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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에누마 엘리쉬 (바벨론의 창세기)/ 사사기 1-3

by 은총가득 2021. 8. 24.

 

에누마 엘리쉬 (바벨론의 창세기)

 

“바벨론의 창세기”라고 불리는 에누마 엘리쉬는 영어로 번역하자면, When Above 라는 뜻입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 신들의 세계에서 벌어진 싸움과 그 싸움의 결과로 생겨난 천지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원래 이 에누마 엘리쉬의 기록 목적은 Marduk을 찬양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안에는 많은 메세지들이 있습니다. 이 메세지들은 강의시간에 나눌만한 내용이 되겠고요. BIBLIA에서는 에누마 엘리쉬의 내용이 어떠한지 간략하게 A3 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흔히들 에누마 엘리쉬를 성경의 천지창조와 인간 창조의 이야기와 비교하며, 그 유사성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요. 일단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고 동의 또는 반대하지 마시고, 직접 읽어 보시고, 그 내용의 간략한 것만이라도 이해하신 후에 나름대로의 판단을 스스로 내리시면 되리라 생각됩니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BIBLIA 성경공부 시리즈 – 사사기 [1] 시작하는 이야기

 

사사기는 사사들이 주인공일까?

 

(사사기의 구조) 책의 이름 자체가 “사사기”이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사사들의 이야기가 “사사기”의 중요한 관심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사들이 살았던 삶의 이야기가 “사사기”라는 책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좋은 소재의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체 책 “사사기”를 보세요. 이 긴 책에서 사사 개인의 삶을 기록한 이야기들은 3장부터 16장까지입니다 (삿 3:7-16:31). 그럼 나머지 1-2장은요? 그리고 17-21장은요? 사사기 전체가 스물 한개 장(章)인데, 그 중에서 일곱 개 장(章)이 사사들의 일화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정확하게 2/3는 사사들의 이야기, 그리고 1/3은 사사들이 아닌 다른 이야기들로 짜여진 책이 사사기입니다.

 

 

 

 이런 형태를 “보따리 형태”라고 부르고 싶어요. 3장부터 16장까지의 사사들의 이야기를 보따리로 싸서 묶은 것이 사사기라는 거지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사사들과 함께 살면서 마치 전기문(傳記文)처럼 기록한 책이 “사사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던 사사들에 대한 기억과 기록들을 오늘날 우리들이 읽는 성경과 같이 두루마리 하나로 엮어서 기록한 것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라는 두루마리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그러니까 이 두루마리를 기록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겁니다. 그 이유와 목적을 바탕으로 사사들의 이야기를 구성했겠지요? 사사들의 이야기 보따리를 꾸릴 때, 사사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담을 텐데, 사사들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보따리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감,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읽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에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 사사기가 예언서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타낙”(תנ”ך)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을 구분할 때, (1) 율법서, (2) 예언서, (3) 성문서, 이렇게 세가지 분류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율법서를 ‘토라'(תורה)라고 하고, 예언서를 ‘네비임'(נביאים), 성문서를 ‘케투빔'(כתובים)이라고 부르는데요. 이 세 분류의 히브리어 첫 글자들을 모아서 만든 단어가 “타낙” 입니다.

 

 

 

이렇게 나누다보니, 좀 의아한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는 누가 읽어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벌어진 전쟁과 사건들을 나열한 역사 기록”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경 분류에 따르면 예언서(전기예언서)에 속한다는 거지요. 그러고보니, 전기 예언서에 들어가는 책들이 다 이상해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가 모두 예언서라니 말입니다.

 

 

❖ ‘예언’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역사를 바라보는 유대인의 시각입니다. 우리는 “역사” 하면, 과거에 일어났던 이야기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역사 이야기를 과거에 일어났던 옛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의 역사 이야기가 우리의 미래를 보여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언’ 하면, 대개 “무슨일이 앞으로 벌어질까?” 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요, “내가 네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히 이런 일을 당하겠구만. 운명은 피할 수 없어. 이미 신(神)이 정해 놓은 것이니까. 그래도 꼭 그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액땜한다손 치고 이렇게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을 말하는 사람들을 예언자라고 부르지 않아요. 이런 사람들을 ‘무당’과 ‘박수’라고 불렀지요. 율법에 의하면 이렇게 운명적인 미래를 점치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 사형에 처해야 되는 사람들로 분류해 놓았습니다(출 22:18; 신 18:9-12).

 

그러면 구약 시대에 예언자들이 하는 일들은 무엇이었을까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율법의 교사이자 일종의 역사가들이었습니다. 조금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볼께요. 사람들이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이런 모양이거든요. 그런데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이미 예전에 우리 선조들이 한번쯤 다 해보았던 것들입니다. 예언자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던 과거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옛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우리 선조들이 과거 바알브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세요. 광야에서 했었던 일을 생각해보세요. 잘 알다시피, 우리 선조들은 이러이러했잖아요.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했잖아요. 그래서 그들이 요렇게 된 것 다 알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요?”

만약 잘못된 길을 걸었던 조상들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들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선조들이 걸었던 그릇된 길을 그대로 따라 걷고 있다면, 예언자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여러분들의 현재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그렇게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벌을 받았던 우리 선조들과 별다를 바 없지요? 똑같지요? 심지어는 그보다 더 어긋나 있지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옛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떻게 되었지요? 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구나! 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고생 고생하다가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었구나.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 것같아요? 하나님의 기준은 바뀌지 않을테니… 여러분도 옳지 않은 길을 걸었던 우리 선조들과 별다를 바 없는 미래를 맞이하겠군요.”

구약 시대의 예언자는 과거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율법)과 그 말씀을 받고 이 땅에서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의 열매를 배우고, 그 역사를 기준 삼아 하나님의 영으로 오늘을 비평하고, 내일 우리가 걸어가야할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예언자는 과거를 배워 오늘을 비평하고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누가 참 예언자인가, 그리고 누가 거짓 예언자인가?” 구약 성경에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참 예언자라고 한다면, 그 예언자가 한 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참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큰 틀에서 틀린 말은 아닙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며,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신 18:22)

그런데, 이것 만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기준이라면, 구약 성경에는 거짓 예언자의 글이 떡허니 있는 셈이 됩니다. 요나(Jonah)요. 니느웨가 40일 뒤에 멸망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욘 3:4)은 틀렸습니다. 요나가 예언을 하자, 니느웨 왕과 대신, 그리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회개를 하였거든요.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는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예언자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서 거짓 예언자로 만든 셈이지요. 예레미야는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분하는 또 다른 기준을 말합니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라.(렘 28:9)

이 구절을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예언자가 평화를 예언할 때는 그 평화가 이루어져야만 참 예언자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예언자가 “걱정마. 잘될꺼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길에 있지 않으니, 네가 걸어가는 길에서 돌이키라. 돌이키지 않으면 너희가 이러 이러하게 되리라.” 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 사람이 그 예언을 듣고, 돌이켜서 예언자가 말했던 그 미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예언 성취의 여부와 관련없이 그는 참 예언자이다.”

