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핵심 요약
[다니엘 1장]
1:1-7 = 포로 다니엘과 세 친구의 바벨론 왕실
1:8-16 = 다니엘과 세 친구의 신앙 지조 일화
1:17-21= 다니엘과 세 친구의 바벨론 황실 발탁
첫째, 느부갓네살이 각국 왕족의 자제들에게 갈대아 학문을 가르친 이유는?
속국의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을 볼모로 잡아 둠으로써 속국들의 반란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국의 뛰어난 인재들을 바벨론과 속국 사이의 관리자로 기용하여 각 속국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함이다.
속국의 종교를 장악함으로 정치적으로도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바벨론 제국은 왕실에서 교육 받은 속국의 영재들을 대부분 박수와 술객으로 기용하여 각 나라의 종교 자문 역할을 하게 하였다.
둘째, 환관장이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고친 이유는?
이들이 고국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속히 바벨론식 생활에 익숙하게 하고 바벨론 왕이 새 주인임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상대에 대한 주권을 표시하는 것이다.
예) 애굽 왕 바로느고가 남 유다 왕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왕하23:34), 느부갓네살이 맛다니아를 시드기야로(왕하24:17) 이름을 바꾼 것 등이다.
셋째,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한 이유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정결을 유지하도록 고기를 피채 먹지 말 것(신12:20-25)과 부정한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 것(레11:1-47)과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을 먹지말라(고전10:28). => 의식법과 도덕법
넷째, 채식 기간으로 ‘열흘’이란 시험 기간을 제의할 때 다니엘의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다니엘 2장]
2:1-13 = 느부갓네살의 첫 번째 꿈과 술사들을 향한 해석 명령
2:14-30 = 하나님께 받은 계시와 다니엘의 찬송
2:31-45 = 다니엘의 꿈 해석
2:46-49 = 존귀하게 된 다니엘
첫째, 바벨론 왕이 술사들에게 ‘꿈과 그 해석’을 함께 보이라고 한 이유는?
박사와 술객들의 해석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해 보기 위해서이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꿈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지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박사들과 술사들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알 수 있다.
둘째, 다니엘이 꿈 해석을 장담하면서 ‘기한’을 달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생명을 담보로 한 정면 사건이다.
셋째, 33절의 신상을 깨뜨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뜨인 돌’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하나의 신상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본주의의 뿌리로부터 나온 모든 세상 나라를 의미한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였다 = 뜨인 돌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서부터 왔음을 암시한다. 이는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쳐서 멸망케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의미한다(계19:15).
넷째, 신상 부위의 재료가 머리에서 발끝으로 갈수록 열등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선 나라보다 뒤에 오는 나라들이 국가적 통합의 정도나 도덕적 윤리적 수준의 하락을 의미한다.
영토나 국력과는 무관하다. 예를 들면 로마는 큰 대제국이었으나 통일성, 도덕성에서 앞선 나라보다 뒤떨어졌다.
제국들은 점점 열등화되어 결국에는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다.
다섯째, 큰 신상의 꿈에 대한 신학적 견해들의 비교
꿈 내용 | 정통 개혁주의 | 세대주의 | 자유주의 |
정금으로 된 머리 | 바벨론 제국 | 바벨론 제국 | 바벨론 제국 |
은으로 된 가슴 | 메대.바사제국 | 메대.바사제국 | 메대 나라 |
동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 헬라제국 | 헬라제국 | 바사제국 |
철로 된 다리 | 로마 제국 | 로마 제국 | 헬라 제국 |
철과 진흙으로 된 발과 발가락 | 로마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의 멸망할 모든 나라 | 알 수 없는 공백기 재생 로마제국 |
분열한 헬라 제국 |
뜨인 돌 | 그리스도 왕국 (하나님 나라) |
그리스도 왕국(천년왕국) 대심판 하나님의 나라 |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 재건(실제 그렇게 되리라는 예언이 아닌 저자의 희망 |
여섯째, 44절의 하나님께서 ‘열왕의 때’에 ‘한 나라를 세우신다’는 말은 무슨 의미?
열왕의 때 = 로마 제국 이후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한 나라 =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심으로써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12제자들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까지 전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해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을 정복하는 날, 곧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날에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완성을 이루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일곱째, 45절의 신상을 부숴뜨린 뜨인 돌은 어느 산을 상징하나요?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시온산을 의미한다.
