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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마틴루터의 95조항 8가지 주제 분석" 및 생애와 사상

by 은총가득 2021. 2. 4.

 

"마틴루터의 95조항 8가지 주제 분석"

당시 면죄부 판매원들은 "면죄부를 사는 순간 영적인 은혜를 얻기 때문에 자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면죄부를 살 수 있으며 이때도 고해성사나 회개의 필요가 없이 오직 돈만을 가지고 오면 연옥의 영혼이 구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마틴루터는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며,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붙였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마틴루터가 작성한 95개 조항의 원제목은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 전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당시 잘못된 가르침을 외치고 다녔던 설교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95개의 조항 전체를 일일이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95개 조항을 8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속죄 규정에 관한 문제점(1-4조)
2) 교황의 사죄권과 한계(5-7조)
3) 속죄의 권한 및 연옥에 있는 영혼의 구원 문제(8-29조)
4) 면죄부와 사죄권의 문제점(30-40조)
5) 면죄부의 구입 및 사면권의 남용(41-52조)
6) 면죄설교의 문제점 및 복음 설교의 비교(53-80조)
7) 면죄부 남용에 따른 질문 및 시행에 대한 논박(81-91조)
8) 십자가 신학과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교훈(92-95조)

1) 속죄 규정에 관한 문제점(1-4조)
루터는 고해성사와 진정한 회개의 차이점을 밝힙니다. 루터의 기본적인 인식은 단순했습니다. 성도들이 진정한 회개를 하고 그 표시로서 돈을 주고 면죄부를 구입하여,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였다면 문제가 없지만, 진심의 회개를 하지 않은 자가 돈으로 면죄부를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돈으로 사거나 팔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마음의 변화가 필요함을 말했습니다.

2) 교황의 사죄권과 한계(5-7조)
교황이나 교회의 성직자들은 단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규정으로 용서를 선포할 뿐, 죄에 대한 사면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면권이란 어떻게 죄를 사면 받는가에 대한 것인데, 돈을 받고 면죄부 (혹은 사면부) 를 발행하는 교황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며, 루터는 로마 교황권의 본질에 대해 강력한 불신을 제기합니다.

3) 속죄의 권한 및 연옥에 있는 영혼의 구원 문제(8-29조)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연옥을 강조한 것은 면죄부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당시에는 성지순례를 다녀오면 연옥에 머무는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만일 순례여정을 갈 수 없다면, 돈으로 면죄부를 구입하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왜곡에 대해 루터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어느 경우에든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면죄부를 구매하는 것은 가치가 없음을 주장했습니다. 특별히 22조에서 루터는 연옥에 있는 죽은 자들에게 교황이 속죄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제기하였습니다: "교황이 연옥에 간 영들의 죄를 사면할 수 없다. 이는 그 영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교회법대로 속죄행위를 했어야 할 것이었다."

4) 면죄부와 사죄권의 문제점(30-40조)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대해 반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 근거하여 죄의 문제를 깊이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인간의 공로나 선행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루터는 주장하였습니다. 루터는 특별히 31조에서 진정한 회개를 강조했습니다: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드문 것 같이 면죄부를 진심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32조에서는 면죄부를 강력히 신뢰하는 미신적 행동을 지적합니다.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루터는 면죄부를 구매하고자 돈을 지불하는 것은 돈을 낭비하는 일이라고 확실하게 지적했습니다.

5) 면죄부의 구입 및 사면권의 남용(41-52조)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을 위하여 면죄부를 발행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교황 뿐만이 아니라, 다른 주교들도 교황으로부터 면죄부 판매 허용을 받아 면죄부를 판매하였으며, 그 돈으로 교황에게 자금을 상납하였습니다. 어느 날 루터는 한 일행이 교회 앞마당에서 각종 심리전을 펼치면서 면죄부가 연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효력이 있음을 설득하는 호객행위를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52조에서 면죄부 남용의 비극을 지적합니다. "면죄부에 교황이나 혹은 어떤 감독이 보증을 선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구원 얻을 가망은 없는 것이다."


6) 면죄설교의 문제점 및 복음 설교의 비교(53-80조)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만일 어떤 성도가 술에 취한 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구입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방식은 십자군 원정대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고해성사를 통해서 해결을 받는 가장 흔한 죄 사함의 사례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죄의 본질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은총과 만족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또한 사면권을 주장하는 자들이 성경을 선포하지 않고, 오히려 면죄부 판매의 정당성에 더 많은 시간을 부여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내용의 설교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행동이 됩니다.

