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고백자,배교자 - 300년 기독교박해 중의 배교한 그리스도인의 처리문제'에 대해서 이번 포스팅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300년 동안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이루어지면서 순교로 주님을 따른 사람도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배교한 사람, 배교했지만 후에 돌이킨 사람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데키우스 황제의 강력한 기독교 박해 이후에 배교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고난과 교회의 성장
순교자들, 고백자들, 배교자들
데키우스 황제 이전까지는 당국에 잡혀가 자기 신앙을 부인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순교자가 되었다. 데키우스 이후 핍박을 이기지 못해 황제나 이방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기독교인들은 배교자가 되었다. 배교자들은 주로 세 부류였다. 첫째는 실제로 우상들에게 희생제를 드린 자들, 둘째는 신들의 제단에 향을 피운 자들, 셋째는 배교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희생제를 드렸다는 증서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데키우스 황제의 칙령을 따랐던, 신앙이 연약한 배교자들은 박해가 끝난 후 다시 예배에 참석하기를 소원했다. 배교자들의 처리 문제
키프리안과 노바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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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도 시대의 폴리갑과 이그나티우스
사도시대 속사도의 폴리갑
사도행전에 기록되었던 사도시대가 마치면 초대교회는 속사도(post-apostiolic)에 의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속사도의 뜻은 사도시대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일컷는 말이며 복음은 사도들을 거쳐 속사도들을
통해서 세계 곳곳으로 퍼지게 됩니다. 끊임없는 박해에도 복음이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속사도들은 교회를 인도하였고 외부의 억압과 핍박으로부터 복음을
지켜왔습니다. 훗 날 이들에게 '속사도'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성경에 이름 한 자도 남기지 못했지만,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명예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복음을 위해 그들의 몸을 바쳤습니다. 그중에서도 신앙을
전달하는 데 가장 기여를 했던 사람은 폴리갑이었습니다.
속사도들
사도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사도들을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의 바톤을 이어받아
달려나갔다. 당시 로마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며 끊임없이 교회를 핍박했다. 교회는 계속되는 박해 아래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해 나갔다. 이 당시 사도들의 직계 제자들 중 교회를 인도하면서, 핍박과 이단 사설(邪說)로부터 복음과 정통 교리를 지키고, 교회에 큰 은혜와 영향을 미쳤던 지도자들을 신학에서는 보통 속사도(續使徒) 또는 사도적 교부(Apostolic Fathers)라고 부른다(속사도라는 명칭은 프랑스 학자 Jean B. Cotelier가 1672년에 처음 사용).
쉽게 말해, 속사도란 사도들의 직접적인 계승자들이나 그 제자들 중 교회의 인도자들이다.
사도 시대 후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약 7~8세기까지 교회를 세우고, 진리의 체계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여 후세에
권위를 떨친 인물들을 넓게는 ‘교부’(敎父, Father of the Church, 교회의 아버지란 뜻인데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라고 일컫는다.
12사도들의 직계 제자들인 속사도들은 사도들의 후계자, 또는 사도들의 뒤를 이은 계승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속사도들은 특유한 사상을 형성하지 않았고,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해 주는 일을 하며, 복음과 교회를 세우기
위한 저술 활동도 했다. 속사도들은 교회의 질서를 강조했으며, 이단 사상을 물리치기 위해 힘썼고, 순교의 본을
보였다. 속사도들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사도 시대 이후의 기독교회 사이에 사도들의 신앙을 전달하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남겼다. 속사도 중 대표적 인물인 폴리갑을 먼저 소개한다.
서머나교회의 지도자 폴리갑
로마제국의 4차 박해 시기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시대에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한 많은 진실한
성도들은 잔인한 고문과 형벌을 당했는데, 폴리갑(Polycarp, AD 69~156?, 168?)도 이때 순교했다.
폴리갑(Polycarp)은 본래 안디옥 출신으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중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다. 서머나는 지금 터키 남부의 해안 도시로 유명한 그리스의 서사시 작가 호머(Homer, BC 750-700)가 태어난 곳이다.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에 의하면 폴리갑은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다. 그는 교회의 참된 장로였고, 생존 당시 큰
존경과 성도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소아시아 교회의 대변자였다. 그가 보여준 삶은 신학적이기보다는 말씀으로 자신을 가르친 신앙인과 목회자의 삶이었다.
전해지기로는 서머나의 어느 과부가 안디옥에서 그를 노예로 샀는데, 그가 너무 똑똑해서 그녀가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도 한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 성격은
직설적이고, 정열적이었다. 그는 20대에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생존 그는 큰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소아시아
교회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순교자 폴리갑의 일생
순교자 폴리갑의 일생을 알아보려 합니다.
순교자로 알려진 폴리갑은 서머나 교회의 속사도였습니다.
당시 폴리갑 외에도 많은 속사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심지어 순교까지 하면서 복음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일생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복음이 이 날까지 이르른 것에 감사합니다.
폴리갑이 순교를 당함으로 움츠려 있었던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
누군가가 무시하고 고통을 준다면 그 또한 낙담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새로운 힘을 얻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폴리갑 이전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은 죽을 때 까지도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면 나를 모욕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받을 때 스데반이 그러했던 것 처럼, 폴리갑이 그러했던 것 처럼 복음을 전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폴리갑의 순교사화
서머나교회가 빌로메리움((Philomelium)에 있는 교회에 보낸 폴리갑의 순교사화(Martyrdom of Polycarp)는 신약 성경 밖에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순교사화이다. 폴리갑의 순교사화는 그의 순교 직후 명백하게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는데, 이 거룩한 주님의 종이 받은 박해와 체포, 심문, 처형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2세기 중엽, 당시 최대의 시험은 황제 제의(祭儀)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위하여 한 줌의
향을 피우고, 가이사를 신인(神人)처럼 반드시 주님(Lord)으로 부르도록 강요받았다. 로마인들은 종교의 본질적
기능이 제국의 이익에 봉사하고 국가와 황제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황제 숭배 거부는 곧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고, 사형에 처해야 하는 중범죄였다. 특히 안토니우스 피우스(AD 138~161)가 통치했을 때 변증가였던 유스티누스의 증언에 의하면, 어떤 이들은 단순하게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즉석에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에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를 구한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관원들의 고문을 이겨냈다. 그들 중에 젊은 청년 성도였던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순교 이야기가
폴리갑의 순교와 연결되어 전해진다. 게르마니쿠스가 처형장에 섰을 때, 재판관이 그의 젊음을 아깝게 생각하여
고문당하고 죽지 말고 마음을 바꾸라고 권면하였다. 이때 그는 대답하기를 ‘로마제국의 잔악한 통치 하에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 더욱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삼키려는 짐승들을 향하여 외쳤다. “어서 오너라. 어서 와서 나를 먹어라.” 그의 용기 있는 모습을 본 구경꾼들은 분노하였고, 재판관을 향하여 외쳤다. “무신론자들을 죽여라!” “폴리갑을 체포하라!” 기독교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일제히 폴리갑의 처형을 요구하고 나섰다.
저들이 폴리갑의 처형을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폴리갑의 영향을 받아 담대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머나교회에 혹심한 박해가 몰아닥쳤고, 게르마니쿠스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소식을 전해들은 폴리갑은 도시에 남아 있기를
원했으나 다수의 만류로 인하여 몇몇 동행인과 함께 가까운 농가로 피신하여 기도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색자들이 두 명의 노예 소년들을 체포하여 고문했고, 그 중 한 소년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실토했다.
폴리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며 도피를 거절했다. 추적자들이 폴리갑을 찾아왔을 때 폴리갑은
그들을 위해 식탁을 준비하게 하고, 그들에게 원하는 대로 먹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한 시간만 기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이 허락했으므로 그는 서서 기도했는데,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두 시간 동안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경건한 노인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후회했다.