시온산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시온산에서 돌이 뜨였다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곧 복음이 모든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갈 것이라는 예언이다.
[다니엘 3장]
3:1-7 =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 낙성식 및 숭배 명령
3:8-18 = 신앙의 위기를 맞은 세 친구
3:19-27 =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세 친구
3:28-30 =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한 느부갓네살 왕의 찬양과 조치들
첫째, 단3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왕이 금 신상을 만든 이유는?
느부갓네살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든 신들 중의 한 분으로 여겼을 뿐 유일하신 창조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느부갓네살은 왜 막대한 금을 들여서 높이가 30m(고 60규빗, 광 6규빗) 가량되는 금 신상을 만들었을까요?
자신이 높임 받기 위한 교만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해석해 준 첫 번째 꿈에서 큰 신상의 정금 머리가 바벨론이며 동시에 느부갓네살 자신을 상징한다고 여기고 백성들로 그 금 신상 앞에 절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신처럼 받들어지며 높임 받기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국의 통합을 다지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즉 고대 여느 제국들처럼 바벨론도 느부갓네살을 신으로 숭상함으로쏘 제국 내의 많은 민족들을 결속시키고 맹목적인 충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일종의 국가 종교를 만든 것이다.
셋째, 갈대아 사람들은 왜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참소하였을까요?
시기심 때문이다. 세 사람을 참소할 때 문제의 본질을 떠나 있다. 즉 세 사람이 왕을 높이지 않는 불충한 신하라고 참소의 이유를 밝히고 있으나, 이 세 사람은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을 뿐 왕을 낮추거나 무시한 적은 없다. 포로 출신으로서 고위 관직에 오른 세 친구들을 평소에 시기 하며 질투했다는 사실이 반증되고 있다.
넷째, 갈대아 사람들의 참소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1)당시 다니엘이 공무 등의 이유로 외국에 나가 있거나 지방 사찰에 나가 있어서 금 신상 숭배 사건과 직접 연류되지 않았을 것이다.
2)다니엘의 지위가 너무 높고 왕의 신임이 너무 두터웠으므로 갈대아인들이 직접 참소하지 못하고, 일차적으로 그의 세 친구를 참소하여 처벌 받게 함으로써 다니엘도 자연스럽게 처벌 대상이 되도록 유도 하려 했을 것이다.
3)금 신상의 낙성식 당시 다니엘이 병에 걸려 있어 거론의 대상에서 제외 되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가정은 당시 상황을 근거로 한 합리적 견해를 제시한 것으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니, 가르칠 때 주의할 것..
다섯째, 15절의 ‘너희를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는 말에 내포된 의미는?
1)이 말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협박할 때 사용한 협박의 말로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조롱의 의도가 담겨있다. 즉 B. C. 586년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 남왕국 유다를 정복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할 때조차도 자기 백성을 구원치 못하는 것은 물론 성전도 지키지 못하는 유약한 신 여호와가 어찌 풀무불 속에 던져진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과연 풀무불 속에 던져진 자를 그 어떤 신도 살린 적이 없고, 살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풀무불 속에서 건져낸다면 그는 진정한 신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후에 살아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고 느부갓네살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조서를 반포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세계와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실 뿐만 아니라 전능자이심을 실증하고 있다.
여섯째, 18절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에서 세 친구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요?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생명을 부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신앙 고백적 표현이며 전인격적인 결단을 드러낸 것이다. 결코 풀무 불에서 구원 받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약화되었거나 하나님이 구원하지 못하실지 모른다는 두 마음을 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 4장]
4;1-3 = 느부갓네살 왕의 조서의 머리말
4:4-18 = 느부갓네살이 꾼 두 번째 꿈의 내용
4:19-27 = 느부갓네살의 한 큰 나무의 꿈을 해몽한 다니엘
4:28-33 = 느부갓네살의 한 큰 나무 꿈의 성취
4:34-37 = 회복된 느부갓네살의 찬양 및 조서의 결문
첫째,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에게 두 번째 꿈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 만이 절대 주권자가 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32절). 느부갓네살은 세계 정복 전쟁을 끝마친 후 자신의 권세와 명예가 극에 달하고 모든 것이 태평하자 자신의 힘만으로 성취하였다는 교만에 빠져 있었다(30절). 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시 세계 초강대국인 바벨론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세계와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신 여호와의 통치와 섭리 아래 있다는 것을 꿈을 통해 깨닫게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과 같은 세상 왕들에게 권세를 주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구속사의 완성을 위하여 역사는 진행시키시는 동안 세상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일반 은총론적 섭리에 따른 것임을 꿈을 통해 깨닫게 하신 것이다.
