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고난을 산 소망으로 극복하라(베드로전서 1:3-9)
들어가며
참된 신앙은 고난이나 어려움을 동반합니다. 이 세상과 악한 영은 하나님을 바르게 믿으려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핍박의 역사라고 할 만큼 교회 역사에서 엄청난 핍박이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선교지에 있는 성도들을 비롯해서 믿음으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핍박뿐만 아니라 내적인 갈등이나 어려움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려 하면 내적인 어려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알지만…”이라는 식의 갈등으로 인해 힘들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신앙으로 인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 속으로
1. 그리스도인에게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무엇이 우리의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까? (3-4절)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3절) 이 구절의 제일 마지막에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산 소망이 무엇인지는 4절에 나타납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4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산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유업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하늘에 간직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산 소망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천국에 예비해 두신 영생과 상급을 가리킵니다. 그 영생과 상급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습니다.
4절에 ‘유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유업은 사전적으로는 “선대(先代)부터 이어온 사업”을 가리킵니다. 원어로는 ‘기업’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유업’이라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게 되는 기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소유인 천국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유업’이라는 말로 설명한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도 누리지만 그 믿음으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오죽 했으면 성경이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했겠습니까? 이 죄악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우리에게 장차 하나님이 주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산 소망’이라고 한 것은 그 소망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역동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 하나님이 장차 주실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 소망으로 인해 어떤 역경도 이겨내고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능력을 가진 소망이기에 ‘산 소망’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이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3절)
다시 한 번 3절을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3절)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한 후에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라는 표현에서 긍휼은 은혜와 같은 말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많으신 긍휼로, 그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원래 자격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이처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셨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저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전에는 아무런 소망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사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소망을 산 소망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6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5절)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6절)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라고 나오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시험은 고난입니다. 믿음으로 인한 고난은 일종의 시험일 수 있기 때문에 시험이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잠깐 근심했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했습니다. ‘잠깐 근심했지만’이라는 것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순간적으로는 괴롭고 힘들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곧 그 어려움 속에서도 크게 기뻐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많은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크게 기뻐할 수 있었겠습니까?
6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5절과 6절의 연결고리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이 여러 가지 시험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5절에 있다는 뜻입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5절)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산 소망을 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그 크신 능력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은 그런 보호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크게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이 하나님이 그 크신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이 가진 유익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때로 그 믿음으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지만 그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비록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완전한 구원, 즉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누릴 수 있게 하십니다. 그 때까지 그 크신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지금도 참된 믿음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믿음생활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경험했습니까? 무엇을 붙잡고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4. 비록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겪고 어려움에 처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 가지를 찾아보십시오.
•7절/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기 때문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7절) 여기에서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고난과 역경에 처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지킨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런 믿음이 확실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즉 예수님 재림과 종말의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겪고 어려움에 처해도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메달이나 포상을 기대하면서 연습이나 경기 중의 그 고단함을 이겨내는 것처럼 우리는 장차 주님으로부터 받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8절/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며 예수님으로 인한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길이기 때문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8절) 우리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전서의 독자들 역시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을 겪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고난을 견딜 수 있음을 알고 그것을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여겼습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을 때,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견디고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겪거나 어려움에 처해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9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절)믿음에는 불가피하게 어려움과 고난이 뒤따르지만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고난을 견디고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는데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그렇지만 믿음은 반드시 선한 결과, 즉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고 해서 믿음을 포기하면 영혼의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우리는 영혼의 구원,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구원을 기대하면서 오늘도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철저하게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어떤 어려움을 만난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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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하며
신앙에는 반드시 어려움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어려움이든지 내적인 어려움이든지 관계없이 어려움은 마치 숙명처럼 신앙에 동반됩니다. 그렇지만 신앙에는 그런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산 소망도 있습니다. 어려움과 산 소망이 동시에 있는 것, 그리고 산 소망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도, 그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도 참 믿음에는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산 소망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성도들의 영적 신분(베드로전서 2:1-10
[ 성경묵상 ]
2장 요약 ; 1-12절에서는 성화된 삶을 실현하는 방법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성도는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주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한다. 여기서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거룩한 제사장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편, 11절부터는 국가와 주인(고용주)에 대한 개개인의 윤리를 다루고 있다. - 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2:1-3 ; 세세토록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1:23-25)들은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 등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을 젖을 사모하듯이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맛본 자라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속 성숙하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에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3절).
'버린다'는 것은 죄악된 세상에서 살면서 입었던 옷을 '벗어 버린다'는 의미(골 3:8)로 해석해야 한다.
