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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창세기 1-11장 묵상

by 은총가득 2021. 2. 9.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

 

기독교는 직선의 시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시간관은 순환적입니다. 기독교의 시간이 직선이라는 말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시작하는 시점이 있고 반드시 마치는 시점이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11절은 그 시작점의 주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 전체의 주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시간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시간이 생겨났습니다. 태초라는 것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그 때부터 시작해서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말씀, 창세기 11절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냐, 이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또 우리의 삶이 또 우리의 모든 존재들이 새로운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 내 인생의 시작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는 신앙고백이 이 말씀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에 오늘 내가 있고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에 오늘 당신이 있고,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어떤 일도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오늘 이 우주는 처음과 같은 상태, 아무것도 아닌 상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에 끝내는 것도 하나님이 끝내십니다. 그래서 창조를 시작하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존하고 붙들고 계시고 그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마지막도 역시 하나님이 마지막을 장식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작하신 하나님, 보존하시는 하나님, 끝내시는 하나님 그 가운데 들어가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계시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22:13)

우리는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기 때문에 내가 태어났고 태어난 날부터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지금도 붙들고 계시고 보존하고 계십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붙들고 계시고 끝내는 분도 누가 끝내실까요? 하나님이 끝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나면 우리의 태어남도 없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없고 우리의 종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항상 하나님께 나와야 됩니다. 나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쓰는 가전제품이 고장이 나면 그 가전제품을 만든 그 회사에 가서 A/S 해달라고 합니다. 다른데 가서 A/S 해달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볼 겁니다.

 

나를 만드시고 시작하신 하나님께 하나님에게 내가 이렇게 고장이 났습니다. 몸이 고장이 났습니다. 마음이 고장이 났습니다. 시작하셨으니 책임지셔야지요.” 이렇게 고하면서 하나님께 나와야 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 나를 돌보시는 것 같지 않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나를 돌보시고 고치시고 싸매어주십시오." 하나님께 그렇게 이야기하셔야 합니다. 당당하게 말입니다. 왜냐하면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책임지시고 돌보시고 마지막도 하나님께서 해결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영원한 작정과 예정 가운데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전능하신 능력의 말씀으로 지금도 우주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1:3).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만물을 돌보시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면 만물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이 잘 유지되도록 관리하시면서 당신께서 창조 이전부터 가지셨던 목적대로 이 세상이 진행되도록 전능하신 능력으로 통치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경륜하시는 것은 모든 피조물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경륜을 모두 믿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그의 창조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인생도, 나의 자식도, 나의 꿈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 말씀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성경본문] 창세기2:1-25절 개역개정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결혼의 원리 (2)

 

오늘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가정을 어떤 원리로 세우셨는가 살펴보면서 우리의 가정과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가 영적인 가정과 같기 때문에 교회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세워 가야하는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한 몸의 원리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이 왜 아담은 흙에서 만드시고 하와는 최초의 그 재료를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하와를 만드셨을까?"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내가 배가 고프면 당신도 배가 고프고 내가 기쁘면 당신도 기쁘고 또 내가 같은 일로 고통당하면 당신도 같은 일로 고통당한다 하는 것이 참다운 가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서로 한 몸의 원리가 되지 않으면 가정의 구성원들은 따로 따로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서 하와를 만들었다 하는 것은 너와 나는 서로 하나다. 원래 우리는 한 재료였다. 그러므로 당신과 나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다. 하는 그런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적으로 확장을 시켜보면 교회에 오는 모든 우리 구성원들은 서로가 다 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 식구들은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너와 내가 모습은 다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다. 한 가족이다. 하는 가족 공동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서로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을 비난하고 내가 당신을 욕하면 그건 곧 누워서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원리는 고백의 원리입니다.

 

23절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이 최초에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고 아담이 하와를 보고 사랑의 노래, 사랑의 고백을 최초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한 이 고백을 기초로 가정이 세워졌고 이 고백을 기초로 둘이 결혼해서 아름다운 가정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할때도 선서를 하지 않습니까? 서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프로포즈하지 않는데 어떻게 결혼이라는 열매가 있겠습니까? 살아가면서도 수시로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고백이 있지 않으면 가정생활은 굉장히 메마르게 됩니다.

 

이것을 교회적으로 확장시켜보면 교회도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신앙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남녀가 결혼을 하고 살면서 사랑의 고백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면서 사는 것처럼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로 이 고백이 늘 있어야 하고 사랑의 행동도 있어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좋은 일만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왜냐하면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고백하고 산다고해서 싸우지 않습니까? 때로는 미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시 하나가 되는 것처럼 교회도 그렇습니다. 싸움이 있고 다툼이 있지만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떠남의 원리입니다.

