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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회사

초대교회사 / 전 니케아 시대 - 니케아 시대

by 은총가득 2021. 2. 24.

초대교회사  - 교회 탄생과 복음전도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 승천후부터 밀라노 칙령까지 사도들의 정통교회를 의미합니다.
또 이것을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로 나뉘기도 하고 어떤이는 리옹지방의 주교 이레나이우스
를 기점으로 하여 시대를 구분하기도 합니다.처음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조직이 됩니다.

 

이 교회는 지금도 교회의 원형이 되어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할때마다 이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많았었습니다.
그리고 안티오키아에서도 교회가 조직되어 예루살렘과 항시 연락이 되었었습니다.그러자 산헤드린(유태교의 사제집단)에서 대대적인 탄압을 실시하였습니다.그 결과 12사도만 남고 전부 다마스쿠스,안티오키아 등지로 도피하였고 결국은 주후44년 성 요한의 동생 야고보가 순교를 합니다.그뒤 엄청난 박해가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하였고 산헤드린과 헤롯왕가의 탄압도 더욱 거세지게됩니다.그런데 헤롯의 급서하게되고
또한 에티오피아여왕 간다게의 환관이 바울로 부터 세례를 받고 복음을 접하면서 기독교의 세력은 더커지게 되고 드디어 13년간 수도 생활을 하던  사도 바울이 활동을 시작함으로서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그는 1차로 소아시아와 아나톨리아의 전도여행을 떠납니다.일행으로는 바나바와 그의 조카인 마가가 동행하였고 이들은 가는곳마다 환영을 받아서 복음을 쉽게 전파할수있었다.그러나 마가는 힘든 전도여행으로 인해 결국은 일행에서 이탈을 하게 됩니다.아나톨리아의 다른 도시 안티오키아에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라비들의 선동으로 결국은 쫓겨가게되고 이고니온,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합니다.그리고 더베에서 다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게되니 이것이 제1차 전도여행입니다.전도여행이 끝난뒤


기독교는 상당한 교의 논쟁에 휩사이게 됩니다.당시 예루살렘교회에는 헬라파 기독교인과 히브리파 기독교인으로 나뉘어 교의 논쟁에 휩싸였는데 예루살렘교회와 안티오키아교회의 구원론으로 결국은 모든 감독
과 장로 사도들이 교의회의를 하게됩니다.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사도회의입니다.사도회의는  베드로가 종식시켰습니다.

 

그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바리새파에서 기독교도가 된 이들에게 율법과 할례에 머물수 없다고 파정을 내렸고 결국은 완전하게 유대교 분파가 아닌 기독교 독립체가 되었습니다.그리고 바울의 제2차,제3차,제4차 전도여행이 시작되었고 성공적으로 마쳐 졌습니다.그후  사도 바울은 로마에의해 순교를 하게되고 이것을 끝으로 사도시대가 종결됩니다.그후 기독교는 꾸준히 그 세력을 넓혀 소아시아지방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사도 바울사후 모든 사도들의 사후여서 다음 사대를 속사도시대라고 합니다.

 연대표입니다.


주후 30경년-예수의 죽음,부활,승천.오순절 성령강림

주후 32년- 스테파누스의 순교,사울의 회개

주후 32년~주후 36년- 사도 바울 아라비아와 다마스쿠스에서 3년간 지냄

주후 36년-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처음으로 방문하다.

주후 44년-사도 요한의 동생 야고보가 순교, 베드로 수감되다.

주후 36년~주후 45년- 사도 바울이 다소에서 10년간 생활

주후 46년-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 교회의 식량난을 해결

주후 46년~주후 48년-제1차 전도여행

주후 49년-예루살렘 사도회의

주후 49년~주후 52년-제2차 전도여행.코린토스에서 18개월간 체재

주후 53년~주후 57년-제3차 전도여행

주후 57년~주후 59년-사도 바울이 가이샤라에서 2년간 투옥됨

주후 60년~주후 61년-제4차 최후의 전도여행

주후 61년~주후 63년-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연금됨,선교활동

주후 63년- 사도 바울 석방

주후 63년~주후 67년-로마에서의 선교활동

주후 67년- 사도 바울 체포됨, 사도 바울 순교. 사도 베드로 순교

주후 100년-복음서 기자  사도 요한의 죽음.최후의 사도 요한이 죽음으로서 사도시대의 종결

속사도시대 개관

이시대의 저술물- 마가의 사도행전, 사도 바울의 서신

* 시대는 명확하지 않으며 사실과 다를수 있다.

속사도 시대 및 교부들

초대교회를 이해할 수 있는 속사도에 대한 자료를 게재한다. 이 글은 속사도를 잘 정의해 주었다. 속사도의 역사는 ‘사도-속사도-변증가(헬라, 라틴)-교부[소아시아(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라틴]’의 라인을 따라간다. 사도 이후 313년까지 속사도 시대로 보면 된다. 즉 속사도, 변증가, 교부의 시대가 속사도의 시대이다. 협의적으로 보면 속사도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글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키프리안의 대한 설명이다. 훌륭한 교부이지만, 교회의 교권화의 토대를 놓은 데서 문제가 있다. 이는 당시 이단과의 싸움에 의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초석을 놓은 점은 유감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몬타누스, 노바티안, 도나투스를 청교도적으로 해석한 것은 지금까지 이단내지 분파주의로 일방적으로 매도한 것에 대한 올바른 또는 중용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의 독선주의는 생각할 여지를 둔다. 또한 몬타누스의 성경이외의 계시도 문제가 있다.

 

속사도시대 (100-313년)

 

1. 속사도시대의 특징

사도 요한이 죽은 후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의 시기를 續사도시대(Post-Apostolic Age) 또는 前니케아회의시대 (Ante-Nicene Age)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교회가 보다 구체적으로 형성된 시기요 발전된 시기였다.

 

(1) 박해로 인한 순교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가 로마제국 정부로부터 큰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네로(Nero) 황제로부터 이 시대의 말기까지 약 250년간 박해가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순교자의 시대라고 할만하다. 이그나티우스(안디옥), 폴리갑(서머나), 유스티누스(로마), 키프리아누스(칼타고) 등이 이 시기에 죽은 대표적 교회 지도자들이다.

 

(2)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의 형성

박해와 기타 안팎에서 오는 여러 도전에 직면한 교회는 그 싸움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통일과 규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점차 가정 교회의 상태에서 교회 간의 연합을 통해 커지고 조직화되었으며 교회 내에서도 감독의 비중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가톨릭 교회가 되었다. 이때의 가톨릭이라는 말은 공동, 보편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중세 이후 로마 교회가 스스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소위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것이다. 이 시대의 가톨릭 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구분하기 위해서 '古가톨릭교회'라고 부른다.

교회만 통일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기초가 되는 여러 가지가 정리되고 통일되었는데, 사도신경이 이 시대에 생겨났고 신약성경 정경도 대략 이 시대에 편성되었다.

 

(3) 여러 사상들의 발흥

온갖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왕성하게 증거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상적 활동도 왕성하게 이루어져서 가히 사상의 발효시대라고 할만 했다. 헬라 철학, 동방 신비종교, 유대의 율법주의 등 여러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복음과 뒤섞임으로써 신앙적 혼란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이 새로 연구 검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가운데서 영지주의(Gnostism)나 신플라톤주의(Neo-Platonsim) 등의 절충 사상으로 사상적 혼란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2.기독교의 확장

 

(1) 교회 확장의 중심지

1) 예루살렘 -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유대 각처로 흩어졌던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여러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여 기독교를 확장시켰다.

 

2) 수리아의 안디옥 - 바울이 서쪽으로 전도해 나가는 근거지가 되었다. 수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전도의 거점

 

3) 에베소, 서머나 - 소아시아에서는 서남방 해안 지방에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였는데 에베소, 서머나가 그 중심이었다. 이곳을 기점으로 복음이 소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4) 빌립보, 데살로니가 - 마게도냐 지방 전도의 중심지

 

5) 알렉산드리아 - 안디옥 다음으로 기독교가 흥왕한 곳이었다. 이 지방에 살고 있는 헬라인과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3세기에는 성경의 애굽어(콥트) 번역도 이루어졌으며 신학교도 세워졌다. 또한 그노시스파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6) 고린도, 아덴 - 헬라(그리스) 지방의 복음 전파의 거점 도시였다. 아테네에서도 변증자들과 순교자들이 나왔다.

 

7) 로마 - 서유럽 전도의 중심지였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각처에 교회가 있었고 북은 갈리아, 남은 북부 아프리카, 서는 스페인에 이르렀다.

 

(2) 성장의 요인

1) 성령의 충만한 역사

2) 신자들의 비상한 전도열 - 성령 충만을 받은 신자들이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함

3) 왕과 상류 계급이 교회로 들어옴

4) 가난한 자와 어려운 자들에 대한 구제 - 소외되고 고난당하던 하류층들이 대거 교회로 들어오게 됨

5) 봉사와 상부상조 - 신자들이 서로 격려하고 도움으로써 박해 중에서도 신자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함

6) 고상한 도덕적 생활 - 이것이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불러일으킴

7) 박해에 대한 인내

 

(3)박해

 

1) 원인

 

① 간접적 원인

가. 오해

기독교인은 부도덕한 자들이다 - 동굴 속에 남녀가 모여 음행한다(숨어서 집회를 가지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 불의한 자들이다 - 자식을 잡아먹는다(성찬식에서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나. 미신

기독교인 때문에 로마의 신들이 노하여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생각함

 

② 직접적 원인

가. 사상의 부조화(不調和)

로마인들은 국가를 최고의 선(가치), 최고의 권위로 생각하였으므로 국가는 모든 일에 국민의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최고선으로 여겼기 때문에 평소에는 국가에 충성하지만 국가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 상치되는 경우에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고자 하는 신본주의를 취했기 때문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제국이 영원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세상에는 종말이 있으며 심판이 있다고 생각함.

로마인들은 가장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으므로 가장의 종교가 온 식구들의 종교가 되었지만 기독교인들은 가장이 불신자이면 그의 종교에 따르지 않음.

 

나. 사회생활의 부조화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나 기독교인은 죄로 여겨 참여하지 않음.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과 융화되지 못함을 보고 사회와 정부를 뒤엎고 개조하려는 것으로 봄

 

다. 로마의 정책과 맞지 않음

로마 지도자들은 제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황제 예배를 강요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에 반대하고 호응하지 않음

로마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비밀 단체 결성과 회집을 금지하였는데 기독교인들은 모임을 계속 가졌기 때문에 충돌이 생김

또 기독교인은 침략 전쟁에 나가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에 군 복무 문제로 충돌이 생김

 

 

(2) 박해의 방법

1) 기독교를 포기한다는 증거로 성경과 교회 기물을 버리게 하거나 파괴하도록 만듦

2) 직업을 갖는 것을 방해하거나 재산 몰수, 공직 박탈 등을 통해 신자들을 직간접적으로 사회에서 추방하려고 함

3) 폭력과 방화를 행사함 - 화형에 처하거나 십자가 형벌을 가했으며 맹수와 결투를 시켜 죽게 함

4) 기독교에 반대하는 많은 사상을 내세워 교리적 사상적으로 압박을 가함

5) 이러한 박해와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기독교를 부인하면 과거의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다.

 

(3) 박해의 결과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더 성장하고 확대되고 강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기 보다는 고난당하고 죽는 쪽을 택하였다. 박해와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한 결과 그리스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들의 구주이심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씀의 필요성을 더 크게 느껴서 신약 정경(Canon)의 형성이 촉진되었다.

로마인들의 무자비한 핍박과 그것을 사랑과 진리와 무저항으로 이겨낸 성도들 간의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는 충격과 감동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온 세상에 유명해지게 만들고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특히 사도들과 교부들의 순교는 기독교가 생명있는 그 무엇이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었다. 그리고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국가에 융합되지 않으려 한 교회의 태도는 훗날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가 서로 뒤섞일 수 없으며 반드시 구분되어 서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명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4) 이 시대의 10대 박해

1세기에 일어난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잔인한 박해는 주로 개인적인 원한과 이기적인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고 나머지는 주로 정치적인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디키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제국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것으로서 기독교를 완전히 섬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지만 그 외 여덟 번의 박해는 특정 도시나 지방에서 일어난 것이다.

 

1) 네로(54-68)의 박해

로마시의 방화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지워 박해함

 

2) 도미티아누스(81-96)의 박해

기독교인들이 독립된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는 이유로 박해함. 이로 인해 카타콤에서의 비밀 집회가 생겨남

 

3) 트라야누스(97-117)의 박해

비밀 결사를 하여 정치적 음모를 꾀한다는 것과 로마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사회생활 부조화를 이유로 박해를 가함. 황제상에 절할 것을 강요함.

 

4)하드리아누스(117-138)의 박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여 박해함. 기독교를 불법화함

 

5)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의 박해

가정교사의 사상적 영향(스토아 사상)으로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박해함. 177년 리용과 비인에서 특히 심한 박해가 있었다.

 

6) 셉티무스 세르베루스(205-211)의 박해

열심 있는 이교도였던 부인의 영향으로 교회를 핍박함. 특히 전도 금지령을 내려서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방해함

 

7) 막시미누스(235-238)의 박해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박멸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제거하려고 함. 이 시기에는 사형은 하지 않았고 투옥과 유형으로 박해를 함

 

8) 디키우스(249-251)의 박해

로마가 옛 신들을 섬겼을 때는 부강했는데 기독교가 들어오자 나라가 쇠해졌다고 믿고 칙령을 내려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디키우스는 원칙에 따라 작심하고 박해했기 때문에 이 때의 박해가 가장 심했다. 그의 목적은 신자들을 죽여서 순교자를 내는 것보다 악형과 감금과 공갈로 우상을 숭배케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산시키는데 있었다.

 

9) 바렐리아누스(253-260)의 박해

기독교인들로 인해 질병과 흉년이 생겼다고 믿고 257년과 258년에 큰 박해를 했다. 신자의 집회를 엄금하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주요 신자들을 유형 보내고 재산을 몰수했다.

 

10)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기독교와 같이 다루기 어렵고 강력한 조직체가 제국 내에 있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겨 기독교를 박해함. 그도 조직적인 박해를 했는데 예배당 파괴, 성경 압수, 성직자 투옥, 악형에 처하고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는 등 핍박을 했는데 304년에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한 제4칙령을 내렸다. 무서운 박해로 디키우스 때처럼 순교자도 많이 나고 배교자들도 많이 났으나 기독교인들을 이해한 민중들이 이전처럼 적대하지는 않았다.

 

(4)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공격

 

1) 루키아누스(Lucianus of Samosada)

루키아누스는 120년 수리아에서 출생했고 200년에 헬라 또는 애굽에서 사망했다. 에피쿠로스 학파 소속의 학자였다. 그는 풍자와 조소의 문장으로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풍습을 비방했다. 그는 <페레그리누스의 죽음>(De Morte Peregrini)이라는 책을 180년경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165년 올림피아 경기 때 키니크 학자 페레그리누스(Peregrini)가 불속에 투신 자살했다는 것을 알리는 편지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페레그리누스는 부모를 죽이고 간음한 자였는데 후에 예수 믿고 목사까지 되었고 나중에 악행이 탄로나 투옥되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도움으로 출옥했다. 출옥 후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추방되어 키니크 학파에 가입했으나 허망한 명예욕에 사로잡혀 기독교인과 키니크학파를 조롱할 목적으로 이 소설을 지었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2) 켈수스(Celsus)

루키아누스의 뒤를 잇는 기독교 비판자는 켈수스인데 그는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로마 혹은 알렉산드리아인이며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울어진 사람이다. 저서 <참 말>(참 강론)로 기독교를 공격했다. 이 책에 반박하게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대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켈수스를 반박함>이라는 책을 지었다.

180년경에 쓴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약 70년 뒤에 쓰여진 오리게네스의 저서 <켈수스를 반박함>에서 상당 부분이 실려 보존되고 있다.

오리겐의 인용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보면 켈수스는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 상식을 다 동원하여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그의 사상은 그리 깊지 않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Voltaire), 시트라우스가 사용한 말들 중 상당수가 켈수스의 저서에 나올 정도로 날카롭게 기독교를 부정했다. 그는 매우 격렬하고 신랄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과 식인을 저지른다는 식의 대중적 비판을 답습할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조의 각 조항을 조롱하고 비방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즉 그릇되게 나가지 않을 세상을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표라고 했다. 만약 관심이 있었다면 팔레스타인을 자기 땅으로 선정하셨을 리 만무하다고 했다. 아울러 그 땅에서 저급한 하층민들을 모으고는 그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나간 다른 사람들뿐이다. 켈수스는 제자들의 증언이 예수 생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꾸며 기록에 삽입했을 것으로 보았다.

 

3) 신플라톤 학파(Neo-Platonsism)

 

① 발생 원인

여덟 번째의 데키우스 황제와 아홉 번째의 발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시행된 박해는 로마의 기존 여러 신들을 끌어들여 로마 제국을 다양한 외적들로부터 보호해 보려고 하는 중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허사로 돌아가고 박해자인 발레리우스가 260년에 페르시아 원정 중에 생포된 다음에 새로 왕위에 오른 갈리에누스 (Gallienus)는 261년에 사실상 박해 정책을 포기하고 관용을 베푸는 조서를 내렸다. 이렇게 한 것은 갈레리우스가 전임자처럼 물리적 힘으로 기독교를 누르려고 한 군인이 아니라 철학으로 기독교를 누를 수 있다고 믿은 지성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신플라톤학파는 출발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해 생겨난 종파였다.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하자 기독교로 인하여 로마의 재래 종교들이 없어질까 하여 이런 철학적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비평만 하는 것을 표방하지 않고 아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 종교를 표방하였다.

