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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성경의 식물 ]3- 몰약(沒藥, Myrrh)/ 야채과 과일들

by 은총가득 2021. 1. 19.

[성경의 식물] 몰약(沒藥, Myrrh)

 

1. 용어

 

히브리어는 ‘모르’이다. 헬라어로 ‘무라’이며, 아랍어는 ‘무르’이다. 아마 히브리어를 음역한 듯하다. 뜻은 ‘몹시 쓰다’이다. 팔레스타인 동남부에 자리한 아라비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등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암석지대나 석회암 구릉지대에 잘 자라는 관목이다. 1-1.5m까지 자란다. 몰(沒)은 ‘가라 앉다’는 뜻이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잘 자라나는 식물이다. 콤미포라 나무로 불린다. 학명은 콤미포라 미르라(Commiphora myrrha)이다. 콤미포라 아비시니카(Commiphora abyssinica)도 비슷한 품종으로 함께 몰약으로 불린다. 몰약나무에서 얻어지는 것이 몰약이다. 몰약은 고대로부터 에션션오일의 여왕으로 불렸다.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 몰약의 홍갈색 송진을 사용했다. 몰약은 부패하는것을 방지하는 항균작용에 매우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병과 매독의 치료약으로 사용되었다. 호흡기 질환을 완화시키는 데에도 효능이 있다고 한다. 중국 의학에서는 상처를 회복하고 출혈을 막는데 사용한다. 구강의 염증과 치료에 사용되었다. 치은염에 효과가 좋고, 상처나 눈의 감염을 방지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뱀에 물렸을 때 해독하는 치료약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 의학에서는 몰약이 항산화 작용과 암 전이억제 효과가 있음을 발견해 적극 활용하고 있다. 다양하고 복잡한 치료제 인듯하지만 몰약은 원래의 세포들이 외부의 공격을 막고,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쉽게 말해 강력한 항산화제인 셈이다.

 

 

 

 

 

나무껍질일 벗겨지거나 상처가 나면 나무껍질 속에 있는 수지관(樹脂管)에서 액이 나오는데 이것이 몰약이다. 몰약은 공기를 만나면 딱딱해지면 고체로 변한다. 마치 눈물을 흘리는 듯한 모양이라 ‘눈물’이라고 한다.

 

 

 

 

몰약의 거걸스테론(guggulsterone) 성분은 톨유사수용체(Toll-like receptors)를 조절함으로써 병원체로부터 숙주를 보호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톨유사수용체는 외부 병원체에 대한 숙주의 최초 방어체계이면서 선천성 면역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몰약 성분이 병원체 침투로 몸 안에 항체가 만들어져 대응하기 이전에 초기적인 면역시스템을 작동시켜주는 역할을 하여 위와 같은 작용을 나타낸다.(식품과학회지(Food Science and Biotechnology) 12월호, 한국식품과학회)

 

약학에서는 몰약나무의 수피(樹皮)에서 나오는 방향성의 고무상수지를 몰약(沒藥, Myrrha)이라고 한다. 성분은 삼출물에 수지가 25~35%로 Herabomyrrholic acid, Commiphoric acid 등과 정유성분인 Eugenolt, Cresol, Cuminaldehyde 등이 함유되고 있다.[출처 약업닷컴]

 

 

2. 성경 속의 몰약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예수님의 탄생 시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예물을 드린 장면일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세 가지 예물 중의 하나였다.(마 2:11) ‘황금’ ‘유황’ ‘몰약’은 당시에 가장 귀한 것들이었다. 예수님의 죽음 때도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가져온다.(요 19:39)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과(출 30:23)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야채(野菜)와 채소(菜蔬)의 차이점

 

 

 

오늘은 야채와 채소의 차이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지만 분명히 다른 단어이기 때문에 가끔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분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질문 하겠습니다.

1)토마토는 무엇입니까? 골라 보십시오.

ㄱ.야채 ㄴ.채소 ㄷ.과일

2) 수박은 무엇입니까? 골라 보십시오.

ㄱ.야채 ㄴ.채소 ㄷ.과일

토마토, 수박, 오이는 야채도 아니고 과일도 아닌 '채소'랍니다. 놀라셨나요? 그런데 정말 궁금한 건 어떤 기준에의해 이렇게 명명된 것일까요? 자, 그럼 야채와 채소의 차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채(野菜)와 채소(菜蔬)란 무엇인가?

 

먼저, 야채(野菜)는 한자어가 나타내는 그대로 들(野)에서 자생하는 채소(菜)를 말합니다. 채소(菜蔬)는 나물 채(菜)와 푸성귀 소(蔬)를 사용합니다. 엄밀하게 채소의 뜻은 한자 만으로 이해하기 힘든 표현입니다. 푸성귀 소의 뜻은 푸성귀, 채소, 남새, 풀의 열매, 풀씨 벼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남새'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나물' '야채' '채소' 등으로 풀이해 놓은 밝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야채는 들에서 나는 나물로 알고, 채소는 밭에서 사람의 손에 의해 길러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심지어 야채라는 단어가 일본식 한자어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우리나라 말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틀린 정보입니다. 야채라는 단어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된 것을 볼 때에 야채는 조선 중기 이전에도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출처 위키백과 채소] 또한 중국, 한국, 일본은 한자 문하권이기 때문에 일본에서 사용한다하여 그것이 일본식 단어라고 보기에는 힘듭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야채를 네이버 사전에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보여줍니다.

