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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쿰란 사본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by 은총가득 2021. 12. 30.

쿰란 사본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1.<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2.<쿰란 사본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3.<쿰란사본들>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4.<사해 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5.예수의 탄생은 기원 1년인가

6.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인인가

7.알파벳은 언제 생겼는가

8.유럽 사조의 근본은 무엇인가

 

 

 

 

 

1.<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금세기 중엽에 그노시스 세계, 헤브라이즘 세계 및 헬레니즘 세계에 있어서 각각 극히 중요한 대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즉, 첫째 1946년(1945년이라고도 한다)에 나일강변의 한 촌락 나그.하마디(카이로의 남쪽 약 570킬로,옛 케노보스키온)에서 그노시스파의 서고를 발견했고, 둘째로 뒤에 말할 1947년의 사해 사본의 발견이며,셋째로, 크레테섬 크노소스 및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선문자 B가 1952년에 영국 건축가 마이켈,벤트리스(1922-1956)에 의하여 해독되고, 이것이 기원전 1400년대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라는 것이 판명된 일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다. 1947년 봄(1945년 이었다고 한다) 사해의 북서부 사막의 구릉지대 쿰란에서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이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염소를 찾기 위하여 한양치기 청년이 반 쯤 허물어진 벼랑의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무엇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그 청년은 사촌 형제와 함께 그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좁은 동굴 속에는 항아리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항아리 여덟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일곱 개는 빈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의 항아리 속에는 큰 두루마리 한 권과 작은 두루마리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를 결국 베들레헴의 고물상에게 넘어가고, 그 해 12월에 예루살렘의 헤브라이 대학이 이 세 두루마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그후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투인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고 매년 계속해서 발견이 있었다. 와디,쿰란 지역의 동굴 발견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1956년에 발견)이었으며,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1Q,Qumran Cave1)에서 11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그 밖에 와디,므라바트 지역의 동굴, 킬베트.밀드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들,그리고 킬베드,쿰란과 아인.페스카 폐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해 사본 또는 사해 문서라고 부르는 것은,1947년에서 수년 간에 걸쳐서 사해의 서북연안과 서안에 펼쳐져 있는 <유다의 황야>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고사본들을 말한다. 발견한 장소나 사본의 내용과 성격 등은 여러가지이며, 그 정리와 분류는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간행된 사본과 단편들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1) 와디.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2) 와디.므라바아트(쿰란의 남쪽 약 16킬로미터,예루살렘의 동남남 약 24킬로미터)지역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 단편들(대부분은 2세기 전반, 특히 유대인의 대로마 제 2차 반란(AD 132-135년)시대에 속하는 것이며, 이 반란의 지도자 발,코호바에 관한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3) 킬베트.엘밀드(예루살렘의 동남쪽 약 14킬로미터)지역의 유적(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에서 발견된 신약성서의 사본 단편들(AD 5-8세기에 속하며, 쿰란 사본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4) 아랍인 베투인들이 가지고 온 출저 불명의 사본 단편들.
이것들 종에서 사해 사본이 중심이 되는 것은 (1)의 쿰란 사본들이다. 사본의 종류는 6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두루마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10권 이상이 되며, 특히 동굴 1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전권(54난의 양피지로 돼있으며,전장 7.34미터,폭 평균 26센티미터,각 난은 평균 30행.이사야 66장이 전부 들어있다)과 동굴 4에서 발견된 키므엘기는 귀중한 것이다. 사본들의 연대는 대개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쿰란 종단의 본거지가 로마군에게 점령된 기원 67년에 걸쳐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본은 대부분이 구약성서의 사본이다. 대부분의 두루마리 연대는 성서의 사본도 쿰란 종단 문서도 기원전 2세기말 이후, 특히 기원 전후의 그시게에 속한다 <사해사본>중에서 오래된 것은 와디.므라바아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이며 기원전 8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발견된 많은 사본이나 파편을 양피지, 파피루스 ,동판,오스트라카 등에 기록되어 있다.

 

 

2.<쿰란 사본들> 은 무엇을 말하는가

쿰란 사본들은 구약성서 정전.외경,주해서 및 쿰란 종단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의 종교 문서로 나뉘고,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다음 네가지 문서로 대별된다.

(1) 구약성서 정전의 사본들(단편을 포함)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되고 에스델기를 제외한 구약 각서가 있다. 신명기 이사야서,소예언서,시편등의 사본은 10종 이상이 된다. 주요한 것은 성마르크 수도원 소유의 <이사야서>의 두루마리(완본)와 헤브라이 대학 소유의 <이사야서>단편,<시편>단편 등이다.
(2) 구약성서의 외경(또는 위경)
여러가지 단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가장 많은 것이 요엘서,에녹서 등이다.
(3) 구약성서의 주해서
창세기,시편,이사야서,호세아서,미가서, 나훔서,스바니야서,하박국서 등의 주해서의 단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하박국서 주해서는 가장 흥미 깊고 중요한 것이다.
(4) 쿰란 종단의 종교 문서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의 종교 집단의 조직, 목적 계율,의식 등을 기록한 <종규 요람><종단 계율제요>라고도 한다. <회중규정>,<축복기도문>,<감사의 시편>등의 예배식문에 속하는 문서, 그 밖에 <빛의 아들들의 싸움의 규칙>,아람어로 된 <외경 창세기>등이 있다. 그리고 1952년 3월에 발견된 동굴 3 속에서는 성전의 보물표와 그 숨긴 장소등을 기록한 이른바 <동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으나 이 리스트가 성전의 보물이었는지,또는 쿰란 종단의 재산이었는지,아니면 허구적인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굴 1에서 남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폐허는 오늘날 킬베트,쿰란<쿰란의 폐허>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이미 1851년에 F.두.서씨에 의하여 답사되었고 <사해사본>의 발견과 함께 이 폐허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서 56년까지에 6회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도미니코파 성서학원 원장 롤런,두.워 신부와 요르단 왕국의 고적 보존국장 G.L.하딩의 지도 아래 킬베트.쿰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그 전모가 밝혀졌다.

