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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정보화사회와 교회의 역할/급변하는 흐름 속의 문화와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책임

by 은총가득 2022. 1. 1.

 

 

정보화사회와 교회의 역할

 

 

Ⅰ. 들어가는 말

 

Ⅱ. 정보화 사회와 교회의 변화

1. 미래 정보사회의 도래 2. 정보화 사회의 의미 1) 정보에 대한 논의 2) 정보화사회의 정의

 

Ⅲ. 정보사회에 대한 신학적 해석1. 성경과 첨단정보의 비교 2. 말씀과 정보화, 설교

 

Ⅳ. 정보화사회의 교회선교의 실천적 움직임

1. 선교 Media의 변화 2. 선교 실천의 역할 변화  3. 정보제공자로서의 교회

 

Ⅴ. 나가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오늘의 현실속에서 정보화를 제외한 인간활동은 기대할 수 조차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또한 오늘날 우리의 목회 현장은 ‘변화’라는 것에 뒤덮여 있다. 무엇이라고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변화’라는 단어는 별다른 무리없이 대중의 호감을 얻어낼 수 있는 단어이다. 거기에 덧붙여 수많은 모임과 연구소, 세미나에 후렴구와 같이 붙어 있는 ‘21세기’란 말도 역시 ‘변화’라는 말 가운데 들어 있는 수 많은 의미 가운데 하나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변화’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꿈틀거리며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 시대의 변화를 규정짓는 요소로 이 시대의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는 분명히 ‘정보화’이다.

 

분명히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사회는 분명 신학하는 자에게나, 목회하는 자에게까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질 것이 분명하다. 그 질문은 ‘다가오는 미래사회의 정보화 변화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적어도 세가지 반응을 보여왔는데 그것은 적응, 거부, 변혁이다. 다가오는 미래사회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속단은 아직 이르다. 현재 미래사회에 대한 우리의 교회 현실 반응은 세가지 적응과 거부, 그리고 변혁 이 세가지를 모두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에게 ‘정보화’란 단어는 현재의 목회현장과는 상관없는 것이며, 현재의 교회현장과는 거리가 먼 주제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화 사회에 대한 질문조차 아무 의미없는 질문일 수 있다.

 

21세기를 불과 3년 앞둔 현대사회의 목회현장, 또는 삶의 자리는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목회현장의 변화에 따른 목회의 본질과 형태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고, 또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새로운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목회의 기본 요소인 설교와 목회행정을 어떻게 바람직하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정보화 시대의 도래를 보는 신학도로서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과학과 신학의 아노미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가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공수정, 생명공학, 우주과학, 물리학 등의 과학적 진보는 그동안 신의 영역으로만 남겨 두었던 종교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생명의 신비는 유전공학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고, 창조의 섭리는 우주과학과 생명공학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 시대가 오고 있다. 인간의 손으로 생명을 탄생시키는 인공수정과 종의 변화를 꾀하고 있는 유전자 합성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실존적 인간의 존엄과 신의 권위에 도전해 오고 있다. 이제까지 교회는 과학의 진보에 대해 팔짱 끼고 관망하는 입장에 서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앞으로 다가오는 정보화 사회는 세계는 물론 교회와 인류의 사고를 전환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다가오고 있다.

 

이에 이 글은 이미 도래해 있는 정보화사회를 전망해 보고 효과적인 교회의 역할과 대응방안을 알아본다. 정보화 사회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교회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목회의 현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시대적 변화를 멀리 내다보고 미래의 목회를 준비하는 한국교회가 이런 현실적 변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 라는 현실적 질문과 함께 이에 대처해 가는 미래적 목회의 방향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

 

Ⅱ. 정보화 사회와 교회의 변화

 

1. 미래 정보사회의 도래

우리에게 미래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미래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시대와 역사의 한 복판에 서서 예언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신학도라면 누구나 다가오는 미래사회에 대해 예측하고, 변화되는 세상 가운데 불변의 복음을 해석하여 선포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관심은 역사 이래로 지속되어 왔지만 근래처럼 미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적은 없다. 그만큼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증거이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공간의 확대라는 면에서 인류는 우주와 해양의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라는 새로운 공간의 확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 새로운 공간의 시민은 인종과 국적, 지역과 거리를 초월해서 엄청난 숫자로 늘어나고 있다.

 

둘째로, 기술혁신은 이전의 어떠한 발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우마차에서 철도로 바뀌었던 기술혁신의 파급이 산업혁명을 가속화 시켰듯이, 이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되는 혁명적 진화에 힘입어 다가오는 정보화 사회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나이스비트(John Naisbitt)는 1982년 출판된 그의 저서 ?메가트렌드(Megatrends)? 에서 80년대에 일어날 다음과 같은 변화를 예측한 바 있다.