1:22-2:3 ;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는 형제를 사랑하고 영적 성장을 위해 말씀을 사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2:4-10 ; 선택된 개체와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성도들의 영적 신분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2:4-5 ; 성도들은 그리스도처럼 산 돌로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가는 자들이요, 동시에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2:6-8 ; 베드로는 구약 사 28:16과 사 8:14 그리고 시 118:2를 인용하면서 교회의 모퉁이 돌로서 갖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지위가 이미 구약 시대에서부터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사실을 말하며, 그를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지만 불신하고 불순종한 자들은 완전히 넘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 말씀 묵상 후 정리함 -
성도는 세상에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질문 1 ] 갓난 아기가 젖을 사모하듯 성도가 사모할 것은 무엇인가?(1-3절)
성도가 구원이라는 종착지에 이르기 위해 세상을 통과할 때 버려아 할 것과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
버려야 할 것은 죄악된 행위들(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이고, 추구해야 할 것은 순전하고 신령한 젓, 곧 말씀이다(2절).
갓난 아기가 간절히 젖을 사모하듯 성도가 말씀을 사모할 때 세상의 유혹과 시련의 길을 통과하여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정성껏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처럼, 우리 주님은 교회에 말씀을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선하고 인자하신 분이시다.
[ 질문 2 ] '산 돌'과 '산 돌들'과의 관계는 누구와 누구의 관계를 보여주는가?(4-8절)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예수님께 나아간다(4절). 그분은 세상에서는 버림받았으나 하나님께 택함 받은 보배로운 '산 돌'(a living stone)이시다. 그분을 믿으면(6절, 사 28:17)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세상은 몰라줘도 그분 때문에 '산 돌들'(living stomes)로 이루어진 신령한 집(성전)으로 세워진다(5절). 동시에 그분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5절). 신분이 바뀌는 것이다.
[ 질문 3 ] 예수를 믿은 성도의 신분은 어떻게 되는가?(9-10절)
성도는 예수님을 믿어 "택하심을 받은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인 백성"이 되었다. 무엇을 위한 신분 변화인가? 하나님의 덕(탁월하심)을 선전하기 위함이다(9절).
본래 흑암 속에서 헤매고 있어야 할 우리들을,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해 주시고 놀라운 빛으로 불러 주셔서 그 빛을 경험하게 하신 후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가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덕을 선전하고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의와 모든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십시오.
'그러므로'는 1:23-25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우리를 거듭나게 한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으므로 거듭난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말씀을 사모해야 함을 나타내기 위한 접속사이다.
성도의 영적 성장, 성화되기 위해서는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 '버린다'는 원어상의 의미 속에서는 믿음으로 갓 태어난 자들이 거듭난 자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악독' ; 마음 속에서 남을 해하려는 무자비한 악들
'기만'(개역한글, 궤휼) ; 미끼, 올가미, 덫 등 모든 속이는 것
'외식' ; 겉과 속이 다르게 판단하는 것
'시기' ; 열등감에서 나오는 행동으로 타인이 잘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
'모든 비방하는 말' ; '온갖 종류의 중상 모략'이나 '악담'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개인의 악의에 찬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들이다(롬 1:30 ; 고후 12:20).
모든 것을 버리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육신의 겉옷을 벗고 물 속에 잠기는 세례를 받았으나, 옛 사람의 모습들을 완벽히 떨쳐버리지 못하는 소아시아 교인들에게 베드로가 목회자의 뜨거운 심정으로 하는 권면이다. 베드로는 그들이 세례를 받고 거듭난 성도들이므로 거듭난 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지적한 이러한 생활 태도는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거룩함으로 구별되어야 하는 성도들인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 아기와 같이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이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을 1절에서 언급한 후 2절에서는 '사모해야 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사모한다'는 말은 갓 태어난 어린 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갈구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바라고 원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젖이 없으면 잠시라도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사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1:23)가 구원에 이를 때까지 자라가기 위해서이다. 성화되어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성도들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 자양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
순전하고 ; 기만(궤휼)과 대조를 이루는 말
신령한 ; 영적인, 이성적인, 합리적인, 적합한 등 다양한 의미
순전하고 신령한 젖 ; 갓난 아이들에게 적합한 젖
‘젖’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비유인가?
