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5장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이 귀인들을 위해 베푼 잔치 자리에,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 쓴 글씨로 인해 두려워하지만 해석하지 못한다. 그러나 태후의 제안으로 왕 앞에 온 다니엘은 성전의 기명을 술잔으로 사용한 왕의 교만과 죄를 책망하고 글을 해석한다. 그리고 벨사살은 그날 밤에 죽고 바벨론은 다니엘의 해석대로 메대 사람 다리오에게 넘어간다.
벨사살 왕은 바벨론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느부갓네살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였다.
유명한 조상을 부친으로 표현하는 것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일반화된 관례였다.
지금도 이스라엘이나 아랍인들은 조상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따라서 바벨론제국의 영웅 느부갓네살을 부친으로 호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 때 그토록 강대했던 바벨론제국은 이후 급속히 약화되어,
벨사살이 큰 잔치를 베풀고 있을 이 당시는,
바사 왕 고레스 2세가 바벨론 제국의 수도인 바벨론성을 포위한지 근 2년이 지난 때였다.
아니! 적에게 포위된 지 2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큰 잔치를 베풀며, 귀인이 1천명이나 참석할 수 있었단 말인가?
역사가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바벨론성은 천혜의 요새인데다,
바벨론 시민 전체가 20년 이상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고,
식민지로부터 들여온 온갖 재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당시 바벨론 제국은 고레스에게 계속 폐전함으로 인해 바벨론성까지 밀려났기 때문에,
각 지방에서 도망쳐온 귀족들이 성에는 가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날 밤 벨사살 왕이 베푼 큰 잔치는 바벨론성의 귀족뿐만 아니라
전쟁의 와중에서 도망쳐온 귀족들을 위한 잔치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잔치는 비록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베푼 것이라 할지라도,
전쟁에 지친 나라의 지도자들을 왕이 불러모아놓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굉장히 의미 있고 타당성이 있는 잔치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장면을 보면, 이 잔치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벨사살은 술을 마실 때,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 온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고,
그 그릇에 술을 부어 마셨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기던 바벨론의 온갖 잡신우상 앞에 가서 찬양을 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의 우상숭배는 우상 앞에서 온갖 음란한 행동을 자행하는 것이었으므로,
왕과 비빈들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함께 어울려 벌였던 이날 밤의 광란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했던 극악무도한 범죄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미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세계 역사의 절대 주권자 되심을 조서로 반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벨사살 왕이 의도적으로 성전의 기명들을 가져와 술을 부어 마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자신의 절대적인 권세로,
바벨론성을 포위하고 있는 고레스의 공격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 내지는 교만한 마음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이날 밤의 큰 잔치는 여호와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모독하며,
인간의 교만과 욕망을 유감없이 드러낸 패역의 자리였다.
벨사살과 그 무리들이 우상잡신을 찬양하며 광적인 향락에 빠져 악행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왕궁 촛대 맞은편 하얀 석회 벽에, 사람의 몸은 없고 손가락만 나타나 몇 글자를 썼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였다. 글자를 쓰는 손가락과 벽에 기록된 글을 본 순간,
연회장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아 버렸다.
어찌 하나님께서 이 같은 패역한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겠는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목격한 벨사살 왕의 낯빛이 사색으로 변하며,
극도의 공포감으로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렸다.
벨사살은 비명을 지르듯 바벨론의 박사들을 부른다.
하지만 왕의 박사들은 아무도, 그 뜻은커녕 글자조차 읽을 수 없었다.
공포감과 두려움으로 연회장은 동요하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후가 잔치하는 궁에 급히 들어왔다.
다니엘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태후는 벨사살 왕에게 다니엘을 부르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불려온 다니엘을 대하는 벨사살 왕의 태도가 몹시 거만하다.
다니엘이 일찍이 느부갓네살 왕을 도와 나라를 치리했던 원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벨사살은 다니엘을 포로 출신의 유다인임을 거론하며,
어디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보라는 듯 상을 걸고 재촉한다.