 

나이스비트의 예견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이전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강제적 기술에서 첨단기술 하이터치(high touch)로,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서 네트워크형으로, 집중에서 분산으로, 양자택일에서 다양한 선택으로 변화될 것을 예측 하였다. 그 외에도 국가경제에서 세계경제로, 단기에서 장기로, 제도적 원조에서 자조(自助)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참여의 민주주의로, 북에서 남으로의 변화도 함께 예견한 바 있다.

 

그가 예측한 것은 대체로 적중되었거나 대부분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그는 80년대 예측의 적중함에 용기를 입어 90년대와 새롭게 다가오는 2000년대의 메가트렌드를 그의 저서 ??메가트렌드 2000??에서 제시하게 되었다.

그의 미래사회에 대한 예상은 희망적이고 활기에 차 있다. 그의 예상이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의 시대에서 실현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그가 예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현재 진행중이거나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가장 최근에 기독교계에서 미래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몇 차례 미래사회에 대한 주제로 강연을 가지기도 한 연동교회 목사 이성희는 현장 목회자의 입장에 서서 미래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축약해 다음과 같이 미래사회의 변화를 예측하였다.

 

여러 학자들의 미래 예측이 유토피아(utopia)적이든 디스토피아(distopia)적이든간에 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미래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급속하게 이전될 것이며, 미래사회의 변화의 핵심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근간으로 하는 삶의 변화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삶의 변화는 이제까지 인류가 경험한 것 보다 훨씬 빨리, 광범위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다양한 변화를 가져오는 핵심 요소인 ‘정보화 사회’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2. 정보화 사회의 의미

1) 정보에 대한 논의

정보란 사전에 의하면, ‘정황의 알림’이라 설명되어 있다. 정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정(情)은 ‘의미등의 내용’을, 보(報)는 ‘알리는 형식’이 된다. 즉 정보란 ‘의미’와 ‘형식’의 두 가지 혼합체인 것이다.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어떤 형태로서 표현한 것이면 모두 정보가 될 수 있다. 영어의 ‘information’은 역시 라틴어의 ‘infomare’에서 왔다. 그 의미는 ‘in+form’이다. in은 ‘~으로 한다, ~에 준다’는 뜻이고, form은 ‘형체’란 뜻이다. ‘형체를 갖춘다, 틀을 짠다’라는 것이다. 무질서하게 있는 것을 구별해서 관련을 맺어 준다는 뜻이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무질서(또는 혼돈, chaos)에 질서를 준다’라고 할 수 있다.

 

정보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첫째로, 시한성을 가진다. 정보는 의사결정을 위한 자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최신정보일수록 그 가치가 높다. 둘째로, 비전이성이다. 셋째로, 축적효과성을 가진다. 정보는 생산·축적될수록 가치가 커진다. 넷째로, 신용가치성이다. 다섯째로는 무한가치성을 지닌다. 여섯 째로, 무형성의 특징을 지닌다. 일곱 째로, 보편다재성이다. 여덟 째로는, 매체의존성을 가진다. 아홉 째로, 표현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환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정보는 내용의 변화없이 한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예로 백과사전을 CD-ROM으로 제작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변환이 없고 단지 매체만 변화될 뿐이다.

 

위와 같은 정보의 특징대로 정보는 일단 한번 축적이 되면 계속적으로 가속도가 붙게 되고 이러한 관성에 의해서 정보의 주권자가 힘을 지니게도 되고,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도 있다. 최근에 와서 많은 정보제공업체가 새롭게 창립되거나 규모를 확장해 가는 것은 정보가 앞으로는 실체적인 상품으로서 가치를 창출해나가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정보의 가공, 집합으로서의 ‘정보화’, 나아가서 정보에 중점을 두는 ‘정보화 사회’란 무엇인가 살펴보도록 한다.

 

2) 정보화 사회의 정의

정보화 사회라는 개념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1962년 미국의 경제학자 프리츠 마흐럽(Fritz Machlup)으로, 지식산업이 주가 되는 ‘지식사회’를 예견하여 주장하였다.

