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장별 요약(도표)
대분류 | 중분류 | 소분류 | 장별 내용 요약 |
1-3 고난 |
1-2 고난 |
1 첫번째 고난 | 1 사단의 첫번째 시험(재물, 자식) |
2 두번째 고난 | 2 사단의 두번째 시험(육체 고통) | ||
3 탄식 | 3 저주와 탄식 | 3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탄식함 / “...하였었더라면”의 고백체 | |
4-37 논쟁 |
4-14 첫번째 논쟁 (고난은 죄 때문임) |
4-7 엘리바스와 욥의 논쟁 |
4 고난은 죄의 결과임<생각해 보라> |
5 고난은 하나님 징계(받아들임으로 해결) | |||
6 자신의 무죄를 주장 | |||
7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하나님께 호소 | |||
8-10 빌닷과 욥의 논쟁 |
8 고난은 자식의 죄 때문임<옛 교훈에 의거>, (기도로써 해결하라) | ||
9 세상에 의인의 고난도 존재함 | |||
10 하나님께 고난 이유 알려주시기 원함 | |||
11-14 소발과 욥의 논쟁 |
11 고난은 욥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죄 때문임<욥 무지 지적>,(회개하라) | ||
12 너희들은 의인의 고난의 이유를 모름 | |||
13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를 하소연함(하나님과 변론하고 싶음) | |||
14 인생을 비관하고 저주함(고통을 벗어날 수도, 고난의 이유를 알 수도 없으므로 죽기를 기다릴 뿐임) | |||
15-21 두번째 논쟁 (악인의 종말 논쟁) |
15-17 엘리바스와 욥의 논쟁 |
15 모든 인간(욥)의 불의와 악인의 종말 | |
16 욥 자신의 결백을 계속 주장 | |||
17 아무 소망 없이 죽음만을 기다림 | |||
18-19 빌닷과 욥의 논쟁 | 18 욥과 같은 악인이 당할 잔혹한 종말 | ||
19 친구들의 잘못된 정죄에 더욱 한탄함 | |||
20-21 소발과 욥의 논쟁 | 20 악인의 일시적인 번영과 현세 필벌 사상 | ||
21 상선벌악의 현세적인 적용 불가능 | |||
22-31 세번째 논쟁 (보편적 죄악 논쟁) |
22-24 엘리바스와 욥의 논쟁 |
22 욥의 죄악을 열거, 기도로 하나님과 화목하라 | |
23 고난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님(연단) | |||
24 악인이 오히려 득세하는 현실을 보라 | |||
25-31 빌닷과 욥의 논쟁 |
25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죄인임 | ||
26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잘 알고 있음 | |||
27 자신의 의인됨을 강력히 주장 | |||
28 친구들의 지혜의 허상(고난을 해결하지 못함)과 하나님의 참 지혜 | |||
29 자신의 의로운 과거와 번영 회상 | |||
30 현재의 뜻 모를 고난을 비탄함 | |||
31 자신의 무죄를 거듭 주장함 | |||
32-37 엘리후의 정리 |
32-33 첫번째 진술 |
32 세 친구의 욥을 정죄함을 책망 | |
33 욥의 교만 책망과 회개를 촉구 | |||
34 두번째 진술 | 34 하나님 공의에 대한 욥의 생각 반박 | ||
35 세번째 진술 | 35 욥 자신의 무죄 주장에 대한 반박 | ||
36-37 네번째 진술 |
36 구원의 하나님을 잊고 죽기를 원했던 욥을 책망 | ||
37 심판과 공의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 |||
38-40 깨달음 |
38-41 하나님께서 만나 주심 |
38-39 첫번째 말씀하심 |
38 자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 |
39 동물계를 통한 하나님의 창조 섭리 | |||
40-41 두번째 말씀하심 |
40 창조물 중의 으뜸인 하마(큰 짐승) | ||
41 용과 같은 악어(리워야단) | |||
42 회개 | 욥의 회개 | 42 하나님을 뵙고 회개, 회복됨 |
안유섭 목사(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
욥이 고난 당한 기간
욥기에서 욥이 고난 받은 기간을 언급하고 있는 곳은 단 두 곳뿐이다.
즉 욥기 2:13에 “칠 일 칠 야를 그와 함께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더라”에서 욥과 그의 친구들이 ‘칠 일 칠 야’를 함께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욥기 7:3에서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에서
욥의 고난이 ‘여러 달’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욥의 고난기간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개역성경과 70인역을 비교해 보면, 욥이 고난 받은 기간을 알 수 있다.
개역성경에는 욥이 고난 받은 총 기간에 대한 기록이 없다.
개역성경과 70인역을 비교해 보면 욥이 고난 받은 기간이 그의 나이 70세부터 100세까지 총 30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역성경은 욥기 42:16-17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참고: KJV - After this lived Job an hundred and forty years, and saw his sons, and his sons' sons, even four generations. So Job died, being old and full of days).
강신택 박사는 ‘히브리어 한글 대역 구약성경’에서 욥기 42:16-17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일 후에 이욥은 140년을 살았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아들들을 네 세대를 걸쳐서, 보았었다.
그리고 이욥은 죽었었다. 그는 늙었었고, (그의) 날들은 다 찼었다.”
개역성경이나 강신택 박사의 ‘히브리어 한글 대역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후에’는 히브리어 ‘아하레’이며,
70인역 헬라어에는 ‘메타’(meta.)로 나와 있다.
히브리어 ‘아하레’는 ‘...후에(after) 또는 ...뒤에(behind)’를 뜻하는
히브리어 독립전치사(Independent Preposition) ‘아하르’의 다른 형태로 ‘아하르’보다는 ‘아하레’가 더 자주 쓰인다.
강신택 박사의 ‘히브리어 한글 대역 구약성경’의 해석에서 ‘이일 후에’로 더욱 분명하게 밝혀주듯이
‘이일 후에’는 ‘이일’ 즉 ‘욥의 고난’이 끝난 ‘후에’라는 의미로, 욥이 고난을 받은 후 140년을 더 살았다는 의미이다.
