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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 유적지

by 은총가득 2021. 2. 4.

 ♣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여름에 갔었던  종교개혁지 중 대표주자인 "마틴루터"의 발자취를 

    떠올리며  마틴 루터의 유적지를 올려 드립니다.     <사진과 글은 다른분 것입니다>

 


독일에는 ‘루터의 도시’가 둘 있다. 그가 나고 죽은 아이슬레벤과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린 비텐베르크다. 비텐베르크에는 파문당한 루터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루터 하우스가 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두꺼운 나무로 짠 아주 오래된 함(函)이 하나 있었다. 단단한 철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위쪽에는 동전을 넣는 구멍도 있었다. 종교개혁을 촉발한 도화선, 면죄부 함이었다.

 

종교개혁


당시 테첼이라는 가톨릭 수도사는 “금화가 면죄부 헌금함에 떨어지며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죽은 자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설파했다. 그가 도시를 돌아다니며 이런 설교를 할 때마다 면죄부 판매는 성황을 이루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중세 때는 달랐다. 사람들은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때는 인쇄술도 없었다. 책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손으로 일일이 필사를 해야 했다. 책 한 권 필사하려면 족히 두 달은 걸렸다. 게다가 성경은 라틴어 성경뿐이었다. 성직자나 학자들만 읽을 수 있었다. 수도원의 수사들이 주로 하는 일이 라틴어 성경을 필사하는 일이었다.

 

 

루터 당시에 그려진 면죄부 판매 모습을 담은 삽화. 면죄부를 팔고 있는 수도사의 머리 위로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면죄부를 사면 죽은 이의 영혼도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필사본 성경의 가격도 엄청났다. 농장을 하나 팔아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두꺼운 종이에 필사한 책이라 부피도 굉장했다. 성경 66권을 보관하려면 커다란 서가가 필요할 정도였다. 당시에는 성경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수도원도 드물었다. 라틴어도 모르고 돈도 없는 서민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가질 수도 없었다. 테첼 같은 수도사가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게 된다”고 황당한 주장을 해도 당연히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여겼다. 성경의 메시지는 오직 성직자의 입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면죄부 함 앞에 섰다. 눈을 감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돈을 넣었을까. 그리고 기도했을까. 구원받게 해달라고. 천국행 티켓을 얻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까.’ 궁금했다. 중세 암흑기의 굴절되고 왜곡된 종교적 풍경이 과연 ‘2017년 한국 교회’와는 무관한 것일까. 행여 면죄부 함이 헌금함으로 이름만 바꾼 것은 아닐까. 지금도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못 본 척하며 ‘천국행 티켓’만 좇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오늘날의 면죄부’만 찾고 있는 건 아닐까.


 

보름스의 광장에는 종교개혁가의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존 위클리프는 성경 해석의 민주화와 대중화를 주창한 인물이다.

종교개혁사에서 마르틴 루터(1483~1546) 이전에 체코의 얀 후스(1369~1415)가 있었고, 후스 이전에 영국의 존 위클리프(1320~1384)가 있었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ㆍ철학부 교수였다. 당시 유럽은 아수라장이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1348~50년에만 무려 2500만~3500만 명이 사망했다. 유럽 인구의 30%가 죽어갔다. 그런데도 교회는 타락한 채 권력욕과 면죄부 판매에만 열을 올렸다. 위클리프는 “그리스도는 가난하게 살았다. 이 땅의 권세를 거절했다. 그런데 교황은 그걸 갖지 못해 안달이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교회의 머리다. 교황은 적그리스도의 화신이다.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리려는 죄인이다”고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뿐만 아니었다. 위클리프는 “누구나 성경을 탐구할 권리가 있다”며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들을 모아 라틴어 성경을 모두 영어로 번역했다. 결국 ‘이단’으로 몰린 위클리프는 대학에서 쫓겨났다. 위클리프는 이단 선고를 받고서 연설을 하다가 쓰러져 죽었다. 그가 죽자 콘스탄츠 공의회는 무덤에서 그의 시신을 다시 파내 화형에 처했고, 재를 강물에다 뿌렸다. 당시에는 유골이 부서지면 다시 부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는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위클리프가 가난한 사제들에게 성경책을 나누어 주고 있다.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필사본 성경의 가격이 엄청나게 높았다.

 

 

종교재판을 받으며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는 존 위클리프. 그는 이단 선고를 받고서 연설을 하다가 쓰러져 죽었다.