 

 

❖ 예언자의 역할, 역사의 역할, 그리고 사사의 역할

 

예언자의 역할은 피할 수 없는 미래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율법을 기억하고 읽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내고, 지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영으로 오늘을 날카롭게 비평하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비추어 잘한 일에는 칭찬하고 축복하고, 과거에 그릇된 길을 걸었던 신앙의 선배들의 길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그들이 잊고 있었던 과거(율법)를 다시 기억하게 하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게 하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었다면, 예언자의 격려로 더 큰 힘을 얻고,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예전처럼 지금 이 길을 쭉 걸어가면 되는 것이죠. 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면, 예언자의 경고에 정신 차리고 지금 걷는 길에서 돌아서면 됩니다.

 

격려를 듣고 그대로 걷다가 하나님의 복을 얻으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한 그가 참 예언자가 되는 겁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결국 하나님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질책을 듣고 그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면, “결국 하나님으로 벌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예언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품은 예언자”로 인정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가장 큰 사명을 사람들의 미래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게하는 촉매제는 과거의 역사이며 율법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언은 곧 “역사를 되짚어 보면, 내 미래를 직시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같네요.

 

 

이스라엘 역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사사기를 읽으면서 “아, 사사 시대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구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하나님을 그토록 쉽게 잊을 수가 있는거야?”라며 분노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 사람들이 살았던 그 때의 삶을 날카롭게 비판하되, 현재 나의 삶을 직시하고 비교하면서, 나는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늘 마음에 품고 사사기를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앞 날이 어떨지가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 사사기는 예언서입니다.

 

 

그러면, 역사이자 예언서인 사사기 두루마리에서 소개하는 사사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사기를 영어로는 The Book of Judges 라고 합니다. “사사”라는 어려운 말로 번역해 놓기는 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재판관”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카톨릭 교인들이 읽는 성경에서는 이 책을 “판관기”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사들이 재판을 하던 사람들이었나요? 물론 드보라처럼 재판하는 일을 했던 사사들도 있습니다만, 그에 못지 않게 전쟁 지휘관의 이미지가 더 빨리 떠오르기도 합니다. 사사치고 전쟁 한번쯤은 치루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거든요. 물론 전쟁을 치루지 않은 사사도 있지만 말이죠. 사사들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재판관”, “군사 지휘관”이라는 이미지가 모든 사사들의 특징과 역할을 모두 아우른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결정의 최종 책임자”(Decision maker)라는 말이 제일 적합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민족이 곤경에 처했을 때,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정을 수행해야했던 사람. 그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 중에 가장 앞에 나서야했던 사람이 바로 사사라는 말입니다.

 

 

❖ 사사기가 순환구조라고?

 

사사들의 이야기를 묶어낸 “사사기”를 공부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사사기가 순환구조(Cyclical framework)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고, 또 교회에서도 사사기를 공부할 때 그렇게들 말합니다. 순환구조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1]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평화롭게 잘 살고 있어요. 가나안 땅에 정착하며 살다보니 삶이 조금씩 좋아지거든요. [2] 경제적인 측면에서 삶의 질이 좋아지다보니, 여유도 생겨요. 그러다보니 슬슬 타락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길로부터 멀어져 가지요. [3] 결국은 고난을 당합니다. [4] 그러고나면, 그제서야 하나님께 울부짖어요. [5] 그러면 참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사사를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사사가 이스라엘을 구원해요. [1] 다시 평화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그 다음부터는 [2]-[3]-[4]-[5]-[1]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순환 구조라고 부릅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사기의 큰 맥은 그 순환구조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두명의 사사 중에서 그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이야기는 다섯명 밖에 없고요,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사람은, 옷니엘 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머지는 사사들의 이야기는 순환구조라는 틀 안에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억지로 끼워입은 옷처럼 어색하고 불편합니다. 사사기의 순환구조는 사사기에서 소개하는 사사들의 삶,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그 사사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군상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수 있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순환구조가 사사기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전체 사사 이야기들의 절반에도 해당하지 않는 구조이니까요.

 

앞서서 “사사기”라는 책이 “보따리 형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사들의 이야기를 묶어내는 보따리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이라고도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감,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 두루마리를 읽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사사기 1-2장, 그리고 17-21장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사사기 1장부터 3장까지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왜 사사기를 기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소개하는 도입부이구요. 17장부터 21장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정말로 고발하고 싶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현주소를 농축해 놓은 총정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은, 중간에 끼어있는 사사들의 이야기들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강력한 메세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사례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 사사기 1-2장

 

사사기 1장과 2장은 시간의 순서로 보았을 때, 여호수아 23, 24장과 서로 포개어집니다. 시간 순으로 역사를 나열한다 손쳤을 때, 사사기 1장과 2장은 여호수아서 쪽에 들어가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내용을 볼까요? 여호수아가 23장부터해서 마지막 고별 연설하시고 돌아가시거든요. 그런데 사사기 보면은요, 사사들의 시대의 첫 출발을 알리는 과정에서 아직 여호수아가 죽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사기 2장에 가야지 여호수아가 죽습니다. 그럼 왜 이리 모호하게 여호수아서의 뒷 부분과 사사기의 앞 두분이 겹쳐지게 기록했을까요? 아마, 이 두개의 책이 나뉘어진 책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책으로 연결시켜 함께 보아야 할 역사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지 않을까요? 그럼,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앞의 두루마리인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포개 놓으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첫번째,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고

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삿 2:2-3)

신명기 20장 10절부터 14절에는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할 전쟁 규정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1] 먼저는 무력이 아니라 항복할 것을 권유합니다. [2] 권유를 따라 항복하면, 서로 화평을 이루고 성문을 연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2-1] 그러나 항복하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전쟁을 하는데, 성 안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겁니다. [3] 전쟁 중에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을 그냥 탈취물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 기준을 주신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 전쟁에는 전혀 다른 전쟁 명령을 내리십니다. 히브리어로는 “헤렘”חרם이라고 부르는 “진멸”시키는 전쟁입니다. 남여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그리고 그 성읍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 거예요.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이것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성인 남자들을 제외한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모든 가축들과 재산들은 “전리품”이예요.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에서 얻게 되는 전리품이 전쟁 최대의 관심사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멸”을 말씀하시는 것은 전쟁에서 얻게될 개인의 “전리품”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실 그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람의 욕심이 그런가요? 성경에서는 아간으로 대표되는 한 인물의 사리사욕을 소개하고 있지만(수7),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옆구리에 가시를 하나 박아 두었습니다. 손바닥에 박힌 아주 작은 가시 하나가 그리 아프지 않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만질 때나, 살짝 스칠 때, 따끔거리면서 그것에 주목하게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가시처럼 박아 두어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땅의 주인이다”라는 것을 말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두번째, 현실점검을 위해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삿 2:20-23)

