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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성령과 섬김의 사역자 나사렛 예수

by 은총가득 2021. 1. 27.

성령 사역자이신 나사렛 예수

    ▲ 김영한 박사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각 성과 촌을 다니시며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을 고치시며 영과 마음과 몸, 전인을 치유하셨다. 이러한 나사렛 예수는 성령 사역자이셨다. 그 후 베드로, 빌립, 스데반 등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모범을 따라 성령 사역자들이 되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역사적 예수는 원형 성령 사역자이시다. 나사렛 예수는 이런 의미에서 유일한 성령 사역자시요 그 이후에 제자들과 교회사에 나타난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 이집트 수사(修士) 안토니우스를 비롯하여 중세의 버나드, 종교개혁의 루터와 칼빈, 18세기의 조나단 웨드워즈, 휫필드, 존 웨슬리 19세기의 찰스 피니, 20세기의 로이드 존스 등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여태까지 정통신학은 예수의 성육신과 신성을 강조하여왔고 기독론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여왔다. 이는 정통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강조하면서도 성령과의 관계는 전제하면서도 부각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어왔다.

필자는 이 글에서 역사적 예수가 지니신 독특한 측면, 그동안 필자가 놓쳤던 부분, 말하자면, 그가 하나님 아들이요 성육신 가운데서도 신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성령으로 태어나시고 충만하신 성령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는 역사적 예수 이해에 있어서 그의 메시야적 사역이 지니고 있는 감추어져 있는 성령의 사역을 자유주의 신학과 심지어는 복음주의 신학이 간과하는 것을 보충하는 글이기도 하다.

 

 

I. 성령으로 태어나시고, 충만하신 예수

1. 성령으로 잉태된 나사렛 예수

성령은 성자인 나사렛 예수의 성육신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4-35). 여기 사용된 “덮으신다”(έπισκιάζω)는 용어는 변화산 사건(눅 9:34)에 대한 묘사에서도 다시 사용되고 있는데 광야에서 낮에는 광야의 살인적으로 작영하는 태양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고 인도했던 하나님의 구름을 연상시킨다. 구름이란 가시적으로 나타난 “신비로운 하나님의 임재”(the mysterious presence of God)를 나타낸다. 이러한 천사의 기별에 대하여 마리아는 믿음으로 대답한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37-38). 마리아는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한다.

 

예수의 잉태는 인간의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인한 생물학적 방식이 아니라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시듯이 성령의 권능으로 태초의 말씀이 마리아의 자궁에 들어가 아기 예수로 잉태된 것이다. 이러한 성령으로 인한 그의 출생은 예수의 신성과 죄 없는 존재를 보장할 수 있게 한다. 세례자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아내 엘리사벳의 태에서 태어나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으나(눅 1:13, 15)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약혼한 신랑 요셉과의 동침없이 처녀 마리아의 태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잉태되었다.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 1:15). 세례자 요한의 출생은 자연적인 과정이었으나 나사렛 예수의 출생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초자연적 과정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잉태가 초자연적이고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2. 성령의 기름부음 받아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메시아로서의 예수

1) 독생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

예수께서 성령 사역자가 되신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받을 시에 성령의 충만을 받은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요 또한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성령의 권능 사역을 하셨다. 사도 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는 태초의 말씀으로서 “성육신 하신 말씀”(das Fleisch gewordene Wort)이었다. 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성육신하신 말씀인 예수에 관하여 다음같이 해설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1-2).

 

예수가 말씀으로 충만하신 것을 드러내주는 장면은 복음서에서 그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간 시험받으실 때에 마귀가 예수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고 시험했을 때, 예수는 신명기 말씀(신 8:3b)을 인용하여 물리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b).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시험했을 때 예수는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 4:7)고 물리치신다. 마귀가 예수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시험한다. 이에 예수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b)고 물리치신다. 이는 예수께서 어린 시절부터 회당에 들어가 구약의 토라(Torah)를 열심히 읽으시면서 말씀으로 충만하신 것을 나타내준다.

 

2) 성령의 기름 부으신 공적 사역

갈릴리의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의 글(사 35: 4-6)을 펴 읽으시면서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공적 사역을 선언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예수는 자신이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아 메시아 사역을 하시는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예수의 메시아 사역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역이다.

예수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모세의 율법의 정신이란 사랑이라는 것을 해석하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그의 인격 안에 이미 도래했고, 천국이 가난한 자의 마음 속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그의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5장-7장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공관복음과 4복음서에는 그의 말씀(가르침)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설교와 말씀에 대하여 청중들은 놀랐다. 그의 설교는 권세있는 자의 설교로서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태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세례자 요한이 옥에 갇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를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3)라는 메시아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수행되는 그의 메시아 사역을 통하여 간접 대답을 하신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5). 소경이 보고, 앉은 뱅이가 걷고, 나병환자가 치유되며, 청각 장애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성령의 치유능력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예수는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사역을 행하신 것이다.

 

II. 성령 사역으로서의 메시아 사역

1. 성령 사역자로서의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었다.

1) 하나님의 본체인 나사렛 예수

나사렛 예수는 지극히 낮은 신분으로 초라한 나사렛 시골에서 성장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유대교 종교지배층으로부터 초라한 지역의 출신으로 무시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영적 원천은 하나님의 본체셨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인간이 되셨다. 초대교회 그리스도 찬가는 이러한 예수의 모습에 관하여 노래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하나님의 본체”(μορφῇ θεοu/)란 하나님의 형상(form)으로서 보이지 않는 성부의 보이는 모습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동질적 존재를 나타낸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제자 빌립에게 그가 행하시는 사역(병고침과 축사와 이적과 기사)을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이심을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 14:10-11). 예수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체험은 그의 인격 안에서 주어졌으며, 그 안에서 신적 본질의 충만함이 드러나 있다고 가르치신다. 앞서 주의 가시는 길을 알지 못한다고 질문하는 제자 도마에게 예수는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7).

 

2) 와그너의 신성유보설은 비성경적이다

신사도 운동가 와그너(Peter Wagner)의 신성 유보설은 성경적이 아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사용하신 유일한 본성은 바로 예수의 인성이다.”(Peter Wagner, How to Have a Healing Ministry Without Making Your Church Sick,( Regal Books(Ventura, Cal., USA, 1988), 정윤교 역, 『제3의 바람』, 나눔터, 1993, 124.) 와그너는 예수가 지상적 삶에서는 신성을 내려놓고 인성만을 사용했는데 이 인성은 성령의 권능에 의하여 초자연적 능력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성자의 케노시스(kenosis)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와그너는 성령 충만을 강조하기 위하여 신성을 대체하는 것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는 신사도 운동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편견일뿐이다.(김영한, 『영적 분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본 성령과 사탄에 의한 영적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 (용인: 킹덤북스, 2014), 500-504.) 지상적 삶에서도 예수는 신성을 유지하셨다. 예수가 신성을 유지하였다는 증거 중에 하나가 그가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부르신 것이다. “아바”(abba)라는 호칭은 구약의 모세나 선지자도 부리지 못한 것이묘, 당시 신약시대 대제사장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라는 메시아적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지신 신인으로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다. 성령은 공생애 동안 예수의 모든 능력의 근원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메시아적 사역을 감당하는 성령의 사역자가 되신 것이다.

 

2. 겸손한 복음 전파자요 치료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셨다. 이 복음 증거를 하시는 가운데 예수는 자신에게 오는 모든 병자들의 모든 질병을 다 치유하셨다. 예수의 사역가운데 38.5%가 치유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치유와 기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나타내시는 특별한 순간이다.”(Ralph W. Neighbour, Jr., Where Do We Go from Here? 2nd ed.(Houston, TX: Touch Publication, 2000), 164-5) 예수의 치유와 기적은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를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는 질병에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외면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도래라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징표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병든 자들을 고치신 것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많은 사람들을 고쳤었으나 예수는 교만하거나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셨다. 예수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셨다.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셨다. 심지어 더러운 귀신들까지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고백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막 3:11-12). 마태는 이사야에 의해 선포된 야웨의 종 노래(사 42:1-4), 온유하면서도 권능의 종의 실현이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 12:18-21). 마태는 예수를 떠들썩하게 크게 나팔부는 권능 치유자가 아니라 평온함과 인내심 가운데 상하고 끄져가는 자의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시는 성령 권능의 사역자로 그리고 있다.(Enrico Galbiati, The Gospel of Jesus, 1992, 나채운 역, 성지에서 보는 예수 사역의 발자취, 서울: 성지출판사, 1994, 117.)

 

3. 하나님의 성령의 공급을 무한정으로 받으셨다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는 인성 자체로부터 영적 능력이 나오지 않고 그의 신성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끊임없은 교통 속에서 조용한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았다. 예수의 인성은 그의 신성과의 불가분적인 소통 가운데 있었으며 그의 신성은 끊임없이 성부와의 인격적 관계에 의하여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한적한 것으로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예수는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40일 기도하시며 시험을 받으셨다(마 4:1).

 

예수는 공적 사역을 위하여 요단강에 나아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라는 공적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고 성령이 충만한 강림으로 인간 예수에게 사역자로서의 권능을 부여하신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1-22).

