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의 일반 개념과 교회사의 의미
제1장. 역사학의 일반 개념
1. 역사의 정의 어원적 정의
역사歷史를 뜻하는 라틴어는 Historia, 영어는 History라고 한다. 그 유래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 ?στορ?α (Historia)에 있다. 이를 풀어서 말하면, 연구, 탐구, 조사 등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남겨놓은 행위가 시간과 함께 소멸 消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저자 著者가 조사한 내용을 말한다. 또한 역사는 연구의 결과를 말하기도 한다. 포괄적으로 말하면 역사는 '지식'이며 '학문'이 된다. 폴리비오스(Polybios, BC 203~120 추정)가 저술한 『역사』(Historia)에서의 정의는 ‘과거에 대한 지식’이라는 되어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폴리비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와 함께 고대 희랍의 3대 역사가로 손꼽힌다. 다만 그리스 고전기(BC 510~323)의 헤로도토스(BC 480~420 추정), 투키디데스(BC 465~400 추정)에 비하면 270여년 쯤 후대의 인물이다. 그래서 폴리비오스가 활동하던 당시의 그리스는 헬레니즘(BC 323~146) 시대와 로마의 정복(BC 168년)과 마케도니아의 멸망(BC 146)에 따라 로마의 지배(BC 146~AD 330, 로마제국 시대의 그리스)를 받던 두 시대에 걸쳐 있다. 그러니까 전쟁으로 얼룩진 시대적 전환기 속에서 살던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 중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갔지만, 학자로서의 대접을 받으면서 로마 귀족들과 친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에 망해가는 조국 그리스와 달리 번영해가는 로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책을 서술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의 명저 『역사』(Historia)는 BC 220부터 146년까지 75년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문명의 전환기를 살았던 폴리비오스는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40권짜리 『역사』(Historia)를 통해서 로마가 서양문명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과정을 기술하려고 했던 것이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살던 그리스 고전기와 달리, 폴리비오스가 살던 시대의 그리스어권 세계는 완전 딴판이었다. 아테네가 문명의 중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헬레니즘 문명의 가장 중요한 도시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케이아(안티오키아)였다. 각각 이집트와 시리아의 도읍이었다. 그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왕이 지중해문명의 패권을 잡은 뒤의 시대였던 것이다. 기원전 336년, 만 20살의 나이로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 왕(영어명 알렉산더, 아랍명 이스칸다르)이 33세(BC 323년)로 단명할 때까지 13년간의 정복전쟁으로 유럽 지중해문명의 양상은 전혀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로스 왕이 죽은 기원전 323년을 헬레니즘 문명의 시대로 정의내리고 있다. 바로 폴리비오스가 살던 전반기 시절이었다. 기원전 203년에 태어난 폴리비오스가 만 57세까지 살던 시대였으며, 그 이후의 후반부 26년간은 그가 죽던 83세까지로 로마제국의 지배기로 구분된다.
여기서 폴리비오스의 역사관을 좀 더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 정치활동을 위한 가장 건전한 교육과 훈련은 역사 연구이며, 운명의 변천을 용감히 견뎌내는 방법을 배우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돌이켜보는 것 ...
... 역사가는 선정주의로 독자를 놀라게 하려고 애써서는 안 되며, 비극 시인들처럼 누군가가 말했음직한 발언을 추적하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가능한 결과를 망라하려고 애써도 안 되고, 평범하더라도 실제로 일어난 일과 실제로 이루어진 발언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그쳐야 한다.
역사의 목적은 비극의 목적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비극 작가는 가장 그럴듯한 말로 관중을 일시적으로 전율하게 하고 매혹하려고 애쓰지만 역사가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과 발언을 기록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진지한 역사학도를 가르치고 납득시키려고 애쓴다. 비극은 관객을 속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비극에서 중요한 것은 비록 거짓일지라도 있음직한 상황이다. 그러나 역사의 목적은 역사학도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1. 역사의 정의 중 (1) 어원적 정의
1. 역사의 정의 ⑵ 내용적 정의
오늘날 ‘역사’의 내용적 정의는 무엇일까?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오늘날 답변도 '과거에 대한 지식'인 것일까? 거기에 '인간'을 더해서 “역사란 인간의 과거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하면 될 것인가? 우선 서양의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인 랑케(1795~1886)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중요시했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H. 카아(Edward H. Carr· 1892~1982)는 랑케로 독자적 연구영역으로 독립시켰던 역사학을 철학, 정치학, 사회학 등의 학문와 교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가톨릭 교리신학원의 책 '세계교회사'(비매품)의 제 1장 ‘역사학의 일반적 개념’은 김성태의 『세계교회사 Ⅰ』(성바오로, 1986) 15~86쪽을 인용한 문헌이다. 그리고 김성태의 『역사 안의 교회- 교회사 논문선집』(분도출판사, 1985), 11~25쪽도 참고하라고 되어 있다. 아무튼, 교재가 정리한 역사의 내용적 정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 첫째로, 역사지식은 연구, 탐구, 조사를 통해 얻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의미하기 위해 사용됐다. 그리고 이 지식은 논리상 정당하고 확실한 근거가 있는 참된 지식, 다시 말해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② 둘째로, 역사지식의 대상은 과거이다. 이 때, 과거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역사지식의 대상에서 현재와 미래를 제외시켰다. 현재는 역사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엄밀하게 현재는 순간순간 연속적으로 과거로 편입되어 묻히지만 역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아직 혼돈상태로 원인과 결과가 혼재하고 거미줄처럼 얽인 상태에서는 충분히 심사숙고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판단을 내리기에 적합지 않다. 진정한 의미의 지식이란 합리적으로 정돈된 종합적 파악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③ 셋째로, 역사는 과거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과거에 대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다만 인간의 과거를 취급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과거는 ‘인간적 과거’이다. 인간적이란 단어는 인간을 동식물과 구별하여 인간만이 소유한 특성, 즉 사물의 이치를 따져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인간화를 추구하며 이러한 노력은 문화와 문명이라는 표현으로 집약되었다. 따라서 과거의 문화문명만이 역사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역사를 ‘과거의 문화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하게 된다.
1. 역사의 정의 중 (2) 내용적 정의 (끝)
2. 역사학의 전제개념
역사란 역사진리 歷史眞理를 발견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역사진리는 다른 학문과 비교하면 그 대상 자체가 상대적이고 종속적이며 잠정적 특징이 있다. 가변성이 매우 크다는 뜻이다. 오늘은 진리일 수 있지만 내일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허위가 될 수 있는 역사진리는 다만 현재 진리로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까지의 역사진리가 비록 내일 수정되더라도 현재의 역사가가 최선을 다하여 역사의 가능성 안에서 역사를 서술하였다면, 그것은 지금의 역사진리가 되고 그에 합당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는 역사사실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는 두가지의 전제, 즉 과거의 사실이어야 함과 동시에 문서나 비문 등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만을 통하여 결정된다.
3. 교회사의 의미 ⑴ 교회사와 일반 역사
교회사는 하나의 역사학으로서 연구방법의 기본적 원리와 작업은 일반 역사학과 동일하다. 교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역사종교’로서 추상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이다. 그런데 교회사의 연구대상인 교회는 신앙의 신비체 神秘體이므로 마지막 연구단계에서는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사는 ‘신앙의 학문’이며 신학의 일부로서 과학적이 아닌 사고방식, 즉 신학적인 특수 연구방법과 종교적 마음가짐을 전제한다. 교회사는 교회에 대한 신학적 개념을 채용할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답변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3. 교회사의 의미 ⑵ 교회사 연구의 양면성
교회사는 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얻어진 과거 교회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교회와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신인 神人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적 神的인 동시에 인적 人的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인간적 한계성과 인간의 공과 功過를 지니고 행동하는 구성원이 성령의 감도 感導를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운영하는 조직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하느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성령과 보호 아래에서 그 내적인 발전과 외적 성장을 통하여 지상에 실현되는 과정을 밝히는 학문이다.
3. 교회사의 의미 ⑶ 교회사 연구의 필요성과 연구자세
교회사는 교회의 참된 본질과 특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이다. 교회사를 통해 얻은 지식이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제시하는 데 필요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교회사는 과거의 교회상을 제시함으로써 이상적 교회와 현실의 교회가 얼마나 다른 지를 알려주며 또한 호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사 연구는 객관적 자세로 임해야 하며, 지나친 호교사 입장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사가 敎會史家는 역사 안의 객관적 사실들을 미지 未知의 타자 他者와의 만남으로 받아들이며 역사 대상을 존중하고 비판의 절제된 감성들을 공유해야 한다.
4. 교회사 연구의 문제점 ⑴ 역사진리와 종교진리의 모순성
종교진리와 역사진리 사이에서 때때로 일어나는 마찰은 흔히 있을 수 있으며 특히 2가지 혼동에서 발생된다. ① 첫 번째 혼동은 역사진리에 있어서 학문적으로 이룩된 결론, 즉 학문적 역사진리와 아직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은 역사 가설 사이에서 발생한다. ② 두 번째 혼동은 종교진리에 있어서 신의 계시인 신앙의 진리와 교회의 불확실한 전통적 견해 사이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역사 가설은 신앙의 진리에 모순될 수 있으며, 학문적 역사진리는 교회 안에서 선의로 전승된 불확실한 견해에 상반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적 역사진리와 신앙의 진리 사이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4. 교회사 연구의 문제점 ⑵ 교회사와 역사신학
교회사는 순전히 인간의 작업만도 아니고, 신의 역사 役事만도 아닌 공동 작업이다. 따라서 교회사가 敎會史家는 양자를 종합, 단일화하여 신적 측면에서 연구할 수 있다. 이것이 인류의 발전 과정을 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제시하는 역사 신학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신적인 요소와 인적인 요소라는 양면성을 지니기에 신적 성격 때문에 어떠한 잘못된 신성하지만, 반대로 인적 요소 때문에 오류와 죄악까지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사가 敎會史家가 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지적하는 것은 신자로서 잘못을 범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언급해야 하고 또 마땅히 서술해야 하는 것이다.
5. 교회사
교회의 역사에 대한 개념은 신학적 임의任意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교회사에 대해서 여러가지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교회사 개념에는 다양한 갈래길이 존재하는 데, 그 까닭은 교회론 문제에 대한 차이점에서 유래한다.
