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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 고레스 왕의 죽음

by 은총가득 2021. 2. 14.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

 

신바벨론 제국의 2대 왕

초대왕 나보폴라살의 아들

 

신바벨론 제국의 초대 왕 나보폴라살을 뒤 이은 신바벨론의 2대 왕이다(BC 605-562).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의 바로 느고를 격퇴하여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하수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지배하였다(왕하 24:7; 렘 46:2-12).

 

그는 수리아, 모압, 암몬 등 근동 지역을 정복한 후(BC 582) 포로들을 잡아가 대대적인

건축 사역을 시켰다. 새 왕궁을 건축하고 큰 도로를 건설했으며 대성벽을 구축하고 성문도

만들었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세워진 이시타르 성문은 지금까지 유적으로 남아 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운하와 여러 개의 댐을 수축했는데 수도뿐 아니라 여러 도시들에도 많은

건축 사업을 이루었으며 특히 바벨론 신들을 위한 신전을 많이 세웠다. 44년 간 나라를

다스렸고 아들 에윌므로닥이 왕위를 계승했다(왕하 25:27).

 

 

 

이스라엘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정책

: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속국으로 만들고(왕하 24:7) 조공을 받았으나 여호야김 왕이

친애굽 정책을 펴자 이스라엘을 다시 침략하여(왕하 24:1; 단 1:1) 여호야김 왕과 왕족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 갔다(BC 605, 단 1:2-4).

 

이때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전에 있는 성물들도 약탈하여 그들 신의 보고에 두었으며

(단 1:2) 여호야김을 뒤 이은 여호야긴 왕이 재위한 지 석 달만에 예루살렘을 다시

침공하여 여호야긴 왕과 왕족,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BC 597, 왕하 24:8-12).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왕하 24:13)과 백성과 방백, 용사를 합하여 1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으며 공장과 대장장이들도 잡아갔다(왕하 24:14). 유다 땅에는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그의 숙부 맛다니야를 왕으로 삼고 그 이름을 시드기야로 개명하였다

(왕하 24:17).

 

그러나 시드기야도 반바벨론 정책을 펴고 친애굽 정책을 펴자(왕하 24:20; 렘 27:1-22;

겔 17:1-21)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하여 함락시켰다(BC 596,

왕하 25:1-21). 이때 시드기야를 잡아 눈을 뽑고 바벨론으로 데리고 갔으며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였다(왕하 25:7). 느부갓네살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은 성전 기명들을

약탈하고 성전과 왕궁을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왕하 25:8-12).

 

이스라엘 포로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정책

 

: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다니엘(벨드사살),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

등과 같은 왕족과 귀족에게 바벨론식 교육을 시켜 왕을 위해 일하도록 하였다(단 1:3-5).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친바벨론적인 메시지를 전한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렘 39:11-14). 느부갓네살은 꿈을 꾼 후 갈대아의 박수와 술객, 점장이, 술사들을

불러 그 꿈을 알고자 했지만 알 수가 없었다(단 2:1-13).

그때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 꿈의 내용을 알게 된 다니엘에 의해 꿈의 해석을 듣게 되었다

(단 2:31-45). 그 후 느부갓네살은 두라 평지에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모든 백성에게

절하도록 하였고(단 3:1-5)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사람은 풀무불에 던져넣겠다는 법령을

공포했다(단 3:6).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금신상에 절하지 않자 이들을 풀무불에

던져넣었으나(단 3:12-23), 불에 타지 않은 것을 보자 세 사람을 불러내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단 3:24-28). 그리고 조서를 내려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하였으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지위를 높여주었다(단 3:29-30).

느부갓네살은 두 번째 꿈을 꾸었을 때도 다니엘에게 해몽하게 했다(단 4:4-27).

그 꿈대로(단 4:16) 느부갓네살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7년 동안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단 4:32). 7년의 시간이 지나 제정신으로 돌아온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였고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였다

(단 4:34).

 

 

느부갓네살이 7년 동안 걸린 병(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insania zoan thropica))

 

느부갓네살은 7년 동안 이상한 병에 걸려 고생했다.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단 4:16)고 했던 꿈속의 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국 그는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없어 왕궁에서 쫓겨났고 소처럼 풀을

먹으며 들짐승과 함께 살았다(단 4:33).

 

인사니아 조안 트로피카(insania zoan thropica)라는 정신 질환으로, 야생 생활에 대한 강렬한 절망을 느끼는 증세이다. 이 질병에 걸린 환자는 자신을 짐승으로 여기고, 짐승과 같은 광기를 보인다. 또한 짐승과 같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원인이 되어 외형마저도 어느 정도는 짐승과 같이 되고 만다. 그래서 느부가네살이 짐승과 같이 살며 짐승의 음식을 먹었을 뿐 아니라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되고 손톱이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왜 이런 병에 걸렸을까?

