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의 산책

욥기에 나타난 그리스도/ 리워야단, 베헤못

by 은총가득 2021. 8. 17.

 

욥기에 나타난 그리스도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 1:21)

욥기는 구약 성경의 열여덟 번째 책이며 시가서의 첫 번째 책이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에서는 성문서('케투빔' כתובים)의 두 번째 책으로 되어 있다. 성경을 대할 때 가장 부담없이 읽고 쉽게 은혜받을 만한 부분이 시가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서 전체가 시로 되어 있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시적 운율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종교적인 교훈을 주로 담고 있다. 구약의 시가서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5권의 책을 말하며, 특히 시가서에는 아름다운 시와 찬양, 지혜와 교훈의 말씀들이 잘 함축되어 나타난다. 이 시가서를 특별히 '지혜서'라고도 한다.
학자들 사이에는 욥기가 실제로 생존했던 욥이란 사람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견해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간의 고난을 신원 미상의 저자가 이야기로 꾸며서 만들었다는 견해로 나뉜다. 그러나 긴 대화들을 상세히 기록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전자가 더욱 타당한 것같다.


욥기는 고난당하는 신앙인들에게는 욥기가 삶에 대한 여러 가지 고뇌에 찬 질문들을 가장 아름다운 시예적(詩藝的) 표현으로 심도 있게 파헤쳐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줌으로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며, 특히 욥기서를 연구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와 함께 심한 시련과 시험을 당하는 성도가 지녀야 하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진리들을 깨닫게 한다. 본서에 표현된 사상의 깊이는 아무리 연구해도 여전히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오하다. 외롭고 경건하게 생활했던 한 인간의 고난과 깊은 고뇌를 통해, 본서는 모든 구차한 연설이나 변증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신비와 엄위와 절대적 주권 앞에서 입을 다물고 오직 겸허하게 청종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래적 위치를 본서는 분명히 깨닫게 해준다.
 
I. 명칭
 
히브리어 성경은 본서의 명칭을 욥기의 주인공인 욥의 이름을 그대로 본따 איוב "이요브"라 칭하였는데 이러한 명칭을 70인역은 ’Ιωβ '이오브'로, 영어 성경은 'Job'으로 사용하였고, 한글 개역성경 역시 '욥기'라 칭하였다. 한편 욥기의 주인공인 איוב "이요브"의 의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돌이키는 자(회개하는 자)'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 - 이 견해는 히브리어 איוב "이요브"가 '돌아오다' 혹은 '회개하다'라는 의미의 아랍어 '아바(aba)"에 근거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서 '욥의 회개'에 그 초점을 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욥'의 아랍어 철자는 '아와분'('Awwaun)이 된다.
둘째, '팝박받는 자'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 - '욥'의 이름을 히브리어의  איב "아야브(적대하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로 '고난당하는 욥'에 초점을 둔 견해이다.
 
2. 저자와 기록연대

본서에는 저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랍비들의 전승과 초대 교회 저술가들 몇몇은 욥기가 모세에 의하여 기록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욥기의 머리말과(1:1~2:13) 끝맺는 말(42:7~17)에는, 욥이 살았던 시대가 족장 시대(B.C. 2000년경)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뒷받침 해주는 증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곧 욥이 성소나 제사장의 참석없이 개인적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점(1:5; 42:8), 아브라함이나 야곱처럼 가축으로 재산을 평가했다는 점(1:3; 42:12; 참조. 창 12:16; 32:5), 욥이 데라(205세)나 아브라함(175세)처럼 장수했다는 점(욥 42:16), '금 한 조각'으로 번역된 קשיטה '케시타'가 야곱 시대의 화폐 단위였다는 점(42:11; 창 33:19)등이 그 증거들이다. 더구나 겔 14:14, 20에서 욥은 노아나 다니엘과 함께 고대의 영웅으로 언급되었다.


또한 비평 학자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전승된 이야기를 B. C.4세기경에 편집자가 편집한 것으로 본다. 일부 보수주의 학자들은 욥기의 저작 연대를 솔로몬의 통치 초기(B.C 10세기경)로 보는데, 그 이유는 욥 28장과 잠 8장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기의 저자가 단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되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고 단지 솔로몬 시대의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3. 기록 목적
 
욥기는 지혜문학의 산물로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루는, 현대용어로 말하면 종교철학적 작품이다. 욥기의 근본 목적은 욥기가 쓰여지던 당시에 편만해 있던 사상인 “고통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이고 고통 받는자의 죄때문”이라는 의식을 논박하려는 것이다. 즉 모든 고통은 죄로 말미암는다는 사상을 논박하면서 하나님의 응보적 정의만이 인간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특별히 의인의 고통을 다룬다.


욥기의 주된 기록 목적은 '의인의 삶에 고난이 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욥기는 지루할 정도로 욥과 욥의 세 친구와의 논쟁을 상세히 실었고, 그것을 통해 인생과 세상의 최종적 결정자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증거하여 근원적인 해답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욥기의 표면적인 기록 목적은 '고난 받는 의인의 삶'이지만 그 내면적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것 위에 초월해 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욥기의 기록 목적을 좀더 세분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욥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가장 강하게 증거하되 모든 것을 능가하고 지배하는 그의 주권과 그가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과 관계없이 언제나 경배와 존경을 받으셔야 할 분이심을 증거한다.
② 욥기는 의인에게 임하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되 의인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며, 믿음을 연단하는 수단으로서의 고난을 증거한다.
③ 욥기는 인내하는 욥의 모습을 통해 고통당하는 성도가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와 믿음을 보여 준다.
④ 욥기는 욥과 욥의 세 친구와의 논쟁을 통해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권선징악 사상'의 허점과 모순을 보여 준다.

4. 욥기의 주제
 
(1)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
욥기의 저자는 처음부터 욥은 순전하고(허물이 없음) 정직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극찬하고 있다. 당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지역에서,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 대한 계시가 충족히 발전되지 않은 먼 족장시대 초기에 생존했던 욥을 생각할 때, 욥의 신앙은 참으로 훌륭한 것으로 칭찬 받을만하다.


