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신약)의 역사
예수는 실존적 인물일까 신일까 인간일까 신약성경은 어떻게 쓰여졌을까 하는 질문에서 신약의 역사를 논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나 동방세계에서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부활,오르페니우스는 디오니소스 축제 (바카스)참가자에 의해 살해 당하고 부활하여 오르페니우스 종교가 생겼다. 고대 종교에서 처녀에서 탄생하여 수난을 겪고 죽었다가 부활하는 스토리는 흔한 것이었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사복음서는 죽었다 부활한 고대 이교도 신인 오시러스 디오니소스의 유대버전으로 예수의 전기는 신비한 진리를 찾으려는(영지주의)영적 비유라고 한다.
여기서 예수의 실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신약의 역사를 따라가고자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정복후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이 다이애스폴라 하였고 BC3-2세기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려 헬라어로 쓰인 셉투아진트(72인역)를 완성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구약은 셉투아진트이다.
사해북단 쿰란 동굴에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필사된 구약사본이 발견되었고 사해문서라고 한다. 사해 문서는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쿰란 공동체의 수도자들은 에세네파라고 불리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지도자는 예수, 결혼을 하지 않고 입교시 세례를 하고 종말과 구원을 기다리며 금욕적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여기서 예수의 실존적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시해문서>
복음서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는 BC 4년경부터 AD 30년까지 생존했다고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역사적 예수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예수 사후 바울이 다마스커스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이방인 선교를 하였다...바울은 복음서 예수 사후 십년여 지난 시점에서 역사적 예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단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심이 있었다.따라서 바을의 서신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초기 기독교 교회는 유대인 기독교도와 헬라
기독교도가 있었고 이들은 율법적 해석 문제등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바울은 편지로 초기 동방 기독교 교회와 소통하였다..이때 남긴 편지는 아나타시우스의 27정경 확정시 정경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 시절 신약(정경)이 없었다는 점은 경전후 교단이 들어서는 일반적 현상과는 다르다.
AD 78년 로마는 유대지역을 침공하여 마사다 요새의 최후항쟁을 끝으로 전쟁은 끝이 났으나 지성소까지 약탈당한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복음서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이 보여지지 않은 시점에서 예수 메시아께서 부활하였고 재림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을 예언한 케리그마(선포)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낭송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추측된다..
AD70년-120년 마가복음이 먼저 출판 되었고 마가의 확장 개정판으로 누가 마태, 영지주의적이적인 요한 복음이 집필되었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으로 오류가 없다고 하나 사실은 성서 서지학 관점에서 오류 투성이다.
예수는 하느님 아들로 부계와는 단절되지만 유대민족의 메시아로서 구약의 예언대로 다윗의 자손이 된다. 나사렛 예수는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 위해 누가복음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호구조사라는 장치를 도입하였다. 실제 방대한 로마자료를 살펴보면 아우구스투스 시절 호구조사가 없었다. 세금을 납부하는 호구조사를 위해 나사렛에서 원적지 베드레헴까지 700킬로를 임신부와 함께 호구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수 없다. 예수를 다윗으로 연결하기 위한 마태와 누가의 족보는 할아버지부터 다르다..
마태는 예수가 베드레헴에서 탄생하고 동방박사가 경배하고 이를 안 헤롯이 2살이하 애기를 전부 죽인다는 허구로 채웠다. 예수 자신 메시아라는 자기 인식이 없었고 이방선교는 생각하지 않았다.마리아가 동정녀라고 했지만 야고보 유다등 6형제가 있었다. 마리아가 처녀로 아들(임마누엘)을 낳을 것이란 마가복음은 셉투아진트의 오역으로 사실은 처녀가 아니라 아줌마에서 임마누엘의 탄생으로 서지학적으로 오류다. 세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과 전도 죽음 부활까지 자세히 실펴보면 전부 다르다
.
AD 2세기 부터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이집트 교회는 곱틱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고 곱틱교회라고 한다. 이들은 영지주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영지주의란 그노시스(지혜)를 통하여 신과 합일 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구원이 믿음으로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한다. 이성중심주의 그리스 로마적인 사고이다.