사사기 역사가가 말하는 두번째 대답 “현실점검”입니다.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 땅의 사람들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라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시험”이라는 모티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이스라엘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삶의 현주소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아실겁니다(출 16).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서 이스라엘의 진 주위에 있게하고 먹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출 16:4).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해 보고 싶으셨던 거지요.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미 그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만나 뜨러 나간 사람들 있었습니다. 만나를 주시는 은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시험하시고, 그렇지 않은 이들을 꾸짖으셨습니다(출 16:28-30).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이유는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나락으로 떨어뜨려서 어떻게든 벌을 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의 목적은 현실 점검입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걸음 걸음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의 목소리를 잘 들으며 옳은 길로 제대로 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사사기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도(하나님의 율법)를 잘 지키나 그렇지 않나현실 점검을 하기 위해서 가나안 사람들을 남겨두었다.”라는 거에요. 그게 그 땅의 사람들을 남겨두신 두번째 이유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그 땅(가나안)의 사람들을 완전히 다 쫓아내지 않고, 남겨두셨는가?”-세번째, 역사를 알게 하려고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삿 3:2)

출애굽하고 광야에 40년을 보냈습니다. 이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는 잘 아실 거예요. 민수기에서는 출애굽 1세대와 2세대의 교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출애굽 1세대가 없었다고 하니(민 14:30) 아마 여호수아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출애굽 1세대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출애굽 2세대, 출애굽 3세대가 섞여 살던 시대였을 겁니다. 출애굽 3세대는 모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보았다손 치더라도 아주 어린 나이에 잠깐 스치듯 보았을까요? 이들은 선조들이 광야에서 아말렉 사람들과 싸우고, 모압사람들과 싸우던 이야기를 선조들의 입을 통해서 옛날 이야기 듣듯이 들으며 자랐던 사람들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아예 이런 이야기 조차도 몰랐던 사람들도 있었던 같아요(참조. 사사 입다 이야기).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눈에 “전쟁의 이야기”는 곧 “역사”였습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쟁을 알게 한다는 것은, 지금 이들을 모두 전쟁 용사로 키우겠다는 말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역사를 알게 하겠다”는 말로 이해하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것같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잊지 말아야할 또 다른 전쟁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니, 이 역사가 제일 중요한 역사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사기 3장 2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이라며, 그 땅에 남겨진 민족들의 명단을 나열하고는 그 이방 민족과의 결혼 이야기를 하지요. 성경을 통틀어 가장 예민한 가정 문제가 이방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큰 곤혹을 겪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1-3)

이방인들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 국제 결혼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결혼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민수기의 예와 같이 간단하게 가정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광야의 생활을 하며 안정적이지 않은 생활을 하던 출애굽한 사람들이 한 땅에서 정착하면서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니, 그들과 결혼을 한다면 그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십수년을 떠돌이 생활하던 출애굽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매우 매력적인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가 있습니다.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존종해야할 의무 뿐 아니라, 그들의 일원이 되어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모압 여인들과 함께 모압의 신들을 예배하는 자리에 나간 거예요. 안정적인 삶과 신앙을 바꾼 것이지요. 뭐,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이 좋은 것을 왜 버려? 우리가 잘 취했다가 하나님께 드리면 되지. 아니 그 사람들이 이룬 선진 문화를 왜 죽이면서까지 없애? 잘 가다듬어진 문화를 흡수해서 우리 문화를 성장 시키면 되지”. 이렇게, 이방 문화와 타협했던 사람들, 그리고 “아니다. 우리는 조금 늦게 가더라도 하나님의 정체성을 지켜야 겠다.”는 사람들이 성경에서는 늘 싸우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싸우고 있지요. 타협했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여 우상 숭배의 길로 가고,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계속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거지요.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5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민 25:4-5)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의 눈에는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는 것은 “정체성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 향한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전쟁 말입니다. 를 너머서 물질 문명의 화려함은 늘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만나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즐기고 있는 물질 문명이 좋아보이고, 그들이 누리는 문화가 더 나아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가나안의 것들을 선택하던 시대가 사사들의 시대입니다.

 

 

 사사기 [2] 첫번째 사사 옷니엘

 

사사기를 설명하는 책들에서 꼭 한번쯤은 나오는 ‘사사기의 순환구조’의 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사사 옷니엘의 이야기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사사 옷니엘의 이야기만 가장 균형적인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다른 사사들의 이야기는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혹 이 구조에 맞추어 넣을 수 있을지라도 어느 한 부분이 비대칭적으로 장황한 구조입니다. 그러면에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옷니엘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의 이야기의 기본틀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옷니엘의 이야기에서 사사 시대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했을 수도 있겠네요.

 

 

❖ “옷니엘”이라는 이름

 

“옷니엘”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어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는 “오트니엘”이라는 이름을 עתניאל 이라고 쓰거든요. 모양만 보아도 이 이름은 עתני(오트니)라는 말과 אל(엘)이라는 말이 연결된 형태입니다. 그런데, עתן 이라는 어근이 히브리어에는 없어요. 그래서 옷니엘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들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요, ע(아인)하고 א(알렙)하고 종종 혼동하거나 혼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עתן이 아니라, 어근 אתן에서 옷니엘의 이름이 가진 뜻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사사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제시한 “옷니엘”이라는 이름의 뜻,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라는 설명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옷니엘의 의미가 정말 그렇다면, “옷니엘”이라는 이름에는 대단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습니다. 사사의 시대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던 시대, 우상을 떠받치던 시대라고 3장 1절부터 6절까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들 그 땅의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따를 때, 옷니엘은 그것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고 외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장한 이름을 가진 이가 이스라엘의 첫 사사가 됐다라는 것은 절대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 옷니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 (1)

 

옷니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던 시대를 되짚어 보아야하겠습니다. 3장 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호와의 목전에”(בְּעֵינֵי יְהוָה “베에이네 아도나이”)라는 고어체 표현을 쉽고 정확하게 요즈음 말로 다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눈에”라고 고쳐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행동거지가 하나님의 눈에(보시기에) 옳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이 악해 보인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악한 길로 가는 이유,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이유, 우상 숭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지 않고, 자기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좇아 살았기 때문이다.”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이 누리던 물질문화 생활은 광야에서는 경험해 볼 수 없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문화사적으로도 한 곳에 정착하는 농경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리고 살았던 것이 분명하니까요. 시대를 너머서 물질 문명의 화려함은 늘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만난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즐기고 있는 물질 문명이 좋아보이고, 그들이 누리는 문화가 더 나아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가나안의 것들을 선택하던 시대가 사사들의 시대입니다.