 

24절 보시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야 됩니다. 결혼을 했는데 떠나지 못하면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그런 문제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결혼은 했으나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떠나지 못해서 일어나는 수 많은 가정의 문제들 때문에 가정은 고통 받고 아픔을 겪습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온전한 떠남입니다. 심리적으로 떠나야 되고,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되고, 사회적으로도 독립하는 겁니다. 이제는 온전한 개별 인격체를 이루어서 온전히 떠나져야 그래야 거기서부터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부모와 형제와 본토 친척 아버지 모든 혈연관계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우리가 혈연으로 대표되는 그 모든 것들을 끊어내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면은 항상 한쪽 발은 세상에 두고 한쪽 발은 하나님에게 두고 그래서 항상 신앙의 회색지대에서 살아갑니다.

 

차든지 더웁든지 뜨겁든지 차갑든지 해야되는데 항상 어중간한 그런 신앙생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온전한 떠남이 있어야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깊음과 행복이 시작됩니다.

 

네 번째 투명의 원리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5) 가정에서 남편이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면. 느낌이 옵니다. "무언가 숨기는게 있구나. 무언가 불편해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되면 자꾸 의심하게 되고추적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부간에는 "내가 나를 다 속을 다 뒤집어서 보여줘도 괜찮다."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감추고 숨기는 순간 그때부터 금이 가고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금가고 틈 생기는 사이로 사탄이 들어옵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내밀한 어려움, 말할 수 없는 무언가 불편한 관계들이 가정을 병들게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숨겨서 무엇하겠습니까? 왜 숨깁니까? 주님 앞에는 모든게 투명해야 됩니다. 죄가 있으면 죄있는 모습대로 잘했으면 잘한대로 그래야 교회생활 신앙생활이 복됩니다.

 

그리고 또한 성도들 간에도 너무 숨기는 것이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오픈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원만한 교우 관계가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 털어놓고 '하나님 제가 이렇게 살다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모양으로 오늘도 주님 앞에 왔습니다. 말씀에 비추어보니 제가 이 모양으로 살다 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용서해주시고 닦아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이런 원리로 되어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 가정에서 이 원리를 잘 지켜가면서 한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신앙생활도 이런 원리로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시면 교회 생활이 복되고 신앙생활이 더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이 되리라 믿습니다.

 

[성경본문] 창세기3:1-24절 개역개정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죄가 들어오는 길 (3)

 

창세기 3장은 원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원죄에 대해서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원죄 이전에 원복이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죄 짓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너는 죄인이야. 너는 이렇게 하면 안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가장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말씀은 복이 있으라.”였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셨던 말씀을 원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이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먹고 누려라. 그러나 한 가지는 하지 마라.” 이것이 우리에게 원복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주셨던 원복을 누리지 못하고 인간에게 죄가 들어옴으로 원복의 누림은 깨졌습니다. 그것이 깨어짐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도 금이 갔습니다.

 

오늘은 인간에게 어떻게 죄가 들어오고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주셨던 태초의 복이 소실되었는지 함께 보려고 합니다. 1절 말씀 보시면 뱀이 이야기를 합니다.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의 질문을 잘 보셔야 합니다. 뱀이 모르고 물었을까요? 알고 물었을까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말씀을 다 알지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한마디로 부정적으로 접근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누구나 이런 식으로 듣다보면 불만이 생깁니다. , 그렇지. 난 이것도 없지. 난 이래서 안돼. 난 이래서 항상 모자라. 그래서 내 인생이 지금 이 모양이구나!” 이런 생각이 생깁니다. 뱀이 그렇게 들어온 것입니다.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것은 99.9%의 자유입니다. 모든 것을 다 누려라. 모든 것을 다 먹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다해라. 동물들의 이름 짓는 것 부터 네가 먹는 거까지 다 누려라. 그러나 한 가지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가 99.9%인데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금지된 것만 파고듭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들어옵니다. 부정적으로 다가옵니다.

 

부정적인 질문과 앞에 나오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이란 말을 붙입니다. 모든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인데 그 하나가 마치 전체인 것처럼 둔갑합니다.

 

우리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에 금지된 것이 많은지 할 수 있는 것이 많은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막으신 것이 많은지 허락하신 자유가 많은지,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굉장히 많은 자유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주신 무한대의 축복과 은총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항상 우리 마음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너 예수 믿어서 잘된 것이 뭐가 있느냐? 너 예수 믿어서 축복받은 것이 뭐가 있느냐? 너 이것도 안됐잖아. 이것도 안됐잖아 그런 마음이 들 때 우리는 , 사탄이 내 마음에 가라지를 뿌리고 있는 중이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셔야 됩니다. 교회에 대해서, 이 나라에 대해, 자식들에게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못 하는것 안 되는 것 다른 자식과 비교해서 모자란 것만 눈에 보이면 가정에 평화가 깨어집니다.

 

고마운 것 잘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한 것 이런 것들 하나 하나 생각해보시고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인 칭찬과 감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에덴을 지킬 수 있는 비결입니다.

두 번째 사탄이 우리에게 들어올때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3절을 보시겠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가 한 말입니다. 하와는 지금 뱀이 이렇게 묻는 말에 대해서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행위입니다.

 

하와는 말씀을 더했습니다. 만지지도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적이 없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말씀을 더하고 있습니다.