둘째,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 해석을 정리해 보세요.
1) 땅의 중앙에 있는 한 나무는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가리킨다(10,22절)
2)나무 끝이 하늘에 닿아 땅 끝에서도 보인다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권세가 더욱 커져 세계 열국들에게 미침을 의미한다(11,22절)
3) 만민이 그 나무의 열매로 식물을 삼는다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의 치하 바벨론 제국과 그 속국들이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을 가리킨다(12,22절)
4)한 순찰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을 징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신 것을 의미한다(13,24,30절).
5)순찰자가 나무를 베게 하되 그루터기를 남게 하였다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권좌에서 쫓겨나되 그의 통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님을 상징한다(14,25,31절).
6)나무 그루터기를 철과 놋줄로 동이게 하였다는 것은 권좌에서 쫓겨난 느부갓네살이 정신이상이 되어 놋줄에 묶인 것과 같이 되었음을 의미한다(15,25,33절).
7)그루터기가 들짐승 가운데 일곱 때를 있게 된다는 것은 권좌에서 쫓겨난 느부갓네살이 짐승 같은 생활을 7년간 계속하게 됨을 가리킨다(16,25,33절).
셋째, 느부갓네살이 꿈 꾼 후로부터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벌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느부갓네살이 회개할 수 있도록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주셨음을 의미한다.
넷째,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은 ‘바벨론 궁 지붕 위’란 어디를 가리키나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공중 정원’을 가리킨다.
다섯째, 느부갓네살이 ‘짐승의 마음’을 받았다는 것은 현대 의학으로 볼 때 어떤 증세인가?
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insania zoan thropica)라는 정신 질환으로, 야생 생활에 대한 강렬한 절망을 느끼는 증세이다. 이 질병에 걸린 환자는 자신을 짐승으로 여기고, 짐승과 같은 광기를 보인다. 또한 짐승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원인이 되어 외형마저도 어느 정도는 짐승과 같이 되고 만다. 그래서 느부가네살이 짐승과 같이 살며 짐승의 음식을 먹었을 뿐 아니라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되고 손톱이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다니엘 5장]
5:1-4 = 벨사살의 잔치와 성전 기명 모독 사건
5:5-16 벽에 나타난 손가락 글씨
5:17-29 = 다니엘의 분벽 글씨 해석
5:30-31 = 왕궁 벽에 쓰인 글자 예언의 성취
첫째, 성경 외 세계사에 기록된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누구일까요?
벨사살이 아닌 나보니더스(Nibonidus)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역사가들은 다니엘서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라고 한 벨사살(Belshazzar)을 가공의 인물로 보고 다니엘서도 그 예언과 내용에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근래에 발견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벨사살은 마지막 왕 나보니더스의 왕자였다. 나보니더스는 왕이 된지 3년 만에 아들 벨사살에게 통치권을 맡겨버리고 아라비아의 ‘테이마’라는 곳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로 세계사 혹은 바벨론 문헌들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벨사살이 아닌 나보니더스로 보고 있는 것이다.
둘째, 벨사살이 귀인 1000 명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할 당시 바벨론의 상황은?
메대 연합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이었다. 벨사살 왕이 잔치를 베푼 때는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해인 B.C. 539년으로써 이미 메대-바사 연합군이 바벨론 제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정복하고 수도 바벨론 성을 근 2년의 포위 끝에 점령하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바벨론에는 바벨론 시민 전체가 10년 이상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벨사살은 바벨론이 천혜의 요새였을 뿐 아니라 식량도 든든했기에 귀인들과 잔치를 베풀고 술에 취할 정도로 자만해 있었던 것이다.
셋째,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 왜 다른 것도 아닌 여호와의 성전 기구들로 마셨는가?