 

신플라톤학파는 재래의 철학사상에다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신비 철학을 구성한 것이다. 시조는 암모니우스 삭카스(Ammonius Saccas, 243년에 죽음)였는데 부모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나 후에 옛 종교로 돌아간 자이다. 이 학파의 중요 학자는 플로티누스와 포르피리우스이다.

 

② 플로티누스(Plotinus)

신플라톤 학파의 최고 지도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인데 삭카스의 제자였다. 그는 208년 애굽에서 출생하여 244년경부터 270년까지 로마에서 활동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란 영혼이 감각에 속한 것들(물질)로부터 해방되어 그 근원인 신께로 돌아가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배척함은 물론 영지주의적 기독교도 배척했다. 그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신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영(Spirit)과 마음(Soul)과 물질(Body)의 삼 단계로 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복귀하기 위해서는 첫째, 덕을 쌓아야 하고, 둘째, 신과 연합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에로스(쾌락적 애정)를 통해서 엑시타시 현상에 이름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다.

 

③ 포르피리우스(Porphyrius)

플로티누스의 제자 포르피리우스(Porphyrius)는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 타락, 성육신 구속, 심판 등의 진리를 송두리째 배격했고 박해 기간에 기독교에 대한 비판서를 썼다. 그는 다신교의 옹호자로서 무려 15권의 저서를 지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는지, 그리스도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서는 동시에 그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또 신약과 구약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 사도들이 서로 분쟁했다는 것, 제자들의 사상이 일치되지 못했다는 것 등을 들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이 불완전하다고 했으며, 더 나아가 예수님이 거짓말을 했으며 제자들의 본이 되지 못했다고 비방했다. 또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사후에 주님의 교훈을 곡해하여 사족을 달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철학으로서 종교를 대신하려고 한 신플라톤 학파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그 원인을 다음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 敎祖가 없었다. 신앙이나 추종의 대상이 될 분명한 인격적 신이나 교주가 없었으므로 철학적 사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둘째,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방법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 축복과 평안을 어떻게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5) 교부들의 신앙 세계

 

1) 교부의 정의

교부들이란 사도들의 직계 제자로서,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교회의 건설과 진리의 체계화에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으로서 후세에 권위를 떨친 인물들을 일컫는다. 특히 교부의 자격 중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교리에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상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정통적이지 못하면 교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첫 교부는 1세기 말에 활동한 로마의 클레멘스를 꼽고 마지막 교부로는 동방교회에 있어서는 다메섹의 요한(725년 사망)을, 서방교회에 있어서는 그레고리 1세(604년 사망)를 꼽는다.

교부는 시대에 따라서 니케아회의 이전의 교부와 그 후의 교부로 크게 나누어 지역과 언어에 따라서 동서로 구별한다. 즉 ①속사도교부 또는 사도적교부(Apostolic Fathers) ②변증가 (Apologists) ③헬라교부(Greek Fathers) ④라틴교부(Latin Fathers)로 나눈다.

 

2) 주요 속사도 교부들

① 로마의 클레멘스(Clements of Rome)

클레멘트 또는 클레멘스는 1세기 말에 로마에서 사역한 유명한 장로이다. 그의 저서로는 <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있다. 그의 저서에는 구약 인용이 많아서 약 4분의 1이나 된다. 그는 바울의 정신을 많이 이해하고 있었지만 야고보와 같이 윤리적 가르침을 많이 베풀었다. 클레멘스의 관심사는 바울과 같이 진리를 세우고 확고히 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교회 형제들의 선행과 덕행을 격려하는데 있었다. 그는 신앙인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② 이그나티우스(Ignatius)

안디옥 감독으로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에 끌려가서 맹수의 밥이 되었다. 이그나티우스의 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상은 교회의 통일, 감독의 권위, 순교자의 영광 등이다.

그의 저서로는 로마로 호송되는 도중에 쓴 7통의 서신이 있다. 이중 <에베소> <마그네시아>(Magnesia) <트라리아> <로마인에게>는 서머나에서 집필한 것이고 <빌라델피아> <서머나> <폴리카르푸스에게>는 드로아에서 집필한 것이다. 그는 이 서신에서 대속 문제, 성육신 문제(주로 당시 교회를 괴롭히던 이단인 假現說者들을 취급하면서), 유대주의자들 문제, 감독직의 권위 문제를 취급했다.

 

③ 폴리캅(Polycarp)

2세기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인 폴리캅은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으며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이그나티우스 친구였으며 후일 이레네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폴리캅은 155년에 서머나에서 화형당하여 순교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빌립보의 서신> 한 통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바울 서신들과 베드로서, 요한일서 등이 인용되어 있다.

 

④ 파피아스(Papias)

브프리기아(브리기아)의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으로서 150년 경에 버가모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저서로는 다섯 권으로 된 <주의 가르침의 설명>이 있다. 이 책은 사도들과 사도들의 제자들이 전한 것을 한 데 모은 것이다. 이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단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속에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파피아스는 열정적으로 천년왕국을 주장하였다.

 

3) 교부들의 신학

 

① 기독론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논쟁다운 논쟁은 없었다. 대체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었으나 신성을 더 강조한 편이었다.

 

가. 클레멘스 (Clemens of Rome)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엄한 홀(笏)이다.

나. 이그나티우스 (Ignatius) : 그리스도는 신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다. 헤르마스(Hermas) : 그리스도의 선재설(先在說)을 믿었다.

 

② 삼일신(3 1神) 교리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명백한 교리는 이 시대에 아직 확립되지 않았지만 희미하나마 삼위일체 교리를 믿은 듯 하다.

가. 이그나티우스 : 신자는 건축재(돌)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것을 끌어올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기계로, 성령님은 밧줄로 비유함

 

나. 클레멘스 : 사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충분한 확신을 얻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되고, 성령님의 보증을 얻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복음을 듣고 이것을 전하러 나아갔다"고 말했다.

 

③ 속죄론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열고자 피를 흘리셨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 받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믿는 자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경건한 마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의)를 주신 것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는 以信得義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별로 철저하지 못했고 이신칭의의 근거에 대해서도 구약 말씀들에서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④ 천년설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은 장래에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스도게서 천년간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신다고 가르쳤으며 파피아스는 상상력을 크게 활용하여 천년 시대의 상태를 묘사하기까지 했다. 전반적으로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윤리주의와 율법주의가 교회 내에 만연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크게 강조한 이신칭의의 복음 진리가 별로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고 행함에 대해 강조한 야고보의 사상만 강조되고 있었다. 이것은 지도자 자신들이 바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리주의가 교회 안에서 만연되게 된 데는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이방 철학 사상 특히 스토아주의의 영향이 컸다.

 

(6) 변증가들

로마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과 보조를 같이하여 문서적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하자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기독교의 참 진리됨을 변호하고 변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들을 변증가(apologist)라고 부른다. 이들의 변증은 기독교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교리화하고 신조화하는 데와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우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변증가에는 주로 2세기에 출현한 신학자들 특히 철학적 소양이 풍부한 헬라(동방) 계통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가장 탁월한 변증가였다.

 

1) 헬라어를 사용한 대표적 변증가들

 

① 유스티누스 (Justinus)

그는 125년에 사마리아에서 출생하여 166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핍박 때 죽었다. 그는 헬라 학문과 철학을 공부하는 중에 진리를 찾아보려고 스토아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또는 피타고라스 학파 등을 전전하며 사숙하였으며 플라톤 학파의 학설에 깊이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가 플라톤 철학을 열심히 연구한 결과 거의 철학의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특별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그가 어느 날 해변을 산보할 때 한 노인을 만난 것이다. 그 노인은 유스티누스에게 구약 성경을 주면서 이 책의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성취되었다고 말한 후 사라졌다. 노인을 만난 후 유스티누스는 모든 인간적인 지혜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고 노인의 충고에 따라 구약을 연구하였고 또한 신약을 연구하는 중에 그리스도가 구약을 성취하신 것을 발견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되었다.

유스티누스의 글에는 <대 변증서>와 <소 변증서>, <트리포(Trypho)와의 대화> 등이 있다. 이 중 <대변증서>는 황제와 원로원, 로마 국민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터무니없고 상투적인 비난 곧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이며 국가에 반대하고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등의 주장들을 반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기독교의 참된 신앙 됨과 고상한 도덕적 종교임을 변증하며 이방 종교에 비교할 때 기독교가 매우 우월한 종교라는 것을 강조했다.

 

② 아리스티데스 (Aristides)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 사람인데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기독교를 변증했다. 이 글은 시내 산에서 발견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참 신의 성질을 설명했고 이교의 신화를 공격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풍성한 삶에 대해 설명했다.

 

③ 콰드라투스(Quadratus)

아테네의 감독으로서 기독교 최초의 변증가이다. 그는 126년 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변증서 제출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예수님에게 병 고침을 받은 자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고 주장했다.

 

④ 타티아누스(Tatianus, 110-170)

앗시리아인으로서 유스티누스의 제자였다. 철학자인 그는 로마에 거주했는데 나중에는 그노시스 종파에 들어갔다고 한다. 저서에는 헬라인의 신화를 반박한 <헬라인에 대한 담론>, 사복음서를 종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편집한 <디아테사론>(傳記)} 등이 있다. <디아테사론>은 가장 오래된 예수님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160-170년 경에 요한복음이 교회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으로 말미암아 증명된 것이다.

 

⑤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철학자로 활동하다가 후에 기독교를 믿었다. 177년 경에 쓴 저서 <기독교에 관한 사명>과 주님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부활>이 유명하다. 그는 변증가 중에서도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강력한 이론가였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철학적으로 변호한 첫 그리스도인이다.

 

⑥ 멜리토(Melito)

소아시아의 사데 교회 감독이었으며 당시 유명한 대작가였으나 전해오는 저서는 없다. 헬라 신화를 비판한 글을 많이 썼다. 최근 ‘주의 수난’이라는 논문이 발견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존중하여 주님을 '본질상 神人'이라고 칭했다.

 

2) 라틴어를 사용한 대표적 변증가들

 

① 미누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

원래 유명한 로마의 법률가로서 230년 경에 활동했고 저서로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친구 간의 대화 형식으로 된 <옥타비우스>라고 하는 글이 있다.

 

② 아르노비우스(Arnobius)

아프리카에서 수사학 교사를 지낸 아르노비우스는 주님을 믿은 후 세례받기 전에 <주후 303년 경> 7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내용은 다신교의 불합리성을 공격하고 기독교의 장점을 칭찬한 것이다.

 

③ 락탄티우스(Lactantius)

아르노비우스의 제자로서 문장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며 크리스찬 키케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저서로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는데 이 책은 독창적이지는 않으나 당시의 변증론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3) 변증의 정신과 내용

 

① 정신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디오그네투스에게 주는 편지> 1절을 보면 변증가의 정신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신자의 존재는 몸에 있어서 영혼(마음)과 같다. 영혼이 온 육체에 충만한 것 같이 신자는 온 세상에 널리 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머물지만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육은 영을 미워하여 항상 대적한다. 이것은 영이 육에게 무슨 해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영이 육신을 그 정욕대로 쾌락을 추구하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은 일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세상 쾌락으로 치닫지 않고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세상에게 부끄러움을 주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 육체를 사랑하며 다스린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를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다.”

 

② 내용

변증서의 내용들은 기독교인이라고 까닭 없이 박해는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박해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비난의 내용>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

-정부를 엎고 세상에 별도의 왕국을 세우려고 함

-그리스도인은 부도덕한 자

-예수는 마술사

 

< 변증의 내용 >

①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다만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일 뿐이며 오히려 세상에서 유일한 참 유신론자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만이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② 신자의 목적은 세상 나라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엎으려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있음. 진리와 믿음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순교하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세상에 나라를 세우려는데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③ 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함

 

④ 예수님은 마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신)이다. 그가 신기한 표적을 행한 것은 그가 마술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나타내기 위해 행한 것이다.

 

변증가들은 변증을 위해서 주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관계, 기독교와 세상 철학들의 관계에 대해 비교하며 유사점과 차이점을 부지런히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변증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은 신의 유일성과 기독교 도덕의 초월성이다.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변증가들은 구약 성경 중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과 예수님의 이름에 의해 지금까지도 이적이 계속되고 있다는 두 가지 사실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상에서 큰 세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기독교의 감화력과 결과를 들어서 증거로 삼는 일도 많아졌다.

 

(7) 헬라 교부들

 

1) 소아시아의 신학자들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170년 경으로서 변증가 시대의 끝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도 변증서가 계속 나오는 등 변증의 열심이 완전히 식어진 것은 아니나 교회는 점점 내부의 충실에 열중하였으며 신학교를 건설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 이 무렵 헬라 신학자와 라틴 신학자가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지방과 언어가 다를 뿐 아니라 국민성의 차이로 사상의 경향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헬라파도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소아시아파이며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파이다. 소아시아파는 사도 요한의 뒤를 이른 사람들로서 성경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사상과 신앙의 온건함이 이들의 장점이었다. 이들은 이단에 대해서는 강한 대항적 자세를 취했다. 이 파의 지도자는 이레네우스와 히폴리투스이다.

 

① 이레네우스(Irenaeus)

이레네우스는 가장 뛰어난 초대교회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제자인 히폴리투스와 함께 초기 가톨릭 논쟁자들 중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데오도레투스로부터 ‘서방교회의 빛’이라는 칭함을 받았다. 그는 대략 115-140년 경 사이에 소아시아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서머나 지방에 거하는 동안 폴리캅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선교사가 되어 고올(프랑스) 지방에 가서 전도하다가 그곳 감독이 되었다. 그는 정통 교리의 옹호에 힘썼다. 이레네우스는 성질이 온순하고 사상이 순수한 것이 장점이며 박학한 학자였다. 그는 헬라의 철학자들과 시인들의 책에 정통하며 반대자들의 사상을 잘 알아보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레네우스는 헬라의 신학자였지만 활동한 장소는 서유럽으로서 라틴 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특히 주후 177년에 리용과 비인의 교회 박해시에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여 그곳의 모든 시민이 신자가 되게 하는 등 전도에 크게 성공하였다.

이레네우스는 변증가들과는 달리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단을 막기 위해 싸웠다. 그는 성경을 자유롭게 인용하여 신약을 충분히 활용한 교부들 중 일인자로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보여주었으며 사복음과 거의 모든 서신을 이단자 마르시온의 성경과 대조하여 논증하는데 인용하였다. 그가 주로 논쟁한 상대는 이단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였다.

그의 사상은 변증가들이 사상처럼 철학적이고 사변적이지 않고 사도 이래의 전통을 존중하고 신앙의 표준을 중히 여겼다. 그는 특히 사도들에 의해 보존된 로마 교회의 신앙과 사상이 모든 교회의 신앙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관(神觀)에 반대하여 하나님은 자유 의지로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한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였고 신의 피조물인 우주(물질) 역시 선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신 로고스이며 그의 독생자라고 하였다. 성령은 성부에 대해 순종하는 위치에 서서며 성자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했다.

이네네우스 신학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부분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구주이심을 밝힌 부분이다. 즉 주님은 이방 종교의 교조들처럼 단지 선한 가르침을 베푼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거룩한 가르침을 낼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주님은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놀라운 인격과 권능을 소유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레네우스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으로 본 것은 그의 순종이었다. 인류는 바로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하고 망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이로서 주님은 인류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주님은 인류의 머리로서 모든 인류를 자기 안에 포함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에 대해 힘써 증거했다.

이레네우스의 신학 사상의 중심은 이미 로고스가 아니고 성육신과 속죄에 있었다. 오랫동안 거의 잊혀지고 있었던 바울의 신학은 이레네우스에 의해 다시 상기되었다.

 

② 히폴리투스(Hippolytus)

히폴리투스는 이레네우스의 제자인데 170년에 태어나서 235년 죽었다. 그는 주석과 연대기와 부활절 계산, 변증가, 이단 반대자로 유명했다. 그는 로마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장로 중 한 사람이었는데 삼위일체론 논쟁과 관련하여 당시 등장한 두 가지 단일신론(Monarchian) 주장(삼위를 위해 일체를 희생시키는 養子論的 단일신론과 일체를 위해 삼위를 희생시키는 樣態論的 단일신론)에 크게 반대하여 로고스 기독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 저서는 <모든 이단을 논박함(Against All Heresies) > 이다.

 

2) 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는 철학과 古文學의 소양이 풍부하였다. 그들은 이단을 반대하여 참 진리를 세우는 것을 본분으로 삼았으나 그 자유로운 연구 태도와 사상 자체는 복음적이 아니라는 비난도 받았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가 이 파의 대표자들이다.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유력한 교회가 되었을 때 기독교를 배우고자 하는 많은 학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신학교가 세워졌고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학교(학파)는 처음에 판테누스에 의해 지도되었다. 판테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고 멀리 인도까지 여행하며 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의 사적은 별로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의 제자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에 이르러 이 학파는 최고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① 클레멘스

150년 경에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180년 경 판테누스를 만나 수학하였고 189년부터 12년간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의 교수로 있었다. 202년 셉테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때 안디옥으로 피하여 거기서 저술과 설교에 종사했으며 후에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가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서 213년 경에 죽었다. 클레멘스는 성격이 온화하고 명상적인 사람으로서 논쟁의 자리에 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폭넓은 교양과 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철학과 기독교 간에는 모순이 없을 뿐 아니라 기독교는 철학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옛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사상의 좋은 점들을 모아 크리스천 영지주의를 낳았다. 클레멘스는 이러한 활동의 중심인물이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이방 종교의 헛됨을 설명함으로써 기독교를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권면>과 기독교인의 생활론으로 당시의 풍속, 습관, 도덕을 설명한 3권 짜리 책 <교육자>와 순서 없이 모은 철학, 종교, 신학의 비망록인 <잡설> 등이 있다.

