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오경 (Samaritan Pentateuch) feat. 수가성 여인
사마리아 오경 (Samaritan Pentateuch) feat. 수가성 여인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짧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0)
그 대화의 내용은 매우 간결하지만 그 안에는 극과 극으로 다른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신앙관이 담겨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찾아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솔로몬이 세운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대하 3:1이하).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심에서 예배와 제의를 드렸다면, 예루살렘의 시온 산 위에 성전이 세워졌듯이 그 산 위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그리심 산 위에 성전을 짓고 제의를 드린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요세푸스(37-약100CE)라는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는 그리심 산의 성전이 알렉산더 대왕시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그리심 산 위에 세워진 성전의 연대를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심 산의 성전 터로 추정되는 지역을 20년 넘게 발굴하면서 1만7천 개 이상의 금화와 은화들을 발굴했고, 수천 점의 토기와 양, 염소, 소, 비둘기의 뼈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성전 터를 발견하였는데요. 그 중 오래된 성전은 기원전 5세기, 그러니까 요세푸스가 말한 때 보다 대략 1세기 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참조. 다른 성전은 기원전 2세기에 건축되었음). 이 시기는 에스라-느헤미야와 동시대입니다.
느헤미야가 유다로 와서 대략 12년을 있었습니다(445-433 BCE). 그리고는 유다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쌓고 잊고 살았던 율법을 회복시켰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였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비운 사이 느헤미야의 모든 수고는 헛것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유다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제의를 돕는 레위인들에게 그들이 받아야할 몫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생활고를 겪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 흩어져 버렸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런 유다의 혼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유다에 비해서 그 제의나 율법이 체계적이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것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포로로 잡혀갔다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온 유다의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인들과 교류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공을 들였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율법과 예배의 체계를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무던히 애썼습니다.
그러던 중 느헤미야의 공백 시기 제대로 자신들의 몫을 받지 못하여 살 길을 찾아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받아들여 그리심 산에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을 사마리아의 가장 거룩한 성소로 삼은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성전과 그 주변의 마을들의 규모를 토대로 그리심 산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주거 지역과 제의 구역의 면적이 대략 400두남(약 12만평)이나 되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어마어마한 수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이주한 것이지요.
사마리아의 제의는 급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마리아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 못지 않은 권위를 가진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세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무척 뿌듯해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율법을 고쳐썼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읽는 성경인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이 탄생합니다. 사마리아 오경과 유대인들의 성경은 매우 소소한 부분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그 작은 차이가 엄청난 신학적인 대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십계명을 신앙의 토대로 삼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보는 성경과 그 내용이 동일한 우리 말 성경의 십계명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출애굽기 20:17 뒤에 내용을 첨가하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를 네가 유업으로 받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날에 너는 큰 돌들을 세우고 회반죽을 바르라. 그 위에 이 율법의 말들을 기록하라. 그리고 요단 강을 건너고 오늘날 내가 네가 명령한 이 돌들을 그리심 산에 세우라. 그리고 그곳에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위한 돌제단을 만들어라. ׳제단 위에는 철을 두르지 말아라.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을 온전히 돌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난 다음 그 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라. 너는 제물을 드리고 그 곳에서 제물을 먹어야한다. 너는 요단 건너편 해지는 곳 길갈 앞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는 땅 세겜 앞의 모레 상수리 나무가 있는 그 산에서 여호와 너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요한복음 4:20에 소개된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은 그 여인이 들었던 바로 이 사마리아 오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 BIBLIA>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Torah은 사마리아인들이 경전으로 여기는 구약성서 오경을 말한다. 사마리아인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가 침입하여 북왕조인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후 이들 이방인과 결합하면서 생긴 혼혈인으로, 이 지역은 자연스레 신앙이 변화하여 일종의 혼합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오경을 뺀 다른 구약성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
사마리아 오경은 단편까지 합쳐서 150여개의 두루마리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9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대부분은 14~15세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특히 이중에서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꼽히는 것은 세겜의 그리짐산 기슭에 위치한 사마리아 회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아론의 증손자 이름을 붙여 아비샤 두루마리로 불린다고 한다.
