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창12장)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되 참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을 가지고 산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믿는 이 믿음이 참 믿음인가? 제대로 된 믿음인가?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을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을 세우심으로 답을 주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 12장 1절을 보시면 믿음의 첫 번째 본질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르셨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다음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준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람이 가게 되는데 그 이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이 말씀에 마음을 두고 성경에 줄도 그어가며 기록도 해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4절에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사실 1절에서 4절로 오는 이 사이에 중요한 말씀은 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4절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라는 이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따라갔습니까?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말씀이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들리는 것입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귀에 들릴 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 그러나 우리의 귀에 들려서 내 마음을 감동하게 하고 내 마음을 뛰게 만들고 내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그 말씀을 따르며, 말씀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보여 달라고 합니다. “보여주시면 제가 믿겠습니다. 보여주시면 제가 결단하고 한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자꾸만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언제인가부터 우리 기독교 신앙도 보여주는 것이 일상화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꾸만 보여 주려고만 합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좇아서 살아갑니다.
“하나님! 내 인생의 일확천금의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보여주시면 제가 한번 제대로 믿어 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 안에 들어와 있는 독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로마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부모들이 잠자리에서 동화책을 어린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화책을 들려주면 아이들이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동화책 안의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합니다.
다윗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아이들은 다윗의 얼굴을 상상합니다. 다윗의 친구들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하고, 골리앗의 무시무시한 얼굴도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상상력이 어마어마해져갑니다. 나중에는 상상력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세상을 이길 힘으로 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깁니까?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아무것도 손에 들려주시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저 믿고 따라갔기 때문에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보십시오. 4절 말씀 보시면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갔는데 롯은 사람을 따라 갔습니다.
롯은 말씀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따라갔습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을 따라간 아브라함, 보이는 사람을 따라간 롯, 우리가 객관적 입장에서 멀리 보면 똑같이 떠나서 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따라간 사연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고, 롯은 자기가 따라간 아브라함과의 재산문제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습니다. 마음이 상하여 자기가 따라간 아브라함을 결국 떠나게 됩니다.
사람을 따라간 사람은 결국 나중에는 물질을 따라가게 됩니다. 롯의 결말을 아시지 않습니까? 가장 비참한 인생, 가장 비극적인 인생으로 자신의 인생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따라가시겠습니까?
선택을 보면 신앙이 보입니다 (창13장)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믿음의 선택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이야기입니다. 원래 조카 롯은 자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삼촌 아브람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마침 아브라함도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롯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그리고 가나안 땅까지 조카 롯을 자식처럼 책임지고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에 한번 내려가고 올라 온 후로는 롯이 믿음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이집트의 풍요로움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은 척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절하게 내려야만 농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에 가보니 나일강 유역이 얼마나 비옥한지 그곳에서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 롯은 자신의 믿음을 그곳에 두고 왔습니다. 그 때부터 조카와 삼촌 간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집트 왕 바로가 준 재산으로 시작해서 재산이 불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도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마 조카 롯의 몫을 챙겨준 것 같습니다. 목축을 하고 농사를 짓다보니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6절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다툰다 했는데 목자가 서로 다툰다는 것은 두 주인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사이가 서로 좋다면 목자들끼리 서로 다툴 일이 없습니다. 위험 수위가 어느 정도 올라왔다는 것을 안 아브라함이 롯을 불렀습니다.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겠다 어떻게 하겠느냐.” 선택을 해야 할 때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롯은 소돔 땅을 택합니다. 영어에 소도마이트 라는 단어는 남색하는자 수간하는자 음란한자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범죄자의 대명사로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사람 함께해서는 안될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롯은 그 마음을 거기에 빼앗겼습니다.
아브라함의 진심은 “네가 소돔 땅으로 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 우리가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의 영역을 나누자는 말인데 롯은 “저는 저 건너 소돔 땅으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의 선택 기준은 물이었습니다. 물이 넉넉해야 농사도 잘되고 목축도 잘되기 때문입니다. 롯은 여호와의 동산을 직접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 롯이 본 것은 애굽 땅이었습니다.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는 애굽 땅을 보았습니다. 애굽 땅 나일강 유역에 물이 넉넉한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저런 땅에서 목축해봤으면, 나도 저런 땅에서 농사한번 지어봤으면” 하는 마음을 가득히 품고 있다가 선택할 때가 되니까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성경은 떠난 롯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복선만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소돔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소돔 사람들이 악하고 여호와 앞에 죄인이었는지 롯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 땅에서 농사짓고 목축하면서 목축들에게 풀을 뜯어 먹이기 위해 늘 여기저기를 늘 이동하며 다니는 목자들이 그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땅은 가나안 땅인데 그 땅에서 농사짓고 척박하더라도 이집트에 내려갔다가 혼이 났으면 가나안 땅에 머물러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그 땅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롯의 선택은 그 땅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믿음이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믿음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바로 선택의 순간입니다.
