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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히브리 식물 및 문화

by 은총가득 2021. 1. 14.

이스라엘의 동지와 하지에 피는 꽃

 

투베아브 - 하지,

투베슈밧 - 동지

 

이스라엘의 일 년 주기를 나누는 두 가지 절기가 있는데, 이는 ‘투베아브’와 ‘투베슈밧’이다. ‘투’라는 것은 15를 의미하는데, 이는 각각 아브 월 15일과 슈밧 월 15일을 의미한다. 아브 월과 슈밧 월은 유대 달력의 이름인데, 아브 월은 8월경에 슈밧 월은 2월경에 각각 해당한다. 두 개의 절기는 한국의 하지와 동지에 해당하는데, ‘동지’를 지나면서 해가 점점 짧아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는 ‘투베아브’를 지나면서 해가 점점 짧아지고 ‘투베슈밧’을 지나면서 해가 점점 길어진다.

 

투베슈밧과 이스라엘 들판의 변화

 

투베슈밧을 지나면서 이스라엘은 낮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여름이 가까워짐을 느낀다. 또한 들판의 꽃들은 붉은 꽃들이 만발한다.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 주의자들은 투베슈밧 전야에 4잔의 포도주를 마시는데, 이는 백포도주에서 점점 적포도주로 색깔이 바뀐다. 슈밧 월의 전 달인 테벳 월(1월 경)에 이스라엘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이스라엘의 나무들이 대부분 잎이 떨어지고 유독 하얗게 보이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후 슈밧 월을 지나면서 이스라엘의 자연은 흰색에서 붉은 색으로 그리고 점차 자색으로 변화한다.

스가랴서 본문은 황폐화된 죽음의 정적으로 묘사된 겨울 동면기의 이스라엘 자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또한 흰말, 붉은 말, 자색 말은 슈밧 월을 기준으로 점차 변화해 가는 이스라엘의 자연과 들판을 묘사한 것이다. 화석류 사이에 선 하나님의 사자는 불멸을 상징하는 화석류와 하나님의 이미지를 연결시킨 것이다.

 

“다리오 왕 이 년 십일 월 곧 스밧 월 이십사 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그들이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구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슥 1 : 7-12)

 

투베아브와 실로의 포도원 축제

 

투베아브가 지나면서 태양빛은 점차 약해지면서 낮 시간이 짧아지고 우기가 가까워 옴을 느낀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들판은 흰색의 꽃들이 만발한다. 습도가 증가하면서 나무의 껍질에는 해충이 만연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밀과 보리의 추수를 끝낸지 오래이고 본격적인 여름 실과를 따기 전의 농한기이다.

성서시대에 이스라엘의 젊은 남녀들은 투베아브에 포도원과 올리브 과수원에서 ‘남녀 짝짓기’가 이루어 졌다. 여자들은 흰옷을 입고 포도원에 모이고 우리나라의 강강수월래와 같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춘다. 이때 남자들이 찾아오고 선남선녀들의 짝짓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별히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성막이 있던 실로에서의 포도원축제는 무척 유명했다. 대부분 각 지파 내에서 결혼이 이루어지던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인 실로의 축제에는 열 두 지파에서 온 선남선녀들이 다 모였고, 예외적으로 지파의 경계를 벗어나 마음에 드는 짝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던 것이다.

에브라임의 첩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이스라엘은 내전으로 치닫고 결국 베냐민 지파는 600명만 남기고 전멸하게 되었다. 이 때 열 한 지파는 600명의 베냐민 남자들을 위해 400명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처녀로 충당하고 나머지 200명은 실로의 포도원 축제에 찾아 온 여자들을 ‘처녀보쌈(?)’ 함으로서 채웠던 것이다.

“또 가로되 보라 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편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다 하고 베냐민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보다가 실로이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호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삿 19:21)

 

투베아브가 지나면서 피는 꽃

 

1. 이슬 꽃

 

투베아브가 시작되면서 이스라엘의 산천에 동시다발적으로 피는 꽃이 있다. 이 꽃은 히브리어로 ‘하짜브’라고 한다. 산지와 계곡, 그리고 평야 등 작지만 지형적인 다양성이 많은 이스라엘 전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피는 꽃은 그렇게 흔치 않다. 이는 각 지형마다 날씨와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짜브는 투베아브가 시작되면서 전 이스라엘에 동시적으로 만발하는데, 이는 투베아브와 함께 이스라엘에 이슬이 많이 내리고 습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슬과 습기가 하짜브의 만발을 초래하기 때문에 하짜브를 ‘이슬 꽃’(dew stalk) 또는 ‘습기 꽃’(moisture stalk)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샤론의 꽃

 

이 시기에 서부 해안 평야, 그 중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샤론 평야’에서 피는 꽃이 있다. 이 꽃이 찬송가에 ‘샤론의 꽃’(white sand lily)으로 등장하는 꽃이다. 히브리어로 ‘하바쩰레트 하샤론’이라고 하는 이 꽃이 아가서에 나오는 ‘사론의 수선화’이기도 하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아가서 2:1)

 

3. 골짜기의 백합화

 

또한 히브리어로 ‘나르키스’로 불리는 꽃이 있는데, 이 꽃은 골짜기의 백합화로 성경에 등장한다. 또한 히브리어로 ‘호아흐’로 불리는 가시나무 사이에 주로 자라기 때문에 가시나무와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아2:1)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아2:2)

 

4. 수전절의 촛대

 

우리에게 크리스마스 명절에 해당하는 유대인의 절기 중에 수전절이라는 절기가 있다. 이 때는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4세가 더럽힌 성전을 다시 회복하고 하나님께 봉헌한 날이므로 ‘성전봉헌절’러 불리기도 한다. 히브리어로 ‘하누카’로 불리는 수전절을 예수님도 지켰고 이 때에 맞추어서 성전에 오셨다. 하누카 즈음에 꽃가루의 보호를 위해 꽃잎을 모으고 있는 꽃이 Crocus인데, 이 꽃은 하누카 때 피우는 하누카 촛대의 모양과 무척이나 흡사하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요 10:22)

 

광야의 음료수

 

“다윗은 광야에서 어떻게 물 문제를 해결했을까?”

 

광야를 지나는 나그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다. 사울을 피해 유다 광야를 피해 다니던 다윗과 그의 추종자 600여 명이 광야에서 맞 부디친 최대의 위기는 다름이 아닌 물 문제였다. 광야의 도망자였던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마셨을 물에 대해서 많은 식물학자들이 재미있는 의견을 제시했는데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광야를 지나다 보면 곳곳에 고인 물들을 발견하는데, 이 물들을 그냥 마셨다가는 배탈로 고생하기 십상이다. 간혹 급성 장염으로 탈수에 빠져 수분 보충을 할 수 없는 광야에서 자칫 운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 광야에서 만나는 고인 물들은 각종 유기물 번식으로 마실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aster tea라는 식물을 넣어서 끓여 먹으면 유기물로 인한 뱇탈을 막을 수 있다. 이런 식물들은 광야를 오랫동안 여행한 사람들만이 아는 노하우이다.

또한 white squill이라는 식물의 잎에는 광야의 밤을 지나 새벽이 되면 상당히 많은 이슬이 내린다. 이 식물에 내린 이슬을 받으면 족히 한 컵 분량의 신선한 음료수가 된다. 광야를 헤매던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은 아마도 이 식물에 내린 이슬을 받아먹었을 것이다. 또한 aster tea를 넣어 광야의 수많은 고인 물들을 끓여 먹었을 것이다.

 

출처 : 이스라엘 투데이 Decem

요담과 가시나무

 

1. 악한 왕의 대명사, 가시나무와 아비멜렉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삿 9:14,15)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한 세겜 주민들을 향해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외친 요담의 ‘나무의 비유’는 잘못된 왕을 추대한 백성들이 당하게 될 고통과 비참한 결과를 암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올리브 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를 순서대로 찾아간 나무들은 세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모두 거절하자 마지막으로 찾아간 나무가 가시나무였다. 가시나무는 자신을 기름 부어 왕으로 삼고자 하는 나무들에게 왕이 되기 전에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이는 가시나무 그늘 밑에서 편하게 쉬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수하에 들어 철저히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고 위협과 협박을 하고 있다.