 

 

❖ 옷니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 (2)

 

어느 누구를 좋아하다보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좋아보이고, 그가 하는 행동 모두가 좋아보이게 마련이지요. 요즈음 아이돌들을 좋아하는 제 큰 딸이 아이돌이 하는 악세사리나, 아이돌이 광고하는 물건, 음료를 사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냥 다 좋은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것들을 가나안에서 맛보았습니다. 이제 그 땅에서 이미 그보다도 더 안정적인 문화를 향유하며 살던 사람들을 좋게 보기 시작하면서,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좋아보이고,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섬기는 신들까지요. 시대적으로는 사사들의 시대보다 대략 300여년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고대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두 시대가 마찬가지였을 이야기 소개해 볼까요? “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왕상 20:23) 아람왕 벤하닷이 아합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승리했어요. 위의 성경 구절은 벤하닷이 전쟁에서 패한 후에 그의 신하들이 벤하닷을 위로하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아람 사람들의 눈에는 이스라엘 하나님은 “산의 신”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들 가운데에는 유독 눈에 띄는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하였던 모리아 땅의 한 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호렙산,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시내산, 아론이 죽은 호르 산, 모세가 죽었던 느보산의 비스가, 여호수아가 율법을 낭독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 있었던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예루살렘의 성전이 서 있는 시온 산 등, 정말 많은 산들의 이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벤하닷의 시대에 유다는 유다 산지에, 이스라엘은 에브라임 산지와 사마리아 산지, 그리고 길르앗 산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람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산 신”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광야를 유랑하던 이스라엘이 살 던 시대, 가나안을 비롯한 지중해 동쪽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세계관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 스멀스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산의 신”이 아니라, “농경의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레반트 지역이라고 불리는 지중해 동쪽 지역에서 비를 내리게하는 천둥 번개의 신을 부르는 말이 ‘바알’입니다.

 

 

그리고 바알의 아내가 풍요의 여신 아세라예요. 하늘 위에서 바알이 천둥 번개와 함께 비를 내리면, 이 비를 머금은 아세라가 수태해서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맺는 거지요. 이 바알 신앙이 국가의 신앙으로 자리잡은 곳이 가나안 땅과 맞대고 있는 페니키아(성경의 두로와 시돈 지역)이고요. 강대국 페니키아의 영향을 받고 살던 가나안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바알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역시 유랑하던 과거와는 달리, 이 땅에 정착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야하는 새 시대에는 그에 걸맞는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런 형상도 모양도 알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칼과 번개를 들고 무언가를 내리치는 바알의 역동적인 모습, 가슴이 풍만하고 임신하여 배가 나와 있는 아세라의 모습이 눈에 보기에도 훨씬 더 세련되고, 더군다나 농사를 짓는 자기들의 격(格)에 맞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가나안의 것들을 선택하던 시대가 사사들의 시대인 겁니다.

 

 

❖ 메소보다미아(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성경에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된 분들도 계실겁니다. 아시다시피, 4대 문명중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처음 문명이 메소포타미아입니다. “메소스” μέσος 라는 말은 “가운데”(in the middle of), 또는 “둘 사이”(between)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타모스” ποταμός 라는 말은 “강”이라는 뜻인데요. 우리말로 풀어 써보자면, “두 강 사이의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 메소포타미아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말이 그리스어 어근을 가지고 있기에 이 단어가 알렉산더 대왕의 시대 이후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와 주변의 땅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름으로서의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의 일반적인 사용은 그러할 지라도, 이 땅을 “강 사이의 땅”이라는 의미로 부르는 것은 그 이전부터 였던 것같아요. 이 땅을 부르는 히브리식 표현이 사사기 3장 8절에 나오는데,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이 땅을 “아람 나하라임” אֲרַם נַהֲרַיִם 이라고 불렀습니다. “두 강을 끼고 있는 아람지역”이라는 뜻이지요.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아람 나하라임의 “구산 리사다임”이 가나안 땅을 8년동안 지배했다고 말합니다.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왕의 이름을 좀더 히브리어스럽게 읽어보자면, “쿠샨 리쉬아타임” כּוּשַׁן רִשְׁעָתַיִם 이라고 읽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읽으면,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쿠샨 리쉬아타임 멜렉 아람 나하라임”이라고 읽게 되는데요. כּוּשַׁן רִשְׁעָתַיִם מֶלֶךְ אֲרַם נַהֲרַיִם 나하라임 아람 멜렉 리쉬아타임 쿠샨 마치 “멜렉”(왕)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아람 나하라임”과 서로 운율을 맞추려는 듯, 왕의 이름을 “구산 리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구산 리사다임”은 굳이 우리말로 해석하자면, “두 배로 악한 구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를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이것이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의 언어유희(Wordplay)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 “두 강 사이에 끼어있는 아람 땅의 두 배로 악한 구산”이라는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하는 셈이 되는데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보겠노라고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받는 벌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Why 옷니엘?

 