3.<쿰란의 폐허>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두.워 원장이 얻은 결론에 의하면 ,킬베트,쿰란의 역사는 다음에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1) BC 8-7세기(철기시대 제II기)
(2) BC 2세기말-AD 68년까지
(3) AD 68-90년경 (로마군의 점령)
(4) AD 132-135년(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반란시에 유대인 저항군이 점거)

(1)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벽의 일부와 토기,오스트라카(ostraca)의 단편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2)의 시기에 속하는 유적은 쿰란 종단의 본거지로서 공동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건물은 북서쪽 구석에 견고한 성루가 있는 30미터 * 37미터의 장방형 건물이며, 안뜰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작은 방이있고, 집회실, 사경실,식당,부엌 등이 있다. 그리고 부근의 와디.쿰란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7개의 저수조, 6개의 욕실 등이 있고, 이것들은 쿰란의 종단의 교리나 생활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쿰란 종단이 형성된 것은 요하네.하르카누스(BC 135-104)시대였던 것 같다. 그후 기원전 31년에 이 근처 일대는 대지진을 만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건물의 균열로 알 수 있으며, 프라비우스.오세퍼스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쿰란 사본들을 만들어 낸 쿰란 종단은 그후 재건된 것 같다.
이곳은 기원전 4년의 헤로데 대왕의 죽음에서 기원 7년경까지 사이에 재건되고 건물의 개축이 있었다.
(3) 의 시기는 유대 반란 제 3년에 시작된다. 출토품 중에는 반란 제2년과 제 3년의 날짜가 새겨져있는 화폐 70여매와 로마군의 화살촉 등이 들어있다. 로마군은 1세기 말까지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4) 의 시기에 속하는 층에서 출토된 로마의 화폐에 의하면 로마 점령군이 약 10년간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후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이유대인의 제2차 대로마 반란(AD 132-135)때에 발.코호바를 수령으로 하는 저항군이 일시 이곳에 진를 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워는 건물의 동쪽에 있는 묘지들을 시굴했다. 또 제분소,빵 굽는 곳, 도기 공장 등의 작업장도 발견했다.
이상의 모든 점으로 봐서, 이 폐허는 유대교의 어느 종교 집단의 본거지이며, 종단의 구성원은 부근 동굴이나 천막에 있는 일시적인 건물에 살면서 이곳을 도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4. <사해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종규 요람> 에 의하면,쿰란 종단의 단원은 자원해서 인적이 떨어진 이 유대 황야에 모여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며 메시아의 내림을 기다리는 종단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사경은 그들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여 구약성서 각서 및 구약성 외경의 대부분이 양피지, 파피루스,동판 등에 필사되어 남겨졌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좁은 의미의 성서학이나 성서 고고학 분야 뿐아니라, 특히 유대교의 공인된 교정본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구약성서의 본문 비판학은 물론, 기원전후의 유대교 역사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교섭, 원시 그리스도교단과 유대교와의 관계 등의 제 분야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국제적인 협력체제 아래 계속되고 있다.
쿰란 종단의 단원들에 의하여 필사된 구약성서의 사본들은 세계 최고의 것으로 높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나베.샤난<고요한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 위에 있으며 22에이커의 부지에 60년의 역사를 가진 옛 베자렐 미술관 (주로 유대인의 민속 자료,슈나고게의 비품등의 종교 사료,16-20세기의 근대 서구 미술작품)과 성서,고고학 박물관(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고고 출토품)을 포함한 본관과 사해 문서들을 소장한 고문서관이 있으며, 그 중간에 현대 조각을 배치한 조각 정원으로 돼있다.
그 밖에 창고, 연구실, 수복용 시설 등이 있다. 이 조각 정원의 설계가 그 규모 면에서 전후 최대인이 이스라엘 박물관은 1964년에 창립되고 이듬해 1965년에 개관했다. 그 내용은 광범위해서 고고학적, 미술학적, 민속학적 제 요소와 근대 미술관적 제 요소를 겸비하여 인류 문화유산을 통해서 미래의 전망을 하게 하는 총합적인 민족의 미술관이다.

박물관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고문서관>에는 사해 문서 및 기원 2세기의 발.코호바의 반로마 봉기 관계의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고문서관은 지상으로는 흰 돔과 장방형의 검은 외벽을 보일 뿐이고 중요한 부분은 지하로 들어가 있다. 그 내부는 이중의 포물선 돔으로 돼있으며, 그것은 굴곡이 있는 거대한 항아리 같이 생겼다. 소용돌이 치는 굴곡은 천장 꼭대기에 있는 약 1.8미터의 구멍까지 위로 뻗혀 있으며, 그 구멍에서 하늘 빛이 실내로 비쳐 들어온다. 고문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재현해 주는 것 같은 설계와 구조의 건물이다.

