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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회사

종교 전쟁

by 은총가득 2021. 5. 3.

종교전쟁(Wars of Religion)

 

30년전쟁 중 제1기 보헤미아의 화이트마운틴 전투

 

 종교전쟁(Wars of Religion)

 

종교전쟁이란 유럽에서 종교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전쟁으로, 넓은 의미로는 종교가 관계된 모든 전란을 말한다. 그러나 서양사(西洋史)의 정의에서 종교전쟁은 종교개혁을 계기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신·구(新舊) 양(兩) 교파(敎派)의 대립으로 생겨나 국제적 규모로 진전된 일련의 전쟁을 가리킨다.

이러한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종교전쟁은 다음 전쟁들도 포함될 수 있다.

① 13세기 초, 남(南)프랑스의 알비·툴루즈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던 알비주아파(派)를 이단으로 응징할 것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요구하여 이들을 토벌한 알비주아 십자군.

② 후스가 처형된 후, 그의 교시(敎示)를 받던 보헤미아인들이 박해에 저항하여 1419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교황이 요청하여 1420년부터 약 10년 동안 십자군이 벌인 후스전쟁.

③ 루터의 종교개혁 후, 1522년에 지킹겐, 후텐 등이 지도자였던 독일의 기사(騎士)들이 트리엘 대주교령(大主敎領)을 습격하였지만, 후에 반격을 받아 무너진 기사전쟁.

④ 츠빙글리가 스위스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에 즈음하여 1531년 카펠에서 벌어진 신·구 양파의 전쟁.

⑤ 1530년 독일 신교파(新敎派)의 제후(諸侯)와 도시들이 카를 5세의 탄압 정책에 항거해서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1546∼1547년 황제측의 제후군(諸侯軍)과 싸운 슈말칼덴전쟁.

그러나 서양사에서 정의된 종교전쟁은 이와 같은 내란이 아니고, 본래 내란으로 시작된 것이라도 그것이 여러 외국의 간섭을 초래해서 국제전으로까지 비화된 경우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전쟁으로는;

① 16세기 후반 프랑스에서의 위그노전쟁.

②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후반에 걸친 네덜란드 독립전쟁.

③ 17세기 전반 독일에서의 30년전쟁.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이 전쟁들이 결코 순수한 종교문제에 국한되어 일어나지 않았고, 정치와 종교가 정치적·영토적 야심과 함께 엉켜 서로 분리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30년전쟁을 끝으로 이후의 전쟁들은 종교를 내세운 구실은 없어지고 정치적 야망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중세시대의 서유럽문명에서 르네상스가 유럽인들에게 세속적 정신을 증가시켰지만, 그러나 종교문제는 여전히 그들에게 최고의 중요 관심사로 남아 있었다. 로마가톨릭 교회의 권력남용은 개혁에 대한 요구를 점증케 했고, 궁극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종교개혁은 고통스럽고 때때로 폭력적인 종교분쟁의 시대를 열었다. 가톨릭은 신교도들과 싸웠고, 신교도 집단들은 그들끼리 서로 다투었다. 종교개혁은 주로 종교문제에 국한되었지만, 그러나 신교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교회가 점점 더 국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고, 역설적이게도 이에 따라 세속주의는 오히려 성장되어 갔다.

종교개혁은 서유럽의 종교적 통일성을 파괴하였고, 그리하여 중세 서유럽문명의 중심적 특성 중에 하나인 종교적 통일성을 사라지게 하였다. 종교개혁은 루터주의, 칼뱅주의, 영국국교회주의, 재침례교 등의 4가지 주요 운동을 초래하였다. 이 4가지 운동은 오늘날 존재하는 거의 모든 신교 종파들의 근간이 되었다.

 

종교개혁 연표

1517년. 루터(Martin Luther)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

1519년. 쯔빙글리(Ulrich Zwingli)가 취리히에서 교회개혁을 시작.

1520년.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를 파문.

1522년. 루터가 작센에서 교회개혁을 시작함.

1524-1525년. 독일에서 농민반란이 발생.

1534-1535년. 존 오브 라이든(John of Leyden)이 뮌스터에서 재침례파 신정정치를 지도.

1534년. 영국의회가 수장령을 통과시킴.

1536년. 칼뱅(John Calvin)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리(The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를 출간.

1539년. 영국의회가 6개 조항(Six Articles)을 채택.

1549년. 최초의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가 영국에서 출판됨.

1551년. 42개 조항(Forty-two Articles)이 영국에서의 칼뱅주의의 영향력 증가를 반영함.

1555년. 독일의 신교도와 구교도가 아우구스부르그 강화조약에 합의함.

1559년. 영국의회가 새로운 수장령과 통일령을 통과시킴.

1560년. 장로파주의(Presbyterianism)가 스코틀랜드의 국교가 됨.

1563년. 영국에서 39개 조항(Thirty-nine Articles)이 채택됨.

 

루터주의

 

루터의 젊은 시절

루터주의는 처음으로 발생한 종교개혁운동이었다. 그 창시자인 마틴 루터(1483-1546년)는 중부 독일의 작센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변호사가 되려했으나, 종교적 귀의를 경험하고 나서 1505년에 아우구스티누스 교단의 수도사가 되었다. 1508년에 그는 작센의 비텐베르크에 있는 대학에서 신학교수가 되었다.

루터의 신학 : 신앙의인(Justification by Faith)

수도승이 되기는 하였으나 루터는 여전히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번민하고 있었다.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그는 성아우구스티누스를 포함하여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의 저작들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답을 로마인들에 대한 성바울의 서신에서 찾았는데, 거기에는 ‘의인은 신앙으로 살지니’라고 써있었다.

루터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궁극의 선에 대한 믿음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통해서라고 결론지었다. 믿는 자가 구원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선행을 하는 것, 교회의 의식에 참여하는 것, 영성체를 하는 것 등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선량한 그리스도교인이라면 물론 이것들을 해도 되지만 (사실 해야 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이라는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오직 신앙만에 의한 구원’ 또는 ‘신앙의인(Justification by Faith)’으로 불리게 되는 교리에 기초한 신학체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작.

1517년에 도미니크회의 수사인 테첼(Johann Tetzel)이 비텐베르크 주변지역에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였다. 면죄부의 교리는 중세의 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자들은 지상에서의 선행에 의하여 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가르쳤다.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충실한 그리스도교인들은 천국에 들어가서 신의 모습을 보기 전에, 그들과 이미 죽은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옥에서 지내야 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이 공덕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교리에 따르면 면죄부는 (회개의 성사에서 나오는) 죄의 사함이 아니라 죄에 따른 현세의 처벌의 면제를 가져다 주었다.

중세 후기에는 면죄부가 때때로 돈을 모으기 위하여 판매되었다. 테첼이 판매한 면죄부로부터의 수익금은 로마에 있는 새로운 성바울 교회당의 건설비용으로 쓰였다.

 

95개조 반박문

루터는 면죄부의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신앙의인' 교리에 불일치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1517년 10월 31일에 그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한 성당의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써붙여 놓았다. 그 반박문은 다른 학자들에게 면죄부 문제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자는 도전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면죄부에 대한 루터의 거부는 재빨리 신학논쟁의 문제, 그 이상의 것이 되어버렸다. 루터와 그의 반대자들은 논쟁을 벌여감에 따라서 양쪽은 각자의 입장을 강화시켰고, 점점 더 서로에 대하여 적대적으로 변해 갔다.