 

야채 (野菜) [야ː채] 중요

[명사]

1. 들에서 자라나는 나물.

2. ‘채소(菜蔬)’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하나는 들에서 자라나는 나물이고, 다른 하나의 뜻은 채소를 일상적으로 부르는 말입니다. 즉 야채는 단지 들에서 나는 나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들에서도 나고, 사람이 직접 기르는 채소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인 것입니다. 야채와 채소는 같은 말이지만, 야채는 채소보다 좀더 포괄적이고 넓은 의미로 사용된 단어인 셈입니다. 채소가 사람의 손에 의해 길러진 순수한 인위적 작물이라면, 야채는 사람에의해 길러진 채소와 들에서 자라는 자연적 나물까지 포함하고 있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야채와 채소는 엄밀하게 구분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닙니다. 두 단어는 혼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야채는 들에서나는 나물까지 포함하는 단어이고, 채소는 농작물에 한정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채소를,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식물(풀 종류)를 언급할 때는 야채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두 단어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싶다면, 들에서 나는 채소를 언급할 때는 '나물'로, 농작물은 '채소'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나물과 채소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단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할 시대적 상황도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고사리나 취나물의 경우 말 그대로 들에서 나는 '나물'이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자연적 밭에서 길러진 채소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고사리를 아무도 채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나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농작물이란 의미보다는 조선시대의 작물 상황에 맞추어 구분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참 어렵네요... 하여튼 성경 속에서는 나물과 채소를 구분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번역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나물과 채소의 구분법

나물은 자연적으로 들에서 자라는 것들을 말한다. 대체로 산나물, 들나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취나물이나 고사리, 곰취 등은 나물에 속합니다. 쑥도 나물에 포함되겠네요. 이 정도로 구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채소는 농작물입니다. 파나 상추 등은 채소입니다. 그럼 고구마나 감자는 뭘까요? 채소입니다. 일단 사람이 기르니까요. 그것을 보통 뿌리채소라고 말합니다. 오이나 토마토는 열매채소입니다. 열매와 열매 채소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열매와 열매채소는 어떻게 구분할까요? 나라와 문화마다 약간 다르지만 이제는 어느정도 보편적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일년주기의 식물이나 넝쿨식물의 경우는 열매채소로 구분하고, 다년생이나 나무에서 열리는 것은 그냥 열매라고 말합니다. 즉 일년생 작물인 토마토는 열매가 아니라 채소이지만, 바나나와 감, 배 등은 열매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님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수박이나 참외의 경우 과일인가? 채소인가는 아직도 논쟁 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단 일년생이고, 사람이 기르는 작물이기 때문에 과일채소로 구분하고 있습니다.[출처 서강학보]

 

그럼 벼나 보리는 뭘까요? 이것들을 곡식입니다. 보리, 쌀, 밀, 귀리 등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받고 있습니다. 갈수록 어렵네요. 다시 정리해 볼까요?

곡식: 쌀, 보리, 밀 등의 주식으로 먹을 수 있는 것들

야채: 들의 나물과 밭의 채소를 아울러 이르는 말

채소: 사람이 논 밭에서 기르는 작물, 상추, 배추 등. 무나 감자, 토마도도 야채이다.

나물: 들과 산에서 자연적으로 자생하는 식용식물

과일: 나무 등의 다년생 식물에서 열리는 열매

위의 구분들은 명확한 것들은 아닙니다. 단지 대체로 이러한 구분법을 따라 구분된다는 것만 알면 될 것 같습니다. 아래는 위의 구분법에 의해 구분한 것들입니다.

 

[채소의 종류]

상추

콩나물(나물이 붙어 있지만 채소입니다.)

완두콩

깻잎

버섯(버섯의 경우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채소의 범주에 넣고있습니다.)

(열매채소:열매이지만 채소에 속한 작물)

토마토

올리브

호박

가지

고추

오이

(뿌리채소)

감자

고구마

당근

마늘

더덕, 도라지(이들도 채소에 넣고 있지만, 종종 나물의 범주에 넣는 곳도 있습니다.)

 

 

 

 

견과류는 무엇일까? 야채? 아니다. 과일에 속한다. 밤, 호두, 아몬드 등은 과일이다.

 


 

[성경의 식물] 마늘(garlic)

 

 

마늘꽃

Pixabay로부터 입수된 Mabel Amber, still incognito...님의 이미지 입니다.