한편, 헬라어 ‘메타’(meta.)는 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소유격(속격)(Genitive)의 경우는 ‘...과 더불어’(with)가 되며 목적격(대격)(Accusative)의 경우는 ‘후에’(after)가 된다.
그런데, 소유격을 수반하는 ‘메타’(meta.)의 목적어는 보통 한 사람이나 한 개인의 개념이 된다.
따라서 70인역에서 ‘메타’(meta.)는 욥의 고난을 수반하기 때문에 목적격이 아니라 소유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70인역에서 ‘메타’(meta.)의 의미는 ‘고난과 더불어’ 또는 ‘고난이 시작된 때부터’로써
‘욥이 고난을 받기 시작한 때부터’라는 의미가 된다.
70인역에서는 욥기 42:16-17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즉 “그리고 욥은 고난이 시작된 때부터 170년을 살았고, 그가 산 해수는 240년이며,
욥은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참고: LXX English Translation (Brenton) - And Job lived after his affliction a hundred and seventy years: and all the years he lived were two hundred and forty: and Job saw his sons and his sons' sons, the fourth generation. And Job died, an old man and full of days)이다.
한편 70인역을 영어로 번역한 LXX English Translation (Brenton)에는 ‘after’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지 ‘후에’라는 의미로 해석할 때는 ‘욥은 이 고난 후에 170년을 살았다’는 의미가 되므로
개역성경의 내용과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70인역의 ‘메타’(meta.)는 ‘...과 더불어’ 또는 ‘...이 시작된 때부터’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감안하여 두 성경을 비교해볼 때, 욥이 고난당한 기간은,
욥이 고난을 당한 후에 140년을 살았다는 것과 고난이 시작된 때부터 170년을 살았다는 기간을 비교하여 계산하면,
170-140=30년이 된다.
또한 욥이 고난을 받기 시작한 나이는
욥의 수명 240에서 고난이 시작된 때부터 살았던 기간 170년을 빼면, 240-170=70세가 된다.
욥의 고난이 끝난 나이는 욥이 고난 받기 시작한 나이 70에 고난 받은 기간 30을 더하면, 70+30=100세가 된다.
그 후에 140년을 더 살았기 때문에 욥의 수명은 100+140=240세가 됨을 알 수 있다.
욥은 고난을 받은 후에 2배의 복을 받았는데(욥 42:10, 12),
고난 전에 70년을 살고 고난 후에 140년을 살았다고 보는 것이
이러한 2배의 복을 받은 것과도 일치하는 견해이다.
정리하면,
1) 욥이 고난받기 시작한 나이 : 70세
2) 욥이 고난당한 기간 : 30년
3) 욥의 고난이 끝난 나이 : 100세
4) 욥이 고난 이후 살았는 기간 : 140년
4) 욥이 죽을 때 나이 : 240세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의 비교
I. 서 론
욥기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던 욥이 오히려 그 어떤 악인조차도 당하지 않은 혹심한 고난을 겪는 모순된 현실을 두고 이를 규명하기 위하여 욥과 욥의 친구였던 당대의 지혜자 들이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가며 벌인 긴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들 사이의 논쟁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그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도 실패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등장하여 절대 초월자로서 창조자이신 자신만이 전 우주와 역사에 대한 절대 주권을 홀로이 가지신 바 이를 피조물이요 유한자인 인간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도 또 관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거듭하여 전 우주적 스케일의 각종 소재를 동원하여 선언하셨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절대 신뢰와 순종이 필연적이며 또한 그럴 때만이 인간 실존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음을 강력히 암시함으로써 욥의 고난에 대해 간접적이지만, 그러나 이런 당장의 고난의 문제를 넘어서 보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주시며 변론을 종결시키신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앞서 벌이는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 사이의 변론의 차이점을 인격적인 면, 방법론
적인 면 그리고 신학적인 면에서 간략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본 론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의 변론을 구분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의 인격적인 면과 변론의 특징을 각각 살펴본다.
[ 엘리바스의 변론의 세부적인 특징 ]
엘리바스는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은 정금이시다” 혹은 “하나님은 심판자 이시다”라는 것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신학자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논증의 특징은 경험적 지식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의 인품은 다소 동정적인 모습도 보이기도 하며 그의 변론의 논조는 다분히 철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죄를 지으면 고난을 당한다”는 논지로 욥에 대하여 “악한 자만이 고난을 당한다”고 훈계를 한다. 이러한 그의 사고를 근거로 그의 신관을 살펴보면 엘리바스가 바라보는 하나님은 “악한 자를 징계하고 선한 자를 복 주시는 의로운 하나님”으로 정리할 수가 있다. 다음은 엘리바스의 변론의 특징을 열거한 것이다.
