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역사적, 신학적 위치의 정립
1.신약신학의 출발점에 대한 문제
바울은 신약신학의 출발전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보고 있다. 복음서를 역으로 살펴보면, 수난과 부활절의 관점에서 쓰여 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전승들에 따라 부활절 케리그마만이 기독교 회중의 창립 및 예수 사역의 계승에 책임이 있었고 이것이 신약신학의 출발점이다.
교회 회중과 기독교 선교라는 상황아래에서 예수 전승이 종합적이고 설득력있는 것이 되려면 부활절 케리그마는 1)지상적 예수의견지에서 회고적으로 발전
2)회중의 상황에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신학신학의 과제는 종교사적 분석을 통하여 신화적 사고들을 분리해내어 제거함으로서 그 배후에 있는 독특하고 중요한 예수상을 보게하는 데 있다.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 자체를 그의 사역의 완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대적 환경 속에서 전례가 없는 부활절 게리그마의 본질적인 토대인가 하는 것이다.
2.자료들
19세기에는 공간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진정한 자료를 찾아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18년 후에는 구전에 대한 탐구와 돈 관심이 집중되었다. 복음서의 문자화 이전의 전승은 ‘양식사’의 견지에서 연구되었다.
우리는 신약신학의 독자적인 전승 비평적 분석의 발판을 마련해 줄 필요는 있을 것이다.이러한 판별기준의 적용은 전승자들이 서로 독립되어 여러 자료들, 공관복음서 전승에서의 마가와 Q,바울에게 모습을 드려낸다는 점이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묘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구조적 측면에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복음서, 즉 예수의 지상 사역을 케리그마적으로 해석한 기사이다. 요한은 공동체가 공관복음서를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지만 공관복음서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변경하지는 않았다. 독자적인 정보로 예수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전달하고자 한다.
3.역사적 구도
역사적 정황은 예수의 사역에 윤곽을 부여해주기 때문에 예수의 사역의 역사적 구도를 탐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세례 요한은 티베리우스 15년, 주후 27년-28년 사이에 활동을 했다. 예수는 빌라도의 유대총독 재임시에 사역했다. 또 예수의 죽음은 방울의 회심이전 주후 33년-35년 사이였다. 따라서 예수의 공적 사역은 정확하게 세속의 연대기로 표시될 수 있다. 예수의 사역은 주후 28년-30년 사이에 일어났다. 그의 나이는 약 30살이었다. 전승 요소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 대왕 치세에 태어났다.
예수의 고향은 나사렛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에 의해서 “나사렛 사람”으로 지칭되었다. 나중에는 “나사렛 이단”으로 지칭한다. 이 호칭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생각에 경멸하는 태도였다.
신약에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말은 예수의 역사적 조상들에 대한 묘사이다. 예수는 다윗의 혈통에 속함과 동시에 성령에 속했다. 탄생 설화는 예수의 역사적 조상들에 관하여 두 가지 점에서 세부적 내용을 제공해 준다.
먼저 예수는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왔다. 성령으로부터의 동정녀 탄생에 있는 의도이다. 두번째는 예수는 약속의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다윗의 합법적 자손으로 태어났다.
예수는 선생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으며 랍비와 마찬가지로 한 무리의 추종자를 거느렸다. 그리고 서기관들의 사용하는 방법으로 말하고 비유와 교훈적,논쟁적 대화의기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예수의 사역을 한 서기관의 활동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의 가르치는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또한 이적이 따랐기 때문에 예수는 평범한 서기관 과는 구별되었다. 따라서 어떤자는 선지자로, 반대로 어떤이는 열심당 선지자 중 하나로 평했던 것이다.
지리적으로는 예수의 사역은 유대 백성들이 정착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서 이루어 졌다. 그가 북쪽 땅이나 가이사랴 빌립보 촌락들로 여행했을 때 그것은 비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 대적자들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예수의 목표는 헬레니즘 세계와 접촉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과의 만남에 중점을 두었고 예수는 이스라엘에 대한 특별한 사명에 자신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예수는 이스라엘에게 알지 못했던 신을 선포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조상들의 하나님의 오심을 알렸다. 그것은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해석해 주고 있고 그는 일반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및 전통들과의 구체저인 논쟁과 대화에 참여했다.
예수의 시대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분파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종교적 생활을 결정하는 데에 영향력이 지대했다. 복음서에는 엣세네파와 열심당은 언급되지 않으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예수와 정면 대결한 세력으로 묘사된다. 특히 바리새파와는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 졌는데 이는 두 당사자 모두가 율법에 관한 문제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가르치고 행동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당시의 지배적인 율법해석과 배치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주의와의 정면대결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대결 양상들을 감안할 때 유대사상의 다른 분파들과의 관계에서 예수의 유대 전통에 대한 의존성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를 혁명가로 묵시적 정열을 품은 정치적 폭도로 규정하거나 그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갈릴리 형제단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하거나 인자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 선포를 유대의 묵시록에서 나온 것으로 주장하거나, 혹은 예수의 지적,종교적 고향을 유대 세레파들, 특히 에세네파들의 재산공유, 공동식사, 세례 등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은 예수의 위치를 왜곡하고있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의 다른 분파, 특히 바리새파와 묵시록의 대표자들, 혹은 에세네파와도 전혀 유사하지 않다.
