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기독교 박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박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오현제 중에서 마지막 황제입니다. 명상록으로도 우리에게 익숙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는 역사적으로 뛰어난 황제로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거세게 박해했습니다. 그가 제위하여 초기에는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인간 나름의 철학과 점성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록 그는 기독교를 강력하게 박해하는 황제로 변했습니다.
명상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고, 철학과 학문에 조예가 깊어 사람들이 볼 때 훌륭해 보이는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3)도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가 본래는 어머니 교육의 영향으로 인간적이며 관대하고 부드럽고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에는 그 시대의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인들을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스토아(Stoa, 스도이고) 철학자인 가정교사와 미신을 믿는 점성가들에게 빠져들면서 기독교를 미신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중요한 행사를 치를 때에는 이방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드렸는데, 그의 통치 초기에 외국의 침략, 홍수, 전염병 등 여러 재해가 뒤따랐다. 그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들이 노하여 이런 재앙이 로마에 임했다고 믿고 비밀 정보원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였고, 심한 고문을 가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기독교 박해는 처참할 정도로 잔인하고 공격적이었다.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은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하고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나왔다. 그런 후에 조개껍질이나 땅 위에 놓인 창 끝에 눕혀졌고,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목을 베어 죽였고, 로마 시민이 아닌 기독교도들은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감옥에서 죽은 기독교인들의 시체는 굶주린 개들에게 던져주어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온갖 고문과 박해 속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고, 순교 당하기도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때에는 역병(疫病)이 극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흉년과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극심하여 죽은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해졌다. 당시 어떤 로마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보았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신들을 무시하고 섬기지 않음으로 인해 신들이 진노하여 역병과 흉년 가뭄 등등의 재난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박해에 유대교인들도 한몫 거들었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인과 달리 로마 당국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 탄압에 일조했다. 유대교인들이 기독교 탄압에 동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모든 전통들, 특히 율법을 무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인들을 메시야 처형의 주범들로 몰아세우면서 유대인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멸망과 붕괴의 비극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메시야를 처형한 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AD 167년에는 황제가 새로운 칙령을 반포하여 아시아 지역에서 핍박이 일어났고, 177년에는 리용과 비인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고문하여 죽이고 오직 황제만을 섬기도록 명령하였다.
당시에 많은 변증가들도 순교를 당하였다. 저스틴(Justin Martyr, AD 100-165)이 순교를 당했고, 177년 리용에서는 50여 명의 순교자를 냈다. 리용의 포티누스(Potinus) 감독도 그들과 함께 고문 끝에 순교를 당했다(AD 178년).
순교 당한 성도 가운데 블란디나(Blandina) 자매를 비롯해 자매들이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여 구경꾼들은 그들이 가진 믿음과 소망에 감동을 받았고, 젊은 그리스도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는 너무나 용기 있게 행동했기 때문에 여러 명의 이교도들이 그를 보고 그리스도께로 회개했다.
펠리시타스(Felicitas)는 대단히 유능한 교회의 일꾼이었다. 교회를 위해 열정을 다한 그녀에게 당국과 이교도 사제들은 각종 회유와 협박으로 개심(改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단호하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당신들에게 승리할 것이며, 나를 죽인다면 죽음을 통하여 더욱 더 큰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녀의 믿음을 꺾지 못한 박해자들은 그녀의 아들들을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들 모두는 처형되었다.
특히 사도 요한의 제자요, 서머나교회의 인도자였던 폴리갑이 이 시대에 순교 당했다.
기독교 역사가인 앤드류 밀러4)는 그의 저서 ‘교회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모든 철학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의 이름 속에
들어 있는 능력과 아름다움을 찾지 못했다. 인간이 상상하고 연구하고 추정하면서 자랑하는
모든 철학은 결코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없다. 인간의 마음과 생각은 복음과
원수가 된다. 교만과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를 의지하는 마음이 금욕주의 철학의 핵심이다.