 

 

1. 용어

히브리어로 ‘숨’(שׁוּם)이다. 민수기 11:5에서 한 번 사용된다.

팔레스타인 마늘과 우리나라 마늘은 거의 다르지 않다. 같은 품종이라 봐도 무방하다. 백합과 속한 뿌리식물이다. 한해살이이며, 다년생 식물이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이 심어 다음 늦봄이나 초여름에 수확한다. 뿌리만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린다. 우리나라의 경우 꽃대인 쫑을 뽑아 반찬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마늘은 동남아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고르게 펼쳐져있고, 잘 자라는 편이다. 소화를 촉진하고, 항산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최근들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늘을 매우 즐겨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좋아했던지 로마시대에는 유대인들을 향해 ‘마늘 냄새 나는 자’로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민수기 11:5에서 의하면 애굽에서 부추 등과 함께 먹었던 마늘을 그리워하고 있다.

마을은 향이 강해, 육고기를 먹을 때 함께 넣어 먹거나, 구워 먹고 밀가루를 반죽할 때 넣어 만들기도 했다.

 

 

 

 

마늘은 뿌리를 먹는다. 생마늘도 식용이 가능하지만 대부분 음식에 넣어 먹거나 가루로 만들어 빵에 넣는다. 요리할 때 갈아 넣기도 한다.

 

2. 성경 속 마늘

마늘은 민수기 11:5에서 단 한 번 언급된다. 그런데 마늘을 그토록 좋아했던 유대인들이 왜 구약에서 단 한 번 만 사용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마늘이 언급된 부분을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수기 11장 전체를 읽는 것이 좋다. 이곳은 디베랴 바닷가로 하나님께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을 보내심으로 진영의 끝을 태우신다. 그들 가운데 악한 감정이 일어난 이유는 이스라엘 섞인 ‘다른 인종’(민 11:4)의 충동 때문이다.

 

 

 

민수기 11:1-5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그들은 매일 내리는 만나를 통해 만족하지 못하고 애굽에서 먹었던 중독성이 강한 부추와 마늘 등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부추나 마늘은 육고기를 먹을 때 함께 먹는 향이 강한 음식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허락하시지만 저주를 받아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른다.

 

[묵상] 원망의 원인과 비전의 회복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나갑니다. 홍해의 기적을 맛본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충분히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흥분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다른 민족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모든 것이 원망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매일 홍해의 기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음식도 떨어지고, 재미난 일도 없었습니다. 매일 내리는 만나도 이제 지겨워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생활이 그리워졌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자유도 없고 인격도 없었지만 음식만은 자유롭게 먹었습니다. 특히 부추와 마늘과 함께 곁들여 먹었던 고기 맛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번 생각하니 애굽에서 먹었던 고기가 생각나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생활이 지겨워지고, 옛적이 그립고 또 그리워졌습니다. 한 명이 원망하기 시작하더니 다른 민족들에게 번져 나갔습니다.

 

 

원망은 전염성이 무척 강했습니다. 원망은 다른 민족들을 너머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번져 나갔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고, 하나님을 불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원망의 깊음 속에는 불신과 탐욕이 꽈리를 틀고 육신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원망할 때 순식간에 교만이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그들을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죄가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그들의 필연이 되었고, 결국 사망에 이른 것입니다.

 

도대체 원망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원망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을 너머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인자 제공자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망이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에게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른 민족은 출애굽할 때 함께 이스라엘과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과 현저히 다른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동일하게 애굽을 미워했지만 비전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이 왜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야하는지를 공동체의 역사 기억을 통해 이해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언약의 성취를 위해 그들은 현재의 고난과 고통에 대해 대가를 지불할 각오는 어느정도는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은 단지 애굽의 핍박을 피해 도망친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편하고 쉴 수 있는 곳이면 됩니다. 바로 비전의 부재가 그들을 원망으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봅시다. 혹시 원망하고 있다면 자신의 비전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단지 물질이 없고, 처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원망한다고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좀더 근원적인 문제, 비전의 부재가 가져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상실한 탓입니다. 만약 비전을 다시 회복한다면 동일한 상황 속에서도 원망이 아닌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식물] 들호박, 들외(gourd, colocynth)

 

1. 용어

히브리어로 ‘파쿠아’다. 학명은 ‘Citrullus colocynthis’로 넝쿨식물이다. 잎이나 줄기 등은 우리나라 수박과 거의 흡사하다. ‘수박’ ‘참외’ ‘호박’ 등으로 번역된다. 일반적으로 '콜로신스'로 불린다. 우리나라의 수박과 참외가 섞여 있는 듯한 모양과 크기다. 종류가 다양해 주먹만한 것에서 사람 머리 만큼의 크기도 있다. 아마도 비슷한 종류의 식물을 묶여 부르는 듯하다. 한국의 수박이나 참외처럼 수분을 많이 필요로하는 곳에서 자라지 않는다. 광야나 사막에서도 그런대로 잘 자란다. 그만큼 자생력이 뛰어나다. 환경이 좋은 곳에서 크게 자라고, 사막 등에서는 주먹만큼하다. 3-4월에 개화하여 두세 달 후에 열매를 맺는다.

