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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묵상/제 1권 1-41편

스펄젼의 시편 34편 강해

by 은총가득 2022. 7. 4.

 

 

스펄젼의 시편 34편 강

개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이 머리말과 관련된 간략한 이야기가 사무엘상 21장에 나온다. 비록 시편 기자의 감사하는 마음이 그로 하여금 분에 넘치는 구원을 베푸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기록으로 남기도록 자극하였지만, 그는 도피 사건들을 자신의 이야기 속에 전혀 포함시키지 않고 다만 위험한 때에 간구한 바를 응답받은 위대한 사실만 언급하고 있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는 허영심 강한 자들처럼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들 앞에 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그런 자들은,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 당한 그리니치의 연금 생활자들만큼이나 자신의 죄에 대해 긍지를 느끼는 듯하다. 다윗은 이례적인 바보짓을 저질렀지만,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노래할 만큼 실제적인 바보는 아니었다. 원문상으로 이 머리말은, 시편 기자가 가드의 왕 혹은 아비멜렉(당시 팔레스틴 왕들에 공통적으로 붙여진 명칭이었을 수 있다-역자 주)인 아기스에게서 달아났을 때 이 시를 썼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기념하려는 의도에서 이 시를 지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받은 은총을 잘 다듬은 기록으로 남겨 두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손으로 만든 최선의 작품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다윗은 자신이 구원함을 받은 특별한 위기 상황을 고려하건대, 이 시편을 쓰면서 큰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이 시를 지음에 있어 상당히 규칙성 있게, 히브리어 알파벳 문자들의 순서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구성하였다. 이러한 답관체 시편으로서는 이 시가 25편에 이어 두번째이다. 


구성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나서 사람들에게로 직접 방향을 돌리는 부분인 10절 말미에서, 이 시편은 두 부분으로 대별된다. 전반부(1-10절)는 찬송이며, 후반부(11-22절)는 설교이다. 우리가 이를 다음과 같이 세분할 때, 독자에게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1-3절 다윗은 여호와를 찬양할 것을 서원하며 다른 이들을 찬양에로 초대한다. 
4-7절 그는 자신의 경험을 연관시키며, 
8-10절 지속적인 믿음을 권고한다. 
11-14절 직접적인 권면의 말씀과 
15-22절 교훈적인 가르침이 이어진다. 
  
  
강해
  
1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2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1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는 "내가······이여"라고 확고하게 결심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자기 스스로 결심하며, 다른 이들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의 머리는 총명하고 그 마음은 뜨겁다. 그는 그 찬양이 누구 때문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한지,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언제 찬양을 드려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우리의 감사는 여호와께 드려져야 하며 제2원인들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여호와는 자기 피조물들의 찬양을 독점할 권리를 갖고 계신다. 다윗이 블레셋 왕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이 경우가 분명 그러하듯이, 심지어 우리가 은총을 통해 자신의 죄를 상기할 때에도, 우리는 자신의 양심이 죄악된 행동을 질책하고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예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설사 낚시바늘에 녹이 슬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물고기를 보내셨고, 우리는 그 점을 감사한다. 
  
"항상." 모든 상황 가운데, 모든 환경하에서, 시련을 당하기 전이나 시련 중에나 시련을 당한 후에, 기쁘고 밝은 낮에, 그리고 두렵고 어두운 밤에. 그는 자신의 한 일이 충분하다고 만족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결코 찬양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여호와께 무자격한 상태에 있음을 항상 느꼈다. 자신의 손가락으로 늘 수금을 타고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은총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찬양할 은총이 고갈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에는 특별한 때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 하리로다." 내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입에도 있다. 우리는 감사함에 있어 벙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감사는 노래로 표현되어야 한다. 우리의 혀는 우리의 영광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은 그 얼마나 축복스러운가! 그 얼마나 감미로우며, 그 얼마나 순전하고, 또한 그 얼마나 향기로운가! 만일 사람들의 입이 항상 찬양으로 가득하다면,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나 이웃에 대한 험담도 사라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맛있는 음식을 항상 혀로 굴린다면, 나날이 만나는 쓰디쓴 곤경이 기쁨 속에 삼키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과 입으로 발하는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골방에서는 좋은 생각을 품고, 세상에 나가서는 좋은 말을 하자.
  
2절.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자랑은 매우 자연스러운 성향이며, 만일 본문과 같은 경우에서라면, 자랑에 몰두할수록 더 좋다 하겠다. 본문에 나오는 자랑이란 단순히 혀로만 뽐내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영혼"이 있으며, 그 자랑은 표현되기도 전에 생각으로 와닿고 느껴진다. 여호와에 대한 거룩한 자랑에 무슨 한계가 있겠는가! 그분의 인격, 성품, 언약, 약속들, 사역들, 그 외에 수많은 사항들 모두가 비교될 수 없고 필적될 수 없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마음껏 그것을 자랑할 수 있으며, 아무리 그렇게 해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내용을 지은 기자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자랑할 것이 없고 다만 애통해 할 것은 많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을 자랑하고자 하는 그를 그 누구도 제지하지 못할 것이다.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사람들은 자랑을 들으면 대체로 괴로워한다. 그들은 자랑이나 거만한 말을 들으면 외면한다. 그러나 여호와를 자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자랑을 통해 가장 곤고한 자들이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시련에 처한 신자들의 확신에 찬 고백은 경험이 적은 형제들에게 풍부한 위안이 된다. 다른 이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도록, 우리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고백해야 한다.
  
3절.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이 요청이 겸비한 자에게 제시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가장 적절한 요청이다. 자신을 작다고 느끼는 자들 이외에 그 누가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겠는가? 그는 여호와의 명성이 인자들간에 더 커지도록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도움을 구한다. 여호와는 무한하시며, 따라서 사실상 더 크게 될 수 없으시다. 하지만 그분이 피조물들에게 알려진 바 됨에 따라 그 성호가 분명한 영광 중에 높임을 받는다. 그의 영혼이 자신에게는 여호와께 적절한 영광을 돌릴 능력이 없다고 느끼며 따라서 다른 이들을 그 은혜로운 사역에 참여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이는 그 사람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자각하여 낙심하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찬양보다 귀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높이 치솟은 산봉우리처럼 우리 눈앞에 솟아올라 있으며, 거룩한 외경심 가운데서 우리를 더욱더 낮게 가라앉힌다.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무리지어 집단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새 생명의 자연스런 본성들 중 하나가 표출된 것이다. 하늘에서 그 예배는 온전한 모습을 띠며, 땅에서는 예배로 충만한 곳이 곧 하늘과 같다.
  
4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4절.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다윗의 기도는 매우 혼란스러웠음에 분명하며, 그의 기도 속에는 분명 지나친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미친 체할 정도로 의혹스러운 정신 상태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가련한 절름발이 기도도 받아들여졌고 여호와는 그를 구조해 주셨다. 여호와의 풍성한 자비를 기리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우리는 범죄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만일 죄가 속죄소를 가로막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가망이 없게 된다. 하지만 반역자들에게도 은총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범죄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변호하는 분이 계시다는 점에서 자비를 엿볼 수 있다.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하나님은 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두려움과 그 원인 등 모두를 예외 없이 제거하신다. 그분의 성호에 영광을 돌리자. 기도가 들판을 휩쓸어 모든 대적들을 죽이고 그들의 뼈를 파묻는다. 이 구절과 앞 구절이 자기본위적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자신에 대해 말하되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다. 혹자는 이 점과 관련하여 어리석게도 점잔을 부리지만, 그들은 고상한 척하다가 하나님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상하지 못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5절.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우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며 모든 신실한 자들의 삶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들 곧,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 각자가 기운이 났으며, 그들의 얼굴이 빛나기 시작했고, 그들의 영혼이 고양되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주어질 수 있는 축복은 그 얼마나 다양한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앙망하는 것 속에는 생명, 빛, 자유, 사랑, 그리고 사실상 모든 것이 다 있다. 상처입은 심령이 선한 의사이신 그분을 앙망하여 헛수고를 한 적은 한번도 없다. 죽어가는 영혼이 어두워가는 눈을 놋뱀에게로 돌렸을 때 한결같이 그 효력을 입었다.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그들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덮인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덮였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자신의 확신을 수치스럽게 여길 필요가 없다. 그의 신뢰하는 바가 옳다는 사실은 시간과 영원 모두를 통해 입증될 것이다.
  
6절.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경우로 되돌아간다. 그는 실제로 곤고했고 너무나 의지할 데가 없어 자신의 생명이 큰 위험에 처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분께 마음으로 부르짖었고 그리하여 구원을 찾았다. 그의 기도는 부르짖음이었다. 그러한 부르짖음을 통해, 간결함과 비통함, 진지함과 단순함, 그리고 꾸밈없음과 슬픔 등을 표현했다. 그것은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구원이 임한다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는 언급이 덧붙여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윗의 고뇌는 단번에 깨끗이 제거되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벌통을 깨트리듯이, 혹은 바람이 안개를 없애버리듯이,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쓸어버리신다. 기도는, 모세가 간구했을 때 여호와께서 이집트의 개구리들과 파리들을 제거하신 것만큼이나 쉽게, 우리의 문제를 제거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시편 기자 자신의 개인적 증언이다. 그는 죽을 지경에 처하여 간구하였다. 이를 통해, 고통당하는 독자는 용기와 위로를 얻을 수 있다.
  
