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를 인정한 최초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스도교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누스로 부르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콘스탄티노 대제(Sanctus Constantinus Magna)로 부른다. 그의 개종으로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했으며, 이로 인해 형성된 그리스도교 문화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272년에 로마 제국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지금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나이수스에서 육군 장교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시의 전형적인 군사 지배 계급이었다. 293년 그의 아버지는 사두정치체제에서 두 명의 부황제(caesa)r 중 한 명으로 임명되어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되었다. 그러고나서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로마 황제 막시미아누스 아래에 들어가 그의 딸 테오도라와 재혼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휘하로 들어가 니코메디아에서 복무했다.
305년 두 명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은퇴하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각각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부황제로는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가 추대되었다. 사실상 후계자인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권력에서 소외된 셈이었는데, 이는 갈레리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압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갈레리우스의 궁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무렵, 다행히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아들을 브리타니아로 원정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305년 여름, 부자는 갈리아에서 재회했다.
일 년 후인 306년 7월, 콘스탄티우스가 에보라쿰(지금의 요크)에서 병사하며 아들을 황제로 선언했다.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즉각 이를 받아들였고,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에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 그의 승계를 인정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는 것은 인정하나 지위는 부황제로 하고, 황제 자리에는 세베루스를 임명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와 함께 정복했던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갈리아, 그리고 게르마니아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으나 정복지에서는 그의 승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늘려 부족들의 반란이 발발하면 즉각 진압하고, 아버지의 명성을 이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또한 갈리아 지방의 재건 사업을 추진하여 건물을 새로 짓고, 방어용 성벽을 쌓고, 성문을 만들고, 자신이 머무를 궁전을 지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던 갈레리우스와 달리 그리스도교에 관대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로마의 국내 정세는 사두정치의 한계를 드러내며 복잡한 내전 상황으로 빠져들어 갔다. 307년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아버지인 막시미아누스가 이를 도왔다. 갈레리우스는 서로마 황제 세베루스를 보내 이를 진압했지만 선제인 막시미아누스의 군대에 궤멸당하고 세베루스는 감금되었다. 그리고 막시미아누스는 아들인 막센티우스를 돕고, 딸 파우스타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콘스탄티누스의 황제 지위를 승인하기로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막센티우스의 싸움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고 대신 프랑크 족 정복에 매진했다.
308년,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참모 중 한 사람인 리키니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기로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와 동로마의 부황제였던 막시미누스가 이 조치에 불만을 품었다. 결국 310년 봄, 갈레리우스는 이 두 사람을 황제로 선언했다.
310년, 선제 막시미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가 프랑크 족 원정을 하는 사이 그의 영토를 공격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콘스탄티누스의 군대에 밀려 패하고 자결을 강요당했다. 이 일로 콘스탄티누스는 더 이상 사두정치체제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으로 권력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두정치가 갖고 있던 종교적 이데올로기, 즉 제우스와 헤라클레스로 대변되는 공동 섭정 이념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
위로부터 차례로 그리스도의 꿈을 꾸는 대제, 밀비우스 다리에서의 싸움, 황제 즉위식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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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년, 갈레리우스가 죽고 리키니우스가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로마는 완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소아시아에서는 막시미누스가,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막센티우스가 각기 자신의 영지를 차지하고 앉아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 막센티우스는 먼저 아버지를 죽인 이유를 들어 콘스탄티누스를 공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막센티우스는 막시미누스와 동맹을 맺고 전투가 벌어졌다. 수적으로 불리했지만 뛰어난 전술가였던 콘스탄티누스의 군대에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밀비우스 다리 앞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전투는 콘스탄티누스의 대승리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마침내 로마에 입성했다. 그는 정부체제를 개편하고 막센티우스가 정치적 유배를 보냈거나 감옥에 가두어놓았던 반대자들도 모두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막센티우스의 지지자들도 용서해주었다. 그리고 "이 표식 아래 로마를 독재자의 손에서 구해냈다"는 군기를 교회당에 걸어 '로마 제국의 해방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동로마는 막시미누스의 잔존 세력을 물리친 리키니우스가 차지했다.
313년, 그는 리키니우스와 메디올라눔(지금의 밀라노)에서 만나 밀라노 칙령을 선포했다.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풀고, 이전에 그리스도교도들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모두 되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320년 리키니우스가 밀라노 칙령을 깨뜨리고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함으로써 평화가 깨졌다.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와 크리소폴로스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리키니우스와 그의 아들을 처형하고 로마 제국 유일의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세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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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는 황제로 등극하고 나서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고, 제국의 권력과 부와 문화의 중심지를 콘스탄티노플로 이동시켰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자신의 도시로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원로원과 로마와 같은 공공건물을 짓는 등 '제2의 로마'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죽기 바로 직전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337년 5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콘스탄티누스의 치세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비록 311년 선제 갈레리우스가 이미 밀라노 칙령과 비슷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했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적극적인 그리스도교 진흥책으로 로마에서 그리스도교의 위상은 새로이 정립되었고, 이후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부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니케아 공의회
Councils of Nicaea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고대 도시 니케아(지금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열린 그리스도교 교회의 첫 번째 에큐메니컬 공의회(Ecumenical movement, 그리스도교의 각 교파들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교류와 협력을 할 것을 주장하는 운동)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하여 개회식을 주재했으며 논의에도 참석했다.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 제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때문에 동방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이 공의회에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다.
회의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궁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어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약 두 달간 계속되었고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이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정죄하고, 일부 참석자들의 망설임이 있었으나 성자가 성부와 완전히 동등함을 나타내기 위해 성서에 없는 단어 '호무시오스('본질상 같은'이라는 뜻)'를 니케아 신경에 포함시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리우스를 추방했는데, 이는 교회와 국가의 공고한 유대와 교회의 일에 세속의 후원이 중요함을 뚜렷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또한 부활절 날짜를 통일하려 했으며 성직자의 직위, 공적인 참회, 분열자들과 이단자들의 재입회, 예배의식의 규정 등을 논의했다. 또한 20가지 교회법을 반포했는데, 그 가운데는 주교 서품 절차, 성직자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에 대한 정죄, 주교와 사제·부제가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 등이 있다.
니케아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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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의 비잔틴 역사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에 따르면 이 공의회에서 성직자의 독신을 규정하는 교회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일부의 반대로 실패했다고 한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이 각기 자기 지역에서 자신들의 관구가 다른 주교의 관구보다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 글김상엽
-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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