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교회사 : 선교의 위대한 세기
XII. 선교의 위대한 세기
19세기는 유럽과 미국의 힘이 폭발적으로 팽창한 시기였다. 이 힘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다. 세계는 아직도 원시 시대에 살고 있는 지역이 대부분이었기에 근대 국가를 탈피하고 현대에 들어서는 이들 나라는 넘치는 힘을 식민지 개척에 쏟아 붓고 있었다. 유럽 정신은 곧 기독교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기독교도 전 세계를 향해 팽창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때의 기독교는 식민지주의와 함께 유럽과 미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서구외의 지역에서도 영혼을 구원하고 그 영혼들을 바른 삶으로 인도했다.
1. 19세기 상황
소위 이 ''위대한 세기''에 유럽과 미국은 번영하였다. 물질세계의 지배와 이에 대한 지식의 증가는 사람들의 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와 산업 혁명을 일으켰다. 인구는 급증하고 도시들이 계속 세워졌다. 자본주의, 사유 기업, 공개경쟁, 자유방임, 국가 통제의 극소화 등이 지배적인 사회분위기였다. 그 결과로 부는 급성장했다. 하지만 빈부의 격차도 무섭게 벌어졌다. 이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모순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주 낙관적이었다.
사실 이 번영에 기본적인 힘을 제공한 것은 기독교였다. 하지만 가톨릭 국가들은 대체로 쇠퇴하고 반면에 개신교국은 강해졌다. 개신교의 가르침이 자본주의에 영향을 준 것이다.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 그리고 미국은 복음적 각성 시기를 맞이하였다. 신앙 성장은 곧 사회로 미쳐 복지 국가의 건설로 이어졌다. 19세기 미국은 자국을 자선 제국(The Benevolent Empire)이라 부를 정도로 모든 신자, 곧 거의 전 국민이 구제와 선교에 열정을 모았다.
해외 선교 활동도 왕성해졌다. 이 시대 선교 사업은 교회가 속한 국가의 힘을 배경으로 하는 강력한 것이었다. 선교사를 많이 보내려면 우선 나라가 강하고 그 나라의 교회가 또한 강해야 했다. 여기에 헌신한 선교사들의 신앙적 모험 정신과 희생이 덧붙여져야 했다. 이런 것들이 갖추어지기 시작하면서 교회사가 래토레트가 말한 대로 ‘위대한 세기’가 시작된다. 구미의 힘과 함께 그 힘을 가능하게 한 복음이 전 세계에 밀려들어갔던 것이다. 특별히 영국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일했다.
선교사는 선교부에서 파송하였다.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해서 모금을 하고 그를 훈련시키고 파송하며, 선교사들이 필요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보급해 주었다. 그리고 선교사가 임지로 떠난 뒤에는 그 선교사가 본국에서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를 담당하였다. 반면에 선교사는 선교부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고 선교지의 상황에 대해 철저히 보고해야 했다. 선교사 숫자가 많아질수록 선교부는 더욱 확장되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선교부를 운영하려면 교회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전에는 소수의 헌신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외국의 한 나라에 가서 그 지역 사람들과 평생을 지내면서 선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선교 대상 국가들은 유럽 나라들에 의해 이미 문호를 열었다. 그 중에 많은 나라들은 구미와 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이제 어느 정도의 국가 보호 아래 조직적인 선교를 감행할 수 있었다.
전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는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성공한 예는 극소수였다. 본국 교인들의 몰이해와 선교사들의 고된 작업 속에 겨우 대표적인 지역에 대한 언어 이해와 성경 번역이라는 도구가 갖추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말까지는 구미 개신교 선교회들이 거의 전 세계를 누비고 들어갔으며, 거의 모든 교단이 이 사업에 참여했던 위대한 시기였다. 이 일은 구미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과 같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제3세계의 문명이 뒤떨어졌음을 절감하였고 복음과 동시에 서구 문명을 심으려고 했다. 많은 선교사들은 복음과 서구문명을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가서도 현지인들과 섞이지 않고 끝까지 서구인으로 산 이들이 많았다. 이들에 의해서는 별로 훌륭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선교를 잘한 선교사는 현지인들의 심성을 연구하여 거기에다 서구 문화보다 복음을 심은 이들이었다.
이 시대의 주인공은 그 누구보다도 선교의 개척자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활동하여 다른 선교사들이 들어갈 길을 열었다. 때로 어떤 선교사들의 활동은 당시 동료 선교사들이나 본국 선교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고, 간혹 선교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선교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이 오히려 이 위대한 세기를 가능하게 한 큰 힘이 되었다.
2. 선교의 개척자 캐리
18세기 말 영국 노트햄프턴의 침례교 목사들은 선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2명의 목사들이 칼빈주의 침례교 선교 단체를 창립하고 모금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이 단체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87쪽으로 된「이방인들의 구원」이란 소책자로 선교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캐리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1701년에 태어난 그는 가난하고 험한 젊은 시절을 보낸 뒤, 1785년 조그만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캐리의 좌우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였다. 이 말씀은 스스로를 몰아서 선교사가 되게 한 것이다. 선교회가 조직되고 그가 선교사로 뽑히자 온 가족은 반대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아내도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캐리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는 5개월을 항해하고 지친 상태로 1793년 마침내 인도의 뱅갈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가족은 병에 걸려 신음하고 아들 하나는 죽었다. 캐리의 아내는 정신 이상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상적인 선교의 꿈은 사라지고 있었다. 캐리는 농장의 지배인으로 일하면서 말을 배웠다. 7년 동안이나 일했지만 인도인 개종자는 하나도 없었다. 낙망의 나날 속에서도 그는 성경을 번역했고 틈만 나면 설교하였다. 학교도 세웠다. 1795년에는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얼마 후에 새로운 선교사가 도착하자 캐리는 캘커타 근방에 있는 덴마크령 세람포로 옮겨갔다. 이 지역은 곧 인도에서 침례교 선교의 중심이 된다. 캐리는 남은 생 3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여기에는 10여명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차츰 이곳은 캐리의 지도로 모범적인 선교지가 되어갔다.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처럼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토요일 저녁에는 함께 모여 서로 사랑하도록 기도했다. 그때부터 그의 사역은 성공적으로 되어갔다.