어떤 작은 것이라도 또는 큰 것이라도 무엇 하나 선택하는 순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내 앞에 있었던 수많은 갈림길들을.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지금까지 “내가 좌로 갈까 우로 갈까? 넓은 길로 갈까 좁은 길로 갈까?” 고민 했던 선택의 순간들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선택은 과거 내 선택의 결과물입니다. 내가 과거에 이런 생각을 해왔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이 되면 그것이 그냥 툭 드러나는 것입니다. 롯은 평소에 애굽 땅을 늘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에 내려 갔을때 그가 보았던 물이 넉넉한 그 땅을 늘 생각해 왔습니다. 막상 기회가 찾아오니까 그는 그 땅을 선택해서 떠나버렸습니다. 평소에 롯은 한 번 이집트에서 본 그 땅을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는 우리가 갈림길에 서 있을 때 분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내가 머무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내가 갈 수 있는 선택을 할까? 그건 평소에 내 마음이, 평소에 내 몸이, 평소에 내 생각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마음과 몸과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어찌하든지 붙들고 지키려고 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선택의 순간에 망하는 길로 가지 않는 비결입니다.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롯은 보이는 삼촌을 따라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보이는 삼촌이 시시해 졌을 때, 보이는 삼촌보다 보이는 애굽 땅과 같은 소돔 땅의 물이 넉넉해 보였을 때, 그는 보이는 삼촌을 버리고 더 멋져 보이는 땅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귀한 선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물질에 대한 정직한 믿음(창14장)
내 것이 아닌데 꼭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생각을 하면 욕심이 생깁니다. 그 욕심을 좇아서 살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는 내 발목을 잡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 것과 하나님의 것, 그리고 내 것과 남의 것,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 것과 남에게 나누어야 될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조금씩 틀을 갖추어 가면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내 것은 내 것으로, 또 불의한 이익을 취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이 지역 왕들의 분쟁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아브라함이 전해 들었습니다. 롯처럼 살다보면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람의 마음에는 롯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아들 같은 조카 롯이지만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 이별을 한 롯이기에 선뜻 가서 도와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들을 보는 마음으로 조카 롯을 구하러 갑니다.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삼백 열 여덟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밤에 기습작전을 통해서 롯뿐만 아니라 롯의 가족들과 또 그 지역에 함께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다 데리고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롯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소돔 땅에서 이제는 돌아와야 되지 않겠느냐?” 돌아올 명분도 좋지 않습니까? 자기 삼촌 아브람이 자신과 가족들을 다 구출해서 오는 김에 그냥 거기 묻어서 따라오면 됩니다.
그러나 롯은 다시 자기가 살던 그 소돔 땅으로 돌아갑니다. 아브람은 아픈 마음으로 돌아오다가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그가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십일조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입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이 이분이 어떤 제사장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서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 것을 드릴 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든 것은 내가 가져야 된다. 모든 것은 내 것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탐욕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신앙의 고백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될 것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제 두 번째 사람을 만납니다. 그건 바로 소돔왕입니다. 소돔왕이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게 보내고 물건은 네가 가지라.” 이 말은 어차피 네가 수고하고 애써서 거둔 전리품이니 네가 가져라. 그러나 사람들은 내 나라 사람들이니 나에게 달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내가 목숨 걸고 가서 전쟁에서 구원해 온 이 사람들은 왕의 백성이므로 왕에게 드리고 내가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은 내가 가지겠다는 것은 합리적인 계산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거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 하고자 합니다. 23절을 보시면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네가 나중에 아브람이 이 세상 것들로 인해서 부자가 되었다 하는 이야기 듣기 싫으니 다 가져가라. 그러나 내가 용병을 썼으니 내가 쓴 그 비용만 제하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 는 말입니다. 한 푼도 자기가 가져야 될 것 이상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거래 관계에서 모든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는 아브람이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내가 어떻게 일 한 것인데” 하면서 거두려 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땀 흘려 수고하지 않았던 그 수고가 자신에게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지를 그가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이집트에 내려가지 않습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대가로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는데 거짓말의 대가로 뜻하지도 않았던 암수 나귀와 양과 소와 노비까지 얻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집트 왕 바로가 아브람의 아내를 누이인줄 알고 데려갔던 대가로 받았던 예물입니다. 