7절. "여호와의 사자." 모든 천군들의 머리되시며 언약의 천사이신 주 예수께서 자신의 군대와 더불어 성도들의 거처들을 둘러싸고 계신다. 참호를 두른 군대들처럼 섬기는 영들이 여호와의 택하심받은 자들을 섬기며 구조하기 위해 그리고 지키며 위로하기 위해 그들을 둘러 진치고 있다.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잠자지 않는 전사들이 사방으로 줄곧 경계를 서고 있으며, 그 군대의 대장 되신 분의 용맹성을 누구도 대항할 수 없다.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손길 덕분에 시기적절한 도움을 얼마나 많이 얻었는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손길은 우리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우리를 들어올리신다. 
  
8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8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여러분은 경험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수소와 기름진 것들을 구비한 향연이 배설되어 있다. 그 기름진 것들은 영양물로 가득하며, 찌꺼기들이 잘 정제된 포도주가 구비되어 있다. 하지만 여러분이 생생하게 그리고 내적으로 그것들을 경험함으로써 은혜의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는 한 그 감미로운 맛을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내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시험해 보라. 여러분은 자신이 직접 시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시험해 보면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요나단의 벌꿀처럼 눈을 밝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믿음은 영혼의 미각이다. 확신을 통해 여호와를 시험하는 자는 항상 그분의 선하심을 발견하게 되며, 그들 자신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본절의 둘째 행은 첫 행에 수록된 권면을 뒷받침하는 논거이다. 
  
9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분을 어린아이처럼 겸허하게 경외하고 그분의 율법 안에서 행하며, 그분의 뜻을 공경하고 그분을 거스를까봐 떨며, 또한 그분 섬기기를 서두르라. 사람들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말며, 악의로 가득한 그들의 위협으로 인해 범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여호와는 그분의 신실한 종들을 굶어죽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이 사치품들을 주시지는 않겠지만, 약속에 따라 그분은 필수품들을 공급해 주신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철회시키시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변덕스러운 생각들과 바람들은 만족되지 않은 채 남겨질 수 있지만, 여호와는 진정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실 것이다. 여호와 경외나 참된 경건은 성도임을 자처하는 자들의, 곧 거룩한 책무를 위해 성별된 자들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걸어갈 안전함과 위로가 가득한 길이기도 하다. 경건은 이생의 삶을 약속한다. 설령 우리가 개들처럼 죽어야 하고 내생이 없다고 가정한다 해도,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들은 후견자를 구하며 번영을 소망한다. 만군의 여호와를 자신의 친구와 보호자로 삼는 자는 분명코 번영을 누린다.
  
10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젊은 사자는 젊음의 활력으로 인해 난폭하고 교활하며 강하지만, 때로는 심히 배가 고파서 포효한다. 또한 그토록 영리하고 교활하며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자들도, 그토록 영민하고 몰염치함에도 불구하고 종종 궁핍해진다. 하지만 게걸스러운 사자들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는 천진스러운 신자들은 자신을 위해 제공된 음식을 먹고 배부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가장 교활한 정치가들이 가르치거나 실행할 수 있는 정책보다 훨씬 더 낫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생의 가장 으뜸되고 중요한 목적을 여호와를 찾는 일에 두는 사람들에게는 진정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나 제공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바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여호와는 그들이 지혜로움을 입증하실 것이다. 세상의 현인들이 모든 것을 잃는 상황에서 그들은 승리할 것이며, 그 영광을 하나님이 취하실 것이다. 
  
11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14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1절. "너희 소자들아 와서." 비록 용사이자 왕이었지만, 시편 기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젊은이를 가르치는 자들이 진정한 귀족에 속한다. 그 일은 영예로우며, 그 보상은 영광스러울 것이다. 아마 가드의 아이들은 미친 체하는 다윗을 놀렸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여기서 그는 오는 세대를 향한 가르침을 통해 자신이 예전에 범했던 실책을 만회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은 가장 희망적인 교육 대상이다. 자신의 원리들을 보급하기 바라는 현자들은 젊은이의 경청을 유도하는 일에 유의해야 한다.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오는 세대가 들은 말을 통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한, 우리는 믿음과 하나님 경외함을 전해야 하며, 경건의 원리와 실천을 그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 이 구절은 모든 주일학교 교사들이 자기 학급 학생들에게, 그리고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다. 가르치는 기술은 지침을 요한다. 우리는 젊은이나 어린이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어야 하며, 그들을 "오라"고 초청해야 한다. 또한 거친 어조로 그들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장난감과 스포츠로부터 돌이켜야 하며, 더 나은 추구의 대상들로 그 마음을 채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다른 것들로 가득한 동안에는 우리가 그들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요점을 강조해야 하며, 우리의 가르침에 있어 여호와 경외가 최상의 위치에 놓이게 해야 한다. 또한 그렇게 함에 있어,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확신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인격을 신중하게 저울에 올려 놓을 수 있다. 
  
12절.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행복한 삶을 살다 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바람이며, 젊은이들에게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법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에게서 인기를 얻을 자격이 있다. 단순한 존재는 삶이 아니다. 진정하고 실제적이며 또한 즐거운 삶의 기술,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어떻게 살며 어떻게 죽는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유익한 모든 종교적 지침들의 목표이다. 미덕에 대한 보상은, 젊은이들을 도덕성에로 이끄는 일종의 미끼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을 가르치는 한편, 사람을 향한 도덕성도 강조해야 한다.
  
13절.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위험스러운 지체인 혀가 악을 언급하지 않도록 주의깊게 그것을 제어하라. 왜냐하면 그 악이 당신에게 되튀어 당신 삶의 즐거움을 망쳐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독을 뱉을 때에는 항상 그 독액이 자신의 살도 태운다는 것을 느끼기 마련이다.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매우 진지한 마음으로 속임수를 금해야 한다. 간교한 꾀를 부리는 자는 마치 스파이처럼 적의 진영 속에 숨어 살며, 노출되어 처형당할까봐 늘 두려워한다. 깨끗하고 정직한 대화는 양심을 편안하게 하며 행복을 증진시키지만, 거짓되고 사악한 말은 우리 베개를 가시로 찌르며 삶을 끊임없는 공포와 수치의 소용돌이로 만든다. 다윗 자신도 부정직한 꾀를 도모했지만 여기서 그것을 자백한다. 또한 그는, 오래도록 잘 살려면 유의하여 간사한 꾀를 버리라고 다른 이들에게 당부한다. 
  
14절. "악을 버리고." 거기서 돌아서라. 단지 당신의 손만 떼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악으로부터 분리시키라. 전염병 환자가 있는 집 근처에서 살지 말라. 사자굴을 피하고, 독사의 굴을 떠나라. 자신을 유혹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라. 
  
"선을 행하며." 실천적으로, 행동적으로, 열정적으로, 또한 일관적으로 선을 행하라. 적극적인 미덕은 소극적인 미덕을 증진시킨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분명 악을 피할 수 있다. 
  
"화평을 찾아." 화평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열정과 주의를 기울여 그것을 증진시키고자 노력하라. 마치 장사꾼이 고귀한 진주를 찾아다니듯이, 하나님과의, 당신 자신의 마음과의, 그리고 당신의 동료와의 화평을 추구하라. 화평보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효과적으로 증진시킬 수 있는 것도 없다. 불화는 부식시키는 힘으로써 심령을 좀먹는 감정을 일깨운다. 분노는 그 대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죽인다. 
  
"따를지어다." 화평을 찾아다니며, 열렬한 소원으로 그것을 추구하라. 그것은 이내 상실될 수 있으며, 사실상, 그것보다 얻기 어려운 것도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라. 설령 적의가 일어날지라도, 자신에게 흠이 되지 않도록 하라. 화평이 당신을 피할 때에는 그것을 쫓아가라. 논쟁을 일삼기 좋아하는 정신 상태가 되지 말라. 당신이 조성한 화평은 당신 자신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며, 당신에게 끊임없이 솟는 위로의 샘이 될 것이다. 
  
15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7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22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15절.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분은 다정한 배려와 인정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살피신다. 그들이 그분께 너무도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므로, 그분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실 수가 없다. 마치 우주 안의 피조물이 그들뿐인듯이, 하나님은 그들 각자를 주의깊게 그리고 집중적으로 살피신다.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눈과 귀는 성도들을 향한다. 그분의 온 마음은 그들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설령 다른 모든 이들이 멸시한다고 해도, 그분은 그들을 무시하지 않으신다. 마치 어머니가 병든 아기의 칭얼거리는 소리를 확실하게 알아차리듯이, 그분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곧장 들으신다. 그것은 낙심한, 구슬픈, 불행한, 연약한, 그리고 불신의 부르짖음일 수 있지만, 아버지의 민감하신 귀는 비탄이나 호소 등을 모두 간파하신다. 그분은 자녀들의 음성에 더디 응답하지 않으신다.
  
16절.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하나님은 죄인들의 행위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자신의 얼굴을 그들을 향해 고정시키신다. 즉, 그들이 인정과 지원을 얻지 못하고 좌절과 패배를 당할 뿐임을 분명히 보이신다. 그분은 불경건한 자들이 번영을 누리지 못할 것임을 단호하게 결의하신다. 그분은 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하신다.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그분이 그들의 불을 밟아 꺼버리실 것이며, 그들의 영예는 수치로 화할 것이고, 그들의 이름은 잊혀지거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전적 파멸이 모든 불경건한 자들의 운명일 것이다. 
  