 

왕정체제의 허와 실

 

사사기는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배경으로 ‘누가 진정한 왕인가’를 다루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싼 이방 국가들은 왕을 세워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열 두 지파 체제를 고수하며 국가적 위기의 때에만 사사들이 등장해 다스리는 철저한 지방분권 정치를 펴고 있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다스리는 신정국가를 세우기를 원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주변 왕국들의 위협 앞에 자신들도 열방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달라고 사무엘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왕의 제도가 갖는 실상과 허상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면서 그래도 왕을 원하는가 하고 백성들에게 물었다. 왕을 세우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위한 군대에 강제 징병당할 것이고 과중한 세금을 내야 할 것이다. 왕이 자신들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왕정’ 자체가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희생과 출혈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개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휘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의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삼상8:11-18)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왕정체제

 

기드온의 아들로서 자신의 형제 70명을 한 바위 밑에서 모두 죽인 아비멜렉은 인면수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었다. 가시나무가 온통 가시로 덮여있듯이, 아비멜렉은 악한 행위로 덮여 있었다. 그는 결코 선한 왕과는 거리가 악한 자이었지만, 세겜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한다.

가시나무는 철저히 자기의 수하에 들어와 복종할 것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 백향목을 다 태워버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면 ‘가시나무에서 나온 불이 레바논 백향목을 태워버린다’는 말은 무슨뜻일까?

이는 가시나무와 백향목이 자라는 지역을 알아야 한다. 두 나무는 서로 다른 지형에서 자라는 대조적인 나무다. 가시나무는 주로 평지에서 자라고, 백향목은 산지에서, 그것도 이스라엘 북쪽의 레바논 국경 산지에서 자란다. 그런데 가시나무에서 나온 불이 레바논 백향목을 태워버린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잘못된 왕을 세운 파급효과가 전체 이스라엘 국토에 미칠 광범위한 재앙을 초래할 것에 대한 상징이었던 것이다. 가시나무의 불이 이스라엘 전 국토와 함께 이스라엘의 전동적인 북쪽 경계인 레바논 산맥에까지 미쳐 그곳의 백향목까지 태워버린다니... ‘왕정’이라고 하는 이방의 국가체제가 가지고 있는 실상과 허상이 잘 보이는가?

 

또 다른 가시나무

 

요담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나무의 또 다른 후보로서 ‘이크샤트’라고 하는 나무가 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아타드를 요담의 가시나무 후보로 보지만, 이스라엘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시나무가 이크샤트이기 때문에 종종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크샤트와 구별되는 아타드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성서 본문에 부합되는 나무가 바로 아타드 밖에 될 수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크샤트는 ‘활’을 의미하는 ‘케셰트’에서 온 단어인데, 이는 이크샤트의 생긴 모양 자체가 활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가지들이 얽히고 섥혀서 왠만한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정적을 유지하는 독특한 나무이다. 보토 0.5-2m까지 자라는 이크샤트는 성서시대에 효과적인 담장으로 사용된 나무이다. 가시가 많아 이스라엘에서도 가시나무로 불린 이크샤트가 요담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나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첫 째로 이크샤트는 좋은 그늘을 제공하는 아타드와 달리 그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본문의 가시나무는 내 그늘을 제공하지 않는다. 본문의 가시나무는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고 말했는데, 이는 가시나무가 좋은 그늘을 제공하는 특성이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로 이크샤트는 가지에 수액이 많아서 왠만해서는 불이 붙지 않는다. 가지 끝에 불을 붙여도 그 불이 끝까지 타들어자지 않고 중간에 꺼져버린다. 이와 달리 아타드는 불을 붙이면 나무 전체가 금방 타들어가고 주변의 나무들까지 삽시간에 태워버린다. 이런 이크샤트의 특성은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와 레바논 백향목을 태운다’는 본문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2. 긴 장례행렬이 한 번 쉬어 가는 정거장

 

요담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나무는 히브리어로 ‘아타드’라고 한다. 이는 요단 계곡과 평야를 중심으로 잘 자라며 큰 나무로 자라 넓은 그림자를 제공해 주는 나무다. 성서시대에 밀밭 사이에 주로 자라던 아타드는 추수하는 농부들의 좋은 휴식처였다.

지금도 아랍 속담에 ‘아타드 그림자 밑에서 먹고 낮잠을 잔다’는 말이 있는데 좋은 그늘을 제공하는 아타드에 대한 상징이 현재에까지 내려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장례 행렬은 죽은 장소에서 무덤까지 향하는 중간에 몇 번 쉬는 장소가 있는데 이는 주로 아타드 나무 밑이었다. 좋은 그늘을 제공하는 아타드는 긴 장례 행렬이 한 번씩 쉬어가는 좋은 정거장 역할을 한 것이다.

이집트의 나일강 하류의 동쪽인 고센 땅에 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곱의 시체를 그의 유언대로 조상의 무덤이 있는 헤브론으로 향하던 야곱의 장례 행렬은 요단강을 건넌 후 아닷 타작마당에서 쉬었는데, ‘아닷’은 바로 아타드 나무를 의미한다.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는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위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떼와 소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그들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호곡하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비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창 50:7-10)

 

3. 예수님의 가시면류관

 

아타드는 가지의 수많은 가시들로 인해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을 만든 나무의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그래서 히브리어 이름을 아타드인 가시나무는 일명 ‘Christ's thorn’으로 불린다. 정확한 학명은 ziziphus spina-christi이다.

출처 : israel today October 2010  중 류모세

 

 

소돔의 사과

 

소돔과 함께 저주받은 ‘소돔의 사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 17:5,6)

 

본문은 사람을 의지하는 자의 허망하고 헛된 결과를 ‘사막의 떨기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사막의 떨기나무로 번역된 이 나무는 사해를 중심으로 한 요단 계곡의 광야, 즉 아라바 광야를 따라서 자라는데, 이 땅의 특징은 사해의 소금 기운으로 인해 땅 자체에 소금 기운이 많은 ‘건건한’ 땅이라는 것이다.

‘사막의 떨기나무’로 번역된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소돔의 사과’로 불리는 나무다. 여리고를 중심으로 한 아라바 광야를 따라 운전하는 사람들은 소돔의 사과를 자주 볼 수 있다. 이 나무를 ‘소돔의 사과’라고 부르는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때에 함께 ‘저주받은’ 나무라는 전승 때문이다. 소돔의 사과처럼 인간을 신뢰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본문은 선포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의 탄식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시 102:17)

시편 본문에 ‘빈궁한 자’로 번역된 단어는 소돔의 사과를 가리키는 식물이다. 소돔의 사과는 히브리어로 ‘아르아르’라고 하는데, 이는 ‘상소, 탄원’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사실 이런 히브리어 원어를 한국말로 번역하고자 할 때 가장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빈궁한 자’로 완전히 의역이 되었지만 그 히브리어 원어는 ‘소돔의 사과’를 가리키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소돔의 사과는 사과처럼 커다란 열매를 맺지만 먹음직스러운 그 열매를 따서 보면 실제로 열매 안이 텅 비어있고 솜처럼 하얀 실들만이 가득 차 있다. 소돔의 멸망과 함께 저주 받기 전에는 물론 이렇지 않았겠지만 참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허망함’과 ‘안타까움’만을 안겨주는 열매이다.

 

소돔의 사과는 넓은 잎과 하늘을 향해 벌어진 꽃의 모양이 마치 하늘로 두 손을 벌리고 구속의 날을 탄원하며 절규하는 듯 한 이미지를 준다. 그래서 시편 시자는 하나님께서 멸시치 않으실 ‘빈궁한 자’의 기도로서 소돔의 사과를 떠올렸는지 모른다.

인류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인해 함께 저주받은 소돔의 사과는 인류의 최종적 구속과 구원을 함께 목 놓아 기다리며 절규하는 모든 ‘피조물들의 탄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나무인 것이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0)

 

*

솥단지와 가시나무

 

성경에 등장하는 또 다른 가시나무가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씨림’으로 불리는 가시나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씨림’이 바로 히브리어로 ‘솥단지’를 뜻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씨림은 각각의 꽃이 4.5개의 꽃받침으로 싸여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솥단지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씨림은 자라는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의 형태를 보여준다. 습하고 그늘진 곳에서 자란 씨림은 일 년 내내 초록색 잎이 무성하고 가지에 달려있는 무성한 가시들은 찔려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광야의 태양과 바람 속에서 자라는 씨림은 많은 기간 동안 잎이 없고 단단한 줄기와 함께 찔리면 무척 아픈 가시들을 소유하고 있다.

 

솥 밑에서 타는 또 다른 솥단지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 되니라”(전 7:6)

 

씨림은 불이 잘 붙고 주변을 삽시간에 태우는데, 특별히 탈 때 내는 탁탁거리며 요란한 소리로 유명하다. 마치 한국에서도 예전에 솥단지 밑의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땔감들이 탁탁거리며 타는 것과 흡사하다.

