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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회사

중세교회사 : 교황제/십자군 운동/스콜라철학 /르네상스

by 은총가득 2021. 2. 24.

중세교회사 : 정치적 교황제

 

정치적 교황제

 

10-11세기 로마 캐도릭 교황제는 가장 어둡고, 가장 슬픈 시기들 중 하나였다. 교황제의 절하는 교황직이 세속적 세력을 장악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세속적 세력을 가진 결과였다. 교황들은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상실되어갔고 일시적 지도자로 변해갔다. 교황제의 이러한 변화는 세속적 군주들을 교황들이 인준하면서 그것에 대한 답례로 교황들에게 지역들을 헌납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교황들은 영적 지도자들뿐 아니라 세속 군주들로 여겨지는 때가 도래하면서 가장 높은 직위는 교황직이었다. 교황제가 정치적 우수성과 능력 면에서 확장되어가면서 교황직을 장악하는 것이 정치적 알력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황들은 로마의 성직자들과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실제에 있어서 교황제는 어떤 당파가 로마를 장악하느냐에 달려있었다. 교황들은 정치적 전당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897년과 955년간 17명의 교황들이 갈렸다. 이러한 상황은 존 12(955-964)가 독일왕 오토 1(Otto I, 936-973)의 군사력을 빌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오토 1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962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썼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독일 황제들의 영향 아래로 교황제가 들어가는 결과를 안겨다 주었을 뿐이다. 교황직에 오르는 사람은 독일 황제에 의해 선택되고 후원을 받는 사람이 가능했다. 정치적 음모는 늘 교황제 주위에 감돌았고 이로 인하여 질적 저하는 말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12세 어린 나이로 교황직에 오른 베네딕트 9(Benedict IX, 1033-1048)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교황권을 소유한 자들 중 가장 형편없는 자로 여겨진다. 다른 교황적 알력에 위협을 느낀 그는 교황직을 1-2,000 파운드에 팔고 교황권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로마에는 3명의 교황들이 있었다. 다시 한번 강력한 독일 황제 헨리 3(Henry III, 1039-1056)가 세명의 교황들을 폐위시키고 독일 감독을 대신하여 교황직에 올렸다. 1059년 로마 종교회의(synod)에서 교황 선출에 대한 규례들을 규정했다. 교황들의 선출은 추기경들이 성직자들과 사람들의 의견들을 수렴하여 결정토록 했다. 더욱이 그 종교회의는 교황이 어느 지역 출신에 구애를 받지 않도록 했다. 이런 규례는 교황 선출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성직 수임권 논쟁

힐데브란드(Hildebrand)는 수년동안 교황제 뒷면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자이었으나 마침내 그레고리 7(Gregory VII, 1073-1085)가 되었다.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황이었다. 그는 어떤 강력한 사상을 가졌다. 그레고리 7세의 원리들은 로마 감독이 우주적 주권을 가졌다는 것, 감독들을 폐위할 수 있다는 것, 감독들을 복귀시킬 수 있다는 것, 황제들을 폐위할 수 있다는 것, 누구에도 판단을 받지 않는 것, 누구든 석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들이 만일 영향을 끼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원리들은 캐도릭교회의 개혁에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원했던 개혁은 일시적 정치권에서 교황권이 독립하는 것이었다.

 

교황권과 세속권은 늘 갈등 속에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성직 수임권 논쟁’(investiture conflict)이었다. 성직 수임은 성직 수임에 따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 독일 황제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지역 내에 높은 교회직책에 임명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개혁파는 이러한 세속 군주들의 권한에서 독립하기를 원했다. 독일 황제 헨리 4세는 대감독을 임명하였는데 그는 그레고리로부터 출교를 당하고, 제국적 권위로부터 배제 당하고, 부하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헨리는 그레고리를 더 이상 교황이 아니라고 응답했다. 헨리가 연합된 독일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상황은 교황 쪽으로 기울였다. 독일 귀족들은 헨리의 출교가 해결이 나지 않으면 그를 폐위시키려고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교회권력 앞에 세속권력이 위축당하게 되자 헨리는 교황이 머물고 있는 카노사(Canossa)의 성문 앞에서 눈오는 날 3일 동안 맨발로 서있었다. 마침내 헨리는 출교에서 벗어났고 황제직도 보존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수임권 이슈는 교황과 황제의 정치적 세력 때문에 좀처럼 해결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헨리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Calixtus II)간에 1122년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을 맺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의하면 교황과 황제는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도록 하며 황제는 성직 수임권한을 이양했다.