 

② 오리겐(오리게네스)

185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서 출생한 오리겐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대 학자였다. 18세 때 스승의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신학 교수가 되었고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 철학을 배웠다. 거룩한 삶을 향한 오리겐의 열망과 금욕적인 경향은 스승인 클레멘스보다 훨씬 더 하였다. 그는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 된 사람 중 하나였으며 아무 소유도 없었다. 그는 211년 경에 로마로 갔으며 215년에는 아라비아로 가서 전도하였으며 230년 경에는 팔레스틴을 거쳐 그리스 등지로 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는 시기하는 자들의 비난과 고소로 인해 추방당했고 가이사랴에 가서 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오리겐은 244년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두로의 감옥에 갇혔으며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오리겐은 다방면에서 석학이었으나 구약 본문 비판, 주석에 특히 뛰어났다. 그의 저술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성경에 관한 것으로서, 본문 비평과 주석이 있다. 비평서로서는 <헥사플라(Hexapla; 6가지 번역 성경)>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때까지 나온 기독교 학자들의 모든 저서 중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 역시 신 구약 전체에 걸친 방대한 것이었다. 둘째는 교리상의 저서로서, <제1원리}(De Principis)>라는 큰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인데 오늘날의 조직신학에 해당하는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변증적인 저술로서, <켈수스를 반박함>이다. 이것은 8권으로 된 방대한 책인데 전부 전해지고 있다.

오리겐은 성경을 중히 여겨 그것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필로와 같이 성경을 철학과 조화시키고자 하여 구약 해석을 함에 있어서 풍유적 또는 우화적(allegorical) 해석법을 사용하였다. 이 해석법은 헬라 철학자들이 신화와 신에 관한 시를 해석할 때 사용한 방법인데 이 원리에 의거하여 오리겐은 성경 말씀에서 한 가지 뜻만 찾지 않고 세 가지 뜻을 동시에 찾고자 했다.

그는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성경에서 육신의 유익을 찾고, 깨친 자들은 정신적 유익을 찾으며, 완전한 이들은 영적 유익을 찾는다.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된 것 같이 성경도 그러하여 성경 안에는 문자적, 도적적, 영적 뜻이 함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문자적인 뜻이란 문자 그대로의 뜻이며, 도덕적인 뜻이란 사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교훈을 말하며, 영적인 뜻이란 성경 말씀 안에 포함된 철학적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오리겐은 항상 기독교 진리를 철학과 조화시키고 철학적 방법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우화적 성경 해석법을 사용했던 것도 바로 성경에서 철학적인 뜻을 찾기 위해서였다. 헬라 사상에 의한 기독교 해석법은 오리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과학은 철학과 윤리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리겐의 작업은 기독교의 과학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 바탕은 신플라톤주의로 기울어진 플라톤 스토아 철학이었다.

교회, 사도적 전승 위에 자기의 신학 체계를 세웠는데, 우선 그는 종속설(從屬說)을 주장했다. 로고스(아들)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같은 본질이지만 아버지에 대해 종속적이라는 주장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아버지께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오리겐은 영혼 선재설(先在說)을 주장하였다.

오리겐의 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 유한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깨끗하게 되지 못한 영혼은 내세에 가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불이 있어서 깨끗하게 된 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의 구원관은 만인구원설이어서, 선인뿐 아니라 악인도 일정한 사후의 시련을 통해 비록 그 길이 멀고 험하기는 하지만 마침내는 다 깨끗하게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오리겐의 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 세계 배후에는 이데아의 세계 곧 현세의 영적 실재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영혼은 그 세상에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우리를 타락시켰다. 그래서 구속 얻은 자들만 거기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리겐은 바울 이후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죽으심의 속죄적 가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만인에게 미쳐서 성도뿐 아니라 악인들까지도 마침내 구원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마귀들까지 구원을 얻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이 다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리겐은 당대의 지성인이요 대학자로서 그의 정신 세계의 규모와 수준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의 모든 이론들이 다 참된 진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성향을 띤 플라톤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그는 세상이 보다 열등한 주물주의 창조라고 했던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부인했다. 하지만 그 역시 역사와 아울러 물질 세계가 죄의 결과라는 (플라톤주의적)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이 점에서 오리겐은 역사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라고 주장한 이레네우스와 큰 대조를 이룬다. 또 영혼의 선재라든지 타락과 구원의 영원한 순환을 주장한 것을 놓고 보면 그의 사상이 기독교의 정통 사상에서 벗어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오리겐의 신학은 니케아 회의 이전까지의 교회에 있어서 최고의 지적 성취로서 이후 동방 교회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대의 기독론 논쟁에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그를 인용했기 때문에 그의 고향 알렉산드리아 회의(399-400년)와 유스티누스 황제 회의(543년), 제5차 교회 대회(553년)에서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일반 신자들보다는 지식층을 위한 것이었다.

 

(8) 라틴 교부들

지리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면 카르타고는 라틴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의 라틴 신학자의 중심 인물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었다.

 

1) 터툴리안 (Tertullianus)

터툴리안은 신학을 라틴 신학으로 개편하였고 라틴역 성경도 마련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에게서 형성된 라틴 신학은 키프리안과 암브로시우스로 계승 발전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대개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임에 비해 라틴 교부들은 대개 법률, 정치 등의 사회과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특성을 잘 설명한 데 비해 라틴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분명히 해 주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즉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과 그것에 근거하는 계시와 그 계시에서 나온 교회를 매개로 하여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터툴리안은 160년 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출생했으며 40세에 회심하였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 만연된 부도덕성으로 인해 자신부터 매우 금욕적이었으며 도덕성에 대해 많이 강조했으며 극장 관람조차 강력하게 정죄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가장 유력한 저서는 <변증서(Apolpgy)>였다. 이 책에서 그는 탁월한 법률가로서 다른 그리스도인 변증가들이 한 번도 취급해 본 적이 없는 강력한 논점들을 다루었다.

단호하며 우울하고 열정적인 그는 중년에 몬타누스주의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그의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계속 교회의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불공정하고 광신적이었다. 그는 약 225년에 죽었다.

터툴리안은 몬타누스주의자가 된 후에도 계속 교리적 오류(이단)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무렵 쓰여진 가장 중요한 작품은 <프락세아스를 대항함(Against Praxeas)>이다.

신학 발전에 대한 터툴리안의 최대 기여는 속죄론의 기초가 되는 죄악론을 주장한 데 있다. 시조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깨어졌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이미 이레네우스가 가르친 것이었지만 그는 아담의 죄와 지금 우리의 죄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사람의 영혼이 부모에게서 유전된다는 유전설을 주장하면서 죄도 함께 유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죄는 육체에 있지 않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터툴리안이 독창적으로 주장한 원죄설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시했다.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활동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삼일신(三一神) 사상을 최초로 내놓았다. 이것은 삼위일체 사상보다는 조잡하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신약(新約)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프락세아스를 대항함>에서) 또 그는 어린아이에게 주는 유아세례를 반대했다. 이것은 세례 후의 범죄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는 철학적 방법을 배제하고 오직 기독교적인 경험만으로 새로운 사상 세계를 개척하려 했다. 그는 일체의 공상적 사변을 정죄했다. 그는 예를 들어 사람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철학적 관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이루었는가(성경적 관심)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바이며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모두 무용하고 위험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2) 키프리안(Cyprianus)

스스로를 터툴리안의 제자라고 일컬은 키프리안은 3세기의 가장 위대한 감독이자 교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200년 경 카르타고의 부자집에서 출생했는데 어릴 때 훌륭한 헬라 교육을 받아 나중에 저명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그는 문학, 수사학, 법률 및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이로 인해 248년에 가르타고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248년 그는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어 많은 일을 했으며, 250년 디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사막으로 피난하여 교회에 서신을 보냄으로써 그가 없을 동안이라도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사막에서 돌아온 후에는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를 만나 사막으로 다시 귀양을 갔다가 258년 참수당하여 순교했다.

키프리안 신학의 중심은 교회론에 있었다. 터툴리안은 人性(人間)의 부패를 말하면서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므로 여기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비해 키프리안은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난 자는 타인이며 俗人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말한 교회는 오직 가톨릭 교회 하나였다. 그는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가톨릭 교회 외에는 다른 교회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은 자이다" 라고 하여 분리된 교회 또는 이단에 가담한 사람이 받은 세례를 무효로 보았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과 감독(교황, 성직자)에 대해 크게 강조함으로써 중세 가톨릭 교회의 근본이 될 사상 체계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교회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교회 외의 일상 생활과 자연 만물의 신성과 가치를 인정치 않았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불가시적(不可視的) 영적 공동체' 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들의 유기적 공동체'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외적 조직과 제도를 갖는 가시적(可視的) 공동체로 보았으며, 그러한 교회의 일체성은 보이지 않는 ‘성령’과 ‘말씀’보다는 보이는 ‘사람’(감독들)에 의해 확실히 유지되는 것으로 보았다.

가톨릭교회 곧 可見的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감독 없이는 신앙도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한 키프리안은 아마도 가톨릭의 성직 제도를 확고히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단과 핍박이 교회를 안팎에서 공격하던 당시의 사정에서는 이런 주장을 할 필요성이 어느 정도 있었을 터이나, 성령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는 신약 교회의 특성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인간의 제도에 근거하여 교회를 유지하려고 의도한 키프리안의 신학은 한쪽으로 크게 치우친 잘못된 신학이며 훗날 나타나게 될 교황 제도를 합리화시켜 줌으로써 교회를 크게 황폐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9) 사죄(고해) 제도의 등장

초대 교회는 일반적으로 모든 죄가 고백(悔改)만 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다 사해질 것으로 믿었지만 예외가 있었다. 하나님께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교회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세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의 부정(否定)-背敎-과 성적 불륜(姦淫), 자살이었다. 이런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축출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유일한 통로로 간주되던 성찬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이런 수찬 정지는 구원을 위태롭게 했고, 이런 징계를 받은 자들은 그것을 완화해 주기를 바랐다. 여기서 참회하는 죄인을 받아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터툴리안은 세례 받은 후에 한 번 회개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배교, 음행, 살인의 죄는 제외했다. 그는 두 번째(세례 후)의 회개에는 공중 앞에서 금식하며 통곡하고 장로들 앞에서 굴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문제는 죄인이 얼마 동안 회개해야 회복되며 누가 회복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죄의 사유권을 교회에, 나중에는 베드로와 교권(성직자)에게 맡겼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감독들은 사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박해가 있게 되자 음행과 간음한 자 및 배교를 한 자들까지 교회가 받아주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서 지도자들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로마 감독 칼리스토스(217-222)는 어떤 죄든지 합법적으로 회개하면 자기가 사해준다는 성명을 내었다. 이것은 교황권의 발전을 의미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배교자는 제외했으나 박해로 인해 무수한 배교자가 속출하자 그것도 결국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은 넘어진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자고 했다. 여기에 대해 엄격파들은 그 입장을 거부하고 로마의 신학자 노바티안을 따름으로 분열하였다. 대다수인 나머지는 관용적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로마 회의(251년), 카르타고 회의(252년)에서 다수파인 관용파가 승리하여 교회는 회개한 배교자들의 교회 가입을 결의했다.

그러나 모든 죄인들을 똑같이 대할 수 없고 사안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키프리안의 주장에 따라 교회들은 배교자 등 죄인들의 죄책 등급을 다루게 되었고,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등급에 따른 고해 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다. 범죄의 경중에 따라 교회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햇수(年數)가 결정되었다.

고해(告解; penance) 개념은 세례의 속편(續篇)으로 발전한 것으로서, 당시 사람들은 고해로써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세례는 한 번만 받는 것이므로 반복할 수 없었고 세례는 세례 받기 전까지의 죄만 씻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세례 후의 범죄에 대해서는 다른 구제 방법이 필요했다. 당시 사람들은 순교를 제2의 세례와 같이 생각했다. 곧 순교는 세례를 받은 후에 범한 모든 죄를 사하는 피의 세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 같은 사람이 순교를 그렇게 갈망하고 그것을 자청했던 데는 이런 사상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쉽게 순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수단이 필요했는데 이에 등장한 것이 고해였다. 이런 사상은 2세기 중엽 로마에서 쓰여진 <헤르마스의 목자>에 나타난다.

 

(10)이단과 분파들

 

1) 이단들

교회는 초기에는 유대교와 로마제국의 박해와 핍박을 받았고 2세기부터는 교회 안에서 발생한 각종 이단 종파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런 이단들의 대부분은 기독교 복음을 로마의 문화권에서 이해하고 곡해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유대교적 이단 종파들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그들은 복음을 유대교적으로 이해하였는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 엘카이파가 다 그러했으며 그노시스파(영지주의) 역시 그런 경향을 나타내었다.

 

① 에비온파

에비온파는 요단 동편 지방에서 기독교 초기 몇 세기 동안 성행한 이단인데 그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교의 반역자로 생각하고 배척하였으며, 따라서 에비온파는 그들이 유대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간주한 마태복음만을 사용하였으며 바울 서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인 기독교회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에비온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을 해야 하며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만을 믿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율법적 경건 때문에 메시아로 자천(自薦)한 사람이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메시아 자각을 했으며 그의 가르침에 많은 무리가 따르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에비온파는 사실상 기독교회가 아니고 유대교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② 엘카이파

엘카이파는 접신적(接神的) 신앙을 가지며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회 내의 유대인 집단이다. 그들은 에비온파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며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주 세척(洗滌) 의식을 행했는데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 신을 만날 수 있고 또한 신과 화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들 사이에는 접신적 행위와 점성술이 성행했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심신의 수양을 쌓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③ 그노시스파

그노시스파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도 하는데 그때까지 나타났던 어떤 이단보다도 간교하고 위험한 이단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3세기 초에는 로마 제국 전역의 대부분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크게든 작게든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지주의라는 용어의 어원은 '지식'이란 뜻의 '그노시스'(gnosis)에서 나왔다. 이 지식은 보통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지식, 지혜로서 특수 계층에 속하는 영적인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적 진리와는 전혀 무관한 여러 가지 세상 종교적 신비적 요소들 곧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과 마술,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의 신화들과 여러 가지 다른 철학들과 페르시아의 이원적 우주론의 혼합물에다 애매한 기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만든 일종의 새로운 종교 철학이었다.

 

 

그들은 구약에서 유대교적 요소를 거절하였으며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하여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과 부활 등의 실재를 부정했다. 대속자에게 있는 인간적 요소는 단지 사람을 속이는 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금욕과 방랑생활을 좋게 여겼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선물 속에서도 위험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물질적인 것은 악하므로 순수한 쾌락마저도 거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우선적인 문제는 이 우주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에 어찌하여 죄가 있고 재해가 있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역사의 해석 문제였는데 특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구원과 헬라 철학의 발출설(發出說), 동양과 헬라의 이원설(二元說)을 채택하여 계통있는 사상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공통적 사상을 보면 신으로부터 유출된 아이온(Aeon ; 영원히 존재하는 자)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물질에 이르게 되는데 물질은 아이온의 최하급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급에 속하는 아이온인 데미우르고스(Demiurgos ; 조물주)가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불완전하며 결점(罪)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조물주인 하급 아이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최고의 아이온이다. 그는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세상에 내려와서 지식을 주고 구원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실제하지 않으며 가현(假現)이다. 인간의 구원은 물질의 구속(拘束)을 벗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속죄는 참 지식(gnosis)을 가지고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인류는 선악의 혼합으로 삼분(三分)되어 있다. 첫째, 대부분의 인간들인데 이들은 물질적(hylic) 계층에 속하며 사탄과 자신의 육욕에 사로잡혀 희망없이 살아가고 있다. 둘째, 정신적(psychics) 인간들인데 이들은 신앙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믿음과 선행으로 세상의 중간층까지만 간다. 셋째, 영적(pneumatic) 인간인데 이들은 특수계층에 속하며 참 지식(gnosis)을 가졌으며 그 지식으로 신앙 이상의 세계에 들어간다.

 

④ 마니교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3세기에 일어난 종교로서 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근원은 동방에 있으며 본래 기독교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종교인데 서방으로 퍼짐에 따라 기독교와 접촉하여 기독교적 요소를 흡수하게 되었다.

그 시조는 마니(216-276)인데 페르시아 귀족의 아들로서 젊을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며 여러 해 동안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으나 반대자들로부터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들의 교리는 페르시아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이 세계는 광명과 흑암과의 싸움이며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하여 생긴 것으로 본다. 사람은 빛을 이 흑암 속에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해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해탈(解脫)의 방법은 육체를 정복하여 금욕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마니교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과 혼인과 망령된 말을 금했는데 이 점에서는 불교와 비슷하다. 마니교의 최고의 덕목은 세 가지를 인봉(印封)하는 데 있다. 첫째는 입의 인봉인데 육식과 망령된 말을 금하는 것이고, 둘째 인봉은 손의 인봉인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인봉은 가슴의 인봉으로 정욕과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마니교는 초기의 기독교와 유사하거나 더 질서정연한 조직체를 가지고 있었다. 마니 밑에 12사도가 있고 그 밑에 70인의 감독이 있었으며 그 밑에 교사들이 있었고 또 그 밑에는 행자(行者)가 있었는데 행자 중에는 택한 자와 듣는 자 두 종류가 있었다. 이 중 택한 자란 세 가지 인봉을 가진 자를 말한다.