 

하와는 말씀을 뺏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죽을지 안 죽을지 잘 모르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고 있습니다. 더하거나 빼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임의로 보태고 빼는 것,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지금 유혹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에덴에서 사탄이 우리 인간에게 들어올 때 말씀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말씀을 어지럽힙니다. 이 모든 것은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뱀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사실을 빼고 혹은 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실을 가감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동조해서 하와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마라 먹는 날에는 죽을까 하노라

 

말씀이 헛갈릴 때 뱀은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4절을 보시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는데 마지막 결론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말씀 위에 굳게 서있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알되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면 제대로 알고 제대로 알아야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뱀이 헛갈리는 하와를 마지막에 강하게 공격하지 않습니까?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말씀에 대한 진리와 사실들을 흔들어 놓고 그 다음 뱀이 공격하는 마지막 무기가 있습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교만입니다. 뱀이 인간을 유혹할 때 마지막 방점(傍點)은 교만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 하나님이 에덴에서 금지한 것이 딱 하나 선악과입니다. 선악과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동산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동산 한 가운데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어디에서 놀다가 드러누워도 선악과를 보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어디에 있다가 보아도 선악과가 아담과 하와의 눈에 띄게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볼 때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제거해버리면 내 인생에 하나님을 제거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왕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 선악과 있는 인생이 얼마나 복인줄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 그런데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의 죄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굳게 서 있지 못할 때 교만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복을 누리지 못하고 원죄 가운데 또 빠져서 살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 인간의 불행을 보았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됩니다. 긍적적으로 살면 되고 하나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면 되고 우리 인생에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내 인생에 선악과나무 한 그루를 꼭 붙들고 사시면 됩니다. 그런 복된 인생을 누리시는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본문] 창세기4:1-26절 개역개정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가인을 사랑하신 하나님(4)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참 가슴 아프고 불행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고 그 후에 가정이 이렇게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연 만물과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자연 만물과 인간이 가장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셨고, 자연 만물에게는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하나님의 뜻을 심어두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씨앗을 심으면 자라서 나무가 됩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해지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겨울이 되면 잎이 다 떨어져 내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그 자연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속에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을 심어놓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랄까 말까? 꽃을 피울까 말까? 열매를 맺어야 되나?” 나무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나무에게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와는 다르게 인간은 항상 갈등합니다.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내가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까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의지도 그 안에 있고 하나님을 떠날 가능성까지도 그 안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가치 있는 순종은 내 존재 안에서 불타오르는 불순종의 의지까지도 억누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우리 속에 갈등이 너무 심하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뇌 속에 순종이라는 프로그램을 넣어 두셔서 무조건 하나님 뜻대로 따르도록 하시지 왜 이렇게 복잡한 마음을 주셔서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시는가?”

 

정말 가치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남녀가 사랑하는데 이 사람이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가능성 까지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너무 상대방을 구속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백을 두고 그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고 함께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렇게 순종하는 것이 더 귀한 순종이고 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예를 성경을 통해서 가끔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실수도 아니고 하나님의 실패도 아니라 하나님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속에 자유의지를 주신 결과 인간이 순종으로 나가지 못하고 불순종으로 나가 버린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인도 그렇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고 동생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자 가인의 마음속에 불편함이 생겼습니다. 불편함은 곧 분노로 나아가고 분노는 살인에의 의지로 치솟습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차적으로 가인을 만나셨습니다.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6절과 7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처음에 살인 충동을 느꼈을 때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가서 너 그러면 안된다. 네 속에는 선한 의지가 있지 않느냐?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충분히 죄를 다스릴 능력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찾아가셔서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합니다. 결국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다시 한번 가인을 찾아가십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이 몰라서 물으셨습니까? 이 똑같은 질문을 하나님이 가인의 부모에게도 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 하나님이 물으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보신 것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절절한 부르심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숨었느냐? 네가 죄 지은 것 내가 다 알고 왔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나와 변론하자. 정직하게 나에게 고하라.” 하나님의 두 번 째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강퍅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두 번의 하나님의 경고와 부르심에도 순종하지 않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벌을 내리십니다.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 때 가인은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죽일까봐 두렵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가인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사랑의 기회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어떤 표를 주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가인을 만나는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이 표를 주셨구나. 가인에게 손을 대면 안되는 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세 번에 걸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쯤되면 가인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해야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셔서 말씀하셨는데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동생을 죽인 것 용서해 주십시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가인은 급기야 하지 말아야 할 마지막 행동을 합니다.

