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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조직신학의 이론과 적용

by 은총가득 2021. 1. 14.

조직신학의 이론과 적용

 

조직신학을 하면서 신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특히 칼 바르트의 글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중요한 부분을 짚고 가겠다.

 

신학을 할려고 할때에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서론적 고찰이 필요하다. 특별히 서양학문의 전통인데 어떤 학문을 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간에 그 일을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성찰이 대단히 서양에서 발전해 왔다. 동양은 방법론적인 성찰이 부족하다.

결국 신학이 하나님의 역사인데 삼위일체신앙이라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보고 성부- 창조, 성자- 구속 성령- 성화를 다루어야 한다. 바로 시작할수 있지만 서양학문전통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과연 어떻게 해야하는지, 성찰하는 방법론적인 성찰이 대부분 해왔다. 신학도 신학을 시작하기전에 신학의 과제가 무엇이냐 방법이 뭐냐를 논의해 왔고 논의 부분을 신학서론이라고 한다.

 

훌륭한 신학자마다 신학서론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칼 바르트는 프리레고레마(서론)만 하더라도 700매를 썼다. 서론이 그만큼 중요하다. 박현용 박사도 서론부분을 많이 썼다. 이종성박사도 마찬가지로 신학서론이 한권이다. 박봉란 교수도 신학서론만 두권을 썼다.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책의 저자인 밀리오레도 1-2장에 거쳐서 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1장은 신학의 과제, 2장은 계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왜 계시를 이야기하고 있나.

 

신학의 과제가 뭐냐? 성부하나님의 창조, 성자하나님의 구원사역, 성령하나님의 성화사역을 기술하는 것이 신학의 주 목표다라고 이야기할수 있다. 이렇게 할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뭐를 통해서 알수 있나? 그것이 바로 계시다. 다른 신학자들은 신앙론의 전제하에서 하나님을 알수 있다라고 다루고 있다. 또 다르게 신인식론에서 다루고 있다.

이런 신학을 해야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신학의 과제가 뭐냐? 밀리오레가 신학이 일어나는 현상을 1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신학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 교회목사님께서는 기독교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질문을 제시할 필요가 없다. 그냥 믿으면 된다. 왜 알아야 하나? 왜 연구해야 하나?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밀리오레는 신앙인들은 단순히 믿는 것으로 머물러서는 안되고 이해하고 연구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왜 그런가? 신앙자체가 어떤 성격인가?

 

Fides Quaerens intellectum(신앙 자체가 이해를 추구하는 성격이 있다.)

신앙을 갖고 있으면 신앙자체가 이해를 추구하게금 해준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친구나 연인을 믿게되면 알게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굳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신앙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신앙자체가 이해를 추구하는 성격이 있다. 더구나 교회지도자에게는 더 필요한 일이다. 위의 라틴어는 어거스틴뿐만 아니라 중세의 안셀름이 인용해 왔다. 그런점에서 밀리오레도 조직신학책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것이다.

 

신학이라 하는 것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갖고 있으면 자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으로 이해를 할수 있다. 우리도 그렇다고 볼수 있다. 그렇게했을때에 신앙을 갖고 있고 이해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성경공부할수 있고 복지문제, 청소문제 산업관련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문제도 추구할수 있지만 왜 조직신학을 해야하는 문제가 생긴다. 교제 34쪽에서 찾아보자. 두 번째 단락에서 보면 조직신학 또는 교의학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제시하고 있다. 먼저는 충실하게 하라 둘째는 일관성있게 하라. 셋째는 시대에 적절하게 하라 넷째는 책임적으로 하라.

이렇게 할때에 조직신학은 이것은 교회가 가장 중요하다고 고백하는 사건, 곧 삶을 자유케 하며 새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건의 빛에서 교회의 교리와 실천을 계속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작업은 모든 교인들이 해야하지만 특별히 목사나 교사들이 해야한다.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에 관련이 있는 4가지 질문

 

1. 교회의 선포와 실천은 성경에 증언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한가? 설교때에 나의 설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정말 충실한가 따져봐야 하는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메시지가 있다면 이것이 정말 계시에 합당한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한국의 목사님들은 매주일, 수요기도, 새벽기도 설교준비하기에 바쁘다 보니 일반적인 메시지에 대해서 검토해볼 시간적 여유가 있다.

신학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목사님도 신학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작업중 하나가 통용되고 있는 메시지가 계시에 합당한가를 의식적으로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2. 신앙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진리를 올바르게 표현하고 있는가? 일관성있게 기독교의 진리를 제시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만찬에 대해서 이야기할려고 할때에 성만찬의 전제가 무엇인가? 빵에 예수님의 임재의 문제가 아닌가? 성만찬을 이해하기위해서는 그리스도론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 진리를 이야기할때에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고 끝내서는 안된다. 교회의 전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기독교 진리를 전체적으로 통일성있게 일관성있게 제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분은 이론적인 것만 강조하는 분이 있다. 실천이 부족한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이는 실천은 강한데 이론이 약한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은 바로 성경자체가 그렇다. 로마서는 전반부는 죄의 문제와 구속문제가 이야기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감사의 생활 이야기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론과 실천을 잘 조화롭게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조직신학을 한번 써보겠다고 한다면 조직신학의 전체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기독교 진리 자체가 온전하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목사님은 설교집을 많이 낸다. 온전한 기독교 진리를 완전하게 제시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좀더 욕심내어서 조직신학적인 부분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밀리오레가 쓴 조직신학책이 잘 없다. 그래서 이 책을 배우는 것이다. 완전한 기독교 진리를 완전한 형태로 사람들에게 제시할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위해서 조직신학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온전한 기독교를 제시할만한 책이 우리나라에 없다. 그런 책이 지금 시급하다.

 

3. 신앙공동체의 선포와 실천은 현재의 상황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살아계신 실재로서 드러내고 있는가? 시대에 맞게 제시해야 한다. 온전한 집이라도 시대상황에 맞게금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아름답게 제시한다하더라도 요사이 젊은이들은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온전하게 제시하며 현 시대 사람들이 언어로 이해할수 있도록 제시되어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성경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현시대에 맞는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우리가 학생들의 사고방식을 알고 그들의 말과 사고방식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것이 바로 3번의 과제다.

 

4. 신앙공동체의 선포는 개인적, 사회적, 삶 안에서 변혁하는 실천으로 나아가는가?

밀리오레는 실천을 강조하는 신학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실천하면 여러 가지가 많지만 변혁하는 실천을 강조해서 해방신학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실천을 유발할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메시지 구성할때에 과연 그것이 구성을 연결시킬수 있는가를 발견해야 한다.

 

설교할때에 십계명하고 잘 연결해서 하라. 소요리 문답이 앞부분에서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고 뒷부분에서 신앙의 내용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천하라는 것이 무엇인가? 십계명에 따른 것이 바로 실천하는 것이다.

십계명이나 성경의 행동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행위로 연결시키는 것이 기독교 진리를 전하게 하는 방법이다.

성경신학자들은 위의 4가지 중에서 1번에 치중하고 실천신학자들은 4번에 치중하나 실제적으로 4개 고루고루 분포하는 것이 좋다.

이런 과제를 염두에 두고 계시를 살펴보아야 한다. 계시가 무엇인가?