그 속에는 겸손이나 죄에 대한 감각이 들어 있지 않고,
결코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
현제 철인 황제로 이름난 아우렐리우스이지만 그가 추구했던 철학 속에서 진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진리인 복음을 거부하고 박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가혹한 박해에도 복음은 계속 전파해져 왔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에 그 자리를 이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대해 포스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이번 포스팅에서는 지난 포스팅에 이어 로마제국의 박해 중에서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다음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인 왕후 돔나 때문에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뿐아니라 유대교까지 로마제국의 종교박해의 피해를 입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말년까지 박해는 계속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뒤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나약하고 변변치 못하면서도 허욕에 사로잡힌
황제들이 연이어 등극하여 정치적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들이 무능하여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무질서해지자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제국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전쟁을 계속했으나 황제들은 환락과 사치에 빠져 쾌락 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이 무렵에 기독교인들은 한동안 자유와 평안을
누렸고,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확장되어 로마 전역이 기독교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5)가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셉티미우스는 아프리카의 군인 출신으로 종교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셉티미우스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동기는 당시 로마제국의 정세와 그의 왕비 돔나 때문이었다.
왕후 돔나는 태양신을 열심히 섬기는 대제사장의 딸이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로마의 전통 종교들을 부활시켜서 로마를 종교적, 정치적 통일체로 만들어 반란 세력을 와해시키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왕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선적으로 로마의 전통 종교들을 부활시켰다. 황제는 태양신을 지존(至尊)의 신으로 세운 후에 다른 모든 신들을 그 아래 두어 섬기게 함으로써 종교적 통일을 이루었다.
그것은 친정에서부터 태양신을 섬겨온 왕후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은 기존의 종교인들로부터 불신을 받았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거부되었다. 황제는 종교인들을 힘으로 제압했고,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인 유대교와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황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누구든지 유대교와 기독교로 개종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하여 새 신자를 받아들일 수 없게 했다. 이 법령은 트라야누스 황제의 칙령과 병행하여 적용되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함께 무차별적 탄압을 감수해야 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치세 말년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었다. 이때에 왜 박해가 중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전승에 의하면,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는 이야기와 왕후인 돔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발생하여 그것이 기독교 박해 때문인 것으로 여겨져서 박해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시기에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는 귀부인이었던 퍼폐튜아(Perpetua)가 충직한 몸종 펠리시타스(Felicitas)를 비롯한 5명의 시종들과 함께 짐승에게 던져져 순교했다(AD 203년). 페르페투아는 상류층 귀부인으로서 임신 중에 체포되어 순교했다. 이 두 여인은 맹수들이 들끓는 원형경기장에서 손에 손을 잡고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위대함을 온 천하에 증거하였다. 사도 시대의 신앙을 속사도 시대로 계승하여 온 이레네우스(Ireraeus)가 순교를 당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신학자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다스( Leonidas)가 참수형을 당하였다.
◀ 죽음 앞에서 용기 있게 행동하여 여러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회개하게 한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그린 그림
이어지는 포스팅에서도 로마의 박해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막시미누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에 관해 포스팅을 하고 '로마제국의 박해'에 관한 포스팅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의 기독교 박해: 막시미누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의 박해|
AD230년에서 AD260사이에 즉위한 황제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기의 황제들 중 막시미누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가 있습니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기독교 박해의 정도는
달랐지만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 하에서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막시미누스의 박해
막시미누스 황제 치하의 박해는 간헐적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형에 처했기 때문에 순교 역사는 거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이 거의 풀렸고 기독교가 참 진리의 종교라는 인식이 퍼져 나가면서 오히려 많은 귀족들이 기독교에 입문했다.
막시미누스는 군인 출신의 폭군으로, 신자들로 구성된 알렉산더 가문에 대해 증오심이 불타
계책을 써서 기독교 성직자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암살된 전임 황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증오심에 불타 기독교인을 박해하였다. 특별히 즉위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모든 사람은 어느 곳에서든지 공개적으로 희생 제사를 드리며, 각 도시의 통치자들은
주의 깊고 부지런히 이 일을 실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총독들의 명령을 따라 전령들이
전국을 다니며 모든 사람이 신전에 나와 제사 드릴 것을 촉구하였다.
이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색출해냈으며, 지도자들을 유형(流刑)과 투옥으로 제거하였다.
막시미누스 황제의 임기 동안에는 사형보다는 감옥에 투옥시키는 방법을 썼다.