AD 144년 마르시온은 구약의 폐기를 주장하였다. 구약은 야훼와 모세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 유대민족의 부족 종교로 이민족에게 배타적인 종교이다. 야훼는 질투 저주 보복의 하느님으로 자비와 용서의 신약의 하느님과는 다르다. 마르시온은 셉투아진트라는 구약 정경이 있었으나 구약의 단절을 주장하고 누가복음서와 바울의 편지 10개로 11서 체제로 정경화 작업을 하였으나 로마교회로 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마르시온의 성경은 5세기까지 시리아등 동방교회에서 사용하였다.
AD 172년 티티안(나중에 영지주의자로 몰려 이단으로 몰림)은 당시 저술된 수많은 복음서중 4복음서만 인정한다.
AD 180년경 희랍어로 쓰여진 성경을 7세기 번역한 무라토리 정경의 파편이 발견되어 초대교회의 정경화 작업의 시도를 알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승리후 AD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고 기독교는 공인되었지만 기독교 우대정책이었다. 이때 기독교인들에 의해 인류의 문화 유산 그리스- 로마의 신상과 신전등이 파괴되었다. 로마 대영 루브르 박물관에서 머리나 팔이 짤린 신상을 볼 수 있다.372년 율리우스황제가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고 기독교인에 의해 배교자가되었다.392년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화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가 되자 불가침의 신성한 절대권력을 위해 종교적 백업을 원했다.,기독교의 야훼는 절대적 전지 전능하고 독재적이었다. 쇠잔기에 들어선 로마인에게 배타적이고 유일신 사상인 기독교가 희망이고 방황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 삶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 (태양신)믿었고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다 죽기 직전 세례를 받아 하느님 세계를 훔쳤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카톨릭과 기독교에서 안식일을 일요일로 태양신이 부활하는 크리스마스를 예수 탄신일로 하였고 카톨릭교회 장식등에서 미트라 신앙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325년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의 문제를 놓고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다..알렉산드리아의 다수파 아리우스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인간성을 중시하였다.. 소수파 아타나시우스는 예수의 신성을 중시하였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자기의 권위 문제로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였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의 실제 즉 동체론으로 결론나 아타나시우스가 승리 하였다, 니케아 신조의 결과 아리우스파가 이단이 되고 이단이 정통이 되었다. 이후 동방교회는 패배한 아리우스를 지지하였고 아타나시우스는 5번의 유배생활을 하였다..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는 패배하면 이단이 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다.
아타나시우스가 승리하였지만 예수를 신이라고 하면 시공간을 창조한 시공간 밖의 신이 두명이고 다신론이 된다. 만약 시공간속의 역사적 예수가 존재한다면 도세티즘(가현실)이 되고 예수는 유령이 된다. 또한 복음서는 신화가 되고 역사적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의미가 퇴색된다.
예수를 인간이라고 하면 예수 사건은 단순히 역사 속의 인간의 이야기이고 복음서는 위인전기가 된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논쟁은 제4차 칼케돈 공의회에서 로마 카톨릭의 성부 성자 성령은 3개의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본질은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이 인정되었다.즉 시공간을 초월 할 수도 있고 역사속에서 육신을 가질 수도 있다.구약속에서 시공을 초월한 창조주인 야훼는 역사속에서 선지자에게 계시를 할 수있다.
366년 다시 복권된 아타나시우스는 부활절 메시지에서 예수 사후 337년 만에 27서 정경을 발표한다.
성경이 있고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고 필요에 의해 성경을 만들었다. 드디어 신약성경의 목록이 발표되었고 이것이 우리가 보는 신약성경 목차이다..정경이된 27서 외의 수많은 문서는 이때부터 외경이 되었고 파기되었다...
367년 아타나시우스는 신약성경 2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을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집트의 수도원 파코미우스의 수도승들은 이런 명령에 불복하여 파기해야 할 책들을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마그함마디의 산기슭 큰 바위 밑 땅 속에 숨겨놓았다
1945년 마그함마디에서 알 마지드가 토기 항아리를 발견했다. 마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1947년에 발견된 사해 문서 발견과 함께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라고 한다. 마그함마디 문서에는 13개의 코우덱스(가죽보자기)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파피루스 문서들이 들어 있었다. 마그함마디 문서는 신약 성서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연구를 위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이다.(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요한의 비밀서 등 60개의 외경이 있음).