들통난 이후에는 다시 돌려주고 와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가지고 왔더니 그 재산이 불어서 이제는 롯과의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내가 땀 흘려 노력하지 않고 얻은 재물 때문에 사랑하는 조카 롯의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물질이 오히려 화가 되는 것. 내가 땀 흘려 일하지 않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을 그는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믿음은 물질에 대한 정직함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것을 정직하게 드리고 또한 땀 흘리고 고생한 것만 정당하게 받고 그것만으로 살 수 있는 정직과 성실이 우리 믿음의 기본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쪼개어짐의 언약 (창15장)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나이가 75세 정도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자손을 반드시 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장은 그로부터 10년이 다가오는 어느 한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처럼 기르고 믿고 의지했던 조카 롯은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렸지만 롯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이 많이 상했습니다. 혼자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자식은 주시지 않음으로 마음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15장 2절3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겠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나에게 씨를 주시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아브라함의 집에 믿을만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람을 후사로 두고 그에게 재산도 물려주고 믿음을 계승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표현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말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 입니다. 날이 갈수록 자신은 연약해 가고 믿고 의지하고 마음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라고 말씀 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를 이을 것이고 그 자로 말미암아 또 네가 크게 영광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만으로 그치지 아니하시고 구체적 행동을 통해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언약을 세우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9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된 암소와 삼년된 암염소와 삼년된 숫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제물을 다 쪼개었습니다. 양 길가에 쪼갠 고기를 늘어서 놓았습니다. 이 방식은 그 옛날 아브라함 당시에 부족의 왕들이 맺던 언약의 방식입니다. 왕들은 이 언약을 ‘저주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부족과 저 부족이 조약을 맺는데 “내가 만약 당신과 맺은 조약을 지키지 않고 어기면 나는 이 쪼개어진 짐승처럼 되어도 좋다.” 짐승을 쪼개어 놓고 두 왕이 그 사이를 함께 걸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면 이 짐승처럼 쪼개어지겠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확실함을 담보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은 그 사이를 지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혼자 지나갑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더라. 타는 횃불이 고기 사이를 지나가더라”
하나님 한분만 쪼개어진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18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각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믿지 못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반드시 네 몸에서 자손이 날 것이고 그 자손에게 내가 이 땅을 다 주겠다. 반드시 너에게는 자손이 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도대체 하나님이 인간과 왜 이런 약속을 하셔야 하는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그 만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하셨으면 믿어야 하는데 시간이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십년이 지나가니까 믿음이 작아지고, 이 만큼 큰 믿음이 자꾸 없어집니다. 자꾸 사라져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냥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안되면 우리 집에 있는 아무개에게 내 재산 물려주고 후사로 삼겠다는 생각까지 이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신 것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리고 약속의 말씀 보다는 우리의 눈앞의 현실만 아른 거릴 때, 그때 마다 믿음이 자꾸만 약해집니다.
하나님은 한 번 더 확실하게 하시기 위해 짐승을 쪼개어 놓고 지나가시고 내가 만약 지키지 않으면 짐승들처럼 쪼개어져도 좋으니 반드시 지키겠다 염려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냥 쪼개어 지겠다 말만 하지 않으시고 진짜 십자가에서 쪼개어지셨습니다. 몸과 피와 살까지 완전히 다 쪼개어 지신 주님의 그 십자가를 보고 우리는 영원으로 살아가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고 사랑입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사랑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간과 쪼개어짐의 언약을 하십니까?” 우리가 물어보고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논리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없습니다. 그냥 사랑 때문입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너를 창조했고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살아가시면서 쪼개어진 십자가의 길로 하나님 한 분만 걸어가시고 우리는 데리고 가시지 않는데, 왜 우리를 데리고 가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만약 그 길을 함께 갔다가 못 지키면 우리가 쪼개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안되니까 하나님 혼자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16장 이후에 보면 하갈 이야기가 나오는데 만약에 아브라함이 쪼개어지는 언약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갔었다면 그는 진짜 쪼개어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속하고도 못 지킵니다. 언약을 맺고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혼자서 그 쪼개어진 짐승 사이를 혼자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늘푸른 은광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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