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타락 구속/월터스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이란-
세계관에 대한 개혁주의적 사상은 20세기 들어오면서 독특한 형태를 띠고 나타났는데, 이것은 특별히 카이펴, 바빙크, 도에벨트, 볼렌호벤과 같은 화란 지도자들의 저작 속에서 두드러진다. 나는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려고 한다. ?사물들에 관한 기본적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 나는 사물들이란 말을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세계, 인간의 생명, 고통의 의미, 가정의 중요성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기본적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사물들 가운데 포함된다. 그리고 세계관은 신념에 관련된 문제이다. 그리고 세계관은 기본적, 즉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궁극적 문제들, 일반 원칙적인 문제들과 관련한다. 그런데 그 세계관 내의 기본적 신념들은 구조나 틀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
세계관의 기능-
세계관의 기능이 있다. 나침반 또는 지도의 역할을 한다. 인간은 세계관이 제공하는 이와 같은 방향 감각이나 인도 기능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세계관은 우리으 견해나 논의 뿐 만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되는 모든 결정 과정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느 대립되는 신념들을 소유할 수 있다. 세계관 내에 비 일관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비일관성은 오랫동안 방치될 경우 통합성(정신적 건강)의 상실을 가져올 것이다.
성경과 세계관의 관계-
성경의 가르침의 범위는 노동, 사회,교육과 같은 일상적인 세속적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문제들이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성경적 범주에 기초한 세계관에 의해서 접근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영역들은 세속화된 서구의 지배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정복될 것이다.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독특성은 “은혜가 자연을 회복한다”는 핵심적 통찰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구원의 전체적인 핵심은 죄로 타락된 창조계를 구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개혁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은혜가 자연 이외의 어떤 것을 포함하게 되며, 그 결과 구원은 기본적으로 비 창조적인, 초창조적인, 심지어는 반창조적인 어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창조계에 가져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거룩한 영역에 속하며 원래의 창조계들은 세속적 영역에 속한다. (제 생각에는 은혜는 창조 이상입니다. 창조의 회복이며 그것을 넘어선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창조를 창조때의 하나님의 경륜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보는 지는 모르겠지만, 은혜는 단순히 창조로 돌아가는 것, 창조를 되찾는 것만은 아니라, 이 글에서 표현한 초창조적인 면이 있다고 믿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자녀,새창조, 구원은 창조+알파라고 보는 것이 반드시 비개혁주의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창조
창조란-
창조에 대해서는 1. 세계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행위 2. 결과된 우주로서의 창조된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규정행위의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법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가 창조의 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의 법이면서 규범이다. 그래서 강제이면서 간청이다. 또한 일반법이면서 개별법이다. 왜냐하면 그 타당성의 범위가 전체적이면서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제 1 창조와 제 2 창조-
신학자들은 무로부터의 창조(제 1 창조)와 아직 형상이 주어지지 않은 땅에서 실재의 정교화와 완성화(제 2 창조)를 구별한다. 이런 의미에서 창 1:2의 혼돈하다는 것은 형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 형상이 왜곡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창조의 범위-
창조의 범위는 전체적이다. 우리의 존재와 행위의 모든 것이 그 전체에 걸쳐 피조된 것이다.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한계와 적절성, 표준과 기준을 발견한다.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서 그 일들을 행하는 올바른 길이 있고 잘못된 길이 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창조된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일반계시-
일반계시가 있다. 우주의 구조 속에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가 있고, 그 지혜에 동조, 순응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지혜”이다. 창조계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일반계시)가 함축하는 한 내용은 창조 질서가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모든 사람에게 대한 지혜의 초청 의미이다.(사 28장 잠 9장)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
그리고 성경이 있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특별계시 성경)와 그의 작품을 통한 계시(일반 계시) 사이의 관계의 이해를 돕는 2 가지의 이미지가 있다. ?안경?이미지와 ?전등?이미지이다.
노안이거나 흐릿한 눈 또는 시력이 약한 눈을 가진 사람은 가장 아름다운 책이 그들 앞에 제시되었을 때 그것이 모종의 책이라는 것은 알아보지만 겨우 한 두 단어나 해석하다가 안경이 주어지면 분명하게 읽게되는 것 처럼, 성경이 그것이 없었더라면 혼란스러웠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을 모아주고 우리의 우둔성을 흩어버림으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을 깨끗하게 보여준다. (기독교 강요 1.6.1)
성경은 우리가 고개를 돌려 보려고 하는 세계마다 그것을 비쳐주는 광부의 전등과 같은 것이다. 전등이 없으면 그들은 무기력해지기 때문에 그들의 주의는 전등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일하는 동안에 그들의 주의는 전 등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암석에 가있다. (이 외에도 청사진의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성경의 빛이 그만큼 도움을 주고 필수적인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창조계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일반계시)는 언어적이 아니다.