그런데 욥의 신앙과 의로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실제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나타나고 확증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믿어진다. 특히 욥의 네 번째 친구 엘리후는,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을 죄에 대한 징계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더욱 더 축복의 길로, 참 생명의 길로 인도하려는 연단의 의미로 풀이했다(욥 33:29, 30). 이렇듯 욥의 고난을, 더 큰 축복과 구원으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계획된 훈련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엘리후의 해석은, 신약의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과 뜻을 같이 한다(벧전 1:3-7). 즉, 성도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잠시 고난을 받지만,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받을 칭찬과 영광을 염두에 두면 오히려 금보다도 더 귀한 신앙의 훈련이며 연단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욥에게서도 보다 더 정금 같은 믿음을 바라시고 잠시 욥에게 사단을 붙이셨으며, 아울러 어려운 환경 가운데로 그를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을지라도 그 의를 실제 삶 속에서 경험적으로 또는 행함적으로 나타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2) 성도는 물질적 유형의 축복이 없이도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가?
욥은 사단의 시험에 의해 단 하루만에 전 재산과 열 자녀를 잃고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욥 1:13-19). 또 얼마 후에는 온 몸이 썩어가는 지독한 질병에 걸려 신음했다(2:7-10). 예컨대 욥은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위치에서, 하루 아침에 경멸과 모욕을 당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심지어 친구들과 아내에게 조차 멸시 받고 소외되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다(2:9, 16:10, 19:13-19).


그렇지만 욥은 다음과 같은 신앙의 자세를 가짐으로써 사단의 첫 번째 시험을 이겨낸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 1:21)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의 궁극적 원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식했다. 자신에게 축복을 주신 자도, 또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자도 동일한 하나님으로 자각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욥의 신앙을 승화, 성장시키려는 섭리(계획)를 갖고 계심을 욥이 어느 정도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욥은 재산을 몽땅 잃은 재난 중에서도 영적 평정을 잃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사단의 1차 시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단은 여호와께 중상 모략하기를, 욥이 그 소유물을 상실하면 반드시 주를 대면하여 욕할 것이라고 공언(公言)했다. 그러나 욥의 신앙은 세속적 번영이나 본분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눅 12:15) 신앙의 본질을 직시하고 있었다고 본다. 때문에 욥이 모든 고난을 다 이기고 하나님께 신원받는 날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받게 된 것도(욥 42:10), 사실 욥의 이러한 올바른 물질관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하나님은 선하신가? 의로운신가?
이 세 번째는 소위 신정론(神正論)으로서, "세상에서 악인은 뻔뻔스럽게도 잘 살아가는데, 의인은 왜 도리어 헐벗고 고통을 당하는가?"하는 현실의 모순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회의심(懷疑心)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정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손상시키며,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속성을 모독할 수 있기에 바른 신관(神觀)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컨대 욥의 혹독한 시련은 사단의 악한 참소를 하나님이 받아주심으로 시작되고 있어, 혹 성도들의 고통은 하나님의 악한 행동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사단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계 20:10) 자기의 운명대로 끊임없이 악행을 저지르며 자기의 죄를 채워가는 타락한 존재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단의 악한 계교를 잠시 허락하기는 했어도, 사단의 뜻대로는 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은 사단의 계교를 역이용하여 욥에게 더욱 심오한 영적 통찰력을 갖게 하셨다. 자칫 사단의 존재가 욥기 1:6-8절에서 볼 때, 하나님의 파송을 받고 세상을 감찰하는 임무를 띤 존재인 것처럼 비칠 수도 있겠으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호와 앞에 섰을 때 사단도 그들 ‘가운데’(ב, 바:불의의 침입자란 뜻)왔다고 한 것은, ‘가운데’란 전치사가 의미하는대로 그곳에 몰래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 사단은 교만하여 타락한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땅으로 내쫓김 당한 불의한 천사로서(겔 28:13-19), 늘 안정이 없고 분요하며 목적없이 이리저리 배회하는 운명을 짊어진 악한 존재이다(참고, 벧전 5:8,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악을 창출(創出)하거나, 또는 악을 저지르도록 원인을 제공하거나, 악을 이용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설령 택한 자를 잠시 고생을 시킬지라도 그것은 축복을 주시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욥의 고통은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성을 깨닫지 못한 교만의 결과라는 친구들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시련과 역경을 통해 자신이 부족한 인간임을 깨닫게 하셨고, 궁극적으로는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이론적 신앙에서, 나아가 직접 눈으로 뵙는 것처럼 가까이서 주를 알도록 하셨다(42:5). 뿐만 아니라 확고부동한 부활 신앙까지도 소유할 수 있게 하셨다(19:25-27). 요컨대 욥에겐 고난이 축복이 된 것이다. 이것이 욥기에서 제기되는 신정론(神正論)의 바른 결론이다.
 
(4)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전적인 순종은 가능한가?
욥은 평소 그 누구 못지 않게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음에도, 하루 아침에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혹독한 고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나 욥은 어떠한 처지에 놓일지라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 전적인 순종의 자세를 보였고 또 그렇게 성숙해져 갔다. 이러한 욥의 신앙은 욥기 전체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욥은 고난을 통해 그 영혼은 더욱 흠 없게 순결해지고, 믿음은 더욱 정금 같이 단련되어(23:10-14),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법을 배우고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난 속에서의 인간의 절대적 순종, 욥기의 이 주제야말로 세계 문학사(文學史) 중에서도 걸작 중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욥이라고 하는 당대의 한 경건한 인물의 깊은 체험적 삶을 통해, 우리에게 놀라운 계시의 한 부분을 전달해 주시고자 욥기를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한 인물의 생애가 장엄한 서사시(敍事詩)로 표현되었다는 그 문학적 가치와 더불어, 그 이면에 숨겨진 신령한 영적 의미를 찾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실로 이것이 성경문학이 기록된 목적이기도 하다.
 
5. 욥기의 신학

(1)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
욥기에 드러난 하나님에 관한 사상의 핵심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는 욥의 고백에서 드러나는 대로 '하나님은 그의 행위와 관계없이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이다. 즉 욥기의 저자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절대적인 신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은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한하고, 그는 이러한 그의 지혜로 자신의 완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을 사용하시지만 그는 언제나 선하고 공의로우며, 따라서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욥기의 신 인식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욥기 기자는 온 세상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는 인간 세계뿐만 아니라 우주와 동물계까지도 창조하신 하나님을 증거함으로써 모든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필연적임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둘째, 이렇듯 절대적인 주권을 소유한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희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욥기 저자의 사상이다.