17절. "의인이 외치매."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처럼, 그들은 억압의 무거운 짐 아래에서, 곧 죄와 유혹과 근심과 슬픔 등과 같은 짐 아래에서 부르짖는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분은 마치 경고벨 소리를 듣자마자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야경꾼과 같으시다.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그 어떤 환난의 그물이 우리를 붙들어맬지라도 여호와께서는 풀어 주실 수 있다. 우리에게는 복잡하고도 수많은 곤경들이 닥칠 수 있지만, 기도를 통해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그 강하신 능력을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우애로써 받아들이며 위로하기 위해 가까이하신다. 상한 심령들은 하나님이 멀리 떠나셨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이 가장 가까이 계신다. 그들의 눈이 닫힘으로 인해 가장 좋으신 친구를 보지 못한다. 실제로는 그분이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 안에 계시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이나 경험 혹은 자신의 계획과 결심으로 평안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 가까이에 계신다. 단순한 믿음의 행위를 통해 그분이 계시되실 것이다.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회개하며 애통해 하는 마음은 선함을 나타내는 참으로 복된 표시가 아닌가! 죄인이 스스로를 정죄할 때, 여호와는 은혜롭게 그의 죄를 사하신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징책하면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분은, 확신의 회초리로 인해 이미 아파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심판의 매를 대시지 않는다. 구원이란 통회와 결부된 것이다.
  
19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의인들은 고난을 통해 언약의 머리되시는 예수님을 닮아간다. 성경은, 선하기만 하면 모든 환난으로부터 안전하게 벗어난다는 식의 생각을 담은 이야기책처럼 우리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우리는 육신의 몸을 지니고 사는 동안 환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거듭 경고를 받고 있다. 곤경들은 곳곳으로부터 닥치며, 열대 지방의 모기들만큼이나 수효가 많고 괴로움을 준다. 택함받은 자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행길에서 자라는 가시덤불과 마주치기 마련이며, 누운 자리에서도 가시에 찔리고, 쉼을 얻지 못한 채 슬픔으로 인해 낙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가시들이 제거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복된 사실인가!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께서는 구속하심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서 그 모든 고난들을 극복하게 하실 것이다. 신자의 곤경에는 끝이 있으며, 결국 기쁨이 찾아온다. 그에게 닥친 시련들이 그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게 하지 못하며, 여호와의 구출 지시가 내려진 이후에는 용광로와 같은 시련이라도 그를 한 순간도 붙들지 못한다. 이러한 약속이 없다면 의인의 운명은 참으로 난감할 것이다. 곤경을 보내신 바로 그 여호와께서 자신의 계획이 실현될 때 그 곤경을 다시 철회시키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사랑하시는 자들을 집어삼킬 정도로 극심한 곤경은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20절.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다윗은 손으로 맞고 발로 차이는 봉변을 당했지만, 그 뼈는 하나도 꺾이지 않았다. 성도들은 근본적인 손상을 입지 않는다. 영원이 그들의 모든 상처를 치유할 것이다. 그들의 본질적 자아는 안전하다. 그들의 육체가 상처를 입을 수는 있지만, 그들 존재의 본질적인 부분은 한 군데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 구절은 성도들에게 빈번하게 주어지는 섭리적 보호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한 사람들도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팔이 부러질 수 있으므로, 이를 신체적인 보호에만 적용할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 이 구절은 영혼에 가해지는 큰 손상과 관련하여 영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한 손상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영원히 방지된다. 다윗의 신체 구조가 손상되지 않았듯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 역시 뼈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돌보셨듯이 모든 신자들 각자를 돌보신다.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상은 전혀 가해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다리를 절거나 신체 일부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갈 것이다. 삶의 시련이 끝난 후에 우리는 흠이나 주름 없는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보호를 받을 것이다.
  
21절.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악인들에게 닥치는 재난들은 살인적일 것이다. 그것들은 약이 아니라 독이다.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붙잡을 줄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그 줄에 감겨 매달리고 말 것이다. 그들 자신의 불법이 그들의 징벌이 될 것이다. 지옥에는 악이 가득하여 거기 떨어진 자들을 괴롭힌다. 예수님께로 피하여 예전의 죄악들로부터 벗어나는 자들은 참으로 복이 있다. 오직 그러한 사람들만이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가장 좋은 동료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버림받고 빼앗기며, 비참해지고 또한 절망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독사로 하여금 자신에게 독이 오르게 하신다. 저주받은 자가 느끼는 마음의 절망감이 어떠하겠으며, 그들이 그런 상태에 처하는 것은 또 그 얼마나 당연한가! 
  
22절.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대가를 지불하시고서, 권능으로써, 그리고 물과 피로써. 시기적절한 모든 도우심들은 권능으로 말미암은 구속의 일부이며,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지금도 구속하고 계신다. 따라서 구속함을 받은 모든 이들은 자신을 사신 분께 속해 있다. 이는 공의의 법칙이며 감사의 근거이다. 우리는, 은혜롭게도 자신의 피로써 우리를 사시고 그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기쁜 마음으로 섬길 것이다.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믿음은 구속함 받은 표시이다. 가장 보잘것없고 초라한 성도들 안에서 발견되는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구원을 보증한다. 신자들이여, 여러분은 결코 버림받지 않을 것이며 파멸로 내던져지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보호자와 친구가 되시며, 천국은 바로 여러분의 것이다.


 

 

 

주해
  
머리말. 아비멜렉은 가드의 왕으로서 아기스와 동일인이었다(삼상 21:20). 아기스의 이름이 둘이었든지, 혹은 아비멜렉이라는 명칭이 팔레스타인의 모든 왕들을 공통적으로 지칭하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높다(창 20:2; 26:8 참조). 이는 마치 바로가 애굽 왕들을, 그리고 가이사가 로마 황제들을 지칭했던 것과 같다. 이 명칭은 '아버지-왕', '나의 아버지-왕', 혹은 '왕의 아버지' 등을 뜻한다. 이는 왕들이 자기 나라 백성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여야 했음을 암시한다. 그 앞에서 다윗은 자신의 행동, 취향, 감각, 혹은 이성을 바꾸었다. 그는 미친 체하였다. -존 길.
  
시 34편 전체. 이 시편은 각 행의 머리글자가 알파벳 순서로 배열되었다. 가톨릭 교부들에 의해 지칭된 바, 알파벳의 답관체 시편들은 모두 아홉 편이다. 하지만 KJV상으로 볼 때 119편 한 편을 제외하고는 그러한 형식을 알리는 암시가 전혀 없다. 에발트(Heinrich Ewald)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와 같은 알파벳의 답관체 형식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으면 성실하지 못한 번역이라고 확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토록 주목할 만한 구성 양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암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실제 번역 과정에서 몇 가지 유익한 작시 의도들을 신중하게 고려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그렇게 하기란 어렵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오늘날 유럽에서 사용하는 어떤 언어의 알파벳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보다 근본적인 유형의 차이점들 이외에도, 영어의 알파벳이 스물 여섯 개인 것과는 달리 히브리어 알파벳은 스물 두 개이다. 또한 그 스물 두 개 중에서 영어와 짝을 이루지 못하는 것들도 제법 많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알파벳의 답관체를 영어로 정확히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윌리엄 빈니.
  
시 34편 전체. 햅스톤(Dalman Hapstone)은 이 시편을 운율적으로 번역함에 있어 알파벳 답관체의 특성을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F로 시작하는 구절은 빠트렸고, 마지막 절은 R로 시작하도록 번역했다. 그의 번역을 조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t all times bless Jehovah's name will I;
His praise shall in my mouth be constantly:
Boast in Jehovah shall my soul henceforth;
Hear it, ye meek ones, and exult with mirth.
(첫 행과 셋째 행이 각각 A와 B의 순서로 시작되고 있음에 유의하라-역자 주.)
  
1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순교자 브래드퍼드는, 메리 여왕에 대해 언급하면서(당시 그는 그녀의 잔혹한 처분에 내맡겨진 상태였다), 이렇게 말했다:여왕이 나를 기꺼이 석방해도 내가 그녀에게 감사할 것이며, 그녀가 나를 투옥해도 나는 감사할 것이고, 또한 그녀가 나를 화형에 처한다 해도 나는 그녀에게 감사할 것이다. 믿음이 있는 영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나님이 그분의 뜻대로 내게 행하신다면,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e, Mirrour).
  
1절. 자연의 틀 전체가 요동하고, 모든 친구들과 지원자들이 거짓되고 기만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며, 우리의 세상적 소망과 계획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우리의 소유물들이 찢겨져 나가며, 또한 질병과 궁핍과 불명예의 홍수가 심한 곤경의 물결로써 우리 영혼을 뒤덮을 수도 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 모든 곤경들이 자신의 몫과 자신의 간절한 소망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발견하고, 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피난처이자 은신처이신 하나님께로 피하며, 거기서 자신의 주님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으신 분이며 또한 온 우주를 통해 제공될 수 있는 것보다, 그리고 온 우주를 빼앗기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베푸신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분의 자애로우신 은총들과 고갈됨이 없는 충만하심 그리고 위대하신 신실성 등을 통해 위로와 안식을 얻는다. 또한 이 사실은 두려움이 닥칠 때 그로 하여금 그분을 의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윌리엄 던롭.
  
1절. 바실(S. Basil)은 이르기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일단 우리 마음에 올바로 각인되기만 하면, 항상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우리로 하여금 영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J. M. Neale's Commentary.
  