 

예수께서 광야 시험을 이기시고 나사렛에서 메시아 사역을 공식적으로 시작하실 때 회당에서이사야 선지의 글을 읽으면서 주의 성령이 자신에게 임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에 자기를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리를 가르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공급받고 계심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예수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이상의 복음서 증거를 보면 인간 예수는 비록 온전한 신성을 지녔으나 인성적으로는 육신적 제한과 언약함 속에 있었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속에서 성령의 권능으로 항상 채우심을 받아야 하셨다.(계속)

 

 

III. 권세있는 교사, 권능의 전인(全人) 치료자, 축사자

 

성령의 권능(δύναμις)이란 예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의 권능으로 가르치고 전파하고 병든자들을 고치며 귀신들을 쫓아내신 초자연적 능력을 가르킨다. 성령을 받는 것은 능력을 받는 것, 권세(έxουσία)를 부여받는 것과 동일하다. 이러한 권세는 귀신을 축출하며 병자들을 치유할 때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수제자 베드로가 고넬료집에 초대되어 말씀을 전할 때 예수께서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으셨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의 권능적 사역은 그의 메시아적 사역에 대한 확증이었다. 성령의 권능 안에서 예수의 메시야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성령의 임재로 인한 사단의 패배, 죄악과 질병과 죽음의 정복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오늘날 성령 사역자의 원형이시다. 예수는 그자신이 권세 있는 교사, 전인 치료자, 축사자였다. 예수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시며 권능적 사역을 행하도록 말씀하신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7-8). 예수의 선교 지상 명령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마 28:20)이란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실 때의 가르침, 병고침, 영혼과 마음의 치유, 축사” 등이 포함되어 있는 전인적인 것이다.(William Henriksen, New Testament Commentary: The Gospel of Matthew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4), 1002.).


1. 성령 안의 권세 있는 랍비
예수는 회당에서(마 4:23) 설교와 대화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윤리의 삶을 살도록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5장-7장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더 정확히 펼쳐진다. 그는 서기관들처럼 단순히 모세의 법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세 이상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그는 율법의 정신을 강조하시면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왔다(마 5:17-18)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너희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살인치 말라는 계명을 더 극단화하여 형제에게 노하고 미련하다고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리라고 경고하시면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에 형제와 먼저 먼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마 5:21-24)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쿰란문서 등의 가르침에 대하여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가르치신다. 율법의 창시자 모세를 능가하는 이러한 예수의 권세있는 가르침은 그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역자임을 알려준다.

 


2. 성령 권능에 의한 질병의 치유자
성령 사역자로서의 예수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고쳐주셨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그의 공적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시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마 4:23-24).
마태복음 8장-9장에서는 예수가 행하신 치유기적들이 기술되어 있다. 나병환자의 치유, 가버나움의 백부장 하인 중풍병 치유, 베드로 장모의 열병 치유, 혈류증 앓은 여인의 치유, 야이로의 죽은 딸 살리심, 눈 먼 사람들, 말못하는 자 치유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치유 사역에 대하여 총괄하면서 마태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예수께서 이렇게 그에게 고침을 받으러 온 모든 사람의 각종 질병을 모두 고치시고 귀신 들린자들을 모두 고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의 충만함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성령 사역자의 원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 사역자들은 모두 예수의 원형적 사역에 기반하는 것이며 예수의 이름으로 고치는 것이다. 예수가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단지 가르침이나 설교로만 전파되지 않고 능력의 치유로서 전파되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의 복음 전파의 모델을 본받아 이러한 치유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많은 질병이 있으며 동성애 탐닉자, 각종 심리병에 의한 만성적인 우울증에 사로 잡힌 자들, 귀신들린 자들에게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복음의 능력을 그대로 증거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3. 성령 권능에 의한 영혼의 치유자
성령 사역자 예수는 설교하시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치유자로서 내면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상담하고 치유하였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세가지 예를 찾을 수 있다.
1) 니고데모와 상담
공의회의 일원인 유대관원인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밤 중에 예수에게 찾아와서 예수의 표적을 보아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예수에 대하여 호감을 표시하였다. 그는 예수가 행한 각종 표적을 보면서 그가 신봉하는 율법 종교의 한계를 느끼고 예수를 찾아 온 것이다.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니고데모는 질문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3:5-8).


예수는 이날 밤 자기를 찾아온 바리새인이요 유대 종교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 율법종교가 주지 못하는 중생의 비밀을 가르쳐주신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는 도리(道理)였다. 중생이란 성령을 통한 회개의 씻음과 새 생명 부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이 날 밤 중생의 도리를 깨달았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성령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니고데모 마음 속에 감동을 일으켜 중생을 체험하도록 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 상담의 결과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의 제자가 된 니고데모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시신을 수습하게 될 때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는 가운데도 아리마태 요셉이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의 시신을 가져온다. 그 다음 날 니고데모는 몰약을 가지고 예수의 시신을 찾는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이 구절은 니고데모가 예수의 제자인 것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근조품은 백 리트라는 약 33킬로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으로서 죽은 자의 탁월한 명예를 말해준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예수와 함께하신 성령은 예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셔서 그날 밤 율법사 니고데모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중생의 사람으로 변화시킨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2) 사마리아 여인과의 상담
예수는 갈릴리로 가시는데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여기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는데 대략 정오(육시) 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는데 에수께서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 여인이 대답한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여인이 질문한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요 4:11).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여인이 대답한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예수께서 이르신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요 4:17a)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7b-18).

여인은 자신의 현재의 삶을 지적한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하고 예루살렘이 선지자의 경배지라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는 하나님 경배의 새 방식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6).


사마리아 여인은 이러한 대화를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을 그에게로 데리고 온다(요 4:28-29). 예수는 그 여인을 처음보자마자 자기가 메시아이니까 믿으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생수라는 현장의 물질을 매개로 하여 대화의 소재로 삼아 그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에게는 다시 길러와야 하는 그러한 생수가 아니라 배 속에서 영원히 솟아 오르는 생수가 필요한 것을 예수는 간파하셨다. 예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언급하시면서 여인이 이것을 원한다면 그녀의 현재의 삶은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권면한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여러 남편이 있었고 지금 남편도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여인의 삶을 예언자의 통찰력으로 드러내신다. 여인은 자기의 숨겨진 삶에 관해 알고 계시는 이 분이야말로 선지자라고 말한다. 예수는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에배해야 할 것을 가르치시니 여인은 메시아가 오시면 참된 진리를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예수는 내가 바로 메시아라고 그 여인에게만은 숨기지 않으시고 메시아의 비밀을 드러내신다.


예수는 성령이 주시는 영감으로 물 길러온 사마리아 여인의 내면성을 아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여인에게 주실 성령을 생수로 비유하시며 그녀에게 접근하여 그녀와 대화의 문을 여셨다. 여인이 예수에게 갈하지 않는 생수를 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는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그녀의 삶이 변화되어야 할 것을 암시하신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성령의 조명을 받았고 그녀는 자신의 불윤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남편이 없다고 예수 앞에 토로하고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서 대화 가운데 말씀으로 조명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녀에게 임한 것이다. 이는 성령사역자로서의 예수의 권능있는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3)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하심
예수께서 감람산에 가셨다가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셔서 백성들을 가르치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오서 모세의 율법대로 이 여인을 돌로 쳐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예수가 평소에 가르친대로 자비와 사랑을 주장하여 처벌의 금지를 명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신 22:22-24). 반대로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처형하라고 하면 로마 총독부가 가진 사형의 판결권과 집행권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에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하신다. 고소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다(요 8:9).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신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 8:10). 여인이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요 8:11a) 예수께서 이르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b). 예수는 여인을 돌려 보내면서 말씀하신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는 간음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이 여인을 잘못대로 율법에 의해 처형하도록 내버리지 않으시고 용서의 기회를 주셨다. 분명히 이 여인은 용서의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서는 기록하지는 않지만 성령론적 해석의 관점에서 예수는 성령의 능력으로 여인을 용서하시면서도 이 여인이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시고 돌려보내신 것으로 읽을 수 있다.


4. 성령 권능에 의한 축사자 예수
1)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쫓아냄
예수께서 그의 사역의 중심지인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더러운 귀신들린자가 예수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예수께서 꾸짖어 명령하니 귀신이 큰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에게서 나왔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막 1:25-26).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많은 병자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막 1:32-34). 마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 나셨다(막 1:37)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막 1:39). 예수는 벙어리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다(눅 11:14).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마 9:32-33).


2) 가다라 지방에서 군대 귀신 쫓아내심
예수는 가다라 지방에 가셔서 귀신 들린 사람 둘이 있었는데 너무 사나워서 사람들이 거리로 가지 못할 정도였다.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마 8:28). 그런데 이들이 무덤사이에서 나와서 예수를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들이 먹고 있었다(마 8:30).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한다.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마 8:31).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마 8:32). 이처럼 예수는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가지시고 많은 귀신들린 자들에게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예수께서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지니신 것은 그에게 성령의 권능이 같이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 예수에게 충만했기 때문에 그는 귀신의 권세를 깨뜨리고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3) 70인 전도단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단을 제어함
예수는 제자들 70인을 2인씩 편성하여 이들에게 성령의 권능으로 사단을 제어하는 권세를 부여하시고 이들을 각동 각처로 보내셨다. 70인 전도단은 돌아와 예수께 기뻐하며 보고하였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이에 예수께서는 그의 오심으로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셨으니 사단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8-19). 아들의 정체를 아는 것과 사단이 아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아는 것이 어린아이들처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에게 주어진 것을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눅 10:21). 예수께서는 사단의 권세를 제어하심으로 그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음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예수는 그의 공적 사역 시작 시에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설교하셨는데, 그의 성령사역, 축사와 치유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실재로 이 지상에 임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가 고넬료집에 초청받아 설교할 때에 예수의 치유권능과 축사권세가 성령의 권능에 의한 것임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누가는 역사적 예수가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추방하는 성령 사역자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5. 사랑과 긍휼의 섬기는 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예수
1) 사랑과 긍휼의 사역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역사적 예수는 성령의 권능으로 많은 이적과 기사(奇事)를 행하셨으나 그는 능력이 제일이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마음의 청빈과 온유와 긍휼과 화평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8가지 복을 산상설교(die Bergpredigt)에서 선포하시는 사랑과 긍휼로 가득찬 사역자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3-10). 예수는 이렇게 설교하신 그분 자신이 사랑하시고 인자와 긍휼하신 자로서 삶과 신앙의 궁색함 가운데 사는 유대인들 가운데 화평을 심어신 자이다.