신체가 마비될 정도의 극한 공포 속에 벌벌 떨었던 벨사살은
다니엘 앞에서 지금 어리석은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악한 자들이 멸망할 줄 알면서도 헛된 교만과 패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 벨사살 같은 자가 바로 그 경우이다.
다니엘이 누구인가? 10대에 포로로 잡혀와 오랜 세월 바벨론 왕궁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승리하며 지내온 사람이 아닌가?
벨사살이 비록 왕좌에 앉아 자신을 멸시하고 있었지만,
술 취한 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패역한 군주를 바라보는 다니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는 다니엘의 적수가 못되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났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왜 왕궁 벽에 신비한 손가락이 나와 글을 기록했는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벨사살의 잘못을 고발한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말은 아람어로, 문자적 의미는
‘세어 보고 세어 보고 달아 보매 부족하여 조각을 낸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어디 바벨론제국과 벨사살 왕만 세어보시겠는가?
어떤 인생이, 아무리 지혜롭고 총명하며 위대하다 할지라도,
어떤 나라가, 아무리 강대하다 할지라도, 죽지 않는 인생이 없고, 쇠퇴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실로 창조주 하나님은 인생과 민족과 나라와 및 모든 만유의 기한과 때를 작정하시는 주권자이시다.
특히 본문에 보면 ‘메네 메네’라고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세어 보고 또 세어 보시며 참고 기다리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언제까지 기다려 주실까?
나에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을까?
우리는 때가 이르기 전에 잘못된 것들은 원위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시험 칠 때, 답안지를 내고 난 다음 정답이 생각났던 안타까운 경험이 있는가?
인생 시험지를 주님 앞에 제출하기 전에, “이제 그만!” 하고 주님 부르시기 전에,
아직도 주님께서 세어 보고 세어 보고 계실 때,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나님 앞에서도 성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신앙에 승리하는 하늘나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한다.
‘데겔’은 정확하게 풀이하면, ‘너는 저울질을 받았다.’ 또는 ‘너는 너무 가볍다.’는 뜻이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벨사살을 심판하시되 먼저 그의 모든 것을 정밀하게 저울질하신 다음,
도저히 부족해서 안 되겠다고 판단되자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을 상고할 때마다, 주님 앞에서 얼마나 송구스럽고 죄송한지...
목사로서 나의 열심과 노력이, 언행이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 손 들고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정밀하게 저울질하신다면, 내 무게는 어느 정도일 것 같은가?
여러분의 헌신의 무게, 용서의 무게, 사랑의 무게, 충성의 무게, 믿음의 무게...
주님께서는 엉뚱하고 불공정하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다만 우리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신다.
신앙양심과 말씀의 저울로 자신을 재어보라.
우리는 부족함이 없이 차고 넘쳐흐르는 넉넉한 신앙의 소유자들인가?
다니엘의 예언대로, 바로 그날 밤에 난공불락의 바벨론성은 함락당하고
벨사살과 귀인들은 죽임을 당하며, 바벨론 제국은 막을 내린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겼던 벨사살 왕의 교만이 제국의 운명을 재촉했다.
혹시 나에게도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어리석음과 교만이 자리 잡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아침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내 속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크게 뜨자.
그리고 비진리와 악이 횡행하고 있는 심히 어두운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담대히 지혜롭게 외치며,
좁은 문, 좁은 길을 향해 망설임 없이 힘차게 발을 내딛자.
(기도)
주님,
하나님을 경홀히 여겼던 벨사살의 교만이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나라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교만과 사치와 방자함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들이 식어지지 않게 하소서.
부족합니다. 기도의 분량도, 헌신과 사랑의 분량도 부족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기다려 주시고 새로운 기회 주심에 감사드리며
열심히, 그러나 욕심 부리지 말고
주를 향해 중단 없이 걸어가게 하소서.