 

 

모양이 거의 흡사한 박이 있지만 들호박이나 들외는 독이 있어서 먹으면 중독 상태에 빠지거나 죽을 수도 있다. 엘리사가 가져온 것은 독이든 들호박으로 보인다.

 

 

다양한 종류의 들호박들, 어떤 것은 참외와 어떤 것은 수박, 어떤 것은 박과 많이 닮아 있다.

 

 

2. 성경 속의 들호박

성경에서 들호박은 왕하 4:39에서 한 번 등장한다. 채소를 캐러 갔다고 들호박을 보고 따와서 국에 넣는다. 그런데 독이 있어 그것을 먹고 모두 배탈이 난 것이다.

열왕기하 4:39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 들포도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호박을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그들은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엘리사는 가루를 가져오라하여 솥에 넣고 먹게 한다.

 

[성경의 식물] 떨기나무(세네, heath, bush)

 

 

1. 용어

떨기나무는 참으로 모호한 단어다. 다른 히브리어를 ‘떨기나무’라는 동일한 단어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로뎀나무, 아카시아 등도 떨기나무로 번역한다. 떨기나무는 '관목'을 말한다. 여기서는 히브리어 ‘세네’만을 다루기로 하자.

세네는 이집트 아카시아(egyptian acacia)로 불리며 개나리나무와 같은 관목이다. 가시가 있어 ‘가시 떨기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중근동 지역에서 흔하며 광야에서 잘 자란다. 산기슭이나 광야 등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흔한 나무이다. 모세가 부름을 받을 때 불타던 떨기나무가 세네다.

 

 

이집트 벽화에 그려진 이집트 아카시아

이집트 아카시아는 광야에서 물 없이도 수백년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숲을 이루지 않고 몇 십미터에서 몇 km 떨어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카시아(Robinia pseudoacacia) 나무는 학명에서 드러나듯 '가짜 아카시아'이며, 본명은 '아카시나무'이다. 아카시 나무는 가지에 가시가 있고, 5월 말경부터 하얀 꽃을 피운다. 꽃이 지면 콩과 비슷한 모양의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이집트 아카시아가 히브리어 세네인지 확정짓기는 상당히 곤란하다. 실제로 세네에 대한 학술보고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 번역상 세네는 관목인 떨기나무로 번역하고, 다른 단어도 역시 떨기나무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캐더린 수도원에 있는 떨기나무가 모세의 소명때 언급된 떨기나무라면 이집트 아카시아와는 상단히 다른 나무일 수 있다.

아래는 이집트 아카시아다. 가시가 크고 줄기에 촘촘하다. 꽃은 노란색이다.

 

 

 

 

 

2. 성경 속의 떨기나무

성경에서 모두 6번 사용되었다. 사용된 곳은 출 3:2(3번) 3:3, 3:4 신 33:16 이다.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

세네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쳐 시나이 반도에 도망쳐 목자로 살아갈 때 나타난다. 사십 년을 애굽에서 왕자로 살아간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애굽 관리가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 관리를 때려 죽인다.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 보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동료이던 히브리인이었다. 아마도 모세의 이러한 행위는 히브리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 분명하다. 다음 날 히브리인들이 서로 싸우자 모세가 말렸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의 입에서 어제의 살인 이야기를 꺼냈고, 우리는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삼지 않았다고 거절한다. 결국 모세는 애굽을 떠난다.

 

우리는 모세가 도망갔을 거라 생각한다. 어느 정도 일리있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포기’한 것이다. 망각한 권력을 지닌 양어머니의 아들로 살아가는 모세에게 애굽 관리 한 명의 살인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애굽을 떠나 시나이 반도로 도망간 이유는 히브리인들이 자신을 버린 것에 대한 일종의 회의나 배신감이 컸을 것이다. 그렇다. 모세는 아직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아무고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나이 반도로 도망쳐 들어가 결혼하고 이드로의 사위로 그의 양을 치며 사십 년을 살아간다. 사십 년이 끝났을 즈음 도망간 양을 찾으러 가다 떨기나무(세네)가 불타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데 한 참이 지나도 사그러지지 않고 계속하여 불이 꺼지지 않은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모세는 호기심이 발동해 불타는 떨기나무로 다가간다. 그 때 음성이 여호와의 음성이 들린다. 그리고 모세를 부르신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렇게 모세는 소명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매우 독특한 표현이 등장한 모세를 부르시기 전에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러 올 때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출 3:4)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보고 계셨던 것이다. 불타는 떨기나무는 고난 받는 이스라에를 상징한다. 떨기나무는 쉽게 불에 타 사그러진다. 하지만 불이 붙었음에도 사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의아했던 것이다. 고난의 불 가운데 있지만 죽지 않는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이다.