예수는 한 나병 환자를 고치실 때에도 그를 불쌍히 여기서 고쳐주셨다. 마가는 다음같이 증언한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 1:41-42). 예수의 치유사역에는 병든 자에 대한 긍휼이 동반되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스스로 기적 치유자라는 우월감에 사로 잡히신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신 긍휼의 사역자셨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예수는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의 글(사 42:7; 사 58:6)을 펴시고 읽으시며 이 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눅 4:20-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는 단지 초자연적 능력의 과시자(誇示者)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들을 보게하시고, 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그의 성령 사역은 이처럼 그 속에 솟아 넘치는 사랑과 긍휼에서 나오는 권능의 사역이었다.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는 원수 사랑에 관하여 가르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3-45). 예수는 자신이 가르치신대로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3-34). 예수는 자신이 가르치신대로 죄인인 우리의 대속을 위하여 속죄물이 되신 사랑의 사역자요 구세주가 되셨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증거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2) 섬기는 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께서 권능적 사역을 하신 것은 섬김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섬기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성령의 권능 사역의 본질은 자기 능력의 과시 행위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섬김이다. 예수는 소외되고 병든 약자들을 위해 오셨고 일하셨다. 섬김이 곧 디아코니아(diakonia)이다. 예수는 원형적 디아콘(Diakon)이다. 예수는 성자였으나 인간의 고통과 죄 속의 비참의 상태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신의 영광의 본체를 내려 놓으시고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들어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미 출애굽기에 드러나는 쉐히나(Schechina)의 하나님 모습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a). 쉐히나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상태에 있는 그의 백성의 고난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이시고 그 근심을 아시고 받고 있는 그의 백성에게 내려오셔서 이들을 이집트인들에게서 건져내시고 이들을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쉐히나는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그의 창조물 가운데 거하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스런 현실에 공명하셔서 그 현실에 직접 참여하고 자신을 그 고통 아래 놓는다.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니신 능력 때문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그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셔서 그 마음이 애끓은 공명을 일으켜 스스로 그들에게 내려가셔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인자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고난, 이것이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방식이며 공명이 낳은 행동양식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여기서 그 힘을 얻는다. 하나님이 가지시는 그의 백성들과의 연대는 단지 심리적 연대에 그치지 않는다. 간접적 지원에 머물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디아코니아는 그 행동의 방향과 정당성을 얻는다." (김상기, "디아코니아는 예수 활동의 본질이며 사랑·정의의 완성" [기독일보] 이동윤 기자 dylee@cdaily.co.kr 입력 2015.01.30 08:04 | 수정 2015.01.30. 08:50, '디아코니아 아카데미 2기')


고통당하는 자를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과 예수의 공통점이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대국 니느웨 성을 향한 심판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다음같이 항변한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b). 요나의 항변에 대하여 다음 같이 다정하게 대답히시는 그 분의 말씀에서 이방 민족이라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0-11). 누구에게나 있는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은 그가 하나님 형상의 잔재(殘滓)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불신자들까지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공명하고 그의 이웃이 되고 그를 위해 행동할 수 있다.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의 실천적 표현"이다. 지배자들이 약자를 억압함으로써 부를 증식하는 불평등을 확대해가는 것에 대해, 예언자들은 지배자들에게 삶의 길을 바꾸라고 경고한다. 예언자들은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세우는 일”이요 “하나님의 법을 마음으로 듣는 일“이다. 법을 매개로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과 만난다. 디아코니아는 “사랑과 정의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디아코니아는 예수 활동의 본질이다. 예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며 가는 그의 길 가운데 쉼이 있다.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쉼은 그의 멍에를 메고 배우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디아코니아의 길에 있다. 사랑으로 일하는 섬김은 성령의 능력이며, 가장 크고 좋은 은사로서,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고 사막에 꽃이 피는 그 길은 성령의 능력, 디아코니아에서 시작된다. 그 변화를 위해 예수는 성령을 약속하셨고, 우리도 성령이 부르는 그 길로 가야 할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위해 오신 예수를 쫓고 그의 실천과 계획을 오늘의 우리 삶으로 옮기려는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동일시되거나 비교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람들에 대해 약자를 조롱하거나 학대하는 자는 곧 자기를 멸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셨다(잠 14:31:잠 17:5). 그와 같은 하나님과 예수의 약자 이해 때문에 “약자는 더 이상 자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교회는 그들을 통해 그들과 동일시 되려고 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디아코니아의 성경적 근거는 나사렛 예수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공명과 연대 및 고난'에서 찾을 수 있다.

IV. 성령능력의 통로 예수
인간 예수는 성령능력의 통로가 되셨다. 그는 성령으로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셨고, 대속제물이 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1.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한 순종하신 예수
예수께서 공생애에서 하시는 모든 권능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죄성으로 인해 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7-8). 사도 바울은 죄인들이 언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것을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예수께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인한 성결의 능력이 충만했기 때문에 그의 인성은 온전한 성결을 이룰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b)라고 증언한다.

2. 오늘날 성령 사역자의 모델 되시는 예수
예수는 제자들에게 치유사역을 가르치고 훈련하셨다. 그의 성령 사역이 자신에게서 그치지 않않고 교회시대에서도 지속될 것을 가르치셨다.

1) 성령의 권능으로 70인을 내 보시어 전도 사역, 마귀 제압
예수께서 70인 2인조 전도대를 보낸 것은 오늘날 전도대의 영적 능력을 예시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의 이름에 귀신들은 전적으로 항복하였다(눅 10:17). 사막의 영성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하는 가운데 어느 날 밤 야수와 파충류의 모습을 한 마귀떼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성령의 빛이 그에게 내려 옴으로써 “갑자기 마귀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의 몸의 고통은 즉시 멈추었고, 무덤은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김영한, 『안토니우스에서 베네딕트까지』, 정통기독교영성가 제 1권, (서울: 기독교학술원, 2011), 82.)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영적 체험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과 전도자들은 예수로부터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눅 10:19a)을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귀신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b). 오늘날 신자들이나 전도자들은 이러한 영적 권세 받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우리 이름이 하늘에 녹명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2) 성령의 권능으로 교회에 복음전파, 가르침, 치유 및 양육 사역 위임, 권능 부여.
나사렛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든 병과 귀신을 제어하고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눅 9:1).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라고 명령하시어 파송하셨다(눅 9:2). 특히 선교의 지상명령에서 예수는 성령 사역자의 원형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선교의 지상 명령을 내리신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예수는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축사, 새 방언, 독에 해 받지 아니함, 병든 자 치유를 말씀하신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초대교회부터 교회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 세계 선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은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가 동반하는 능력으로 전파디고 있다. 오늘날에도 복음 전파에는 항상 귀신이 추방되고, 병든 자들의 치유가 일어나고 각종 초자연적 표적이 일어난다.

3) 권능의 현재화
목회나 선교현장에서 축사나 질병을 치유할 때 성령 사역자들은 치유의 위임자인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떠나가라.”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이름을 사용하여 간구하거나 명령하면 그대로 직접 시행하겠다는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오늘날 역사적 예수는 2천년 전(前)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박물관에 계신 것이 아니다. 그는 살아계시는 인격으로 오늘도 그를 믿고 신뢰하는 자의 중보자가 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역사적 예수의 현재성을 다음같이 증언한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4-25)


오늘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이 부재하여 하나의 종교적 인본적 집단으로 변모된 교회는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매우 인간적으로 볼 때 인도주의적 신사도(紳士道)의 종교라고 평가받지만, 예수의 복음과 능력이 부재한 인본주의적 종교로 변모되고 있다.


저자는 글을 쓸 때 기독교방송(CBS)과 극동방송(FEBC)을 즐겨 청취하곤 한다. 매주 월요일에서 금요일 오전 11시 05-50분에 방송되는 극동방송의 「소망의 기도」는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고 중보기도의 능력의 시간”으로 병든 자들과 어려운 삶의 문제에 대한 기도치유의 시간이다. 이 치유 기도 프로그램이 일회적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 지속되는 것을 보면 기도에 참여하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치유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현장화되는 사실에 접하게 된다. 이러한 기도에 참여하는 지역 목회자들은 모두 성경 그대로 믿고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바 성령의 현재하는 능력을 그대로 믿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오늘날 예장 통합측 온누리교회 장로로서 치유사역을 하고 있는 평신도 사역자 손기철의 “헤븐리 터치 미니스트리”(Heavenly Touch Ministry)와 개인적 간증 전도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달하는 평신도 전도자 김하중의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 of God) 사역도 오늘날 주목되는 성령 은사 사역이다. 이들은 교리나 이론이 아닌 병든 자들에게 일어나는 치유(손기철의 사역)와 삶과 신앙의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를 알려줌(김하중의 사역)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려주고 있다. 그 외 저자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한국교회 안팍에서 일하는 헤아릴 수 없는 목회자들, 선교사들과 평신도 사역자들의 사역과 설교를 통하여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신체와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시고 새로운 소망과 삶의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사역을 헤아릴 수 없다.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와 정통주의자로 자칭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이러한 성령 능력의 현재화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며 이러한 능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이단적 내지 신비주의적, 불건전한 신앙“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교리 안에 맞추어진 신학적 지식과 교리적 설교를 통하여 살아계신 성경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교리가 만든 하나님 상에 갇혀놓았다. 이를 저자는 “성경 이신론”(bible deism)이라고 명하고자 한다.