5. 예수의 탄생은 기원 1년인가

현재 우리가 보는 역사서는 연대를 표시하는데 서혁 기원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원1년으로 하고 그 이전을 기원전 (BC.Before Crist)로표시하고, 그 이후를 기원후(AD.Anno Domini)로 표기하고 있다. 이것은 남러시아의 스키티아 지방에서 출생한 6세기 로마의 수도이사이며 연대사가인 죠니 시우스,엑시구스(497년경-550년경)가 525년에 로마 교황의 명령을 받고 <부활절>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글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탄생 기원을 채용하여 확립하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 건국 754년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이 기원법은 9세기가 되어 프랑스 왕국 카로링왕조 제2대 왕 칼 대제(742-814)시대에 다른 기원법보다 결정적인 우위에 두게 된 이후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년표에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전 4년경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정확하다면 서력 기원법의 전체 체계는 기원전에 관해서는 4년을 빼고 기원후에 관해서는 4년을 가해야 한다. 그 근거는 차치하고 실제로 예수가 탄생한 것은 후일의 연구에 의하여 기원전 6년경에서 기원전 4년경 사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는 오랜 습관대로 이것을 편의상 그대로 상요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동시대의 다른 인물에 비해서 비교적 정확한 편이지만,예수의 탄생에 관한 사료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과학적 검토에 족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소극적이긴 하지만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나 그 이전이라고 주장하는 연대의 연대학의 성과를 인정하고 있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2장 1절이하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 왕 때(BC 3-74)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고 했으며 헤롯왕의 유아 학살의 명령을 피해서 이집트로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누가복음에도 로마황제 어거스투스 시대(BC 27-AD14)에 전 로마 제국의 인구조사 칙령이 있어서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갈 때 유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남쪽 약 9킬로미터에 있는 도시이며 다윗왕과 관계가 깊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해서가 아니라,예수가 다윗의 호순으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다윗과 인연이 있는 베들레헴이 예수의 탄생지로 전해졌다고 한다. 마가복음 12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 자신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또 예수의 생애에서 베들레헴은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또 예수의 탄생지는 지중해와 갈릴리 호수의 거의 중간에 있는 갈리리아의 도시나사렛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나사렛은 예수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도시였다.
아무튼 마태,누가 양 복음서의 탄생 기록은 예수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왕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헤롯이 유아 살해령을 내렸다는 기록은 헤롯이 그 만년에 로마 황제의 신뢰를 잃고 그 결과로 헤롯은 광기가 들어서 많은 육친까지도 살해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고,그것은 구약성서 위경의 모세의 승천 6장 이하에도 나타나있다. 누가복음의 탄생 설화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탄생을 모두 헤롯왕 시대라고 했다. 그리고 <클레니오(로마의 귀족 스루피큐스.퀴리노)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에 한것보다 이전의 국세조사>때였다고 한다.

 

1세기의 유대 역사가 프라비우스.요세퍼스(37년경-100년 이후)의 <유대 고대사>나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5장 37절 등에 의하면 클레니오가 유대에서 인구조사를 한것은 기원 6년이다. 아마 이 인구조사는 몇년에 한번씩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칼타고 태생의 그리스도교 호교론자로 유명한 텔트아누스(160년경-220년이 이후)의 <마르키온에 대한 반론>4-16에 의하면 사르투르니누스가 시리아의 총독이었을 때(BC 9-6)에 인구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4세기의 로마 역사가 문법학자 마크로비우스(340/360년경-?)에 의하면 어거스투스가 동시대인 헤롯이 자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2세 이하의 남아를 모두 학살한 것을 엄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마크로비우스에 의하면 예수는 평화 정책을 써서 각지의 신망을 얻고 로마 황제 어거스투스(그는 헤롯왕가의 유대인에게도 우호적이었다고 한다)시대와 헤롯왕 시대에 탄생한 것은 분명하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의 활동의 시작은 30세경이며,그는 그 만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30년경에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지방 총독 본디오 빌라도(26-36)에 의하여 극형,즉 십자가형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 확증되고 있다. 이 해부터 역산하면 예수의 탄생은 기원 전후가 된다.
한편 헤롯은 기원전 4년의 과월절 전에 요르단강 하류의 서쪽 여리고에서 죽은 것이 역사적으로 확정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기원전 4년이후는 될 수 없다고 한다. 여러가지 점을 고려해서 예수의 탄생은 기원전 6년에서 기원전 4년 사이라고 추정된다.
인간 예수의 짧은 생애는 그 죽음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으나, 예수를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 =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원시 그리스도교단 안에서 형성된 전승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삼일만에 부활했음을 전하고 있다.

6. 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인인가

각 복음서에 의해서 묘사돼 있는 예수상은 차이가 있으나 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예수>란 헤브라이어 인명 예수아 또는 예호수아(여호수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예수스이다. 사도행전 7장 45절,히브리서 4장 8절에는 모세의 후계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예수>로 기재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야훼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며, 인명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기원 1세기의 프라비우스.요세퍼스나 파피루스 문헌등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10명이 넘었다고 하니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꽤많았던 것이다. 골로새서 4장 11절에도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라는 예가 보인다. 마태복음 27장 16절에는 <예수.바라바>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리스도>Christos (<크리스도>또는 하리스토스>라고도 표기된다>란 그리스어의 동사 크리오 chrio(<기름 붓다>란 뜻)에 유래하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뜻이며, 헤브라이어의 마시아하,아람어의 메시하,즉 그리스,라틴어형의 메시아스 Messias에 해당한다(요한복음1장 41절 4장 25절).

 

기름 특히 향유는 고대에는 귀한 것이었다. 올리브유의 용도는 여러가지였으며, 기름에 유향을 섞어서 태워 향기 예물로 바치거나(레위기 6장 15절),기름은 번영의 표시이며(신명기 8장 8절,예레미야서 31장12절),귀중한 상품으로 수출됐다(느헤미야기 5장 11절,에즈라기 3장8절),또는 기름은 융성(신명기 33장 24절),기쁨(시편45편 7절,히브리서 1장 9절)의 상징이 되며,기름이 떨어지는 것은 비애를 나타내는 것이었다(요한계시록 6장 6절).