2절.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이는 하나님의 눈에 그토록 혐오스러웠고 겸비한 자의 귀에 그토록 무례하게 들렸던 바리새인의 자랑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겸손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다면, 곤고한 자가 결코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랑이 있겠는가? 하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빌 4:13)라는 말을 덧붙일 때 이 자랑 속에는 겸손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자랑을 좋아하시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우리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그분께로 돌리는 이러한 자랑은 좋아하신다. -리처드 베이커.
  
2-6절. 이 짧은 내용 속에서 고찰될 수 있는 갑작스런 전환들과 주격의 변화는 매우 인상적이고 흥미롭다. "내 영혼이······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이처럼 불연속적인 표현들에서는 힘과 간결성이 돋보인다. 만일 이들이 적절한 불변화사들에 의해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면, 그 의미가 상당 부분 상실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내용 전개를 가속화시켜 주는 이 구절들은, 롱기누스(Longinus)가 고찰한 바와 같이 내적 마음 작용의 진지함과 열정을 드러낸다. 또한 비록 그것이 문장의 흐름을 혼란스럽게 가로막는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 내용을 강화시켜 준다. -사무엘 챈들러.
  
3절. 베네마(Hermann Venema)는 이렇게 언급한다:사무엘상 22: 1에 수록된 바와 같이, 아기스와의 일이 있은 후에,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이들은 빚진 자들 및 사울의 통치에 불만을 느낀 자들 등과 더불어 사백 명 가량의 군대를 이루었다. 그는 자신의 도피에 관한 이야기를 이와 같은 동료 및 친구들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한 마음과 한 음성으로 여호와를 높이도록 그들에게 요청한다. -C. H. S.
  
4절.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기 전에 하나님은 여러분의 간구를 듣기를 기대하신다. 만일 여러분이 기도를 억제한다면, 약속된 은총이 보류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묵상은 마치 변호사가 법정에서의 변론을 위해 소송건을 공부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약속을 깨닫고 그 부요함으로 인해 감동을 받는다면, 곧장 은혜의 보좌로 달려가서 여호와 앞에 간청을 드리라. -윌리엄 거놀.
  
4절.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내 모든 환난으로부터 나를 건지신 것도 큰 은총이었다. 하지만 나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신 것은 더 큰 은총이었다. 이는 현재의 해악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는 것은 장래의 해악으로부터도 보존될 것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평정을 누릴 뿐만 아니라 경건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인 안정도 누린다. 악인도 환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 과연 그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곤경 가운데 있지는 않다 해도 그들보다 더 큰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간다. 마음의 죄악 혹은 세상에 속한 마음은 결코 악인을 안전하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가 때로는 학질로 인한 발작에서 벗어나지만, 그 두려움을 온전히 떨쳐버리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시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그가 티시폰(Tysiphone)의 채찍을 항상 느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공포만은 항상 느낀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음을 알게 될 때, 어찌 내가 그분을 찬양하지 않겠으며 그분의 성호를 높이지 않겠는가? -리처드 베이커.
  
5절.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우리가 여호와를 더 많이 생각하고 우리 자신을 더 적게 생각할수록 더 좋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를 앙망하면, 우리의 생각과 특히 우리의 마음이 보호를 받을 것이며, 곤경의 깊은 물을 지날 때에도 우리가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배를 타고 랭홈(Langholm) 맞은 편으로 건너갈 때 나는 종종 이 점을 생각했다. 물 아래를 내려다볼 때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럴 때 나는 건너편의 어떤 물체에 시선을 고정시킴으로써 편안한 마음으로 그 강을 건넜다. -데이비드 스미스(David Smith, 1792-1867).
  
6절.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부르짖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결핍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절박한 궁핍 상태는 겸양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배고픔을 부끄러워할 수는 없다. 다윗은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시 55:2)라고 말했다. 또한 히스기야는 이르기를,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라고 했다(사 38:14).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 검어진 살을 가지고 걸으며 공회 중에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욥 30:28). (2)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그 기도가 매우 열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지기 때문이다. 물론 기도에 있어 열정이란 중요한 요소이다. 한껏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이 더 빨리 날아간다. 따라서 성경에서 성도들의 기도는 '부르짖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2).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시 55:17).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시 18:6).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시 88:13).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욘 2:2).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시 28:1). 때로는 부르짖음 그 이상인 경우도 있다:"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욥 19:7).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애 3:8). 우리 모두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자비로우신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 그분은 큰 소리로 울부짖는 기도를 드리셨다. (3) 이러한 기도들은 하나님이 응답하실 정도로 너무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 18:6). 마치 생사와 관련된 소식을 신속하게 전하는 우편물처럼, 부르짖음은 기도에 날개를 덧입혀 준다:"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시 22:5).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시 34:17). -사무엘 러더퍼드.
  
7절.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나는 이 사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축소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그리고 그토록 많은 수효가 한 점 위에 함께 서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과 실랑이를 벌이지 않을 것이다. 또는, 그들의 실체가 어느 특정한 장소에 위치하는지 아니면 덕성과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만 특정 장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지에 관한 물음과도 실랑이를 벌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경건한 자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들의 도움을 원할 때마다 문과 자물쇠와 빗장 등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의 간구를 통해 그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이므로 그들에게는 능력 부족으로 인한 장애가 없으며, 선한 의지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장애도 없다. 경건한 자를 돕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며, 그들은 그를 향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그의 처음 회심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눅 15:10), 내가 감히 확신 있게 말하거니와,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할 때 너무도 즐겁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행한다. 이와 관련하여 오리겐(Origen)이 했던 말을 후대의 어느 해석가의 글을 통해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오리겐은 천사들이 나눈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소개한다:"만일 그분(성자 하나님을 의미함)이 땅에 내려가시되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가 그 연약함을 감수하며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면, 어찌하여 우리는 아직도 여기 서 있는가? 오라, 모두 함께 하늘에서 내려가자." -자카리 보간.
  
7절.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우리는 시편 중 여기서 처음으로 천사들의 사역에 접한다. 하지만 교부들 중에는 이 구절을 "위대한 사자"이신 그리스도께 적용하는 이들이 많다. -닐.
  
7절.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사자란 피조되지 않은 천사요 하나님 앞에 서신 천사요 언약의 천사요 구원의 대장이시며 또한 하나님 백성의 인도자요 지휘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또한 그분을 통한 구원이 마치 그들을 둘러싼 성벽 및 보루 혹은 그들을 둘러싼 군대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었을 수도 있다. 또는 여호와의 사자란 피조된 천사를, 심지어 피조된 천사 한 명을 지칭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단 한 명의 천사가 수많은 성도들을 보호하기에 충분하며 또한 엄청난 수효의 대적들을 한꺼번에 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왕하 19:35). 혹은 이 단수형 표현이 많은 무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백성 편에 선 그들의 수효는 무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성도들을 둘러 진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군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창 32; 1, 2; 눅 2:13 참조). 또한 이들은 성도들을 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키는 존재들로서 그들을 위해 일어나서 그들을 보호한다. -존 길.
  
7절.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의 사자는 한 쌍을 이루는 두 편의 시편들(34:7, 35:6)에서 드러나는 이중의 특성을 통해, 은총의 사자와 심판의 사자로 각각 언급된다. 이러한 한 쌍(34편, 35편)은 사도행전 12장과 비교될 수 있다. 거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베드로를 둘러 진치고 또한 그를 구원하는 존재로 묘사됨과 아울러 핍박자인 헤롯 아그립바를 물리치는 존재로도 묘사된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7절. "둘러." 이를 예시함에 있어 주목할 수 있는 사항인즉, 다르비외(D'Arvieux)에 의하면, 천막들을 원형으로 빙 둘러 치는 것이 아랍인들의 관습이라는 것이다. 왕이 그 중앙에 위치하고 아랍인들이 그 주위를 두르는 형태인데, 이는 그들간의 간격을 정중하게 띄워 두기 위함이다. 또한 테베노트(Melchisedek Thevenot)는, 카이로 근방의 터키 진영을 묘사하면서, 그 수장의 천막이 널찍하고 근사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또한 편리한 설비를 갖추었다는 점에 특별히 주목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그의 천막 주위로 권총의 사정거리내에 약 이백 개의 천막들이 둘러져 있었고, 그 문들은 모두 수장의 텐트쪽으로 마주보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눈은 항상 수장의 숙소 쪽으로 향했으며, 그가 습격을 당할 경우에 언제라도 달려가서 그를 도울 태세를 갖추었다." -리처드 맨트.
  
8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우리의 감각들은 이해력을 도와준다. 우리가 가장 합리적인 토론을 벌인다 해도 벌꿀의 달콤함을 감지하지는 못한다. 그 맛을 보라. 그리하면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빛 안에 거하며, 당신의 영혼을 항상 그분의 사랑으로써 즐겁게 하라. 당신의 몫으로 주어진 골수와 기름진 것을 내어오라. 어리석은 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얼굴을 봄으로써 대낮같이 밝은 당신의 모습에 비해 그들의 불꽃이 얼마나 어두운지를 알게 하라. -리처드 알레인(Heaven Opened, 1665).
  