 

 

 

모세가 보았다는 떨기나무와 같은 종류, 시나이 반도 캐더린 수도원에 있는 떨기나무이다.

[시나이 반도 남부에서만 자라는 매우 독특한 떨기나무이다. 다른 곳에서 기르기 위해 몇 번을 이식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한다.]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신 33:16)

두 번째 언급은 모세가 마지막 생애를 마무리 하면서 지파들을 축복하는 기도문 속에 등당하는 요셉 지파를 향하여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라고 표현한다. 요셉의 차남이 이었던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종종 요셉 지파로 묶여 불려진다. 이들은 후대에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질 때 북쪽 지파의 리더지파가 된다. 그들이 창대하게 될 것은 선언하는 표현이다.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의 은혜’라는 표현은 아마도 모세 자신이 경험한 불타는 떨기나무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떨기나무는 고독과 소외, 광야의 생활과 환란을 뜻한다. 그렇다면 떨기나무 가운데 계신다는 표현은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전통적 해석을 따르는 것이 가장 적법해 보인다. 이러한 전통적 해석에 근거해 요셉지파의 축복문을 해석해 본다면, 요셉지파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있다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선언이자 약속이다. 아마 요셉이 애굽에서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 과정을 통해 고통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형통했다. 그렇다! 문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다.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성경의 식물] 돌감람나무(wild olive)

 

 

1. 용어

산이나 들에서 자라는 야생 올리브 나무이다.(사 41:19) 바벨론 포로이후 초막적을 기념하기 위해 사용된 나무이다.(느 8:15) 70인역은 사이프러스 나무, 예루살렘 성경은 ‘소나무(pine)’로 번역했다. 가뭄에 강하고 들에서 잘 자란다. 아프리카 올리브(African Olive) 또는 들(야생) 올리브(Wild Olive) 가짜 올리브(False Olive) 등으로 불린다.

 

돌 올리브는 재배되는 올리브나무와 비슷하고 비슷한 품종이지만 열매는 많이 다르다. 먼저 기름이 많지 않고 향기롭지 않다. 또한 거의 사용할 수 없는 기름이다. 그래서 세균에 강한 돌 올리브나무 뿌리에 참 올리브 나무를 접붙여 사용된다. 참 올리브나무가 잘 자라는데 사용된다.

 

열매는 참 올리브 열매에 비해 작고 검다. 참 올리브나무 열매는 연녹생과 검정 두 가지 색이 있다.

 

돌 올리브 열매

 

 

참 올리브 열매

 

 

2. 성경 속의 돌감람나무

 

올리브나무는 올리브 열매를 맺기 위해 3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고, 귀했기 때문에 함부로 베지 않는다. 그런데 돌 감람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초막절 행사를 위해 쉽게 베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바울은 올리브나무와 야생올리브 나무를 참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비유적으로 사용한다.(롬 11:17) 그런데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착각한다. 바울이 말하는 접붙힘은 일반 농부들이 사용하는 방식과 반대이다. 정상적인 접붙이기는 돌 올리나무 뿌리에 참 올리브나무를 붙인다. 그러나 바울은 참 올리브나무 뿌리에 돌 올리브나무 줄기를 붙인다고 말한다. 여기서 참 올리브나무 뿌리는 이스라엘 전통을 통해 전해오는 생명의 계명, 즉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롬 11:17-18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바울의 역설적 접붙이기는 실수가 아니다. 창 올리브나무를 통해 올라오는 복음의 영양분을 돌 올리브나무가 자신의 본성을 이기고 참 올리브나무의 열매는 맺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복음을 통해 오는 생명이 결국 거짓을 이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돌 올리브나무는 땔감이나 지팡이 정도로 밖에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가치 없는 나무이다. 가지도 넓게 뻗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늘로도 잘 사용되지 않았다.

 

[묵상] 무엇이 살게 하는가?

 

우리는 종종 현재의 내 삶에 대한 이해가 과거까지 해석하는 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부와 성공, 명예와 권력이 나의 노력과 수고로 인해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만’ 있었던 것이 절대 아닙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고, 누군가의 기도가 있었고,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이곳에 온 것입니다. 현재의 나를 해석하는 틀은 현재의 내가 아닌 과거의 누군가들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감람나무 접붙이기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명의 매우 역설적입니다. 일반 접붙이기는 뿌리를 병충해와 가뭄에 강한 들감람나무를 사용하고, 그 위에 참 감람나무 가지를 붙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반대로 참 감람나무 뿌리에 돌 감람나무 가지를 붙였다고 말합니다. 돌 감람나무는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렇게 되면 돌 감람나무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참 감람나무 열매가 맺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참 감람나무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진액이 무엇일까요? 바로 진리의 말씀, 복음을 말합니다.