1. 고난의 원인이 죄에만 있다고 봄 (4:7~9)
2. 근본이 불투명한 환상과 같은 주관적인 체험을 근거로 변론함 (4:12~21)
3. 주관적 체험인 환상을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권위를 갖는 것으로 말함 (4:12)
4. 자신이 경험한 바가 곧 진리의 전체인양 과장하여 말함 (5:1~7)
5.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세속 인과응보론으로만 설명함 (5:9~16)
6. 전통적인 도덕률에 근거하여 변론함 (15:17~19)
7. 욥의 고난의 진정한 원인을 깨닫지 못한 체 거듭 회개만을 촉구함 (5:17~27)
[ 빌닷의 변론의 세부적인 특징 ]
빌닷의 이름은 뜻은 “논쟁의 아들”이다. 이 이름에서 살펴볼 수 있듯 그는 전통, 전승을 중히 여기는 역사가나 법률가의 이미지를 많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다분히 역사적인 논조로 변론을 하면서 논쟁적인 모습을 함께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빌닷은 “고난은 틀림없이 죄 때문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욥에게 “악한 자는 항상 고난 가운데 있다”고 훈계를 한다. 이러한 빌닷의 신관은 “확고 부동한 입법자이며 심판자인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의 변론의 특징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하나님의 공의를 인과응보론으로만 설명함 (8:1~7)
2. 악인은 벌을, 의인은 복을 받는다는 철저한 흑백논리를 내세움 (8:13;20)
3.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승에 근거하여 변론함 (8:8~10)
4. 자연 현상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함 (8:11~19)
5.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욥을 비난함 (18:1~4)
6. 욥에게 독설로 저주함 (18:7~10)
7. 하나님과 인간을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로만 파악하고 인격적 관계에 있음을 알지 못함(25:1~6)
[ 소발의 변론의 특징 ]
소발은 “거친” 혹은 “지저귀는 자”라는 이름을 뜻을 갖는다. 그는 도덕가나 독단적 교리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며 그의 논증의 근거는 가정이다. 다소 거칠고 둔한 모습을 느끼게 하는 소발은 인습적인 분위기로 현재 “우리는 죄를 짓고 있다”라는 논지로 욥에게 “악한 자의 생이 짧다”라는 것을 훈계한다. 이 소발의 신관은 “굽은 것을 곧게 하시는 철저한 하나님”임을 믿고 있으며 그의 변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불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함 (11:4~6)
2.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교리적으로만 설명함 (11:7~11)
3. 욥에게 직접적으로 회개를 촉구함 (11:12~20)
4. 모든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의거, 변론함 (20:2~4)
5. 하나님의 공의만을 강조하고 사랑은 도외시함 (20:27~29)
[ 엘리후의 변론의 특징 ]
다소 이지적인 신학자의 모습을 보이는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갖고 있다. 그는 젊은이답게 교육을 통한 논증의 근거를 보이고 있으며 예민하고, 분을 내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젊은 사람의 혈기도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논조를 보면 약간의 교만감도 우리는 느낄 수가 있다. 따라서 그의 논조는 논리적인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시고 교훈하신다”는 논지로 욥에게 “겸손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훈계를 한다. 이 엘리후의 신관을 그의 변론을 통해 살펴보자면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훈련자 이시며 교사이신 하나님”이시다.
엘리후의 변론이 다른 세 친구와 다른 점은 그의 변론은
첫째로 그가 철두철미하게 욥에 대하여 동정을 갖고 그 변호자로써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세 친구들에게도 노를 발하는 모습(32:3)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가 있다.
둘째, 엘리후는 총명(지혜)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사람에게 타고난 것이라고 설명한다.(32:8) 따라서 지혜로 불리워 질 때 까지 시간을 들여 노력하고 또 완숙해 지도록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욥은 보다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28:28)
셋째, 이러한 엘리후의 변론 역시 그의 지나친 자신만만함과 작은 교만은 그의 논지를 입증 하는데는 실패한다.
넷째, 그는 분노의 감정으로 논쟁에 임한다.(32:2~5) 이는 지극히 개인적 감정의 표출이다. 욥이 의롭다 함을 보고 그는 분을 냈으며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면서도 욥의 질문에 대답할말을 하지 못할 때 분노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노는 그 자신이 하고 있는 지금의 변론 자체도 온전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섯째, 이러한 엘리후도 욥을 변호한다고는 하지만 욥의 진정한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갖는 유한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엘리후의 모습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변론에서 기여한 바는 하나님은 인간의 훈련과 징벌을 목적으로 고난을 주실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33:14~30;37:13) 이것은 엘리바스의 변론과 비슷하기도 하지만(5:17) 젊은 그가 변론한 말 가운데에서 가장 인본주의적인 모습을 벗어난 말이기도 하다. 사실 1장과 2장 서문에서 이미 욥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고 또 욥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자신의 고난의 모습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잃지 않고 있는데 엘리후의 이 말이 욥에게 커다란 위안은 되지 않았을 지라도 인간으로서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위로한 말치고는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엘리후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욥의 세 친구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적인 모습을 그 세 친구와는 다르게 신본주의적인 모습을 가지고 변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변론을 함으로서 전통과 경험, 이성을 통한 가정을 중심으로 변론하는 세 친구의 모습과는 대조를 보이는 것이다.
다음은 엘리후의 변론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요약한 것이다.
< 장점 >
1.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므로 인간이 하나님과 변론하려 해서는 안됨을 강조함 (33:13~18)
2. 인간의 구원은 선행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달려 있음을 강조함(33:24~30)
3.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이 연단을 위해 주신 것임을 강조함 (33:29~30)
4. 하나님이 우주와 역사를 절대적인 공의에 의해 섭리하심을 강조함 (34:10~15)
5.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 자신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음을 강조함 (35:1~8)
6. 자연 현상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함 (36:1~37:18)
< 단점 >
1. 고난중에 있는 욥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음 (35:8)
2. 욥이 고난 중에도 신앙을 잃지 않았음에도 신앙을 버린 양 정죄함 (36:17~23)
3.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이해하긴 했으나 욥의 고난 자체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함
III. 결 론
결론적으로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의 변론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려고 변론을 시작하였지만(2:11) 엘리후는 선지자적 사명으로 진리 수호을 위해 변론하기 시작하였다.(32:18~22)
따라서 이들의 방법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데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독단적, 인본주의적인 인과응보적 논리로 욥을 정죄하였지만 엘리후는 욥 스스로 자신을 살피도록 유도를 하였다.(33:5~7)
이들은 변론 과정에서 역시 다른 태도를 각각 보이는데 욥의 세 친구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데 대해 노하였지만(18:7~10) 엘리후는 욥이 반박할 수 있도록 포용하는 태도를 보였다.(33:32)
변론의 근거를 살펴 보면 세 친구는 환상(4:12~21)과 전승(8:8~10)으로 변론을 주로 하였고 엘리후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바른 통찰력(33:13~33)을 근거로 하였고 세 친구는 고난은 죄의 결과임을(4:7~11) 입증하는데 주력한 반면 엘리후는 고난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연단하시기 위한 것임을(33:19~30) 밝힌다.그러나 이들은 고난의 해결책으로 모두 회개를 촉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22:21~30;34:31~32)
이들 모두에게는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 역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다.아무리 그들의 말과 변론이 인격적이고 도덕적이며 하나님을 아는 수준에서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그들 역시 유한한 인간이며 죄로 오염되어진 인간이기에 신이신 하나님의 그 모든 계획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세 친구가 갖는 한계성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무지하고 감정에 치우친 반면 엘리후는 자기의 주관대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함에 있다.(34:7~9;33)
이 논술을 통하여 두 가지를 개인적으로 고난에 대하여 깨닫는다.