창조된 땅-
땅의 창조는 갓 탄생한 건강한 어린 아이와 같다. 모든 면에서 어린 아이는 매우 좋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사실이 그가 변화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아이가 어린 상태에 그대로 머무른다면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어린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성숙해야 한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아직 어릴 때에 치료법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만성 질병에 걸렸으며 아이는 질병에 걸린 채로 자라고 있다고 그리고 질병이 그의 몸을 여의게 한다고 가정해보자. 아이가 청년기에 가까워지는 동안 그의 몸에서는 두 가지 뚜렸하게 구별되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 분명하다. 그 하나는 질병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성장과 성숙의 과정으로 그것은 자연적이며 정상적이며 좋은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질병의 발전으로서 그것은 그의 몸의 건강한 기능을 위축시키고 저해한다. 이런 어린 아이가 청년기에 도달했을 때 그 병의 치료책이 발견되어 아이가 천천히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하자. 아이가 성년기에 접근하는 동안 이제는 제 3 의 과정 즉 치료의 과정이 그의 몸 안에서 진행될 것이다. 치료는 질병의 작용에 대항하고 해독시키는 과정으로 그 목적은 그 젊은이로 하여금 건강한 성년기에 도달하게 하려는 것이며 이 치료의 과정을 통해서만 건강한 육신의 정상적인 작용이 있게 될 것이다.
->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계획하셨던 발전의 단계에 아직 이르지 못했었다.
미래적 땅과 이 세상의 문화-
땅의 실체의 문화적인 영역이 약속된 영광스러운 새 땅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 사실상 성경은 반대쪽을 암시한다. 새 땅을 예루살렘으로 묘사하면서 요한은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고 들어오리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고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4,26)라고 쓰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도가니 속의 금처럼 심판의 불 속을 통과함으로써 정화될 인류의 문화적 유산들을 가르키는 것일 것이다.
새 땅-
헤르만 바빙크가 제시한대로 새 땅에서의 사람의 삶은 이 땅에서의 삶과 비교해 볼 때 마치 번데기에서 나온 현란한 빛깔의 나비와 같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번데기와 나비는 극적으로 달라졌지만, 같은 생물인 것이다. 창조계가 원초의 과거에서 종말론적인 미래로 발전하는 것을 가장 적절하게 상징하는 것은 아마도 성경이 동산에서 시작하여 도성“만국의 영광과 존귀”로 가득한 도성으로 끝난다는 사실인 것이다.
선한 창조계-
창조계는 선하다. 창조계가 선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줄곡 가정해온 다른 사실 즉 법의 지배가 하나님의 피조물 특히 남자와 여자들 편의 어떤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오히려 그들의 자유롭고 건강한 기능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타락
타락의 본질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열매 자체에 죄의 독소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시험하여 생명나무로 표현된 더 안전하고 복된 상태로 끌어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 나무가 상징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지키면 선을 알게 되고, 그 반대 개념으로-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악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도무지 선을 맛볼 수 없고, 다만 악을 경험하고 그 반대 개념으로 선을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선악과가 가르치는 바대로 선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악이란 말씀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이 성경의중심 사상임을 성경의 다른 예들이 확증해 준다.
타락의 결과
타락의 범위-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할 뿐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 대한 관계도 내포되어 있었으므로 언약의 파괴는 그 모든 관계의 풰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타락의 현장만 살펴보더라도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데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옷을 지어입고 자신의 죄를 하와에게 전가하는 데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땅도 저주를 받고 가시와 엉겅퀴를 냄으로 농사를 방해한데서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가 풰손되었음을 각각 목도하게 된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정도에 자신이 이르지 못함을 질책하기도 하며, 때로 스스로로부터희 소외감도 느끼게 되었다. 자기 소외감은 인간 생활의 전체성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구조와 방향, 이원론 비판-
죄와 피조계와의 관계를 좀 더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 도에벨트의 구조와 방향의 용어를 생각해 보자. 구조란 창조시 제정된 질서를 언급하는 것으로 서양철학의 실체,본질, 본성 등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며, 방향이란 이와 대조적으로 창조계의 어떤 것이 하나님을 향하는가 그 반대를 향하는 가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로서 가변적이다. 이 방향은 개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현상, 사회제도에도 적용되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는가 혹은 그 반대를 향하는가를 가리킬 떄도 사용된다.