셋째, 그가 비록 인간이 생각지 못한 그리고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를 행하신다 할지라도 그분은 조금의 악이나 잘못이 없으시고 언제나 공의로우시며, 완전한 선을 소유한 분이시라는 것이 욥기 저자가 지닌 또 다른 신 인식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욥이 결론 부분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고 잠시라도 그의 선하심에 의문을 품었던 그의 어리석음을 회개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넷째,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한 목적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의인에게 임하는 고난이 바로 이러한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의 저변에는 죄의 결과로 인한 고난이라는 사상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상으로 흐르고 있다.


다섯째, 인생은 하나님께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 역시 욥기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 인식 중의 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을 향해 질문하시는 질문자가 되시며, 인간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역설했던 것이다.


여섯째, 질문할 수도 없고 질문에 대답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완전히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그러므로 그 하나님은 인간의 판단에 의해 좌우되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전개되는 어떠한 상황에 관계없이 언제나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이 욥기 저자의 신 인식에 대한 절정이다.


일곱째, 욥기 저자의 신 인식에 대한 결론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지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로 종결된다. 즉 구원은 이론이 아니며,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체험이 신앙의 핵심인 동시에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욥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던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2) 욥기의 물질관과 사탄론
 1) 욥기의 물질관
욥기에 나타난 물질관의 핵심은 그것이 인간의 뜻대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달려 있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서론에 나오는 욥의 고백이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 1:21)


그러므로 욥기가 강조하는 물질관은 한마디로 '청지기적 물질관'이라 할 수 있다. 즉 알몸으로 나온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필요대로 물질을 허락하시되 때로는 그의 선하신 뜻에 의해 거두어 가시기도 하시며, 결국에는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이므로 사람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고 그의 뜻대로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해 선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욥기가 주장하는 물질관인 것이다.


 2) 욥기의 사탄론
욥기에 나타난 사탄론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사탄의 주된 임무는 '파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며 성도의 믿음을 파괴하고,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파괴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둘째, 파괴를 위해 사탄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중상모략'이라는 것이다. 욥을 파괴하기 위해 하나님께 중상모략을 펼치는 사탄의 모습은 이러한 견해를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


셋째, 사탄 역시 큰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욥의 자녀들을 한꺼번에 죽이고 욥의 재산을 한꺼번에 몰수하여 욥의 몸에 악창이 나게 하는 사탄의 능력은 실로 소름끼칠 정도의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한다.


넷째, 그러나 그렇듯 능력이 많은 사탄이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의 하나라는 점이다. 욥기의 저자가 역설하여 강조하고자 한 사탄론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었다. 즉 아무리 사탄이 능력이 많다 할지라도 그의 능력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능력이고 그의 권모술수 역시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에 의해 감시되는 계략이며, 그의 활동 역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시행되는 극히 제한적인 것이라는 사상이 욥기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6.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가 욥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따라서 욥기 연구에 있어서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1) 엘리바스
'순금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엘리바스'는 팔레스틴 동남쪽에 있는 에돔의 도시 '데만'(참조, 욥 2:11)출생인데 그곳은 예로부터 지혜자들을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곳이다(참조, 렘 49:7). 그는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인 듯하며, 세 친구를 위한 지도적인 대변인 역할도 수행했었다. 그는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였고 그의 사고는 진지했으며, 지혜롭고 품격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세 친구 중 가장 명료한 사고력과 사려 깊은 비평을 보여 준 과학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내세운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은 하나님은 완전히 순결하시며 의로우시다는 것(4:17)과 '인간은 스스로 자신에게 곤란을 초래한다는 것'(5:7), 즉 고난은 스스로의 죄에 대한 형벌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사고는 궁극적인 면에서는 타당성이 있는 견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보편적 원리를 특수한 경우의 욥에게 억지로 적용시키려 했고, 그것이 잘 되지 않자 나중에는 여러 가지 죄명을 들어 그를 비난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는 자리에 처하게 된다.


(2) 빌닷
'논쟁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빌닷'은 수아 사람으로서 전통주의자(8:8-10)인 동시에 엘리바스보다 더욱 치밀한 논쟁적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욥을 불경건한 자(8:13)라고 비난하고 나섰는데 그의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결코 공의를 굽게 하시지 않는다(8:3)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 역시 근본적으로는 틀린 것이 없었으나 그 역시 지나친 권선징악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욥의 특수한 경우를 무시한 채 자신의 사상에 흡수시키려 하다가 나중에는 욥을 위로하러 온 그가 욥을 책망하며 비난하였기에 끝내는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된다.


(3) 소발
'거칠다'라는 의미의 '소발'은 아라비아 북방으로 추측되는 나아마 사람이었다. 그는 무뚝뚝한 독선자였고 도덕주의자였으며, 하나님은 악한 일을 아시고 보시는 분이라는 사상 속에 사로잡힌 자였다(11:11). 욥의 자랑을 비난하는 것(11:2-6)으로부터 시작되는 그의 변론은 권고가 아닌 책망으로 시종 일관하였으며, 종국에는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권고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상대방보다 자신이 더욱 거룩하다는 논조로 발전, 그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책망을 듣는 자리에 처하게 된다.