1519년에 루터는 라이프찌히의 저명한 신학자인 요한 에크(Johannes Eck)와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그의 견해가 1세기 전에 이단으로 매도 당했던 존 후스의 견해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그는 교회의 성직자들의 권위를 거부하였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발하였을 때, 루터는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으로 응수했다.

보름스 의회(The Diet of Worms)

1521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에서 열리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출두할 것을 명령하였다. 의회가 그에게 그의 입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자, 루터는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이것이 내 입장이며, 나는 달리는 할 수가 없습니다(Here I stand. I cannot do otherwise)."

황제가 루터에게서 법의 보호를 박탈한다고 선언했을 때,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공(Frederick the Wise)은 그 개혁자에게 바르트부르크 성에 있는 은신처를 제공했다.

개혁의 수용

1522년에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그는 프리드리히 현공의 지원을 받아서 자신의 생각에 따라 지역교회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루터주의는 대중의 지지를 얻었고, 특히 독일 북부와 동부지역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루터주의의 교리들

'신앙의인' 교리에 덧붙여서, 루터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유일한 정당한 출처는 성경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공의회와 교황에 의해 정의되는 교회의 전통들과 성경 모두에 드러나 있다는 로마가톨릭의 견해를 그는 거부하였다.

루터의 신념은 신약성서에 나와 있듯이 오직 2가지의 성사, ‘세례(=영세)와 성체(=성찬)’만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7가지의 성사(영세, 견진, 성체, 고해, 종부, 신품, 혼배)가 존재한다는 가톨릭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그다지 공식적인 신자들의 전체 조직체가 아니라는 그의 생각을 강조했다. "그러나 너희는 선택된 인종이고 고귀한 성직자이자 신에게 바쳐진 사람들이며, 너희를 어둠으로부터 그의 놀라운 빛 속으로 불러낸, 신을 찬양하도록 따로 떼어놓은 민족이다"라는 성베드로의 첫번째 서신을 떠올리며, 그는 모든 신자들이 성직자라는 원시그리스도교의 개념을 재강조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성경을 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루터는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준비하였다. 이 성서번역은 독일문학의 걸작들 중 하나로 인정된다.

루터는 수도원을 폐지하였으며 성직자들의 독신생활을 반대하였다. 루터파의 예배는 칼뱅파보다 더 격식을 차렸지만, 가톨릭보다는 소박한 것이었다.

루터와 농민반란

유럽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일지역의 농민들도 가난하면서 무거운 세금과 지주에 대한 의무들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1524년에 독일 남서지역에서 지주들에 대항하는 농민반란이 시작되었고 1525년에는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농민들은 농노제와 장원체제를 폐지하고자 하였다.

농민들은 루터의 지지를 기대하였으나, 이 종교개혁자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다. 그는 농민반란에 반대하였으며 오히려 이를 진압하는 군주들을 지지하였다.

루터주의의 확산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의 운동을 근심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운동이 신성로마제국의 통일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투르크와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적들을 상대하느라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아우구스부르그 의회

1530년에 루터는 아우구스부르그 의회에서 카를 5세 앞에 출두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아우구스부르그의 신앙고백'으로 알려지게 될, 그의 신앙에 대하여 진술하였다. 의회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평결하였다. '아우구스부르그의 신앙고백'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동료였고, 독일의 저명한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였던 멜란히튼(Philipp Melanchthon)에 의해 기록되었다.

아우구스부르그 강화조약

아우구스부르그 의회 이후에 다수의 루터파 독일군주들과 도시들은 1531년에 가톨릭 합스부르그 가문에 대항하는 종교적 군사적 동맹인 '쉬말칼딕 동맹(Schmalkaldic League)'을 결성하였다. 독일이 루터파와 가톨릭으로 점점 더 뚜렷하게 분열함에 따라 긴장은 고조되었다. 1546년부터 1555년까지 독일은 종교적 내전으로 분열되었다.

1555년에 양측은 타협안을 찾았는데, 그것이 아우구스부르그 강화조약이다. 이 조약은 각각의 독일군주들에게 로마가톨릭과 루터주의 중에서 자신의 국가의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부르그 강화조약은 칼뱅주의자나 재침례교도들 같은 다른 종교집단들은 승인하지 않았다.

루터주의는 독일의 많은 지역, 특히 북부와 동부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동부의 실레지아를 포함하여 남부 독일의 대부분과 서부의 라인란트는 로마가톨릭으로 남게 되었다.

독일 밖의 루터주의

루터주의는 곧 스칸디나비아로 확산되어 스웨덴과 그가 통치하던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의 발트해 지역, 그리고 덴마크와 그의 통치하에 있던 노르웨이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칼뱅주의

 

스위스 종교개혁의 시작 : 쯔빙글리

스위스 종교개혁은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년)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문주의자이자 가톨릭 신부였던 쯔빙글리는 원래는 가톨릭교회가 스스로를 개혁하기를 바랬었다. 하지만 1519년에 그는 취리히에 있는 그의 교회를 이끌고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쯔빙글리도 성서의 우월성을 믿었다. 하지만 그 독일의 개혁자와는 달리 쯔빙글리는 세례와 영성체는 진정한 성사라기보다는 신자의 그리스도교 교회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의식이라고 믿었다. 쯔빙글리는 성직자의 독신의무를 부정하였으며, 예배에 있어서는 소박함을 강조하였다. 1531년에 쯔빙글리는 내전 중에 가톨릭 병사들에게 살해당하였다.

 

존 칼뱅(John Calvin) : 젊은 시절

스위스의 신교도들은 쯔빙글리의 죽음으로 일시적으로 지도자가 없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 몇 년 안에 칼뱅주의를 받아들였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존 칼뱅(1509-1564년)은 법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루터의 사상적 영향을 뚜렷하게 받은 그는 신교도가 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그의 견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여전히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으므로 칼뱅은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처음 은신처는 스위스의 바젤이었으며, 그후 1536년에는 제네바에 정착하여 빠른 시간 내에 그 곳의 종교개혁 지도자가 되었다.

 

칼뱅주의의 교리들

존 칼뱅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가장 중요한 단행본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리(1536년)'에서 그의 신학을 발표하였다. 칼뱅은 성서가 그리스도교 교리의 유일한 출처이며 성사는 세례와 영성체 2가지뿐이라는 루터의 견해에 동의했다.

 

루터와는 달리 칼뱅은 종종 예정설이라고 불리는 신의 선택에 의한 구원이라는 교리를 강조했다. 이 믿음은 신의 압도적인 힘과 권위와 인간의 하찮음과 비행 간의 대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교리에 따르면 창조가 시작되었을 때 전지전능한 신은 시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전 우주의 계획을 세워놓았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 자신의 이유 때문에, 신은 구원을 받을 자들과 저주를 받을 자들을 결정해놓았다. 구원을 받을 운명인 사람들은 선민으로 알려져 있다. 신은 선민들에게 지상에 신의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욕구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교 도덕가치에 따라 생활하고자 하는 욕구를 부여했다.

 

실제에 있어서의 칼뱅주의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뱅은 수도원과 성직자의 독신의무를 폐지했다. 예배에 있어서 칼뱅은 소박함을 강조하였다. 칼뱅파의 예배는 기도, 찬송가 부르기, 성서 낭독 및 설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럽대륙에서 대체로 개혁교회라고 불리는 칼뱅파 교회는 집회에서 선출된 원로(elder)라고 불리는 평신도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칼뱅주의는 또한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세속적인 쾌락의 부정을 포함하였다. 교회출석에 대한 요구에 덧붙여서 칼뱅파의 금욕주의는 카드놀이, 도박, 가무, 연극관람, 음주 및 욕설을 금지하였다.