마니교는 동서로 전파되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틴,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에 이르렀고 심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까지 존재했다. 어거스틴도 젊을 때 8년간이나 마니교에 탐닉한 적이 있다.

 

2) 교회의 분파들

 

① 몬타누스파

몬타누스파는 교회가 영지주의 등 이단들의 도전으로 흔들리고 사도들의 타계로 인해 그러한 교회들을 굳게 할만한 사람들도 적어지고 게다가 초대교회를 특징지웠던 성령의 충만과 놀라운 은사들도 적어지게 되었을 때 나타났다. 이때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났으며 따라서 예언들도 의심받게 되었다. 교회는 안이한 형식주의에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초기의 영적 생명력은 결핍되고 경직성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몬타누스파는 이러한 경향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반발(반동)으로 나타났다. 이 운동은 156년 프리기아의 몬투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열광적인 부흥운동을 시작하였다. 후에 카르타고의 교부 터툴리안이 이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분리되었다.

몬타누스파가 주장하는 진리(교리)는 거의 당시 가톨릭 교회와 같았으며 소위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특별한 주장을 하는 것이 없었다. 성경의 모든 책을 다 정경으로 인정하고 전통적인 신앙 고백들을 다 굳게 지켰다. 그들은 뿌리를 정통 기독교에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노시스파와 그밖의 여러 가지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 내의 진보적 사상들을 막고 초대 기독교를 부흥시키려는데 그 목적을 가지고 생겨난 것이었다.

몬타누스파는 신앙보다 지식을 강조하는 사상을 특히 반대하였으며 엄격한 규율을 실시하여 교회의 규율 문란으로 인한 신자들의 도덕적 타락을 막으려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예수께서 속히 오셔서 천년왕국을 건설하시리라는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 안에 계급제도가 생기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교사와 교역자의 자격과 임명은 안수나 감독의 임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의 뜻에 따라 직접 맡겨 주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주의(萬人祭司長主義) 원리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 바로 몬타누스파이다.

또 이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시하여 금욕과 고행을 장려하였으며, 재혼을 금하였다. 여자의 사치스런 의복을 금하고 처녀는 너울을 쓰도록 하였다. 또 세례 후 범죄는 무서운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두 번째 회개(세례 후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박해 때 숨는다든지 도망하는 것을 정죄하며 변절했던 사람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 세례를 칭송함으로써 장려했다.

 

② 노바티아누스파

노바티아누스파가 생긴 것은 디키우스 황제(249-251)의 심한 박해 때 교회 안에 많은 변절자들이 생겨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해가 지난 뒤 변절했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다시 들어오려고 하였을 때 로마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로 의견이 갈라졌다. 대부분의 로마 교회 지도자들을 비롯한 서방 교회의 감독들과 동방 교회 감독들은 변절자들에 대해 관대히 대했다. 그러나 노바티아누스는 이들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다툼이 생기게 되어 노바티우스는 한 분파를 세우게 되었다. 로마 감독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진 후 노바티아누스를 파면하고, 변절자들을 적당히 회개시키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노바티안파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을 배반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로서 이 세상에서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범죄자는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밖에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나 살인, 음행 등의 죄도 중죄로 간주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혼도 실질적 간음으로 보았다. 교회들은 이들을 분파주의로 정죄하고 그들의 행위가 교회의 질서를 문란시키고 분열을 일으켰으며 이단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과 기존 교회들 사이에 생긴 간격으로 파문을 당하고 분파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주장을 끝까지 고수하였으나 7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③ 도나투스파

도나투스파는 4세기 초, 곧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가 끝날 무렵에 일어났다. 이 파는 일찍이 몬타누스파와 노바티아누스파가 가지고 있던 청교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도나투스파가 직접 생긴 원인은 박해 기간 중에 강압이나 두려움에 의해 성경을 버리거나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는 교회는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범죄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떠난 교회이므로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저지른 지도자들로부터 세례를 받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대부분의 감독들은 관용 정책을 써서 박해시에 범죄한 자들을 비호하고 반대로 도나투스파와 같은 강경론자을 탄압했다. 그래서 강경론자들은 새 감독을 세웠는데 316년에는 도나투스가 카르타고의 강경론자들이 세운 새 감독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되어서 카르타고에는 두 사람의 감독이 있게 되었고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그후 약 100년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발전하여 로마 제국의 다른 지방에도 전파되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에게 자기들을 보호하고 후원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콘스탄틴은 처음에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자 도나투스파는 더 광신적인 열정으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러자 콘스탄틴은 태도를 바꾸어 321년에 그들에게 완전한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주는 새 법을 선포했고 가톨릭에 대해서는 인내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권고했다.

도나투스파는 우선 엄격한 교회 규칙의 적용과 교인의 순결 유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고 세속적인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것을 절대 반대했다.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자가 간섭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러나 제도는 가톨릭적인 감독 정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도 가톨릭의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 세례에 의한 중생 곧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인정했고 유아세례도 시행했다.

몬타누스나 테르툴리아누스, 노바티아누스, 도나투스 같은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이단이나 말썽꾼들이 아니며 교회가 바른 길로 나아갈 것을 염원하며 그렇게 될 수 있는 나름대로의 행동 원칙을 가지고 교회의 개혁을 시도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탁월한 이들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언제나 개인주의적 편협함과 고집, 완고함 등이 부분적으로 작용하여 종종 광신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그들이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오류를 범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이들이 보다 폭넓고 명철한 판단을 하여 개혁을 균형 있게 진행했더라면 오류들은 줄어들었을 것이며 그들의 활동은 교회 생활과 신앙 사상의 개혁과 발전에 훨씬 더 큰 유익을 남겼을 것이다.

 

(11) 성경의 편집과 신경(信經)의 작성

 

1) 신약 성경의 편집

최초의 복음서는 적어도 주후 60년 경에 가서야 쓰여졌다. 이 기간을 전후로 하여 바울의 서신들이 기록되었고 그보다 후에 요한이나 기타 사람들의 서신들이 기록되었다. 1세기 말엽에 가서 바울의 서신들이 최초로 한 데 모아졌다. 2세기 중엽에는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모아졌다. 요한복음은 얼마 있다가 공인을 받았다.

오늘날의 신약 성경은 속사도 시대 동안 편집되고 확정되었다. 유스티누스의 글에 의하면 일요일의 모임 때 예수님의 언행을 읽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의 복음서였을 것이다. 유스티누스의 제자 타티아누스가 사복음서를 종합하여 한 줄기의 전기로 만들어서 <데아테사론>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160년 전후의 일이다. 사도의 서신을 복음서와 같이 성경의 일부로 취급한 최초의 사람은 그노시스파의 마르키온이다. 마르키온은 주후 140년 경에 최초의 정경 목록을 내놓았는데 여기에는 완전치 못한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중 10개만 포함되어 있었다. 마르키온은 그의 잘못된 사상 때문에 구약 성경을 일절 배척하고 성경을 오직 복음서와 사도 서신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처럼 마르키온의 정경 형성 작업은 그노시스파가 사도들의 이름을 붙인 자기들의 복음서와 묵시록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일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올바른 정경 형성 작업을 촉구하는 자극이 되었다. 이와 함께 몬타누스파의 예언으로 말미암은 소위 '새로운 계시'의 등장도 정경 형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세기 말에는 소위 사도들의 '행전'들이라는 책이 몇 가지 나왔는데 여기에는 누가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사도들의 선교 활동 내용이 들어 있었다. 거기다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빌라도의 생애에 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몇 가지 복음서들도 나왔다. 이런 책들은 기독교 소설에 가까운 책들이었다. 특히 이런 책들은 가현설자나 결혼을 거부하는 주장을 하는 일부 이단들의 주장을 널리 퍼트리는데 기여했다.

2세기 말에 기독교 저술가들은 교회가 공인한 책을 모두 밝힐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오직 네 권의 복음서가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무라토리 단편>으로 알려진 최초의 정경 목록은 일반적으로 주후 200년 경 로마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1740년 이탈리아의 역사가 무라토리가 밀라노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인데 첫 부분은 분실되었으나 남은 부분에는 네 권의 복음서와 바울의 13개의 서신서들 및 사도행전과 요한의 두 서신, 유다서와 요한계시록, 솔로몬의 지혜서, 그리고 공인이 유보된 베드로 묵시록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전후서와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삼서는 빠져 있었다. 1세기의 교부 로마의 클레멘트는 이미 히브리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었다.

페시토라는 성경도 있는데 2 세기 중엽 이전에 에뎃사에서 만들어진 시리아역 신약 성경이다. 그 안에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의 13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요한1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요한 2, 3서가 추가되었다. 이레네우스는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3서를 인용하지 않았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빌레몬서, 요한2,3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2,3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유스티누스 시대 즉 150년 경에는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을 합한 신약 성경이라는 것이 일반 교회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시대에는 이미 그것이 있었다. 지금의 신약 성경은 짧은 시간 동안 급속히 형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2세기 말 경에는 오늘날 신약 성경에 수록된 문서의 대부분이 이미 성경으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에 아직도 성경으로 승인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2,3서,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이었다.

3세기 초까지 정경의 주요 목록에 대해 전교회적인 의견 일치가 이루어졌지만 몇 권의 책은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서방교회는 히브리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몬타누스파가 히브리서 6장을 배교자들의 회심을 거부하는 근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 요한계시록은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책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천년왕국론을 반대하는 동방교회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4세기 초까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된 책은 베드로후서, 요한 2서와 3서, 유다서였다. 요한계시록도 어떤 사람들에게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결국 367년에 신약 성경 27권을 정경으로 확정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또한 정경에 들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신앙 문서로 평가된 <디다케(열두 사도의 교훈집)>와 <헤르마스의 목자서>는 교회에서 읽을 수 있는 책으로 허용되었다. 정경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유익한 글로 인정된 또 다른 책은 <클레멘트 1서>와 <바나바 서신>이다. 그밖에 시리아 교회는 수 세기 동안 타티안의 <디아테사론(사복음서의 기사를 한 권으로 간추려 놓은 책)>}을 네 권의 분리된 복음서 대신 사용했다. 후에 시리아 교회는 요한계시록을 거절하였고 히브리서 등 공동 서신들의 권위를 낮게 평가했다. 그러다가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모든 책을 인정하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 정경이 확정되고 공인된 것은 393년의 힙포 공의회와 397년의 카르타고 공의회에서였다.

 

2) 사도신경의 형성

교회가 그노시스파 등의 이단 종파들과 투쟁하는 동안 교회에는 세 가지 산물이 형성되었는데 첫째는 신경이고 둘째는 교회법, 셋째는 조직이다. 이 중 신경(信經;Creed)은 라틴어 'credo'(나는 믿는다)에서 유래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교훈을 집약하여 하나의 신앙고백 형태로 만든 것으로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을 정해 놓은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회 복음의 유일성을 의미하며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적 전승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중 유력한 설은, 초대 교회 당시 세례식을 거행할 때 세례주는 사람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이것을 받는 수세(受洗) 후보자는 먼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 고백이 점점 일정한 형식으로 되어서 오늘날의 사도신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의 사도신경과는 같지 않은 듯하다. 그후 교회에 아리우스, 그노시스파 등의 이단이 일어남으로써 정통 교리를 표시할 만한 문구를 넣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전문(全文)이 완성된 듯하다.

 

(12) 로마 교회

2세기 말 교회에서 나타난 현저한 두 가지 현상은 첫째, 지역 교회에서 성직제도가 거의 확립되어 감독(주교, 목사)의 역할과 권위가 다른 신자들에 비해 크게 신장된 것이고, 둘째, 다른 지역 교회들에 비해 로마 교회의 역할과 권위가 크게 신장된 것이다. 이그나티우스나 폴리갑은 그런 감독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이제 교회의 여러 은사자(직분자) 중 하나가 아니라 초대교회 때 성령께서 담당하셨던 역할을 대신할 정도의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그나티우스는 말하기를 "감독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지역교회에서 감독이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처럼 로마교회도 다른 모든 교회들 중에서 이런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온 세상 모든 교회의 감독과 같은 위치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로마교회의 비중이 이렇게 커진 것은 바울과 베드로가 거기서 순교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마 제국의 수도에 있는 교회로서 실제로 모든 면에서 다른 교회들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큰 교회였지만 100년 경에 이르러서는 로마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93-97년에 로마교회의 이름으로 고린도교회에 보낸 클레멘트의 편지에는 형이 아우에게 말하는 어조로 고린도교회의 순종을 요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로마교회는 부유하였으므로 규모가 큰 자선 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으며 유력한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많은 교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2 유대전쟁(135년)이 일어나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된 후에는 세상 어디에도 로마와 지도권을 다툴 교회는 없게 되었다. 로마는 영지주의, 몬타누스파와의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거기서 사도신경과 신약 정경이 결정되었을 뿐 아니라 서방에서는 사도들과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교회가 로마교회뿐이었기 때문에 이단에 반대하는 모든 교회들이 로마교회의 지도를 바랐다. 이레니우스는 185년에 쓴 그의 글에서 모든 교회는 베드로와 바울이 세운 로마 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초기의 교부들이 그런 주장을 한 것은 로마교회가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다른 교회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교회라고 믿었다.

로마교회가 왕성할 때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약해졌다. 2세기에는 소아시아, 시리아가 제국 판도 내에서 가장 기독교화 되어 에베소, 안디옥이 유수한 기독교 중심지였다. 로마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들 간에 부활절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로마 교회의 주장은 소아시아 교회들의 주장을 이기고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소아시아 지역에서조차 로마 교회의 위상은 견고하게 되었다. 유대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지도력 쇠퇴와 2세기 안디옥 교회 및 소아시아 교회들의 쇠퇴로 말미암아 200년 경의 로마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로마의 감독은 감독들 중 가장 우월한 위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로마의 감독은 교황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3세기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큰 우위를 나타내고 있던 알렉산드리아나 카르타고 같은 북아프리카의 도시들도 제국의 수도 교회인 로마 교회의 지도권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13) 속사도시대의 생활상

이 시대에 이르러 성경과 신조가 교회의 내부적 통일의 핵심이 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 정치는 점점 조직화되게 되었다. 유능한 지도자와 경제적 풍부함을 지닌 대도시에는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이들 대도시 교회들은 많은 신자들을 갖게 되었다. 또 이 시대에 이르러 교회는 구원의 구심점으로써 확고히 그 위치를 세우게 되어 '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감독의 권위에 있어서는, 초기에는 사도시대와 마찬가지로 감독과 장로가 일반 신자와 다르다는 사상이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감독이 권력이 커지게 되었으며 모든 힘이 감독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회를 대표하는 지위에 섰으며 가르치고 예식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특히 박해 시기에는 흔들리는 신자들과 교회를 이끌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감독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이리하여 점차 감독은 사도의 직분과 권위의 후계자라는 사상이 발달하였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는 감독에 의하여 설립되어야 하고 감독 없이는 교회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당시 이미 감독이 교회의 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의 세계적인 대 회의는 없었다. 다만 각 지방의 대회는 있었는데 3세기 들어서서 도시를 중심으로 지방 대회가 열렸다. 카르타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에서 지방 대회가 열렸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초기에만도 미디아, 알렉산드리아, 스페인의 엘베리스, 고올의 아를르에서 대회가 소집되었다.

교회를 잘 이끌기 위해서는 직원도 필요하였다. 속사도시대 초기에는 감독과 장로가 직제의 중심을 이루었는데, 감독은 공식적으로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으며, 장로는 감독이 임명하게 되어 있었으나 회중들 앞에서 동의를 얻어 감독이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점점 교회 조직이 정비되어 감독 1명에 여러 명의 장로로 구성된 장로단(長老團) 또는 수십 명의 집사로 구성된 집사국(執事局)이 있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3세기 후반에 와서는 이 조직이 더 세분화되어 안수직(按手職)인 감독과 장로단 그리고 비안수직인 집사 외에도 이들을 보조하는 하급의 직분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부(副)집사, 시송악사(詩誦樂士), 귀신쫓는 자, 성경낭독자, 회당지기, 노래하는 사람 등이었다. 감독은 지방 교회 평신도들이 선거로 선출하였고 3명의 인근 감독이 안수하였다. 장로와 집사는 교회와 교직자들이 선출하였는데 감독이 안수하였다.

1세기 말에 처음 시작되어 2세기와 3세기를 거치면서 키프리아누스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발달한 감독제도는 차츰 세력이 커지고 통일화되어 드디어는 세계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 정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황 정치에 있어서는 감독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그 중에서도 특히 로마 감독 곧 교황은 다른 모든 감독들보다 우위에 서며 오류가 없는 절대자라고 주장되었다.

로마 각 주의 대감독구 도시의 감독들은 다른 감독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이것은 교직제도를 세우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감독(Archbishop)이란 말은 이런 특별한 대도시에 있는 감독들에게 일찍부터 쓰였던 것인데 나중에는 이것을 대주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시기의 중요한 대감독은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에 있었으며 얼마 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도 대감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목사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재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감독은 교회 정치의 수반으로서 행정을 관리하였고 집회와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설교를 하였고 종교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장로는 일반적으로 예배에 관련된 일들을 관리하였고, 안수례를 행하였으며 신자들을 교육하였고, 종교 회의에서 감독의 상담 역할을 맡아 행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집회는 초기에는 개인 집에서 모이거나 셋집, 혹은 회당 등에서 모였으나 약 3세기에 이르면서부터는 별도의 건물을 지어서 가졌다. 회당은 직사각형 모양의 본당과 강단을 갖추었다. 모임은 주일(일요일) 집회(예배) 외에 주간 중에도 모였다. 집회에서는 사도들의 언행록과 선지자들의 글을 비롯한 성경을 읽었고 다 읽고 나면 회장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말을 했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도 있었으며 성찬도 매주 행했던 것 같다. 자원에 의해 바쳐진 헌금은 보관하였다가 고아와 과부, 병들어 곤궁한 자, 옥에 갇힌 자, 나그네와 유랑민 등을 구제하는 데 쓰여졌다. 일요일에 모임을 가진 것은 그 날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날(첫날)이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었기 때문이다.