제 2장.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립
- 서기 30~100년 -
사도 시대란 말 그래도 예수의 직 제자들이 살아있던 시대를 말한다. 영어로는 엎허스탈릭 에이쥐(Apostolic Age)라고 한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무렵부터 그들이 형성한 초기 공동체가 형성된 시기를 서기 30년부터 100년까지로 정하고 있다.
위키피디아의 정의를 보면 다음과 같다.
The Apostolic Age of the history of Christianity is traditionally the period of the Twelve Apostles, dating from the Great Commission of the Apostles by the resurrected Jesus in Jerusalem c. 33 until the death of the last Apostle, believed to be John the Apostle in Anatolia c. 100. Traditionally, the Apostles are believed to have dispersed from Jerusalem, founding the Apostolic Sees. It holds special significance in Christian tradition as the age of the direct apostles of Jesus Christ. The major primary source for the "Apostolic Age" is the Acts of the Apostles, but its historical accuracy is questioned by some.
이 중에서 the Great Commission은 예수님의 명령을 의미한다. '지상명령', '가장 큰 명령', '지상 최대의 명령', '대사명' 등을 일컫는다. 이 표현은 마태오 복음서 마지막 장인 28장의 마지막 구절(19~20절)에 그 기원을 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유다를 제외한 열 한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장면이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19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20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have commanded you. And behold, I am with you always, until the end of the age.”
St. Peter, by Rubens, 1610~1612년경 작품
사도행전은 사도시대의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는데,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도행전에 서술된 예루살렘 교회 외에도 유다지방을 제외한 팔레스티나 본토와 요르단 강 서안 西岸 지역에도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 밖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갈릴래아 Galilea 교회, 사마리아 Samaria 교회, 요르단강 서안 지역의 교회 등이다.
제2장.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립
⑴ 유다계 그리스도교 ① 예루살렘 교회
교회와 그 역사는 30년경, 유다교의 축일인 오순절 五旬節 Pentecost 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다.
[사도행전 제2장 1~13절 성령강림]
1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12 그들은 모두 놀라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13
그러나 더러는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며 비웃었다.
이 역사적 사건 이후에 복음은 사도들, 특히 베드로에 의하여 선포되었다(사도 2,14~36; 3,11~26; 4,8~12). 베드로의 설교는 그의 공적 사명인 초창기 교회의 복음 선포(케리그마, Kerygma, 영어발음 커리금어) 계획을 드러내고 있다.
복음선포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진술과 하느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는 제시하는 것이었다. 복음선포의 주제는 예수의 부활과 예수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구약의 메시아 예언, 즉 메시아 내림(來臨, 찾아오심)에 대한 희망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이러한 호교적 내용 이외에 요르단 강의 세례로부터 시작하여 승천에 이르는 예수의 일생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은 사도들의 설교에 있어서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제2장.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립
⑴ 유다계 그리스도교 ② 예루살렘 밖의 교회
초창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갈릴래아 지방에 전파되어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는 로마제국에 항거하기 위해 기원전부터 발생한 광신적 유다주의 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광신적 유다주의 운동이 소멸되었고, 더욱이 그리스도교가 단순히 민족주의로 흐르는 유다주의와 결별을 고하면서 이 운동을 이단시하였다. 이로써 신약에서는 더 이상 갈릴래아의 그리스도인을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사마리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마리아 출신인 필리포스 부제가 자기 고향에 복음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 지방출신인 시몬이라는 마술사의 성직 매매 사건에 연루되어 선교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요르단 강 서안 지역에서는 세례파라는 명칭을 지닌 비 非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나자렛파라고 불렸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유다교의 종교적 행사를 거행하는 공동체였으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는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이 둘의 명칭이 혼용되어 사용되었음을 발견할 때, 밀접한 관계가 없었다고 단순히 판단할 수는 없다.
제2장.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립
⑵ 이방계 그리스도교 ① 시리아 교회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주로 팔레스티나의 본토 유다인들과 ‘디아스포라’ Diaspora (본토 이외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에서 성장하였고, 동시에 복음이 이교인들에게도 전파되었다. 그 중 시리아는 교세 확산의 중대한 거점 역할을 하였는데, 그 대표적 공동체가 다마스커스 교회와 안티오키아 교회였다. 특히 안티오키아는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대도시 안티오키아에 설립된 교회로, 예루살렘 다으으로 그리스도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후에 이 공동체는 크게 발전하여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Claudius (재위 41~54) 시대에 그 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의미인 ‘그리스도인’으로 처음 불리기 시작했다(사도 11,26). 또한 안티오키아에서 처음으로 완전히 분리된 두 공동체, 즉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병존하기 시작했다.
제2장.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 1.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립
⑵ 이방계 그리스도교 ② 로마교회
로마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전설과 전승된 증언에 의하면, 로마 교회는 베드로 사도가 세웠다고 보고 있다(사도 12,17). 또한 로마 주교의 명단을 언급 하는 역사적 증언에는 베드로가 모든 명단의 첫 자리에 놓여있다. 성경과 역사적 증언들은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로마에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있었다고 전한다(로마 1,8; 사도 2,10)
2.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생활
⑴ 특수 공동체의 생활
예루살렘 신도들은 그들 특유의 공동체, 즉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의미하는 에클레시아 Ecclesia를 형성하는 동시에 예수를 주님 Kyrios 이라 부르며, 그들의 고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유다교 공동기도에 참여한 다음 개인집에서 집회를 가졌다. 집회는 예비자 교리교육, 신도들을 위한 설교, 신앙과 애덕실천을 권유하는 훈시부분과 빵을 나누는 성찬례, 기도가 집전되는 예절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이 특수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상부상조의 경제조직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사유재산 포기에 따른 공동체의 재산공유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강제성이 아닌 자발성을 전제로 하였으므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다. 초기 공동체의 이러한 경제구조는 협동정신과 형제적 사랑 뿐 아니라 약속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던 그들의 종말론적 사상과 현세 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⑵ 교계 체제의 확립
앞서 언급한 상부상조의 경제구조는 교회 내부에 문제를 야기했다. 즉 그리스계 과부들이 식량배급에서 히브리인들과 비교해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불평을 토로한 것이다. 이에 사도들은 그리스인 중에서 일곱명을 뽑아 기도와 안수를 통해 부제 副祭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스테파노를 대표로 세워 설교와 세례예식의 임무도 함께 부여했다. 이처럼 초기 공동체는 교회 내부의 제도적 요청에 의해 성직계급의 질서를 갖춘 공동체로 성장해나갔다. 복음 선포, 교회관리, 영적 지도, 성사 집행 등의 직무를 맡은 사도단, 사도들의 보조단체인 히브리인 신도들을 돌보는 원로단과 그리스인 신도들을 책임진 부제단이 있었다.
이처럼 교계 체제의 확립에 대한 언급은 사도행전 6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곱 봉사자를 뽑다(사도행전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 부제직의 기원
초대교회 신자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식량배급에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가 식량배급을 받을 때 홀대를 받는 일이 생겼고, 이에 열두 사도들은 평판이 좋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 이 직무를 맡겼던 것이 바로 부제직의 기원이다.
제2장. 사도 시대의 그리스도교. 3.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시련
3.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시련
사도시대에는 유다 민족주의가 극렬해지고 있었다. 민족주의의 창궐은 세계 공동체를 지향하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동족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심하게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小) 야고보의 순교(62년)와 예루살렘 함락(70년)은 유다교와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향력을 약화하거나 상실하게 하였다.
Saint James the Just
여기서 잠깐 예루살렘 교회 1대 지도자 (小)야고보에 대해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사도요한의 형이며 제배대오의 아들인 (大)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다.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다'는 뜻이라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小)야고보는 그를 시기하고 경계하던 바리사이파에 의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바리사이파는 부활절에 야고보를 강제로 끌어내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끌고 가 배교를 강요하다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게 한 다음 돌로 쳐죽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네로의 박해로 총독 안나스의 손에 순교당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아무튼 이 사건은 AD 62년의 일이다. 그런데 이 (小)야고보는 신약성서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같은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같은 인물로 동일시하고 있단다.
즉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의인 야고보(Saint James the Just, 혹은 James the Just), 예루살렘의 야고보(James of Jerusalem), 하느님의 형제 야고보(James Adelphotheos), 야고보, 주의 형제(James, the Brother of the Lord)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첫번째 예루살렘의 주교이며 루카복음서 10,1~20에서 언급된 70인 사도 중 첫번째 사람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리스도교는 이후 바오로 사도의 선교로 이방인 사이에 점차 확산되어 유다교적 유대 紐帶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의 대립은 피할 수가 없었다.
⑴ 교회 내분
① 율법논쟁
49년에 교회 내분을 보여주는 사건, 즉 예루살렘 사도회의와 안티오키아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이방계 그리스도인에게 모세 율법, 특히 할례 割禮를 강요한 데서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유다 민족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는데, 유다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리스도교가 아직 유다교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고 간주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할례 받지 않은 이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관습적 거부감이 존재했고 그것은 유다교에 반역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유다 민족주의의 압력에 굴복한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그 증표로 할례를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개혁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 국가의 세속적 목적과 연결될 위험을 깨달았다. 할례의 의무화에 대한 요구를 단호히 배격한 것이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원로들과 함께 회의를 열어 이에 관해 논의하였고, 야고보는 절충안으로 노아 Noa 계명, 즉 우상에 바쳤던 음식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음란한 행동을 금하는 윤리 계명★만은 준수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교회의 내분은 이후에 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들려 바오로와 논쟁한 모습에서 심화되었다.
★ 대홍수의 주인공 노아는 최고의 의로운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는 의로움으로 단죄받은 세상의 파멸에서 화를 면했고, 이 땅과 주민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킬 수 있었다. 제관계 전승은 이 화해 속에서 노아의 후손 모두에게 미치는 범우주적인 계약을 보았다.
② 이단 운동
70년 함락 이후 예루살렘에는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 이외에 다른 유다인 공동체가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전례를 수용하면서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실천하였다. 또한 정통 유다교와도 다른 교리의 종교적 행사를 거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다계 그리스도교 또는 유다교 이단은 주로 요르단강 서안지방의 에비온파 Ebionism와 엘케사이파 Elkesaism, 소아시아 지역의 니콜라오파 Nicolaitans와 케린투스 Kerintus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 특성은 우선 그리스도를 예언자나 위대한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신성을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구원론적 의미를 배척하였다. 또한 바오로 사상과 삼위일체 하느님을 부인하며 윤리적 자유주의를 표방하였고, 물질적 메시아 사상 등을 주장하였다.
