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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느브갓네살왕의 교만과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단4:19-37)

by 은총가득 2021. 7. 18.

 

니엘의 충언과 왕의 교만 (단4:19-28절)

 

옛날이나 지금을 막론하고 진리의 사람들은 항상 괴로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행사가 악하다고 증거 해야 할 사명 때문입니다. 진리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공사 간에 불문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파해야 합니다.

진리의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심판하는 재판석의 증인인 것입니다. 증인은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본 대로, 들은 대로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장이 곤란한 경우가 닥칠 때 그 아픔과 고통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사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의 이야기를 듣고 한 동안 놀라며 마음이 번민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어안이 벙벙했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욥의 친구들이 멀리서 욥을 보고 너무나 놀라서 말을 못하고 욥의 곁에 7일 동안 묵묵히 앉아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생각 밖의 황당한 일을 당하면 한 동안 정신을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은 길조가 아니라 흉조요, 신하가 함부로 해석할 수 있는 꿈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이나 국가의 길조를 예언하고, 백성들과 위정자들의 길조를 예언하는 일은 피차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이 흉조일 경우에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기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조국이 망할 것이라는 흉조를 말하다가 구덩이에 갇히는 곤욕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다니엘이 왕의 앞에서 어안이 벙벙하고, 놀라고, 마음이 번민하고 있는 것을 왕이 눈치를 채고 편안한 마음으로 해몽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신하로서 왕의 심판에 대한 계시를 알고 연민의 정과 아울러 심각한 내면의 갈등을 겪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그 해석을 하기 전에 먼저 이 꿈이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왕에게 흉조를 예언하는 아픔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통치자입니다. 그가 비록 독재자이고 우상 숭배자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을 박해하는 악인일지라도 자기 인생의 죄 값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선지자로서 마음이 아프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불행이 차라리 왕의 대적에게 임하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인격이요, 성품이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그의 자질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입을 열어 꿈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1. 큰 나무는 곧 왕이시라고 했습니다.

 

왕이 꿈에 본 큰 나무는 느부갓네살 왕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나무의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서 사방 천지에 보이지 않은 곳이 없음은 왕의 통치와 명성이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여 전 세계에 미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가 아름답고 열매가 많아서 만만의 식물이 될 만하고 그 나무 아래 들짐승과 조류들이 깃들여 안식처를 삼은 것은 바로 느부갓네살의 부와 권세의 혜택을 받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태성성대를 누리고 있는 모든 거민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묘사는 과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벨론은 앗수르를 제압하고 세계를 재패했으며 그 결과 바벨론의 권세와 영화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극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 말로 말하면 바벨론의 권세와 영화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조에 달했던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은 다른 나라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했으며, 왕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고, 왕의 명성 또한 전 세계에 미쳤으며, 제국은 부강했고 나라는 태평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왕에게 알리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순찰자가 그 나무를 베라고 함은 왕이 사람들에게 쫓겨나서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서 정하여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단4: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은 사필귀정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인간을 심판하시며 그 교만을 낮추시되 철저하게 낮추시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명정하신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변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잠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잠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느부갓네살 왕이 받은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왕이 사람들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며, 일곱 때를 지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느부갓네살이 미치광이가 되어 이성을 잃고 짐승과 더불어 살아갈 징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철과 놋줄은 쇠사슬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들에게 자유를 구속하는 억압적 도구인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특수한 귀신에 사로잡혀 짐승과 같이 될 것입니다. 철과 놋줄에 묶이듯이 사탄의 줄에 묶여 악령의 지배를 받고 광인이 되어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왕으로서 극단적인 치욕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징계를 받고 나서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 나라를 누구에게 주시는 줄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그가 가진 것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자기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신 중의 신이요, 주 중의 주이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왕이요 통치자요, 주재자이십니다.