루터하우스 안에는 당시에 썼던 벽난로와 나무 테이블 등이 놓여 있었다. 루터는 저 옆에서 불을 쬐며 위클리프와 후스의 정신을 고민했으리라. 종교개혁의 여명기. 어둠은 짙고, 또 길었다. 새벽을 미리 알고 울던 선각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많은 위클리프파와 후스파가 루터 이전에 처형을 당했다.

 

 

가톨릭에서 파문 당한 루터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비텐베르크의 루터하우스. 1631년에 화재로 소실됐다가 복원됐다.


나는 독일의 아이슬레벤으로 갔다. 루터가 태어나고 죽은 곳이다. 예전에는 동독 땅이었다. 아이슬레벤 시 청사 앞에는 루터의 동상이 서 있었다. 통독 직전에는 그곳에 동독인들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고 한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업자였다.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루터는 폭풍우 속에서 벼락을 만났다.

 

 

루터가 태어난 고향인 아이슬레벤. 말년에 루터는 고향으로 와서 죽음을 맞이했다. 시청사 앞 광장에는 지금도 루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했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던 루터는 그때 “살아난다면 수도자가 되겠다”며 성 안나(광부들의 수호 성인)에게 약속했다. 목숨을 건진 루터는 아버지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자가 됐다.

루터의 벼락체험. 나는 그게 ‘두려움’이라고 본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갖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불안이다. 벼락을 통해 그걸 체험한 루터는 결국 자기 삶의 방향을 틀었다. 루터는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가 머리를 깎고 수도자가 됐다.

 

 

아이슬레벤 시청사 앞 광장에 세워져 있는 마르틴 루터의 동상. 그는 라틴어로만 돼 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나는 궁금했다. 종교개혁가 이전에 루터는 가톨릭 수도자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무려 15년을 보냈다. ‘수도자 루터’의 삶은 어땠을까. 그것이 그의 종교개혁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런 물음을 안고서 나는 에어푸르트로 갔다. 그가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가톨릭 수도자로 출가했던 에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루터는 꽤 고지식한 편이었다. 원칙을 엄수하는 스타일이었다. 수도원의 겨울은 춥다. 불을 때지 않는다. 온기가 있는 공간은 부엌이 유일하다. 루터는 고행을 자처했다. 한겨울에 담요만 덮어쓴 채 3일씩 금식하기도 했다.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1분도 채 안돼 뛰어가 고해성사를 다시 하곤 했다. 그걸 수차례나 되풀이했다.

오죽하면 담당 사제가 “제발 나가서 제대로 된 죄를 짓고 다시 오라”고 했을까. 그만큼 루터는 죄에 대한 강박증이 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고해소(告解所) 바로 앞에는 아예 ‘루터의 계단’이 있었다. 고해성사를 마친 루터가 이 계단을 다 오르기 전에 다시 뛰어가 고해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수사 시절의 마르틴 루터.


루터는 왜 그랬을까. 당시 교회가 내세우는 신은 ‘심판의 하느님(하나님)’이었다. 교회는 끊임없이 ‘죄’를 강조했다. 죄를 강조할수록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그래서 구원에 매달린다. 사람들이 구원에 매달릴수록 면죄부가 많이 팔린다. 결국 교회의 힘과 영향력이 커진다.

어찌 보면 1500년 전과 지금은 닮았다. 요즘도 적지 않은 목회자가 ‘죄를 강조하는 마케팅’에 몰두한다. ‘죄 짓는 인간과 심판의 하나님’이란 대립적 구도를 유달리 강조하며, 신자들 내면의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에 불을 붙이고 부채질한다. 그러니 “면죄부를 사면 구원을 받는다”는 중세 때 주장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요즘 주장은 어떤 면에서 상통한다. 만약 거기에 ‘자기 십자가’가 빠져 있다면 말이다.