 


중세교회사 : 십자군 운동과 시토 수도회

 

십자군 운동

 

1) 원인: 십자군 운동은 모슬렘인들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을 재탈환하려는 군사적 원정이었는데 중세에 퍼져있었던 환경과 조건들을 전형적으로 잘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십자군들은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강력한 종교적 열정은 수도원제도, 금욕주의, 광야 생활과 자기 희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로마 캐도릭주의는 유골, 순례 등을 숭배하면서 영적 보화들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십자군들을 크게 감동시켰던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take the cross), 즉 모험심, 지역 확장, 재물 확장, 종교적 증오심과 같은 것이었지만 참된 종교적 열정은 순수한 종교적 열정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지 못했을 것이다. 십자군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두 가지였다: 모슬렘인들이 638년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그 곳으로 순례하는 자들을 허용했지만 셀루크 터키족들(Selijuk Turks), 즉 모슬렘들은 1076년 팔레스타인을 정복하여 순례자들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유럽인들을 자극시켰다.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Alexius I)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청원하여 자신의 지역을 위협하는 모슬렘들을 물리쳐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1095년 클레몽(Clemont) 종교회의를 열어 교황 우르반 2세는 웅변적으로 설교하며 모슬렘인들의 손아귀에서 팔레스타인을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큰 혜택이 약속되었다. 우르반은 참여하는 모든 자들에게 면죄부를 베풀었다. 다른 교황들은 영생까지 약속하였는데 참여자들만 아니라 십자군 운동을 후원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베풀었다. 십자군들에게 주어진 지상적 혜택은 빚에서 면제를, 세금에서 자유를, 그리고 이자의 부담에서 자유를 제공했다.

 

2) 십자군 운동의 규모. 1095년부터 1270년까지 모두 7차례의 주요한 십자군 운동이 있었을 뿐 아니라 적은 규모의 운동도 있었다. 1차 십자군 운동(1095-99)를 제외하고 모든 운동은 대대적 실패를 경험했다. 1차 십자군 운동은 예루살렘으로 떠나 1099715일 그 도시의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난 후 탈환하였다. 1187년 모슬렘인들이 재탈환할 때까지 그 도시에 왕국을 세우고 유지했다. 6차 십자군 운동을 이끌었고 출교 당했던 황제 프레데릭 2(Frederick II)는 협정을 맺었으나 1244년 모슬렘인들에게 영속적으로 빼앗기고 말았다.

 

3) 영적 모순들. 그들의 목적들을 통해 본다면 십자군 운동은 전적으로 실패였다. 가장 큰 실패는 도덕적 영적인 면에서 일어났다. 신성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물건들과 장소들을 이교도들의 손아귀에서 구원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잘못이다. 특별한 영적 혜택들을 소유했다고 하는 장소들로 순례하거나 그러한 것들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은 그러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실 정반대의 것을 가르친다. 육체적 대상들을 따르거나 숭상하는 일은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다(5:5; 고전 10:14; 15:2). 유골, 성상, 또는 성지 등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헌신과 관련이 깊지도 않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헌신했던 것이지 사물도 아니고 성골을 숭상하거나 순례에 대한 특별한 보상을 약속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성부께 예배드리는 것이 예루살렘이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 자신은 성지(holy places) 사상을 물리치셨다(4:19-24) 그들은 잔인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잘못된 점이 많았다. 1차 십자군 운동의 일원들은 라인지방(Rhineland)의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고 헝가리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을 벌였다. 예루살렘이 마침내 탈환되자 그들은 거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신약성경 도적적 규범에 비추어본다면 십자군 운동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5:7, 43-48; 2:13) 신약성경이 최상의 사랑실천을 가르치기 때문에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리스도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에 원천적으로 잘못된 것이다(18:36; 고후 10:3-4; 6:10-18).

 

시토 수도회

초기 2,000년의 종교적 열정은 십자군 운동에 집중되었다. 1차 십자군 운동이 시작된 직후 또 다른 수도회가 1098년 프랑스 시토(Citeaux)에서 시작되었다. 수도적 원리를 갈구했던 베네딕 수도승 로벗(Robert)에 의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시토 수도사들은 과도한 금욕주의, 세상과 등짐, 침묵의 교리, 명상, 그리고 사도적 가난’(apostle poverty)을 강조했다. 가장 큰 강조는 농사적 수고와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시토 수도승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세례 주는 일이 금지되었다. 주거지, , 예배 장소, 그리고 식이요법 등은 당연한 것이었다. 병약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육식은 금지되었다(딤전 4:1-5). 시토 수도사들은 짚으로 엮은 침대에서 잠을 취했다.