이윽고 떠날 시간이 되었으므로 그들은 폴리갑을 데려갔다. 그날은 큰 안식일이었으므로 폴리갑을 맞은 경찰지휘관 헤롯과 그의 부친 니세테스(Nicetes)는 폴리갑을 자기 마차에 태운 뒤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면서 “가이사(Caesar)가 주(主)다. 그에게 향을 피우고 자신을 구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해가 있느냐?” 하면서 폴리갑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 폴리갑이 “나는 당신들이 나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폴리갑이 마차에서 내릴 때 그를 급하게 말에서 내려뜨려 타박상을 입혔다.
그러나 폴리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길을 재촉했고, 마침내 소란스런 경기장으로 인도되었다.
폴리갑이 앞으로 나아가자 지방 총독은 그에게 폴리갑이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총독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권하면서 “가이사를 수호신으로 맹세하라. 회개하라. 무신론자들은 없어져 버려라고 말하라.”라고 요구했다. 폴리갑은 엄숙하게 경기장에 모인 이교도들을 향해 “무신론자들은 없어져 버려라.” 하고 외쳤다.
총독은 다시 한 번 그에게 “그리스도를 욕하라.”고 요구했다.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은 한 번 더 “가이사로 맹세하라.”고 했다.
폴리갑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배우기를 원한다면
시간을 정하고 나에게 들으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총독이 이야기했다.
“나는 야수들을 가지고 있다.
네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너를 그것들에게 던질 것이다.”
“야수들을 부르십시오.
좋은 것에서 악한 것으로 회개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악으로부터 의(義)로 변화되는 것은 고귀한 것입니다.”
“네가 야수들을 무시하니 나는 너를 불태울 것이다.”
“당신은 오직 잠깐 태우고 잠시 후에 소멸되는 불로 나를 위협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악한 죄인들을 위하여 예비된,
다가오는 심판과 영원한 형벌의 불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
폴리갑은 용기와 기쁨이 넘쳤고, 은혜로 충만했다. 그와 반대로 놀란 총독은 전령을 경기장 한복판으로 보내어
“폴리갑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다.” 하고 선포하게 하였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이 사람이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이사에게 희생이나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가르친 아시아의 선생, 기독교인들의 아버지, 우리 신들의 파괴자다!”라고 외치며 총독에게 사자를 풀어놓으라고 외쳤다.
그리고 일제히 폴리갑을 산 채로 불태워야 한다고 소리쳤다. 군중들은 여러 곳에서 장작과 밀짚을 모아왔고, 장작단이 마련되었다. 폴리갑은 못박히지 않고 두 손을 말뚝 뒤로 묶인 채 기도하였다.
“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
당신 앞에서 살고 있는 의인들의 경주의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영과 육의 영생과 부활로
순교자들의 수에 포함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
당신의 소중한 아들을 통하여 참으로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
나는 당신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
아멘.”
강한 불꽃이 폴리갑의 몸을 둘러쌌고, 이어 사형 집행인의 칼이 이 거룩한 교회 지도자를 찔렀을 때 많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폴리갑은 빌라델비아 출신의 다른 11명과 함께 순교했는데,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주님의
특별한 일꾼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자기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주신 분께 자신을 기쁘게 드렸고, 모든 장애물을
넘어 복음의 길을 완주했다. 서머나교회의 성도들은 비록 훌륭한 지도자를 잃었지만, 폴리갑의 순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못하던 용기 없는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신앙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참된 신앙인 폴리갑
폴리갑이 살아 있을 때, 한번은 폴리갑이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던 이단 마르시온을 만나러 갔다.
마르시온이 “폴리갑이여, 우리를 인정하라.”라고 하자 폴리갑은 “예, 우리는 당신을 인정합니다.
나는 당신이 사단의 맏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폴리갑의 편지는 몇 장 되지 않는데, 시종일관 인용문으로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폴리갑에게는 자신의 말로 설명해야만 할 새로운 사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슴속에는 사도들의 교훈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폴리갑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편지 속에서 사도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폴리갑은 서머나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전체 교회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다. 로마 감독도 폴리갑을 대할 때는 특별히 예우했다. 폴리갑이 부활절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에 갔을 때 로마 감독은 폴리갑이 자기를 대신해서 성찬식을 집례하도록 자신의 자리를 내주었다. 이러한 권위와 영향력은 그가 사도 시대와 연결된 산 증인이라는 점에도 있지만, 그의 거룩한 신앙과 원숙한 인격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사도시대 이후에 등장한 속사도들, 그들은 폴리갑을 포함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온 몸과 마음을 다했던 시대의 귀한
종들입니다.
속사도 이그나티우스와 트라야누스 황제
이그나티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 폴리갑과 함께 속사도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짧게 대표적인 속사도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그나티우스가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특히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에서 타라야누스 황제와의 일화로 유명했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와 짧은 대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이야기했고 그 일로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그나티우스에게 사형을
내렸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조금 생소한 인물일 지도 모르지만 이번 포스팅을 통해서 그가 어떻게 순교하게
되었는지 알게되고 속사도 이그나티우스가 그토록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귀중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대표적인 속사도들
속사도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로마의 클레멘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서머나의 폴리갑,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
로마의 헐마스, 그리고 프리기아의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등이다. 폴리갑과 이그나티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며, 헬마스는 바울의 친구로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과 직접 교제를 나눈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 문제를 밝히는 데 있어서 그들의 증언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폴리갑의 편지는 우리에게 신약 성경
형성사에 관한 원천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요한일서와 베드로전서 역시 폴리갑의 편지 속에서 처음으로
확실한 증언을 받게 된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
이그나티우스는 속사도 중 폴리갑과 함께 사도 요한의 제자로 AD 70~107년까지 37년 동안 안디옥의 감독으로
있었다. 그는 2세기 초 박해 중에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그가 안디옥교회의 인도자였다는 사실은 로마제국
제2의 도시였던 안디옥의 비중과 초대교회에서 그가 차지한 위치를 가늠하게 해준다.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를
시작한 교회였던 안디옥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이방 교회의 모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안디옥의 총독은 하드리아누스였는데,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던 중 사형 선고를 받고,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AD 98~117) 시기에 순교했다. 그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안디옥에서 로마까지 끌려갔는데, 그곳까지
가는 동안 일곱 개의 서신을 남겼다. 그 중 한 통은 폴리갑에게 준 것이었다.
그는 로마로 압송되는 가운데 서머나(Smyrna)를 지나면서 친구 폴리갑에게 서신을 썼을 뿐 아니라 일곱 개의 서신들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의 편지들은 그가 그리스도에게 열정적으로 헌신된 사람이고 순교를 열망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로마 교회에도 편지를 쓰면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구출함으로써 자신이 사모하는 순교의 귀한 면류관을 박탈하지 말라고 권면했다.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도 아시아
교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성도들을 권면함으로써 교회에 확신과 힘을 더해 주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탄원합니다. 나에게 불합리하게 친절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도록,
내가 야수들을 위한 먹이가 되게 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밀(小麥, wheat)이고, 나는 야수들의 이[齒]에 의해
갈아지고 있습니다. 내가 …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나의 무덤이 되어서 내 육신의 어떤
것도 뒤에 남겨놓지 않도록 야수들을 달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에게 갈 수 있도록,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아무것도 나를 시기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불과 십자가와 야수와 전쟁들, 절단, 난도질, 주리 트는 것, 사지를
자르는 것, 나의 온 몸을 짓밟는 것, 마귀의 잔인한 고문들, 이러한 것들이 나에게 다가오게 하십시오. 오직 내가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십시오. … 나는 땅끝까지 통치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 왜냐하면 내가 거기에 도달했을 때 나는 진정한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모했던 대로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게 던져 죽이라는 선고를 받고 맹수의 포효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리스도의 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운 짐승의 이빨 속에서 절구질되어 순결한 그리스도의 떡이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존 폭스의 ‘기독교 순교사’에서)
또한 그는 “칼날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폴리갑은 이그나티우스가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가 남긴 일곱 통의 서신들은 초대교회의 신앙과 조직을 밝혀
주는 귀중한 자료인데, 영지주의적 유대교 이단설을 경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theos hemon Iesous Xristos)라 불러 그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와의 일화
한번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안디옥을 방문하였을 때에 이그나티우스를 보고자 하였다.