8절. "맛보아 알지어다."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서 멀찌감치서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삼손 이야기에 나오는 사자의 뱃속에 많은 양의 벌꿀이 가득 들어 있었지만 사자 자신은 그 달콤한 맛을 보지 못했듯이, 그것을 당신 속에 지니고 있으되 그 맛을 보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당신은 그것을 봄은 물론이고 소유해야 하며, 또한 그것을 소유함은 물론이고 맛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얼마나 감미로우신지를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게 자신의 감미로우심을 볼 뿐만 아니라 직접 맛보게 하신다. 다음과 같은 말은 '보는 것'에 그친다:"우리가 일찍이 일어나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나무에 작은 포도들이 열렸는지 보자. 그리고 석류나무 열매들이 무성한지 살펴보자." 이 말 속에는 포도원의 광경이 보일 뿐이다. 반면에 다음과 같은 말은 '맛보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내가 너를 포도주 저장실로 데리고 가서 향기로운 포도주와 석류 열매로 만든 새 과실주를 마시게 할 것이다." 이 말 속에는 포도주를 직접 맛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교회는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를 볼 뿐만 아니라, 포도주 저장실로 가서 그것을 맛볼 수 있다. -토머스 플레이피어.
  
8절. "맛보아 알지어다." 어떤 것들, 특히 종교적 삶의 깊이는 경험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경험하고서도 말로 적절히 구체화시킬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설명하기 전에 먼저 즐겨야 한다. 어떤 면에서 즐기는 것이 곧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할 가치가 있는지를 알 수 있기 전에 먼저 사랑해 보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믿을 가치가 있는지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믿어 보아야 하는 것들도 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영적 진리를 분명히 자각한 후에라도 그것을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을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던 어느 철학자의 답변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질문을 받지 않아도, 나는 이미 알고 있을 따름이다." -토머스 빈니(Thomas Binney, Sermons, 1869).
  
8절. "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은총들을 맛보지 않고 삼켜버리거나 혹은 악의적으로 망각하지 않도록 유의하라. 당신의 미각을 활용하여 그것을 알고 음미하라. -몰레루스.
  
8절. 천지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자신의 입과 눈을 열기를 게을리 한다. 이 때문에 시편 기자는 우리가 "맛보며" "알기를" 바란다. -톨룩(F. A. G. Tholuck).
  
8절. "맛보아 알지어다"는, 오랫동안 준비되어 온 호화 잔치에 초대하는 말이며, 그 광경을 볼 수 있게끔 훤히 열어 놓았음을 시사한다. 사실상, 이 명령형은 격려하는 어투라기보다는 설득적이다. -헹스텐버그.
  
8절. 신자가 이생에서 영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맛보는 것이다. -데이비드 딕슨.
  
8절.
  
여호와를 맛보며, 
그분이 얼마나 감미로우신지를 알지어다.
그분을 의뢰하는 자는 지극한 행복 속에서 살아간다.
-존 데이비스(John Davies, 1569-1626).
  
8, 9, 10절.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백성의 모든 궁핍함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하심, 유효적절하심, 완전하심, 그리고 풍족하심 등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다. 사자의 굶주림과 탐욕을, 더욱이 젊은 사자의 격렬함을, 신실한 신자의 인내 및 조용한 기다림과 대조시킨 표현은 매우 효과적이지 않은가? 믿음의 삶은 어디서나 음식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사자들은 주릴 수 있으며 또한 주릴 것이다. 이는 그 무엇으로도 그들의 게걸스러운 식욕을 충족시켜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호커(Robert Hawker).
  
10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차라리 늙은 사자들은 필요한 경우에 꾀를 써서 주림을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자기 내면에 악한 것이 없음을 느끼듯이, 외적으로는 그들에게 좋은 것이 결핍되지 않을 것이다. 위에 있는 샘들을 자유로이 열어 주시는 분이 결코 지하의 샘들을 모조리 닫지는 않으실 것이다. 요셉이 은을 넣어 주는 한, 베냐민의 자루 속에 은이 고갈되지 않을 것이다. 은혜란 자활 의지도 없는 빈털털이 방문객과 같은 것이 아니다. 가장 탁월하신 존재를 섬길 때 가장 좋은 축복을 누린다. -윌리엄 세커.
  
10절. 사람들은 야생 짐승의 생활이 분명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한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육식 및 초식 짐승들이 길들여진 네발 짐승들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길들여진 네발 짐승들은 인간 주인에게 사치품이나 필수품을 제공하는 대가로 보다 조용하고 안전한 생활을 얻는다. 그러나 심지어 호랑이나 표범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육식 짐승의 생활은 너무도 고달프다. 종종 그것들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굶주림으로 고통당해야 하며, 먹이를 발견하여 잡았을 때에도 때로는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치명적인 싸움을 벌여야 한다. 거의 모든 야수들의 부르짖는 소리는 너무도 음울하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까닭에, 그 소리를 듣는 여행자들은 두려움에 앞서 서글픔을 느낀다. 사냥 중에 그것들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생긴다면, 여러분은 발을 질질 끌고 코를 킁킁거리며 다니는 그것들이 "숲의 왕"이라기보다는 가련하고 의기소침하며 굶주린 그리고 다음 번 먹이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불쌍한 놈들임을 알게 된다. 그것들은 나쁜 먹이나 오랜 굶주림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질병을 앓는다. 또한 그 살갗에 무서운 싸움의 표시인 흉터들이 발견되지 않는 야수들은 거의 없다. 설령 오래도록 산다고 해도 그것들의 운명은 딱하기만 하다:그 이빨은 닳아 쇠약해지고 그 턱은 뭉툭해지며 또한 그런 상태에서는 굶어죽는 짐승들이 많다. 야생 짐승들 중 자연사로 죽는 것들은 절반도 안 된다. 관찰될 수 있는 한, 그것들의 생활은 가혹한 빼앗기의 연속이며, 그것들 간에 필사적인 혈전이 반복된다. -Daily Telegraph.
  
10절.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그런 자는 선한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약속을 받은 사람임에 분명하며, 약속된 바가 자신에게 선하다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세상의 축복들을 풍부하게 누리는 것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는 독한 술이 신경 쇠약에 좋지 않음과 같다. 그렇다. 만일 선한 사람에게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면, 그는 결핍된 그것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가 그것을 즐기기보다는 부족 상태에 있는 것이 더 낫다. 지혜로운 자라면, 손에 넣을 경우에 본인에게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입증될 그 무엇이 자신에게 결핍되었다고 하여 과연 불평하겠는가? 그것은 마치 미치광이에게 검을, 어린아이에게 칼을, 그리고 열이나 수종이 있는 환자에게 술을 주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제지하시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 자체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내가 판단하기에 그것들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매우 좋은 것들이다. 신성한 결핍 상태는 회개에로 인도하고 우리 안에서 삶을 수정케 하는 탁월한 수단이다. 그것은 기도를 하도록 자극하고,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영적 전투를 준비하게 하며, 우리가 참된 신자들인지 아니면 위선자들인지를 밝혀 주며, 또한 더 큰 범죄와 장차 도래할 징벌을 예방해 준다.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우리의 믿음과 기쁨과 감사와 영적 지혜를 더하게 하며, 그리고 내가 다른 논문에서 상세히 설명하였듯이 우리의 인내도 더하게 한다. -리처드 영(Poor's Advocate, 1653).
  
10절. 나는 자기 남편이 보스월에서 전사한 어느 가련한 미망인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한다:피로 얼룩진 병사들이 그녀의 집을 약탈하기 위해 몰려와서는 그녀의 모든 소유를 다 빼앗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음식이든 옷가지든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겠다"고 그들은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나는 상관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는 한 내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꾸했다. 그것이 진정 신자다운 모습이다. -Allexander Peden's Sermon, 1682.
  
10절. 하늘과 땅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둘러보며, 좋게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살펴보라. 그리고 확신 가운데 그것을 그리스도께 구하라. 그분의 사랑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죄나 마귀나 곤경이나 파멸 등이 당신에게 닥치지 않는 것이 좋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것들을 즉시로 없애버리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일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차지하는 것이 어느 성도에게 절대적으로 좋은 일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즉시로 그를 세상 만국의 군주로 세우실 것이다. -데이비드 클락슨. 
  
10절 하반절. 콜럼바(Columba)는 생애의 마지막 오후 중 일부를 다윗의 시편을 필사하면서 보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적힌 34:10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내가 필사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다. 나는 여기서 멈출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라고 이어지는 구절은 나의 뒷 사람이 필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베이슨(Baithen)에게 남겨 줄 것이다." 여느 때처럼, 한밤중에 기도를 위해 깨우는 종소리가 울렸다. 콜럼바는 제일 먼저 서둘러 교회로 갔다. 조금 후에 교회에 들어선 더미드(Dermid)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콜럼바가 분명 죽어가고 있는 상태임을 발견했다. 그를 자기 팔에 안아 일으키고서, 더미드는 그의 머리를 자기 가슴에 기대게 했다. 곧이어 형제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임종에 직면한 콜럼바를 보고서 큰 소리로 울었다. 콜럼바가 그들의 소리를 듣고서 눈을 뜨고 무슨 말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들을 축복하기 위함인듯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죽은 그의 얼굴에는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표정이 감돌았으므로, 마치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Story of Columba and his Successors, the Christian Treasury, 1848.
  
11절. "너희 소자들아 와서." 사실 베네마는 언급하기를, 다윗이 동굴에서 자기 동료들을 자신의 자녀로 지칭했는데 이는 그가 그들의 선생이 되고 또한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한창 젊음을 꽃피우는 나이였고, 마치 아들들처럼 다윗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그 지도자의 훈계와 명령에 복종하였으므로, 그에게는 그들을 자기 자녀로 지칭할 권리가 있었다고 한다. -C. H. S.
  