오늘날 일부 정통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해석한 교리적인 성경 안에만 가두어 놓은 성경 이신론자들에 반하여 미국 풀러신학교 교수인 찰스 그래프트(Charles H. Kraft)가 그의 『능력 그리스도교』(Christianity with Power)에서 능력 복음전도(power evangelism)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 하나의 종교적 관습이나 윤리로 변질한 자유주의 기독교나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와 전통적 교리를 단지 추상적으로만 인정하고 삶 속에서 부인하고 있는 실천적 이신론 기독교 신자들에 대하여 기독교 복음이 상실하고 있는 사도적 기독교를 복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공헌하고 있다고 본다. 그가 가진 균형잡힌 의도는 다음 문장에서 보여진다. “나는 오랫동안 그 ‘모든 것’의 일부 – 사랑, 용서, 회개, 복음전도 등 복음주의자로서 우리가 헌신하고 있다고 여기는 일들 –에만 힘을 쏟아 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 ‘모든 일’의 다른 측면 – 영적 능력의 차원 - 을 체험하도록 권고하고 계신다. 나는 우리 모두가 사랑에 가득찬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능력에 가득찬 그리스도교를 체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Charles H. Kraft, Christianity with Power, 『능력 그리스도교』, 31.)


단지 저자가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능력 기독교 주장자들이 죄의 회개, 사랑과 용서라는 전통적 복음주의 가치를 소홀히 다루고 오로지 축사, 치유, 황홀경, 쓰러짐, 방언 체험, 음성 듣기 등에 치중한다면 복음이 지니는 영혼구원(칭의)과 성화(성결)를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찰스 그래프가 여태까지의 사랑, 용서, 회개, 복음전도의 전통적 복음주의의 입장으로부터 영적 능력의 차원을 체험하는 일에 지나치게 기울어짐으로써 그가 추구하는 균형성을 상실하고 기독교를 너무 초자연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4) 성령의 권능을 사랑의 열매로 보여주신 나사렛 예수
역사적 예수는 성령의 권능을 사랑의 열매로 보여주셨다. 그는 초자연적 사역자였으나 그의 모든 능력 사역은 그의 본성인 사랑에 의하여 동기화되고 사랑으로 행해지고 그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이들의 치유자가 되셨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병든자들과 소외자들을 보시고 연민과 공감을 가지시고 이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치유사역을 드러내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는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 누가 고쳐주었다고 알리지 말라고 하셨고, 그의 오병이어 기적으로 인하여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자 피신하여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기영합자(populist)가 되지 아니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숭고하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어 속죄 제물이 되셨다. 예수는 그가 가르치신 위대한 사랑의 계명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신앙의 본질이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을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받는 것(칭의)이나 기독교 신앙의 결실은 주는 것(성화)이다.


성령 사역(능력 치유와 귀신추방)은 칭의와 성화의 교리와 균형있게 행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령 은사를 가장 많이 받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이 모든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은사 가운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이 없는 능력 사역, 사랑이 없는 방언이나 예언, 사랑이 없는 산 같은 믿음, 사랑이 벗는 구제나 헌신과 희생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사랑 없는 모든 영적 지식이란 공허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사도 바울은 깊이 통찰한 것이다.(끝)


섬기는 자로서의 나사렛 예수

    김영한

머리말

여태까지 역사적 예수는 주로 전통교회와 신학에서 대속자, 구속주의 관점에서 다루어졌다. 이는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 하나님의 말씀인 나사렛 예수의 역사와 인류와 우주를 향한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해왔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전통교회는 구세주와 대속자이신 예수의 초자연적 모습을 강조에 치중함으로써 그가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섬기는 모습에 대하여는 크게 부각하지 아니한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본 연구에서 복음서를 중심으로 나타난 나사렛 예수의 섬기는 자로서의 모습을 그려내려고 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대속자요 구세주인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그 분이 세상과 이웃을 위한 진정한 섬기는 자로는 사실은 교회가 이 세상을 위하여 소금이요 빛이요 섬기는 자로서만 그 진정한 사명을 다할 수 있다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나사렛 예수의 이러한 섬기는 자로서의 모습은 진정한 지도자란 오늘날 지도자의 리더십에 관심이 고조되는 때에 진정한 지도자란 자신을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이웃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함을 우리들에게 교훈해주는 것이다.

 

I. 하나님 나라 도래의 지평으로 예수의 섬김: 하나님 나라 전파

이웃과 세상 섬김은 나사렛 예수의 사역의 핵심이다. 예수의 삶 자체가 모두 섬김으로 특징화 된다. 예수는 그의 전 삶을 통하여 섬김의 모범을 부여주셨다. 그는 이 세상을 향하여 일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섬김의 사역을 실천하셨다. 예수의 섬김은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 사역으로 나타났다. 설교와 가르침과 치유사역은 예수의 3대 섬김의 사역이었다. 예수의 섬김사역은 영, 마음과 신체를 보존하고 함양하고 그 질병을 치유하는 전인적 섬김사역(the wholistic serving ministry)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사역이 끝나자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자기 사역을 시작하신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예수는 그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단지 복음의 선포로서 알렸을 뿐만 아니라 가르치심과 더불어 섬기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을 통하여 증언하셨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섬김의 삶이었다.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의 말씀을 펴 읽어시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자신의 섬기는 사역의 의미를 말씀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의 섬기는 사역은 그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지평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 아들의 오심이란 수직적 차원의 성자의 겸허한 자기 비움에서 도래했으나 이것은 수평적 차원으로는 사회적으로 소외자들에 대한 섬김이라는 가시적인 모습이란 표징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섬김이요, 포로된 자의 자유, 눈먼 자의 보게함, 눌린 자의 해방이라는 섬김이다.

 

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실 메시아가 당신이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 나라 도래를 위한 그의 섬기는 사역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구현하는 메시아의 사역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치유함을 받으며, 청각장애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것인데 이러한 사역을 하는 섬기는 자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것이다. 예수의 섬기는 사역은 질병의 치유와 복음의 전파만이 아니라 초자연적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냄으로 나타났다. 그의 귀신 추방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도래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0). 예수는 그의 귀신 쫓아냄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 나라 도래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자연적으로 어느 미래 시점에 우주진화적 과정으로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섬김 사역 가운데서 이미 그 징표로서 현재한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미래에서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사렛 예수의 권능의 섬김, 병자,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절망에 빠진자, 각종 질병에 의하여 고통받고 있는 자들, 귀신들려 정신이 이상하게 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권능적 치유의 섬김 속에서 이미 도래하여 현재하고 있다. 예수의 섬김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능적 도래가 현재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섬김은 단지 구약적 예언자의 섬김과는 달리 예언자들이 증언한 하나님이 보내실 그 사람, 메시아의 섬김이다.

 

II. 하나님 나라 비밀에 대한 가르침의 섬김

예수는 갈릴리 호수 인근의 산에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셨다. 이 산은 팔복산이라고 하고 이 산에서 한 설교를 산상설교(Sermo Montanus, Sermon on the Mount, Bergpredigt, 마 5장-7장; 눅 6: 17-49)라고 한다. 산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임재하시는 장소로서, 호렙산에서는 모세에게 그 이름을 계시하시고 시내산에서는 그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는 장소이다. 마태는 산상에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시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1). 예수께서 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이들에게 설교하시고 가르치기에 적합한 곳에 올라가셔서 앉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시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주로 회당에서 그리고 들판이나 산에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비유(마 13장)로 설교하신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 가라지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밭에 감추어진 보물과 값진 진주의 비유, 그물의 비유 등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마 5장-7장)를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밤새 기도하시고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신다“(요 8:2). 예수는 자신이 세상의 빛(요 8:12-20)이라는 것, 높임 받으심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길(요 8:21-28), 진정한 자유(요 8:30-36), 아브라함과 마귀의 자녀(요 8:17-47), 자신과 아브라함(요 8:48-59)에 관해 가르치신다.

 

산상설교에 나타나는 사랑과 정의가 균형잡힌 예수의 사상은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타당하다.

오늘날 21세기 인류를 위협하고 있으며, 인류를 파멸의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는 핵무기 증강과 이슬람 극단주의 IS의 전쟁과 살상(殺傷) 등 폭력적 방법이 아닌 가난한 마음, 온유, 인간애 등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법 집행과 처벌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가 천국의 질서인 것처럼 오늘날 시대에도 산상설교의 온유와 자기 비움과 사랑과 정의의 정신은 그대로 통용될 수 있다.

 

III. 섬김의 모범자로서의 예수

1. 원봉사자 예수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인간을 섬기고 구속하기 위하여 오셨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교만, 권력의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므로 범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 원죄란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자 하며 자기 권력의지의 종이 되어 하나님에 대항하고 타인과 세계를 지배하고자 함에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어거스틴이 말한 바 같이 겸허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겸허는 삼위일체의 이위(二位)이신 성자의 지위를 버리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신분으로서 종이 되어 죄인을 구원하시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에 있다. 예수는 병든 자를 고치시며, 소외된 자를 받아들이며,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시고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섬김의 삶을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디아코노스(Diakonos)로서 그의 삶 자체가 봉사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봉사자”(Urdiakon)이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거처에 계실 때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에 대한 서열(序列)다툼을 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는 섬김의 정신을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예수는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막 9:36) 제자들에게 이르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7). 여기서 예수는 이웃을 다스리는 권력의지가 아니라 섬기는 자의 태도를 가르치고 계신다.