결코 인간이나 그 무엇도 인류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인간 역사의 주인이 아니요, 인간 역사를 주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하고 명철한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쫓아내시면 당장에 들짐승과 같은 존재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나라의 왕위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자기의 뜻대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섭리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존재 세계에 개입하셔서 자기의 뜻대로 세우시고 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도 자기 뜻대로 상 줄 자에게 상을 주시고 벌 줄 자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롬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택하심도, 버리심도,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삼상2:6-8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치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사무엘의 어미니 한나는 기도로 사무엘을 얻었을 때 성령이 충만한 중에 하나님께 대하여 노래하기를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낮고 천한 자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시며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요셉은 옥에 갇혀 있다가 발탁이 되어 대제국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으며, 다윗은 베들레헴 촌에서 천한 목동으로 일하다가 일약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아모스는 드고아의 한 촌부로 있다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는 거룩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산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고 천한 자라도 그가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크고 요긴한 일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심판을 행하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을 소유하고 계시며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순찰자가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는 남겨 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남겨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심판의 집행유예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며 회개하면 복권을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중죄인일지라도 그가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악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도리어 더욱 강퍅해지고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전8: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느부갓네살은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는데 일곱 때를 지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곱 때는 왕이 미치광이 생활을 끝내는 시간입니다. 그의 교만에 대한 천벌을 받는 기간인 것입니다. 이는 7년이라는 의미도 있고 완전수의 의미도 있으며 거룩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짐승의 마음을 받아 들에서 지낼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가 자랑하던 왕좌에서 쫓겨나고, 그가 의지했던 권세로부터 추방당하고, 그가 누렸던 부에서 소외되었습니다. 그의 출신이나 소유한 것이나 공로나 과거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생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그의 생명은 남겨두셨습니다. 일곱 때의 고초를 겪으면서 인간이 아무리 강대하다 해도 결국 한 치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절망적이고 나약한 존재라는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절망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처음부터 호령하는 것을 배웠고 부귀를 누리는 것만 익혔습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지어 인간의 존엄성마저 빼앗긴 채 들에서 짐승과 함께 살았다는 것은 그의 평생에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2. 다니엘의 충심어린 간언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게 될 때 하늘의 벌을 받아 미치광이가 된다는 경고적 예언을 해 주었습니다. 짐승처럼 되어 버릴 장래의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괴롭고 아픈 일입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용기가 아니고서는 감히 왕 앞에 이런 충언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언자의 가슴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겸손한 충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르기 전에 왕의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단4:27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다니엘은 왕의 연단이 유예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통치를 하여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로 나라를 다스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동안은 교만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권력자의 교만은 백성들을 작게 보고 무시하며 업신여길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자기를 작은 아이라고 했으며 백성은 크다고 함으로 겸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왕상3:7-9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다니엘은 왕이 죄악된 모든 것과 단절하고 그것에서 멀리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불의한 상태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통치를 하여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을 시행함으로써 죄악된 상태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충언을 들어보면 그동안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나라를 강력하게 하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을 많이 동원하여 성을 쌓고 건물을 지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의한 일을 많이 자행한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그러한 왕의 실책을 이 기회에 만회시키고 왕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 주고 싶었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왕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마음이요 책무입니다.

임박할 하나님의 진노를 내다보았던 아브라함은 소돔 성의 구원을 위해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황폐해 버릴 풍전등화 같은 예루살렘의 운명 앞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울면서 예언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신 예수님은 그 성의 평화를 촉구하시면서 통곡하셨습니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지함과 불의함 때문에 멸망해 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을 향해 일침을 가하거나 충언을 해줄 사람은 적습니다. 다니엘의 이러한 충언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있는 복되고 복된 충언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물이 많은 나라는 흥하고 부강할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생명은 세상의 권력 앞에서 이러한 선지자적 사명을 띠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참 된 예언자적 교회는 그 나라의 양심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교회, 죄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는 교회가 진정한 애국하는 교회요, 백성을 구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다니엘의 해몽은 분명히 미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장래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길조가 아니라 흉조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공의를 시행하고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희망적인 예언도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이를 거절할 경우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임하고 변경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은 차라리 왕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고 평안하고 강건했으면 좋겠다고 진언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역사를 보는 선지자였으며 그 역사의 비밀을 알고 대비하는 지혜를 가진 충실한 신하였습니다.