찬송가로는 시편과 이사야 6장, 누가복음 1:46-2:29, 마태복음 21:9 등을 불렀다. 더러는 찬송가는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지금 남아 있는 찬송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지은 것이다. 설교는 처음에는 단순하였으나 갈수록 정교하고 복합적인 것이 되었다. 처음에는 성경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말하는 정도였으나 나중에는 설교를 통해서 생활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목적과 아울러 (거짓 사상과 이단들의 발호로 인해) 성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설교가 웅변적이고 교리적이며 짜임새 있는 글처럼 되어갔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예전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서 세례 외에도 각종 절기를 지켰다. 세례의 경우 세례 받으려는 사람에게 기도와 금식, 죄 용서를 간구하는 것을 치며 2년간 준비 기간을 가지게 했다. 세례는 주로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침례를 행했다. 세례는 축일에 행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부활절 전날 밤에 많이 행했다. 또 찬성과 반대 양론 속에서 유아 세례도 실시되었다. 키프리아누스는 출생 후 되도록 빨리 세례를 베풀 것을 권했으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어린 아이의 세례에 반대하여 성장 후로 미룰 것을 권했다. 그러나 라틴 교회는 전반적으로 유아 세례를 시행했다.

절기 중 큰 절기로는 부활절이 있었는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날짜가 달랐다. 동방은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은 날 즉 니산월 14일을 부활절로 지켰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신 사실을 중시하여 유월절에 해당되는 일요일 즉 춘분 후의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켰다. 일자를 통일하기 위한 동방과 서방 간의 논의가 계속 되어 마침내 325년 니케아 회의 때 일요일에 하기로 결정되었다.

부활절 전 일 주일은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여 금식을 하며 경건하게 보냈다. 로마에서는 주님이 40시간 동안 무덤에 계셨던 것을 기념하여 40시간 동안 금식과 철야 기도를 했다. 이 40시간은 나중에 니케아 회의(325년)에서 40일로 변해 사순절(四旬節)로 정해졌다. 부활 주일 전야에는 세례식을 거행했으며 세례를 받은 이들이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도록 했다. 부활 주일 새벽에 모든 금식이 끝나고 즐거운 오순절이 시작되었다.

부활절 후 50일간은 환희의 때로서 매일 만찬식을 행했고, 제40일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고 제50일에는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의 강림을 기념하였다. 이 시대에는 아직 성탄절의 풍습이 없었다. 헬라 교회에서는 예수의 세례 받으심과 그의 나타나심을 축하하여 1월 6일에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라는 축하 행사를 했다. 서방 교회에서 나중에 성탄절이 시행되자 주현절의 성질이 달라직 되었다.

당시 교회는 형제 사랑에 크게 힘을 썼고 특히 로마의 박해가 심할 때는 더욱 일치단결하여 서로 돌보았기 때문에 당시의 로마 감독 우르바누스 1세(223-230년)는 로마 전체에는 그리스도인 거지는 단 한 명도 없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3세기 중엽에 로마 교회는 1500명의 과부와 그밖에 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시리아, 아라비아, 갑바도기아에까지 구제금을 보내기도 했다.

정절을 중히 여기는 정신은 종종 다소 소극적이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났다. 초대 교회는 결혼의 정당성과 소중함을 인정했으나 이 시대에 와서 결혼은 정욕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독신자(獨身者)가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재혼은 더 좋지 않게 생각되었다. 306년 스페인의 엘베리스에서 개최되었던 지방 대회에서는 이혼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는 교회에서 추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교직에 있는 자는 독신이 좋다는 사상이 점점 널리 퍼지게 되었으나 강제적 규정으로 정해지지는 않았다. 독신자들이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은 아직 이 시대에는 없었으나 번잡한 세상 생활을 피하여 혹은 박해를 피하여 산과 들로 나가서 은둔 생활을 한 사람은 더러 있었다.

이 시대에 신자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일반적으로 중히 여겨졌으며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금식을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또 순교자들에 대한 존경은 특별하였다. 그리하여 2세기 중엽부터는 이들의 유물이 존중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무덤에서 이적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교회는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각 순교자들의 순교일에 성만찬식을 행했으며 3세기 초부터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헌물을 바치기도 했다. 순교자 다음으로는 박해를 받을 때 신앙을 굽히지 않은 수절자(守節者)가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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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 전 니케아 시대

군주적 감독직 발생

 

배교의 어두운 과정이 접어든 후 로마 카톨릭교회로 나아가는 모습을 여기에서 보게 될 것이다. 배교는 계속해서 일어났다. 사도들의 시기에도 교회는 배교의 모습을 직면했다(20:29-30; 39-10). 사도들이 떠난 후 배교는 수없이 일어났다. 후기 사도적 교회 역사초기시대는 핍박으로 시작했다. 1세기말에 이르러 로마정부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 정책을 정착시켰다. 핍박은 2-3세기에 걸쳐 간헐적으로 일어났지만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발표된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으로 끝났다. 하지만 교회를 위해 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놀라운 발전도 있었다. 후기 사도적 교회역사 초기시대를 가리켜 전 니케아시대”(Ante-Nicene Age)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최초의 교회 종교회의였던 니케아 종교회의 전 시대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 회의는 소아시아 니케아에 325년 콘스탄틴에 의해 소집되었다.

 

군주적 감독직 발생

 

처음으로 배교가 교회에 일어났던 형태는 조직화의 타락에서였다. 조직화 타락에서 일어난 처음 단계는 여러 세기동안 진보하면서 무오류 교황이라는 직책으로 변화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군주적 감독직’(monarchical episcopate)-군주적이란 의미는 한 지배’(one-ruling)를 의미하고 감독직이란 감독의 직책’-이라 부른다. 이런 군주적 감독직이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가능한 설명은 후기 사도적 시대에 시작했을 것으로 여긴다(20:29-30; 39-10). 교회 조직에 일어난 이런 변화는 2세기 첫 분기에 어디에선가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디옥 군주적 감독이었던 익나티우스(Ignatius, 10-117)는 소아시아 7교회들의 군주적 감독들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적 시대에 장로들’(presbyters)감독들’(bushops)은 서로 각 교회를 감독하는 남성들에 사용되었던 명칭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장로가 다른 장로보다 더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감독이란 직책이 그에게 주어졌다. 2세기 초 이러한 변화가 모든 교회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고 군주적 감독의 권위는 지역적이었지만 160년에 이르러 군주적 감독직은 거의 우주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의 개념은 감독들이 사도들의 역할, 권위, 그리고 책임들을 계속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감독직 개념과 연관을 가지면서 위대한 능력과 신적 권능이 주어졌다. 어떤 역사가들은 강력한 감독직 발전은 이단이 발생하므로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요구된 권위를 집중하는데 제도화되었다고 한다. 지역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신약성경적 표현을 볼 수 있다: “poimen pastor shepherd”(4:11); “presbuteros presbyter, 장로와 나이 든 자”(11:30); “maturity and experience”(god 14:23; 20:17); “episkopos bishop overseer, supervisor”(1:1; 20:28).

 

사도적 교회에 발전된 것과 비교하여 감독직책에 관련하여 성경은 세 가지로 결론 내린다. 먼저, “장로”(elder), “감독”(bishop), 그리고 목회자라는 세 용어는 모두 같은 직책을 교호적으로 사용했다(20:17l 28; 1:5, 7; 벧전 4:11). 장로들이 목회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교회의 여러 공직자들이 교사들과 복음자들이 언급될 때 장로가 어떻게 생략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차이점은 같은 직책에 다른 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신약성경 교회는 장로가 있는 것으로 언급할 때마다 장로는 한 장로한 목회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은 지역교회가 항상 장로들의 다수들이 있다고 한다. 주님께서 한 사람이 지역교회의 최고의 감독자로 격상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만일 지역교회에서 조차 그런 일을 원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우주적이나 전체적인 지도력을 한 사람이 갖을 수 있을까? 세 번째로 한 장로의 권위가 지역교회를 넘어 영향을 끼친다는 지침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떼들을 이끄는 사람들로서 성령이 그들에게 감독자로 세우셨던 것이다(20:28).

 

교회 핍박

2세기초에 이르러 교회는 시리아, 마게도니아, 그리스, 이집트, 그리고 로마 지역에 잘 설립되었지만 소아시아에 가장 활발했다. 하지만 정부적 차원의 반대를 직면했다. 교회는 이미 네로(54-68)와 도미티안(81-96) 시대에 핍박을 겪었다. 그러한 핍박들은 고대사회에 교회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로마정부는 기독교인들에게 악감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거나 경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에 대한 악감은 무신론자라는 고소들에서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통적인 신들을 부인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이 방종하다(licentiousness)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야에 몰래 예식을 행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식인종(cannibalism)이라 보았는데 그 이유는 성찬에 대해 오해를 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배타적인 사상에 대해 미움을 받았다. 그래서 핍박이 2세기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소와 핍박에 대해 변증자들’(apologists)-apologia라는 그리스어는 변증을 의미하는데-이 일어나 로마 지도자들 앞에 복음과 교회를 철학적으로 변호하려고 노력했다.

 


초대교회사 : 전 니케아 시대 - 영지적 이단들

영지주의

교회 내에 오래 지속된 교리논쟁들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된 질문이다. 신약성경의 뒷부분의 책들은 1세기말 전에 벌써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거짓된 개념들이 일기 시작했다고 가르친다. 요한서신들은 특별히 이런 맥락에서 오해된 개념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처럼 보인다(요1서 1:1-3; 2:18, 22; 4:2-3).

교회가 직면한 두 번째 교리적 위기는 영지주의(Gnosticism)였다. 영지주의의 기원과 성격은 신비에 싸여있다. 아마도 종교철학의 분야로 분류되기도 한다. 영지주의는 교회가 세상에 있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만 어떻게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영지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용이치 않다는 이유 중 하나는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유대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이들과는 전혀 다른 종합체로 변했기 때문이다. 또 시대를 지나면서 다른 형태로 발전하고 진화되었다. 그래서 2세기 교회가 직면한 영지주의는 3세기의 것과는 자뭇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지주의는 동방에서 일어났고 2-3세기 교회에 큰 도전을 주었던 것은 틀림없다. 영지주의는 135-160년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끼쳤다.

 

‘영지주의’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영지’(gnosis, 지식)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지만 영지주의가 변호하는 지식은 연구나 관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지혜를 의미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은 ‘pleroma’라 부르는 빛의 영적 세계에서 최고의 머리이다. 이 세상의 어떤 파편들이나 빛의 씨앗들이 어둠과 악의 보이는 세계로 떨어져서 갇히게 되었다. 이렇게 갇힌 빛의 ‘광채’(sparks)는 사람 안에 거하고 빛의 영역으로 재통합되거나 회복되어야만 한다. 회복의 수단은 그리스도가 계시했던 ‘지식’으로 말미암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지식’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단지 보이는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거나 영적 참된 실체들과 교재를 하므로 가능하다.

 

영지주의자들은 보이는 육체적 세계가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믿었다. 오직 ‘영’(spirit)만이 선하다. 물론 어떻게 세상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문제를 풀기 위해 영지주의자들은 ‘영’이란 것을 사용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이시다면 전적으로 선하신데 어떻게 하여 그가 육체적 세상과 같은 악한 것을 창조하실 수 있었을까(How could He have created . . .)?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높으신 하나님은 육체적 세상을 만드신 유일하신 분이셨다는 것을 단순히 부정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육체적 세상간에 공간을 메우는데 ‘이온들’(aeons)이나 천사들의 많은 계급에 대한 견해를 도입한다. 이온들중 가장 높은 것은 물질(matter)과는 완전히 분리된 것이지만 사람과 육체적 세상보다 낮은 계급에 있는 물질은 전적으로 물질적이다. 하나님과 육체적 세상간에는 수많은 영적인 것(spirituality)이나 유형적인 것(corporality)의 이온들의 많은 계급들이 있었다. 이러한 이온들 중 하나가 ‘조물주’(demiurge), 즉 불완전하고 열등한 존재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세상을 창조했다. 영지주의자들을 역시 ‘조물주’를 유대인의 하나님과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동일시했다. 신약성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높으신 하나님이시다. 육체적 세상에 대한 영지주의적 견해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육체적인 것은 모두 악하기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올 수 없다고 결론 맺는다. 이러한 문제는 ‘가현설’(Docetism, 그리스어 ‘dokeo’는 ‘seem’의 뜻)으로 재분류되어갔는데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실제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육체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허깨비(phantom)이거나 유령과 같은 것(ghost-like apparition)으로 영지주의는 말한다(눅 24:36-43). 이러한 설명은 요한의 저서들(요1서 1:1-3; 4:2-3; 2서 7)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설명을 강조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어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세례를 받을 때 인간 예수님으로 오셨고 인간 가운데 거하셨다고 믿었다(요1서 2:18, 22).

 

영지주의자들의 윤리는 이러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나아갔다. 육체는 악하기 때문에 반드시 학대를 받아야만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고행(ascetism)으로 육체를 학대한다. 다시 말하면, 육체에 필요한 육체적 안위조차도 자기 부정한다(딤전 4:1-5; 골 2:20-23).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와 영이 완전히 구분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각 실체들은 다른 길을 걸어야만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지 말아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으로 인해 육체의 방종(indulgence)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신약성경 저자들에 의해 날카롭게 공격을 받았다(딤후 3:1-7; 벧후 2:1-2, 12-19; 요1서 3:4-10; 유 4, 8, 16; 계 2:14-15, 20-24).

 

말키오니즘

말키온(Marcion)은 소아시아 출신으로 139년 로마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했고 마침내 144년 출교를 당했다. 말키온의 영지주의는 전적으로 반 유대적이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사악하고 잔혹했다. 그리스도는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계시했다. 바울은 복음을 신실하게 이해했던 유일한 사도였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유대주의 사상에 젖혀있었다. 구약성경과 그 하나님은 전적으로 부인되었다. 고행적 삶은 따르는 자들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말키온은 분파를 조성하고 성문서들의 정경화를 시도했다. 그가 말하는 정경은 바울의 10서신들과 누가복음이며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부친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모든 구절들을 삭제했다. 말키온의 추종자들은 5세기까지 살아남았다.

 

몬타니즘

몬타니즘(Montanism)은 영지주의의 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말키온 시대 이후에 나타났으며 소아시아 출신 몬타누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교회 내에서 일어나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교회 내에서 사라졌고 세속화가 점점 만연해갔다. 결과적으로 몬타누스는 156년에 일어나 자신이 성령의 도구라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보내신 성령을 보내신 그리스도의 약속을 주장했다(요 15:26). 과도한 예언을 주장하는 몬타누스는 세상의 임박한 종말, 성령의 시대의 종말을 예언하면서 하늘의 예루살렘이 프리기아(Phrygia)에 세워질 것이기 때문에 고행만이 이 시대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소아시아 감독들은 종교회의 개최하여 몬타니즘을 정죄했지만 교회 내에 만연했던 세속화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이었고 그 운동은 몬타누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수년동안 계속되었다.

 

 

카톨릭교회

 

‘교회’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기본적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므로 구원받은 온 세상 사람들의 총체(aggregate)”를 의미한다(마 16:18; 행 2:47; 엡 1:22). 다른 하나는 “예배와 영적 사역의 목적을 위해 함께 지리적인 영역에 특별한 모임을 갖는 사람들”을 말한다(롬 16:16; 고전 1:2; 계 1:4, 11). 그래서 교회는 ‘우주적’이고 ‘지역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 교회가 ‘카톨릭’이 될 수 있을까? 교회의 ‘단일성’(oneness)을 어떻게 말할 수 있나? 모든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몸이라는 요소는 공통적인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의 단일성이라할 때 본질상 ‘교리적(doctrinal)’이다. 우주적 교회는 조직체가 아니라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각 성도는 우주적 교회의 한 일원이며 다른 일원들과 관계를 가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우주적 교회의 구성인은 기독교인 각자들이지 지역 회중이 아니다(고전 12:27).

사람들은 2세기의 사람들처럼 이러한 개념들을 망각하기 쉽다. 먼저 사람들은 우주적 교회의 개념을 개인적 기독교인들보다 다양한 지역적 회중들로 구성하는 것처럼 가진다. 형제의식은 지역교회들(church-hood)의 연합이 되었다. 그리하여 지역 회중들에 대한 개념을 집합적인 활동(collective work)이라 여기기 쉽다. 이런 개념으로 나아가면, 교회의 일원들과 지역 회중들은 스스로 공통적 신앙과 관계를 가졌다기 보다 서로 조직적 연합체로 인식하게 된다. 기원적 단일성과 연합적 활동은 회중 내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서로의 협력을 전재한다. 2세기 군주적 감독들은 회중 내적 지도자들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교회는 공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감독들의 권위를 전제하는 기독교인들의 유기적 단일체로 인해 ‘카톨릭’이 되었다. 영지주의적 그리고 몬타니스트적 위가로 인해 교회는 ‘카톨릭화’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단자들과 분파자들(schismatics)에 대해 교회는 참 교회와 신앙을 정의하고 스스로 보호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역 교회들은 회중 내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 것이다.

