좌의 그늘 아래에서 안전하게 거하는 반면에, 가장 강한 죄인이라도 매시간 위기에 처해 있다. 어찌하여 우리가 우리의 군대와 영웅들에 관해 그토록 자주 언급하는가? 오직 여호와께만 힘이 있으며, 따라서 오직 그분께만 찬양을 드리자.

  

17. "구원함에 말은 헛 것임이여." 동양인들에게 있어 군사적 힘은 말과 낫 달린 전차에 의해 많이 좌우되었지만, 시편 기자는 그것들을 가리켜 거짓이요 기만적인 확신이라고 한다. 용맹스러운 준마를 탄 기사가 용감히 싸울 때나 달아날 때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말은 그를 위기로 몰아넣거나 그를 떨어뜨려 짓밟을 수도 있다. 

  

"그 큰 힘으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따라서 가장 강력한 방어 수단들도 정작 가장 필요한 때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찬미해야 한다. 산헤립은 자신의 기병대를 총동원시켜도 여호와의 천사 한 명의 적수가 되지 못했으며, 바로의 말들과 전차들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백성을 추적했으나 허사였다. 마찬가지로 땅과 지옥의 모든 세력들이 연합하여 여호와와 그 택하신 자들을 대적할지라도 완전히 패배하고 말 것이다. 

  

18. "보라."(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말이다역자 주). 이는 군대들과 말들보다 더 큰 놀라움을 안겨 주며 또한 전차들과 방패들보다 더 분명한 확신을 줌을 시사한다.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살피사." 각별히 배려하시는 그분의 눈길은 그들의 영광이요 방어벽이다. 그들을 몰래 취할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천상의 감찰자께서 그 대적들의 계획을 미리 아사 대책을 강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믿음의 눈을 그분께 고정시면, 그분의 사랑의 눈이 항상 그들을 살피실 것이다.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의 증거가 미미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증거는 명백한 것이다. 겸손한 소망의 몫은 담대한 믿음의 그것에 못지 않다. 여러분에게는 이것이 큰 위로가 되지 않는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하지 않는가? 아버지 되신 그분의 눈은 장자를 살피심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살피신다. 이 다정한 말씀은 마치 부드러운 빵처럼 은혜 안에 있는 아기들, 즉 유아 음식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19.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여호와의 손은 그분의 눈과 함께 움직인다. 그분은 은혜롭게 주시한 자들을 주권적으로 보전하신다. 성도들의 생명 주위는 구원과 회복으로 울타리 쳐져 있다. 왕께서 허가증에 서명하시기 전까지는 죽음이 그들을 건드리지 못한다. 설령 그분이 죽음의 손길을 허용하신다 해도, 그들의 영원한 생명은 보전된다. 죽음이 우리의 몸을 죽일 수는 있지만 우리 존재를 죽이지는 못한다.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z혹독한 기근도 그 주인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해 어딘가에 음식과 기름을 예비해 두신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위해 음식을 예비하사 그로 하여금 배부르게 하신다. 사람들을 보전하시는 분은 의인의 영혼이 기근에 시달리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다. 인간의 힘은 기근에게 굴복당하지만, 하나님은 절박한 상태에서 유능하시며, 가장 궁핍한 상황하에서 그 풍성함을 입증하신다. 신자여, 현세에서 당신의 하나님을 섬기라. 그분의 눈이 당신 위에 있으며, 그분의 손은 오래도록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20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1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여기서 경건한 자들은 시편 기자에 의해 찬양받으신 분을 자신도 의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바란다는 것은 위대한 교훈이다. 조용히 기대하며 소망 가운데 인내하고, 또한 확신 가운데 정직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도달하는 소중한 경지들 중 하나이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보잘것없는 겉치레로 그분을 의뢰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지닌 모든 것으로 그리고 우리의 전존재로 그분을 의뢰해야 한다.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저는 우리가 일할 때에 도움이 되시며 위기에 처할 때에 방패가 되신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모든 것들을 응답해 주신다. 그분은 만유 가운데서 그들의 만유가 되신다. "우리"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음에 주목하라. 단단히 붙듦을 암시하는 이 말은 참으로 소중하다. 개인적으로 굳건히 붙들어야 그리스도인이 된다. 다른 모든 것은 단순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21.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1절에서 권고되고 명령된 의무가 여기서는 여호와 앞에서 이행되고 있다. 믿는 우리는 즐거운 마음이 될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내밀한 성품은 신실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믿음이라는 뿌리는 적절한 시기에 즐거움이라는 꽃을 피운다. 의심은 슬픔을 낳지만, 확신은 기쁨을 조성한다.

  

22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여기서 이 시편은 크고 포괄적인 기도로써 마감된다. 본절은 "인자하심"을 간구하는 내용이며, 이 인자하심은 즐거운 신자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추구된다. 우리 주님도 "너희 믿음대로 되라"( 9:29)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신이 택한 수준만큼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주님, 우리의 소망이 흐릿해질 때에는 우리의 수준 이상을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우리가 간구하거나 생각한 것 이상의 축복을 내려 주소서. 

 

  

 

 

 

주해

  

 33편 전체. 이 시편은, 적그리스도와 대적들이 타도됨으로써 교회가 최종적인 구원을 얻어 승리할 훗날에 부를 감사의 노래이다. 사무엘 호슬리.

  