돌 벼개를 벤 야곱은 천사의 꿈을 꾸고 깨어서 그 돌을 세워서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창세기 28장 18절,이것은 가나안 종교의 특징의 하나인 신성한 돌을 숭배하는 흔적이다), 사울,다윗 그 아들 솔로몬드 제사장 아론,예언자 엘리사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사야서 45장 1절에는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고 했으며, 이방 페르샤의 왕 큐로스가 구약성서에서는 왕의 칭호인 <메시아>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큐로스가 유대인을 바빌로니아 포로 생활에서 해방했기 때문이며 이 호칭이 당시 일반 민중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원래 보통 명사였으며 복수형도 있었을 것이다.<그리스도.예수>또는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칭호>인 예수 (인명)>라는뜻이다. 그리스도는 나사렛의 예수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목수였던 요셉을 가장으로 하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구약성서를 읽고 주의 사람들에게도 요셉의 아들로 인정받고, 나사렛에서 교육을 받아 성인이 되었다. 모친 마리아는 카톨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모친>으로 숭배되고 있다. 예수에게 여러 동생들이 있었다. 사해 문서는 예수가 태어난 배경을 전해주고 있다.

7. 알파벳은 언제 생겼는가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최대의 유산은 알파벳과 헤브라이즘일 것이다. 전자는 실용적인 유산이며 후자는 정신적인 유산이다. 먼저 알파벳의 정의부터 해보자.

알파벳이란 말의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즉 표음 문자를 가리키며, 이런 글자가 일정한 순서로 배열된 자모표 이다. 원칙적으로 1장 1음을 표기하는 것이다. 4항에서 말한 것처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구분은 우선 글자의 사용 여부로 할 수 있다. 오리엔트에서는 기원전 3천년대에 이미 글자가 사용되었다. 즉,메소포타미아의 (슈메르인의) 쐐기글자와 이집트의 신성 문자가 그것이다. 양자가 모두 독자적인 표의 문자이며, 각기 극히 복잡한 구조와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기나 신관 계급등의 독점물로서 신성시되었다.

한편 이러한 서기제도는 대 신전이나 대 궁전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의 산물이었다. 이 글자들은 처음은 그림 글자에서 발달한 것이었으나 거의 원형 그대로 일부 표음 문자로 바뀌어 갔다. 이렇게 해서 글자는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함께 발달했으나 지금부터 약 2천년전에는 읽혀지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미 기원전 2천년경부터는 가나안인은 쐐기 글자와 신성 문자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가나안 글자의 창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기원전 1500년 경에 <시나이 그림 글자>가 나오고 이것이 알파벳의 직접 조상이 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인의 발명한 글자를 페니키아인,아람인,이스라엘인 들이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 각지에서의 무역 활동 상의 필요 때문에 표음화된 이집트 글자를 근거로 해서 독자적인 간략한 표음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지중해를 통해서 그리스.로마로 전달된 알파벳은 유럽인의 글자로서, 즉 라틴 글자의 알파벳으로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라틴 글자의 알파벳 없이는 유럽 문화는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나안에서는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처럼 거대한 중앙집권 국가는 성립되지 않았다. 가나안 사회의 중심은 상인층이었다. 그들에게는 왕후나 신관과 같이 서기를 양성할 경제적인 힘은 물론 없었으나 문자를 신성시할 필요도 없고 문자를 오직 실용적인 기호로 바꾸어 사용해갔다.

별표에서 보는 것처럼,첫 글자는 <숫서 머리>를 뜻한다. 숫소는 가나안어로 <알프>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글자도 <알프>로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 <알프>는 <숫소>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순히 <아> (엄밀하게 말하면,<아>를 발음하기 직전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 라고 하는 첫 소리를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10세기의 비문에는 이 <숫소의 머리>가 이미 양식화 되어 두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어 있었다. 이 글자가 180도 회전하면 고대 그리스 글자(BC 8세기)의 알파가 되며, 이것을 90도 회전하면 라틴 글자 A가 된다. 둘째 글자는 <집>을 뜻한다. 이것은 가나안어의 <집>을 나타내는 <벳>의 첫 소리 B음을 나타낸다. 이 그림 글자는 기원전 10세기에는 한 획으로 쓰는 글자가 되고 그것을 180도 회전한 것이 고대 그리스 글자 베타가 되고 그 베타의 윗부분 획이 이어져서 라틴 글자 B가 됐다고 한다.

알파벳이라는 명칭 자체는 그리스.알파멧의 처음 두 글자 알파와 베타에서 나온 것이며, 그 어원은 가나안어의 <숫소의 머리>와 <집>에 유래한다. 고대 이스라엘인은 가나안이게서 알파벳을 배우고, 이것을 독자적으로 헤브리어 글자로 발전시킨 것이다.

8. 유럽 사조의 근본은 무엇인가

전항에서 우리는 유럽인의 오리엔트에서 받아들인 유산의 하나, 즉 실용적인 유산인 알파벳의 기원을 살펴봤으며 다음은 정신적인 유산인 헤브라이즘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헤브라이즘이라는 것은 원래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고나 행동속에서 자라난 것이며,고대 이스라엘인의 유일 인격신 야훼 신앙에 유래하며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되고 신의 의로움과 사랑을 근본 원리로 한다. 헬레니즘(그리스 사상 문화)과 함께 유럽 정신의 전통을 형성하여 온 2대 사조의 하나이다.