‘정보사회 (Information Society)’라는 명칭은 1960년대 우메사오타다오(梅棹忠夫), 하야시 유지로(林雄二郞)등의 일본학자들이 명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3년 1월 일본의 우메사오타다오는 정보사회를 ‘The age of spiritual industries'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는 사회진화의 정도가 농업, 물질산업, 정신산업의 구성비율에 따라 결정되며 발달된 사회일수록 정신산업의 비중이 확대된다는 논리를 근거로 인류발전의 3단계를 설정하고, 현대가 ’물질산업 중심사회‘에서 ’정신산업 중심사회‘로의 이행선상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앨빈 토플러는 ?제 3의 물결?에서 주장하기를, 인류사회는 수천년간 제1의 물결(농경사회)을 타왔으며 그 후 수백년간 제2의 물결(산업사회)을 지나왔다고 전제하면서, 이제 인류사회는 고도 정보화 사회로 일컬어지는 제3의 물결에 빠른 속도로 휩싸여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말하면, 인류는 3000년에 걸쳐 농경사회를 이루고, 그후 300년에 걸쳐 산업사회를 구축하였으며, 최근 30년에 걸쳐 정보화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현 시대를 ‘고도정보화 사회’로 정의하였다.

위의 미래 학자가 예견한대로 이 시대는 정보화 사회로 전환되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전이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또 하나의 파라미터로서 직업인구의 변화를 예로 들 수 있다. 지난 100년 사이에 미국사회의 변화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정보처리기술과 통신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이른바 ‘정보화 사회’라는 새로운 큰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거대한 산업 사회의 물결은 정보의 무한한 가치 창출과 배분에 기초를 둔 정보화 사회로 이전되면서 ‘제3의 물결’에 밀려 퇴조하고 있다. 컴퓨터 기술과 통신 기술의 획기적 발전, 혹은 융합은 정보혁명을 일으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우리의 생활 깊숙히 들어와 의식구조에까지 대변혁을 가져오고 있다. 특히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기술은 다양한 개개의 표류하는 정보들을 체계화하며, 정보전달시간을 더 한층 단축시켜 변화의 속도를 가속시키는 정보화사회의 주역이자 총아로 각광받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항상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과, 현대사회에서 컴퓨터기술과 통신기술이 어느 기술보다도 가장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지배적 사회형태인 산업사회가 발전하여 다른 차원의 사회 즉, 정보화 사회로 변화할 것임은 당연한 순리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Ⅲ. 정보사회에 대한 신학적 해석

 

거대한 문명의 전환기에 선 교회와 신학은 과연 어떻게 이 시대를 보고 있는가? 아직까지 다가오는 세계에 대한 교회와 신학의 뚜렷한 신학적 통찰이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대화 30주년 기념으로 “멀티미디어의 충격과 교회의 대응”이란 대화모임을 가진 바 있고, 대한성서공회에서는 창립 100주년을 기념으로 “멀티미디어 시대의 교회”라는 주제로 성대한 강좌를 개최하여 이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을 증폭 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대한기독교서회에서는 미래사회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 신학적 고찰을 주제로 삼는 “21세기 교회와 사회 세미나”를 매월 개최하여 목회자와 신학도에게 다가오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최근의 정보통신혁명의 부산물로서 가장 거대한 망으로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인터넷을 포함한 몇가지 기술혁명과 신학과의 관계를 접목시켜 보고자 한다.

 

1. 성경과 첨단 정보의 비교

성경의 바벨탑은 인류 최초의 합동 사업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고, 어떻게 해서 그 대공사가 어이없이 끝나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바벨탑 이야기 속에는 인류가 그렇게도 많은 언어를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나온 이래 하나님을 닮은 ‘창조성’으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창조하였고, 도구를 이용하여 기능을 개선해 왔다. 도구와 재료의 현저한 발전과 함께 인간은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고 결국 바벨탑이라는 것으로 상징되는 인류 최초의 거대한 연합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구웠고, 돌은 벽돌로 대체 되었다. 진흙보다 좋은 접착력을 가진 역청이 건축재료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바벨탑을 세우는 교만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언어의 소통(疏通)에 혼란을 줌으로 그들의 무한한 욕망을 잠재우셨다.

 

하지만 바벨탑의 저주를 인류는 세계를 묶는 의사소통 수단(global communication)인 인터넷으로 극복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터넷은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국제망정보센터인 InterNIC(International Network Information Center)은 96년 7월 등록된 도메인 수가 468,000개라고 밝혔다. 이중 기업-상용 기관 도메인 명인 .com 이 89.6%인 419,360개로 압도적이며 비영리기관 도메인 .org가 6.2%인 28,839개, 네트워크 관리 도메인 .net 가 3.7%인 17,115개, 교육기관 도메인 .edu가 0.6% 인 2,686개로 나타났다.