학교가 세워지고 인쇄소도 만들어졌다. 번역 사업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여기서 캐리는 뱅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다리어 등 3개의 언어로 성경을 완역하였다. 여러 다른 언어와 방언들로 된 신약성경과 쪽 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번역 작업은 이전의 가톨릭 선교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본래 가톨릭에서는 말씀보다 의식에 중요성을 두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성경 번역 작업은 선교에 가장 강한 힘을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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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람포에 선교회가 세워진 지 1년도 안되어 개종자가 나타났다. 계속 개종자는 생겼지만 전도는 매우 느렸다. 침례교 선교회가 시작된 지 약 25년이 지난 1818 년에 600명의 세례 교인과 수천 명의 신자가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캐리는 1819년 세람포 대학을 세웠다. 37명의 인도인으로 학교를 시작했는데 그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리하여 인도에서는 이때부터 교회 지도자와 복음 전파자가 양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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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의 내지 선교회
1854년 약관 22세의 젊은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가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중국 선교에 실패하여 거의 문 닫게 된 중국 복음화 협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에서 파송되었다.
그는 18세 때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중국을 목표로 의학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기 위한 극기 훈련도 하였다. 그는 생각했다. “중국에 가면 도움 얻기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의지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다.”그래서 그는 기도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선교지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테일러의 돈은 바닥이 났고 선교회로부터 후원금도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런던 선교회 지역에서 몇 달을 지냈다. 그곳의 선교사들은 너무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는 외국인 거주 지역을 벗어나서 판잣집으로 옮겼다. 결국 중국에 도착한 지 1년이 지나 그는 내륙 깊숙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선교사가 전혀 가본 적이 없는 조그만 마을에 머무른다. 그만의 방법대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는 중국옷을 입었다. 그리고 변발을 하고 머리를 검게 염색하였다. 그리고는 중국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그가 생활하는 모습이 다른 선교사들 눈에는 치욕스럽게 보였다. 선교 본부에서도 그에 대하여 대단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미 그는 정기적인 후원금이 아닌 부정기적이고 개인적인 후원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결국 3년이 지나지 못해 중국 복음화 선교회와는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마음대로 여행하며 선교하였다.
1865년 그는 중국 내지 선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때 그가 세운 원칙은 다른 선교 단체들의 것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이 선교회는 초교파적이다. 둘째, 공식 교육이 부족한 이들도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셋째, 선교회의 본부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넷째, 선교사들은 중국식 복장을 해야 하며 가능하면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겨야 한다. 다섯째, 선교회의 일차적 임무는 언제나 복음 전파이지 의료나 교육 활동이 아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지 선교회는 성장했다. 중국과 본국 양쪽의 이해 부족, 불성실한 동료들과의 마찰, 약한 건강, 1870년 아내와의 사별 등으로 테일러는 대단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의 선교 사업은 왕성해져 갔다. 선교사 후보생들은 구름처럼 몰려왔다. 서북 변방에서 시작된 선교 사업은 1882년까지 중국의 모든 성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거의 모든 성에 선교사가 상주하게 하였다. 테일러는 1905년 중국에서 잠들었다.
내지 선교회는 선교사가 중국 땅 어디에나 갈 수 있다는 확실한 가능성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1914년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선교회가 되었고 전성기인 1934년에는 1368명의 선교사가 활동하였다. 1964년부터 내지 선교회는 해외 선교회(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로 바뀌어 아시아 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이것도 19세기 테일러와 그의 동료들이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4. 아프리카 선교
수백 년 동안 아프리카는‘백인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다. 그토록 많은 선교사의 목숨을 요구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아시아에 비해 출발이 늦었지만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개신교의 아프리카 선교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었지만 남쪽 오렌지 강 이남의 해안 지방 몇 곳에 국한되었다. 그러다가 차츰 그 이북으로 그리고 내지로 확대되어 갔다. 아프리카 지역은 선교사들이 식민지주의와 야합하였다는 비판을 특히 많이 들었던 곳이다. 로버트 마펫 같은 선교사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서구식으로 사고가 진행되고 산업이 증대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후에 리빙스턴은 선교 활동과 상업 활동을 병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유럽의 문명이 아프리카인들의 생활수준과 도덕 수준을 높일 것이라는 전제에서 나왔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아프리카의 장래는 유럽 문물이 얼마나 들어오느냐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복음과 기독교 문명을 혼동한 셈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문명화가 되면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더 쉬워지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오직 소수의 선교사들만이 선교 사업이 식민지 쟁탈과 병행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 시기에 대표적인 선교사는 물론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영웅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이다. 그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아프리카 내지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길을 닦은 사람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힐 정도로 존경받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성과는 다르게 소심하고 변덕이 심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선교 사역에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아프리카로 집중시킨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1840년 27세에 도착한 아프리카는 그가 평생 밝혀 낼 신비스런 이상향이었다. 그가 결혼한 상대는 위대한 아프리카 선교사 로버트 마펫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의 여행벽으로 가족은 행복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가족들을 영국으로 보내고 평생을 홀로 여행하였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과 아랍인들의 악질적인 노예무역을 목격하고 그 흉악상을 전 세계에 고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프리카를 구하는 방법은 복음을 주고 상업을 바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리빙스턴의 최초 탐험은 잠베지 강을 따라 중앙에서 북서쪽으로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환등기를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여 후에 들어올 다른 선교사들의 길을 예비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평생을 통해서 계속되었다. 그가 선교 사업에 남긴 업적은 크게 세 가지이다. 아프리카의 길을 찾아낸 것이요, 아프리카 선교의 가능성을 보여 준 것이요, 아프리카에 대한 선교열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리빙스턴이 개척하고 발견해 낸 길들을 따라서 선교사들은 별로 어려움이 없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예 무역상들이 더 많이 그 길을 이용하였다. 그의 세번째 탐험이자 마지막 탐험은 나일 강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었는데, 그 탐험에는 단 한 명의 백인도 동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1873년 어느 날, 그는 자기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숨졌다. 그를 사랑하는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심장을 아프리카에 묻고 몸은 미이라로 만들어 영국으로 보내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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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세아니아 군도의 선교
마지막 선교지는 태평양의 섬들이었다. 이 아름다운 지역은 1,500개의 섬들로 이루어졌다. 이 섬들에 선교사가 도착한 것은 18세기 말인데 본격적인 선교는 19세기에 이루어졌다. 이 지상 낙원처럼 보이는 섬들에서는 식인 풍습, 유아 살인, 일부다처 및 성적 타락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원주민들은 거의가 무당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본래가 순진한 원주민들은 유럽 선원들에 의해 쉽게 농락과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일세기가 다 지나기 전에 이 지역 거의 전체가 복음화 되었는데, 이는 대중 운동(people movement)이라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이것은 한 종족의 제일 높은 사람이 개종하면서 종족 전체가 신자가 되는 그런 방법이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유럽 사람들은 군함이나 총포의 위력으로 밀고 나가서 왕을 설득하고 결국은 국민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들을 자행하였다. 제국주의의 물결은 이 태평양의 모든 섬들도 서구 여러 나라의 영토로 분할시켜 버렸다.