결국 계시에는 몇가지 종류가 있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다. 카톨릭교회는 일반교회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수 있지만 이 능력이 죄로 인해서 약화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결국은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수가 없다. 오직 뭐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완전히 알수 있나? 특별계시이다. 이 특별계시가 바로 성경말씀이다. 그래서 3장에서 성경말씀을 설명하고 있다.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수반되는제반되는 문제를 검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 시간은 그래서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먼저는 성경의 권위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밀리오레의 조직신학 책을 위주로 읽어야 한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은 스위스 쯔빙글리 전통에서 나왔다. 칼빈전통과는 조금 다른 개혁신학의 전통이다. 여기서 도움이 되는 이유는 이 저자가 목사였다. 즉 오랫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 신앙고백을 썼다. 설교하면서 교리적으로 참고할 부분들이 참 많다. 성경에 대해서 제시하면서 외경문제, 해석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공의회, 교부들, 인간의 전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카톨릭에서 중시하는 부분들을 꺼집어 내어서 이슈화 시켰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서들을 보면 트랜스 공의회에서 결정되었다고 무슨 공의회에서 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많지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 많이 부족하다.

여기서 보게되면 교회 회의의 주장이 중요하다 하지만 교부들 스스로 보게 되면 자기들 말이 성경보다 못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공의회 회의 내용을 성경보다 높게 주장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신학의 필요성이 제시되는데 우리가 못한 것이 침입을 당하게 되니까? 신학해야 한다. 조직신학의 과제가 그저 우리가 한가하게 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하는 과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하는 과제이다. 성경에 맞게 시대에 맞게 실천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은 목회현장에서 유용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웨스터 민스터신앙고백의 1장의 성경론을 보면 굉장히 장황한 것 같지만 성경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강조점이 무엇인가? 누구나 성경안에서 이해가능하다. 개신교의 성경해석원리는 두가지 잘못된 것들과는 달라야 한다. 성경자체로 읽지 않고 전통과 이성을 통해서 읽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급진주의나 제세례파가 주장하는 성령이 직접말씀하시기 때문에 성경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성령을 이야기할때에 개신교는 말씀과 함께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교회의 입장이다. 카톨릭교회는 말씀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말씀보다는 전통과 이성을 강조하니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재 침례파는 성경을 이야기하면서 성령의 경험을 더 이야기하다보니 성경을 경시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카톨릭이나 재 침례파형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칼빈이 그래서 참된 개신교는 카톨릭과 재침례파의 두 입장을 다 추구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은 성경은 누구에게나 이해될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직신학개론 3장 성경의 권위

성경을 권위있게 인정할려면 해석에 몇가지 문제를 제시하면서 오늘날 프린스턴신학교 쪽에서 문자적인 견해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진 않는다.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성경 해석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제 4장 삼위일체 하나님

조직신학의 순서로 본다면 신학서론이 서두에 위치하게 된다. 결국 이 신학의 내용이 하나님의 행위의 역사, 성부하나님으로서 창조, 성자하나님으로서 구원, 성령하나님으로서 성화가 목표인데 그러나 서양학문의 전통에 있어서 이 목표를 추구하기전에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이 바로 신학서론이다. 그래서 신학의 과제(도대체 뭘 해야하나), 신학근거(어떻게 설교를 구성해야하나)를 다루어 보게 된다.

밀레오레는 신학의 과제를 4가지로 설명한다.

 

1계시에 충실한가? 말씀에 충실한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어떤 내용을 미리 설정해 놓고 그 설교의 내용을 증빙하기위해 성경본문을 끌어내어서는 안된다. 이미 이것은 주석하는 부분에서 잘 알겠지만 성경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내가 할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려고 하는 말씀인가 따져보는 것이 필요하다.

 

2.일관성이 있나? 통전성이 있나?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 진리가 통전적이고 전체적이기 때문에 교회 하나만 이야기하는 것은 안되고 전체를 통전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매번 설교할때마다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정말 기독교 진리가 훌륭하기 때문에 야망을 가지고 사용하고 싶을때 해당되는 말이다.

 

3. 시대의 적절성이다. 기독교 진리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몇몇 사람이 이해되는 것으로 기술되어서는 안된다. 젊은 사람들이 이해되는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4. 교회와 사회를 변혁할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저 과거에 있는 것을 상투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교회를 개혁할수 있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학의 과제를 요약했다. 결국 2장에서는 신학의 근거는 계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계시의 근거는 광범위하다. 밀레오리는 계시를 어떻게 이야기하나? 신학은 계시에 근거해야한다라고 이야기할때에 그렇다면 계시가 뭐냐? 계시는 성경이다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했지만 여기에서 또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계시가 성경안에 있는 것은 완전하지만 계시와 성경은 같지 않다는 것을 제기하게 된다.

 

밀리오레의 계시는 첫 번째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를 드러냄으로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리, 엄밀하게 볼때에는 교리적 지식 몇 개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이란 것이 뭐냐?

두 번째로 답할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계시라고 할때에 성경이다 교리다라는 것보다는 좀더 은밀한 의미에서 볼때에는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좀더 깊게 드러낸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 입장에 반대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밀리오레가 서구사회의 일반적인 관념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사회는 계시가 성경이다라는 예전의 입장을 수정해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변화해 온 것을 알수 있다. 계시는 성경이다.라는 전통적입장이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밀리오레의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계시가 하나님의 자기 드러냄이고 그 계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할때에 인간의 반응이 어떠냐하면 셋째로 우리의 인간의 반응은 전인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시는 우리의 전인격을 가지고 받아들여야하는 실존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계시가 지식 한두개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네 번째로 계시는 우리에게 충격과 동요를 일으키기까지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66쪽에서 계시에 대해서 좀더 상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밀리오레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계시라는 용어는 일차적으로 성경, 신조, 교리 교회적 권위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위가 바로 계시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본성과 목적에 대한 것이 최고의 계시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위치는 어딘가?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다루어야 한다면 그렇다면 성경의 위치는 어디인가?

솔직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다루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근거가 어딘가? 그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이 중요하다. 그런데 성경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성경이 여기만 닫혀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닫혀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르트 신학의 공헌이라고 보는데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많이 강조해서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강조했었다. 그러나 이것을 반영한 것이 바로 칼 바르트였다. 바르트는 선포되는 말씀이 중요한 나머지 선포되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기록된 말씀이나 이것이 선포되어야만이 하나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된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3중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선포되는 설교말씀자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말씀의 프라이드를 가져야 한다. 기록된 말씀을 참 말씀으로 하는 것이 바로 계시된 말씀이고 기록된 말씀이 바로 계시된 말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것이 선포되지 않으면 안되기에 선포되는 말씀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사에서 선포되는 말씀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선언하는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이다. 단순히 기록된 말씀도 중요하지만 이 기록된 말씀을 선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미 이야기하고 있다.(1500년대에 제시된 말씀이다.)

 

밀리오레가 계시의 개념을 좀더 발전시켜 나가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성경론을 이야기많이 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도움이 된다고 보면 함께 86쪽에 있다. 두 번째 문장에 보면 칼빈이 지적한 대로 교회의 신앙이 모든 복음서 이야기의 일점일획의 정확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은 그리스도의 사역, 죽음, 부활 등의 중심적 사건들을 묘사한 복음서의 진실성에 따라 그 옳고 그름이 정해진다.

밀리오레의 책의 군데 군데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지식적인 습득이 용이한 내용들이 참 많다.