전도서 가지는 우매자의 웃음소리를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에 비유하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수다를 떨며 깔깔대며 웃기에 바쁜 어리석은 우매자의 웃음소리를 솥단지 밑에서 타는 씨림의 요란한 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솥단지를 뜻하는 ‘씨림’의 가시나무를 솥단지를 끓이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도서의 본문도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위드플레이에 해당한다.

 

악인에게 임할 심판과 분노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더웁게 하기 전에 저가 생 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 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시 58:9)

 

시편 기자는 부정과 불의를 일삼는 악인들에 대한 분노를 불이 붙으면 삽시간에 버져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가지나무 불로서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는 두 가지 형태의 씨림이 나오는데, ‘생 것’과 ‘불붙는 것’이 그것이다. ‘생 것’은 습한 곳에서 자라서 초록색 잎을 가진 씨림을 말하고, ‘불붙는 것’은 광야에서 자란 완전히 말라버린 억센 가시를 가진 씨림을 말한다. 즉 인정사정 가를 것이 없이 모든 것을 삽시간에 불태워버리는 가시나무 불처럼 악인에게 임할 심판과 분노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삽시간에 타버릴 니느웨

 

“가시덤불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같이 취한 그들이 마른 지푸라기같이 다 탈 것이어늘”(나 1:10)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면서 불이 붙어 삽시간에 타버리는 씨림을 언급하고 있다. ‘엉킨 가시덤불’(tangled seerim)은 바로 씨림을 말하며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실 때 씨림이 마른 지푸라기같이 다 타버리듯이 그렇게 맹렬한 진노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에돔에 대한 철저한 심판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시랑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사 34:13)

 

이사야는 에돔에 대한 완전한 심판을 예언하면서 에돔 궁궐에 씨림이 자랄 것을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경작하지 않은 땅에서 자라는 것이 씨림이다. 농부는 경작지나 포도원을 만들 때 가장 먼저 곳곳에 자란 씨림을 제거하는 작업부터 한다. 에돔이 심판을 받아 그 궁궐이 황폐화 될 것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씨림이 자란다는 것은 곧 에돔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담벼락 위에 자란 가시나무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호 2:6)

 

성서시대에 유대인들은 포도원의 둘레를 막은 돌 담벼락 위에 자란 날카로운 가시나무로 인해 양과 염소들이 담을 넘어 포도원으로 들어와 포도원이 황폐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이러한 씨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유로서 예언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담벼락의 모든 씨림을 불 태워 그들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실 것이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씨림이 그들의 장벽과 울타리가 되어 길을 찾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비유적 예언이었다.

 

* 출처 : 이스라엘 투데이 열린다 성경 - 식물이야기 류모세

 


이스라엘 장례문화

 

(1) 유대인의 장례식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선행은 무엇일까?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장례를 돕는 일이다. 죽은 사람을 돕는 일은 보상을 바랄 수 없는 선행이기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선행으로 기려진다. 많은 선행이 경우에 따라 보상이 가능하나, 죽은 사람에게 하는 선행은 보상을 전혀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운구(運柩)하는 일이나 시신 (屍身)을 땅에 묻는 선행을 그중 으뜸으로 친다. 죽은 사람에 대한 일체의 장례 행사는 죽은 이가 속해 있는 유대 공동체의 책임이다.

 

헤브라 카디샤

 

사람이 죽었을 경우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헤브라 카디샤(Holy Brotherhood)'라고 불리 우는 장례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거룩한 친구들'이란 뜻이다. 전통적인 유대인의 장례식은 이 '헤브라 카디샤'에 의하여 진행된다. 구약 시대의 장례식은 고인(故人)의 직계 자손은 물론 그가 속하여 있는 온 동네 사람들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이 기간 동안 동네의 모든 행사는 중단되었으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마을의 규모가 커지며 온 동네 사람이 다 장례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장례식을 위하여 특별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구성되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 '헤브라 카디샤 (거룩한 친구들)'라고 불렀으며, 역사문헌에 알려진 최초의 '헤브라 카디샤'는 16 세기 프라그에서 발견된다. 프라그 문헌에 의하면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장례 시 '헤브라 카디샤'에 의하여 매장(埋葬)되었으며 매장될 무덤까지도 그들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당시 유대법은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일체의 장례비용도 헤브라 카디샤에 의하여 충당되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자기가 헤브라 카디샤의 일원으로 뽑히는 것을 큰 기쁨과 영광으로 여긴다. 신실하고 덕망있는 사람만이 뽑혔기 때문이다.

 

헤브라 카디샤는 이익을 남기는 조직체가 아니요 순전히 이웃을 돕기 위한 자원단체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헤브라 카디샤는 어려움을 당한 형제를 돕기 위한 모임으로 장례식 외에도 여러 경우에 형편에 따라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조직되었다. 최근엔 유대인 사회에도 상업적인 장의사가 생겼지만 이는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이익을 남길 수 없다는 유대 전통에 어긋난다.

 

임종(臨終)의 순간

 

유대인들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임종자의 방을 떠나는 것은 죽는 사람에 대한 모독(冒瀆)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면 절대로 그의 방을 떠나지 않으며 임종을 지켜봄으로써 죽는 이에 대한 최대의 경의(敬意)를 표한다. 임종자는 임종의 시간이 다가오면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죄 사함의 고백을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나의 하나님, 나의 열조의 하나님, 제가 당신 앞에 고백하오니 저의 회복과 죽음이 당신의 손에 달렸습니다. 당신의 뜻이라면 저를 완전히 고쳐주옵소서. 그러나 제가 죽어야한다면 저의 죽음이 제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속죄가 되게 하옵소서." 임종자의 고백에 임종자를 보내는 친지들은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복되시다 당신이여, 당신은 주되신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주의 왕 이시요, 진실한 심판자시니이다."

 

크리아

 

임종자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그의 유족들은 유대의 전통에 따라 그들의 겉옷을 찢으며 슬픔을 표시한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유족은 사망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옷을 찢으며 슬픔을 표한다. 최근에는 장례식에서도 옷을 찢는다. 이 전통은 구약성서에 근거한다. 야곱은 요셉의 피 묻어 찢긴 옷을 보았을 때 그의 아들이 죽었다고 판단되자 겉옷을 찢으며 울었다.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도, 가족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욥도 겉옷을 찢으며 울었다 (삼하 1:11; 욥 1:20). 이 옷을 찢는 행위를 가리켜 '크리아'라고 하며 찢겨지는 옷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크리아를 행하는가? 고인의 아들, 딸,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아내나 남편이 이에 해당된다. 최소한 십 삼세를 넘은 성인이어야 하며 미성년자는 친지들이 대신 옷을 찢어준다. 고인과 이혼한 사람은 본인이 원하면 옷을 찢을 수 있으나 의무는 아니다. 사위나 며느리는 친 부모가 반대하지 않는 한 크리아에 참여할 수 있다. 결혼한 지 일주일 미만의 신혼부부는 옷을 찢지 못 하게한다. 어떤 슬픔도 그들이 누려야 될 신혼의 기쁨을 능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는 전문적으로 곡하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울게 하였으나 이제는 사라진 관습이다.

 

숨이 넘어간 것이 확인되면 고인의 자녀나 친척 또는 친구 중에서 한 사람이 눈을 감겨주고 입을 닫아준다. 부자연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면 몸을 반드시 눕히고, 팔과 다리를 곧바르게 펴주며, 발을 문 쪽으로 향하게 하여 눕힌다. 이 목적 외에 고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禁忌)로 여긴다. 이상의 정돈이 끝나면 고인의 머리 쪽에 촛불을 켜 놓는다. 어떤 유대인들은 촛불을 시신(屍身) 주위에 삥둘러 켜 놓기도 한다. 촛불이 켜진 후 유족과 친지들은 잠시 고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경건한 시간을 갖는다.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거나 불편하게 한 것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다.

유대인들은 초상집의 모든 거울을 보이지 않도록 덮어씌우거나 보자기 등으로 가리운다. 사람은 죽으면 그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썩기 시작한다. 한쪽에선 사람의 몸이 썩기 시작하는데 산 사람의 몸을 거울로 보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거울을 보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모독이라 여겨진다. 또 한 가지 전통은 하나님의 형상에 관계된 해석이다. 비록 고인이 숨을 거두어 시신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시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졌던 것이며 지금은 그 형상이 부서지고 있는 시간이다.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의 형상을 거울을 통해 본다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생각이다.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임종자가 숨을 거둔 후 무덤에 묻히기까지 절대로 시신을 홀로 방치하지 않는다. 이 기간 동안 시신을 지키는 자는 계속하여 시편을 낭송한다. 시신이 안치(安置)되어 있는 방에서는 일체의 음식이나 음료를 먹고 마시는 행위 또는 흡연은 금기로 여겨진다. 이런 행위가 필요할 경우는 다른 방으로 장소를 옮겨야 된다. 시신이 안치된 방에서는 고인에 대한 어떠한 부정적인 발언이나 비평은 삼가한다. 비록 그 내용이 정당하다 할찌라도 마찬가지다. 고인에 대한 좋은 추억이나 그가 남긴 교훈 등만이 화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장례 절차에 대한 안건은 허용된다. 장례식 기간 동안 유가족에 대한 모든 종교적 의무는 면제된다.