 

예수의 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직도 옛 삶과 목표에 사로 잡혀 자기들의 보상(報償)을 이 땅 위에서 받기를 기대하는 대신에 하늘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예수에게 요청한다(막 8:37-38; 막 13:26):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이 요구에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고난의 용광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 의식을 섬김의 종, 고난의 종으로 이해하신 것을 우리는 여기서 파악할 수 있다. 예수는 죄에 빠진 인간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몸소 마시려고 하신다(참조, 시 75:8; 렘 25:15-16; 합 2:10). 그리고 예수는 인간들의 죄에 대한 벌로 받아야 할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자 하신다.

 

다른 열 제자가 이를 듣고 분히 여긴다. 제자들 중에 서로 크다고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을 마가는 다음같이 전해준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마태도 거의 비슷한 예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 26-27). 누가도 이와 비숫한 뜻의 예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준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5-27).

 

예수는 자신을 임금이나 집권자나 고관과 같이 생각하시지 아니하셨다. 예수는 이들처럼 사람들 가운데서 권세를 부리지 아니하셨다. 예수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세속적 가치(價値)의 전도(顚倒)를 가르치신다. 예수는 섬기는 자가 진정하게 다스릴 수 있으며, 낮아지는 자가 진정하게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자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는 가르치신대로 낮아지셨고, 종이 되셨고, 섬겼고, 대속물이 되셔서 자신의 생명까지 속량물로 주셨다. 이러한 예수의 생애는 섬김의 생애였다. 섬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간에 대한 섬김의 생애였다.

 

2. 섬김의 명령을 주신 나사렛 예수

예수는 유월절 전에 이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신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요 13:4-5).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본받아 섬기는 삶을 살아라고 교훈하신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 13-16).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오늘날 우리는 그분을 본받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권세 있는 자 또는 부유한 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섬겨야 한다. 예수는 최후의 심판 때 우리의 섬기는 행실을 따지실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주님은 나그네를 영접하고 벗은 자를 입히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며, 목마를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자를 심방하며, 옥에 갇힌 자를 심방하라고 가르치신다(마 25:35-39). 진정한 섬김이란 대가가 주어지는 권세 있고 부유하고 큰 자를 섬김이 아니라 대가보다는 희생이 있어야 하는 지극히 작은 소자를 섬김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는 자신을 지극히 작은 소자와 동일시 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b).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 45b).

 

3. 전인(全人)적 치유로서의 섬김

1) 영혼, 마음, 신체의 치유로서의 섬김

예수의 복음사역은 죄지은 자와 마귀에게 짓눌린 자를 해방하는 영적 사역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어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섬김이었다. 예수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으며 그리고 신체에 질병을 가진 자들을 치유하고 소외된 자들을 공동체에 복귀시키고 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예수의 복음사역은 전인적인 구원의 사역이었다. 봉사란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실천하신 영혼, 마음, 신체 모두를 포괄하는 전인적 구원 활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 봉사는 전인적 섬김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에 근거한다.

 

첫째, 예수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는 잔치 식사를 자주 했는데 이때 제자들과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였다. 잔치 식사는 종종 모든 사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를 상징한다(마 8:11; 눅 14:16-24; 눅 15:20-24; 사 25:6-8). 여기서 소위 자칭 의인(義人)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특권들의 비난이 일어난다(눅 15:25-32). 이들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의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이들은 용서 받은 죄인들과 더불어 나누는 예수의 식탁교제로부터 스스로를 배제하는 위험에 빠진다.

 

여리고에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눅 19:2)가 있었다. 그가 여리고를 지나가는 예수를 보고자 하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 올라가간다. 예수는 나무 위에 있는 그를 보시고 그를 부르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한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여리고 지역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그 지역 내 전체 세관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바리새인들은 그러한 부패한 세리장을 인정하고 그 집에 유하고자 한 예수를 비난하였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 19:7).

 

그러나 예수는 다음 같이 서약하고 회개하는 삭개오의 내면을 보셨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는 비록 비난받는 세리직에 있었으나 서민들의 재산을 속여 착취한 것은 없는 정직한 세리였다.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며,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표명함으로써 이미 그 마음은 가난한 천국의 시민이 되었다. 예수는 그 마음에 이미 메시아를 영접한 삭개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말하신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예수 사역의 일차적인 것은 영혼의 구속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바른 관계의 회복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체의 치유와 이웃과의 바른 관계로서 나타난다. 사도 요한은 다음 같이 증언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된 것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그리고 영혼의 구원은 그 열매로서 이웃에 대한 봉사로 나타난다. 칭의는 삶의 변화와 거룩한 삶이라는 성화의 열매로 나타난다.

 

둘째, 내면적인 질병과 고뇌를 치유하셨다. 귀신 들림은 내면적인 질환으로 귀신이 인간의 정신을 점령하여 마비시키는 내면적 질환이다. 복음서 저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게 명하여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의 정신을 온전하게 하신다(막 1:21-39; 눅 4:31-36; 마 8:14-17). 예수는 거라사의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치유하신다. 군대 귀신이란 여러 명의 귀신들이 강한 세력을 이루는 귀신 군단을 말한다. 군대 귀신이 추방되자 거라사인의 정신은 온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예수와 함께 있기를 원하나 예수는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향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시고 그를 집으로 돌려 보내신다(막 5:1-20; 마 8:28-34; 눅 8:26-38). 두로 지경에서 예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들린 딸로부터 귀신을 추방하신다(막 7:29-30). 그리고 예수는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지는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신다(막 9:14-29).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종교적인 갈등을 가지고 찾아온 니고데모의 내면의 문제에 대하여 중생의 도리를 가르침으로 해결해주신다(요 3:1-21). 그리고 사마리아 수가 성(城)의 여인이 가진 인생의 전정한 가치와 삶의 의미에 관하여 “생수”라는 용어를 가져다 여인에게 비유로 설명하신다. 예수는 내면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을 가르치시고 그녀에게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요 4: 1-42). 그리고 예수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체포 시 자신을 부인하고 배반한 수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어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인격적으로 물으시고 그의 신앙을 다시 확인하시고 그를 복권(復權)시키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신다(요 21: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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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 신체적인 질병을 치료하셨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막 1:42), 가버나움에서 지붕을 뚫고 침상채 달아내리운 중풍병자를 고치신다(막 2:12).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마른 자를 고치신다(막 3:5). 그리고 갈릴리, 유대, 예루살렘, 아두매, 요단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에서 온 많은 병자들이 몰려온다. 예수는 이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추방하신다(막 3:7-12). 예수는 12년 혈루병 여인을 고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된 딸을 죽은 데서 살려내신다(막 5:42). 게네사렛 지방에서 예수는 각종 병자들을 고치신다(막 6:56). 갈릴리 호수 지경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다(막 7:35).

 

2) 통전적 섬김

영혼 구원과 신체와 지성의 구원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양자는 예수의 전인적 구원사역 안에서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짝을 이룬다. 그것은 신발의 짝이나 안경의 짝 처럼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는 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구원은 분리된 것, 분열된 것, 파괴된 것을 온전하게 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자기와의 왜곡된 관계, 사회와의 잘못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고 그에게 이르신다: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막 1: 44). 군대귀신 들린 거라사인을 고치시고 그를 집으로 돌려 보내신다. 이는 영혼과 신체에 관련해서 이들이 치유된 것을 알림으로써 이들에게서 있어서 상실된 가족적 사회적 관계가 회복되기를 위한 것이다. 예수는 치유를 통전적으로 이해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 보여주신 섬김이란 영, 마음과 신체를 통합하는 통전적 행위(ganzheitliches Handeln)로서 행해진다.


IV. 타인을 위한 존재로서의 나사렛 예수

예수는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예로서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 Le Bon Samaritain)의 비유(눅 10: 30-37)를 가르치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마침 한 제 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한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 중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숙비를 지불하고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 숙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 갚으리라”고 하였다. 예수는 이 세 사람 중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도 아니고 자비를 베푼 자(눅 10:37a)라는 사실을 가르쳤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제사장은 예배를 인도하고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자(출 40:12-15; 민 18:1-7; 대상 24:1-19)였다. 그는 율법 해석과 성전 예배의 중심이 되는 유대 사회에서 지도층의 인물이었다. 레위인은 성소의 다른 일들을 맡아서 했다. 이들은 성전에서 특별히 음악가, 문지기, 성전 곳간 지기로 봉사하였고 여기다 종교적인 교육을 맡아 봉사했다(대상 25장-26장).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 제사과 율법 교육이 중심이 되는 유대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이들이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자를 길가에 그냥 버리고 지나친 것은 율법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전혀 생각치도 않은 사람이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가 북왕국을 정복한 후에 지금까지 수도였던 사마리아의 이름을 따라 옛 왕국 땅에 세운 지방 영토였다(왕하 17:24). 그때부터 이 지역 사마리아에 살았던 혼합주민들을 가리켜 사마리아인이라고 한다. 혼합주민들은 수리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앗수르에 굴복하여 이주해 온 종족들과 북왕국 땅에 남아 있던 주민들과 결혼함으로써 생겨났던 자들이다(왕하 17:24-41).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유다 사람들은 이 혼합주민들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지을 때도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다(스 4:2-3; 학 2:1—14). 사마리아 주민들은 주전 3세기 경에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고 또 시온산이 아닌 그리심산을 신명기 12장에서 요구하는 한 군데 예배 장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단자로 여겼다. 이러한 유대사회에서 이단자로 여겨진 사마리아인이 정통이라고 자부하던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된 것이다.