하나님은 바벨론이 번성하여 당시의 최강국으로 부상한 것, 느부갓네살 왕이 나라를

통치하게 된 것 등이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가능했음을 알기를 원하셨다. 또한 다니엘의

꿈해석을 듣고 느부갓네살이 깨닫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았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다(단 4:30). 그래서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게 하셨던 것이다(단 4:32). 그리고 7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셨다. 그때 느부갓네살은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34)라고 고백했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

 

. 세운 사람: 느부갓네살 왕

. 세운 때: 이스라엘과 열국을 정복한 후

. 세운 곳: 두라 평지

. 신상의 모양: 높이 27m, 넓이 2.7m 정도 되는 사람 모양의 금신상

. 세운 이유: 느부갓네살 왕의 힘을 과시하고, 세계 정복을 기념하며, 자신을 신격화시켜

온 국민의 숭배를 받으려고.

. 신상을 섬기는 방법: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모든 악기 소리가

나면 온 국민이 엎드려 절하게 하였다. 절하지 않는 사람은 극렬히 타는 풀무 속에  넣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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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사살(Belshazzar)

 

신바벨론제국의 마지막 왕

나보니도스 왕의 아들

 

신바벨론을 통치한 갈대아인 왕으로 마지막 왕이었다(단 5:1).

그의 이름은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나보니도스인데, 당시 직책에

대한 관습상 느부갓네살을 아버지로 부르기도 했다.

느부갓네살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나보니도스가 아라비아로 원정 간 동안 바벨론을

다스렸던 벨사살은 메대 바사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했을 때 살해되었다(단 5:30).

 

 

벨사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을 본 왕

 

벨사살은 성전의 기물을 사용하여 잔치를 열 때 벽에 쓰여진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단 5:5)이라는 글을 보았고 그 뜻이 바벨론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다니엘의 해석을 들었다

(단 5:25-28).

 

 

벨사살 왕에 대한 예언

 

이 말은 바벨론이 메대 바사 제국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이며 벨사살 왕이

하나님에게 심판 받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 예언은 BC 539년에 성취되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Mene Mene Tekel Upharsin)

 

바벨론 왕 벨사살이 왕궁에서 잔치를 베풀 때 왕궁 벽에 쓰여진 글자이다(단 5:5,

24-25). 이 말은 아람어구의 음역으로 “세고 세었으며 무게를 달고 나누었다”는 말이다.

바벨론의 박사들도 이 말의 뜻을 해석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다니엘에 의해

그 말의 뜻이 밝혀졌다(단 5:26-28).

메네는 ‘세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벨사살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다는 뜻이며,

데겔은 ‘무게를 달다’라는 뜻으로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하다는 말이다.

또 우바르신은 ‘페레스’의 복수형으로 벨사살의 나라가 나뉘어 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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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스(Cyrus)

 

메대 바사(페르시아)의 초대왕

신바벨론 제국 정복

 

안샨 왕 캄뷰세스 1세의 아들로 바사(페르시아)의 초대 왕이다(BC 559-530).

메대 바사를 통일하고 바벨론을 정복하여 그 당시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왕이었다.

고레스의 정복정책은 앗수르와 달리 정복민족의 전통을 존중하고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였다(스 1:3-4).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바벨론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게 했으며 성전도 재건축하도록 허락했다(스 1:2-4).

 

 

고레스의 조치는 이미 오래 전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전해진 예언의 성취였다

(사 44:24-28; 45:1-13). 이사야는 고레스에 대해 그는 열국을 정복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을 회복할 자이며(사 45:1), 기름 부음을 받은 자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목자라고

예언했었다(사 44:28; 45:1).

 

 

 

에스라도 이런 고레스에 대한 예언의 성취에 대해 기록하였다(스 1:1-2; 3:7; 4:3).

 

 

 

* 고레스 왕의 무덤

 

 

* 고레스 왕의 무덤, 현재 이란의 도시 파사르가데(Pasargadae) 소재.

200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됨.

  [출처] 두란노 비전성경사전


키루스 2세(고레스 대왕)

 

 

키루스는 아시리아를 정복하자 이제 마사게타이 족을 복속 시키고 싶어졌다. 이 민족은 동쪽 아락세스 강 저편 이세도네스 족의 맞은 편에 살고 있으며, 인구도 많고 호전적인 민족으로 알려졌다.