 

3. 교만의 결과로 결국은 징계를 당한 왕입니다. <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 insania zoan thropica>

 

애굽의 바로 왕은 자기가 꾼 꿈의 해석을 듣고 요셉이 하는 말을 모두 믿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국정의 모든 전권을 요셉에게 이양했으며 최고의 권력에서 손을 떼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통치를 요셉의 뜻대로 하게 했기 때문에 애굽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가 임하여 나라는 태평하였고 백성은 만세수를 불렀습니다. 그토록 지독했던 7년 동안의 대흉년에도 아무 문제가 없이 배부르게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충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단순한 꿈의 해석 정도로만 이해하고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자기가 꾼 큰 나무의 꿈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단4:28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느부갓네살 왕의 선언에 의해 다니엘의 해석의 역사성과 진실성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느부갓네살 왕이 나중에 제 정신이 돌아왔을 때 한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란 그가 교만하여 나무가 베임을 당한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 응했다’는 것은 ‘남김없이’ ‘모조리’ 라는 뜻으로 사실대로 응해버린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응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교만한 왕에게 여지없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인간 중에 그 누가 바벨론 제국의 왕을 징치하며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저들을 징계하고 징치하실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임했다.’라는 히브리어는 ‘공격했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진실이,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긍휼이 왕을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공격입니다. 전혀 사전에 대비할 수 없고 피할 수없는 위력적인 공격입니다.<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 insania zoan thropica자신을 짐승으로 여기는 욕구가 강한 정신병 >

 

철벽같은 성을 쌓고 강력한 수비대와 호위 병사를 거느린 왕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단숨에 공격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는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공격을 받은 헤롯왕은 벌레에게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공격을 받은 애굽의 바로는 개구리와 메뚜기와 이와 파리의 공격을 받고 질색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공격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는 하루아침에 유황 불비를 맞고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노아 시대에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격을 받고 홍수에 떠밀려 다 죽고 말았으며, 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죽임을 당하였고, 미련한 나발은 하나님의 공격을 받고 열흘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공격을 받은 로마의 네로 황제는 미쳐서 자살하고 말았고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한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공격을 받고 미치광이가 되어 죽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격을 받고 멀쩡하게 살아남을 인간이 어디 있으며 이겨낼 장사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지금까지 자신을 도구로 사용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이라는 몽둥이를 들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자기가 신이 된 것처럼 자기 자랑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 번 올라간 자만은 쉽게 내려오지 않습니다. 한 번 교만해진 심령은 쉽게 낮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안주해버리기 때문에 그 자리가 높은지 낮은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생각하기를 자기는 출생부터 존귀한 자로 태어났고, 처음부터 위대한 인물이었고, 하는 일마다 성공하는 일등생이었고, 이 세상에는 자기와 같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주 특별한 자만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그러한 자기 모습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항상 그런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주병’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자기도취, 자기만족, 자기우월 사상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는 자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도 하지 않고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만 들여다보다가 결국 연못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 자리에 수선화 꽃이 피었는데 사람들은 나르키소스가 수선화가 되었다고 해서 수선화와 자기도취증이라는 말을 같은 말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르시시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있었습니다. 이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너무 잘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나무 중에는 자기가 제일 큰 나무요, 하늘에까지 닿은 나무입니다.

 

나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세운 바벨론 제국의 수도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고 방어 요새에 대한 철저한 신뢰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능력과 권세로서 군왕의 자리에 군림했다고 자부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은망덕이요 반역입니다. 그가 비록 정복 전쟁에 성공하여 많은 영토와 나라를 정복하고 침략했을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대제국이 될 수 없습니다.

 

나라를 빼앗기는 쉬어도 그것을 다스리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가 온 땅을 평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잡혀간 유다 청년들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 바벨론 제국을 통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라를 경영하게 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는 동안 나라는 태평해졌고 부강해졌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이면에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사실을 망각하고 모든 영광과 공로를 자신에게로 돌렸습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두 번이나 하나님을 찬양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니엘이 그가 꾼 첫 번째 꿈을 해몽했을 때였습니다.