영국의 문예 사회 평론가 머슈.아놀드(1822-1888)가 평론집<교양과 무질서> (1869)에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논한 이래, 이 양자가 유럽사상의 2대 원류로서 파악되게 되었다. 보통,헤브라이즘은 인간중심주의의 헬레니즘과 대비해서 논의되는데 그것은 구약성서에 근거한 헤브라이적 사유의 특질을 나타내는 경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된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으로 대별된다.

노르웨이의 신학자 트리프.보만(1894-)은 그 저서<그리스도인의 사유와의 비교에 의한 헤버라인의 사유>에서 헤브라이인과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의 구조적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헤브라이인의 사유벙밥의 특색은 동적이고 힘차고 열정적이고 자주 거의 폭발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비해서 ,그리스인의 사유방법은 정적이고 온화하고 절도를 중히 여기고 조화를 사랑하는데 있다. 헬레니즘이 이성적 과학적 미적인데 비해서 헤브라이즘은 의지적 윤리적 신중심적 인생관 세계관이고 그 특색이다.

 

예수가 언제 어디스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자세히 알아 내기는 사료의 제약으로 극히 어려운 일이지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유대인의 편협한 선민 사상도 부정하고 하나니의 사랑과 공정을 믿었고, 그것을 유대교의 전통적 문화의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보면 변경지인 북쪽 갈릴레아를 거점으로 해서 도시와 마을을 순회하면서 동포에게 전했다.

그리스도교는 일면으로는 유대교를 모태로 해서 그것을 계승하고 다른 면으로는 그것을 변형 발전시킨 것이다. 유럽인이 받아들인 헤브라이즘은 신약성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에 의하여 계승된 고대 이스라엘인의 사상인 것이다.

4세기 후반부터 게르만인이 고전 고대의 세계로 침입하여 이른바 헬레니즘,헤브라이즘,게르마니즘의 융합이 시작되고 역사의 담당자가 로마인에게서 게르만인으로 바뀌고,그와 함께 무대도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 유럽으로 이동하고 역사 개체로서의 유럽이 형성된다.

 

사해사본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번역자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부딪치게 된다. 1장 “히브리어 본문의 상태”에서 필자는 우리에게 전해진 히브리어 본문에 우연한 실수나 고의적인 본문 변경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성경 번역자는 변경된 본문까지 회복해가면서 번역을 하게 된다는 점을 밝혔다.

구약성경 번역의 대본이 되는 히브리어 본문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마소라 본문」을 일컫는 것이다. 비록 「마소라 본문」의 전신이었던 「전(前)마소라 본문」이 기원전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기원후 7세기이므로, 「마소라 본문」이 확정되기 이전에 나온 고대의 히브리어 사본과 고대의 번역본들은 「마소라 본문」 가운데 변경된 본문을 회복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다. 고대의 히브리어 사본으로는 「사마리아 오경」과 「사해사본」이 있고, 고대 번역본들로는 그리스어역 「칠십인역」, 시리아역 「페시타」, 아람어역 「타르굼」, 라틴어역 「불가타」 등이 있다.

이제 히브리어 사본인 「사해사본」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해사본」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현지에서 들을 수 있는 「사해사본」 발견에 얽힌 이야기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해사본」 박물관 설립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사해사본」의 출판에 관한 소식도 전하고자 한다.

 

 

1. 「사해사본」의 발견

 

 

1947년부터 1969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사해 서북부 유대 광야에서 “유대 광야 두루마리” 혹은 “사해 두루마리”로 불리는 구약성경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모두 열 한 개의 동굴에서 「에스더기」만을 제외하고 구약성경에 속한 모든 책들의 옛 사본들이 여러 종류 발견되었다. 거기에서 발견된 여러 종류의 사본들은 현존하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보다 천년 이상이나 더 옛 것일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본문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성경 본문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대 광야 두루마리의 발견은 20세기에 발견된 다른 어느 고고학적 발견보다도 성서학계에 커다란 흥미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뉴욕 타임」지는 에드문드 윌슨의 「사해 두루마리」가 1956년 미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58년 4월 15일자 「뉴욕 타임」지는 사해 두루마리 발견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1959년에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회가 「신학논단(神學論壇)」 제 5집에서 사해사본을 특집으로 다뤘던 일이 있다. 그후 연세대학교 민영규 교수의 “예루살렘 입성기” 중에서 무려 10회(21회부터 30회까지)를 “사해문서의 쿰란 유적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일이 있다.

 

 

「그말씀」 1993년 2월호에서는 화보를 통하여, 사해사본이 담겼던 항아리와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두루마리, 사해사본이 발견된 동굴 가운데 제 4,5 동굴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1947년 겨울의 그 엄청난 발견은 사실 우연이었다. 사해 서북부 유대 광야는 근 2천여 년 동안, 지금까지 아무도 정착해본 적이 없는 불모지이다. 다만 아랍 유목민들(베두인)이 계절을 따라 옮겨 다니는 황량한 들판이다. 아랍 유목민의 한 목동 무하마드 아드-디브(Muhammad Adh-Dhib, 아드-디브는 ‘늑대'라는 뜻임)는 자기가 먹이던 양떼 중에서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잃은 양을 찾아 계곡을 뒤졌다. 어느 한 계곡에 왔을 때 벼랑 위로 조그마한 동굴 입구가 보였다.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작고, 광야의 들귀신들이나 드나들 듯한 음산한 굴이었다. 사해 부근의 유대 광야에는 이런 굴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소년은 혹시 들짐승이나 있으면 어쩌나 해서 돌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동굴 안에서 단지가 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돌을 던져보았다. 여전히 똑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무엇인가가 저 굴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드디어 그가 굴 속에서 발견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사본들이었다.