 33편 전체. 잠시 시편 기자의 묵상 방식을 살펴보자. 그의 시편은 현학적 형태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현학적 형태에서는, 기자가 획일적으로 정해진 규칙을 적용하고, 주도면밀하게 철학적 방식을 따르며, 원칙들을 설정하고, 또한 결론을 추론해낸다. 반면에, 그는 창조주에 관한 가장 숭고한 개념을 우리에게 제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원칙들을 설정하며, 유명한 철학자들처럼 자신의 철학을 언급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세상의 기원'에 관해 철학자들은 그 얼마나 터무니없는 견해들을 피력해 왔는가! 그들 중 이 중요한 주제와 관련하여 결론을 내린 자들은 얼마나 극소수인가! 시편 기자는 단 하나의 원리에 의해 그 중요한 물음에 답한다.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근사하게 표현된 이 원리에 대한 증거가 너무도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 원리란 이러하다:"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6). 세상 창조와 관련하여 제시된 설명 중 이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 세상은 자기 동인적 의지의 소산이며, 세상 창조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원리뿐이다. 자연 만물 가운데 가장 단순한 것도 우리를 이 원리에로 인도하기에 충분하다. 나의 의지가 자기 동인적이든지 아니면 자기 동인적인 의지를 지닌 다른 어떤 존재가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나 자신은 나의 부모에게서 났고, 나의 부모는 조부모에게서 났다. 모든 유한한 피조물들은 한 단계 앞선 존재에게서 났다. 분명한 사실은, 유한한 존재들이 자기 동인적 의지를 지니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동인적인 유한한 피조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유한한 피조물이 자기 동인적 의지를 지니든지 아니면 자기 동인적 의지를 지닌 첫째원인이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시편 기자의 원리인즉, 그러한 첫째 원인이 계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철학자들은 세상의 기원에 관해 결론도 없이 논의해 왔듯이, 세상 통치와 관련하여서도 동일하게 불확실한 추론을 제시해 왔다. 시편 기자는 이 물음에 대해 단 하나의 원리를 통해 매우 능숙하게 답변했다. 이 원리는 앞의 원리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것에 대한 증거 역시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13, 14). 이는 섭리에 관한 교리이다. 이 교리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일반의 마음을 지으셨다"(15)는 사실을 근거로 한다. 형제들이여, 잠시 이러한 추론에 대한 증거에 관심을 기울여 보라.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거민의 행사를 감찰하신다"는 말 속에 표현된 섭리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이 일반의 마음을 지으셨다"는 원리로 말미암은 필연적 결과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시편 기자가 세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앞에서 설정했던 원리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그렇다. 인생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교리로부터, 감찰자요, 지시자요, 보응자시요, 또한 행위에 따라 징벌하시는 분인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잇따른다. 섭리 교리를 반박하는 가장 그럴 듯한 반대 입장들 중 하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비열함을 대조하는 것이다. 인간처럼 보잘것없는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위대하신 존재의 관심과 배려를 받을 수 있겠는가? 이보다 더 그럴 듯한 혹은 이보다 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반대 견해도 없을 것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곤충과 비열한 자들을 짓밟아 멸하는 가장 강력한 군주간의 간격은, 하나님과 인간간의 거리를 나타내기에는 매우 불완전한 이미지이다. 군주가 개미나 벌레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며 그것들을 징벌하거나 포상하는 것이 그의 위엄에 걸맞지 않듯이 하나님이 자신보다 무한히 열등한 존재인 인간을 감찰하고 지시하며 징벌하고 또한 포상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위엄에 걸맞지 않다는 식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그럴 듯한 반대 입장에 답하는 데에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인즉,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셨다는 것보다 인류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그분의 위엄을 더욱 손상시키는가? 지혜로우신 존재께서 지성을 지닌 피조물들에게 지식과 덕성을 갖출 역량을 주셨을 때, 그들 스스로 지식과 덕성을 얻도록 노력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을리가 있겠는가? 지성을 지닌 피조물이 지식과 덕성을 갖추기를 원하시는 지혜로우신 존재께서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징벌하시지 않겠는가? 혹은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는 자들에게 그분이 자신의 은총을 베푸사 그러한 노력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지 않겠는가?

몰지각한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성품들'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그분의 사역을 다룰 때와 동일하게 애매모호함을 드러내었다. 학교에서 소위 하나님의 윤리적 성품들이라고 지칭되는 내용은, 그들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들이었다. 이 성품들은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 '인자하심'에 속한 성품들과 '공의'에 속한 성품들로 구분된다. 이것들을 시인했던 철학자들은 자신이 입증했어야 했던 사항을 대체로 당연한 것으로만 여겼다. 그들은 모든 완전한 것들을 자기 마음속에 모았으며, 그 모두를 '완전한 존재'라고 명명된 한 대상에게 돌렸다. 그들은 완전한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고서입증은 하지 않고서완전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면 무엇이나,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 존재에게 돌렸다. 시편 기자는 최고로 공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을 이성적인 존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그분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을 따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할 때, 우리는 피조물이 존재하므로 창조주도 존재하신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조주께서 공의롭고 인자한 존재이심을 입증하고자 할 때, 우리는 피조물들 속에 인자와 공의라고 하는 속성들이 있으므로 이 피조물들을 존재케 하신 분 역시 공의롭고 인자하시다고 말한다. 시편 기자의 추론 방식이 바로 이러하다:"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5). 말하자면, 창조주의 인자하심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그분의 행사들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드러냄과 아울러 그분의 공의를 입증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러한 성품을 지닌 존재로 만드신 까닭에 우리가 그분의 공의의 법칙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그분의 인자하심이라고 하는 은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정함이라는 법칙에 불순종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자의 행복은 억지 행복이며,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다. 또한 공공 단체의 번영은, 그것이 불법에 기초할 경우에 마치 그 기초와 함께 이내 무너져 사라지고 말 건물과 같다. 

한편, 여기서 특별히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시편 기자의 탁월한 원리들은 단순한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실천적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진리라는 점이다. 그는 그러한 원리들의 영향력을 평범한 개인들을 넘어 입법자들과 정복자들에게까지 확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혹자는 인간의 태도를 고려하여, 지금까지 언급되어 온 교리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들에게나 받아들여지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입법자들과 정복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윤리를 세우며 다른 사람들이 복종해야 하는 규칙들 위에 존재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지닌 사상은 달랐다. 그가 지침으로 삼는 금언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다음 구절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 그의 군사적 금언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다음 구절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 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16, 17). 이러한 금언을 누가 제시하는가? 세상이라는 극장에 결코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은둔자인가? 아니면 거기서 빛을 발하기 위해 필요한 재능을 결여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가장 지혜로운 왕들 중 한 사람이며, 가장 용감하고 유능한 장수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그 택하신 백성을 다스리도록 가장 힘든 전투를 수행하는 군대를 지휘하여 가장 완벽한 승리를 거두도록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다. 시편 기자의 사고 체계를 계속 설명하자면, 그가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섭리 교리를 추론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듯이, 그리고 창조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윤리적 성품들에 관한 교리를 추론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듯이, 하나님의 윤리적 속성에 관한 교리와 섭리 교리 그리고 창조 사역에 관한 교리로부터 그는 공의롭고 인자하신 최고 주권자의 율법에 따라 흔쾌히 행하는 자들 외에는 그 어떤 정복자나 입법자도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권리를 갖고 있었다. 제임스 소린(James Saurin).

  

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라!" 어원학자들에 의하면 "즐거워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원래 기뻐서 춤추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가장 활기찬 기쁨을 나타내는 강력한 표현이다. 알렉산더.

  

1. "너희 의인들아" 너희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왜냐하면 그곳은 안전하지 못하므로) "여호와 안에서"(KJV 직역역자 주) "즐거워하라." 어거스틴.

  

1.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찬송을 마땅히 해야할 사람은 경건한 자뿐이다. 불경스러운 사람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은 마치 꽃을 퇴비에 얹어 두는 것과 같다. 죄인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은 마치 어리석은 자의 입에서 나오는 신탁과 같다. 일생토록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일인가! 그것은 계속 죄악을 도모하는 악인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처럼, 고리대금업자가 믿음으로 사는 삶을 논하는 것처럼, 혹은 마귀가 성경을 인용하는 것처럼 흉물스럽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에 적합한 사람은 오직 경건한 자뿐이다. 이사야는 "찬송의 옷"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61:3). 그 옷은 성도들이 입을 때에만 근사하다. 토머스 왓슨.

  

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이 시편은 서두에 나오는 표어를 통해 32편과 겹쳐진다. , 이 표어는 32편 끝에 나오는 권면의 반복인 것이다:"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1.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를 하나님이 즐거워하신다. 어거스틴.

  

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중 여기서 우리는 악기에 관한 언급을 처음 접한다. 초기 교부들이 거의 한 음성으로 교회에서의 악기 사용에 반대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까지도 동양의 교회에서는 악기 사용이 금지되는가 하면 서양에서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음성으로 부르는 찬송에 월등한 위치를 둔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한다. .

  

2. "하프", "프살테륨." (고대의 현악기이며, 한글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역자 주.) 우리 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림에 있어, 유대교화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하프나 프살테륨과 같은 악기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희생 제사와 마찬가지로, 단지 유대인들만 진지하고 심각한 심경에 사로잡히기 위해 악기 사용을 허용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겸허하게 배려해 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오르간 대신 우리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그분을 찬양할 수 있다. 크리소스톰.