마그함마디 문서중 제일 중요한 도마복음 콥트어 사본은 기원후 35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기원후 5, 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다. 도마복음서는 신약성경의 복음서 중 가장 일찍 쓰여진 마가복음보다 앞선 114개의 말씀으로 된 가라사대 복음서이다..도마복음의 말씀중 일부는 영지주의 성격이 강하고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이를통해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교류 흔적을 본다.
384년 부터 제롬의 4복음서 구약성서 라틴 벌게이트본이 나오고 400년경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와 바티카누스가 발견되고 16세기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서 17세기 킹제임스 영어 성경이 성립되었다
476년 서로마 멸망과 함께 로마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는 분리되었고 1453년 동로마 멸망으로 동방교회는 그리스정교와 러시아정교로 분리되었다. 16세기초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 카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분리되었고 1536년 영국의 헨리 8세는 앤과 결혼하기 위해 성공회를 만들었다. 17세기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정조말 청의 베이징에 파견된 카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카톨릭을 전파하였고 대원군 집권시 카톨릭은 박해를 받아 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기독교는 1882년 알렌에 의해 미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현재 이집트에는 콥틱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역사적 예수가 있다면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이를 번역한 희랍본이 집필되었고 이후 희랍본을 번역한 라틴어본 영어본이 나왔다...판본은 너무 많아 희랍어판만 약 1500개 이상이 있다고 하니 성경은 필사과정과 판본에 따라 달라진다....
참고☆여호아의 증인
아리우스파가 이끄는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영지주의 성격이 강하였고 아리우스의 영향력은 찰스러셋이 1872년 설립한 여호와의 증인으로 이어진다. 신은 여호와 뿐이고 예수는 여호와의 피조물로 인간을 대속하여 죽었다..사탄의 세계인 현세는 예수 재림으로 끝이 난다. 이들은 사탄의 세계에 속한 국가를 인정하지 않고 병역거부 국기의 맹세도 거부하고 성직자 그룹이나 교회도 없다.단지 임박한 예수재림만 기다리는 종말론 사상이 강하다.
예수는 실존적 인물일까 신일까 인간일까 신약성경은 어떻게 쓰여졌을까 하는 질문에서 신약의 역사를 논하고자 한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사복음서는 죽었다 부활한 고대 이교도 신인 오시러스 디오니소스의 유대버전으로 예수의 전기는 신비한 진리를 찾으려는(영지주의)영적 비유라고 한다.
여기서 예수의 실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신약의 역사를 따라가고자 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정복후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이 다이애스폴라 하였고 BC3-2세기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려 헬라어로 쓰인 셉투아진트(72인역)를 완성하였다. 초기 기독교의 구약은 셉투아진트이다.
사해북단 쿰란 동굴에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필사된 구약사본이 발견되었고 사해문서라고 한다. 사해 문서는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쿰란 공동체의 수도자들은 에세네파라고 불리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지도자는 예수, 결혼을 하지 않고 입교시 세례를 하고 종말과 구원을 기다리며 금욕적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여기서 예수의 실존적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복음서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는 BC 4년경부터 AD 30년까지 생존했다고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역사적 예수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예수 사후 바울이 다마스커스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이방인 선교를 하였다...바울은 복음서 예수 사후 십년여 지난 시점에서 역사적 예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단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심이 있었다.따라서 바을의 서신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초기 기독교 교회는 유대인 기독교도와 헬라
기독교도가 있었고 이들은 율법적 해석 문제등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바울은 편지로 초기 동방 기독교 교회와 소통하였다..이때 남긴 편지는 아나타시우스의 27정경 확정시 정경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 시절 신약(정경)이 없었다는 점은 경전후 교단이 들어서는 일반적 현상과는 다르다.