⑵ 교회 수난
① 유다인의 탄압
유다교 종파 중에서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몇 차례 충돌하였다. 우선 사두가이파는 지배계층으로서 사도들을 시기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또 정치적 목적으로 사도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바리사이파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복잡미묘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히브리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호의적이었지만, 그리스계 그리스도인에게는 적의를 보였다. 이는 그리스계가 성전이나 유다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에 관심이 없는 반면, 히브리계는 성전을 중요시하고 모세율법을 준수하는 유다 사상에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② 로마인의 탄압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로마제국의 마찰은 넓은 의미로 보아 황제 클라우디우스 Claudius (재위 41~54)의 유다인 로마 추방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로마 제국에 일종의 페스트를 퍼뜨린다는 이유로, 시리아에 있는 동포 유다인을 초대하지 못하도록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들에게 특명을 하달했다.
또한 64년 7월 16일, 로마 폭군 네로 Nero (재위 54~68)는 로마시 일부 지역을 파괴하기 위해 그가 방화하였다는 소문을 막으려고 이 범죄를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전가시켰다. 이것이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그리스 로마 문화와는 다른 그리스도교만의 특수한 생활 습관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시아누스 Domitianus (재위 81~96) 황제 때까지 박해는 계속되었다.
55년간 계속된 그리스도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교회에 대한 박해는 개인적 목적을 성취하려는 폭군의 전횡적 專橫的 행동의 소산이었지, 법적 근거는 없었다. 두 번째로, 박해가 벌어진 지역은 제한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박해는 로마와 소아시아, 팔레스티나 등의 소규모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세 번째로 박해는 로마 제국의 황제나 지방의 통치자들이 반 反 그리스도교적 조처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사회의 혼란을 막으려고 정책적인 결정을 내린 것에 불과하였다. 네 번째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 정부와 유다인의 마찰로 인한 부수적 결과였다.
도미티아누스 혹은 도미시아누스 황제
AD 51년에 태어나서 30세에 로마제국 11번째 황제가 되었다. 그의 나이 45세가 되던 해인 96년에 살해당했다. 이 자는 자신을 우상화하면서 '주님이자 하느님'(dominus et deus)라고 부르게 강요했다. 많은 이들의 반발 속에서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예수님이 주님이자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케리그마에 반대되는 상황에서 '황제우상화'를 반대하는 주요세력으로 몰아 심한 탄압을 가했다. 이후 그는 근위대장과 궁정관리 그리고 마누라(도미티나 롱기나)의 음모로 살해당했다. 이후 로마제국은 오현제의 시대로 들어섰다. 한편 96년은 중국은 후한의 시대이고,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가 삼국을 이루던 시대였다.
제3장 사도 시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 서기 100년 ~ 300년 -
서기 100년 이후 계시의 시대가 끝났다. 계시는 끝나고 전달만이 남았다. 계시가 끝났다는 것은 사도시대가 끝났다는 뜻이다. 더 이상 예수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던 사도들은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사도시대 이후'의 시대로 정의한다.
기원후 100년부터 300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제 사도 이후의 시대는 계시의 시대가 끝나고,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후대에 전달하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는 사도시대 교회와 초기 교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성전시대 聖傳時代★의 출발점이 되었다.
성전이 이제 예수님 말씀을 전달하는 본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성전 시대의 출발은 바로 사도 이후에 시작된 것이다. 결국 교회는 선교 분야에서 결정적 조치를 취하여 그리스 로마 세계의 모든 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러한 선교 정책은 성공을 거두어 특히 로마제국의 대도시에서 개종자 改宗者들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이제 교회는 외부에서 가해오는 반감을 막아냄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그 신원 身元, identity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인 계시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정신적 성장이 촉진되었다.
★ 성전시대 聖傳時代
성전(聖傳, 라틴어: Traditio) 또는 거룩한 전승은 기독교의 신학 용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계시를 나타내는 말로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이 있는데, 여기에는 성경과 사도전승 등이 포함되어 있다. 성경은 거룩한 전승의 일부로서 교리, 신앙생활상의 관행, 행동규범, 경신(敬神) 의식, 종교적 체험 등 초대교회부터 전승된 것들을 글로 써서 기록한 것이며, 성경의 내용은 오직 성전의 문맥 안에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사도전승에 따라 조심스럽게 해석해야만 한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거룩한 전승의 범위를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에 한정시켜서 이해하고 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으로도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르치기에 충분하고 완벽하며, 누구나 성경의 내용을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3장 사도 시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1.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교의 발전
⑴ 지역적 확장
1.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교의 발전 ⑴ 지역적 확장
① 성공적 전파의 원인
선교는 비 그리스도교 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노력이며 교회의 주요 임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다. 선교는 이 명령에 대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충성스럽게 응답하는 자세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선교를 충실히 수행하여 급속적으로 발전한 요인은 우선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령이 교회에 늘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열성적 복음 선포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러한 성공 요인은 교회 자체가 지닌 내적 요인과 교회 밖의 외적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내적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교의 결혼과 가정에 대한 윤리이다. 교회는 결혼의 신성함과 가정생활의 숭고함을 강조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교의 만민평등사상이다. 세 번째는 형제적 사랑, 협동정신, 상부상조 등의 경제조직 등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세이다. 네 번째는 박해시대에 신자들이 보여준 영웅적 용기이며, 다섯 번째는 평신도들의 전교 열성이다.
여섯 번째는 호교론자 護敎論者의 출현으로 문서 선교가 성공을 거둔 점이다. 이로써 상류계급과 지식층이 입교하고, 그들에게 예속된 모든 이가 개종함으로써 교세가 확장되었다. 일곱 번째는 그리스도교의 설교나 저술이 히브리인에게 국한해서 사용하던 아람어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문화권의 통용어인 그리스어를 사용한 사실이다.
다음으로 외적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당시 그리스 로마 문화를 지배하던 그리스 철학이 인간 내면에서 추구하는 근본적인 문제 즉 신의 존재, 영혼의 존재와 불사불멸성 不死不滅性, 인생의 목적 등에 확실한 해답을 주지 못한 반면에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이러한 문제에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한 점이다. 두 번째로 로마제국의 전통적 다신교에서 영적 만족을 얻지 못하고 종교적 한계를 체험한 이들이 결과적으로 일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 번째로 로마제국에 산재해 있던 유다인, 즉 ‘디아스포라’는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웠는데 이곳이 선교사들의 복음 선포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네 번째로 로마 제국의 지중해 연안지역 지배와 이에 따른 편리한 교통망이 도움이 되었다.
1.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교의 발전 ⑴ 지역적 확장
② 교세
사도시대 이후의 그리스도교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에 크게 확산되었고, 로마제국 밖에서도 여러 지방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 위치한 시리아, 이집트-알렉산드리아, 소(小)아시아, 아라비아 지방, 페르시아에서 서부지역의 이탈리아, 북(北)아프리카 골 Gaul 지방, 게르만 지역, 에스파냐 지방과 영국 제도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에 교세가 확장되었다.
⑵ 신앙의 체계화
1.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교의 발전 ⑵ 신앙의 체계화
① 사도교부
사도교부 使徒敎父는 계시시대가 끝나고 전승시대로 넘어가는 사도 이후 시대의 첫 단계에 등장한 저술가 그룹이다. 이 저술가들은 사도들과 면식이 있는 직제자 또는 사도들과 직접 접촉하지 못했지만 사도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목자들이었다.
이에 속하는 교부들은 다음과 같다.
로마의 클레멘스 Clemens Romanus (재위 900~100)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Ignatius (35~107)
스미르나 Smyrna의 폴리카르포 Polycarpus (60~155)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 Papias, 헤르마스 Hermas 등
사도교부들의 저서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표현방식에서 저자들은 서간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사도들과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는, 내용에서 저자들은 신학적 정의와 사변적 교리보다는 사목적 관심과 실천적 윤리를 강조했다. 이러한 사도 교부 시대의 저서가 가진 가치는 초기 교회의 사상, 신앙생활, 관습 등 교회 모습의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다. 또한 로마 주교의 수위권과 절대 전제군주적 주교직을 강조한 점, 성령 감도 感導의 정의와 성경의 정경 canon 규정 외에도 신앙의 지침서와 전례서로 사용되는 등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1.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교의 발전 ⑵ 신앙의 체계화
2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그리스도인은 로마제국 안에서 그리스 로마인과 유다인 다음 가는 제 3의 국민으로 등장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발전은 비그리스도교 세계의 공격, 즉 지식층의 논리적 논박 論駁, 황제들의 박해, 일반 대중의 의혹과 모함 등을 초래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방어적 자세로서 교회에 대한 오해와 비난에 대한 해명의 방법과 그리스도교의 합리성을 주창하는 호교론 저술의 적극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소극적 측면은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인 박해가 법치국가에 있어 불법행위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또한 지식인층의 모함과 허위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가 참다운 교회의 모습이며, 구약에 뿌리를 둔 전통적 종교임을 주장하였다. 적극적인 측면에서는 초기 교회의 변증론자들은 이교의 다신교와 유다교를 상대로 그들의 부당성과 비윤리성을 지적하면서 신랄하게 공박하거나, 그들의 종교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배척하는 모습을 전개하였다. 이에 속하는 교부는 과두라투스 Quadratus, 아리스티데스 Aristides, 유스티노 Justinus (100~165), 아리스토 Aristo, 타시아누스 Tatianus 등이 있다.
이들 교부의 등장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그들은 문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교회의 실상을 비그리스도교 세상에 알렸고, 그들의 작품은 그리스도교 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두 번째로, 사도교부들과 비교할 때, 교부들은 신론 神論, 말씀의 그리스도론 Logos-christology, 삼위일체에서 상당한 발전을 보였고, 이 시기에 성경의 정경이 설정되기 시작하였다. 세 번째로 2세기 교회의 내적 생활 특히 전례 생활, 교회와 국가의 관계, 신생 교회의 선교 활동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네 번째로, 교회를 옹호하는 그들의 노력이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문서선교의 목적은 성취되어 그리스도교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교의 발전 ⑵ 신앙의 체계화
③ 신학학파의 형성
2~3세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이교도의 박해로 인한 외적인 위험뿐만 아니라 영지주의, 몬타니즘, 마리치온 이단 등에 의한 위협에 처하게 된다. 당시의 교부들은 이단 논박을 통해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앞으로의 신학 발전에 중요한 기초를 놓았다.