  

유아 상태였던 유대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기독교 교회에서는 악기 사용이 용인되지 않았고, 단지 음성으로 부르는 찬송만 허락되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2절 하반절. 다윗은 "열 줄의 악기로"(한글 개역 성경은 "열 줄 비파로"라고 번역하였다역자 주)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한다. 그가 뜻하고자 한 바는 그 현악기의 줄이 몇 개인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의심의 여지없이 그 모든 줄을 다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몸을, 말하자면 여러 개의 현들을 매단 악기를 주셨다. 우리가 혀라는 한 가지 현만을 퉁기고서 충분한 찬송을 드렸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거룩한 묵상을 통해 나지막한 심령의 소리를 발하고, 거룩한 가사에 맞추어 입으로 찬송하며, 또한 큰 소리로 손뼉을 친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협주곡으로서 서로 연합되며, 그분은 이러한 음악만을 즐겨 받으신다. 리처드 베이커.

  

3. "그를 노래하며." (1) 노래란 '자연'의 음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기를, 산들이 노래하고( 55:12), 골짜기들이 노래하며( 65:13), 또한 숲의 나무들이 노래한다고(대상 16:33) 한다. 아니 공중은 새들의 음악실이며, 그것들은 나름대로의 음악적 운율에 맞추어 지저귄다. (2) 노래란 '예식들'의 음악이다. 어거스틴이 밀란에 가서 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 그토록 즐거운 가락을 교회에서 듣게 됨으로 인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베자(Beza)는 고백하기를, 그가 처음 회중에게로 들어가서 그들이 시 91편을 노래하는 것을 들었을 때 너무도 큰 위안을 느꼈으며 그 노랫소리가 후에도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고 한다. 랍비들은 이르기를,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킨 후에 시 111편에서 116편까지를 노래했다고 한다. 또한 우리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은 복된 만찬 직후에 찬미했다( 26:30). (3) 노래란 '성도들'의 음악이다.  성도들은 큰 무리를 지어 이 의무를 이행했다( 149:1, 2).  그들은 큰 곤경 가운데서도 이 의무를 이행했다( 26:19).  그들은 큰 도피 중에서도 이 의무를 이행했다( 42:10, 11).  그들은 큰 구원 가운데서 이 의무를 이행하였다.  매우 풍요한 상태에서도 이 의무를 이행하였다( 65:14). 이 모든 변화들 가운데서 노래는 그들의 명백한 의무이자 기쁨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성도들과 하나님의 종들이 전능자 여호와께 기쁨과 찬양을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분의 모든 성품들은 그들의 노래와 운율이 되기에 적합하다. (4) 노래란 '천사들'의 음악이다. 욥은 이르기를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38:7)라고 한다. 이제 이 "새벽 별들", 피네다(Pineda)의 말처럼, 천사들을 가리킨다. 어느 갈데아 기자도 이를 천사의 군대라 지칭하였다. 이 천군이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하러 보내심을 받았을 때에도 찬송하며 그 메시지를 전했다( 2:13). 그들은 찬양의 노래로 메시지를 전했으며, 천사의 무리 전체가 악보를 들었다. 하늘에는 천사들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가득하다. 거기서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분과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께 할렐루야를 노래한다( 5:11). (5) 노래란 '하늘'의 음악이다. 영광스러운 성도들과 천사들은 이런 식으로 찬양의 소리를 드높이며, 복된 상황 가운데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다. 또한 이는 신부 대기실의 음악이다. 이 땅에서 시편을 노래했던 성도들이, 이제 보다 큰 음성으로 할렐루야를 노래하며, 온전히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 없었던 자신의 기쁨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여기서는 그들이 나른한 마음과 더듬거리는 혀로 애를 썼지만, 영광 중에 이러한 장애물들이 제거되며, 그들의 즐거운 찬양을 훼방할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존 웰스(John Wells, Morning Exercises).

  

3. "새 노래." 말하자면, 최근에 받은 은혜로 인해 새롭게 그리고 최근에 만든 노래를, 혹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노래, 곧 하나님의 행사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그분을 찬양할 새로운 자료로서 매일 제시되는 잇따른 노래들을 가리킨다. 혹은 항상 신선하며 생명으로 가득하고 또한 새로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새로워진다는 의미에서 '' 노래라는 뜻이다. 욥은 이르기를 "내 영광은 내게 새로와지고 내 활은 내 손에서 날로 강하여지느니라"( 29:20)고 한다. 혹은 새 이름( 2:17)이나 새 계명( 13:34)처럼, 평범하지 않고 드물며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새롭다'는 것이다. 또는 이것은 복음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 그 속에서는 새 언약( 8:8), 새 예루살렘( 21:2), 새 이름( 2:15), 그리고 만물이(고후 5:17) 새롭다. 그 내용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새롭다:"저희가······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14:3). '새롭다'는 말은 옛 것과 반대되는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모세의 노래는 옛 것이고 어린양의 노래는 새 것이다. 마틴 가이어(Poli Synopsis Criticorum, 16141681). 

  

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옛 것을 벗어버리라. 여러분은 새 노래를 알고 있다. 새 사람, 새 언약, 새 노래. 새 노래는 옛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은혜를 통해 옛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서 이제 새 언약 곧 하나님 나라에 속한 새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새 노래를 배우지 않는다. 어거스틴.

  

3. "새 노래." 말하자면, 대체로 신기한 것을 접했을 때 갖게 되는 열렬한 감정으로 부르는 노래. 또는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낡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항상 새롭다는 뜻이다. 혹은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워진 영의 작용에 의해 불리우는 노래를 가리킨다. 이 새로워진 영은 창조에 속한 옛 은총들을 추구하기보다는, 만물을 새롭게 하는 이른 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속한 새 은총을 추구한다( 40:3; 96:1  5:9; 14:3). 조반니 디오다티.

  

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새 노래를 부르라는 권면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의 타락을 나타내는 음울한 증거이다. 그런 경우에는, 옛 것들을 망각하지 않도록 지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헹스텐버그.

  

3.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하나님을 올바로 찬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최선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존 트랩.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교회에 주어진 그분의 약속의 말씀. 믿고, 바라고, 또한 행해야 할 바를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뜻과 징벌상의 판결. 세상 창조 및 통치와 관련하여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결단. "정직하여"라는 말은 결함이나 잘못이 없다는 뜻이며, '부정직하다'(혹은 '사악하다')는 말과 반대된다. 또한 그것은 진실하고 확실하다는 뜻이다. 존 드 피네다(John de Pineda, 15771637)와 몰레루스(D. H. Mollerus, 1639), Synopsis.

  

4.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진리는 하나님의 가장 엄숙한 것들 속에뿐만 아니라 

꽃들 하나 하나에도 있다.

진리는 자연과 시기의 음성이며

진리는 우리 안에 있는 감시자이다.

그것은 별들에나 황금 빛 태양에나 산들바람에나

그 어디에나 있다.

진리, 그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윌리엄 토머스 베이컨(William Thomas Bacon).