 

베르나르(Bernard, 1090-1153)는 시토 수도회의 강력한 변호자였으며 당대에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다. 아이러닉칼하게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 쓰는 일로 유명하게 되었다. 다른 전파자들은 시토의 원리들을 채택하여 보다 극단적으로 흘렀다. 브레스키아의 아놀드(Arnold of Brescia, ?-1155)는 문자적으로 모든 재물과 세속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12세기 초 브로이의 피터(Peter of Bruys)는 엄격한 금욕주의와 함께 유아세례 부인, 성찬, 교회 축일과 건물,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십자가 등을 거부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도구라는 의미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들은 중세 성직자들의 부귀영화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중세교회사 : 종교재판

 

이단적 종파

1) 카타르. 12세기는 정통교리로 여겨지는 것에서 극단적 대중성과 급진적으로 벗어나서 로마 캐도릭교회에 심각한 도전장을 던진 두 이단 종파가 일어났다. 그들의 형성은 캐도릭교회의 자라나는 세속성과 도덕적 문란이 원인이었다. 두 단체는 극단적 금욕을 지향하면서 도덕적 청결을 강조했다. 그 첫 번째 단체가 카타르’(Cathari)인데 헬라어로 kathalos청결’(pure)을 의미한다. 카타르들은 프랑스 남부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알비에서 유래된 알비파(Albigenses)로도 알려져 있다. 카타르들의 기본적인 교리적 특징은 이원론(dualism)이다. 이는 두 개의 영원하고 지상적 세력이 있다는 신앙이다: 하나는 악마(evil)이고 다른 하나는 선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영속적 투쟁을 하고 있다. 카타르들은 물질관에 있어 영지주의에 가깝다. 그들은 물질적 세상이 마음을 주도하는 악마의 세력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선한 세력은 영을 주도한다. 그래서 물질, 특별히 육체 그리고 먹고, 마시고, 세속적 재산들을 소유하는 것 등은 모두 악한 것이고 거부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카타르들은 어류를 제외한 육식을 금지했고 심지어 계란과 치즈까지고 금지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것들이 육적 성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결혼과 부부생활은 카타르들이 강력하게 부정한다. 육체적 세상은 선한 하나님의 영역으로부터 영들을 가두어 두는 감옥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재생산, 즉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같은 것은 감옥의 수를 성장시켰다. 사탄은 이러한 것들과 엄격한 금욕주의적 삶을 거부했다. 어떤 카타르들은 엔두라’(endura)와 같은 예식, 즉 죽음에 이르는 자발적 절식을 강조했다. 또 세례, 성체, 동물 살해, 전쟁, 사형, 맹세, 수많은 절기, 장식물, 캐도릭교회의 교리들, 그리고 악한 하나님의 사역과 같은 구약성경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카타르들은 두 계층으로 나뉘어지는데: ‘완전한 자“(perfect)과 신자들이다. 완전한 자들은 카타르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금한다는 것을 엄격히 고수하는 자들이고 신자들은 대부분이 이에 속하는데 세상의 형식들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만일 엄격한 고수를 행치 않고 세상을 떠나게되면 그들이 구원을 얻을 때까지 다시 성육신 된다.

 

2) 발도파. 발도파(Waldenses)는 카타르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고 대부분 같은 지역에 거주했다. 두 단체가 신앙 면에서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발도파들은 프랑스 리용의 부유한 장사꾼, 발도(Vadez 또는 Waldo)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떠도는 복음 전파자의 노래와 부유한 젊은 군주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19:21)으로 충격을 받았기에 모든 재산을 다 팔고 가족과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었다. 사도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가르침(10)을 따르기로 굳게 마음먹은 발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모직으로 만든 망토와 신발을 신고, 구걸해서 얻는 것으로 생활하면서 두 명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파했다. 카타르들과는 달리 발도파들은 대부분의 캐도릭 교리를 준수했고 캐도릭교회로부터 분리하지 않았다. 발도와 그의 조력자들은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자 1184년 출교를 당했다. 그리하여 그들과 캐도릭인들간 교리적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독특한 원리들은 믿음의 유일한 법칙으로 성경을 강조했고, 복음 전파를 강조했고, 그리고 교황 권위를 강력히 부인했다.

 

탁발 수도회

1) 도미닉칸들. 도미닉 수도회는 1170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도미닉(Dominic)으로부터 시작한다. 1203년 남부 프랑스로 여행하면서 그는 카타르들의 행위에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들이 캐도릭 선교사들이라고 생각했다. 캐도릭 선교사들로 인해 사도적 가난으로 열정을 갖게 되었고 카타르들처럼 복음 전파가 그들을 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되었다. 도미닉의 충고를 따르는 자들을 가리켜 복음 전파자들의 수도회’(Order of Preachers) 또는 도미니칸들’(Dominicans)이라 부른다. 그들은 1216년 교황의 인준을 받았다.

2) 프란시스탄들. 아싯시의 프란시스는 중세에서 가장 뛰어난 성자로 손꼽힌다. 다른 선배들처럼 프란시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닮는 최상의 길이 가난하게 살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프란시스칸들은 1223년 교황적 인준을 받았다.