루터는 절망했다. 그는 ‘심판의 하나님’을 미워했다. 심지어 “원죄로 인해 영원히 저주받은 죄인들에게 십계명의 율법으로 다시 억압하는 하나님을 나는 용납할 수가 없다”는 고백까지 했다. 훗날 루터는 로마서를 읽다가 깨달았다. 인간이 쌓아가는 의(義)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義)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짐을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걸 루터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라고 표현했다. 이게 루터 신학의 핵심이다.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던 성경. 루터는 독일어의 언어적 명료함과 아름다움까지 정리하고 되살려 냈다고 한다. 성경의 중간중간 삽화가 들어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루터의 ‘오직 믿음’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고, 십일조를 하고, 다른 종교에 눈을 돌리지 않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오직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교회만 나가면 ‘오직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도대체 ‘오직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건 ‘눈’을 빼는 일이다. 나의 눈, 에고의 눈을 빼는 일이다. 예수는 그걸 ‘자기 십자가’라고 불렀다. 그렇게 ‘눈’을 빼며 나(예수)를 따르라고 했다. 그게 ‘전적인 항복(Total surrender)’이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보여준 것도 ‘전적인 항복’이었다. 왜 그럴까. 그럴 때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의(義)’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루터가 강조한 '오직 믿음'에는 자기 십자가를 통한 '전적인 항복'이 전제돼 있다. 그럴 때 '오직 믿음'이 이루어진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다. 그럼 ‘하나님의 의(義)’는 무엇일까. 신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함이다. 그러니 ‘에고의 눈’을 갖고서 그 속성에 부합하긴 어렵다. ‘에고의 눈’이 빠질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속성으로 녹아든다. 그게 ‘체다카’다. 루터의 ‘오직 믿음’에 담긴 깊은 영성이다.

해가 떨어졌다. 종교개혁 순례의 여정은 이제 ‘루터의 혁명적 삶’을 향하고 있었다.


[출처: 중앙일보] 종교개혁, 현장을 가다(중)-독일 아이슬레벤


마틴루터가 종교재판을 받던 곳과 하이델베르그 고성의 철학자의 길

 

 

마틴루터가 종교재판을 받던곳은 보름스대성당이 있던곳이며 보름스대성당 바로 인접한 넓은 광장이 있는데 예전에 마틴루터가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틴루터가 서있던 그 자리 마틴루터의신발이 철로 되어있는데 마틴루터는 이곳에서 서서 재판을 받았다네요
마틴루터의신발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마틴루터가 서서 재판을 받앗던 곳

:♣ 필자도  신발을 신어 보면서 무척 감동을 받은 곳입니다. ..

죽음을 무릅쓰면서 진리를 수호했던 마틴 루터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황앞 선 마틴 루터...
마틴루터의신발도 신어보고....
마틴루터는 1517년 면죄부의 95개 논제문제로 1521년3월 파문 당한뒤 피신하기에 이릅니다
영지 바르트부르크의 도움으로 10개월간 망명생활 즉 도피생활을 하게되는데 이때 그는 수염을 기르고 변장을하여 도피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공원바로 앞에는 마틴루터를 비롯한 얀후스등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의 동상이 2007년에 만들어져 기독교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만들어졌어요

 

 

여기에는 그 당시의 수 많은 종교개혁자들의 동상이 세워졌지요

 

 

 

이곳을 뒤로하고 하이델베르그성으로

하이델베르그성도 마틴루터와 연관된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 예쁘고 아름다운 성입니다

 

물론 철학자의길도 있구요

 

당시에 만들어 먹던 커다란 맥주통은 사람키 2번이상되는 지름이 3미터는 더 되어보이더라구요

 

 

 

이 하이델베르그 성에는 지금도 예전의 모습대로 일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 필자도 이길들을 걸었었다....

 

 

♣ 필자도 이곳에서 사진을 ...


마틴루터 유적지 탐방..

 

      

                    * 이 거대한 교회 안에 있는 루터의 묘

 

 

-세계최초라고 우겨 대던 비텐베르크 금속 활자기

(마틴루터는 이 금속활자기 덕분에 종교개혁을 할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에는 정보를 퍼 뜨릴수 있는 수단이 입소문과 육필 정도였을텐데 이 금속 활자기가 등장하면서

대량 복사를 통하여 순식간에 많은 량을 살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인터넷에 버금가는 신 기술이었을 것이다.

독일은 이후 이 금속 활자 기술로 인하여 문학이 번성하는 황금기를 맞이할 수 있었고 세계문학에 우뚝서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에 중심에 등장하는 인물중에 한사람 부인 까뜨리나 이다.

(부인 까뜨리나는 수녀였었는데 신부이던 루터와 결혼하고 돈을 버는 재주가 특출나서 그 번돈으로

마틴루터의 든든한 정신적, 물질적 후견인으로 지원을 한다.)

 

♣ 억척스럽게 내조했던, 마틴루터의 부인, 아마도 그녀가 없었다면..... 한마디로 까뜨리나는 내조의 여왕입니다.

남대접하고 퍼주기 좋아하는 마틴루터는 매일 수십 수백명의 손님을 치루었다고.....