자기들의 눈에 좋아보이는 것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가서는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신들을 예배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뒤늦은 부르짖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옷니엘을 “사사” (히. “쇼페트” שׁוֹפֵט)라고 부르지 않고, “구원자” (히. “모쉬아” מוֹשִׁיעַ)라고 불렀습니다. “사사”라는 이름은 누군가를 재판하고 판단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입니다. 그러나, 사사는 재판관의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사들의 이야기는 주로 전쟁과 관련이 있지요. 위급하거나 위험한 상황에서 탈출시키는 “구원자” 또는 “전쟁의 지도자”의 역할 또한 사사의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왜 하필 옷니엘이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선택하셨는지 성경에는 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안다면 왜 옷니엘을 택했는지를 추측할수가 있어요. 옷니엘은 갈렙의 아우인 그나스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갈렙의 사위입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렸는데, 혹시, 느낌이 오시나요? 아직 느낌이 안 오시면, 옷니엘의 장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시면 압니다. 갈렙이죠. 그리고, 갈렙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당시의 트렌드라고 해야할까요? 그 당시 사람들은 지도자나 일반 백성들이나 한가지로 경제적인 윤택함과 그 땅에서의 안전보장 등 이런 저런 가장 현실적인 이유로 이방 사람들과 결혼하고 우상숭배를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옷니엘은 트렌드를 따르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옷니엘은 그 당시에 좀 속된 말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한 가닥하고, 좀 영향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을 보면 알수 있지요. 가장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보면, 이런 사람이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자기 재산도 늘리고, 땅도 늘리고, 그 지역 안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자기 이름의 가치도 올리는 것이 처세를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옷니엘은 그 이름 값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사회의 풍조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과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그 엇나간 길에서 힘과 영향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할 지라도, 오직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옷니엘의 이름)라고 선언했던 이가 옷니엘이었습니다. 그래서 옷니엘을 소개하는 처음에, “옷니엘”이라는 이름에 대단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출애굽, 그리고 치열한 정복 전쟁의 시대였던 사사의 시대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방인들과 결혼하던 시대, 우상을 떠받치던 시대라고 3장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증언합니다. 이렇게 모두들 그 땅의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따를 때, 옷니엘 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옷니엘 주변의 사람들이 바알들과 아세라가 우리의 미래이며 힘이라고 떠받드던 때,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 라고 당당하게 외쳤던 사람이 옷니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옷니엘에게 임하였고, 그래서 사사로 부름받은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은 무작위로 선택된 아무개에게 복권 당첨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준비된 사람, 고백하는, 그리고 그 고백대로 사는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옷니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장한 이름을 가지고, 이름 값을 하며 살던 이가 이스라엘의 첫 사사가 됐다라는 것은 절대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사사기 [3] 두번째 사사 에훗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하나님의 백성 vs 이방인)

이스라엘의 첫번째 사사인 옷니엘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사사들의 이야기의 시작은 매우 도전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12절)

서론에 무언가 사사를 설명하는 이야기라던가, 또는 이 시대를 국제 사회의 배경이라든가, 주인공으로 등장할 사사의 집안 환경이라든가하는 배경 설명은 다 던져버렸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돌려 말하지 않고 곧바로 꼭 해야하는 말,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악한 일들을 하였다.” 앞으로 이 말은 조금 형태는 변할 지라도 사사들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반복될 겁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 사사기 역사가가 전하려는 하나님의 메세지라는 뜻입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에홋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 똑같은 표현을 두번 연속으로 반복합니다. 이 짧은 문장으로 삶의 기준이 여호와 하나님인가, 아니면 사람(자신)인가를 극명하게 대조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삶의 결과는 모압왕 에글론의 압제였습니다. 무려 십팔년에 걸쳐 말이지요. 에글론과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서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리는 여리고를 점령하였다는 짧은 전쟁 이야기가 13절에 소개됩니다. 모압과 암몬이 혹시 어떤 사람들인지 아시나요? 모압과 암몬의 기원은 창세기 19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피한 롯이 소돔을 떠나 소알에 이르러 그 주변 산에 올라가 한 굴에서 살았습니다. 롯은 이제 세상이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 때 롯과 함께 굴에 피하였던 두 딸이 낳은 아들들의 이름이 모압과 암몬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이 아이들의 출생이 법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는 잠시 뒤로 하고, 혈통으로 보면 이 둘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친족이고 이스라엘의 친족이 되지요. 이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핵가족 시대인 오늘과 달리, 확대 가족 시대였으며 동시에 친족 사이의 교류와 관계를 매우 중시하던 시대가 구약 성경의 시대입니다. 그러니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과 대단히 가까운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런데,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압과 암몬을 이방인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리고 성경에도 이들을 이방인 취급을 합니다. 많은 부분 성경에서는 “이방인”이라는 기준을 인종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이방인이라는 개념은 철저하게 신앙을 기준으로 합니다. 모압과 암몬 사람들도 혈연으로 굳이 따지면, 아브라함의 가족들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방인인 것입니다.

 

 

고고학의 도움으로 모압 사람들이 “그모스”(Chemosh)라 불리는 신을 섬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민 21:29; 왕상 11:7,33; 왕하 23:13; 렘 48 참조). 그모스를 섬기는 순간, 스스로를 바라보는 정체성(기준)이 바뀌어집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신앙을 이야기하는데요.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정체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자기 정체성을 세워 나아가고 그것을 삶에서 지키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건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가진 경건한 사람들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정체성은 “나와 네가 같다”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정체성은 “다름”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도 A이고, 당신도 A이다”라면 나만의 정체성은 없는 겁니다. 모두가 A이니, 그냥 A인 겁니다.

 

 

세상에 이 둘만 살고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 이 둘은 A가 무엇인지도 모를 겁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지도록 세뇌 당한 전체주의 국가를 상상해 보시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세상에 두 명이 살고 있는데, 하나는 자기를 A라 부르는데, 다른 한 명은 스스로를 B라고 부른다면, 이들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A라 부르는 사람은 B가 누구인지, 그리고 B가 어떤 생각과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자기와 비교해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너는 B이지만, 나는 A야.”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그러니까 정체성을 동질성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유일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에 늘 갈등의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런 면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삶과 생각에서 갈등하는 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라, 매우 당연한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주인 삼고 그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지요.

 

 

그러므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에훗의 이야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면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선언하는 말은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자신들을 기준 삼아 살았다”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겠고요. 또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모압의 백성(모압의 신인 그모스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겁니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이라 부르지만, 마치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 된 셈입니다.

 

종려나무 성읍을 빼앗기다

 

이스라엘이 에글론에게 압제 당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에글론이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하였다고 말합니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야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3절)

“종려나무 성읍”이라는 곳은 여리고입니다.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신 34:3)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대하 28:15)