7) 면죄부 남용에 따른 질문 및 시행에 대한 논박(81-91조)
하나님께 선행이 부족하거나, 죄를 회개하지 못하였거나 고해성사를 다하지 못하여 연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면죄부를 구입하는 것이야말로 중세 말기 가장 왜곡된 일이었습니다. 면죄부 판매자들은 면죄부를 많이 사도록 죄책감을 자극했습니다. 이에 루터는 어떻게 교황은 돈을 받아야만 사면권을 행사하느냐고 반박했습니다.특별히 82조는 루터의 파문을 당하는 빌미를 제공했던 주요한 논제로, 직접적으로 교황을 공격했다고 여겨지는 논제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을 전혀 공경하지도 않는 자들이, 면죄부만 구입하면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는 교황권의 행사는 무의미함을 주장했습니다 (84조).

8) 십자가 신학과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교훈(92-95조)
95개 조항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용들은 루터의 초기 개혁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학이 반영되어있습니다. 루터는 영광의 신학에 대조되는 개념으로 십자가의 신학을 강조하였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따라가는 길을 의미했습니다. 92조부터는 마치 루터의 설교와 같고, 절규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평안하라 평안하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평안이 없는 선지자들은 다 떠나라고 말씀하였다"(겔 13:10, 16; 렘 6:14, 8, 11; 살전5:3).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를 지라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93조). 그리고 마지막 두 조항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훈련과 고난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94조) 이같이 하여 역시 면죄부를 구입한 자들에게 평안의 위안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95조)"(행 14:22).

지금까지 살펴 본 8가지 주제를 분석해 볼 때, 첫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는 당시에 잘못된 상황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면, 마지막 8번째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92~95조: 십자가 신학과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교훈
92.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 가라.
93.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그리고 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94.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죽음, 지옥을 통하여서 그들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95. 그리고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평안의 보장에 의해서보다는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

마지막 4개의 조항을 통해 봤을 때, 루터는 특별히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며, 진실한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권면했습니다.


1521년 4월 18일, 루터는 재판장에서 수 많은 군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최후의 진술을 하였습니다.
“존경하신 폐하와 높으신 분들께서 단순 명료한 답변을 요구하시므로, 저는 아무런 주석도 단서도 붙이는 일 없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성경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성에 의하여 다른 확신을 갖지 않는 이상,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들에 의해 사로 잡혀 있으며,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안전한 것도 옳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떻게 다른 방도를 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섰으니, 하나님이여 도우시옵소서. 아멘.”

출처: .tistory.com/74


마틴 루터의 생애와 사상

-믿음으로 살리라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롬 1.17).

 

 

종교개혁이란 16세기 유럽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의 오류와 윤리적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일어났던 신앙운동이었다. 그 결과 개신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한편 독일 종교개혁의 봉화를 올렸던 루터는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1. 종교개혁을 배우는 의미

 

개신교회(Protestant)란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를 제외한 종교개혁 이후에 출발한 대부분의 교파를 의미한다. 개신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신구약성경, 사도신경, 그리고 삼위일체교리와 기독론을 공유한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종교개혁 과정에서 로마가톨릭교회와 중요한 신학적 차이가 발행했다. 그러한 차이점을 이래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

 



  1. 개신교회의 입장에서 배타적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발전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2. 또한 다른 교파들의 장점과 단점을 배울 수가 있다. 역사 속에는 자신들의 교파만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교파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배타적인 태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나누는 잘못된 태도였다.
  3. 이단에 바르게 대처할 수 있고,
  4. 교회가 윤리적 ㆍ교리적으로 잘못을 행할 때 교회와 자신을 개혁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다수의 개신교회 교인들은 종교개혁 전통과 자신들이 속한 교회의 독특한 신학적 특징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에 흔들리거나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말은 영어로 'Re'와 'Form'의 합성어인데 “본질로 돌아간다”는 뜻이 있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운동이 아니고 본래 신앙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분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에 기초하여 교회를 개혁하려 했던 그들의 노력은 교권에 의해 거부되었고, 양자 사이에는 교리적ㆍ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면서 결과적으로 개신교회는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1999년 10월 31일 교황청의 대표와 루터교회의 대표는 지난날 서로 정죄했던 것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데 일치를 보았다. 이것은 478년이 지나서 이루어진 화해였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 당시와는 다르게 많은 변화와 개혁이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교리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2. 중세교회의 윤리적ㆍ교리적 부패

 