 

1) 이사야서 사본 1QIsaa (1-66장)

2) 이사야서 사본 1QIsab (주로 38-66장 부분)

3) 하박국서 주석

4) 훈련 교본(the Manual of Discipline)

5)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싸움

6) 감사 찬송

7) 외경 창세기

 

이것들 중 성경 사본들은 오늘날의 「마소라 본문」보다 천년이나 더 오래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으나, 그 목동으로서는 단지에 담겨져 있던 그 가죽 두루마리의 비밀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큰 수입을 잡을 수 있는 가죽이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만이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 중 일부를 가지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구두 수선공 칸도(Kando)에게 보였다. 그의 본명은 카릴 이스칸더 샤힌(Khail Iskander Shahin)이지만 현지에서는 그를 칸도라고 부른다. 칸도는 시리아 정통교회 교인이었고, 무하마드 아드-디브보다는 유식했던 것 같다. 칸도의 눈에는 그 가죽이 단순한 가죽이 아니라, 글씨가 쓰여 있는 만큼, 단순한 가죽 이상의 가치를 가진 어떤 경전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사본 두루마리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시리아 정통 교회의 대감독(Metropolitan)이던 아타나시우스 예수 사무엘(Athanasius Yeshue Samuel)에게 보냈다(이렇게 해서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 중 위의 1,3,4,7 두루마리가 몇 차례에 걸쳐 그에게로 넘어갔다).

 

사무엘 대감독 역시 성서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해독하거나 연대를 추정하거나 그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본들이 히브리어 성경사본이라는 것과, 그것들이 발견된 곳이 지난 이천 여년 동안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 사본의 연대가 고대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는 점에 재빨리 착안하였다.

한편 다른 경로를 통해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나머지 두루마리들의 일부가 1948년 당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과의 엘리에제르 립파 수케닉(Eliezer Lipa Sukenik)교수의 손으로 들어갔다(쿰란 제 1동굴의 것으로서는 2,5,6 두루마리). 수케닉 교수가 그 사본들을 입수하기까지 겪은 우여곡절은 유명하다.

두루마리의 단편만 검토해 보고서도 그 두루마리의 참 가치에 놀란 수케닉 교수는 그런 사본들이 베들레헴에 더 많이 도착되었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지척에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당시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사이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고 베들레헴은 적지였기 때문에 그리로 여행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케닉 교수는 ‘하가나’(이스라엘 국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그의 아들 이갈 야딘(Yigael Yadin)장군과 이 일을 상의하였다. 이갈 야딘 장군은 이미 고고학자로도 인정받고 있던 학자였다. 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히브리 대학교 고고학과 교수가 된 인물이다. 이갈 야딘 교수는 그때를 이같이 회고하고 있다.

 

제 부친께서는 그 두루마리들을 보시러 베들레헴으로 가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전선을 거쳐야 되는데, 한 민간인이 물건을 가지러 전선을 뚫고 적 진지로 들어간다고 할 때 그것을 허락할 군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처음에 저는 군사령관으로서 그 일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친과 저는 고고학자입니다. 그 기막힌 물건(사해사본 두루마리)이 지척인 베들레헴에 있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고고학자의 입장에서 제 부친께 꼭 가셔서 그것을 가져 오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들된 도리로서는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제가 잘 엄호를 해드릴테니 다녀오시라고 했지요.

 

결국 수케닉 교수는 베들레헴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구두 수선공 칸도를 만나 나머지 두루마리를 입수하였다. 그러나 그때 수케닉 교수는 도굴한 유물을 불법적으로 사들인 것이 위법행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 수사 당국으로부터의 추궁이 두려워서, 그는 사들인 사본들 중에서 일부를 칸도의 집 뒤뜰에 묻고 일부만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두 주일 후 수케닉 교수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가서 파묻은 단지를 꺼냈다. 단지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는 시커멓게 썩은 가죽이 악취만 풍기고 있었으며 이미 사본은 판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해발 마이너스 300미터의 쿰란 광야에서는 이천년을 견뎌온 가죽 두루마리가 해발 800미터의 베들레헴에서는 단 두 주일을 못 견뎌 썩고 말았던 것이다.

 

 

2. 「사해사본」 박물관

 

 

기원전 200년 경의 성경사본을 포함한 네 벌의 사해 두루마리를 팝니다. 수익금은 본 교단(시리아 정통교회)의 기독교 교육 및 선교기금이 될 것이며, 이 일에 단체나 개인의 참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1954년 6월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지 광고란에 나왔던 사해사본 경매 광고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네 벌의 사해 두루마리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나온 일곱 벌의 두루마리 중 시리아 정통교회의 대감독이 가지고 있던 「이사야서 사본 1QIsaa」, 「하박국서 주석」, 「훈련교본」, 「외경 창세기」 등을 말한다.

같은 동굴에서 발견된 것들 중 다른 세 벌의 두루마리인 「이사야서 사본 1QIsab」,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싸움」, 「감사 찬송」 등은 히브리 대학교의 수케닉 교수가 가지고 있었다. 수케닉 교수가 기자 회견에서 쿰란 제1동굴에서 나온 이사야 사본들이 기원전 1-2세기의 것들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것들 중 가장 오래된 성경사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전세계에 밝힌 것은 1948년 12월 31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시리아 정통 교회의 사무엘 대감독은 육감으로나마 자기가 입수한 네 벌의 두루마리가 굉장한 보물일 것이라고 믿어 왔는데 수케닉 교수의 그 발표가 있자 이젠 더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이 거부가 된 것이었다. 그 두루마리들이 세계적 보물로 확인되었으니 이제는 부르는 것이 값이 될 것은 확연했다. 사무엘 대감독은 전쟁이 많은 팔레스틴에 이 귀중한 보물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언제 불타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구실로 그것들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아타나시우스 예수 사무엘 대감독이 시리아 정통 최고의 권좌를 버리고 네 벌의 두루마리를 몰래 숨겨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나 예루살렘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것이 1949년 1월이었다.