 

어떤 사람들은 스키타이족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아락세스 강은 아스트로스 강(도나우 강)과 크기가 비슷하였던 것 같다. 그 강 가운데 섬이 있는데, 그곳에 모여 알 수 없는 나무열매를 태우며 그 연기를 마시고 취해 춤추며 노래하였다. 그들의 성 행위는 동물처럼 공공연히 행해졌으며, 코카서스 산맥 산중에 살고 있던 종족이다. 키루스는 자신이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과 지금까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그가 스키타이족 원정을 하게 된 이유였다.

 

당시 마사게타이족은 미망인인 '토미라스'라는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키루스는 사자를 보내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구혼하였다. 그러나 토미라스는 키루스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마사게타이 왕위임을 간파하고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 키루스는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아락세스 강변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공공연히 마사게타이 공격 준비를 해 가고 있었다. 키루스의 군대가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토미라스가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이 전했다.

 

" 메디아의 왕이여, 지금 당신이 진행하고 있는 일을 중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 일이 당신에게 득이 될 것인지, 실이 될 것인지 당신은 판단하지 못하고 있소. 당신 나라의 일이나 잘 다스리고, 내 나라의 일에 신경 쓰지 마시오. 정 우리와 일전을 치룰 생각이라면 강에 다리를 놓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소. 우리가 강에서 3일 길을 물러가 있을테니 마음놓고 강을 건너시오. 만일 우리가 귀국의 영토에 들어가서 싸우기를 원한다면 당신도 똑같은 조건으로 하기 바라오."

 

마사게타이 토미라스의 제안에 대해서 키루스는 페르시아 주요 지휘관을 소집하여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를 의논하였다. 그리고 모두 토미라스를 자국으로 끌어들여 싸워야 한다는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전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의 생각은 달랐다.

 

"만일 적을 끌어들여 싸운다면 이긴다 하여도 적진내에서 승리하여 추격한 것과는 그 전과가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고, 만일 패한다면 전 제국을 잃을 수 있으며, 승리에 도취한 마사게타이는 철수는 생각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유는 제쳐두더라도, 캄비세스(1세)의 아들 키루스 왕이 일개 부녀자에게 굴복하여 퇴각한다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사게타이 종족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알지 못하고 애당초 체험한 적도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가축을 잡아 고기를 굽게 하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실컷 먹게하여 배부르고 술에 취해 있을 때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키루스는 크로이소스의 제안에 따라 건너가서 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기 아들 캄비세스(2세)에게 크로이소스를 부탁하고, 만일 마사게타이 토벌 작전을 성공하지 못 할 경우 크로이소스를 존경심과 예의를 갖추어 돌봐주라고 당부하고 두 사람을 페르시아로 돌려보낸 후 자신은 부하들과 도하했다.

 

 

 

키루스 왕의 죽음

 

키루스는 아락세스 강을 거넌 그날 밤, 마사게타이 땅에서 한 꿈을 꾸었다.

히스타페스의 장남이 양쪽 어깨에 날개를 달고 나타나 한쪽 날개로는 아시아를, 다른 한쪽으로는 유럽을 덮었다. 아르사메스의 아들 히스타페스는 '아케메데스'가의 후손으로 그의 장남이 '다리우스'였다. 다리우스는 아직 나이가 어려 출전하지 못하고 페르시아에 남아 있었다. 키루스는 잠을 깨어 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히스타페스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히스타페스여, 나는 그대의 아들이 나와 내 나라에 반역을 일으킬 것을 알고 있소. 신들께서는 나를 지켜보시고 중요한 것은 나에게 알도록 하시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당신 아들이 반역을 꾀하였으니 내가 출정을 마치고 페르시아로 돌아가는 날 심문을 할 수 있도록 잘 감시하는 것을 잊지 말라."

 

이에 대하여 히스타페스는 이렇게 말했다.

 

"왕이시여, 저희가 페르시아에서 자유롭게 살면서 노예의 신분을 벗어난 것은 모두 왕의 은덕입니다. 제 자식 놈이 반역을 한다면 왕의 뜻대로 처분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히스타페스는 이렇게 말하고 아들 다리우스를 감시하기 위해 페르시아를 떠났다.

 

키루스는 아락세스 강에서 하루를 더 진군하여 크로이소스의 계략대로 실행에 옮겼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아락세스 강으로 철수했다. 마사게타이 족은 삼분의 일의 병력으로 키루스의 비 전투부대를 공격했다. 그리고 페르시아 군은 다시 습격하여 마사게타이 족을 쳐서 죽이고, 많은 수를 포로로 잡는데 성공하였다. 포로 중에는 마사게타이 토미라스 여왕의 아들 '파르가피세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왕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사자를 보내 키루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피에 굶주린 키루스여! 이번 일로 우쭐거리지 말라. 그대는 남자가 되어서 치사하게 많이 먹으면 취하는 포도를 사용하여 마약을 가지고 속임수를 써서 이긴 것이지, 당당히 힘으로 겨루어 이긴 것이 아니다. 그대가 마사게타이 삼분의 일의 군대에게 못된 행패를 부리기는 했으나, 그 죄를 묻지 않을 터이니 이곳을 떠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마사게타이의 주인이신 태양신께 맹세하는데, 피에 굶주린 그대에게 피를 포식하도록 해 주겠다."

