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젼의 시편 32편 강해
개요
주제
이 시에는 “다윗의 마스길”이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이 영광스럽고도 복음적인 시편을 다윗이 지었다는 것은 이 머리말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로마서 4:6, 7, 8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언급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자신이 범한 큰 죄에 대한 깊은 회개에 이어 그토록 더없이 복된 평안이 뒤따랐던 까닭에, 그는 이 뛰어난 노래의 부드러운 운율 속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부었다. 역사적 순서로는 이 시편이 시 51편에 이어지는 듯하다. “마스길”은 새로 접하게 되는 머리말이며, 이것이 교훈적이거나 교육적인 시편임을 시사한다. 한 신자의 경험은 다른 이들에게 풍부한 지침을 제공하며, 회중의 발자취들을 보여 주고, 그리하여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인도해 준다. 의심하는 성도들이 이 시편을 일개인에게만 해당하는 특이한 언급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그들 자신에게 제공된 교훈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이러한 머리말을 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51편에서는 다윗이 범법자들에게 여호와의 길을 가르치기로 약속했으며, 여기서 그는 그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내고 있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매년 유대교 속죄일에 모든 회중의 죄를 고백할 때 이 시편을 불렀다고 한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2절 용서받은 자의 감사.
3-5절 다윗의 개인적 고백.
6, 7절 다른 이들에 대한 적용.
8, 9절 죄사함받은 자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10, 11절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각각 주어질 몫을 언급함.
강해
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1절. "복이 있도다." 산상수훈처럼, 이 시편은 복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두번째 감사 시편이다. 1편은 거룩한 축복의 결과를 묘사하고, 32편은 거룩한 축복의 원인을 상세히 설명한다. 1편이 충분히 자란 나무를 묘사하고 있다면, 이 시편은 그것을 처음 심고 물주는 과정에 대한 묘사이다. 1편에서 하나님의 성경을 묵상하는 자로 언급되는 사람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탄원을 드려 응답을 받는 자로 나온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복이 있도다." 이제 그는 복이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설령 그가 너무도 가난하거나 병약하거나 혹은 슬플지라도, 그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다. 용서하시는 자비는 세상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고귀하다. 이는 그것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사하여졌다"는 말씀을 듣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이다. 이 경우에 있어 축복은 성실하게 율법을 지켜온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 우리에게는 결코 축복이 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율법을 어겼지만 거저 제공된 바 너무도 풍요로운 은혜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은 자에게 축복이 주어진다. 자기의를 추구하는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축복과 무관하다. 돌아온 탕자에게 환영의 인사말이 선포되며 음악과 춤이 시작된다. 온전하고 즉각적이며, 또한 변경되지 않는 죄사함의 은혜는 가련한 죄인의 지옥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며, 진노의 상속자를 축복에 참예하는 자로 만든다. "사함을 얻고"로 번역된 말이 원어상으로는 마치 짐을 들어올리거나 장벽을 제거하는 것과 같이 '이동시키다' 혹은 '제거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들어올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은 우리의 짐을 지기 위해 피땀을 흘리셨고, 그 짐을 온전히 제거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다. 삼손은 가사의 문들을 어깨에 매어 옮겼지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짐의 무게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이 사람은, 언약궤가 속죄소에 의해 덮여 있었듯이, 노아가 홍수로부터 가리움을 받았듯이, 그리고 애굽인들이 깊은 바닷물에 의해 뒤덮였듯이, 하나님에 의해 가리움을 받는다. 육체와 영혼의 모든 더러움들을 모조리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영원히 감추어 주는 그 가리개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한때 죄악의 끔찍스러운 모습을 보았던 자가 그것을 더 이상 보지 않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죄를 속하고 가리우며 또한 그것을 없애는 것이다. 속죄에 의뢰할 수 있는 영혼은 이제 사랑하시는 분께 인정받으며, 따라서 천국에서 누릴 축복을 미리 자각하는 즐거움을 맛본다. 본문을 통해 볼 때, 사람이 죄사함받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용서받았음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축복을 누리겠는가? 분명 그것은 지식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각이 위안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2절. "마음에 간사가 없고." 사함받은 사람은 모든 경우에 있어 자신과 자신의 죄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정직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용서란 수치가 아니며, 그것이 가져다 주는 평안은 양심을 속임으로써 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기만과 위선은 아무런 축복도 가져다 주지 않으며, 그럴싸한 꿈을 불어넣어 그 영혼을 지옥으로 빠트릴 뿐 참된 평안으로 가득한 하늘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범죄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간사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고 허물로부터 의로워진 사람들은 거짓으로부터 성결해진다. 거짓말쟁이는 용서받은 영혼이 아니다. 배신, 표리부동, 속임수, 위선 등은 마귀의 자녀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모습들이다. 반면에 죄씻음받은 사람은 신실하고, 정직하고, 단순하며, 또한 아이와 같다. 궤계, 속임수, 교묘함, 그리고 위장 등으로 무장한 사기꾼들에게는 축복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봐 노심초사하는 까닭에 평안할 날이 없다. 그들의 집은 화산 가장자리에 지어져 있고, 영원한 파멸이 그들의 몫임에 분명하다. 죄를 묘사하는 세 단어들과 죄사함을 나타내는 세 단어들에 주목하고 그 경중을 따지며, 그 의미들에 주목해 보라.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복"에 해당하는 원어는 복수형이다. 이중의 즐거움, 행복의 다발, 산처럼 큰 기쁨! 우리의 불순종을 묘사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세 단어들에 주목해 보라:허물, 죄, 그리고 불법(한글 개역 성경의 시편 32:2에는 '불법'이라고 번역되지 않음-역자 주) 등은 지옥문에 서 있는 머리 셋 달린 개이다. 하지만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님은 그 개로 하여금 자신에게 속한 신자들을 향해 짖지 못하도록 입을 막으셨다. 천상의 삼위일체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죄의 삼위일체를 정복하신다. 정죄하지 않는 것은 용서의 본질이다:신자가 범죄하지만, 그의 죄는 죄로 여김받지 않으며 죄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부과되지도 않는다. 어떤 영들은 우리에게 전가된 의에 손상을 가하기 위해 입에 거품을 물고 설쳐대지만, 바울의 설명처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롬 4:6) 자들이 바로 우리이다. 자신을 대신하여 그 모든 빚을 탕감해 줄 대리인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셀라)
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제 다윗은 우리에게 자신의 체험을 전해 준다:자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느낀 것을 증거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가르침도 없다.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뱃속에서 뽑아내듯이, 자신의 체험에 입각하여 어떤 문제를 다루는 자는 그것을 잘 표현해낼 수 있다.
3절.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무지로 인해 내가 고백하지 못할 때, 혹은 절망에 사로잡혀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을 때.
"종일 신음하므로." 그는 고백에 대해 침묵했지만 슬픔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심한 범죄로 말미암은 공포는 다윗을 끊임없는 한탄으로 몰아가서 마침내 그의 음성은 더 이상 또렷하게 발음되지 않고 한숨과 신음으로 가득하였다. 그래서 그것은 부상당한 짐승의 거친 울부짖음과 같았다. 죄를 자각함으로 말미암은 고통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그 고통의 크기를 알지 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든 육체적 질병들을 겪는 것이 더 낫다. 갖은 고문을 동원하여 진행되는 스페인의 엄격한 취조도 내면의 양심이 당하는 심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 뼈가." 내 신체 중 가장 단단하고 튼튼한 부분이.
"쇠하였도다." 내 슬픔이 너무도 강렬하여 건강을 해치고 나의 기력을 멸할 정도이기 때문에, 내가 쇠약해지기 시작했도다. 죄란 그 얼마나 치명적인가! 그것은 치명적인 질병이다! 뼈를 녹이는 불이다! 우리가 자신의 죄악을 감추면, 마치 악화된 상처가 심하게 부풀어 올라 매우 고통스럽게 하듯이 그 죄악은 내부에서 격심해진다.
4절.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하나님은 손가락 하나만으로 우리를 짓뭉개실 수 있다. 그분의 손이 무겁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짓누르면 어떻게 될까? 양심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은 밤에도 거의 안식을 취하지 못한다. 이는 지긋지긋한 낮의 기억들이 침실과 꿈 속에까지 쫓아오거나 혹은 두려움으로 인해 식은땀에 젖은 채 뒤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이 들어 주실 때에는 매우 큰 도움이 되지만, 압박할 때에는 무시무시하다.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이와 같은 다윗의 고백에서 드러나듯 하나님의 손이 마음을 내리누르는 상태보다는, 차라리 아틀라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역자 주)처럼 온 세상을 어깨에 짊어지는 편이 더 낫다. 그 영혼의 활력이 메말랐고, 상심으로 인해 그 몸에 긴요한 체액이 탈진된 듯이 보였다. 생명의 램프를 채운 기름이 거의 소진되었으며, 불꽃은 이내 꺼질 듯이 깜박거렸다. 고백하지 않은 범죄는 마치 격렬한 독처럼 기력의 근원을 고갈시켰고, 그를 번개 맞은 나무처럼 혹은 열대 지방의 몹시 뜨거운 태양열에 의해 시들어버린 식물처럼 만들어버렸다. 자신의 죄를 깨닫되 주님을 망각한 가련한 영혼, 그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셀라." 음조를 바꿀 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본절의 음색이 매우 낮은 음계로 되어 있고, 이토록 딱딱한 표기를 사용함으로써 하프의 현들을 다시 맞출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은 분명 다른 가락에 맞추어지거나 혹은 보다 흥겨운 주제를 노래하게 될 것이다.
5절. "내가 이르기를." 그의 확고한 결론임을 나타낸다.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오래도록 망설인 후에, 상한 심령은 먼저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주님 앞에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치료를 위해서는 먼저 피침으로 궤양 부위를 찢어야 한다. 사함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자신의 허물을 자각하는 것이다. 만일 너무 교만하여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중의 징벌을 당하기 마련이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동료들이나 대제사장에게가 아니라 여호와께 아뢴다. 상징의 시대에도 신실한 자는 견딜 수 없는 죄의 질고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는데, 하물며 새벽이 밝아옴으로써 모형과 그림자들이 사라진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영혼이 낮아져 죄악을 고백하기로 결심할 때, 죄사함이 가까이에 있다.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우리는 죄의 사실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죄도 자백해야 한다. 그것을 숨기면 소용이 없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죄를 고백하는 일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왜냐하면 온전한 고백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겸손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영혼의 비밀들을 들추어내야 하며, 아간에 의해 숨겨진 보물을 파헤쳐야 하고, 우리의 죄악들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나의 죄 자체가 사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악 또한 사해졌다. 그 죄악의 해독이 제거되었으되, 그것을 시인하자마자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의 용서는 깊고도 철저하다:자비의 칼이 죄악의 악한 잡초를 뿌리째 자른다.
"셀라." 또 다시 잠깐 멈출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서둘러 다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영혼아, 멈추고서 찬탄과 놀라움을 표하며,
내게 그토록 큰 사랑을 베푸신 이유를 여쭈어라.
은혜로 인해 내가 주님 가족의 일원이 되었도다.
할렐루야!
주께 감사하되, 영원히 감사하나이다.