 

제네바에서의 신정정치

제네바에서 칼뱅은 시정부를 지배하던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신정정치를 확립했다. 금욕적인 행동규칙을 어긴 자들은 심한 처벌을 받았고, 종교적 반대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박해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에스파냐인 마이클 세르비투스(Michael Servetus)의 경우인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부정하였다. 가톨릭 종교재판소는 그의 이단혐의를 입증하여 사형선고를 내렸다. 세르비투스는 제네바로 도주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칼뱅파 관헌에 체포되어 화형을 당했다. 칼뱅파의 통치를 벗어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제네바를 떠났고, 반면에 수천명의 다른 사람들은 그곳을 은신처로 삼았다.

 

칼뱅주의의 확산

칼뱅파 개혁교회는 스위스의 많은 지역, 특히 제네바, 취리히, 베른 및 바젤 등의 도시지역에서 지배적이 되었다.

16세기 중반에 칼뱅주의는 프랑스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를 의미하는 위그노들은 점차 강대해지는 프랑스 국왕의 권력에 반대하던 귀족들로부터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전히 압도적인 로마가톨릭 국가였다.

칼뱅의 제자였던 존 녹스(John Knox)는 그 새로운 신앙을 스코틀랜드에 전해주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칼뱅주의는 교회행정을 원로들이 운영하는 장로파주의로 알려졌다. 1560년에 스코틀랜드 의회는 장로파주의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영국에서 청교도라고 알려진 칼뱅주의자들은 영국의 교회에 남아있는 가톨릭적 요소를 제거하고자 했다. 청교도들은 17세기에 영국의 정치와 정부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칼뱅주의는 네덜란드에서도 상당수의 추종자들을 만들었지만, 독일에서는 소수의 추종자를 얻는데 그쳤다. 오스트리아와 폴란드에서도 칼뱅주의가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지만, 그들은 나중에 가톨릭 종교개혁에 의하여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갔다.

 

칼뱅주의와 경제발전

유럽의 경제발전에 미친 칼뱅주의의 영향은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칼뱅주의가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발달을 촉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베버는 칼뱅주의가 절주, 검약, 근면과 같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장려하고 경제적으로 비생산적인 과시적 소비를 억제시켰다고 했다.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은 때때로 그 성공을 신이 그들을 선민에 넣어주었다는 표식으로 생각했다. 스위스인, 스코틀랜드인, 네덜란드인 및 후일의 뉴잉글랜드인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칼뱅파 사람들이 사업에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기는 하였으나, 베버의 명제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도전을 받아왔다.

 

영국국교회주의(Anglicanism)

 

헨리 8세(1509-1547년)

영국은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영국국교회로도 알려진 국가가 통제하는 영국교회가 국교가 되었다.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 있는 감독파 교회들은 그 기원을 영국교회에서 찾고 있으며, 감리교파는 18세기에 영국국교회의 분파로서 시작되었다.

 

교황권과의 대립

영국의 종교개혁을 가져온 일련의 사건들은 아라곤의 캐더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려는 헨리 8세의 요구로 시작되었다. 캐더린에게 살아남은 자식은 한명 뿐이었는데, 그가 후에 매리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는 후계자로 사내아이를 원하였으며, 그는 그 당시에 앤 볼린(Anne Boleyn)에게 미쳐있었다.

 

국왕은 교황 클레멘트(Clement) 7세에게 캐더린과의 결혼은 무효라며, 결혼의 무효화를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녀는 헨리 8세의 형이었던 아더(Arthur)의 미망인이었다. 교회법에 따르면 남자는 자신의 형제의 미망인과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교황 율리우스(Julius) 2세는 그 결혼을 허락하는 관면(dispensation)을 해주었지만, 헨리는 관면은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온 것이었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그의 선임자의 결정을 번복시키기를 주저하였고, 캐더린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당시에 이탈리아의 지배자였다는 사실도 그의 행동의 자유를 속박하였다.

헨리 8세는 점점 더 조급해졌다. 1529년에 그는 대법관인 토마스 울지(Thomas Wolsey) 추기경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토마스 모어(Thomas More)를 앉혔다. 새로운 캔터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1533년에 결혼의 무효화를 허락해주었다. 그리하여 헨리는 앤 볼린과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부인들 중 2번째 부인이었다.

 

수장령

1534년에 의회는 수장령을 통과시켰는데, 그것은 교황이 아니라 국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영국은 교황의 우위를 부정하였지만, 헨리 8세 치하의 영국교회는 교리와 의식면에서는 여전히 근본적으로 가톨릭이었다. 1539년에 의회는 영국교회의 교리를 규정하는 6개 조항을 승인했다. 6개 조항은 교황의 우위를 제외한 모든 주요사항에 관하여 가톨릭의 가르침을 재긍정하면서, 신교도 신앙을 부정하였다.

 

수도원 해산

헨리 8세는 영국의 수도원을 적대시하였는데, 수도원은 교황권에 대한 지지의 거점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1536년에 통과된 의회의 법안으로 소규모 수도원들이 해산되었고, 규모가 큰 수도원들은 1539년에 해산되었다. 돈이 필요했던 국왕은 수도원의 토지의 대부분을 부유한 영국인들에게 매각했다.

 

종교개혁에 대한 반대

헨리 8세는 로마와의 결별에 대한 일부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직 대법관 토마스 모어와 로체스터의 주교인 존 피셔(John Fisher)가 수장령 지지의 맹세를 거부하여 1535년에 처형되었다. 1536년에는 보수적인 북부 일글랜드에서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로 알려진 반란이 일어났지만, 헨리 8세는 손쉽게 이를 진압하였다.

 

백성들의 지지

그러나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국왕을 지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교회가 징수하는 세금과 수수료는 물론 교회의 막대한 부에 분개하였다. 그런 이유 중에 하나가 14세기에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기간 동안에 교황권에 대한 영국인들의 적개심이 늘어났었는데, 교황권이 그 당시에는 영국의 전통적인 적이었던 프랑스에 의해 지배하에 있었다. 또한 해산된 수도원 재산을 매입한 사람들도 국왕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에드워드 6세(1547-1553년)

헨리 8세와 그의 3번째 부인 제인 시무어(Jane Seymour)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10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계승하였다. 에드워드가 통치하는 동안에 영국교회는 더 신교적이 되었다. 1551년에는 6개 조항이 폐지되고 42개 조항으로 대체되었는데, 그것은 점점 증가하는 칼뱅주의의 영향력을 반영한 것이었다. 영국의 성직자들은 이제 결혼이 허용되었다.

신교적 사상들이 영국교회의 예배에서 표현되었는데,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1549년판 기도서가 그것으로 영어로 발표되었다.

 

매리여왕(1553-1558년)

에드워드 6세가 죽자 매리여왕은 영국에 로마가톨릭을 복구시키려고 하였다. 이 일은 그녀가 1554년에 그녀의 사촌이자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에스파냐 국왕 필리프 2세와 결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백성들을 격분시켰다.