 

우리도 이방인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유대인들을 향한 자존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겸손’을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말고, 허황된 마음으로 자랑하지 맙시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의 식물] 독초(毒草, gall, poisonous herb)

 

 

1. 용어

 

독성이 매우 강한 풀로 히브리어로 ‘로쉬’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모두 12번 사용되었다. 한글 성경은 ‘독한 물’(렘 9:15; 23:15), ‘담즙’(애 3:19) ‘쓸개’(암 6:12)로 번역되었다. 동일한 ‘독초’ 또는 ‘인진’ ‘쑥’으로 번역된 ‘라아나’는 다른 단어이지만 비슷한 식물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로쉬와 라아나가 동일한 풀이 아닐까 추측한다. 사리풀이나 시리아 체꽃으로 보기도 한다. 로쉬는 ‘머리’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어는 고유명사가 아닌 보편명사로 어떤 상태의 식물, 즉 독이 든 식물로 보는 것이 옳아 보일 수 있다. 로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다른 독초에 비해 가장 많은 맹독성을 지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로쉬라는 식물은 고유명사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경 로쉬라는 단어가 12번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라아나’가 다르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다.

 

 

 

2. 성경 속의 독초

 

신 29:18,32:32-33, 욥 20:16, 시 69:21, 렘 8:14, 9:15, 23:15, 애 3:5, 3:19, 호 10:4, 암6:12,

 

celandine

 

 


[성경의 식물] 대추나무(palm), 종려나무

 

1. 용어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번역이다. ‘대추’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타마르’로 우리날 대추와는 상당히 다르다. 모양은 비슷하나 성향이나 특징은 전혀 다른 종류이다. ‘타마르’는 대추나무(욜 1:12)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종종 종려나무로도 번역된다.

 

종려나무는 아열대 지방에서 잘 자란다. 상록교목으로 대추야자로 불린다. 학명은 ‘Phoenix dactylifera’이다. 가나안 전 지역에 있 자라지만 수분이 어느 정도 있는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여리고에 많이 자란다. 3-7m까지 자란다. 큰 줄기는 하나이며 줄기에서 잎이 바로 자란다. 대추야자열매는 바나나처럼 한 송에 수백개의 열매가 붙여있다. 대략 50cm의 크기로 뭉쳐있다. 작게는 서너개에서 많게는 12송이가 열린다. 제대로된 열매가 열리려면 적어도 3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번 자란 나무는 200년 가까이 열매가 계속 열리기 때문에 대를 이어 종려나무를 심고 가꾼다.

 

 

 

수분을 좋아하긴 하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기 때문에 종종 광야 한 가운데서도 자라는 경우도 있다. 지중해 연안 주변에 잘 자란다. 특히 페니키아(베니게) 지방에서 가장 잘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학명에 ‘Phoenix’가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베니게 지역이 가장 잘 자라는 곳일 것이다. 대추 열매는 종종 ‘꿀’로 이해된다. 단 것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추열매는 많은 당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추야자열매를 꿀로 부른 것이다. 열매가 누렇게 익으면 추수하여 보관한다.

 

 

종려나무는 품종이 약간 씩 다르다. 어떤 종류는 잎을 하늘 높이 치솟고, 어떤 종려나무는 잎을 길게 옆으로 늘어뜨려 그늘을 만들어 준다.

 

 

 

2. 성경 속의 대추나무(종려나무)

 

종려나무처럼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도 귀할 것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다음으로 종려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종려나무는 평화와 쉼, 번영과 신부의 우아함, 기쁨과 승리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종려나무 아래에 있다는 말은 샬롬의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의 주신 평화를 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많은 열매는 번성과 축복을 상징한다.

 

사사기의 여사자 드보라는 종려나무 밑에서 사사의 역할을 감당한다. 남 사사와 다르게 공정판 판결을 위한 판결 사역에 집중한다. 아마 억울한 사람들이 드보라를 찾아와 공정한 판결을 기대했을 것이다. 종려나무에서 열리는 대추열매는 꿀과 같았다. 구약에서 꿀은 종종 여호와의 말씀을 뜻한다. 드보라(뜻은 벌)가 종려나무(꿀)과 함께 있는 풍경은 매우 자연스럽다.[이 부분은 필자의 졸저 <사사기 강해1>에 잘 설명되어 있다.]

 

 

 

종려나무는 부챗살처럼 뻗는 모습은 승리를 나타닌다. 빛이 뻗어나가는 모습과 닮아 승리와 영광을 의미한다. 종려나무는 물이 있는 곳을 말해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엘림에서 종려나무 70주를 만난다. 오아시스였던 곳으로 보인다. 광야에서 만난 오아시스는 그야말로 안식과 평안을 주었다. 후에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상징하게 된다.

 

리비야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와 종려나무

 

 

[사진 출처]

 

종려나무 열매들. 익으면 달아서 꿀로 부른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이며, 생명이다.