 

‘카톨릭’교회의 발전과 특성

1. ‘보이는 교회’와 ‘보이는 계승’--참 교회가 사회적으로 그 정체성이 명시될 수도 있고 교회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지속적인 계열들이 역사 속에 더듬을 수도 있다. 참 교회가 항상 일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도 된다. 단순히 ‘종파’(sect)는 참 교회가 될 수 없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성경을 축소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가르치며(요 17:17) 교회에서 일어났다(눅 8:11). 교회가 진리라는 카톨릭 교회 개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그러면 진리는 교회가 말하는 것이 되고 만다.

2. 교회만이 성경의 해석하고, 성경의 보고며, 소유자이다--이러한 개념은 위의 개념에서 계속해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교회가 항상 참 교회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질 것이다. 그리하여 각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지 말아야 하고 단순히 교회가 말하는 성경 말씀만을 순응해야만 한다.

 

3. 감독 권위의 확장-군주적 감독들, 즉 특별히 사도시대동안 설립된 사도적 교회들의 감독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들로 여겼다. 영지주의자들이 전해 받은 비밀적 구전들을 사도들로부터 받았다는 영지주의적 주장에 대해 리용의 감독 이레니우스(Irenaeus, c. 142-200)는 사도적 가르침은 사도적 터전 위에 세워진 교회들에 온전히 보존되었거나 아니면 그들의 감독들에게 맡겨졌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것이지 구전으로 감독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다. 또 사도들의 교리들과 권위들이 감독들에게 영속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은 믿음을 정의할 수 있는 사람들임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감독들이 정의내리는 신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단자들이고 분파자들이었다. 믿음을 정의내리는 감독들의 권위에 일치하지 않으면 출교를 당하게 되었다.

 

로마교회의 발생

1. ‘사도적’교회--바울이 두 번이나 나타났기 때문에 로마가 다른 감독지역보다 우위에 있다. 베드로가 말년에 로마교회 감독으로 사역했다고 믿는다.

2. 제국의 수도--로마교회의 우위성은 로마제국의 정치적 활동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3. 동방교회들의 축소--에베소, 안디옥, 그리고 예루살렘과 같은 동방교회들이 소아시아 유대인-로마 전쟁과 몬타니스트 갈등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 동방교회들의 공백을 로마 교회가 메웠다. 200년에 이르러 로마는 가장 영향력있는 교회가 되었다. 로마의 성장하는 권력은 부활절 논쟁에 잘 반영되었다. 그 논쟁은 너무나 격렬했기 때문에 종교회의들(synods)은 그 문제에 대해 로마와 팔레스타인에서 개최되었다. 이런 종교회의들은 로마예전을 따르기로 했고 소아시아 교회들이 따르기를 거부하자 로마의 감독 빅토르(Vinctor, 189-198)는 그들을 출교내렸다.

 

 

단일신론

 

기독교인들의 논쟁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인격, 본성, 그리고 사역과 관련된 논쟁만큼 오래 동안, 잔혹하게, 해결되지 않은채 진행된 것은 일찍이 없었다. 이러한 논쟁들은 기독론(Christology)으로 알려진 신학으로 발전해 갔다.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것으로 삼위일체론 안에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말한다. 다양한 기독론적 견해는 수세기 동안 채택되고 변호되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의 인격, 본성, 그리고 사역에 대한 개념이다. 그래서 이런 주제들에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하고 그 확신 속에 거해야만 한다.

 

 

세 가지 기독론

 

1. 로고스 기독론--
‘로고스’(logos)라는 헬라어는 말씀으로 번역되는데 하나님을 육체 모양으로 나타내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데 요한이 사용한 단어이다(요 1:1, 14; 요1서 1; 계 19:13). ‘로고스’ 기독론은 한 분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이시라는 주장이다. 성부와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산되기 때문에 그들은 성부에게 종속해 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지셨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성육신하기 전, 동안, 그리고 후에 신성으로 존재하셨다. 터툴리안(Tertullian, c. 150-225)은 이 견해의 참피온이기 전에 190-195에 개종한 카탈지(Cathargian) 출신 법률가였다. 약 200년에 카톨릭 교회를 떠나 몬타니즘으로 수용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최초의 교회 학자였기에 ‘라틴신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2.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기독교 개념을 공격한 영지주의는 이 주제에 연구적 관심을 갖도록 자극시켰다. 공통적 신자들은 삼위일체와 다신론의 개념간의 구분을 쉽게 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대신 단일신론이나 유일신론(unitarianism)을 통해 이해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주장한다. 단인신론자들은 또 두 분파가 있는데 역동적 단일신론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양자가 되셨다는 것이다. 세례 시 그리스도나 성령, 아니면 다른 신적 권능이 그에게 임했다. 어떤 역동적 단일신론자들은 예수님에게 신적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꺼리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부활시 신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3. 양식론적 단인신론-
두 번째 단일신론자들은 한 분 하나님께서 세 가지 형태로 자신을 명시하셨다(manifestinated)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일시적 명시일 뿐이다. 3세기 초 로마에서 이런 사상을 가르쳤던 사벨리우스(Sabellius)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하나이며 같은 분이라는 것이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3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명시한 이름들에 불과하다. 성부는 구약성경의 율법수여자이고, 성자는 성육신 하신 자이고, 그리고 성령은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는 자이다. 사벨리우스는 로마에서 출교를 받았지만 북 아프리카와 동방에서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많은 논쟁이 있은 후 서방교회는 로고스 기독론을 정통으로 인정했지만 동방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 상이한 현상을 나타내었다. 기독론 논쟁은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도록 황제 콘스탄틴을 부추겼다.

 

 

 

초대교회사 성직자들의 성장

 

종교적 헌신자들은 전문적이고 평범한 일원들간에 구분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기독계에서 성직자/평신도의 구별을 의미를 말한다. ‘성직자’(clergy)는 그리스어 kleros (“lot”)라는 말로서 한 직분을 갖기 위해 어떤 사람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무엇을 제비를 뽑는다는 어원에서 나왔지만 공직을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하다가 공직을 소유하는 자(office-holder)를 의미하게 되었다. 평신도(laity)는 그리스어 laos라는 말로서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성직자는 특별히 엘리트 계급을 일컫는 말로서 평신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해 선출되고, 훈련받고, 후원받는 사람들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 이유는 두 부류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먼저 유대적이고 이교적 예전들의 경쟁 때문이다.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이 되면서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사제적 지위(castes)를 가졌다. 자신들의 위치를 격상시키기 위해 점점 카톨릭 교회의 구조에 영향을 끼쳤다. 두 번째로는 위임적 종교(proxy religion)에 대한 욕망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부족함을 느끼는 자들이 인간적 도움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개인적 종교적 책임을 벗어나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평신도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고,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해서 특별한 사람들이 해 주기를 바랬다. 세 번째로 전문적인 교회 매니저’(church manager)와 어떤 권위적 표상을 원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의무들을 대신 처리하는 자들이 필요했다. 평신도를 위해 규율들을 해석하고 가르치며 신앙을 정의하고 이단자들을 규명하는 사람이 요구되었다. 무엇을 행해야하는지 알리는 사람, 신앙을 변호하는 지도자가 요구되었다. 또 좋은 기강을 유지하고 조직체를 매니저하는 사람이 요구되었다. 네 번째로 인간적 자부심과 탐욕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성취욕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조직체들은 계급제도를 갖고 있어 성취자들에게 주어진 특권, 영광, 그리고 인정한다. 교회 내부에서도 의롭거나 부지런한 사람들이 타인으로부터 인준을 받고자하는 세속적 욕망이 생겨난 것이다. 성취자들 보다 우위에 점유하려는 욕망은 평신도가 바라는 위임적 종교와 결합되어 성직자 평신도 구분을 만들었다. 더욱이 머지않아 성직은 탐욕적이고 특권적이 되고 말았다.

 

 

성직자 평신도의 개념

공직적 수임(official ordination)-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그 어떠한 공직적, 공적 진행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상기된 자격요건을 갖춘 사람들(딤전 3; 1)은 일원들의 감독자들인 복음전파자들에 의해 임명받았다(14:23; 20:28; 1:5). 아마 그 형식은 아마도 공직을 임명하는데 가시적인 인준이었던 안수였을 것이다(딤전 5:22). 하지만 성직들은 보다 특권적이고 특수했기 때문에 공직적 임명들은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복음전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맡길 수 없었다. 감독들은 다른 회중 일원들의 감독들에 의해 지명되고 인준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고 있는 회중들에 의해 재가되거나 선출되었다. 회중적 선출들이 형식적이 되어갔다. 장로들과 집사들은 감독들에 의해 수임받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의 두 가지 계층이 생겨났다. 주류 계층은 감독들,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deacons)이다. 감독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의미하다가 점점 한 도시나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자신들만이 이적적 은사들을 소유한 자들이고 예배를 주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했다. 이 지위에 해당하는 다른 계급은 장로들(presbyterians)이었다. 처음에는 장로들과 동일시되다가 종속적이고 조언적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장로는 가끔 많은 교회들이 속해있는 한 도시의 한 교회를 돌보았지만 그 도시의 감독에게 늘 지도를 받았다. 세 번째 계급은 집사들로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데 조력했다. 공적 위치를 넘어서서 활동하기도 했다.

 

두 번째 계층은 비주류층으로 부집사(sub-deacons)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집사들에게 종속되어 그들의 일들을 조력한다. 낭독자(readers)들은 성경을 공적으로 낭독하는 자들로서 교회 저서들에 대한 책임을 맡은 자들이다. 시종직(acolytes)은 공적으로 감독들을 돕는데 있다. 귀신 쫓는자들(exorcists)은 악령을 내쫓는 사역할 한다. 선창가들(precentors)은 예배시 음악적 부분을 책임진다. 관리인들(janitors)은 교회 건물들과 뜰들을 책임진다. 교리문답자들(catechists)과 해석자들(interpreters)은 교훈과 해석을 감당한다. 여집사들(deaconesses)은 여인들 가운데 가난하고 아픈 자들을 돌본다.

 

 

교리의 변화

 

교회를 위한 조직화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후기 사도적 교회로 나아가는 가운데 교리와 예전에 있어 다른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이 신약성경의 권위적 형태를 인정하거나 따르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문제에서도 그러한 거부감이 일어났다. 배교는 교회의 한 쪽면만이 아니었다. 교회의 조직적 구조의 변화들은 변절을 조장시켰다. 권위의 기반이 신약성경과 지역교회들의 감독들로부터 전통, 군주적 감독들, 성직자들, 그리고 종교회의들로 옮겨지면서 신약성경 자체는 다가오는 변절에 대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직적 변화는 교리, 예배, 그리고 다른 예전의 변화를 위한 길을 터놓았다. 이러한 변화들은 신약성경과는 자뭇 다른 것들이었다.

 

 

 

예배의 변화

1. 예배일-사도시대에는 성도들이 예배를 위해 모였던 날은 주일의 첫날, 즉 주일이었다(20:7; 고전 16:1-2; 1:10).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는 때에도 지속되었다. 마침내 수요일 금요일이 금식을 위한 날로 구별되었다. 부활절기는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준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년중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2. 성찬(Lord's Supper)이라는 말은 성체(eucharist)로도 알려지는데 헬라어 eucharisteo감사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후기 사도적 교회에 예배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신비적 종교들,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의 예전에 영향을 받은 후 점차적으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한다(real presence of Christ)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빵과 잔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몸이다그리고 이것이 내 피니라”(26:26-29).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 요소들-빵과 포도들-안에 임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비록 이러한 사상이 완전히 여물어지기에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또 성례식인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상징으로 은혜를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사상은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죄용서와 같은 특별한 은혜가 전달된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성찬 참여에 거부당하는 것은 성직자들의 무서운 무기로 등장했다. 또 희생이 잇는데 이것은 오랜 동안 발전되면서 성찬을 준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갱생을 의미하게 되었고 점점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성직자들의 특권과 능력을 증강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이러한 일들을 감당하는 일이 중요하고 특별했기 때문에 사제들과 같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기술과 지식이 요구되었다.

 

3. 성자숭배(veneration of saints)-‘성자라는 말은 거룩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구별된 사람을 의미했다. 신약성경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자들을 말한다(고전 1:2). 하지만 그 용어가 성도들의 삶을 위해 고결함을 간직했던 몇 명의 경거난 엘리트들에게만 적용되기 시작했다. 초기 박해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을 낳았다. 성자들과 순교자들은 처음에 존경과 축하의 대상이 되었지만 갈수록 기도와 숭배의 대상으로 변했다. 그들의 유골까지도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성자숭배의 근거가 된 것이다.

 

 

세례와 죄용서

1. 세례의 문제는 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Formula-성 삼위일체의 이름들이 세례 시에 선포되어야 하느냐(28:19) 아니면 그리스도의 이름(2:38)만 언급해야하느냐는 문제였다. 후기 사도시대 예전 시에 세 이름을 부르기로 되었다. 세례 문답자(catechumens)는 세례를 준비하는 자들로서 교훈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후보자들이 교훈을 잘 받을 때까지 세례 의식은 연기되었고 적당치 않는 일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수단이 되었다. 교훈의 시기는 대개 2-3년이 되었다. Subjects에서 유아세례는 185년 이레니우스가 희미하게 언급하기 전까지는 언급되지 않았는데 유아세례는 성인들처럼 유아들이 세례를 통해 여러 유익들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주례자들(administrants)에 대한 것은 3세기 중엽 이단적 세례의 유용성에 대한 논쟁으로 뜨거웠을 때 불거진 문제였다. 여기에서 세례를 주례하는 자격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성직자들에게만 주어진 관례로 정착되었다. 비일원들은 세례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죄용서(forgiveness of sins)는 먼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들 수 있는데 오래되고 일반적 논의였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들의 수와 종류는 유동적이지만 믿음의 포기는 가장 불변의 죄가 되었다. 사면(absolution)은 핍박으로 인해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에게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비록 예전들은 다르지만 참회(penance, ‘바꾼다는 의미)와 사면(용서)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은 궁극적으로 성직자들에게 주어졌고 이러한 권한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교회와 국가

 

교회가 정치적 세력들을 경험하면서 발생한 갈등들을 겪게 된 것은 313년에 이르러 교회는 여러 면에서 신약성경이 말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로부터 방황했다. 교회가 핍박의 증오대상으로 여겨졌던 복음의 기본 원리들은 이제 공식적 관용이 허용되면서 지켜야하는 규율이 되었다. 2-3세기 교회의 이야기는 최종적 승리와 종교적이고 정치적 세력에 대한 마지막 갈등’(final struggles)의 이야기이다. 터툴리안의 유명한 문구가 기억난다: “기독교인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the blood of Christian is the seed of the church).” 비록 이 문구가 정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는 의미를 갖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씨앗이 된다는 의미로서 기독교인들의 땀, 눈물, 그리고 피에 의한 것이다(8:11). 교회는 잔인한 억압을 직면하기 시작하면서 성장했다. 복음의 성격과 복음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성격은 불신자들의 적대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딤후 3:12).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과 평화를 즐기거나 추구하면 언뜻 보기에는 교회의 타협이라고 보여진다. 신약성경은 핍박을 피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고 그것을 직면하는 법을 말해준다(5:10, 12). 문제는 교회가 핍박을 원하는 것이 아니가 그것이 요구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가장 적대적 환경 가운데서라도 번영한다는 것이 신적 본질의 분명한 증거이다. 더욱이 그 어떠한 것으로도 핍박만큼 불신앙을 제거하고, 신실한 자들을 고무시키고, 기독교인들을 연단시키는 것이 없다(1:2-4; 벧전 1:6-7; 4:12-13). 신약성경은 결코 핍박이 교회의 안녕을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는다(cf. 8:1-4; 2:8-10).

 

네로 핍박이 있기 전에 제국 내에 있는 본토인들에 대한 로마정책은 관습적 종교를 거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전향시키지는 않았을 뿐 아니라 제국 내에 새로운 종교들을 들여오는 것을 간과했다. 이러한 규율에 위배되지 않는 종교들을 종교 허용’(religio licita)이라 불렀다. 유대주의는 여기에 속했다. 로마정부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구별을 교회가 존재했던 초기에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법적 보호를 즐기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만 아니라 교회를 파악하고 난 후 기독교인들을 신흥종교며 이색종교(different religion)를 추종하는 자들로 구분했다. 황제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64년 로마 시에 일어난 방화범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것도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그 도시에 상당한 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정부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게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1) 기독교인들이 복음전파의 열정을 가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이교도들과는 달리 기독교인들은 이웃들과 함께 하기를 원했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개종시키려고 했다. 2) 옛 신들과 전통적 이교들을 부인했다. 로마제국인들이 다신 종교를 따르고 있지만 이교신들의 존재를 인정했고 다른 신앙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그들에게 종교는 단순히 개인적 문제나 관습으로 여겼다. 기독교인들은 전혀 달랐다. 유일 종교였고, 유일한 참 종교였다. 흥미 있는 것은 이교신들을 부인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atheists)로 불렀다는 것이다.