‘전통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리옹의 이레네오, 동방 교회 신학의 발전에 기틀을 마련한 오리게네스, 서방 교회 신학의 기초를 놓은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와 로마의 히폴리투스 등과 같은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 교회 안에 고유한 신학 학풍이 형성되어 일종의 학파가 생겨나게 된다.
제3장 사도 시대 이후의 그리스도교
2. 교회생활
2.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생활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부 관습, 특히 교리와 전례는 아직도 유다교적 사상 또는 유다계 그리스도교적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우선 교리에서 그들은 구약성경, 특히 창세기 첫부분(1~3장)의 여러 구절에 대한 주해나 예언서, 주로 예레미아와 에제키엘의 단편적 내용을 인용하였다. 또한 신도들은 유다교의 저서들을 구독하였고, 이 시기에 저술된 묵시록도 유다교의 묵시사상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은 주요 교리를 보았을 때, 유다교의 천사론을 표절한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그리스도의 지성소(至聖所) 강림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구원론, 그리고 유다교에 기원을 두는 상징들을 이용한 교회관, 유다교의 종말 사상과 관련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과 지상 왕국의 건설에 대한 종말론이 있다.
전례에 관해서는 입교 의식과 주일 집회를 통하여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입교의식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우선 세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을 준비시키는 단계가 있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느님의 존재, 그리고 예수의 메시아 구약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가르치는 교리교육과 구약의 하느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황금률, 초대 교회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규정집인 노아 계명을 준수하도록 가르치는 윤리교육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이 끝나면 단식 실천과 구마, 안수와 침수(沈水)의 단계를 거치는 세례 예절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예절 외에 축성된 기름을 십자모양으로 바르는 도유예절과 흰 옷을 입는 예절 등이 있었다.
신약성경과 사도시대 이후의 저서들도 주일★ 집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주일 집회는 전례적 죄 고백으로서의 참회 예절을 시작으로 사도들의 회고록 예언서 등의 저서를 낭독하는 독서, 설교, 교회의 중요한 지향을 위한 기도가 있었다. 그 다음 성찬 기도를 통해 신도들은 ‘아멘’으로 대답하였고, 함께 빵을 나누었으며 가난한 신도들을 위한 헌금으로 끝을 맺었다.
★ 주일에 대한 기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디다케에서 발견되는 ‘주(主)의 날’이다. 이러한 표현 외에 주일을 ‘제8일’ 혹은 천지창조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시켜 ‘첫째날’로 지칭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유다의 배반을 보속하기 위한 수요일 단식의 극기,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자들이 실천한 슬픔의 고생으로서의 금요일 단식이 있었으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유다교의 축제일이 계속 지켜지고 있었다.
2.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생활
⑵ 영성과 윤리
① 기도와 극기
초기에 기도는 그리 중요한 역할은 하지 않았다. 다만 유다인의 기도와 유사한 형태를 유지했다. 신도들은 예수 안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새로운 삶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에는 정의와 평화를, 가난한 이에게는 도움을, 통치자들에게는 지혜를 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2세기 중엽 이후에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영성생활에서 개인 또는 공동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행위 중 가장 중요한 위치가 되었다.
기도는 완덕을 추구하는 데 불가결의 요소이며,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신도들은 인간의 육체와 정욕이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일치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장애를 억제하는 고행의 생활을 실천하였다.
② 신심
사도 이후 시대에 신심의 중심은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의 생활은 신도들이 따라야 할 표본이었고,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그리스도교 신심의 기초와 이상이 되었다. 가장 숭고하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형태는 순교였는데, 신도들은 이를 모든 완덕의 극치라고 생각했다. 순교에 대한 열망은 그리스도교 의 기본적 자세였고, 영성생활의 특징 중 하나였다.
③ 사랑의 실천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사랑의 나눔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 자선행위에서 표현되었다. 우선 사랑의 나눔은 그리스도인의 회식을 뜻하는 아가페 Agape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교회와 부유한 신자의 가난한 형제들을 위한 주택제공에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공동기금을 마련하여 재난 구호 활동 등에도 도움을 주었다.
2.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생활
⑶ 교회조직
① 개별교회
사도시대 이후의 지방교회는 그리스도교의 기초적 단위 공동체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러한 기초 공동체들 사이의 일치를 위해 지도자들은 신도들에게 경고와 가르침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직책 부여의 필요성을 느끼고, 더욱 세분된 새로운 교계제도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각 지방교회는 한 명의 감독을 최고 지도자로 하여 하위 계급인 원로단(장로단 내지 사제단)과 부제단의 순서로 조직되었다. 또한 교부들은 교계제도를 연구하여 이에 대한 신학적 이론을 정립하였다.
3. 교회의 수난
3.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의 수난
⑴ 이단운동
①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그리스도교 영지주의는 성경을 '공상적 비유'로 해석한 사상을 말한다. 이런 저런 사상들을 짬뽕한 것이거나 일종의 짬짜면에 해당된다. 그리스 철학과 신화, 이교도의 신비적 구원과 유다교 사상, 동양의 신화적 우주개벽설, 점성학 등을 혼합한 것이다. 즉 우주창조, 세계관, 인간구원, 신앙 등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이원론 二元論, 유출설 流出說, 정령론 精靈論 등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사도 이후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그리스도교의 여러 영역에 나타나 교회의 존립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대표적 이단자는 사토르니누스 Satorninus, 세트파 Sethians, 바르벨로파 Barbelognostic 등의 시리아 영지주의자들과 카르포크라테스 Carpocrates, 바실리데스 Basilides, 등의 이집트 영지주의자들, 마르치온 Marcion과 발렌티누스 Valentinus 등의 로마 영지주의자들이다.
3.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의 수난 (1) 이단운동
② 단일신론
2세기 중엽에 이르러 영지주의 반동의 결과로 새로운 형태의 이단이 발생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를 하나의 창조물(인간)로 변형시키려고 했을 때, 일부 저술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다보니 일신론과 마찰이 발생하였다. 이 때 ‘단일신론’ 單一神論 Monarchianism이라는 이단사상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 극단적 일신론 이단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로 다시 두 가지 주장, 즉 양자론 養子論 adoptianism과 양태론 樣態論 modalism이 등장하였다.
양자론은 인간 예수가 어느 한순간 신격화되어 신의 양자가 되었다는 요지의 이단이었다. 이 학설에 따르면, 본래 참된 신은 오직 성부 뿐이며, 그리스도는 양자관계에 의한 신일 뿐이다.
양태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신 唯一神의 한 형태만을 본다. 즉, 유일신은 때에 따라 성부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을 성자로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 학설은 성부가 인간 구원을 위해 수난을 받았다는 ‘성부 수난설’까지 내세우게 되었다. 이후에 이들은 로마 교회의 결정에 따라 단죄되었다.
3.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의 수난 (1) 이단운동
③ 광신주의
광신주의는 윤리도덕의 엄수嚴守를 광적으로 주창하였다. 여기에는 몬타누스 Montauns의 사상과 타시아누스 Tatianus가 전파한 ‘엔크라트주의’ Encrates★가 속한다.
★몬타누스. 원시교회의 종말론적 긴장을 부활시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알렸다. 또한 그는 이제 그리스도를 넘어 하느님의 계시가 종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며 성령의 예언자로 자처하였다.
★★엔크라트주의. 타시아누스가 전파한 것으로, 육체를 멸시하는 엄격한 금욕주의의 경향을 지녔다. 그는 모든 신자에게 육식과 음주만이 아니라 부부관계의 완전한 절제까지 요구하였다.
3.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의 수난
⑵ 교회 박해
① 박해의 원인
여러 가지 역사적 견해가 있지만 확실한 것은, 초기 대부분의 황제와 지방 통치자들이 대체로 법적 근거가 없이 그리스도교 신도들을 처벌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내부적인 원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주장하던 그리스도교의 절대론으로 인한 유일신교 唯一神敎와 다신교 多神敎의 충돌이었다. 둘째로, 로마제국이 그리스도와 그 신도들에 대해 품고 있던 오해와 증오심이었다. 셋째, 황제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느낀 국가 위기의식이다.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은 범세계적이고 초국가적인 향방의 그리스도교가 국가를 전복시키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② 박해의 과정
2세기에 이르러 시작된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3대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는 트라야누스에서 안토니우스 피우스에 이르는 100~160년 사이의 시기이고, 두 번째는 아우렐리우스에서 시작하여 막시무스 트락스에서 끝난 160~250년의 시기이며, 세 번째는 데치우스와 東로마 제국의 갈레리우스 사이에서 발생한 박해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의 박해는 지엽적이고 소규모의 교회 탄압이었고, 셋째 시기의 박해는 전국적이고 대규모였다.
제4장 로마제국 시대의 그리스도교(서기 300~450년)
1.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리스도교
“이제부터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
로마인이 믿는 종교는 무엇이든 존중을 받는다.”
- 밀라노 칙령 -
(1) 콘스탄티누스의 전환
①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콘스탄티누스 1세(272~337).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박해를 끝내고 정식종교로 승인했다. 압류재산을 돌려주고 국가 보상정책도 정했다. 325년에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해 기독교 발전에도 기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Constantius Chlorus와 헬레나 Hellena의 아들로 285년경에 나이수스 Naissus(세르비아의 Nisch)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클레시아누스의 궁전에서 보낸다.
교재에는 285년 태어났다고 되어 있지만,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인터넷의 유력 사이트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출생연도를 272년 혹은 273년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무래도 272년이 정설로 보인다.
위키백과. 콘스탄티누스 1세 네이버캐스트 새로운 로마를 세운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가 제국을 4분 통치하면서 293년에 로마제국 서부지역의 제2정제 正帝 Augustus 막시미아누스 치하에서 제2부제 副帝, Caesar로 임명되어 골 지방과 브리타니아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다.