 

*단2: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그가 비록 한 순간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다니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풀무불에서 건짐을 받은 세 청년을 보았을 때입니다.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이 정도의 체험적 고백이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가 진심으로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두 번이나 꾼 꿈을 통하여 그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교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떨치려고 해도, 아무리 뇌 속에서 지워버리려 해도 그렇게 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솟구칩니다. 내가 이 제국을 건설했는데 누가 감히 무시할 것입니까. 이것이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변화될 수 없는 인간의 교만인 것입니다.

 

 

교만은 인간의 영혼 속에 깊이 내재해 있는 참으로 무서운 암초입니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인간은 스스로가 이 교만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며 교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욥40:11-14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서 짓밟을지니라.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인간이 부하다고 해서 교만한 것이 아니며 권세가 있다고 하여 교만한 것도 아닙니다. 가난해도 교만한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멸시하고 박대했던 갈릴리의 가버나움은 지극히 가난했지만 교만이 하늘에 닿았기에 주님께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마11:21-24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에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 교만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인 바벨론이나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이 사탄적이요 교만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만에서 해방 받고 자유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이 우리의 겸손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심판과 왕의 찬양 (단4:29-37절)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도 했지만 그분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믿음은 점점 희미해지고 다시 자기의 본성이 도로 날아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왕의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과 충고가 있은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다니엘의 충고대로 그 자세를 변화시키고 겸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신 기간이었습니다.
그 명백하고 확실한 해몽과 함께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진리의 예언자 다니엘의 충언을 충분히 새길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오래 참으십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무시할 때 집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려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느부갓네살이 회개하도록 인내하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주신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심한 슬픔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4:29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황궁 지붕에서 거닐새..
당시의 지붕은 사람이 거닐 수 있는 평탄한 지붕입니다. 마치 오늘 날 슬라브 콘크리트 지붕과 같은 구조입니다. 그러나 ‘황궁 지붕’이라는 말 ‘헤칼 말르쿠타’는 ‘궁전’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왕이 성 안의 장엄한 성벽과 망대를 둘러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는 바벨론 왕궁에 심히 만족하고 흡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는 말로 자문하고 있습니다.
*단4;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바벨론 도성은 676 구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장엄함과 위용은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국가에 있어서 왕의 권세는 그 수도의 장엄함과 웅장함에서 곧잘 비교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바라본 성의 웅장함은 자신이 누리는 영화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에는 중대한 요소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나 왕이, 내 능력과 권세로, 내가 건설, 내 도성, 내 위엄과 영광.’ 이라는 말들입니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죄가 ‘내, 나.’입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의 발상이요, 이기적이요, 배타적이며, 자기만족주의입니다. 자기 자랑의 극치인 것입니다.


자기 제일의 교만함입니다. 그는 건축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건축한 거대하고 방대한 바벨론 성위를 거닐면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왕도를 내려다 본 것입니다. 그 성은 참으로 넓고 컸습니다.
그 성 안에는 세기적인 인물들이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부유하고 화려했습니다. 그 도시는 황금으로 장식된 도시였습니다. 집과 성곽과 망대와 건물들은 한 점의 손색이 없었고 성 안에 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는 아름다운 돌로 바닥을 깔았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성을 보면서 왕은 자신도 모르게 그 성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주위 신하들을 보고 말하기를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한 도시를 보라. 이것으로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자기를 극대화시켜 버렸습니다.