6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6절.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만일 시편 기자의 말의 의미가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라면, 그의 증거는 참되다. 주목할 만한 기도 응답 사례들은 다른 경건한 이들의 기도 생활을 크게 고무시킨다. 어떤 사람이 어디에서 금덩어리를 발견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곳을 파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우리의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 주는 유익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감수하게 된다. 다윗의 사례를 접한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스러운 용기를 지니고서 여호와를 찾았을 것임에 분명하며, 만일 그들의 용기를 북돋워 줄 그러한 사례가 없었다면 그들은 절망 가운데서 죽었을 수도 있다. 아마도 시편 기자는, 모든 경건한 영혼들이 이와 같은 은총을 추구할 것임을 나타내고자 한 듯하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의 증언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건함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면 다윗과 동일한 방식으로 누구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속죄소는 천국에 이를 모든 이들을 그곳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하지만 기도를 위해 정해진 때가 있으며, 그것을 지나치면 기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죄를 짓는 때와 징벌의 날 사이에 자비가 위치하며 하나님이 발견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형이 선고되면 간청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정죄당한 영혼은 여호와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용인된 때를 가볍게 여기지 말며, 구원의 날을 허비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응답하기로 약속하신 동안 경건한 자는 기도하지만, 불경건한 자는 집 주인께서 일어나 문을 닫으실 때까지 간구하기를 지체한다. 일단 문이 닫히면 그들의 두드림은 너무 때늦은 것이 되고 만다. 집어삼킬 듯한 큰 홍수가 밀어닥치기 전에 여호와를 찾고자 하는 것은 그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여호와를 찾게 되면 그 홍수가 닥칠지라도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홍수가 닥치고 물결이 거세게 요동하여, 마치 아틀라스가 일으키는 거대한 물결처럼 그들을 까불릴 것이다. 소용돌이와 폭우가 도처에서 일어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안전 거리를 확보할 것이며 모든 해악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다. 아마도 다윗으로서는 평상시에 거의 마른 상태인 강바닥을 급류로써 넘치게 하는 큰 홍수에 매우 익숙하였을 것이다. 이 넘치는 강물은 종종 큰 피해를 가져다 주었고, 기손의 경우에서와 같이 군대 전체를 휩쓸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이 비유적 표현은, 진실한 탄원자가 갑작스럽고도 압도적인 재해들로부터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죄로부터 구원받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목하라. 정직한 고백과 온전한 용서가 어떤 일을 이룰 것인지를 보라. 대속의 복음은 우리의 심판자이셨을 그분을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게 하였다.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환난이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내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는 마치 녹을 깨끗이 지우되 금속은 상하게 하지 않는 줄과 같다. 세 가지 시제에 유의하라. 앞에서 우리는 슬픈 과거를 살펴보았고, 앞 문장은 기쁜 현재이며, 본문은 즐거운 미래에 관한 내용이다.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이 얼마나 황금 같은 문장인가! 그는 노래로 에워싸여 있고 감격적인 자비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은총으로 인한 승리를 선포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원은 전혀 단절된 부분이 없으며, 그의 주위를 완벽하게 두르고 있다. 그는 모든 방향으로부터 노랫소리를 듣는다. 그의 앞에서 소망이 심벌즈 소리를 울리고, 그의 뒤에서는 감사의 탬버린 소리가 울린다. 우측과 좌측 그리고 위와 아래에서 기쁨이 울려퍼지고, 이 모든 소리들은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종일토록 고통 속에서 부르짖었던 바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 얼마나 큰 변화인가!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질 것인가!
"셀라." 잠시 멈출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토록 놀라운 사랑은 깊이 숙고될 필요가 있으며, 그토록 큰 기쁨은 조용한 묵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언어로써 그것들을 표현하기란 역부족이다.
8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8절.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화자로서, 시편 기자에게 기도에 대한 응답을 제시하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는 분이시다. 여호와께서 친히 그 자녀들에게 성실한 길을 걷도록 가르쳐 주시며, 그분의 거룩한 말씀과 성령의 권고들은 신자의 일상 대화를 지도해 준다. 우리가 사함받은 것은 향후로 우리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살기 위함이 아니라 거룩함으로 교육을 받으며 완전에 이르도록 훈련을 쌓을 수 있기 위함이다. 천상에서 받을 훈련은 우리의 양자 됨을 통해 보증되는 언약의 축복들 중 하나이다:"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라"(사 54:13). 실천적인 가르침이 가장 귀한 교훈이다. 그리고 비록 가말리엘의 문하에 들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윤리학에 관해 무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시든 그 뒤를 따르는 것을 배운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하다.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종들이 자기 주인의 눈빛을 보고서 신호를 받듯이,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찡긋하기만 해도 그들이 잘 알아차리듯이, 우리는 주님의 가장 세미한 암시들에도 복종해야 한다. 바로잡기 힘든 우리의 게으름을 자각하게 하기 위해서는, 굳이 천둥 소리가 요청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속삭임과 사랑스러운 손길만으로도 족하다. 여호와께서는 위대한 감찰자이시며, 그분의 눈은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을 두루 살피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목장에 거하는 양이 되어 그분의 지혜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좋다.
9절.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사람을 짐승과 구분해 주는 것은 바로 지성이다. 마치 우리에게 그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자. 사람들은 조언과 권면을 받아야 하며, 지혜가 안내하는 길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의 어리석음에 대항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천사와 같은 존재여야 하는 우리가 쉽사리 짐승처럼 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KJV에서는 "그것들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그 입에 자갈과 굴레를 씌워야 한다"로 되어 있다-역자 주.) 우리가 순종하기 전에 심각한 징계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경우들이 흔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깃털과 같이 성령의 입김에 의해 쉽게 움직여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통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으며 하늘의 소망을 접하고서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의 자갈은 우리의 완고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며, 심한 병고의 굴레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고집불통인지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나귀나 노새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성마른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꽉 조이는 고삐에 매일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완고한 종과 같이 되지 않고 여호와께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는 거듭하여 채찍을 맞는다. 칼빈은 이 구절의 하반절을, "그것들이 너희를 차지 않도록"이라고 옮긴다. 이 번역이 더욱 그럴 듯하고 자연스럽긴 하지만, 원문 자체는 애매모호하다. 그러나 전반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어 지장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10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10절. "악인에게는 슬픔이 많으나." 다루기 힘든 말이나 노새처럼, 그들에게는 찔리거나 맞은 상처 자국들이 많다. 이생에서와 내생에서 악인의 몫은 기대될 수 없다. 그들의 기쁨은 덧없는 반면, 그들의 슬픔은 더욱 늘어나고 심해진다. 죄를 뿌리는 자는 무거운 슬픔의 단을 거둘 것이다. 양심의 슬픔과 실망이나 공포로 인한 슬픔은 때가 되면 죄인들에게 반드시 주어질 유산이다. 또한 양심의 가책과 절망의 슬픔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현재의 죄악된 기쁨을 자랑하는 자들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기억하고 경고를 받아야 한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여기서 믿음은 사악함과 반대되는 것으로 언급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미덕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삶의 근심을 처리하는 위대한 마술사와 같은 것이며, 그것을 소유하여 은총의 환경 가운데 거하는 자는 자비라는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우리가 언제나, 심지어 하나님의 자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없는 때에라도, 그 자비를 믿게 되기를 기원한다. 왜냐하면 자비란 언제 어디서나 신자를 둘러싸고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그 자비의 향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악인 주위에는 말벌의 벌집이 둘러싸고 있어 늘상 슬픔이 따르지만, 우리에게는 꿀을 비축해 주는 꿀벌떼가 있다.
11절. "너희 의인들아······즐거워할지어다." 너희 즐거움을 배가시키며 그 기쁜 탄성을 거듭 울려퍼지게 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가대원들을 거룩한 흰 예복으로 입히셨으므로, 그들의 즐거운 음성을 억제하지 말고 그들로 마치 큰 횡재를 한 자들처럼 큰 소리로 노래하며 외치게 하자.
"여호와를." (KJV 직역은 '여호와 안에서'임-역자 주.) 여기에는 우리의 기쁨이 천박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침이 나온다. 우리는 죄악 속에서 기뻐해서는 안 되며, 음식이나 포도주 혹은 기름 등에서 위안을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 영혼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뜨락은 우리 하나님 안에만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며 또한 그분이 영원토록 우리의 몫이 되시며 우리의 아버지와 주님이 되신다는 사실은, 열광적인 기쁨을 표현하는 무한한 시편의 주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기뻐하며." 행복이란 우리의 특권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진정 우리는 관대하신 하나님을 섬긴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순종의 일부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반역적인 불평은 그 얼마나 죄악된 것인가! 용서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기뻐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어떤 사람이 군주에게 용서를 받고서 너무도 기쁜 나머지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왕 중 왕께 거저 사함을 받고 나서도 용서할 수 없는 슬픔 가운데 사로잡혀 있을 것인가?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사랑이 싸늘하게 식으면 고귀한 기쁨의 불꽃이 억눌림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마음으로부터 힘찬 노래를 발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예의를 갖추기라도 하듯 나지막이 곡조를 속삭이기도 한다. 오늘날의 교회가 지나치게 예의범절에 치중하느라고 점점 더 가식적인 모습이 되어간다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사실이다. 그래서 회중 가운데서 질문자의 고함소리나 신자의 외침이 들리면 곧장 제지될 것이다. 이것이 무질서한 광신 상태보다는 나을 것이지만, 여기에도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앙을 과도하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마음에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이 기쁨에 사로잡혀 예의범절이라는 좁은 경계를 넘어설 때, 우리는 사울의 딸 미갈과는 달리 경멸의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사함받은 사람들이 정직하고, 의롭고, 또한 간사함이 없는 자들로 표현되고 있음에 주목하라. 어떤 사람이 많은 허물을 갖고 있을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거짓된 마음은 어디서나 파멸의 표시가 된다. 왜곡되고 변덕스러운 길을 걷는 사람, 그리고 비뚤어지고 간사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며, 앞으로도 구원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은총의 씨앗이 뿌려졌을 때 수확을 맺는 땅은, 잡초가 무성하고 황량한 곳일 수도 있지만 우리 주님은 그것을 '정직하고' 좋은 땅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찰해온 바에 의하면, 이중의 혀와 속임수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구원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부류에 속한다. 은혜가 임하면 사람의 마음을 똑바로 일으켜 세워 주며, 사악함과 교활함으로 인해 왜곡된 상태로부터 혹은 부정직함으로 인해 구부러진 상태로부터 그를 구원해 준다.
독자들이여, 이 얼마나 기쁨 가득한 시편인가! 여러분은 이 시편을 숙독하는 중에 자신이 좋은 땅에 거하노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구원의 길을 전하라.
주해
머리말. 마스길이라는 머리말이 붙은 시편들은 모두 열 세 편이다. 영역본들은 단지 원문에 나오는 단어를 영문으로 표기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그러나 제네바역을 비롯한 영역본들은 난하주에 "교훈을 주기 위한"이라는 말을 앞에 덧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이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확언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몇몇 탁월한 히브리어 학자들은 이 머리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존경할 만한 영역자들 중에는 그것을 번역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이들도 있다. 영역본들의 난하주에 첨부된 해석은 가장 오래된 것이니만큼 권위 면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그것은 시 32편의 내용과 매우 잘 부합하며, 이 시편이 최초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 시편은 현저하게 교훈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편이 포괄하는 내용은, 확신에 찬 영혼이 어떻게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을 누릴 것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항상 구원의 노래를 부를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이다. -윌리엄 빈니(William Binnie, D.D., The Psalms:their History, Teachings, and Use, 1870).
시 32편 전체. 이것은 교훈적인 시편이며, 여기서 다윗은, 예전에 범죄의 본을 보인 적이 있는 자로서, 자신의 교훈을 통해 죄인들에게 회개를 가르치고자 한다. 이 가르침은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우리 모두가 필히 배워야 할 사항이다. 왕들, 제사장들, 백성들, 남녀들, 어린아이들, 그리고 장사꾼들 등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 수업을 받아야 하며, 이를 배제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무익하다. 핵심을 말하자면, 이는 진실한 회개자의 표시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는 한때 다른 이들에게 거침거리가 되었지만,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에게 해악을 끼친 것처럼 이제 자신의 회개를 통해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자 간절히 애썼다. 나는, 자기 자신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간증하여 죄인들에게 회개를 가르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는 진정한 회개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회심하고 난 후에 우물가에 물동이를 버려 두고 마을로 들어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요 4:29)고 말했다. 또한 우리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하셨다. 사도 바울 역시, 개종한 후에 자신을 가리켜 죄인들 중 괴수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사례를 들어 죄인들에게 회개를 가르쳤다. 자신이 넘어뜨린 것만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아치볼드 심슨(Archibald Symson).
시 32편 전체. 어느 날 루터가 전체 시편들 중 어느 것이 가장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바울적인 시편"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어떤 것들이 바울적인 시편이냐고 다그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32편, 51편, 130편, 그리고 143편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는, 우리에게 죄사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율법과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그것들을 바울적인 시편들이라고 지칭한다. 또한 다윗은 노래하기를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라는 바울의 언급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못한다.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는 말씀은 인간의 모든 공적을 배제하며,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가리우지 말고 '다만 용서가 있을 뿐 공적은 전혀 없다'고 고백할 것을 가르친다." -Luther's Table Talk.
시 32편 전체. 어떤 이들은 이 시편이 속죄일에 불리우곤 했다고 확언한다. -로버트 레이턴(Robert Leighton).