이와같은 예수의 종교사적 선구에 관한 이해에서 우리는 예수가 어느 특정 유대교의 분파로부터 나오지 않았고 그것들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반대하거나 의거하여 자신의 선포를 발전시킨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바리새파와 대결한 것은 이스라엘을 회개에로 부를 때 바리새파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의 결례를 거부하고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스스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요한이 하나님에 의해 권세를 부여받은 유일한 인물로 확신했다. 이것을 “역사적”이라기보다는 “구원사적”으로 이해할 수있다. 구원사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내시도록 그 길을 예비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예수는 이러한 “구원사적” 의미에서 세례 요한과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예수와 세례 요한의 종교사적, 전승사적 관련성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구원사적 관련성에서는 예수가 절대적이다. 신약의 진술들을 공정하게 다루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역사적 및 구원사적-을 모두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그 두 방법을 상호간에 치열한 대화를 하도록 해야한다.
4.구원사의 출발점:세례 요한
세례 요한의 사역은 지리적 접근성과 몇몇 기본적인 문제들에서 유사점들이 많다. 이 둘은 모두 자기들을 구원사적으로 이해했으며 세례 요한에 대한 공관복음서 이외의 전승들은 그의 설교의 신학적 이해에 더해 주는 것이 없다.
세례 요한의 설교는 신학적인 주제들을 가지고 있다.
임박한 진노의 심판은 심판날이 가까왔다는 것과 회개에 합당한 한 개인의 내부적 열매,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행위를 요구한다. 요한의 회개는 단순히 윤리적 행위를 바꾸는 것만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행위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바리새파 유대교의 회개는 매일 매일의 부분적 회개인 반면에 세례 요한은 단번의 총체적 회개를 의미 했으며 엣세네파가 특별한 공동체에로의 입회를 요구한 것과는 달리 모든 이스라엘을 회개로 불러 대비하라는 요구였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최후의 종말론적 대면을 예기했다. 또한 그의 회개에의 요구는 장래의 성령세례를 통한 변화의 약속을 의미했다.
요한의 세례는 엣세네파의 반복적 결례의식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반복될 수 없었다. 요한은 유대종교의 결례에서 형성된 물세례를 베풀었으나 그것은 성령세례를 통한 종말론적 정화라는 구약예언과 맥을 같이한다. 성령을 통한 인류의 새로워짐은 오실 자에 의해서만 현실로 될 것이다. 오실 자를 가리키는 세례 요한의 독특한 호칭은 “내 뒤에 오시는 이” “능력 많으신 이” 였으며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자”였다. 오실 자는 궁극적으로 심판자였으며 성령세례 주실 분을 선포함으로 요한의 세례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새로워짐을 약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세례는 유대의 세례운동과 구별된다. 예수를 가리키는 구약예언의 종말을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고, 예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이 주요 사명이었다. 예수의 수세는 구약에 대한 요한의 이해에 동조하고 그것이 유대교와 구별됨을 전재하는 것이었고 예수 자신의 공적 사역의 시작을 지시했다.
제2장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 사역의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고 이로부터 나온다.
5.예수의 선포와 동시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
세례 요한의 지향점은 “오실 자”의 오심이었으나 예수의 지향점은 하나님의 오심과 하나님의 주인되심, 즉 통치였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로 발견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를 동의어로 말했으며 하나님 나라는 개인적 지향을 나타낸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라 지금 도래하고 있다고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는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표준적인 용어가 아니었다.
“다가오는 세대”, 즉 새로운 세상 및 세상을 위한 새로운 시간 준거라는 사고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고를 대신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적 출현을 우주적 과정으로 바꿔 놓는다.
바리새파-랍비적 유대교는 메시야적 왕을 열렬히 기다렸다. 랍비적인 종말 기대의 하나님의 통치는 율법의 관점으로 모아졌다.
랍비들이 말하는 하늘의 통치는 율법에 표현되어있는 창조주의 권리주장이었다. 그리고 기도문에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즉각적이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고 있다. 엣세네파는 하나님 나라를 드물게, 이원론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에 관해 유대교 환경에서 알려졌지만 예수처럼 자주, 중심적 용어로 사용한 유례가 없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통치가 최후의 심판을 통해 세상과 관련해서 이루어 져야한다고 한다. 이 통치는 하나님 백성에게 구원을 의미한다.
예수의 통치개념은 종말론적이었으나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을 자신의 선포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것은 미래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현재적 도래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었다.