 

1617절 보시면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여호와 앞을 떠나서 성을 쌓고..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성을 쌓았습니다. 두렵기 때문에 성을 쌓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강박으로 두렵기 때문에 성을 쌓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가인은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단절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고 하나님이 세 번이나 사랑의 메시지와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하나님의 기대와 메시지를 끝까지 자기 발로 걷어 차 버렸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셨을까요?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불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내 속에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고 싶은 가능성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가치 있는 순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내 자아를 날마다 죽임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가치있는 순종입니다.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자기 자유의지로 불순종으로 흘러갔던 가인의 후손들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 이후에 5장에 보면 아담의 자손, 아담 셋 에노스. 에노스의 자손들의 계보가 나옵니다. 내가 불순종하고 싶지만 불순종을 순종으로 나아갔던 예배 공동체 사람들의 계보가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은 내 속에 있는 불순종의 불씨들을 제거하는 시간입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을 떠나 살고자 하는 내 옛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하루를 시작하셔야 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나를 복종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귀한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매일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자기의 자아를 좇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는 자는 세상에 무릎 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가인의 실패를 기억하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우리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에덴의 비극으로 흘러가고 인간에게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족보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 족보가 나올 때마다 이름도 어렵고 흥미도 떨어집니다.

 

하지만 족보는 그 안에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족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처음에 성경을 의미 없이 읽을 때는 족보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낯설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1장에 42대에 걸친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처음 성경 읽으시는 분이 신약을 펼치자마자 족보가 나오면 굉장이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한 번 읽고 두 번 읽다 보면 어렵던 예수님 족보에도 아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 후에 여러 번 읽다보면 예수님 족보에 특이한 점들이 발견됩니다. 여인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옵니다. 도대체 이 여인들은 어떤 사람들이길래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지 여인들을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족보를 보는 재미가 굉장히 쏠쏠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창세기 5장은 성경에 나오는 처음 족보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4장에도 짧은 족보가 나옵니다. 4장에서 보았던 가인의 족보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족보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세 번이나 가인에게 기회를 주시고 용서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돌아오지 않고 결국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살았습니다.

 

성을 쌓았다는 것은 하나님과는 완전히 단절된 인생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곧 예배 공동체에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예배 공동체를 떠난 가인의 족보를 살펴보면 특이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라멕입니다. 그는 아내가 둘이 있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이런 말이 나옵니다. 423절을 보겠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라멕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가정 공동체가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 한 여자로 가정을 이루어 주셨는데 라멕은 아내를 둘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는 위배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또 사람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라멕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가하는 사람을 나는 참고 견디고 보지 못하고 누군가가 실수해서 내가 상하게 되면 사람을 죽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조금 기분 나쁘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고 내가 조금 불쾌하다고 해서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계보에는 이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배 공동체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괴물같은 사람들입니다. 가인과 라멕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와를 떠나 성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족보에 나오는 라멕같은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이런 인생들을 살겠느냐? 너희 자손 중에 이런 사람들이 나오도록 너는 두고 보겠느냐?”

 

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426절을 보시면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있었는데 아벨은 가인이 죽였고 가인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해서 가인이 아담의 자식이 아닙니까? 육체적으로 아담의 자손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계보를 기록했던 역대상 11절은 아담 셋 에노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가인도 없고 아벨도 없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올라갔고 가인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족보에서 제외시켰다는 의미입니다.

 

가인은 이미 아담의 아들로서 혈통적 위치는 있으나 영적 위치에서는 하나님이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 대신에 주셨던 새로운 선물인 셋에게서 아들이 났습니다.

 

셋은 그의 아들을 에노스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그 때에 비로소 예배 공동체가 세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예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계보 가운데 특별한 사람이 나옵니다. 누굴까요? 에녹입니다. 21절 보시면 에녹은 육 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삼백 육십 오세를 살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더라'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바닷가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걷는 것도 아름다운 동행이며 봄바람이 부는 꽃이 흩날리는 아름다운 들판에서 사랑하는 자와 함께 걸어가는 것도 동행입니다.

 

그런데 30분 혹은 1시간은 같이 걸을 수 있으나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더라도 한 시간 두 시간 넘어가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나는 좀 쉬고 싶다. 저기 벤치가 있는데 나는 좀 앉아서 쉬고 싶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계속 걷자고 합니다 나는 물 좀 마시고 싶다.”고 말하면 상대방은 어쩌면 그렇게 자주 목이 마르냐.”고 핀잔을 줍니다. 그 부부가 끝까지 함께 걸을 수 있을까요? 둘이 손잡고 산책 나갔다가 마음 상해서 돌아올 때도 많습니다.

 

에녹은 이렇게 어려운 동행을 300년 동안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내가 북쪽으로 가고 싶은데 하나님은 남쪽으로 가자고 합니다.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의지를 꺾어야 하지요. 나는 쉬고 싶은데 하나님은 자꾸만 일어나라고 합니다.

 

나는 열정이 넘쳐서 달리고 싶은데 하나님은 멈추라고 합니다. 이것이 동행입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내 의지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내가 죽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내 모든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께 맞추어 사는 것입니다. 에녹이 무려 삼백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에녹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독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300년을 매일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겠습니까? 이 힘은 바로 예배 공동체의 힘입니다.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예배의 힘, 그 영적 흐름이 에녹 때에 이르러서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노아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옵니다. 예배 잘 드리는 믿음의 가문은 이런 아름다운 후손들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어떤 계보에 속하기를 원하십니까? 내 자손 가운데 라멕같은 사람이 나와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를 떠나 성을 쌓고 살아가는 자손들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인지 모릅니다. 스스로 힘 자랑하고 스스로 자기의 위세를 자랑하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하나님 없는 자의 추한 말로가 불쌍하지 않으십니까?

