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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회사

종교개혁의 출발 신호 -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by 은총가득 2021. 7. 4.

종교개혁의 출발 신호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출생 사망 국적 대표작

 1483년
 1546년
 독일
《식탁 담화(Tischreden)》
면죄부 판매 등 교황청의 부패를 보고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문 앞에 이를 반박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여 교황청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교황에서 파문당하고 사형의 위기에 처했으나 지지자들로 인해 사면받고 이후 은거하며 라틴어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교회를 재건하고 루터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1546년 여행 도중 숨졌다.

 

종교개혁이 전 세계에 남긴 역사적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이 개혁의 첫머리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마르틴 루터이다.

후세 사학자들 중에는 루터에게 종교개혁의 모든 공로를 몰아주는 데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종교개혁의 출발 신호를 알린 인물일 뿐 그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종교개혁의 욕구는 충분히 숙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 세계를 지배하던 보이지 않는 권력인 '가톨릭 교회'는 왜 종교적인 개혁을 강력하게 요구받게 되었을까? 그리고 종교개혁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마르틴 루터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6세기가 되자 중세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중세 사회를 떠받치는 세 가지 버팀목이었던 봉건제도와 길드, 장원경제 등이 급격히 해체되면서 자본주의 경제가 출현했고, 이런 사회·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교회 역시 변화해야만 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교회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런 쇠퇴와 비례하여 교회의 타락상들이 속속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상은 극에 달해 자리를 지키지 않는 부재 성직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름만 성직자 대열에 끼워놓고 자신의 잇속만 챙기면서 성직자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마저 외면하는 사람들의 증가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불신을 낳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게다가 교황청이 성 베드로 성당의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성직(聖職)을 판매한 일 등은 교회 성직자들에 대한 불신을 부추겨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드높였다.

 

정치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각 나라별로 국가적인 통일사업이 완성되면서 국민들은 강력한 국민국가를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만은 국가의 권한 아래 포섭되지 않은 채 여전히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군주들은 통일국가를 완성하는 데 있어 교회 세력을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교회에 위기 상황이 닥쳐올 때도 이를 방관하여 간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교회를 자신의 권한 아래 두고자 하는 군주들이 많았다.

 

게다가 장원이나 길드가 붕괴되면서 개인주의적인 자본경제가 성장했고, 이에 따라 막대한 영토와 부를 축적하고 있는 교회나 수도원을 해체하여 상업적인 생산활동에 투입하고자 하는 바람이 일었다. 이들 세력 역시 교회의 붕괴를 은근히 희망하고 있는 터였으므로 교회의 위기 상황을 도와줄 마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충분히 성숙했을 때 마침내 깃발을 들어 올린 사람이 있었다.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였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 작센안할트 주의 아인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부였지만 교육열이 대단히 높아서 그는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1502년 그는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졸업해서 부모의 꿈을 이루어주었다. 그러나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 한스의 소망을 뒤로 하고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에 들어갔다.

 

 

 

면죄부를 판매하는 성직자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가 왜 갑작스럽게 종교에 귀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쓴 《식탁 담화(Tischreden)》에서 그 이유를 약간 밝혀놓았다. 1507년 7월 2일, 고향 집에 다녀오던 그는 슈토테른하임 근처에서 천둥 번개에 놀라 "성 안나여, 저를 도우시면 수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외쳤다. 무사히 학교로 돌아온 그는 당시의 말을 지키기 위해 수사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루터는 1506년 수사 서원을 하고, 1507년 4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507년 5월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그 후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들어가 1512년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성직자가 된 루터는 행복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로마를 여행하면서 본 종교의 부패는 이미 그 도를 넘어서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면죄부 판매였다. 면죄부란 자신의 죄를 탕감받는 일종의 증명서로 헌금을 통해 이를 구입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즉, 헌금을 통한 구원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선행(善行), 즉 단식이나 순례, 면죄부 구입 등의 선행을 통해 구원을 받으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오직 진실한 신앙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오직 깊은 신앙심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으며 이 은총만이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아무리 다른 선행을 한다 해도 독실한 신앙심이 없으면 파멸로부터 구원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중간자로서의 교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논리대로라면 교황청을 비롯한 모든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문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신념에 젖어 있던 루터에게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는 당연히 못마땅한 처사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자신의 불만사항을 조목조목 쓴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문 앞에 붙였다. 그는 이 문서에서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부당성과 현재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부패상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아울러 로마 교황의 권위와 교황청의 권위 역시 부정했다. 그는 이 문서와 동일한 내용을 교황청의 마인츠 대주교에게 보내는 한편 독일어로 번역한 후 대량 인쇄하여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배포했다.

 

이 문건을 본 민중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면죄부 판매율은 급격히 떨어졌고 루터는 일시에 독일 민중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올랐다. 예상대로 그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혹독한 추궁과 공격을 받았다. 특히 루터 자신이 교회 및 정통 교리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여 요한 에크와의 공개토론에서 패배함으로써 한때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은퇴하여 일 년간 공부에 정진한 후 1520년에 종교개혁에 관한 세 가지 중요 문서를 발표했다. 〈그리스도교 국가의 개신에 관해 독일의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빌론 유폐(幽閉)〉 〈그리스도교 신도의 자유〉가 그것이다.

첫 번째로 발표된 〈그리스도교 국가의 개신에 관해 독일의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그는 귀족층의 교회개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두 번째 글인 〈교회의 바빌론 유폐〉에서는 교회의 성사제도에 대한 비판글을 수록했다. 그는 영세(領洗)와 성례(聖禮)만을 인정하고 그 외의 모든 성사제도를 부정했다. 세 번째 글인 〈그리스도교 신도의 자유〉에서는 루터가 새롭게 제시하는 교리들을 일반 대중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간결하게 설명해놓았다.

 

이 세 건의 문서가 다시 발표되자 로마 교황청은 즉시 루터의 의견에 반박하는 문서를 발표했다. 아울러 교황청은 루터를 정식으로 파문하는 한편 그를 '종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개최된 보름스 국회'로 소환했다. 그의 모든 책은 금서가 되었고 그는 사형의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루터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거나 바꾸지 않았다.

로마 교황청은 루터를 사형시키고자 했으나 독일의 왕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했다. 이후 루터는 간신히 사면을 받았으나 세상의 눈을 피해 은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은거하는 동안 어려운 문자로 되어 있는 《신약성서》를 쉬운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다. 일반인들이 교회 목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성서를 읽음으로써 진정한 신앙에 눈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명성은 점점 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1522년 루터는 다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신념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중심으로 루터파를 조직하여 새로운 종교상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아울러 기존 교회의 낡고 모순적인 규칙들을 깨고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어갔다. 이 중에는 성직자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제도를 반대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 금혼 규정을 깨고 수녀와 혼인하여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루터 성경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루터는 교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점에서 종교개혁의 첫 깃발을 들어 올린 인물로 평가되며, 그와 때를 같이하여 혹은 그 후에 독일 이외의 국가에서 일어난 모든 종교개혁 운동의 기본 사례를 제시했다.

 

 

 

발트부르크에 있는 루터가 성서를 번역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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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개혁의 깃발을 들었을 당시 이미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더라도 그가 개혁의 첫 총성을 울린 사실만큼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