6.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도래와 현재적 도래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은 미래적 도래 및 현재적 도래를 모두 말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도래는 예수가 역사종말의 심판의 기대와 인자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란히 선포하고있다. 그 의도는 현재로 하여금 미래에 참여케 하는데 있다. 하나님 나라, 심판, 인자의 미래적 도래는 모든 시간적 의미와 함께 훨씬 더 구체성이 부여되었다. 예수는 종말론적 출현이 시간적으로 근접해 있음을 “선교적”형태로 선포했다. 예수는 근본적으로 시대 계산을 거부했고 오히려 회개에로 부르기 위해 사람들을 기약없고 계산할 수 없는 도래 앞에 세워놓았다. 근접성에 대한 언급은 제자들을 안심시키려고 제시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심판은 계산할 수 없지만 가까이 와 있다. 그라나 그것은 시간적으로 미래의 일이며 아직 오늘이 아니다. 예수의 특징은 다른 분파종교와는 달리 미래성의 하나님 나라는 심판이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벌써 현재에 도래하고 있지만, 이 현재적 도래가 사실 미래적 도래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미래적 도래보다 훨씬 더 핵심적이다. 예수는 자신의 치유행위를 구원 때의 표적이라한다. 긍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에 관한 질문은 예수라는 인물에 관한 질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하여는 그것이 볼 수 있는 형태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고 은밀하게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 업적을 통해 획득될 수 없으며 오직 발견될 따름이다. 가르침의 형태로 발견되지 않고 예수의 사역에 대한 해석으로 표현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비유들은 모든 사람을 향해 있지만 오직 제자도 안에서 예수를 좇는자 만이 실질적 내용을 소유하게 된다.
7.하나님의 통치: 그 내용 및 현존하는 세상 질서와의 관계
하나님의 통치에 관하여 예수가 말했을 때 그의 의도는 팔복의 가르침과 주기도문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팔복의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는 육체적, 영적으로 구원의 도래를 가져온다. 즉 결핍과 고통이 없는 새로운 세상, 평화와 의의 세상을 가져온다. 이 새로운 것은 하나님의 주도권을 통해 도래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신 중심적으로 하나님이 백성들을 만나셔서 그들을 친교로 이끄실 때 온다.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현존하는 세상 질서의 여러 변동들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도래한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분파들의 심판의 날, 권세의 전복, 우주의 변동 등과는 다르다. 그것은 권력구조의 관계 변화와는 독립적으로 도래한다. 외부적인 관계 변화는 그 결과로서 뒤따르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진정 구조들의 변화, 새로운 사회질서를 가져오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회 변화의 결과로서 도래하지는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구원의 약속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워지고 완전케 될 때에 도래한다.
팔복이 하나님 나라를 제안하는 것이라면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를 간구드리는 것이다. 이 기도문은 하나님의 통치의 내용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받고 그의 은혜로운 뜻이 성취될 때 도래하며 그 통치는 삶의 육체적 영적 측면을 완전케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와 미래의 두 차원에서 도래한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통치의 핵심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의 완전성에 있다면 예수를 통하여 새로워 진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묵시록이나 랍비 유대교와는 달리 예수는 도래할 세상,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예수는 종말론적 축복의 식탁교제에 대한 심상을 사용했는데 완성의 때가 친교의 자리가 될 것임을 표현하고자 한다.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완성으로서 예수와의 친교, 하나님관의 종말론적 식탁교제이다. 또한 예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새롭다는 것을 포도주와 가죽 부대의 비유로 설명한다. 구원의 날은 이전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적 변화이다. 그것은 세상 사물의 원시적 회복이 아닌 새로운 창조로서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렇듯 예수는 하나님 나라와 함께 올 삶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성격 때문에 예수는 그것을 생생하게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제 3 장 요구로서의 회개(예수의 윤리학)
8. 죄를 지적하며 회개에로 부르심
저주는 부한 자에게 적용된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구하지 않는 자에게 적용되었다. 부자는 자신의 소유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리석었다. 예수는 소유의 문제에 대해 매우 엄격하고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다.
부자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달리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예수의제자로의 부르심에 직면해 있었다. 부자는 자신의 의로움의 대가로 생각했던 자신의 부를 버릴 수 없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부와 함께 자신이 그 동안 획득한 의도 버려야 했던 것이다.
예수가 반대했던 염려는 미리 예견해서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비축해 놓는 것이 아니라 장래를 염려하는 충동에 이끌려서 소유물 속에서 삶의 안정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부의 문제에 대해 예수는 이웃에 대한 부자의 행실을 주목한 것이 아니라 첫번째 계명을 주목하였다. 부한 자들에게 대한 정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며 이 정죄는 궁극적으로 회개에로의 부르심이었다.
비리세인들은 자고 사소한 율례들을 열심히 준수하는 것을 통하여 중하고 책임적인 계명들에 대한 준수에는 자기 자신과 남들을 속였던 것이다. 그들의 모든 열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인정받는 것이었다.
9. 규범으로서의 율법에 관한 예수의 입장
--율법이라는 용어에 관한 예비적 고찰--
예수시대의 유대 문헌에서 불법은 공식적으로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었다.
할리카는 토라의 해석일 뿐만 아니라 토라의 구절들에 의해 밑받침 받고 있는 규범적인 율법이기도 했다.
예수가 구약 계명들에 대해서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구약의 구별을 거부한 것은 그가 완전한 정결과 완전한 거룩이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스스로 그 계명을 범함을 통하여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그 계명의 의도를 성취하면서 안식일의 효력을 중지시켰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는 새로운 성전의 건립이나 새로운 공동체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오심을 생각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유대교에서 윤리적으로 최고의 명령으로 보였던 것은 절대적인 명령이 되었다. 구약 자체에 대한 불분명한 관계속에서 섞여 짜여 졌던 것들-율법적 공리와 진정한 계명-은 예수의 총 체적 명령 속에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시점에서 최초로 분리되었다.