 

예배 공동체 속해서 살아가는 에노스의 후손들, 그들의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동행이 우리의 인생이 되고 우리 후손들의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6

 

부모들은 자식에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줍니다. 거저 주고 거저 먹이고 부모가 자식에게 한평생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어주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물론 부모님의 은혜가 진짜 은혜인 줄로 아는 자식이 있다면 철든 자식이겠지만 대부분은 잘 모릅니다. 그 은혜를 진짜 은혜되게 하는 것은 자녀들의 순종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어도 그것을 은혜로 받고 자기 삶으로 살아내지를 못하면 은혜는 그냥 다 흩어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구원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삶을 사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내가 살아내어야 그 구원이 구원의 은혜가 완성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이고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고 내 삶은 엉망으로 산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욕보이는 것이 됩니다.

 

은혜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은혜의 방향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입니다. 은혜의 방향은 위로부터 아래로입니다. 하나님에게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그 은혜를 받으면 은혜에 감격해서 삶의 자리에서 살아갈 때 은혜가 완성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버리지 않고 은혜를 완성시키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8절을 보시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를 입었는데 어떻게 살아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 했습니다. 동행은 같이 걷는 것입니다. 같이 걷는 것이 쉬울까요? 절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자기 부인이 있어야 됩니다. 북쪽으로 가자고 하는데 나는 남쪽으로 가자고 하면 동행이 안됩니다.

 

하나님이 가자고 하는 방향으로 내가 맞추어 드려야 합니다. 내가 맞추어 드리기 위해서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해여 됩니다. 멈추라고 하면 멈추어야 되고 뛰자고 하면 뛰어야 하는 것이 동행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그 은혜를 진정한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 노아는 자기부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이 악한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에녹과 노아입니다.

 

노아의 삶이 주는 계속되는 교훈입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하나님이 방주의 설계도를 지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설계도를 따라 만들면 120년이 걸립니다. 3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악이 관영한 세상을 바로 심판 하시지 않고 120년 동안 유예기간을 두셨습니다. 120년 동안 노아에게 이렇게 큰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인간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이고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해서 내가 팔짱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우리는 반드시 거기에 반응하는 행함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라! 방주 만들면 내가 너와 너 가족을 구원해 주겠다.' 은혜입입니다. 방주만 만들면 우리 가족들이 다 살 수 있는데 그런 놀라운 복음의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귀찮아서 못하겠어요. 120년 동안이나 방주를 지어요? 못합니다.” “이렇게 햇빛이 쨍쨍한데 내가 방주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이 나를 비웃을 겁니다. 저 못합니다.” 라고 했다면 그 은혜는 흩어지는 맙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노아가 하나님,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순종했습니다. 성경은 노아의 순종을 이렇게 말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느니라'

 

훌륭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를 노아답게 만든 것이고 은혜를 은혜 되게 한 행위입니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이 노아시대에 노아만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만들었거든요.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만들면서 120년 동안 망치질했습니다. 120년 동안 나무를 베었습니다. 120년간의 망치질이 사람들에게 주는 구원의 소식이며 전도의 외침입니다. “모두 다 이 방주로 들어와서 구원받으십시오.”

 

사람들이 묻습니다. “뭐합니까?” “방주 만듭니다.” “왜 방주 만듭니까?” “하나님이 이 악한 세상을 심판 하려고 합니다. 다 방주에 들어가서 구원받으셔야 됩니다.” 방주를 짓는 시간은 120년 동안 동시대 사람들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기쁜 소식,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이 사람들은 120년간의 시간들을 헛되이 흘려보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구원의 놀라운 기쁜 소식을 이 사람들은 흘려보냈습니다. 은혜를 은혜 되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은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기도할 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 하나 따져보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건강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건강해서 내가 운전도 하고 내가 옷 입고, 호흡을 해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건강의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사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방종의 구실로 삼고 하나님이 주신 이 몸을 자기 마음대로 죄악에 방임하여 산다면 하나님 앞에 가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은 교회,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우리가 잘 지켜야하지 않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다 준행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을 주셨으면 가정을 잘 가꾸는 순종, 귀한 자녀를 주셨으면 자녀를 잘 돌보는 순종,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에게 주신 것 들을 되갚아가는 준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은혜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가지고 준행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역입니다.

 

7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7장 말씀은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노아의 의로움을 하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너는 의롭다.'고 인정하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노아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62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여기에 의로움의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것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 위에 노아의 의로움이 놓여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75절을 읽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노아의 행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세 가지 말씀이 전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이 말씀위에 있습니다. 노아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말씀 위에 놓여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고 일하고 그 말씀 하나 붙들고 지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 너는 참 의로운 존재구나!' 그렇게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빼고는 논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인 의,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 행동의 의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의롭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성도님에게 질문합니다. 집사님, 의로우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의롭다 해야되나, 의롭지 않다 해야 하나?”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사탄은 그런 틈새를 파고 들어옵니다. 네가 의로워?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는데 네가 어디 의롭다고 큰 소리 치느냐?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가 다 알고 있는데 어디서 네가 의롭다고 하느냐!”