 

 

[성경의 식물] 로뎀나무(대싸리, White Broom)

 

 

1. 용어

 

로뎀은 히브리어 로템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구약에 4번 사용되었다. 다른 나무에 비해 극히 빈도수가 낮음에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이유는 엘리야가 죽기를 구했던 장소이기 때문이다.(왕상 19:4,5) 우리는 로뎀나무를 가시나무로 알지만 가시나무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명아주과의 1년생 식물이다. 잎은 바늘처럼 뾰족하고 가지사 무성하다. 줄기를 자라서 비(빗자루)로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의 대싸리와 동일한 식물은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로뎀(로템)은 좀 더 크고, 잎이 날카롭다. 영어는 White Broom로 번역한다.(Retama raetam) 장미목 콩과의 낙엽활엽관목이다. 지중해 동남부가 원산지다. 팔레스타인 사하사막, 아라비아 지역에서 많이 자란다.

 

 

 

 

가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많지 않다. 최근들어 로뎀나무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면서 그늘이 전혀 없는 작1m 남짓의 작은 대싸리 수준으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3m까지 자라는 약간 관목에 해당한다. 종종 로뎀나무와 떨기나무를 동종으로 보지만 약간 다르다. 욥기 30:4에 의하면 떨기나무와 대싸리가 반복되어 사용된다. 히브리어는 서로 다른 단어이다. 아마도 떨기나무와 대싸리(로템)나무는 거의 비슷한 종류인 것으로 보인다. 하얀 꽃이 피며, 잎이 떨어지면 빗자루로 재료로 사용된다. 광야에서 종종 발견되는 흔한 나무이다.

 

2. 성경 속 로뎀나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를 죽였지만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세벨의 분노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도망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소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브엘세바에서 하룻길 되는 광야로 더 들어간다. 죽기를 구하며 로뎀나무 아래 앉는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서 로뎀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하갈과 관목덤불

 

창세기 21장에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라함의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이스마엘이 희롱하는 것을 본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해 쫓아낸 사건이다. 두 번째 추방이며, 영원한 추방이다. 이때 하갈은 15쯤 되는 이스마엘을 데라고 광야로 나간다. 집에서 가져온 물이 모두 떨어지자 죽기를 결심한다. 어린 이스마엘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하살 한 바탕 거리로 떨어져 이스마엘을 향해 마주 앉아 통곡한다.

 

창세기 21:15-16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이곳에서 사용된 ‘관목덤불’은 ‘이쉬하(חיש)’라는 단어로 ‘로템’이 아니다. 개역한글에서는 ‘떨기나무’로 번역했고, 쉬운성경은 ‘어떤 작은 나무’로 번역했다. 성경에서 ‘이쉬하’라는 단어은 창 2:5; 21:15, 욥 30:4,7에서 네 번 사용되었다. 나무는 정확히 동일하지 않지만 맥락상 떨기나무와 로뎀나무는 전혀 다른 의미의 나무는 아니다. 그러나 로뎀에 비해 이쉬하는 좀 더 크고 잎이 많으며, 많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갈 스토리에 나오는 떨기나무로 번역되 이쉬하, 이쉬하는 로뎀나무보다 크고 그늘도 많다.

 

 

 

 

엘리야의 절망스런 통곡

 

왕상19:1-5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하갈이 대성통곡한 곳도 브엘세마 광야이다.(창 21:14)이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간 곳도 브엘세바이다. 이곳은 야곱이 요셉을 만나기 위해 가나안을 떠날 때 머물러 하나님께 기도했던 곳이다.(창 46:1) 야곱이 이곳에서 희생의 제사를 드린 이유는 무엇일까? 아브라함 때에 들었던 흉년이 이삭의 시대에 다시 일어난다. 그때 이삭은 블레셋으로 들어간다. 성경에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창세기 26:2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명하신다. 아마도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애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블레셋으로 간 후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것을 볼 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블레셋이 애굽과 같다는 것, 다른 하나는 블레셋에서 다시 애굽으로 내려갈 계획이 이삭에게 있었을 가능성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족장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셨음이 이삭의 때에 명확해 진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자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기근이 심할 때이다. 브엘세바는 가나안의 끝, 약속의 땅을 벗어나는 경계지점이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브엘세바 간 의미는 족장들이 가진 브엘세바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즉 브엘세바를 벗어난다는 것은 약속의 땅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엘리야는 브엘세바에서 하갈처럼 갈등했다. 야곱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엄밀하게 엘리야는 이세벨 때문에 도망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소명의 자리, 곧 가나안에서 도망갔던 것은 분명하다. 하늘에서 비가 그쳐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백성들, 소망 없는 이스라엘을 보며 그만 포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로뎀나무에 자신의 고개를 처박고 울부짖는다. 그늘이 거의 없는, 잎이 가시와 같아 불편한 자리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엘리야의 신세는 광양의 로뎀나무처럼 별다른 가치도 없고, 뗄감으로나 사용되는 무가치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엘리야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순간, 그 자리에 그는 로뎀나무 아래 있었던 것이다.