매리는 영국의 신교도들을 박해했다. 그녀의 통치기간 중 약 300명이 화형을 당하였고 매리여왕은 블러디 매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녀의 희생자들 중에는 캔터배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도 있었는데, 레지날드 폴(Reginald Pole) 추기경이 그와 대체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년)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는 튜더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종교적 불화가 국가의 통일성에 미치는 영향을 염려하여, 그녀는 국민들 대다수를 만족시킬 종교적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1559년에 의회는 신수장령을 통과시켰는데, 그것은 매리여왕 시절의 친 가톨릭적 법안들을 폐지하고 다시 한번 국왕을 영국국교회의 수장으로 삼는 것이었다. 1559년의 통일령(Act of Uniformity)은 1553년의 개정판 기도서를 채택하였고,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1563년에 의회는 39개 조항으로 영국국교회의 교의를 명확히 하였다. 교회는 대체로 신교적이었던 반면에 여전히 주교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 치하의 종교적 해결책은 가능한 한 많은 백성들을 결속시키기 위하여 타협과 자구의 애매함을 강조했던 것이었다. 1603년에 엘리자베스가 사망했을 때에는 영국은 신교 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종교적 해결책에 대한 반대

비록 엘리자베스의 해결책이 폭넓게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많은 열렬한 신교도들은 그것이 영국교회를 진정으로 신교적으로 만들기에는 충분치 못하다는 이유로 그 해결책에 반대했다. 청교도로 알려진 이 신교도들 중 일부는 교회에 잔존해있던 모든 가톨릭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기를 원했다. 특히 많은 청교도들은 주교들 대신에 스코틀랜드에서 시행되고 있던 장로파 교회 행정시스템으로 대체시키고 싶어했다. 분리파로 알려진 다른 신교도들은 영국국교회에서 완전히 떠나고자 했다. 1620년에 아메리카 플리머스에 정착했던 순례자들(pilgrims)이 바로 이 분리파들이었다.

 

노포크 공작(The Duke of Norfolk)

로마가톨릭 교도들도 또한 엘리자베스의 타협안을 거부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여왕에 반역하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1569년에 노포크 공작은 엘리자베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이 일과 다른 가톨릭의 음모들로 인하여 정부는 가톨릭 교도들에 대하여 단호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통치기간 중에 약 200 내지 3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스코틀랜드의 매리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매리여왕으로 알려져 있는 가톨릭교도인 매리 스튜어트로부터도 도전을 받았다. 1567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매리는 퇴위하였고, 신교도인 그녀의 아들이 즉위하여 제임스 6세가 되었다. 매리는 1568년에 영국으로 몸을 피했다. 영국의 헨리 7세의 증손녀인 그녀는 엘리자베스를 승계하여 영국의 왕위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거의 20년 동안 매리는 엘리자베스에 대항하는 일련의 가톨릭의 음모들에 연루되었다. 1586년에 그녀는 여왕을 암살하려는 앤소니 바빙톤(Anthony Babington)의 음모를 후원했다가 이듬해에 참수되었다.

 

필리프 2세

스페인 국왕 필리프 2세도 또한 엘리자베스를 적대시하였다. 영국은 1588년에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이 위협을 제거하였고, 이로 인하여 영국인들의 애국심은 크게 고취되었다.

 

재침례교(Anabaptism)

 

재침례파의 신앙

재침레교도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급진주의자들이다. 재침례파는 특히 서부 독일에서 영향력이 강했지만,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러시아 및 영국 등에서도 나타났다.

재침례교도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다양성이 존재했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란 종교적 귀의를 경험하고 난 후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유아세례를 반대하였다. 많은 재침례교도들이 충성서약과 무기휴대를 반대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16세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종교권력과 정치권력간의 긴밀한 관계를 반대하였다. 대신에 교회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재침례교도들은 1524년에서 1525년간의 독일의 농민반란에 적극 참여했다.

 

재침례파의 지도자들

 

토마스 뮌쩌

독일의 재침례교도인 토마스 뮌쩌는 철저한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기존의 정치적, 사회적 질서의 전복도 주장하였다. 그는 1525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존 오브 라이든(John of Leyden)

1534년 2월부터 1535년 6월까지 네덜란드의 재단사 존 오브 라이든은 서부독일의 베스트팔리아에 있는 뮌스터 시에서 신정정부를 이끌었다. 이 새로운 이상향에서는 모든 재산이 공동소유였다. 신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는다고 주장하며 존 오브 라이든은 일부다처제를 옹호하고 4명의 처를 두었다. 뮌스터시가 가톨릭 주교에 의해 다시 장악되자, 존 오브 라이든은 1536년에 처형당했다.

 

시몬스

토마스 뮌쩌와 존 오브 라이든은 재침례파 운동의 극단을 보여준다. 메노 시몬스(Menno Simons)는 그 견해가 더 온건했다. 로마 가톨릭 신부이자 네덜란드인이었던 시몬스는 1536년에 재침례교도가 되었고, 종교의식과 일반적인 생활에 있어서의 소박함을 설교했다. 그의 가르침은 메노파 운동(Mennonite movement)을 낳았는데, 야만파(Amish)는 메노파의 한 지파다.

 

알비주아 십자군(Croisade des Albigeois)

알비주아 십자군은 알비주아파를 토벌하기 위하여 로마 교회가 파견한 십자군이다. 중세 유럽에서 로마가톨릭은 언제나 이단에 대해 심판과 처벌을 해 왔으나, 12세기 이전까지는 이단으로 규정된 교파가 극소수였고 이에 따른 처벌 역시 개인적이거나 소집단적인 수준이었다. 랑그도크의 카타르파는 대중적인 교파운동 가운데 이단으로 규정된 최초의 집단이었다. 아리우스주의와 마르키온주의 이후 대중적인 세력을 지닌 교파가 이단으로 규정된 것은 900년만의 일이었다. 12세기경부터 남부 프랑스에 카타르파의 교세가 확장되었고 다른 지방으로 영향력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카타르파의 기원은 아라곤왕국이었으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던 랑그도크에서 교세가 확장되었다. 카타르파는 알비파라고도 불렸는데 1176년 알비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랑그도크 지역은 수많은 공국과 백국들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각 도시마다 별도의 법과 재판정을 가지고 있었다. 랑그도크의 교회 법정은 카타르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였으나 알비 십자군이 결성되기까지는 공정한 철학적 논쟁의 대상일 뿐이었다.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르파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애초에 교황의 생각은 적절한 설교자를 보내 그들을 평화적으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저 소수의 카타르파 교도만을 가톨릭으로 돌아서게 했을 뿐이었다. 이런 이면에는 카타르파의 지도자들이 지역 귀족들로부터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지역의 주교들조차 카타르파에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1204년 교황은 특사를 파견하여 카타르파에 동조하는 주교들을 처벌하였으며, 1206년부터 이들을 후원하는 귀족들을 파문하기 시작하였다.

 

1207년 툴루즈의 강력한 백작이었던 툴루즈의 레몽 6세가 파문되었다. 교황은 당시 프랑스의 왕에게 카타르파를 후원하는 귀족들을 토벌하도록 요청하였으나 필리프 2세는 거절하였다. 1208년 레몽 백작은 교황 특사 피에르 드 카스텔뇌를 만났으나, 격렬한 언쟁 끝에 그를 살해하였다. 교황은 진노하였고 결국 살인의 책임을 물어 랑그로크 지역에 대한 십자군 출정을 요청하는 칙서를 선포하였다. 교황은 칙서에서 십자군에게 이단의 근원인 랑그도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토벌하도록 요청하였다. 이 칙서는 북부 프랑스의 귀족들이 갈등 관계에 있던 남부 귀족들을 제거할 명분을 주었다.