사랑의 계명은 요한 복음이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듯이 예수의 입에서 새계명이 되었고 그 실현은 십계명의 후반부를 한 차원 높게 지양하며 성취하게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에게 그를 새 계명으로 이끌어 주기 위하여 율법의 정점에 이중의 사랑 계명을 두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율법이 구원의 때에 예언된 대로 성취되는 모습을 보여 주려했다. 예수가 대조법에서 율법과 대비되게 놓았던 총체적인 요구들은 예수를 통하여 도래한 종말론적 성취와 일치했다. 율법은 그 타당성을 보유하고 있었고 오직 종말론적인 지양적 성취를 통해서만 중지될 수 있었다.
10. 예수의 윤리적 요구
예수의 윤리를 ‘합리적인 윤리’라고 지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예수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열어 놓았다.
2)이웃과의 관계라는 방향으로도 깨우침을 주었다. 예수는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요구를 가르킴으로서 이웃사랑의 중대성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사랑의 배후에는 예수의 총체적인 요구만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예수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다.
3)예수는 사회제도들의 그물망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들의 영역에서도 깨달음을 주었다.
4)제자들간의 관계와 같은 새로운 사회 관계가 등장한다. 예수는 그러한 관계를 섬김이라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표현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결혼하지 않는 경우와 제자도를 위하여 결혼과 가족을 버리는 경우도 만들어 놓았다. 예수는 이 말씀을 통하여 자기 제자들이 최소한 한 동안 만이라도 결혼과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을 정당화했던 것 같다. 이러한 결혼의 자의적인 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조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세금을 내고 권리와 무력의 사용 등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것은 회개의 결과로 따라왔다. 현재 도래중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헌신이었다.
전통적인 해결책들--열심당적인 입장은 예수를 율법수여자로 변화시켰다. 예수는 악을 기각하는 유토피아적인 율법을 세상에 강요하였다. 이러한 해결책은 반정립이 연대기적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 전통적 카톨릭적인 개념은 예수의 개념들을 오름차순으로 율법에 통합시켰다. 이 해결책은 현실의 굳건한 토양위에 세워놓았으나 반정립의 관계에 있는 것은 간과했다.
-- 루터의 종교개혁은 예수의 새 계명들 또는 하나님의 “자연질서”의 요구들, 즉 신약의 관점에서 율법의 분석될 수 있다는 견해를 대표했다.
제 4 장 하나님의 통치의 선물로서의 회개: 구원의 새질서
11. 율법의 구원의 질서: 그 인정과 효력정지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언약의 영역에 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언약은 그 성취여부가 계명들을 준수하느냐에 달려있긴 하지만 은혜에 기초한 받아들임이었다.
유대교에서 응보의 개념은 개개인은 율법에 얼마나 충실하였느냐를 토대로 종말론적 심판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예수는 인간의 행위가 최후의 심판에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그 날에 진지하게 다루어질 것을 강조했다. 예수의 심판기대가 구약과 유대전승을 사용하고 아울러 그것을 변용할 방식은 예를들면 상과 응보에 대한 강화들 속에 아주 잘 나타난다.
예수는 죄를 계속해서 범함으로써 얻게되는 부정적인 점수와 그 결과인 형벌에 반대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렸다. 또한 상급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것도 금지 이켰다. 자신의 행위에 관하여 완전히 선입견이 없는 것은 즉 율법의 구원의 질서 자체가 중지되었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의 결과는 포도원의 비유에서 인간의 공로에 의존한 구원을 이야기했던 언약이 중지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런 이유로 모든 형태의 점수매김과 모든 권리 주장은 기각되었다.
마태복음의 네복은 고통중에 있는 사람을 자비롭게 돌보고, 올바른 길을 걸으며, 화평케하며, 정의를 위한 싸움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핍박 받는 사람들에 대한 축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팔복에 관한 가르침의 의미에서 그휼히 여기는 자가 된 사람은 인도주의적인 업적들에 대해 그 대가로 인정을 받기를 원한 사람이 아니라 팔복에 관한 가르침의 약속으로부터 비롯될 자신의 미래를 기대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팔복에 관한 가르침은 줄곧 조건으로서의 율법의 성취에 과하여는 일언반구도 없이 종말적인 구원의 말씀을 나누어 주었다.
12. 죄인들을 위한 구원
죄인들을 하나님의 통치로 부르는 거시 예수의사명이었고, 어떠한 조건도 없이 세리들과 식탁교제를 함으로써 죄인들의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예수가 죄인들에게 자신과의 교제를 허락했을 때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죄사함이일어냤다. 예수를 통한 죄용서는 그의 사람들과의 어울림을 통하여 일어났고 그의 비유들 속에서 말로 표현되었다. 예수를 통하여 이렇게 죄사함을 나누어 주는 일은 구약이나 유대교에 그 유례가 없었다. 예수의 인격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지금 자신의 종말적인 통치를 이루고 계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믿음은 행동을 통한 회개의 근본적인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자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죄사함과 후원에 맡기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치유는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증거가 아니었다. 치유는 단지 표지일 따름이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시점에 하나님의 죄사함을 잗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을 이웃에게 개방함으로써만이 그 죄사함을 계속 보유할 수 있었다. 예수의 이러한 죄사함은 일반적인 사면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개개인과 인격적으로 어울리는 것과 결합되어있다.