참회의 시편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로마에서 종교재판소 측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그는 3년 동안 매주 일곱 편의 참회 시편들을 반복 낭송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그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죄를 자백하게 하며, 그에게 선고된 형의 정당성을 받아들이게끔 하기 위한 의도였음에 분명하다. 분명 재판 과정에서 주도 면밀하게 불법적 고통도 가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죄수에게 공감과 위안을 가져다 줄 뿐이었을, 이토록 경건한 의식에 대해 신부들이 고통이나 징벌의 개념을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몬터규(M. Montague, The Seven Penitential Psalms in Verse······with an Appendix and Notes, 1844).
1절. "복이 있도다." 혹은, '오, 복있는 사람이여' 또는 '오, 그런 사람의 지복들이여!' 이는 최고의 그리고 가장 완벽한 축복을 시사한다. 이는 코끼리의 거대한 몸집을 나타내기 위해 복수형인 "베헤모드"로 언급하는 것과 같다. -로버트 레이턴.
1절. 이는 시 1편을 제외하면, 복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 첫번째 시편이다. 시 1편에서는 결백한 상태의 복됨 혹은 결백했던 자의 복됨에 관해 노래한다. 그런가 하면 여기서는 회개의 복됨을 노래한다. 이는 무죄 상태 다음으로 가장 행복한 상태이다. -로리누스(Lorinus, Neale's Commentary).
1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복이 있도다." 여기서 다윗은 죄악을 제거하는 것을 진정한 지복으로 여긴다. 지복이란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하며,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누릴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느낄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관해 의심한다면 그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악이 제거된 사실에 대해 이처럼 의심하는 것은 참된 지복과 상반되며, 그것은 단지 양심의 고통일 뿐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양심이 뜨거운 쇳덩이에 그을려 무감각해지지 않은 상태라면, 자신의 죄가 사해졌는지의 여부에 대해 의심할 수가 없으며 죄에 대해 생각하기만 해도 큰 두려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가 그의 기억 속으로 찾아들며, 이를 생각하면 너무도 무서울 것이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여러분의 죄를 감추어 보라. 죄를 가리우는 것은 '저주'로 판명이 난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잠 28:13). 죄를 자백하지 않고서, 혹은 더 나쁘게는 그것을 부인함으로써, 그것을 '가리우는' 일이 있다. 게하시가 거짓으로 죄를 감춘 것과 같이. 혹은 우리가 죄를 짓고서 정당화함으로써 그것을 가리우기도 한다. 자신이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거나 자신은 죄악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모두는 사악하게 가리우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죄를 가리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죄를 가리우는 것이 '복된' 경우가 있다:죄사함이란 죄를 감추어버리는 것이며, 그것은 축복이다. -리처드 알레인.
1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우리는 육욕적인 기쁨으로 영혼을 달래어 잠들게 할 수 있지만, 그와 같은 아편의 효력은 이내 쇠진할 것이다. 그 모든 즐거움은 단지 훔친 물과 같고 몰래 먹은 빵과 같다. 그처럼 가련한 평안을 추구하는 자는 감히 빛을 가까이하지 못하며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과 내세를 조금만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도 그러한 서글픈 평안은 이내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일단 죄사함을 받으면 여러분은 진정한 기쁨을 소유한다.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토머스 맨턴(Thomas Manton).
1절. "사함을 얻고." 성결한 다윗은, 이 시편의 서두에서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 준다. 그것은 아름다운 외모나 영예나 부귀(이들은 세상의 3인조이다)에 있지 않고 오직 죄사함에 있다. '사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뜻이다. 이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라는 예레미야 1:20 말씀과 잘 어울린다. 이것은 이해하기 힘든 축복이며, 다른 모든 은총들의 근원과 같은 것이다.
나는 용서에 관해 간략히 묵상하고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사항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1) 용서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행동이다. '용서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히브리어 단어를 그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내재한 그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결과이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25). 채권자가 채무자의 빚을 탕감할 때, 그는 거저 그렇게 해준다. 바울은, "긍휼을 입은 것은"이라고 고백한다(딤전 1:13).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나는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는 뜻이다. 용서받는 자는 온통 긍휼로 뒤덮여 있다. 주께서 죄인을 사하실 때, 그분은 빚진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유산을 주신다. (2) 죄를 사함에 있어 하나님은 범죄와 징벌을 면제하신다. 범죄는 공의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자마자 그는 화염검을 보았고 저주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은 죄인을 용납해 주신다. 그분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비록 네가 나의 공의의 손에 사로잡혔지만, 내가 너를 사면할 것이며, 너로 하여금 네게 씌워진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3)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주어진다. 거저 주시는 은혜는 무조건적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참으로 고귀하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공의는 죄인에 대해서나 보증물에 대해 보응을 가하고자 할 것이다. 모든 용서는 피의 대가이다. (4) 죄사함이 있기 전에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와 사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전파될 것이"(눅 24:47). 회개가 로마 가톨릭적 의미에서 용서를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어야 한다. 회개가 죄사함의 원인인 것은 아니지만 요건이기는 하다. 죄를 뉘우치며 낮아진 자가 사함의 은총을 받기에 더욱 합당할 것이다. (5) 하나님은 죄를 사하심에 있어 더 이상 그것을 기억조차 아니하신다(렘 31:34). 주님은 우리를 온전히 면책하실 것이며, 예전의 불법적인 행위를 책망하지 않으시며 취하된 소송건을 다시 들추어내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바다에 던져진 죄는 코르크 마개처럼 다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납처럼 바닥에 가라앉을 것이다. 이 언약의 축복을 얻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토머스 왓슨.
1절.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행복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눈에서 숨기고 가리울 그 무엇인가를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 이외에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렇게 해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는 언약궤를 통해 상징적으로 예표되었다. 언약궤 뚜껑은 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속죄소라 불렸다. 그것이 언약궤 속의 돌판들을 덮었듯이, 하나님은 그 돌판에 새겨진 율법을 거스린 우리의 죄를 가리우신다. 따라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덮었던 구름은 하나님이 죄악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가리우시는 것을 상징했다. -토머스 테일러(Thomas Taylor, David's Learning:or the Way to True Happinesses, 1617).
1절.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이러한 "가리움"은 가리워져야 하는 어떤 불결하고 벌거벗은 상태와 관련이 있다. 우리를 더럽게 하고 벌거벗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죄이다. 모세는 아론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스라엘 백성으로 벌거벗게(한글 개역 성경에는 '방자하게'로 번역되었다-역자 주) 하였느냐고 했다(출 32:25). 우리의 덕성이라는 의복은 너무나 짧아서 우리를 가리우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분의 덕성과 그분의 의의 겉옷을 빌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마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죽 옷을 지어입히셨듯이 그분의 의의 겉옷은 우리의 의복이 될 수 있다. 옷이란 우리의 벌거벗음을 가리우고 추운 날씨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며 또한 우리를 치장해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중재는 우리의 벌거벗음을 가리우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게 해준다. 그분은 우리가 입어야 할 "흰 옷"(계 3:18)이 되사 우리의 벌거벗은 추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게 하시며, 우리를 사탄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 그분은 구원의 능력이 되신다(사 63:1). 또한 그분은 우리를 치장해 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혼인 예복"(마 22:11)이 되시기 때문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롬 13:14). -아치볼드 심슨.
1절. 용서의 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허물", "죄", "불법." 율법이라는 단어에서와 같이, 동일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닌 여러 단어들이 함께 사용되어 그 행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그것에 대한 법적 제재 수단을 더욱 구속력 있게 만든다. 내가 이 표현들에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호를 선포하실 때 이와 동일한 단어들을(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번역상의 차이를 보인다-역자 주) 사용하셨기 때문이다:"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출 34:7). 이러한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시편 기자를 가리킴-역자 주)이 "······복이 있도다"라는 강렬한 어투의 교훈을 반복해서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가?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의 경우를 고려한 때문이다. 죄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윗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죄악의 쓰라림을 피가 마를 정도로 느꼈으며, 따라서 사함받은 기쁨을 가장 생기 있는 어휘들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이 교훈을 자신에게 적용할 사람들을 고려한 때문이다. 즉,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가볍고 사소한 일로 여기지 않고 그토록 위대한 특권의 가치를 철저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죄를 사함받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너무도 복되고 행복하다. -토머스 맨턴.
1, 2절. 이 두 구절에는 네 가지 죄악들이 언급된다:(1) 허물, "페샤"([vp). (2) 죄, "하타아"(hafj). (3) 불법(한글 개역 성경상으로는 확실히 번역되어 있지 않다-역자 주), "아온"(@w[). (4) 간사, "레미와"(hwmr). 이들 중 첫번째는 경계를 넘어가서 금지된 것을 행함을 가리킨다. 두번째는 목표를 상실한 채 명령된 바를 행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종종 그것은 죄성이나 혹은 죄악된 삶을 살게 하는 죄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세번째는 적합한 과정이나 상황에서 이탈된 것을, 혹은 도덕적으로 왜곡되거나 빗나간 그 무엇을 뜻한다. 불법이란 공정함 혹은 공의와 반대된다. 네번째는 허위, 기만, 간사함 등을 뜻한다. 이러한 죄악들을 제거하기 위해 세 가지 행위들이 언급되어 있다:사함을 얻고, 가리움을 받으며, 또한 정죄를 당치 않는 것이다. (1) 대속의 희생을 통해 허물(페샤)이 사해져야 한다. 죄를 담당하거나 죄를 제거한다는 것은 항상 대속의 희생을 요한다. (2) 죄(하타아)는 가리워져(ywsk) 시야에서 감추어져야 한다. 그것은 혐오스럽고 추잡하며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 (3) 빗나가고 왜곡된 것을 가리키는 불법(아온)으로 인해 정죄를 당해서는 안 된다(bxty al, 로 야테초브). (4) 간사함(레미와)은 마음에서 근절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그 영혼 속에는 간사함이 전혀 없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으며(하나님이 그 죄를 마치 맷돌처럼 바다 깊은 곳에 던져 넣으시며), 자신의 불법과 왜곡됨으로 인해 정죄를 당치 않고, 또한 기만적이며 사악한 마음이 근절되는(죄가 사라지는 대신 의로 가득 채워지는) 일 등은 행복을 위해 필수 사항들이다. -아담 클라크.
1, 2절. "허물." 어떤 이들은 이를 부작위의 죄와 작위의 죄로 이해한다.
"죄." 어떤 이들은 이를,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그 영혼을 이탈시키는 탐욕과 내적 충동 등과 같은 내적 성향들로 이해한다. 이 내적 성향들은 외적 죄악에 대한 직접적 원인이 된다.
"불법." 모든 죄의 뿌리인 원죄에 유의하라.
"사한다"는 것은 제거하거나 담당하거나 혹은 옮기우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속죄를 혹은 죄를 담당하거나 옮기우는 것을 뜻하는 죄사함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두 단어가 사용된다. 그 중 하나는 말하자면 속죄의 방식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속죄의 결과를 나타낸다. 전자는 귀중한 원인을, 후자는 그 결과를 각각 나타낸다.
"가리움을 받은." 홍해에서 바닷물이 애굽인들을 덮었던 사실을 암시한다. 메노키우스(Menochius)는 이것이 히브리인들의 기록 방식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히브리인들의 기록 방식이 로마인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들은 연필로 판 위에 덮인 밀랍에 글을 썼고, 그것을 지우고자 할 때에는 그 밀랍을 평평하게 만들어 앞의 글자들을 덮었다. 따라서, '죄를 깊은 바닷속에 던진다'는 말이 홍해에서의 사건을 암시하듯이, 그러한 기록 방식은 '죄를 지운다'는 표현과 일맥상통한다.
"정죄를 당치 않은." 책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이지만 용서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에 위반되지만 가리움을 받는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징벌이라는 빚을 지게 하지만 정죄되지 않는다. 이 모두는 사죄의 확실성과 내용 그리고 그 완전성을 시사한다. 여기서 죄를 표현하는 세 단어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성호를 선포하면서 사용하신 내용과 같다. -스티븐 차녹.