중세교회는 6-15세기 말까지 모든 유럽국가들과 지중해 연안을 통일시킨 절대적인 종교기구이자 권력기구였다. 중세의 전성기에는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표현되는 시기가 있었다. 문화와 사상적인 면에서도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다. 중세의 사상의 1층에는 '철학'이 있고 그 2층에는 '신학'이 있었다. 예술, 학문, 사회, 문화의 모든 것이 교회를 떠받들고 있었던 것이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로마가톨릭교회 안에는 윤리적 부패와 교리적 오용이 나타났다. 중세교회는 유럽에서 많은 토지와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본래의 순수한 종교적 기능에만 몰두 할 수 없었다. 재산 증식과 권력 유지를 위해 각종 정치와 행정, 전쟁에 개입하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성직자들의 성적인 타락과 성직 매매가 만연했고, 하급 성직자들의 대다수가 교육을 받지 못해서 교인들을 바르게 가르칠 수 없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적 부패는 윤리적 부패보다 더 위험했다. 교리의 오류는 성례전에서 부터 비롯되었는데,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성례전이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중세 교회가 면벌부(免罰符, indulgentia)1를 남용하게 되는 근거는 고해성사 교리였다. 고해성사는 보속행위를 통해 공로를 쌓아야 하는데 중세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로가 구원을 받을 만큼 충분한지에 대해서 늘 불안했다. 교황청의 이론가들은 성인(聖人)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고도 남을 정도의 공로를 쌓았는데 이러한 '잉여공로'는 하늘 창고에 쌓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천국의 창고를 여는 열쇠가 교회에 있고, 교황이 인정하는 면벌부는 살아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연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잉여공로가 적용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교황청은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면벌부를 주었다. 그러나 16세기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모자라게 되자 모금운동을 하게 되었고, 대사면의 조항에 베드로 성전건립을 위한 헌금이 추가되면서 면벌부는 크게 오용되었다. 면벌부 판매의 문제는 단순히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였다. 우선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 잉여공로설, 교황이 면벌권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오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가톨릭교회가 사용했던 Indulgentia를 면죄부로 번역한 것은 큰 오류라고 지적하고 대사(大赦)혹은 면벌부(免罰符)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면벌부란 가톨릭교회가 신자에게 고해성사 이후에도 남아있는 벌의 일부 혹은 전체를 사면해 주었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즉 죄와 벌을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해 성사를 통해서 죄는 사해졌지만 그 벌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벌을 보속을 통해서 없어지지만 교회가 부여하는 대사(大赦)를 통해서도 없앨 수 있다고 본다

 

3. 종교개혁의 배경

 

1)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여러 차례 개혁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14세기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위클리프(John Wyclif, 1302?-1384)와 15세기 체코의 프라하 대학의 학장이었던 얀 후스(Jan Huss, 1372-1415)의 개혁은 큰 의미가 있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후스의 화형식 후스의 동상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고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의 부패와 권한 남용을 비판했고, 성만찬에서 화체설을 부정했다. 특히 후스는 평신도에게 떡과 잔을 모두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둘 다 자국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결국 두 사람은 모두 콘스탄츠 공의회(1415)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위클리프는 무덤이 파헤쳐 화형당했고 후스는 산 채로 화형 되었다.

 

2) 종교개혁의 배경

 

16세기 종교개혁은 순수하게 종교운동이라고 하기 어렵다. 종교개혁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사회ㆍ정치ㆍ문화적 변화와 함께 일어난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의 배경으로는 다음의 6가지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14~15세기 유럽사회에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르네상스는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모토를 강조하면서 중세시대에 억압되었던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주의를 강조했다.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ㆍ로마 시대의 철학과 예술을 연구했고, 교회의 부패와 사치를 공격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고전보다는 성경과 교부에게로 돌아가서 그것들을 연구했고, 교회의 부패와 사치보다 신학적 부패를 더 비판했다는 점이 인문주의자들과 다르다.

 

 

보디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제로의 다비드 상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둘째, 후기 스콜라주의(유명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의 성직구조와 성례에 입각한 구원론을 공격했다. 루터 당시에 교회의 신학 방법론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르는 “옛길”과 오캄을 따르는 “새길”로 양분되어 있었다. 루터는 유명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윌리엄 오캄

셋째, 교회 일치와 개혁을 위해 공의회 운동이 일어났다.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권은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프랑스 국왕은 1309~1377년 사이에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 놓았다. 이 기간을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라고 부른다. 70년 후에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왔지만 교황청은 로마 교황청과 아비뇽 교황청으로 분열되었다. 교황의 숫자도 2명 혹은 3명이 되었으며, 그러한 분열은 약 40년간(1378-1417)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세속 군주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일치와 개혁을 위해 공의회를 개최했다.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8)는 세 명의 교황을 해임하고 한 명의 교황을 선출했다. 공의회운동은 교회를 통일시키는데는 성공했으나 교회의 개혁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아비뇽 교황청


바티칸 교황청

 