 

타하라

 

유대인들은 새로 태어난 아기를 깨끗이 씻어 세상에 맞듯이 가는 사람도 깨끗이 씻어 세상을 떠나보낸다. 죽은 사람의 몸을 닦는 종교적 의식을 가리켜 '타하라'라고 한다. 유대법에 의하면 모든 유대인은 죽은 후 타하라 의식에 의하여 씻기게 되어있다. 이 의식은 헤브라 카디샤에 의하여 진행되며 사정에 따라 장의사에 의하여 주관되기도 한다. 주관자는 죄에 대한 용서와 영혼의 평강을 위하여 기도하며 몸을 닦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하게 씻기며 임종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행위는 결례로서 금지되어있다. 유족들은 일반적으로 이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유족에겐 너무나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수의(壽衣)

 

탈무드 에 보면 장례식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예전엔 사람들이 상가집에 음식을 가져올 때 의례히 부자들은 금이나 은으로 만든 바구니를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버드나무로 만든 바구니를 들고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나한 사람들은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한 법을 만들었으니 상가 집에 오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버드나무 바구니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예전엔 사람들이 시신을 들고 나올 때 의례히 부자들은 값비싼 천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침대모양의 관(棺) 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나한 사람들은 보잘것없는 들것을 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부끄럽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 법을 만들었으니 모든 상가 집은 간단하고 조촐한 관을 쓰게 하였습니다.

 

예전엔 어떤 집에서는 장례 비용이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보다도 더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장례 비용이 무서워 도망치는 이들도 생겼습니다. 이러한 일은 라반 가말리엘 이 자기가 죽으면 무명수의 한 벌 입혀 조촐하게 묻어달라고 부탁한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 모두는 간소한 장례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위의 탈무드 전통은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 평등함을 가르친다. 유대인의 전통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죽으면 다 똑같은 수의를 입고 묻히도록 규정되어 있다. 라반 가말리엘은 가난한 사람들은 부끄럽지 않으며 부자들은 자만하지 않도록 자기가 입을 수의에 대한 규정을 정하였다. 그 후 그의 장례식은 후대 유대인들에게 기준이 되었다. 이와 같은 탈무드의 전통에 따르면 값 비싼 장례식은 오히려 죽은 이에 대한 예우(禮遇)가 아니다 . 유대법은 수의는 반드시 라반 가말리엘의 전통을 따라 간소한 것으로 사용하도록 가르친다.

 

수의는 보통 무명, 아마, 옥양목을 그 재료로 사용한다. 기준은 셋 중의 하나를 고르되 무명보다 비싸면 안 된다. 수의는 반드시 손으로 직접 만들어야 한다. 색깔은 완전히 흰색을 사용하여야하며 이는 순결과 품위를 상징한다. 죽은 이의 몸은 순결하고 품위 있게 모셔져야한다. 수의에는 어떤 종류의 물품도 그 안에 넣지 못하도록 주머니를 만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재산보다 그의 영혼이 더 중요함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수의를 입힌 후 그가 사용하던 탈릿 을 그 위에 덧 입힌다. 이때 어떤 유대인들은 탈릿의 찌찌트 중 하나를 잘라낸다.

 

관(棺)

 

유대인들은 어떤 관을 사용하나? 관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창세기 삼장 십 구절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말씀에 두고 있다. 흙을 재료로 만들어진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매장(埋葬)의 목적이 屍身이 빨리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있다고 믿는다. 어떻게 하면 시신이 흙으로 빨리 돌아가는가? 빨리 썩어야한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이나 유럽의 일부 유대인들은 관을 사용하지 않는다. 갈대로 엮은 들것 위에 시신을 뉘운 채 그대로 매장한다. 시신이 썩어 빨리 흙으로 돌아가도록 돕기 위함이다.

 

그 밖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사는 자국의 풍속을 따라 관을 사용한다. 그러나 백 프로 나무로 만든 관을 사용하여야만 한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못을 사용한 관이 권장된다. 나무라야 잘 썩기 때문이고 그래야 시신이 빨리 흙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유대인들은 관의 밑 바닥에 작은 구멍들을 뚫는다. 시신이 흙으로 빨리 돌아가기를 돕기 위함이다.

 

장례기간

 

일반적으로 臨終한지 스물네 시간 안에 장례식을 행한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이십 일장 이십 삼절의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葬事)하여"를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혹 멀리 살거나 여행 중에 있는 친인척의 도착을 기다리는 경우 약간의 시간은 연장하기도 한다. 그들의 장례식 참여가 고인에 대한 경의의 표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장례 기간은 한국의 삼일장, 오일장, 칠일장 등에 비하여 그 기간이 매우 짧다. 한국의 경우 고인의 지위가 높을수록 장례식 기간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시신을 장기간 묻지 않은 상태로 두는 것을 고인에 대한 불경으로 여긴다. 흙에서 왔으니 가능한 한 빨리 흙으로 보내주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영혼은 이미 하나님에게로 갔는데 육신은 산자의 땅에 오래 동안 붙잡혀 있는 것이 고인에겐 모독이요 유족에겐 부끄러움이라는 생각이다. 유대인의 전통은 욤키퍼 에 기도하러 가는 제사장이라 할 찌라도 길에서 모르는 사람의 시신을 발견하거든 먼저 그를 매장하고 그 후에라야 기도하러 가라고 명령한다. 이는 죽은 것에 손대는 것이 금지된 제사장에게 이례적인 명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매장 (埋葬)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관을 운반하는 일을 특별히 귀한 선행으로 여겨왔다. 관은 고인의 친구들이 운반한다. 운구야말로 죽은 사람에 대한 마지막 선행이며, 어떤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인의 친구들은 무덤으로 관을 운반할 때 유대 전통에 따라 일곱 번 멈추어 선다. 이는 전도서에 히브리어의 '헤벨'이라는 말이 일 곱번 나오기 때문인데 , 우리말로 '헛되다'라는 뜻이다. 관을 무덤에 놓은 후, "그(녀)가 평강 중에 그(녀)의 자리로 돌아가기를"이라고 낭송한다. 삽으로 약간의 흙을 떠서 두세 번 관 위에 붓는다. 이 때 유가족들은 흙이 관 위에 부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첫 삽의 흙이 관 위에 부어지는 소리는 유가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인과의 영원한 이별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스라엘이 아닌 나라에서는 고인이나 유족들의 願에 따라 성지 이스라엘의 흙을 구하여 下棺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

 

하객들은 관이 완전히 흙으로 덮히기 까지 무덤을 떠나지 않는다. 관이 흙에 덮여 보이지 않게 되면 자유롭게 무덤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무덤이 완전히 흙으로 메워지기까지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관례이다. 무덤을 떠난 후 유대의 결례(潔禮)에 따라 손을 씻는다.

 

가까운 친척들이나 친구들은 이 기간 동안 유족을 방문하여 그들을 위로한다. 유족들은 집에 촛불을 밝히며 이발이나 목욕을 금한다. 화장품을 사용과 가죽 제품의 사용을 금한다. 예를 들어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을 수 없다. 의자에 앉는 것도 금한다. 그러나 등 없는 낮은 걸상에 앉는 것은 허용한다. 사업 문서에 서명하지 못하며, 목욕도 하지 못하며 심지어 토라를 공부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엔 집을 떠나서도 안 된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상가집을 방문 하였을 때 유족이 먼저 말을 걸지 않는 경우 외에는 방문자가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칠일의 기간이 지나면 첫 번째 맞는 안식일에 회당에 나간다. 회중들은 개회 찬송을 부른 후 유족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한다. "주께서 시온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슬퍼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기를!" 이 인삿말은 '시바' 기간 동안 유족의 집을 방문할 때도 사용한다. 장례식 후 칠일이 지난 후 유족을 다시 직장에 출근한다.