평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던 벨사살은 술기운을 통해 내재 되어 있던 신성 모독적 마음을 밖으로 표출한 것이다. 또한 그가 성전 기명으로 술을 마신 것은 자신의 권세가 하나님과 견줄 만큼 절대적임을 과시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기 위해서였다. 벨사살은 아버지인 느부갓네살을 통해 여호와가 세계 역사의 절대 주권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벨사살은 10년 이상의 양식을 비축한 천혜의 요새인 바벨론 성의 제1인자로서 자신의 권세가 절대적이며 고레스의 공격을 얼마든지 수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싶었던 것이다.
넷째, 성전 기명으로 술을 마신 것이 왜 개인은 물론 나라가 망할 정도로 큰 죄인가?
성전 기명은 죄 많은 인간의 것이 아닌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것으로 인간의 죄성과 쾌락을 자극하는 술을 마시는 도구로 사용한 점과 하나님의 거룩한 기명을 앞에 두고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한 것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기명들을 관유를 발라 일반 그릇들과는 다른 지극히 거룩한 그릇들로 구별하셨다(출40:9). 또 대제사장이 1년에 한 차례 피를 발라 속하는 예식을 통해 거룩을 유지하였다. 또한 제사장 이외에 성전 기구들을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자는 비록 레위인들이라 할지라도 즉각적으로 사망을 면할 수 없을 정도였다(민4:1-49). 따라서 이처럼 거룩히 구별된 성전 기명들로 술을 마시고 우상을 찬양한 것은 죽음과 멸망을 자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왕궁 벽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신 이유는?
심판을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을 만큼 바벨론 제국의 죄악들이 관영했기 때문이다.
우상을 섬기고 속국에게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바벨론의 죄악은 벨사살의 극한 교만과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그 죄악의 수위가 끝내 심판의 수위까지 높아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벨사살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대에 멸망이라는 최종적인 심판 선언을 받는 비운을 당하고 만 것이다.
여섯째, 25절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무슨 뜻인가요?
메네 = 세다, 한계를 정하다. => 하나님께서 이미 왕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뜻(26절)이다.
데겔(히브리인의 세겔을 말함) = 헤아리다, 달다 =>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왕을 저울에 달아본 즉 부족함이 보였다는 의미(27절)이다.
파르신(바르신)의 원형인 ‘베레스’ = 나누다. 깨뜨리다 => 하나님이 왕의 나라를 나누어서 베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의 죄악들을 일일이 살펴 보신 결과 그 죄악이 관영하여 심판을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는 때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그 uf과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켜 메대와 바사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뜻이다.
일곱째, 벨사살을 멸망시킨 사람은 누구인가?
바사왕 고레스이다. 그러나 다니엘서에서는 메대 사람 다리오로 나와 있다(31절).
이는 고레스가 자신의 외삼촌에게 일시적으로 왕의 자리를 양위했기 때문이다.
바벨론을 함락시킬 때 메대-바사 연합군의 총 지휘권은 고레스에게 있었다. 고레스는 자신이 세계 정복을 위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외심촌 다리오를 새롭게 건국된 메대-바사 연합 제국의 왕으로 세운 것이다. 고레스는 약 2년 후 다리오로부터 모든 권한을 이양 받았다.
다니엘서 1장
다니엘서는 BC605년 느부갓네살에 의해 1차로 포로로 잡혀가서 최소한 바사의 고레스왕 3년까지 살았던 다니엘의 행적과 그가 체험한 환상을 기록해 놓은 성경으로, 특히 7장 이하에서 강대국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니엘이 본 여러 환상으로 인해, 신약의 요한계시록 같은 묵시록의 하나로 보고 있다.
다니엘 1장 뜻을 정하여
유다왕 여호야김 제3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 기구 중 얼마를 가져간다. 그리고 유다백성 중 아름답고 재주가 능하며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택하여 3년간 왕의 진미로 기르게 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한다. 이들은 채식을 먹고도 더욱 아름다웠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명철로 무리 중 특출하여 왕 앞에서 수종을 드는 자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서를 읽으면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대제국의 왕궁에서 호강하며 살지 않았느냐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이 젊은이들의 생활은 고국 이스라엘에 있을 때보다 분명히 풍요로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진정으로 호강하면서 살았을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들은 잡혀온 포로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정복자와 피정복자, 주관자와 포로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포로는 주관자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정복자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
느부갓네살은 포로로 끌려온 유다 젊은이들을 자기 생각대로 교육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먹을 음식도 날마다 지정하여 주었다. 심지어 저들의 이름까지도 바꾸어버렸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음식이라 할지라도 입맛에 맞지 않으면,
사실 그 음식을 매일 먹는다는 것은 고역 정도가 아니라 고문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름은 그 이름을 지어준 그 부모의 신앙고백이 담긴 이름이었으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을 규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란 뜻이며,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미사엘은 ‘하나님과 같으신 이가 누구신가’,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는 뜻이다.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이름들이다.