(4) 엘리후
'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엘리후'는 부스 사람으로서 네 사람 중 최연소자이며, 욥의 세 친구들과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의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은 선하시다(욥 33:24)라는 것이었는데, 네 사람 중 엘리후가 가장 좋은 진단을 내렸다. 즉 그는 앞의 세 사람들처럼 욥의 고난을 천편일률적인 권선징악의 공식에 집어넣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하나님이 때로는 의인을 연단시키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시기도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하나님의 책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욥의 의로움과 경건함을 인정하지 않은 편견, 그리고 논쟁 중의 과격한 발언으로 인해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되지는 못했다. 결국 그의 견해는 앞의 세 사람보다는 발전되고 좀더 정확한 것이었으나 욥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는 못하였기에 완전한 지혜와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7. 내용분해

제1부 - 욥에게 닥친 재난 (1:1-2:13)
욥에 대한 소개 (1:1-5)
사단의 첫번째 공격 (1:6-22)
사단의 두번째 공격 (2:1-10)
욥의 세친구들의 소개 (2:11-13)
 
제2부 - 욥과 친구들과의 변론 (3:1-37:24)
A. 첫변째 변론 (3:1-14:22)
1) 욥의 탄식 (3:1-26)
2) 엘리바스의 첫번째 변론 (4:1-5:27)
 ① 고통은 죄의 결과라고 믿음 (4:1-21)
 ② 욥의 어리석음을 질타함 (5:1-7)
 ③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권면함 (5:8-16)
 ④ 하나님의 훈계를 받을 것을 권면함 (5:17-27)
3) 욥의 답변 (6:1-7:21)
 ① 욥의 번민 (6:1-13)
 ② 친구들의 동정을 구함 (6:14-30)
 ③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질문 (7:1-21)
4) 빌닷의 첫번째 변론 (8:1-22)
5) 욥의 답변 (9:1-10:22)
 ① 자신의 현 처지를 호소함 (9:1-35)
 ② 고통속에서도 부르짖음 (10:1-22)
6) 소발의 첫번째 변론 (11:1-20)
7) 욥의 답변 (12:1-14:22)
 ① 하나님께 대한 변론 (12:1-25)
 ② 하나님께 대한 간청 (13:1-28)
 ③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탄식 (14:1-22)
B. 두번째 변론 (15:1-21:34)
1) 엘리바스의 두번째 변론 (15:1-35)
 ① 욥의 말에 대한 책망 (15:1-13)
 ② 악인의 고통 (15:14-35)
2) 욥의 답변 (16:1-17:16)
 ① 친구들의 매정함을 질책함 (16:1-5)
 ②  자신의 처지를 한탄함 (16:6-14)
 ③ 자신의 결백을 주장함 (16:15-22)
 ④ 죽음을 소망하는 욥 (17:1-16)
3) 빌닷의 두번째 변론 (18:1-21)
4) 욥의 답변 (19:1-29)
5) 소발의 두번째 변론 (20:1-29)
6) 욥의 답변 (21:1-34)
C. 세번째 변론 (22:1-26:14)
1) 엘리바스의 세번째 변론 (22:1-30)
2) 욥의 답변 (23:1-24:25)
 ① 자기 연단의 기회로 봄 (23:1-17
 ② 죄악된 세상에 대한 탄식 (24:1-25)
3) 빌닷의 세번째 변론 (25:1-6)
4) 욥의 답변 (26:1-14)
D. 욥의 마지막 변론 (27:1-31:40)
1) 첫번째 독백 (27:1-28:28)
 ① 자신의 정직함을 주장 (27:1-23)
 ② 지혜의 송가 (28:1-28)
2) 두번째 독백 (29:1-31:40)
 ① 과거를 회상함 (29:1-25)
 ② 현재의 비참함을 드러냄 (30:1-31)
 ③ 순전함을 주장함 (31:1-34)
 ④ 하나님을 향한 변론 (31:35-40)
E. 엘리후의 변론 (32:1-37:34)
1) 변론을 중재하는 엘리후 (32:1-22)
2) 엘리후의 첫번째 변론 (33:1-33)
3) 엘리후의 두번째 변론 (34:1-37)
4) 엘리후의 세번째 변론 (35:1-16)
5) 엘리후의 결단 (36:1-37:24)
 ① 욥의 연단에 관한 믿음 (36:1-21)
 ②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36:22-37:24)
 
제3부 / 욥의 회복 (38:1-42:17)
A. 하나님의 첫번째 말씀 (38:1-40:5)
1) 하나님의 첫번째 물음 (38:1-40:2)
2) 하나님의 전지전능 (38:39-39:30)
3) 대답을 요구하심 (40:1,2)
B. 하나님의 두번째 말씀 (40:6-42:6)
1) 하나님의 두번째 물음 (40:6-41:34)
 ① 하나님의 주권 (40:6-14)
 ② 하마를 만드신 하나님 (40:15-24)
 ③ 악어를 만드신 하나님 (41:1-34)
2) 욥의 답변 (42:1-6)
 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함 (42:1-3)
 ② 자신의 완악함을 회개함 (42:4-6)
C. 욥과 그친구들의 회복 (42:7-17)

8. 욥기에 나타난 그리스도
 
(1) 고난당하는 욥 -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
특별한 잘못 없이 온갖 모진 시련을 당한 욥은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던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상기시키며, 고난 중에도 친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린 점에서도 역시 욥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사53장; 히7:25),

(2)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① 중보자를 찾는 욥 - 욥은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 9:32)” 라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도 또 사람이 아니시기에 내가 하나님께 직접 나의 억울한 사정을 말씀드릴 수가 없고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줄 중재자도 없다고 탄식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 탄식은 탄식에만 그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보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중보자를 간절히 희구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보자가 있어서 나의 딱한 사정, 나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말씀드려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간절히 중보자를 찾는 심정을 나타내었다.


② 중보자 성자 하나님 -  욥은 자기의 증인과 중보자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답답하고 고통스러워 중보자를 찾고 있던 욥이 16:19에와서는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고 말하였다.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씀은 땅에는 한 사람도 자기의 진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나 하늘에는 참다운 사실을 아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땅에서는 자기를 알아주고 도와주고 위로하여 줄 사람이 없으나 하늘에는 자기의 진실을 증거하여 주고 자기의 결백을 보증하여 줄 분이 있는 것을 알고 욥은 크게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욥은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16:20)”라고 하였다. 하늘에 계시는 보증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되시는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 분 만이 우리의 참된 중보자이시다.

(3) 초림과 재림의 예수님
① “내가 알기에는 나의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 19:25)
여기에서 대속자라고 하였는데, 대속자라는 말은 자기를 희생하여서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이다. 이 대속자가 장차 땅위에 서실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자 하나님께서 장차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실 것을 분명히 예언하는 말씀이다.


②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6)
이것은 욥이 죽은 다음에 영혼으로 주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욥이 죽었다가 부활하여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 뵈옵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평안한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있으나 욥은 고난 중에서 주님을 찾았다. 친구가 다 떠나버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까지도 비난하는 이러한 절대고독, 완전 고난 중에서 주님을 찾았다.