* 필자도 이 여장부의 손을 잡고 사진을...

 

 

-루터가 태어났던 생가

 

 

 

 

-루터가 청년시절 다니던 대학

 

 

-루터가 세례를 받았던 성당

 

 

-루터가 신부로써 첫 설교를 했던 장소

 

 

-설교를 벌이는 루터

 

 

-루터가 과객들과 밤샘 토론하고 논쟁을 벌이던 골목집들 / 훗날 그들은 모두 루터의 지지세력이 된다.

 

-루터의 기념관

 

 

-루터의 생가 골목에 현재모습

 

 

 

-루터가 숨을 거둔 집

 

-루터의 생가에 세워진 흉상


마틴루터 4

 

비텐베르크 (Wittenberg)

1990년까지 동독땅 작센주에 속하였던 Wittenberg 는 이제 다시 통행이 자유로운 독일연방으로 예전의 루터도시로 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이 방문을 하고 있다. 동독당시 발전이 없이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이 도시는 다시 정부와 주의 집중적인 투자로 인하여 예전의 깨끗한 도시의 모습을 다시 찾았다.

오늘은 종교개혁의 중심인 Wittenberg 을 찾아 개혁자들의 흔적을 찾아 하나하나 자세한 설명을 사진과 함께 올린다. 오랜전부터 꼭 방문하고 싶었던 도시로 독일인들에게 그리고 개신교인들에게는 하나의 성지와 같아 5만의 인구임에도 구도시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인구 5만의 작은 도시를 기차로 찾아 차가 없이 하루종일 걸으면서 유럽의 어두운 중세에서 사람들을 성경과 바른 신앙으로 변화시켜 근대화로 가는 인류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활을 감당하는 마틴루터를 읽고 싶었다. 여름날임에도 썰렁한 날씨는 간편하게 입은 여름복장을 춥게한다. 기차역에서 방향을 잡아 시내로 들어가기 전 커피한잔이 생각나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 것도 없다. 날씨도 썰렁하고 역주변도 썰렁하여 역사를 찾아 먼거리를 달려온 순례자의 마음도 찬기운이 돈다. 따듯한 차한잔이 간절한 날씨에 아무 것도 없는 역주변은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을 찾는 도시의 첫인상에 실망이 된다. 시내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면서 눈에 띄는 낯익은 건물들. 사진으로 보아 언제 와보았던 도시같이 반갑다. 낯섫음이 없이 시내 초입에 있는 루터의 집과 대학 그리고 멜랑히톤교수의 집이 한눈에 보인다. 평형으로 곧게 시내를 들어가는 두개의 길은 차의 집입을 막고 사람만이 다니는데 길위에 서서 보는 시내는 루터가 설교를 하던 교회 그리고 궁정교회의 종탑이 한눈에 보이면서 신앙의 교향에 온 착각 가운데 여기저기 들러본다.

 

Wittenberg 시는 개혁자 마틴루터로 인하여 항시 감사를 하고 있다. 아무런 보잘 것없는 작은 도시였던 독일 북동쪽 한구석에 위치한 도시에 루터는 거의 그의 생애를 보내었다. Johann von Staupitz (스타우피츠, 비텐베르크대학의 신학박사)가 1511년에 루터를 이도시로 데려온다. 그 후 루터는 그의 생애 마지막 1546년 까지 이 곳에서 살게된다. 그와 그의 개혁으로 인하여 이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뜻있는 도시로 1996년에는, 종교개혁에 관계된 궁정교회, 시교회, 그리고 루터의 집, 메랑히톤의 집을 죽연결하는 두개의 길 주변이 UNESCO 로 등록이 되는 영광을 얻는다.

 

1293년에 도시는 정식으로 시로 등록이 되며, 1502년 프레드릭현자 ( Kurfuerst Friedrich der Weise 1463-1525)가 Loucorea 대학을 세운다. 1817년 도시는 인근 Halle (할레) 라는 도시와 합병이 되면서 Wittenberg 라는 도시명으로 프로이센에 속하게 되었다.

 

1508년 루터는 대학에 교수로 이 곳을 오게되며, 그후 1511년으로 신학교수로 이도시에 아주 이사를 온다.