 

장례식후 삼십일 (쉬로심)

 

'쉬바 (칠일)'가 지난 후의 삼십일 기간을 가리켜 '쉬로심(盒余勖 )'이라 하며 우리말로 '삼십일'이란 뜻이다. 쉬바가 끝나면 정상적인 직장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후 삼십일 기간 동안 아직도 유족으로서 지켜야할 사항들이 있다. 이 기간 동안 유족은 일체의 축하 파티에 가는 것을 금한다. 댄스파티, 생일파티 등이 이에 속하며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살한 사람에 대해서는 '쉬바'나 '쉬로심' 모두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깨뜨린 사람에게는 어떤 형태로건 존경이나 추모행위가 금지되어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경우

 

부모님의 喪을 당했을 경우엔 십 일개월 동안 회당에서 모든 공 예배 시간에 기도문을 낭송한다. 이 기도문을 가리켜 '카디쉬'라고 한다. 내용은 공평하신 하나님과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원래 카디쉬는 게힌놈의 고통으로 부터 부모의 영혼을 구원하기위해 일 년동안 유족에 의해 기도로 낭송되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죽으면 먼저 게힌놈에 들어가며 악인의 경우 그 악한 정도에 따라 최소 일 년이상 그곳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후대에 자기의 부모가 악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십 일 개월로 그 기간을 줄였다.

는 날로 삼는다. 이 날은 스물네 시간동안 촛불을 켜 놓고 카디쉬(기도문)를 읽는다. 기일 외에도 유대의 모든 주요 경축일에 고인을 追慕한다.

 

비석 (碑石)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碑石을 세워준 전통을 좇아 (창 35:20) 유대인들은 구약시대로 부터 비석을 세워왔다. 碑文은 어떤 내용을 택하는가? 이스라엘의 경우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쓰여진 시편 119편을 그 내용으로 채택한다. 그러나 시편 119편의 시 전체를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고인의 이름의 히브리어의 알파벳에 해당하는 싯귀만을 택한다. 여기에 영혼을 뜻하는 히브리어 '니샤마 ( 琮賊 )'의 히브리어 알파벳 , , , 에 해당하는 싯귀를 추가한다. 따라서 비석에 쓰여진 싯구의 각행의 첫 번째 알파벳을 합하면 '고인의 이름 + 영혼' 이 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편이나 그 밖의 성구를 비문으로 사용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고인이 죽은 지 일 년 안에 비석을 세우는 것이 관례이나 이스라엘에선 보통 삼십일 이내에 세운다.

 

검시(檢屍)

 

유대법은 사망원인 조사상 어쩔 수 없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체해부(屍體解剖)를 금한다. 살해당했거나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 자살했거나 자살한 가능성이 있는 경우, 범죄 여부를 가리기 위해 부검(剖檢)은 피할 수 없다. 유대법은 위의 경우와 더불어 인공유산으로 인한 사망, 사고사, 독극물에 의한 사망의 경우 등에 한하여만 부검을 허락한다. 그 외의 경우는 부검을 허락하지 않는다.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해부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며, 死體는 비록 그 영혼이 떠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에 그 형태가 인위적으로 훼손되면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인간에 대한 전인적인 존중은 그의 영혼뿐 아니라 그의 몸도 존중될 때 비로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인간에 대한 전인적 존중은 그가 죽은 후라고 해서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 유대인의 死體에 대한 견해이다.

 

화장(火葬)

 

유대법에 따르면 시신은 반드시 땅에 묻혀야 한다. 그러므로 火葬은 법으로 금한다. 고인이 화장을 원했다 할지라도 이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으로 간주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 화장한 사람에 대해서는 일체의 추모의식도 행하지 않으며 화장 후 남은 유골(遺骨)을 땅에 묻고자 할 때 묘지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대인 전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당일 해가 지기 전에 시신을 땅에 묻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만약 가족이 시신을 확인할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경우, 매장일을 연기해도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빠져나가기 때문에 빈 몸통 안으로 야간에 악령이 들어간다고 하는 믿음에 기인한다. 그래서인지 툭하면 테러 또는 군 작전 수행 과정에서 희생되는 사망자들의 장례가 대부분 그 다음날에 많이 치루어진다.

 

* 무덤의 종류

 

1. 천연 동굴을 이용하거나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을 이용하였습니다.

 

가) 굴을 이용한 경우

이스라엘의 산악지대는 거의 다 석회암, 백악질, 사암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비가오면지하로 스며든 물로 석회가 녹아서 크고 작은 굴들이 산기슭이나 언덕기슭에 천연적으로 많이 생겨 굴이 많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요11:38)도 이런 경우로 보입니다.

 

나)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

부유한 사람의 경우에는 바위를 파서 무덤을 만들었는데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도 이런 경우입니다. (마27:60)

묘를 팔 때는 언덕 기슭을 옆으로 파 들어가서 대를 만들어 시체를 안치하고 사람들이 출입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장사를 지낼 때 중앙의 묘는 비워 놓았다가 더 필요할 경우 그 중앙에 위치한 묘터를 뚫고 들어가서 다시 네모난 묘실을 만들어 땅속에서 개미집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2. 무덤을 막는 돌문

 

묘지의 돌문은 자동차 바퀴같이 둥근 모양으로 높이는 대개 1미터 정도이고 두께는 두 뼘쯤 됩니다. 이 돌문은 자연히 닫히도록 고안되어 있는데 옮길 때는 여러 사람이 약간 비스듬한 윗 쪽으로 밀어 올려 놓고 쐐기를 박아 구르지 못하게 하였다가 쐐기를 빼면 저절로 닫히도록 해 놓았습니다.

 

3. 시체와 관

 

유대인들이 시체를 묘지에 안치 할 때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시체를 세마포에 싸서 시체를 놓는 곳에 그냥 안치하는 경우와 둘째는 관을 넣어 장사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첫번째 방법으로 장사된 것으로 보입니다.(눅23:53 , 막15:46, 마 27: 50, 눅24:12, 요 20:6) 또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여겨집니다.(요 11:43-44)

 

* 출처 :지리로 본 성서의 세계(이희철 저, 생명의 말씀사):

blog.naver.com/ahav_yeshua/50085867176

 

“아버지(아브)”

 

인간이 타락함과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권한과 주권이 아담에게서 사단에게 넘어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상의 모든 주권과 권한을 맡기셨다. 하지만 인류의 첫 조상, 처음의 아버지 아담의 범죄 함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가 마귀의 자녀로 전락한 사건이 발생되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아닌 마귀의 자녀가 되었다고 성경은 정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셨다. 때문에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 ?(알렙)으로 시작하는 첫 단어가 바로 ba (아버지 - 아브)이다. 히브리어의 모든 단어에는 숫자로 순서가 정해져 있다. 그 중 가장 첫 번째, 1번이 바로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이다. ?(알렙)으로 시작하는 다른 단어에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아도나이’, ‘엘로힘’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도 있다. 하지만 ‘아브’라는 것을 제일 처음 언급하신 것은 ‘하나님도 결국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단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의미를 훼손시키고 변질시켰다. 전능하시고 살아계시며 사랑과 공의의 아버지의 이미지에서 공포와 폭력, 정죄의 아버지의 이미지로 온 인류 가운데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정을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맡기셨다. 또한 그의 선민 이스라엘의 출발도 믿음의 조상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맡기셨다. 하나님께서는 가장을 통하여 집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 가장은 가정 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주권을 사용하여 가정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법으로 이끌어갔다.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기 원하시는 아버지는 과연 어떤 형상일까? 성경을 통하여 신 ,구약에 흐르고 있는 아버지의 형상을 알아보기 원한다.

 

1. 아버지 - ‘아브’의 원어적 의미

(원어)

1. “아버지”(ba;' : 아브) - ‘아버지 father, 조상, 열조’

 

2. ?(알렙)으로 시작하는 다른 중요한 단어들

(원어)

1. “아담”(!d;a; : 아담) - ‘아담, 인류, 인간’

2. “아도나이”(yn;doa} : 아도나이) - ‘나의 주 my Lord, LORD’

3. “하나님”(!yhiOla> : 엘로힘) - ‘하나님, 신들’

- 그 외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많은 단어들도 알렙으로 시작되어진다.