1, 2, 6, 7절. 복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 숨기며 자백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다윗이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한 그는 비참했다. 그의 영혼 속에 간사함이 깃들어 있었고(2절), 자신의 마음이 비참했으며, 그의 뼈가 녹아서 쇠약해졌고, 또한 그의 체액이 마치 여름날의 가뭄처럼 메말라버렸다(3, 4절). 그러면 복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죄없는 자, 죄를 짓지 않는 자,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그 심령이 한탄하지 않는 자이다.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최고의 축복이며, 하늘의 행복이다.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 절대적이고 온전하며 완벽한 순종, 우리의 전존재로써 드리는 마음의 순종, 이것이 바로 무쌍의 축복이다. 하지만 죄악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죄로 둘러싸여 있고, 또한 자신이 바로 죄인인 사람들 중에, 누가 복있는 사람일까?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특히 다윗의 예전 상태와 같은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 그러한 축복을 느낀다(3, 4절). 시편 기자는 이 축복을 누리기 전에 그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던가! 죄로 인해 그의 영적 기능이 그 얼마나 심각하게 마비되었겠는가! 그래서 죄악은 한때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수 있었던 자로 하여금 간사한 마음을 품게 했다:"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 24). 그는 자신이 그러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 고통과 슬픔을 야기시키는 죄악된 길을 걸어간 탓인지를 알고 싶었다. 하루 종일 울부짖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침묵한 채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열지 않고 그분 앞에서 벙어리가 되어 그분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며 자신의 불법에 대한 징벌을 받아들이지 않고(레 26:46) 또한 진실한 자백을 통해 그분께 범한 죄악을 정직하고 솔직하며 신실하게 인정하지도 않았던 그의 영혼은 그 얼마나 서글펐겠는가!
"허물의 사함을 얻고······복이 있도다"(1절). 복있는 사람을 보라. 그 마음 상태, 간사함이 없는 영혼, 그 회개한 심령, 그리고 은혜받은 영혼의 결실 등이 복되다.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사죄받는 것이 복되다. 이 사죄는 완벽하고 온전하며 아무런 결함이 없고, 죄를 가리우며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게 해준다. 이로 말미암는 축복들이 복되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3절). 나는 침묵을 지켰다. 단순히 침묵한 것이 아니라 줄곧 단호하게 침묵을 고집했다. 과거에 경험한 은총들을 모두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내 양심의 질책과 마음의 고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켰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심에도 불구하고, "내 진액," 곧 내 속에 있는 영적인 모든 것, 나의 영적 활력, 그리고 내 영혼 속에 있는 모든 영적 생명이 메말라서 사라진 듯함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여,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토설치 아니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단을 제게 보내셨습니다. 내게 있어 그는 진실한 질책으로 가득하되 사랑으로 가득한 메신저였습니다. 그가 주의 말씀을, 강하신 왕의 말씀을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나의 죄를 그에게 시인했고 내 불법을 감추지 않았지만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오직 주께만 내가 범죄하였으며, 나의 자백은 주께로 향한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나의 죄를 주께 자백했나이다. 저는 엄숙하게 이르기를 내가 그렇게 하리라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내가 나의 허물을 여호와께 자백했으며, 그러자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7절). 한때 나를 그토록 무겁게 내리눌렀던 그 손바닥 아래에서, 이제 나는 휴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시며, 저는 더 이상 주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를 나의 거주지, 높은 망대, 나의 은신처, 나의 안전, 그리고 나의 집으로 삼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주의 사랑 안에서는 안전합니다. 주의 종 나단의 입을 통해 주께서 선언하시기를, 내게 곤경이 닥치되 내가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구원은 너무도 흡족할 것이므로, 주께서 그 은총의 팔로 나를 에우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주의 은혜로우신 중재로 인하여 감사 찬송을 발하나이다.
하나님께 사함을 얻은 자가 얼마나 복된지를 보라! 그러기에, 시편 기자가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덧붙인다고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께서 내게 은혜로우신 행사를 베푸신 후에 진정으로 주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 곧 모든 "경건한 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서 주께 기도할 것입니다. 나의 사례를 통해 격려받고서, 그들은 나의 죄악되고 어리석었던 모습과는 달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 앞에서 자백하고 탄원을 올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를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며, 주께서는 진정으로 주를 찾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생 제물에 안수하면서 그 희생을 통해 약속된 씨(메시아를 가리킴-역자 주)를 봅니다. 주를 만날 기회가 따로 있는 법이며, 그 기회는 주의 말씀 속에서 선포되고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께로 내 마음이 은밀하게 이끌림으로써 그것이 밝히 드러납니다. 마지 못해 하는 마음은 주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나아가야 할 범죄한 피조물에게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주께 기도할지라." 그리하면, 아무리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 물결이 제아무리 격렬하게 곤두박질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며, 저를 덮치기는 더욱 힘들 것입니다. -제임스 해링턴 에반스(James Harrington Evans, M.A., 1785-1849).
2절.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 아벤 에스라는 이 구절을 '하나님이 그 죄를 생각하시지 않는 자'로 의역했다. 이는 곧 그 죄를 고려하시지 않고, 그래서 그것을 심판하지 않으시며,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간주하신다는 뜻이다. '계산에 넣지 않는다' 혹은 '책임을 묻지 않는다.' 즉 그들에게 징벌의 빚을 떠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무료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우리의 후원자께서 속전 지불하는 일을 스스로 떠맡으셨다. 그의 고난은 우리의 면책을 위함이며, 그분의 속박은 우리의 자유를 위함이고, 또한 그분에게 주어진 징벌은 우리의 평화를 위함이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갈파한다. -로버트 레이턴.
2절. "마음에 간사가 없고." 성도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때로는 그 양심이 성경 말씀으로 가득하여 그것을 판단 근거로 삼지만, 그 말씀이 매우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 가련한 영혼은 이르기를, 자신이 적대적인 상황 속에 처해 있다고 했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그가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신실한 영혼이다. 하지만 나는 내 속에 간사함이 많음을 발견하며 따라서 나는 신실한 사람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매우 빈약하고 그릇된 것이다. 간사함이 없는 마음이란 지극히 적은 사기성과 위선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죄가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이 땅에서 그러한 권능을 지닌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따라서, 레위에 관한 말라기 2:6과("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나다나엘에 관한 요한복음 1:47의 경우에서와 같이("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 같은 구절이 성도들에게 적용된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이 땅에서의 불완전한 상태에 걸맞는 보다 하위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쓰셨던 면류관과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의복을, 이 땅에서 외부의 마귀와 더불어뿐만 아니라 자기 내부의 죄악된 육신과 더불어 전투 중인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씌우거나 입혀서는 안 된다. 가련한 영혼이여, 다시 눈을 닦고서 이 땅이 어떤 곳인지를 살펴보라.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총을 너무도 귀한 것으로 여겨 과장된 어투로 말씀하신다. 따라서 그분은 그들에게 주어진 은총이 완벽하여 그들을 모든 죄악으로부터 깨끗하게 해준다고 확언하지 않으시며, 다만 의기소침해진 가련한 영혼들을 위로하여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게 하고자 하신다. 그들의 불안한 마음은 위선에 사로잡혀 진실된 현상황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서 간과하기 쉽다. 그러기에 그분은 그들에게 주어진 적은 은총도 높게 평가하시며, 그것을 마치 완벽한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언급하신다. -윌리엄 거놀.
2절. "마음에 간사가 없고." 일단 용서가 이루어지면,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질 용기를 갖게 된다. 그는 마음속의 간사함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빚이 분명 다른 사람에 의해 모조리 탕감되었다면 누가 그것을 밝히지 않겠는가? 치유를 확신한다면 누가 자신의 병을 밝히지 않겠는가?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간사"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음을 알고 있다. 신자는 숨길 것이 전혀 없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한 모습으로 공개되고 벌거벗은 상태인 자신을 본다. 그리고 만일 그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는 법을 배웠다면, 그는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뵙는 법 또한 배운 셈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간사함도 없다. 이는 의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의 내면 속에 진실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안에서 자신에 관한 진실을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간사함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로우며, 자신의 모습만 볼 때는 그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함께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 이유인즉, 그는 값으로 사신 바 된 존재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진정한 목표로 삼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간사함이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전혀 진실하지 아니하며 자아를 높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간사함이 없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보다는 자신에 대한 생각에 더 몰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의 진리와 영예와 영광를 으뜸되는 관심사로 삼는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의롭게 판단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길 수" 있다. -리베(J. W. Reeve, M.A., Lectures on the Thirty-second Psalm, 1860).
2절. "간사가 없고." 사죄의 은총은 신실함이라는 속성에 덧붙여지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잘못들을 덮어 주신다. 그러나 그분은 오직 신실한 영혼만을 자신의 옷자락으로 덮으신다. "죄의 가리움을 받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 다음 구절에 그 해답이 나와 있다:"마음에 간사가 없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불의라는 벌거벗음과 수치를 덮어 주는 의복이다. 그리고 이 의복을 입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면 어떤 믿음인가?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거짓이 없는 믿음이다(딤후 1:5). 에디오피아 내시는,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행 8:36)라고 말했다. 그러자 빌립은 "만일 네가 온 마음으로 믿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이러한 37절 내용이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누락되어 있다-역자 주). 이는 마치, '위선적인 마음 이외에는 그 무엇도 너를 방해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은총의 문을 닫히게 하는 것은 거짓된 마음뿐이다. -윌리엄 거놀.
2절. "간사." 간사한 마음은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내적 부패이며, 이로 말미암아 그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행동을 취한다. -토머스 테일러.
3절. "내 뼈가 쇠하였도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자들의 죄악을 조롱하지 않으시며, 외적으로는 그들을 더욱 엄하게 대하시며, 버림받은 자들보다 그들을 더욱 엄격하게 질책하신다. 다윗의 곤경과 고통은 부분적으로 외적인 것이었고 또 일부는 내적인 것이었다. 즉, 그의 육신에 임한 고통은 외적이었고, 그의 양심에 임한 고통은 내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몸에 닥친 곤경과 고통은 때로는 그의 살을 아프게 했고-이는 덜 고통스러웠다- 또 때로는 그의 뼈를 아프게 했다-이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뼈의 고통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거의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정한 보응이다. 우리가 자신의 기력을 죄악 가운데 허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쇠약하게 만드신다. 삼손은 자신의 기력을 들릴라에게 허비하다가 너무도 연약한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뼈와 기력을 주신 것은 다른 용도를 위함인 것을, 즉 오직 그분을 섬기기 위함일 뿐 마귀의 일을 위해 그것을 허비하거나 탕진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겠다. -아치볼드 심슨.
3절. "내 뼈가 쇠하였도다." 뼈 혹은 몸의 기력이라는 표현은 내적 힘과 영혼의 활력을 의미한다. 진실한 회개자는, 자신의 죄악이 죽음을 임하게 하기에 합당하며, 그의 심판주께서 그 죄악에 대한 형벌을 선언할 준비를 갖추고 계시고, 지옥이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열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징벌을 시행하는 악한 천사들이 서둘러 그를 지옥으로 끌고가기 위해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 등을 깨닫는 한, 그 죄에 대한 자각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심령이 깨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사무엘 페이지(Samuel Page, David's Broken Heart, 1646).
3절.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여기서 다윗은 한 인간으로서 죄 때문에 신음할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고통에 처한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이제 그는 방 안에서 몰래 울기보다는 차라리 광야에서 울부짖는 편이 더 나은 듯하다. 한때 그는 밤에 자신의 침대를 적시기도 했지만, 이제는 하루 종일 울부짖는다. 한때는 그의 진액이 메말랐지만, 이제는 자신을 지탱시켜 주는 뼈가 흔들리며 쇠약해졌다. -알렉산더 카마이클(Alexander Carmichael, 1677).
4절. "주의 손." 하나님은 이 교정시키는 손으로 자신의 자녀들을 징벌하며 매를 가하신다. 징벌하시는 혹은 교정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이라 지칭하기도 한다(삼상 5:11). 언약궤로 인해 에그론에서는 하나님의 손이 가혹했다. 사람들은 타격을 가할 때 평상시보다 손에 힘을 더 많이 준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모든 환난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말미암는다. 둘째,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그 자녀들에게 종종 엄하게 손을 대신다. 셋째, 하나님은 종종 그들에게 엄한 손길을 주야로 미치게 하신다. -토머스 테일러.
4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이 표현에 또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시편 기자가 '영적 가물'을 언급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찰스 빙햄(Charles H. Bingham, Lectures on the Thirty-second Psalm, 1836).
4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팔레스타인의 여름은 8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이다. 그 열기는 너무도 격렬하여 거의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9월 초순이나 중순까지는 소나기를 전혀 볼 수 없으며, 여름철의 비는 눈만큼이나 드물게 내린다······때로는 들판의 마른 풀들에 불이 붙어 대화재를 야기시키기도 하며, 바싹 마른 땅바닥이 갈라져서 깊숙한 고랑을 만들기도 한다. -존 에디(John Eadie, D.D., LL.D., Biblical Cyclopaedia, 1868).