욥이 자신의 모든 진실과 결백을 보증하여 주시는 중보자가 하늘에 계신 것을 알고 중보자이신 주님을 찾았고, 또 대속자이신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가 장차 땅 위에 서실 것과 죽은 다음에 육체 밖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 즉 초림의 주님과 재림의 주님을 찾았으며, 부활신앙을 소유했듯이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욥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굳게 그리스도를 의지하여야 할 것이다.


욥의 회개와 회복(욥42:1-17)

 

[1-6절]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 . . .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말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자이시며 무엇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주권자이시다. 2절의 ‘경영’이라는 원어(메짐마)는 ‘생각, 목적, 계획’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 사람은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3절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라는 말은 38:2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받아 말한 것 같다. ‘이치’라는 원어(에차)는 ‘의논, 뜻’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도전적인 말들을 하였다. 이제 그는 그런 말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잘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해 무례한 말을 삼가야 한다. 

 

욥은 하나님께 또 말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과거에 선진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고백한다. 욥이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듣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한다. 그는 의로운 자이었지만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순복하지 못하고 몇 번 도전적인 말을 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그 무례한 말까지 회개하는 것이다. 욥은 그가 당한 고난과 그의 부족을 통해 보다 더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7-9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 . . .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에게 노하셨다. 그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말이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욥은 그 친구들보다 하나님에 대해 비교적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의롭게 사는데 왜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 중에 두시는가 하고 불평스런 말을 했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그와 그의 자녀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줄곧 말했었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욥을 정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노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번제 같은 제사 형식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번제’는 속죄와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제사이었다. 욥에게 잘못된 말을 했던 친구들은 욥에게 가서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위해 번제를 드려야 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그 사람에게 가서 푸는 것이 옳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으나, 인간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온다고만 알고 있었고 욥을 그릇되이 정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드린 번제를 받으셨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셨고 그 중심을 받으셨다. 

 

[10-17절]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 . . .

욥이 그 벗들을 위해 빌매 여호와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이전의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 자신을 비방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마 5:44).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 빌 때 하나님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 그는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을 주셨다. 물질의 복도 하나님의 복이다(창 26:12-13). 

 

욥이 회복되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들과 또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해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12)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다. 그것은 욥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욥의 노년에 복을 주셔서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셨다. 그는 양 14,000마리와 약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2,000마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그는 첫째 딸을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을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을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다.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없었다. 사람의 외적인 아름다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욥은 그들에게 그 오라비들에게처럼 기업을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욥에게 물질적 유여함과 가정적인 행복을 주셨다. 

 

그 후에 욥은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다. 욥은 장수하였다. 그는 200세 이상을 살았다고 추측된다.13) 그의 연령을 보면, 욥은 아브라함과 이삭 때의 인물이라고 보인다.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를 살았다.

 

우리는 고난 중에 무례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지 말고, 겸손히 믿고 참고 순종하자. 나의 죄로 인한 징계의 고난이라면 즉시 회개해야 하지만,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고난이라면, 하나님의 뜻에 맡기며 참고 기다려야 하고 결코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하는 불평스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욥기의 교훈이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당하는 이웃에 대해 함부로 정죄하지 말아야 하고 특히 그의 고난의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 더욱 그러해야 한다. 모든 고난이 다 특정한 죄의 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사람이 와서 사과하면 용서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2).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자. 우리는 욥처럼 경건하고 의롭게 흠과 점이 없이 온전하게 살아야 하고, 그러나 고난 중에 잠잠히 기다려야 한다.

 

 

동물 세계가 주의 손 안에 있음(욥39:1-30)

 

[1-4절] 산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산(山)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滿朔)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산염소’라는 원어(야알레-살라)는 ‘바위의 영양(羚羊)’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산염소의 새끼 낳는 때를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아느냐, 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이 되는지 아느냐라고 물으신다. 산염소 같은 짐승은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와 바위 사이 또는 동굴에 두 마리 내지 다섯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산염소나 산양, 암사슴 같은 짐승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사람이 그런 짐승들에 대해 아는 것이란 지극히 조금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라는 구절은 “그 고통(산고 産苦)을 던져버리며”라는 뜻이다. 

산염소나 사슴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고 그 출산의 고통을 던져버리며 그 새끼들은 강해지고 들판에서 자라다가 어미를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암사슴 같은 짐승은 새끼를 낳은 후 1년 정도 키우지만, 그 후 어린 사슴은 어미를 떠나 독립해 나간다고 한다. 

 

[5-12절]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요란한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들나귀는 집에서 기르는 나귀와 그 성질이 다르다. 들나귀는 들이나 척박한 벌판을 거처로 삼고 자유로이 산다. 그것은 성읍 사람들의 요란한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것을 제어하려고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초장을 찾아 산을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먹을 만한 푸른 것을 찾아다닌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써레=논이나 밭의 흙을 고르게 하는 도구]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집에서 키우는 소는 순하게 길들여져서 외양간에 매어두기도 하고 논이나 밭을 갈게도 하고 써레를 끌게도 하지만, 들소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에게 복종치 않기 때문에 외양간에 머물게 할 수도 없으며 밭이나 논의 일을 위해 사용할 수도 없다. 비록 그것이 힘이 많아도, 사람은 그것을 의지할 수 없고 자신의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길 수 없다. 사람은 그것에게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는 일이나 타작마당에 곡식을 모으는 일을 맡길 수 없다. 

 

[13-18절]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고 말씀하신다. 영어성경들은 본절을 다양하게 번역했다. KJV, “네가 공작들에게 멋있는 날개를 주었느냐? 또는 타조들에게 날개와 깃털을 주었느냐?” NASB, “타조들의 날개들은 사랑스런 날개와 깃털을 가지고 즐거이 퍼드덕거리도다.” NIV, “타조의 날개들은 즐거이 퍼드덕거리나 황새의 날개와 깃털에 비교할 수 없도다”(‘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은 임의로 첨가됨). NASB의 번역이 언어적으로 또 문맥적으로 가장 나은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劬勞)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괘념치[마음에 두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주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암타조는 6-8개의 알을 모래 위의 오목한 곳에 낳고 40일 가량 버려두어 부화시키는데, 발에 깨어지거나 다른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않고 마치 자기 새끼가 아닌 것처럼 그것에 대해 무정하고 그것이 깨어져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조가 뛰어갈 때는 말 탄 자를 무시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태운 경주마는 시속 약 72킬로미터로 달리지만, 타조는 보통 시속 64킬로미터, 최고 145킬로미터로까지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25절]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 힘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19절의 ‘갈기’는 말의 목덜미에 난 긴 털을 가리키고, 21절에 ‘허위다’라고 번역된 원어(카파르)는 ‘앞발로 친다’는 뜻이다. 