우리는 타락으로 자연계에까지 큰 영향을 받았지만 여전히 창조계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타락으로 매춘이 생겨났으나 그것이 성의 아름다움을 없애지 못하는 데서 타락의 기생적 성격도 살펴보았다. 이런 것을 구조와 방향의 용어로 다시 설명한다면 타락으로 창조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방향이 반신적(反신적)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릇된 이원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계의 일부를 지적하여 인간의 반신적 방향을 지적하기 보다는 그것을 인간 드라마의 악동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이나 결혼, 신체 등을 그 자체로서 악으로 간주하는 경우이다. 또한 이와 정반대로 하나님의 구조의 일부의 어떤 것-영혼 교회 등-은 그 자체로서 선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이지 인간 본성의 실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육신 자체를 악으로 생각할 때는 예수님의 성육신에도 커다란 오해가 생기게 된다. 또한 교회 생활만은 경건한 것, 정치 및 사회생활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은 구조와 방향을 혼동한 것들로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준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사탄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으나 사탄의 그러한 지배가 창조의 구조까지 바꾼 것이 아니라 기생적으로 붙어있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기생적이라하여 죄의 결과가 결코 덜 심각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피조물이 큰 탄식과 고통으로 구 속의 날의 기다리고 있다.(롬 8:22) 또한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현재에도 그의 진노를 쏟고 계시며(눅13:1-5,요 3:18) 장래에는 불신자들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케 하실 것이다.(계 21:8)
구속
창조계의 구조 전체가 타락한 것은 아니라 방향이 반신적으로 바뀐 것이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결과는 온 우주에 미치는 것이었고,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현재에도 임하여 있고 장차에도 임할 것이기에 그 비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꼐서 타락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셨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간에게 1. 먼저 찾아오셔서(엡 2:1,2) 전과 같이 행위에 의하지 않고 2. 은혜에 의한 계약을 맺으셨다. 타락의 현장에서 창 3:15의 원시복음을 주시고 이 말씀대로 3.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셨고 4. 성령님께서 그 구원의 사실을 적용시킴으로 우리의 마음은 새롭게 되어 하나님께 향하게 되었다.
회복-
혹자는 이교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구원 내지 저 세상에서의 구원을 이야기하나 주님의 구원의 목적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는 말씀대로 인간의 범죄로 왜곡된 창조의 본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만유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성경의 구원을 나타내는 단어가 모두 회복을 나타낸다는 사실에서 더 확증된다.
하나님의 나라-
이중성취는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가르치시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친데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중적으로 이뤄가시는 과정 속에서 인간을 구속하셨기에 그 과정 속에서 세 시제가 나타난다. 과거에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고, 현재에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있으며, 미래에는 육신까지 완전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각 시제마다 다른 구원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원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 면을 지닌다는 세 시제의 동일성이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취도 역사 내에서 성취되는 단게에 의한 구분이지 두 가지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복귀가 아니다-
만물의 회복과 관계하여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이것이 에덴동산으로의 복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문화 명령은 역사적 과업으로서 타락 후에도 계속 창조의 잠재력을 비록 왜곡된 형태로나마 개발함으로 성취되고 있다. 마치 유년기에 심한 질병에 걸린 아이가 청년기에 나았다하여 그의 몸을 유년기의 상태로 되돌려 놓으려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죄악으로 인한 문화 활동의 해악 때문에 문명을 원시 상태로 되돌려놓으려 할 것이 아니고 현재의 상태에서 말씀에 응답하도록 개혁해야 할 것이다. 또한 타락 후에도 만물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에 반응하기 때문에 악한 제도 속에도 보존될 것이 있다. 따라서 전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역사 상황 속에서 왜곡된 규범적 요인을 찾아 거기서부터 개혁할 것이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구조에 대해 살펴보고 그것이 타락과 구속으로 어떻게 방향이 바뀌었으며 어떤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살펴보았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시 형성(form)하신 것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왜곡(deform)되었으며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개혁(reform)되어야 할 지를 생각해 본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국가, 가정, 학교, 기업 등 사회 제도나 공격성, 성령의 은사, 성, 춤 등을 파악하는데 유용하며, 생활의 모든 면(약속 지키기, 사랑 베풀기의 개인적 측면뿐만 아니라 광고, 노동관리, 교육, 기업 경영, 정치 등의 사회 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도록, 그 전쟁이 바로 영적 전쟁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로이 클레멘츠
1. 원숭이와 주교