  

5.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양식과 의복과 또한 모든 즐거움을 땅으로부터 공급받는 엄청난 수효의 사람들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아낌없이 그 혜택을 나누어 주는 자연의 관대함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뿐만 아니라공중과 물 속과 땅의무수한 생물들 또한 매일 자연의 도움을 받고 있다. 우리의 보살핌을 받는 짐승들 역시 땅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연에 의해 공급되는 풀을 주로 먹고 살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도, 사람들이 취미삼아 키우는 것들 이외에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존속된다. 조류 중 가장 수효가 많고 경시되는 것이 참새들일 것이다. 그것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이지만 자연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자연의 자녀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곤충의 수효는 너무도 엄청나므로, 그 종류들을 파악하는 데에도 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파리류만 해도 얼마나 많고 다양한가! 이는 우리 몸의 피를 먹이로 삼는다. 또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바로는, 이 한 마리가 있는 곳에는 사람이나 짐승의 피를 빨아먹지 않는 것들도 무수하게 존재한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아마 흙 한 줌 안에도 살아 있는 곤충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한 방울 물 속에서도 발견된다. 그것들의 번식 및 생존 수단은 이해할 수 없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이 무수함은 물론이고, 자연이 그것들의 생존을 위해 제공하는 수단들도 풍성하다. 이토록 고갈됨이 없는 풍성함을 자연의 품속에 쏟아 부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피조물 하나 하나에게 먹을 것과 거할 곳을 공급하신다. 그것들을 위해 그분은 풀과 채소 등을 자라게 하사 적절한 먹이로 삼게 하신다. 또한,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보잘것없는 피조물들이라 해도 그분은 그것들 모두를 먹이고 돌보신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주의 위대하심이 그 얼마나 분명한지요! 온 인류가 힘을 합해도 이룰 수 없는 일을 주께서는 행하십니다. 주께서 공중과 물 속과 땅 위에 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셨나이다. 주께서 짐승들과 곤충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주를 믿는 백성을 위해서 행하지 않으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할 때, 우는 까마귀를 주께서 먹이심을 생각하자. 사람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는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만족의 비결을 배우자. 위대하신 자연의 창조주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께 관심을 집중하자. 이는 그분이 우리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과 신실함으로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은총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줄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크리스천 스텀(Christopher Christian Sturm).

  

5.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세상에 거하는 무가치한 자들의 불평 소리를 들을 때, 혹자는 하나님이 ''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을 퍼뜨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손길을 곰곰이 고찰해 보면, 모든 것이 그분의 자비를 표현하고 있으며, 그분의 인자하심이 나타나지 않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심지어 사람들의 불법마저도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장애 노릇을 거의 하지 못한다. 그분은 자신의 태양을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고, 자신의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보내신다. 아담 클라크.

  

5. "여호와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성을 논의함에 있어, 그분의 '인자하심'을 빠트려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분의 완전한 속성들 모두가 그분의 영광이지만 그 인자하심이야말로 특별히 그렇게 불리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여호와의 장엄하신 영광 보기를 진지하게 청했을 때, 주께서는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33:19; 34:7)라고 대답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인자하심(선하심)을 자신의 영광으로 여기신 것이다. 또한 그것은 후에 언급되고 있는 그분의 자비, 은혜, 오래 참으심, 그리고 진리 등을 포함한다. 인자하심을 따라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를 구원하실 때, 그것은 자비이다. 인자하심을 따라 무가치한 자에게 은총을 내리실 때, 그것은 은혜이다. 인자하심을 따라 반역을 일삼는 자를 참으실 때, 그것은 오래 참으심이다. 인자하심을 따라 약속된 축복을 베푸실 때, 그것은 진리이다. 인자하심을 따라 궁핍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때, 그것은 풍성하심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매우 포괄적인 용어이다. 그것은 죄인으로서의, 신자로서의, 혹은 단순한 피조물로서의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그분의 모든 형태의 사랑을 다 포함하고 있다. 조지 버더(George Burder, 1838).

  

5. "여호와의 인자하심." 그분은, 자신이 원하셨다면, 우리 혀로 느끼는 모든 맛을 쓰게,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혐오스럽게, 우리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을 가시로, 우리 코로 맡는 모든 냄새를 악취로, 그리고 우리 귀로 듣는 모든 소리를 소음으로 만드실 수도 있었다.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D.D., 17431805).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루아흐"(jwr)가 영이 아니라 호흡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그 입"이라는 표현에서( 11:4과 비교) 그리고 "말씀"과의 대구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단순한 말은 단순한 호흡에 불과하다. 이 둘은 힘, 노고, 그리고 연약한 인간이 무엇인가를 완전케 하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방법 및 도구 등과 대조된다. 다음과 같은 평행 구절도 있다:"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27:3).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33:4).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니라.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104:29, 30). 반면에, "루아흐"를 해석함에 있어 하나님의 성령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해석이 될 수 없다. 7절과 9절뿐만 아니라 본절 역시 언급하는 창조 역사로 말하자면, 창조는 하나님의 성령과 그분의 말씀의 소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셨고,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또한 우리는 성령과 하나님의 권능이 여기서 호흡으로 상징되어 있다고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는 호흡이란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는 첫번째 표시이기 때문이다. 헹스텐버그.

  

6.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는, 요한이 가르치듯이, 삼위일체 중 제일위이신 말씀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 있다( 1:1, 존 코세이우스<John Cocceius>, 16031669). 이 말은, 그로티우스(Grotius)가 그리스도를 아무데서도 찾지 못하는 반면 코세이우스는 그리스도를 어디서나 찾는다는 옛 말을 입증시키는 한 가지 사례이다. C. H. S.

  

6.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이 될 것이다"고 어거스틴은 말했다. 따라서 교회는,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구절을 사도신경의 첫번째 내용으로 삼고 있다. 존 윔스(John Weemse).

  

6, 9.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행동과 말씀이 그리고 실행과 약속이 일치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실행에 옮기시는 것은 말씀이나 약속을 하시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간에는 틈새가 전혀 없다. 그분의 말씀은 곧 행동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11:3). 명령과 약속을 포함한 그분의 말씀 속에는 전능성이 깃들어 있다. "그의 능력의 말씀"이라 지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3). 그분의 말씀 한마디는, 천지의 모든 힘들이 연합하여 영원토록 해야 할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순간에 이루신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생동감 있는 믿음의 작용을 방해하는 주요 낙심거리들이 제거된다. 약속 실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약해지는 것은, 우리가 그 실현을 불확실하며 어려운 것으로 여기거나 먼 장래의 일로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믿음은 그러한 실현이 확실하고 쉬우며, 또한 현재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

  

7.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하나님이······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1:10). 이리저리 휩쓸려 움직이는 이 물질이 다른 모든 물질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법칙하에 그 경계를 제한받음으로써 사람과 그를 둘러싼 다른 모든 피조물들이 거할 수 있는 땅이 마련될 수 있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라고 노래한다. 그 경계는 그분의 종들로 하여금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우리처럼 해변에서 바라보았으며, 잘 알려진 법칙의 영향 하에 높이 굽이치는 바다 물결은 마치 그들처럼 하늘에 닿으려 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치 그 물결이 해변보다 훨씬 더 높아서 뭍을 덮칠 위험에 놓인 듯할 정도였다. 발달된 과학의 혜택을 누리는 우리도 흔히 그러한 인상을 받는다. 선지자들도 우리가 보는 것같이 보았고, 우리와 동일한 종류의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그 얼마나 놀랍게 여겼던가! 모래톱은 바다 경계를 위한 여호와의 대리자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5:22). 존 던스(John Duns, D.D., Science and Christian Thought, 1868). 