이때 히폴리투스와 우르술라가 순교했다. 당시 로마 감독이었던 힙포리티스와 폰티아너스는 사르디니아 금광에 유배되어 노예로 죽음을 당하였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북방 약50km에 있는 고대 도시 제라슈(jerash/Gerasa)에 세워진 제우스 신전
데키우스의 박해
AD 249년 데키우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 로마의 정국은 매우 불안하고 심각했다. 데키우스는 네로 황제처럼 옛 로마 정신을 열정적으로 일깨우며,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고심했다. 황제는 로마가 영광을 상실하게 된 동기를 종교적 이유에서 찾았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데키우스는 ‘로마가 옛 신들을 섬겼을 때에는 부강했는데 기독교 때문에 쇠퇴했다’고 여겨 기독교에 혹독한 박해를 가하였다. 그리고 신들의 형상과 황제의 신상을 재정비하고 다시 세웠다. 황제는 모든 총독들에게 칙령을 내려 전 국가적으로 기독교를 금하고 박해하게 하였고, 신들 앞에 제물을 드리지 않거나 황제의 신상 앞에 분향하지 않는 자들은 체포되었다.
250년에는 유행병을 퇴치하기 위해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 드릴 것을 명하는 칙령을 반포하였고, 정한 날짜에 신전에서 제사를 지낸 사람들에게는 리벨루스(libellus)란 증명서를 발부하였다. 리벨루스가 없어서 참석을 거부한 사실이 드러나면 체포, 처형되었다.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성도들이 리벨루스를 돈을 주고 사지 못한다면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데키우스의 명령 앞에
성도들은 순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목적은 순교자보다 배교자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황제는 죄인들을 처형하기보다 그들을 회유하는 데 주력했다. 불순종하는 자들을 체포한 후 무서운 고문과 회유 정책을 통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나, 황제의 회유 정책에 따라 배도하고 풀려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때의 양상은 다양했다. 어떤
자들은 아예 일찌감치 마음을 바꾸어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어보다가 체포되면 할 수 없이 명령에 순종했고, 또 어떤 자들은 관리들을 매수하여 돈을 주고 증명서를 구입하여 순종을
위장했다. 때문에 순교자들은 많지 않았으나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두 가지의 신조어가 생겼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은 믿음을 고백했다고 하여 <고백자>라는 칭호를 얻었고,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신앙을 버린 자들은<배교자-Apostat>로 호칭되었다. 박해가 아주 심했지만 고귀한 순교자의 피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켰다. 박해 속에서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의 저명인사들이 순교를 당해야 했다. 로마 감독 파비안(Fabian)과 안디옥 감독 바빌라스(Babylas)가 그 중에 들었고, 키프리아누스(Cyprianus)는 도피하여 은둔생활을 하며 지냈다.
데키우스 황제는 251년 6월 로마 군을 이끌고 흑해 연안 도브루자에 있는 늪지대에서 제국을 침입한 자들과 전투를 벌이다 패배해, 갈루스가 이끄는 침입군에게 그의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발레리아누스의 박해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처음 3~4년 동안은 기독교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왕궁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어려움이 찾아오고 국난과 흉년이 계속되자,
이를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들이 분노하였다고 하여 교회의 재산을 압수하고 집회를 금지시켰다. 특히 258년에는 기독교인에 대한 처벌을 성문화하는 칙령을 발표하였고,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귀족들은 직위가 박탈되고 재산을 몰수당했고,
사무원들은 강제 노동을 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무렵 카르타고의 카푸리아누스(Cyprian 200~258)가 순교를 당하였으며, 스페인의 타라고나 지방 감독 투루투어스와 부감독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페르시아의 샤프르 1세와 전쟁을 하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산 채로 포로가 된 로마 황제는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결국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의 주요 순교자 - 파비아누스,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디오클레티아스 황제 박해
이번 포스팅에서는 로마의 황제 중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기독교는 끝이 없는 박해를 받았지만 복음의 불꽃은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불타올랐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로마제국의 황제별로 알아본 기독교박해에 관한 내용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본래 비천한 노예 출신으로, 자수성가하여 권력을 획득한 그는 군(軍)의 추대로 로마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20년 동안 뛰어난 행정력과 조직력으로 로마를 통치하였지만 기울어져 가는 로마를 바로 세울 수는 없었다. 그는 로마를 살리기 위하여 제국을 네 개로 분할하고 군대를 강화하고 경제를 개혁하였으며, 기독교에 대하여는 관용 정책을 베풀었다. 당시 그의 부인 프리스카(Prisca)와 그의 딸 발레리아(Valeria)를 비롯하여 내시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Galelius, 당시 황제는 아구스도라는 호칭을 가지고 그 밑에 있는 하급 황제는 카이사르<가이사>라고 불렸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 밑에 갈레리우스가 있었다)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군대에 가기를 거부하거나 군대를 떠나버리는 것을 보고 황제에게 기독교인들을 군대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확신시켰다. 황제는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갈레리우스, 막시미안과 결탁하여 기독교를 뿌리뽑으려고 시도했다. 