인간은 자연적 진화의 산물인가, 아니면 신의 창조의 산물인가? 타임머신이 발명되기 전에는 상상과 입증불가능한 가정에 깊이 의존하지 않고는 아무도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자연적 진화를 지지하는 증거는 그렇게 압도적이지 않다. 새로운 생물 분류법인 분기학은 최근 들어 많은 전통적 진화의 역사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기원의 문제에 대한 성경의 명확성을 과장하면서 창세기의 처음 몇 장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는 아담과 하와가 등장하는 창세기 2장에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그들이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사냥꾼들이 아니라 정원사들이었다. 그들은 유목민처럼 방랑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한 곳에서 정착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기원전 만 오천년 혹은 이만년에 살았던 신석기 문화가 밝아오기 전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공룡이나 네안데르탈인에 관한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하여 창세기는 침묵의 장막을 친다. 이책에서 우리도 그와 같이 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인간의 의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 기계인가? 동물인가?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는 동물계와 연결되어 있고 화학적으로는 무기물의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물론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동물 모델과 기계 모델에 전혀 맞지 않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들이 있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 특징은 자의식과 상상력이다.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을 충분히 유의미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유비 뿐이다. 다른 어떤 유비도 다른 어떤 모델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에 의한 ?존엄성?이다.
3. 동산에서의 과학
다스림 : 인간은 주변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담은 일꾼이었다 : 일은 저주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인간의 주권적 다스림, 곧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본받은 인간에게 맡긴 지배권의 결과이다. 일은 선한 것이며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대가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게으름은 인간 삶의 목표가 아니다.
아담은 과학자였다 : 아담은 동물의 이름을 지었다. 모든 과학은 근본적으로 이름을 짓는 일과 연관된다. 힌두교, 뉴에이지 운동, 범신론적 세계관에서는 결코 과학이 발생할 수 없다. 20세기에 와서 과학과 기술이 그렇게도 무서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우주의 왕으로 생각한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창세기가 인간의 지배감에 항상 동반되어야 할 것으로 지적한 책임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4. 매우 중요한 조건
하나님은 인간이 모든 것을 즐기기 원하셨다.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제한 없는 자유라는 거대한 궤도를 허락하셨다. 금욕주의와 반물질주의는 모두 창조 교리에 대한 이해의 결여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너희는 자유롭다. 그러나???”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이에 대해“아니요, 나는 자유롭습니다.‘조건’같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자주 인간 자유의지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뜻 밖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은 실제로는 인류의 수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자발적인 순종이라는 특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동의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정해 주신 허용의 범위 안에 거하는 한 자유롭다. 충족감과 만족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5. 우리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
남자 혼자만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다. 오래전에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교리를 변호하면서,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영원 전부터 그 분에게는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사랑은 인격적인 관계의 맥락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라고 그는 주장했다.
기쁨을 위해서 두 사람이 필요하다
결혼은 인간의 존재 속에 축조되어 있다. 우리가 가정이라고 부르는 이 복합적인 관계는 우연한 샤회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이다. 존엄성, 다스림, 책임, 관계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은 아직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곧 처참하게 부서질 형상이었다.
제 2 부 타락
6. 낙원의 황혼
우리는 낙원데 대한 신념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문턱에 서 있지만 용기를 잃어벼렸다. 인본주의자들과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낙관주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신념을 축으로 하고 있다. <국부론>에서 아담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푸줏간 주인이나 빵집 주인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의 양식을 기대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경제 체계를 세우려고 한다면 죄에 대하여 현실적이 되는 것이 좋다고 아담 스미스는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갈망, 더욱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갈망이 마치 망령처럼 인류를 애타게 하는 것 역시 사실이 아닌가? 이 갈망은 무엇인가? 이것은 단지 절망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유토피아의 꿈에 불과한가? 이제 성경은, 그 갈망이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망령과 같은 갈망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인류의 기억이라고 말한다.