  

7. "바닷물." 내가 보아온 모든 것들 중, 바다나 대양만큼 나의 상상력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도 없다. 이 거대하게 쌓인 물을 볼 때마다, 고요한 상태에서도 큰 감동과 놀라움을 느낀다. 특히 폭풍우 속에서 바다가 요동함으로써 사방의 수평선이 거품을 내뿜는 큰 물결과 둥둥 떠다니는 산들처럼 보일 때, 그러한 장면에 접함으로써 일어나는 공포심을 적절히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내 생각으로는,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에게 있어 요동치는 바다는 그의 눈에 포착될 수 있는 움직이는 물체들 중 가장 큰 것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큰 규모로 말미암아 그의 상상력에 미칠 수 있는 감명 중 가장 깊은 감명을 남길 것이다. 나는 바다라는 이 거대한 물을 바라볼 때마다 처음 그것을 쏟아내시고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한 바닥을 만드신 손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은 대상은 자연히 내 생각 속에 전능하신 존재에 관한 개념을 불러일으키며, 그분의 존재를 형이상학적 논증 못지않게 확신시킨다. 상상력은 이해력을 자극하며, 감지할 수 있는 대상의 엄청난 크기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존재에 관한 개념이 생겨난다. The Spectator.

  

7. "무더기같이." 바닷물을 마치 고체인 듯이 언급하는 표현으로서, 출애굽기 15:8 내용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깊은 물." 물 덩어리. 이러한 표현의 핵심은, 마치 사람들이 적절한 크기의 고체를 다루듯이 하나님이 그 엄청난 양의 물을 다루신다는 사실에 있다. , 마치 사람들이 돌을 쌓고 밀을 저장하듯이 하나님은 바다를 쌓고 저장하신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7. 지금까지 지구의 표면을 덮고 있는 엄청난 양의 바닷물은, 창조 제 삼일째에 보다 좁은 범위 안으로 결집되었으며, 물 속에 잠긴 땅의 거대한 형적들이 드러나 거주 가능한 곳이 되었다······물들은 지표 위로 두루 흩어져 존재하는 대신 대부분 하나의 거대한 구성체로 집결되었다. 현재 우리 눈에 보이는 상태가 바로 그러하다. 여러 곳의 큰 바다들과 대양들이 사실은 물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구성체일 뿐이며,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 남빙양 등과 같이, 각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명칭들로 불린다. 창세기 1:9에 관한 조지 부시(George Bush)의 주해.

  

8. "온 땅은." 제어할 수 없을 듯이 보이는 바다도 그렇게 길들이신 하나님이 땅 위에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그들이 그분 대신 다른 그 무엇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야수가 날뛰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뱀이 숨어 기다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사람이 그대를 미워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마귀가 그대를 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주관하에 있고, 그분만이 그대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9.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전혀 지체됨이 없다. 휴고 그로티우스.

  

9.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결과들이자 그분의 지성과 계획과 결심의 소산이었다. 윌리엄 빈니.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옛적의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후계자격인 요즈음의 고위 성직자들이 진리를 더욱 대항할수록, 그것은 더욱 확산되었다. 독일에서의 종교 개혁은 천주교인들의 박해로 인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다른 여러 왕들 중) 영국의 헨리 8세와 헝가리의 루도비쿠스라는 두 명의 왕들이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썼을 때, 오히려 사람들의 호기심이 더욱 자극되어 전반적으로 루터의 입장에 동조하게 만드는 결과가 야기되었다. 리처드 영(Richard Young, Christian Library, 1655).

  

11. "여호와의 도모." 앞 절의 "열방의 도모"와 본문의 "여호와의 도모"간의 대조에 주목하라. C. H. S.

  

11. "심사." 앞 절의 "사상"에 해당하는 말과 원문상 동일하다. 윌리엄 드 버그(William de Burgh, D.D.). 

  

11. 손목 시계나 괘종 시계의 톱니바퀴들은 각기 반대편으로 움직이지만, 한결같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 곧 시간을 알리거나 괘종을 치게 하려는 의도를 위해 기여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분의 약속들과 상충되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길을 취하는가 하면, 또다른 사람은 저 길로 행한다. 선한 사람들은 이 길로 가고 악인들은 다른 길로 가지만, 모든 것이 결국에는 그분의 뜻을 이루며,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목적에로 초점을 맞추게 된다.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1절 하반절. 형제들이여, "심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말하자면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앉아서 생각하신다거나 혹은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에 대한 계획을 세우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처럼 더딘 모습은 사람인 여러분에게나 해당된다. 어거스틴.

  

12.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서도 잃어버린 바 될 수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튼튼한 대리석에 새기고서도 멸망당할 수 있고, 콜로서스(로데스 항구에 세워졌다고 하는 약 36m의 아폴로의 청동상역자 주)에 버금가는 기념비에 그 이름을 새기고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으며, 병원 정문에 그 이름이 새겨지고도 지옥으로 갈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이름을 자기 집 대문 앞에 새겼지만 그 집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변해 버릴 수 있다. 이 모두는 마치 먼지에 혹은 물 위에 이름을 쓰는 것과 같아서, 그 글자는 기록되자마자 사라진다.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나온다고 해서 복된 사람이 아니듯이, 단지 이름을 남긴다고 해서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영원한 천상의 기록(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적힌 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참된 위안을 누린다. 그러한 기록은 어두컴컴한 곳에 싸여 보관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읽을 수 있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12. "빼신 바 된 백성." 혹자는, '그분을 자신의 유업으로 선택한 백성'이라 읽는다. 어떻게 읽든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동일하다( 26:1719 참조). 존 트랩.

  

12. 우리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은 복된 일이다. 거지와 관계를 맺어 보았자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는 그에게는 전혀 힘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왕과 관계를 맺는 일은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바이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복이 있도다"라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조셉 사이먼즈(Joseph Symonds).

  

12.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큰 유익을 자기 자신의 노력과 열심에 의해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그리고 택하시는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친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된다. 존 칼빈.

  

12. 때때로 나는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을 알파벳의 '자음들' '모음들'에 각각 비교하곤 했다. '자음들'은 수효가 많고 큰 글자들로서, 글자가 수록되는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반면에, '모음들'은 비록 수가 적고 크기가 작지만 가장 긴요하다. 멋진 소리를 내게 하는 것도 모음들이다. 그것들이 없이는 발음이 되지 않는다. 오 친애하는 여러분이여, 비록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다른 이들 위에 자신을 드러내지만, 그들은 단지 '자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벙어리와 같은 존재들이다. 반면에, '선한' 사람들은 어느 측면에서나 가장 크게 쓰임받고 중요시되는 '모음들'이다. 선한 사람은 기도를 통해 도움을 주며, 권고로써 조언하며, 또한 자신의 권위로써 중재한다. 우리가 애곡하는 것은 바로 '선한 사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망이 '모음'을 없애버린 것이다. 또한 나는 선한 사람이 없는 곳에는 침묵만이 흐를 것임을 두려워한다. 그럴 경우에 침실에서, 집안에서, 가게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교구에서 침묵만이 흐를 것이다. 이는 그가 어디서나 '모음' 역할을 하며 모든 면에서 '선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존 키친(John Kitchin, M.A., a Funeral Sermon, 1660).