그런데 저들의 이름이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로 고쳐져 불려졌다.
고쳐진 이름들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이 꺼리는 이방신과 관련된 이름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살아오면서 별명을 하나씩 갖고 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그 별명으로 불려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신을 ‘뺑덕어멈’이라고 부른다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이 이름들은 참으로 아름답고 존귀한 이름이었다.
남에게 불려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저들이 지극히 꺼리는 우상의 이름들이었다.
제발 그렇게 불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피하고 싶은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매일 그 이름에 대답하며 살아야했다.
만일 그대로 살아갔다면 이 젊은이들의 삶은 참으로 비극이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사느냐 초막에서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하고 즐겁게, 기쁘게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8절에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라는 이 한마디의 말이,
소망 없는 포로의 삶을 능력 있는 믿음의 삶으로 바꾸어 놓는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뜻을 정하자,
하나님께서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9절을 보라!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의 출중한 재주와 능력이 환관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하나님께서 저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셨다.
17절을 보라!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저들의 능력이 탁월하여 무리 가운데 뛰어나게 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능력을 더하셨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더하셨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바로 이 말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하나님 백성들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오늘 내가 거절해야 할 ‘왕의 진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 내가 포기해야할 ‘세상의 이득’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뜻을 정하여 세상을 향하고 있는가?
그 자녀들이 거룩한 뜻을 정하면, 이미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크고 놀라운 일을 준비하시고,
아무리 절망보다 깊은 어둠이라 할지라도,
내 앞길의 등불이 되시며 빛이 되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 이것 저것이 필요합니다. 주세요!
이 문제 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형통의 복을 주소서! 라고 기도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먼저 뜻을 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마음껏 나를 사용하시며 나를 기뻐하실 수 있도록...
(기도)
주님,
세상의 도전 앞에 뜻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눈치만 살필 때가 많습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설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용기는 있으되 무모하며, 희생은 크되 감동이 없고, 열심은 넘치되 결실이 부족합니다.
침묵케 하소서. 말씀을 듣기보다 욕망을 쏟아내기 바빴던 신앙의 시간들.
실천케 하소서. 비우고 낮아지기보다 채우고 높아지기를 소망했던 삶의 자리들.
다시 순교자의 영성으로 이 땅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다니엘 2장 느부갓네살의 번민
느부갓네살은 즉위 2년에 꾼 꿈 때문에 번민하다가 해몽을 하지 못하는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다니엘은 세 친구와 함께 기도하여 계시를 받고 왕의 꿈을 해몽함으로써 높은 지위에 오른다.
느부갓네살왕은 왜 당시 바벨론 최고의 지혜자들이라 할 수 있는
박수, 술객, 점쟁이, 술사들을 갑자기 불신하게 되었을까?
사실 느부갓네살왕은 평소에는 늘 저들을 의지하고 신임했으며,
지혜자들은 국정 전반에 대해 왕의 최측근 참모역할을 해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느부갓네살왕이 갑자기 바벨론 모든 박사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을까?
느부갓네살왕의 성미가 고약해서 그랬을까? 자신이 꾼 꿈을 알아내어 해몽하라니!
아무리 용한 점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꾼 꿈까지 알아내어 해몽할 수는 없다.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꿈의 사람 요셉도, 바로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듣고서 해몽하지 않았는가?
박사들이 밝힌 것처럼, 이같은 일은 육신을 지닌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느부갓네살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다니엘 2장 전체를 읽으면서, 왜 그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지혜가
바벨론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뛰어났다고 성경은 말한다.
당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나이가 얼마였을까? 저들은 갓 20세가 넘은 청년들이었다.
아직 세상물정 모를 나이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들의 지혜가 어떠하였기에,
겨우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보다 그 지혜가 열배나 뛰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바벨론의 박사들이 누군가? 수많은 학문수련과 경험에서 오는, 범상한 통찰력과 유려한 언변으로,
제국의 황제를 보필하는 최고의 지혜자들이요 모략가들 아닌가?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저들은 한갖 미물에 불과한 존재들이었다.