 

사탄은 우리를 당당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기준으로 근거되어 있는데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내 자아가 놓여있으면 그럼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물어도 누가 우리에게 당신은 의인입니까?”라고 물으면 , 저는 행위로는 의로울 수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아래서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신앙인입니다.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였습니다. 언약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신앙이나 도덕성 때문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주권으로 맺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였던 유대인들이 율법의 관계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요 신앙인의 의로움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에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율법이 최고의 가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외적인 행위가 강조되었고,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의 정의, 자기 의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러한 율법을 수호하는 최고의 기관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은 의로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후 70년에 의로움의 위용을 자랑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 제국에 의해 폐허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수호하는 최고의 기관이었던 예루살렘 성전, 인간 스스로의 의로움을 상징했던 그곳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란 주님의 예언대로 폐허가 되었으며, 이스라엘이 그토록 자랑했던 스스로의 의로움도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로마 권력에서 나오는 정의도, 이스라엘의 율법이 담보했던 의로움도 인류의 역사 속으로 바람과 같이 소멸해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646절을 통해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부정하기만 한 우리는 아무리 우리의 의를 드러낸다 해도 다 더러운 옷 같을 뿐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시들어 없어지는 잎사귀와 같을 뿐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를 보면 전혀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에게 나 같은 악한 인간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려 하고 희망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들고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우리는 희망 없는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살아갈 때 의로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노아 시대를 보십시오. 노아시대 사람들은 전부 자기 좋아하는 대로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결혼하고 먹고 마시고 신앙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습니다. 말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여호와 앞에서 명하신 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가 술 취하는 자인 것도 아시고 때로는 성격이 급해서 자녀들을 저주하는 그런 사람인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약한 존재임을 알고 계셨음에도 노아야! 네가 내 말씀 위에 서 있구나. 그러므로 너는 의로운 존재다.”

 

창세기부터 하나님의 의는 오늘 이 시간까지 변함없이 말씀 위에 서 있는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시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 있음으로 의로운 존재다.” 하는 의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의인입니다. 이전에는 악한 존재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 아래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당당한 의인의 삶을 살아가시는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

 

사람들은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는 것을 감사해 합니다. 나 자신이 공동체 안에서 잊혀진다는 것은 가혹한 일입니다. 만일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면 내가 잊혀져 버린 것인지 이 공동체 안에서 내가 존재감이 없어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우울하여지고 마음이 상해버리고 맙니다.

 

인기 연예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화려한 조명과 무대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데, 이전만큼 인기가 못해진다면 그들의 내적 고통은 말하지 않고 느껴보지 않더라도 얼마나 힘들지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요즘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SNS에 집착합니다. 나의 존재감을 과시하게 위해 SNS등에 사진도 올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글과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지 않고 나를 끌어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으로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영혼의 깊은 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셨나'라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도 주시고 기도하면 응답도 주시는데 내 인생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열심히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고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도 전혀 침묵하실 때를 영혼의 깊은 밤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깊은 밤의 시간들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다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굉장한 내공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노아의 가족들도 깊은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모든 사람들이 망하고 죽는 역사의 현장 가운데 노아의 아들과 며느리를 포함해서 8명만 탔습니다. 8명이 방주를 탄 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방주에서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자꾸 가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창세기 7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일단 문 닫고 방주에 들어간 이후에 40일 동안 비가 새차게 내렸습니다. 24절을 보시겠습니다.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이 장장 190일 동안 즉, 6개월 열흘 동안 방주에 짐승들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은 절대적인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그들은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시지는 않았는지, 방주에 타고 있는 시간들이 영원히 지속되면 어떻하지, 우리가 내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하면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 신이 나기도 합니다. 압제하던 애굽을 보면서 얼마나 신났을까요? 하나님은 우리편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대단히 큰 증거입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홍해를 건너간 것도 스케일이 큰 사건입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간 이후부터는 혼자서 걸어서 가나안 땅까지 가야만 합니다. 구름이 택시처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낮에는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와 밤에는 아주 차가운 추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 가운데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지는 않으셨는지 염려 됩니다.

 

우리가 은혜 받을 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기다림이 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노아와 가족들에게도 하나님과의 교제와 단절이 끊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기간이 있는데, 우리에게도 반드시 그러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81절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는데 노아와 그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방주 안에 들짐승들과 가축들까지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셨습니다. '기억하다' 라는 히브리어 단어 '자카르'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님의 가슴에 칼로 새기다' 라는 뜻입니다. 조각칼, 아주 날카로운 것으로 후벼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방주에 타고 있는 짐승들까지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의 가슴 속에 기억되었으으로 나는 너희들을 잊지 않는다. 염려하지 마라! 그러나 때가 되어야 내려줄 것이 아니냐? 물이 말라야 내려 줄 것이 아니냐? 기억하고 있으니 아무 염려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서서히 물을 빼고 계십니다. 물로 뒤덮였던 지구상에 물이 서서히 줄어들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시간 가운데 방주 안에 타고 있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답답해 죽을 지경입니다.