오경 두루마리 Samaritan Torah Scrol
사마리아 오경은 기원전 108년에 하스모네 왕조의 히르카누스 왕이 그리짐산의 경신례 성전을 파괴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오경과 신학적 차이를 반영하는 독자적 경전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사마리아 오경만의 독특한 히브리어 서체가 쿰란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경에 기록된 소위 고어체 히브리어 두루마리들과 유사하다는 점을 보면 당시부터 사마리아 오경이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Samaritan Hebrew text
사마리아 오경은 약 1,900군데에서 마소라본보다 70인역과 유사한 면을 보여 많은 학자들은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이 같은 히브리어 성서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사마리아 오경은 마소라본과 주로 철자 등에서 6천여 곳의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복수형인 엘로힘 대신 단수형 엘라를 사용하거나 의인화한 표현들을 고쳐 절대적 유일신론을 강조한 것이며,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조상들의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들의 인간적 약점들이 언급된 구절들을 고치기도 했다. 한편 하느님이 지정한 거룩한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세겜의 그리짐산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십계명 끝부분에 그리짐산에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별도의 규정을 첨가했다.
사마리아 오경 Samaritan Torah
그리짐 산 Mount Gerizim
'2007 Samaritan Torah scroll on Mount Gerizim
사마리아 알파벳 Samaritan Alphabet
북이스라엘은 주전 721년 호세아왕을 마지막으로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다. 왕국의 멸망이후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시리아의 민족 혼합정책에 의해 앗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는데 이 곳에서 그들은 혼혈이 되어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는 정통적인 신앙에서 멀어져 갔다. 이후 모진 고난속에서도 순수한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유다사람들에 의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조소와 비난을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면 이후의 역사에서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후예인 사마리아 사람들 중, 그래도 신앙을 지키며 야웨를 섬기던 사람들이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보았던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이 39권의 ‘정경(Canon)’인지 의문이 들게 된다. 대답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멸망이후 신앙과 순수한 핏줄을 지켰던 유다왕국 중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멸망하기 이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오경만을 자신의 정경으로 삼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 성경을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마리아 오경은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우리가 가진 성경과 유사하지만 그들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의도적으로 성경을 수정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 먼저 사마리아인의 분파주의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문제로 예루살렘보다는 사마리아인들의 중심지인 세겜이 유일하고 적절한 예배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명기에서 중앙성소를 강조하며 훗날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하는 표현인 “여호와께서 택하실 장소”(the place which YHWH will choose)를 “여호와께서 택하셨던 장소”(the place which YHWH has chosen)로 수정하여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의 성소가 중앙성소가 되었다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장소도 히브리어 성경 본문의 예루살렘의 모리아(Moriah) 대신 세겜 근처의 모레(Moreh)로 변경시켜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신앙의 뿌리가 자신들 위에 있음을 나타내려 하였다. 그리고 사마리아 오경은 그리심산 위에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출애굽기 20장17절 다음에 첨가시켰고, 신명기 27장4절에 언급한 야웨를 위해 돌단을 쌓은 곳도 에발산 대신 그리심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수정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환경과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성경을 수정한 경우는 그 어떤 경우라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한 예로 유대인들은 성경을 필사할 경우 오자라 할지라도 본문에는 오자를 그대로 옮겨 적고 읽을 때는 수정된 형태로 읽었는데 이는 의도적인 수정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이러한 사마리아인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웨스트 뱅크 지역인 나불로스(세겜)의 그리심산 부분에는 2,500년에 걸쳐 자신들이 요셉의 직계 후손(에브라임, 므낫세 지파)임을 주장하며 그들만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7백여 명의 사마리아인의 후예를 만날 수 있다.<CKDRHFTKS>
사마리아인들이 유대교에서 완전히 갈라져 사마리아 오경을 따로 갖게 된 것은 기원전 4세기이다. 현존하는 유대인의 오경(Torah, 율법서)과 사마리아인의 오경(the Samaritan Pentateuch) 사이에는 약 6,000여 곳에 차이가 있다. 그 차이들의 대부분은 사소한 문법적 요소나 철자법의 차이가 대부분이지만 간혹 주석적 첨가나 삭제, 내용의 차이 등도 있다.
성서학계에서는, 유대인의 오경이 역사적으로 많이 변천되고 수정 가감이 여러 번 가해진 것에 비해 유폐된 소집단이 전승시킨 사마리아 오경의 본문은 본문상의 변화를 비교적 적게 겪어왔다고 평가하여, 귀중한 자료로 취급하고 있다.
더욱이 마소라 본문과 비교할 때 나타나는6000여 곳의 이독(異讀) 중 1600여 곳에서 칠십인역과 일치하고, 특히 기원전 2세기의 사해사본과도 많은 곳에서 일치하기 때문에, 사마리아 오경은 본문의 신빙성을 크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물론 사마리아 오경 안에도 사마리아인들이 교리적 이유에서 본문을 수정한 예가 보인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20장 17절과 신명기 5장 21절 등의 십계명 끝에다가 각각 신명기 11장 29절의 내용을 삽입시켜 그리심산이 야훼의 성산(聖山)임을 나타내려 한 것, 또는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주께서 택하실 그 곳”(신12:11,14,18,21,26 등)이라는 미완료 형태를“주께서 택하신 그 곳”이라고 완료태로 바꾸고, ‘그 곳’이 바로 ‘세겜’이라고 하는 것 등이다.