하지만 디오클레시아누스가 은퇴하면서 예상과 달리 자기 아버지가 아닌 젊은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로 임명하자 니코메디아 황궁을 빠져나와 갈리아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다음 해에 사망하자 갈리아의 군대들은 306년 7월 25일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로마제국의 서부지역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②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이탈리아와 아프라키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의 정권투쟁을 계획하였다. 그는 막센티우스를 그리스도교의 박해자가 아니라 서부지역의 폭군으로 규정하여 주민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로 출정하였다. 하지만 그는 로마 티베르 Tiber 강의 밀비오 Milvio 교橋에서 막강한 상대방 군대와 마주쳤고, 자신의 군대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전투 전에 발현發顯 또는 꿈을 통하여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군대는 그리스도교 신의 가호와 구원의 표징을 받았다. 그로 인해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그는 서부유럽 전체를 차지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는 첫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312년 10월 28일 로마의 원로원은 콘스탄티누스를 최고의 통치자로 추대하였고,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신인 그리스도를 보호신으로 공경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그리스도교로 전환한 것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연 것이었다.★
★ 콘스탄티누스의 대승전과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과 견해에 대한 몇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밀비오교 전투 직전에 꾼 콘스탄티누스의 꿈이 진실된 것인지의 여부이다. 둘째 문제는 콘스탄티누스의 전환에 대한 동기를 종교적 체험의 영적 결과로 보기보다는 순전히 황제의 정치적 책략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의 내적 변화는 매우 긍정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이유는 황제가 일신교적인 미트라 Mitra 태양신의 신도로서 어느정도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가 참된 종교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그가 접하고 있는 상황들, 특히 그의 가정 분위기가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었기에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은 내적으로 준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태,『세계교회사Ⅰ』, 218~222쪽 참조.
(2) 국교의 성립
① 로마 황제의 친 그리스도교 정책
밀비오교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에서 두 달동안 지낸 다음 313년 봄에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그는 동부지역 황제 중 하나인 리치니우스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공동으로 ‘밀라노 관용령’이라는 교서를 선포하였다. 이것은 동부 로마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국 내의 여러 종교에 부여된 기존권을 그리스도교에도 승인하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후 리치니우스가 동부지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면서 로마지역에서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완전히 종식되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재위 중, 그리스도교에 물질적 특혜와 법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313년 그는 로마주교, 즉 교황에게 라테라노 Laterano 궁전을 기부하였고, 후에 이곳에 콘스탄티누스 대성당(지금의 죠반니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베드로 대성당, 예루살렘의 무덤 성당, 베들레햄의 예수성탄 성당이 건립되었다.
라테라노 궁전과 콘스탄티누스 대성당(현 죠반니 대성당)의 모습. '라테라노'라는 지명은 로마제국 초기 라테라누스 가문의 저택에서 유래한다. 밀비우스교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이 저택을 소유했다가 교황에게 기증하였고, 궁전 옆에는 대성당이 세워졌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봉헌보다 10여년 이상 빠르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교도 제관들에게 부여했던 면세특권을 그리스도 성직자에게도 부여하였고, 특히 주교에게 국가의 사법권을 이양하였다. 따라서 살인자를 제외한 원고와 피고는 주교에게 그들의 소송을 제기하여 중재와 판결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밖에도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규정하였고, 몰수된 교회의 재산에 대한 반환조치를 취하였다. 더 나아가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 신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수 있게 하였다.
② 교회의 발전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여러 황제가 교회정책에 대한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테오도시우스 1세 Theodosius Ⅰ(재위 379~395)는 친 그리스도교 정책의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380년 2월에 황제는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을 반포하여 동부지역의 국민들에게 니케아 공의회의 전통신앙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였다. 황제는 그리스도교 이단자들에게는 교회 설립과 종교 행사를 금지시켰고, 정통교회로 돌아오도록 강권을 발동하였다. 392년에는 또 하나의 법령을 반포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이단의 가르침을 대역죄에 해당하는 벌금형에 처하였고, 이교 우상숭배의 종교행사는 모두 중형 重刑에 처하는 금령을 내렸다. 이러한 反이교정책과 親그리스도교 정책 이후 이교 신앙은 국민의 공적 생활에서 점차 사라졌고,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교회가 성장하고 대중화된 이면에는 문제점들도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가 교회에 정치적으로 관여함으로써 교회의 세속화를 가져온 황제-교황주의 Caearo-Papism로서, 그 실질적 내면은 교권의 약화를 예기하는 것이었다.univnote.tistory.com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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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회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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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향한 베드로의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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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의 최초의 교회 협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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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로마황제 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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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체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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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석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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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대화재, 네로의 핍박(첫번째 핍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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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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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도미티안 황제(두번째 핍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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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100-165)이 로마에 [예수제자훈련학교]설립(Disciple-Scho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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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갑의 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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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
콥틱(Coptic)어로 쪽복음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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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의 판테누스(Pantaenus)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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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둘리안(Turtullian 160-222)의 세계선교운동 촉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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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
퍼피튜아의 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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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
에뎃사이(Edessa) 아브갈 4세의 회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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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
오리겐(Origen 185-254)의 세계선교운동 촉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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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
로마의 고넬료가(Conelius)가 골(Gaul)종족에게 7인 선교사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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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
그레고리(Gregory 240-332)에 의한 알메니안인들의 집단적 개종으로 야만인의 왕 티리바테스 2세(Tiribater II)의 폭력적 박해가 시작되었으나 마침내 왕도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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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
디오클레시안 황제 박해시작 - 최후, 최악의 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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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과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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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합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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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
니케아 회의 : 교회융합→제국통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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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멘티우스(Frumentius), 이디오피아에 복음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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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필라스, 고트족에서 선교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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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스의 마틴(Martin of Tours)이, 선교사역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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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
에집트의 수도사들이 에티오피아어로 성경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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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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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
반달(Vandal)족의 북아프리카 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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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 |
패트릭(Patrick)의 아일랜드 회개운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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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
왕들의 주도아래 지역단위로 기독교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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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 |
프랑크족(Franks)의 왕 클로비스(Clovis)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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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복음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전파되기 시작, 네스토리안(Nestorians) 선교사들이 1350까지 터키스탄(Turkestan)에서 활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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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
시리아인 전도자(Nestorians)들에 의해 세일론섬(island of Ceylon)에서, 페르시안 주교 산하의 말라바(Malabar)에서, 간지즈강 유역에서ㅡ훈족(Huns), 터크족(Turis), 위거족(Uighurs), 중에서, 그리고 티벧(Tibet)과 수마트라(Sumatra)등지에서 수 많은 기독교 개종자 속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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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
유대인 아랍왕 두누와스의 박해로 아라비아의 나란(Najran)과 힘마(Himyar)지역에서 14,000명의 아랍 크리스챤들이 학살(Duh-Nuw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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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 |
성소피아 성당 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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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 |
저스티니안 황제(Emperor Justinian)의 명령으로 비잔틴제국 주변의 모든 야만족이 기독교로 개종, 소아시아의 7만명에게 강제로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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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 |
네스토리안 대주교가 중국 만리장성 북방 헤프탈릴(Hephthalites)지경의 백인 훈족에게(White Huns) 주교를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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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 |
콜룸바(Columba)가 스코트랜드에 복음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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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 |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 메카에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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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 |
교황권 확립(그레고리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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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 |
그레고리대제(Gregory the Great)가 영국에 어거스틴(Augustine) 주교를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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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 |
켄트(Kent)족의 왕 에텔버트(King Ethelbert)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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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 |
헤지라(메카→메디나, 이슬람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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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6 |
동로마 성상숭배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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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 |
노텀부리아(Norbhumbria)족의 왕 에드윈(King Edwin)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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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 |
동 앵글(East Angles)족의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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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5 |
네스토리아 선교회(Nestorian Mission) 중국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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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 |
롬바르드(Lombards)족의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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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 |
이슬람의 예루살렘 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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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 |
북아프리카 650만 베르베르(Berbers)족의 80%가 기독교로 개종, 그러나 950년까지 전부 이슬람으로 다시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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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 |
윌 프리드(Wifrid) 영국의 기독교 개종을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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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6 |
보니페이스(Boniface)의 장기선교역사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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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 |
도르(Thor)의 참나무가 쓰러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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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
베데(Bede)의 『영구 교회사(Church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편찬, 앵글로 쌕슨족(Anglo-Saxon race)의 개종을 서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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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2 |
마르텔장군 뚜르 쁘와디아 전쟁에서 승리(이슬람군 격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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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 |
촬레마그네(Charlemagne)가 쌕슨(Saxon)족에게 강제로 세례, 그리고 세례거부자는 하루에 4천 5백명을 처형하고 수천명을 유형지로 추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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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6 |
덴마크(Denmark)의 왕 하랄드(King Harald)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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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 |
안스갈(Ansgar)의 덴마크 복음화운동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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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 |
안스갈(Ansgar)의 스웨덴 복음화운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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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 |
시릴(Cyril)과 메토디우스(Methodius)가 모라비아(Moravia)에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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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 |
불가리아(Bulgaria)의 왕자 보리스(Boris)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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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
마그야르스(Magyars, 현재의 헝가리)에 복음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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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 |
이슬람세력이 모리타니아(Mauritania)의 유목민 베르베르(Berber)족을 포함한 기독교 세계의 50%를 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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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4 |
러시아(Russia)의 공주 올가(Princess Olga)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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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2 |
신성로마제국 탄생(오토 1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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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 |
러시아의 왕자 블라디미르(Prince Vladimir)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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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
fp이프(Lief the Lucky)의 그린랜드(Greenland) 복음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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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북몽고(North Mongolia)의 수도 가라코룸(Karakorum)에서 터키족인 20만명의 케라이트(Keraits)족을 개종, 나미안족(Namians)과 메르키트족(Merkites)을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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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4 |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완전분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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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 |
카놋사의 굴욕(헨리4세 vs 그레고리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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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
보름스협약 (성직임명권 협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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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
키프차크 터키족(Kipchak Turks)의 쿠만인(Cumans) 몇 명이 헝가리의 스테판 2세(Stephen Ⅱ)를 통해 기독교에 접촉하여 복음을 영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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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0 |
중앙아시아 옹구트족(Onguts)의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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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
웬드족(Wends), 프러시안족(Prussians), 리츄아니안족(Lithuanians)과 기타 발틱해안의 종족들을 제외한 유럽 전반에 걸쳐 기독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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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
프랜시스코 수도사들(Franciscan Friars)의 북아프리카 파송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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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 |
중앙아시아 위커족(Uighurs), 케라이트족(Keraitits), 몽골족(Mongols) 그리고 모든 주요종족들이 부분적으로 기독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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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 |
십자군 악코에서 철수(십자군전쟁 종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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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5 |
몬테코르비노(Montecorvino)의 요한(John)이 중국 북경에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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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 |
아나그니 굴욕(교황 보니페이스 vs 프랑스필립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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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 |
바빌론의 유수(∼70년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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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 |
유럽, 페스트로 인구 1/3 감소(∼1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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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5 |
페름(Perm)의 주교 스테반(Steaphan 1335-1396)이 러시아의 콤미-페름(Komi-Perm)종족을 복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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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 |
중국 명조(Ming Dynasty)에 의해 기독교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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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 |
트리포(Trifo)와 테오도릿(Theodorit)이 콜라라프족을 복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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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 |
동로마 멸망(by 이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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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 |
캐톨릭 선교사들의 신세계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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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 |
바스코 다 가마(Vasoc da Gama)와 캐톨릭 선교사들의 인도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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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
새로 조직된 개신교 교회들이 거의 150-200년 동안 복음을 받지 못한 종족들에게 접촉하기 이해 노력을 경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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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 |
황금해안(Gold Coast)의 추장 에후투(Efutu)와 1300명 원주민의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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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 |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95개 조항의 선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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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9 |
루이스 볼라노스가 아르헨티나의 투구만 2만명을 개종시켰는데 현재도 OFM이 이들을 위해 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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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
마틴 루터를 포함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1세기의 사도들에게 주어졌을 뿐이요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끊어졌다고 가르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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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 |
칼티엘(Cartier)이 선교사들과 함께 캐나다에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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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 |
포르투갈인(Portuguese)들이 코로만달(Cormandal)해안의 힘센 어부 바라타(Bharatha)족 1만명을 한꺼번에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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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 |
예수회(Society of Jesus) 선교활동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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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 |
프란시스 자비엘(Francis Xavier)의 선교활동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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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 |