 

도미니칸들과 프란시스칸들은 많은 면에서 닮은 점들을 갖고 있으며 하나의 수도회로 연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탁발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가난, 복음전파, 동료를 돕는 것, 그리고 스콜라적 연구에도 동일하게 전념했다. 마침내 그들은 교황적 권위에 종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교황에게 헌신할 것을 맹세했고, 교황제를 위한 성체가 되었다. 교황제의 강력한 변호자들인 그들은 이단 종파들을 타파하는 종교재판자들로 역할했다.

 

종교재판

캐도릭교회의 선교적 노력이 카타르들과 발도파들의 물결을 이길 수 없게 되자 강력한 조치가 강구되었다. 이런 이단적 종파들은 성경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1229년 툴루제의 교회회의에서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고 번역하는 모든 작업까지 금지했다. 이단 조사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를 종교재판이라 부른다. 이단 혐의를 가진 자들은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고 종신형을 받거나 조금 경감한 형벌을 받았다. 정죄받고 철회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세속권력으로 넘겨져 화형에 처해졌다. 군사적 십자군들과 핍박의 다른 형태들은 카타르들과 발도파들에 대해 일어났다. 카타르들이 철저히 일소되고 발도파는 상당한 피해를 받았다.

스페인 종교재판

 

15세기말에 이르러 유럽 국가들 중 프랑스, 영국, 그리고 스페인은 강력한 국가적 정체와 연합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국가에 있는 로마 캐도릭 교회들은 점점 민족화가 되어갔고 국가 주권자들과 영합하고 교황의 권한에서부터 점점 이원화해갔다. 특히 스페인은 국민적 연합을 이룩하는데 매우 어려운 점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711년 이후 모슬렘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모스렘인들(또는 Moors)은 그라나다(Granada) 왕국에 제한되었다. 나머지 스페인 지역은 4지역의 캐도릭 왕국으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가장 큰 왕국은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티야의 아사벨라가 1469년에 연합하므로 이루어졌다. 이제 강력한 스페인 왕국을 건설한 그들은 1492년 그라나다에서 무어인들을 추방시켰다. 모슬렘인들과 오랜 갈등의 결과로 스페인 민족주의와 캐도릭주의는 서로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되었다. 캐도릭 정통과 애국주의는 스페인들에게는 동일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확고한 캐도릭인이 아닌 자들은 대체적으로 유대인, 모슬렘, 이단자, 프로테스탄트, 아니면 마술사들이었고 교회만 아니라 국가에 위협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사벨라 여왕이 독실한 캐도릭 신자였기에 스페인을 정통 캐도릭주의가 아닌 다른 종교적 견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종교재판 절차

1480년 왕의 권위와 교황의 허락으로 이룩된 종교재판은 로마 캐도릭 교회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것들 중 하나가 되었다. 스페인에서 거짓 추종자들을 처결하기 위해 고안된 종교재판은 먼저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압박이 가해졌는데 이는 그들의 종교를 비밀리에 준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유대인들을 찾기 위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예를 들면, 돼지고기를 먹게 한다든지, 동정녀와 그녀의 형상을 가지고 시험하여 범죄자들을 가려냈다. 종교재판은 고소된 자들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때까지 범죄자라는 혐의를 지우지 않았다. 서로들을 감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한번 검거되면 친구들의 방문까지 거절당했다. 고소자들의 이름과 증거들까지 혐의를 받는 자들에게 제시되지 않았다. 오로지 열렬한 정통 캐도릭 신앙을 가진 자들이나 친척이 아닌 자들만이 고소 받은 자들을 위해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고문은 이단의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이 고백을 할 때까지 가해졌다. 고문의 형태는 대체로 물을 붓거나 목을 조르는 것, 눕힌 뒤 사지를 당기는 것, 턱을 쥐어트는 것, 헝겊은 목구멍으로 쑤셔 넣는 것, 등이었다. 특히 strappade는 사람을 공중에 매달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는 것인데 매우 큰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더욱이 여러 가지 형벌을 가했는데 재산 압수, 종신형, 공개적 수치, 추방, 그리고 사형 등이었다. 고소받은 자들은 auto de fe(“믿음의 행위라고 직역되지만 종교재판의 사형집행으로 보는 것이 좋다)으로 알려진 공개적 행사를 받게 되었다. 주로 공휴일에 거행되었고 지도자들의 혼인식이나 병자들이 낫게 되는데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정해진 날 감옥에 갇힌 자들은 사제들과 종교재판자들에 의해 공중 장소에 나오게 된다. 설교가 행해지고,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종교재판을 지지한다는 맹세가 행해진 후, 선고가 발표된다. 종교재판들이 사형을 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감옥에 갇힌 자들은 형벌을 받기 위해 세속 군주들에게 넘겨졌다. 교회 직분자들은 세속 군주들에게 자비를 요청하며 피를 보지 않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형식적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당연히 화형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자들은 가장 첨예한 문제를 들고 나오고 종교재판의 기록을 낭송한다. 이러한 절차로 인해 1480-1524년 동안 14,344명이 화형을 당했고, 1,368명이 형상을 만들어 화형을 당했고, 195,937명이 다른 형벌을 받거나 참외의 형벌로 사형을 면했다. 스페인 종교재판은 마침내 1834년에 이르러 중단되었다.