 

정보화 시대는 바야흐로 글로벌 네트웍(global network)을 구축하였고 갖가지 전자,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과 단말기의 보급으로 인하여 세계는 한 ‘마을’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온 세계를 실시간(real time)으로 묶어내고 있다. 기존의 국제전화선을 무색하게 만든 ‘인터넷 폰(internet phone)'은 큰 호응을 일으키며 인터넷 사용자들로 하여금 전 세계인과 부담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위성통신 시설을 비롯한 막대한 금액의 장비가 있어야 가능했던 화상회의 시스템은 개발되어 상용화 되기도 전에 탁구공만한 카메라와 전화선, 모뎀만 있으면 지구 끝의 어느 누구와도 얼굴을 대면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터넷 화상전화’에게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신기술은 실용화(實用化) 단계를 넘어서서 범용화(汎用化)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하나의 선, 하나의 미디어 매체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모두에게 제약없이 전달되어 지는 것, 바로 그런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현실화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소한 질문을 던져 본다. ‘멀티미디어가 교회와 신학에 미치는 영향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기술이 과연 우리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앞으로 이런 물음은 더욱 깊게, 분화되어 제기될 것이다. 우리 인류가 직면했던 가장 난제였던 ‘대화의 통로를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가?’는 물음은 하나의 성령과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멀티미디어를 통해 교회는 처음의 바벨탑과는 다른, 새로운 바벨탑을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와 신학이 인터넷 시대에 어떠한 모습으로 대처하고 변화되어갈 지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하고 투자해야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미 영국성공회는 95년 7월 24일 인터넷에 사이버교회를 세우고 이곳에서 고해성사를 받기로 하고 사제의 설교 및 성경해설 검색등이 가능한 서비스를 개시하여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이는 기존 교회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획기적인 발상이다. 전통적인 신앙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위기로 볼 수 있지만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가깝게 다가 가려는 영국교회의 참신한 시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교회는 오랫동안 대중매체(신문, 출판,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등)는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야 한다는 확신을 지녀왔다.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이루어지는 그 ‘선물’의 목록은 계속하여 확장되어 왔다. 인공위성, 컴퓨터, 가정의 비디오와 계속 발전해 가는 정보전달 수단과 같은 현대의 이기들은 인류 가족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 형태를 바꾸고 새로운 기술로 진보를 이루더라도 이 새로운 선물들의 목적은 재래식 대중매체의 목적과 동일한 것이다. 그 목적이란 바로 형제애와 상호 이해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형제된 우리가 서로 가까워지게 하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인간 운명의 추구가 더욱 진보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커뮤니케이션 매체는 개인과 인류 가족 전체의 더욱 더 긴밀하고 원활한 관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인간에게 맡겨진 놀라운 도구이다.

 

2. 말씀과 정보화, 설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이 선언은 인류의 역사가 ‘정보의 역사’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곧 정보와 함께 하셨고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근원도 말씀(정보)으로 이루셨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신의 창조와 우주적, 역사적 주권은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흑암과 혼돈의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커뮤니케이션 체제를 극복하고 거부하셨다. 그 후로 하나님은 제사의식을 통해 자신과의 네트웍을 유지하기를 원하셨다. 제사장을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자로 하여 드리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과의 화해를 이루시고 당신의 백성들과 교류하셨다. 그리고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회복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한다”(요한복음 1:14)는 말씀은 바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커뮤니케이션의 극대화된 표현인 것이다. 그 말씀은 살아있는 운동력을 지닌 인격체로까지 묘사되었고, 육체가 된 로고스는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거대한 정보망인 인터넷과 현란한 멀티미디어를 타고 흘러 다니는 정보는 수없이 많다. 마치 창조 이전의 혼돈상태(Chaos)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도 말씀(Logos)은 육신(Bit화)이 되어야 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빌 2:6-7)?

 