거의 모든 섬이 비슷한 과정으로 선교가 진행되었지만 타히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796년 헨리 노트(Henry Nott)가 영국에서 이 섬에 도착했을 때 섬의 성적 타락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선교사들이 배를 저어 접근했을 때 그들을 마중한 것은 창칼이 아니고 벌거벗은 처녀들이었다. 처음 여기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여자들의 집요한 유혹에 못견디어 함께 그들과 타락하거나 섬을 떠났다. 노트도 결국 원주민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그 유혹을 이기고 선교를 시작할 수 있었다.
타히티 왕은 반대파를 없앨 수 있는 무기를 구하려고 선교사들을 환대하고 기독교로 전향할 뜻을 비쳤다. 선교사들은 망설였다. 하지만 반대파들이 그들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왕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왕과 그의 부하들에게 성경과 함께 총을 주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전쟁 중에 이 섬을 떠났지만 노트는 계속 남았다. 그리고 반란군은 진압되었다. 동시에 왕은 노트의 요구대로 조상 대대로 섬기던 우상을 버렸다.
그의 우상은 모두 열두 개였다. 이것들은 런던에 보내져 전시되었다. 그리고 큰 감동을 일으켜 기부금을 모을 수 있었다. 왕은 우상을 버린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례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처를 여러명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7년이란 세월을 고민한 끝에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1819년 모든 국민이 보는 가운데 왕과 신하들은 세례를 받고 섬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동시에 유아 살해, 식인 풍습, 전쟁 등도 사라졌다.
하와이에 선교를 처음 시작한 것은 미국선교회였다. 태평양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하와이 역시 유아 살해와 식인 습관은 흔한 일이었고, 정령 숭배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하와이는 1778년에야 서방 세계에 알려졌는데,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타히티로부터 북아메리카의 서해안으로 항해하는 중에 이 낙원 같은 섬을 발견했던 것이다.
미국 선교회는 1819년 10월, 7쌍의 부부를 하와이로 파송하였다. 다섯 달 동안의 항해 기간 중 앤도버 신학교를 졸업한 히램 빙햄(Hiram Bingham)이 그 선교팀의 리더가 되었다.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저들은 거의 발가벗다시피 한 원주민들의 영접을 받아 경악하였으나 선교적 상황은 비교적 좋은 편이었다. 그 당시 하와이에는 커다란 사회 변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이었다. 그는 우상숭배와 인간을 희생하는 제사를 금지시켰으며, 오랫동안 질질 끌어오던 부족들간의 전쟁도 끝날 것 같았다. 이런 가운데 선교사들은 입국을 허락받았으며, 기독교 선교사로서의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와이 선교는 원주민들을 기독교 문명의 단계로 끌어올리려는 선교사들과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거부감, 동족인 백인 선원들이 원주민 여자들을 마음대로 농락할 수 없게 된 데에 대해 반발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와이에서의 선교사역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어갔다. 교회들과 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에 대해 더 알려는 사람들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런 학교들 중에는 시빌 빙햄(히램 빙햄의 부인) 여사가 세운 여자 학교도 있었다. 그 학교에는 추장부인들이 많이 등록했는데,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1823년에는 왕의 어머니가 세례를 받기도 했다. 아마 가장 극적인 개종 이야기는 한 추장의 부인이었던 카피올라니(Kapiolani)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녀는 많은 하와이인들처럼 펠레(Pele) 여신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여신은 킬라우에아(Kilauea) 화산의 분화구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돌아온 뒤 그녀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지켜보는 가운데 화산에 올라가 분화구 용암 속에 돌멩이들과 소위 신성하다는 열매를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구경꾼들에게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증거하였다. 이 사건은 선교사들이 모두 합세하여 펠레신을 공격한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독교를 전할 수 있게 한 극적인 사건이었다.
하와이 선교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을 때, 선교사들은 섬의 구석구석까지 펴져나갔으며, 1837년에 이르자 선교사들의 수는 60여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열심히 사역하고 헌신적이며 굳건한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는데, 이 기초적인 사역이 끝나자 커다란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40년 경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들어옴으로써 개신교 선교지가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타협적인 선교방법이 청교도적인 개신교의 선교방법보다 잘 먹혀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브래드포드 스미스는 “헌금을 요구하는 대신 가톨릭 사제들은 선물을 주었는데, 특히 어린이들에게 세례 줄 때 큰 효과를 보았다. 그들은 설교 없이 짧게 미사를 마쳤으며, 음주나 흡연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고, 어떤 죄인들에 대해서도 면죄를 약속했으며, 누구나 다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서양식의 훌륭한 저택에서 살
지 않고 하와이인들과 똑같이 생활하였다.”고 설명하였다.
개신교 선교가 주춤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유입 이외에도 빙햄 부부의 귀국과 몇몇 선교사들의 물질주의 때문이었다. 몇몇 선교사들은 토지와 부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선교사의 소명을 저버린지 오래였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소위 부업으로 토지를 갖고 있어서 선교사역에만 전적으로 매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한때 2만 명을 넘어섰던 하와이 교회는 크게 쇠퇴하여 5,000명도 안되게 약화되었다. 선교사들은‘문명화’를 가져다 준 사명은 완수하였으나, 그 문명을‘기독교화’하는 보다 어려운 과업에서는 결국 실패했던 것이다.
19세기에는 유럽의 힘이 전 세계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힘도 그러하였다. 여기 기술하지 않은 곳 가운데 선교 역사에 큰 장을 마련한 예로는 일본, 한국 그리고 동남아가있다.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19세기의 선교는 힘의 선교였다. 본국의 강력한 인적, 물적 지원과 정부의 강력한 힘이 그 밑바탕이었다. 그리고 여러 선교 영웅들의 지혜와 희생적인 봉사가 전 세계 모든 지역에 복음을 심었다.
19세기는 유럽의 힘으로 선교를 수행한 시기였다. 이때 거의 모든 지역에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다. 선교사들은 본국의 힘으로 강하게 선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재정적 뒷받침은 물론이고 정치적인 압력도 선교를 위한 방법으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선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XIII. 신정통주의
자유주의는 기독교를 과학에 복종시켰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특히 인간 속에 내재되었기에 인류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성에 대한 이러한 자부심은 인간이 만들어 낸 엄청난 악, 바로 세계 대전 앞에서 무너졌다. 이 전쟁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초월하심도 깨달았다. 그러나 자연 과학에 사로잡힌 자유주의의 후손들은 다시 옛날의 정통 신앙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양쪽을 다 거부하며 신정통주의라는 중간노선이 나타나게 되었다.