이그나티우스를 만난 트라야누스 황제와의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여기 사악한 마귀,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있구나.”
“나는 마귀가 아니라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자입니다.”
“네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죽인 그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
“그렇습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트라야누스 황제는 특별한 법도 적용하지 않고 그를 로마로 압송하여 원형경기장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 앞에서 그를 맹수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를 당하게 했다.
로마의 총독이나 황제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그들의 핍박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천국의 소망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복음을 위해 참 많은 순교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사도들, 그리고 이그나티우스와 같은 속사도들도 있겠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까지 지켜온 복음. 그 수많은 희생과 고난을 거쳐 우리에게 온 것이 바로 그 복음입니다.
순교자,배교자,고백자 - 키프리안과 교회의 인도자
'순교자, 배교자, 고백자 - 300년 기독교 박해 중의 배교한 그리스도인의 처리문제'에 이어서 '키프리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배교자들에 대한 논쟁의 정점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이 있었습니다. 키프리안은 소위 온건파에 해당하는 입장을 벌였습니다만 그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를 택하지 않고 숨어서 교회를 살폈던 것은 인도자 없는 교회를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키프리안은 신앙인의 길을 계속 걸어간 결과로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키프리안의 삶을 통하여 교회에서 인도자의 중요성에 대한 부분을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키프리안(Cyprian)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난 키프리안(200-258)은 육신의 일락과 명예로는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해 친구인 캐실리우스 장로의 설교를 자주 들으며 성경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가 46세(246년)이던 어느 날 정원에 앉아서 성경을 읽다가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그때부터 그의 생활은 현저히 바뀌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헌신하리라 결단하고 그의 평생을 주님께 드렸다.
그는 249년 초 카르타고(Carthage, 그리스인들은 칼케돈이라고 부름)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키프리안은 동양 사람인 터툴리안을 굉장히 존경하여 그를 항상 ‘주(主, The Master)’라고 불렀다. 키프리안은 터툴리안 예찬론자로 그의 글을 열심히 연구해 수사학에 익숙하여 그의 논적(論敵)들을 쉽게 이겼다. 그의 글들은 당대 최고의 기독교 작품들에 속하고, 그는 정열적인 터툴리안과 달리 온건하고 친절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키프리안은 데키우스의 박해 직전에 감독이 되었으며, 박해 때에는 숨어 다니면서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했다. 후에 타락한 자들의 회복 문제를 다룰 때 어떤 사역자는 ‘로마 교회는 박해 중에 감독을 잃었는데, 이에 대해 키프리안의 견해는 어떠한지’ 문의하는 편지를 썼다.
키프리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카르타고 지역의 감독 회의를 소집했다. 감독 회의에서 ‘신앙을 버린 자들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고,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하거나 황제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고 박해를 피하기 위해 배교증명서를 뇌물로 산 사람들은 조건 없이 교회로 받아들이기’로 아주 쉽게 결정하였다. 또한 배교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였을 때에는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되, 그들의 회개가 진심이라는 것이 증명될 때에 한하여 허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은 감독들이지 ‘고백자들’이 아니라고 결의했다.
이로써 논쟁은 멎었지만, 감독 회의의 결의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어서 교회의 분열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다.
키프리안은 이후 발레리안 황제 치하의 박해 때 새로운 총독에 의해 검거되었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참수형을 당한다. 그는 심문이나 처형을 당할 때 신앙인답게 행동하고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믿음과 인격의 고매함을 빛나게 하였다.
갈레리우스(Galerius): 그(신들을 섬기는) 일을 재고하라.
키프리안: 당신의 그러한 요청을 재고하십시오. 이것은 재고할 필요도 없는 단순한 문제입니다.
갈레리우스: 로마의 신들과 그들에 대한 신성한 의식들의 반대자로 자청하고 나선, 신성 모독자인 그대의 생명은 너무 길었다. 그대는 악질적인 범죄의 기수였기에 우리는 그대를 본보기로 삼아 그대와 사귄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다. 우리는 키프리안이 참수되는 것을 기뻐한다.
키프리안: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258년 9월 14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부장이 일격에 키프리안의 목을 베었다. 그때 죽음을 각오하고 모여든 성도들이 다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도 키프리안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
“…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계 20:4)
데키우스의 박해 때 키프리안은 자신이 순교함으로써 개인적인 명예를 얻는 것보다 살아서 성도들을 돌보아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비겁하고 믿음 없는 행위라고 비난할 것도 충분히 예견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내가 순교한다면 남은 성도들은 지도자 없는 상황에서 더욱 방황하고 약해질 것이다’고 생각하여, 훗날 자신이 받을 모욕과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감독과 고백자
노바티안은 배교자들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때 키프리안의 권위가 문제시되었다. 키프리안에 대한 반대는 노바티안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제기되었다.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고통을 당한 카르타고의 다른 ‘고백자들’이 키프리안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고백자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그들이 친구와 친척들에게 사면을 남발하는 부작용이 생기고 감독들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이에 대해 키프리안은 ‘고백자들’의 사면 추천을 존중하지만 사면권은 감독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하나 됨을 대단히 중요하게 보고, 교회의 분열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았다.
“가지가 나무에서 부러지면 싹을 틔울 수 없으며, 시내가 근원에서 끊어지면 말라버립니다. …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상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 그렇게 탄생된 교회는 사탄의 교회를 만듭니다. … 그들은 교회 밖에서 모이면서 마치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습니다.”
키프리안은 ‘고백자들’의 행동이 교회가 하나 됨을 위협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배격하고, 타락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감독 대회를 개최해 인도자의 권위를 세워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 인도자가 있으며, 인도자 안에 교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구라도 인도자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키프리안은 251년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라는 선언서를 낭독했는데, 이는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리는 천 년 이상 교회의 규범으로 남아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 안에 감독 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한 키프리안은 진정 서방(라틴)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이며 저술가였고, 영광스런 순교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깊은 신앙과 인격에서 우러나온 관심과 사랑으로 양떼들을 열심히 보살핀 목자로 기억되고 있다.
카타콤과 기독교 박해: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_1
카타콤은 기독교 박해에 있어 상징적인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카타콤과 기독교 박해: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을 2부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한 번 들어가면 미로처럼 생긴 구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잡으려 했던 로마 병사들은 길을 헤맸다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초기 그리스도인의 도피처가 되고 피난처가 되었던 카타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빛나는 빛을 품고 살았던 것이지요. 1부에서는 카타콤의 의미와 구조에 관해 알아보고 이어지는 2부에서 또 카타콤에 관해 함께 생각할 것들, 나눌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피난처 카타콤
기독교 역사 초기에 로마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의 위험에 자신을 내어놓고 사는 삶이었다. 당시 로마는 막강한 힘으로 세계를 정복해 가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나 로마가 인정한 이방 종교들을 거부하면서 엄청난 박해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땅 위의 박해와 땅 아래의 기도’로 이어지는 삶이었다.”는 말이 있다. 그들의 삶은 콜로세움과 카타콤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신자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자연히 신자들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는데, 점차 지하 묘지에 모여들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숨어 지내던 지하 교회나 묘지를 카타콤(catacomb)이라고 부른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거세지자 카타콤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난처로 변했다. 카타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피난처인 동시에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들의 교회였고, 죽어서도 가까이 있고 싶어했던 그들만의 보금자리였다.
지하 묘지의 통로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사방팔방으로 뚫려 있고, 각 층은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하 묘지는 대부분 4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좁은 통로와 계단이 체계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은 그 통로의 벽에 구멍을 뚫고 안치했다.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이교도들도 죽은 자를 카타콤에 장사하였다.