자신은 로마의 신인 주피터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하였으며, 두 부하는 헤라클레스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종교 정책을 바꾸어 궁내에서 기독교인들을 제거하고, 아폴로 신전에서 제사 드릴 것을 강요하였으며, 이에 호의적이지 못한 기독교인들을 제국의 전역에서 말살하는 조치를 취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303년 칙령을 선포하고 황제의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반역자로 몰아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모든 집회는 금지되었다. 또 예배당을 파괴하고 모든 성경을 공개리에 불사르는 조치를 내렸다.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인 권리 보장의 박탈은 물론이고 모든 성직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하달되었고, 종국에는 제국 내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멸절시키게 하였다. 이때 순교한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없을 정도에 달했고, 기독교인들은 ‘사냥터의 몰이꾼들에게 몰리는 토끼’처럼 쫓겨다녔다. 자신을 쫓는 자들이 성경을 불태우면서 “네가 믿는 성경이 어디 있느냐?” 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내 마음 속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무서운 박해로 데키우스 황제 때처럼 순교자도 많이 나고 배교자들도 많이 생겼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의 사위이자 동부의 황제였던 갈레리우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계승시켜 기독교인들을 더욱 혹독하게 박해하였다. 그 공포를 이기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형벌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과 타협하였다. 당시에 기독교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온갖 고문 도구와 방법들이 동원되었고, ‘기독교의 전멸’을 기념하기 위한 주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으로 도망갔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311년에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칙령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인들의 꿋꿋한 지조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고, 마지막엔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당시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더욱 증가하였고, 점차 사회의 주역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오랫동안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순교를 당한 순교자들을 로마 교외에 있는 카타콤의 지하 묘소에 장사를 지내주기도 하였다. 결국 로마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었다.
로마 시대의 고문 방법
로마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사용했던 고문 방법으로는 채찍질, 찢어 죽이기, 돌로 쳐서 죽이기,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 위에 올려놓기, 깊은 감옥에 가두기, 몸을 잡아당기기, 감옥 안에서 질식시키기, 맹수의 밥이 되게
하기, 교수대, 황소의 뿔에 받혀 죽게 하기 등 갖가지 잔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십자가는 노예들과 이방인들에게만 사용하는 고문 도구로, 로마 시민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죄와 고통과 수치 등의 관념이 십자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십자가 형을 폐지하였다.
박해를 이긴 교회
로마인들의 무자비한 핍박을 진리와 사랑과 무저항으로 이겨낸 성도들의 승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어서 복음의 진리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더 성장하고 강해졌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기보다는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는 쪽을 택하였다. 박해와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한 결과 그리스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자신들의 구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순교자,고백자,배교자 - 300년 기독교박해 중의 배교한 그리스도인의 처리문제
'순교자,고백자,배교자 - 300년 기독교박해 중의 배교한 그리스도인의 처리문제'에 대해서 이번 포스팅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300년 동안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이루어지면서 순교로 주님을 따른 사람도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배교한 사람, 배교했지만 후에 돌이킨 사람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데키우스 황제의 강력한 기독교 박해 이후에 배교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고난과 교회의 성장
온갖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로마 전국 각처에서 계속하여 자라났다. 사회적 위치나 나이를 불문하고 성도들은 자신들을 피로 사신 주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기다는 차라리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순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히려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 하늘에만 소망을 둔 순교자들의 거룩한 믿음은 복음의 불꽃에 기름을 붓듯 그들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연단시키고 고양시켰다. 부활과 생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두고 복음 앞에 전진해 나간 순교자들의 삶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 주었다.