1. 배경
19세기 후반‘역사적 예수’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랑케의 새로운 역사 방법, 즉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있던 그대로의 과거를 재현하려는 운동은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인간 예수에 대한 신화를 다 벗기고 실제의 예수를 살펴보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새로운 역사 연구 방법에는 초자연이나 영적
인 영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과는 예수님을 순전히 보통 인간으로 보는 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예수전이 씌어졌다. 여기서는 복음서의 내용이 온전히 다 수용되지 않았다. 기적을 벗긴 예수는 하나의 보통 인간이었다. 그러한 그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리츌이었다. 그의 목표는 ‘교리적 그리스도에서 역사의 예수로’였다. 하지만 여기 보통 사람 예수는 스승으로 가치가 있어야 했다.
역사 비평은 예수님에게 입혀졌던 신화의 찬란한 옷을 벗겼다. 그러나 벌거벗은 예수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자기들 생각에 예수가 본래 입었으리라 생각되는 거친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역사 연구는 차츰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역사가 완전히 과학적일 수가 있겠는가? 몇 천 년
전의 과거를 재현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다시 해낼 수 있겠는가?
학자들은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해서 나타난 예수는 예수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역사가 자신의 이해를 투영해서 상상한 예수일 뿐이었다. 19세기의 사고와 문화에 젖은 자기의 두뇌 속에서 만들어진 상상의 인물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간적인 이해의 투사체가 무슨 구세주가 될 수 있겠는
가? 현 시대의 눈으로 과거의 사람을 볼 게 아니라 그 시대의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래서 19세기의 부르조아적이고, 도덕적이며, 관념론적인 표현의 예수는 잘못되었기에 후기 유대교의 묵시 문학의 분위기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처였다. 바이스는 예수님이 임박한 무서운 종말과 초자연적인 새 창조를 기대했다고 주장했다. 슈바이처도 예수님을 당시 시대의 인물로는 자신의 죽음이 이 종말의 시작을 주리라 착각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역사적 예수’가 19세기 사람들의 이상적인 인간을 투사한 것이라면, 바이스나 슈바이처의 방법은 1세기 유대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상상해 본 것이었다. 여기 덧붙여서 ‘종교사학파’들은 예수님과 초기 기독교를 후기 헬라의 신앙과 관습에서 이해해 보려고 하였다. 리츌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고유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종교사학파에서 볼 때 기독교의 현상은 비역사적인 것이었다.
종교사학파는 무엇인가?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를 똑같이 원시 상태부터 차츰 진화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이 보기에 초기 기독교는 절대로 특별한게 아니었다. 기독교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후기 유대교, 동방의 종말론, 헬라의 신비주의, 영지주의, 스토아 사상 등이 모여져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기독교는 새 종교가 필요한 때 나타났을 뿐이었다고 저들은 보았다.
보우셋은「주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기독교가 원시 상태의 종교에서 헬레니즘이라는 환경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 예수님이 주로 불리었다고 주장했다. 이때 비로소 예수님은 이방 제의의 신들처럼 경배되었고, 또 그 신들이 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기독교도 다른 모든 종교들처럼 원시 상태가 있었고, 제의적, 신비적 단계로 진보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는 상대화되었다.
이러한 상대화는 유명한 트뢸취에 의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는 하르낙이 주장했던 기독교의 본질을 비판했다. 하르낙 식의 사랑이라든지, 온 인류의 형제화라든지 하는 기독교의 본질이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중인데 무슨 본질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기독교는 추상화된 개념으로 축소시킬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러한 개념이 발전한 역사이며, 그 모든 것이었다.
종교사학파들에게 기독교는 영원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역사의 여러 운동처럼 새롭게 변하는 것이었고, 신적인 생명력이 역사 안에서 항상 새로운 개개의 사건에서 자신을 현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통일되지도 않았고, 보편적일 수도 없었다. 기독교도 이러한 법칙대로 보편적이지도 않고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는 유럽 문명과 함께 흥하고 망할 상대적인 것이었다.
역사를 ‘일어났던 그대로’보자는 운동에서 시작된 역사 비평학은 스스로의 약점 때문에 모든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어났던 그대로 복원시키는 일을 상대적인 인간이 하기 때문이었다. 이 상대화는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신비주의자요, 종말주의자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원시 상태로부터 진화되어 온 종교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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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기 신학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그 스스로 허구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계몽주의 때부터 일어났던 빛나는 인간 이성에 대한 예찬은 19세기에 와서 절정에 달한다.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이 신의 한 부분인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리하여 인간과 신의 차이는 단지 양적인 것이요, 그것도 차츰 좁아드는 것으로 착각했다. 결과는 인간의 수준으로 신도, 구원도 끌어내린 것이었다.
이성의 발달로 그리고 인간의 계몽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조금씩 실현되어 갈 것이라는 부르조아적 낙관론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가장 이성이 뛰어난 유럽 사람들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대량 살상하는 무서운 무기를 만들었을 뿐이었고, 온 세상은 인간의 집단적인 악에 의해서 참담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이 위기를 맞이하여 젊은 목사 칼 바르트는 폭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1919년「로마서 강해」라는 작은 책으로 나타났다. 곧 이어 스위스와 독일의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특히 투르나이젠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를 출판했다. 당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거부하고 비극의 심연에 빠져있는 어두운 인생을 묘사했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신정통 신학자들의 눈을 열어 준 것이었다.
바르트는「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자신의 관심은 “어떻게하면 하나의 인간으로서 엄위하고 높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였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그는 성경 자체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선배들이 볼 수 없었던 진리의 영역이 있었다. 그는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말에 치중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19세기는 인간 절대주의 시대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가르쳐 온 자유주의와 결별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행복한 날들이었던 19세기의 실제적 종말이 1914년 임했다. 나 자신에게 그 해 8월의 어느 날은 암흑의 날이었다. 그 날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황제 빌헬름 2세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들 가운데서 이제까지 신앙적으로 존경했던 스승들을 발견했다.” 이제 그에게 세상의 위기는 임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스승의 성경 해석, 역사에 대한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게 됐다.
또한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나 도스토에프스키의 실존주의와 프란즈 오베르벡이나 불룸하르트 등의 정치신학, 마르하이네케 등의 헤겔 후 신학들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그에게 끼친 것은 성경이었다. 그가 직접 교구에서 목회를 하면서 성경을 읽은 데서 그는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11년 스위스 사펜빌에서 목사가되었다. 바르트가 그의 친구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과 이 당시에 교환한 서신들을 보면 이러한 상황들을 보다 더 잘 알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설교학을 약간 개선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실제로 설교를 하고자 한다면, 이는 단지 우리들 자신의 영성의 흥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어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적어도 19세기 신학에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제 알았다. 19세기의 자유주의가 무슨 오류를 범했던가? 그것은 하나님을 멋대로 생각하고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요 본성이 선하므로 바르게 교육시키면 의롭게 살 수 있으리라 착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인 이해가 아니었다. 바울과 어거스틴의 가르침의 중심에 표현된 복음의 내용이 아니었다. 또한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다시 명확하게 밝혀졌던 구원의 길도 아니었다. 인간은 악하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죄인이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믿음으로만 구원될 대상이었다. 근본이 악한 인간들은 절대로 그 악한 본성에서 선한 것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는 인간과 하나님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았다. 그것은 양이 아니라 질의 차이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무서운 간격이 있었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없다. 가능성도 없다. 단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 이르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무능한 인간은 죄의 노예로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었다.