  

15.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이렇게 번역된 구절에 대한 하나의 실례로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덧붙이고자 한다:"인류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인종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함에 있어 모든 상황이 일치한다. , 원래는 단일 인종이었으나 온 땅에 인구가 늘어가고 확산된 후에, 기후, 음식, 생활 양식, 질병, 그리고 서로 닮지 않은 사람들 간의 결합 등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변화들이 야기되어 온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변화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며, 단지 개인적 다양성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들이 나중에는 보다 독특한 종류들로 한정되었다. 이는 동일한 원인들이 계속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그것들이 더욱 일반화되고, 보다 뚜렷하게 특징지어지며, 보다 지속적으로 굳어지고 또한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되었기 때문이다." 콩트 드 뷔퐁 르클레르(G. L. Comte de Buffon, Leclerc, 17071788).

  

15. 만물의 창조주께서 "일반의 마음을 지으셨다." "일반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하드"(djy) '동시에 함께'라는 뜻으로서, 사람들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도 많이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적 성향이라는 측면에서는 마치 똑같은 시점에 지음을 받은 듯이 그 마음이 한결같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 하나님께 동일한 신앙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이 점을 변개시켜서는 안 된다. 윌리엄 핑크(William Pinke, 1631).

  

15절 하반절. 두 사람이 가난한 자에게 도움을 주면서, 한 명은 하늘에서의 상급을 바라고 다른 한 명은 사람들의 칭찬을 구한다. 우리의 눈에는 이 둘이 한가지로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둘로 이해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을 이해하시며 또한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들의 목적을 보시며 그들의 기초 동기를 감찰하신다.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어거스틴.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아벨라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는 오십만에서 백만에 달했지만, 알렉산더의 오만 병사들에 의해 완패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때 막강했던 다리우스도 이내 몰락했다. 나폴레옹은 오십만 이상되는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진격했다.

  

공랭식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혹은 스키타이인 티무르 영도하의 군대도

그처럼 많은 수효는 아니었고 

그처럼 공포를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끔찍스러운 겨울의 혹한으로 인해 군대는 지리멸렬했고, 그 지도자 나폴레옹은 얼마 가지 않아 세인트 헬레나라는 쓸쓸한 바위섬에 갇히게 되었다. 이 구절은 전체 인류 역사를 통해 입증되어져 왔다. 가장 강력한 대군들도 하나님이 그들을 대적하시면 마치 눈송이처럼 녹아버린다. C. H. S.

  

16. "용사." 혹은 '거인.' 골리앗을 예로 들 수 있다. 가장 능숙한 수영 선수들도 익사하는 경우가 있다. 존 트랩.

  

16, 17.

  

빽빽하게 운집한 창기병들이 

그 지휘관을 지켜 주지 못하며

용감한 자의 힘이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한다.

전마는 헛되이 앞 발을 들어올리지만,

자기 주인을 구하기에는 너무 힘이 약하다.

리처드 맨트(Richard Mant).

  

16, 17. 모든 인간의 '지성'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이 제아무리 세다 해도 사실은 연약하고 부족할 뿐이다. 스튜어트 퍼론

  

16, 17. 폭풍우를 만난 어느 행인이 피할 곳을 찾기 위해 길 바깥으로 벗어나 근사하게 펼쳐진 떡갈나무 가지 아래로 간다. 그는 그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잠시 동안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갑작스런 돌풍이 불어와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그 가련한 행인에게 떨어뜨린다. 그리하여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온 그는 다치거나 불구자가 된다.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역시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다. 그들은 어떤 위대한 사람의 보호 아래로 피하기 위해 자신의 길을그리고 너무도 자주 하나님의 길을벗어나며, 얼마 동안은 그렇게 하여 도움이나 피난처를 제공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 그 위대한 사람 자신이 급속히 몰락하여 예전의 축복이나 영예를 상실하게 되고, 그를 의지했던 사람들 역시 그와 함께 몰락하게 된다. 그들이 그와 같은 육신의 팔을, 그들을 기만했던 그 부러진 지팡이를 의지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두 발로 오래도록 서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토머스 가테이커(Thomas Gataker).

  

17. "." 만일 말의 힘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거나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39:19), 말의 힘을 신뢰하지 말라. 말의 힘을 이용하되 그것을 의지하지 말라.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에 의해 말에게 주어진 힘을 의지한다면, 여러분은 말을 자신의 신으로 삼는 셈이다. 우리가 강한 그 무엇을설령 그것이 짐승이라 할지라도 의지하기 쉽다는 점을 잘 아시는 까닭에, 하나님은 말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는 경고를 자주 하신다. 

"구원함에 말은 헛 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은 말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헛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시편 기자가 "말은 헛 것임이여"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약한 말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힘센 말을 언급한다. 그러한 말도 인간을 구함에 있어서는 헛 것이며, 그 힘으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에게 위대한 구원을 약속하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말의 힘에 의한 구원을 기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내가······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7)고 말씀하셨다. 이는 마치, 피조물의 힘에 의지하여 구원받으려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말은 너희를 구원함에 있어 헛 것이며, 나는 말 없이도 너희를 구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할 것이다. 조셉 캐릴(Joseph Caryl).

  

1720. 사람은 세상적 축복의 결핍 상태에 대해 민감하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공급해 주실 것임을 알게 되기까지는 집요한 관심과 노력으로 안달해 가면서 그 축복들을 추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근사한 친구들을 둔 경우에는, 이러저러한 도움을 곧 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궁핍한 상황에 대해 아무런 염려도 하지 않는다. 반면에, 끝없는 노고와 근심 가운데 빠져 사는 사람에게 "왜 당신은 그토록 기진맥진하게 살아가는가?" 하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나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내가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나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식의 불신 가운데서 조바심내는 제자들을 지켜보셨다. 그러한 불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게 했다. 현재의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켜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재산이란 쇠하여지며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근심의 짐을 주님께 맡기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결코 자신의 어깨에서 그 짐을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의 눈길은 우리에게 선을 베풀기 위해 항상 우리 위에 머물러 있다. 외적인 것들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을 자기 영혼의 의지처로 삼지 않는 사람은 세속적 지원을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 지혜, 친구들, 혹은 힘 등을 의지할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지 않을 것이다.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하든 거짓되든, 건전하든 부패했든간에 의지할 존재를 찾아나설 것이다. 그들은 도움을 청하러 애굽으로 내려갈 것이며, 말을 의지할 것이다. 병거의 수효가 많으므로 그것들을 의지할 것이다. 그리고 강력해 보이는 기병들을 의지할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지 않고 여호와를 찾지도 않는다. 존 볼(John Ball).

  

18. "보라." (KJV 직역역자 주.) 지금까지 시편 기자는 '모든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증거를 제시했지만, 이제는 교회를 향하신 그분의 보살핌을 언급함으로써 그 섭리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밝힌다. 그분은 자신의 교회를 모든 위험과 공격 가운데서도 인도하고 지키며 또한 보호하신다. 이 사실을 주목하게 하기 위해 그는 "보라!"는 말로 시작한다. 아담 클라크.