 

 

 

중세교회사 : 다른 종교적 활동

 

스콜라 철학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은 중세 신학적 철학에 붙여진 이름이다. 형식적으로 역사에 나타나게된 것은 학교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스콜라 철학자들’(Schoolmen)이라 부른다. 스콜라 철학은 본질적으로 이성과 종교를 조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논리가 신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고 성경적이거나 교회 교의를 이성적으로 상술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경을 향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접근방법은 배우 철학적이고 지성적이었다. 아리스토틀과 같은 헬라 철학자들의 많은 저서들이 발견되자 고대 철학에 대해 새로운 흥미를 갖게 되었고 그 방법들을 성경적 진리를 발견하거나 후원하는데 적용했다. 이성만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충족을 줄 수 없다. 계시가 더해져야만 한다. 성경은 최종적 권위를 갖고 있지만 종교회의와 ‘교부들’의 해석을 기준하여 이해해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 캐도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에 두 거성이 있는데 한 분은 안셀름(Anselm, 1033-1109)으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을 발전시켰고, 두 번째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로서 스콜라 철학자들의 왕자로 여겨진다. 안셀름은 성경의 모든 진리가 철학으로 실증된다고 믿었지만 아퀴나스는 철학이 진리와 전혀 반대되지 않는다고 믿었고 철학과 신학이 하나님께로 나왔기 때문에 전혀 모순이 없다고 믿었다.

 

13세기에 이르자 스콜라 철학자들은 모든 신학적 질문들을 이성으로 해결하려고 했을 때 자신들의 확신을 잃기 시작했다. 7성례-세례, 견진성사, 성찬, 참회, 종부성사, 수임, 그리고 결혼-의 사상이 나타났던 시기도 스콜라 철학이 왕성했던 시기였다. 성례는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몸의 일원들에게 부여하신 은혜의 방편이었다. 특별히 성찬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이 때에 일어났다.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란 용어는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문자적 육체와 피로 변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화체설은 4차 라테란 종교회의(1215)에 교리로 완전히 확정되었다. 성찬의 잔의 사용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평신도들에게 분잔 되지 않았다. 이런 예식은 성찬의 두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담고 있다는 견해로 촉진되었다. 12-13세기에 이르자 우주적으로 수용된 유아 성찬식은 서방에서 금지되었다. 성찬은 주님의 성육신과 희생이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비주의

스콜라 철학과는 전혀 다른 운동이 동시에 있었는데 신비주의(mysticism)였다. 신비주의는 영혼 내에 있는 진리와 지혜를 위한 요청이었다. 그 목적은 신 또는 신성한 것과 연합하는 것이었다. 신비주의의 목적은 논리적 분석보다는 추상적, 논쟁보다는 열정에 의해, 머리보다는 가슴에 의해, 지성적 용맹성보다는 영적 감성에 의해, 예전과 축제보다는 하나님과의 영혼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 내적 헌신과 영적 영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성령과 개인의 영혼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교황제 쇠퇴

 

교황제 절정

교황 이노센트 3(Innocent III, 1198-1216)의 보직 둥 교황제는 세속 권력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직위는 캐도릭교회가 영적 사상들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렀던 공포적이고 끈질긴 투쟁의 결과였다. 세속적 야망들은 영적인 부분을 희생했을 때 가능했다. 이런 야망을 위해 정치적 음모가 펼쳐졌다. 하지만 절정에 달한 교황제는 이미 지평선에서부터 쇠퇴가 예기되었다. 절정의 행로는 곧 쇠퇴로 이어졌다. 세속적 일들은 교황제를 위한 적절한 환경이 아니었기에 교황적 지상권은 매우 짧은 시기만 유지했다. 일세기도 되기 전에 교황은 정치적 영역에의 권력 투쟁에서 몰락하고 만다.