이제 바르트는 루터와 칼빈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그리고 2천년이나 내려온 정통 신앙의 가치를 깨달았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종교였다. 거기에는 아무런 구원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통 신앙은 분명히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보여
주며 구원의 길도 열어 준다. 이것이 자유주의에는 없었다. 단지 인간의 현실에 대한 여러 가지 인간적인 이해만을 더해줄뿐이었다. 그것도 자꾸 변해 왔다.
정통 신학으로 갈 것인가? 그러나 바르트는 자유주의의 아들이었다. 그는 역사 비평학을 통해서 성경은 인간의 손으로 쓴 오류투성이의 문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 신앙을 인정했지만 이미 비판을 받았던 정통 신학은 그대로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정통 신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정통 신학이다. 축자영감설을 인정하지않는 정통 신앙, 바로 신정통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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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존주의와 변증법
바르트의 신학 방법인 실존주의와 변증법은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루터교를 국교로 하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루터교 가정에서 7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키에르케고르는 부친의 처음 부인이 세상을 떠나기 4개월 전에 부친과 하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때문에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항상 우울했고, 이 우울증이 그의 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약간 곱사등에다가 유약한 몸을 지닌 우수의 철학자로서 학문과 예리함에 있어서 천재성을 일찍부터 보이기 시작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1830년에 코펜하겐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철학과 문학에 더 큰 흥미를 느껴서 그의 석사학위논문을 ‘아이러니의 개념’에 관하여 썼다. 그리고 그는 신학 분야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의 천재성은 그로 하여금 학교공부로 만족할 수 없게 하였다. 그는 몇 가지 인생의 문제들 때문에 정신적 위기에 떨어졌고 종교적 실존, 특히 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싸워야 했다. 첫 번째 사건은 아버지가 죄를 고백한 사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하녀와의 불륜관계로 키에르케고르가 태어났음을 그에게 고백하였다. 두 번째 사건은 그의 약혼의 파기였다. 그는 1837년 레기나 얼선을 만나 사랑에 빠져 약혼에 이르렀으나 어느 날 갑자기 파혼하였다. 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일기에는 ‘하나님의 거부’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아마도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는 그의 약혼녀와 결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정신적 위기감
이 그로 하여금 심미적이고 실존적인 작품을 남기게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초반 사람이었으나 자기 시대에는 빛을 볼 수 없었다. 한 세기나 일찍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미친 그의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오늘날 그는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불려진다. 초기 바르트의 신학은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책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을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세 단계로 보았다. 그것은 실제로 그의 생애와도 같았다. 심미적 단계는 미를 추구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이는 충동적인 삶이다. 여기에는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없다. 반성도 없다. 그저 찰나적인 삶의 원리로서 관능을 따라서 움직이는 삶이다. 동물적인 삶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급기야 실망과 초조 속에서 좌절하고 말게 된다. 물 위에 던진 돌이 물을 차고 날지만 몇 번이나 튀겠는가? 결국 좌절의 심연에 빠지고 만다. 좌절 속에서 경험하는 실존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이다. 이 무의미와 절망 속에 빠져 버리고 말 것이냐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아서 다음의 단계로, 곧 윤리적인 단계로 도약할 것이냐, 이것은 참으로 실존의 문제였다.
윤리적 단계의 사람은, 심미적 생활은 죽음에 처한 인간이 선택할 길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살 것을 결심한다. 그렇다고 생과 죽음과 무의미가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런 두려운 일에 대한 불안을 짊어지고 산다. 하지만 관능적으로 자신을 잃고 뒹굴 수는 없다. 그래서 자유를 가진 인격체로 자신을 바라본다. 인류애를 발휘하며 꿋꿋이 운명과 싸우며 죽어간다.
이것이 비극적인 영웅주의이다. 넘어지고 쓰러지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간다. 까뮈의「페스트」에 나오는 의사와 같은 삶이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좌절하고야 만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여기서 또 한 번 선택의 길이 열린다. 자기의 운명을 지고 싸우다 죽을 것이냐, 아니면 영원자요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자신을 의탁하며 살아날 것이냐.
다음의 도약 단계가 종교적인 단계이다. 종교적 단계도 둘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절대자에게 맡기지만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자기의 노력, 자기의 의, 자기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려는 단계가 있다. 이것은 율법적인 단계요 바리새인의 단계이다. 이것 역시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은 하지만 역시 한계에 도달
한다. 인간은 자기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 단계인 자기 몸 전체를 정말로 내던지는 참 종교적인 단계로 나아간다. 구원이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에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논리가 지배하지 않고 역설이 움직인다. 여기서는 모든 윤리적인 차원을 뛰어넘는다. 윤리와 모순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단계이다. 높은 바위에서 끝없는 심연에 몸을 던지는 전적인 모험이다.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중심 사상을 역설이라는 단어에서 본다. 여기에서 “진리는 주관이다.”라는 실존주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같은 백만 원짜리 수표라도 사람에 따라서 가치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처럼 신앙도 객관적으로 정보를 받고 같은 경험을 갖는 게 아니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기에 주관적인 것이다. 또한 결단 역시 실존하는 개개인들이 주관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키에르케고르의 신앙관이 나타난다. 신앙은 논리가 아니고 역설이며 합리가 아니라 비합리인 것이다. 후에 그의 사상은 신앙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이들에 의해 이용되기도 한다. 그는 신앙의 대상이 비합리적이거나 부조리하지 않다고 못박는다. 역설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그것이 부조리요 역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주관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모험이라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신앙은 그들이 말하는 식의 이성의 한계 속에 있는 것도, 합리적인것도 아니었다. 또한 ‘일어났던 그대로’의 객관적인 역사 기술도 가능한 게 아니었다. 그는 이런 주제넘은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은 20세기에 와서 실존주의자들이 만든 모든 혼란과 무의미의 시작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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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칼 바르트의 신학
바르트(1886-1968)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금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배웠다. 그러나 그는 1909년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교수들에게 배웠던 자유주의 설교는 교인들에게 아무런 양식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단에 오를 때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위선과 회의를 통렬하게 느꼈다.
그는 친구요 목사인 투르나이젠과 이 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들은 신앙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 연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경 안에 있는 신기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로마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를 발견하고 자유주의의 잘못된 입장을 깨달았다.