4절. "여름 가물." 러셀 박사는, 유대 지방의 기후와 매우 흡사한 알렙포의 기후를 설명하면서, 5월 중순 이전에 봄의 신록이 사그러들며 5월말 이전에 그 지역 전체가 바싹 마르고 황량해져서 아무것도 산출하지 못할 것 같은 지경이 된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를 견딜 수 있을 만한 식물들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토머스 하머(Thomas Harmer, Observations, 1775).
4절. "여름 가물." 1846년부터 1859년까지의 13년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5월과 10월 사이에 단 두 차례의 소나기가 내렸을 뿐이다. 한번은 1858년 7월에 내렸고, 또 한번은 1859년 6월에 내렸다. -휘티(Dr. Whitty, Water Supply of Jerusalem, Kitto's Cyclopaedia에서 인용됨).
4절. 만일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매를 가하신다면,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호되게 그리고 심하게 치시겠는가. -그레고리(Gregory).
4, 5절. 만일 우리의 범죄가 각다귀 같은 것이 아니라 낙타와 같이 크다면, 우리는 한 방울 물과 같지 않고 바다와 같은 슬픔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주홍 같은 죄악들은 피눈물을 요구한다. 베드로가 가증스러운 죄를 범했을 때 그는 비통하게 울어야 했다. 만일 여러분의 예전 삶이 불법으로 뒤엉킨 실타래와 같고 큰 오점들로 가득하며 갖가지 지독한 죄악들로 얼룩져 있다면, 더욱 철저하게 자백하며 더욱 겸비해지라. 갑절이나 금식하고 세 배나 더 기도하라. 눈물을 쏟으며 깊은 한숨을 쉬라.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허물을 심각하게 그리고 거듭하여 시인하라.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살전 4:13)는 말라. 여러분이 진지하고 합당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 선하심으로 인해 여러분의 죄악을 용서하실 것이다. -나다나엘 하디.
5절. "셀라." 제1권 61페이지를 참조하라.
5절.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죄악을 솔직하게 공개한다. 위선자는 자신의 죄를 감추며 가리운다. 그는 죄를 드러내지 않고 숨긴다. 자기 몸에 혐오스러운 질병을 지닌 환자처럼, 그는 자신의 질병을 자백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한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의 신실함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데서 밝히 드러난다.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삼하 24:17).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는 특정한 죄를 자백한다. 불건전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악을 뭉뚱그려 자백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대체로 죄인임을 시인하겠지만 다윗은, 말하자면, 상처 자국을 자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내가 이 죄악을 범했사오니"(시 51:4, 한글 개역 성경에는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만 되어 있다-역자 주). 그는 단순히 "내가 악을 행했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러한 악을 행했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피흘린 범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토머스 왓슨.
5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여러분의 죄악을 기탄없이 자백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발하라. (탕자처럼) 아버지께 죄를 자백하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 15:21). 하늘 법정에서는 지상의 재판정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판결이 진행된다. 기탄없는 자백을 들을 경우에 사람들은 그것을 정죄의 기회로 삼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죄인이 자신의 허물을 한탄하면 할수록 심판주의 진노는 더욱 누그러뜨려진다. 죄악은 하나님을 거스른 범죄이므로 공의의 징벌을 야기시키기 마련이지만, 일단 그것으로 인해 영혼이 상처를 입게 될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관대하심에로 인도한다. 그런 까닭에, 다윗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로 결심하자 그는 곧바로 죄사함에로 가까이 이끌렸다. "시인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용서하신다"(어거스틴). 주저하지 말고 자백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기꺼이 용서하실 것이다(요일 1:9). 죄에 대한 시인으로 하여금 마지막 자백이 되게 하라(힐러리)-네 죄를 고백하는 것을 거기서 떠나기 위한 의무로 여기라. 그리하면 그것을 바탕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아이작 크레이븐(Isaac Craven, Sermon at Paul's Cross, 1630).
5절. "내가 이르기를······자복하리라 하고." 죄사함받아 의롭게 된 자들도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이 점을 다룸에 있어 신속하게 답변되어야 할 물음들이 있다. 첫번째 물음은, 의롭게 되어 죄사함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신의 죄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자백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섯 가지이다. 첫째,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은 거룩한 자백은 죄인의 심령 속에 지대한 안락함과 거룩한 평온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죄악을 감추면 그 양심에 공포와 두려움이 생긴다. 둘째,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불평과 자백을 듣기를 즐겨하시기 때문이다. 목전에서 거짓말하는 것은 아주 지독한 행위이며, 하나님은 애통해 하며 입은 상복을 최상의 옷으로 여기신다. 셋째, 죄의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강렬하고 진지한 탄원을 재촉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6절 참조). 자백과 영혼의 관계는 숫돌과 칼의 관계와 같아서, 죄의 자백을 통해 영혼은 예리하게 연마된다. 죄악을 하나님께 자백하면 탄원이라는 칼날이 예리하게 서게 된다. 죄악을 제대로 자백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 역시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넷째, 죄의 자백은 그 마음속에 거룩한 뉘우침과 경건한 슬픔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시 38:18). 죄를 공표하면 뉘우침이 일어난다. 죄를 자백하면 그 양심에 죄가 되살아나게 되며, 이로 인해 수치심이 일어나 얼굴이 붉어지며 마음이 슬퍼진다. 다섯째, 은밀히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영예롭게 만든다. 내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게 되며 나 자신을 정죄하는 셈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영광을 돌리게 한다. 나는 죄를 자백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영광을 돌리게 한다. 죄의 자백을 통해 나는 하나님이 내 죄를 알고 계심을 시인한다. 여섯째, 죄를 자백하면 그 죄악에 대해 쓰라린 느낌을 갖게 되며, 자백을 통해 그 죄악으로 자기 양심에 되살아나게 하면 그리스도께 매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러브(Christopher Love, Soul's Cordial<1683>에서 요약함).
5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죄사함이 자백에 따른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르기를, '펙카비'(Pe-ca-vi)라는 세 음절('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는 뜻)이 그토록 큰 힘을 지닌 것이라고 하였다. -나다나엘 하디.
5절.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이 죄악이란 아마도 그가 밧세바와 간음을 범하고 우리야를 죽게 한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그분이 그의 죄뿐만 아니라 그 죄의 '악'마저 사하셨다고 말했다. 그 죄의 악이란 무엇인가? 그가 범한 죄악 중 가장 심각한 것이란 분명 위선으로 복잡하게 얽힌 죄악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저주스럽게도 그 죄악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을 기만하였다. 그는 자신이 흘리게 한 피보다 더 진한 색깔을 죄의 '악'이라는 표현에 입혔다.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죄의 극악성을 드러내고자 하심에 있어, 하나님께서도 죄의 사실 그 자체보다는 그 사실 속에 있는 위선에 더 비중을 두시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성결한 사람(다윗을 가리킴-역자 주)에 대한 증언 가운데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야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 15:5). 과연 다윗은 우리야의 일 외에는 그릇된 길로 발걸음을 돌린 적이 없었을까? 과연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일 외에 다윗이 행한 모든 일들을 인정해 주셨을까? 그렇지 않다. 분명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이 탁월한 여호와의 종이 미처 기억하지도 못했던 다른 죄악들도 기록하셨다. 하지만 다른 모든 죄악들은 여기서 희석되어 버리며, 이 죄악만이 그의 생애의 유일한 오점으로서 언급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모든 죄악들을 합친 것보다도 이 한 가지 죄악이 더욱 위선적이고 더욱 거짓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다윗이 여러 가지 그릇된 행실을 드러내긴 하였지만, 그 마음만큼은 정직했다. 하지만 우리야의 일에 있어서는 그의 양심이 심각한 상처를 입었고, 완전한 파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오래도록 기절당한 상태였다. 또한 그 은총이 손상당했을 때 그 상처는 더욱 깊어져 남아 있던 피가 그리로 흘러내렸다. 하나님은 냉철한 분별력을 지니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와 언약은 자신의 자녀를 이러한 상처로 인해 죽도록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고치시되 그 자리에 상흔이 남아 있게 하신다. 그 상흔은 죄에 대한 표시로서, 다른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위선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윌리엄 거놀.
5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우리는 사함받은 내용과 사함의 방식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사함받은 내용은 그의 "죄의 악"이다. 여기서 "악"이 '쿨파'(culpa)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푀나'(pœna)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쿨파'는 허물을, '푀나'는 징벌을 뜻하는 라틴어이다-역자 주). 혹자는 '푀남'(pœnam)으로 이해하여, 이 단어가 나단의 메시지를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그 메시지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진노의 타격을 다소 누그러뜨리셨지만, 자녀에 대한 징계의 일환으로 어느 정도의 징벌은 유효하게 하셨다. 그래서 압살롬으로 하여금 반역을 도모하여 다윗의 처첩들을 강간하도록 허용하셨다. 데오도레트(Theodoret)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쿨팜'으로 이해하고, 이 구절을 '쿨팜'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서 매우 큰 범죄에 대한 언급이라고 여긴다. 나는 이러한 견해들을 무시하지 않듯이, 이 구절이 자백 가운데 들어 있는 단어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백한 죄는 "페샤"([vp)이며, "죄의 악"이란 이 단어를 분석한 내용인 셈이다. 이는 "아온 하타히"(yhapj @w[)의 문자적 의미가 '나의 완악한 탈선'이기 때문이다. "하타아"(hafj)란 우리가 목표로 삼는 범위나 과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사람들이 지복을 목표로 삼지만, 대부분은 거기로부터 벗어난다. 이는 그들이 거기로 인도하는 법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법칙을 어기는 것을 가리켜 "하타아"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단지 무지로 인해 헤매다가 율법을 어기는 자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입법자께 순종하지 않으려 한다. 이 사람들의 죄는 '완악함'이라 불린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러한 죄를 사하시는 분으로 언급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에 의해 자백된 죄 그 이상을 사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바람 그 이상을 베푸실 수 있다. 우리의 영원한 영적 유익과 관련된 것이라면, 하나님은 항상 차고 넘치도록 공급해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자를 그 누구도 물리치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그분이 자백 대상에서 제외시키시는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서 레이크(Arthur Lake).
6절.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그분이 그런 하나님이심을 안다면, 누가 과연 돌이키기를 거부하거나 지체하겠는가! 이성적이고 경건한 모든 이들은 분명, 지체하지 않고, 그토록 온유하고 온화하신 주님께 호소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실 때,' 혹은, 히브리어 원문의 표현처럼,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그분께 기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용서를 약속하시는 분이 내일을 약속하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께 호소할 수 있는 특정한 때가 있으며, 용서와 은총을 얻게 되는 특정한 날이 있다. 만일 인간이 어리석은 완악함으로 그날과 때를 멸시하거나 게으름으로 그것을 무시하면, 그는 분명 영원히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고 말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홍수로 말미암아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이는 그가 예비되어 있는 구원의 언약궤를 경멸하고 조롱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은 멸망할지라도 그 언약궤 안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안전할 것이다. -로버트 레이턴.
6절.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주께 기도할지라"고 다윗은 말했다. "이로 인하여!" 무엇으로 인하여인가? 그의 죄악들로 인하여이다. 누가? 악인이 아니라 "경건한 자"가, 이런 측면에서, 기도할 이유를 발견한다. 무엇을 위해 그가 기도해야 하는가? 분명, 새로워진 용서를 위하여, 늘어난 은혜를 위하여, 그리고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전혀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윗과 마찬가지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시 143:2)라고 기도하자. 그는 비록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자신을 심판하시지 말 것을 그분께 간구드렸다. 그가 두려워하며 벗어나고자 기도한 것은 바로 심판에 처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로 나아가지 않기를 간구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리로 들어가지 않게 되기를 간구했다. -나다나엘 하디.
6절.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짐작되는 바에 의하면, 다윗이 심각한 타락에 빠진 후에 나단의 질책을 듣기 전까지, 그는 부주의하고 영적으로 마비된 상태로 지냈다. 그리고 종종 이것은 완악하게 만드는 죄의 속성에 대한 증거로서 제시되어 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그는 줄곧 마음속에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기꺼이 낮추려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정죄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을 지켰고,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적당히 변명과 핑계를 둘러대며 고통을 지나치려 애썼다. 하지만 은폐된 고뇌의 압박은 그의 평안뿐만 아니라 건강까지도 훼손시켰고, 심지어는 생명 그 자체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 마침내 그는 가장 심도 깊은 회개를 하기에 이르렀고, 무조건적인 자백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자신을 내어맡겼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주께 기도할지라."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모든 자들이 기도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가 사죄를 간구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사항이기도 하다:"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9-12). 그리고 이러한 기도는 사죄의 은총을 드러내시는 일과 관련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은총을 실행으로 옮기시는 일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윌리엄 제이.