밀리오레의 입장은 성경의 일점일획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해도 그것이 기독교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고 있기에 좀더 세부적인 문제가 있겠지만 전체적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함에 있어서 성경이 전혀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한 부분에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결국은 성경을 읽어야 하는데 어떻게 읽어야 하나? 성경을 읽을때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리스도 일원론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성경을 읽을때에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먼저 천지를 창조하신 성부하나님이며 온세상을 구속하신 성자하나님이며, 새로운 생명과 자유를 가져다 주시는 성화하시는 성령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성령만 강조하고 성자하나님만 강조하고 성부하나님만 강조하는 데 있다. 유니테리온 교파는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는 종파이다. 그러면서 어떤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를 안하는 그런 교파가 있다. 오순절교파는 성령만 강조하고 있다. 세계교회적으로 보면 성부하나님만 강조하고 있는데가 있다.(동방정교회)

한가지만 강조하지 말고 조화롭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시할때에 그분들의 사역중심으로 제시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우리가 대략 신학의 과제와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회의 핵심적 교리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경륜은 때에 따른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히 다르다. 노아의 시대, 모세의 시대, 예수님 시대, 성령의 시대에 따라 분명히 성령의 역사는 다르다. 이렇게 시대를 나누는 것이 바로 dispensation이다. dispensation은 바로 세대주의라는 때에 따른 하나님의 역사다라고 보고 있다.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낸 계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면 그 다음에 성령이 오순절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3위일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오순절때다. 삼위 하나님이 오순절부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셨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경륜을 통해서 삼위일체는 어떻게 계셨나? 오순절 이전에 예수가 오시기 이전에 삼위일체는 어떻게 계셨나를 알아보면...

하나님의 때에 따라 경륜에 따라 나타나기이전의 삼위일체를 내재적(immanent) 삼위일체라 한다. 그러나 조금더 내용을 살린다면 여기서 내재적은 맞지만 economy는 계시적 삼위일체로 부르는 것이 낫지 않나 본다(황교수). 동방정교회에서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중시하나 카톨릭과 기독교에서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먼저 알아야 내재적 삼위일체를 알아야 한다고 본다.

세대주의는 한 시대를 너무나 엄밀하게 나누어서 이 시대는 이렇게 역사한다고 주장하니까? 바르지 않은 것이다.

 

4. 삼위일체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인데 삼위일체 하나님중에서 성부하나님을 다루는데 오늘날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 속성보다는 구체적 일을 서술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성부하나님의 사역을 주로 다루는데 창조라는 것이다.

논술할때에 일단 반론을 먼저 살펴볼려고 하는 것이 13세기 스콜라주의에서 나타났는데 집대성한 것이 바로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다. 서양학문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이런 사상들이 있어서 먼저 반론을 살펴볼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있다. 밀리오리도 하나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전에 반론을 먼저 살펴보고 있다.

 

근대신학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여러 가지 반론을 책을 통해서 찾아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비판들을 요약해서 잘 실어놓고 있다. 이런 방법론은 신학함에 있어서도 굉장히 유용하다고 본다.

서양사람들이 설교할때에도 자기 이야기를 제시하고 반론을 제시한 후에 자기의 주장을 드러낼려고 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한다. 이것이 수사학적이다. 설교에 있어서 서양사람들에 있어서 이용되어진 방식이다. 밀리오리가 하나님 개념 자체에 대한 비판을 검토하고 나서 그 다음에 삼위일체론을 제시하는 것이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하나님에 대하여 일반적이고 불분명한 방식으로 말하기보다는 구체적이고 특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몸을 입고 태어났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보고 있다. 이 하나님은 새롭고 은혜로운 일을 하시는 분이며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세계안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현재에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것이 삼위일체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결국은 삼위일체론을 반대하는 유일신론은 유대교와 비슷하면서 유일신론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추상적이다. 성경을 통해서 일어난 일들이 오늘날도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 역동적인 사역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하면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되었다가 얼음과 물은 모양은 다르지만 물로서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다보니 실제적으로 구체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 이상설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삼위의 관계성을 하나님의 사역과 상관없이 어떤 존재로 있는 물질처럼 설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설명할려고 해야지 이것과 상관없이 물체인것처럼 설명해서는 안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가 역동성의 관계인데 역동성은 사랑의 관계인데 사랑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셔서 우리를 주의 능력받아 완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라고 기도하면 좋다.(삼위일체론에 입각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기도와 설교에서 삼위일체설의 설교와 신학에서 어떻게 반영되는가가 참으로 중요하다. 연구해서 기도문을 만들어 보라.

 

삼위일체의 말자체는 성경용어가 아니다. 하지만 그 개념은 이미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적으로는 성부라고 불려지는 분으로부터 오며 성자라고 불려지는 분의 희생적 사랑안에서 세계를 향하여 인간적으로 시행되고 성령이라고 불려지는 분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임재하는 역동적인 실재가 된다. 하나님게서 그리스도를 당신의 아들로서 사랑하시고 사랑안에서 세계를 구원하셨는데 그 사랑을 개인들에게 적용시킬때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개인에게 적용시킨다는 것이 기본적인 구조다.

몰트만의 말을 빌면 ‘ 복음의 이야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천지와 함께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을수 있는 것은 차라리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개념을 설명해도 괜찮다. 하나님은 이세상의 어떤 존재를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존재하는 물질로 하나님을 설명하기는 부적절하다. 현대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를 어떤 유비를 들어서 설명할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있다. 그런데 옛날 신학을 보게 되면 삼위일체를 유비로 설명할려는 시도가 있었다.

 

소논문을 준비할때에는 한국 유명 목회자들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발견해 보는 것도 좋다.

삼위일체론이 좀더 교리로 발전되게 된다. 먼저 삼위 일체론을 확정하게 되는데 중요한 교리적 근거가 바로 니케아 신조이다.

 

성경에서는 전반적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이 하나의 광석과 같은 알갱이만 있었다. 나중에 교회에서 문제가 있어서 이것을 정리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성부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 것이 바로 322년에 만들어진 니케아 신조이다.

창조주하나님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다라는 것이다. 인간적 실체를 입은 존재였지만 하나님과 본질상 동일하다는 근거를 내었다. 교회가 이런 근거위에서 삼위일체를 더 공식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낸 이유가 뭐냐? 다른 어떤 이단적인 교리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런 교리를 물리치면서 삼위일체 교리가 바로 정론이라고 밝힌 것이다.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이면서 물리친 이단 사설이 3개 있다.

종속론이 있는데 성자와 성령이 성부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동방정교회로 볼수 있다. 여기서 성령의 위치가 문제가 된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성령의 위치로 어느 분으로부터 나온다고 보고 있나? 성부로부터만 온다고 본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에도 원래부터 성부로부터 성령이 온다고 했다가 나중에 서방교회에서 성자로도 나온다는 문구를 집어넣어서 동방정교회가 서방 정교회를 정죄했다.

 

양태론은 최초에 성부하나님이 되셨다가 어떤 때는 성자하나님이 되셨다가 어떤때는 성령이 되시는 모양새다. 세분의 각 다른 실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동성을 그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성자께서는 인간과 같은 존재로 오셨는데 성자께서 고통을 받으시고 하셨겠는가? 신이시기 때문에 고통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해할수 있기 때문에 이것도 받아들일수 없다.

 

삼신론이 있는데 세 존재가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곡된 하나님의 이해는 현대의 것을 제시하고 있다.(106쪽) 성부를 강조한 나머지 성자가 작게 되어버린 경향이 생겨버렸다.

1)성부를 강조한 종교가 바로 미국의 시민종교이다. 창조주 하나님으로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하고는 다른 새로운 종교를 이야기하고 있는 종교가 있다.