1514년 부터 시교회 (Stadtkirche)에 설교를 맡게 되었으며, 1515년에는 아우구스틴 수도원 부주교를 역임한다. 당시 구교에서 베드로성당건축비와 독일 마인츠 성당을 짓는 건축비를 충당하기위해 테첼은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판매하려, 작센왕국의 선제후인 현자프레디릭에게 허락을 신청하나 선제후는 자신의 지역에서는 절대로 면제부 판매를 금하여, 그는 작센경계지역 인근에서 판매를 한다. 그 면죄부 구입을 위해 미사를 빠지는 교인들을 보면서 루터는 신앙 가운데 잘못 전하여지는 구원의 진리를 바로잡으려 궁전교회의 나무문에 95개 논제를 걸면서 구교의 면제부판매 문제는 전국으로 확산하게 된다.

 

로마 교황의 친서로 인하여 1524년 루터는 수도사의 옷을 벗고, 시 최고신부이며 감독관이던 Johannes Bugenhagen과 개혁의 사역을 시작한다. 교황의 친서가 도착하기전, 교황의 편지를 불에 태운 사건과, 당시 수녀였던 Katharina von Bora와의 결혼은 당시 구교사회에선 큰 사건으로 유럽전체에 퍼져나간다. 이 결혼식을 기념하여 비텐베르크는 매년 루터의 결혼날자인 6월에 축제를 정기적으로 연다.

 

Philipp Melanchthon, Johannes Bugenhagen, Justus Jonas 그리고 Georg Spalatin 은 유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개혁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이도시에 모여 계획하게 된다. 멜랑히톤과 루터가 대학에서 개혁에 관한 강의로 인한 영향 그리고 Cranach(크라나하)의 그림과 인쇄술로 인하여 개혁의 이름으로 참기독교신앙은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이들의 종교개혁의 역사는 이도시를 개신교 가운데 정신적인 성지로 만들어 지역경제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역사는 신의 섭리가운데 만들어져 간다는 것을 루터의 개혁과 그 주변을 보아 다시 확인한다. 당시 선제후로 신성로마제국이였던 지금의 독일지역은 항시 황제를 선출하는데 그 가운데 4명의 강력한 왕가의 제후가 맡고 있다. 그 선제후 가운데 작센의 제후가 들어간다. 당시 프리드릭현자 선제후는 당시의 구교의 잘못됨을 강하게 주장하는 바른 신앙을 가진 제후였으며, 그 작센왕국안에 비텐베르크에서의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의 힘과 바른 신앙으로 보호되고 발전되어진다. 당시의 황제인 칼도 Worms 제국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꺽지않는 루터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법으로 보호 받는 것만을 제재하게된다. 그러한 루터를 길에서 강도에게 납치되는 것과 같은 꾸며 프리드릭현자는 루터를 자신의 왕국안에 있는 바트부르크성에 은신시킨다. 재미있는 점은 그와 루터는 살아서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한다.

 

 

 

비텐베르크 구시가지의 모습이다. 가운데 교회가 시교회인 성마리안교회이다. 교회 바로 앞 광장이 시장광장이며 광장 흰색건물이 시청사이다. 오른쪽길위로 가면 루터의 집, 멜랑히톤의 집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대학건물이 나온다. 사진에 광장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궁정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중앙역에 내려 도보로 가능하며 모든 루터와 개혁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을 천천히 걸어서 방문 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시청 가운데 보이는 두개의 동상은 시청사를 바라보면서, 왼쪽이 멜랑히톤, 오른쪽이 루터의 동상이다. 궁정교회 안에 안치되었으며 준비된 묘비도 이와 같이 배치되어 있다. 이 두사람은 개혁의 동지로 죽어서도 같은 장소에서 묻히면서 연혼가운데서도 좋은 친구로 지낼 것 같다.

 

시청광장의 모습이다. 뒤에 보이는 교회가 시교회, 성마리아교회이다.

광장에서 아래로 보이는 궁정교회이다. 이 교회는 1760년 7년 전쟁시 불에 타서 심하게 무너지게 되며, 루터의 95개 논제를 걸었다는 교회의 나무문도 당시에 타버려 1858년에 청동으로 문을 다시 만들게 된다. 교회 탑의 모습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내용으로 한 찬송가인 "내 주는 강한 성이요" 384장을 탄생시킨다.

 

 

95개 논제가 걸린 나무문은 1760년 7년 전쟁으로 불타 없어지고 이 후 청동으로 루터의 375년 탄생일 기념으로 다시 만들어 지금은 95개의 논제가 독일어로 문에 새겨져있다. 당시 실제로 루터는 이 교회의 나무문에 논제를 못박았는가 라는 의문은 많은 추측을 낳고있으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시의 전통 가운데 싹을 내려 전국, 전유럽으로 번지게 된다.