첫째는 고통의 첫째 이유는 보다 큰 고통을 면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는 것이며 둘째는 어떠한 고통이 우리에게 임한다 할 지라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바를 모두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이 논술을 통해 깨닫기를 원한다.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끝.
[참고자료]
1. 빌 아놀드 외 1인, 구약의 역사적 신학적 개론, 크리스챤, 2009
2. C.헤슬 벌럭, 시가서 개론, 은성, 1999
3. 우찌무라 간조, 성서주해, 성서연구원, 2001
4. 제자원 편집 위원, 그랜드 종합 주석, 제자원 워드 하우스, 2009
http://blog.daum.net/eyoungu/18283198
욥기의 해피 앤딩과 예수님
욥기는 42장, 총 1059절에 걸쳐, 무엇보다 의인의 고난이라는 신정론을 다룬다.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 즉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희생양)같은 욥이었다(참고. 르네 지라르: 욥처럼 예수님도 희생양임). 만약 욥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면(욥 2:9) 하나님이 사탄에게 패배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욥의 인내를 도우셔서 사탄을 물리치셔야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쁜 뜻을 열심히 이루기 위해서라면 못 하실 일이 없다(욥 42:2).
욥기의 결론은 아래와 같이 기독론적 해피 앤딩의 예고편이다:
1. 인간 관계의 회복:
욥은 자신의 고난 중에 제대로 나타나지도 않았던 형제자매와 지인에게 식탁 교제를 베푸는 자비로운 호스트 역할을 한다(욥 42:11). 이리와 타조의 친구로 살던 욥(30:29)은 더 이상 소외되지 않고 인간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죄인과 식탁 교제(성찬)를 하시며, 선으로 악을 이기셨다.
2. 회복적 정의를 위한 기도의 회복:
욥의 친구들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하나님에게 기도한 적이 없지만, 욥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42:10). 욥기의 등장인물 중 하나님에게 직접 말을 걸고 기도한 이는 욥뿐이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라는 징벌적 정의를 내세웠지만, 욥은 기도를 통해 회복적 정의를 실천한다. 회복적 정의의 성취는 죄인의 회복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중보 기도를 드린 예수님에게서 본다.
3. 물질과 장수와 자손의 회복:
가축은 2배 증가하고, 완전 충만의 숫자 열을 반영한 10자녀, 4대 자손을 보며, 140년을 더 살았다. 욥의 7아들처럼, 아름다운 세 딸은 기업을 분배 받았다(42:15). 주 예수님 안에는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는 회복이 발생한다(갈 3:28). 욥 1장처럼 42장에서 회복이 일어난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덕분이다. 능력과 부를 가지신 창조자 예수님은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시는 재창조자시다(계 1:17; 5:12). 오메가이신 주님은 우리의 일그러진 인생도 부활의 권능으로 회복하시고 소망을 주신다(벧전 1:3).
4. 고난보다 더 큰 하나님의 자비로 강함의 회복:
욥처럼 인내하는 이는 복되다. 주 예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기에, 주님이 강림하실 때 까지 성도는 길이 참아야 한다(약 5:7, 1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욥 1:1; 2:3; 28:28)는 소망으로 인내하기에, 고난 가운데서 더 강해진다.
5. 임마누엘로 인한 해피 앤딩:
욥은 하나님에 관해 들었지만 이제 보고 임마누엘을 주린다(욥 42:5). 욥기의 해피 앤딩은 신약 성경의 해피 앤딩을 예고한다. 하나님의 본심은 저주와 심판이 아니라 구원과 복이다. 예수님이 등불이 되셔서 신부와 영원히 임마누엘하실 것이다(계 21:23).
위의 해피 앤딩을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보여준다(송길원목사님의 FB글에서 인용함):
‘세례 요한 탄생 축일의 저녁 기도’ 첫 소절(ut gueant laxis resonare fibris mira gestorum famili tuorum solve polluti labi reatum sancte Joannes)에서 따온 이 음계는, 11세기 음악 이론가요 수도사였던 ‘Guido of Arezzo’가 고안했다.
Do: Dominus(하나님),
Re: Resonance(하나님의 음성이 울림),
Mi: Miracle(기적),
Fa: Famille(가족),
Sol: Solution(구원, 더러움을 해결함),
La: Labii(입술),
Si: Sancte Iohannes(거룩한 요한),
Do: Dominus(하나님).“하나님, 주님의 음성의 울림, 기적, 가족, 구원, 입술, 거룩,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과 성도의 해피 앤딩의 삶을 노래한다. ‘도’가 처음과 마지막에 반복되어,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복음의 소리와 기적으로 죄인을 구원하셔서 가족으로 삼으신다. 해피 앤딩을 보장 받은 주님의 가족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입술로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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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A. Prideaux. “Job 42:7-17, and the God of the Happy Ending.” The Reformed Theological Review 71(2012, 3), 170-184.
송영목 / 고신대학교 교수
욥기에 나타난 `부당한 고난`에 대한 이해
1. 욥기의 핵심적 스토리
욥기는 어전회의에서 발생한 사탄의 고소 사건을 그 배경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현세적 인과응보 교리에 따라 욥의 고난을 해석하려 했던 친구들의 변론을 침묵으로 끝나게 한다. 대신에 하나님의 지혜를 대변하는 엘리후를 등장시켜 자기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욥을 제압하게 한다. 엘리후의 네 번에 걸친 변증은 욥으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었다(6:24, 25; 19:4; 33:31, 33).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33:17-18).