2)성자를 강조한 사상도 있다. 세계적으로 볼때에 성령을 강조하는 부류도 많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강조하는 집단이 참으로 많다. 미국에서는 유니테리언이 있다. 얼마전에 크리스챤 사이언스 잡지도 유니테리언이 잡고 있다.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다라고 강조한다. 인간예수를 강조한다. 여기서는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는 도덕적 군자로서 누구나 노력하면 도달할수 있는 성인의 위치에 있는 인간으로 제시되고 있다.

3)성령을 강조하고 있는 부류도 있다. 카리스마틱 집단을 말한다. 이것이 사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강하게 번지고 있다. 세계의 주류교회에서는 수가 격감하고 있지만 카리스마틱 교단에서는 성도수가 증가하고 있다. 성령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성부,성자를 제대로 말하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성부성자성령을 균형있게 제시해야 바른 신학이 된다. 어느 한 위를 높이기 위해 다른 두 위를 배제시킨채 이야기하면 이단에 빠질수 있다. 마지막에 밀리오리가 삼위일체론을 요약하면서 몇가지를 110-115쪽에 제시하고 있다.

 

3. 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삶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임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과 소외와 죽음의 길을 가신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의미라고 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삼위일체론은 이론적이고 추상적이지 않느냐 보고 있다.

117쪽에 보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조심해야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했을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는 그 속성은 하나님 당신께서 삼위일체하나님의 역사로서 외부로 향해서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하나님이 스스로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가, 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가가 바로 속성이다. 그 속성은 하나님은 이러저러한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어떤 분이신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이제 하나님께서 내적 속성을 살펴본 후에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외적으로 어떤 분이신가?를 살펴보아야 한다.(하나님의 사역) 그런데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은 내적으로 어떤 분이신가 살펴보고 외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는데 그 중간단계에 무엇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인 것이다.(예정론)

하나님이 외적으로 어떤 사역을 하시는데 창조, 구속, 성화사역을 하시는데 하시기 전에 예정하시고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창조하시기로 선택하셨다.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121쪽을 보라. 어거스틴, 아퀴낫, 루터, 칼빈 등 많은 고전적 신학자들이 이 교리를 가르쳤지만 이 예정론은 특별히 개혁신학 전통의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창조론정리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꿰어서 그것을 하나의 내것으로 만드냐가 조직신학의 의무이다. 평가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한 사람이 학자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연구를 좀 해야되고 연구결과를 알림으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알고 도움이 되도록 알려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래서 소논문을 써야 한다.

소논문은 평소에 관심있는 교리와 문제에 착안해서 생각도 해서 그것에 대한 여러 견해를 살펴보실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밀리오리가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제시하고 있나를 쭉 제시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것에 대해서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여러 견해를 제시하고 나서 그것이 현대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수 있으며 판단이 가능한가? 이것이야 말로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이다라는 판단을 내릴수 있어야 한다.

훌륭한 CEO들도 미래를 내다보고 자기들이 하지 않는 것들이라도 과감히 결단하고 판단을 해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교회 상황에 가장 합당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리고 있다.

 

1)문제상황을 제시하는 것이 먼저다.

2)한국교회에서 어떤 것이 적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형식으로 하라.

12월 중순쯤에는 소논문을 내라. 연구를 해서 내라.

신론중에서 삼위일체론을 지난주에 했다. 삼위일체가 하신 사역중에서 먼저 창조를 살펴보자. 창조하고 섭리하고 창조의 절정으로서 인간의 창조를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보면서 창조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밀리오리는 악을 두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적인 악과 도덕적인 악으로 구분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적인 악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부주의해서 악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잘못해서 일어나는 것은 당연히 내가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3가지 포인트가 있다. 먼저는 하나님의 측량 불가능성이다. 우리가 문제를 알지만 전부를 알지 못한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다. 옥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선한 일을 했던사람인데 왜 옥에 들어갔나? 예상하지 못했지만 들어갔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 기독교가 로마로 퍼져나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전체적으로 볼수 있는 눈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문제가 있느냐? 그러나 천년 후 만년 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우리로서는 그 문제 자체를 조금 아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알수 없다.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실지는 측량불가능하다. 죄의 심판도 될수 있고 연단도 될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것이 모범답안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다. 현실적인 문제는 자기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창조론이야 머리로 이해안되면 덮어놓아 버리면 된다. 하지만 악의 문제는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복잡한 것이다.

악이란 것이 어떨때는 하나님이 이용하실때도 있고, 하나님이 이용하시는지 안하시는지 모르지만 어째든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악을 이용해서 선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니까? 하나님이 주권에 대한 믿음을 계속 가져야 한다.

 

창조론 정리

창조론에 보면 주제라고 해서 창조론 의미를 3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32에 보면 창조론의 주제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133쪽 창조론은 하나님의 철저한 타자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창조물은 창조물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135쪽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은 철조하게 창조주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다.

137쪽 피조물 세계는 문제가 많다. 우연성, 한계성이 있지만 창조론은 선하다. 창조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윤리가 있을수 있겠지만 3가지로 요약을 잘해주고 있다.

139쪽에 보면 피조물의 공존성, 피조물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밀리오리는 피조물의 공존성 상호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다.

140쪽에 보면 피조물이 목표를 가지고 있다. 최종적인 목표가 있다.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다음에 좀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이런 창조를 하셨다면 어떻게 하셨나?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식으로 했나? 건축식이냐? 유출이냐? 이것이 신학의 어려움과 과제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은 일반인들도 할수 있다. 여기서 목회자들이 창조에 대해서 설명해야하는 어려운 과제에 봉착해 있다. 창조에 대해서 예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143쪽부터 설명하고 있다. 1)출산 2)건축 3)유출 플라톤 철학에서 나왔다.4)정신과 몸 몸이 있는데 정신을 하나님이 불어넣어준 것이다. 5)예술적 표현

5가지가 있지만 조금은 불충분하다. 세계 신학계가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할수 있는 예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나를 설명하고 있다.

 

창조론과 과학의 문제

인터넷상으로 문제가 되지만 학교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가능하다면 총회에서 이런 위원회를 만들어서 대처해야 한다. 정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교회에서 고민하는 것은 거의 없다. 이런 점에 있어서 대학생들에게 큰 문제가 되어 있다. 한국 교회가 이런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는 것이 아직은 약하다.

6장으로 넘어가서 신정론섭리론 문제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이렇게 하시고 창조하신 피조물을 섭리가운데 다스려 간다는 이야기를 할수 있다. 섭리론을 하다보면 악의 문제가 생기니까? 왜 선하신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는가?를 다룬다. 이것이 바로 신정론이다.

신정론은 건너뛰고, 왜 악이 생기는가?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62쪽에 나온다. 1)하나님의 측량 불가능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범위가 어마어마하다. 우리는 현재, 짧은 시점밖에 이해하지 못하다보니 넓은 범위를 이해할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위가 악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2)죄와 연관해서 악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연단으로 해석할수 있다. 3)특별히 교인들에게 있어서 뚜렷한 죄가 없는데도 악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3가지의 신정론에 대한 답변이다.

그 다음에 창조론에 중요한 부분으로서 인간론이다. 7장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석문제다. 1)직립성 2)사고하는 능력이다. 3)자유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상호관계를 맺을수 있는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본다(밀리오레)

밀리오리는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3가지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창조된 인간, 타락한 인간,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인간 으로 이야기한다.