이 무서운 교만과 자만이 바로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천벌을 받는 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 제국 건설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공적으로 돌리는 교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이처럼 자기가 지상 최고의 존재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며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거나 그보다 더 높아지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고 했습니다. 실상은 그가 평안하고 아무 걱정 없이 들에서 양을 칠 수 있었던 것은 다윗과 그의 군대의 보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과 그의 군대를 무시하고 어디서 온 자들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 모든 부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자랑하면서 교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련한 나발을 심판하시고 그를 징계하시자 그가 낙담하고 열흘 후에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는 밭의 소출이 풍성한 자였습니다. 그는 심중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부자는 ‘내가’라는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만한 자를 방치해 두지 않습니다. 바로 그 날 밤에 그 영혼을 회수해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계획한 것, 예비한 것, 하나도 자기의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대하여는 부요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나 가난한 자였습니다. 철저한 인본주의자요, 유물주의자요, 현세주의자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천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자기도취, 자기만족, 자기 영광, 자기 위엄, 자기 권세에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성을 완전히 잃은 것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맙니다.
자만에 이끌리는 순간 생각이 혼미해지고 판단이 흐려지면서 이성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소리가 들렸습니다.
*단4:31-32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이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그 음성은 초자연계에서 들려온 소리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요, 심판을 행하시는 주의 사자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다른 사람의 귀에 들려진 소리가 아니라 느부갓네살 왕에게 직접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길을 가던 사울 청년에게 들려온 음성과 같았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던 그 음성이었습니다. 이 음성은 왕의 말이 입에서 채 끝나기도 전에 들려왔습니다. 이는 심판의 신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은 느부갓네살의 정신병<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 insania zoan thropica> 이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 섭리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 소리는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왕의 주권 박탈의 소리입니다.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보좌의 권세가 상실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보좌는 난공불락의 보좌였습니다. ‘떠났느니라.’라는 말 ‘아다트’는 ‘가져갔다.’라는 뜻으로 왕권의 박탈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로 가져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 영화의 보좌에서 밀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보좌를 가져가신 것입니다. 이제 왕국의 보좌는 그에게서 떠나버렸습니다.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둘째, 영광과 명예 박탈의 소리입니다.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열국의 왕들 중에 왕입니다. 왕 중의 왕의 영광과 명예를 누렸습니다. 그는 세계의 모든 인간들로부터 찬사와 존경과 영광을 한 몸에 받고 살았습니다. 만인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수많은 사람을 쫓아내었고 학대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반대로 사람들에게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쌓았던 모든 명예와 영광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의 보좌에서 내려오는 일도 대단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서 쫓겨난다는 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요, 죽기보다 더한 모욕인 것입니다.

 


셋째, 인간성 박탈의 소리입니다.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순찰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이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심판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상실되고 그 자리에 짐승의 마음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가 짐승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짐승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성이 철저히 상실되고 인간의 이성 작용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지성이나 감성이나 의지가 없어지는 상태로 바로 타락한 인간상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상은 신상에서 인상으로 내려오고, 그 다음에는 인상에서 물상으로 내려오고, 물상에서 축상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생각하고 말하고 먹고 활동하는 상태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는 인생은 사람에게서도 쫓겨납니다. 사람에게서 쫓겨나는 인생은 짐승들의 세계로 들어가서 짐승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짐승이 된 느부갓네살의 모습이 리얼하게 그려진 말입니다. 소처럼 풀을 먹는 현상을 ‘보안드로피 (boanthropy)’ 혹은 ‘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insania zoan thropica)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1946년 영국의 한 정신병원에 있던 한 환자는 병원음식을 거절하고 정원의 풀을 먹거리로 했답니다. 몸이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와 같고, 손톱이 새의 발톱처럼 되었다는 말은 스스로 자기 몸을 돌볼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반사회적이라는 말입니다.

 


넷째, 일곱 때를 지나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일곱 때를 지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간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확신하는 기간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간은 완전한 기간입니다. ‘일곱’은 완전수이기 때문에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하나님의 징치의 완전한 기간입니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빠른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시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때를 알지 못합니다. ‘때와 시기’는 아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반드시 그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순간 그 일이 왕에게 즉시 임하였습니다.
*단4:33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그 시간 후에 그에게서 총명이 떠났고 모든 판단력과 의사소통 능력과 분별력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성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능력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 중에서 야만적인 동물로 전락한 것입니다.


자신을 짐승으로 생각하고 짐승의 생활 방식을 따라 사는 질병을 현대 의학에서는 ‘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라고 하는데 이 병은 정신병으로 분류됩니다. 그는 벌거벗고 스스로 인간 속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숲과 나무 사이에 거하며 독수리처럼 새처럼 뛰놀다가, 배가 고프면 소처럼 풀을 뜯어 먹으며 밤이 되어도 비나 이슬을 피할 줄도 모르고 들짐승처럼 땅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의 몸은 온통 털로 덮었고 소처럼 울고 타조처럼 울부짖었습니다.