넷째, 교회의 부패는 신비주의 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신비주의는 교권을 벗어나 하나님과 개인의 직접적인 만남과 접촉을 가능하게 했다. 루터는 독일에 전파되었던 새로운 경건운동의 영향을 받은 교사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았고, 신비주의 전통 안에서 기록된 「독일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다섯째, 유럽의 각 국가들 안에 성장하고 있었던 민족주의 운동은 로마가톨릭교회를 약화시켰다. 특히 루터는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독일 영주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여섯째, 14~15세기에는 과학이 발달하고 도시가 번창했다. 항해술과 과학의 발달로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사람들의 시야가 넓어졌다. 종교개혁사상이 급속히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적 발전, 특히 인쇄술의 발달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4. 마틴 루터의 생애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원래 법학도였다. 그의 부친은 광산업으로 성공하였는데 루터가 세속적인 출세를 하기 원했다. 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1505년 여름날 오후 번개가 떨어져 그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는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수도사가 되겠습니다!”하며 부르짖었다. 그 후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수도원에 들어갔고 1507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아이슬레벤 루터의 고향교회 루터의 소년시절의 방

 


아이제나흐, 루터가 학창시절을 보낸 집


포플로문과 어거스틴 수도원

 

당시 중세의 교회는 구원의 확신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적인 공포와 불안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다. 그러한 중세적 불안 상태에서 예민했던 루터는 죽음의 공포를 겪으면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흑사병의 공포(1562)


루터는 늘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 그는 수도원에서 철저하게 금욕적으로 생활했다. 욕정이 생길까 봐 더운 물도 마시지 않았다. 매일 종탑 방을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에 자신의 죄를 하나 하나 고백했다. 루터는 이 당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주신다.”는 오캄의 사상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노력하고 공로를 쌓아도 구원에 확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사람으로 창조해서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영적 시련'(anfechtung)에 빠졌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장 요한 스타우피츠(Joann von Staupitz, 1640-1524)의 추천으로 1508년부터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하면서 성경을 가르쳤다. 그는 늘 두려움에 떠는 루터에게 진정한 참회란 벌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는 루터가 복음을 발견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1512년 어느 날 루터는 수도원의 탑에서 '탑의 경험' (turmerlebebnis)으로 칭하는 회심을 체험하였다. 그는 로마서 1:17의 말씀을 읽고 구원은 공로('자신의 의')가 아니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덧입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정식교수가 되어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강의하면서 복음을 철저하게 재확인했다.

 

면벌부 구입을 독려하는 도미니크 수도승 요한 테첼 연옥에 대한 상상도

 

 


당시 면벌부의 모습

 

1517년 루터는 면벌부의 악패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고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관할 구역의 대주교와 주교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복사본을 비텐베르크 교회 입구에 붙였다. 이 날은 1517년 10월 31일로 종교개혁의 출발일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루터는 회개와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인 토론을 원했던 것이지 그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다. 루터는 또한 처음에는 면벌을 할 수 있는 교황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면벌부가 연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반대했고, 그것이 진정한 회개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루터 당시 비텐베르그의 모습 1536

 


비텐베르크 성전 문 앞

 

95개조항을 붙이는 루터(영화의 한장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95개 조항의 반반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서 복음을 재발견하는 순간에 시작되었다. 루터가 복음을 몰랐더라면 반박문은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복음주의 사상은 빠르게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각 대학 안에서 루터의 사상이 전파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종교개혁은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루터의 주장을 철회시키기 위한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520년 12월 10일 루터는 교황의 파문 교서와 교회 법전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10세

교황의 칙서를 불태우는 루터

 

1521년 4월 17일에 보름스에 있는 황제의 법정에 출도한 루터는 자신이 쓴 책들의 내용을 취소할 것인지를 질문받았다. 루터는 “성경의 논증"과 "자신의 양심"에 근거하여 최소를 거부하고 국법에 의해 죄인이 되었다.

 




황제 칼 5세와 1521년 보름스 국회의 황제 앞에서 증언하는 마틴 루터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안전을 위해 그를 납치해서 바르부르크 성에 숨겼다. 루터는 그곳에서 1년을 보내면서 독일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했고, 그것은 1521년 9월에 출판되었다. 루터성경은 독일의 신앙생활에 큰 공헌을 하였다. 루터는 많은 개신교 신학사상을 발전시키고 1546년 사망했다. 루터파는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조약에서 가톨릭과 동등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루터를 보호한 선제후 프리드리히


1067년에 세워진 바르부르크 성

루터가 성서를 번역한 방


마틴 루터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폰 보라

백장미 십자가 - 루터의 문장 루터의 친필 사인

 


루터가 만든 내주는 강한 성이요 찬양

 

루터교의 확산

 

5. 루터의 신학사상

 

1) 십자가의 신학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신학을 주장했다.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거부했다. 그가 비판한 영광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신뢰하는 신학이고, 도덕적인 공로 의인화를 추구하는 중세 스콜라주의였다.

 

2) 1520년의 3대 논문

루터는 1520년에 중요한 세 개의 논문을 발표했다.