카타콤은 통로를 좁게, 그리고 미로처럼 만들어서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여간해서는 출구를 찾거나 되돌아갈 수 없었다. 카타콤의 내부는 칠흑같이 어두워서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어둠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카타콤은 깊은 흑암과 밝은 하늘의 소망이 교차되는 곳이었다. 카타콤에서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과 끊임없이 연락하고 접촉하면서 소식을 듣고 양식을 공급받았는데, 이러한 일들은 주로 야간에 이루어졌다.
박해와 카타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집회였는데, 집회를 위해 성도들이 찾은 가장 안전한 장소는 지하 묘지였다. 카타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처 겸 은신처였다. 로마제국의 기독교인 색출 작업은 주로 낮에 이루어졌기에 집회는 대부분 밤에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에서 집회를 갖거나 그곳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지하 묘지를 수색했고,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이 카타콤으로 숨어든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였다. 카타콤의 갱도는 미로와 같이 복잡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이를 이용해서 추격하는 로마 병사들을 따돌리는 데 적합했다. 미로 속을 헤매다 시체로 발견되는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카타콤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을 날마다 확인했다. 죽은 자를 묻기 위해 만들어진 카타콤은 그리스도인을 보호하는 피난처가 되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약 250년 동안 온갖 박해를 받았다. 때로는 콜로세움에서 맹수에게 살과 뼈가 뜯기고, 때로는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복음과 교회를 지켰다.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성도들의 안식처는 오직 구원자이신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들은 썩어 냄새나는 시체들과 카타콤에서 수함께 세대를 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목자라는 순수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카타콤의 규모와 구조
순교자 세바스찬의 묘지가 로마 아피아 가도(街道)에 면한 두 언덕 사이에 있어서 3세기에 이 묘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 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 후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묘지들이 발견되면서 모든 지하 묘지를 카타콤이라 부르게 되었다.
갑바도기아에서 발견된 카타콤은 2천 명 정도가 생활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로마 근처에는 60여 개의 카타콤이 있으며, 그 안에서 약 960km의 통로가 발견되었다. 로마 근교에 있는 카타콤은 지하 통로의 길이가 500km 이상 된다.
로마의 카타콤 중 칼리스토 카타콤은 묘역(墓域)만도 4만 5천 평에 달한다. 그물처럼 얽혀져 있는 통로들은 여러 층으로 파여 있으며, 깊이 들어간 곳은 지하 20m가 넘을 정도이다. 그곳에 묻힌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대략 10만여 명이나 된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카타콤을 찾는데, 안내자 없이는 카타콤에 들어갈 수 없다. 5층쯤의 깊이로 지하로 파들어간 데에다 거미줄처럼 미로가 얽히고설켜 쉽게 길을 잃기 때문이다. 카타콤은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터널형 통로를 사방으로 뚫었고, 계단을 만들어 2~5층 정도의 여러 층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그 벽에는 모두 약 600만 명에 이르는 성도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카타콤과 기독교 박해: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 (2)
카타콤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기로 합니다. 카타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박해에도 교제를 나누며 천국을 바라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땅 속 어두운 곳에서 살았지만 가장 밝은 하늘나라로 간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
로마의 황제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에게 가장 심하게 박해를 가했던 황제들은 카라칼라,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등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시기는 로마의 역사가들이 ‘피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한 시기였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평생을 지하에서 살았기에 햇빛을 보지 못해 병으로 죽어간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카타콤 교회를 중심으로 로마의 모든 지역과 계층에 침투하여 복음을 전했다. 상류층 인사들 중에서 구원받고 카타콤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들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카타콤 교회를 위해 쓰도록 드렸다. 카타콤에서 필요한 식수는 제일 하층(下層)의 통로 밑에 우물을 파서 거기에서 필요한 만큼의 물을 얻었다.
그들의 소망은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서 사는 영광에 들어가는’ 문이었다. 이들의 예배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이 있었다. 그들은 지상으로 나가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전했고, 카타콤 안으로 들어와서는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며 뜨거운 감사에 젖었다. 그들은 진정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들이었고, 충성된 그리스도의 사신(使臣)들이었다.
교제의 사랑방
카타콤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이 발견될 때마다 그들의 뼈대는 그들이 당한 끔찍한 일들을 말해준다. 머리는 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갈비뼈와 어깨는 부서져 있으며, 뼈들은 종종 불에 태워져 있다. 그처럼 가공할 만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카타콤에서는 소망과 믿음을 표현한 비문들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사랑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벽에는 “사랑했던 당신들 때문에 나는 63세까지 살 수 있었소!”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교도들의 다음과 같은 비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비문과 아주 대조적이다.
“현재를 위해서 살라.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20세의 나이에 나를 데려가는 신을 저주한다.”
카타콤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온갖 즐거움과 특권을 버리고 많은 고난과 핍박과 조롱을 받으면서 캄캄하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계 속 살 수 있었던 힘,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힘은 부활의 주님에 대한 믿음,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려는 마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 그리고 말씀과 은혜로 충만한 교제에서 나왔다. 이런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어진 고통스런 생활과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자신과 형편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간절하고 뜨겁고 주님과 가까웠던 교회는 분명 카타콤 교회였다.
박해와 순교, 무수한 죽음과 공포를 이겨낸 신앙의 힘이 깃든 곳, 카타콤!
지하 묘지 카타콤은 콜로세움과 함께 초대교회 성도들이 겪었던 수난과 순교를 나타내는 의미 깊은 역사적 상징물이기도 하다. 죽음의 상징이었던 콜로세움과 카타콤은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간절히 소망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의하여 하늘나라로 통하는 축복의 통로로 바뀌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 13:14)
인류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고난과 환난의 시대를 이겨낸 초대교회 성도들의 숨결이 카타콤에 배어 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 선포되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박해를 받던 교회는 묘지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의 지하 묘지는 모두 교회의 공적인 재산으로 인정받게 된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에도, 신자들은 자신의 무덤을 땅 위에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타콤에 묻혀 있는 순교자들과 믿음의 사람들 옆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묻히기 위해 계속 그들의 무덤을 지하에 만들었다. 이러한 일은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카타콤의 벽화와 묘비명
카타콤의 묘와 벽면에는 당시 그곳에 숨어서 지내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보여주는 그림이나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요나, 불 속에 던져진 뒤에도 타지 않고 살아난 다니엘의 세 친구,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구한 선한 목자 등을 그린 그림들은 언제 로마군에게 잡혀서 맹수의 밥이 될지 모르는 자신들이지만, 그들을 지켜주고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신앙의 표현이었다.
또 물고기 형상이 그려져 있는데, 그리스어로 물고기는 ‘ΙΧΘΥΣ(ichtous, 익투스)’라고 한다
이 단어를 위아래로 나란히 늘어놓으면,
ΙΗΣΟΥΣ(Iesus, 예수)
ΧΡΙΣΤΟΣ(Christos, 그리스도)
ΘΕΟΥ(Theou, 하나님의)
ΥΙΟΣ(Uios, 아들)
ΣΩΤΗΡ(Soter, 구세주)
위 단어들의 첫머리 글자들과 맞아떨어진다. 이런 단어를 합체문자(合體文字, 그리스어로 acrosticos)라고 하는데, 어떤 단어들이나 문구들의 첫 글자들을 따서 합성하는 단어이다. 물고기 형상의 그림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가장 널리 퍼진 상징이었다.
또 ‘ΑΩ(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로, 그리스도가 만유의 시작과 끝이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카타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새겨져 있다.
“그는 평안히 잠들다. 하나님 안에서 살다. 영원히 산다.”
“울지 마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죽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란다.”