「로마서 강해」출간 이후 에밀 브룬너, 루돌프 불트만,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투르나이젠 등이 그를 지지했다. 물론 이들은 후에 서로들 의견에 많은 차이를 보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한다. 이들은 1922년부터「시대의 사이에서」라는 신학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여 1933년 폐간될 때까지 새 시대의 독일 신학을 이끌어 갔다. 그들의 입장은 신정통이 되었다.
바르트와 신정통 신학자들은 키에르케고르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헤겔의 변증법 곧 정반합 식의 단순한 이론을 배척하고, 진리와 진리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에서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유한과 무한의 중간점에 있다. 그러므로 양쪽을 다 잡고 있는 것이다. 인간 속에는 부정과 긍정이 함께 있다. ‘예’와 ‘아니오’가 서로 해석되고 의지되며 발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인으로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종으로서 누구에게나 종속된다. ”바르트의 이 말은 루터의 말과는 의미가 다르다. 루터는 인간이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 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양극단 사이에서 계속 예, 아니오를 반복하면서 달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교리주의나 신비주의에 빠지지않는 유일한 방법이라 했다.
바르트의 이러한 방법은 자유주의자와 전통적인 신자들 양쪽 모두에게 혼란을 줄뿐이었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항상 움직이고 있는 하늘을 나는 새와 같다는 것이다. 그의 애매한 방법은 역사관에 더욱 잘 나타난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의 과학적인 역사관에 반대하였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 결과는 그들이 범한 오류에 그대로 빠지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 비평학자들과 똑같이 성경을 보았다. 그는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다른 것들과 똑같이 인간의 문서이다.” 왜 그런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증거자로서의 기능과 그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서 우리처럼 진정한 역사적인 인간들이었고 행위에 있어서 죄악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말이나 글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었고 실제로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번역을 제안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확실성과 명확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진 성경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확실한 근거 위에 서 있다.” 오류와 불확실 그것이 성경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보다는 그것이 주관적으로 인간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신구약에 기록된 성경의 역사는 절대로 실제 역사가 아니다.”라고 바르트는 선포했다. 특히 성경의 초자연적인 사건들, 예를 들어 부활이 그러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재림은 둘 다 같은 것이지만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이 역사에서 실제 일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관심은 정말로 무엇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관심사인가?
그는 말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실제 역사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의 실제 의미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지 잘 증명된 역사적 보고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듣고 내리는 인간의 결단이 자유주의자들의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신정통주의자들은 분명하게 자유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과거를 재현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일생도 완벽하게 재구성하리라는 생각은 인간 자신만큼이나 허구였다. 신정통주의자들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는 그들 이론에 의하면 정확하지 않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주관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진리는 주관이었다. 구원은 이렇게 여전히 인간 수준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
XIV. 에큐메니컬 운동
헬라어 ‘오이쿠메네’ 곧 ‘거주하는 세계’에서 나온 에큐메니컬 운동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협동과 연합을 추구해 왔다. 역사상 교회들이 서로 일치하지 못했기에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에큐메니컬 운동은 힘찬 활동을 벌였다. 많은 교회들이 힘을 합쳐 세계 기독교 협의회를 만들었고 그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그러면서 과연 이 기구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교회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의문도 강하게 일어났다.
1. 배경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이 사도의 복음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연합되었다고 믿었다. 사도의 뒤를 잇는 속사도들은 교회간의 차이를 전혀 말하지 않았고 당연히 동서방 여러 교회들은 연합하는 것을 전제하였다. 니케아 신조에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하고있다. 물론 이것은 무형의 교회를 의미했지만 많은 신자들은 유형의 교회에도 이 의미를 적용했다.
그러나 교회의 일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리는 거의 일치했지만 서로 연합해서 무슨 일을 하기에는 로마 제국이 너무 넓었다. 특별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간에는 주도권때문에 알력이 있었다. 결국 중세에 가서 이 둘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과 희랍 정교회가 서로를 이단으로 파문한 것이었다. 그래서 1054년에 완전히 분열하고 마는 결과를 빚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수많은 교파들이 난립하는 결과를 빚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는 루터교, 제네바와 네덜란드는 칼빈주의, 영국은 성공회 그리고 대부분의 지역은 가톨릭으로 그냥 남아 있었다. 또한 이미 가톨릭과 갈라진 정교회는 희랍과 러시아를 지배하였다. 그뿐 아니다. 여러 군소 교단들, 재침례파들과 신비주의자들 등 여러 분파들이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몇 백 년 동안 개신교단은 숫자가 계속 늘었다. 이 서로 다른 교단들은 아무런 유대가 없었다. 서로 함께 일하는 경우도 없었다. 심지어는 지역의 개교회들끼리도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옆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건 전혀 무관심인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개교회주의로 나가서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교회끼리의 유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신자들은 여러 교파들이 난립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교단이 다르면 아무런 유대가 없었다. 그러니 서로 따로따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개교회들이 어떤 부분에서라도 협동해서 일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만약 서로 협동한다면 여러 가지 재정이나 인력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서로 경험도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에큐메니칼의 시작이다.
19세기 초 미국에서는 많은 교회와 교단들이 서로 협력했다. 선교사를 보낸다든지, 전도 집회나 부흥회, 성경 반포회, 교도소 전도 그리고 각종 구제 활동 등에서 서로 협조했다. 이 일은 평신도 차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직자들보다도 평신도들이 교리의 미묘한 차이에 별관심이 없고 그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을 합쳐서 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성직자들 사이에도 퍼져 나갔다. 그러다가 1846년에는 미국과 영국의 50개 교단이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Alliance)을 형성하였다. 신앙적인 자유와 선교 및 교육 활동 분야에서 서로 협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기에서는 개신교도들 간의 교리나 교회 정치 구조 등은 상관하지 않았다. 단지 선교하는 일과 교육에 있어서 힘을 합하고 인력을 서로 교환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1908년에 미국에 31개 개신교 교단이 ‘교회 연합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를 구성하게 되었고, 1950년에는 더 큰 규모의 ‘전국 교회 연합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가 발족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에도 교회 연합회(KNCC)가 있는데, 대체로 진보적인 교단들이 포함되어 있다. 각국의 교회 연합회가 세계적인 규모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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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러 분야와 특성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의 뿌리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여러 흐름이 모여진 것이다. 그중 한 분야가‘선교 사역’이다. 이는 선교 현장에서 교파 사이의 경쟁이나 재정과 인력 낭비를 막기위해서 자연적으로 취해진 움직임이었다. 본래부터 선교지에서는 초교파적으로 일이 진행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본국의 선교회가 초교파적으로 많은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854년에 뉴욕과 런던에서 범세계적인 선교 대회가 열렸다. 그 후 간헐적으로 비슷한 모임이 있었다. 그렇게 8차로 모인 것인 1910년의 에딘버러 세계 선교 대회였다. 이때부터 모임은 각 선교회의 공식 대표들로 이루어졌다. 완벽한 자료에 의해서 선교사들과 선교 지역의 현지 대표들이 장래 선교의 방향과 영감을 나누었다. 이 대회는 이전의 것들과는 규모나 내용 면에서 획기적이었다.