  

18. "여호와는······살피사." 태양이 어떻게 그 빛과 열을 한결같은 경로에 따라 온 세상에 던지는지, 또한 어떻게 그것이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비취는지 생각해 보라. 그 빛이 집열 렌즈에만 집중된다면, 그 렌즈에 비추어지는 물체만 타고 다른 모든 것들은 지나쳐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창조시에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바라보셨으며, 그것들은 그분의 눈에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 하지만 그분이 사랑의 빛을 던지기를 기뻐하실 때, 또한 그분이 그 빛을 택하심받은 자들 위에 그리스도를 통해 비취게 하실 때, 그들의 심령 깊은 곳이 뜨거워지고 그들의 사랑에 불이 지펴진다. 그런가 하면 다른 이들은 그 온기를 거의 느끼지 못하며 그들 위에 던져진 일반 은총의 빛을 거의 감지하지도 못한다. 리처드 홀즈워스(Richard Holdsworth, 1651).

  

18.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이는 매우 고무적인 말씀이다. 종교의 상대적 가치를 주장하려 들지 않는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아울러 그분의 인자하심을 소망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그 조화에 놀라며, 이 두 가지 사항이 서로 상충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였다"( 9:31). 혹자는 두려움이 소망을 다치게 하거나 소망이 두려움을 제거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다. 그리고 이 둘이 혼합된 상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깊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두려움은 그것에 의해 제시되는 증거를 통해, 그리고 우리를 느슨하고 부주의한 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평안과 기쁨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소망을 고무시킨다. 또한 소망은 이러한 두려움에 적지않은 도움을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랄 때, 그분은 가장 영광스러워 보이시며 또한 그분에 대한 우리의 모든 헌신이 가장 가치 있게 여겨진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보살핌을 더 많이 확신할수록, 더욱더 "여호와여,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려 하십니까?"라고 여쭙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근심하시게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떨수록, 우리는 더욱더 무릎을 꿇고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할 것이다( 19:14). 그것은 '생동감 넘치는 소망'이라 불린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경험을 통해, 마치 봄이 들판과 정원에 동일한 영향을 미치듯이 그 소망이 그들의 모든 원칙들과 의무들에 동일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윌리엄 제이.

  

18.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 당신이 확신을 가질 수 없을 때, 구원의 소망을 세울 수 있는 바탕을 더욱 든든히 하라. 확실한 기초 위에 서 있으면, 온 세상이 요동해도 당신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각함에 따른 기쁨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을 자각함으로 인해 눈에 눈물이 가득하며 당신의 영혼에 슬픔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과연 당신의 처지를 어떤 위선자의 그것과 혹은 가장 부유하되 은혜를 모르는 자의 그것과 바꾸려 하겠는가? 나는 당신이 어떤 가능성으로써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구원의 가능성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다. 분명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사람에게도 거기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과연 아무것도 아닌 일인가? 만일 지옥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강렬하게 지니고 있다면 그들의 고통이 경감되지 않겠는가? 당신은 병들었을 때 의사를 찾는다:"선생님, 제 상태가 어떠합니까? 제가 살겠습니까, 아니면 죽겠습니까?" 만일 그 의사가 대답하기를, 확실하지는 않지만 낙관적이라고 한다면, 아마 그것은 당신이 살 것이며 또한 좋아질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병 중에 있는 당신에게 위로가 된다. 토머스 둘리틀(Thomas Doolittle, M.A., Morning Exercises, 16301707).

  

18. 가장 연약한 신자도, 가장 작은 성도도 소망의 근거를 갖고 있다. 복음과 언약은 순서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제시되며, 하나님은 은총을 그토록 풍부하게 공급하시므로, 우리 모두는 "좋은 소망을 은혜로" 얻을 수 있다(살후 2:16). 또한 이러한 은총을 지닌 모든 이들은 소망하도록 허락받고, 격려받으며, 심지어 명령받는다. 그들의 소망이 자신에게는 위로가 되며 하나님께는 기쁨이 된다. 사무엘 둘리틀(Samuel Doolittle, Righteous Man's Hope in Death, 1693).

  

18, 19. 무려 15개월 가까이 로셸(프랑스의 항구 도시역자 주)에 대한 포위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 전례 없이 용감하게 맞섰던 그 거민들은 기근으로 인해 말, 나귀, 노새, , 고양이, , 그리고 생쥐 등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비참한 처지에 직면했다. 그리고 옥수수 1페크( 9리터역자 주)의 값이 오늘날 화폐로 약 25파운드에 달했다. 그 거민들이 크고 후한 아량을 베푼 사례들이 많았다. 어떤 이들은 너무도 은밀하게 자선을 베푼 까닭에 그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 사례들 중 하나를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왕의 대변자 역할을 담당했던 드 라 구테(De la Goute)에게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프로스니(Prosni)라는 상인의 미망인으로서 매우 경건하고 인정 많은 여인이었다. 기근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해졌을 무렵에, 자신의 곡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저 주었다. 그녀의 오빠 드 라 구테의 아내, 곧 그녀의 올케는 생각이 달랐으며, 그녀의 행동을 비난하며 성난 음성으로 묻기를 "아가씨에게 남아 있는 모든 곡식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언니, 여호와께서 나를 위해 공급해 주실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포위 공격은 계속되었고, 기근은 그 무서운 참상을 더했다. 그리고 네 자녀를 둔 가련한 미망인 프로스니는 큰 곤경에 처한 자신을 발견했다. 남아 있던 자신의 양식이 모두 고갈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올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녀를 위로하기는커녕 준비성 없는 처신을 나무랐다. 그러고는 비아냥거리며 덧붙여 이르기를, "그토록 큰 믿음을 가지고서도, '여호와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서도 그렇게 몰락해 버렸으니, 좋은 시절이나 돌아오면 그분이 프로스니를 위해 공급해 주실런지"라고 했다.

이 말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가련한 미망인 프로스니는 서글픈 낙심에 잠겨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 가운데 죽음을 맞기로 결심했다. 자기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자녀들이 기쁜 마음과 흥겨운 얼굴로 그녀를 맞으며 이르기를, 낯선 어떤 사람이 늦은 시간에 문을 두드렸고 문을 열자 2부셸( 72리터역자 주) 가량되는 밀자루를 던지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고 했다. 

 

미망인 프로스니는 자기 눈을 믿기가 어려웠으며, 그 은인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넘쳐나는 상태로, 굶주린 몸 상태가 허락하는 한 최대한 빨리 올케에게로 곧장 달려갔다. 그러고는 올케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언니, 여호와께서 나를 위해 공급해 주셨어요"라고 외쳤다. 그러고 나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도 시기적절하게 제공된 이 뜻밖의 도움 덕분에, 그녀는 포위 공격이 끝날 때까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으며, 그처럼 시기적절하고 자비로운 도움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코 알 수 없었다. The Biblical Treasury, Vol. .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영혼"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이 놓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록 이 단어가 히브리인들간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 양식이긴 하지만, 진지한 감정 상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신자들이, "우리는 온 마음으로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을 우리의 방패와 도움으로 여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존 칼빈.

  

20. "우리 영혼." '우리 영혼들'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다. 이는 마치 우리 모두가 한 영혼을 지녔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놀라워하며 이르기를,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24:32)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 증거될 무렵에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4:32)고 한다. 식탁 위에 놓인 여러 물방울들에 손을 대면 그것들은 곧바로 하나로 합쳐진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간에 좀더 친숙해진다면, 그들은 쉽게 연합될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제이.