“존경하는 아버지 아스칸디우스, 사랑하는 어머니 레기나, 성령 안에 다시 사시리라. 아들 펙토리우스
로마는 기독교인들을 정치와 군사로만 박해하는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철학자들을 통하여 사상적으로도 공격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기독교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데에 쏟아 부었습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박해에 순교자들과 인도자들이 복음을 지켰던 것 처럼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변증가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흐리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철학가들의 사상에 반격하는 또 다른 복음의 전쟁이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기독교를 공격한 철학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지는 포스팅에서 변증가로서 기독교 신앙을 정립한 부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시다.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공격
로마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과 병행하여 문서적,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단은 복음을 대적하기 위해 물리적 박해만 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상적 공격수들은 주로 철학자들이 많았는데, 루키아누스(Lucianus of Samosada)와 켈수스(Celsus, 셀수스) 등이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안팎에서 공격을 가하는 이단들(영지주의, 몬타니즘, 반삼위일체주의)이나 철학자들과 교회가 싸우면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辨證, 변론하여 증명함)하는 변증서들이 많이 저술되었고, 교리문답 학교도 등장했다. AD 125년 즈음에는 아테네 교회의 감독 콰드라투스가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변증서를 썼고, 아리스티데스는 피우스 황제에게 변증서를 썼다. 하지만 그 중요성으로 볼 때 저스틴(Justinus, 유스티누스)이 기독교의 첫 변증가로 꼽힌다.
켈수스(Celsus)
켈수스(Celsus)는 2세기 후반의 인물로,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울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진리>에서 기독교에 대하여 총체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비판을 시도했다. 켈수스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와 상식을 다 동원해서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켈수스의 사상은 그리 깊지는 않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 시트라우스가 사용한 말들 중 상당수가 켈수스의 저서에서 나왔을 만큼 날카롭게 기독교를 부정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을 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식의 대중적 비판을 답습할 만큼 경솔하지 않았고, 기독교 신조의 각 조항을 조목조목 조롱하고 비방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즉 그릇되게 나가지 않을 세상을 창조했을 것이라고 했다.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다는 증거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데 관심이 있었다면 팔레스타인을 자기 땅으로 선정했을 리 만무하며, 아울러 그 땅에서 저급한 하층민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나간 사람들뿐이다.”
신플라톤주의자 포르피리우스(Porphyrius)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냉정한 인물로 여겨지는 포르피리우스(Porphyrius)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 타락, 성(成)육신 구속, 심판 등의 진리를 송두리째 배격했다. 그는 다신교 옹호자로서, 교회에 대해 몹시 적대감을 품고 무려 15권의 저서를 지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는지, 그리스도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동시에 그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또 신약과 구약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 사도들이 서로 분쟁했다는 것, 제자들의 사상이 일치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 가르침이 불완전하다고 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거짓말을 했으며, 제자들의 본이 되지 못했다고 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사후에 그 교훈을 곡해하여 사족을 달았다고 했다.
초기 교부들은 그를 가장 지독하고 화해할 수 없는 신앙의 적대자로 여겼다.
대항마(對抗馬) 변증론자들
철학자들의 공격에 맞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소문을 제거하고, 진리의 복음과 교회를 지키고 변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학식 있는 자들이 일어나서 자신들이 믿는 바를 붓으로 담대하고 능력있게 전했는데, 이들을 변증가(apologist)라고 부른다.
변증가들은 하드리안 황제(재위 117~138) 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오해나 비난에 대하여 편지나 글로 변박하고, 기독교인이라고 까닭 없이 박해받는 사람들이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변호하며 복음의 진리를 역설하였다. 이들의 글은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고 체계화해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고 북돋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속사도들이 서신을 남겼다면, 변증가들은 작품을 남겼다. 일부 변증가들이 복음의 진리를 헬라의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한 경향 때문에 신앙적인 면에서는 속사도들의 신앙보다 후퇴했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한편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변증가들 중에는 주로 2세기에 출현한 신학자들, 특히 철학적 소양이 풍부한 헬라(동방) 계통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순교자 저스틴은 탁월한 변증가였다. 또 라틴의 교부 터툴리안(Turtulian, 155~230 추정)도 대표적인 변증가였다. 터툴리안은 ‘신약(新約)’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기독교박해와 변증가 저스틴
저스틴은 사상적인 기독교 박해에 대항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변증가입니다. 철학에 박식했던 저스틴은 성경을 통하여 참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성경이야 말로 참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스틴은 살아있는 동안에 변증가로서 구약성경의 예수님을 전했고 그가 남긴 <변증서(Apology)>에서 복음 편에 서서 그리스도를 증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변증가 중에서도 저스틴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저스틴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그 후에 그는 순교하기 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스틴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대표적인 변증론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2세기 초 팔레스타인(세겜 땅)에서 희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저스틴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으로, 열렬한 철학도였다. 여러 철학을 공부하고, 특히 플라톤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30대 초반에 그는 ‘플라톤 철학의 최고봉’에 있는 신(神)에 깊이 매혹되어 에베소 근처의 해변을 걷고 있던 중 거듭난 늙은 유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온유하고 진지한 노인은 저스틴에게 그가 대답할 수 없는 많은 질문을 하였다. 많은 토론이 있은 후, 노인은 저스틴에게 “그대는 행함과 사랑이 없는 말쟁이에 지나지 않소. 그대의 목적은 선의 실천자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리한 논쟁가, 교묘한 궤변론자가 되려는 데 있소.”라고 하며 “성경을 뒤져 보라. 히브리 예언자들을 연구해 보라. 그대 앞에 광명의 문들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지혜와 계시를 주시지 않는 한 아무도 이것들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저스틴의 눈에 그 노인에게는 참된 철학이 있어 보였다. 이후 저스틴은 구약 성경을 탐독했고, 예수 그리스도 구약을 성취한 구원자요, 진리임을 발견했다.
“나는 이 철학만이 안전하고 유익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플라톤의 사상에 기쁨을 느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죄악과 쾌락 속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가 죄 사함의 경험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사실을 확신했고, 모든 철학 중 기독교가 참된 철학이라는 것이 그의 중심 사상이었다. 이후 그는 기독교의 역사와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열심히 받았고,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이자 뛰어난 변증론자가 되어 강연과 논쟁과 저술 등을 통해 복음을 변호하고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구약의 그리스도를 증거한 저스틴
스스로 철학자라고 했던 저스틴은 거듭난 뒤 자신이 갖게 된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편지와 글을 썼고,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가혹하게 다루자 그리스도인들을 변증하는 글을 써서 황제에게까지 띄웠다.
저스틴에게 있어서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리스도였다. 저스틴은 시편 22편을 26회나 인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어떻게 예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등 여러 시편을 자주 인용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증명하기 위해 이사야 52장 13절과 53장 12절을 29회나 인용하였다. 또한 그는 구약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신약의 예표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노아 방주의 나무는 십자가의 나무를, 야곱의 아내 레아나 라헬은 교회를,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하였다.
복음의 변증가요, 순교자였던 저스틴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138-161)의 통치 기간에 저스틴은 로마에서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스틴은 사상과 토론과 논증에 열중한 학자였다. 그가 마흔 다섯 살 때, 고린도에서 철학을 공부한 유대인 철학자 트리포(Trypho)와 논쟁을 벌였다. <트리포와의 대화>라는 책에서 저스틴은 트리포에게 구약 성경에 나타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설명했다. 이 책은 주로 유대교에 공감하는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뛰어남을 변증하고 있다.
저스틴은 로마에서 한 유명한 철학자와 논쟁을 벌였고, 영지주의적인 발렌틴 파(派), 마르시온 파 사람들과 유대인들과도 논쟁하였다. 그러자 그의 삶을 시기하는 철학자들이 일어나, 저스틴은 ‘이방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드리라’는 황제의 새로운 법을 어겼다고 고소되었고, 재판관 앞에 서게 되었다. 재판관은 저스틴의 신앙에 대해, 교회의 모임에 대해 물었다. 저스틴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어디에서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말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는 다른 신들에게 예배하고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길을 택했다. 저스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때에 일어난 박해 기간에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채찍질을 당하고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자(Martyr)’라는 별칭을 얻었다.