 

3. 창조된 아버지의 형상 vs 망가진 아버지의 형상

타락하기 이전 아버지 아담은 지혜의 사람이었으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과 함께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리를 가진 자였다. 그는 인류의 대표로 세워졌으며 인류 최초의 아버지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의 타락이전 하나님 그를 보호하시고 그와 말씀하시고 함께 교제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은 그로 인하여 나타났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개념은 훼손되었으며, 그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귀가 우리의 아버지, 조상이 되어버렸다(요 8장 44절). 그리하여 인류는 타락 이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총에서 벗어나 종신토록 일하고 수고하며 땀을 흘려야만 소산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버지의 형상이 어떻게 마귀의 형상으로 전락했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①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아버지 아담

② 하나님께서 주신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렸던 아버지의 형상

③ 범죄 함으로 잃어버린 아버지의 형상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에서 마귀의 형상으로)

 

① -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버지 아담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을 가진, 가장 흡사한 모습으로 창조하셨다. 때문에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 자체를 가진 완전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었고, 하나님의 지혜도 볼 수 있었다. 즉 최초의 인류의 대표, 최초의 아버지의 형상은 아담을 통하여 나타났는데, 그것은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창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원어)

1. “형상”(!l,x, : 첼렘) - ‘형상 image, 닮음, 허상 ’

2. “모양대로”(tWmD] : 데무트) - ‘닮음, 같은 것(모양), 유사(성), 같은 모양’

 

② - 1. 온 세상의 주권자 아버지 아담(자녀와 땅의 축복을 받은 아버지)

 

하나님은 아담을 단순히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모든 것의 이름을 짓게 하시며, 다스리고 정복하게 하셨다. 작게는 가정의 아내 하와를 다스리게 하시고 크게는 하나님의 집 에덴동산을 맡기셨다. 그의 지혜와 권세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으며, 수치심과 열등의식이 전혀 있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완전한 인간을 모습을 가진 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온전히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고 대화함으로 부족함이 없는 형상을 가진 자였다.

 

(창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원어)

1. “생육하다”(hr;P; : 파라) - ‘열매 맺다, 다산하다, 결실이 풍부하다’

2. “번성하다”(hb;r; : 라바) - ‘많다, 크다, 증가하다, 쏘다’

3. “충만하다”(alem; : 말레) - ‘채우다, 가득 차다, 충만하다’

4. “정복하라”(vb'K; : 카바쉬) - ‘정복하다, 속박하다, 강요하다’

5. “다스리라”(hd;r; : 라다) - ‘밟다, 다스리다, 지배하다’

 

③ - 1. 범죄 함으로 잃어버린 아버지의 형상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에서 마귀의 형상으로)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포기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본인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 죄인의 형상, 마귀의 형상이 그의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처음 생긴 수치심과 열등의식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후 죄에 눈이 밝아져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다. 그 때부터 인간의 자화상과 아버지 상은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집 에덴에서 쫓겨났으며, 수고하고 땀 흘리는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발생되었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집의 주권자 아담에게 그의 아내를 다스리게 하시고, 아내 하와는 그의 남편 아담을 사모하라고 명하심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우신다.

 

(창 3장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원어)

1. “다스리다”(lv'm; : 마샬) - ‘다스리다, 주권을 잡다, 지배권을 가지다’

 

(요 8장 44절) 마귀의 자녀가 되어버린 인간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원어)

1. “나다”(ejstev : 에스테) - ‘너희는 ~이다.’

 

4. 아버지의 형상 회복작전

 

하나님은 아담으로 인하여 망가진 아버지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하여 또 하나의 대표를 선택하신다. 그가 바로 아브람이었다. 하나님은 ‘고귀한 아버지’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아브람을 만나주시고, 그에게 약속을 주심으로 망가졌던 아버지의 형상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로 바꾸어 주시고, 믿음의 시대를 열어 새로운 시작으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다.

그는 아담과는 달리 경외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끝까지 순종하였다. 그는 그의 독자 이삭까지도 하나님 앞에 바침으로 경외하는 자라는 자리에 까지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복원되기 원하셨다. 이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처럼 단순히 믿음의 회복을 의미 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정의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의미와 형상을 알아보자.

 

1. 아버지는 씨(생명)을 주는 존재이다.

2. 아버지는 자녀와 가족에게 말씀과 예배를 교육하는 존재이다. / 섬김

3. 아버지는 자녀와 가족을 다스리며 축복하는 권한을 가진 존재이다.

/ 다스림

(특히, 죽기 전에 자녀를 축복하는 것이 그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하다)

 

① - 1. 아버지는 씨(생명)를 주는 존재이다.

 

아버지의 역할 중 가장 최초의 역할이 바로 씨를 줌으로 자녀를 잉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씨라는 것은 생명, 그리고 족보, 그리고 그의 기업을 의미한다. 특히 장자는 그 기력의 시작으로 하나님께서 굉장히 중히 여기셨고, 씨를 통하여 아들을 낳아 반드시 대를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 가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 하나님은 이유 없이 설정하는 것도 부정으로 취급하실 정도로 아버지의 씨는 굉장히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셨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보증으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 이삭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씨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다.

물론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였다. 그도 또한 그 씨로 큰 민족을 이룬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아들 이삭의 씨로 말미암아 낳는 자가 약속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씨라고 칭함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

 

(창 21장 12절) 약속의 씨 이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창 21장 13절) 아브라함의 씨 이스마엘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원어)

1. “씨”([r'z, : 제라) - ‘씨, 씨 뿌리기, 자손, 소산’

2. “부르다”(ar;q; : 카라) - ‘부르다, 선포하다, 소환하다, 읽다’

3. “이루다”(!Wc : 숨) - ‘두다, 정하다, 임명하다, 확립하다’

 

(창 49장 3절) 장자는 기력의 시작이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원어)

1. “기력”(@/a : 온) - ‘활력, 정력, 재산, 부’

2. “시작”(tyvioare : 레쉬트) - ‘첫째, 처음, 시작, 최초, 최상의 것’

 

② - 1. 아버지는 자녀와 가족에게 말씀과 예배를 교육하는 존재이다.

 

아담이 실패했던 부분이 바로 교육의 부재였다. 아담은 하와를 교육하는 것을 게을리 하였다. 하나님의 들은 말씀을 교육하지 않은 것으로 인한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교육의 부재가 에덴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아버지로서의 목적을 자녀에게 의와 공도를 교육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언급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실하게 교육하시길 원하셨다. 그 결과는 참으로 대단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교육되고 양육된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순종의 아들, 말씀의 아들로 인정되어진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은 그 집의 장자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으며, 아버지가 없이는 온전한 가정으로 인정되지 못하였다.

 

(창 18장 1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세우신 목적(아버지의 회복)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아버지의 의무는 자녀의 교육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녀를 포함한 그의 권속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제사(예배)에 대한 것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회복된 가장, 아버지의 모습이다.

 

③ - 1. 아버지는 자녀와 가족을 다스리며 축복하는 권한을 가진 존재이다.

 

회복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축복하는 모습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결과 그 자체였다. 그 자체가 축복이었다. 축복의 모습은 아들 이삭 때부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야곱의 때에 완성되어 진다. 그 축복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민족의 축복, 즉 야곱의 12아들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선민 국가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이라는 큰 축복으로 완성되어 진다. 다른 축복과 다르게 아버지의 죽기 직전에 이루어지는 자녀 축복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일생 중 굉장히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이다. 그 축복은 장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제사권, 장자권, 축복권이 위임되어 진다.

 

5. 숨겨진 아버지의 역할

 

하나님은 야곱 이 후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언급하시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버지의 두 가지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들이 숨겨져 있다.

 

1. 왕 - 나라의 대표(이스라엘 전체의 아버지)

역할> 다스림, 치리, 교육

2. 제사장 - 하나님 집의 대표(영적인 아버지)

역할> 섬김(예배로 섬김), 교육(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침)

제사 권과 축복 권을 가지고 있다.

3. 삶의 스승, 신앙의 스승 / 본

(빌 3장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하나님은 왕과 제사장, 그리고 각 가정의 가장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고, 이끌어나가신다.

 

6. 주님의 아버지 나라 회복

 

주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끊임없이 말씀하신 것이 바로 성부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에 관한 것이었다. 주님은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끊임없이 나타내셨고, 그 분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기 원하셨다.

 

1. 아버지의 형상 회복의 완성 -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회복되고 완성되어진다. 주님은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가 드러나길 간절히 바라셨다. 그 모습은 성경의 곳곳에서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아버지 형상이 회복된 모습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그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다. 주님도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게을리 하시지 않았으며, 병들고 잃어버린 그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치료하시며 찾아다니셨다.

 

(요 14장 9절) 주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장 24절)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

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 하나님의 집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지으신 예수 그리스도

- 성전 정화사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청소하심으로 변질된 집을 다시 세우신다. 도둑의 소굴과 장사꾼의 소굴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집의 청소는 구약의 교회를 정리하시고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열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집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다시 정의하시고 무너진 아버지의 집의 질서를 다시 세우셨다. 어떠한 하나님의 성전도 하나님 아버지가 없이는 완전할 수 없으며, 어떠한 가정도 가장이 없이는 완전하고 온전하게 세워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장의 법 아래, 가정의 질서 아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세워나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마 21장 13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의 모습은 가장과 가족이, 가족과 하나님의 교제와 대화가 충분히 넘치는 것이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가정이 가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함으로 섬기는 집,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가정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의 모습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가장이 다시 자녀들을 가르치고, 하나님과 그리고 가족들과 교제하고, 자녀와 가족을 축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다.