  

20. "저는 우리의 도움." 시리아 왕 안티고누스는 안드레오스 섬 인근에서의 전투를 준비하고 적들의 동향을 살피고 그들의 힘을 알아 보기 위해 소함대를 보냈다. 보고 내용인즉 그들의 전함 수효가 아군보다 더 많고 병력 배치 면에서도 더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안티고누스는 이렇게 말했다:"뭐라고? 그럴 리가 없다. 너희는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는 대장 한 사람의 위엄이, 특히 용기와 경험의 뒷받침을 받을 때 다른 많은 사람들을 압도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용기와 경험을 하나님 안에서 찾지 않으면 어디서 찾겠는가? 그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으로부터 구원해낼 힘과 권능이 그분께만 있다. 그분은 그 일을 해내실 수 있고 또한 하실 것이다. 그분의 마음은 지혜롭고 그 힘은 강하다. 그분 외에는 구주가 없으며 구원도 없다. 그분은 의인의 방패요 연약한 자의 힘이요 또한 억압받는 자의 피난처가 되신다. 그분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 1:23). 온 세상에 그분과 같으신 분이 누구인가? 존 스펜서.

  

20. 어느 젊은이에 관한 근사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중에 배를 타고 있었다. 다른 모든 승객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그 젊은이만은 쾌활했다. 승객들이 유쾌하게 웃는 이유를 묻자, 그는 그 배의 도선사가 바로 자기 아버지이며 또한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돌봐주실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위대하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모든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그리고 모든 환난의 결말이 어떠할지를 영원부터 작정해 두셨다. 그분은 우리의 도선사로서 선미에 앉아 계신다. 그러므로 설령 교회 혹은 정부라는 배가 가라앉는 상태에 있다 해도 안심하라. 우리의 도선사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이다. 먼저 천상에서 작정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지상의 국회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상의 바퀴에 의해 지시와 제어를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12:6). 참새 한 마리는 한 앗사리온의 가치도 없다. 그 누구도 하나님이 영원부터 작정하신 것보다 한 앗사리온 정도 이상의 해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22.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그들의 어떠한 장점에 따라서가 아니라 은혜의 정도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망의 은혜의 정도에 따라 그 소망은 하나님 안에서 은혜와 자비를 발견하리라는 기대감 가운데 그분을 의지하도록 격려한다. 존 길(John Gill).

    

 

 

 

힌트

  

 33편 전체. 이 시편은 성례전적이다.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다:(1)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13). (2) 찬양의 의무를 강화시키는 논거들(419). (3)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성호, 그들의 행복, 그리고 간구 등과 관련하여 갖는 확신(2022). 아담 클라크.

  

1. 기쁨은 찬양의 핵심이다. 여호와께서는 기쁨의 원천이다. 참된 즐거움을 위해서는 반드시 올바른 성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1절 하반절. 아름다운 찬송. 무엇으로? 음성으로, 묵상으로 드리는, 그리고 습관화된 찬송. ? 천사에게 날개가 있듯이, 우리는 그것을 타고 올라간다. 나무에 꽃이 있듯이, 그것은 우리의 열매이다. 제사장이 관복을 입어야 하듯이, 그것은 우리의 직무이다. 여인의 긴 머리와 같이, 그것은 우리의 아름다움이다. 왕의 머리에 씌워진 왕관처럼, 그것은 우리의 가장 높은 영예이다. 언제? 항상. 특히 신성모독, 핍박, 질병, 궁핍, 죽음 등에 직면할 때. 누가? 불경건하거나 위선적인 혹은 분별없는 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찬송 없이 지내는 것은 마치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2. 악기를 사용한 음악. 그것이 합법적인가? 그것은 적절한가? 만일 그렇다면, 그 사용, 제한, 그리고 규칙은 어떠한가? 회중 음악을 향상시키는 설교.

  

3절 상반절. 우리의 헌신을 신선하게 유지할 의무. 회중 찬송에 있어서는, 신선함, 기교, 그리고 성심성의 등이 결합되어야 한다.

  

4. 하나님의 말씀과 행사. 그것들은 정직하고 서로 일치한다.

  

4절 상반절. 그 말씀은 교훈적이고, 교육적이며, 역사적이고, 예언적이며, 언약적이고, 체험적이며, 항상 올바르고, 또한 잘못이나 허물이 전혀 없다.

  

4절 중반절. 창조, 섭리, 은혜 등과 관련한 하나님의 사역은 항상 진리와 부합된다. 

  

4, 5. 찬송을 드려야 할 네 가지 근거들:하나님의 진리, 신실하심, 공의, 그리고 인자하심:(1)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2)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3)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4)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아담 클라크.

  

5. 하나님의 행사에 있어서는 공의와 인자하심이 동일하게 부각된다.

  

5절 하반절. 주의 깊은 시각과 유창한 언변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주제이다.

  

6. 옛 창조와 새 창조에 있어서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

  

7. 파괴 작용과 재건 작용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

  

7. 위대하신 농부의 곳간.

  

8. 우주적 예배에 대한 이유, 그것에 대한 장애 요인, 장래의 전망, 그리고 그것과 관련한 우리의 의무.

  

8절 하반절. 경외, 예배의 핵심.

  

9. 창조에 있어, 그 백성을 부르심에 있어, 그들의 위로와 구원에 있어, 그리고 그들이 영광에 들어감에 있어 저항할 수 없는 여호와의 말씀.

  

10. 선교 범위 안에 있는, 교양 있고 철학적인 이교도들.

  

10, 11. 서로 적대적인 도모들. 

  

11. 하나님의 뜻의 영원성, 불변성, 충족성, 그리고 그 지혜. 하나님의 의도들, “그 심사”, 그 심사의 지혜와 사랑.

  

12. 복 있는 백성과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의한 두 가지 선택, 그리고 그 복된 결과. 하나님의 교회의 행복.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분의 기쁨, 그리고 그분에 대한 그들의 기쁨.

  

13. 전지하심과 그 교훈들.

  

13, 14, 15. 섭리의 교리.

  

15.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철저히 파악하고 계시며, 그들의 행위를 평가하신다. 인간 성품의 유사성.

  

16, 17, 18. 인간적 신뢰의 거짓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안정성.

  

18. 하나님의 자비를 소망함에 있어, 그 그릇된 형태와 참된 형태를 구분해야 한다.

  

18. (1) 하나님이 지식의 눈길로 그들을 살피신다. (2) 하나님이 사랑의 눈길로 그들을 살피신다. (3) 하나님이 섭리의 눈길로 그들을 살피신다. 윌리엄 제이.

  

19. 자연적 기근과 영적 기근 가운데서, 특히 내적 소망과 법적 충족의 기근 가운데서 살아 남음.

  

20. “여호와를 바람이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1) 확신여호와께서 최고로 선하시다는 확신. (2) 소원이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씀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 (3) 소망. (4) 인내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행함에 있어 결코 태만하지 않으신다. 윌리엄 제이.

  

20절 상반절. 신자가 매순간 취해야 할 입장.

  

21. 믿음이 넘쳐남으로 말미암은 기쁨.

  

22. 신자들만을 위한 기도.

  

22. 대갚음, 혹은 믿음에 비례하여 주어지는 은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