 

첫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루터는 교회의 7성례전을 반대하고 세례, 성만찬, 고해성사만을 성례로 인정했다(후에는 고해성사를 제외하였다). 그는 또한 성만찬에서 화체설과 희생제사를 반대했고 성도들에게 잔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독일 기독교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은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하고 있다. 세례 받은 모든 평신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성직자와 평등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교회 개혁을 위해 독일의 민족주의에 호소하였다. 또한 성직자들의 교권의 억압으로부터 개인의 신앙의 양심과 권리를 옹호하는 평신도 신학을 출발시켰다.

 

셋째, 「기독교인의 자유」는 기독교인의 윤리를 다루었다. 죄 용서를 받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유자이지만 , 만인을 섬기는 종이 되는 자유자라고 주장했다. 이 논문은 신앙의 문제가 죄로부터의 자유함이며, 그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타인을 섬기기 위한 자유라는 사실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 독일귀족에게 고함 기독교인의 자유(1520)

 

3) 하나님의 말씀

루터 신학의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성경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경해석을 했다. 그는 복음을 잘 표현하는 성경이 그렇지 못한 성경보다 권위가 높다고 보았는다. 그래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선호했고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다.

 

 

루터는 복음이 교회를 창조했기 때문에 성경은 전통보다, 교회보다, 신학자보다 더 권위가 높다고 보았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교회의 전통에 속한 것이기에 교회의 교도권(敎道權, magistrium, 가르치는 권한)을 옹호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은 스스로가 해석자이며, 성경 해석은 오직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말씀의 권위를 강조하는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그림

루터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이었다. 그는 율법의 역할을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 율법은 악을 방지하고 질서를 제공하는 시민법의 역할을 한다. 둘째, 율법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신학적인 역할을 한다. 율법은 본래 선한 것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사용하시면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지만, 마귀가 율법을 사용하면 절망과 하나님에 대한 증오로 이끌어 간다. 율법의 공격을 통해 죄의 공포를 경험한 사람만이 복음의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측면이다.

 

루터가 번역한 신약성경

4) 노예의지와 이신칭의

루터는 인간의 의지는 죄로 구부러져 있어서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인정받는 길(칭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의(義)가 믿음으로 전가(傳加) 될 때만 가능하다. 이 교리는 루터에게 교회가 세워지고 무너지는 중요한 교리였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는 것도 인간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활동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전가된 의를 통해 의롭게 되기 때문에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했다. 그들은 의롭게 인정받지만 실존은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기독교인의 선행은 공로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 죄용서와 칭의를 받은 감사의 마음에서 샘솟는 사랑(quellende liebe)에서 나온다.

 

5) 교회론

루터는 교회가 성례전도 아니고 교직 제도도 아니고 '성도의 교제'라고 했다.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하는 표지(signs)는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특징은 '사도적 계승'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고 듣는 것이다. 루터는 또한 '만인제사장설'(universal priesthood)을 주장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성직자의 직분을 무시하지 않았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7개 성례전에서 오직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로 인정했다. 그는 성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말씀), 표지(signs), 믿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세례와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고, 물과 잔과 떡이라는 표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례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효력과 의미가 발생한다.

 

 

 

5) 두 왕국 사상

루터는 국가와 교회가 모두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가는 율법의 시민적 기능에 속하며 교회는 복음에 속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 국가를 주신 것은 악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신자들은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시민적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의 왕국은 국가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 루터의 두 왕국 사상은 오늘날처럼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시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6) 토마스 뮌처와 농민전쟁

 

Thomas Muentzer(1488-1525)

 

1975년 동독사회주의 정부가 발행한 지폐

 

급진종교개혁자 토마스 뮌처(Thomas Muentzer, 1489-1525)는 중세 신비주의를 공부했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자극을 받고 비텐베르크에 왔다. 1520년 루터의 추천을 받아 츠비카우에서 목회를 하던 중에 재세례파에게 영향을 받고 영성주의와 신비주의에 심취했다. 1521년 비텐베르크에서 가톨릭 예배에 과격하게 저항한 결과 추방되어 체코로 갔고, 그곳에서 후스파 과격주의와 접촉하면서 종말이 임박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성령을 받기 전에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3년 알스테드(Allstedt)의 목사가 되었고 가톨릭의 박해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기독교 동맹'을 결성했다. 1524년 루터가 작센의 영주들에게 경고한 결과 그는 알스테드에서 추방되었고, 농민전쟁의 중심부인 독일의 남서부로 갔다. 1525년 그는 뮐하우젠(Muehllhausen)에 와서 농민전쟁이 시작되자 스스로 지도자로 나섰으며, 종말의 때에 선민들의 투쟁이 시작되었다고 선포했다. 1525년 5월 그는 전투에서 패하여 처형되었다.

 

토마스 뮌처의 신학과 루터의 신학은 네 가지 측면에서 대조적이다.

첫째, 루터는 성경과 말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며 말씀을 통해 성령이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뮌처는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적인 성경보다는 성령이 주관적으로 개인의 영혼에 말씀하시는 내적인 말씀이라고 보았다.