 

말은 힘이 좋은 짐승이다.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는 그 힘의 상징이다. 옛시대에 말은 전쟁의 필수적 도구이었다. 말은 또한 겁이 없는 짐승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협해도 움츠리지 않는다. 그의 위엄스러운 콧소리는 두렵다. 말은 골짜기에서 앞발로 치며 달리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앞으로 전진하며 적군들을 맞아 싸운다. 그것은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않으며 칼을 만나도 물러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 위에서는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땅을 삼킬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쓸쓸히]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23절의 ‘전동(箭筒)’(‘전통’이라고도 발음함)은 ‘화살통’을 가리킨다. 25절 전반절은 “나팔 소리 가운데 ‘힝힝’ 하고 울며”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말은 그 위에서 화살통과 빛난 큰 창과 작은 창들이 쟁쟁하는 소리를 내며 땅을 삼킬 듯 맹렬히 성내고 나팔 소리를 들어도 머물러 서지 않으며 나팔 소리 가운데 ‘힝힝’[혹은 ‘하, 하’] 하고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26-30절]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 . . .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매와 독수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그는 욥에게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며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고 물으신다. 매는 작은 것은 25cm 정도이지만, 큰 것은 66cm 정도나 되며 날개를 펴면 날개폭이 119cm나 되는 것도 있으며, 독수리는 매보다 좀더 커서 크기가 보통 80-90cm가 되고 날개폭은 약 2m가 된다고 한다. 또 독수리는 부리가 약 5cm나 되고 끝이 2.5cm 정도 아래로 굽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 이런 새들을 만드셨고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독수리는 높은 나무 위나 높은 산 절벽이나 바위 끝에 둥지를 만든다고 한다. 독수리와 매는 동물들 중에서 시력이 가장 좋은데, 매의 시력은 사람보다 약 8배나 더 좋아 하늘에서도 쥐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그것들은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짐승의 시체도 먹는다. 예수께서도 이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그는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24:28; 눅 17:37). 

 

사람은 어떤 동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매우 적고 모르는 것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친히 만드셨고 그것들의 구조와 생리를 잘 아신다. 그는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들 사이나 동굴에 무리 지어 생활하는 산염소나 암사슴을 만드셨고, 들이나 척박한 벌판을 거처로 삼고 자유로이 사는 들나귀와 들소를 만드셨다. 그는 자기 낳은 알에 대해 무정하지만 경주마보다 빠른 타조를 지으셨고 그 성질과 생리를 잘 아신다. 그는 힘있고 겁 없는 말을 만드셨다. 그는 낭떠러지에 집을 짓는 매와 독수리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창조하셨고 섭리하신다. 온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창조자시며 주권적 섭리자이신 하나님 앞에 사람이 지식과 능력이 지극히 제한적인 피조물이며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히 엎드려 우리의 무지와 무능과 부족을 고백하고 오직 그를 경배하고 섬겨야 하며 또 감히 그와 변론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http://www.oldfaith.net/01exposit 

 

 

 욥기 41장의 리워야단은 어떤 동물일까?

 

욥기 41장에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리워야단(leviathan)은 정확히 어떤 동물일까? 그 동물은 플레시오사우르스(plesiosaur), 또는 모사사우루스(mosasaur)처럼 수영하는 파충류일까? 아니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어떤 동물일까? 정확히 어떤 동물인지 답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 발견된 거대한 반수생(semiaquatic) 공룡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었다.[1]

 

영화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3)에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 rex)를 제압함으로서 유명해진, 거대한 수각류 공룡인 스피노사우루스(Spinosaurus)의 표본이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 두 공룡이 실제로 만나서 싸운다면 같은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최근의 평가는 스피노사우루스가 주둥이에서 꼬리까지 15m로(몸무게는 20t), 티라노사우루스보다 조금 더 길다는 것이다.[1]

 

스피노사우루스는 등에 2.1m 높이에 이르는 뼈로 된 돛(bony sail)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정확한 용도는 불분명하다(사진은 여기를 클릭). 최근 연구에 의하면, 스피노사우루스는 물고기와 다른 수생 먹이를 먹으며, 상당한 시간을 물속에서 보낸다는 것이다.[1, 2] 그들은 둥근 좁고 긴 턱을 가지고 있으며, 아래턱에 파충류와 같은 이빨들과 위턱에 공룡과 같은 큰 이빨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수각류 공룡과는 달리, 스피노사우루스는 더 나은 부력을 위해 단단한 사지 뼈들과 짧은 뒷다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악어와 같은 반수생 척추동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성이다.[1] 유연한 꼬리와 꼬리뼈의 모양은 스피노사우루스가 수영할 때에 자신의 꼬리를 사용했음을 가리킨다. 스피노사우루스는 현대 악어처럼, 물에서 살 수 있도록 완벽하게 디자인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물갈퀴가 있는 노(paddle) 같은 뒷발, 두개골 높은 곳의 콧구멍 등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1]

 

욥기 41장에 기록된 리워야단은 스피노사우루스와 같은 반수생 공룡에 대한 묘사일 수 있을까? ”누가 그것의 턱을 벌릴 수 있겠느냐 그의 둥근 이틀은 심히 두렵구나”(14절). ”그것은 몽둥이도 지푸라기 같이 여기고 창이 날아오는 소리를 우습게 여기며 그것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이 지나갈 때는 진흙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을 남기는구나”(29~30절).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로 만드는구나 세상에는 그것과 비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지음 받았구나”(32~33절)
 
욥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단어들은 제안되고 있는 스피노사우루스의 행동과 유사하게, 강 또는 얕은 물의 바닥을 기어가거나 걸어가고 있는 거대한 사나운 동물을 가리키고 있다.[1] ”그것의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라는 말은 스피노사우루스가 수영할 때, 뼈로 된 돛에 의해 물에 남겨지는 항적일 수 있다.