그러나,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많은 성읍들 중에서 굳이 여리고를 콕 집어서 이야기했을 때에는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을 겁니다. 여리고가 모압 지역에서 국경 도시로서는 제일 가깝기는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요단강 건너에 여리고 말고도 많은 도시들이 있었는데, 여리고를 마치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데에는 아마도 여리고를 빼앗긴 것에 대한 충격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요?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고 있는 이 당시 사람들에게 여리고는 아주 상징적인 도시입니다. 여리고는 그 역사가 10,000년이 넘는 오아시스 도시입니다. 앞으로는 요단강, 그리고 늘 신선한 물이 터져나오는 샘이 있고, 유대 산지 쪽에서 터져 나오는 오아시스의 물들이 흘러들어오는 마을입니다. 상대적으로 연평균 강수량은 30mm이하입니다. 물이 풍부하고, 일조량이 많고, 비가 적은 곳에서는 유실수 농업이 발달하는데요. 그래서 여리고는 종려나무(대추야자)가 풍성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메마른 누런 광야에 푸른색 종려나무 잎으로 뒤덮여 있는 여리고를 말이지요. 자연스럽게 여리고는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도시였을 겁니다. 정치를 안다면, 역사도 깊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도시를 방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이치였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철옹성 같은 풍요로운 도시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 없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냥 성을 열세 바퀴를 돈 것과 양각 나팔을 분 것 뿐이었습니다. 물론 성벽이 무너져 내린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에 들어가서 점령하며, 칼을 들고 싸웠다는 이야기가 간단하게 한 줄로 소개되어 있습니다만(수 6:21), 여호수아 6장의 그 장엄한 전쟁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하나님이셨고, 싸우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미 성이 무너져 내린 순간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피흘림 없이(전쟁없이) 주신 도시인 여리고를 에글론에게 빼앗겼습니다. 전쟁으로 잃어버렸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에글론이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하였다”라는 짧은 기사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그리고 이스라엘이 자기 정체성을 잊고 살 때, 그냥 주신 것을 다시 되찾으신다는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가나안의 것이 더 좋아 보였고, 비교적으로 안정적이어 보이는 모압의 삶을 동경하였고, 여호와 하나님보다 그모스가 더 매력적이었던 이스라엘 자손들! 그들이 기대했던 삶과 실제로 그모스의 아래에서 모압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살이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것 또한 삶의 아이러니 입니다. 그제서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네요.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애타게 찾을 때, 머리 한번이라도 쥐어 박지 않으시고 정체성을 잃고 그모스의 백성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에게 구원자를 보내셨으니 말입니다.

 

 

베냐민 사람 구원자 에훗

 

여기에서 학자들 사이에서 몇가지 논쟁이 있습니다. 논쟁의 내용이 어찌보면 별것이 아닌데, 그래도 재미삼아 한번 알아놓으며 재미 있을 만한 잡다한 지식 중의 하나로 소개해 볼께요. “에훗이 사사인가, 아닌가?”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에훗은 당연히 사사이지요. 그런데, ‘사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쇼페트’ שֹׁפֵט 인데, 이 단어가 에훗을 가리키는 말로 성경에 쓰여있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어근 שׁפ”ט 가 가지는 의미가 “재판하다”(저는 이 말을 “의사결정을 하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다고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말했었습니다)입니다. 그런데, 이 어근을 사용하는 “재판하다” 또는 “의사결정을 하다”라는 말조차도 에훗의 이야기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홋이라” (삿 3:15 상반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 에훗을 ‘사사’가 아니라, ‘구원자’ (히. 모쉬아 מוֹשִׁיעַ)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에훗을 과연 ‘사사’라고 부를 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한 번쯤 가져볼 만합니다. 그러나, 사사의 역할이 곧 구원자이기에 학자들의 작은 논쟁은 그냥 그들 만의 것으로 잠시 제쳐두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상반절의 다른 부분이거든요.

 

성경에서 에훗을 (1) 베냐민 사람, 그리고 (2) 왼손잡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 말로 번역된 성경은 참 번역이 잘된 성경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모든 번역은 히브리어에서 자국어로 번역되는 순간 ‘상상력’의 가능성을 없애 버립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그 독특한 표현 방법 때문에 여러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데, 번역이 되면, 그 모든 상상력이 번역된 ‘말’에 갇혀버리기 때문이지요.

 

‘베냐민'(히. 빈야민 בִּנְיָמִין)은 잘 알고 있듯이 야곱의 막내, 요셉의 동생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보호함을 받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베냐민의 후손들을 부를 때, 성경에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1) 쉐베트 빈야민 שֵׁבֶט בִּנְיָמִין 또는 (2) 마테 빈야민 מַטֵּה בִּנְיָמִן, 마지막으로 (3) 브네 빈야민 בְּנֵי בִנְיָמִן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딱 한번 (4) 하벤야미니 הַבֵּנְיְמִינִי라고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대상 27:12). 그런데, 사사기에서는 에훗을 히브리어로 “벤-하야미니” בֶּן־הַיְמִינִי 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를 조금 배워보신 분들은 아실 수도 있는데, 이 표현 방법은 ‘아들’이라는 명사 ‘벤’과 ‘오른쪽/남쪽/힘’이라는 명사 ‘야민’이 서로 결합된 형태로 야곱의 아들 ‘베냐민’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베냐민’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풀어서 사용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사사기를 기록하며 에훗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의 언어의 유희(Word-play)입니다. 일부러 ‘베냐민 지파’를 떠올리는 표현을 사용하기 보다는 ‘베냐민’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여러가지 다른 의미를 더올리게 하면서 그 다음 표현을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왼손잡이’라는 말입니다.

 

왼손잡이 에훗

 

문자적인 의미는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 지파 출신의 에훗이 ‘왼손잡이’라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 합니다. ‘왼손잡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 방식은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 אִישׁ אִטֵּר יַד־יְמִינוֹ 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해석하기가 좀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테르’ אִטֵּר 라는 히브리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예요. 히브리어를 굳이 직역하자면, 사람은 사람인데 오른 손이 ‘이테르’한 사람이라고 의미라거나, 오른 손을 ‘이테르’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어찌되었든 ‘이테르’라는 뜻을 모르는 한, 도무지 그 뜻을 알수 없는 표현방법입니다. 언어학에서 Hapax Legomenon 이라 것이 있습니다. 그냥 짧게 Hapax 라고도 하는데요. 단 한번 나오거나, 또는 너무 드물게 본문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그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모르는 옛 말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테르’가 바로 Hapax Legomenon입니다. 그럼 이런 단어들이 구약 성경에서 툭툭 튀어 나올 때에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이 성경을 읽었던 옛 사람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을 읽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또는 타인의 강제에 의해서 사마리아와 유다 땅을 떠나서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중에서 현재의 이집트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그곳에 정착할 무렵, 그 땅에서 태어난 2세들은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있었어요. 이렇게 번역된 성경을 칠십인역이라고 부릅니다(라. 셉투아진타 Septuaginta 약어로는 LXX). 그럼 우리말 성경에는 ‘왼손잡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를 LXX에서는 어떻게 번역을 했을까를 보면, 당시 유다 공동체가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LXX에는 이 표현을 번역하면서 ‘암포테로덱시오스’ ἀμφοτεροδέξιος 라는 단어를 채택하였습니다.

 

 

이 말은 ‘양쪽’을 의미하는 ‘암포테로이’ ἀμφότεροι 라는 말과 ‘오른 손’을 뜻하는 ‘덱시오스’ δεξιός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기원전 3세기 중반에서 2세기에 이르는 시기 사이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 번역가들은 당대에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를 ‘두 손이 모두 오른 손인 사람’, 두 손을 모두 오른 손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왼손 마저도 오른 손 마냥 편안하게 무기를 잡을 수 있었던 양손잡이로 이해했다는 거지요. 비록 오른 손의 아들(베냐민)로 태어났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오른 손의 역량을 키울 때, 왼손도 갈고 닦아 오른 손처럼 사용했던 사람,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뛰어 넘어 살아가던 에훗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에훗, 영광이 누구에게 있는가?