그는 만물의 왕이 아니라 만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백약이 무효가 되었고 모든 의술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화려하고 찬란하던 제국의 영화가 그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왕국을 보고 기염을 토하던 그의 기상은 땅의 풀만 바라보고 괴성을 지르는 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아 침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비단 금침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짐승에게는 인간의 영광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교만한 자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하나님은 악령의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악신이 그를 괴롭히면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 세상 왕들에게는 너무나 흔히 있는 일이며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23:9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렘13: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렘13:15-16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나라의 위정자나 지도자들이 교만하면 그 나라는 망할 징조입니다. 교만한 지도자는 미치게 되기 때문에 미친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나라 전체가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실례로 로마의 네로나,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소리니, 일본의 도조 등이 그런 미친 자들입니다.


이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사람들을 광분시켰고 미치광이가 되게 하여 전 세계를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겸손은 존귀한 결과를 낳지만 교만은 이처럼 비참한 결과를 낳습니다. 교만은 자기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더욱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일곱 때의 고초를 겪으면서 느부갓네살 왕은 인간이 아무리 강대하여도 결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며 언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단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 고백은 느부갓네살이 자연적으로 질병에서 회복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권고하시고 그에게 겸손과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셔서 그가 빛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미친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회복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불신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 역시 사람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회개하는 심령을 부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나무를 베었지만 그루터기를 남겨 두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에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나의 눈을 하늘을 향하여 들었다.’라는 말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이 회개했다는 것과 하나님을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23:1-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그 순간이 하나님을 뵙는 순간이요 그가 살아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그를 바라보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인이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는 것은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앙망하는 태도입니다. 자기나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복하는 태도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짐승이 되어버린 왕에게 하늘을 우러러 보는 영의 지각 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지금 생명의 부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보신 증거입니다. 멸망 받을 짐승 같은 인간에게 거룩한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총명’이라는 말 ‘만다’는 지혜, 명철, 이성, 지식, 등 다양한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간다운 온전한 의식이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이성 작용이 모두 회복된 것입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이 돌아왔습니다. 인간의 순수한 마음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산물로 인간 외에는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감성과 이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총명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보게 하였습니다.
*단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인간들의 수가 아무리 많고 세력이 강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낱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군사인 천군천사와 땅의 사람들을 자기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분으로 그의 통치 영역은 천계, 영계, 지계를 총괄하는 전 우주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 주권 속에서 피조 세계의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아니하시는 유일한 전능자라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에 대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간 인생의 본분입니다.


그가 회개하였을 때 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단4:36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해서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는 불가항력적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다시 그것을 복권시켜 주신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느부갓네살은 언제 그런 병을 앓았느냐는 듯이 그의 건강과 정신과 심성이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았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진 왕의 당당한 권위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국정을 맡았던 나라의 관리들이 모두 왕 앞에 머리를 조아렸으며 왕권을 그에게 돌리고 하례를 드렸습니다. 왕은 병을 앓기 이전보다 더욱 위세가 당당하고 권위가 높아졌으며 모든 존경과 영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나라에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 왕좌를 두고 모략과 살상이 판을 치는 세상에 7년 동안이나 미치광이로 지냈던 사람을 다시 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국가의 총리를 맡고 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알고 왕이 회복하고 등극하는 그 날을 고대하며 국정을 아무 사고 없이 잘 운영한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단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첫째, 그는 하늘의 왕에게 찬양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다신론적 이방 신관에서 유래한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들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34절에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또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 자존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한다고 했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분으로 영원무궁한 분입니다.


둘째, 영원한 통치자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34절에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비로소 세상 왕국은 유한하고 가변적이요, 불완전하고 유동적이며 끝내는 쇠잔하는 나라임을 깨닫고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고 불변하고 진실하고 영광스러운 나라라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하늘의 왕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셋째, 절대 주권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양했습니다.
땅의 거민이든지, 천사든지,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은 없는 것 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주장에 대해 그 어느 인생도 감히 항거할 수 없고 불평할 수 없고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롬9:19-21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넷째, 진실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37절에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다 의로우시므로’ 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와 간섭이 온전히 공의롭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불의가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에 그의 판단은 다 진실하고 의롭고 정직한 것입니다.