AD 78년 로마는 유대지역을 침공하여 마사다 요새의 최후항쟁을 끝으로 전쟁은 끝이 났으나 지성소까지 약탈당한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았다.
복음서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이 보여지지 않은 시점에서 예수 메시아께서 부활하였고 재림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을 예언한 케리그마(선포)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희망을 주고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낭송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추측된다..
AD70년-120년 마가복음이 먼저 출판 되었고 마가의 확장 개정판으로 누가 마태, 영지주의적이적인 요한 복음이 집필되었다.
성경은 하느님 말씀으로 오류가 없다고 하나 사실은 성서 서지학 관점에서 오류 투성이다.
예수는 하느님 아들로 부계와는 단절되지만 유대민족의 메시아로서 구약의 예언대로 다윗의 자손이 된다. 나사렛 예수는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기 위해 누가복음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호구조사라는 장치를 도입하였다. 실제 방대한 로마자료를 살펴보면 아우구스투스 시절 호구조사가 없었다. 세금을 납부하는 호구조사를 위해 나사렛에서 원적지 베드레헴까지 700킬로를 임신부와 함께 호구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수 없다. 예수를 다윗으로 연결하기 위한 마태와 누가의 족보는 할아버지부터 다르다..
마태는 예수가 베드레헴에서 탄생하고 동방박사가 경배하고 이를 안 헤롯이 2살이하 애기를 전부 죽인다는 허구로 채웠다. 예수 자신 메시아라는 자기 인식이 없었고 이방선교는 생각하지 않았다.마리아가 동정녀라고 했지만 야고보 유다등 6형제가 있었다. 마리아가 처녀로 아들(임마누엘)을 낳을 것이란 마가복음은 셉투아진트의 오역으로 사실은 처녀가 아니라 아줌마에서 임마누엘의 탄생으로 서지학적으로 오류다. 세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과 전도 죽음 부활까지 자세히 실펴보면 전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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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2세기 부터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이집트 교회는 곱틱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고 곱틱교회라고 한다. 이들은 영지주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영지주의란 그노시스(지혜)를 통하여 신과 합일 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구원이 믿음으로 이루어 질 수 없다고 한다. 이성중심주의 그리스 로마적인 사고이다.
AD 144년 마르시온은 구약의 폐기를 주장하였다. 구약은 야훼와 모세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 유대민족의 부족 종교로 이민족에게 배타적인 종교이다. 야훼는 질투 저주 보복의 하느님으로 자비와 용서의 신약의 하느님과는 다르다. 마르시온은 셉투아진트라는 구약 정경이 있었으나 구약의 단절을 주장하고 누가복음서와 바울의 편지 10개로 11서 체제로 정경화 작업을 하였으나 로마교회로 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마르시온의 성경은 5세기까지 시리아등 동방교회에서 사용하였다.
AD 172년 티티안(나중에 영지주의자로 몰려 이단으로 몰림)은 당시 저술된 수많은 복음서중 4복음서만 인정한다.
AD 180년경 희랍어로 쓰여진 성경을 7세기 번역한 무라토리 정경의 파편이 발견되어 초대교회의 정경화 작업의 시도를 알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승리후 AD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고 기독교는 공인되었지만 기독교 우대정책이었다. 이때 기독교인들에 의해 인류의 문화 유산 그리스- 로마의 신상과 신전등이 파괴되었다. 로마 대영 루브르 박물관에서 머리나 팔이 짤린 신상을 볼 수 있다.372년 율리우스황제가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고 기독교인에 의해 배교자가되었다.392년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화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가 되자 불가침의 신성한 절대권력을 위해 종교적 백업을 원했다.,기독교의 야훼는 절대적 전지 전능하고 독재적이었다. 쇠잔기에 들어선 로마인에게 배타적이고 유일신 사상인 기독교가 희망이고 방황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 삶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 (태양신)믿었고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다 죽기 직전 세례를 받아 하느님 세계를 훔쳤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카톨릭과 기독교에서 안식일을 일요일로 태양신이 부활하는 크리스마스를 예수 탄신일로 하였고 카톨릭교회 장식등에서 미트라 신앙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325년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의 문제를 놓고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다..알렉산드리아의 다수파 아리우스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인간성을 중시하였다.. 소수파 아타나시우스는 예수의 신성을 중시하였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자기의 권위 문제로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였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의 실제 즉 동체론으로 결론나 아타나시우스가 승리 하였다, 니케아 신조의 결과 아리우스파가 이단이 되고 이단이 정통이 되었다. 이후 동방교회는 패배한 아리우스를 지지하였고 아타나시우스는 5번의 유배생활을 하였다..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는 패배하면 이단이 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다.