다니엘6장 사자굴의 다니엘
다리오가 바벨론을 점령한 후 다니엘은 세 명의 총리 중 한 사람으로 등용되었으나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의 모함으로 사자굴 속에 던져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봉하여 다니엘을 보호하신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넣은 것을 후회한 다리오왕의 명으로 다니엘은 구원되고 모함한 자들은 사자굴에 던져져 죽는다. 다리오는 전국에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제국은
왕들의 실정으로 인해 100년도 지속하지 못한 채 망하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어 왕이 되었다.
그런데 다리오왕이 어떻게 알았는지,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 가운데서
다니엘을 총리의 한 사람으로 발탁한다.
당시 다니엘의 나이는 이미 80이 넘은 고령이었다.
더군다나 다니엘은 멸망한 바벨론 제국에서 최고위 관리를 지낸 사람이었다.
바벨론 제국이 망할 때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니엘은 화를 면했고,
다리오왕은 다니엘을 수석 총리의 자리에 앉혀서 전국을 다스리고자 했다.
80세 넘은 패망한 나라의 전직 관리요,
포로로 잡혀온 유다 백성 중의 한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이 어떻게 다시 총리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뜻을 정한’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지식과 명철과 영적 능력을 더하셨고,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하셨으므로 세상이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다니엘은 나라의 재상이 되어 국사를 맡아 보는데,
원래 그 나라 출신의 관리들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 저 자는 우리가 패망시킨 바벨론의 고위관리가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유다에서 잡혀온 포로가 아닌가?
그런데 어찌 저 자가 우리 머리 위에서 우리를 다스린단 말인가?”
그래서 다니엘을 시기하는 자들은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다니엘의 공무 수행 가운데서 어떤 잘못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참으로 아무런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는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그래서 그 대적들은 다니엘을 넘어뜨릴 다른 구실을 찾기 시작한다.
이에 저들은 신앙문제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다니엘을 넘어뜨릴 수 없음을 깨닫고,
꾀를 내어 왕에게 온갖 아첨을 떨면서 이상한 조서를 내릴 것을 간청한다.
그리하여 결국 한 달 동안 왕 외에 그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는 내용의 조서에 어인이 찍히고 금령이 반포되었다.
유다 사람들은 포로살이 하는 동안 날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바라보면서
하루 세 번, 기도드리는 풍습이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 창문을 열어둔 채, 소리를 내어 기도드렸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숨길 수 없었다.
다니엘은 왕의 조서가 내린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니엘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도했다.
드디어 약점을 잡은 사람들은, 다니엘을 왕에게 고발한다.
다리오왕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리오왕은 하루 내내 사형집행을 피할 길을 찾는다.
하지만 다니엘의 대적들은 하루 종일 왕을 재촉하였고,
어인을 찍어 일단 반포한 조서는 취소할 수 없었던 까닭에,
왕은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리오왕은 온 밤을 지새며 식음을 패하고 음악을 그치며,
일이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한다.
이튿날, 왕은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굴로 가서 다니엘을 부른다.
그런데, 왕이 뭐라고 하면서 다니엘을 부르는가? (20절 읽기)
이때 사자굴 속에서 반가운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왕이여, 나의 하나님이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습니다.”
왕은 심히 기뻐하며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져 올린다.
다니엘의 몸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왕은 다니엘을 참소한 자들과 그 가족을 끌고 오게 하여 사자굴에 던져 넣는다.
그리고는 온 땅에 새로운 조서를 내린다. (26,27절 읽기)
이렇게 해서, 다니엘은 다리오왕 뿐만 아니라,
바사의 고레스 왕 시대에까지 형통한 삶을 누리게 된다.
다니엘의 이 같은 활약이 있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 백성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었고,
또 포로에서 귀환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사자굴의 다니엘’은 주일학교 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참으로 감동적인 위대한 신앙 승리의 표본이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담대하게 소리를 높여 설파한다.