저스틴의 변증서들
저스틴의 첫 <변증서(Apology)>는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그의 양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로마 국민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와 공평을 베풀 것을 제안하였다. 총 68장으로 구성된 제1 변증서에서 그는 최초로 이교도의 여러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논박하였다. 4~13장까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논박하고, 그 뒷장들에서는 기독교의 우월성을 변증하였다.
제2 변증서는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을 항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교도인 남편이 그리스도인인 아내를 로마의 행정장관 우르비쿠스에게 고발했는데, 그 부인은 남편의 생활방식 때문에 이혼하기를 원하였다. 귀족이었던 그녀가 자신에 대한 재판을 연기시키는 데 성공하자,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복음을 전해준 프톨레미라는 사람을 투옥시켰다. 프톨레미는 재판에 회부되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였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루키우스라는 사람이 방청인 자격으로 그 부당한 판결에 대해 항의하였다가 그리스도인인지 심문 받았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도 즉각 사형을 언도받았다. 저스틴은 이들을 부당하게 처형한 것에 대해 격렬히 항변했다.
그는 또 “그리스도는 소크라테스보다 엄청나게 뛰어나다. … 왜냐하면 아무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위해 죽을 만큼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과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분을 위하여 부귀,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초개같이 여겼다.”라고 말했다.
저스틴이 한 변증의 공로는, 당시 만연해 있던 ‘기독교인은 무신론자고 부도덕하며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을 확실히 격침시켰으며,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저스틴의 사상은 전반적으로 성경에 기반을 두었으나 그의 철학적 배경에서 받은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저스틴은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까지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지나친 비약과 오류를 보이기도 하였다. 철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연속성을 설명하려 했던 접근방법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이 계승했다. 터툴리안은 그런 저스틴의 시도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옷을 입은 철학자’라고 아주 단호하고 비판적이었다
변증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 라틴신학의 아버지
라틴교회는 초기교회에서 언어에 따라 분화된 세 그룹의 교회(시리아-아르메이나어계, 헬라어계,라틴어계)중 하나입니다. 기독교 변증가 터툴리안은 라틴어로 신학적인 저술을 하여 후에 라틴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변증가 터툴리안은 신약과 삼위일체 와 같은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저술활동은 <변증>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변증가 터툴리안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라틴 신학의 아버지 터툴리안(Tertullianus)
터툴리안은 160년경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에서 로마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수사학과 법률을 공부하고 법률가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40세에 그리스도를 만났다. 당시 로마 사회에는 부도덕한 삶이 만연해 터툴리안은 매우 금욕적이었으며, 육신을 절제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기독교 신앙을 위한 변증가로서 광범위한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철학, 법률, 헬라문학, 라틴 학문에 심오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번뜩이는 지성, 꺾이지 않는 의지, 불같은 웅변, 날카로운 풍자 등 풍부한 은사를 가지고 진리 수호에 총력을 기울였던 터툴리안은 탁월한 변호사, 논리적인 웅변가, 철의 의지를 지닌 변증가로 평가된다.
그의 방대한 저술들 중 가장 유력한 저서는 『변증Apology』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 변증가들이 한 번도 다룬 적이 없는 강력한 논점들을 다루었다.
터툴리안은 그의 신학적 저술들을 라틴어로 저술했고, 라틴역 성경도 마련하여 서방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터툴리안은 2~3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데, 이교도들도 그의 문체에 매료되어 그의 작품을 읽을 정도였다. 그는 법률학적인 용어나 수사학적으로 세련미가 넘치는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색출해낼 필요는 없어도 당국에 고발된 기독교인들을 처벌하라’는 트라얀 황제의 불의한 판결에 항거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결코 사과하지 않는 변증가’로 평가했다. 5세기의 한 저술가는 “그가 언급하는 모든 말은 경구(驚句)였고, 그가 진술한 모든 내용들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적자들을 완전히 패배시킬 때까지 논증했지만, 앙심을 품거나 부정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주장의 정당함을 확신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주장을 변증했다.
지리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면, 카르타고는 라틴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 라틴 신학자의 중심 인물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들은 대개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임에 비해 라틴 교회의 감독들은 대개 법률, 정치 등의 사회과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영적 진리의 특성을 잘 설명한 데 비해, 라틴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분명히 해주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즉, ‘역사적 사건과 그것의 근거가 되는 성경의 계시, 그리고 그 계시에서 나온 교회를 통해 기독교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주는 데 기여했다.
터툴리안은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발견할 때까지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발견했으면 믿어야 한다. 그 이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여러분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붙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더 이상 믿을 것이 없음을 믿어야 하고,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터툴리안은 모든 사변(思辨)을 배척했다. 그리고 성경 밖의 문헌에 근거한 신학 추구를 거부했다. 그는 이교 철학이 모든 이단들의 원천이라 하였다.
단호하며 열정적인 그는 처음에는 주류인 정통교회를 지지하다가 207년에 몬타누스주의(주로 세상의 임박한 종말과 거기에 입각하여 더욱 엄격한 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재혼도 금하고 금식을 많이 하며 박해 시에 숨는 일도 금했다)에 가담했다. 법률가적인 그의 성향은 엄격한 질서를 그리워했고, 당시 교회는 터툴리안의 기준에 미달이었기 때문에 몬타니즘과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몬타니즘에 환멸을 느끼고 거기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교회의 존경과 신뢰를 계속 받았다. 그는 220년 이후 연로하여 죽었다.
터툴리안의 『변증』
그의 저술 중 가장 유명한 책은 단지 『변증Apology』이라 불린다. 터툴리안의 저술들은 저스틴과 같은 2세기 변증가들의 저술들을 계승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저술보다 훨씬 뛰어난 면을 지니고 있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인이란 이유 때문에 사형을 선고하는 불법에 대하여 그의 모든 해박한 법률 지식을 동원하여 논박했다.
“우리는 단지 어제만을 제외하고는 당신(황제)의 모든 곳들-도시들, 섬들, 요새들, 마을들, 시장들, 군대의 막사들, 궁전, 원로원, 공회 등-에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신전은 멀리했다.” 『변증』 37장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모든 재난의 원인이며 모든 사람이 겪는 고통의 원인이라는 근거 없는 모함으로 그들의 증오를 정당화한다. 만일 티베르 강이 도시의 성벽에 넘쳐 흐르거나 혹은 나일 강이 주위 평야를 적시지 않거나, 만일 천체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든지 혹은 땅이 움직이든지, 기근이 있든지 혹은 전염병이 있다면 곧바로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그리스도인들을 사자에게 던져라.’
무슨 소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마리의 사자에게 던지란 말인가?” 『변증』 40장
“(우리에 대한)당신들의 박대가 아무리 교묘할지라도 그것은 당신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대신에, 그것은 우리 종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당신들이 우리를 쓰러뜨릴 때마다 우리의 수는 더 늘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교회의)씨앗이다. 당신들이 비난하는 그 내용이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 내용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그 비난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을 연구하고 감동을 받지 않겠는가? 이렇게 연구한 그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변증』 50장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시했다.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활동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이레니우스와 함께 영지주의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또 오리겐과는 달리 그리스 철학을 증오하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을 이단의 근원으로 보았다.
터툴리안은 그의 생애를 자신의 신앙의 일관성과 반대자들의 모순을 보여 주는 데에 쏟았다. 그는 진실하고 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단호한 인물이었다. 한편으로 그의 성격은 다소 모나고 거칠고 괴팍했다고 전해진다.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실을 과장하거나 기독교인들의 도덕성을 과장하는 경우도 혹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툴리안의 신학은 정통으로 인정받고 있고, 그의 탁월한 논리적 사고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신약(新約)’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의 본질과 세 位格(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특별히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개념은 후에 있을 니케아 종교회의에 큰 영향을 준다. 그는 또 어린아이에게 주는 유아 세례를 반대했다.