다섯째,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고 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전의 기물을 빼앗아 자기의 우상 신의 창고에 두었습니다.
그는 신상의 꿈에 대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금 신상을 세워 경배하라는 악법을 세워 진리의 사람들을 시험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는 불복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려고 했으나 이 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교만했고 급기야 자기의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 앞에 드높이고 자기의 치세를 자랑했습니다. 이런 교만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결국은 그가 하나님을 우러러 보도록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그가 참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이제야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항복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기까지 역사하시며 사람을 회개시키고 겸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를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여기면서도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했지만 진정한 회개, 생명을 이루는 참 회개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지마는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의 신앙 역시 구원의 은총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이 세운 대제국의 통치자로서 이만한 고백과 찬양과 감사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종들인 다니엘과 친구들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저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으나 그곳의 왕 앞에서도 당당히 하나님을 증거하고 증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바벨론의 왕까지도 회개시키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불신 세상의 모든 왕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회개시키는 역사가 는 성도들을 통하여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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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 4장은 느부갓네살은 두 번째 꿈을 꾸었고, 다니엘의 해몽대로 그는 정신병에 걸려 7년 동안 소처럼 풀을 먹은 후 회복된다.

 

왕은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를 찬양하며 조서를 반포한다.

 

느부갓네살은 이방의 왕으로 다신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처음 꿈을 다니엘이 밝혀내고 해몽했을 때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 가운데서 살아나는 사건을 경험했을 때도,

느부갓네살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았고,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는 정도였다.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2:47).’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3:28).’

느부갓네살은 결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니엘 4장에서는 분명히 태도가 달라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동족들이 섬기는 신들과 그 신앙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유일한 절대자로 믿었는가에 대해서는 단정 짓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세계와 역사를 지배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분명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그의 나라는 실로 영원한 것임을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에게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방 대제국 통치자의 입술을 통해서도 이 같은 고백이 나오게 하셨다.

여호와를 잘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 이방인마저도

우주와 역사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하고 있는데,

하물며 너무나 큰 구원의 은총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들은 삶의 매순간 순간마다 주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절대주권이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나의 모든 권리를 주님 앞에서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경험, 지식, 나의 감정, 나의 자존심 등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고,

나는 오직 그분의 명령에만 복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내 감정이 허락하지 않지만,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만,

내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나를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좇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 가정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분명히 행사되고 있는가?

 

오늘 내가 속한 구역, 기관부서, 교회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인정되고 있는가?

미국의 법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그 법은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만 행사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법은 우리나라 안에서만 행사되어지는 것이다.

치외법권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나라에 거주하면서도 그 나라 법에 통제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다른 나라의 대사관이나 미군부대 같은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데,

그 시설물들은 비록 우리나라 안에 있지만, 우리나라의 법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의 법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교회가 비록 이 땅에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그곳을 하나님의 법이 지배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인정된다면,

그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비록 몸은 예배당에 와 앉아 있고, 교인으로 등록하고 세례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한다면,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 영혼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통치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

그렇지 않다면 나의 소속은 어디인가?

어느 나라의 백성인가? 누가 나를 다스리고 있는가?

 

하늘에 닿도록 크게 자란 나무는 땅의 권력자의 교만을 비유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이 큰 나무 꿈을 꾼 것은 세계정복 전쟁을 끝마친 후,

자신의 권세와 명예가 극에 달하고 모든 것이 태평하여 교만에 빠져있던 때였다.

이때 하나님께서 꿈으로 느부갓네살에게 경고하셨다.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은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

이에 박수장, 곧 지혜자들의 우두머리였던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는데,

독재자에게 그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놀랐지만 왕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실을 고한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충고를 좇지 않고 1년의 유예기간을 헛되이 보내고 만다.