프란시스 자비엘이 트라반코(Travancore)에서 선교활동 시작. 1개월만에 1만명의 무쿠바족(Mukuvas)을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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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 |
칼빈(Calvin)이 위그노교도(Huguenots)를 브라질에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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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 |
세일론(Ceylon) 콜롬보(Colombo)부근 카레아스(Careas) 해안의 어부 7만명을 천주교로 개종, 1583년까지 마나르(Marar)섬에서 파라바족(Paravas)과 카레아족 등 지주조개 잡이 어부들 가운데 4만 3천명의 기독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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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 |
어거스틴교단(Augustineians)의 필리핀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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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 |
페루의 제수잇(Jesuit)교파 신학자 호세 드 아코스타(Jose-de Acosta 1539-1600)가 <미개인 복음전파>(On the Preaching of 혿 Gospel Among the Savages)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아메르 인디안(Amerindian)종족 전도의 문제점을 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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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 |
마테오 릿치(Matteo 꺛챠)dml 중국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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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 |
영국교회(Anglican) 교구목사 하드리안 사라비아(Hadrina Saravia)가 최초로 개신교 세계선교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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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 |
프란시스코 교단(Franciscans) 일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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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 |
네덜란드 정부가 동인도제도의 말레이족(Malays)을 개종하기 위한 선교사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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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 |
로버트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의 마두라(Madura)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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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 |
일본에 반기독교 교서 공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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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 |
교황 그레고리 15세(Gregory ⅩⅤ 1554-1623)가 「신앙전파를 위한 신성회중」(Cacred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을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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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 |
마태복음이 말레이어(Malay)로 번역, 이는 비서구어로 번역된 최초의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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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 |
「뉴잉글랜드 복음전도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New England)가 설립되어, 아멜인디언(Amerindian) 선교를 위해 죤 엘리옷(John Eliot)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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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 |
러시아 정교회가 버링 스트레잇종족(Bering Strait) 선교를 위해 시베리아(Siberia)를 횡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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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 |
져스티니안 폰 벨츠(Justinian Van Weltz 1621-1668)가 독일교회와 학생들의 세계선교에대한 각성을 촉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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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4 |
폰 벨츠(Von Weltz) 문제가 선교의 필요를 언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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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 |
영국 시인 죤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저서 「실락원」에 [만민에게 복음을!]이란 구절을 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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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 |
스페인의 괌(Guam)에 군사기지와 캐톨릭 선교회를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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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 |
다카(Dacca)에서 2만명의 나마수들아 벵가릴(Na masudra Bengalis)들이 힌두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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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3 |
러시아에서 칼믹(Kalmyks)족 최초로 동방정교회로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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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 |
『기독교 증진회』(Society for the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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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 |
러시아이 중부 볼가(Middle Volga) 지방에서 1705년까지 3.638명의 야만인 케레미스(Cheremis)인들이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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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 |
복음전파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해외부서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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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 |
토볼스크(Tobolsk)의 주교 흴로훼이(Filofey)가 1721년까지 160개 교회로 성장시키고, 4만명의 오스트족(Ostyaks), 보컬(Voguls)족, 시리안족(zyrians), 야쿠족(Yakuts)을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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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5 |
「화란-할레 선교회」(Danish-Halle Miss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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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 |
칼 폰 칸스테안(Karl Von Canstein) 백작이 동독의 할레(Halle)에 최초로 칸스테인 하우스(Canstein House) 인쇄소를 설립하여 80년동안 300만권의 성서를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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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 |
진젠돌프(Zinzendorf)가 독일에 헤른후트(Herrnhut)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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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2 |
모라비안 교도(Moravians)의 첫 선교사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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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6 |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알창겔스크 사모에드 족을(Samoyeds of Archangsk) 위한 선교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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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6 |
중공의 반기독교 칙령 발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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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러시아 스비자스크(Svijazks)에 「새 세례자를 위한 기관」(Office for Newly-Baptized)을 설립하여 1741년부터 1762까지 43만 550명의 볼가(Volga) 야만인들을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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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 |
요셉 초툰세비스키(Josef Chotunceviski)를 중심으로 캄차카(Kamchatcha)를 위한 복음화 운동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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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 |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세계 복음화 기도운동> 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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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 |
오스트야크(Ostyaks)가 오브도르스크(Obdorsk) 지역의 북극 연안까지 복음을 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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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 |
제수잇파(Jesuits)가 브라질에서추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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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3 |
예수회(Society ofJesus) 탄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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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 |
아승훈이 중국에서 천주교를 조선에 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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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 |
「모라비안교파 해외선교 기관인 이교도를 위한 복음 전도회」(Society for Propagating the Gospel Among the Heathe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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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 |
러시아 정교(껸냐무 Orthodox)의 수도사 출신 8명의 선교사들이 알라스카의 코디아크(Kodiak)섬에 도착하여 2천 500명의 에스키모 정령숭배자들을 세례. 1795년까지 1만명 세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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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 |
영국의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침례교선교사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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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 |
윌리엄 캐리가 최초로 「세계 기독교선교현황」을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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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 |
「런던 선교사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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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 |
「스코틀랜드 선교사협회」(Scottish Missionary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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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 |
「글라스고우 선교사협회」(Glasgow Missionary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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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 |
「네덜란드 선교사협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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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7 |
「런던 선교사협회」(LMS)가 최초로 선교사들을 타히티(Tahiti)에 파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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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 |
「교회 선교사협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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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 |
학생운동(Student Movement) 폭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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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 |
「전도지 선교회」(Religious Tract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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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 |
미국에서 「메싸추세스 침례교 선교회」(Massachusetts Baptist Missionary Society)가 [개척지 복음전파]를 위해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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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 |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yt)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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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 |
「해이스택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로 말미암아 학생선교운동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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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 |
로버트 모리선(Robert Morrison) 중국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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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 |
「미국 해외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가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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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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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 |
예수회(Society for Jesus) 복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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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 |
「바셀 선교사협회」(Basel Missionary Socieyt)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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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 |
「미국 성서 공회」(American Bible Socieyt)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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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 |
로버트 모회트(Robert Moffat)의 아프리카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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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 |
「런던 사무원협회」(London Secretarise' Associat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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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 |
「파리 복음선교회」(Paris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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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 |
「미국 전도 소책자 선교회」(American Tract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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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 |
「미국 가정 선교협회」(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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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 |
볼가(Volga)지역에서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로부터 집단적 이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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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 |
「라인 선교사협회」(Rhenish Missionary Society, RMS)가 창설되어 보르네(Borneo)의 대야크족(Dayaks)을 위한 선교를 시작. 1839년에 대야크인의 첫 세례자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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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 |
영국의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아프리카에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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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2 |
남경조약(Treaty of Nanking)으로 중국 개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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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 |
런던의 「복음주의 동맹」(Evangelical Alliance)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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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 |
동방정교의 시베리아 이디드이르(Anadyr) 지방의 코리아크(Korik)와 척치(Chukch)인들을 위한 선교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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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 |
모라비안 교파가 니카라과의 미스키토(Miskitos)을 위한 선교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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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 |
「성서와 의료선교사협회」(Bilble and Medical Missionary Fellowship)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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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 |
「런던 선교대회」(London Missionary Confe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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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 |
「뉴욕 선교대회」(New York Missionary Confe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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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 |
미국에서 1858-1859 대각성운동과 「훌턴스트릿 기도회」(Fulton Street Prayer Meet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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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
개신교 선교사들의 일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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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
「리버풀 선교대회」(Liverpool Missionary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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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 |
「스코트랜드 국립 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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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 |
동방정교 선교회가 시베리아 아부르(Amur) 강주변의 골드(Gold)와 길야크(Gilyak)족을 위한 선교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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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 |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에 의해 「중국 내지선교회」(C.I.M-China Inland Miss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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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 |
「성서 유니온」(Scripture Un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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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 |
남인도의 집중적 선교운동으로 1백만의 텔루구(Tellugu)반민들이 30년간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로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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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
「프린스톤 해외선교협회」(Princeton Foreign Mission Society)에 의해 프린스톤에 부흥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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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 |
로얄 윌더(Royal Wilder)에 의해 「세계선교사 회보」(Missionary Review of World)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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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
뉴저지 32개신학교 250명 신학생들에 의해 「신학교 선교동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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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
「기독교 열성 청년회」(Young People's Socieyt of Christian Endeavor)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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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
미국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한국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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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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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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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 |
「대학생 자원 해외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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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심슨(A. B. Simpson)에 의해 「기독교 선교연맹」(C&MA-Christiam and Missionary Alliance)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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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
「성서 기증 선교회」(Scripture Gift Miss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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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
10년간 믿음선교(Faith Mission) 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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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
「대학생자원 해외선교운동」 제1회 전국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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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
「북미주 해외선교대회」(Foreign Mission Conference of North America)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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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런던 남부에서 제4회 「람베스선교대회」(4th Lambeth Conference) 개최. 194명의 영국교회 주교들 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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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
「런던 에큐메니칼 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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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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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의화단사건(Boxer Rebellion)으로 중국선교 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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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
독일 프란시스코 교도들을 통해 브라질 문두루쿠 인디안(Munduruccu Indians) 복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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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
「인도 전국선교사 협회(National Missionary Society for India)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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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
평신도 선교운동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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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inburg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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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국제 선교회보(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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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영국 선교사회 대회(Conference of British Missionary Societies)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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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
영국의 스터드(C.T.Studd 1862-1931)가 전세계복음화 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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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영국 정치가 출신 선교사그러브(K.G. Grubb 1900-1980)에 의해 「세계 정복 운동」(World Dominion Movement)이 결성되어 세계선교지 종족 언어에 대한 구체적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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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초교파 해외 선교협회」(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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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
필리핀에서 캐톨릭 교황 파이우스 10세(Pius Ⅹ)의 의교리분답서(Catechism)를 20만명의 모슬렘을 위해 졸로-모로(Jolo-Moro)어로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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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레이크 모홍크(Lake Mohonk)에서 「국제선교협회」(International Mission Council)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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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노르웨이 선교협회」(Norweigian Mission Council)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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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카메룬 타우센드(Wm. Cameron Towsen)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 SVM에 동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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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미국에서 「보르네오 비복음화 종적선교회」(Unevangelized Tribes Mission of Borneo)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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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제수잇파(Jesuits) 선교사들이 브라질의 일본인들을 위해 사역, 1978년까지 1백만명의 일본인중 63만명이 천주교로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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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