알비십자군의 군사작전은 1209년에서 125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 : 초기 진압(1209~1215년)

1209년 1만여 명의 십자군이 리옹에 집결하여 남쪽으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6월이 되자 위기를 느낀 툴루즈의 레몽 6세는 카타르파 토벌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로서 그의 파문은 철회되었다. 십자군은 레몽 로저 드 트랑카발의 영지였던 몽펠리에로 방향을 돌려 알비와 카르카손의 카타르파를 목표로 진군하였다. 레몽 로저는 툴루즈의 레몽 6세와 같이 십자군에 협조하기로 약속하였으나 회담을 취소하고 카르카손으로 달려가 방어 준비를 하였다.

 

몇 군데의 작은 마을을 점령하면서 진군하던 십자군은 7월 21일 베지에에 당도하였다. 십자군은 가톨릭 교도에게는 십자군 참여를, 카타르파에게는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십자군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십자군은 성문을 부수고 베지에로 돌격하여 도시를 함락하였다. 방화와 학살이 벌어졌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교황 특사 아르나우드 아말리크가 교황에게 도시 함락의 경과를 보고한 문서를 포함한 여러 기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희생된 시민이 7천에서 2만명에 이른다. 베지에의 함락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후 여러 도시들은 전투 없이 항복하였다.

 

십자군의 다음 목표는 카르카손이었다. 카르카손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방어에 취약한 도시였고 많은 시민들이 도주하였다. 1209년 8월 1일 십자군이 카르카손에 당도하였고 도시를 포위하였다. 공성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8월 7일 십자군은 도시로 들어가는 물길을 차단하였고 레몽 로저는 협상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포로가 되었다. 8월 15일 도시는 항복하였다. 시민들은 살해당하지는 않았으나 알몸으로 쫓겨났다. 카르카손이 함락되자 다른 도시들은 전투 없이 항복하였고, 몇몇의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십자군은 가을이 지나기 전에 인근 지역을 대부분 무혈 점령하였다.

다음 전투는 1209년 12월 라스투르에서 있었고, 십자군은 겨울 내내 토벌을 계속하여 1210년 3월에는 짦은 공성전을 벌인 끝에 브람을 점령하였다. 1210년 6월에는 방비가 잘된 요새 미네르바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7월 22일 공성전 끝에 미네르마의 주 성곽이 파괴되자 도시는 항복하였다. 카타르파에게는 가톨릭으로 개종할 기회가 주어졌다. 대부분의 카타르파가 개종하였으나 끝내 거부한 140명은 화형에 처해졌다.

 

1211년 툴루즈의 레몽 6세는 다시 파문 당하였으며 십자군은 툴루즈로 향하였다. 3월부터 시작된 공성전은 길게 이어져 9월까지 계속되었고 가을이 끝나기 전 툴루즈는 함락되었다. 한편, 1213년 아라곤왕국의 국왕 페테르 2세가 십자군에 합류하였으나 무레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1215년 랑그로크 지역의 대부분 도시가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두 번째 시기 : 레몽의 반란(1216~1225년)

툴루즈가 함락되자 레몽 6세는 그의 아들 툴루즈의 레몽 7세와 함께 도주하였다. 그들은 지역 도시들의 반란들 주동하며 십자군과 대치하였고, 1218년에는 십자군 사령관 몽포르가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1216년 사망하고 사령관마저 잃게 된 십자군은 랑그도크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세 번째 시기 : 프랑스 국왕의 간섭

1222년 레몽 6세가 사망하자 툴루즈 백작의 지위는 그의 아들 레몽 7세에게 계승되었다. 1223년에는 필리프 2세가 사망하고 루이 8세가 즉위하였다. 국왕으로 즉위한 루이 8세는 랑그도크 지역에 대한 십자군을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하였다.

1225년 11월 레몽 7세는 그의 아버지의 전철을 따라 파문되었다. 루이 8세는 1226년 6월 새롭게 십자군을 결성하여 랑그도크로 진격하였다. 국왕이 직접 진격해 오자 요새화된 도시들이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아비뇽은 항복하지 않았으며 3개월간의 공성전을 치른 9월이 되어서야 항복하였다. 1226년 11월 루이 8세가 사망하자 루이 9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고, 루이 8세의 아내 카스티야의 블랑쉬가 십자군을 통솔하였다. 여왕 블랑쉬는 레몽 7세에게 툴루즈 백작의 지위를 계속 보장할 것을 약속하면서 항복과 십자군 참여를 권유하였다. 레몽 7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229년 프랑스 북부의 모에서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레몽 7세는 협정 직후 결국 붙잡혀 고문당한 후 구속되었다. 이로서 랑그도크 지역은 프랑스 국왕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종교재판

랑그도크에 대한 프랑스 국왕의 점령이 완결된 1229년 11월 툴루즈에서 종교재판이 시작되었다. 한편 몇몇 지역에서는 여전히 카타르파에 대한 토벌이 지속되고 있었다. 새로 즉위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도미니코회에 종교재판의 권한을 일임하였다. 1233년 곳곳에서 카타르파의 저항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랑그도크 전역에서 종교재판이 진행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들이 불구덩이에 산 채로 던져지기도 하였다. 1240년 레몽 로저 드 트랜카발이 항복하였고, 1244년 몽세귀르가 9개월의 공성전 끝에 함락되었고, 1245년 카타르파의 마지막 요새인 퀘리부가 함락되어 카타르파의 저항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후스전쟁

1419∼1434년 기간에 보헤미아의 후스파(派)가 종교상의 주장을 내걸고 독일황제 겸 보헤미아 왕의 군대와 싸운 전쟁으로, 초기의 반란은 1415년 후스가 처형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의 전쟁은 온건한 우트라키스트(대학교수, 귀족, 상층시민)에 의한 프라하교회의 지도권 쟁취를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이어 농민·하층시민을 주체로 한 과격한 타보르파가 프시네츠의 니콜라우스, 얀 지슈카 등에 의해 형성되어, 1419년 프라하시(市)에서 황군(皇軍)과 싸우고, 독일 각지에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마르티누스 5세와 황제 지기스문트는 5차례에 걸쳐(1420∼1431년) 십자군으로 탄압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바젤종교회의는 에겔 화의에서 후스파와의 화의(和議)를 제안하였고, 이후 후스파는 분열을 일으켜 ‘리벤의 싸움’이라 불리는 내전에서 온건파가 승리하였다. 최종적 해결은 1436년에 이그라우 협정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 결과 후스파는 빵과 포도주에 의한 성체배령(聖體拜領)이 인정되어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였다.

 

얀 후스(Jan Hus, 1372~1415년)는 보헤미아 남부 후시네츠 출생으로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1398년 프라하대학교 교수로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1401년 철학부장, 1402∼1403년 학장, 1409년 총장직 등을 지냈다. 한편, 1400년 가톨릭 사제가 되었는데, 프라하대학장 시절 그곳의 베들레헴 성당 주임신부를 겸해 일반 시민들에게도 좋은 강연을 많이 하였다. 종교개혁자로서는 옥스퍼드대학교 교수인 J.위클리프의 설을 받아들여, 친구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예정구령설(豫定救靈說)을 강조하며,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이른바 성직매매(聖職賣買) 등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하였고, 프라하 대주교 즈비녜크의 후원을 얻어 프라하대학교 내에서의 체코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으며, 1406년 체코어의 정자법(正字法)을 확립하였고, 성서와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로마교회는 분열의 혼란 중에 있어서 한동안 후스의 움직임을 묵인하고 있었으나, 1410년 피사종교회의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후스에게 그 동안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고, 후임 교황인 요하네스 23세도 1411년에 후스를 파문하였다. 후스는 여전히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로마교회는 이것을 철저히 단속할 필요를 느끼고 1414년에 콘스탄츠공의회에 후스를 소환, 그의 저서에 있는 이단사상으로 지목되는 부분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기 때문에, 지기스문트 황제의 안전통행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415년 콘스탄츠 교외에서 화형에 처했다.