오랜 박해가 외형적으로는 교회를 무너뜨릴 것처럼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교회가 정결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또한 박해는 성도들을 먼 지방에까지 흩어지게 하였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다. 특별히 핍박과 고난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에 안일하게 사는 성도들에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순교자들, 고백자들, 배교자들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하고, 392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國敎)로 선포된 후부터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오던 기독교는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처럼 기독교가 자유를 맞이한 것은 오랜 박해에도 불구하고 생명까지 잃어가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믿음의 씨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
데키우스 황제 이전까지는 당국에 잡혀가 자기 신앙을 부인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순교자가 되었다. 데키우스 이후 핍박을 이기지 못해 황제나 이방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기독교인들은 배교자가 되었다. 배교자들은 주로 세 부류였다. 첫째는 실제로 우상들에게 희생제를 드린 자들, 둘째는 신들의 제단에 향을 피운 자들, 셋째는 배교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희생제를 드렸다는 증서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데키우스 황제의 칙령을 따랐던, 신앙이 연약한 배교자들은 박해가 끝난 후 다시 예배에 참석하기를 소원했다.
배교자들의 처리 문제
약 300년 동안의 기독교 박해 속에서 순교자도 있었지만, 주님을 부인하고 타협하는 배교자(Apostacy)들도 많이 나타났다. 이들은 박해의 종식 후 교회 안에서 또 다른 문제거리가 되었다. ‘믿음을 버렸던 배교자들을 받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교회는 내적 분쟁을 겪게 되었다. 엄격파는 배교자들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온건파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키우스 황제의 핍박은 짧았지만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신앙을 버린 자들에게는 ‘배교자(Apostate)’ 또는 ‘변절자(Lapsed)’라는 칭호가 붙여졌는데, 문제는 타락의 정도와 사정이 달랐기 때문에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배교자들 중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파렴치한 자들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넘어지고 배교하여 동정 받을 수 있는 자들도 많았다. 물론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마자 앞을 다투어 배교한 자들과 기독교인들을 고발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한 자들에게는 동정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모 형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배교한 자들과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배교 증명서를 구입한 자들, 한때 배교했지만 곧 크게 회개한 후 다시 신앙생활을 한 자들까지 배교자로 단죄하기는 곤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고백자들’(데키우스의 박해와 고문을 받고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야말로 배교자들 가운데 누가 다시 교회의 구성원으로 회복될 것인가를 결정할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이 문제의 처리를 ‘고백자들’에게 일임해야 한다고 하였다.
키프리안과 노바티안
북아프리카 지방의 일부 고백자들은 자신들이 그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며 일부 배교자들을 교회로 귀환시켰다. 그러자 많은 성도들이 크게 반발했다. 성도들은 고백자들과 감독들이 배교자들을 지나치게 용서한다고 불만을 표하면서 배교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한편 교회의 감독들은 그러한 문제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해결할 수 없으며 교회들이 회의를 열어서 결정해야 정당하고 공평하고, 또한 일률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두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키프리안(Cyprian)과 노바티안(Novatian, 소아시아 브루기아 출생으로 구원받기 전에는 철학자였다)이다. 교회의 감독들이 모여서 회의한 결과, 카르타고의 감독인 키프리안과 로마의 장로인 노바티안에게 이 문제를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은 서로 견해가 달랐다. 키프리안은 변절자들을 선별하여 구제해야 할 자들은 구제하고, 변절자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다른 절차 없이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노바티안은 그 방법이 변절자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여 죄를 해결해야 할 교회가 그들의 죄를 나눠 갖는 것으로 보고 반대했다.
노바티안은 <사도적 전통>이라는 저서를 통해 순수한 믿음과 사도적 전통을 보존하려고 애썼던 로마인 장로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5, 이레니우스의 제자로 티버 강에서 순교 당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노바티안을 좇던 이들은 순결한 삶을 살아 사람들은 그들을 ‘순결한, 정결한’을 뜻하는 ‘카타리안(Cathari)’이라고 불렀다. 후대에 그들을 침례교 개혁자들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어떤 교회사가들은 노바티안의 중심에 명예욕이 숨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노바티안의 강경론이 안디옥교회에서는 환영을 받았지만, 서방(라틴) 교회와 키프리안은 노바티안의 주장을 강력히 반대했다
[출처] 작성자 iii느낌표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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