바로 이러한 사본이 세겜의 한 회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대문 열쇠, 출입구 열쇠, 두루마리 보관 상자 열쇠를 세 사람이 각각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야말로 요셉의 직계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형성되었고, 자기 제사장들은 바로 레위 지파의 직계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사마리아인’ (Samaritans)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사마리아 지방에 이주해 와서 사는 여러 족속들의 후예’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그들을 경멸하여 부르는 칭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샤메림’(Samerim,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나 ‘샤메림 하에메트’ (Shamerim Haemet, 율법을 진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남들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곧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히브리어가 아닌 아랍어로 말한다.
지금도 세겜에 보관되어 있는 사마리아 오경 두루마리를 가리켜 모세의 손자 아비슈아가 가나안 진입 후 13년 되던 해에 직접 쓴 원본이라고 주장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두루마리의 나이는 3,000년이 넘는다.
『아비슈아 두루마리』는 주후 1335년 대제사장 비느하스 벤 요셉(Phinehas ben Joseph)이 발견한 이래 그들이 보관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비슈아 두루마리』가 쓰여진 연대를 그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1335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로 잡는다.
도둑맞은 ‘사마리아오경’ 사본
1995년 3월, 사마리아인들에게 크나큰 슬품이 찾아왔다. 700여년간 내려오던 사마리아 오경 사본을 도둑 맞은 것이다. 사마리아오경은 주전 4세기경 유대분파에서 분리되면서 오직 구약성서의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삼은 사마리아 유대인들의 경전이다. 가장 최초의 것은 9세기 경에 기록된 것이지만 대부분 6-700여년 된 것들이다.
이중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마리아오경은 그리심산 사마리아 회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아론 증손의 이름이 붙은 '아비슈아'라고 불리는 그 두루마리가 바로 도둑 맞은 것이다. 이는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자부심으로 그 가치는 결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이었다. 도둑이 오경을 꺼내가기 위해 바닥에 버리고 간 수백년 된 청동케이스도 값으로 치자면 수백 만불에 달한다고 한다.
1995년 3월, 관광객으로 보이는 두 세 명의 남자가 결국은 회당에 보관되어오던 모세오경 2개를 가져간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정부에 호소를 하며 잃어버린 오경을 뒤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모든 노력은 허사였다.
요르단으로 흘러 들어간 사마리아오경은 7백만불의 돈을 요구했다. 팔레스틴 수반 아라파트가 직접 나서 7백만불에서 2백만불로 협상을 해 놓았지만, 사마리아인들이나 팔레스틴정부나 서로 지불을 거절했다.
그 많은 거금을 지불할 수도 없지만, 설령 지불한다 해도 그와 유사한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97년에 마지막으로 1백만불까지 값을 내려서 요구했지만 끝내 지불하지 못하자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아마도 다른 나라로 갔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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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양을 갖춘 성경
성서는 처음에는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하였으나, 길고 긴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고자 하는 정확한 곳을 찾아내기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4 복음서를 계속 비교하면서 읽으려면, 두루마리를 말았다가 다시 펴고 하는 작업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주후 2세기부터 요사이 책과 같은 형태의 성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형태의 성경을 코덱스(Codex, 라틴어로서 책이란 뜻)라 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주로 코덱스를 사용하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두루마리 형태의 성경을 오랜 세월 동안 고집하게된다.
이렇게 책 형태로 된 성서, 즉 코덱스 중에서 신약성경을 완전한 다 포함하고 있는 것 중 가장 오래 된 것이 바로 성聖 캐더린 수도원에서 발견된 시나이 사본이다. 보통 코덱스 형태의 성경은 그 중요도를 고려하여 사본의 종류를 로마 대문자 A, B, C, ..., Z 등으로 나타내는데, 예를 들어 코덱스 A라는 사본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이라고 하는데, 주후 400~45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코덱스 B는 바티칸 사본이라고도 하는데, 주후 35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후 300~350년에 기록된 시나이 사본은 이러한 이름체계가 사용된 이후에 발견된 더 중요한 사본이기 때문에 히브리어 첫 글자인 א(알렙이라 발음하며, 로마자 A에 해당)을 써서 나타낸다.
이제 이 시나이 사본 א알렙에 대해서 알아보자.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교의 강사이고 기독교 문헌학자인 콘스탄틴 폰 티쉔도르프는 성서사본을 찾기 위해 중동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한 것은 그의 나이가 아직 30이 안된 1844년이었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 동방정교회로서 시내산 아래에 위치한 성 캐더린 수도원을 막 떠나려고 하던 날, 그는 대강당 중앙에서 낡은 양피지 한 바구니를 발견하게된다.