세속 권력에 군림하는 교황의 지상권은 이노센트 3세 이전부터 지속되었지만 실제로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노센트와 그 후계자들은 세속군주들간 농간을 통해 교황 지상권 이론을 강요하려고 노력했다. 사용했던 수완은 정치적 주장권을 내세우는 교황의 후원을 받기 위해 야망적 세속 군주가 교황의 그늘아래 들어오는 것이었다. 만일 세속 군주가 약속을 어길 때-이따금 일어났지만-교황은 경쟁자 세속 군주를 후원하여 갈아치웠다. 교황은 이 때에 출교나 파문 등과 같은 무기를 사용했다. 파문(interdict)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지역에서 성례나 성직이 수행되지 못하는 것이다. 출교(excommunication)는 성례를 부인하고 신실한 자들만 참여하는 성찬식에서 제외된다. 출교는 개인들에게 해당된다면 파문은 모반적인 군주들의 영역에 해당되었다. 실제적으로 그들의 영역 내에 종교적 예배가 금지되었다. 정말 가공할만한 위력있는 교황적 무기였다. 이노센트 3세가 불복종하는 군주들에 대해 85회나 파문을 내렸다는 것을 보아 그가 어떤 성격을 지닌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노센트와 투쟁을 치른 유명한 군주는 신성로마제국의 독일 황제들이었다. 이노센트는 자신의 요구에 응하는 사람이 발견될 때까지 제국직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양도했다. 성공적으로 교황권을 유지했고 제국직을 갖는 자들을 주도했다. 또 다른 영주들을 비천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필립 2세는 이혼했던 아내를 돌아오게 하라고 강요받을 정도였다. 리온의 알폰소 9(Alfonso IX of Leon)는 깊은 관계를 가졌던 아내와 별거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아라곤의 피터와 영국의 존은 자신의 주권이 교황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노센트는 군사적 십자군을 조직하여 카타르들과 그들의 후원인들을 분쇄하였다. 이노센트가 후원했던 정책들과 교리들은 교회법이 되었고 교황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콘스탄틴노플의 몰락(1453)은 헬라교회를 로마교회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이런 정치력에 덧붙여 13세기동안 캐도릭 교회는 유럽의 1/3의 땅을 차지하였다.

 

보니파세 8

보니파세 8(1294-1303)는 교황직에 올랐던 어느 선배들보다 교황직 지상권에 강한 집착을 가졌던 교황이었다. 불행하게도 로마 캐도릭 교황권은 가장 밑자리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했다. 13세기는 교황권의 정치력을 손상시켰던 시기였다. 성장하는 민족주의(nationalism), 로마법의 영향, 평신도 법률가들(성직자들을 대신했던 왕들의 조언가들), 그리고 교황들이 세속 일에 관련되지 말아야한다는 확신들이 그러한 상황을 엮어나갔다. 결과적으로 교황직은 대중적 지지를 잃고 있었다.

프랑스의 필립 4(1285-1314)는 보니파세의 무시무시한 적대자였다. 필립이 모반죄를 적용하여 교황의 사절단을 체포하자 보니파세는 그들을 석방하고 필립과 프랑스 감독들을 로마로 소환했다. 필립은 성직자들, 귀족들, 상류계층의 사람들을 불러 자신의 입지를 지지해 달라고 했다. 보니파세는 이에 대해 우남상툼(Unam sanctum)을 발하였는데 그 안에는 세속권보다 교황권이 우위에 있다는 강력한 주장이 담겨있었다. 세속권력은 교황에게 종속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교황을 통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로마 교황제는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필립은 보니파세를 가리켜 이단, 부도덕이라는 죄목을 씌우고 그를 처단하는 범종교회의의 개최를 명했다. 필립의 압력은 결국 1303년 보니파세는 체포되었다가 석방 후에 곧 죽고 말았다. 교황권은 강력한 세속권에 대한 모든 힘을 소유했다가 그 일로 패하고 말았다. 결국 교황의 정치적 야망에 크나큰 타격을 안겨다 주었다.

 

아비뇽 유수

아비뇽(Avignon, 1309-1377)으로 옮겨진 교황청은 프랑스의 속박을 받게 되었다. 모든 교황들이 프랑스인들이 되었는데 최초의 아비뇽 교황은 필립에 의해 선출되어 보니파세가 내렸던 필립에 대한 출교, 파문을 철회케 했고, 우남상툼을 수정토록 했다. 아비뇽에 있는 동안의 시기를 가리켜 교황제의 바벨론 포로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세속권력 위에 군림했던 교황직의 지상권을 변호하거나 반대하는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교황권력을 점점 무력하게 만들었다. 아비뇽 교황들은 프랑스 꼭두각시들로 인정하면서 교황권에 도전하는 여러 국가들이 일어났다. 아비뇽 교황제는 사치스런 삶을 영위하기 위해 국가들의 세금납부를 강요하고 응하지 않는 자들에게 출교를 내렸다.

1377년 로마로 되돌아온 교황제는 추기경들은 교황을 선출했지만 자신들의 견해를 수렴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의 선출을 무효화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자 무효화되었던 교황은 아비뇽으로 가서 스스로 교황임을 자천했다. 이에 대해 로마 교황은 퇴위할 것을 거부하면서부터 대 분열”(Great Schism)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아비뇽과 로마에 적대적 교황들이 존재하면서 유럽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가 이익에 걸맞은 교황들을 지지했다.