 

둘째, 루터는 신앙이란 말씀을 접하고 성령의 조명과 감화를 통해 내적인 결단에 이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뮌처는 내면의 영혼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함을 통해 신앙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서는 믿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셋째, 루터는 교회를 이신칭의를 통해 이루어진 성도의 공동체라고 했다. 그러나 뮌처는 내적 경험을 통해 회심한 선민의 모임이 교회라고 보았으며, 이들은 선민이고 메시아 왕국을 앞당기는 전위대가 된다고 주장했다.

 

넷째, 루터는 두 왕국 사상을 주장했다. 세상의 통치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뮌처는 두 왕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상의 통치는 메시아 왕국이 올 때 무너져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그는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인정하였다.

 

 

 

6. 종교개혁의 5대 원리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중세 가톨릭교회는 구원을 가르치는 권위는 성경과 거룩한 전승(聖傳)이라고 주장했고, 성경을 해석하는 최종 권위를 교황의 교도권에 두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믿음과 실천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권위는 교황이 아니고 성경이라고 보았는데, 이 말은 성경 외에 다른 책이 필요 없다거나 성직자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최종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라틴어 불가타 성경만을 권위로 인정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자국 언어로 번역해서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로 미사를 진행했고 평신도들은 예배에서 소외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를 제1차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다. 예배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했고, 미사보다는 말씀 설교를 강조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떡과 잔을 숭배하게 만들고 성경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화체설과 반복 희생제사를 거부했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중세 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동반자로 생각했으며, 마리아와 성인들도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보자라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중보자를 인정하지 않았다(요일2:1). 그들은 성직자나 교회제도가 없어도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설’을 인정했다. 이 말은 신학으로 훈련받지 않은 평신도가 설교하고, 성만찬을 집행하고, 축도하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 교회제도를 주시고 훈련받은 목회자를 세우신다. 이런 제도가 중요하지만 성직자들이 중보자는 아니라는 뜻이다.

 

 

3) 오직 은혜(sola gratia)

중세교회는 성례전을 통해 은혜가 주입되면 인간은 변화된 기질을 통해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은혜와 공로의 협동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지가 타락해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⑷ 오직 믿음(sola fide)

중세 교회는 칭의를 얻으려면 믿음과 공로가 다 필요하다고 했으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오직 믿음이라고 했다. 루터는 믿음에서 '즐거운 교환'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내 것이 되어서 칭의를 얻고, 나의 죄는 예수님 것이 되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루터는 칭의를 법률적으로 이해했다. 만일 대법원에서 죄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면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원리가 적용되어 같은 재판을 두 번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칭의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라고 선포한다. 공로가 없어도 믿으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옷 입혀짐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해서 행위를 무시하는 것은 올바른 개신교 신학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으면 성도를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 가신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중생을 체험한 성도는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중세교회는 성상과 이미지를 사용해서 교회를 영광스럽게 만들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직자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교회에 영광을 돌리는 신학을 반대했으며, 성모 마리아를 그리스도 보다 높이거나 동등한 자격으로 대우하는 것에 반대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모든 형상과 상징들을 지워버렸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모에 대한 존숭과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분리시켜서 이해한다. 성모 마리아를 구원자로 여기지 않으나 성모가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고 가르친다.

 

  • 중세 교회는 교회의 일은 성직, 평신도의 직업을 세속직이라고 구분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께 '소명'으로 받은 모든 직업은 성직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직업소명설”이라고 한다.
  • 하나님은 교회만이 아니라 세속 사회의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거룩해야 하는 것처럼 세속 안에서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직업은 성직이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도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면 세속적인 것이다.
  • 세속과 거룩성은 장소와 직업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로 구분 되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jbjoon63

 

마틴 루터, 성경 위에 예술을 꽃피운 신학자

루터에게 있어 성경과 예술은 무엇인가

 

성경과 교회 전통이라는 이중적 권위의 틀로부터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가 있다는 사상에 이르는 루터의 여정은 매우 오랜 것이었다. 그는 14세 때에 약 500여 개의 성경 구절을 해석한 일종의 주해서를 구입하여 공부한바 있다. 그러나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야 라틴어 성경책 완본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1501년 경이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날마다 한 장씩 낭독되는 라틴어 성경을 들을 수 있었고, 때로는 그 자신의 차례가 되면 순서에 따라 지정된 한 장의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1505년 7월 17일 루터가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 자신의 성경책, 즉 빨간 가죽 표지의 라틴어 성경책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는 성경을 매우 열심히 탐독하였고, 성경의 내용에 익숙하게 되었다:

“나는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때로는 성경 몇 구절이 하루 종일 나의 모든 생각을 지배하고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와 대학에서 보다 막중한 직위를 담당하게 되었다. 1512년 10월 18일에 루터는 박사학위를 수여받았으며 며칠 후에는 성경 연구학 정교수가 되었다. 이때에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호하고 해석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1513년 8월 16일,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시편 강해를 시작하였다. 1515년에는 이 대학이 있는 비텐베르크 도시의 한 교회에서 설교자로 임명을 받는다. 같은 해에 이 대학에서 로마서 강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시편과 로마서 강의를 통하여, 특히 시편 51편과 로마서 1:17절의 강해를 통하여 사람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 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각성을 통해 그는 마치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감격을 경험하였으며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린 것과 느낌을 받았다. 올바른 성경해석을 향한 루터의 고뇌와 번민이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에게 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료 수도사나 제자들에게 매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십자가를 가리키며 설교하는 루터’ 루카스 크라나흐 작품


1517년의 95개조 논제에서, 그는 교회의 보화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였다. “교회의 진정한 보배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가장 거룩한 복음입니다. …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는 바로 그 말씀의 보배임을 말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2년 후에 벌어진 라이프지히 논쟁은 신앙에 있어서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루터의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논쟁에서 요한 엑크는 성경은 신앙생활에 두 번째 위치에 놓인다고 말하며, 교황권의 위치와 전통에 최종적인 권위가 있다는 로마교회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루터는 교황 직은 신약성경에도 나타나 있지도 않고 초대교회에도 없는 것이라며 즉각적으로 반박했다. 그것은 전통에 의해 인정될 수 있으나 성경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오직 성경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고 수납할 수 있는 권위임을 높이 드러낸 것이다. <안용준 목사>

 


 

마르틴 루터의 성직 박탈이 오늘날 전 세계에 가장 널리 퍼진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탄생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철옹성 같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개신교 종파의 효시가 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에까지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루터의 혁명적인 정신은 르네상스 이상으로 근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였다. 신대륙의 발견과 산업 발달로 육체가 근대화되었다면, 르네상스로 정신이 새 옷을 입었고, 프로테스탄트 탄생으로 영혼이 비로소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인생을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은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논제’라는 제목으로 돈을 받고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免罪符) 판매 등 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문서를 전격 게시한 것이다. 당시 면죄부 판매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는데, 교회의 일에 대한 비판은 그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루터의 항거는 당연히 폭풍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즉각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애당초 학자들 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천둥이 사방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듯이 삽시간에 독일 전역은 물론 전 유럽을 강타했다. 95개 논제 발표 후 약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 로마 가톨릭 교회는 루터를 견제하기 위해 그에게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주장을 소개하도록 요구했다. 그 결과 루터의 주장은 오히려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 온 세상에 전해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은 한층 더 고조되었고, 수많은 루터의 추종자가 생겼다.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의 결혼도 종교적 신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 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년)였다.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며, 그동안 이루어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특히 농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혼인 선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강한 신념은 이런 염려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자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처음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농민전쟁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복음을 독재 체제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고 영주들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 이렇게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종말에 하느님이 오면 인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루터는 결혼을 해 자식을 낳는 것이 사탄에게 대적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루터의 이와 같은 생각이 개신교 성직자들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결과를 낳았음은 물론이다.

 

1530년대에 이르러 루터는 누구보다도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대중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엄청나게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몇 년 사이에 평생 쓴 편지의 3분의 1을 쓸 정도로 많은 편지를 써야 했으며, 생애 마지막 날까지 분쟁을 중재하느라 분주했다. 마침내 온 생애가 혁명 그 자체였던 사나이 마르틴 루터는 1546년 63세의 나이로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장례식에서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은 종교개혁가 필립 멜랑히톤은 찬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터는 구약시대부터 교부들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스승과 예언자 반열에 드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루터의 적대자들에 대한 풍자화(후기 목판화,1520년에서 1530년경, 게르만 민족 박물관, 뉘른베르크)_예영커뮤니케이션

 

1519년 7월, 성직자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벌인 논쟁은 루터가 교황의 눈 밖에 나는 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파문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며, 에크가 주장하는 ‘로마 교회에 대한 순종(Romana obedienia)’보다 자신의 입장이 더 기독교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인 교리라고 주장했다. 에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불온한 주장을 교황에게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은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에서 앞으로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동료 모두 파문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루터는 12월 10일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 교황으로부터 영원한 추방을 선고받았다.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만 파문은 루터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루터의 마음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면죄부의 오용으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루터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 의회는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제국에서 추방당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그는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로써 그는 성서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독일어 통일에까지 지대한 공헌을 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카를슈타트(본명은 Andreas Bondenstein)가 이끄는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 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 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미사 폐지, 평신도에 대한 성배(聖杯) 부여, 성상(聖像) 파괴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이 개혁 운동의 논리적 귀결인 것은 분명했지만,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히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1522년 ‘기사(騎士)의 난’과 농민전쟁(1524∼1525년)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부터 루터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再洗禮派)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을 든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이 교황과 그 일당과 싸우고 있다(후기 목판화, 루터 박물관, 비텐베르크)_예영커뮤니케

 

1525년 6월 13일13일 루터는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의 결혼도 종교적 신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 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년)였다.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며, 그동안 이루어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특히 농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혼인 선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강한 신념은 이런 염려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자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처음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농민전쟁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복음을 독재 체제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고 영주들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 이렇게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종말에 하느님이 오면 인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루터는 결혼을 해 자식을 낳는 것이 사탄에게 대적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루터의 이와 같은 생각이 개신교 성직자들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결과를 낳았음은 물론이다.