“다니엘이 어떻게 이처럼 오래도록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저는 분명히 여러분께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히 따른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끝까지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다니엘과 함께 하셨던 주님께서,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다니엘을 도우셨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여러분의 모든 삶 가운데 동행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리고 본문과 관련하여 이런 주제도 함께 설교한다.
“혹시 나를 모함하거나 괴롭히는 이웃이 있습니까?
이럴 때, 정말 억울하고 분하고 괘심하지만, 절대 싸우지 말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찬양했던 그 입술로 절대 범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맡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방법입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설교’이다.
신앙을 가졌다고 모두 다니엘이나 요셉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재능과 은사에 따라 다니엘처럼 출세하여 이름을 떨칠 수도 있고,
일평생 작은 마을에서 가족, 이웃들과 더불어 평범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니엘이나 요셉이 아니라,
이 땅에서 이름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로 살다가 주님 앞에 서야할 것이다.
그리고...
가난, 궁핍, 이별, 고독, 실패, 탈락, 사고, 병듦, 낮아짐, 핍박, 죽음...
이와 같은 단어들은 분명히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삶의 일부분인데,
신자들은 물론, 목회자들의 설교와 기도 가운데도 이러한 단어들은 거리끼는 것이요,
불신앙과 저주, 불행의 영역이 되고 말았다.
직접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지만,(요즘은 대놓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
그 반대상황들을 ‘축복’이라, ‘신앙의 승리’라고 대놓고 강변하고 있으니,
신자든 불신자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교회들의 세속적인 욕구 지수가 그 어느 집단보다 높다.
이 땅의 교회들이 구약본문으로 더 많이 설교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구약성경에 대해 조심스러워했던 이유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의 유대교 신자들이 아니라,
복음으로 새 피조물이 된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닌가!
곤핍하고 불안하며 연약한 가운데 있는 교우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또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자녀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욕구가 너무 강렬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내려오라고 요구하고 있다.
돌로 빵을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내리며, 세상 신을 향해 절하라고 강권하고 있다.
교회와 지도자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 땅의 교회마다 넘쳐나는 축복의 메시지,
위대한 신앙 승리자들의 무용담과 획일적인 승리 방정식.
심각한 말씀의 편식으로 인해 비둔해진 교회는
이제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기도)
주님,
우리의 욕심이 너무 커서 하늘을 가리고
상대화된 말씀은 부적이나 축문처럼 취급받고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지혜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고,
다니엘 같지 않은 하찮은 수많은 생명들도
낙심치 아니하고 믿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목회자를 배출하는 이 나라,
주님의 뜻과 계획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잠들지 않게 하소서! 지리멸렬되지 않게 하소서!
다니엘7장네 짐승의 환상
바벨론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은 침상에서 꿈에 계시를 통해 네 가지 짐승과 그 짐승을 하나님이 심판하는 환상을 본다. 그리고 인자에게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고 천사는 넷째 짐승에 대해 해석한다. 이에 다니엘은 크게 근심한다.
다니엘서는 모두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아주 선명하게 둘로 구분된다.
1-6장까지는 다니엘의 생애와 관련된 주요 사건과
다니엘이 섬겼던 바벨론 왕들의 꿈과 환상을 통해 주어졌던
간접적인 묵시들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7-12장까지는 다니엘 자신이 직접 꿈과 환상을 통해 받은 네 개의 묵시를 통해
대제국의 역사를 비롯, 세상의 종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에서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의 다니엘에게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본격적으로 계시하셨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래서 다니엘서를 구약의 요한계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먼저 1-8절을 보면, 네 짐승과 작은 뿔 환상이 나온다.
바벨론 벨사살 왕 원년에 하루는 다니엘이 침상에서 자다가 꿈을 꾸는데,
그 꿈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상이었다.
꿈속에서 보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달랐다.
