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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2 -성지순례

by 은총가득 2020. 5. 8.


나사렛(갈릴리) 

수태고지 기념교회. 나사렛하면 번득 스쳐가는 글귀가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한복음 1:46)” 이 말은 갈릴리 지방에 대한 지독한 사회적 편견이 담겨있는 발언이었다. 그러니 주님이 나사렛에서 자라고 먼저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이 편견에 대한 도전이요 상징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사셨던 곳으로 주님의 발자취를 찾아 성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나사렛은 하부 갈릴리 지방의 작은 분지(해발 540m)로 갈릴리 호수에서 서남쪽으로 31㎞쯤 떨어져 있다. 도시의 남쪽 산 능선에 오르면 이스라엘 최대 곡창지대인 이스르엘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오늘날 나사렛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를 믿는 아랍 사람들이다. 하지만 1957년 이후 약간의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지만 나사렛은 누가 뭐래도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아랍 기독교 도시 가운데 하나다.

나사렛에 가면 도시 중심에 가장 눈에 띄는 건물 하나를 만나게 된다. 로마 가톨릭 소유의 수태고지 기념교회(Church of Annunciation)다. 오랫동안(1954∼196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과 비잔틴 시대(427년경)의 기념교회 유적, 그리고 그 위에 세워졌던 십자군의 기념교회 흔적이 나왔지만 이곳이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 수태고지 사건의 현장이라는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1969년 가톨릭의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가로 30m, 세로 70m, 높이 59m) 기념교회를 완성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커다란 기념교회에 조금도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도시의 정중앙에 세워진 교회를 보면 마치 이탈리아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두오모(도시 중심에 있는 성당)가 연상된다. 처음부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종교적 편견을 가지고 세워졌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브리엘천사 기념교회.

수태고지 기념교회에서 600m쯤 북동쪽으로 이동하면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가브리엘천사 기념교회(Church of St. Gabriel)를 만나게 된다. 이 교회 역시 수태고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마리아가 우물에 왔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수태를 고지했다 하여 샘 위에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기념교회가 세워졌지만 무너졌고, 1967년 그리스 정교회에서 우물 위에 조그마한 기념교회를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필자는 나사렛에 가면 정교회 소속의 작은 기념교회를 방문하려고 한다. 이곳을 수태고지의 현장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다. 다만 이곳이 나사렛에 있는 우물로서 예수님의 발길이 머물렀던 가장 확실한 장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했다는 우물. 기념교회 내에 있다. 

누구나 나사렛에 들르면 번득 스쳐가는 글귀가 하나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한 나다나엘의 말이다. 이 말은 당시 갈릴리 지방 또는 갈릴리 지방에 속해있는 나사렛에 대한 지독한 사회적 편견이 담겨있는 발언이었다. 모든 사회적 편견이 오랜 시간을 걸쳐서 형성된 것처럼 나사렛에 대한 편견 역시 당대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편견의 뿌리를 이사야서 9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1-2)

스블론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했고 심지어 갈릴리 지방은 이방 땅으로 취급되었다는 기록이다. 갈릴리 지방 그리고 그 지방에 속해있는 나사렛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은 이처럼 구약 시대부터 형성됐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회적 편견의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정학적 접근 방법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갈릴리 지방은 스블론과 납달리 땅을 포함하고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그래서 이방 나라인 두로와 시돈 그리고 아람과 인접해 있던 곳이 갈릴리 지방이었다. 

둘째는 갈릴리 지방은 고대로부터 북쪽 메소포타미아 문화권과 남쪽 이집트 문화권을 연결하는 ‘비아마리사 길’이 통과하는 지역이었다.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의 교류는 이 길을 통해 끊임없이 교차됐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보면 갈릴리 지방은 고대부터 항상 이방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었으며 그 결과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이방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은 높은 산악 지역(해발 700∼1000m)에 위치하고 있어 외부와의 접촉이 쉽지 않았다. 특히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살았던 종교인들의 관점에서 북쪽 갈릴리 지방은 이방 문화에 오염된 경건치 못한 지역으로 생각하는 지독한 편견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성장하고 갈릴리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파한 것은 수천 년 내려온 지독한 사회적 편견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종교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또한 과거의 편견 속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여러 모양의 반목과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지 않은가? 지독한 편견에 도전했던 예수님의 교훈이 더욱 새롭고 절실해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김상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