 

기사전쟁(騎士戰爭, Ritterkrieg)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에 자극 받은 인문주의자 울리히 폰 후텐을 사상적 대변자로 하고, 제국기사(帝國騎士) 프란츠 폰 지킹겐의 지휘 아래 독일 라인지방 기사들이 1522∼1523년에 걸쳐 일으킨 반란이다. 지킹겐은 반란에 실패하여 자기 성으로 후퇴하였으나 포위군의 대포가 성을 분쇄하여 그는 부상 끝에 사망하였다. 후텐 역시 스위스로 망명했다가 수개월 뒤에 죽었다.

 

이 전쟁은 화포(火砲)의 발달에 따른 보병(步兵)의 발전, 제후(諸侯)의 권력 증대, 화폐경제의 발달 등이 소(小)봉건영주인 기사계급을 압박하자 그들이 과거의 영광인 중세제국의 재건을 꿈꾸고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오히려 기사계급의 몰락만을 재촉하였다.

 

카펠전투(Battle of Cappel)

카펠전투라는 이름은 스위스 취리히주(州)와 추크주 사이의 접경지역에 있는 카펠 수도원에서 따온 것으로, 이 전쟁은 1529년과 1531년에 스위스에서 일어난 종교전쟁이다. 1523년 이래 울리히 츠빙글리에 의해서 취리히를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개혁운동 때문에 신·구 양 교도가 대립되어 1529년 5월 카펠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첫 번째 전투는 루체른,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등, 스위스 연방 내 5개 가톨릭 주들이 크리스티안 동맹을 결성하면서 발생했다. 이들 5개주는 취리히가 공동지배지역(common lordships : 스위스 연방에 의해 공동으로 통치되는 영토)에서 프로테스탄트를 확산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취리히가 크리스티안 동맹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양측간의 전투는 미미한 정도에서 그쳤으며 1529년 6월 26일 카펠에서 휴전이 조인되었다. 이어 가톨릭 주들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공동지배지역에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기로 하는 내용의 카펠 화약이 체결되었다. 당시는 취리히를 중심지로 한 신교측이 우세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유리한 화약(和約)이 맺어졌다.

 

그러나 연방 내 5개 가톨릭 주들은 사실상 프로테스탄티즘이 투르가우(공동지배지역 가운데 하나)에서 강요되고 있다고 여겼으며, 이에 따라 1531년 10월 취리히에 갑작스런 선전포고를 했다. 가톨릭교측에서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8,000의 병력으로 이외르크 괼들리의 지휘 아래 황급히 소집된 약 2,000의 취리히 군대를 10월 11일에 카펠에서 무찔렀다. 이 싸움에 종군목사로 참가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도 전사하여 이후 스위스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은 일시 좌절상태에 들어 갔다. 11월 24일 제2차 카펠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은 논란이 되어왔던 공동지배지역 전역에 걸쳐 가톨릭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U.츠빙글리(1484~1531년)는 스위스의 종교개혁가로서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로 일하며 체계적인 성경강해로 명성을 날렸다. 루터의 영향으로 취리히의 종교개혁에 나섰다. 가톨릭을 고수하는 주(州)들과의 전투에 종군목사로 참전했다가 카펠전투에서 전사했다.

 

슈말칼덴전쟁

슈말칼덴동맹(Schmalkaldischer Bund)은 16세기 중부 독일의 슈말칼덴에서 맺은 독일 그리스도교 세력의 방위동맹으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정책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이었다. 1531년 2월 헤센 백작, 작센 선거후(選擧侯)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제후와 마크데부르크, 브레멘 등의 도시 사이에 6년 기한으로 슈말칼덴동맹이 체결되었다.

1535년 다시 10년간 연장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안할트, 포메른, 뷔르템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하노버, 함부르크 등의 도시도 가맹하여 독일 그리스도교 세력의 대부분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에 황제는 종교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슈말칼덴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교측은 대패를 당하고 이 동맹도 해체되었다.

 

위그노전쟁(Huguenots Wars)

16세기 프랑스에서 구교와 신교간의 갈등으로 전개된 1562~1598년간의 전쟁이다. 프랑스에서는 전통적으로 로마가톨릭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남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신교도를 위그노(Huguenot)라 불렀다. 위그노란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칼뱅파(派) 교도에 대한 호칭으로서 16세기 초부터 프랑스에서 확산된 교회개혁운동은 정부의 탄압으로 많은 망명자를 낳았다. 1559년 파리에서 열린 프로테스탄트 교회회의에서 칼뱅파의 의견을 많이 반영한 신앙고백이 성립되었다. 이후 신자들의 수는 증가하였으나 동시에 가톨릭과의 대립도 격화하여 1562년 바시의 학살이 발단이 되어 위그노전쟁이 일어났다. 이들은 빠르게 성장하여 종교적 영역을 넘어 정치세력화 되기 시작함에 따라 구교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이러한 신구교의 정치적 갈등이 프랑스 궁정 내부문제와 국제적 문제와 겹쳐지며 결국에는 프랑스 최초의 종교전쟁인 위그노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신구교 양 진영 모두에게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당시 유럽의 악화된 경제 사정, 전염병, 국제적 갈등이 더해지면서 프랑스 국토를 심각하게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인한 폐해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정치파(politique)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탄생하게 된다. 이들은 종교를 떠나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며 이후 왕권 강화와 질서 회복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는 훗날 프랑스가 영토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절대주의 시대로 접어드는 밑바탕이 된다.

 

위그노전쟁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 구교의 신교탄압은 프랑수아 1세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 앙리 2세로 이어지게 된다. 앙리 2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샤를 9세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어머니이자 앙리 2세의 부인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 1519~1589년)가 섭정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그녀는 프랑스 내부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가톨릭 귀족 가문인 기즈(Les Guise)가(家)와 결탁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는 위그노의 세력권인 나바르의 왕으로 강한 가톨릭 성향의 기즈가(家)와 온건 가톨릭 교도인 몽모랑시 가문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거기에 가톨릭과 위그노들의 대립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나바르(Navarre)는 에스파냐 피레네산맥 서부의 구릉지로써, 스페인어로는 나바라(Navarra)라고 한다. 옛 나바라 왕국의 북부에 해당하며 대부분은 나바라주(州)에 딸린다. 에브로강 유역에 포함되는 남부에는 맥류, 포도, 사탕무 등이 생산되고 북부 삼림지대에서는 바스크인이 임업을 하며, 목축·광업 등도 성하다. 기원전부터 살던 바스코네스인(Vascones)은 로마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게르만 민족(프랑크족, 서고트족)에게도 굴하지 않았고,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에게도 저항하였다. 830년경 왕국이 되고 산체스 3세(1000~1035년) 때에 영토를 확대하여 피레네를 넘어서 프랑스 방면까지 이르렀다. 11세기 말부터 아라곤왕국에 합병되었으나, 1234년부터는 상빠뉴의 띠보가(家)에 딸렸다.