11절. "너희 소자들아 와서." 여러분은 세상의 부모를 알고 있다. 하지만 천상의 부모를 알기 위해서도 노력하라. 여러분은 육신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의 영혼의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도 열성을 보이라. 여러분은 호레이스(Horace)의 송가들과 버질(Virgil)의 전원시들 그리고 키케로의 웅변들에 관해 전문적 지식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다윗 시편들과 솔로몬의 잠언들 그리고 성경의 다른 책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라. 만나는 아침에 거두어 들여야 했다. 동양산 고급 진주는 아침 이슬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아침은 시인들의 친구이다.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어린 시절, 곧 인생의 아침에 그분을 알라.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을 때, 자신이 행하신 첫번째 일은 빛으로 세상을 치장하며 그것을 어둠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구원을 알게 하는 지식의 빛을 새벽 일찍이 비추이는 자녀는 행복하다. 하나님이 율법에서 장자와 첫 소산들을 요구하셨듯이, 우리의 첫 날들도 당신께 드리기를 요구하신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는 지혜의 말씀이다. 한 랍비는 여기서 히브리어 "카프"(k)가 여느 때와는 달리 이 동사에 덧붙여져 있음에 주목한다. 이 문자는 숫자로 50을 지칭한다. 이 문자가 덧붙여진 것은, 일찍이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이십 배나 삼십 배뿐만 아니라 오십 배나 백 배의 상급을 얻게 됨을 시사한다. -나다나엘 하디.
  
11절. "너희 소자들아 와서." 다윗은 이 시편의 후반부에서 자녀를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다. 비록 전사요 왕으로 기름 부음받은 자였지만, 다윗은 자녀 가르치는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그의 머리는 온갖 관심사들로 가득했고 그의 손은 여러 일들로 분주했지만, 그는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에 입각한 훌륭한 조언을 제시하기 위해 정성과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매튜 헨리.
  
11절. 다음 사항들에 주목해 보라. (1) 그가 그들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것:"내게 들으라." 놀이를 멈추고, 너희 장난감들을 치우고, 내가 너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들으라. 내 말을 듣는 데 그치지 말고, 그것을 지키고 순종하라. (2) 그가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일:"여호와를 경외함." 이는 모든 종교적 의무들을 포함한다. 다윗은 유명한 음악가요 정치가요 또한 군인이었지만, 자녀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수금 연주법을, 검이나 창을 다루는 법을, 혹은 국가 정책을 위한 금언들을 가르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여호와를 경외함'을 가르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예술과 과학보다 나으며, 모든 번제와 희생보다 낫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치며 스스로 배우기를 갈망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매튜 헨리.
  
11절.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이 구절은, 젊은이들에 대한 매우 부적절하고 경건하지 못한 교육 방법이 당시에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이 방법으로 인해 자녀들은 참된 신성을 가르치는 한 가지 건전한 교훈을 습득하기 전에 이교적 신화 체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침내 그들의 마음속에 이교주의가 주입되며 신들과 여신들 그리고 영웅들(이는 폭군들이라 불리우는 것이 적절하다)의 행위가 그들 자신의 본이 되고 만다. 또한 그들은 내적으로 이교적이 됨으로써 외적으로도 이교적이 되고 만다. -아담 클라크.
  
11절. "여호와를 경외함을." 문장의 대가는 이 구절을 통해 네 가지 종류의 두려움을 시사한다:'현세적인', '비굴한', '최초의', 그리고 '자식으로서의' 두려움. 우리가 단지 세상적 이득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혹은 세상적인 어떤 불편함을 당하지 않기 위해 범죄를 두려워할 때, 이는 '현세적' 두려움이다. 우리가 단지 지옥의 고통 때문에 범죄를 두려워할 때, 이는 '비굴한' 두려움이다. 우리가 하늘의 행복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범죄를 두려워할 때, 이는 '최초의' 두려움이다(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느낀 두려움이라는 점에서-역자 주). 끝으로, 우리가 자신의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로 그 하나님을 거역할까봐 두려워할 때, 이는 '자식으로서의' 두려움이다.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이 두려움은 일순간에 배울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의깊은 연구와 훌륭한 선생을 필요로 한다. 성 크리소스톰은 시편 기자에 의해 여기서 암시되는 학교와 이교적인 학생들이 자주 드나드는 학당을 서로 비교한다. 성 에브라엠(Ephraem)은 이 구절을 언급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그 자체가 마음의 학교라고 한다. 그리고 성 로렌스 저스티니아니(Lawrence Justiniani)는 이렇게 말한다:"그가 선언한 것처럼, 나는 여러분에게 별들의 진로나 사물의 본성 혹은 천계의 비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경외를 가르칠 것이다. 경외함이 없는 그러한 지식은 연기와 같다. 하지만 그런 지식이 전혀 없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러한 경외 속에는 공포가 아니라 사랑이 담겨 있다. 인간적 두려움은 쓰라림으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감미로움으로 가득하다. 전자는 속박에로, 후자는 자유에로 각각 인도한다. 또한 전자는 지옥의 감옥에 대한 공포심을 갖게 하지만, 후자는 천국의 문을 열어 준다." -닐.
  
11절. "여호와를 경외함을." 그러므로 선한 자녀들이여, 이를 너희의 으뜸가는 관심사와 연구 대상으로 삼으라.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책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툴리, 버질, 호머, 그리고 다른 불경스러운 저자들의 작품에 조예가 깊다고 해서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만일 너희가 가나안 언어를 습득하지 못했다면, 헬라어와 라틴어를 배운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만일 너희의 삶과 행로가 기독교의 규칙과 법칙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너희의 언어가 라틴어 문법이나 프랑스 왕가의 규칙에 걸맞는다고 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창조주에 대해 무지하면서 피조물들에 관한 지식을 소유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또한, 이 땅에서 잠시 살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법을 배운다고 해도 내생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는 법을 배우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축복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대소를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115:13). -토머스 가테이커(David's Instructor, 1637).
  
12절. 오래도록 사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 큰 문제이다. "왕이여 만세수를 누리소서"라는 충성어린 기원은 번영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시편 기자가 "생명 보기를 원하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말할 때, 그는 곧바로 "좋은 날을"이라는 표현을 덧붙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라틴 민족 사이에서는, 산다는 말이 때로는 형통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 때문에, 한편으로 성경은 저주받은 상태를 영원한 죽음이라고 지칭한다. 이는 저주받은 자들의 삶이란 단지 비참한 가운데 지속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복받은 자의 삶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는 그것이 지극한 행복 가운데 영속적으로 거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나다나엘 하디.
  
12절. 삶의 유익이란 그 길이에 있지 않고, 그 활용에 있다. 가장 오래 사는 자가 때로는 가장 미천한 삶을 살기도 한다. -세네카(Seneca).
  
13절.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피시누스(Ficinus)는, '건강 유지에 관하여', '건강 회복에 관하여', 그리고 '생명 연장에 관하여' 논문을 쓴 뒤에, 이 모든 것으로 부족하므로, 지혜롭게 네번째 논문('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관하여')을 추가하였다. 영생을 얻는 것은 방만하고 음란한 혀라는, 이 세상적인 지체를 억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심판주께서 친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7)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49:21을 신명기 33:23과 비교하라. 그러면 선한 말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흡족하게 함을 알게 될 것이다. -존 트랩.
  
13절.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아마 다윗은, 궤사한 말을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함에 있어, 자신의 행위를 바꾸면서 자기 자신의 죄악을 되돌아보고 있는 듯하다. 진정으로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자들은, 자신과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다른 이들에게 경고할 것이다. -매튜 헨리.
  
14절. "악을 버리고." 이는 악이 사람들 가까이에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항상 그들 가까이에 있으며, 거부하고 회피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이 구절은 모든 종류의 악과 관계된 것이다. 악한 사람들과 그들의 악한 동료, 악한 것들, 악한 말과 악한 일들, 그리고 모든 악한 모습 등. 여호와를 경외하는 표시는 악을 미워하고 거기서 떠나는 데서 드러난다(잠 8:13; 16:6). -존 길.
  
14절. "악을 버리고." 말에 관한 교훈들이 두 가지 언급된 후에, 이번에는 마땅히 취해야 할 행위들에 관한 네 가지 교훈들이 제시된다. 이는 우리가 말보다 행위에 더 치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네 가지 교훈들은 모두가 적극적인 형태이다. 이는 소극적인 것은 행위의 특성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소극적인 마음으로 취하는 행동은 게으름보다 나을 것이 없다. 네 가지 중 앞의 두 가지는 선과 악이라는 일반적인 사항과 관련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무엇이든 악한 것과 마주치면, 우리의 입장은 그것을 떠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에 대해서는 주저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리처드 베이커.
  
14절. "선을 행하며." 소극적인 선함만으로는 하늘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기에 부족하다. 세상에는 온통 소극적인 행동만을 강조하는 종교를 지닌 자들도 있다. 그들은 술주정꾼이 아니며, 욕쟁이가 아니다. 또한 그들은 이 때문에 스스로를 축복한다. 바리새인이 어떻게 허세를 부렸는지 생각해 보라(눅 18:11):"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영이라는 숫자를 합해 보았자 숫자가 더 늘어나지 않음과 같다. 우리는 악을 그만둘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주여, 제가 큰 죄로 얼룩지지 않도록 나 자신을 지켰나이다. 저는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은 가련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는 무슨 선이 들어 있는가? 포도원의 종이 거기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나무를 부러뜨리거나 울타리를 부수지도 않는다. 만일 그가 포도원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그는 삯을 얻지 못한다. 우리가 마지막 날에 '우리는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큰 죄를 범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도원에서 어떤 선한 일을 행했는가? 우리가 받은 은혜는 어디에 있는가? 만일 우리가 그 은혜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삯을 받지 못하며 구원을 상실할 것이다. -토머스 왓슨.
  