첫 번째로 등장한 것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모양이었고,
둘째는 곰과 같았고, 셋째는 표범과 같았으며,
마지막 넷째 짐승은 앞의 세 경우와 달리 자연계의 어떤 짐승으로 비유되지 않고
단지 무섭고 놀라운 짐승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이 환상은 느부갓네살 왕의 큰 신상의 꿈과 의미상 서로 일맥상통한 것인데,
바벨론 제국시대로부터 로마제국까지, 그리고 로마제국시대 이후로부터
세상 종말이 도래하기까지의 역사 전개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지금도 바벨론 유적에 보면 날개달린 사자 조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날개달린 사자는 곧 바벨론을 상징한다.
실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새 중의 왕인 독수리와
동물의 왕인 사자에 비유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용맹스럽고 지혜롭게
주변 국가를 정복하였으며 제국을 다스렸다.
2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꿈꾸었던 것처럼,
황금으로 된 큰 신상의 머리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바벨론 제국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이 보니 사자의 날개가 뽑혔고,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죽은 뒤 바벨론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해지고
나중에는 보통의 나라로 남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곰은 사자보다는 그 용맹성이 못하다.
이런 면에서 큰 신상의 정금 머리로 상징되는 바벨론보다 열등한 한 나라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나는데, 은으로 된 가슴과 팔로 상징되는 나라로 바사제국이다.
그런데 이 곰이 갈빗대를 셋이나 물고 있는데,
이것은 바사제국의 탐욕스러운 정복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준다.
실로 바사제국은 항상 100만 명 이상의 군대를 소유하였으며,
역사상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많은 정복전쟁을 치렀다.
세 번째 표범에 비유되는 나라는 헬라제국인데,
이 나라는 큰 신상에서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로 상징된다.
표범은 사자나 곰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민첩성은 두 짐승을 능가한다.
더군다나 표범에 새의 날개 넷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헬라의 군대의 기동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실로 알렉산더의 제국은 불과 13년 만에 세계적인 제국을 형성하였다.
머리가 넷이라는 말은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난 다음
제국이 넷으로 분리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네 번째 존재는 자연계의 어떤 짐승으로도 비유될 수 없는,
엄청난 힘과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로마제국을 상징한다.
큰 신상에서는 철과 진흙으로 된 종아리와 발로 상징되는데,
앞의 세 제국과는 달리 탐욕으로 불타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잔인하게 짓밟으며 그 백성들을 학살했다.
그런데 이 네 번째 짐승은 열개의 뿔이 있었고, 그 가운데 한 작은 뿔이 있었는데,
그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과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로마제국 이후 종말의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간의 지혜와 성정을 가지고 사단으로부터 부여받은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9-14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보좌 환상과 인자의 환상인데,
앞에서 네 짐승으로 상징된 제국을 포함,
세상 모든 나라가 결국은 하나님의 최후 대심판으로 적그리스도와 함께 멸망할 것과,
인자 곧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권세와 영광을 얻고
여호와를 섬기며 그 앞에서 절대 순종하는 선민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메시야 왕국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상에서는 때로 사단과 악한 세력이 승리하는 것 같으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요, 나아가 현세상이 종결되는 세상 끝날에는
필히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원히 멸망할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다.
최후의 심판 자리에 펼쳐져 있는 책들이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책과 행위를 따라 기록한 책이다.(계20:12-15)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어
악이 관영한 이 시대 가운데서도 선으로 악을 이기며,
믿음으로 인내하고 승리하는 겸비한 신앙인이 되어,
생명책에 그 모든 이름이 아름답게 기록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15-28절까지는 네 짐승과 작은 뿔 환상에 대해 천사가 뜻을 풀이해 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다니엘은 천사의 해석을 듣고도 번민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보고 들은 계시의 내용이 너무나도 엄청나고 두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저절로 흘러가는 것이거나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섭리에 의해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진행되어 간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이미 우리에게는 승리의 소식이 선포되었음을 확신하고,
오늘의 어려운 현실에 굴복하지 말고 인내하며 최선을 다해 나아가야 하겠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신’ 이유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먼저 찾아오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친히 오셨다.