위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신(神)이 세상에 현현(顯現)한 사건으로서의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로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 중의 사건이다.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인 오늘날 이 성육신 사건은 다시 한 번 나타나야 한다. 혼돈의 인간세상에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셨듯이 혼돈의 현대사회 속에 새로운 말씀으로 부활하셔야 한다. 오늘날 말씀의 성육신 사건은 정보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 정보사회가 구축하고 있는 정보는 대부분 교회 밖의 영역으로 제한되어 있다. 네트웍을 통해 유통되는 정보는 오직 자연적 지식이 주종을 이룰 뿐, 교회가 제공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지식의 게임’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우리가 보다 관심 갖는 바는 그가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대중적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가장 아름답게 활용하셨다는 점이다. 물론 글도 써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을 읽고 쓸 줄 아는 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귀 있는 자들은 다 들을 수 있도록 생명의 진리와 도를 그토록 아름다운 말로써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감격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정말 중요했던 것은 말 그 자체가 아니라, 말을 통해 전달되는 사랑의 인격이요, 정의로운 진리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 분에게는 구전이 되었든 멀티미디어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주어진 대중의 미디어를 최대한대로 아름답게 활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말을 하되 말에 사로잡히지 않았듯이, 문자가 되었든지 아니면 소리나 영상이 되었든지 매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교회는 아직도 ‘설교’가 유일한 정보전달 수단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말씀은 육신이 되어 가장 효과적인 하나님과의 매개체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설교와 하나님의 복음의 전달 매체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정보화 사회의 길목에 서서 과연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어떻게 성육화될 것인가?’ 라는 질문인 것이다.

 

Ⅳ. 정보화사회의 교회선교의 실천적 움직임

 

1. 선교 Media의 변화

1848년 처음으로 국제 뉴스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던 폴 로이터(Paul Reuters)는 메시지 전달 시간을 줄이기 위해 비둘기를 이용했다. 이 역사적인(?) ‘텔레커뮤니케이션 혁신’을 통해 로이터 통신은 다양한 금융시장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로이터가 설립한 로이터통신은 비둘기 대신에 광섬유와 인공위성을 통해 세계의 상품 정보와 주식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기독교 복음은 항상 인간이 사용하는 미디어(media)와 국가기반시설(infrastructure)을 이용하여 전파되었다. 구약시대에는 구전과 글로 전달되었고, 사도 바울은 로마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건설한 군사도로와 발전된 항해기술을 이용해 지중해를 누비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오늘날 선교사들은 비행기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다가올 고도정보사회에서는 무엇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될 것인가?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 highway)를 통하여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활자매체를 통해서 개신교는 개혁의 주도권을 쥐었다. 한국사회에 기독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부터 성서라는 활자매체는 복음을 싣고 와 우리민족을 구원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달매체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천되어가고 있다. 이 시대는 전자매체의 시대로 급속도로 이동되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이동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시대이던 가장 첨단의 전달매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한 것이 기독교였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것은 “왜 교회가 전자매체의 열린 공간을 복음의 장으로 활용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이미 그 답이 확정적으로 내려져 있는 어리석은 질문이다. 전자매체를 활용하는 복음전도야말로 장차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새로운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이다. 이미 우리에게 그 칼은 쥐어졌다. 좋던 싫던 간에 모든 정보는 영상정보로 또는 전자활자가 되어 전파를 타고 각 가정으로, 인터넷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의 CATV, 라디오, 텔레비젼을 통한 사역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볼 것이다.

 

2. 선교 실천의 역할 변화

현재 인터넷은 세계적으로는 말할 것 없이 국내에서도 그 앞을 한치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 이 속도로 가속도가 붙는다면 전국의 모든 초, 중, 고, 대학은 말할 것 없이 각 가정과 사회에 인터넷이 미치는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자라고 있는 10대, 20대, 그리고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네모난 모니터를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세상을 보는 세대이다. 모니터 속의 세상에 자신들만의 공간을 형성하고 마음껏 그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기업의 막대한 투자에 힘입어 엄청난 선교의 장이 마련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미비하기만 하다. 인터넷에는 현재 음란물을 공급하는 수백개의 회사들도 앞을 다투어 미래의 고객들에게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1995년 5월 미국 상원사무위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외설스럽고 추잡하며, 저속하고 음란한 정보를 전달할 경우 10만 달러의 벌금과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률안을 통과 시켰지만 아직도 가상공간 안에는 ‘정보의 쓰레기통’이라는 별명에 맞게 온갖 유해한 정보들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도 100만이 넘는 젊은이들이 매일 가상공간 속에 들어와 살지만 그들에게 전도지 한 장 건네줄 복음적인 공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실로 가상공간은 야누스와 같이 양면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한 우물이 쓴물고 단물을 낼 수 없다고 했지만 모니터에는 음란한 화면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성경말씀과 찬송이 흘러 나오게 할 수도 있다. 이 선택의 이면에는 교회가 이제 선교의 장으로서 사이버스페이스를 받아 들이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지역선교, 해외선교로 그 눈을 넓혀온 한국교회가 마지막으로 눈을 돌릴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사이버스페이스 선교일 것이다.