6절. "경건한 자."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자이며, 그의 판단은 하나님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는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일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벧후 1:4). 또한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성호와 형상을 지니고 살아간다. 경건함이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토머스 왓슨.
6절. "기회." 어떤 행동을 하기에 가장 적절하고 만족스러운 때가 있는 법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히브리어상으로, 경우에 합당한 말이란 수레에 실린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적절한 시기는 마치 큰 유익을 주는 말을 실은 수레와 같다. 이는 행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때에 행해진 일은 근사하고 만족스럽다. 하나님이 시기적절하게 내리시는 비는 그 얼마나 흡족한가! 나무가 제때에 과실을 맺을 때, 그것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 마찬가지로, 천사들이나 사람들이 시기적절하게 어떤 일들을 행할 때,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한다. 적절한 시기가 있는 법이며, 만일 우리가 그 시기를 놓치면 취해진 행동이 달갑지 않게 되고 그 목표가 상실되고 만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만일 우리가 때를 분별할 지혜를 갖고 있다면, 적절하고 만족스러우며 효과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그린힐(William Greenhill).
6절.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과거의 사례들을 돌아보면 기도의 효력은 놀라웠다. 기도는 하늘로부터 우박을 내려 다섯 왕들과 그 군대들을 물리치게 하였다. 기도는 하늘의 창문을 닫아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가, 다시 그것을 열어 땅에 비를 가득 내리게 하였다. 기도는 태양을 멈추게 하고 그것을 15도나 뒤로 물러서게 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역병을 내리시려던 차에 기도로 말미암아 그 손을 거두셨다. 다른 도움이나 수단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기도만으로 강력한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렸다. 기도는 홍해를 갈라 그 물결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덮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도는 신실한 자를 이 세상의 모든 위험들로부터 구원하였다.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이를 요약하자면 이 세상의 어떤 재난이나, 이생의 어떤 곤경이나, 죽음의 공포나, 혹은 죄의 유혹 등이 제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경건한"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행복을 통해 그 모든 것들을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든지간에, 그는 영혼의 위안과 양심의 위로와 마음의 천국을 여전히 간직하며,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써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여기서 두 가지 사항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 중 하나는 위험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이다. 위험 상황이란 "홍수가 범람할지라도"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경건한 사람이 이생에서 직면하게 되는 환난은 세 부류로 묘사되고 있다. 첫째는 '물들'이고 둘째는 '많은 물들'이며, 또한 셋째는 '많은 물들의 범람 상태'이다(한글 개역 성경상으로는 이러한 세 부류가 잘 구분되어 있지 않다-역자 주). 그리고 구원이란 "진실로······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경건한 사람이 얻는 구원 역시 세 부류이다. 첫째는 그 홍수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 홍수가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그 홍수가 진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토머스 플레이피어.
6절.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신실한 자에게 닥치는 환난이 물에 비유되어 있다. 흔히들, 불과 물을 가리켜 무자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둘 중 물이 더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불은 물로써 끌 수 있지만, 물은 그 위력이 거세어지기 시작하면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의 환난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홍수"이다. "불행은 한 가지만 닥치는 것이 아니다"는 속담이 있다. 마치 거대한 물들이 함께 요동하며 밀려닥치듯이, 이생의 곤경 또한 그러하다. -토머스 플레이피어.
6절.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바싹 마른 수로들이 순식간에 넘쳐 흐르는 장면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신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와같은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들 중 하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코니비어와 하우슨(W. J. Conybeare, J. S. Howson, Life and Epistles of St. Paul).
6절.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는 난파당한 바울처럼 홍수에 휩쓸렸을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익사당하지는 않았다. 홍수가 아무리 거세다 해도 경건한 자를 함부로 집어삼키지는 못한다. -조셉 트랩(Joseph Trapp).
6절. "저에게." 이 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생략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강력하게 제기되는 반대 물음에 답변하도록 도와준다. 즉,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물을 잃고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으며 또한 마음의 근심을 당해 왔는데 어찌 범람하는 홍수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저에게"라는 말이 이 의문에 답하도록 도와준다. 철학자들 중에도-외경스럽고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말하건대-자신의 소유물을 손톱만큼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 자들이 있다. 제논(Zenon)은, 자신의 모든 소유가 풍랑으로 인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르기를, "운명의 신이여, 내게 외투만 남기시기를 잘하셨나이다"라고 했다. 또한 아낙사르쿠스(Anaxarchus)라는 사람은, 폭군 니코크레온(Nicocreon)이 그를 쳐죽이도록 명령했을 때, 그 핍박자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원한다면 아낙사르쿠스의 가방(그는 자신의 몸을 이렇게 지칭했다)은 치고 부수겠지만 아낙사르쿠스는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들은 자신의 소유물이나 몸을 그토록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마음을 높은 차원에 두었다. 그들은 이르기를, 어떤 사람의 마음이 바로 그 자신이라고 했다. 줄리어스 케사르는, 조타수 아미클라스가 폭풍우를 두려워하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이 겁쟁이 친구야,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너는 케사르와 같이 있음을 알지 못하느냐?" 그 말뜻인즉 다음과 같았다:케사르의 몸도 다른 사람의 몸과 마찬가지로 익사당할 수 있지만, 그의 마음과 배포와 용기 그리고 불굴의 정신만은 결코 폭풍우에 잠길 수 없다. 철학이 그 정도 수준이라면 신앙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이성과 윤리적 덕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지만, 신앙은 믿음을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여부를 판단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영혼이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속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몸이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속에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영혼의 영혼은 믿음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가리켜 신실하다고 하는지 알고자 한다면, 자연 상태인 그의 영혼에 입각하여 그를 이성적이라고 규정할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영혼인 믿음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하면 우리는 반대 물음에 대해 쉽게 답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홍수가 신실한 사람의 소유물이나 그의 몸에 혹은 그의 이성적인 영혼에 미칠 수는 있지만, 그의 믿음에는, 즉 그에게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토머스 플레이피어.
6절. 시편 내용 중 이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구절도 드물다. 그리고 주석가들로 하여금 이보다 더 다양한 해석을 내리게 한 구절도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라는 표현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해석한다:'그토록 추잡한 타락 가운데 처한 이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쉽게 용서받은, 이 사례를 통해 격려를 받아서.'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이를 경고의 의미로 해석한다. 즉, 경건한 자들은 다윗처럼 타락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의미가 어떠하든지간에, 이러한 해석들은 그리스도인이 이생에서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완전 상태에 처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로리누스와 카예타누스(Lorinus, and Cajetanus<1469-1534>, 닐에 의해 인용됨).
7절.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다윗은, 주를 가리켜 여러 은신처들 가운데 하나라고 혹은 하나뿐인 은신처라고 말하지 않으며,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라고 말한다. 이 본문의 표현은 너무도 탁월하다. "그분은 내 것이며, 나는 그분의 구원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라고 다윗은 말한다. "나는 그분께 인격적으로 간청을 드렸다. 나는 죄인으로서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피난처로 삼았다. 나는 그분의 날개 아래에 피하였다. 나는 그분의 의의 겉옷으로 자신을 덮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안전하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는 주님의 속죄 사역의 유익을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몫을 소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기 것으로 삼는' 믿음과 '사색적인' 믿음은 그 얼마나 다른가! 사람들은 이르기를 자신이 교리를 믿으며, 진리를 인정하며, 또한 우리의 신조에 동의한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인에게 도움과 안전을 제공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본문이 시사하는 개념을 밝히는 가운데,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범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위험성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황량하게 노출된 광야에서 폭풍우가 가까워오고 있음을 알아챈 여행자의 경우를 가정해 보자. 그는 피할 곳을 찾는다. 하지만 그가 폭풍우를 피할 곳을 눈으로 볼 경우에 가만히 서서 "나는 피할 곳을 보고 있으니 여기 계속 머무를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그가 거기로 나아가지 않겠는가? 폭풍과 비를 피하기 위해 달려가지 않겠는가? "은신처"가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하게 대피할 때에 비로소 그곳은 '그의' 은신처가 된다. 설령 그곳이 거기 모여든 수많은 다른 여행자들을 지켜 주었다고 할지라도, 만일 그가 그리로 가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그곳이 존재하지 않았던 장소나 마찬가지이다. 이 단순한 예화를 통해, 복음의 축복 역시 자기 소유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의사는 진찰을 의뢰받았을 때에만 치유할 수 있고 약은 먹어야 약효를 발휘할 수 있으며, 또한 돈은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만을 부유하게 만든다. 복음서 비유에 나오는 상인은, 매우 값진 보화를 발견하였지만 만일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취하지 않았다면 전혀 부유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의 구원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길르앗의 발삼"이시라면 그 처방약을 바르라. 만일 그분이 "의사"시라면 그분께로 가라. 만일 그분이 "매우 값진 진주"라면,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것을 사라. 그리고 만일 그분이 "은신처"시라면, 그곳으로 달려가서 안전케 되라. 그분이 여러분의 "은신처"가 되시기 전까지는 여러분은 확고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파운틴 엘윈(Fountain Elwin, 1842).
7절.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아마도 '도피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아담 클라크.
7절. "은신처." 키르케 화이트(Kirke White)는 이 단어에서 착안하여 아름다운 찬송을 지었다. 그 찬송은 "깨어라, 유다의 감미로운 하프여, 깨어라"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그 가사를 다 인용하기에는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Our Own Hymn Book, No. 381.
7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만일 우리가 "환난"이라는 번역에 만족한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들 중 하나를 기대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그분에게 속한 자들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품어주사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일들이 그들을 괴롭히지는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 10).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이러한 방식들을 모두 사용하신다. 때로는 환난을 멈추게 하사 그들로 고통당하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위해 사자들의 입을 막으시고 또 다른 이들을 위해 풀무불의 열기를 막아 주신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하나님이 고난당하는 자를 마비시켜 무감각하게 만드신다. 성 로렌스는, 불 속에 던져져 타들어가면서도 참을성 있게 견뎌내었을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며 익살을 부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많은 순교자들의 경우에 그들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자들이 정작 순교를 당하는 자들보다 더 고통스러워하고 동요하였다는 기록을 접한다. 다른 이들을 괴롭혔던 것이 결코 그 순교자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둘째, 비록 그들이 환난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지만, 비록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에서 환난을 당하도록 허용하시지만, 그분은 그들을 그 환난에서 지켜 주사 그것에 압도당하거나 영혼의 낙심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혹은 그분의 은총 가운데서 자신감을 얻게 하신다. 그들은 폭풍에 직면하지만 그 발 아래에는 튼튼하고 강한 배가 있다. 그들 앞에서 뇌성이 울리고 번개가 번쩍이지만 승리의 월계관이 그들을 지켜 준다. 그들은 경멸과 멸시로 짓밟힘을 당하지만 마치 땅에 묻힌 씨앗처럼 더욱 번성해진다. "주는······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라는 말씀은 우리의 헌신을 도와준다. 주께서는 나로 하여금 환난에 무감각해지도록 만드시거나, 혹은 그 속에서도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존 던(John Donne).
7절.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이 고백을 통해 선지자 다윗은 점차 자신을 일으켜 세우며, 예전에 토로한 바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넘어서고 있다. 즉, 그는 예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첫째, 하나님이 자신의 '은신처'라고 했다. 둘째, 그분이 그를 환난에서 보호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셋째로, 그는 여호와께서 환난 대신 은총으로 에우사 그를 기쁘게 하시며 환난과 원수들을 극복하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한다. 다윗이 "주는······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라고 말했듯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과 같은 다른 이들에게 베푸신 그분의 선하심을, 그리고 노아와 다니엘과 롯에게 베푸신 그분의 구원의 은총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바울처럼 자신에 대한 그분의 선하심과 구원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갈 2:20). 이러한 고백은 감사하는 마음을 북돋울 것이다. 반면에 여러분을 향한 그분의 선하심을 인정하지는 않고 단지 그분 자신의 선하심이나 다른 이들을 향한 그분의 선하심만을 인정한다면, 여러분은 투덜거리며 불평하게 될 것이다. -토머스 테일러.
7절. "나를 에우시리이다." 이는, 우리가 사방으로 환난에 휩싸이듯이 수많은 위로와 구원으로 에워싸이기도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십자가가 날마다 무거워지듯이, 우리의 위안 역시 날마다 늘어난다. 우리는 사방으로 공격을 받고, 또한 사방으로 보호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처럼 사방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를 발해야 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 103:1). -아치볼드 심슨.