 

3. 회복된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회복된 아버지의 형상으로 그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과 의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

 

(요 15장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 출처 : "성경문화연구원" -

https://blog.naver.com/ahav_yeshua/50087893885

번역하기

 

히브리 문화로 보는 유대인의 약혼(정혼)

 

주님은 성경 속에서 우리와의 관계를 정혼 관계 혹은 혼인 관계를 통하여 정의하시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의 결혼 문화로 성경을 바라본다면 또 한 번의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경우와 같다.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과 뜻을 알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결혼 문화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정혼과 결혼 문화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성경의 반 이상을 이해 할 수 있는 엄청난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다. 주님은 유대인의 문화로 성경을 기록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그들에 의하여 성경을 기록하셨다. 때문에 그들의 문화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비일비재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 유대인의 결혼문화를 살펴봄으로 그 gap을 한 번 줄여보도록 하자.

 

(원어)

<구약>

1. “결혼”(hl;WlK] : 켈룰라) - ‘신부의 상태나 조건’

2. “약혼”(cr'a: : 아라스) - ‘약혼하다 betroth’

3. “정혼”(jq'l; : 라카흐) - ‘취하다 take, 손에 넣다, 잡다, 붙잡다, 운반하다’

 

<신약>

1. “결혼”(없음)

2. “약혼”(없음)

2. “정혼”(mnhsteuvw : 므네스튜오) - ‘약혼하다, 결혼하다.’

 

성경적인 원어는 ‘켈룰라’로 사용되지만 유대 문화적인 히브리어로 결혼을 ‘키두신’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성화(sanctification)’이라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결혼을 얼마나 신성하게 여기는 지를 말해주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결혼의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라”하신 하나님의 최초의 명령을 수행함에 있다. 유대인은 태어나자마자 8일 만에 할례를 받는다. 이 때 아버지는 할례 받는 아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 기도의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성인이 되어 후파(닫집 모양의 차양)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유대인은 반드시 이 후파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결혼의 중매자(Matchmaker)라고 부른다. 탈무드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쉬고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하시고 계시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짝을 지어주시는 일이다.

 

그럼 결혼의 문화에 앞서 약혼의 문화에 대하여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주님은 우리와 정혼 즉, 약혼을 하시고 아버지 집으로 가셔서 처소를 준비하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재림을 약속하셨다. 재림이란 바로 주님과의 혼인 잔치가 펼쳐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때문에 우리는 약혼의 문화를 알아야지만 주님의 재림을 순결한 신부로서 기다릴 수 있다.

 

1. 약혼

 

약혼의 절차와 문화적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① 신부의 아버지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성경에 약혼에 관한 언급은 단 한 번 나와 있다.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의 약혼이 그것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열 두 세살이 되면 결혼을 시켰다. 혼인 상대자는 자녀들이 아주 어렸을 때 부모에 의하여 이미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약혼 시에 남자는 여자의 집을 찾아가 여자 부모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bride price)을 지불해야 했다. 이것은 몸값의 의미보다는, 지금까지 키워 준 딸을 아내로 주는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값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그 여자를 아내로 얻을 수가 없다. 신랑은 신부 될 사람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야곱은 라반의 두 딸과 결혼하기 위해 14년을 일해야 했다. 이것을 결혼하기 위해 신부의 아버지에게 지불해야 했던 ‘신부 값’ 혹은 결혼 지참금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신부로 맞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 ~ 20).

이렇게 신부의 아버지에게 신부 값을 지불한 신랑 외에는 그 누구도 신부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신부를 위해 값을 지불하였음으로 그녀는 영원히 신랑의 것이 된다.

 

② 포도주를 통한 혼인 언약

여자의 부모가 이 돈을 받으며, 남자가 여자에게 포도주를 한 잔 따라준다. “나는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고 싶습니다. 이 포도주를 당신에게 따라줌으로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당신도 이 잔을 받아 마심으로 나의 아내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여가가 그것을 받아 마시면 결혼을 승낙하는 것이 된다. “이 포도주를 받아 마심으로 나는 나의 생명을 당신을 위해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따라 주시면서 받아 마시라고 하셨다(마 26:27~28). 그 피는 새로운 언약의 피였다. 혼인 언약을 할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면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따라 주셨다. 그것은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영적인 신부가 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신랑은 모든 것이 다 준비되면 신부를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난다. 약혼식이 끝나고 신랑은 신부 집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해 처소를 준비하고 당신에게로 다시와서 당신을 나 있는 곳에 데리고 가 거기서 함께 살겠소.”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똑같은 약속을 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이 말씀은 흔히 장례식 때 많이 읽혀지는 말씀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말씀의 배경은 장례식이 아니라 결혼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약속은 약혼을 한 신랑이 신부 집을 떠나면서 신부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바로 그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을 하심으로써, 예수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시고 제자들을 신부에 비유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약혼을 한 신랑은 신부에게 모든 것이 다 준비되면 곧 와서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집을 떠난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신랑도 모르고 신부도 모른다. 신랑의 아버지 외에는 그 때와 시간을 알 수가 없다. 신랑의 아버지가 결혼 날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교회)를 데리러 오시는 날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신랑 되는 예수께서도 그 날은 알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 ; 참조 마 24:50, 25:5,13, 살전 5:1).

예수께서도 재림의 때를 모른다고 하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재림을 결혼에 비유하신 것이다. 혼인 잔치가 이루어지는 때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기 때문이다.

신랑은 혼인잔치가 언제 열리게 될지 모르고 오직 신랑의 아버지만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러한 유대인의 결혼 관습을 이 가르침 속에서 그대로 반영하고 계신 것이다. “언제 결혼합니까?” 물으면 신랑은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도 모르고 어머니도 모르고 형제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알고 계십니다.”

‘그 날과 그 때’에 대하여 본인이신 예수께서도 모른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의 결혼 관습 배경에서이다.

 

신부는 그 때를 묻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준비되면 곧 신랑이 혼인 잔치를 위해 데리러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 그녀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마 25:13).

 

③ 떠나기 전에 신부 될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

여자 집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에 남자는 여자에게 선물을 준다. 그것은 청혼을 받아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며,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기억해 달라고 하는 의미이다. 약혼 기간은 보통 1년에서 2년 정도였다. 이 기간 동안 짝을 이루게 될 남자와 여자는 거의 만나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룰 준비를 하게 된다. 신부 될 사람은 신랑 될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 남자가 준 선물을 보면서 남자를 생각하게 된다.

약혼은 모든 면에 있어서 결혼과 똑같은 효력이 있었지만, 그러나 약혼은 아직 미완성된 결혼이다. 결혼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만나지 못하고 기다려야 한다. 결혼식이 이루어져야 함께 살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 둘이 한 몸을 이루지 못했지만, 신부의 마음속에는 신랑이 자리 잡고 있고, 신랑의 마음속에는 신부가 자리 잡고 있다. 한 집에 같이 살지는 않지만,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이미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하나가 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미 그들은 하나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이 약혼 기간이다.

예수께서도 마지막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그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이 선물은 제자들에게 신랑되시는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했다. 이 선물이 무엇인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요 14:26~28).

이러한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주 안에 내가, 내 안에 주가 거하게 된다. 즉 영적으로 동거하는 삶을 살게 된다. 성령의 선물을 통해 우리는 신랑되시는 예수를 기억하게 된다.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성령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④ 정결한 처녀만이 혼인할 수 있다.

약혼 기간을 최소한 1년으로 잡은 데는 약혼녀의 성적인 순결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만일 여자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면 1년이라고 하는 약혼기간 동안에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러면 그 여자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약혼기간을 1년으로 잡은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약혼 기간 동안에 그녀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요셉은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했다. 아직 결혼 전이기는 했지만, 약혼은 결혼과 같은 효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파혼한다고 하는 것은 이혼과 똑같은 것이었다. 성적인 순결을 지키지 못한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파혼은 여자 쪽에서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마리아는 바로 그러한 위기속에 처했었다.

 

그러나 천사를 통해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파혼하지 않았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 앞에 순결한 처녀(신부)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이처럼 혼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순결이다.

이미 약혼이 이루어졌어도 여자가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그 약혼은 무효가 된다. 신랑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에게로 데리고 가 혼인 잔치를 하시 전까지 우리는 영적인 순결을 지켜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삼기 위해 값을 지불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선물을 주고 떠나셨다. 이미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와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7 ~ 20).

 

2. 결혼

 

다음은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결혼 문화를 알아보도록 하자.