 

 

중세교회사 : 전 종교개혁시기

 

전 종교개혁시기

 

존 위클리프

“종교개혁 전의 종교개혁자들”(Reformers before the Reformation)로 불리는 유럽의 여러 각처에서 일어난 신학자들과 존 위클리프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실제로 발발하기 약 100년 캐도릭 교리들에 항거했던 인물들이다. 얼마나 그들이 종교개혁에 공헌했는지는 아직도 논쟁적이지만 그들의 교리들과 정신은 그러한 이름을 받을 만 하다고 여겨진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1328?-1384)는 초기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성직자들의 부와 세속 정부에 대한 간섭에 대하여 1376년 부상했던 영국 신학자였다. 교회직을 청지기직으로 인식하지 않고 남용하는 모든 성직자들은 그의 공직과 재산들을 몰수하여 세속권한에 두게 했다. 교회 권위는 세속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는 팽배했던 교황적 개념을 정면으로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클리프의 견해는 많은 영국민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영국 귀족들은 위클리프의 견해를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를 희생해서라도 세속권력을 확보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부, 위장, 그리고 외식에 식상해 있었고 모든 수도승들은 위클리프가 “사도적 가난”을 주창했기 때문에 그를 따랐다. 위클리프의 대중적 인기, 즉 귀족들에게 받았던 인기로 인해 로마 캐도릭 교회는 1377-78년에 그를 소환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법률로서 성경에 매우 강조했기 때문에 영국민들을 위해 자국어로 성경을 읽도록 했다. 스스로 이 일을 감행했는지 감독했는지 간에 그는 1382-84년 불가타에서 영어 성경을 출판했다. 이것이 최초의 영역 성경이 되었고 캐도릭 교회에 의해 금지서가 되었지만 널리 퍼져나갔다. 15세기 초 이러한 영역 성경을 읽는 자들에게 엄한 형벌을 내렸다. 위클리프의 또 다른 영향은 맨발로 겉옷만 걸치고 복음을 전파했던 “가난한 사제들”에게 성경에 평신도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롤라드(Lollards)로 알려진 그들은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가는 곳마다 알렸다.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15세기 초 심한 핍박을 받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롤라드 운동은 종교개혁 때까지 생존하였다. 위클리프의 인기도는 1376년 화체설에 대한 도전을 던지는 가운데 시들어지기 시작했다. 성찬을 위한 사제들의 인간 대리자들로 역할 한다는 것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화체설을 정면으로 반대한다는 것은 큰 희생을 치러야했고 교회의 근거를 흔드는 처사였다. 하지만 귀족의 보호를 받은 그는 체포되지 않고 살다가 1384년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교회회의들은 그의 저서들을 불태우라고 명했고 후에 유골까지 불태웠다.

 

존 후스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보헤미아, 즉 영국 밖에서 꽃피게 되었다.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존 후스(John Huss, 1373-1415)는 보헤미아의 설교가, 신학자, 민족의 지도자였다. 교황이 1412년 나폴리 왕에 대한 십자군을 일으키자 후스는 정면으로 무력을 사용하고 면죄부를 발행하는 교황의 처사를 비난했다. 이로 인해 교황 칙서가 그에게 내려졌지만 국민들은 이것을 불태웠다. 결국 프라하는 교황의 파문 하에 있게 되었고 후스는 출교와 추방을 당했다.

후스는 후에 콘스탄스 종교회의에 소환되어 “안전 보호”(safe-conduct)를 받았으나 무시당하고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검거되어 1415년 7월 6일 화형을 맞이했다. 후스를 따르는 자들은 평신도들에게도 잔을 제공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후사이트(Hussites)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우트라퀴스트(Utraquists)라 불리는 자들은 성경에 정죄된 예식들을 거부했다. 또 타보라이트(Taborites)는 성경에 명시되지 않는 모든 예식들을 거부했다. 자연히 그들은 화체설, 성자숭배,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맹세, 면죄부, 사제적 고백(priestly confession), 춤, 그리고 다른 오락들을 거부했다. 결국 우트라퀴스트들은 로마 캐도릭 예식을 수용했다. 우트라퀴스트와 타보라이트간의 분열을 일으켰던 전쟁으로 인해 타보라이트는 1434년 대패 당하고 거의 소멸 당하였다. 후에 모라비안들은 후사이트 운동의 영적 후손이 되었다.

 

 

교황제 개혁운동

 

개혁을 위한 종교회의운동

1. 피사 종교회의(1409)는 1378년 로마 캐도릭 추기경들은 대중의 성화에 의해 이태리인 우르반 5세(Urban V, 1378-1389)를 교황으로 선출하였지만 불만을 그에게 계속 표현했다. 4개월 후, 우르반의 선출이 협박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며 부정당하다고 하였다. 또 추기경들을 다른 교황 클리멘트 7세(Clement VII, 1378-1394)를 선출하여 우르반을 대신하였다. 선출된 두 명의 교황은 일치 양보가 없고 서로 정통성과 교황의 지상권을 주장하므로 두 경쟁 교황이 하나는 아비뇽에 다른 하나는 로마에 존재하므로 “대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는 과거에도 이러한 분열을 경험한 바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각자가 추기경 모임을 통해 선출되었다는 점과 그것에 따른 국가들의 후원을 받는 점에서 달랐다.