 

1284~1328년까지는 프랑스령이 되고, 그 후 여러 영주의 손을 거쳐 1484년 알브레가(家)의 영토가 되었다. 1512년 에스파냐왕 페르난도가 북부를 빼앗은 후 이 부분(上部 나바라)은 에스파냐령이 되었다. 프랑스쪽의 나바르(下部 나바라)는 나바르 왕 앙리 3세가 1589년 앙리 4세로서 프랑스 왕이 되었을 때 프랑스에 병합되어, 현재 프랑스의 아키텐주(州) 피레네자틀랑티크 데파르트망(Department)이 되어 있다. 에스파냐 왕국 내의 나바라는 그 후에도 지방적 특권을 유지하고, 중세적 신분제의회 코르테스를 개최하고 있었고, 농업적인 면에서는 봉건적인 소생산을 지속하였고 교회도 귀족의 지배권이 강했다. 제1차 카를로스전쟁 때에는 카를로스파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전쟁 종결 후인 1841년 일체의 지방적 특권을 빼앗겼다. 그 후 근대적 발전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카를로스파, 프랑코파의 지반이 되고 있었다. 이곳에는 아직 바스크어가 남아 있다.

 

이 혼란의 와중 반신교주의(反新敎主義) 성향이 강했던 기즈 공작의 군대가 먼저 1562년 3월 1일 바시의 거리를 지나면서 창고에 모여서 예배 중인 신교도들을 습격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8차에 걸친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가톨릭과 위그노들은 서로를 이단시하고 폭력을 가했다. 3차전까지 치른 뒤 양측은 평화협상을 벌여 합의를 이루었으나 정부가 위그노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함에 따라 격렬한 갈등은 다시 시작되었다. 결국 1572년 8월 24일 성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의 축제일(그날 카트린의 딸과 나바르 왕의 결혼식 열림)에 기즈 공작과 카트린이 결탁하여 축제에 참석한 위그노 지도자들과 위그노들을 대량 학살(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한다. 이에 격분한 위그노들은 전국에서 들고 일어났고 신교와 구교의 격렬한 싸움은 재개되었다.

 

하지만 샤를 9세가 사망하고 신교에 대해 다소 너그러웠던 앙리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후 앙리 3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위그노의 지도자격인 나바르의 왕이 앙리 4세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신교와 구교의 갈등을 해결하고 혼란한 사태를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앙리 4세는 1592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화해를 도모코자 하였으며 1598년에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함으로써 36년간을 끌어오던 위그노전쟁을 종결시켰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에스파냐의 속령(屬領)인 네덜란드의 홀란트, 위트레흐트 등 북부 7주가 1572∼1609년에 본국인 에스파냐와의 항쟁에서 독립을 쟁취한 전쟁이다. 중세 이후 네덜란드 지방은 모직물 공업과 중계무역으로 번영하여 도시는 광범한 자치권을 소유하며 자유의 바람이 넘쳐 있었고, 종교개혁 이후에는 북부 여러 주에 칼뱅파(派)의 신교도가 급증하였다. 1556년 에스파냐 왕위에 오른 펠리프 2세가 가톨릭교회의 수호자임을 호언하면서 네덜란드 지방에 대한 신교파의 탄압을 강행하였다. 또한 도시에 대해 중세(重稅)를 부과하고 상업을 제한하며 자치권을 박탈하면서 본국의 재정수입의 증대만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학정에 대항하여 북부는 물론 남부 여러 주의 가톨릭교를 신봉하는 시민계급까지 참여한 항거운동이 1566년부터 전개되었다. 이때의 지도자급은 봉건적 대귀족 출신인 에흐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 등이었다.

 

이럴 즈음 군사적 독재권을 수임 받고 정예병 1만명을 인솔하여 1567년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부임해온 알바 공작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잔악한 탄압을 가하였다. 소위 ‘혈(血)의 평의회(評議會)’라는 심문소(審問所)를 개설하여 지도자인 에흐몬트와 호른 등을 비롯한 8,000명 이상을 종교재판(宗敎裁判)으로 처단하였다. 또 알바공은 상류귀족과 부유한 시민계급의 재산을 몰수하고 무역에 중세를 부과함으로써 상업활동이 마비되어, 매뉴팩처(자본주의 생산의 초기 발전과정에서 성립한 과도적 경영양식인 공장제 수공업)의 기능은 정지되고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알바공의 이러한 공포정치(恐怖政治)로 시민들은 속속 영국, 독일 등으로 망명하였는데, 그 수가 10만을 헤아렸다.

 

1572년에 들어서면서 네덜란드인(人)의 반항운동은 독립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에스파냐의 지배층으로부터 고이젠(거지들)이라 불린 신교도(칼뱅파)가 중심이 되어 처음에는 해상에서 에스파냐의 은선단(銀船團)을 습격하더니, 급기야는 오라녜공 빌럼을 지도자로 하여 다수의 귀족과 상·공업자, 농민들이 합세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576년에는 남북 여러 주가 브뤼셀동맹을 성립시킴으로써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본래부터 종교적으로 대립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이해관계를 달리한 남·북 양주의 불일치(不一致)는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여기에다 새로 부임해 온 총독 파르마공(公)의 이간책이 주효하여 1578년 남부는 에스파냐에게 굴복하였다. 그러나 홀란트 등의 북부 7주는 1579년 위트레흐트동맹을 결성하여 항전을 계속하면서, 1581년 7월 독립을 선언하고 윌리엄을 초대 총독으로 하는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을 설립하였다.

 

1584년 윌리엄이 가톨릭교도에게 암살된 이후에도 항전을 계속하던 중,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격파되어 국제적 지위가 하락되고 재정적으로 궁핍한 데다 펠리프 2세가 사망함으로써(1598년),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은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펠리프 3세가 즉위한 이후 1609년 에스파냐와 12년간의 휴전조약(休戰條約)을 체결하였다. 휴전이 만료된 이후 전쟁은 재개되었으나,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서 국제적 승인을 얻음으로써 독립전쟁도 종식되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영국의 청교도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의 대혁명에 선행한 시민혁명(市民革命)의 승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영국과 에스파냐의 항쟁

16세기 후반 영국과 에스파냐의 항쟁도 종교전쟁에 포함된다. 이 전쟁은 메리 1세의 남편으로서 영국에 구교(舊敎)의 부활을 기도한 펠리프 2세에 대해 엘리자베스 1세가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출병(出兵)해서 신교도의 독립군을 원조하였고, 다시 펠리프 2세가 스코틀랜드 여왕 M.스튜어트를 영국 여왕으로 추대하여 영국에 구교를 뿌리 박으려 하였기 때문에 영국 국민이 이에 대항하여 무적함대를 격파해서 그 의도를 분쇄한 것이다.

 

무적함대(無敵艦隊, Spanish Armada)는 에스파냐의 펠리프 2세가 편성한 대함대였다.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결과 카를로스 1세, 펠리프 2세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펠리프 2세의 후반기에는 해외무역에서 영국이 대두하고, 국내의 정치와 경제도 쇠퇴하였다. 왕은 영국을 원정(遠征)하기 위하여 전함 127척, 수병 8,000, 육군 1만 9000, 대포 2,000을 가진 대함대를 만들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588년 5월 28일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한 대함대는 네덜란드 육군 1만 8000과 합류하여 영국 본토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하워드경(卿)을 사령관으로 하고, 호킨스, 드레이크 등의 명장을 배치하여, 전함 80척과 병력 8,000으로 싸우게 하였다. 영국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기동력이 뛰어나고 선원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무적함대는 플리머스 연해에서 영국함대를 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8월 7일 칼레 연해에서 영국군의 화공(火攻)에 의한 야습으로 타격을 입었으며, 그라블리느 해전에서 결정적 타격을 받아 54척만 본국으로 돌아갔다. 무적함대의 패배는 에스파냐의 해상무역권을 영국에 넘겨주고 네덜란드가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30년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년 사이의 30년간에 독일을 무대로 신교와 구교 간에 벌어진 최대의 종교전쟁이며, 최후의 종교전쟁으로 그 기간은 대체로 4기(期)로 구분되는데 전반의 2기는 종교적 색채가 짙고 후반의 2기는 정치적 색채가 짙다.