 

 

3) 기독교인들은 은둔적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삶의 모든 면에 잘 반영되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나 국가 종교에 참석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반역자들로 보였다; 기독교인들은 공직을 가지며 정치적 활동을 거부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군들에 가입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사회의 주변에 살면서 로마인들이 즐기는 유희들을 거부했다. 3) 이러한 기독교인들을 로마정부는 핍박했다. 교회가 조직화된 후부터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공권력을 직면했다. 교회는 네로부터 콘스탄틴에 이르는 시기동안(64-313) 간혈적인 핍박으로 환난을 당했다. 잔인한 핍박들은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달랐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던 황제들도 있었다. 가장 잔인한 핍박을 일삼았던 황제들 중 한 사람은 데시우스(Desius, 249-51)였다. 248년 로마제국의 설립 1,000주년은 쇠퇴를 직면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쇠퇴의 원인을 옛 신들을 거부하는데서 비롯되었다는데서 원인을 찾았다. 그래서 데시우스는 교회에 대해 잔인한 핍박을 거행했다. 아마도 가장 처절한 핍박은 디오클레티안 시대(284-305)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건물들과 성경이 불에 탔고 교회 지도자들이 살해를 당했을 뿐 아니라 평범한 기독교인들도 사냥, 고문, 또는 죽임을 당했다. 4) 마침내 복음이 승리했다. 로마의 핍박이 교회를 없애지 못했다. 교회는 여전히 성장했다. 디오클레티안의 폐위되고 죽은 후 신흥 로마 공직자, 콘스탄틴은 제국의 유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포용하기로 했다. 결정적인 전투를 앞두고 전설에 의하면 한 꿈을 꾸었다: “이 상징을 통해 너는 정복할 것이다.” 이 상징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의 첫 두 글자를 의미했다. 313년 콘스탄틴은 유명한 밀라노 칙렬’(Edict of Milan)을 내리고 교회에 법적 자유를 베풀었다. 복음은 잔혹한 적들 가운데서 살아남아 승리를 신자들에게 안겨주었다.

 


초대교회사 : 니케아 시대 - 니케아 종교회의

 

 

니케아 시대

 

콘스탄틴이 초기 4세기 로마제국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므로 교회는 제국적 편애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교회는 난폭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기본 교리들을 고수하고 승리했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교회는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므로 기나긴 슬픈 좌절을 맞이해야만 했다. 교회와 국가의 종교적 자유와 분리에 대한 원리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나지 않았다(cf. 마 22:21; 행 18:12-17). 정부는 종교적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국가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수년동안 이교들은 교회와 공존하며 평화를 누리기가 불가능했기에 정부적 핍박을 가하여 교회를 근절하려고 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안 시대동안 마지막으로 불었던 핍박이 지나간 후에도 교회를 짓누를 수 없었다. 콘스탄틴은 교회를 법으로 규정하고 로마제국 내에 정치적 연합을 도모하는데 도구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국은 법적으로 하나였고 종교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셈이다. 교회는 폐배한 이교들을 대신하여 국가종교가 되었다. 이것은 콘스탄틴의 계획이었다기보다 발전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밀라노 칙령’(313)은 기독교인들에게만 법적 관용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제국 내 다른 종교들에게도 동일한 권한을 주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교회가 다른 종교들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틴 치리 초기에 소수에 불과했지만 제국의 보호 속에 상당한 힘과 성장을 가져왔다. 밀라노 칙령이 있은지 얼마 후 콘스탄틴은 성직자들에게 공적 의미를 면제했으며 교회가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 이교적 희생들을 금지했고 주일에 도시에서 일하는 것도 금했다. 다른 면에서 보면, 콘스탄틴은 교회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고 여겨지며 교회는 여기에 부합하여 이익을 얻었다고 여겨진다. 교회와 국가는 점점 의존하는 관계로 발전되어 갔다.

 

니케아 종교회의

 

콘스탄틴은 교회를 관리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교회는 교리적 논쟁들로 싸우게 있기 때문에 제국 내에 연합을 도모하려는 도구로 사용되려면 상당한 노력이 요구되었다. 그가 직면한 문제들 중 하나는 ‘도나티스트’(Donatist) 논쟁이었다. 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에 의해 수임 받은 것이 유용하느냐 라는 문제로 새로 임명된 감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기므로 북부 아프리카 교회는 분열을 낳았다. 도나투스(Donatus)는 그를 대신하여 선택되었다. 도나티스트들이 북부 아프리카 성직자들에게 부여된 제국적 은사들을 공유하기를 거절하자 황제에게 청원했다. 콘스탄틴은 고올(Gaul)의 아를(Arles)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정당치 못한 성직자들에 의해 수임된 직분이라도 법적으로 인준되며, 이단적 세례라고 보기 어렵고, 부활절은 로마력에 따라야한다고 선언했다. 도나티스트들은 황제에게 다시 청원했으나 또 다시 콘스탄틴은 그들의 청원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황제가 교회적 사건들에 규례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선례를 낳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논쟁은 320년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의 교리와 연관되어 일어났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격한 논쟁, 즉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가 피조물들 중 처음 난자이고 세상을 형성한 대리자이지만 그에게는 시작이 있었고 하나님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서방교회와는 달리 동방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이 일치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도전했고 논쟁은 너무 날카로워서 콘스탄틴이 균형을 잃을 정도였다. 참석한 300여명의 감독들 중 6명만이 서방교회 출신이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대부분은 아리우스 입장을 강력히 거절했기 때문에 콘스탄틴은 아리우스 입장을 반대했던 사람들 뒤에서 정치적 편법을 사용했다. 종교회의는 반 아리우스에 대한 신조를 채택했고 아리우스는 추방당했다. 또 종교회의는 부활절의 일자, 원리, 그리고 회복에 관한 규율들을 선포했다.

 

 

신약성경은 기독교인을 위해 충족한 신조였다(딤후 3:16-17).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도 믿음을 정의하는데 교회의 대표자들로 활동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신약성경이 콘스탄틴 시대에 시작되었던 교회의 범종교회의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 합법성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 공회’(행 15장)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1) 예루살렘 공회의는 세속 지도자의 권위에 의해 개최되지 않았다. 2) 이것은 ‘범종교회의’가 아니었다. 참석한 사람들도 모든 교회들의 대표자들이 아니었다. 실제로 예루살렘과 안디옥교회와 관련된 사람들만이 참석했다. 3) 문제를 직면한 교회의 일원들이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내걸은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해졌다(24절). 4)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공회의에서 선포된 내용들은 성령에 의해 영감받은 사도들에 의해 전해줄 때에만 권위있을 뿐이다(28절). 범회의(12-29절)는 사도적 회의에 이른 결정을 설명하고 나타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갈 2:1-10).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들이 아니면 현대교회적 종교회의들이 내린 결정들은 예루살렘 공회의 전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아리안주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또 다른 개념들은 계속하여 전 니케아와 니케아 시대에 교회의 신학적 전망을 주도했다. 다른 논쟁들이 그 이후에 정면에 나섰지만 그리스도의 본성과 성부와의 관계는 항상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결국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관은 핵심이며 신앙에 있어 가장 독특한 표상이다. 처음부터 그러했다. 유대인들이 복음에 대해 가장 거부감을 가졌던 것도 바로 그리스도 신성이었다. 그리스도 신성에 대한 진리는 영지주의적이고 단일신론적 이단들과 정면으로 싸워야만 했다. 서방교회는 ‘로고스 기독론’을 일찍이 취하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임을 역설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성부와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교리였다. 하지만 동방교회는 일관성 있는 결론을 가지지 못했다. 다양한 기독론적 견해를 갖고 있었기에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아리우스 교리

아리우스(c. 250-336)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들 중 하나의 장로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와 교리적 논쟁을 벌였는데 앞으로 2-300년 동안 교회에서 일어난 논쟁이 되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피조물들 중 최초이며 최고이라고 가르쳤다. 신적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들처럼 무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고결성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 두 번째 하나님(secondary God)으로 채택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시라고 인정하면서도 두 번째이시고 조금 열등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도 아니시고 전적으로 인간도 아니시지만 하나님과 인간간의 제 3의 인물이다. 성육신 때 그리스도는 인간 육체가 되어 인간적 영과 이성을 취했다. 알렉산더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동일하게 영원하시고, 성부와 본질상 하나이시고, 전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논쟁은 너무 격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안 종교회의는 아리우스를 정죄 했기에 그는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 가운데 도피처를 찾았다.

 

 

콘스탄틴노플에 제국도시를 건설한 콘스탄틴은 제국의 연합이 이러한 논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단순한 권면으로 평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325년 니케아에 최초의 범종교회의를 개최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질상 하나라는 것을 신조로 채택했다.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고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아리안 사상은 거절되었다. 콘스탄틴은 이 신조를 수용하지 않는 자들, 즉 아리우스를 비롯한 사람들을 제국에서 추방시켰다. 하지만 니케아 종교회의는 아리안주의 종말을 의미하지 못했다. 콘스탄틴은 아리우스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에 타협적인 신조를 후원하면서 아리우스를 복귀시키고 도리어 아리안주의 반대 지도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를 추방시켰다.

 

콘스틴탄의 아들들이 제국을 통치하면서 제국은 나뉘게 되었고 신학적 논쟁에 더욱 얽히게 되었다. 서방의 황제는 ‘카톨릭인들’과 친숙했고 동방의 황제는 아리안들과 친숙했다. 그리하여 세속적 권력 편에서 신학적 문제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아리안주의든, ‘니케아 신앙’이든 특정한 시기에 영향력을 끼치느냐라는 것은 누가 황제의 총애를 받느냐에 달려있었다. ‘니케아 신앙’은 마침내 니케아 신앙 옹호자 데오도시우스(Theodosius)가 황제에 등극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381년 데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틴노플 종교회의, 즉 2차 범종교회의를 개최하였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모두 한 신적 본질이라는 것을 재 확언했다.

 

아리안주의가 독일부족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다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위기에 있었을 것이다. 5세기말 카톨릭 감독들은 프랑크족 왕 클로비스(Clovis)를 설득시켜 자신들의 보호자, 참피온으로 삼았다. 잔인한 술책을 이용하여 클로비스는 독일부족을 정복했다. 클로비스와 콘스탄틴노플의 비잔틴 황제인 저스티니안(Justinian)의 정복간에 독일인들은 자신의 아리안 신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아리안주의는 절멸하게 되었는데 성경적 진리 능력으로가 아니라 세상적 권력으로 이루어졌다

 

 

교황제와 수도원 제도

 

교황권(papacy) 성장

로마제국의 공적종말은 독일 장군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476년 마지막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의 폐위로 여긴다. 하지만 제국의 쇠퇴는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로마제국의 붕괴는 어두운 시대’(dark ages)라 알려진 불경기와 혼란의 기나 긴 세월이 서방세계에 이미 불을 당겼던 것이지만 로마교회는 제국의 운명과 함께 하지 않았다. 제국 붕괴가 있기 전에 약탈을 일삼는 야만족들은 교회를 정치적 문화적 난국에서도 여전히 안전하고 견고한 제도로 보았기에 로마교회의 관심에 복종했다. 사람들이 안내자와 안정된 세력으로 여겨지는 로마교회에 의존하면 할수록 교회는 쇠퇴해 가는 정치제도에 영향력을 더욱 많이 끼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 멸망은 로마감독의 우수성(primacy)을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가도록 했다.

 

콘스탄틴의 아들들은 343년 사디카(Sadica)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아리안주의에 의해 발생한 논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 실패한 종교회의였지만 폐위된 감독이 로마감독에게 자신의 경우를 청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것을 결정했다는 것은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 로마감독은 로마에서 결정이 날 때까지 교구권과 공직을 책임지고 재심할 수 있었다. 로마감독의 우수성은 로마감독들로 활약했던 열정적인 몇 명의 변호자들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이노센트 1(Innocent I, 420-427)는 로마교회가 사도적 전통의 보관자였다고 주장했고, 로마감독이 우주적 사법권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레오 1(Leo I, 440-461)은 베드로가 수제자였으며 그 우수성은 계승자들에게도 주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런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칼케돈(Chalcedon) 종교회의(451)는 콘스탄틴노플을 로마와 동일한 위치에 놓았다. 이러한 결정은 동방과 서방간의 분열의 조짐을 낳는데 촉매역할을 했지만 로마감독의 우수성은 아직도 확실하게 증명되기에는 일렀다.

 

로마교회와 그 감독의 우수성 이론이 발전하기까지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요구되었다. 1) 성경은 아직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우수하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20:20-28; 23:8-12; 15:1-29; 2:1-14). 2) 성경은 사도직의 영구성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특별히 사도들이 예상된 베드로의 우수성에 대한 후예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부활후 예수님께서 나타나 보이신 사람이 사도성을 계승한 자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1:21-2).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마지막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 15:8). 그렇다면 바울이 사도로서 마지막 자격을 가진 인물임을 의미한다. 맛디아(Matthias)가 유다를 대신하여 선출되었을 때 사도들이 제비를 뽑았지만 삽시간에 선출을 받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은 아니었다(1:21-26). 3) 만일 베드로가 사도들 가운데 우수성을 소유했고 다른 사람들이 그 우수성을 계승받았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분명하게 그러한 계승자가 반드시 로마에 있는 교회 감독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베드로가 로마교회의 감독들 중에 한 사람임을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과 다르든지, 성경에 덧붙여지든지간에 로마교회가 사도적 가르침의 보존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황제(papal system)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

 

 

수도원제도 성장

수도원제도(monasticism)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목적을 위해 세상을 등지며 금욕적 실천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수도원제도의 시작은 이집트의 안토니(b. 250)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본다. 그는 어릴 때 재산을 모두 팔고, 황량한 곳으로 가서 기도와 엄격한 자기부인적 삶을 살았다. 어떤 파초미우스(Pachomius)는 최초의 수도원들을 설립하므로 수도원제도를 발전시켰다. 수도원제도에 두 형태가 있는데: 1) 은둔자(hermitic)로서 다른 사람들과 등지며 살아가는 것이고; 2) 수도사(cenobitic)로서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6세기 초반 베네딕(Benedictine) 수도회가 세워져서 공동적 예배, 노동, 그리고 연구를 강조하였다.

 

수도원적 삶이 개인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7가지 이유가 있었다: 1) 로마인들의 핍박이 감소됨에 따라 많은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그 가운데 세속적 삶을 여전히 간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교회로부터 육체적으로 분리하여 영적인 높은 수준에 이르기를 갈망했다; 2) 순교의 휴식기간은 수도원제도를 가장 높은 영적 수준에 이르도록 했다; 3)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도원제도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4) 고대인들은 활동적인 봉사보다도 명상적 삶을 보다 높은 덕으로 삼았다; 5) 예배의 형식주의가 팽배함에 따라 수도원제도를 통해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을 갈구했다.

 

수도원제도는 성경적으로 볼 때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1) 수도승과 평범한 교회 일원들간 이중 구조를 창출한다. 왜 평범한 교회 일원이 수도승에게 잘못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이 왜 옳을까?; 2) 덧붙여 수도원제도는 평범한 교회 일원들에게 표준이하의 성화를 고무시킨다; 3) 수도원제도는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과 분리는 정죄 받아야할 일이다(17:14-16; 고전 5:9-11). 기독교인들은 세상으로 들어가서(16:15) 그들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5:13-16; 9:10-13). 그들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닫아버린다면 어떻게 이런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더욱이 수도원제도의 금욕주의는 무가치하고 거룩하지도 않는 것으로 정죄 받는다(2:23; 딤전 4:1-5)

 

그리스도의 본성

 

신성과 인성

기독론의 한 쪽은 그리스도와 성부와 관계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는 신성이신가? 이 질문은 교회 내에 여러 파당을 만들었고 그들로 인해 뜨거운 논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다양한 답변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던 아리우스와 같은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을 부인했다. 니케아 종교회의(325)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성이 재확언되었다. 하지만 그 논쟁이 식어지고 아리안주의가 박멸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부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자연적으로 기독론 문제, 즉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문제로 나아가게 했다.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신가?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연합되고 그 결합은? 이러한 질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려하는 가운데 발생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 단일한 태도를 일찍 갖춘 서방교회는 그 만큼 우위를 지닐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충만한 사람이시지만 그의 인성과 신성이 서로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이것은 변호나 설명보다도 신앙의 고백적 차원이었다. 유한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동방은 보다 철학적 사고를 일삼았고 그 결과는 만족치 못했다. 동방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분명하게 정의하기를 갈망했다.

한 쪽을 강조하다보면, 그리스도의 본성의 다른 쪽을 등한히 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다보면 인성이 자연스럽게 소홀해지게 된다. 또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다보면 그의 신성을 소홀하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는 아리안 논쟁에 큰 핵심부분이었다. 신성을 강조하고 인성을 소홀하였던 논쟁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련된 논쟁에 중요한 부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두 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두 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인격의 이중성(duality)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던 사람들은 ‘단성론자들’(monophysites)이라고 부른다. ‘단성론자’란 헬라어 ‘하나’를 의미하는 mono와 ‘본성’을 의미하는 phusis의 합성어이다. 이런 주제에 대한 논쟁들은 5-6세기에 걸쳐 뜨거웠고 몇 차의 범종교회의를 통해 이슈로 등장했다. 단성론자들은 지금도 중동지역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

 

인성의 중요성

그리스도의 본성에 둘러싼 논쟁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들을 간과해버린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간에 균형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어느 한 부분을 축소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인간과 동일하게 취급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은 퇴색될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충만한 신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다른 면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부여한다 하더라도 이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그 분은 충만한 인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인성 없이 그의 신성은 사람에게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사람이신 그 분이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적합하게 나타내셨다(요 1:18; 14:9). 예수님은 인간 육체를 지니신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에 그 분은 하나님을 사람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실 수 있으시다. 더욱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는 사람들을 성화시킨다(히 10:10). 인성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예수님도 완전하신 분이라 할 수 없다(히 5:8-19; 2:10).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악마를 무기력하게 만드셨다(히 2;14). 대제사장과 죄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그는 형제들처럼 되셔야만 했다(히 2:17). 사람이시기에 그 분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우실 수 있으시다(히 2:18). 예수님은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겪는 모든 고통을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고부시킬 수 있으시다.