대분열은 하나의 지상의 지도자 아래 연합된 하나의 참된 교회임을 주장했던 캐도릭 교회에 크나 큰 수치를 안겨다 주었다. 이 사건을 교황들의 선출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도록 인도했다. 하지만 대 분열은 그렇게 생각만큼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여러 학자들은 교회의 범종교회의가 개최되어 대 분열을 해결해야만 한다는 상황의 실천적 필요성을 간파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결국 범종교회의가 각 교황의 인준 없이 1409년 피사에서 개최되었다. 종교회의는 두 교황들을 파직시키고 알렉산더 5세(Alexander V, 1409-1410)를 선출하였다. 종교회의의 결정은 교황제 위에 종교회의의 우월성을 선포했다. 이것을 가리켜 종교회의주의론(conciliar theory)이라 한다. 종교회의는 대 분열이 유럽의 강국들에게 인준 받지 않고 강행하므로 알렉산더의 선출이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를 직면했다. 피사의 종교회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었다. 로마 캐도릭 교회는 이제 세 명의 교황을 거느리면서 여러 국가들의 세력의 이권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2. 콘스탄스 종교회의(1414-1418)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알렉산더의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존 23세(John XXIII, 1410-1415)에 의해 소집되어 중세의 종교회의 중 매우 중요한 의미, 즉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대규모를 참석했던 종교회의가 되었다. 교황 위에 종교회의의 우월성을 주창하고 교황직의 절대적 권력을 박탈하고, 종교회의의 규율에 복종할 것을 법으로 제정했다. 존 23세와 베네딕 13세는 파직을 당하고 세 번째 교황인 그레고리 12세는 사임하였다. 그리하여 종교회의에서 선출된 마틴 5세(Martin V, 1417-1431)를 선출하므로 대 분열의 막을 내렸다.

 

3. 바젤 종교회의(1431-1449)는 콘스탄스 종교회의의 칙령에 따라 모였지만 교황들은 자신들의 권위가 제한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바젤 종교회의는 도덕적 행정적 개혁을 선언했지만 종교회의 우월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종교회의 시작부터 교황 유진 4세(Eugene IV, 1431-1447)를 둘러싼 여러 모략이나 음모가 일어나면서 교황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대 분열로 상실한 교황권의 재탈환을 성공시켰다. 제국을 위협하는 터키인들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후원을 얻으려는 비잔틴 황제만 아니라 헬라교회 지도자들은 헬라와 라틴교회간의 재연합을 위해 섭외를 자청했다. 바젤 종교회의가 섭외의 장소로서 이태리 도시보다 아비뇽으로 할 것을 주장하자 유진은 그 종교회의를 페라라(Ferrar)로 옮겨 소규모의 종교회의를 주도했다. 페라라에서 다시 장소를 옮겨 플로렌스(Florence)에서 개최된 종교회의는 라틴과 헬라교회가 여러 가지 점에 있어 타협점에 이르고 재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바젤에 그대로 남아 있던 다수의 사람들은 계속 회의를 진행했지만 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선출된 교황도 그 힘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소규모 종교회의는 교황 유진을 이어 니콜라스 5세(Nicholas V, 1447-1455)를 선출하므로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

 

르네상스

현대를 위한 발판은 14세기에 시작하여 약 20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동안 문화적, 예술적 부흥이 있었던 시기뿐만 아니라 철학적 변화도 있었다. 인문주의적 새로운 세계관이 나타나시기였다. 또 이생의 쾌락과 만족을 강조했고 내세를 기대하지 않았다. 구원과 멸망에 대한 것 주제들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지상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사람들은 쾌락을 위해 무엇이든 감행했다. 고전적 고대성과 이교도주의가 다시 일어났고 세속화의 영향은 더해갔다. 사회의 변형은 역시 교황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15세 후반, 10세기부터 시작된 이래 가장 어두운 시대가 되었다. 교황들은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친척들과 가족들을 요직에 세웠다. 어떤 이들은 구역질날 만큼 부도덕했고, 사치했고, 사생아들을 낳았다. 교황제는 뇌물로 연맹되었다. 교황제는 일시적 극적인 세속화가 되어 사치를 삶을 유지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지웠고 교회직들을 매매했다.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는 특별히 전쟁광이로서 말을 타고 직접 전투에 임하곤 했다. 식스투스 4세(Sixtus IV, 1471-1484)는-그의 이름을 따라 시스틴 채플이라 부르는데-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면죄부들을 판매하는 자로 유명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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