14절.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올바르게 행하라. 그리하면 여러분이 굳이 화평을 추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찾지 않아도 화평이 여러분을 찾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의롭게 살라, 그리고 화평하게 살라"고 말한다. 평정이 머무는 곳에는 항상 의가 발견될 것이다. 하지만 평정은 악의 집을 싫어한다. 은혜가 먼저 수저를 들지 않는 곳에서는 화평이 식사를 하지 않을 것이다. 경건을 유지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토머스 애덤즈.
  
14절.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가장 바람직스러운 것들은 가장 얻기 쉬운 것들이 아니다. 마음의 평강보다 더 소중한 것을 생각해 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위대한 축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찾을 때 그것은 종종 우리 손에서 요리조리 빠져 나간다. 그것은 달아나며 우리는 그것을 좇아야 한다. (1) 평화지향적 태도를 지닌 자는 불필요하게 혹은 참을 수 있는 상황에서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평화지향적인 사람의 또다른 특성은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거의 주목할 가치도 없는 사소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화를 내지 않는다. (3) 만일 불필요하게 감정을 해치거나 화를 낸다면,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중단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만일 의견 차이가 이미 시작되었다면, 초기에 그것을 억제하며 더 이상 진전되지 않게 하라. -다니엘 워터랜드(Daniel Waterland, Dr., J. R. Pitman's Course of Sermons on the Psalms, 1846).
  
15절.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열다"(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에는 "기울이다"는 뜻으로 번역되어 있다-역자 주)는 말이 원문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미는 하나님의 귀가 의인의 부르짖음을 향해 기울여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여러 차례 엿볼 수 있듯이 의의 소중하고 탁월한 힘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귀는 고귀하고 의로운 자들과 그들의 기도를 향해 기울여져 있다:"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아 2:14). -존 굿윈(John Goodwin).
  
15절.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히브리어 원문상으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향해 있다"이다. 베드로는 이를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12)라고 옮긴다. 비록 그들의 기도가 너무도 희미하고 약하여 만군의 여호와의 귀에 미칠 수 없을 정도라 할지라도, 그분이 친히 몸을 굽히사 그들의 간구와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이다(애 3:56). -존 트랩.
  
15-17절.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낯선 자들이 아우성을 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도울 것인지의 여부는 일종의 모험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 자녀가 큰 재난을 당하여 부르짖는다면, 우리는 서둘러 그들을 돕는다. 하나님과 맺은 우리의 관계는 우리의 바람이 하나님의 귀에 들릴 것이라는 소망을 당연히 강화시켜 줄 것이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자는 자신의 간구가 이루어질 것을,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아들로서 대우해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외경스러운 마음으로 말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가까이하시며, 그런 자들과 함께하시는 것을 너무도 흡족하게 여기시므로, 그들이 그분께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을 용납하실 수가 없다. 그분은 그들을 항상 자신 곁에 두시며 항상 자신의 눈길 아래에 두셔야 한다. 이 "상한" 자들로 말하자면, 그분은 분명 그들을 오래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시지 않을 것이며, 가까이서 그들의 뼈를 맞추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어 곪지 않도록 할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그분이 온전히 치유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허용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장래의 고통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두려워 상처 부위를 제대로 진단하지도 않고 그것을 덮어버리기만 하는 자는 어리석고 잔인한 의사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심한 고통을 가하되 상처 부위를 철저히 치료해 주는 사람을 무자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찾는 환자들의 질환상 필요할 때에는 가끔 그런 식으로 치료하신다. 하지만, 그분은 그들이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할 때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께 잊혀진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들의 의사께서 그들 곁에 있을 때에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의 친구 되신 분을 적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분이 멀리 떠나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의 질환이 깨끗이 사라지고 나면, 그들은 수치와 감사로 뒤엉킨 심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 아니, 그들은 자신의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눈길을 조금도 받을 자격이 없으며 오히려 낯선 자나 대적으로 간주됨이 마땅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대로, 즉 사랑과 자비와 인자하심을 지닌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시기를 즐겨하신다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임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품에 안으실 것이며, 결코 그들을 내버리거나 물리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비록 이 참회자들이 스스로 잃어버린 바 된 존재라고 여기는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들은 구원받은 무리 가운데서 감사의 찬송을 부를 것이다. -제임스 제인웨이.
  
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상한 마음이 주는 유익을 생각해 보라. (1) 상한 마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2) 그것은 여러분의 봉사 및 의무와 관련하여 발견되는 수많은 결함들을 보완시켜 준다:"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3) 상한 심령은 그 영혼을 하나님이 내주하시기에 적합한 거처로 만들어 준다:"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하려 함이라"(사 57:15). (4) 그것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로 가까이하시도록 이끈다:"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5)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치유를 받게 해준다:"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겔 34:16). 자신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손길을 발견할 수 있는 자가 그리고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렘 30:17)는 감미로운 말씀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 자가 어찌 상한 심령이 되지 않겠는가? (6) 그것은 우리를 하늘에 이르는 바른 길로 들어서게 한다. 거기서는 우리의 모든 상처와 고통이 치유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그 잎사귀들이 만국을 치유하기 때문이다(계 22:2). 거기서는 상처나 고통에 대한 불평이 전혀 없으며,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치유된다. -존 스팰딩(John Spalding, Synaxis, Sacra, or a Collection of Sermons, etc., 1703).
  
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우리는 자신보다 낮아진 자들일수록 더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비한 자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신다. 귀한 그릇은 가장 잘게 부숴진 진흙으로 만들어진다. -조지 혼.
  
18절. "마음이 상한······중심에 통회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기에 적합하지 못하지만 자기 자신의 결함만으로 구주께 버린 바 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목회자들이 불평거리로 삼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실이다.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라"(호 14:3). 더욱 절망적이고, 무기력하며, 또한 고아와 같은 상태에 처해 있을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로부터 더 많은 은총을 구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죄악의 잠에 빠진 영혼을 흔들어 깨우실 것이다. 이 교훈의 말씀은 마치 번갯불처럼 우리 자신의 내면을 환히 살피게 할 수 있다. 가련한 죄인이여, 그대의 영혼 위에 놓인 지탱할 수 없는 죄악의 짐이 그대를 지옥으로 내리누르려 하지만, 그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짧은 인생이라는 실에 매달린 하나님의 진노가 그대 머리 위에 매달려 있으며 그대는 일 년도 아니 어쩌면 한 달도 존속되지 못할 상황이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 상황을 직시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마치 보스월드(Bosworld) 들판(리처드 3세가 헨리 7세에게 패배당했던, 영국 중부의 격전지-역자 주)에서 리처드 3세가 말 한 마리를 애타게 구했듯이 이렇게 부르짖을 것이다:"오직 그리스도만을! 오직 그리스도만을! 온 세상의 일만 배보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제임스 날튼(James Nalton, 1664).
  
18절. "마음이 상한." "다케에 루아흐"(jwr yakd)는 '두들겨 맞은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말 속에는 해머의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즉, 먼저 광석을 산산조각낸 다음에, 금속이 광석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그 금속을 뚜드려 펴는 작업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또한 이는 예레미야 23:29을 떠올리게 한다.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산산조각내는 것'과 '뚜들기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들이며, '해머'와 '바위'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힘센 손이 커다란 해머로 바위를 내리치듯이, 여호와의 말씀은 성령의 권능에 의해 죄인의 심령을 강하게 내리친다.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은 참된 회개를 나타내는 두 가지 본질적 특성이다. -아담 클라크.
  
19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우리에게 닥치는 곤경의 횟수가 잦고, 그 성격이 유별나며, 또한 정도 면에서 심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들은 더욱 많으며, 그분의 지혜는 더욱 놀랍고, 그분의 권능은 더욱 이적적이다. 그분은 우리를 그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19절.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다윗이 곤경에 직면했을 때, 그는 아람 군대와 마주친 엘리사처럼(왕하 6:16) 하나님께로 눈을 돌렸으며, 자신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보다 더 강하신 분이 함께하고 계심을 발견했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신의 고난과 관련하여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라고 부르짖으며, 받은 바 약속과 관련하여서는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외친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저울로써 의인의 상태를 측정하고서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라고 말하며, 그러고 나서 자신의 치유 경험에 입각하여 의인이 치유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한다. 변호사는 자신의 고객을 분쟁으로부터 건질 수 있고, 의사는 환자를 질병으로부터 구할 수 있으며, 또한 주인은 자기 종을 속박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호와는 우리를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하신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러 갔을 때 대적들의 말발굽 하나도 남기지 않았듯이, 여호와께서 의인을 구원하러 오는 때에도 단 하나의 곤경도 남겨 두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네 모든 불법을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내가 네 모든 결함들을 제거할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실 것이다. -헨리 스미스(Henry Smith).
  
20절.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아벤 에스라의 지적처럼) 아마 다윗은 블레셋인들에 의해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뼈는 부러뜨려지지 않았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였다(요 19:36). -존 트랩.
  