이 여파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상임 위원회가 생겼고, 다시 이것은 1921년에 국제 선교 협의회로 성장했다. 회의 의장은 에딘버러 대회를 주재했던 존 모트(John Mott)였다. 그는 미국 감리교회의 평신도였다. 이리하여 대표적인 선교회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선교를 받은 지역의 교회 대표들도 다수가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1938년 마드라스 대회 때에는 절반이 신생 교회 대표들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두 번째로 중요한 분야는 ‘청소년의 사역과 교육’이었다.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기구는 조지 윌리엄스에 의해서 1844년 세워진 YMCA였다. 초교파적인 이 단체는 처음부터 에큐메니칼적이었다. 다음해에는 전 세계를 상대로 YMCA 세계 연맹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성격의 YWCA가 세워지고 1894년에는 이 단체의 세계 연맹도 결성되었다.
청년들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운동은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었다. 1886년 미국에서 무디의 영향 아래 시작된 이 운동은 존 모트의 지도 아래 1895년 스웨덴에서 세계 학생 기독교 연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에서 기독 학생 운동을 지도하였
다. 그리고 후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가 될 남녀 학생들의 훈련장이 되었다.
세계 기독교 교육(World Christian Education) 운동도 1889년 시작되었다. 그것이 1907년에는 세계 주일학교 협회가되었다. 후에 이 단체는 여러 나라로 하여금 초교파적 기독교 교육 기구를 만들게 하였다. 결국 이 운동은 1950년 기독 교육과 주일학교 협회 세계 협의회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 운동은 초교파적으로 젊은이들이 기독교 교육에 조직적, 기술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 번째 분야는 ‘삶과 일’(Life and Work)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 분야는 기독교적인 봉사와 윤리를 위해서 연합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이 분야의 처음 출발은 1846년 런던에서 결성되었던 복음주의 연맹이다. 이 단체는 초교파적으로 활동해서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연맹은 교회와의 공식적인 관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1908년에는 조시아 스트롱에 의해서 미국 기독교 협의회가 조직됐다. 이 단체가 목적하는 바는 첫째, 교회들의 교제와 보편적 일치, 둘째, 교파 구별 없이 그리스도와 세상을 위해 함께 봉사, 셋째, 교회의 영적 삶과 신앙 활동에 관해 상호 교제하고 권면, 넷째, 삶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법을 적용하여 도덕
적,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영향력을 모으는 것 등이었다.
이것이 1950년 국내외 선교, 선교사 및 기독교 교육, 고등 교육, 여성 활동 등에 관심을 가진 국내의 여러 초교파적인 기구를 병합한 미국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U.S.A.)로 발전하였다. 이미 프랑스, 스위스, 영국, 캐나다 등지의 나라에서도 거의 같은 조직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결국 이들이 세계적인 차원으로 응집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네 번째 분야는 ‘신앙과 제도’(Faith and Order)였다. 신앙적이고 교리적인 부분까지도 연합하고 일치하려는 이 분야는 당연히 근본적인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각 교단간의 교리적인 차이는 심한 것이었다. 1927년 로잔 회의에는 100개 교파 400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놀라운 것은 교리의 차이에 대해서 서로들 많은 양보를 하여 많은 부분에서 동의했다는 것이다.
1937년에는 에딘버러에서 다음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문서가 작성된다. 이때 기본적인 교리 가운데 80% 이상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신앙과 제도’분야는 ‘삶과 일’분야와 합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위트레흐트에서 다음과 같은 선언이 선포됐다. “세계 교회 협의회(WCC)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 간의 교제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다섯 번째 분야는 ‘교회의 유기적 일치’(Organic Church Union)였다. 우선 몇 개 교단이 서로 통합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들이 통합했고 미국의 몇 교회가 북 장로교회와 통합해서 1906년 연합 장로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남 장로교회와 합쳐서 미국 장로교회가 된다. 이런 식으로 비슷한 몇 교단들이 서로 합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여섯 번째 분야인 교파들의 세계적인 연합과 친교 기구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앞의 여러 분야들이 차츰 세계 교회 협의회(WCC)로 통합되었다. 거기다 1960년에 획기적 변화가 나타났다. 로마 가톨릭이 WCC에 가입한 것이다. 이로써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세력의 절정에 달한 느낌이었다. 공산권에서 온 대단히 수상한 대표들을 포함해서 WCC는 이제 엄청난 규모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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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제점과 한계
가능하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교회끼리, 교파끼리 서로 합치고 교제하고 친교하려는 운동이 바로 에큐메니칼이다.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가 되겠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조직이 강화되고 구속력이 커지고 재정이 많아질수록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
른 내면적인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었으니, 이는 목적의식의 불분명이었다.
우선 교리적인 부분에서 가능하면 포괄적으로 다루려는 것이 이 운동의 성향이었다. 각 교파 신학의 특징들을 깎아서 모난 면이 없게 하다 보니 개신교와 가톨릭 같은 현격한 차이를 가진 교단끼리도 별문제 없이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피우스 12세는 1928년에 교회 일치 운동에의 협력을 금지한바 있었다. 그러나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23세는 그동안 금지시켰던 에큐메니칼 운동에 협력하는 것을 장려하는 결정을 공포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과거에는 개신
교도들을 이단자라거나 분파주의자라고 묘사했던 것과는 달리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묘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교회가 교리나 정체 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주장대로‘사목적’인 회의 곧 개신교와 정교회와의 관계에 영향을 줄 새로운 태도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교회 일치 운동을 주창하는 이들은 로마 가톨릭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한 것만으로 만족하여 저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각 교단의 전통적인 신학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같은 지역의 극단적인 좌파 신학을 주로 말하게 되었다.