 

벌써부터 사진 복사판을 펴내 학계에 공개하기를 바랐던 예루살렘의 미국 동방학 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 in Jerusalem)의 학자들은 사무엘 대감독이 이사야서 사본(1QIsaa)이 포함된 네 벌의 두루마리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자 본격적인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사진 복사판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그 이익금은 연구소와 사무엘 대감독과 각각 50퍼센트씩 나누기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밀라 버로우스가 편집한 「성 마가 수도원의 사해 두루마리 제1권 이사야서 사본과 하박국서 주석」이다. 출판 비용은 8천불이나 들었고 사무엘 대감독에게 돌아간 이익 배당금은 겨우 3백불이었다.

사무엘 대감독은 그가 가지고 있던 사해 두루마리들을 경매에 붙이기로 작정하였다. 요르단 정부는 팔레스틴의 요르단 영역 안에서 발견된 유물의 불법적 국외 반출에 항의하였다. 히브리 대학교 측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머지 네 벌을 확보하고자 했다. 경매 과정에서 한 때 이사야서 사본 한 벌만도 40만 불까지 말이 났었지만 결국 그 두루마리는 25만 불에 팔렸다. 그것을 산 사람은 수케닉 박사의 아들 이갈 야딘이었다. 민간 재단(American Fund for Israel Institutions)에서 10만불, 이스라엘 정부가 15만 불을 지불했으나, 나중에 사무엘 곳테스만(D.Samuel Gottesman)이라고 하는 뉴욕의 독지가가 25만 불을 기부하여 민간 재단과 이스라엘 정부에 각각 환불하였다. 지금 이스라엘 국립박물관 사해사본실 입구에는 사무엘 곳테스만과 그의 아내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실 사무엘 대감독이 그 네 벌의 두루마리를 받고서 구두 수선공 칸도에게 준 것은 겨우 97불 20센트였다. 그 중 32불은 칸도에게, 나머지 65불 20센트는 베두인 소년에게 돌아갔었다.

 

이스라엘 국립박물관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책의 전당’(the Shrine of the Book)이라고 하는 사해사본 박물관이 있다. 독특한 건축 양식부터가 방문객들에게 호기심을 일으킨다. 직육면체의 검은 대리석 벽과 흰 돔을 서로 마주 보게 지은 것은 쿰란공동체의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싸움’이라고 하는 그들의 중요한 신학사상을 건축양식을 통해 나타내 보인 것이다. 검은 대리석은 ‘어둠의 자녀’를 가리키고 흰 돔은 ‘빛의 자녀’를 가리킨다고 한다. 검은 대리석이 주는 중압감은 보는 이들에게 2천년 이상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짓눌렀던 박해를 상기시킨다. 지상으로 보이는 흰 돔은 지붕이고 박물관 자체는 지하에 들어 있다. 검은 대리석 벽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으며 입구에서 사해사본실까지 이르는 지하 통로는 무등변 사변형 아치들이 서로 엇갈리게 연속되어 있어서 마치 본래 그 사본들이 보관되어 있던 동굴을 실감케 한다. 실내 온도와 습도는 항상 일정하도록 조절되어 있어서 진열된 사본의 부패를 방지하고 있다.

사해사본실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커다란 단지 안에 들어 간 기분을 느끼게 된다. 땅 위로 솟은 흰 돔의 모양은 바로 사본이 들어 있던 단지의 뚜껑을 모방한 것이고 실내의 단순한 내부 구조는 바로 그 단지 속을 본뜬 것이다. 중앙에 높이 솟은 손잡이 모양의 꼭지가 달린 커다란 원기둥은 그 단지 속에 들어 있던 사해 두루마리 모양을 확대시킨 것이다. 그 원기둥의 윗 부분에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 사본을 실물 크기로 복사하여 붙여 놓았다. 실내 벽으로는 들어가면서 「훈련교본」, 「하박국서 주석」, 「감사찬송」 등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 실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3. 발견된 구약사본들

 

에스더기를 제외한 구약의 모든 책이 다 발견되었다. 발견된 구약사본 총목록은 젤린-포러의 「구약성서 개론」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단편’뿐이다. 여기서 ‘단편’이라 함은 두루마리 사본의 조각을 뜻한다.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첫째 사본(1QIsaa) 하나만이 1-6장까지 다 들어 있는 완전한 형태의 두루마리이다. 그 외에는 불완전한 형태의 두루마리이거나 단편들이다. 예를 들면, 제 4동굴에서 발견된 예레미야 7-22장(4QJer)은 7장부터 22장까지 다 있는 것이 아니라 부분 부분 조각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사해 두루마리의 인쇄본들은 다음과 같다.

1950년에 버로우스(M.Burrows)가 트레버(J.C.Trever)와 브로운리(W.H. Brownlee)의 도움을 받아 「성 마가 수도원의 사해 두루마리(The Dead Sea Scrolls of St.Mark's Monastery)」를 두 권으로 편찬해 냈다. 1권에서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첫째 사본(1QIsaa」과 「하박국서 주석(1QpHab)」의 사진판과 해독판을 보여주고 있다.

1954년에 이갈 야딘(Y. Yadin) 교수는 그의 아버지 엘리에제르 수케닉 교수가 생전에 출판했던, 「감추어졌던 두루마리(Megilloth Genusoth)」, I(1948),II(1950)를 보강하여 「감추어졌던 두루마리 보물 (Osar Hamegilloth Hagenusoth)」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서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둘째 사본(1QIsab)」과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의 싸움(1QM)」과 「감사찬양시(1QH)」가 들어 있다. 이것의 영어 번역판 「The Dead Sea Scrolls of the Hebrew University」이 1955년에 나왔다.