7. 죽음에 이르는 함정
낙원을 배경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뱀이 말을 한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이었다. 좀더 뒤에 나타난 성경 구절들로 미루어보아 여기서 뱀은 악마적 지성의 대언자 노릇을 하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허용하신 넓은 범위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다는 것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의 목적은 반역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여자의 최초 대응은 확고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이 우둔한 동물의 잘못된 정보를 정정하려 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지식이 뛰어나고 또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마귀와 대화를 트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당신은 그를 변화시킬 수 없지만 그는 당신을 매우 쉽게 타락시킬 수 있다. 사단은 처음에는 그 명령을 내린 하나님의 잔인함을 불평하고 다음에는 우리가 그 명령을 어겨도 그 분은 우리를 정죄할 만큼 잔인하지 않다고 설득함으로써 단숨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하심을 동시에 부인한다. 여기에 사단의 일차적 전략이 있다. 즉 하나님과 그 말씀의 신실성에 대한 의심의 씨앗을 심어 주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신이되라! 이런 식으로 모든 혁명의 악독한 논리가 일어난다. 이것이 모든 인본주의의 저변에 흐르는 포로메테우스적 교만이다. 그들의 태도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사람에게 영광! 그가 만물의 주인!이라는 식이다.
신체적, 미적, 지적 욕구에 대한 삼중 유혹을 주목하라. 사람들은 흔히 정욕을 과도한 육체적 열정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정욕에 희생되는 부분은 사람의 성경과 재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물론 여자를 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영혼을 파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평등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영혼을 팔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싸구려 심리 치료의 태도이자 “플레이보이” 잡지의 철학이다. 나의 자유로운 표현을 막는 것, 나의 행동에 제동을 가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자기 성취야말로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표이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아담은 결혼 관계에서의 자신의 책임을 포기하였다. 그녀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따라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주의 지배자로 창조하셨지만, 우리는 해파리처럼, 도덕적 무척추 동물처럼 행동한다. “육신이 약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보다 더 맞는 말은 없을 것이다.
8. 거대한 붕괴
수치심
뱀의 주장에는 어는 정도 왜곡된 진실이 있었다. 그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라고 바울은 말한다. 갑자기 온갖 새로운 가능성들이 그들의 상상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감추려는 초라한 시도로 자신들의 몸을 가린다. 그들의 심리적으로 서로를 방어한다. 갑자기 그들은 자기만의 은밀함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두려움
그들은 서로를 피해 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도 숨어야 할 별도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창피해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변명
이 이상한 악이 어디로부터 왔을까? 이것이 아담의 논리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창3:12)다른말로 하면“하나님 당신의 잘못입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당신이 그 원인입니다.” 가끔 제안되는 또 다른 대답은 이원론이다. 이원론은 서로 반대되는 동일한 두 세력-즉 하나님과 악마-이 우주에 존재한다고 본다. 사실 성경은 이 두가지 대안적 해답을 전부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죄의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원론이 거부된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사단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두기를 거부한다. 우리 인간이 악의 기원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던 것처럼 변명거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을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인과 관계나 논리의 범위 밖에 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바로 이것이 요점이다. 그것은 괘씸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그것을 했소. 그것은 나에게서 시작되었소. 내가 악의 기원이요.”
심판
의미심장하게도 인간에게 가장 큰 충족감을 주어야 하는 출산과 노동이 고통으로 얼룩지게 된다. 그러나 이 고통은 단지 죽음의 서곡일 뿐이다.