이 말은 엘리후가 논증한 변론의 핵심이자 주제이다. 욥기 기자는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싸움터에서 돌진하는 용사처럼 욥으로 하여금 맹렬하게 적진을 향해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욥은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향해 대항하는 것처럼 보였던 욥은 공의로우신 절대자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앞에서 철저하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욥기가 계시하는 하나님
욥이 갖혀 살고 있던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세계, 즉 하나님 앞에서 알게 된 인간의 고난 문제는 그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현실 앞에서 볼 때 지극히 작은 피조계의 현상에 불과했다. 오히려 욥은 자신이 당한 고난가지고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욥은 인간이 만든 정의의 범주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둘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았다. 우리가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다. 그것은 우리의 논리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언약(창 3:15) 안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아가페를 감지할 뿐이다.
이 하나님의 언약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한 상태에서 주어졌다. 그리고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통해 점진적으로 계승되었다. 마침내 이 언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 결과 이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들은 십자가와 죽음의 경험을 통해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욥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즉 욥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와 증거에서 그 핵심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우심에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욥기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유일한 '진리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길은 인간의 역사를 정화시키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의 메시지였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아무런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을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분이시다.
3. 욥을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버림받은 사람의 고통과 외로움을 대변한다. 이것은 또한 경건한 성도들이 겪은 지독한 고독의 외침이기도 하다(시 22:1-3). 욥은 그와같은 경험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외면치 않고 구원하는 분이시다(시 22:4-6).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길을 따르도록 초청하신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30).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십자가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에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남아 있다(고전 1:26-29).
인간의 고난과 고통은 그 원인이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그밖에 또 다른 것이든 신학적 과제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세상의 구조, 즉 수많은 부조리와 불합리의 구조 속에서 억압과 고통을 받아야 하는 우리와 우리 이웃들에게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주장할 것인지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는 질문이며 교회에 대한 도전일 것이다.
그런데 욥기는 그 문제에 대해 한줄기의 빛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욥이라는 인물이 당한 고난과 하나님을 향해 끈질기게 전진하는 신앙의 결과 마침내 욥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욥기는 우리에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증인으로서 욥을 제시하고 있다.
4. 십자가의 길과 신자가 누릴 영광
이 세상에서 부당하게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욥과 같은 심정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욥 7:11).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그리고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빛 가운데 있어야만 '부당한 고난이라고 하는 허망한 논쟁'(욥 16:3)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욥과 같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로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다.
이것은 신비스럽게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었다. 그리고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는 바울 사도의 선언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마치는 말
야고보 사도는 욥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
욥의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자랑하신 것처럼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성을 증명함으로써 사탄의 참소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한 욥에게 복을 주심으로써 욥의 신실성을 온 천하에 나타내셨다.
이로써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하고 욥을 고소했던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욥기는 결국 욥을 비롯해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사탄 외에는 아무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 나라의 주권과 영광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욥기의 주제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송영찬 목사/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구약성경을 한번이라도 다 읽어보신 분이 계신가요? 구약성경은 39권으로 구성됩니다. 그중에 가장 읽기 힘든 성경은 욥기입니다. 욥기는 전체가 42장으로 비교적 양이 많지만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의인이고 부자였던 욥이 어느 날 갑자기 쫄딱 망했다가 다시 축복을 받아 잘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는 전체 42장에서 단 세장, 즉 앞의 1, 2장과 마지막 42장에만 나옵니다. 욥의 줄거리만 알고 싶다면 이 세 장만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욥기가 정작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대목은 나머지 장에 나옵니다. 3장부터 39장까지가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 대목은 욥의 친구들과 욥, 그리고 욥과 하나님 사이에 벌어지는 신학적 논쟁입니다. 이런 신학적 논쟁이 지루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욥기 읽기를 꺼려합니다. 믿음의 깊이와 세상 삶의 불가해한 차원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욥기가 필독서입니다.
욥의 대재난
욥은 두 번의 큰 재난을 당합니다. 하나는 자녀들과 재산을 모두 잃은 사건입니다. 욥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욥에게는 아들이 일곱에다가 딸이 셋이 있었고, 양 칠천 마리, 낙타 삼천 마리, 소 오백 겨리, 암나귀 오백 마리가 있었으며, 그 밑에서 일하는 종들도 많았습니다. 욥은 요즘의 큰 기업체 사장에 해당됩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모범적으로 잘했습니다. 욥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소식을 연달아 들었습니다. 1) 스바 사람들이 들이닥쳐 들판의 소와 나귀를 강탈해가고 종들을 죽였다. 2) 번개가 쳐서 양과 종들이 모두 죽었다. 3) 갈대 사람들이 들이닥쳐 낙타를 강탈하고 종들을 죽였다. 4)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돌풍이 불어 자식들이 모두 죽었다.
욥이 당한 두 번 째 큰 재난은 욥이 가장 저주스러운 병에 걸린 사건입니다. 욥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재난을 당한 뒤에도 욥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재난은 원래 사탄의 음모였습니다. 천상회의에서 사탄은 욥을 함정에 빠뜨리겠다고 하나님과 흥정을 벌입니다. 욥이 하나님에게 성실한 것은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니까 그 축복을 거두어들이면 하나님을 거부할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허락합니다. 사탄은 욥의 재산을 빼앗고 자녀들을 죽게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욥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자 사탄은 다시 하나님과 흥정을 벌입니다. 재산과 자식을 잃었어도 자기 몸이 성하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거니, 그의 몸을 치면 달라질 거라는 주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생명만은 손을 대지 말라는 단서를 달고 사탄의 요구를 허락합니다. 욥 2:7, 8절은 욥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고대인들에게 악성 피부병은 가장 저주스러운 병입니다. 일단 겉으로 볼 때 흉하기도 하고, 본인이 견디기도 힘들고, 전염성도 높기 때문입니다. 욥이 걸린 병이 나병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나병과 악성 종기나 피부병이 구분되지도 않았습니다. 일단 이런 병에 걸린 사람은 격리 조치됩니다.