 

 

예배의 변화

 

전 니케아 시대(100-325)는 교리와 예배에 변화가 있었고 니케아 시대(325-600)에는 더 가속화되었다. 교회의 공적예배는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첫 부분은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고,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듣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4-5세기 동안 위대한 몇 명의 설교가들이 있었지만 대규모 도시 교회들에 제한적이었다. 지방의 교회들과 몇몇 도시들에서는 설교가 일반적이지 못했다. 설교 전이나 후에 있는 기도조차도 기도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중예배는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예배 중 가장 엄숙한 순서이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배제되었다. 성찬의 극적인 의식화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께서 신비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 점에 있어 동방과 서방은 이견, 즉 두 성분들 안에 임재하시는 시기에 대해 이견을 가졌다. 동방에서는 성상(iconostasis)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성상들(신성한 형상이나 성화들)이 대치된 구획이 있었다. 동방교회는 성찬식을 거행하는 동안 회중들로부터 사제들이 있는 장소였다.

 

성일과 절기

가장 오래된 축제일들, 즉 부활절과 오순절은 세월이 가면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외 다른 절기들이 더해졌다. 부활절은 금식과 회개의 시간, 즉 40일간의 사순절 다음에 왔다. 4세기에 이르러 승천이 기억되기 시작했지만 주요한 축제로서 성탄절과 예수 공현날(epiphany-성탄절 후 12째 되는 날)이 더해졌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를 축하하는 공현날을 지켰던 날은 부활절이었다. 공현날은 1월 6일에 지켜졌고 성탄절 12월 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일로 서방에서 시작되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동방과 서방은 강조점을 달리하는 절기를 지켰다. 동방은 공현날을 그리스도의 세례를 축하하는 날이라 했고 서방은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날이라고 했다. 성탄절의 기원과 관련된 관습들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들이 난무했지만 그겋을 준수하는 것은 이교적 풍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Sol Invictus(태양의 비침을 기념하는 날)와 Satumalis는 12월 25일에 일어났는데 이런 풍습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교회에 접목되었던 것이다.

 

성자, 성물, 그리고 성상

순교자들과 그들의 유골들을 숭배하는 것은 점점 보편화가 되었다. 그들의 유품들만 아니라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귀하게 다루어졌다. 이러한 성물들이 안치된 장소로 순례하는 일은 경건을 위해 특별하게 다루어졌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교회 예배에서 추모되어졌고, 그들을 기도 속에서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추모가 자연스럽게 순교자들과 성자들에게 청원하는 기도로 변천되었던 것이다. 4세기말에 이르러 순교자들과 성자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중재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을 보호하고, 치유하고, 그리고 도울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도시들의 수호자들이 되었고, 상업의 보호자들이 되었고, 병들의 치유자들이 되었다. 성자들과 순교자들은 옛 이교 남신과 여신들을 대치시켰을 뿐이었다.

가장 신성하게 숭배된 인물들 가운데 마리아, 예수님의 모친을 빼놓을 수 없다. 마리아를 공적으로 숭상하는 것은 그의 형상을 모시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자연스럽게 주님의 모친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는 어느 순교자들, 사도들보다 위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베푸는 그 어떤 축복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베푼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동방의 이교적 여성신을 축출하고 그 자리를 채운 것에 불과했다. 니케아와 전 니케아 시대 동안 그녀의 동정녀에 대한 교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그녀가 예수님을 낳고난 후 남편 요셉과 성적 관계를 가졌다고 말한다(cf. 마 1:24-5; 눅 2:7; 고전 7:1-5; 막 3:31-32; 6:3; 요 2:12; 7:3-5; 행 1:14).

 

 

어거스틴 주의

 

어거스틴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은 사도시대이후 로마 카톨릭교회에 가장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 그가 이룬 최대의 공적과 그 근거는 중세동안 로마 카톨릭신학을 형성하고 주도했던 교리제도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거스틴의 견해는 자신의 삶을 잘 반영한다. 그는 이교도 부친과 카톨릭 모친 사이에서 북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다른 종교는 앞으로 그의 사상과 실제적 행동간에 경험하게될 기나 긴 여정을 예상했다. 자신 안에 느꼈던 두 가지 본성, 즉 하나는 세상적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이고 이상적인 것이었다. 두 본성 중 낮은 것은 초기 삶을 지배했는데 만족하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학문적 공부와 경력을 추구했던 그는 마침내 384년 이태리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초기 삶 동안 여러 철학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북 아프리카로 되돌아온 후 어거스틴의 내적 갈등은 마침내 386년 개종의 열매를 맺게 했고 다음 해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후에 반달족이 둘러싼 가운데 연로한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될 히포의 감독이 되어 교권제도권으로 진입했다.

아마 어거스틴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기억해야하는 것들은 죄와 구원과 관련된 것들이다. 전 인류는 심지어 유아마저도 아담의 타락의 저주아래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아담 안에서 전적으로 죄를 지었으며 사악하고 소망이 없는 상태에 있다. 하나님은 임의로 사람들을 예정하시는데 구원하시는 수는 제한하셨다. 은혜에 대한 어거스틴의 개념을 보면 개인들이 구원을 위해 스스로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어떤 공간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이런 은혜는 개인의 마음과 삶에 감당할 수 있는 능력, 믿음과 사랑에 스며든다(infuse).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런 개념들은 어거스틴의 삶에 철저히 근거를 두고 있는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인해 죄의 사슬로부터 구원을 얻었던 경험을 그는 갖고 있다.

 

펠라기우스

이런 어거스틴의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린 자는 아일랜드나 영국의 수도승 펠라기우스(Pelagius)였다. 그는 400년 로마로, 410년 북아프리카에 도착했다. 어거스틴과는 정반대로 그는 사람들 안에 있는 자유의지의 사상을 주장했다. 그의 슬로건은 “해야된다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담으로부터 어떤 원죄도 유전 받지 않았다. 아담은 단지 따르지 말아야할 나쁜 실례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사용 못할 수도 있다. 펠라기우스는 은혜를 배제하지 않았지만 세례 시 죄들을 용서받고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해야한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 견해에 대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펠라기우스는 영향력 있고 능력 있는 후원자들을 지니지 못했기에 여러 종교회의, 황제, 그리고 교황들에 의해 정죄를 받았다. 카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어거스틴의 죄와 구원론 입장을 수용했다.

 

성경

1) 죄는 아담의 범죄, 죄성, 그리고 영적 중대성들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죄론과 구원론의 근거가 되었다. 죄는 사람들이 유전 받은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법을 범하므로 행하는 어떤 것이다(요1서 3:4). 유아들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없으며(신 1:39; 사 7:16) 성경은 그들에 대해 순수한 상태에 있다고 말씀한다(롬 9:11; 고전 14:20; 마 19:14). 사실 성경은 사람들 스스로가 짓는 죄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겔 18:20; 고후 5:10).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상징적으로 죄를 짓거나 그의 범죄와 죄성을 유전받은 것이 아니다. 아담의 죄는 간접적으로 모든 사람을 죄 있는 것으로 만들었고 죄의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세상에 죄를 소개했다(롬 5:21-22; cf. 마 5:32).

2) 자유의지가 자신의 것이 아니거나 자유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의 의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경은 사람이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마 16:24; 요 7:17). 더욱이 아담은 자신의 처음 죄로 인해 자유의지를 상실했고 인류들에게도 했다고 여겨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자유의지가 부족하다는 교리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한 교리는 첫째 죄를 짓는 사람의 책임을 회피할 가능성이 높고; 둘째 하나님께 죄의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왜냐하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셋째 사람들이 범할 수밖에 없는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임하는데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는 저항 당할 수도 있다(행 7:51).

4) 예정론. 성경은 기독교인들의 목적과 대상들에 관하여 이미 예정되었다고 말하지만(롬 8:29-30; 엡 1:5, 11), 특별한 개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어 기독교인들이 되게하고 구원받도록 하며 다른 사람들은 지옥에 가도록 하지 않으셨다. 이와 같은 예정론은 하나님을 사람들을 편애하는 것으로 만들며(행 10:34)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뜻과는 정반대를 의미한다(딤전 2:4; 벧후 3:9).

 

교황권 신장

 

로마주의

동방교회의 성장이 7세기초 모슬렘인들의 진격으로 인해 주춤해지면서 중세(600-1500)의 교회성장에 두드러지는 현상은 서방교회의 성장이었다. 먼저 학문과 열정을 가진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아일랜드 교회가 패트릭(Patrick, 389-461)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아일랜드 전역에 교회를 시작하고, 전파하고, 개척한 인물로 보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아일랜드의 사도’(Apostle of Ireland)라 부른다. 교회는 아일랜드에 확고한 뿌리를 두었기에 영국의 교회가 로마제국의 몰락과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으로 붕괴되었을 때에도 생존하고, 번영하고, 발전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영국 섬들-스코틀랜드와 영국-과 대륙-프랑크족과 독일왕국들-에 다시 한번 교회를 개척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개인적 평신도 고백’(private lay confession)을 실천했던 분들이었다. 평신도 고백은 자신들의 죄를 성직자들에게 고하는 것을 말한다. 후에 이런 고백형태는 필수적 요소가 되어 실행하는 자들에게 혜택이 주어졌다. 신약성경은 성직자든 평신도든 구별을 두지 않지만(벧전 2:9), 평신도가 성직자에게 고백하는 형태로 바뀌었다(딤전 2:5). 죄 고백은 적절한 조건(5:23-24; 1:15; 17:3-4) 아래 서로에게”(5:6)하는 것이다. 최초의 고해성사 지침서’(penitential books)는 아일랜드에서 시작되었다. 죄인이 자신의 죄들에 대해 만족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영원한 형벌만 아니라 일시적 형벌’(temporal punishment)이 죄들로 인해 발생한다는 신앙이 깔려 있었다. 하나님의 용서는 영원한 형벌을 옮기시지만 일시적 형벌은 아니다. 일시적 형벌에 만족하지 못하면 영혼은 연옥(purgatory)으로 가게된다. 만족이 기도, 교회 참석, 금식, 순례, 구제, 또는 다른 선행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때는 완전히 용서하신다고 가르치신다(8:12). 하나님은 더 이상 형벌을 가하지 않으신다. 596-7년 교황 그레고리는 선교사들을 영국으로 파송했다. 아일랜드와 로마인들은 다른 형태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들간에 충돌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정치적 권위들의 도움을 베풀어 마침내 영국섬들을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유럽 내에 로마 캐도릭주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교회와 세속권력의 연합

중세동안 로마 캐도릭교회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는 세속 권력 성장에 의존했고 그 독점에 따라 달랐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후원하는 관계였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였다. 각자는 서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세속 군주들은 교회 일에 관련되었고 교회 지도자들은 세속 일들에 깊은 연관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은 서 유럽이 이론상 하나의 광대한 국가로 있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로마 캐도릭 교황들은 마침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되었다. 로마 캐도릭교회는 결코 중세시기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동방(비잔틴) 제국 황제들이 서 로마제국의 멸망(476)에서 생존했지만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이태리로부터 분리되었고 로마를 더 이상 후원하지 못했다. 로마가 콘스탄틴노플에 종속되었지만 정치적으로 분리하기 시작했고 로마는 콘스탄틴노플을 독립성을 위한 방해자로 여겼다. 결과적으로 로마 캐도릭교회는 프랑크 왕들을 후원자와 보호자로 성원했다. 물론 프랑크 왕들은 이런 관계를 통해 큰 유익을 얻었다. 롬바르드족(Lombards)이 이태리 지역을 포위하고 751년 로마를 위협했을 때 프랑크족의 난쟁이 페핀(Pepin the Short)은 그들에게 정복지들을 이양하라고 압력을 가했고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아썼을 때 그것을 교황에게 돌렸다. 이러한 행위들은 많은 결과들을 불러 일으켰다. 1) 교황들에 의해 세속 군주들을 공식적으로 세우고 임명하는 전례를 세웠고; 2) 교황들이 실제로 정치적 지도자들이고 지역적 군주들이 되었다. 페핀은 정복한 이태리 지역을 교화의 소유권 아래 두었는데 이것을 교회 국가들’(States of the Church)이라 부른다.

 

교회와 국가간의 밀접한 관계는 페핀의 아들 중 유명한 샤를마뉴(Charlemagne, 768-814)의 통치동안 더욱 강화되었다. 교회는 세속 군주들의 권위를 후원했고 세속 군주들은 교회 지도자들의 칙령들을 강요하는데-예를 들면 십일조를 거두는데-그것을 사용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교황 레오 3(Leo III)에 의해 로마에서 황제관을 썼다. 황제직은 교황제의 선물로 여겨졌다. 프랑크 제국이 샤를마뉴가 죽는 동시에 쇠퇴하게 되었고 교황들의 권력과 독립성은 점점 성장해갔다. 넓어져 가는 그들의 권력은 신약성경의 하나님의 종에 대한 개념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22:21; 6:15; 18:36; 17:20-21; 고후 10:3-4; 6:12; 딤후 2:4).

 

 

정치적 교황제

 

10-11세기 로마 캐도릭 교황제는 가장 어둡고, 가장 슬픈 시기들 중 하나였다. 교황제의 절하는 교황직이 세속적 세력을 장악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세속적 세력을 가진 결과였다. 교황들은 영적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상실되어갔고 일시적 지도자로 변해갔다. 교황제의 이러한 변화는 세속적 군주들을 교황들이 인준하면서 그것에 대한 답례로 교황들에게 지역들을 헌납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교황들은 영적 지도자들뿐 아니라 세속 군주들로 여겨지는 때가 도래하면서 가장 높은 직위는 교황직이었다. 교황제가 정치적 우수성과 능력 면에서 확장되어가면서 교황직을 장악하는 것이 정치적 알력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황들은 로마의 성직자들과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실제에 있어서 교황제는 어떤 당파가 로마를 장악하느냐에 달려있었다. 교황들은 정치적 전당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897년과 955년간 17명의 교황들이 갈렸다. 이러한 상황은 존 12(955-964)가 독일왕 오토 1(Otto I, 936-973)의 군사력을 빌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오토 1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962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썼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독일 황제들의 영향 아래로 교황제가 들어가는 결과를 안겨다 주었을 뿐이다. 교황직에 오르는 사람은 독일 황제에 의해 선택되고 후원을 받는 사람이 가능했다. 정치적 음모는 늘 교황제 주위에 감돌았고 이로 인하여 질적 저하는 말할 수 없었다. 어떤 때는 12세 어린 나이로 교황직에 오른 베네딕트 9(Benedict IX, 1033-1048)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교황권을 소유한 자들 중 가장 형편없는 자로 여겨진다. 다른 교황적 알력에 위협을 느낀 그는 교황직을 1-2,000 파운드에 팔고 교황권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로마에는 3명의 교황들이 있었다. 다시 한번 강력한 독일 황제 헨리 3(Henry III, 1039-1056)가 세명의 교황들을 폐위시키고 독일 감독을 대신하여 교황직에 올렸다. 1059년 로마 종교회의(synod)에서 교황 선출에 대한 규례들을 규정했다. 교황들의 선출은 추기경들이 성직자들과 사람들의 의견들을 수렴하여 결정토록 했다. 더욱이 그 종교회의는 교황이 어느 지역 출신에 구애를 받지 않도록 했다. 이런 규례는 교황 선출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성직 수임권 논쟁

힐데브란드(Hildebrand)는 수년동안 교황제 뒷면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자이었으나 마침내 그레고리 7(Gregory VII, 1073-1085)가 되었다.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황이었다. 그는 어떤 강력한 사상을 가졌다. 그레고리 7세의 원리들은 로마 감독이 우주적 주권을 가졌다는 것, 감독들을 폐위할 수 있다는 것, 감독들을 복귀시킬 수 있다는 것, 황제들을 폐위할 수 있다는 것, 누구에도 판단을 받지 않는 것, 누구든 석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들이 만일 영향을 끼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원리들은 캐도릭교회의 개혁에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원했던 개혁은 일시적 정치권에서 교황권이 독립하는 것이었다.

 

교황권과 세속권은 늘 갈등 속에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성직 수임권 논쟁’(investiture conflict)이었다. 성직 수임은 성직 수임에 따른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 독일 황제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지역 내에 높은 교회직책에 임명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개혁파는 이러한 세속 군주들의 권한에서 독립하기를 원했다. 독일 황제 헨리 4세는 대감독을 임명하였는데 그는 그레고리로부터 출교를 당하고, 제국적 권위로부터 배제 당하고, 부하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헨리는 그레고리를 더 이상 교황이 아니라고 응답했다. 헨리가 연합된 독일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상황은 교황 쪽으로 기울였다. 독일 귀족들은 헨리의 출교가 해결이 나지 않으면 그를 폐위시키려고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교회권력 앞에 세속권력이 위축당하게 되자 헨리는 교황이 머물고 있는 카노사(Canossa)의 성문 앞에서 눈오는 날 3일 동안 맨발로 서있었다. 마침내 헨리는 출교에서 벗어났고 황제직도 보존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수임권 이슈는 교황과 황제의 정치적 세력 때문에 좀처럼 해결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헨리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Calixtus II)간에 1122년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을 맺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의하면 교황과 황제는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도록 하며 황제는 성직 수임권한을 이양했다. hoibin.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