 

영국성공회가 사이버교회를 세운 이유는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주말시간을 희생시키지 않으려는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이 교회를 찾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지탄하고 한숨만 쉴 것이 아니라 교회를 이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코 신앙생활에 게으른 사람들에게 집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거리상으로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 공동체로서의 나눔이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천리안과 나우누리 등에 작은 모임을 개설한 교회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전과는 달리 매일 교우들과 대화와 의견을 교환하며 수평적인 언로가 막혀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마음껏 자신의 생각을 성도들과 나눌 수 있어서 좋다는 의견이 대다수의 의견인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의 교회관은 모이는 교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흩어지는 교회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의 교회는 흩어지는 성도들을 통해 선교해야 하는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이 날로 강조되어 가고 있다. 흩어진 성도들이 언제든지 목회자와, 또는 교우들과 만날 수 있는 곳, 교회에 막연한 거부감이나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교회의 문을 쉽게 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열려진 가상공간의 교회는 훌륭하게 선교의 장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해 낼 것이다.

 

3. 정보의 제공자로서의 교회

앞으로의 교회는 정보의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폐쇄적 교회의 시대가 가고 개방적 교회로 전이될 것이 분명하다.

교회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정보의 창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뒤 따라 가는 교회가 아니라 과학의 수용 차원이 아니라, 과학이 가진 분명한 한계를 지적하면서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목회의 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기존의 기독교 사회단체들도 멀티미디어 문화의 사회적 “충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연대적 프로그램 개발에 힘쓰지 않으면 멀티미디어 문화는 거의 세속화, 우상화의 못자리가 되어버릴 것임에 분명하다. 이즈음에서 우리는 누가, 어떤 메시지를 생산하여, 누구에게, 어떤 가치를, 어떤 의도로, 어떤 문화적 상황하에서 효과있게 분배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발전적으로 정보의 소비자가 아니라 정보를 창출하고 제공하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의 정보화 인식이 중요하며, 다음으로 교단과 총회 차원의 정보화 추진 사업이 중요하다.

 

최인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회 멀티미디어화는 먼저 교회 내적 차원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 개교회 차원의 멀티미디어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되는 추세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대부분의 교회가 멀티미디어와 상관없이 21세기의 목회로 진입하려는 것 같다. 교회가 멀티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는 재정부족, 컴퓨터 지식의 결여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 것이 목회자 자신이다. 대체적으로는 목회자들이 오랜 전통으로 내려 온 기존의 목회방식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멀티미디어화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멀티미디어화의 최우선적인 실행과제는 현역 목회자를 위한 프로그램과 신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커리큘럼 개발이다.”

 

한신대의 주재용도 크리스챤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강조하였다.

“21세기 교회는 기존 목회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들이 바로 21세기 교회를 이끌어 갈 주역이다. 문제는 이들 사고가 기성세대 목회자와 다르다는 점이다. (중략) 결국 교회는 21세기 정보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복음선교는 실패할 것이다.”

미래의 교회가 정보의 수동적 수혜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능동적인 정보의 창출자로서 선한 복음을 사이버스페이스에 전파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는 이 두가지 갈림길에 서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를 통하여 민족이 계몽되었고, 개화가 촉진되었으며, 새로운 비젼을 가져왔던 것 처럼 미래의 교회도 앞서가는 정보창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미래사회의 견인차 역할을 감당해 갈 수 있을 것이다.

 

Ⅴ. 나가는 말

 

이제 미래는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오고 있다. 준비하고 기다리지 않으면 그 시간은 영원히 우리의 손에서 멀어져 갈 것이다. 시대와 함께 걷지 않는 교회는 퇴보되고 민중의 삶과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교회가 앞으로 이 사회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이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간파하고 그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과 함께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국가와 기업이 발 빠르게 옮겨가고 있는 사회적 변동을 교회가 앞장 서서 그 의미를 되새겨 줘야 할 때이다. 정보화 사회는 결코 낙관적인 세계만은 아니다.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란 도전이 우리 교회에 주어졌다. 정보화 시대를 맞는 한국교회, 그리고 목회현장은 새로운 도전을 진지하게 받아 들여 미래를 예측하고 이를 위한 대안을 마련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아래와 같은 목회적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의 현대화가 요구된다. 교회의 임무는 시대와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 가는가를 간파하고 인간에게 나아갈 방향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제시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래사회의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은 가부장적이고도 권위주의적인 교회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성령적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영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영은 새로운 창조, 그것의 자유, 그리고 그것의 평화의 능력으로서 교회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 가능성, 희망 안에 있는 교회가 미래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목회자의 확고한 성서적 신념 위에 열린 목회로서의 기능적 접근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는 보수화, 근본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목회자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속칭 ‘보수적 목회’의 형태는 현재의 교인을 붙잡아 놓는 효과적인 목회 방법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새롭게 다가오는 신세대들을 복음으로 이끌어 내기에는 역부족이고도 시대착오적인 방법이다. 앞으로 21세기를 이끌어 갈 교회의 주인공은 지금 자라나는 컴퓨터 세대이다. 그들에게 의미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적 근본을 확고히 가지면서도 그 해석과 전달 방법에 있어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방법과 도구를 활용하여 전달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다.