신학적인 차이들을 수용하면서 외형적인 일치를 추구하다보니 자연히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그 한 예로, 1960년부터는 세상에 대한 봉사로 관심이 모아졌다. 이전의 어느 회의보다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의 대표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제3
세계의 관점이 강하게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 모임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거의 잊혀졌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68년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개최된 제1차 회의 이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취했으며, 구원을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보았다. 1973년에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선교회의에서는 그 주제인 ‘오늘날의 구원’(Salvation Today)을,
인간을 모든 형태의 학대에서 해방하며 세상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사회의 인간화’(humanizing of society)라고 해석했다. 1975년에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제5차 회의에서는‘비군사적 게릴라 혁명 계획’을 지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해방신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채택하였다.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격차가 지적되고 제3세계의 독재 상황이 부각되었다. 그러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폭력을 포함해서라도 그리스도인이 혁명적인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정치적인 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신자가 폭력을 주창하는 입장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 후 세계교회협의회의 방향은 거의 완전히 세상적인 관심에 집중되었다. 전쟁과 평화, 인권, 여권, 전쟁 반대, 인종 차별, 난민, 경제 정의, 민족주의, 지역주의, 국제 구조, 조세 제도, 기아 문제 등이 토론되었다. 영혼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뜻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이기적이고 정치적인 대표들에 의해서 회의의 방향이 정해지고 수백 수천만 불의 재정이 그들 뜻대로 사용되었다.
선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력한 재정 지원에 의해서 선교 신학과 방법이 연구되고 논의되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자들의 선교관이 제창되기 시작했다. 1932년 ‘선교의 재고’(Rethinking Mission)란 이름의 책이 하버드대학 교수인 호킹(Hocking)에 의해 보고서 형식으로 출판되었다. ‘선교 일백 년 후의 평신도들의 연구’란 부제의 이 보고서는 엄청난 파문을 불러왔다.
이 보고서의 주요 관심은 타종교에 관한 기독교의 접근 방법과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포되는 메시지였다. 여기서 기독교의 메시지는 역사적 사실이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원리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같은 종교들이 ‘전투적이고 비판적인 기독교 운동’에 의해서 고통당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마디로 기독교를 그들 대표적인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더 이상 어느 예언자 또는 어느 성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예언자, 성경, 계시, 의식, 교회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모든 예언자들은 새 표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연합해서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다른 종교를 파괴하면 안 되고 그들을 도와서 그들이 가진 종교의 고유성과 장점들을 발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60여 년 전부터 선교 신학에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다. 세계 선교 협의회(WCC)는 선교의 전통적인 의미를 외면했다. 다른 종교에서 개종시키는 것을 죄악이라고 선언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 많은 과격한 대표자들에게 있어서 선교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에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남미 독재 국가를 전복시키는 일이 선교이고, 그 일을 위해 세계 교회 협의회는 무기를 사 줘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바야흐로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일치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일치 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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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보수적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한 교단은 거의 다 신학에 있어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에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교단이 참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WCC의 신학적인 경향과 노골적인 세속성을 의심하였고, 후자는 믿는 자들이 협조와 화해의 정신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비단 교회의 일치를 위한 불일치는 장로 교단만 분열시킨 것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교단에서 비슷한 분열을 경험했다. 자연히 진보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교단들은 한국의 교회협의회(NCC)에 가입해 결국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속하게 되었다. 반면에 보수적이고 반 에큐메니칼적인 교단들은 복음주의협의회(NAE)에 가입했다.
복음주의협의회는 1941년 시카고에서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본래 에큐메니칼측에 대항하자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보수주의인 국제교회연합회(ICCC)에 대한 반응이었다. 국제교회연합회는 분리주의자 칼 매킨타이어에 의해서 구성된바, 전투적으로 복음을 방어하고 자유주의에 대항한다는 목적을 선포했다. 그러나 사실상 열심이 부족한 보수주의자들을 비난하고 있었다.
국제교회연합회(ICCC)에서는 WCC에 가입한 교단이나 기관에게 거기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자유주의와 함께 한 교회를 형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볼때도 옳지 않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었다. 매킨타이어가 주필이 된「크리스천 비콘」이란 신문이 발간되고 각종 소책자들이 나왔다. 여기에는 WCC 지도자들의 설교와 글들이 사진과 함께 실려 분석, 비판되었다.
차츰 기독교 연합회 내에서 매킨타이어의 지도력에 대한 반발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954년에는 그것이 터져서 분열하고 말았다. ICCC의 지도자들은 ‘거짓, 사기, 과장’을 자행하고 각 교파의 지도자들을 이간시켜 교단을 분열시킨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매킨타이어는 ICCC를 탈퇴하였다. 차츰 여기 소속된 지도자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기관에서 분열주의자로 백안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건전한 복음주의 연합체를 만드는 것이 NAE의 이상이었다. 구성원들은 자유주의의 배교와도 분리되어야 하지만 신앙인들의 ‘모든 종류의 완고함, 불관용, 중상, 증오, 질투, 거짓 판단, 위선’ 역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2년 세인트루이스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 34개 교단과 단체에서 약 200명의 대표들이 참가했다. 여기서 해롤드 오켄가(Harold Ockenga)가 지도자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국제교회연합회(ICCC)에 실망한 수많은 보수주의 기관의 가입 지원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다음해 시카고 모임에는 50개 교단(도합 1500만의 신자)에서 1000명의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참석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복음주의협의회를 축복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운동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부흥회 운동을 통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특히 1950년대 이후에 빌리 그래함에 의해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나 부흥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교파에 관계없이 서로 협조하며 설교를 들었다. 한 장소에서 집회가 열리면 교파를 구별하지 않고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 교파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예배했다.
그러나 NAE에 대해서 많은 교회들이 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소속된 많은 학자들이 성경관에 있어서 대단히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비교적 건전하게 진행되던 보수적 에큐메니칼 진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수적 에큐메니칼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인물인 빌리 그래함 목사는 “나는 나의 신앙과 로마 가톨릭의 신앙이 본질적으로 꼭 같은 것임을 발견했다.”라고 공공연히 말할 뿐 아니라, 세계적인 개신교 지도자들과 부흥사들의 상당수가 ‘복음 전파의 한 목적’이라는 미명아래 로마 가톨릭과 손을 잡는 것을 당연시 하더니, 1994년 3월 29일에는 소위 ‘복음주의자와 천주교 연합’(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이란 이름으로 이른바 ECT선언을 발표하여 세계 기독교계를 놀라게 하였다. 개신교의 대표적인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를 위시하여 빌 브라이트(Bill Bright), 휘튼대학의 마크 놀(Mark Knoll), 풀러신학교의 리처드 뮤(Richard Mouw), 유명한 ''Knowing God’의 저자인 파커(J. I. Packer), 감옥 설교자로 알려진 찰스 콜슨(Charles Colson), 오스 귀네스(Os Guiuness), 패트 로버트슨(Pat Robertson) 등 이른바 쟁쟁한 복음주의자들이 천주교와의 통합에 앞장선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 교리나 정체를 변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의 한 목적을 위해서는 서로 연합해야 한다고 하는 이런 연합 운동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들을 무시한 외형적인 일치가 과연 그리스도의 뜻인가? 그리고 일치해서 모여진 지도력과 재정이 오히려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가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 WCC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소망적인 것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의 최대 관심은 일치된 교회 활동 자체보다 영혼의 구원에 있다는 것이다.<Hol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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