 

욥기 40장과 41장에서 하나님은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큰 두 공룡을 언급하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거대한 초식공룡(베헤못, behemoth)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교만한 자들에게 군림하는 왕(king over all the children of pride)”(욥 41:34)이었다. 이 두 공룡 모두 욥이 거주하던 지역의 강이나 인근에 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욥기 41장의 리워야단은 모사사우루스(mosasaur)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을 기어가고 수렁 또는 진흙에 자국을 남기는데 필요한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3] 비슷한 이유로 플레시오사우루스(plesiosaur)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시편 104:25~26절과 이사야 27:1절에 등장하는 리워야단은 넓고 깊은 바다에 살았던 다른 종류의 파충류일 수 있다. ”거기에는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는 생물 곧 크고 작은 동물들이 무수하니이다 그 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시편 104:25~26).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이사야 27:1)).

여기에서 두 리워야단은 플레시오사우르스 또는 모사사우루스처럼 수영을 하는 파충류를 묘사하고 있을 수 있다. '리워야단'으로 번역된 단어는 우리말의 용, 파충류, 공룡처럼, 여러 대형 파충류들 나타내는 통칭적인 단어일 수 있다.

 

그러면 욥기 41장의 리워야단은 어떤 동물이었을까

스피노사우루스이든, 또는 이와 유사한 동물이든, 그것은 정말로  두려운 짐승이었다.[4] 하나님은 그 분의 창조적인 힘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 사나운 동물을 사용하시기로 선택하셨다. 욥이 리워야단과 베헤못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노아 홍수 이후 얼마 되지 않은 그 시기에 욥은 자신의 눈으로 이들 두 동물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References
1. Ibrahim, N., et al. 2014. Semiaquatic adaptations in a giant predatory dinosaur. Science. 345 (6204): 1613-1616.

2. Amiot, R., et al. 2010. Oxygen isotope evidence for semi-aquatic habits among spinosaurid theropods. Geology. 38 (2): 139-142.
3. Field, D. J., et al. 2015. Pelagic neonatal fossils support viviparity and precocial life history of Cretaceous mosasaurs. Palaeontology. 58 (3): 401-407.
4. Thomas, B. 2015. Was Leviathan Real? Acts & Facts. 44 (2): 15.

* Dr. Tim Clarey is Research Associate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received his Ph.D. in geology from Western Michigan University.


*관련기사 : 

스피노사우루스와 티라노사우루스 대결은 영화 속 얘기 (2014. 9. 12.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15785307

티라노사우루스 때려 눕힌 거대 공룡이 사실은 수영 선수? (2014. 9. 15. 동아사이언스)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5153http://creation.kr/BiblenScience

 

 

성경에 나온 공룡 ‘베헤못’(욥 40:15)

▲ 욥기의 ‘베헤못’으로 추정되는 긴 목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 출처: quora.com 캡처 

 

232호 / 창조이야기 (40)

 

본지는 창조론 전문가인 미국 켄트 호빈드 박사의 창조론 강의를 요약, 소개한다. 호빈드 박사의 강의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흥미롭게 설명하며, 진화론이 거짓 믿음 체계임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편집자>

 

사람들은 성경에 공룡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공룡’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1841년까지 공룡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룡은 성경에 나와 있다. 욥기 40장에 하나님이 욥에게 하시는 질문 안에서 공룡을 발견할 수 있다. 

 

욥은 10명의 자녀를 하루아침에 잃었다. 그리고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다. 욥은 자녀들의 무덤 앞에 앉아서 종기의 고름을 짜내고 있을 때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 제발 저에게 대답해 주세요. 왜 저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그의 물음에 주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3~4a)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지구를 만들 때 없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의도를 아신다(대상 28:9).’고 말한다. 그 분이 모든 생각을 알 뿐만 아니라 생각의 의도까지 아신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 욥에게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b)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욥에게 85개의 질문을 하셨는데 욥은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욥은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그런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었다. 그를 위해 85개의 질문을 하고 계신다.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욥 38:16) 1977년까지는 과학자들은 바다의 샘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과학자들은 성경의 일부를 천천히 따라잡는다. 성경은 말한다.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욥 38:19a) 빛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움직인다. 그 다음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욥 38:19b)고 말한다.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km이다. 어둠의 속도는 0이다. 어둠은 움직일 수 없다. 우리는 빛의 자녀다.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서 빨리 움직여서 빛을 비춰야한다.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욥 38:24) 하나님께서 욥에게 빛이 바람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신다. 햇빛이 바람의 패턴을 일으킨다. 빛으로 땅이 뜨거워지면 공기를 확장시켜서 바람을 일으킨다. 하나님은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욥 38:35)라고 물으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전기가 신호를 보내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게 아닌가? 라디오나 핸드폰, 전자레인지, 텔레비전처럼. 전기는 신호를 두 가지 방법으로 보낸다. 전선이나 전기 자기장이다. 라디오 주파수가 거기서 나온다. 하나님은 욥에게 4000년 전에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지난 몇 백 년간 그것을 발견해 왔다. 

 

그리고 40장에서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욥 40:15a)라고 말씀하신다. 욥은 베헤못을 볼 수 있었다. 이 베헤못은 긴 목 공룡 중 브라키오사우루스라고 여겨진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 소같이 풀을 먹고,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다고 설명한다. 또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코끼리나 하마의 꼬리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브라키오사우루스의 꼬리는 다른 것들보다는 더 백향목 같다. 성경은 또 베헤못의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크고 튼튼한 뼈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박물관이 소장한 실제 공룡의 발가락관절뼈를 보면 굉장히 크다. 공룡의 발가락뼈가 그렇게 큰 이유는 큰 발가락과 그에 맞는 커다란 발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큰 발을 가졌던 이유는 지탱해야 할 큰 다리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 공룡의 앞다리는 약 6m나 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큰 공룡은 머리까지 약 18m이다. 이 공룡이 살았을 때 무게는 100톤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다음 구절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욥 40:19)고 말한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리쉬스’는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가장 중요한, 가장 큰 동물이란 뜻이다. 그것은 코끼리나 하마는 아닐 것이다. 브라키오사우루스일 것이다.

http://gnpnews.org/archives/66668

 

[관련기사]
문화 속에 나타난 용의 존재
공룡은 많은 역사 기록에서 발견된다
공룡은 기후 변화와 사냥이 시작되면서 사라졌다


소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하마

(욥40:15)

 

베헤못(Behemoth)

 


하마

관련 구절

  욥기 40:15

개역개정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개역한글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찌어다 내가 너를 지은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이름에 대한 논의 

성경의 다른 문맥에서 히브리어 ‘브헤마’(behema)는 일반적으로 큰 동물, 특별히 가축을 가리킨다. 그러나 욥기 40:15가 묘사하는 이 동물은 특별한 종류의 동물로 등장하고 있다. 