 

그러나 키루스는 이러한 협박에 대하여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 토미라스 여왕의 아들 파르가피세스는 술에서 깨어나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자 키루스에게 포박을 풀어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여 포박이 풀리자 곧 자결하였다. 토미라스는 자신의 권고를 키루스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모든 병력을 총 동원하여 키루스와 맞섰다.

 

 

마사게타이인은 스키타이인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으며, 궁병, 창병도 있고, 기병, 보병도 있었다. 전투 병들은 양날이 있는 도끼를 가지고 있었다. 창 끝, 화살촉, 전투용 도끼에는 오직 청동을 사용하였고 머리 장식, 허리띠, 코르셋 등에는 금을 사용했다.

 

먼저 양쪽 군대는 거리를 두고 서로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응사했다. 이윽고 화살이 다 떨어지자 창과 단검과 도끼를 가지고 격돌하여 혼전을 벌였다. 양군 모두 좀처럼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마사게타이 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키루스 자신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키루스의 재위 기간은 통산해서 29년이었다.

 

키루스의 죽음은 B.C. 529년 8월경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가 죽은 후 키루스의 시신은 파사르가다에로 옮겨져 성대하게 장사지냈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파사르가다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의 무덤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

 

고대도시 페르세폴리스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파사르가다에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의 지붕을 복원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인근 공장들에서 나오는 산업폐기물로 묘석들이 부식되고 있다.

 

키루스 왕의 무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006년>

 

 


 

마사게타이 족

카스피해의 동북부와 트란스옥시아나의 서부에 살던 민족. 기원전 7세기부터 기록이 존재하며, 기원전 4세기에 사라진다. 여러 스키타이 민족 중 일파이며, 헤로도토스의 역사 4권 11장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마사게타이족에게 밀려 아락세스 강을 건너 킴메리아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스키차이에는 사카, 다하에, 이세도네스 등 여러 스키타이계 민족들이 존재한다. 헤로도토스도 그의 책 역사에서 마사게타이족을 스키타이의 일파라고 본다고 서술한다)

 

기원전 500여년 경에 이들은 아락세스 강 동쪽, 그리고 이세도네스 맞은 편에 거주하였으며, 인구도 많고 호전적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들의 풍습은 요즘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들지만, 스키타이를 야만인으로 평가한 헤로도토스의 과장일 수 있다. 일처제도를 유지하지만 공처제를 하기도 한다고 헤로도토스는 주장했다.

 

마사게타이족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혼인을 구하는 경우 여자가 사는 말 수레 앞에 화살 통을 걸어 혼인을 구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부모가 죽은 경우 장례 의식을 위해 부모의 유해를 일부 섭취하는 풍습도 있었다고 하나 이는 스키타이 북부의 타이가 지대의 일부 수렵채집민 이야기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부모가 죽으면 친족들이 모여 양, 염소와 함께 죽은 유해를 삶아 먹었다고 하며, 그들은 이런 풍습을 큰 행복과 효도로 여겼다고 한다. 이런 이유는 조상의 지혜, 혹은 능력을 이어받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며, 죽은 부모가 묻힐 곳은 땅이 아닌 자식의 몸이라는 개념이 현대와 다르게 효도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병으로 죽으면 먹지 않고 땅에 묻었는데, 자식의 몸에 묻지 못한 것을 불효로 여겼다고 한다.

 

농사는 짓지않고 가축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또한 가축의 젖도 먹었다. 이런 생활방식은 스키타이와 유사했다고 한다. 무기는 활과 창도 썼지만 주로 양날도끼를 썼고, 재질은 구리와 청동을 사용했다고 한다. 말에도 청동 흉갑, 재갈과 고삐 그리고 면갑은 금을 사용했다고 한다. 화살촉은 구리를 사용했는데, 활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또한 사람의 장신구로는 머리와 허리, 어깨에는 띠를 하고 금 장식을 주로했다. 철과 은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금과 구리 및 주석은 풍부하게 나왔지만 철과 은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종교는 태양신만 믿었고, 말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금이 아주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비슷하다.

 

키루스 대왕을 죽인 토미라스가 새겨진 주화

 

키루스의 머리를 잡은 토미라스 여왕 - 우즈베키스탄 누쿠스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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