본문에서 욥이 재 가운데 앉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재는 똥더미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요즘의 쓰레기장입니다. 욥이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몸이 가려워서 긁었을 수도 있고, 자학적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욥은 지금 인간으로서 죽지 않는 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으로 추락한 셈입니다. 이 순간에 갑자기 욥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그는 욥에게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 여자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을 한 날에 잃은 어머니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하나도 아니고 열을 잃은 겁니다. 참척의 고통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크게 느낍니다. 열 달 가까이 몸에 품었던 아들과 딸을 잃었으니 이 여자가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남편은 차마 옆에서 보기 힘든 상태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 많던 재산과 하인들도 없어졌습니다. 날품팔이나 구걸을 통해서라도 욥을 돌보지 않으면 욥은 굶어 죽습니다. 아내는 욥을 돌보면서 위로하기도 하고, 살 길을 찾아보자고 의논하기도 했겠지요. 그런데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아내에게는 모순이요 자가당착으로 들렸습니다. 모든 걸 잃고 몸도 병들더니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다른 해결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아내는 욥에게 악담을 했습니다. ‘당신,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게 차라리 좋겠어요.’ 이런 상태로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게 오히려 낫다고 뜻입니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가한 비난은 이후 욥의 친구들을 통해서 그 신학적인 논리가 더 풍부해집니다. 욥의 친구들은 세 명입니다. 엘리바스, 소발, 빌닷입니다. 이들은 유대의 지혜 전통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배운 것도 많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친구 욥이 끔찍한 재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와서 위로하고 조언했습니다. 욥이 이런 불행을 극복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당시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상식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욥이 지금당한 재난과 불행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이 욥을 다시 세워주실 거라고 충고했습니다. 욥은 그들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더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고, 욥은 그들을 맞받아쳤습니다. 이들 사이의 논쟁이 한바탕 지난 뒤에 젊은 유대교 신학자인 엘리후가 등장해서 또 다른 논리를 제시합니다. 욥에게 임한 재난은 높은 경지의 신앙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니, 참고 견디면 좋은 시절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겁니다. 욥은 사면초가에 빠졌습니다. 아내와 세 명의 친구와 젊은 신학자가 다 욥을 비난했습니다. 본문 욥 2:10절은 아내를 향한 욥의 대답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위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화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는 대답입니다. 이것은 기복주의의 극복입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전통적인 입장과는 위배됩니다. 구약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사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임하고,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보십시오. 다 복 받아 부자로 살았습니다. 중간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간이고, 더 나가서 그것은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이고 결국에는 다 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이자 자신들을 선택한 신이라 믿었던 유대인들에게 이런 생각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이런 생각과 논리가 유대의 지혜전통으로 자리 잡았고, 그것이 구약의 중심사상인 신명기 역사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욥은 이런 전통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복만이 아니라 화를 당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른 하나의 대답은 욥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재난을 당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욥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자기 죄의 탓으로 돌리고 인정하든지, 아니면 이유 없이 재앙을 내린 하나님을 욕하고 죽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아내와 친구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욥은 그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욥은 겸손하지도 못하고 용기도 없는 인물로 비쳤을 겁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못했으니까요. 여러분들도 욥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욥이 왜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걸까요?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을 대표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성실하게 섬기던 사람이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저주스러운 운명에 떨어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 신앙이 가능할까요?
욥기는 바로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팔복에서 복되다고 말씀하신 대상은 가난하고 울고 외롭고 갇힌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위로를 받을 길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사람들로 매도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 그리고 시냇물을 찾는 목마른 사슴의 심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하나님만을 향하게 됩니다. 세상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참되게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동의하시나요?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불행한 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더 근원적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게 뭘까요?
얼마 전에 둘째 딸과 아침을 먹으면서 식탁에 올려놓고 제가 조금씩 읽고 있는 하이데거에 관한 책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섬뜩한 느낌으로서의 불안’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계 안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알게 되면 섬뜩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설명을 듣자 딸은 자기도 더 어렸을 때부터 그와 비슷한 느낌을 종종했지만 너무 무섭고 낯설어서 자꾸 피하면서 재미있는 일상에만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느낌을 경험했을 겁니다. 내가 어디서 왔을까, 하는 질문만 파고들어도 아득하고 섬뜩합니다. 혼자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단절된 상태를 견뎌내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그런 느낌은 더 심각해집니다. 이런 걸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입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고립무원으로 세상을 대면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백척간두라고 불렀습니다. 백 척이면 30미터쯤의 높이입니다. 그런 나무 기둥 위에 혼자 올라서면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욥의 운명이 이와 비슷합니다. 아내, 친구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하나님도 도움이 안 됩니다.
현대인들은 영적인 고립무원과 백척간두를 경험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 교육이 그런 경험을 막고 있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모두 대학을 위한 정보를 배우는 데 몰두하고, 대학교에서는 취업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교육 제도 아래서 셍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말하듯이 이 세상의 모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의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관계를 맺는 경험이 가능할까요?
특히 스마트 폰이 청소년들의 정서와 영성 형성에서 더 큰 문제일지 모릅니다. 그 기계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유용한 도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의 역기능이 너무 큽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그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으면서 누군가와, 그리고 어떤 에피소드와 접속합니다.
그게 반복되면서 혼자서 세계를 직면할 능력을 잃어갑니다. 고독을 느낄 틈조차 내기 힘듭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생각할 틈도 없습니다. 연예인들과 스포츠와 인터넷 게임만이 자기 삶의 현실로 경험됩니다. 기껏해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익숙한 것들이 자기 뜻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만 두려워할 뿐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빈말과 호기심과 애매성에 빠져서 본래적인 자기를 상실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신학적으로 바꾸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라는 영적 실존이 무엇인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세상살이에만 쫓김으로써 참된 믿음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설명이 실감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좀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욥의 운명은 쓰레기장처럼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모든 것들과 단절되었습니다. 피부는 병들어갑니다. 숨이 붙어 있긴 하나 죽은 거나 다를 게 없습니다. 욥 3장에서 그는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욥 14장에서 자기를 스올, 즉 지옥에 감춰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뜻입니다. 욥의 운명은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욥입니다. 우리는 곧 늙고 병들고 모든 정들었던 것들과 헤어져야 합니다. 모든 감각이 사라집니다. 모든 기억들이 망각됩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이 득달같이 찾아옵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이 옵니다. 쓰레기장으로 가야합니다.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 욥의 운명을 안고 지금 살고 있습니다. 이 엄중한 사실은 외면한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순간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이런 믿음 없이 어떻게 오늘의 삶을 버텨낼 수 있을까요? 그런 믿음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를 경험했던, 즉 완전히 버림받았던 한 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2천 년 전 삼십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가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반국가 사범에게 내려지는 로마의 사형제도입니다. 그는 체포당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이로 인해서 모든 기존 권력과 체제에 위협적인 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유대교 최고법정인 산헤드린과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빌라도 총독이 이 사람에게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여섯 시간 동안 몇 마디 말을 쏟아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다음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그는 나사렛 출신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정용섭 목사/대구 샘터교회
욥기를 읽는다는 것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지만 실은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성경의 한 책 이야기를 해나가려 합니다. 욥기입니다.