「근동 기독교 협의회」(Near East Chirstian Council)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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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
「국제선교사 협의회 예루살렘 대회」(Jerusalem Conference of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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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CIM대표 호스테(D.E. Hoste, 1861-1946)가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을 위한 200명의 선교사 모집 공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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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일본에서 전도자 도요히코 카가와(Toyohiko Kagawa, 1888-1960)를 중심으로 「하나님의왕국운동」(Kingdom of God Movement)을 시작, 1백만 이상에게 복음을 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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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
영국 런던에서 「비복음화지역 선교회」(Unevangelized Fields Miss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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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
에쿠아도르의 HCJB 방송국에서 방송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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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
타운센트(Townsend)에 의해 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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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
「대학생 해외선교협회」(Student Foreign Missions Fellowship)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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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
WEC선교사 브리에르레이(L.G. Brierley)가 처음으로 「비복음화 종족」(Hidden People) 연구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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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
「영국교회 협의회」(British Council of Churches)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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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
제2차세계대전시 1천 1백만 미국인들의 선교의식 각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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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
「IMC 마드리스 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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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복음주의 해외선교 협의회(Evan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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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ICVF/SFMF 대학생 선교대회 토론토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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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교회 세계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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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
루터교 세계연맹(Lutheran World Ferderation)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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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
복음주의 대학생 국제협의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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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
IMC 휘트비 대회(Whitby Conference of IMC)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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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세계선교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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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아프리카 대륙에 4천 4백만 기독교인 달성, 500종족들 가운데 년당 180만명이 증가하고 아프리카 토착교회(AICs)는 1천 700개의 교단으로 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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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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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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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개신교 선교사들의 중국 철퇴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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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IMC 월링겐대회(Willingen Conference of IMC)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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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미국인 선교학자 맥가브란(D.A. McGavarn)이 The Bridges of God를 발행. 종족단위 복음화 개념을 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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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에쿠아도르의 아우카 인디안(Auca Indians)에게 5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정글에서 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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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신학교육 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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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
IMC 가나대회(Ghana Conference of IMC)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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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
영국에서 복음주의 선교사 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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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
아시아 기독교대회 발족대회(Inaugural Assembly of Asia Christian Conference)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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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연장신학교육(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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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니카라과의 심층전도(Evangelism-in-depth)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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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
IMC와 WCC의 병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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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
한국에서 UBF 선교회 발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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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
DWME의 멕시코 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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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
계간 복음선교(Evagelical Mission Quarterly) 발간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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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
카메룬의 야운데(Yaounde)에서 [현대 서부 아프리카 복음화]에 대한 DWME회의에서 라우선(J.S.Lawson), 바레트(D.S. Barrett), 아얌(B. B. Ayam)이 132 아프리카 종족복음화 단계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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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
훌러 세계 선교대학(Fuller School of World Mission)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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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MARC가 창설되어 교회의 세계선교를 위한 신학과 연구자료를 공급하며 세계복음화를 위한 베를린회의(Berlin Congression World Evangelization)와 연결되기 시작. 종족그룹에 대한 근대적 아이디어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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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복음주의자협회(Association of Evangelicals of Africa and Madagascar)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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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미얀마에서 선교사 축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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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홍위병들이 중국교회 파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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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태평양 교회 대회(Pacific Conference of Churches)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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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베를린 전도대회(Berli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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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종족복음화를 위한 신성회중(Sacred 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s)이 9천 900여개 언어종족과 1만 5천 종족그룹을 위한 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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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
국제선교 협력기구(K.I.M-Korea International Mission)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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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아프리카 토착 교회가 300개의 다른 종족으로 집합된 1,700만명과 5,800개 교단으로 증가. 매년 96만명 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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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복음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총회(All Philippine Congress on Evangelization)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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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대만에서 중국 전도대회(Chinese Congress on Evangelis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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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연합성서공회」가 세계인구에 97%를 위한 구약 249개 언어, 신학 578언어, 쪽복음 1천 431언어로 출판, 년 성경반포수는 1966년에 8천만권, 1970년에 1억 7천 300만권, 1985년에 5억 4천 900만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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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
「리버풀 선교대회」(Liverpool Missionary Societ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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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 |
「스코트랜드 국립 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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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 |
동방정교 선교회가 시베리아 아부르(Amur) 강주변의 골드(Gold)와 길야크(Gilyak)족을 위한 선교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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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 |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에 의해 「중국 내지선교회」(C.I.M-China Inland Miss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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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 |
「성서 유니온」(Scripture Un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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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 |
남인도의 집중적 선교운동으로 1백만의 텔루구(Tellugu)반민들이 30년간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로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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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 |
「프린스톤 해외선교협회」(Princeton Foreign Mission Society)에 의해 프린스톤에 부흥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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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 |
로얄 윌더(Royal Wilder)에 의해 「세계선교사 회보」(Missionary Review of World)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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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
뉴저지 32개신학교 250명 신학생들에 의해 「신학교 선교동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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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
「기독교 열성 청년회」(Young People's Socieyt of Christian Endeavor)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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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
미국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한국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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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Appenzeller) 한국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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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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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 |
「대학생 자원 해외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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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
심슨(A. B. Simpson)에 의해 「기독교 선교연맹」(C&MA-Christiam and Missionary Alliance)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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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8 |
「성서 기증 선교회」(Scripture Gift Miss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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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
10년간 믿음선교(Faith Mission) 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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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
「대학생자원 해외선교운동」 제1회 전국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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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
「북미주 해외선교대회」(Foreign Mission Conference of North America)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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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런던 남부에서 제4회 「람베스선교대회」(4th Lambeth Conference) 개최. 194명의 영국교회 주교들 참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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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 |
「런던 에큐메니칼 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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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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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의화단사건(Boxer Rebellion)으로 중국선교 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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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
독일 프란시스코 교도들을 통해 브라질 문두루쿠 인디안(Munduruccu Indians) 복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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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
「인도 전국선교사 협회(National Missionary Society for India)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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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
평신도 선교운동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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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inburg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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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국제 선교회보(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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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
영국 선교사회 대회(Conference of British Missionary Societies)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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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
영국의 스터드(C.T.Studd 1862-1931)가 전세계복음화 십자군(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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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영국 정치가 출신 선교사그러브(K.G. Grubb 1900-1980)에 의해 「세계 정복 운동」(World Dominion Movement)이 결성되어 세계선교지 종족 언어에 대한 구체적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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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초교파 해외 선교협회」(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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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
필리핀에서 캐톨릭 교황 파이우스 10세(Pius Ⅹ)의 의교리분답서(Catechism)를 20만명의 모슬렘을 위해 졸로-모로(Jolo-Moro)어로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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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레이크 모홍크(Lake Mohonk)에서 「국제선교협회」(International Mission Council)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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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노르웨이 선교협회」(Norweigian Mission Council)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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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카메룬 타우센드(Wm. Cameron Towsen)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 SVM에 동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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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미국에서 「보르네오 비복음화 종적선교회」(Unevangelized Tribes Mission of Borneo)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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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제수잇파(Jesuits) 선교사들이 브라질의 일본인들을 위해 사역, 1978년까지 1백만명의 일본인중 63만명이 천주교로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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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
「근동 기독교 협의회」(Near East Chirstian Council)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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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
「국제선교사 협의회 예루살렘 대회」(Jerusalem Conference of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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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CIM대표 호스테(D.E. Hoste, 1861-1946)가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을 위한 200명의 선교사 모집 공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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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일본에서 전도자 도요히코 카가와(Toyohiko Kagawa, 1888-1960)를 중심으로 「하나님의왕국운동」(Kingdom of God Movement)을 시작, 1백만 이상에게 복음을 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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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
영국 런던에서 「비복음화지역 선교회」(Unevangelized Fields Miss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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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
에쿠아도르의 HCJB 방송국에서 방송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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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
타운센트(Townsend)에 의해 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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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
「대학생 해외선교협회」(Student Foreign Missions Fellowship)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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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
WEC선교사 브리에르레이(L.G. Brierley)가 처음으로 「비복음화 종족」(Hidden People) 연구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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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
「영국교회 협의회」(British Council of Churches)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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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
제2차세계대전시 1천 1백만 미국인들의 선교의식 각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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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
「IMC 마드리스 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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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복음주의 해외선교 협의회(Evan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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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ICVF/SFMF 대학생 선교대회 토론토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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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교회 세계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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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
루터교 세계연맹(Lutheran World Ferderation)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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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
복음주의 대학생 국제협의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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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
IMC 휘트비 대회(Whitby Conference of IMC)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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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세계선교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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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아프리카 대륙에 4천 4백만 기독교인 달성, 500종족들 가운데 년당 180만명이 증가하고 아프리카 토착교회(AICs)는 1천 700개의 교단으로 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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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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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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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
개신교 선교사들의 중국 철퇴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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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IMC 월링겐대회(Willingen Conference of IMC)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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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
미국인 선교학자 맥가브란(D.A. McGavarn)이 The Bridges of God를 발행. 종족단위 복음화 개념을 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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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에쿠아도르의 아우카 인디안(Auca Indians)에게 5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정글에서 살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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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
신학교육 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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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
IMC 가나대회(Ghana Conference of IMC)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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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
영국에서 복음주의 선교사 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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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