 

① 한 밤중에 신부 집에 들이닥친 신랑

열 처녀의 비유를 살펴보면 열 처녀들이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다 그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신랑이 한밤중에 들이 닥쳤다. 신랑이 온 것을 안 그들은 허겁지겁 일어나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그 중 횃불을 밝힐 충분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고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다섯 처녀는 기름이 떨어져 기름을 구하러 간 사이 잔치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뒤늦게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비유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25:13)

이 비유에 나오는 신랑은 신부 아버지에게 신부를 데리고 가는 대가를 다 지불하였다. 신부는 신랑이 따라 주는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신랑은 신부에게 선물을 주고 떠났다. 그 후 신부는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며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동안에 어언 1년이 다 지났다. 그 동안 신랑은 집으로 돌아가 신부를 데리고 올 준비를 했다. 그러한 준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부와 함께 지낼 집을 짓는 것이었다. 이제 아버지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다. 혼인 날짜를 정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행 1:7). 아버지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된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아들을 신부에게로 보냈다.

 

한편 신부 집에서는 언제 신랑 집에서 신부를 데리러 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항상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어야 했다. 신부는 언제든지 신랑이 데리러 오기만 하면 즉시 떠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혹 저물 때 엘는지, 밤 중 엘는지, 닭 울 때 엘는지, 새벽 엘 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 13:32~33,35)

신랑은 ‘한밤중에’ 이르러서야 신부 집에 거의 도착하게 되었다. 신랑의 들러리들은 신랑이 왔다고 하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큰소리로 외쳤다. “신랑이 온다. 나와서 맞이하여라.”(마 25:6). 그리고 그들은 뿔나팔(쇼파르)을 불어댔다.

신랑 되신 예수께서 신부를 데리러 오실 땡의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이 장면은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올 때의 바로 그 장면이다.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에 빠졌던 열 처녀들은 신랑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신랑을 허겁지겁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각자의 횃불에 불을 밝히고 신랑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 “한밤중에” 신랑이 왔다고 하는 것은 언제 신랑이 올지 전혀 예상 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을 통해 예수의 재림이 늦어진다는 사실과, 예수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②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차이점

이 비유에 나오는 열 처녀는 신부가 아니다. 신부의 들러리들로서, 자매들과 친구일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 열 명일까? 유대인들은 공동체의식이 강하다. 그들은 함께 모이는 것을 상당히 중요시 한다. 그래서 의식을 거행하거나 공동체 행사를 할 때 적어도 열 명 이상은 있어야 했다. 회당에서도 열 명 이상이 모여야 예배를 시작한다. 장례식도 열 명이상이 있어야 한다. 열 처녀의 비유는 결혼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으로 열 명의 들러리들을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열 명의 신부 들러리들은 신랑을 기다리다가 모두 잠이 들고 말았다(이 비유에서 신부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신랑이 한밤중에 들이닥쳤다. 그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 신랑이 온 것이다. 미련한 처녀들만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도 함께 자고 있었다. 그러나 유일한 차이점은, 슬기로운 들러리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고 있었는데 반해, 미련한 들러리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시 오실 예수를 맞이할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열 처녀가 주는 교훈이다.

 

③ 횃불과 기름

유대인의 결혼식은 저녁에 시작된다. 결혼식은 반드시 후파에서 거행되는데, 후파가 준비된 장소로 신랑과 신부가 들러리들에 애워싸여 등장하게 된다. 이 때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행렬을 이루어 결혼식장으로 간다. 이러한 유대인의 결혼식 장면은 “지붕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에 잘 나온다. 횃불을 오래 사용하려면 많은 기름이 필요하게 된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횃불을 밝히기 위한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기에 낭패를 당한 것이었다.

 

④ 이 잔치는 혼인잔치가 아니었다.

혼인 잔치는 신부 집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의 집에서 하게 되어있었다. 신랑이 신부 집에 온 것은 혼인 예식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리고 가기 위함이었다. 신랑 집에서 혼인 잔치 준비를 다 갖추어 놓은 다음, 신부를 데리러 신랑을 보낸 것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신부 집에서 있었다고 하는 잔치는 혼인 잔치가 아니라 먼 길을 온 신랑을 위하여 그리고 딸을 멀리 시집보내면서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잔치로 보인다.

 

⑤ 결혼 예식

이렇게 신랑의 집으로 간 신부는 그 곳에서 혼인 예식을 치르게 된다. 고대 시대의 유대인들의 혼인 예식을 간단히 살펴보자.

신랑과 신부는 결혼하는 날 하나님 앞에 속죄를 받기 위하여 결혼식을 올릴 때 까지 금식을 한다.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함이다. 그런 뜻에서 이날을 ‘개인적인 대 속죄일(private Yom Kippur)’이라고 부른다.

유대인은 반드시 후파 밑에서 결혼식을 한다. 이 후파는 닫집 모양의 차양으로서 그 안에 신랑과 신부가 들어가서 결혼식을 올린다. 고대에는 야외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라고 하시면서 하늘의 별만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데서 이러한 관습이 유래되었다. 결혼식은 두 사람의 등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신랑 신부의 가족이나 친척(비록 거리가 먼 친척이라고 할지라도)은 증인으로 세울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신랑과 신부가 후파에 들어가기 전 신랑은 신부의 얼굴에 베일을 덮어 준다. 신랑과 신부가 후파에 도착하면 신랑이 신부 주위를 일곱 바퀴 돈다. 결혼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신랑은 신부에게 반지를 끼워준다. 이 반지에는 보석을 박거나 무늬를 새기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지에 흠을 내어야 되기 때문이다. 이를 ‘슐라못 반지(온전한 반지’라고 부른다.

 

신랑은 케투바(Ketubah)라고 하는 결혼 증서에 서명을 하고 낭독을 한다. 그리고 신부에게 건내준다. 이 케투바는 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신부에 대한 신랑의 의무들을 밝히고 있다. 이 케투바는 평생 동안 간직하도록 되어 있다. 만일 이것을 잃어버리면 다시 써야 한다.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에 보면 결혼식이 끝남과 동시에 신랑이 오른 발로 유리컵을 깨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흰 보자기로 싼 유리컵을 신랑이 구두로 “쨍”하면서 깨뜨림과 동시에 하객들은 함성을 지르며 춤을 추며 즐거워한다. 본격적으로 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서, 가장 즐거운 순간에도 성전이 무너진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 하나는 깨어진 유리는 다시 복구할 수 없듯이, 결혼도 이제는 되무를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물론 예수 당시에는 이런 관습이 없었다.

 

 

3. 혼인 잔치 - 혼인잔치의 비유

① 이레 동안의 잔치

결혼식이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그들만을 위하여 마련해 둔 방에 들어가서 7일을 지낸다. 이 방은 신방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랑과 신부는 7일 동안 잔치가 계속되는 동안 이 방에 머무르게 된다. 잔치를 7일 동안 하는 것은 야곱이 레아를 맞이하고 7일 동안 초례 기간을 가진 데서 비롯되었다(창 29:27). 신방에 들어간 신랑이 신부와 ‘하나가 되는’ 의식을 치른 다음,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면, 그때에 비로소 잔치가 시작되게 된다. 결혼 예식을 통해 법적으로 하나 되고, 신방에 들어가 신랑과 신부가 실제적으로 하나가 된 다음에 본격적으로 잔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또한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그 잔치는 끝장나고 만다. 상황이 이렇게 다급하게 되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주님의 첫 번째 이적의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잔치는 계속 될 수 있었다. 유대인의 일상에 있어 포도주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거의 음료로 여긴다. 포도주는 잔치 상에 빼 놓을 수 없는 메뉴였다. 포도주는 잔칫집의 흥을 더욱 돋우어 주었다.

 

② 두 번 초대하다.

누가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고 되어있다(눅 14:16). 마태복음에는 이 잔치가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였다고 밝히고 있다(마 22:2). 이 비유는 도마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저녁 만찬을 준비하고 손님들을 청했다고 되어있다(도마복음 46). 유대인들의 혼인 예식은 저녁에 이루어진다. 혼인 예식이 끝나면 곧바로 잔치가 이루어진다. 누가복음에는 주인이 손님들을 두 번 청한 것으로 되어있다. 첫 번째 초대는 잔치가 있음을 알리고 잔치에 참석해 달라고 하는 초청이었고, 두 번째 초청은 모든 잔치 준비를 다 끝내고 어서 와서 잔치에 참석하라고 하는 초청이었다. 이 잔치는 많은 사람들을 초청한 큰 잔치였다. 이러한 잔치를 베푼 사람은 부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특별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손님들을 두 번 초청하는 관습이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상류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두 번씩 초청하는 것이 관례이다.

 

* 참고 : 유대 문화를 통해 본 예수의 비유 이진희 지음

쿰란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