 

이 비유가 은연 중 말하는 바는 예수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고 그의 법적 아버지는 목수였다. 그는 변두리 지역 갈릴리의 작은 농촌 나사렛 출신으로 예루살렘의 제사장이나 레위인 가문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예수는 당시 종교적 상류계층들이 도외시한 사회적 소외자들 세리들, 어부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걸인들에게 공명과 연민으로 다가갔고 각종 난치병자들과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과 정신이상자들을 고쳐주고, 친구로 삼았고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는 이들을 섬기는 자가 되셨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이방인으로서 강도 만난 사람들의 진정한 이웃이 된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타자를 위한 존재(das Sein für andere)였다.

 

V. 예수가 섬긴 자들

1) 허기(虛飢)진 자들: 5천명과 4천명을 먹이심

사복음서(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5)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외진 광야에서 설교를 끝내시고 허기진 5천명을 한 어린이가 가져온(요 6:9)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 먹인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마 15:32-39; 막 8:1-10)에는 4천명을 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설교가 끝났는데 날이 저물어가고 거기는 빈들이라 먹을 것이 없고 마을과 촌으로 가기에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제자들은 대답한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이니이다”(눅 9:12).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에 제자들은 대답한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눅 9:13). 그 곳은 빈들이었고 “남자가 한 오천 명 되었다.” 예수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다”(눅 9:16). 예수께서 축사(祝辭)하시자 떡 5조각과 물고기 2마리는 5천명이 먹을 수 있을만큼 부풀어진다. 축사하신 그분이 바로 태초의 창조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이런 부풀어지는 생성의 기적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가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자신의 초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빈들에서 허기(虛飢)진 상태로 그냥 돌려보내면 도중에서 쓰러질 사람들이 생길 것을 염려한 그분의 긍휼과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기적의 사건에는 역사적 예수의 원천, 즉 신성이 암시되어 있다.

 

2) 각종 병자를 고치심

예수의 인격 안에서 그리고 그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는 왔고 그리고 가까이 오고 있다. 예수님은 그의 메시아적 사역 - 복음 선포와 가르침과 치유사역 - 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가시화 하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 눅 4:18).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마 4:23-24). 예수는 벳새다에서 소경의 눈에 안수하시어 그의 눈을 고치신다(막 8:23-25). 여리고 주변에서 소경 거지 바디메오를 고치신다(막 10:52). 예수께서 5천명과 4천명의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마태도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5-36). 예수께서 그에게 나아온 무리들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 것은 대중 앞에 초자연적 마술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여 기진함을 보시고 이들을 불쌍히 여기신 긍휼과 공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

 

3)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심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자(막 1:23)가 처음으로 예수를 알아본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귀신은 영적 존재라 예수가 귀신의 세력을 멸하기 위하여 오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가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한 곳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예수가 거라사에 갔을 때 귀신 들린 자가 예수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눅 8:26-28). 예수는 군대 귀신을 쫓아내신다. 귀신은 청한다: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막 5:12).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귀신들이 귀신 들린 자에게서 나와서 2천 마리가 되는 돼지 떼에 들어가, 돼지 떼들이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한다(막 5:13). 예수는 군대귀신 들린 거라사인을 고치시고 정상인이 된 그를 가족에게 돌려보내셨다.

 

예수는 일곱 귀신에 사로 잡힌 막달라 출신 마리아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 내셨다.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눅 8:1-2).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에서 놓임을 받은 후에 예수의 신실한 여성 제자가 되었다.

 

4. 내면의 문제를 가진 자들을 상담하심

1) 니고데모와 상담

예수는 사람의 눈을 피하여 밤에 그를 찾아와 신앙의 문제를 의논했던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난다”(γεννηθh, receive birth)는 말이 생소(生疎)하여 모태에 다시 들어가 나야 하는가 질문하는 니고데모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γεννηθh, έξ ὓ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 be born of water and Spirit)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 5-7). 중생의 비밀을 가르쳐주신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는 도리(道理)였다. 중생이란 성령을 통한 회개의 씻음과 새 생명 부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날 밤 니고데모는 기독교의 중생(重生)의 도리를 알고 체험하는 자가 되었다.

 

2) 사마리아 여인과 상담

예수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사마리아 땅을 멸시하고 피했다. 누가에 의하면 관행과 달리 예수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 한 가운데를 거쳐가시면서 사마리아인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지 아니하였다(눅 9:51-52, 막 10:1; 마 19:1; 눅 10:29-37; 요 4: 1-42). 예수는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는데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였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고 남성이 여성에게 말을 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마리아 여인이 대답한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예수는 그의 영적 감수력으로 이 여인이 내면의 문제로 고민(苦悶)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시고 이 여인에게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말씀을 하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그러한 물을 달라고 대답하는 여인에게 예수는 이르신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 여인이 대답한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요 4:17a).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7b-18). 여인은 말한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19-20).

예수는 여인에게 메시아가 오면 이루어질 신앙적 진리를 가르치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4). 여인이 대답한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예수는 이 여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요 4:26).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 왔으나 이 여인에게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드러내신 것은 특이하다. 그 이유는 이 여인에게는 그녀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줄 메시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여인은 메시아를 받아들이고 새 사람이 된다.

 

3) 간음하여 현장에서 잡힌 여성과 상담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한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5). 이들은 예수를 고소할 조건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시험하고자 함이라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다. 이에 예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b)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신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 8:10). 여인이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요 8:11a). 예수께서 이르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b).

예수는 율법의 집행으로 여인을 정죄하기 보다는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면서 그녀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신다. 예수는 여인을 돌려 보내면서 말씀하신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는 간음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셨으나 용서와 참회의 기회를 이 여인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가 중요시 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회개와 새 출발이다. 회개와 새 출발을 위하여 예수는 용서라는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용서와 사랑은 이 여인을 감동시켰을 것이다. 분명히 이 여인은 용서의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성령 사역자이신 나사렛 예수(III)

 

5. 사랑과 긍휼의 섬기는 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예수

 

1) 사랑과 긍휼의 사역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역사적 예수는 성령의 권능으로 많은 이적과 기사(奇事)를 행하셨으나 그는 능력이 제일이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마음의 청빈과 온유와 긍휼과 화평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8가지 복을 산상설교(die Bergpredigt)에서 선포하시는 사랑과 긍휼로 가득찬 사역자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3-10). 예수는 이렇게 설교하신 그분 자신이 사랑하시고 인자와 긍휼하신 자로서 삶과 신앙의 궁색함 가운데 사는 유대인들 가운데 화평을 심어신 자이다.

 

예수는 한 나병 환자를 고치실 때에도 그를 불쌍히 여기서 고쳐주셨다. 마가는 다음같이 증언한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 1:41-42). 예수의 치유사역에는 병든 자에 대한 긍휼이 동반되었다.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가시니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스스로 기적 치유자라는 우월감에 사로 잡히신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신 긍휼의 사역자셨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예수는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의 글(사 42:7; 사 58:6)을 펴시고 읽으시며 이 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눅 4:20-2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는 단지 초자연적 능력의 과시자(誇示者)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들을 보게하시고, 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그의 성령 사역은 이처럼 그 속에 솟아 넘치는 사랑과 긍휼에서 나오는 권능의 사역이었다.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는 원수 사랑에 관하여 가르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3-45). 예수는 자신이 가르치신대로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3-34). 예수는 자신이 가르치신대로 죄인인 우리의 대속을 위하여 속죄물이 되신 사랑의 사역자요 구세주가 되셨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증거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2) 섬기는 자로서의 성령 사역자

성령 사역자로서 예수께서 권능적 사역을 하신 것은 섬김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섬기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성령의 권능 사역의 본질은 자기 능력의 과시 행위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섬김이다. 예수는 소외되고 병든 약자들을 위해 오셨고 일하셨다. 섬김이 곧 디아코니아(diakonia)이다. 예수는 원형적 디아콘(Diakon)이다. 예수는 성자였으나 인간의 고통과 죄 속의 비참의 상태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신의 영광의 본체를 내려 놓으시고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들어오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미 출애굽기에 드러나는 쉐히나(Schechina)의 하나님 모습을 가장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a). 쉐히나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상태에 있는 그의 백성의 고난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이시고 그 근심을 아시고 받고 있는 그의 백성에게 내려오셔서 이들을 이집트인들에게서 건져내시고 이들을 인도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쉐히나는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그의 창조물 가운데 거하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스런 현실에 공명하셔서 그 현실에 직접 참여하고 자신을 그 고통 아래 놓는다.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니신 능력 때문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그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셔서 그 마음이 애끓은 공명을 일으켜 스스로 그들에게 내려가셔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인자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고난, 이것이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방식이며 공명이 낳은 행동양식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여기서 그 힘을 얻는다. 하나님이 가지시는 그의 백성들과의 연대는 단지 심리적 연대에 그치지 않는다. 간접적 지원에 머물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디아코니아는 그 행동의 방향과 정당성을 얻는다." (김상기, "디아코니아는 예수 활동의 본질이며 사랑·정의의 완성" [기독일보]

이동윤 기자 dylee@cdaily.co.kr 입력 2015.01.30 08:04 | 수정 2015.01.30. 08:50, '디아코니아 아카데미 2기')

 

 