 

셋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더욱 관심을 가지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바로 그 자체에 있다. 모든 과학적 진보의 귀결도 결국 ‘인간’에게 그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란 말씀대로 영으로서의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는 ‘신령’과 ‘진정’이라는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넷째로, 과학의 한계를 뛰어 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모든 과학적 발전의 부산물들을 목회의 범주 안에 녹여 낼 수 있는 기능적 요구도 현대의 목회자들에게는 요구된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시대가 낳은 발명품을 활용하여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삼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러한 정보화사회속에서 올바른 목회를 하기위해서, 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는 예배를 회복하고 갱신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삶의 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으로 나가야 한다. 정보화시대속에서 교회의 역할을 다시한번 되새겨보며, 시대를 선도해가는 신학도들이 먼저 의식의 전환을 가져와 문명의 이기를 올바로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허락하신 우리들의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보다 발전된 내일의 모습을 기대하며 한걸음, 한걸음 나가자.

 

 

 

 

급변하는 흐름 속의 문화와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책임

 

1. 현대문화의 기조:개인주의와 다원주의(egoism & prularism)

칸트가 말하는 공통적인 지각, 또는 상식, 공동체의식, 공통선의 개념이 붕괴

그리스도인이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1)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불간섭

2) 취향의 문제 : 성(性), 종교, 윤리, 신념체계

("취향에 대해서는 논란하지 말것")

※ '취향'은 전체문화 안에서 과거에 옷이나 의복, 음식 등 주로 개인의 물질문화재의 취사선택을 의미하였으나 이제는 이 말이 다원주의 문화속에서는 과거 절대적이라고 믿던 성, 윤리, 종교의 정신문화적 차원으로까지 확대적용되고 있다.

※ 1)은 개인주의를 말하며, 2)는 다원주의를 말한다.

 

2. 현대시대의 문화적 특징 세가지

1) 세속화 : 신율적 문화에서 인간의 자율적 문화로의 이행 : 신성과 전통의 삶의 공간이 무너지고 오직 이성과 과학과 합리의 세계만 인정받게 됨.

2) 개인화 : 문화 전반에 걸쳐 객관적 진리보다는 개인의 취향에 따른 다양한 선택권을 가지게 됨.

3) 다원화 : 문화선택의 개인화는 필연적으로 문화의 다원화를 초래한다.

 

▶ 한국교회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이와같은 문화적 상화속에서 문화 다원주의, 그 가운데서도 특히 리차드 로티의 개념으로 감성적 개인주의(aesthetic individuarism)가 점차로 확산되고 있다.

 

3. 하나의 세계, 다양한 문화

1) 이 시대에 문화가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이유 : 과거는 제한된 공간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문화)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순응하였지만 교통 통신의 발달로 우리 안마당에서 세계의 온갖 문화와 사상과 입장들이 함께 공존하는 이른바 지구촌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에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화됨)

 

2)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자문화와 유입되는 문화간의 갈등 또는 문화충격이다. 그러나 문화간의 갈등과 충격 역시 교통통신의 발달속도만큼 빠르게 완화되어진다.

※ 여기서 문화변용(acculturation)의 개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문화변용이란 서도 다른 문화를 지닌 인간의 집단이 직접적, 영속적인 접촉을 한 결과 일방 또는 쌍방의 문화가 변화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인데 문화접촉이 있으면 모방이든 상호교환적이든 반드시 문화변용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우리 경우는 서구문화와의 접촉시 모방쪽으로 변용이 일어남으로써 세대간 다양한 갈등을 표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3) 이와같은 세계화 추세의 두측면

① 하나의 세계로 나아감 : 교통, 통신의 발달. 자본주의의 확산-UIP영화, 코카콜라 등 거대기업의 진출 / 문화제국주의의 조짐까지 보임 : 아메리카니즘 등

② 나라간 문화차이에 대한 인식의 확대 (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킴 - 한국인의 인사법과 탄자니아의 마사이부족의 인사법) : 선교든, 무역이든 세계로 진출하기 위해 그 나라의 문화를 습득하는 것은 필수적

 

▶ 과거 : 차이에 대한 인식은 서구문화 우월주의에 기초했으나 지금은 상호이해와 관용으로 흐르는 경향 - 힌두교를 비롯한 동양종교의 서구진출은 그 좋은 예이다.