9 에덴의 동쪽
창세기 저자의 평가에 따르면, 자신의 환경을 도시화하려는 인간의 야망 속에는 사악한 음모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산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된 우리는 스스로 대안을 세우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도시는, 서툴게 만든 우리의 에덴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자연 가운데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나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벽돌과 희반죽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제거해야만 했다. 창세기 5장의 긴 족보를 따라가 보라. 그러면 각 단락의 끝에서 불길한 북소리처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어구를 발견할 것이다. “그가 죽었더라…그가 죽었더라…그가 죽었더라.” 어리석은 아담이 들여오고, 살인자 가인이 확증한 도덕적 타락이 이제 악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소름끼치는 악의 광경에 대한 나나님의 대응을 주목하라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이 비록 하나님을 패배시키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고통으로 찢어 놓을 수 있음을 시간과 역사 속에서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제 다시는 세상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을 그대로 방치해 두기만 해도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위한 세상을 신속하게 저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궁극적인 두려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홍수 때문에 동방으로의 진행이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그 방향이 바뀌지는 않았다.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대안적 유토피아인 에덴의 동쪽에 집중하고 있다. 바벨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 없는 야망의 원형적 상징이다. 진보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인간은 환경을 다스리기 위해 부여받은 자신만의 독특한 지적 은사를 활용하여 바벨탑을 지었고, 이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명령하신 바와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을, 왜 만들었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다. “우리를 위한 도시를 건축하자”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 이름을 내자.” 아담이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저항하며 자신의 길을 추구하는 인류의 모습이다. 인간의 능력에 대한 인본주의자의 주장에는 부풀린 것이 없다. 만약 사람이 어떤 한 가지 목표에 자신의 마음을 일치하여 집중시킨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은…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흩어짐을 마치 하나님의 심판인 것처럼 취급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그것이 심판이라는 암시는 없다. 본문은 하나님이 분노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술의 진보가 인간에게 지울 어리석은 짐을 하나님이 걱정하셨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것은 응보의 행위라기 보다는 자비의 행위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지혜로운 아버지가 불로 뛰어드는 어린 아들을 제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기서 인간의 창조적인 에너지가 자기 파멸의 길로 향하는 것을 막으셨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열망, 가치관, 문화가 언어와 함께 분산되었다. 더 이상 진리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민족주의적 대립이 불신, 의견의 불일치, 경쟁심을 키우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기술 혁명이 더욱 느리게 진전될 것을 의미했다.
바벨이 혼란은 임시 변통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조만간에 인간의 교만이 다시 한 번 위험한 상황에 도달할 것을 아셨다. 언어의 분산은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대책이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을 쓰신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있었으니 곧 구원 계획이다. 하나님은 즉각적인 위험을 막으셨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관심은 그 흩어진 모든 민족 중에서 한 가족에게 집중된다. 그것은 아브라함이라고 불리는 셈족 중 한 사람의 가족이다. 흥미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여행 방향이다. 하나님은 그를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보내셨다. 아브라함은 바벨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벨은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였다. 신약 성경은 아브라함이 전혀 다른 도성, 하나님이 건축하신 더 나은 기초를 갸진 도성을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제 3 부 구속
11. 마스터 플랜
성경은 영원 전 아득한 때 하나님이 이 위대한 계획을 세우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대한 지성의 가장 깊은 곳에 보관된 채로 수천 년 동안 그 비밀이 엄격하게 유지되었다. 그 마스터 플랜의 전체를 거의 망라하는 것이 로마서 8장이다.
12. 우리의 도덕적 딜레마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마스터 플랜에서 과거 시제로 되어 있는 측면, 곧 죄책에 대한 그 분의 치료책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성취하신 이 일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캐더린 대제가 물론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 것이다. 용서하는 것이 그 분의 일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소문났듯이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그 말처럼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의 뜻이 요구하는 바를 드러내 준다. 하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시기 때문에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신 5:17,20). 하나님은 바울이 로마서 8:4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요구”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쏟고 계신다. 원래 성경은, 우리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며 우리의 도덕적 무능력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인데, 성경은 이 도덕적 무능력을 고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에게 성경이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을 예상하게 하기 위함인데, 이 심판을 되돌리기 위해 성경 그 자체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는 우리의 죄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위대한 세계 종교들-특히 뉴에이지 운동과 함께 세력을 떨치고 있는 저 동양 종교들-과 다른 점이다.
13.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그가 죽으셨다”
바울은 여기서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마치 일종의 감화력인 것처럼 해석하려고 한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우리는 삶을 질서있게 만들기로 작정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감동시켜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일종의 사랑의 모델이 된다. 물론 이런 생각에도 일리는 있다. 십자가는 강력한 정서적 상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극적인 능력에 진한 감동을 받고 변화되었다.
사랑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있는 방식으로 상처를 다룬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를 벌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다고 해서 나의 의로움에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의로움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내가 직접 내려와서 그들이 당해야 할 형벌을 당했다. 나는 그들의 죄를 이미 나의 아들에게 담당시켰다.“ 십자가는 정신적인 협박이 아니며 비합리적인 행위도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죄를 가능하게 하는 곳이다. 이제 당신은 그 대답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바로 로마서 8장에 그 대답이 있다. 하나님은 죄책을 치료하셨다. 마스터 플랜은 실행에 들어갔고, 오늘 당신과 나는 그 계획의 수혜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확보하신 정죄로부터의 해방을 받기 위하여 믿음의 빈손을 내밀기만 하면 된다.