그리고는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셨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쓰러진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고,
오늘도 힘차게 믿음의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기도)
주님,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세상과 현실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
새 아침이 밝아올 때마다 자녀의 영을 새롭게 하시고
긴 호흡 가운데
오늘을 숨쉬게 하소서.
다니엘8장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환상
벨사살 왕 3년에 다니엘은 숫양과 숫염소 및 숫염소에게서 난 뿔들과 특히 네 뿔 중 한 뿔에서 새로이 난 한 기이한 작은 뿔의 환상을 보고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해석을 듣는다.
다니엘은 바벨론제국의 마지막 왕 벨사살 때에 묵시를 받는데,
7장에서는 ‘네 짐승과 작은 뿔’ 환상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두 번째로 ‘숫양과 숫염소 및 작은 뿔’의 환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다니엘 7장과 마찬가지로 8장에서도 천사가 등장하여 친절하게 환상을 해석해 주고 있다.
먼저 다니엘은 숫양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20절에 나와 있듯이,
두 뿔을 가진 숫양은 곧 메대와 바사 왕들을 상징했다.
바벨론의 뒤를 이어 등장한 나라를 흔히 바사제국, 즉 페르시아제국이라고 부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메대-바사 연합국이었다.
이 가운데 바사가 더 강대했기 때문에 바사제국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숫양의 두 뿔 가운데 하나가 더 길었다는 것은,
메대-바사 연합국 가운데 바사가 더 강대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메대-바사연합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파죽지세로 주변 국가들을 점령하고 다스렸다.
그런데 이어 한 숫염소가 서편에서부터 등장한다.
21절에 나와 있듯이, 털이 많은 숫염소는 헬라 왕을 상징했다.
두 눈 사이에 큰 뿔이 솟아 있는데, 그것은 그 첫째 왕 알렉산더를 상징하고 있다.
이 숫염소, 곧 헬라는 어찌나 빨리 달려오는지, 그 발이 땅바닥에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산더대왕의 세계정복 속도가 그만큼 빨랐다는 뜻이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등극한지 불과 5년 만에 바사제국을 멸망시켰다.
두 눈 사이의 현저한 뿔은 곧 알렉산더대왕을 말한다.
그는 어떤 헬라의 왕들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나 용맹,
정복력에 있어서 현저하게 특출한 왕이었다.
바사제국은 알렉산더의 진격 앞에 실로 맥없이 무너졌다.
이같이 알렉산더의 헬라제국이 거침없이 강대해져서 국력이 절정에 달할 즈음,
제국의 왕인 알렉산더가 바벨론에서 열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큰 뿔이 꺾인 것이다.
알렉산더가 죽자 헬라제국은 통치의 구심점을 잃고 네 개의 나라로 분열된다.
그런데 그 한 뿔에서 또 작은 뿔이 등장하는데,
이 뿔이 영화로운 땅 곧 이스라엘 땅을 점령하고 핍박하기 시작한다.
이 작은 뿔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인데,
그는 예루살렘 성전 번제단 위에 제우스를 섬기는 제단을 세우고,
구약 율법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된 돼지를 제물로 드려
거룩한 곳을 더럽히며 하나님과 유대인들을 모독했다.
그리고 에피파네스의 박해기간 2300주야 동안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
결국 에피파네스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내장이 썩는 어떤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다니엘이 본 이 환상을 더 멀리 내다보도록 한다. (마24:15)
다시말해 작은 뿔은, 장차 있을 종말의 때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다니엘의 묵시는 가깝게는 로마제국이 등장하기 전, 에피파네스의 핍박을 나타내고,
멀리는 세상의 종말에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세상 나라 왕들과 다니엘의 태도가 극명히 비교됨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의 왕들은, ‘그것이 원하는 대로’(4) 즉 제 맘대로 행하고 강하여졌으며,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갔고(11),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했다(25).
반면, 다니엘의 경우, 천사가 말할 때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17),
가브리엘이 말할 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었다(18).