고통당하는 자를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과 예수의 공통점이다. 구약의 선지자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대국 니느웨 성을 향한 심판을 거두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하여 다음같이 항변한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b). 요나의 항변에 대하여 다음 같이 다정하게 대답히시는 그 분의 말씀에서 이방 민족이라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0-11). 누구에게나 있는 불쌍히 여기는 사람의 마음은 그가 하나님 형상의 잔재(殘滓)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 불신자들까지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공명하고 그의 이웃이 되고 그를 위해 행동할 수 있다.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의 실천적 표현"이다. 지배자들이 약자를 억압함으로써 부를 증식하는 불평등을 확대해가는 것에 대해, 예언자들은 지배자들에게 삶의 길을 바꾸라고 경고한다. 예언자들은 약자들 편에 서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세우는 일”이요 “하나님의 법을 마음으로 듣는 일“이다. 법을 매개로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과 만난다. 디아코니아는 “사랑과 정의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디아코니아는 예수 활동의 본질이다. 예수의 멍에를 메고 배우며 가는 그의 길 가운데 쉼이 있다. 대단히 역설적이지만 쉼은 그의 멍에를 메고 배우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디아코니아의 길에 있다. 사랑으로 일하는 섬김은 성령의 능력이며, 가장 크고 좋은 은사로서, 메마른 땅에 물이 흐르고 사막에 꽃이 피는 그 길은 성령의 능력, 디아코니아에서 시작된다. 그 변화를 위해 예수는 성령을 약속하셨고, 우리도 성령이 부르는 그 길로 가야 할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위해 오신 예수를 쫓고 그의 실천과 계획을 오늘의 우리 삶으로 옮기려는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동일시되거나 비교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람들에 대해 약자를 조롱하거나 학대하는 자는 곧 자기를 멸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셨다(잠 14:31:잠 17:5). 그와 같은 하나님과 예수의 약자 이해 때문에 “약자는 더 이상 자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교회는 그들을 통해 그들과 동일시 되려고 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디아코니아의 성경적 근거는 나사렛 예수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공명과 연대 및 고난'에서 찾을 수 있다.

 

IV. 성령능력의 통로 예수

인간 예수는 성령능력의 통로가 되셨다. 그는 성령으로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셨고, 대속제물이 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다.

 

1.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한 순종하신 예수

예수께서 공생애에서 하시는 모든 권능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죄성으로 인해 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7-8). 사도 바울은 죄인들이 언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것을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예수께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인한 성결의 능력이 충만했기 때문에 그의 인성은 온전한 성결을 이룰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b)라고 증언한다.

 

2. 오늘날 성령 사역자의 모델 되시는 예수

예수는 제자들에게 치유사역을 가르치고 훈련하셨다. 그의 성령 사역이 자신에게서 그치지 않않고 교회시대에서도 지속될 것을 가르치셨다.

 

1) 성령의 권능으로 70인을 내 보시어 전도 사역, 마귀 제압

예수께서 70인 2인조 전도대를 보낸 것은 오늘날 전도대의 영적 능력을 예시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예수의 이름에 귀신들은 전적으로 항복하였다(눅 10:17). 사막의 영성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하는 가운데 어느 날 밤 야수와 파충류의 모습을 한 마귀떼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고통 속에 빠졌을 때 성령의 빛이 그에게 내려 옴으로써 “갑자기 마귀들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의 몸의 고통은 즉시 멈추었고, 무덤은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김영한, 『안토니우스에서 베네딕트까지』, 정통기독교영성가 제 1권, (서울: 기독교학술원, 2011), 82.)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영적 체험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과 전도자들은 예수로부터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눅 10:19a)을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귀신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눅 10:19b). 오늘날 신자들이나 전도자들은 이러한 영적 권세 받은 것을 자랑하지 말고 우리 이름이 하늘에 녹명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2) 성령의 권능으로 교회에 복음전파, 가르침, 치유 및 양육 사역 위임, 권능 부여.

나사렛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든 병과 귀신을 제어하고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눅 9:1).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라고 명령하시어 파송하셨다(눅 9:2). 특히 선교의 지상명령에서 예수는 성령 사역자의 원형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선교의 지상 명령을 내리신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예수는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축사, 새 방언, 독에 해 받지 아니함, 병든 자 치유를 말씀하신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초대교회부터 교회의 시대를 거쳐 오늘날 세계 선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은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가 동반하는 능력으로 전파디고 있다. 오늘날에도 복음 전파에는 항상 귀신이 추방되고, 병든 자들의 치유가 일어나고 각종 초자연적 표적이 일어난다.

 

3) 권능의 현재화

목회나 선교현장에서 축사나 질병을 치유할 때 성령 사역자들은 치유의 위임자인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떠나가라.”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의 이름을 사용하여 간구하거나 명령하면 그대로 직접 시행하겠다는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오늘날 역사적 예수는 2천년 전(前)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박물관에 계신 것이 아니다. 그는 살아계시는 인격으로 오늘도 그를 믿고 신뢰하는 자의 중보자가 되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역사적 예수의 현재성을 다음같이 증언한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4-25)

오늘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이 부재하여 하나의 종교적 인본적 집단으로 변모된 교회는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매우 인간적으로 볼 때 인도주의적 신사도(紳士道)의 종교라고 평가받지만, 예수의 복음과 능력이 부재한 인본주의적 종교로 변모되고 있다.

 

저자는 글을 쓸 때 기독교방송(CBS)과 극동방송(FEBC)을 즐겨 청취하곤 한다. 매주 월요일에서 금요일 오전 11시 05-50분에 방송되는 극동방송의 「소망의 기도」는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고 중보기도의 능력의 시간”으로 병든 자들과 어려운 삶의 문제에 대한 기도치유의 시간이다. 이 치유 기도 프로그램이 일회적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 지속되는 것을 보면 기도에 참여하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치유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현장화되는 사실에 접하게 된다. 이러한 기도에 참여하는 지역 목회자들은 모두 성경 그대로 믿고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바 성령의 현재하는 능력을 그대로 믿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오늘날 예장 통합측 온누리교회 장로로서 치유사역을 하고 있는 평신도 사역자 손기철의 “헤븐리 터치 미니스트리”(Heavenly Touch Ministry)와 개인적 간증 전도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전달하는 평신도 전도자 김하중의 “하나님의 대사”(Ambassador of God) 사역도 오늘날 주목되는 성령 은사 사역이다. 이들은 교리나 이론이 아닌 병든 자들에게 일어나는 치유(손기철의 사역)와 삶과 신앙의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의 메시지를 알려줌(김하중의 사역)으로써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려주고 있다. 그 외 저자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한국교회 안팍에서 일하는 헤아릴 수 없는 목회자들, 선교사들과 평신도 사역자들의 사역과 설교를 통하여 오늘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신체와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시고 새로운 소망과 삶의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사역을 헤아릴 수 없다.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와 정통주의자로 자칭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이러한 성령 능력의 현재화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며 이러한 능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이단적 내지 신비주의적, 불건전한 신앙“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교리 안에 맞추어진 신학적 지식과 교리적 설교를 통하여 살아계신 성경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교리가 만든 하나님 상에 갇혀놓았다. 이를 저자는 “성경 이신론”(bible deism)이라고 명하고자 한다.

 

오늘날 일부 정통주의자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해석한 교리적인 성경 안에만 가두어 놓은 성경 이신론자들에 반하여 미국 풀러신학교 교수인 찰스 그래프트(Charles H. Kraft)가 그의 『능력 그리스도교』(Christianity with Power)에서 능력 복음전도(power evangelism)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오늘날 하나의 종교적 관습이나 윤리로 변질한 자유주의 기독교나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와 전통적 교리를 단지 추상적으로만 인정하고 삶 속에서 부인하고 있는 실천적 이신론 기독교 신자들에 대하여 기독교 복음이 상실하고 있는 사도적 기독교를 복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공헌하고 있다고 본다. 그가 가진 균형잡힌 의도는 다음 문장에서 보여진다. “나는 오랫동안 그 ‘모든 것’의 일부 – 사랑, 용서, 회개, 복음전도 등 복음주의자로서 우리가 헌신하고 있다고 여기는 일들 –에만 힘을 쏟아 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 ‘모든 일’의 다른 측면 – 영적 능력의 차원 - 을 체험하도록 권고하고 계신다. 나는 우리 모두가 사랑에 가득찬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능력에 가득찬 그리스도교를 체험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Charles H. Kraft, Christianity with Power, 『능력 그리스도교』, 31.)

 

단지 저자가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능력 기독교 주장자들이 죄의 회개, 사랑과 용서라는 전통적 복음주의 가치를 소홀히 다루고 오로지 축사, 치유, 황홀경, 쓰러짐, 방언 체험, 음성 듣기 등에 치중한다면 복음이 지니는 영혼구원(칭의)과 성화(성결)를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찰스 그래프가 여태까지의 사랑, 용서, 회개, 복음전도의 전통적 복음주의의 입장으로부터 영적 능력의 차원을 체험하는 일에 지나치게 기울어짐으로써 그가 추구하는 균형성을 상실하고 기독교를 너무 초자연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4) 성령의 권능을 사랑의 열매로 보여주신 나사렛 예수

역사적 예수는 성령의 권능을 사랑의 열매로 보여주셨다. 그는 초자연적 사역자였으나 그의 모든 능력 사역은 그의 본성인 사랑에 의하여 동기화되고 사랑으로 행해지고 그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이들의 치유자가 되셨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병든자들과 소외자들을 보시고 연민과 공감을 가지시고 이들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치유사역을 드러내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는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 누가 고쳐주었다고 알리지 말라고 하셨고, 그의 오병이어 기적으로 인하여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자 피신하여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기영합자(populist)가 되지 아니하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숭고하다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어 속죄 제물이 되셨다. 예수는 그가 가르치신 위대한 사랑의 계명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신앙의 본질이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을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받는 것(칭의)이나 기독교 신앙의 결실은 주는 것(성화)이다.