14. 행하는 믿음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가,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도록 힘을 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했다면, 이것은 그가 로마서 의 앞부분에서 주장한 것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겍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해지는 비결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제사를 통하여 정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을 오순절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성령을 부활절과 훠씬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전파에 조종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 즉 하늘로부터 오는 신호를 통해 모든 행동을 초자연적으로 지시받는다는 생각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사죄와 존재의 갱신이 함께함을 보여 준다. 당신이 그것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
15. 새로운 관계, 새로운 신분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그 두 가닥을 연결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책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을 제어한다. 우리 삶에서 죄의 세력을 깨뜨리는 열쇠는 마음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두는’ 곳이다. 만약 당신의 삶 속에서 죄의 세력을 정복하는 법을 알고자 한다면, 그 대답은 더 좋은 것들, 더 고상한 것들, 더 선하고 거룩한 것들로 당신의 마음을 채우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신 심오한 진리는 부성이야말로 신성의 가장 절대적이며 근본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제 4 부 새창조
16. 소망의 삶
누가 옳다고 생각하는가? 낙관주의자인가, 비관주의자인가? 그리스도인의 논쟁이 대개 그렇듯이, 그들은 모두 옳으면서 동시에 모두 틀렸다. 하나님의 계획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ㅏ 죽으심으로 이미 그 일부가 실행되었다. 제3의, 아직 성취되지 않은 단계가 남아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아직’의 부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불멸을 고백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교적인 교리다. 그리스도인들은 몸의 부활을 믿는다. 당신은 그 차이를 아는가?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샤프츠베리의 성경주의는 사회적 양심을 마비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혁에 대한 그의 열정을 지속적으로 자극했다.
17. 고통을 직면함
우주는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으며 ‘썩어짐의 종 노릇’ 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하는 독특한 위치로 회복되어 창조자의 형상을 입고 그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다스릴 때까지 우주는 그것 참된 의미를 회복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 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아주 명백한 증거는 없다. 성령의 성례적 표시인 세례도 우리에게 아무런 외적인 표지를 남기지 않는다. 우리의 육체적인 상태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다. 실제로, 소위 우리의 영적인 생활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그리스도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궁창에 빠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별들을 바라본다.
18. 실패할 수 없는 계획
바로 지금 현재의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난’이 정상적인 경험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로 하여금 그건 십자가를 지는 일을 요구할지라도, 그것은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악의에 찬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위대한 계획은 결코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좌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전능과 무오한 지성에 의하여 입안되었다.
약한 연결고리가 없음
황금 사슬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시키는 다섯 단계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리 아셨고
하나님은 그들을 예정하셨고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셨고
하나님은 그들을 의롭게 하셨고
하나님은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첫째, 이 각 동사들의 주체가 누구인지 주목하라. 언제나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둘째, 각 단어들의 시제를 주목하라. 과거시제다.
셋째, 이 다섯 동사의 목적어를 주목하라. 동일한 무리의 사람이다.
어떤 능력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지 못한다.
희랍어 디아볼로스는 중상자라는 의미이다. 나는 마귀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못박게 충동했을 때 마침내 자신이 인류의 결정적인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에 그렇게도 많은 것을 투자하신 하나님이 마지막 순간에 마귀의 고소 때문에 훼방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하여 단호하시다.
19.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우리의 문명은 방황하는 별이 아니라, 떨어지는 별 아래서 태어났다. 목숨을 바칠만한 대의가 모두 무너졌다. 마르크스 주의가 무너진 지금, 무엇이 남아있는가? 내가 단언하건대 뉴에이지 운동을 위해 죽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행복과 장수를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기 위한 것이라면 지나친 노력이나 희생이 있겠는가? 그 영광은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는 것, 곧 죽음을 생명으로, 덧없음을 영원으로 바꾸는 불꽃이다. 기독교는 결코 무미 건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모험으로의 초대이다.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 하나님은 우리 중 가장 연약하고 추한 자를 택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정력과 기쁨과 지혜와 사랑이 고동치는 빛나고 눈부시고, 영원히 죽지 않는 피조물로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완전하게 반영하는 밝고 흠없는 거울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것을 위하여 존재한다. 하나님은 그 이외의 다른 것으로 끝을 맺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숨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제 가서 왕을 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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