 

오늘 우리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 이 침묵의 시간이 영혼의 깊은 밤의 시간이 언제까지 입니까?” 원망이 이만큼 차오르고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포기하고 싶고 던져버리고 싶을 때 그때 '기억하사', '자카르' 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하나님의 가슴에 후벼 파듯이 나의 이름을 새겨주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기억하시고 그분의 가슴팍에 새기고 계신데 기억하지 못하고 알아드리지 못하고 원망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한다면 영혼의 깊은 밤을 넉넉히 건너갈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 하나 붙잡고 기다리다 보면 내 인생에 차올랐던 물도 빠질 것이고 답답했던 일도 해결될 것입니다.

 

9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약속이 나옵니다. 무지개 언약입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 땅을 멸하는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다시는이라는 말을 거듭해서 반복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노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시는 것이 더 상식적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노아야, 그리고 노아의 가족들아 봤지? 앞으로 나에게 충성된 삶을 살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렇게 다 멸해버릴거야. 모든 세상이 물에 잠기는 것 다 봤지? 앞으로 말 잘들어라.”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닐까 생각이 되어집니다. 아마 저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겁주지 않으시고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증거를 주셨습니다. 무지개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나님은 스스로 약속에 자기를 예속 시키셨습니다. 약속을 하고 나면 그 약속에 묶이게 됩니다. 새벽기도 나오겠다고 어떤 이와 약속을 하고 나면 계속 갈등합니다. 나간다고 하지 말걸. 왜 약속을 해가지고 이렇게 고민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약속은 약속 당사자인 우리를 예속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어기더라도 마음에 불편함과 죄송함과 죄의식이 남아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인간과 약속을 하셨겠습니까? 인간들이 어떤 존재입니까? 이렇게 약속하고서도 약속을 파기하고 또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스스로 인간과 약속을 하셔서 스스로 그 약속에 매이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무지개 언약의 약속을 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면서도 피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내가 다시는 이 사랑하는 우리 피조물들을, 내가 다시는 이 사랑하는 내 자식들을 내손으로 심판하지는 않겠다.”

내가 한 번 참아보겠다. 내가 앞으로는 더 참고 더 견디고 더 기다려보겠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무지개 약속 속에 자신을 예속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렇게 약속한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잘 지킬 것을 기대 하지 않으십니다. 다 알고 계셨습니다. 떠날 가능성도 알고 계시고. 더 큰 죄를 지을 가능성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무지개언약 이후에 인간세상을 보십시오. 역시나 인간들은 하나님앞에 많은 죄를 지으면서 노아 홍수의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은 노아홍수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 약속 속에 자신을 예속시킨 이후로 계속 참고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 마다 하나님의 피눈물을 보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후회하심을 보셔야 하고 하나님의 인간 사랑하심을 보실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걸어 놓으시고 오늘도 이를 깨물고 견디고 계시고 참고 계심을 느끼셔야 합니다.

 

하나님 인내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내가 다시는 인간의 행위를 보지 않겠다. 너희가 십자가 아래 숨기만 하면 구원하겠다.” 행위에 대해서는 눈감으시고 믿음만 보겠다는 거룩한 하나님의 결단입니다.

 

철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가슴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죄로 향하여 달려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눈물짓지 않게 해 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하나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0

 

역사가 발전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이전 세대에서 잘하는 것을 다음 세대에서 이어받는 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이전 세대에서 잘 못하는 것을 다음 세대는 잘 고쳐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가 되면 역사는 퇴보합니다. 원래 잘하던 것을 그만두거나 또한 원래 악했던 것을 강화시켜서 더 악하게 만드는 것, 이것은 역사가 퇴보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족보이야기는 역사가 퇴보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족보에 나오는 이름을 보면 대부분 모르는 사람의 이름만 잔뜩 나옵니다.

 

하지만 이 족보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보여 주고자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속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인간의 반응은 오히려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족보에는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이 등장합니다. 얼마나 많이 낳았는지 셀 수 없을 정도의 이름이 열거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도 나중에는 생략됩니다. 왜냐하면 그 외에 더 많은 사람들과 자손들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족보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나서 창세기 1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과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은 원죄가 아니라 원복(原福)이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복을 복되게 누리지 못하고 복으로 잘 간수하고 다스리고 그 복에 맞추어서 살지 못하고 방종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죄 때문에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죄(original sin, 原罪)입니다. 하나님은 그 후에 홍수를 통해서 인간을 땅에서 멸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신 첫 번째 말씀 또한 복이었습니다.