1955년부터 「유대 광야 발견물(Discoveries in the Judean Desert)」(이하 DJD) 총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르텔레미(D. Barthelemy)가 펴낸 「유대 광야의 발견물 제1권: 쿰란 제 1동굴」(1955)에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곧 창세기, 출애굽기, 신명기, 사사기, 이사야, 에스겔 등의 사본 단편들의 사진판, 해독판, 주해 등이 들어 있다.

1960년에는 브루아(P.Beroit)와 밀리크(J.T.Milik)와 롤랑 드보(R.de Vaux)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2권: 무라바아트 동굴 (DJD,II: Les Grotlesde Murabbaat)」가 나왔다. 무라바아트에서는 성경 밖의 문헌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성경본문 자료로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이사야 등의 단편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사본들의 사진판, 해독판, 설명 등을 볼 수 있다.

1962년에는 빌레(M.Billet)와 밀리크(J.T.Milik)와 롤랑 드보(R.de.Vaux)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3권: 쿰란의 여러 동굴에서 나온 사본들(DJD,III: Les “Petites Grottes” de Qumran)」이 나왔다. 여기에는 쿰란 제 2동굴, 제 3동굴, 제 6동굴, 제 7동굴, 제 10동굴에서 발견된 구약 각 책의 여러 사본들과 성경 밖의 여러 문헌 사본들의 사진판과 해독판, 해설이 들어 있다.

 

1965년에는 샌더스(J.A.Sanders)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4권: 쿰란 제 11동굴의 시편 두루마리(DJD,IV: The Psalms Scroll of Qumran Cave 11)」가 출판되었다.

1968년에는 알레그로(J.M.Allegro)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5권: 쿰란 제 4동굴(DJD,V: Qumran Cave 4: I(4Q 158-186)」이 나왔다. 여기에는 이사야서 주석, 호세아서 주석, 나훔서 주석, 스바냐서 주석, 시편 주석, 애가 본문 등이 포함된 여러 문헌의 사진판, 해독판, 설명 등이 들어 있다.

1971년에는 쿰란 제 11동굴에서 발견된 욥기 타르굼이 출판되었다(J.P.M. van der Ploeg, A.S.van der Wounde,Le Targ de Job de la grotte XI de Qumran).

1977년에는 토브(E.Tov)가 편집한 「유대 광야 발견물 제6권: 쿰란 제 4동굴(DJD,VI: Qumran Grotte 4,II, 1.Archeologie, 2.Tefillin, Mezuzat et Targums(4Q 128-4Q 157)」이 출판되어 나왔다. 여기에서는 쿰란 제 4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인 레위기 타르굼, 욥기 타르굼을 볼 수 있다. 「유대 광야 발견물」 총서는 아직도 완간되지는 않았으나 지난 15년 동안 다른 새로운 편집이 출판되지 않고 있다.

구약 밖의 본문으로는, 1956년에 아비가드(N. Avigad)와 야딘(Y. Yadin) 편집의 「외경 창세기(A Genesis Apocryphon)」가 나왔다. 1957년에는 묄러(P.Wenberg-Moller)가 편집한 「훈련교본서(The Manual of Discipline)」가 「유대 광야 본문연구(Studies on the Texts of the Desert of Judah」 총서 1권으로 나왔다. 1960년에는 닐센(Svend Holm - Nielsen)의 「호다요트: 쿰란에서 나온 시(Hodayot Psalms from Qumran)」가 나왔고, 1961년에는 같은 「호다요트」가 만수르(Menahem Mansoor) 편집의 「감사찬송(The Thanksgiving Hymms)」으로 나왔다. 이것은 「유대 광야 본문연구」 총서의 제 3권이다. 이 총서는 라이덴의 이 제이 브릴사(E.J.Brill)에서 나온 것으로서 모두 9권으로 되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제1권과 제3권은 발견된 문헌의 본문 자체를 번역하고, 주석을 단 것이다. 벤 치온 봐콜더(Ben Zion Wacholder)와 마틴 아벡(Martin G. Abegg) 편집의 「미간행 사해 두루마리: 쿰란 제 4동굴의 아람어본문 예비편집(A Preliminary Edition of the Aramaic Texts from Qumran Cave Four)」은 「다마스쿠스 계약」(일명 「사독문서」)과 「엣센파 달력」의 해독 판이다.

1992년에는 ‘사해 두루마리 사본 기금’(Dead Sea scrolls Foundation)이 새롭게 구성되어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나머지 사본들에 대한 편집과 출판 계획이 세워지고 있으며, 1992년 11월 22일에 샌프란시스코 성서학회 총회에서 자문 위원회의 첫번 모임이 있었다.

네덜란드의 이 제이 브릴 출판사에서는 1993년에 토브(E.Tov)가 편집한 「사해 두루마리 마이크로피시(The Dead Sea Scrolls on Microfiche)」가 나온다. 1947년에 사해 두루마리들이 발견, 발굴되기 시작한 이래 지난 40년 동안 많은 사본들이 공개되었는데, 이번 마이크로피시에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포함될지는 몰라도 예고한 내용을 보면 쿰란에서 발굴된 것을 위시하여 와디 에드 - 달리예, 와디 무라바이트, 키르벳 미르트, 나할 헤베르, 마사다 등에서 발굴된 두루마리를 포함할 것이라고 한다. 사해 두루마리의 미공개 두루마리의 출판은 구약본문 연구에 더욱 더 밝은 빛을 비추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