뿐만 아니라 환상을 본 다니엘은 지쳐서(혼절하여) 여러 날을 앓았다(27).
본문에 보면, 세상의 왕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요즘은 세상 모두가 세상의 왕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사람들을 보라. 권세자들이나 일반 백성이나, 유력자들이나 연약한 자나,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고 스스로 높이고 있는지 모른다.
어디를 가도 참으로 겸손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창조주 하나님을 대놓고 거역하고 대적하는 방자한 세상이다.
다니엘을 보라! 다니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가브리엘 천사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로 엎드렸다.
18절의 ‘깊이 잠들었다’는 표현은 다니엘이 기절하여 정신을 잃었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 앞에 혼절하여 수일을 앓을 정도였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서있는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마음 씀씀이 하나...
진정으로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만일 진실로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시며,
나의 언행심사를 빠짐없이 살펴보고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삶의 태도는 지금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 식당에서 봉사할 때, 학생들을 가르칠 때, 찬송을 부를 때,
구역식구를 대할 때, 새가족을 대할 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때...
그리고 혼자 있을 때...
과연 우리는,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자세로,
다니엘과 같이 겸허한 자세로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보다 더 하나님이 없는 듯,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고,
영적 고아처럼,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평소 우리는 교회의 여러 신앙훈련에 참가하고 있다.
새벽기도를 비롯해서 각종 영성훈련, 기도회, 수련회, 성경공부, 특별집회 등등.
그런데 만일 그 모든 수고와 우리의 소원이
단지 내 자신과 우리 가족, 우리 공동체의 소원성취를 위해,
마치 불공을 드리듯 공덕을 쌓기 위해, 새벽을 깨우고 시간을 내어 달려온 것이라면,
도대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비는 대상이 부처님, 칠성님, 최영장군님, 천지신명 옥황상제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을 뿐,
기독교나 불교나, 우상 숭배하는 온갖 미신들이나 뭐가 다를 게 있겠는가?
교회마다 절기에 따라 영성훈련을 하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내가 살기 위해, 나를 높이기 위해, 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뒤따르기 위함이 아닌가?
세상의 수많은 욕망들 속에서 살아가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 자녀의 형상을 회복하고,
오히려 내가 죽고, 내가 낮아지고, 나의 온갖 욕망의 계획들을 포기하기 위해,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닐까?
자신을 향해 침 뱉고 모욕하고 때리고 찌르는 자들을 용서하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용서하며 이해하며 사랑하기 위해,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새벽을 깨워 달려 나오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지 않고, 하나님 앞 기도의 자리가
온갖 나의 욕구를 쏟아놓고 요구하는 욕망의 분출구에 그친다면,
어찌 그곳에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역사할 수 있겠는가?
부활은 죽음 뒤에 찾아오는 것이요, 십자가 없는 영광의 면류관은 없다.
먼저 세상의 욕심을 비워야 하늘의 은혜로 내 삶이 풍성해지며,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
영적 고아란, 하나님 없는 듯이 사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에,
욕망으로 사나워진 미몽(迷夢)들을 내던지고, 높아진 세상의 온갖 자리에서 내려와
순전한 심령으로, 겸비한 조아림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자.
(기도)
주님,
어떤 세상의 징조로도 깨닫지 못하는,
두렵고 떨림 없는 이 시대의 완악한 심령들 가운데 강림하소서.
이 나라 영적 지도자들의 꿈속에 나타나시고, 꾸짖으시고, 때려주소서.
기름진 얼굴들을 씻어내게 하시고,
울부짖는 세상의 수많은 생명들이 가슴으로 뜨겁게 느껴지게 하소서.
피땀으로 일군 이 땅의 영적 토양이
더 이상 황폐해지지 않도록,
다시금 하나님 백성들의 눈물들이 뿌려지게 하소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닥쳐올 환난에도 능히 이길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되게 하시며,
지금 어느 곳에 서 있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섬으로써,
새로운 소망의 문들이 열려지게 하소서.
작성자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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