13. 예수의 죄사함과 의인들(눅15:25-32)
죄사함은 오로지 은혜의 문제였기 때문에 의인이 제시할 수 있었던 상대적인 성취는 하잘것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이러한 계산 방식과 억측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가능하게는 했던 시내산 언약의 질서는 효력이 중지되었다. 둘 모두 아들로서 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피조물적 성격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부인하였다. 의인은 종의 태도를 버리고 아버지와의 교제를 회복하고 아우에 대한 심판의 입장을 중지할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의로움도 버려야한다. 예수의 구원의 제안은 의인들을 포괄하였다. 그의 죄사함은 종말론적으로 새로운것의 동터옴을 개시시키는 것이었다.
제 5 장 종말론적 갱신의 표현으로서의 예수의 구원사역
14.이적 기사들과 그 비판
현재의 합리적 사고로 보아 불가능한 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공리로 전제했다. 슈트라우스는 이적 이야기들을 당시의 사상들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적 이야기의형성과 전승고정에서 결코 적지 않은 정도로 증보와 치환이 일어났다. 예수가 귀신들린 사람만이 아니라 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중요한 치유를 수행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하다. 소위 자연 이적들에 관한 전승들과 관련하여 오직 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사건과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만이 예수의 지상사역 중에 행해진 듯이 보인다.
15. 예수의 이적들의 신학적 의미
공관복음서들은 말씀들과 설화에서 예수의 이적을 내내 ‘뒤나메이스’로 지칭했다. 따라서 예수의 이적들은 역사속에서 구원을 수행하고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들로 이해되었다. 예수에게는 형벌의 기적은 없다. 그러한 것이 없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태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믿음과 결부시켰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전시용으로 이적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Q전승은 더 나아가 ‘요나의 표적’을 말하고 있다. 이 표적은 예수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 표적은 요나 자신, 즉 이 경우에는 인자 자신이었다.
모든 경우에 사람들은 오직 예수이 인격과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믿음’을 갖게 되었다. 구체적인 위기 속에서 자신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던 개개인을 향하고 있을 때, 예수가 구체적인 도움을 통해 자신과의 교제를 허락했을 때 믿음이 출현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선택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일반적인 믿음의 태도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투자로서의 믿음을 구했다. 믿음은 현상을 깨뜨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깨뜨림도 하나님을 지향한 가운데에서의 깨뜨림이 아니라면 이직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확신,실제로 “구원자체”였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경우와는 달리 자기의 도움을 구하고 발견했던 사람들을 지신의 사역의 맥락 속에서 믿음이 있다고 인정했을때 그는 그들이 자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 지금 제시하고 있는 약속에 응답하여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치유 이야기들은 결코 예수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그의 권세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마8:9에 따르면 백부장으로 하여금 예수에게로 호소하러 오게 한것은 대리적인 종교적 권능이 아니라 예수의 권세였다. 예수는 자신의 치유사역이 행동을 통한 성취 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믿음이 출현한 곳에서 모든 것이 온전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결정적으로 실현되었다.
예수의 이적들 속에서 본질적이었던 것은 이 세상의 사건들의 정상적인 과정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외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응보의 질서의 깨뜨림이었다. 이적들의 이야기의 본보기를 통하여 믿음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였다. 전체 예수 전승 속에서 이적 이야기들은 승귀되신 분, 자신의 성령을 통하여 공동체 속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이 누구인가를 표현하고있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의 치유 사역을 통하여 자기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짊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종임을 보여주었다. 공동체로 하여금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동일한 방식으로 승귀되신 분으로부터 자신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예수를 통하여 일어났던 것을 다시 상세히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제 6 장 예수의 자기이해
16.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관계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를 통하여 도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예수에 대하여 더 위대한 그 어떤것을 주장할 수 있을까?
브레데는 마가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메시야됨을 사람들에게 숨겼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초지의신앙 공동체에서 인자라는 개념을 유대의 묵시록으로부터 빌려와 예수에게 전가시켰으며 그렇게 해서 부할절 신앙에 표현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
1. 종교의 형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나라
우리는 예수에 대해 생각할때, 세속과 분리되어 살았으며 엄격한 종교적 관습이나 규율에 얽매여 사신 분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는 특별한 종교적 관습이나 규율에 얽매이지 않은 매우 단순하고 자유로운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1.종교적 관습에 대하여 자유로운 예수
예수는 사회적으로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분은 레위지파도 제사장출신도 아니었고, 율법학자나 서기관이 될수 있는 정규교육을 받은 분도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의 직업을 가지셨다. 그의 이야기 솜씨도 매우 소박하고 단순하였다. 그는 신앙고백서나 교리를 외우게 하지 않았고, 하늘의 신비한 비밀에 대해 명상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전설이나 설화,격언을 이용하여 자기의 생각을 나타내셨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지켰으며 또 지킬것을 요구하였던 모든 종교적 관습에 대해 자유로운 태도를 취했으며 그것들을 상대화시켰다. 예를 들어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들이 강조하던 십일조도 강조하지 않았으며, 종교적 표시가 달린 의복을 입고 다니지 않았으며, 바리새파처럼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하지도 않았으며, 하루 3번씩 기도하는 관습을 지키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에게 중요했던 것은 십일조를 바치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자기의 마음과 삶을 바치는 것이었으며, 또 어떤 고정된 틀에 자신을 묶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때, 가능할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중요한 것은 종교적 형식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지키는 문제였다.