20절. "그 모든 뼈를." 뮈(Muis)는 이렇게 말한다:"이는 그의 신체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왜냐하면 육체적 고난은 허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경건한 자의 죄악이란 가벼우므로 뼈까지 침투하는 법이 거의 없음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가이어(Geier)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그것은 너무 난해한 설명이다. 오히려 뼈란 신체 중 매우 중요한 부분을 상기시킨다. 뼈를 다치면 신체 구조 전체가 위기에 처한다. 따라서 이것은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라는 말씀과 같은 일종의 잠언으로서, 의인을 돌보시는 여호와의 각별한 보호를 나타낸다." 그런가 하면 게네브라드(Genebrard)는, "뼈란 모든 지체들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말한다. -Poli Synopsis.
  
20절. 유월절 어린 양의 뼈를 꺾지 않은 것은 "뼈 하나도 꺾이지 않으신" 예수님을 예표했다.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안전하게 보호받게 됨을 예표한 것이기도 하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는 말씀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Andrew A. Bonar's Commentary on Leviticus.
  
20절. 그리스도의 뼈들은 그 자체로서는 부러뜨려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그 어떤 무력에 의해서도 부러뜨려질 수 없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뼈가 부러뜨려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미리 선언해 두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 영생을 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라 그들이 회개하기 전에는, 마귀나 인간의 그 어떤 힘으로도 그를 죽일 수 없으며 또한 죽여서도 안 된다. 그분의 뜻은 온전히 성취되어야 한다. -토머스 풀러.
20절. 이 시편과 35편간의 유사점을 보여 주는 한 예로서, 본절과 시편 35:10에 나오는 뼈에 대한 언급을 살펴보라.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21절. "악이." 많은 고난(19절)도 의인을 해치지는 못하지만, 악(단수형에 유의하자)은 악인을 죽인다. 이는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상이함을 시사한다. 의인에게는 수많은 억압 상황들이 허용되며, 악인에게는 곤경이 그다지 자주 닥치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곤경들도 전자를 해치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를 위해 선을 이루지만, 후자의 경우는 극소수의 곤경들에 의해 혹은 단 한번의 곤경으로 인해 완전히 파멸당하고 만다. -헨리 해먼드.
  
21절.
  
양심이 죄인을 괴롭히고, 
미지의 공포를 야기시키면서 이를 간다.
이제 회심의 시기가 영원히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뒤늦게 회개하고 울부짖은들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한다.
-피터 다미아노(S. Peter Damiano, 988-1072).
  
21절. "죄를 받으리라." KJV를 직역하면 "황폐해지리라"이다.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은 KJV 난외주의 번역과 일치하며 히브리어 원문 "예에 솨무"(wmvay)를 적절히 옮긴 것이다. 의인을 미워하는 자들은 죄를 범한 것이며 징벌을 면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단어가 KJV에서는 종종 그런 식으로 번역되어 있다(레 4:13, 22 참조). 그리고 대개 이 단어 속에는 범죄와 그것으로 말미암은 징벌의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사무엘 챈들러.
  
22절. 교회에 제공된 하나님의 약속들과 그분의 말씀이 담긴 생명의 책 속에 수록된 죄에 대한 경고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이 아니다. 이 내용은 그 어떤 시대에도 낡아빠진 것으로 간주되거나 구속력과 가치를 상실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선한 자들과 선한 목적들이 억압을 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경우에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폭풍우가 물러나 자취를 감추면
하늘은 다시금 높푸르다.
  
궂은 날씨가 지나고 나면 청명해진다. 비록 지금은 궂은 날씨이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종교를 대적하는 자들과 복리를 좀먹는 자들이 번영을 누리며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해도 고뇌할 필요가 없다. 다윗이나 욥은, 햇빛이 캄캄한 구름 속에 가리우고 궂은 날씨로 변하는 것을 보았지만, 끝내는 극복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마베리.
  
22절. 사탄은 하나님께 허락받은 기간보다 더 길게 시험하지 못한다. 그분은 우리가 정도 이상의 시험을 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시험과 더불어 피할 길도 주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서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용감하게 싸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사탄이 공격을 계속한다 해도, 그분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하다(고후 12:9). 만일 우리의 힘이 완전히 쇠해진다면,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안에 더 큰 힘을 불어넣으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우리를 낮추사 우리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살아 계신 여호와를 의지하게 하시며, 승리의 모든 영광을 그분께만 돌리게 하신다. 우리의 힘이 아직 남아 있다 해도 그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이제 그것이 모조리 사라진다고 해도,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가장 심한 공격을 받고 지루한 싸움이 계속 진행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여호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강력한 권능 안에서 강하라"는 권고와 마주한다. 담대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손쉬운 그리고 기쁜 승리를 베푸실 것이다. 사탄은 시험을 통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낙심케 하며 두려움으로 당황하게 하며 또한 절망 가운데로 몰아넣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만일 우리가 차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며 그분의 이름에 의지한다면, 사탄은 우리에게서 달아날 것이며, 우리에게는 이미 환한 낮이 임한 셈이다. 잠시 동안만 기다리라. 그리하면 이 어두운 안개와 무서운 폭풍우가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시험을 통해,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사탄의 악의를 직시하도록 가르치신다. 또한 우리 자신의 지혜를 부인하고 그분의 은총을 찬양하며 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고 사죄의 은총과 하늘에 속한 교제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교 등을 귀중하게 여기도록 가르치신다. 만일 이처럼 쓰디쓴 약이 그토록 우리를 영적으로 유익하게 만들어 준다면, 우리가 낙심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여호와를 신뢰하며, 담대하라. 그리하면 그분이 당신을 강하게 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힌트
  
1절. 확고한 결심, 그 결심을 실행함에 있어 수반되는 심각한 어려움들, 그것을 실행함에 있어 도움이 되는 것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는 탁월한 결과들. 여섯 가지 물음들:누가? “내가.” 무엇을? “송축함이여.” 누구를? “여호와를.” 언제? “항상.” 어떻게? 그리고 왜?
  
1절. 이 땅에 하늘이 임하게 하기 위한 지침.
  
2절. 추천할 만한 자랑과 그것을 듣고 기뻐하는 경우. 우리는 여호와를 자랑하되, 그분 자신을, 그분이 스스로를 드러내신 바를,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를, 그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기대하는 것들을 자랑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나누는 것은 신자들의 의무이다.
  
3절. 연합 찬양에로의 초청.
  
3절.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 혹은 하나님의 사역을 광대하다고 찬양하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일이다.
  
4절. ‘구속함받은 영혼의 고백.’ 간단명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공적을 배제시키며,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격려한다.
  
4절. 네 단계. “두려움”, “구함”, “응답하심”, “구원하심.”
  
5절. 믿음으로 앙망함을 통해 얻는 힘.
  
6절. (1) 가련한 인생의 유산, “환난.” (2) 가련한 인생의 친구. (3) 가련한 인생의 부르짖음. (4) 가련한 인생의 구원.
  
6절. 가련한 인생의 부요함. 은혜의 섭리 안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위치, 혹은 은총이 우리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자연스러운 과정.
  
7절. 천사들의 진, 경건한 자의 구원.
  
7절. 천사들의 사역. 예수께서 “여호와의 사자”이심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8절. 경험은 신앙적 진실성에 대한 유일하고 참된 시금석이다.
  
8절. ‘맛.’ 성별된 미각, 정선된 음식, 만족스러운 결정, 천상의 주인.
  
9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된 재산.
  
9절. 두려움을 몰아내는 두려움.
  
10절. 사자들은 주릴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만족을 누린다. (“Spurgeon’s Sermons”, No. 65). (1)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여호와를 찾는 자.” (2) 대조법을 통해 강조된 약속. (3) 약속의 성취.

 

 


  10절.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11절. 선생 역할을 맡은 왕, 그의 젊은 제자들, 그의 교육 방식, 그가 선택한 주제.
  
11절. 주일 학교 사역.
12, 13, 14절. 혀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3절. 혀로 범하는 죄들. 그 폐단, 원인, 그리고 치유.
14절 상반절. 소극적인 미덕과 적극적인 선행의 관계.
14절 중반절. 왕이 추구하는 바. 그 어려움, 추구하는 자들,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보상들.
15절. 우리를 주시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향하신 그분의 눈과 귀.
16절. 악인은 살면서 패배당하고 죽어서 잊혀진다.
17절. 환난과 그것이 제공하는 삼중의 축복. (1) 우리를 기도하게 만든다.

(2)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귀에다 아뢰도록 만든다. (3) 즐겁게 구원을 체험할 수 있는 여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18절. 상한 마음들을 가까이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들의 구원의 확실성.
19절. 흑인과 백인, 혹은 독과 해독제. 특별한 백성, 특별한 시련들, 특별한 구원들, 의무로서의 특별한 믿음.
20절. 큰 위험에 처한 신자의 진정한 안전. 그의 영혼, 그의 영적 삶, 그의 믿음, 소망, 사랑, 예수에 대한 그의 관심사, 그의 양자 입양, 그리고 칭의 등, 이 모든 것들이 보존된다. 
21절. 악인이 자신의 악에 의해 멸망당한 사례들. 성경상의 사례들, 역사상의 사례들, 그리고 지옥에 던져진 자들의 사례들. 그 엄숙한 사실을 통해 얻는 교훈들. 악의에 찬 심령을 지닌 사람의 절망적 상태.
21, 22절. 멸망당할 자들과 그렇지 않을 자들은 각각 어떤 이들인가?
22절. 여러 가지 의미들을 지닌 구속.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믿음. 은혜의 사역에 있어 비길 데 없는 영광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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