 

궁정교회에 있는 루터의 무덤이다.

 

대학인 Loucorea (로이코레아) 광장이다. 1502년 프레드렉현자가 만든 대학으로 루터개혁으로 매우 유명하여진다. 이 대학에서 루터는 1512년 교수로 활동하며 400명 학생들 앞에서 잘못된 구교의 부조리와 개혁에 대하여 강의를 하는 역사적 대학이다. 이 대학에서 조금 늦게 멜랑히톤교수는 그리스어 교수로 활동한다. 대학은 1817년 Halle 시와 병합이 되면서 대학도 Halle-Wittenberg 대학으로 바뀐다. 1995년 시는 이도시를 아카데미도시로 다시 성장시키기위해 이 건물에 재단을 만들어 시작한다.

 

루터의 집이다. 1504년에서 1507년까지 검은 수도원으로 만들어 진다. 1508년 루터는 이 수도원에 입교를 하며, 1523년 이 수도복을 벗으면서 수도원을 떠난다. 제후인 요한은 이 수도원을 1532년 루터에게 선물하여 루터는 부인 카타리나와 6명의 자식들과 이 건물을 집으로 사용한다. 정원 가운데 걸어가는 여인이 부인 보라이다.

 

 

루터의 거실이다. 이 거실에서 많은 사람들과 개혁에 대하여 논제하였다.

 

 

루터의 친구 멜랑히톤의 집이다. 루터의 집과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루터집의 정원이다.

시교회의 전경이다.

<글: 독일 거주 한인 DS Park>


 

베르린 대성당과 마틴루터교회

 

표시하기

 

▼ 베를린 대성당고대박물관 옆에 위치하고 있다

 

 

▼ 베를린 대성당1747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 검게 그을린 듯한 벽면푸른빛의 돔 지붕으로 되어 있다

 

 

▼ 2차 대전 당시 엄청난 폭격을 받아 본래의 화려함을 거의 소실하고...

 

 

▼ 지금의 모습은 처음에 비하면 아주 단순하게 바뀐 것이라고 하니....

 

 

▼ 처음 베를린 대성당의 위풍 당당함이 어느 정도 였을지 짐작 해 볼 수 있다

 

 

▼ 베를린 대성당은 원래 프로이센 왕과 독일제국 황제를 배출한 명문가인

호엔촐레(Hohenzolle)가문의 묘지 용도로 지어진 성당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안에 들어가면 눈부시게 화려한 호엔촐레 가문의 관(冠)들이 있다

 

▼ 나치와 DDR정권은 이곳을 시위와 퍼레이드하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베를린 대성당 바로 앞에는 루스트가르텐(Lustgarten)이라고 하는

넓은 잔디 정원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 저녁이 되면 베를린 대성당의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많은 여행객들이 모여든다

 

 

 

 

▼ 대성당 입구 현관위에 그려진 '예수와 12제자'

 

 

 

 

종교개혁자 마틴루터교회

 

▼ 성채 안에 있는 마틴루터 무덤의 동판

 

 

 

▼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양편에 꿇어앉은 마틴루터와 신학자 멜란히톤

아래의 병풍같은 것은 '성채교회 대문의 95폭 테제기록

 

 

▼ 마틴루터의 젊은시절 초상화

 

 

▼ 루터 하우스 안 큰강의실에 있는 제후들의 그림

 

 

▼ 대예배실의 모습

 

 

 

 

 

▼ 스테인드 글라스와 천정의 모자이크화가 아름다운 대성당 안에서는

종종 오르간 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 예배실 정면에 설치된 대형 파이프올갠

 

 

 

 

 

▼ "루터 장미'라 불리는 문장

 

 

▼ 루터하우스 정원에 세워진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

 

 

독일 오페라 극장(Deutsche Staatsoper Berlin)은 '베를린 국립 가극장'으로도 불리운다

 

 

▼ 오페라극장 건물 위의 조형물

 

 

프로이센의 영광을 구현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명으로 1742년 12월 7일

개관한 왕립 가극장(Koenigliches Hofoper)이 그 전신으로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 베르린     페르가몬 고대박물관

 

 

 

 

 

 

 

 

 

                 <가져온 글과 사진>

 

♣ 혹시 마틴루터의 유적지를 안가보신 분께 꼭 보시길....... 적극 추천합니다

볼것도 많은데다가 아주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