저들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것은, 눈부신 태양빛 아래 가물거리는 촛불과도 같은, 초라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니엘의 지혜가 어디서 왔는가? 왜 다니엘의 지혜가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보다 더욱 빛났는가?
다니엘은 비록 약관 20세 청년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에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지혜자도 다니엘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왕의 터무니없는 고집은, 바벨론 모든 박사들의 세상 지혜와 능력의 한계를 드러나게 했고,
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다니엘의 지혜와 총명은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포로로 끌려온 유다의 한 청년은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이요 제국의 치리자로 세워지게 된다.
혹시 느부갓네살왕처럼,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가?
내가 지금 안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세상의 어떤 지혜자와 능력자가 나를 근원적으로 도울 수 있을까?
죽음의 위기 앞에서 다니엘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길밖에 없었다.
내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가장 완전하게 도우실 수 있음을 분명히 확신하고,
세상의 모든 생각, 경험, 지식을 내려놓고, 권능의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한다.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잊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그토록 사랑하시고 인정하셨는지, 성경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다니엘은 어려운 문제에 당면했을 때, 친구들과 함께 하나님께 매달린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니엘은 하나보다 둘이, 둘보다 셋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의 힘이 훨씬 크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체없이 세 친구에게 찾아가 일의 전모를 알리고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했다.
죽음을 앞에 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다니엘과 세 친구는 그 어떤 행동보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에 힘썼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아름다운 우정은 고난 가운데서 더욱 빛났다.
신앙의 동지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정말 어려울 때 나를 돕고, 함께 기도드릴 신앙의 동지들이 있는가?
만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소 상호간에 진실된 중보기도를 해 줄 수 있는 영적교제가 없다면,
그러한 모임은 얼마나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며, 무기력하고 공허한가!
다니엘은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믿음으로 마주섰다.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을 다 멸하라는 느부갓네살왕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왕궁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왕 앞에 섰던 박사들이 끌려나가고, 소식을 들은 수많은 박사들은 혼비백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피할 길을 찾고 있을 때,
다니엘은 오히려 왕 앞으로 나아간다.
문제를 피한 것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지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실로 담대하게 왕에게 말미를 구한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에게 장담을 하고 난 뒤에야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다시말해 다니엘은 사건 해결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에,
오직 하나님께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왕에게 자기 생명을 내건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였던 다니엘은, 이제 자신의 목숨을 내어걸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으로 고난에 정면으로 맞선다.
이것이 바로 ‘목숨을 건 신앙’이다.
이것이 바로 에스더가 고백한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이다.
이것이 바로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아브라함의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다.
어떻게 신앙생활하기를 원하는가?
적당히 흉내만 내고, 고상하게 우아하게 부담스럽지 않게, 인격수양하는 정도의 신앙생활에 만족하려는가?
만일 그렇지 않고, 제대로, 뜨겁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신앙생활하기 원한다면,
다니엘과 같은 목숨을 건 신앙으로, 모든 고난에 맞서며, 담대히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꼼짝 못하시게 하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죽음에, 내어 던졌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셔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게 하셨다.
믿음이란 하나님 품 안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이다.
(기도)
지혜의 근원되신 주님,
세상의 지식과 지혜는 넘쳐나지만, 어딜봐도 길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땅에 십자가는 높고 말씀들은 넘쳐나는데
기갈로 사람들은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다니엘을 찾으시는 하나님!
숨겨두신 거룩한 백성들을 정금같정금같이 나오게 하시고,
교회마다 신앙의 동지들이 조직되게 하시며,
하나님께 자신을 던져 넣어,
세상을 살려내게 하소서.
다니엘3장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그 후 느부갓네살은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세우고 숭배하게 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신상숭배 거부죄로 참소당해 처형받게 되었으나 신앙지조를 굽히지 않는다. 저들은 풀무불 속에 던져지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불 가운데서도 살아난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더 높은 지위에 오른다.