7절. "구원의 노래." 그는 감사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그 감사를 "노래"와 결합시키고자 한다. 그의 마음이라는 활시위가 너무도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갖가지 구원들에 대한 찬양을 억누를 수가 없다. 하나님에 찬양을 드리면서 입을 절반쯤만 벌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이 집에서는 추한 발라드 곡을 큰 소리로 부르지만, 내가 확언하거니와 교회에서는 자신의 음성을 거의 들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큰 소리로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큰 찬양 소리로 인해 하나님의 귀가 먹기라도 하실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윗은 안팎의 온 힘을 기울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아치볼드 심슨.
8절.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KJV에서는 "내가 너의 갈 길을 훈계하고 가르치며, 주목하여 너를 인도할 것이다"라고 번역했다-역자 주.) 본문에 약속된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여기에는 믿음이 담겨 있으며, 이해력을 바로잡는 일이 언급되어 있다. KJV에 "내가······훈계하고"로 번역된 말이 원문상으로는, '내가 너로 이해하게 만들 것이다'는 뜻이다. 사람도 훈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작용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며, 이해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하나님은 마귀가 우상, 무당, 복화술사, 혹은 귀신들린 자 등에게 역사하듯 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마귀의 행동에 대해 자발적으로 협력하지 않으며 단지 수동적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역하게끔 역사하신다. 사람의 이해력이나 행동을 교정하시는 능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그 이해력이나 행동 자체는 사람의 것이다. 내가 '네게'(이 단수형 배분사는 아무런 예외가 없음을 시사한다), 곧 모든 사람들 각자에게, 훈계할 수 있는 역량을 줄 것이며, 만일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그의 탓일 뿐 내 허물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KJV 본문의 첫번째 부분은 하나님이 우리의 이해력을 교정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고 나서 두번째 부분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지침이 이어진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치며." 이는 어느 것이 길인지를 가르쳐서 그것을 발견하게 하신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그 길에 들어섰을 때 어떻게 줄곧 그 길로 갈 것인지를 가르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그 길을 걸으며 졸지 않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길을 걸으며 헤매지 않게 하시기도 한다. 따라서 이 두번째 부분은 앞에서 수정된 이해력을 통해 신념화시킨 것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끝으로, "주목하여 너를 인도할 것이다"는 말씀이 나온다. 세번째 부분은, 하나님이 끊임없이 살피신다는 확언이다. 그분은 우리를 배려하시며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실 것이다(원문상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분은 우리를 우연이나 운명에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일반 섭리에만 맡겨 두지도 않으실 것이다. 이 일반 섭리를 통해 모든 피조물들이 전반적으로 그분의 보호와 경영하에 있게 된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곰곰이 생각하고 배려하시며 또한 자세히 살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가장 예민한 기관이자 도구인 눈으로 감찰하시다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끼면 곧장 교정시키신다. 이 세번째 부분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관성과 오래 참으심과 관련된 것이며 영속적으로 미래와 관련된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눈으로 끝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눈이 감기지 않는 한, 우리는 그분의 시야와 배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실어야 하는 화물, 즉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 우리가 담당해야 하는 항해, 즉 우리가 어떻게 진로를 조종하고 다스릴 것인지가, 다시 말해서 신실한 자의 가정에서 취하고 나누는 행실과 대화가, 그리고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항구, 즉 천상의 예루살렘에 도착하리라는 우리의 확신 등이 이 도표 안에, 이 지도 안에, 이 지침 안에, 이 본문 안에 표현되어 있다. -존 던.
8절. "내가 너를 훈계할 것이다", "내가 너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라는 삼중의 반복(KJV대로 번역한 것임-역자 주)은 훌륭한 선생의 세 가지 속성을 가르쳐 준다. 첫째,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이해하게 한다. 둘째, 그들 앞서 행한다. 셋째, 그들과 그들의 길을 살핀다. -아치볼드 심슨.
8절. "길." 이 길을 다른 모든 길들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에게는 줄곧 이 길로만 행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 이유인즉, 첫째, 이것은 왕의 대로이며, 우리는 그 속에서 구원의 약속을 얻기 때문이다(시 91:11). 둘째, 하나님의 도가 가장 완전하기 때문이다(삼하 22:31). 셋째, 하나님의 도는 가장 정직하며, 정직하기에 또한 가장 지름길이기 때문이다(호 14:9). 넷째, 하나님의 길은 가장 즐겁고 명랑한 길이기 때문이다(잠 3:17). 따라서 하나님의 길은 가장 안전하고, 정직하며, 첩경이며, 또한 즐거운 길이므로, 우리는 그 길로 걷도록 주의해야 한다. -토머스 테일러의 글에서 요약함.
8절.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어떤 짐승들에 관한 자연 이야기(어느 평론가는 여기서 인용하고자 하는 내용을 좋지 못한 자연 역사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변경시키면 시사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본서는 유아용이 아니고 성인용이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우화 내용이 훗날에 가서 달라져 있다면, 이를 사실로 믿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를 읽어 보면, 그 짐승들이 단지 자기 알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것이 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플리니). 그렇다면 하나님의 눈이 우리 속에 생성시키지 못하는, 혹은 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암브로스) 어떤 사람이 말로는 칭찬하는 듯하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비난이 담겨 있을 수 있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억지로 좋은 의도를 주입시키려 한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계속 우리에게 눈길을 두신다면, 그것은 더 큰 칭찬이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눈을 지닌 분이시며, 죄인에게 눈길을 두시지 않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2).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머무는 영혼에게 있어, 봄은 얼마나 기쁘겠으며, 가을은 또 그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나를 굽어보시는 여호와의 눈길은 자정을 정오처럼 만들어 준다. 그것은 (천체의) 염소자리를 게자리로 만들며, 동지를 하지로 만든다. 여호와의 눈길은 모든 불명예의 어둠을 성결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영화롭게 해주며, 음울한 상태를 쾌활하게, 망설임을 확신으로, 그리고 서글픈 영혼의 시기심을 오류 없는 상태로 바꾸어 준다. 그분의 눈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그분께로의 회심과 그분과의 연합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결과로 나타난다. 먼저, 그분의 눈이 우리의 눈에 작용한다. 그분의 눈은 우리 눈으로 그분을 보게 한다. 이는 다음 구절 속에 표현되어 있다:"보라, 여호와의 눈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모든 이들 위에 있도다"(시 33:18을 KJV로 직역한 것임-역자 주). 그분의 눈은 우리의 눈으로 그것을 보도록 요청한다. 그리하여 우리 눈이 그분의 눈길을 요청한다······우물이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항상 올려다보듯이 우리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이러한 형상이 그분께로 돌이킬 때, 그분도 그 형상에로 돌이킴으로써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어떤 잘못이나 바람직스럽지 못한 일을 범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분의 눈길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른 또다른 위대한 결과는, 그것이 우리를 그분 자신께로 연합시킨다는 것이다. 그분이 자신의 눈을 우리 위에 고정시키시고 다시 그분께 돌이키는 우리의 눈길을 받아들이실 때,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눈동자"처럼 지키신다(슥 2:8).
그분의 눈으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르는 두 가지 큰 결과들은 바로 이러하다. 즉, 그분의 눈길은 우리를 그분께로 돌이키게 하며, 그러고 나서 우리를 그분 안으로 돌이키게 만든다. 먼저, 그분의 눈길은 우리의 눈을 그분께로 돌이키게 하며, 그러고 나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하나가 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난 중에 그분의 인내를 바탕으로 삼아 견디며, 우리의 불명예가 그분께도 해를 끼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될 때보다 더 안전한 경우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분의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핍박을 받는 모든 상황에서 그 모든 핍박자들에게 "왜 나를?"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분은 전능하신 권능으로 우리를 지키실 수 있는 것처럼, 자애로우신 눈길로써 우리의 억압 상황을 모두 지켜보신다. -존 던의 글에서 요약함.
8절.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KJV 난하주에는, "내가 네게 조언할 것이며, 내 눈이 네 위에 있으리로다"라고 되어 있다. 이 난하주는 히브리어 원문상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그 문자적 의미는, '내가 네게 조언할 것이며, 내 눈이 네 위에 있으리로다'이다. 데 베테(De Wette)는 이렇게 옮긴다:"내 눈이 너를 향할 것이다." 이는 특정한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지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일러 주는 상황과 관련하여 취해진 개념이다. 또한 그분은 이르시기를, 그를 살펴볼 것이며 그를 줄곧 지켜 볼 것이며, 또한 그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알버트 반스(Albert Barnes).
8절. "주목하여." 우리는 은총들을 가리켜, 전능자의 낯빛이 우리에게 향할 때 그분의 눈에서 나오는 광채로 여길 수 있다. 사람이 그 눈길의 인도를 받을 경우에, 그는 은총 가운데 자신을 지으신 분께 이끌린다. 하지만 우리가 만일 그 눈길의 인도를 거부한다면, 그 손으로 제지당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받은 바 은총을 남용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 은총을 베푸신 분을 망각한다면, 그리고 그분께 애정어린 경의를 기꺼이 돌려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재난과 곤경을 가하도록 강요하는 셈일 따름이다. 그러한 재난과 곤경마저 사실 우리를 위한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 앞에 슬픔이 너무 많이 닥친다고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그러한 슬픔을 자초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그분의 눈길은 아름다운 모든 것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며, 그 눈빛은 모든 어둠을 흩어버리고 모든 위험을 방지하며 또한 모든 행복을 두루 확산시킨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비통해 하고 불안해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두려움과 함정'이 너무도 자주 여러분에게 닥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분 주위에서 축복이 잇따라 사라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하시기를 마치 고집불통인 사람이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대하듯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사람들은 관대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만일 여러 은총들이 떠나버린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아직 남은 은총들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허물이 많았던가를 살펴보라. 그리고 만일 심한 제재를 받아야 할 정도로 우리의 완고함이 심각하지 않다면, 장래에는 그 부드러우신 눈빛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권고를 더욱 열심을 내어 순종하라. -헨리 멜빌(Henry Melvill).
9절.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이렇듯 극심하고 격렬한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발이 빠른 젊은 암약대"와 "광야에 익숙하며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리는 들 암나귀"(렘 2:24)에 비유한다. 시편 기자는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짐승들과는 달리 이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극심한 탐욕이 그들의 감각을 압도할 때에, 우리는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그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만일 하나님의 섭리의 굴레가 그들의 광증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성이라는 안장을 내던져버리고 제멋대로 성질을 부린다. -토머스 애덤즈(Thomas Adams).
9절.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이 두 짐승의 몇몇 특성들에 입각하여, 교부들과 다른 주석가들은 여러 가지 해석들을, 혹은 최소한 여러 가지 암시들을 제시했다. 그들은, 말이나 노새가 어떤 사람이 타든 혹은 어떤 짐을 싣든간에 구별하지 않고 또한 곰곰이 생각하거나 고려해 보지도 않고서 다 받아들이는 것으로 여긴다. 그것들은 자기 등에 탄 사람의 신분이 높은지 낮은지를 묻지 않으며, 그 등에 실린 짐이 금이든 시장에서 팔 근채류이든 묻지 않는다. 또한 그 해석가들은 이르기를,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도 죄의 종류가 무엇이든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쾌락을 위해 범죄하든, 이득을 얻기 위해 범죄하든, 혹은 단지 동료를 위해 죄를 짓든간에 어쨌든 죄를 짓는 셈이다. 노새의 경우에 그들은, 그 어미나 아비 중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열등하며, 그것은 말의 유전자보다 나귀의 유전자를 더 많이 지니고 있다고 본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행동과 생각이 하늘에 속한 요소보다는 땅에 속한 요소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성 제롬은 생각하기를, 말의 특성은 사납고 거세며 노새는 게으르다고 한다. 성 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 특성들에 착안하여, 말의 사나운 모습을 기독교 진리를 배척하는 이방인들에게 적용하고, 또한 노새의 게으름을 기독교의 초청을 받고서도 신속하게 응하는 법이 결코 없는 유대인들에게 적용한다. 해석가들은 이러한 암시 및 적용의 범위를 자신의 임의대로 한층 더 확대했다. 그들은 짐승과 죄인을 서로 비교할 근거를 나름대로 충분히 지니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짐승이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존 던.