2.율법을 상대화시키는 예수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이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구원의 길이었으며 하나님의 계약과 택한 백성에 대한 표지로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삶의 상황과 조건들이 다양해지며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 613가지의 율법의 계명들로 이 모든 새로운 상황들에 다 적용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할라하(Hallach)라는 율법에 대한 거대한 해석체계가 형성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할라하가 너무나 방대하여 모든 피조물의 행복을 실현해야 할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적 계율로 전락되었다. 따라서 예수님당시에는 ①율법을 전수 해석하며 가르치며 지킬수 있었떤 율법학자들, 랍비들, 바리새인계층-‘의인’계층과 ②시간적, 물질적이유로 인해 율법을 지킬수 없었던 평민계층-죄인계층으로 이분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수는 율법을 상대화시킨다. 왜냐하면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조항의 준수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3.예루살렘 성전과 제의의 상대화
예수는 율법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성전과 이 성전에서 거행되는 모든 제의도 상대화시킨다.
<근거>①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막11:14) - 예수는 잎사귀는 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성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형식은 있으나 본래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 예루살렘 성전의 저주, 포기를 뜻한다.
②성전의 상행위를 금지하는 사건(요2:13) - 당시 예루살렘 성전안에는 제물파는 장사꾼들과 환전상들로 항상 소란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제사에 바치는 모든 제물을 성전안에서 살것을 요구하였고, 이스라엘자체의 화폐만 사용할 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은 이과정에서 몇배의 이득을 취하였고 이 불의한 돈은 제사장들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상행위를 금지하셨다. 예수는 더 나아가 아무나 기구(器具)들을 가지고 성전뜰을 질러 다니는 것을 금하였다.(막11:16) 여기서 기구들은 제사에 사용되는 물건들을 말하며 따라서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성전의 상업적 기능은 물론 종교적 기능,제사적 기능마저 중단시킴을 의미한다. 즉, 성전의 정화가 아니라 성전의 무효화를 의미한다.
③성전휘장이 찢어진 사건-예수가 운명하는 순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폭으로 찢어졌다는 보도도 이방인, 여인, 이스라엘 남자, 레위인,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의 구분을 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4.이스라엘의 혈통, 의와 불의의 판단 기준의 상대화
①이스라엘 혈통의 상대화 - 예수는 이스라엘의 혈연적, 민족적 공동체의 선민의식을 상대화시킨다.혈연적 이스라엘 공동체를 선민으로 생각하던 사상은 후기 유대교에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예수당시에는 참이스라엘이라 주장하는 다양한 종교집단들이 생겨났다.(하시딤, 바리새파, 엣세네파파, 젤롯당--) 이들은 의로운 자들을 영입하여 세력확장에 힘썼다.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상황에서 예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그는 거룩한 자들을 모아 세속으로부터 구별되는 특별한 공동체를 형성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다.(마11:19)<그는 이점에서 구약 예언자의 전통에 서 있었고 따라서 예언자로 불려진다.(마21:11)>
물론 복음서의 예수의 활동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한되어 있다. 제자들을 파송할때도 그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로만 국한되었다.(마10:5)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을 여지 없이 흔들어 놓았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준 사건(마8:11), 혼인잔치의 비유(눅14:16)등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혈통이냐 아니냐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함을 말한다.
②의와 불의의 판단기준의 상대화 - 예수는 더 나아가 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의 사회적 판단기준을 상대화시킨다. 자칭 의인인 먼저된 자들은 나중 될 것이고, 불의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먼저 될 것이다. 옥합을 깬 여인의 사건(눅7:44-48),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30-37),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18:11), 부자 청년의 이야기(눅18:21), 삭개오의 이야기(눅19:2)는 바로 이점을 말한다.
의인과 죄인의 기준은 당시 바리새인등이 주장하는 종교적 형식과 계율에 대한 복종여부가 아니라 율법의 골자인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행하느냐 아니냐에 있다. 다시말해 구원의 기준은 당시사회에서 통용되던 기준이 아니라, 예수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예수에게 전폭적으로 맡기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
5.엣세네파, 쿰란 공동체와 예수의 차이
엣세네파는 전에 살펴본바와 같이 하시딤이 하스몬왕가를 떠날때, 바리새파와는 달리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세속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려한 집단이다. 예수당시에는 4,000명의 엣세네파들이 사해언덕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공동생활, 결혼금지, 노동, 상급자에게 복종을 생활규범으로 삼았고, 음식은 굶주림을 피할정도만 먹었다. 또한 이들은 안식일, 정결에 관한 계명을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이 엣세네파중에서 극단적인 사람들은 쿰란 고원에 수도원을 짓고 고행과 은둔의 생활을 하였다. 그렇다면 예수와 이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①엣세네파 사람들은 이 세계의 모든 속된 것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로 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예수는 속세를 떠나지 않고 그 한복판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복음을 전파했다.