3장에는 다니엘이 등장하지 않고 그의 세 친구에 관한 기사만 기록되어 있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여호와 절대 신앙을 사수하다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나게 되었다는, 너무나 잘 알려진 장면이 소개된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우상 제물을 먹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지도 아니했고 믿음도 지켰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바벨론 왕의 인정을 받고 고급 관리가 되어
바벨론 여러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온 젊은 애송이들이 높은 차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본토 갈대아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심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높이 60규빗(약 30m)나 되는 큰 금 신상을 세우고
그 앞에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절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만약 그 금 신상에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는 엄한 명령이었다.
옛 중동 문화에서 종교와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였기 때문에,
신에 대한 숭배는 곧 그 신의 지상 대리자인 왕에 대한 충성의 고백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신상 숭배를 거스르는 행위는 곧 반역이요, 죽음을 뜻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앞에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신상에 절을 하고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상에 절하지 않음으로 죽음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삶과 죽음의 선택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어려운 신앙적 선택의 순간이 수없이 많이 다가온다.
나는 그러한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나의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말씀이나 주님의 교훈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매일 세상 속에서 온갖 상황을 접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만일 주님의 교훈과 말씀이 나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갈대아 사람들의 참소로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의 재판 자리에 나아간다.
왕의 회유와 협박이 시작된다.
그런데 왕의 말을 엄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의 말 가운데 특히 (15절) 하반절을 보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느부갓네살의 이 말은 우리를 당황케 한다.
왜냐하면 바로 앞장에서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2:47).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이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이 자신이 꾼 꿈과 그 해몽을 다니엘이 밝혔을 때,
그가 깜짝 놀라 고백한 내용들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포로로 끌려온 젊은이들을 파격적으로 제국의 고위직에 임명한 것을 보면,
느부갓네살은 분명히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고백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신앙을 멋지게 흉내 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았던 느부갓네살의 놀라운 고백 내용을 보라!
나의 신앙 고백, 우리의 신앙 고백들은 어떠한가?
스스로 신앙 고백한 내용들을 진실로 믿고 있다면,
오늘 우리가 속한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분명히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각각 구분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열 처녀는 다 같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는데...
이대로 신앙생활해도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신앙고백이 나에게도 있는가?
내가 바라는 대로 응답되지 않을 경우,
실망과 좌절을 일삼으며 신앙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 적이 얼마나 되는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기적이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마음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힘은 보이는 힘이지만 제한적이고,
하나님의 힘은 잘 보이지는 않으나 우주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전능한 힘이다.
믿음이 없이는 그 힘이 보이지 않으며, 설사 본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을 보았고,
하나님이 그 전능한 힘으로 자신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기에 담대할 수 있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졌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곳에도 계셨다.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
하지만 죽음이 손도 댈 수 없었으니, 어떤 불이, 어떤 시련이,
하나님의 손에서 그 자녀를 빼앗아 갈 수 있으랴!
왕과 신하들은 모두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지만, 그 일은 현실이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아니,
하나냐(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미사엘(누가, 무엇이 하나님이신가?),
아사랴(여호와께서 도우신다)의 위대한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 왕을 감동시켰고,
이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에게 신앙적 유익을 끼치게 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신앙의 고백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나의 신앙의 고백이 우리 가정에, 직장과 학교, 친구와 이웃, 교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도 안 된다.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지 아니한다면 그 수많은 고백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의 고백이 아니라,
생활의 고백, 삶의 고백이 아닐까?
(기도)
주님,
수많은 교회들의 이름대로,
수많은 주의 백성들의 이름대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영글기를 기원합니다.
신앙고백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도 기다려 주시고,
배반과 불충을 일삼을 때도 참아 주시는 하나님!
흔들어 깨워 주소서.
깊어 가는 시대의 어둠에 묻혀
더 이상 영혼의 깊은 잠을 자지 아니하도록...
느부갓네살왕
다니엘4장 누가 진짜 주인인가
느부갓네살은 두 번째 꿈을 꾸었고, 다니엘의 해몽대로 그는 정신병에 걸려 7년 동안 소처럼 풀을 먹은 후 회복된다.
왕은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를 찬양하며 조서를 반포한다.
느부갓네살은 이방의 왕으로 다신교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처음 꿈을 다니엘이 밝혀내고 해몽했을 때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 가운데서 살아나는 사건을 경험했을 때도,
느부갓네살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았고,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는 정도였다.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2:47).’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3:28).’