 

에훗이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걸었던 예로, 남들은 모두 오른 손을 사용하며, 그것에 가치를 두고 살며, 그것에 만족했던 반면에, 에훗은 왼손 마저도 사용하려고 노력하여 왼손을 오른 손처럼 사용하였다는 것을 말했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왕 에글론을 따르고 그의 신 그모스를 섬겼지만, 에훗은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다른 길,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섬겼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들이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겼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대 풍습을 하나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힘센 다른 국가를 섬길 때에는 자연스럽게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형성 됩니다. 이스라엘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동안 섬겼다면, 자연스럽에 십팔년 동안 이스라엘이 신하된 공동체로서 모압의 왕 에글론을 자신들의 가장 최고의 왕으로 삼아 살았던 셈입니다. 이렇게 신하된 나라의 몇가지 의무들이 있었는데요. 첫번째는 때를 맞추어 공물을 보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나라의 최고 신을 우리나라의 신전에 두고 아침 저녁으로 그 신을 위해서 제의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도 있으나, 주인 삶은 나라의 신이 우리의 신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제의인 것이지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모압의 신이 내 나라의 신이 되는 겁니다. 모압의 압제 아래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여호와께 부르짖기 이전 열여덟해 동안 자의로든 억지로든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겼을 것은 너무나 분명해요. 그모스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리며 살았던거지요. 자기들의 기준과 눈으로 보기에 모압의 것이 더 안정적이어 보이고 좋아 보였으니까요.

 

에훗은 달랐습니다. 에훗 (히. 에후드 אֵהוּד)의 이름은 ‘어디에?’라는 뜻은 히브리어 ‘에’ (אֵי)와 ‘영광, 힘’이라는 의미의 ‘호드’ (הוֹד)가 합쳐진 이름입니다. ‘영광이 어디에 있는가?’, ‘힘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 에훗의 이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은 조금 더 문명화되고 안정적인 삶과 생존을 위해서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선택하였고, 그들이 섬기는 모압의 왕 에글론과 그의 신 그모스로부터 그것들을 찾으려 하였지만, 에훗은 달랐습니다. 오직 그 영광과 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온다는 믿음! 그 믿음으로 에글론을 죽이기 위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에글론을 만나다

 

에훗이 요단 강을 건너 모압 땅으로 들어가는 표면적인 명목은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에훗이 한 규빗이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가지고 가는데요. 우리말 성경에는 ‘한 규빗’이라고 표현하였지만, 사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다른 단위로 쓰여있습니다. 규빗이라는 단위를 히브리어로는 ‘암마’ אַמָּה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훗이 가지고 간 칼을 설명하면서 사용한 칼의 길이는 ‘암마’가 아니라, ‘고메드’ גֹּמֶד 라는 단위로 표기를 했어요. 그런데, 이 단어도 위에서 말한 Hapax Legomenon 입니다. 성경에서 딱 여기에서만 사용된 길이의 단위이거든요. 그래서 이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22절에서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보아서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길이 였다는 것은 분명하고, 칼자루까지 뚱뚱한 에글론의 몸에 따라 들어갔는데, 칼끝이 나온 정도라면, 한 규빗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 번역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표현이 하나 있어요. 에훗이 에글론에게 갈 때,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칼을 찼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겁니다(16절). 아래의 그림은 앗시리아의 왕 아수르나시르팔(Ashurnasirpal)이 사자 사냥을 하는 장면입니다. 왕이 칼을 찬 허리를 보세요. 왼쪽 허리 춤에 찰을 찼습니다. 고대의 벽화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가 왼쪽 허벅지에 칼집이 오도록 칼을 찹니다. 왼쪽 허리에 칼을 차고, 오른 손으로 뽑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에는 에훗이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칼을 찼다고 말하지요? 이것 역시 에훗이 왼손을 잘쓰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에글론을 표현하면서 ‘매우 비둔한 자’라고 말하는데요. 조금은 사심(私心)이 담겨 있는 번역이 아닌가 해요. 히브리어 원문에는 비둔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리’ בָּרִ֖יא 라는 단어인데요. 우리말의 어감상, ‘비둔하다’라는 말에는 미련하고 제 한몸 가누지 못할 것같은 어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은 “살지고, 튼실한” 거예요. 비둔한 것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지요. 놀라운 것은요. 이 형용사 ‘바리’라는 단어는 사람의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하던 단어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여러번 ‘바리’가 사용되지만, 사람의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된 예는 에글론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대부분 곡물이나 동물들을 표현할 때 이 형용사를 사용합니다.

 

바로가 7년간의 풍년을 예고하는 꿈에서 나일 강가에서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올라오는 꿈을 꾸잖아요? 이 살지고 누가 봐도 튼실한 소를 표현할 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바리’라는 말을 썼습니다. 바로가 7년간의 풍년을 예고하는 꿈에서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잖아요? 그 ‘무성하고 충실한’이라는 말이 ‘바리’입니다. 이것이 사사기를 기록한 사람의 의도입니다. 에글론이라는 사람의 이름에는 히브리어로 “에겔” עֶגֶל이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이 뜻은 “송아지”인데요. 사사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에글론 왕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소’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한가지! 에훗이 에글론에게 공물을 가지고 오는 장면에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공물을 바칠 때에”라고 건조하게 표현해 놓았지만, 히브리어로느 “바야크레브 엣-하민하” וַיַּקְרֵב אֶת־הַמִּנְחָה 라고 읽습니다. 이 표현은 매우 상투적인 히브리어 표현으로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에 제의를 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가져갈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자들은 “에글론에게로 공물을 바치러 갔다”는 말을 두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첫번째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압의 왕을 마치 신을 떠받들 듯이 섬겼다는 거예요. 아마 이 공물은 모압 왕이 아니라, 모압의 신 그모스에게 주는 선물일 수도 있고요.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신과 그 신의 다스리는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왕이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하는 해석인 거지요. 그렇다면, 에글론 왕을 또는 그모스를 이스라엘의 신인 양 섬기던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일부러 제의에 사용하는 어투를 차용하여 사용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또 하나의 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제가 선호하는 설명인데요. 에훗이 마치 살지고 튼실한 송아지를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듯, 에글론(소)을 죽일 것이라는 숨은 뜻을 ‘바야크레브 엣-하민하’라는 말 속에 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에글론 앞에서 주저하던 에훗 VS 에글론을 독대할 구실을 만들려는 에훗