②쿰란의 수도사들은 세계를 이원론으로 구분했다. 쿰란수도원안에는 진리와 빛이 있고 구원이 있지만, 바깥세계는 어두움이 있다. 애초에 하나님은 두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지으셨다. 그러나 예수는 본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누구나 회개할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③엣세네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을 지켰다. 특히 안식일법을 더욱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에 대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셨다.
④엣세네파 사람들은 금욕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단 한차례 40일간 금식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며, 제자들에게도 금식을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는 오히려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셨으며,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말을 들으셨다.
⑤쿰란의 수도사들은 철저한 계급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상급자에대한 불복종은 엄한 벌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셨을 뿐이다.
⑥쿰란의 하루 생활은 엄격하게 규칙화되어 있었다. 하루생활은 ‘기도→오전노동→몸을 씻고 흰옷을 입고 함께 식사→오후노동 →함께 식사’였으며, 함께 모였을때는 침묵을 지켜야 했다. 신입회원은 입단식때 이 규약들을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공동체는 수련기간이나 입단식때의 맹세, 규칙적인 기도시간등이 없었다.
6.종교의 형식들을 상대화시키는 이유
예수가 이처럼 일체의 종교적 형식과 제도는 물론 하나님의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를 상대화시키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①근본적인 원인은, 예수가 선포하며 일으키려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기다림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 유대인들이 가진 민족적 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자연까지 포함하는 보편적, 우주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민족적 이스라엘공동체를 상대화시킨 것이다.(눅13:29-30)
②종교의 본래목적은 종교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땅위에 세우는데 있다. 성전, 율법등은 그 자체가 절대적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불과한 상대적 의미를 가질 뿐이다. D. Bonhoeffer의 말처럼 종교의 모든 형식들과 제도들은 비종교화되야 한다. 즉 모든 절대성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를 상대화시켜야 한다.
또한 예수의 존재 자체때문에 이 모든 것은 상대화되어야 한다. 예수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분이므로 성전은 상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전의 목적은 인간의 죄를 중보하고 하나님나라를 실현하는 것인데 그 목적이 바로 예수에게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눅13:34)
③의와 불의, 경건과 불경건의 기준은 종교적 형식의 준수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지키느냐 않느냐, 하나님나라를 세우느냐 않느냐에 있다. 따라서 모든 종교적 관습과 형식들은 상대화 될수 밖에 없다.
④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그 사회의 종교가 요구하는 모든 관습들과 형식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후자는 종교의 세계에서 소외되며, 더우기 그 종교가 사회의 지배종교일때는 사회로부터도 소외되어 버린다. 종교의 목적은 모든 인간의 상실된 가치와 존엄성을 회복하는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종교가 ‘종교적인’ 인간으로 자처하는 상층계급과 불경건한 계급을 2분화 시킨다. 예수는 이러한 소외된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 당시 사회의 모든 관습과 가치체계를 상대화시킨 것이다.
⑤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세계’이다. 종교와 율법의 목적도 바로 이것인데, 종교가 인간의 생명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이 된다면 이는 잘못된 종교이다. 율법의 목적도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행복에 있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오히려 행복을 억압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예수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체계를 상대한 시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율법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나라-율법과 예수
1.율법의 본래 목적과 전도(顚倒)
?율법의 기능에 대한 2견해
①부정적 견해 - 전통적인 신학은 율법의 기능을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루터는 ‘하나님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을 심판하는 반면, 복음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한다’고 보다. 이같은 율법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구약성서와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연결되고 결국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사건도 정당화 시키는 유태인 배척주의(antisemitis)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들은 바울의 견해중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다’(롬7:12), ‘율법은 신령하다’(롬7:14)는 귀절에 대해서는 침묵하였고,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으며(갈3:10),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3:13)는 귀절만을 강조하였다.
②긍정적 견해 - 그러나 K.Barth, D.Bonhoeffer는 구약과 율법을 긍정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결국 신학자들의 입장은 정치적입장을 반영한다고 볼수 있다.
그럼 율법을 어떻게 볼것인가? 율법은 크게 나누어 ㉮하나님에 대한 제의나 종교적 의식에 관한 종교법(cultic law)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회생활에 관한 도덕법(moral, civil law)으로 구성되 있다. 이 율법의 기본정신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이웃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의무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보호하며 특히 약한 자들의 생명의 기본 권리를 보호하여 주라고 명령한다.(신24:4,14, 안식일계명, 안식년, 희년의 계명) 즉 율법의 근본목적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는데 있지 않고, 인간을 위시한 모든 피조믈의 평화로운 삶의 세계를 실현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다”(롬7:12)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율법의 본래 목적을 망각하고 율법주의에 빠졌다. 이제 율법의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율법의 세부조항을 지키느냐 않느냐는 형식주의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율법은 인간이 자기의 의를 주장할수 있는 수단이 되어 자기 교만에 빠진 인간을 양성했고, 반대로 그 율법조항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게 되었다.<바리새인과 과부의 기도, 간음한 여인사건>
또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킨다는 미명으로 하나님의 참뜻을 교묘하게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인간적인 계명들과 사회의 통념적 윤리와 도덕을 지키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와 자비는 실천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자기를 의로운 자로 착각하며 다른 사람의 과실을 보았을때는 무섭게 정죄하는 인간을 양산한 것이다.