느부갓네살은 결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니엘 4장에서는 분명히 태도가 달라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동족들이 섬기는 신들과 그 신앙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유일한 절대자로 믿었는가에 대해서는 단정 짓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느부갓네살이 세계와 역사를 지배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분명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그의 나라는 실로 영원한 것임을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에게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방 대제국 통치자의 입술을 통해서도 이 같은 고백이 나오게 하셨다.
여호와를 잘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 이방인마저도
우주와 역사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하고 있는데,
하물며 너무나 큰 구원의 은총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들은 삶의 매순간 순간마다 주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절대주권이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나의 모든 권리를 주님 앞에서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경험, 지식, 나의 감정, 나의 자존심 등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고,
나는 오직 그분의 명령에만 복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내 감정이 허락하지 않지만,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만,
내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나를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좇아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 가정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분명히 행사되고 있는가?
오늘 내가 속한 구역, 기관부서, 교회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인정되고 있는가?
미국의 법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그 법은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서만 행사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법은 우리나라 안에서만 행사되어지는 것이다.
치외법권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나라에 거주하면서도 그 나라 법에 통제받지 않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다른 나라의 대사관이나 미군부대 같은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데,
그 시설물들은 비록 우리나라 안에 있지만, 우리나라의 법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의 법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교회가 비록 이 땅에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그곳을 하나님의 법이 지배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인정된다면,
그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비록 몸은 예배당에 와 앉아 있고, 교인으로 등록하고 세례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한다면,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 영혼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통치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가?
그렇지 않다면 나의 소속은 어디인가?
어느 나라의 백성인가? 누가 나를 다스리고 있는가?
하늘에 닿도록 크게 자란 나무는 땅의 권력자의 교만을 비유하고 있다.
느부갓네살이 큰 나무 꿈을 꾼 것은 세계정복 전쟁을 끝마친 후,
자신의 권세와 명예가 극에 달하고 모든 것이 태평하여 교만에 빠져있던 때였다.
이때 하나님께서 꿈으로 느부갓네살에게 경고하셨다.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은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
이에 박수장, 곧 지혜자들의 우두머리였던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는데,
독재자에게 그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놀랐지만 왕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실을 고한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충고를 좇지 않고 1년의 유예기간을 헛되이 보내고 만다.
마침내 느부갓네살은 정신병에 걸리게 되고,
왕위에서 쫓겨나 일곱 해 동안 들에서 짐승과 같이 지내게 된다.
(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insania zoan thropica)
그런데 이같이 몰락했던 왕이 어떻게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는가?
느부갓네살이 왕으로 재등극하기까지의 과정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짐승처럼 살아가던 느부갓네살이 7년이 지난 어느 날, 하늘을 우러러 본다.
이 말은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곧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장면은 눅15장에서 탕자가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통회하고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에 느부갓네살의 총명이 돌아왔고, 고침을 받은 그는,
다음으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자로 인정하고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린다.
그리고 찬양 가운데 그의 이전의 모든 지위가 회복된다.
이후 느부갓네살은 온 천하의 백성에게 조서를 반포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은 찬양과
여호와께 대한 모든 인생의 교만을 경계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는 장면이다.
이는 징계받기 직전 바벨론 궁 지붕에서 자신이 건축한 도성을 내려다보며
교만으로 가득했던 모습과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 보면,
34절의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뒤에 나는 기도하는데 마음을 바치고,
주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내 죄에 대해 간구하였다.
그리고 신들 중에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무지에 관해서 기도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 사람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인가?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교만해지거나 아니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보게 되면 겸손해진다.
느부갓네살은 교만해졌을 때 비참으로 떨어졌으나,
겸손해졌을 때 존귀한 영광의 지위를 회복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견지할 때,
그것이 바로 우리를 진짜 출세시키는 능력이요, 존귀한 자리로 이끄는 지름길이 아닐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조서 내용을 자신의 말로 고쳐 옮기지 아니하고,
공포된 내용 그대로, 느부갓네살의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대제국 바벨론 주권자의 입술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계와 역사에 대한 절대 주권자이심을
고백하게 하고 있다.
(기도)
주님,
느부갓네살이 이방의 왕일지라도 다니엘은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와 공동체에서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별된 삶을 살되,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회복된 느부갓네살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간들을 돌아보게 하소서.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나의 삶이 감사와 찬양으로 울려 퍼지게 하소서.
[작성자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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