아시아 기독교대회 발족대회(Inaugural Assembly of Asia Christian Conference)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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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연장신학교육(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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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니카라과의 심층전도(Evangelism-in-depth)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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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
IMC와 WCC의 병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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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
한국에서 UBF 선교회 발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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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
DWME의 멕시코 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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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
계간 복음선교(Evagelical Mission Quarterly) 발간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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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
카메룬의 야운데(Yaounde)에서 [현대 서부 아프리카 복음화]에 대한 DWME회의에서 라우선(J.S.Lawson), 바레트(D.S. Barrett), 아얌(B. B. Ayam)이 132 아프리카 종족복음화 단계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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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
훌러 세계 선교대학(Fuller School of World Mission)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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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MARC가 창설되어 교회의 세계선교를 위한 신학과 연구자료를 공급하며 세계복음화를 위한 베를린회의(Berlin Congression World Evangelization)와 연결되기 시작. 종족그룹에 대한 근대적 아이디어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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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복음주의자협회(Association of Evangelicals of Africa and Madagascar)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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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미얀마에서 선교사 축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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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홍위병들이 중국교회 파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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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태평양 교회 대회(Pacific Conference of Churches)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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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
베를린 전도대회(Berli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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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종족복음화를 위한 신성회중(Sacred 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s)이 9천 900여개 언어종족과 1만 5천 종족그룹을 위한 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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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
국제선교 협력기구(K.I.M-Korea International Mission)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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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아프리카 토착 교회가 300개의 다른 종족으로 집합된 1,700만명과 5,800개 교단으로 증가. 매년 96만명 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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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복음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총회(All Philippine Congress on Evangelization)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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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대만에서 중국 전도대회(Chinese Congress on Evangelis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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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
「연합성서공회」가 세계인구에 97%를 위한 구약 249개 언어, 신학 578언어, 쪽복음 1천 431언어로 출판, 년 성경반포수는 1966년에 8천만권, 1970년에 1억 7천 300만권, 1985년에 5억 4천 900만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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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일본 해외 선교협회(Japan Overseas Mission Association)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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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아프리카 복음화를 위한 개척지 상황(Frontier Situations for Evangelization)이 바레트(D.B. Barrett), 호로네크(M.L. Hronek), 맘보(G.K. Mambo), 브비티(J.S. Mbiti), 맥베이그(M.J. McVeigh)에 의해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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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미국선교학회(American Society Missiology)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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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시카고에서 복음과 개척지 종족을 위한 협의회(Consultation on The Gospel and Frontier Peoples)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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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국제 선교학 논평지(Missiology, An International Review)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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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방콕에서 DWME 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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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미국선교학회(American Society of Missionary Convention)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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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필리핀에서 전 아시아 학생선교대회(All-Asia Student Missionary Convention)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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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서울에서 전 아시아 선교협의회(All-Asia Missionary Convent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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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교회선교위원회 협의회(Association of Church Mission Committees)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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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아시아 선교회(Asia Mission Associat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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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얼바나 전도(Urbana Reversal) : 1970년에 8%, 1976년에 28%에 학생들이 헌신서약 종족 복음화 선교전략 대확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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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로잔에서 세계복음화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in Lausan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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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일본 전도대회(Japa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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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CCC 한국 대회(Explo '74)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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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최초의 하기 국제 연구소(First Summer Institute of International Cong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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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1980년 세계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를 위한 공식적 회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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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
나이로비에 레나나에서 케냐 비복음화 종족 대회(Unreached Peoples Confe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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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
동서선교 정보수집과 전략개발센터(East-West Center for Mission Research and Development)가 서울에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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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
아시아 선교협회(Asia Mission Association)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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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세계 복음화 중국대회(Chinese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개최(홍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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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캔사스에서(IFMA/EFMA연합 실행 위원수련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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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미국 해외선교센터(United States Center for the World Mission)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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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얼바나 선교대회(Urbana '76)에서 50% 학생헌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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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이슬람 세계대회(Islamic World Congress)가 기독교 선교사의 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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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
선교사들이 성경이 없는 5천 2백억 언어 그룹중 300 언어로 성서번역 500언어로 성경 개편과 새로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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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
전인도 선교 및 복음화 대회(All-India Congress on Mission And Evangeliz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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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
인도 선교 협회(IMA)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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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
미국 세계선교센터 국제연구소(ISS)에서 최초로 선교전망 'Perspectives'코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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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모슬람권 복음화를 위한 북미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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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ISI가 레이톤 친(Leiton Chin)으로 WCFM책임자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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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중국교회 재 개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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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서독의 바드 리벤젤(Bad Liebenzell)에서 세계복음협회 주최로 비복음화 종족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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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비복음화 종족을 위한 EFMA 실행위원 수련회, 1990년까지 5천 208종족 복음전파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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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맥가브런(McGavran), 빌리스(Bliss), 질(Gill)의 [2천년까지 모든 종족에 교회 개척]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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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얼바나(Urbana)대회에서 75%학생들 헌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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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제자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대회(Philippine Congress on Discipling a N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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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멜보우르네 DWME 선교대회(DWME Conference Melbou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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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태국에 파타야(Pattaya)에서 LCWE 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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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에덴버그(Edinburgh)에서 개척지 선교 세계협의회(World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ions)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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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개척지 선교를 위한 국제학생 협의회(International consutation on frontier missions)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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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개척자협회(.Frontier Fellowship)창설과 [Global Prayer Digest"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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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IFMA 개척자 위원회 (IFMA Frontier peopl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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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얼바나(Urbana)대회에서 90% 학생들 헌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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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숨은 종족 (Hidden People)을 주제로 독일복음선교협회(German Association of Evangelical Mission)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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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
영국 하드포드(Hertford)의 하이레리그(High Leigh)에서 복음선교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주체로 비복음화 종족 전도(Reaching Unreached Peoples)를 위한 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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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그랜드 래피드(Grand Rapids)에서 복음전파와 사회적 의무에 대한 협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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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3년마다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 선교협의회 대회(Asia Mission Association Consultation)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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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암스테르담에서 83만 5천명 순회 전도자들의 전도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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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세계 복음주의 협회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에서 위튼 83(Wheaton '83)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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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IFMA 와 EFMA 실행위원수련회에서 각각 미해결 과제(Unfinished Task)에 대해 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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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USCWM에서 IFMA/EFMA/AEPM 수련회를 통해 개척선교에 대한 사명의 재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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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호놀룰루에서 중국민족 세계복음화대회 (Ethnic Chiness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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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
세계복음화 기도동맹(WEPA - World Evangelization prayer Alliance)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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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남아프리카에서 최초로 국내단위 선교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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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CCC 엑스폴로 '85(Explo '85)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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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맥가브런이 선교학자 회의를 열어 2천년 세계선교의 대전진(Gaint Step)에 대한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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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미국 휴스턴에서 소수민족 복음화를 위한 국내 대회(National Convocation on Evangelizing Ethnic)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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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자이레 국내복음화 대회(Zaire National Congress on Evangelism)에서 64교단 지도자들이 1990년까지 1만 교회를 복음화되지 않은 지역에 설립할 것을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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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나이제리아 복음주의 선교회(Nigeria Evangelical Mission Association)가 나이제리아 비복음화 종족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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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선교 2천년(Mission 2000) 계획을 선교 학자 맥가브란(D.A.McGavran)이 제안, 유럽의 10만 교회의 선교회가 세계의 비복음화 종족에 2천년까지 교회 개척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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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미국 남침례 해외 선교부에서 비거주 선교 분과 신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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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인도 선교협회(India Mission Association)가 인도의 숨은 종족 연구를 대규모로 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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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맨데이트 '86 선교대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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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갈렙 프로젝트(Caleb Peoject)가 선교기관들과 협력 1만 3천 대학생들에게 영향력 발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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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휠트 윌쓰(Fort Worth)에서 미국 교회사 협회(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 주최로 1986년 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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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암스텔담 '86(Amsterdam '86)에서 8천명의 목사와 전도자들에게 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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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콜로라드 스프링(Colorodo Springs)에서 개척지 선교학 협회(Society for Frontier Missiology)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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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아시아 선교협회(Asia Mission Association)국제대회 미국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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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콤미밤 '87(COMIBAM '87)최초의 남아프리카 선교대회(Latin American Congress on Mission)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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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제3세계 선교협회(Association of Third World Mission) 최초의 국제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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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제8차 아시아 신학 협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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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개척지 선교를 위한 국제 학생협의회 (International Student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ion)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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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개척지선교 세계 협의체(World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oin)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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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리더쉽 '88(Ledership '88) 기독교 젊은 지도자를 위한 로잔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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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제1회 개척지 선교를 위한 신학생 국제대회(First International Meeting of Theological Students for Frontier Mission)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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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제1차 한인세계선교대회(Korean World Missions '88)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최초로 시카고 휫튼대학 빌리그램 센타에서 1988년 7월 25-30일 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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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GCOWE '89(Global Consultation for World Evangelization by AD 2000 & Beyond)싱가폴에서 1989년 1월5-8일 50개국대표 314명이 참가한 2000년대 세계복음화 전략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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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로쟌II 마닐라 세계복음화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gress for World Evangelization in Manila. Lausanne II) 1989년 7월 11-20일 마닐라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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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Korean World Missions '92) 7월27-8월1일 시카고 휫튼대학 빌리그래함센터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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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GCOWE '95 제2차 세계복음화 전략회의, 17-25일 한국 서울 횃불선교센터 214개국 4662명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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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제3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 96) 선교사 384명 2,300명이 모여 시카고 윗튼칼리지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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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GCOWE '97 남아공에서 아프리카 지도자들로 미전도종족에 초점을 맞추게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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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
10월 일본 교토에서 제3세계선교협의회(TWMA) 창립 10주년 기념 선교대회가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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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제4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C 2000) 7월 24-28 윗튼대학에서 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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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2000년 세계선교대회 8.14-19 서울, 잠실체육관, 사랑의교회, 명성교회, 소망교회, 영락교회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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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 7.29-8.6 빌리그램함 전도협회 주최로 암스텔담에서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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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어바나 2000 선교대회 12.27-31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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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메시야 2000 예루살렘선교대회 12.27-2001.1.2 개최 [출처 |
blog.naver.com/hdchae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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