 

욥의 로뎀나무 뿌리

 

욥 30:4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먹을 거리를 삼느니라

 

욥기 30:4에서는 ‘대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고 기록된다. 대싸리가 또한 로뎀나무라는 것을 알기는 쉽지않다. 대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는다는 말은 이 로뎀나무 뿌리를 우리들이 칡 뿌리 먹듯이 먹는 것이 아니다. 그 뿌리로 숯을 만들어 그것을 팔아 먹을 것을 마련했다. 그런데 팔아서 먹을거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대싸리 뿌리를 먹는다면 심각한 기근을 말하는 것이다.

 

베두윈 사람은 로뎀나무로 숯을 만든다. 시편 120:4을 보면 '로뎀나무 숯불이란 표현이 있다. 로뎀나무의 잎은 미네랄 풍부해 쓰지만 중요한 식물이다. 로뎀나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덤불’로 표현한다.

 

시 120:4, 사 14:23

 

[묵상] 로뎀나무 아래서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이 바알 숭배에 빠지고 타락의 길을 걸을 때 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힘이 있어 하늘의 닫고 열었습니다. 바울의 본거지인 갈멜산 정산에서 바울의 제사장들과 대결하는 용맹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아무도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망했고, 억울했고, 소명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단 끝, 브엘세바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광야이고 절망의 장소입니다. 제대로된 그늘도 만들지 못하는 로뎀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며칠을 굶었지만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육체의 허기보다 더 강렬한, 영혼의 허기가 그를 압도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과 생명과 모든 힘을 다해도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실수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왜 불렀습니까? 이렇게까지 당신을 위해 헌신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어느 누구도 저의 이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가진 선지자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은 저를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불렀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제 저를 죽여주십시오.

 

천사가 찾아와 그를 위로합니다.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줍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일어나 힘을 얻어 네가 가야할 길을 가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일어나 시내산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가 행해야할 것을 일러 줍니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눈에 모든 것이 불안하고 절망스러워 보여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성경의 식물] 단풍나무(신풍나무, 플라타너스)

 

 

 1. 용어

 

플라타너스를 말한다. 히브리어는 ‘아르몬’이다. 학명은 ‘ Platanus orientalis L’이며 버즘나무(Platanus orientalis)의 일종이다. 우리가 아는 플라타너스는 양버즘나무다. 단풍과의 낙엽 활엽 교목이다. 기존의 플라타너스와 모양이나 크기가 거의 흡사하기 때문에 다른 종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잎이 커 그늘을 만든다.

 

 

 

2. 성경속의 단풍나무

 

‘아르몬’은 신풍나무(창 30:37)로 번역되었다. 성경에서는 딱 두 번(창 30:37, 겔 31:8) 기록되었다. 한 번은 야곱이 라반의 양을 키울 때 양이 새끼 낳은 때 신풍나무를 잘라 그 앞에 두게 했다는 표현과 에스겔에서 멸망하게 될 바벨론을 표현할 때 사용했다.

 

 

신풍나무의 줄기는 표피가 벗겨지면서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야곱에 양들이 새끼를 낳은 아마도 줄기를 벗겨 그 앞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 30:37

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에스겔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높이신 것을 먼저 소개하면서 교만하게 된 바벨론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바벨론은 그 어떤 나무와 비교할 수 없는 크고 화려하고 멋지고 장엄한 나무였다. 그런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라는 표현 모호하다. 전체 맥락 안에서 나무들의 장대함과 화려함보다 바벨론의 화려함이 더한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할 것을 볼 때에 ‘그 가지’는 신풍나무의 가지가 뻗어가는 것보다 더 멀리 뻗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풍나무는 잎이 크고 활엽목이기 때문에 물을 많이 필요로 한다. 물가에 잘 자라며, 강수량이 어느 정도 되는 지역에서는 가로수로 심겨진다.

 

에스겔 31:1-11

1 열한째 해 셋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누구에게 비하랴 3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 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5 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크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뻗어 나갔고 6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7 그 뿌리가 큰 물 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1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11 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 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

 

그늘이 필요한 반사막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신풍나무가 별 대수롭지 않게 평가되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아마도 아무런 실과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처럼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신풍나무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나무임에도 평가절하된 이유는 열매가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묵상] 신풍나무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야곱의 지혜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그는 자신의 양을 더 많게 하기 위해 신풍나무를 가져와 양들 앞에 두었습니다. 그로인해 양들은 야곱이 원하는 대로 새끼를 낳았고, 부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에서를 속일 때도, 라반의 양을 기를 때도 야곱은 여전히 자신의 지혜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과욕이 위기를 부르고, 탐욕이 고통을 데려 온다는 것을.

 

신풍나무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야곱은 단지 그것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야곱의 지혜는 하나님의 선함 속에 있고, 야곱의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신풍나무를 본다하여 얼룩한 새끼를 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양들이 새끼를 밸 때 DNA와 세포 하나까지 간섭하시고 만지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야곱이 이것을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라반의 집을 떠날 때 두 아내를 불러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빼앗아 나에게 주었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창 31:9) 그럼에도 야곱은 자신이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출처: [Pensé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