도서관 사서는 수도사들이 이 종이들을 화롯불의 불쏘시게로 사용하려고 한다고 했다. (수도원이란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들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같은 것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자세히 살펴본 티쉔도르프는 이 고문서는 아주 오래된 글씨체로 쓰여진 헬라어구약성서(칠십인역 성서 )의 사본임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바구니에서 필사본 중 129쪽을 꺼내었다. 티쉔도르프는 그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였지만 오직 43개의 쪽만 가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거기에는 역대상, 예레미아서, 느헤미아서, 에스더서가 있었는데, 도서관 사사는 비슷한 종이 두 바구니를 이미 태워버렸다고 말했다!
같은 코덱스에서 이사야서 전부를 발견한 티쉔도르프는 이것들은 불쏘시게로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귀한 것이라고 수도승에게 경고를 해 주었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그 사본을 라이프찌히 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했는데, 지금도 그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디센도르프를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시나이 사본 א알렙
1853년, 즉 처음 사본을 발견한지 9년 후 티쉔도르프는 다시 한번 성 케더린 사원을 방문하게 된다. 처음 사본을 발견했을 때 티쉔도르프가 매우 감격해 하는 것을 본 수도승들은 이번에는 그의 방문을 경계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소득이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후 다시 6년이 지난 1859년, 티쉔도르프는 이번에는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더 2세의 후원을 등에 업고 시내산을 세번째로 방문하게 되는데, 알렉산더 2세는 그리스교회의 공식적인 보호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석으로 남아있는 시내산 수도원들의 최고 괸리자인 대수도원장을 임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수도원을 떠나기로 한 날 하루 전에 티센도르프는 그가 최근에 발행한 헬라어 구약성서를 수도원 청지기에 선물해 주었다. 그러자 그 청지기는 그도 역시 같은 사본의 성서가 있다면서 그의 독방 안 벽장에서 붉은 천에 싸여 있는 사본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흥분을 감추고 티센도르프는 이것을 그날 밤 읽어볼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허락을 받고 자기 방에 돌아온 티센도르프는 오래된 성서 사본을 발견한 기쁨에 넘쳐 밤 세워 가며 그 사본을 연구하였는데, 그는 후에 일기장에서 "잠 자는 것은 정말 신성모독죄로 보였다"고 고백했다.
약 주후 4 세기경에 기록한 것으로 판단되는 이 성경의 보관상태는 아주 양호했으며, 구약성서의 대부분과 신약성서 전체, 그리고 그때까지 오직 책 이름만으로 알려진 헤르마스목자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티센도르프는 이 시나이 사본의 발견에 대해 "나는 내 손에 현존하는 것 중 가장 귀중한 성경보물, 지난 20년 동안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한 모든 사본들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보물을 들고 있음을 알았다"고 증언하였다. 코덱스 א알렙,(시내산 사본) 코덱스 A와 (알렉산드리아 사본) 코덱스 B와 (바티칸 사본)으로 더불어 가장 권위있는 사본들이다.
후에 이 귀중한 사본은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더 2세에게 넘어 갔는데,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후 성경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또 돈이 궁해진 소련 공산정부는 이 사본을 대영박물관에 10만 파운드(약 50만불에 해당)에 팔겠다고 했다.
이 금액은 1867년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판매한 가격 720만불의 1/14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였다. 이 제안에 영국 정부가 5만 파운드를 내었고, 나머지 5만 파운드는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교회와 개인이 헌금하여 필요한 돈을 마련하였다.
드디어 1933년 성탄절 바로 전날, 인류의 최고의 보물 중 하나인 이 시나이 사본은 삼엄한 경비 아래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들어오게 된다. 이 사본은 지금까지 같은 박물관에 잘 전시되어 있는데, 찾아오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값진 선물인 성경을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by Bruce M. Metzger) 신약 사본들에 대한 이해 1 <에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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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문자는 사마리아 히브리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이다.
사마리아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의 일종이며, 고대 히브리 문자에서 파생된 문자이다. 사마리아인들이 사용한 고전 히브리어의 방언인 사마리아 히브리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경전인 사마리아 버전의 모세 오경(토라) 이른바 "사마리아 오경"의 설명에 사용되고 있으며, 전례 언어로 남아있는 사마리아 히브리어의 문자로서 형식상 현재까지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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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새겨진 사마리아 문자
토라(사마리아 오경)에 쓰여진 사마리아 문자
기도서에 쓰여진 사마리아 문자
- 사마리아 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