 

1.창조된 인간

 

인간, 인간, 인간

1)하나님과 관계 가능성

2)타인과 관계 가능성

3)최종적인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운동

죄-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다보니 인간이 자기의 위치를 모르고 자기가 크다고 착각함. 그러다보니 이웃이 자기를 섬기도록 생각한다. 그래서 밀리오리는 타락이라는 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다보니 자기가 크다고 교만하게 되어 이웃이 자기를 섬기는 굴종의 관계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최종목적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길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은 이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상. 문제가 있다보니 냉소주의나 게으름에 빠져서 인간의 최종목적을 생각지 못하고 이룰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밀리오리는 전통적으로 이루어진 죄의 개념을 이렇게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회복-타락으로 관계가 끊어졌는데 이 사이를 이어주는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을 믿어야 한다. 이 관계가 회복되는데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이 관계가 회복되다 보니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신학이 이렇게 다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신학을 잘한다라는 것은 대단한 아이디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야기된 것들을 잘 이용해서 여러 가지 적용물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학을 잘하는 것이다. 상호관계적인 것을 잘 이용해야한다.

 

그리스도론

번역자가 여기서 인격이라는 말을 쓰는데 영어로는 ‘person’ 인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위격이라고 보면 된다. 위격은 삼위일체 안에서의 관계성을 말하는 것이다. 위격은 예수 그리스도와 누구와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성부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보통의미의 인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한 위격을 말하는 것이다.

밀리오리의 이야기는 전통적인 견해를 제시하면서 현대에 논의되고 있는 것을 자꾸 소개해 줄려고 하는 것이 다분히 보인다. 전통적인 것이 본성(위격)을 가진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어떤 사역을 하셨나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본성(위격) 다음에 사역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역이다. 본성 혹은 위격이라 하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이다.

잘못된 삼위일체론의 하나가 종속론이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고대에는 어려웠다. 교회 역사적으로 볼때에 초기에는 예수님께서 결국은 인간이셨기에 피조물중에서 으뜸이셨지만 그렇다고해서 성부와 본질상 동일한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대변한 것이 바로 아리우스이다. 니케아에서 해결해야하는데 니케아 신조를 보라.

 

3째부터 7째줄이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7째줄에 보면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가 나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질상 동일하신 분으로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되었다. 기원후 325년이다. 그리스도가 성부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본질상 동일하다는 위격의 기준이 바로 니케아회의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215쪽에 보면 밀리오리의 신학에 대해서 조금은 자유로운 미국 신학이라고 보는 견해가 나와 있다. 자기들이 창조적으로 해석할려는 경향이 많다. 니케아 신조에 보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예수님이 신인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지만 215쪽에 보면 밀리오리는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나? 예수가 참 인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밀리오리는 예수가 참신이라는 개념을 뒤집어서 참 인간이라는 것을 먼저 언급한 것이다.

이런 색다른 방법을 보게 되면 이런 것을 찾아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 제 2스위스 신앙고백을 보라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심을 먼저 규정하고 있다. 밀리오리는 참인간이라고 규정하지만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은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밀리오리는 전통적인 방법을 뒤집어서 말한 부분을 비판한다면 니케아 신조의 예수는 참 하나님이심을 꺼집어 내어 반박하면 된다.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으로 반박해도 된다.

우리가 교리사를 볼때에 예수가 성부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다라고 확정하게 된 문제가 뭐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성과 인성을 안에서 어떻게 가지고 있는가? 신성과 인성의 관계가 짬뽕되어 있나? 붙어있나? 관계가 있다면 신성이 크냐 인성이 크냐의 논의가 있을수 있다.

그래서 아폴리나리우스가 제기한 것이 신성과 인성이 있다면 신성이 강하니까? 신성이 인성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신성본위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 다음에 네스토리우스는 아폴리나리우스의 견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으면 인성이 잡혀 먹으니까? 인성을 보호하는 쪽으로 네스토리우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두 격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신성과 인성이 구별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유티켓은 어떻게 주장하나? 성육신 전에는 두가지 본성으로 있다가 성육신후에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의 본성인 신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이런 논의가 있었고 결국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정답을 내린 것이 칼케돈 신조(기원후 451)이다.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고 있지만 신성과 인성이 혼동되어서는 안되고 변화되어서도 안되고 마치 인성이 신성에 변화되어서 영에서 로고스가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었는데 이것도 안되고, 분할되거나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위격을 주장하는 중요한 표지가 바로 이런 문구들이다.

그리스도와 성부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여기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칼케돈 신조이다. 여기는 4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혼동되거나, 변화되지 않고 또한 분할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고전적으로 이런 논의가 있어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위격이 확정되었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나?

 

3중직을 완성하신 사역을 하셨다. 그리스도를 설명하라. 기름부음받은자의 직책을 완성하셨다. 기름부은 받은자가 3종류가 있다. 예언자요 제사장이요 왕의 직분을 완수하셨다. 기름부은 받은자로서 3가지 직분자가 있는데 이 3가지 직분자로서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언자의 직분이 뭐냐? 먼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편에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예언자 직분이다. 둘째 인간편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기 자신을 재물로 드려서 구속을 완성하시는 행위가 바로 제사장 역할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향해서 인간에게 직접 통치를 하신다는 것이 바로 왕이다.

먼저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편에서 인간편으로 그 다음에 인간편에서 하나님 편으로 그 다음에 왕직에서 인간편으로 나아간다. 장로교 전통에서는 이미 이것이 헌번에도 있다.

칼빈의 3중 직분론을 이야기했다.

그 다음에 교회사에 있어서 예수님게서 인간의 죄를 어떻게 구속했나? 인간을 하나님과 어떻게 화해를 시켰나?를 3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는 승리자 그리스도론이다. 과거에 있어서 사람들이 마귀의 세력이 강력해서 마귀들이 인간을 하나의 볼모로 잡고 있었다.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와서 마귀의 세력을 무찌름으로 인간을 화해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조금 부족한 것처럼 들려서 여기에 보다더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시한 것이 바로 둘째로 안셀름의 만족설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는데 그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분노가 너무 커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릴수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주셨다는 것이다.

 

셋째로 도덕적 감화설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노력을 많이해서 엄청난 사랑을 주어 인간을 만족하게 하심으로 화해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도덕적 감화론을 가장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 것은 미국의 유니테리언 종파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3중 직분론으로 설명할수 있다.

 

그 사역을 통해 화해하시기위한 3가지 방법이 바로 승리자 그리스도론, 안셀름의 만족설, 도덕적 감화설이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이 세상 도처에 편재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영화롭게 되신 후에 참 몸이기를 포기한 신화론적인 주장을 결코 가르치지는 않는다.

카톨릭은 화체설, 루터교는 공제설을 주장하면서 예수의 몸이 편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장로교에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후에 몸이 하나님 우편에 있는 것이고 이세상 편재한 것은 바로 예수의 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교리공부를 할때에 앞에 이야기한 것을 잘 연결시킬때에 중요하다.

고대 공의회의 4가지 신조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 신조가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신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의 정확한 이름이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바로 콘스탄티 노플 신조이다. 니케아 신조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금 정리된 것이다.

 

에베소신조도 칼케돈에서 정리된 것이다.

서양교회에서는 니케아 신조를 잘 사용한다. 어떤 경우에는 니케아신조를 고백하는 것도 굉장한 의미가 있다. 사도신경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니케아신조이다. 니케아 신조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교회의 터전을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반대한 이유가 뭐냐? 교회가 아리우스의 견해를 배격했다 이유가 뭐냐?