 

창세기 9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것이 원래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하셨던 말씀이 이 말씀이었는데 세상을 완전히 멸절하고 새로운 창조를 하시면서 노아와 그 자식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또 다시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늘 우리가 읽은 족보를 보면 얼마나 많이 생육하는지 얼마나 많이 번성하는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퍼져나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걸어놓으시고 내가 이 무지개를 볼 때마다 다시는 내가 너희를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지키면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번성하고 또 번성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 10장 말씀에 8절과 9절을 보면 특이한 이름이 나옵니다. 니므롯입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여호와 앞에라는 말은 여호와 before, ()이라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를 대적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니므롯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이름입니다.

 

함의 자손 중에 니므롯이라는 세상의 첫 용사가 나오는데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 이제는 대놓고 대적하는 사람, 이제는 하나님과 대하여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셈, , 야벳의 자손들 가운데 나타나는데 특히 함의 자손 중에 태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번성하게 만들어 주셨는데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의 약속을 지켜가며 그 약속을 이끌어 가시는데 인간의 역사는 반대급부를 향해 나아갑니다. 아담과 셋과 에노스의 자손들이 살던 시절에는 예배 공동체가 활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족보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에녹같은 사람, 하나님과 동행해서 악을 심판하고 죄악된 세상을 따라 살지 않다가 구원 받았던 노아같은 사람들을 이제는 족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니므롯 같은 사람의 후손들이 족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용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깁보르'(*)'강력한 세력을 지닌 자', '폭력으로 통치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또한 니므롯의 이름은 (*, '반역하다'란 뜻의 '대적자')입니다.

 

즉 아무는 여호와 앞에...사냥꾼이로다 - 하나님 앞에서 무례한 권세를 부리며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가리켜 니므롯에 비유한 속담이다.

 

앞선 역사가 악한 사람들을 심판했던 노아의 홍수와 같은 사건들을 보여 주었음데도 불구하고 무지개를 걸어 놓으시고 길이 참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용해서 악용하고 역행하는 이 인간의 오만하고 불순종한 모습을 오늘 이 족보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지개 언약 이전의 하나님 같으셨으면 결코 두고 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했기 때문에 세상을 심판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번성하도록 그냥 하나님은 두고 보십니다. 바벨탑 사건에서도 보시겠지만 언어를 혼잡하게해서 나눌지언정 이제는 인간을 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 이를 깨물고 참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를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우리의 역사를 부흥 성장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바벨탑의 교훈 (11)

 

요즘은 자녀를 가지면 보통 태명을 짓습니다. 태명에는 뱃속에서부터 이렇게 자라다오 하는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이렇게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아이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것이 아이를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이름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당신의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십계명 세 번째 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의 이름보다 높이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이름을 더 높은 곳에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은 시날 평지에 세워졌습니다. 시날 평지는 우리가 처음 본 장소가 아닙니다.

 

109, 10절을 보시면 니므롯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9절 보시면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에 바벨과 에렙과 악갑과 갈렙에서 시작되었으며 여기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은 대적하다라는 의미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니므롯, 그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가 시날 땅 바벨입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바벨에서 성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벨탑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시면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큰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탑을 쌓는 목적이 자신의 이름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그 탑 꼭대기에 세워서 높아지려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니므롯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었고 그 후손들이 바벨에 쌓은 성은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그들의 욕망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이들의 시도를 하나님이 그냥 가만히 두고 보셨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을 어떻게 쌓는지 보려고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이후에 무지개 언약을 세우신 이후에는 그 언약 속에 자신을 속박하심으로 함부로 인간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간의 이런 악한 시도, 이런 교만한 시도를 그냥 두고 보시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 당시로써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탑을 높이 쌓아 올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많은 건축자재들을 땅에 쌓아 두었을 것입니다. 최첨단 기술을 가진 인부들이 그 자리에 모였을 것입니다. 이제 시작해서 탑을 높이 쌓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말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바벨탑 시도는 무산되고 그들은 자기들이 쓰는 언어대로 각기 나라대로 다 흩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이야기와 비슷한 일들이 우리 인생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살면서 이름을 내기 위하여 시도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인들도 자기 이름을 내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모함하고 거짓말을 합니까? 교회도 자기 이름을 내려고 시도하는 교인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시끄럽습니다. 오늘 이 나라가 왜 이렇게 국론이 분열되어 있습니까? 오늘 이 나라가 왜 이렇게 같은 말을 쓰면서도 서로 못 알아듣는 것입니까? 같은 나라 같은 땅 같은 나라의 말을 쓰면서도 서로 나누어지는 것은 자기의 이름을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름을 죽일 때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기의 영광과 교만을 죽일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때 공동체가 하나가 되고 살아납니다. 본문의 이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탑을 쌓아서 내 이름을 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이면 예배드리기 원하십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내 이름을 없애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지우는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나면 내 이름이 지워져야 합니다. 내 이름 석자가 지워지고 내 존재가 지워지고 내 잘남이 지워질 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흩어짐을 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바벨탑 이야기는 이 당시에만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이 나라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였으면 내 이름을 지우고 예배드리는 일에 내 이름을 지우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정말로 우리가 흩어짐을 면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이름만 드러내고 내 이름은 다 없애고 내 이름은 숨기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늘푸른 은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