4) 소결론 :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다원화, 차이성, 타자성을 의식하게 되고 또 전시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여러 가치관들 예를들어 서구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기독교중심주의, 강대국중심주의 등이 해체되고 이른 바 낯선 것들, 이질적인 것들, 타자들, 주변적인 것들이 복권되면서 도덕이나 윤리, 종교나 정치, 이 모든 것들이 이제는 취향에 따라 '선택가능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 다원주의가 담고 있는 핵심이다.

 

4. 문화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1) 과거 : 협의적 문화 개념 - 주로 정신적인 활동 (철학, 고급예술, 종교, 예의범절 등과 관련)

2) 현재 : 광의적 문화 개념 - '인간의 모든 의식적 활동'. '인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문화가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일상적인 정신활동과 그 부산물, 생활양식이 문화이다.

▶ 반 퍼슨: 문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5. 문화, 일상적 삶, 신앙생활

1) 그리스도인도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 그리스도인도 인간이며, 또한 문화가 인간의 삶의 방식, 또는 양식이라면 일상적인 삶에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방식으로 삶을 영위할 것인가에 대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 - 성경이 원하는 삶의 방식 (성적인 문제, 결혼, 재물관, 일의 방식, 휴식의 방식, 이웃과의 관계방식, 신앙생활 방식 등등)

 

2) 성경공부에 관한 편견이 전환되어야 할 시점 : 종교생활, 예를들어 기도하는 법, 전도와 헌금 생활, 교회출석과 예배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공부의 전부라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즉 실제 삶의 방식들, 예를들어 소비생활, 재물관, 가족관계, 직장생활, 장사하는 일, 이성교제나 성생활, 정치나 권력문제, 청소년이나 노인문제 등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줄 수 있는 성경공부가 필요하다. 이중적 그리스도인을 극복하고, 경건의 모양보다는 경건의 능력을 기르는 성경공부가 요구된다.

 

3)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문화는 영성과 관련이 있다. (고전 10:31 참조)

예를 들어 돈의 가르침(마 6:24) : 돈은 사단적인가? 가치중립적, 아니 재물이나 돈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지만 영성이 부족해서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성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성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쁨만큼이나 인간이 누리도록 주신 선물이다.(창 1:28, 전 9:9, 요 3:29) ⇔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시킴.

 

4)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전영역이 그리스도의 구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Al Wolters)

① 결혼은 회피대상이 아니라 거룩하게 해야 할 영역

② 감정은 억눌러야할 대상이 아니라 정화되어야 할 영역

③ 성행위는 거부되어야 대상이 아니라 구속(救贖)되어야 할 영역

④ 정치는 출입금지 구역이 아니라 개혁되어야 할 영역 - 그리스도인 정치참여에 대한 답변

⑤ 예술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으로 주장해야 할 영역

⑥ 사업은 세속에 맡겨야 할 것이 아니라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준에 일치하도록 재조정해야 할 영역

 

▶ 이것들이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전체(영역)가 문화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문화적 지향점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 이 둘 중, "하나님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며, 바울의 표현처럼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1)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문화는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고 항상 성경을 잣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지난 번 발표자가 CBS에서 밝혔듯이 좋은문화란 성경을 잣대로 평가하여, 하나님의 뜻과 창조질서에 순종하는 문화가 좋은 문화이다.

2) 그러므로 이 시대에 특히 대중매체를 통하여 생산되어지는 모든 문화들은 성경에 비추어 평가되어야 한다. (문화수용자 또는 소비자운동이 요구 - 문화의 생산이 참여도 필요)

3) 문화 수용자 운동의 잣대는 발표자의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문화적 자유를 위하여"라는 글을 토대로 원용하여 검토해볼 수 있다. (건강한 삶을 제시하느냐, 연약한 자에게 거침이 될 수 있느냐, 다른 사람의 유익과 덕을 세울 수 있느냐 등등).

4)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책임

①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영성이 요구

② 더불어 사는 이웃도 좋은문화를 누려야 - 기독교시민운동이 요구(문화운동의 필요성).

 

■ 대결론: 기독교에 있어서 문화는 다원화시대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이며 하나님이 주신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삶만이 좋은문화이다. 그리고 예수문화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본을 본받는 삶 즉,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한 삶과 타인을 위한 삶을 분리하는 자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임을 자각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