기독교박해와 변증가들: 콰드라투스,아테나고라스,멜리토
기독교박해와 변증가들에 관한 포스팅을 이어가보겠습니다. 기독교박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변증가들이 사상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디오그네투스 선생에게 보낸 편지'로 알려진 한 서한은 작자미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권하는 내용입니다. 사본은 전쟁으로 소실되었지만 그 전에 기독교학자에 의해 연구되고 출판되었습니다. 콰트라투스, 아테나고라스, 멜리토 등 의 변증가들도 사상적인 기독교박해에 대항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이 서한의 내용과 함께 다른 수많은 변증가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오그네투스 선생에게 보낸 편지
작자 미상의 저자가 2세기 말엽과 3세기 초엽 사이에 집필한 변증론 『디오그네투스(Diognetus)
에게 보낸 서한(Epistola ad Diognetum)』이라는 문헌이 있다. 이 문헌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앙리 에티엔느(Henri Etienne)가 1592년 파리에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한』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면서이다. 이 문헌의 사본이 처음 발견된 것은 15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어느 생선가게의 헌 종이 꾸러미 안에서였다. 희랍어를 공부하러 온 젊은 학생이 이것을 헐값에 산 뒤 한 신학자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서방 교회에 이 문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스트라스부르크 시립도서관에 사본이 보관되어 있다가 1870년 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지만, 이미 여러 번 연구되고 출판된 뒤였다.
이 문헌은 호교론(護敎論)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권유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곧 디오그네투스가 던진 그리스도교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편지 양식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그리스도 신앙에 관한 한, 신약성경을 제외하고 이 책만큼 현대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저술은 없다”라고 평가할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일부 학자들은 저자를 유스티누스로 보기도 한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남과 다르다면 영토가 달라서도 아니고 하는 말이 달라서도 아니고 의복을 입는 모양이 달라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네 고유한 도성에 고립되어 사는 것도 아니고 특이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모양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교리는 인간들의 불안한 지성이 탐구하여 달성해낸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인간적인 철학 체계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의 운명이 정해주는 대로 그리스 도시들이나 야만인 도시에 거주하며, 의복이나 음식이나 그 밖의 생활방식에 있어서 지역의 전통에 그대로 순응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서는 놀라운 모범을 보여주며, 그 모범은 누구나 자백하듯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지상에 거처하지만 마치 이방인 같습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본분에 참여하지만 그들은 외국인 취급을 받습니다. 어느 이역(異域) 땅이나 그들에게는 조국이요, 어느 조국도 그들에게는 이역 땅입니다. 누구나 하듯이 그들은 혼인을 하고 자녀를 낳지만 갓난아기를 내다 버리지는 않습니다. 누구와도 밥상을 함께 나누지만 잠자리를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육을 입고 살지만 육에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삶을 이루고 가지만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법률에 복종하지만 그들의 생활 모습은 법을 초월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습니다. 혐의가 없으면서도 유죄로 판결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죽음을 부여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생명을 얻습니다. 처형을 당할지라도 다시 살 것을 생각하고서 기뻐합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실은 부유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지만 그들은 충만해 있습니다. 그들은 경멸을 받지만 멸시 중에도 하느님 앞에서는 오히려 영광을 받습니다. 그들의 영예는 사정없이 짓밟히지만 그것이 그들의 무죄함을 증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욕을 당하면서 상대방을 축복합니다. 온갖 무례를 가하지만 그들은 존경으로 대합니다. 선을 행하고서 악인으로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벌을 받고서도 그것이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는 양 즐거워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단자들이라고 공격하고 헬라인들은 그들을 박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워하는 이유를 밝히지 못합니다.”
“영혼은 불멸이면서도 죽어야 할 운명의 육체 안에 예치되어 있는 것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비록 타락하기 쉬운 세상사 가운데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지만 그들은 하늘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거룩함을 바라보며 고대하고 있습니다. …
우리 불의가 극에 다다라 그 책벌의 형태로써 고초와 죽음이 임박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환히 나타났을 때, 미리 작정하신 자비와 권능을(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보여주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워하거나 거부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내로 우리를 참으시며, 자비하심이 넘쳐 우리 죄를 짊어지고 자원하여 그 죄를 속량할 대가로 당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악인을 위해 거룩하신 분을, 죄인을 위해 무죄하신 분을, 불의한 자를 위해 의로우신 분을, 썩어버릴 자를 위해 썩지 않으시는 분을, 그리고 죽어야 하는 자를 위해 불멸이신 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면 우리 죄를 덮어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안에서가 아니라면 악하고 불의한 우리가 어떻게 의(義)를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 복된 전환이여! 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업적이여! 오, 기대치 못할 은혜여! 많은 이들의 불의가 한 의인 안에서 덮여져, 한 의인의 정의는 수많은 불의한 이들을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 외의 변증가들
콰드라투스(Quadratus)
아테네의 감독으로서 기독교 최초의 변증가이다. 변증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125년경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인 변증 서신을 보냈다. 그는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기독교를 힘있게 변증하였다.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철학자로 활동하다가 후에 기독교를 믿었다. 177년경에 쓴 그의 저서 『기독교에 관한 사명』과 주님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부활』이 유명하다. 그는 변증가 중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강력한 변증론자였다.
멜리토(Melito)
사데 교회의 감독이었던 멜리토는 신중하고 위엄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찢기고, 그리스도인들이 체포와 고문을 당하며, 맹수나 도끼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화형에 처해지는 모습을 보며 황제 앞에 변호사로 섰다.
다시 순교를 주제로 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해봅니다. 초기 기독교를 향한 박해에 수많은 순교자들의 순교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그리스도로 인한 새 생명을 얻기위해 자신의 몸을 포기했습니다. 로마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압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복음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통해 더 힘있게 전해졌습니다.
죽음을 이긴 순교자들의 믿음과 소망
초기 기독교는 모진 박해의 파고(波高)를 헤치고 살아남았다.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란 칙령>과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인 1~3세기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과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강렬한 소망,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였다.
어느 시대에나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세상의 통치자들과 관원들, 거짓 종교의 지도자들은 복음을 대적하고 핍박하였다. 특히 사단은 이 세상에서 거듭난 교회를 말살하기 위하여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법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사단의 목표는 이 세상을 복음이 없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지켰다. 사탄이 성도의 몸은 죽일 수 있었지만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죽일 수는 결코 없었다.
순교자들
신약 시대 첫 순교의 면류관을 쓰는 영광은 스데반에게 돌아갔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했고, 복음을 증거하는 그의 얼굴은 천사 같고 악의가 전혀 없었으며, 죄인들을 향한 긍휼이 가득했다.
열두 사도 중 첫 순교자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헤로디아의 오라비였던 아그립바의 칼에 의해 처형당했다.
AD 67년경에 순교한 베드로는,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시키려는 형리(刑吏)에게 ‘나는 나의 구주께서 돌아가신 자세로 죽기에 합당치 못하니 내 머리를 아래로 향해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안드레는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가야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두 나무를 중앙에서 가로지른 카이(X) 모양의 십자가에 달려 백성들을 권하고 기도하면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AD 67년경 네로의 박해 때 순교한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으므로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고 목을 베어 죽였다고 전해진다. 폴리갑은 불꽃 속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육체를 떠나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들어갔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던 이그나티우스는 AD 115년경 원형경기장에서 굶주린 맹수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많은 영적 목자들을 세우고 창에 찔려 죽었다고 전해진다. 디모데는 이교들의 우상 숭배를 나무라다가 곤봉에 맞아 죽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런 분들 외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이름도 남기지 않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변치 않는 약속 안에 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 6:9)
어떤 사람은 끓는 기름에 던져졌고, 어떤 사람은 사지를 절단 당하거나 갖가지 방법으로 고안해낸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들과 정혼한 신랑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달려나갔고, 박해는 순교자들의 믿음을 별처럼 빛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불과 칼, 십자가형이나 황제의 위협 아래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품으며 복음을 전파했고, 어떤 지역에서는 이방 종교가 거의 멸절해버릴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순교사화: 유세비우스 <교회사>, <순교사>, <피 흘린 발자취>가 전하는 순교자들
순교에 관한 주제로 지난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이번에도 '순교'에 이어 '순교자'에 관하여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나 존 폭스의 <순교사>, J.M 캐롤 박사의 <피 흘린 발자취> 등을 통해 여러가지 순교사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사가들이 전한 순교자들의 이야기 중에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들 중 몇 가지를 자세히 소개합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202년 ‘유대교와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데, 그때 북아프리카의 페르페투아(Perpetua)가 순교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페르페투아는 20대의 결혼한 귀족 여성으로, 간수의 허락을 받고 젖먹이를 데리고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곁에는 펠리키타스(Felicitas)라는 임신한 노예 소녀와 몇 명이 같이 있었다. 재판 날이 다가오자 딸을 끔찍이 사랑했던 페르페투아의 아버지가 감옥으로 찾아와서 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설득했다.