욥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무고한 자가 겪는 고난’ ‘흠이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 ‘세 친구’ ‘욥의 아내’ ‘비슷한 말이 끝도 없이 반복된다’ 등 대개 이 정도입니다.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다거나, 그를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고통을 겪은 욥을 생각하면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은 견딜만 하더라는 것이겠지요.
욥기 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있습니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16:19). 대개 이 정도입니다. 또 있나요?
사람들은 어떤 텍스트를 읽든 그 텍스트가 감추고 있는 보물에 접근하기보다는 자기 삶의 정황에 필요한 말들만 발췌하여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고한 시인 기형도는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에서 목사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와 좀 다른 목사 한 분을 소개합니다. 그 목사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이 없습니다. 손 노동을 좋아하는 그는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기도 했습니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교인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그게 왜 분노해야 할 일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고백과 삶이 분열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어서였을까요?
저는 그 말을 성경 읽기는 삶을 통해 완성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욥기의 세계를 산책하면서 우리 삶의 실상과 만나고,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이 깊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욥이 실존 인물이 아니란 말이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욥기가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도입부를 볼까요?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1:1). 옛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옛날옛날에 ~이 살고 있었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과 유사하지요? 지명은 나와 있는데 시대를 짐작해 볼 만한 정보는 아예 없습니다.
인물에 대한 정보도 그렇습니다. 욥이면 욥이지,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라니요?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인물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 혹은 사건 전달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표정을 보니 “그러면 욥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냐?”고 묻고 싶은 것 같군요.
사람들은 일쑤 사실과 이야기를 혼동합니다. 욥은 실존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전형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성이 진실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이 “옛날옛날에~”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하여 아이들이 “에이, 꾸며낸 이야기잖아. 진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 이야기 속에 진실이 담겨 있음을 압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탄생할 만한 삶의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마치 배경 음악처럼 그 이야기가 탄생한 상황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민담이나 전설 혹은 설화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걸 분석할 능력이 좀 부족하니까 전문적인 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습니다.
학자들은 욥기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돌아온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앞으로 본문을 읽어가는 과정 중에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환 이후의 상황은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등의 책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푸른 꿈을 안고 찾아온 고국 땅에서 귀환자들은 절망만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 아름답게 새겨져 있던 고국산천은 황폐하게 변했고, 성전마저 무너져 예루살렘은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두 손을 들고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오느니 한숨뿐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탓할 대상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무능한 지도자들에게 눈을 흘기기도 합니다. 그래 봐야 곤고한 상황이 해결될 리 만무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야기를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제 아버지는 평생토록 한복을 입고 지내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작 무렵에 태어나셔서 20세기를 거의 관통하며 사셨으니 참 고난에 찬 인생을 사셨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몇 년 전부터 집에 계실 때면 늘 들으시던 음악이 있습니다. 무료할 때 들으시라고 ‘국악’ 테이프를 사드렸는데, 그중에서도 ‘회심곡’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듣고 또 들으셨습니다. 노래꾼은 사람이 어떻게 잉태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돌봄을 받으며 자랐는지 처연한 음색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진자리는 인자하신 어머님이 누웁시고 마른자리는 아기를 뉘며
음식이라도 맛을 보고 쓰디 쓴 것은 어머님이 잡수시고 달디 단 것은 아기를 먹여
오뉴월이라 짧은 밤에 모기 빈대 각다귀 뜯을세라 곤곤하신 잠을 못다 주무시고
다 떨어진 세살부채를 손에다 들고 왼갖 시름을 다 던지시고
허리둥실 날려를 주시며 동지섣달 설한풍에 백설이 펄펄 날리는데
그 자손은 추울세라 덮은데 덮어주고 발치발치 눌러를 주시며
왼팔 왼젖을 물려놓고 양인 양친이 그 자손의 엉둥 허리를 툭탁치며
사랑에 겨워서 하시는 말씀이 은자~동아 금자~동아 금이로구나
만첩 청산의 보배동아… 순지 건곤의 일월동아
나라에는 충신동아 부모님전 효자동아 동네방네 위엄동아
일가친척의 화목동아 둥글~둥글이 수~박동아
오색비단의 채색동아 채색비단의 오색동아
은을 주면 너를 사고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애지중지 기른 정을 사람마다
부모은공 생각하면 태산이라도 무겁지 않겠습니다
연세가 많아지시니 일찍이 세상을 떠나신 엄부자모(嚴父慈母,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가 그리우셨던 모양입니다. 어떤 근원적 슬픔에 접속되었다고 할까요. 아버지는 그렇게 생의 말년의 울울한 심사를 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이한치한(以寒治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은 열로 다스리고 차가움은 차가움으로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슬픔의 감정 또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들음으로 슬픔을 다스립니다.
욥기를 읽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삶이 봄날처럼 화창하고 평안한 이들은 잘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삶이 쓸쓸하고 곤고하여 견딜 수 없는 이들이 읽습니다. 욥기를 읽다보면 연민과 비슷한 감정이 일고, 어느 사이에 자기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연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연민은 파괴적 또는 고통스러운 악이 어떤 사람에게 부당하게 발생하는 것을 볼 때, 또한 그런 일이 우리와 우리의 친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일어날지도 모를 때 생기는 괴로운 감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지금 더할나위없이 행복한 사람, 혹은 모든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 이야기가 핍진성이 없어도 연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연민의 감정이 일고 그것은 카타르시스로 이어집니다. 카타르시스는 본래 약제를 통해 인체 속에 생긴 불순물을 씻어내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확장되어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욥기를 그런 관점에서 읽을 수는 없을까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기술된 욥기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변할 때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옛 질서가 무너져 내릴 때, 든든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흔들릴 때, 상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욥기 독자들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논리로는 해명되지 않는 세상이 그들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욥기는 율법의 가르침이 부질없어 보이는 현실, 성전 체제가 더 이상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현실, 인습적인 지혜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생의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술된 것입니다.