 

이 동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신화적 괴물이다. 후대 랍비 문헌들은 이 동물을 다른 괴물인 리워야단과 격렬한 싸움을 한 괴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창세기 1:21에 언급된 ‘큰 바다 짐승’과 연관이 있다.

 

2) 하마이다. 이 제안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많은 영어 역본들은 각주에 이렇게 표시하고 있다. 하마는 이집트에 잘 알려져 있는 동물임에 틀림없으며 아마도 메소포타미아의 일부 지역에서도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욥기 40:15-20의 문맥과 하마는 많은 점에서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욥기 40:16에서 묘사하는 베헤못의 힘과 강한 근육은 대부분의 시간을 조용하게 풀을 뜯어먹거나 물에서 쉬기만 하는 하마와 연관 짓기가 어렵다. (하마의 턱은 대단히 강하고 특히 수컷 하마는 위험한 동물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평가해볼 때 하마의 근육과 힘이 매우 감탄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둘째로 하마의 작고 뭉툭한 꼬리는 들어올리기 어렵고, 자신이 싼 대변을 흩어뜨리는 데만 사용된다. 이 점은 욥기 40:17에서, 꼬리 치는 것이 백향목(또는 레바논개잎갈나무) 모습 같다는 언급과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욥기 40:20에 나타난 베헤못은 산의 풀을 먹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하마는 보통 강변에서 서식하며 또는 범람원 주변이나 강물이 흐르는 골짜기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언덕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하마는 극도로 짧은 다리와 무거운 체중 때문에 바위를 넘어가거나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는 힘들다.

 

 

아프리카코끼리

 

3) 남부 이집트의 나일 계곡, 수단, 에티오피아에 살았던 아프리카코끼리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살았던 인도코끼리는 구약시대에도 알려져 있었다. 베헤못에 관한 설명은 하마보다는 코끼리에 더 잘 어울린다. 이 동물의 강력한 힘이 가장 뚜렷한 증거이다. 달릴 때 코끼리는 자신의 꼬리를 곧게 세운다. ‘꼬리’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코끼리 코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욥기 40:21에서 ‘가시나무 아래에나 습지의 갈대밭 그늘에 누우니’라는 묘사는 진흙구덩이나 강에서 진흙 목욕을 하거나 뒹군다고 잘 알려진 코끼리의 습관을 가리킬 수 있다. 
 

 번역

가장 좋은 번역은 본문에 ‘괴물 베헤못’으로 적은 뒤, ‘이것은 아마도 코끼리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각주를 덧붙이는 것이다.  

 

출처: Edward R. Hope, 『성서 속의 동물들』, 이영미 외 역 (서울: 대한성서공회, 2018), 251-253; 

 

..................................................................................................................................................

                                               

 

 하마(Behemoth)

 

히브리어 베헤뫁이란 말은 짐승을 뜻한다. 모든 영어번역본에서는 beast로 번역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9번이 복수형으로 나오는데 짐승이나 짐승들이라고 번역되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욥기 40:15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고 했다. 

다음절에서 하마의 특징이 더 설명되어 있다. 

욥 40:16-17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라고 말한다. 

24절까지 하마에 대해서 설명을 더하고 있다


(욥 40:23)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

(욥 40:24)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는 하마에 대한 최고의 찬가가 아닐 수 없다. 

우제목하마과 동물로 몸길이 3.8~4.6m, 몸높이 1.5m, 몸무게 2~3t. 몸이 크고 피부가 두껍다. 몸의 모양은 원통형이며 발가락이 4개 있다. 발가락 사이마다 물갈퀴 비슷한 피막으로 연결되어 있어 물 속으로 들어가면 콧구멍이 닫혀져 5~20분 동안 잠수할 수 있다.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

 


    폭풍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욥40:1-9) / 옥한흠

 

 

욥기 40:1-9

 

  1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찌니라 

  3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4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두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6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8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9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ㅇ 주요내용 

 당신은 어떤 고통 앞에서 그 고통의 이유를 꼭 알아야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깊은 속마음을 읽지 못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후가 욥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한참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폭풍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욥이 얼마나 무지한 사람인가를 보여 주려고 하십니다.  

 

  - 어찌 인간이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이 욥에게 던진 질문은 무려 71개나 됩니다. 하나님이 욥의 기를 죽이기 위해, 아니면 그의 무식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질문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문 한마디 한마디에는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은밀한 관심이 들어 있습니다. 

 

  - 야훼 하나님

'야훼',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은 언약자로서의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인간과 일대일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무관하게 보이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지 다음에 세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욥이 당한 고통은 그 이유를 밝힐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 전능, 선하심에 관심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한번 상상해 보라

셋째로, 하나님께서 만물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신 이유는 욥이 당면한 문제를 풀어 주기 이전에 하나님이 욥한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려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어려운 일을 가지고 시름할때나, 남이 모를는 슬픔을 안고 몸부림칠 때 문제 해결 그 자체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이 나 같은 것을 만드시고 보살펴 주시고 사랑해 주신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의 지혜, 그의 능력, 그의 선하심에 온통 당신의 마음을 쏟으면 그 무한하신 사랑의 능력이 욥을 치료하시듯 당신을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이 있어도, 문제가 남아 있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모든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어떤 슬픔이 있어도 그 슬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다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이전에 먼저 그가 문제를 안고도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 때문에 위로를 받는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병도 고쳐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그런 사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예수님만 계신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비록 슬픔과 고통이 남아 있을지라도 날마다 에수님과 만나는 사람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욥처럼 무조건적인 믿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