 

성령 사역(능력 치유와 귀신추방)은 칭의와 성화의 교리와 균형있게 행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령 은사를 가장 많이 받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이 모든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사랑이라는 지고의 은사 가운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랑이 없는 능력 사역, 사랑이 없는 방언이나 예언, 사랑이 없는 산 같은 믿음, 사랑이 벗는 구제나 헌신과 희생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사랑 없는 모든 영적 지식이란 공허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사도 바울은 깊이 통찰한 것이다.


섬기는 자로서의 나사렛 예수(IV)

 

IX. 예수 섬김 정신의 신학적 원천

1. 하나님의 케노시스:

1) 예수의 자기 비움

 

나사렛 예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정신은 그의 본성에서 나온다. 그의 본성은 그가 단순히

예언자였다는 사실을 너머서서 그가 “태초의 말씀”(the Word at the beginning)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태초의 말씀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ó μονογενής υίός, the only begotten Son, 요 1:18)이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예수가 태초의 생명의 말씀(ó λόγος th/|ς zωh/|ς the Word of Life, 요일 1:1)이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찬가(der Christus Hymnus)를 인용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μορφῇ θεοu, morphē theou, the essential form of God)시나”(빌 2:6a). “하나님의 본체란 하나님의 형상(form)으로서 보이지 않는 성부의 보이는 모습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전 본성과 본질(the whole nature and essence of Deity)을 지니고 계신다. 예수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동질적 존재를 나타낸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b). 이 구절은 예수의 신적 동질성과 겸허한 모습을 말하고 있다. 예수는 자기의 신적 지위를 포기하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인간의 신체를 입으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έκένωσε, ekenose, emptied)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이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the self-emptying of God)이다. 예수의 자기 비움이란 하나님의 게노시스(kenosis)로서 바로 우주와 역사의 지고의 중요한 사건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셔서 인간 역사 속에 들어 오신 것이다. 첫 사람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우주와 역사가 예수의 자기 비움의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는 구속의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의 자기 비움의 겸허한 행위는 하나님의 구속사건을 가능케 하였다.

 

2) 하나님의 낮아지심

첫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으나 성자 예수는 자신을 비어(κενόω, kenoō, emptying)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시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자신을 낮추었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이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제한하셨다는 것이다. 자기 제한이란 영적 존재인 로고스가 신체라는 형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낮추심이요 자기 제한이다. 자기 고양이 아니라 자기 비하(卑下)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빌 2:7-8a). 이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로고스로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성자의 자기 제한(the self-limitation)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겸허요 자기 낮춤이다. 이러한 자기 비움과 낮춤을 신성의 포기로 오해해서는 않된다. 자기를 비운 하나님의 로고스는 여전히 하나님이었으나 제2위라는 신성의 지위를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다. 다음 성경 구절은 예수가 여전히 신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3) 예수의 자기 포기

여기서 게노시스 이론을 제창한 토마시우스(Thomasius)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자기 포기란 본질적 신성(전능, 편재, 전지 등)을 보유했으나 상대적 신성 (전능성, 편재성, 전지성)을 포기했다거나 메시아 의식을 포기했다고 해석해서는 않된다. 역사적 예수는 비록 인간의 죽을 몸과 인성으로서의 유한한 지성, 감정, 의지에 제한되셨으나 신성으로는 그 본질적인 면에서 있어서 조금도 이러한 제한에 구속받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구절에서 나타난 예수적 예수의 말씀은 그가 신성의 본질적 차원을 그대로 보유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b).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 10:30).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포기하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b).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 죄의 대속물로서 자기 자신의 몸을 증여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주심이다. 하나님의 자기 주심은 하나님의 자기 포기요, 자기 버리심이요, 자기 부정이다. 하나님은 자기 주심을 통하여 그 분의 정의를 성취하신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결단코 그의 사랑 때문에 그의 정의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사랑을 빙자하여 동성애를 허용하며 심지어 예수는 동성애를 금기(禁忌)하는 율법의 해방자라고 말한다. 이는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행위다.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심을 욕되게 하며, 우리의 죄 때문에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내어주신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섬김은 결단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희생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섬김이란 정의와 사랑이 입맞추는 나라요 공동체다.

 

2. 하나님 사랑의 화신(化身) 나사렛 예수

1)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심

예수는 이 세상을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의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사도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 사랑 설교를 다음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은 그가 창조하신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비록 이 세상이 하나님을 거역한다 할찌라도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기 비움의 사랑(the kenotic love)은 하나님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인간적 자기 주심(divine-human self-giving)을 통해 표현되어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악을 이기고, 구원을 수행하신다. 우주와 역사를 존재하도록 하는 기본원리는 단지 사랑이라는 자연의 낭만적 원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 주심이요, 자기 아들의 주심이다. 예수는 성자로서 자원하여 인간의 대속을 위하여 인간의 몸(처녀 마리아)으로 자기 자신을 제한하셔서 하나님의 겸허를 보여주신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섬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근저에 깔려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심이란 아버지가 바로 자기 자신을 주심이기 때문이다.

 

우주와 역사와 인생에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 하나님의 사랑이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보이기에는 역사와 우주와 인생이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부조리(사고와 재난과 질병과 이별과 슬픔과 고통)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고 모든 것이 우연이고 덧 없음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무의미와 덧 없음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역사와 우주와 자연에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란 덧 없이 보이는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의미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와 역사와 인생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구속(救贖)이다.

 

2) 사랑의 계명을 주심

사랑의 모범이 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오늘날 우리들에게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5).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단지 신앙고백이나 교리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차원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제자된 동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조건없이 사랑하며 조건없이 섬기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본래는 우뢰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만큼 성격이 급하고 주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불을 내리기를 요구한 자였다. 누가는 이 사실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그는 본래 성격이 급하고 투쟁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든 그가 예수를 만나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성품이 차츰 변화하게 되었고, 예수의 사랑을 받은 제자로서 온유의 사람이 된다. 그는 예수의 사랑 정신을 받아 사랑의 사도가 된다. 그래서 요한은 성품으로 성화를 이루어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가 되어 그의 서신에서 형제 사랑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예수에 대한 사도 요한의 진정한 신앙이 성령의 열매(성화)를 맺은 것이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4-16). 사도 요한은 예수의 새 사랑 개념을 가장 실천적으로 구현한 제자이다.

 

그는 사랑의 원천을 알고 하나님의 본성을 알며, 예수 십자가 죽으심의 위대한 비밀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자로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 위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증언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7-10).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이것이야 말로 섬김의 극치인 것이다. 아가페의 사랑만이 무조건적 섬김을 이행할 수 있게 한다.

 

X. 나사렛 예수의 섬김 - 교회의 사회 봉사(섬김)의 전거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말씀하신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7-8).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길은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의 섬김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디아코니(Diakonie), 봉사직무의 전거(典據)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봉사의 신학적 귀감(龜鑑)이 되시고 기초가 되신다. 지상의 교회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작은 예수로서 예수의 섬김 사역을 실천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오늘날 기구나 관청이 되어 버린 유럽의 교회나 권위적 지배의 교권적 위계질서가 되어 버린 가톨릭 교회처럼 민중이나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종으로서 겸허하게 섬기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러한 종으로서 섬기는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의 진실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회봉사는 섬기는 종, 그리스도의 섬김 사역에 근거하면서 그리스도가 증거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도록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모든 행위를 포괄한다. 선교만 하고 섬기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교회의 선포에는 섬김이 동반되어야 한다. 섬김이 동반하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자기 기구 중심으로 자기 소속원들을 위하여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반대로 이 세상을 섬기고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늘도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을 위하여 주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웃을 섬기는 자의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교회는 이웃을 위하여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공동체에 아직도 속하지 아니하고 있는 자들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의 친구요 저들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기독자는 내면적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자다. 그러나 외면적으로는 이웃을 향한 봉사자다”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를 택하신 것은 신자들만의 구원과 복락만이 아니라 신자들을 통하여 이웃과 세상의 구원과 복락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훼퍼(D. Bonhoeffer)가 말하는 것처럼,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Sein für andere)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타자를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Dieterich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München 1982, p. 261) 본회퍼는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 자들과 연대하며, 저들과 함께 살고, 함께 고통받으며,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길을 찾는 교회를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교회의 중요한 사회봉사로는 단순히 구제하는 자선사업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통받는 자들, 가난한 자들,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자들, 더 이상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연대하는 사회적 행위를 말한다.

 

교회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사회(postmodern society)에서 그리스도가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 대하여 그를 마땅히 구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당시의 종교인들(제사장, 레위인 등)은 지나가 버렸으나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명의 사마리아인이 그를 구출해준 것처럼 교회는 이 시대에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웃을 향한 봉사는 예수의 섬김에 참여하는 것이다. 섬김에의 참여는 소외된 자들과 고통을 나누는 것이며 그들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들의 고통을 떠맡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매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섬김 속에서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과 권능을 매순간 체험한다.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소망만이 비로소 교회로 하여금 자기중심적 삶을 포기하면서 이려움 속에 있는 이웃을 향하여 유대를 공고히 하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한다. 사회적 약자들은 더 이상 자선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오늘날 예수의 모습을 재현해준다. 교회는 이들을 통해 이들과 동일시 되려고 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세상은 교회가 바로 지상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알게 된다. 교회는 오늘날 섬김의 공동체로서만 섬김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출처 : 코람데오닷컴>

 ☆☆아쉽게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인 듯합니다. 존함에 걸맞는 보다 새로운 내용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