아타나시우스가 승리하였지만 예수를 신이라고 하면 시공간을 창조한 시공간 밖의 신이 두명이고 다신론이 된다. 만약 시공간속의 역사적 예수가 존재한다면 도세티즘(가현실)이 되고 예수는 유령이 된다. 또한 복음서는 신화가 되고 역사적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의미가 퇴색된다.
예수를 인간이라고 하면 예수 사건은 단순히 역사 속의 인간의 이야기이고 복음서는 위인전기가 된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논쟁은 제4차 칼케돈 공의회에서 로마 카톨릭의 성부 성자 성령은 3개의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본질은 하나라는 삼위일체론이 인정되었다.즉 시공간을 초월 할 수도 있고 역사속에서 육신을 가질 수도 있다.구약속에서 시공을 초월한 창조주인 야훼는 역사속에서 선지자에게 계시를 할 수있다.
366년 다시 복권된 아타나시우스는 부활절 메시지에서 예수 사후 337년 만에 27서 정경을 발표한다.
성경이 있고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고 필요에 의해 성경을 만들었다. 드디어 신약성경의 목록이 발표되었고 이것이 우리가 보는 신약성경 목차이다..정경이된 27서 외의 수많은 문서는 이때부터 외경이 되었고 파기되었다...
367년 아타나시우스는 신약성경 27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을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집트의 수도원 파코미우스의 수도승들은 이런 명령에 불복하여 파기해야 할 책들을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마그함마디의 산기슭 큰 바위 밑 땅 속에 숨겨놓았다
1945년 마그함마디에서 알 마지드가 토기 항아리를 발견했다. 마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1947년에 발견된 사해 문서 발견과 함께 고고학상 최대의 성과라고 한다. 마그함마디 문서에는 13개의 코우덱스(가죽보자기)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파피루스 문서들이 들어 있었다. 마그함마디 문서는 신약 성서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연구를 위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이다.(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요한의 비밀서 등 60개의 외경이 있음).
마그함마디 문서중 제일 중요한 도마복음 콥트어 사본은 기원후 35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기원후 5, 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다. 도마복음서는 신약성경의 복음서 중 가장 일찍 쓰여진 마가복음보다 앞선 114개의 말씀으로 된 가라사대 복음서이다..도마복음의 말씀중 일부는 영지주의 성격이 강하고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이를통해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교류 흔적을 본다.
384년 부터 제롬의 4복음서 구약성서 라틴 벌게이트본이 나오고 400년경 코우덱스 시나이티쿠스와 바티카누스가 발견되고 16세기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서 17세기 킹제임스 영어 성경이 성립되었다
476년 서로마 멸망과 함께 로마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는 분리되었고 1453년 동로마 멸망으로 동방교회는 그리스정교와 러시아정교로 분리되었다. 16세기초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 카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분리되었고 1536년 영국의 헨리 8세는 앤과 결혼하기 위해 성공회를 만들었다. 17세기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정조말 청의 베이징에 파견된 카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카톨릭을 전파하였고 대원군 집권시 카톨릭은 박해를 받아 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기독교는 1882년 알렌에 의해 미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현재 이집트에는 콥틱교회와 수도원이 있다.
역사적 예수가 있다면 아람어를 사용하였고 이를 번역한 희랍본이 집필되었고 이후 희랍본을 번역한 라틴어본 영어본이 나왔다...판본은 너무 많아 희랍어판만 약 1500개 이상이 있다고 하니 성경은 필사과정과 판본에 따라 달라진다....
[출처] 신약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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