먼저, 그리스도께서 성부하나님보다 못하다면 어떻게 되나? 그분을 우리가 예배할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보다 못한 피조물은 예배할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성부하나님보다 못하다. 결국에는 피조물이다라고 이야기했을때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할수 없게 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면 하나님의 피조물이 많은 것처럼, 그 밑에 여러 피조물이 있을수 있다고 생각할수 었다. 결국에는 예수님같은 존재가 2000년에 전에 있었으니까? 5000년후에도 더 있을수 있지 않을까? 결국에는 여럿이 생기는 다신론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종속론은 다신론이라고 보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원론의 문제인데 고대의 구원론은 오늘날의 구원보다 훨씬 깊었다고 보지만 요사이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아 천당간다라는 것을 믿고 있다. 오늘날 구원받는 것이 애매하고 추상적이 되어버렸는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구원의 개념이 굉장히 분명했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게 되면 인간이 결국에는 신처럼 된다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신처럼 만들 수 있나? 우리를 신처럼 만드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면 우리를 신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아리우스 견해를 반박한 사람들의 입장이 이 3가지이다.

 

과거에 있어서는 신성이 완전한 것이기에 고난도 없고 피로도 없다고 보았다. 예수님이 고난받으신 것은 신성이 아닌 인성이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에는 잘 모른다.

사도신경에 한국말로는 삭제된 부분이 있는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음부에 내려갔다라는 말이 있는데 한국말로는 음부에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삭제되어 있다. 왜 빠져있나? 무슨 의미냐? 라는 문제도 있다.

인성과 신성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때 신성은 같이 죽으셨나? 그때 신성은 어디 가 있었나?하는 문제들은 소눈문의 주제들이다.

신학작업은 다른 학자들이 주장한 참고서적을 다 살펴보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학자들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를 살펴보고 각주에 제시하고 소논문을 만들때 다른 사람들도 참고할수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3중 직분론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된다.

 

성령론

성령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사역을 다음에 이야기한 것을 보게 된다.

왜 그리스도론 다음에 성령론이 오게 되나?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객관적으로 완성하셨는데 이 완성사역이 훌륭하다해도 거기에 있으면 안된다. 이것을 각 개인이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어떻게 받아들여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이것을 주도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개인과 교회에 적용시켜서 계속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을 먼저하고 성령론을 다음에 하는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교인들이 받아들여서 참된 신자가 되는 과정이 중요하다. 밀리오리는 이 과정을 설명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의견을 파편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소요리문답 대요리 문답이 명백하게 이것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참된 교인이 되고 참된 삶을 사는 방법을 잘 이야기하고 있다.

 

성령론을 주의깊게 책을 살펴보면 성령론이 약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보충하기위해 대요리문답에 나타난 성령론을 살펴보면 된다.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

성령론 전에 기독론을 다루었다. 그리스도론에서 성령론으로 넘어가는 논리가 뭐냐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론을 다루다가 성령론으로 넘어가는데 넘어가는 연결고리가 뭐냐? 이것을 칼빈이 강조하는 것이다. 칼빈의 성령론은 제목이 길다.

일단 그리스도께서 위격, 성부하나님과의 본질상 하나되시는 위격을 가지시고 결국 사역을 하셨고, 구속을 하셨고, 구속하신 행위가 바로 3중직을 완성하셨다고 본다. 그 구속론을 3가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1)승리자 그리스도의 역할 2)만족설 3)도덕적 감화설을 설명할수 있도록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령론으로 어떻게 넘어가느냐?!.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속사역이 그것이 내게 주관적으로 적용이 되어져야 한다. 어떻게 적용되나? 우리의 의지대로 마음대로 할수 있나? 이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 성령의 역사를 이야기하게 된다. 이때부터 성령론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위대하지만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로 있으면 소용이 없다. 주관적인 사실로 내게 적용이 될 때에 성령의 역사로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어떻게 적용되어서 계속해서 역사되는가를 설명하면서 성령론을 설명하면 된다.

 

분명한 원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객관적으로 완수되었다면 그 객관화된 것이 주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그리스도론 다음에 성령론이 필수적으로 위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령론이 신학사를 살펴보게 되면 밀리오리가 지적한 대로 무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사실, 카톨릭 신학에서 보면 성령론의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론 다음에 바로 넘어가는 것이, 바로 성체(성찬)으로 넘어간다. 카톨릭의 신학에서 성만찬이야말로 신학의 목표다. 그러다보니 성령론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상대적으로 카톨릭 교회가 지배해온 중세중반까지는 성령론이 이야기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서양사람들은 자꾸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다보니 성령의 역사와 역할에 대해서 별로 중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복음주의 조직신학을 잘 보여준 것으로 알려준 알리스 맥크로스라는 사람이 ‘기독교 신학개요’라는 책을 냈는데.. 이 사람은 성령론을 쓰지 않았다. 이 책도 조직신학을 좋은 점을 보여준 책이지만 성령론에 대해서 쓰지 않았던 것이 조금의 문제가 있다. 지금의 신학자들도 이 성령론에 대해서 조금 무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밀리오리는 성령론이 무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받고 중시되어야 함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볼때에 성령론을 제대로 중시해서 쓰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밀리오리는 성령론이 중시되어야 하는 이유를 쓰고 있다.

요사이는 성령과 영성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가 바로 성령에 대한 관심은 비인간화되고 관료화된 현대 사회와 교회에 대한 저항이다. 뭔가 2% 부족한 것을 교인들이 느낌을 받아와서 나름대로 영성을 추구할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교회의 공격으로 보면 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막스베버라는 사회학자라는 현대사회학의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조직과 카르스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조직과 단체가 이 두가지를 근거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모여있어도 조직되어 있지 않으면 힘을 낼수 없게 된다. 그래서 조직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조직이 너무 굳어지면 카리스마 같은 창조적인 생각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조직 자체가 굳어서 사망하게 된다. 그래서 적당하게 조직도 서 있어야 하고 조직도 또 창조적인 생각을 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훌륭한 조직도 살아있고 카리스마도 적절히 받아들일수 있겠느냐? 이 두가지를 잘 갖출때에 오래살아남게 된다는 것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 두가지가 잘 구성되어서 살아남지 않았나 본다. 밀리오리가 볼때에 현대에 와서 조직이 강조되다보니 성령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 것이다. 현대교회가 조직이 강하게되다보니 카르스마를 이야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조직이 일정기간 지나다보니 조직이 굳어지다보니 카리스마가 약해지게 된것이다.

 

대교회를 구성한 한 목사를 보더라도 카리스마로 시작했서 조직을 크게했더니만 조직이 굳어져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사이는 영성운동을 하고 소그룹 운동을 하게 된 경향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중 하나가 장로교회의 너무 장로중심의 체제로 굳어지게 되어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영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체제가 되었다. 미국은 20대 후반도 장로가 될수 있다. 장로의 자격이 많이 완화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또한 임기대로 하다보니 조금더 창조성이 있다. 그러나 미국 교회가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 한국 장로교회의 직제가 조직 관료화가 너무 많이 진행되어 창조적인 영성이 들어왔을때 수용하는 것이 좀 약하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 병폐로 나타난 것이 세습화이다. 세습화의 문제가 되는 것이 조직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조직이 굳어지면 성령의 역사가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단적인 예가 카톨릭 교회의 독신제를 고집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결국 이런 문제로 인해서이다. 카리스마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 역사로 올라가보면 신부들이 축첩이라는 것을 했다. 중세말기까지만 해도 축첩을 했다. 축첩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신부의 아들이 누군지 알려지게 된 것이다. 소위 권력이 있는 주교가 아들이 있을때에 그 아들에게 교구를 물려주는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신부들 전체가 볼때에 이것은 세습제가 되고 카리스마, 창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등용을 막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신부들 자신들이 신부들의 독신제도를 자기네들이 결정해서 강력하게 밀고 나간 것이 오늘날까지 되어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카톨릭 교회가 독신주의를 고집할 정도로 성령의 역사를 보존하기위해서 개신교에서 세습제를 한다라고 했을때 어떤 교회에서는 그 아버지 목사 못지않게 카리스마가 있을수 있지만 이것이 일반화된다면 한국 교회가 더 굳어질수 있는 관료화가 생길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로 인해 굳어진 기존 교회의 체제를 새롭게 할수 있는 것이 성령을 실질적으로 강조하고 있고, 카리스마 지도자가 있으면 좀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소위 학벌좋은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문제가 있다. 사실 교회야말로 사회의 원리, 학벌, 권력, 배경을 떠나서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를 받아들이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회의 흐름을 거의 따라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세계교회에서도 성령의 역사에서도 중시되어야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중시되어야 한다. 정말 조직까지도 바꿀수 있는 리노베이션이 일어나야 한다.