마침내 느부갓네살은 정신병에 걸리게 되고,

왕위에서 쫓겨나 일곱 해 동안 들에서 짐승과 같이 지내게 된다.

그런데 이같이 몰락했던 왕이 어떻게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는가?

느부갓네살이 왕으로 재등극하기까지의 과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짐승처럼 살아가던 느부갓네살이 7년이 지난 어느 날, 하늘을 우러러 본다.

이 말은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곧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장면은 눅15장에서 탕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통회하고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에 느부갓네살의 총명이 돌아왔고, 고침을 받은 그는,

다음으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자로 인정하고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그리고 찬양 가운데 그의 이전의 모든 지위가 회복된다.

이후 느부갓네살은 온 천하의 백성에게 조서를 반포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은 찬양과

여호와께 대한 모든 인생의 교만을 경계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는 장면이다.

이는 징계받기 직전 바벨론 궁 지붕에서 자신이 건축한 도성을 내려다보며

교만으로 가득했던 모습과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 보면,

34절의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뒤에 나는 기도하는데 마음을 바치고,

주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내 죄에 대해 간구하였다.

그리고 신들 중에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무지에 관해서 기도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 사람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인가?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교만해지거나 아니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보게 되면 겸손해진다.

느부갓네살은 교만해졌을 때 비참으로 떨어졌으나,

겸손해졌을 때 존귀한 영광의 지위를 회복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견지할 때,

그것이 바로 우리를 진짜 출세시키는 능력이요, 존귀한 자리로 이끄는 지름길이 아닐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조서 내용을 자신의 말로 고쳐 옮기지 아니하고,

공포된 내용 그대로, 느부갓네살의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대제국 바벨론 주권자의 입술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계와 역사에 대한 절대 주권자이심을

고백하게 하고 있다.

[출처] 다니엘4장 누가 진짜 주인인가|작성자 예레미야

 


 

가장 귀한 지혜

 

잠2:1-8

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잠언을 보면 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3-18)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어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6-7)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잠 8:11)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귀한 것을 원한다 하더라도,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 전도서에도 지혜가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전 7:11-12)

 

그러면 어떤 지혜가 가장 귀한 지혜일까요?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가장 잘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잘 경외하면 모든 축복이 다 따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사람은 물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아무리 세상에서 잘 된다고 해도, 지옥에 들어갈 것이고, 멸망할 것이고 결국은 마귀의 종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어도 미지근하고 엉성하게 믿는 사람은 정말 미련하고 지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 들으시는 중에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얼마나 복되고 귀한지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다니엘에 대하여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왕이 알았도다』(단 1:20)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가진 지혜와 비교할 수 없는 지혜를 다니엘이 가졌다는 걸 왕이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세상 사람의 지혜는 비교가 안 되게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가지고 있던 지혜와 총명이 이렇듯 뛰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까요? 다니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추리라』(단 12:3)

 

이 지혜로운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사람들일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얼마나 지혜가 있는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걸 미워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악’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모든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경외할수록 악을 미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악에서 떠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나도 미워하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좋아하는 건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건 나도 싫어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건 나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입니까. 제일 지혜로운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 때 모든 복을 다 받아서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손으로 하는 일이 모두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신 28:1-14).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을 치시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 34:7)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환난이 다가왔을 때, 어려움 당할 때, 곤고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서 진을 치고, 마치 아람군대가 쳐들어 와서 엘리사를 잡아죽이려고 할 때 천군천사를 보내서 보호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제일 지혜롭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환난이 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둘러서 진을 치고 저희를 건지실 줄 믿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9,10)

 

2. 자기 자신을 똑바로 아는 지혜

 

자신을 똑바로 안다는 것은 정말 귀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똑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평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지혜>

자기 자신의 죄를 알고 자기 자신의 허물을 알아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아는 것은 굉장한 지혜입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사람은 회개하게 되고 의롭다함을 받게 됩니다.

또,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겸손하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살 수 없고 자신의 무능함과 한 시간 후에 생길 일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인간임을 알 때,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게 되니, 얼마나 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잠 28:25)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 누구보다 먼저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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