 

18절은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공물을 바치고 나서는 에글론 있던 왕궁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 길갈로 가려던 참이었어요. 에글론을 죽이겠노라며 호기있기 요단강을 건널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요.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칼을 차고 모압을 갔다 왔지만, 아무것도 바뀌어진 것이 없었던 거예요. 성경에는 이런 에훗의 마음을 녹여 놓은 어떤 표현도 없지만, 호기롭게 요단강을 건넌 에훗의 쳐진 어깨가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요단강을 건너 다시 돌아올 무렾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 에훗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19절).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왜 그곳에서 다시 에글론에게 돌아가게 되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대략 추측해 볼만한 여지는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돌 뜨는 곳’에서 에훗이 다시 에글론에게로 가는데요. ‘돌 뜨는 곳’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프실림’ פְּסִילִים 입니다. 사사기를 연구하는 성서 해석자들중에는 이 지역에 돌을 뜨는 채석장이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가지는 원래 의미는 ‘신(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돌들’이라는 뜻입니다. 혹시 요단강의 길갈 주변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돌들이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나요? 그렇지요.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께서 요단강 물을 쌓이게 하셨고, 마른 땅을 백성들이 건너가면서, 법궤를 메고 있던 제사장들이 서있던 곳에서 열두개의 돌들을 가져와서는 길갈에 세웠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겁니다(수 4:20). 아마 에훗은 그 돌들을 보았을 겁니다.

 

“아! 애굽 땅에서 강제 노역을 하고, 광야를 떠돌던 우리 조상들은, 군사적인 힘과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때문에 이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와 이 땅을 차지했는데, 우리는 지금 그 하나님 버리고 오히려 모압의 왕, 모압의 신을 섬기고 있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는 상징과 같은 여리고 마저 빼앗겼구나.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눈과 기준이 만들어 낸 결과라는 것이 이렇게 비참하구나. 게다가 호기롭게 몰래 칼을 숨겨 차고 에글론 앞까지는 갔지만, 결국 공물만 바치고 그냥 돌아오는 나는!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아직도 의심하는 이들 중의 하나구나!”

 

아마, 그 돌들 앞에서 이렇게 자기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게 되지는 않았을까요? 그래서 다시 에글론을 찾아갑니다.

또 다르게 이 부분을 설명하는 해석들도 있습니다. 모압 왕을 죽여야 하는데, 뭔가 빌미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곳은 예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성소와 같이 중요한 상징적인 역할을 했던 장소라는 거예요. 그 주변 사회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강을 건넌 믿지 못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막강했던 여리고 성의 함락을 모르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기적 같은 요단강을 건넌 이야기와 그 막강한 성이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이야기의 증인처럼 서 있는 열두개의 돌들(프실림)은 역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스라엘의 상징이었고, 그 돌들이 있는 곳은 거룩한 장소였을거예요. 에훗이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신탁을 받은 듯 가장을 하고 에글론 왕을 찾아간다면, 혹 에글론 왕이 신하들을 물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길갈 주변까지 갔다가 다시 에글론 왕이 있는 모압 땅으로 돌아가는 치밀한 계획이었다는 이 설명 역시 이 상황을 설명하는 또하나의 선택지입니다.

 

 

발을 가리다

 

길갈에서 돌아온 에훗이 에글론에게 ‘하나님의 은밀한 일’ (히. 드바르 세테르 דְּבַר־סֵ֥תֶר) 을 전해 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19절). 히브리어 ‘다바르’라는 말은 ‘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말'(word)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밀한 일’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말'(신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원래의 의미에 충실한 번역인 듯 싶어요. 왜냐하면, 20절에서 에훗이 서늘한 다락방에서 홀로 앉아 있는 에글론을 독대할 때, 에글론에게 한 말이,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였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 (히. 드바르 엘로힘 דְּבַר־אֱלֹהִ֥ים)이라고 번역한 말의 ‘명령’이라는 단어가 앞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은밀한 일’의 ‘일’에 해당하는 단어 ‘다바르’이거든요. 그러니, 20절도 “내가 하나님의 말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네요.

 

 

이 말을 들으러 에훗 가까이로 오던 에글론을 에훗이 왼손을 뻗어 오른쪽 허벅지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찌릅니다. 에글론의 왼손이 움직였을 때에도 에글론은 아무런 의심이 없었을 거예요. 오른 손이 무기를 잡는 손이지, 왼손은 그런 손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에글론이 몰랐던 사실은, 에훗은 왼손을 오른손처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 장면이 우리 말 성경에서 에훗을 표현하는 ‘이쉬 이테르 야드 예미노’를 ‘왼손잡이’로 번역하는 근거가 된 장면이기도 합니다.

 

 

에훗이 나간 후, 에글론이 다락방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신하들은 그가 ‘발을 가리우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표현은 “쉰다” 또는 “낮잠을 잔다”라는 의미일 것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고, “용변을 본다”라는 뜻일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해석들이 이 표현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성경이 전해주고자하는 것은 “발을 가리우신다”라는 뜻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열여덟 해동안 모압왕 에글론을 섬기고,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겠노라며 에글론을 죽였다는 사실이겠지요.

 

 

모압사람들이 복수를 하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싸움에 만 명이 넘는 모압의 군사들은 그저 가랑잎 같은 존재일 뿐이지요. 에훗의 명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전쟁하는 한편, 이들이 퇴각하지 못하도록 요단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지켜섰습니다. 그 자리에서 모압의 용사 약 일만 명이 죽습니다.

 

 

에훗의 손

 

이 짧은 에훗의 이야기에는 ‘손’이라는 히브리어 ‘야드’ (יָד)가 자주 사용됩니다. 왼손을 오른 손처럼 사용하는 양손잡이 에훗(15절), 에훗의 손에 들려가는 에글론에게 바치는 공물(15절), 왼손을 뻗쳐서 칼을 빼는 에훗(21절), 이스라엘의 손에 모압을 넘쳐주신 하나님(28,30절)의 이야기에 ‘손’이라는 히브리어 ‘야드’를 반복합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역사가가 이렇게 에훗의 이야기에서 ‘손’이라는 히브리어 ‘야드’를 반복하는 의도를 직접 성경 속에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지 않을까요? 성경에서는 매우 흔하게 ‘하나님의 손’이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상징합니다. 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손에 의지하는가? 그리고 내가 가진 손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한 사람과 민족의 운명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눈에 보시기에 가장 좋은 하나님을 위한 손을 가진 에훗! 에훗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름을 받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선택할 만한 이유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하는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히. 에후드 “영광이 어디에 있느냐?”), 언제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양손잡이) 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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