2.율법의 정치적 기능
예수당시 율법은 종교적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적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결합되어 있었고 종교지도자는 사회, 정치적 지도자의 위치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대사회를 결속시키는 힘은 율법에 있었는데, 이 율법은 당시 종교,정치,사회지도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은 모든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는데, 일반 평민이 그 복잡한 율법조항을 외우고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따라서 율법은 친로마적인 정치,사회, 종교지도층의 전유물로 그들의 신분과 특권을 보장하여 주었으며 그 결과 그 사회의 체제를 보장해 주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단순히 종교적 이유만이 아니라 그들이 그 사회의 기존체제를 유지하고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 특권을 보호하는데에 율법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3.율법의 상대화-사회체제의 상대화
가.예수는 정결에 관한 할라하를 상대화시킨다.(막7:17-23) 예수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어도 좋다고 했다. 중요한 문제는 마음의 정결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제의적 구분을 폐기한다. 이는 “하나의 종교사학적 전환”이다.
나.예수는 안식일에 대한 할라하를 상대화시킨다. 바빌론 포로시대 이후 할례와 안식일은 가장 중요한 ‘계약의 표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안식일 계명에 대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안식일에도 밀이삭을 따먹어도 좋다고 말하며, 병자 치료는 거의 안식일에 일어난다. 인간은 안식일의 주인이며,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예수는 종교-정치지도자들의 위선을 비판한다. 그들은 할라하를 지키는 것 같지만, “교묘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막7:9-13), 율법의 정의와 자비는 저버린다.(마23:27)
또한 예수는 율법과 모세의 권위를 상대화 시키고 자신의 권위를 더 높게 세운다.(산상설교의 6명제-“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태도는 예루살렘성전과 제의를 상대화시키는 데까지 확대된다. 예수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할 필요가 없다, 이 성전을 헐라. 3일만에 다시 세우리라라고 말하며,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두 렙돈(156원정도)을 더 기뻐하신다. 종교와 정치가 결합된 사회에서 율법을 상대화시키는 이러한 예수의 행위는 곧 정치체제의 상대화를 의미했다.
4.왜 예수는 율법을 상대화시키는가?
가.결의론(Kasuistik)에 의해, 삶의 구체적인 상황이 생길때마다 계속 새로 생겨난 계명들이, 하나님의 참뜻을 실천하기는 커녕, 오히려 율법의 본래의 목적을 저버리며, 정말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감추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나.선한일에는 항상 상이 따르기 마련인것 처럼, 율법의 조항들을 지켰을때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또 그 이상을 지켰을때는 더 특별한 상을 기대하게 되고, 이는 혹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때의 상쇄수단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다.예수가 율법을 상대화시킨 목적은 “하나님의 요구의 철저화”에 있다. 예수는 교회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새로운 율법의 시여자’가 아니다. 그는 결의론이나 율법의 체계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의 글자가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요, 중요한 것은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있었다.
라.율법의 본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계시며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속에서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물론 모든 규범과 질서가 철폐되어서는 안되지만, 피조물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오히려 피조물의 생명을 억합하고 파괴하는 규범이나 제도는 상대화 되야 한다.
마.율법이 사회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던 당시 사회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박탈당하고 소외된 사람의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들을 해방하고자 할때, 예수는 그 사회의 기초를 형성하는 율법을 상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5.“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율법중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이중계명으로 대답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이 자기의 고통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사마리아사람은 아무 종교적 이유없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이는 그 마음속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때문이었다.
예수는 사랑의 이론이나 학설이 아닌 실천을 요구했다. 사실 온 인류와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기는 쉽지만 바로 곁에서 고난당하는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자비를 베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먼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것이다. 그럼 이웃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곧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이 이웃사랑의 기준이 되야한다는 것이다.
그럼 예수가 말하는 이웃은 누구인가?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곧 나의 이웃이다. 예수는 이웃사랑을 요구할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한다.(마5:43-48) 즉 예수의 사랑은 혈통과 인종과 민족과 국경의 한계를 초월한 사랑이다.
이런 예수의 사랑은 단지 개인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공적인 차원을 가진다. 억압과 착취당하는 이웃을 돕고자 하는 사람은, 그들을 억압, 착위하는 구조를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6.예수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가 율법을 상대화시킨 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목적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율법의 근본목적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완성된, 슬픔과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하늘과 새땅인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며, 예수는 이를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써 완성하셨다. 즉,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년의 계명을 선포하고, 정의를 외치며 율법을 상대화시키는 예수의 행동은 불의한 자들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의 자기증명이요 율법의 궁극적 완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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