학교에서는 이런 문제를 예민하게 생각하는 청년들을 다루기 때문에 저들은 한국 교회에 대한 생각이 상당히 부정적이어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마지막 문장에 보면 세로운 삶,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사역이다, . 새로운 공동체가 중요하다. 요사이 청년들은 컴퓨터나 여러 가지 활동들을 통해서 방콕이 되어 활동한다. 이런 자들은 사실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되게 하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의 역사하면 어떤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하나되게 해주는 사역을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로 영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뉴라이트에 소속되어 정치에 개입할려고 하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지치면 영성을 추구하게 되는 흐름이 있어 왔다.

다섯째로, 아프리카에서 오순절계통이 급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할때에 교회의 발전이 있다. 성령의 역사를 이야기해야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현대에 있어서 성령론에 있어서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지만 필요한 것을 밀리오리는 강조하고 있다.

성령신학의 대략적인 모습을 보게되면 성령론을 일단 펼칠때에 어떻게 해야하나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로 성령은 아무 영이 아니다. 기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속에서의 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문제되는 것이 ‘필리오케’논쟁이다. 성령이 올때에 꼭 성부로부터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성자로부터도 유출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동방정교회는 성부로서만 유출된다고 주장하나 서방교회는 성자와의 관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성자로부터도’ 유출한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성자로 부터도’가 바로 ’필리오케‘이다. 동방교회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성자의 역할이 약화된다. 그래서 서방교회는 성부로부터도, 성자로부터도 유출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위격, 삼위일체에서의 성령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떤 일을 하나? 밀리오리는 6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3개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성령의 사역가운데 하나는 다시 드러내는 사역이다.(represnt) 성령은 그리스도를 신자에게 다시 현존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본다.

두 번째는 새로운 삶의 창조다.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을 가능케해주는 능력으로 보면 된다.

세 번째는 성령의 다른 사역은 공동체적인 사역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성령의 역사는 개인이 어떤 능력을 받고 신비한 체험까지 하게 되는 것으로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개인이 경험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성령의 역사는 공동체의 역사가 될 때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현대신학자 중에서 칼 바르트가 성령론을 교회론과 가장 잘 연결시켜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칼바르트는 이야기하기를 성령께서 성도를 교회로 모으고 키우고 키운 교인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역할을 한다라고 정의한다. 성령의 역할의 일차적인 목표는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공동체로 모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 개혁신학에 있어서는 공동체 사역이 강조되어 왔다.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어떻게 나타나나? 밀리오리는 칭의, 성화,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령이 한국교회에서 약하된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21세기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앙고백서이다. 여기서 나타난 성령론이 문제가 좀 있다. 심지어는 교회의 최고의 지적 능력을 만든 것이 바로 이 교단의 신앙고백서인데 이것마저도 성령에 대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 성령에 대해서 좀 흐려있다는 것이다.

 

예배용 4번을 보게되면 성령과 성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성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성자에 대한 유출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또한 유출인지 아니면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본판에 보게되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이땅에 보냈다고 표현하는데 성령을 이땅에 보낸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소지가 있다. 성령의 존재가 성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너무나 불확실하게 나와 있다.

신앙고백에 대해서 이야기할때에 ‘나는-’ 이 맞냐 아니면 ‘우리는-’이 맞냐? 좀더 친근감이 있기 위해서는 나는이 맞지만 한국인의 정서상 우리로 고백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본다.

미국에서의 신학수업은 이런 수업을 하고 나서 이런 신앙고백서를 내가 하나 만들어보는 것이다. 심지어는 학교다니는 동안 3개정도 신앙고백을 만들어보게 해서 신앙이 어떻게 변경되었는지를 비교해보게 한다. 우리는 이런 것을 잘 하지 않는 관습이 있다.

 

성부중심의 삼위일체론을 21세기 신앙고백서에 제시함을 통해서 성부와 성령의 관계가 약화되는 문제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보니 성령론에서 성자가 어떻게 한다는 성자를 주체로 해서 설명해야하는데 성자하나님을 대상으로 해서 설명하는 작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주체로 해서 제시해야하는데 부족한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또한 성자와 성령과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도 발견하게 된다.

 

제 2 스위스 신앙고백

개신교의 요약인 바로 이신칭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믿음이 어떻게 생기느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성화론이 중요하다. 여기에 보면 성화론이 문제가 많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과 대요리 문답을 비교해 보면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밀리오리가 제시한 대로 살면 성화적인 삶을 살수 있다고 볼수 있는가?

교회에서 성화의 삶이 뭐냐? 교인들에게 성화의 삶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라고 가르칠 것인가? 봉사하라고 가르칠 것인가? 이런 것을 가지고 성화를 설교할수 있겠는가?

 

특별히 교회의 신앙고백서에서 원칙을 정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대요리문답에서 무엇을 제시하고 있나? 93문부터 152문에 이르기까지 성화에 대해서 제시하는 것이 뭐냐? 십계명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성화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사이 사람들은 성화를 복잡한 것으로 생각한다. 기억하라. 성화는 복잡한 것이 아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성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대요리문답의 50문항 이상을 십계명에 대한 주석을 시도하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밀리오리는 불분명하게 성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전통적인 신앙고백서에서는 십계명을 하나의 성화의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도 십계명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십계명 일년에 한 두 번 설교하지 않는다. 교회가 십계명 지키기가 쉽지않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의 문제는 이론만 많이 이야기하고 실천의 문제는 좀 빠져 있는 것이 문제다. 십계명을 이야기하면 걸리는 부분이 많이 있다보니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 자체가 표리부동해지는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 대소요리 문답이나 하이델 베르코 문답은 더 분명하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은 감사의 삶인데 그 감사의 삶이 바로 십계명을 따르는 삶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십계명을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한다.

 

십계명으로 구체적인 행동원칙을 제시해야 성화를 회복할수 있다.

소요리문답 31문을 보게되면 유효함부르심, 효과적 부르심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29문을 보게되면 주체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다. 아니면 35문에서 성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심이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사역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사람 전체가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능히 점점 죽고 의에 대하여 살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사역은 성령이 하시는 사역이다. 성화의 주체는 장로교 신학에서 보면 옛 사람도 아니요 새사람도 아니요 성령의 주체로서 행하는 것이다.

성화의 방법으로 십계명을 행해야 하는데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니까? 기도해야 하고, 또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하고 설교의 결과 기존 신자들은 신앙이 성장하고 설교를 통해서 믿지 않는 자들은 믿게 되어야 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 과정을 어떻게 일어나나? 이 과정을 설명한 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효과적 부르심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효과적 부르심이 뭐냐? 이것이 믿음을 생기게하는데 있어서 좋은 설명인데 이것이 과연뭐냐?