 

1530년대에 이르러 루터는 누구보다도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대중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엄청나게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몇 년 사이에 평생 쓴 편지의 3분의 1을 쓸 정도로 많은 편지를 써야 했으며, 생애 마지막 날까지 분쟁을 중재하느라 분주했다. 마침내 온 생애가 혁명 그 자체였던 사나이 마르틴 루터는 1546년 63세의 나이로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장례식에서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은 종교개혁가 필립 멜랑히톤은 찬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터는 구약시대부터 교부들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스승과 예언자 반열에 드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과 21세기 한국교회!

 

 

▲마르틴 루터(왼쪽)와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독일 슈트랄준트 예술박물관). ⓒJesus Army 제공

 

                            면죄부 판매 모습을 묘사한 목판화(사진=위키피디아) 

 

 

◈ 면죄부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1506년 일괄 면죄부를 대량 세일에 나섰다.

 

- "단순히 면죄부를 산 사람만의 죄가 아니라 그의 부모 친지의 영혼조차 면죄부를 산 돈이 금고에 떨어져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옥으로부터 튀어나온다."

 

 

                                               

 

 

 

 

 

 

<요한 테젤이 판매한 면죄부 / 출처: 자주시보 >

 

- "면죄부를 사는 순간 그만한 교회의 영적인 은혜를 얻기 때문에 자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

 

-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면죄부를 살 수 있으며 이때도 고해성사나 회개의 필요가 없이 오직 돈만을 가지고 오면 연옥의 영혼이 구제받을 수 있다."

 

이 같은 불의를 보다 못한 마틴 루터는 이에 항의하며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의 문에 내걸고 마침내 종교개혁의 불꽃을 피어 올렸다. (제대로 성경읽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 http://bible119.com/221118068242)

 

 

 

▲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 ⓒJesus Army 제공

 

◈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문에 95개 논제를 붙였는데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하고 성경의 권위를 교황과 교회와 사제들의 권위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가톨릭교회 수사이자 사제였으며,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수였던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1520년 그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비성경적 가르침들을 거부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 황제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을 선고받았다.

 

1521년 5월,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를 당하고, 온갖 위협을 피해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루터는 중세의 어두움을 깨는 혁명적인 개혁을 한다. 그것은 교황청에서 그토록 외치던 규율, '성경은 라틴어로만 읽어야 하고 사제들을 통해 들어야 한다'는 금기를 깨고,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1522년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던 기독교 세계 전체에 말씀의 빛이 비춰지는 순간이었다.

 

중세 '암흑기'는 문자 그대로 진리인 말씀의 빛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 비춰지지 못하던 '어둠의 시대'였다. 일반인이 성경책을 소유하는 일 자체가 불법이었던 시대이고, 성경책들은 일반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제들만을 위한 것으로서 모두 라틴어로 쓰여 있었다.

 

1534년, 루터는 신약성경에 이어 구약성경도 전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불후의 명작' 독일어 신구약 전체 성경본을 만들어냈다. 그의 성경은 곧 모든 독일인들이 갖고 싶어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후 전 세계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이 자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혀지는 시발점이 됐다.

 

 

▲ 면죄를 위해 돈을 넣는 통. ⓒJesus Army 제공

 

◈ 종교개혁 5대 강령과 21세기 한국교회

 

마르틴 루터의 3대 강령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며 진리의 최종 권위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성경'이라고 말했다. 그 후 존 칼빈은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2개 강령을 추가해 종교개혁 5대 강령을 선포했다.

 

1.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2. 오직 은혜 (Sola Gratia)

3. 오직 믿음 (Sola Fide)

4. 오직 그리스도 (Sola Christus)

5.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500년 전 종교개혁 5대 강령의 기준에서 이탈된 21세기 한국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종교개혁 5대 강령의 기준에서 나의 신앙생활은 과연 온전한가?"

 

마르틴 루터는 막강한 로마교회의 권위 앞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최종 권위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성경'이라고 천명하였다. 앞선 종교개혁자들이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하기도 했지만, 루터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21세기 한국교회의 교리와 제도와 관행이 과연 '오직 성경'에만 기반을 두고 있는지,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며 두렵고 떨림으로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JESUS ARM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