9절.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사람의 부러진 다리는 쉽게 치유될 수 있지만 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보라. 말은 수의사의 치료를 가만히 받지 못한다. 따라서 다리를 고정시키려 하면, 다리를 흔들며 몸부림을 치고는 달아나고, 묶기만 하면 족쇄와 쇠고랑을 채우려는 줄 알고 한사코 발버둥친다. 반면에 사람은 기꺼이 외과의사의 지시를 따르며, 평생 절름발이로 지내기보다는 얼마 동안 옥살이 같은 생활을 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 1:4).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9절. "자갈과 굴레." "메헤그 와레센"(@srwAghm). 칠십인역은 이 두 단어 중 첫번째 것을 "칼리노이"(calinw')로, 또한 두번째 것을 "케모이"(khmw')로 각각 번역한다. "칼리노스"라는 헬라어는 말의 입 속에 집어넣는 쇠로 만든 재갈을 가리킨다. 그러나 "케모스"는 말이나 노새로 하여금 사람을 물지 못하게끔 씌우는 입마개 같은 것을 가리켰다. 크세노폰(Xenophon)에 의하면, 그 입마개를 씌운 말은 숨을 쉬되 입이 닫혀 물지는 못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런 장치를 잘 알지 못하므로 단지 입마개라고만 지칭한다. "케도브"(bfq)라는 동사는 군사 용어로서 '공격을 위해 진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까이 온다"라는 말은 해를 끼치기 위해 접근하는 것을 가리킨다. 시편 기자의 권고는, 은혜로운 하늘의 지침과 인도에 순복하라는 것이며, 또한 굴레만 씌우면 통 말을 듣지 않는 고집세고 다루기 힘든 망아지들을 닮지는 말라는 것이다. 만일 그 턱을 재갈로 고정시키지 않으면 그것들은 등에 타려는 사람을, 혹은 초장이나 마구간으로 몰고 가려는 마부를 향해 공격할 것이다. -사무엘 호슬리(Samuel Horsley).
9절.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KJV는 "그것들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이라고 번역한다-역자 주.) 야생 짐승을 고려할 때에는 KJV의 번역이 적절하겠지만, 나귀나 말의 경우에는 그러한 번역이 다소 미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발적으로 따르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으며, 줄곧 강요와 제재를 받아야만 말을 듣기 때문이다. -알렉산더(J. A. Alexander).
9절.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 그것들을 붙들기 위해서는 재갈과 굴레가 필요하다. 그것들은 자발적으로 너희에게 오지 않는다." -찰스 카터(Charles Carter, The Book of Psalms, 1869).
10절.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구 가운데에 중심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선들이 각기 원주를 이루고 있듯이, 건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원주를 이룬다. 그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혹은 행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로 초점이 맞추어지며, 그는 그분 주위로 원을 그리고 있다. -로버트 코드레이.
10절.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그는 인자하심으로 둘러싸일 것이다. 마치 사람이 공기나 햇빛으로 둘러싸이듯이. 그는 어디서나 인자하심과 은총을 발견할 것이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낮이나 밤이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나, 병환 중에서나 건강할 때나,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시간 속에서나 영원 속에서나. 그는 인자하심 가운데서 행할 것이다. 그는 인자하심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또한 그는 보다 나은 세상에서 영원한 인자하심 가운데 살아갈 것이다. -알버트 반스.
10절. 리처드 애드킨스(Richard Adkins)는 시편 32편을 그에게 읽어 주던 손자 아벨에게, "그 본문에 표시를 달아 두거라"고 말했다.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라는 본문에 표시를 달아 두거라. 나는 젊은 시절에 그것을 읽고 믿었는데, 이제 노년에 접어들어 그것을 다시 읽고 그것이 진실임을 알게 되었단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아벨아,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은 희로애락이 뒤섞인 세상 가운데서 참으로 복된 일이란다." -The Christian Treasury, 1848.
11절.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이 권면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즐거워하라'는 권고 내용. 둘째, '의인'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이라고 하는 대상. 셋째, "여호와를"(KJV는 "여호와 안에서"로 번역한다-역자 주)이라는 제한. 시편 기자는 세 차례에 걸쳐 권면한다: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즐거이 외칠지어다. 삼중의 축복을 언급했던 그는 이제 삼중의 기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찰할 필요가 있는 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 본성의 둔감성이다. 우리는 동작이 굼뜬 말처럼 여러 차례 박차가 가해지고 자극을 받아야만 영적인 일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육욕적인 일들에 몰두함에 있어서는 특별한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깊은 잠에 빠져들며 첫번째 고함소리를 듣고는 깨어날 수 없다. 술취한 사람을 일어나게 하려면 여러 차례 깨워야 하듯이, 죄의 쾌락에 취한 사람은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가 말했듯이, 여러 차례의 권고를 통해 일깨움을 받아야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하여 시편 기자는 33편에서도 같은 권고를 거듭 반복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다(빌 4:4). 둘째, 이 권고가 점차 깊이를 더해감에 유의하라. "기뻐하며"라는 말은 원문상 마음속의 내적 기쁨을 뜻하며, 최소한 바람직한 혹은 좋은 일을 만나거나 만날 소망으로 인한 기쁨을 나타낸다. "즐거워할지어다"는 말은 기쁨을 외적인 몸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때로는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시 65:12, KJV에는 "언덕들이 기쁨으로 뛰나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는 표현처럼 춤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즐거이 외칠지어다"는 말은, 마치 말을 할 줄 알게 된 벙어리가 감격에 겨워 노래하듯이, 기쁨으로 인해 탄성을 발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단계는, 영적 기쁨의 속성이 이와 같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즉, 영적 기쁨은 특정한 단계를 따라 증가하다가 마침내 완벽한 기쁨에 이르게 된다. 그 완벽한 기쁨이란 승리의 외침을 시사하는 마지막 표현에서 잘 나타나 있다. 영적 전투에서 죄와 사탄을 물리치고 대적들을 굴복시켜 승리한 자들이야말로 진정 회개한 사람들이다. -아치볼드 심슨.
11절.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지속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자뿐이다. 여러분은 죄악 가운데서 기뻐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은가? 그들의 기쁨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다. 혹은 곳간과 가방이 가득함으로 인한 기쁨에 대해 말하고 싶은가?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기쁨이다. 혹은 포도주나 미각을 돋우는 산해진미들로 인한 기쁨에 대해 말하고 싶은가? 그것은 혼돈의 기쁨이다. 전도서 2:3을 읽고 믿으라. 전도서 전체가 그러하지만, 특히 2:1-11까지는 시대를 초월하여 가장 신령한 철학을 담고 있다. -크리스토퍼 파울러(Christopher Fowler, Morning Exercises, 1610-1678).
11절.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인 카르파니(Carpany)가 친구인 하이든에게, 그의 교회 음악이 어떻게 그처럼 흥겨울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위대한 작곡가는 너무도 근사하게 답변했다. "나는 그렇게밖에 달리 할 수 없다네. 나는 느낀 바대로 곡을 쓸 뿐이야.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면 내 마음은 너무도 기쁨으로 가득하여 내 펜이 악보 위에서 춤을 추고 뛰논다네. 하나님이 내게 흥겨운 마음을 주셨으므로, 나는 흥겨운 심령으로 그분을 섬길 따름이라네." -John Whitecross's Anecdotes.
11절. 방탕한 사람은, "기뻐하라"는 말에 "여호와를"이라는 말이 첨가되면, 그것을 외면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이라는 환난 가득한 바다의 파도와 물결로 인해 "기뻐하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씀을 단단히 붙들 것이다. -헨리 아이레이(Henry Airay).
11절.
영광의 광채로 번쩍이는 왕께 노래하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아,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라
은종을 울리듯, 마음과 음성을 모아서
이날에 받은 위안을 노래하라.
-킨웰머시(Kinwellmersh,
무디 스튜어트<A. Moody Stuart>에 의해 인용됨).
11절. 시라쿠자 지역과 관련하여 툴리(Tully)가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일년 내내 그토록 심한 폭풍우가 몰아닥쳤지만 태양빛을 얼핏이라도 보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다윗의 모든 시편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의 시편들 속에서 거듭 불평을 토로하고 두려움과 억압 상황을 호소한다. 그러나 그 내용들 중 시꺼먼 절망의 흑암으로만 뒤덮여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표현들이 여기저기에 끼어들어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어느 시편의 초두에서는 물 위로 던져진 노아의 비둘기처럼 불안한 심경이 토로되지만, 그 말미에 가서는 마치 감람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돌아온 비둘기와 같이 위로를 주는 내용이 나온다. 또다른 시편에서 우리는 육신적 두려움에 압도당한 채 낙심 가운데서 방황하는 기자의 모습을 발견하지만, 마음을 사로잡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자신을 다시 회복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러한 고백 내용은 육신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을 한층 넘어서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마치 끊임없는 폭풍과 격렬한 물결에 의해 까불리고 깨어져가는 표류 상태의 배와 같은 그의 모습을 보지만, 그를 뒤흔들고 동요시켰던 것들이 결국에는 그를 안전한 해안으로 실어다 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해안에서 그의 배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떠 다닌다. -윌리엄 스퍼스토(William Spurstowe).
힌트
1절. 복음의 축복. 시 1편을 32편과 함께 놓고서, 그 교리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을 조화롭게 섞어 보라. 혹은, 1편과 32편 그리고 41편을 함께 모아 놓고서, 그 내용을 읽고 그 힘을 느끼며 또한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실천해 보라.
1절. ‘복음의 축복들.’ (1) 그것을 지닌 자의 원래적 상태. (2) 받은 바 유익의 특성. (3) 그것을 얻는 경로. (4)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
1, 2절. 죄의 특성과 용서 방식.
2절. 정죄를 당치 않는다는 놀라운 교리. 그것을 입증하고 설명하며, 또한 활용하라.
2절. “간사가 없고.” 용서받은 자의 정직한 마음.
3절. 자신의 슬픔을 스스로 지니고 있음. 소심함과 낙심 가운데 빠지기 쉬운 자연스러운 경향. 그 위험. 슬픔을 토로하는 방법. 그렇게 하도록 격려함. 자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복된 자. 속으로 한탄하는 자가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이다.
3, 4절. “힘겨운 확신과 자상하신 구원”(“Spurgeon’s Sermons,” No. 313).
4절. 확신을 지닌 영혼의 슬픔. 하나님이 주야로 힘겹게, 쇠약하게, 그리고 파멸을 당하게 하심.
4절 하반절. 영적 가뭄.
5절. 온전한 자백의 은혜로운 결과들. 혹은, 성경적으로 설명된 자백과 사죄.
6절. 경건한 자에 관한 성경의 묘사. -토머스 왓슨.
6절. 한 사람의 체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됨.
6절 상반절. 은총의 날을 활용하는 법.
6절. 죄사함은 다른 모든 은총들에 대한 보증임.
6절 하반절. 임박한 환난, 탁월한 구원.
6절 하반절. 신실한 자의 지복. -토머스 플레이피어.
7절. 위험을 느끼고, 은신처를 감지하며, 보전을 요청하고, 또한 기쁨을 체험함.
7절 상반절. 죽음과 심판에 마주할 때, 죄와 사탄과 슬픔으로부터 은신처가 되시는 그리스도.
7절 중반절. 환난에서 보호되는 성도들.
7절 하반절. 원을 이루는 노래-그 원을 그으시는 분, 그 원주가 의미하는 바, 그리고 그 중심에 계신 분.
7절. “구원의 노래.” 죄악, 지옥, 죽음, 대적들, 의혹, 시험, 사고, 음모 등으로부터의 구원. 신령하신 선생, 그분의 학생들, 그들이 받는 강의, 그들에게 주어지는 징벌과 상급.
8절. 눈의 힘.-헨리 멜빌. 여기서 그는 유아 세례와 감독 제도를 입증하고자 헛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성경이 이들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지만 암시하고는 있다고 시인했다.
9절. 하나님의 재갈과 굴레, 그것들을 필요로 하는 노새들, 그리고 우리가 그들 가운데 속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
9절. 우리는 말이나 노새보다 어느 정도나 더 나은가, 혹은 얼마나 더 못한가?
10절. 죄로부터 비롯되는 수많은 슬픔들. 가장 심한 환난의 때에도 신자를 에워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악인의 몫과 신실한 자의 운명.
11절. 신자의 기쁨. 그 근원:“여호와를.” 그 활력:“외칠지어다.” 그 정당성:그렇게 하도록 명령됨. 그 복된 결과들과 풍부한 이유들.
11절. “마음이 정직한.” 교훈적인 표현이다. 마음이 비굴하거나 굽혀지거나 혹은 기울어지지 않고, 올곧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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