대요리문답을 거슬러올라가게 되면 58문-75문사이에 보면 유효한 부르심, 칭의, 대소요리문답에서 구원의 과정으로 하나더 제시하는 것이 있다. 밀리오리는 칭의가 있고 성화로 바로나가지만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하나더 더 집어넣고 있다. 양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칭의를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화가 된다고 웨민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나 밀리오리는 빼버렸다. 그것이 타당한가?하는 문제는 소논문 주제로 다룰수 있다. 신앙고백서를 살펴보면 양자를 넣은 데도 있고 뺀데도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넣는 것이 낳다. 빼는 것이 낳다는 것을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신앙고백서에 대한 성령의 역사, 특별히 구원의 순서, 구원의 서전, 신학적인 용어로는 ordo salutis(구원의 질서, 구원의 순서)라 한다. 칼빈주의에서 칭의, 양자, 성화, 단계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신학에서는 순서를 중시하지 않는다. 감리교는 성화만 중시한다. 어째든 구원의 질서, 구원이후의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는 장로교 개혁교회에서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의 하나가 바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에서 소요리 문답이다.

왜 이것을 개혁교회 칼빈주의에서 문제로 삼고 중시하게 되었나를 알아보자.

밀리오리책에서는 성령론을 신자의 생활론, 신자의 윤리하고 제대로 연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발견하게 된다. 이 성령론을 신자의 생활, 왜냐하면 구원의 질서라고 하는 것은 믿고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구원의 단계에 있어서 신자의 삶부분이 중요한데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약하게 취급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대소요리 문답에서 찾아볼수 있다.

칼빈주의, 개혁교회에서 구원의 질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된 배경이 뭐냐? 4단계론이 나온다.

31번에 나온다. 1단계로서 효과적 부르심이라 부른다. 효과적 부르심을 통해서 믿음을 받게되고 이 믿음을 통해서 칭의가 일어나고 칭의가 일어나면 양자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마지막에 성화이다.

 

소요리 문답의 구원의 단계를 보면 4단계이다. 효과적 부르심, 칭의, 양자, 성화이다.

감리교에서는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나 장로교에서는 효과적 부르심이 있다는 것이다. 감리교에서는 효과적 부르심을 이야기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믿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다.(칭의)

그렇다면 효과적 부르심이 뭐냐? 왜 이 효과적 부르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나? 여기에 개혁교회 장로교회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부르심이 무슨 뜻이냐? 예정론하고 관계가 있다. 이 예정한 부르심이 바로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효과적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효과적 부르심을 영어로는 effectual calling 이라 부른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부르심으로 보면 된다. 자세히 보면 결과적 부르심으로도 보면 된다. 이 결과가 바로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전에 보면 소요리문답에서 구원의 과정에서 좀 설명하고 있는데... 20문에 보면 하나님이 오직 그 선하신 뜻대로 영원전부터 어떤 이들을 영생에로 택하셔서 은혜의 계약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부르심 즉 효과적인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효과적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인바, 우리의 죄와 비참을 확실히 알게 하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시며 우리의 뜻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는 복음안에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설복하시며 또한 그렇게 할 힘을 주십니다. 이것을 보게되면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수 있다.

그렇다면 중생이 뭐냐? 이 효과적 부르심 안에 중생의 단계가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심지어 믿음도 소요리 문답에서는 명시적으로 중요시되지 않고 있다. 소요리문답에는 믿음이라는 용어가 안나오고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면 인간이 하는 것이 뭐냐? 성령이 다 하면 인간의 노력의 헛것이냐? 그래서 웨슬리는 웨슬리언을 창시한 것이다. 자유의지를 강조해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600년대에 웨스트민스트 신학은 청교들 사이에서 엄격하게 작성된 것이다. 100년뒤에 영국에서 변화된 상황, 미국에서 변화된 상황을 웨슬 리가 보면서 자유의지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장로교회가 칼빈주의를 믿고 있느냐 보면 그것도 아니다. 장로교도 대부분 믿으면 구원얻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보면 웨슬리를 따르는 것도 보게 된다. 그래서 신학을 해서 제대로 알아가면서 개정하고 고치고 하면서 진보해 나가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10장에 보라. 하나님이 예정하신 지정하신 적당한 때에 본성상 취해있는 죄와죽음의 상태에서 은혜의 자리로 부르셨다.라고 밝히고 있다.

4단계를 밀리오리는 3단계로 이야기한다. 그는 프린스톤에 신학학자인데도 불구하고 3단계로 이야기한다. 이유가 뭐냐하면 밀리오리도 효과적 부르심을 빼먹었다. 웨슬리주의를 강조하는 바탕으로 세상이 흘러가다보니 3단계로 만든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어느 교단이든 다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화는 어떻게 하겠는가? 구원의 단계로 어떻게 교인들이 살아가야 하나? 성화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나? 교회가 윤리 문제를 어떻게 설교하나? 기도만 하라. 교회 헌금 많이 하라고만 이야기해서 되나? 생활의 문제를 어떻게 성화 아니면 기독교인의 삶하고 연결해서 이야기를 할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 밀리오리가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소요리문답에서 성화를 보면 35문에 있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사역으로서 우리의 영육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새로워지며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새로워지며 죄에 대하여 주곡 의에 대하여 살수 있게 하기위해서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40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소요리문답 1/3이상을 차지하면서 답하고 있다.

밀리오리는 불행하게도 이 십계명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교회도 십계명에 소홀하게 대하고 있다. 어째든 종교개혁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십계명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문답을 보게되면 성화의 방법으로 십계명의 방법을 따를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야하는데 그 행동이 바로 십계명의 삶이라는 것이다.

 

구원받은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지금까지 강조해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루터교도 마찬가지다. 감리교도 마찬가지다. 윤리의 기본은 십계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에서는 너무 약해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기독교인들이 표리가 부동하고 말만많지 행동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대소요리 문답을 볼때 구원의 질서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하고 있고 , 감리교에서는 강조하지 않는 효과적 부르심을 강조하면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그 다음에 성화를 이야기하고 성화의 방법,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까지 이야기해 주어야 하고 그 삶의 원리로 십계명을 제시한 전통이 있는데 밀리오리마저도 이것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십계명을 설교하고 싶으면 대소요리 문답이 잘 드러내고 있다. 각 계명에서 두가지 진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을 보면 그 답이 잘 나와 있다. 먼저는 부정적인 것을 이끌어 낸다. 살인을 안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인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고, 생명이 제대로 역할을 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긍정적인 의미까지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다.

성화는 양적이고 상대적인데 반해서 처음에 이루어진 성화는 질적인 성화로 보고 할때에 개혁교회에 요리문답은 감사의 생활을 많이 강조해 가는 것이다.

옛날에는 거룩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교회법을 어겼을때에 성찬을 받지 못하게 했고 출교가 있었다. 지금은 가능하지 않다.

한국 개신교의 문제는 할 것 다 한다. 여기에 벌칙구조가 약하기 때문에 목사들의 말이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발란스,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개신교인들이 자살을 많이 하는 이유? 결국은 개신교는 말하는 것하고 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제도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끌여들여서 통합을 이룬다면 개신교인들이 자살이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는 하지만 제도적으로 결국은 소외받는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자살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가장 예민하고 사회문제를 잘 느끼는 사람들이기에 저들을 품을줄 알아야 한다. 작성자 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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