 

① 제1기(1618∼1620년) : 독일의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양 교도 간의 반목은 1555년에 있었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 이후에도 그 응어리가 가시지 않아, 17세기 초 양파의 제후(諸侯)들은 각기 신교 연합과 가톨릭교 연맹을 결성해서 대립하였다. 이와 같은 정황 속에서 1617년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라 가톨릭 절대신앙을 강요하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619년 페르디난트 2세가 황제가 되자 보헤미아인들은 팔츠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받들고 이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1620년 바이서베르크 싸움에서 패배하여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탄압 받기 시작하였다.

 

② 제2기(1625∼1629년) : 진작부터 독일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이를 기화로 영국 및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신교도군의 총수로서 독일에 침입하였으나 황제군의 장군 발렌슈타인과 틸리에게 패배하여 1629년 양측은 뤼베크 조약으로 화해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는 배상령(賠償令)을 내려 종교제후(宗敎諸侯)의 영지(領地) 회복과 루터파(派)의 공인(公認)을 선포하였다.

 

③ 제3기(1630∼1635년) : 그러나 이듬해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가 신교를 옹호하고 프랑스의 후원을 얻어 다시 독일에 침입하였다. 스웨덴군은 황제군을 라이프치히전투에서 격파하고 틸리를 전사시켰으나 1632년 뤼첸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도 전사하였다. 이후에도 스웨덴군은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패배를 거듭하여 1634년 황제군 사령관 발렌슈타인이 모반혐의로 암살되자 1635년 황제와 그리스도교군의 작센 선제후 사이에 프라하 화의가 성립되었다.

 

④ 제4기(1635∼1648년) : 프라하 화의 직후인 1635년에, 1631년 이래 배후에서 신교 세력을 밀었던 프랑스가 전면에 나서서 독일에 출병하고 에스파냐에도 선전 포고하며, 스웨덴과는 연합전선을 폈다. 전쟁은 일진일퇴의 전황 속에 끌어가다가 1637년 황제위를 계승한 페르디난트 3세는 전세의 불리와 국내 제후들이 오랜 전쟁으로 시달려 1641년 종전을 제의하였다. 1644년부터 열린 강화회의는 지지부진하다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성립되어 30년간의 종교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써 독일 제후국 내의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는 각각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였다

 

|작성자 먼 산

 

 

 

 

위 그림은 "파리의 유혈 결혼식"의 결과로도 알려졌는데, 신 · 구교 갈등 봉합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신교 그러니까 위그노교도들이 할거하는 나바르(프랑스 남서부 스페인 접경지역)의 왕을 카트린 왕후가 자신의 막내딸과 결혼시키는 행사를 계기로, 위그노교도 1천 명을 하객으로 초청해놓고, 그들의 리더인 콜리니卿을 암살하고 이어서 이틀후인 1572.8.23~24야밤에 구교도 강성파인 기즈公이 카트린 왕후섭정의 특명 및 샤를9세의 묵인 하에 결사대를 조직해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무차별 살육을 한 사건이었다. 영화 <여왕 마고>(1994)가 이를 잘 보여주고, "삼총사"로 잘 알려진 알렉상드르 뒤마가 작품[La Reine Margot](1845)을 써낸 게 원작이었다.

 

유럽 내에서 종교와 정치의 중심이 된 프랑스 .....

 

서양 역사 초기에서의 프랑스 영토는 로마제국의 변방이었다. 따라서 제우스를 모시고 신전의 신탁을 받으면서 정통성을 "사칭"한 로마황제들로서는 특히 갈리아족들이, 중국인들이 보는 오랑케에 불과했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도 보듯, 프랑크인들은 개화와 지배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슈바르츠(검은 숲)" 지대라 하여 라인 강 동쪽과 북구야말로 문자 그대로 비문명권인데, 칭키스칸을 위시한 중앙아시아 기마민족들이 "유럽의 오랑케"를 못살게 구니, 이 일대의 게르만 민족이 살기 위해서라도 로마 제국의 영토를 먹어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이와 같은 게르만 야만족들은 그 뿌리가 하나지만, 켈트족, 프랑크족, 고트족, 반달족 등 이름만 달리하고 나름대로의 토속신앙으로 로마제국의 다신교신앙을 좀 먹어 들어갔다.<퍼옴>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던 전쟁을 끝내기 위한 강화 회의 중인 1648년에 30년

전쟁의 진원지였던 프라하 가 스웨덴군에 점령되고 프랑스가

황제군과 에스파냐 군대에 승리 를 거두면서 지루했던 협상이 급진전 되었다.

 

 

 

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종교전쟁 이라지만 승전국에게 전리품이 배분 되어야 하니

전후 프랑스는 알자스와 메스 등을 얻어 라인강 유역까지 국경을 넓혔으며 스웨덴은

포메른과 브레멘대주교령 등의 영토를 얻어 발틱해와 북해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제국 안에서는 브란덴부르크 가 동포메른, 마크데부르크 대주교령 등의 영유를 인정받고,

바이에른과 작센 등도 약간의 영토와 선제후를 인정받으며 새로운 열강으로 떠오른다.

 

 

 

스위스와 네덜란드 가 독립국 지위를 승인 받았으며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가

정식으로 승인되고 칼뱅파 에게도 루터파와 동등한 권리 가 주어졌으며....

농노들이 영주와 종교가 다를 경우에도 종교 행사에 참가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독일의 영방 제후와 제국도시들에 “황제와 제국을 적대하지 않는 한에서” 외국과 동맹할

권리가 인정 되었으니 제후들에게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 이 인정된 것이다.

 

 

 

쾰른은 베스트팔렌주에 속하는데 그 이름을 딴 “베스트팔렌 조약”은

독일에서 벌어진 가톨릭과 신교 간에 30년 종교전쟁 을 끝마치기 위해

1648년에 베스트팔렌에서 체결된 평화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이 붕괴 됩니다.

 

1624년의 상태로 되돌리기로 결정했으며 베스트팔렌 조약 에

대한 반대는 무효라고 선언하여 독일 문제에 교황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유럽의 국경선 이 확정되었다!

< https://cafe.daum.net/bpguide/FbqL/10738?svc=cafeapi>


 

30년 전쟁 (1618 - 1648)

 

 

로마 카톨릭 교회 지지 국가들과 개신교 지지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종교 전쟁

- 인류 전쟁사에거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 사망자수 800만명

 

진행

신성 로마 제국 지지 제후국 <-> 반대하는 제후국 다툼

강대국 개입

종교적 전쟁 - 정치적 대결 구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로

 

전쟁의 여파

독일 전역 - 기근과 질병으로 ㅏ괴

보헤미아 왕국/남부 네덜란드/독일/이탈리아 - > 인구 급감

용병과 병사들

마을 약탈 - 점령당한 영토 거주민들의 생활고 심해지고

 

신흥 강대국의 등장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랑스, 스웨덴 - 전쟁 이후 상당한 영토 보유

신성 로마 제국- 17세기 이후 로마 제국의 권위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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