아카드어로 ‘욥’이라는 말은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뜻이랍니다. 말의 경제성이 대단하지요? 욥의 존재 자체가 질문입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는 애타는 외침인 셈이지요. 이쯤되면 이름이 운명이라는 말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의 몸이 뒤집힌 물음표 같지 않습니까? 시인 김승희 님의 시 한 대목을 들어보세요.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병든 물음표.”
<신의 연습장 위에>라는 시의 일부인데요, 가슴이 저릿해지지 않나요? 자기를 ‘신이 쓰다버린 모호한 문장’ 같다고 느끼는 이 도저한 비애. 욥을 생각할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르는 것은 유한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연민 때문일 겁니다.
욥기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지혜에 끝없이 의문부호를 붙이는 욥과 그것을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세 친구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복적 지혜와 인습적 지혜의 충돌이라고 할까요? 욥은 자기 경험세계의 파탄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친구들은 욥에게 불경한 언설을 그치라고 윽박지르는 식입니다. 나중에는 엘리후라는 젊은이까지 등장해서 논쟁이 좀 복잡해집니다.
본문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좀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기의 기술체(記述體, style)는 두 가지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1~2장과 42:7 이하는 산문체 서술입니다.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운문체 서술입니다. 그러니까 욥기는 산문체 부분이 운문체 부분을 에워싼 액자 구조라고 보면 됩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대체로 산문체 부분입니다. 그 부분은 욥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가 갑자기 어떤 불행에 빠지게 되었는지, 고난 속에서도 그가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보였는지, 그래서 마침내 얼마나 큰 복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전해줍니다. 구성도 단순하고 메시지도 확실합니다.
그에 비하면 운문체 부분(3장부터 42:6까지)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렇게도 경건했던 욥이 하나님께 마구 대듭니다. 그리고 친구들끼리 우정에 금이 갈 정도로 치열하게 논쟁을 벌입니다. 겸손하던 욥의 언어도 격정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토론이 어떤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심이 좀 부족한 사람들은 중간 부분을 과감하게 건너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욥기의 핵심은 바로 운문체 부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운문체 부분은 욥과 그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논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의 비대칭적 논쟁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슷비슷한 말들이 반복되는 것 같아 때로는 읽기 지겹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운문체 부분에는 욥의 긴 탄식과 엘리후의 일방적인 연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신 하나님의 까칠한 질문도 나옵니다. 미로처럼 복잡한 논쟁과 이어지는 말들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욥과 친구들을 당혹케 했던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손쉬운 해답을 구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가라지 비유 생각나세요? 어떤 사람이 밭에다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싹이 나고 마침내 결실할 때가 되었는데 가라지도 보이는 겁니다. 당황한 종들이 주인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마 13:27). 원수의 소행이라는 말을 듣고 종들은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말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했던 겁니다.
세상은 선과 악으로 딱 갈리지 않습니다. 선과 악이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있습니다. 전적으로 선한 사람도 없고, 전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착종(錯綜)되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함부로 ‘심판하지 말라’ 혹은 ‘정죄하지 말라’ 하신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욥기 읽기에 앞서 염두에 둘 것
욥기를 읽어나갈 때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태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를 자임합니다. 욥은 땅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시련이 부조리하다는 것입니다. 욥이 지금껏 기대왔던 신학으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그는 거듭거듭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벌을 받고, 선한 이들이 상을 받는 것이 그가 의지해 온 신학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겁니다. 욥을 힘들게 했던 것은, 이미 작동하지 않는 신학을 가지고 친구들이 끊임없이 그를 꾸짖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불행을 겪는 이들을 보면 위로한답시고 하늘의 관점에서 말을 할 때가 없지 않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불행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그것이지요. 말을 해야 할 때와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입을 다물어야 할 때 발설되는 말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상처를 더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둘째, 욥기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욥의 말보다 친구들의 말이 더 은혜롭게 들리기 때문일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았나요? 욥의 말은 종작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비해 친구들의 말은 논리정연합니다. 물론 나중에 가면 그들의 말도 다소 흔들리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욥이 주인공이니까 그의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친구들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만큼 전통적인 지혜 혹은 인습적인 지혜에 익숙하다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께 마구 대드는 욥을 보면 불경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욥기의 새로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욥은 그런 지혜가 작동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욥의 말이라고 다 맞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의 말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옳고 그름의 척도로 그들의 논쟁에 접근하면 욥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발화된 말의 내용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말이 발설되는 상황이나 심리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지만 때로는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될 때도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욥기의 주제를 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라고 못박는 것은 다의적(多義的)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에 굴레를 씌우는 일입니다. 어쩌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이란 시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에게 혹은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답은 없습니다. 인간을 지칭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실존’ 혹은 ‘현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어쩌면 물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의 세계’가 속절없이 무너질 때 세상은 불안정해집니다. 실존은 크게 흔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욥에게 닥쳐온 고난의 이유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넷째, 욥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과거의 인물로 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태와 정도는 다르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욥은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어떤 의미에서 ‘욥들’을 양산하는 체제입니다. 욥기를 읽어가는 동안 신문을 옆에 두고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중심부에 있는 이들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욥기를 읽어가면서 우리 곁에 있는 ‘욥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진짜 메시지를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네요. 욥기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에 던져진 유한한 존재로서의 우리 삶의 실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삶은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합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했던 뉴턴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자기를 놀라게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고 말합니다. 대체 어떤 힘이 나무를 위로 밀어올리고 열매를 맺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을 가지고 그 신비를 설명합니다. 중력은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이고, 은총은 위로 끌어올리는 힘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욥기를 읽어가면서 이 두 힘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김기석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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