“얘야, 내 흰머리가 가엾지 않니? 내게 아버지라 불릴 만한 가치가 있다면 네 아비를 불쌍히 여겨 다오. …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게 해다오. … 네 아들을 생각해 봐라. 네가 없으면 그 아이가 어떻게 살겠니? 자존심 때문에 우리 전부를 파멸시키지 말아 다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무척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애원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의 결심은 아버지를 몹시 격노케 해서 아버지는 딸을 심하게 때리고는 며칠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총독 마누티아스는 그녀에게 황제를 위해 제사를 드리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명했다. 그녀는 싫다고 대답했고, 아이를 빼앗긴 채 컴컴한 굴 속에 던져졌다.
얼마 후,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찾아와서 아주 부드럽게 신앙을 포기하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을 온전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재판장은 다시 한번 자신의 생명과 아버지의 눈물, 그리고 어린 아기의 인생을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오셔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으시더니, 턱수염을 잡아뜯고 얼굴을 감싸쥐시고는 살아오신 날들을 저주하기 시작하셨고… 나는 노년에 이런 불행을 끼쳐드려 너무나 슬펐다.”라고 했다.
그러나 재판을 받을 때 페르페투아는 그리스도로부터 온 믿음과 사랑의 위대한 힘을 훌륭하게 증거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육체의 고통과 혈육의 정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었다.
함께 사형 판결을 받은 펠리키타스가 진통이 찾아와 소리지르자 간수가 “이만한 고통에도 소리를 지르는데, 맹수들에게 던져질 때는 어떡할래?” 하고 물었다. 펠리키타스는 “나의 고통은 나 자신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내가 맹수들을 대면할 때, 내가 그분을 위하여 고난 당하기 때문에, 내 안에 거하셔서 나를 위해 고통을 담당하실 분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딸을 낳았고, 그 아이는 한 그리스도인이 데려가 친딸처럼 키웠다.
원래 로마정부는 임신한 여성은 처형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순교하기를 사모했다. 그들이 영원한 본향으로 가던 날, 총독 앞을 지나가면서 “당신은 우리를 심판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심판하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대여섯 명의 거룩한 순교자들은 카르타고의 검투장에서 처형되었다.
줄리안(Julian)
길리기아 태생 줄리안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체포되어 고통을 당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어떤 노력도 그의 신앙을 버리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사람들은 그를 채찍으로 때린 후 독사와 전갈이 잔뜩 들어 있는 가죽가방 속에 집어넣어 바다에 던져버렸다.
블란디나(Blandina)
고울(Gaul) 지방에 혹독한 핍박이 찾아왔을 때 남프랑스의 노예 소녀 블란디나는 이방 신들을 믿고 따르기를 거부하여 사람들과 함께 경기장으로 끌려나갔다. 15세 난 소년 폰티쿠스(Ponticus)는 제일 먼저 죽었고, 블란디나는 제일 나중을 위해 남겨졌다. 그녀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하며, 그리스도 앞에서 다시 만나자고 권면했다. 마침내 그녀의 차례가 되었고, 맹수들 앞으로 가는 그녀는 마치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결혼식장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맹수들 앞에 섰으나 맹수들이 그녀를 해치려 하지 않아, 그녀는 불에 달구어진 의자에 앉혀졌다. 기력이 없는 그녀는 자신의 몸이 타는 것을 알고도 저항할 수 없었다. 고통과 공포가 오고가 기진맥진하여 죽기 직전의 모습이 되자 그녀는 황소가 갇혀 있는 감옥에 던져졌고, 성난 황소가 뿔로 그녀의 온 몸을 들이받아서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피에 물들고, 불에 탄 그녀의 몸은 사람의 형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에는 목을 잘랐는데, 그것이 그녀에게는 마지막 고난이며 영원한 영광에 참예하는 일이었다. 참혹한 고통을 통과하여 그녀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고 그리스도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시신은 6일 동안 시민들에게 전시되었고, 이후 불태워 재를 론강(江)에 뿌렸다. 177년 프랑스 리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마리아 드 코시카오(Maria de Coceicao)
‘마리아 드 코시카오’라는 젊은 여인이 오빠와 함께 리스본에서 살고 있었는데, 종교 재판관에게 체포되어 고문대에 올려졌다.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재판관이 요구하는 대로 고백하고 말았다. 쇠사슬이 풀리고 다시 감방으로 보내져, 그녀는 팔 다리가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거기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재판석에 불려나가 그녀가 고백한 것을 재인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완강히 거부하면서, 전에 고백한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억지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답에 화가 난 재판관은 그녀를 다시 고문대에 누이라고 명했다. 그녀는 다시 연약한 본성에 휩쓸려 전에 한 고백을 또 하고 말았다. 그녀는 즉시 감방으로 보내졌다. 세 번째 재판관 앞에 불려나온 그녀는 고백에 서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녀는 이번에도 전과 같이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나는 내 육체의 연약함에 두 번이나 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고문대에 있는 동안 또다시 약해져서 그렇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100번 고통을 준다 해도 고문대에서 풀려나오자마자 나는 고통으로 인해 억지로 고백한 사실들을 다시 부인할 것입니다.”
재판관은 그녀를 세 번째 고문하도록 명령했다. 세 번째 시험에서 그녀는 아주 꿋꿋하게 고통을 견뎠다. 그녀의 믿음과 인내가 증가되자 재판관은 그녀를 죽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로 끌고 가면서 매질을 한 뒤 10년 동안 추방시켰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
이처럼 무서운 박해가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복음을 향해 전진해갔고, 성도들의 피라는 풍성한 수액을 공급받아 쑥쑥 자라고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장기간의 잔혹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교회는 폭력이나 물리적인 저항으로 맞서지 않고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는 거룩한 믿음으로 맞섰다. 이 믿음의 장렬함이야말로 가장 견고하고 아름다운 무기였다. 하늘에서 받을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사모하는 소년 소녀들까지 거룩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 죽음을 향해 달려나갔다. 신앙을 지키느라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피의 증인들>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이 땅의 어떤 종교도, 무기를 들지 않고 영적인 힘으로 황제와 박해와 원수들을 이겨낸 종교는 없다.
기록된 순교 사례들 가운데 가장 처참한 모습은 주로 원형극장에서 자행되었다. 군중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뻘겋게 달궈진 쇠사슬에 결박되고, 그로 인해 살이 타들어가며 내뿜는 악취와 연기가 질식할 정도로 사방에 진동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더러는 조개껍질이나 쇠갈고리로 온 몸이 토막났고, 어떤 경건한 처녀들은 검투사나 포주에게 넘겨져 욕을 당했다. 227명의 회심자들이 달궈진 쇠로 한 쪽 다리를 절단 당하고, 한 쪽 눈이 후벼 패인 채 광산으로 보내졌다는 사료(史料)도 있다. 더러는 펄펄 끓는 납 용액을 뒤집어쓰고 죽었으며, 더러는 소금과 식초에 절여져 고문대에서 피흘리며 죽었다. 말 한 마디만 하면 그 참혹한 고통을 면할 수 있었는데도.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3~38). blog.naver.com/sangdam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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