‘젖’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이라는 문구를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서 신비주의적 이단인 영지주의에서 작성된 성례 의식으로부터 빌려왔다는 사실이다. 그 문구는 곧 “나는 너에게 네가 마실 거룩한 나의 젖을 주었다”라는 것이다(Odes Sol. 8:16). 여기서 말하는 젖의 기원은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진 ‘12개의 이성적인 샘들’로 불리워질 수 있으며, 이 젖은 영지주의에서는 성례전을 통하여 얻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이 젖이 ‘복음’, ‘말씀’을 의미하는 ‘로고스’로 대체되면서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젖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H. W. Bartsch).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젖은 곧 복음으로 전해지는 말씀(1:25)을 가리킨다.
한편, 유대교에서도 ‘토라’를 젖에 비유하여 아이들이 젖을 먹으며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율법을 먹음으로써 영혼을 먹이며 영양분을 공급받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갓난아이와 같은 회심자들'은 그들의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그들에게 적합하고 가감되거나 섞인 것이 없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어린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갈망하듯이 사모해야 된다’라는 의미이다.
1:23-25에서 성도를 거듭나게 한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을 언급했다면, 본절에서는 그 거듭난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해 말씀을 사모하라는 직접적인 권면을 주고 있는 것이다.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여러분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한 번이라도 우리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맛본 자들이라면,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더욱 사모해야 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는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살아 있는 귀한 돌입니다.
'산 돌'은 어원적으로 '살아 있는 돌' 또는 '생명을 주는 돌'을 의미하며, 실제로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박해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신 말씀이다. 고난을 받는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배척 당하고 핍박 당하고 있지만, 이러한 예수를 택하셔서 살리신 하나님이 자신들을 살리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과 같이 되었으니, 신령한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십시오.
'신령한 집'이란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전 3:16 ; 엡 2:22).
성도들이란 이미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이지만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 생명을 얻었으며, 장차 부활할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산 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성도들은 새 생명을 얻은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신령한 집이란 교회를 말하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참된 성전, 곧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산 돌'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신령한 집'은 단수형으로 되어 있어 여러 성도들이 합력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목적은 "신령한 집"(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데 있다. 성전이 된 성도들은 그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방에 대하여 제사장의 나라로 선택하신(출 19:6) 하나님께서 /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집의 회중(산 돌)이 된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에게 제사장의 사명을 부여하였다.
신약 교회 성도들은 성도 스스로가 제사장의 자격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자격을 지니게 되어, 더 이상 대제사장과 같은 약점을 지닌 사람의 중보 없이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를 섬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란 성도 개개인이 제사장으로서 드리는 신령한 예배, 찬미, 선행, 구제, 거룩한 삶 등을 말하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이다. 자세한 내용은 주석(131-132쪽)을 참고하라.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잇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2:6-8의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이사야 28:16과 시편 118:22, 그리고 이사야 8:14을 인용한 것이다. 세 인용절에서 그리스도는 돌(반석)에 비유되고 있으며, 이 돌에 대한 태도가 사람들의 삶을 결정짓게 된다.
모퉁이 돌 ; 건축물의 벽과 벽 사이를 잇는 건물의 기초요 중심인 돌.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감당해서 교회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시사한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 환난의 때에 진멸되지 않을 것, 최후 심판의 때에 당당하게 하늘 나라에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의미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을 가져다주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분이기에 그들에게는 보배와 같은 존재이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이 내다버린 돌과 같은 무가치한 존재이다고 밝히고 있다.
보배 ;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광과 가치가 있는지를 시사해 주는 단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배척을 당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영광의 자리로 높여 주심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예수를 믿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 자들은 결국 심판에 처해져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요,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부딪히는 돌 ; 어떤 사람을 걸려넘어지게 하는 돌, 혹은 그것 위에 사람이 엎드러지는 돌
하나님께서는 그를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시는 반면에 그를 거부하여 따르지 않고 인간적인 권력에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거치는 돌과 함정, 올무가 되셔서 그들을 넘어지게 하고 패망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귀한 보배이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함정, 올무, 심판의 돌이 되신다(Origen, Delitzch, Selwyn).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베드로전서 2:9-10) - 주해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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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여러분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베드로전서 2:1~10절)
1.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3절)
매일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가끔 만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본문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베드로전서는 공동서신으로 집약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각해야 할 것이 많고 설명해야 할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양을 너무 많게 잡음으로 살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줄여보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보편적으로 세 편 이상의 설교했던 내용이 하루 묵상 분량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므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전히 부활의 산 소망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말씀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성도의 삶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벧전 2:1~3절은 이 거듭남이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이기 때문에 자라감이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일생에 걸쳐서 계속되는 것이라고 했던 칼뱅처럼, 생명의 씨앗은 태어나는 순간에 심어지는 것이지만, 자라남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생명은 반드시 자라남, 즉 새로운 삶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세라는 긴 시간을 부활의 산 소망으로 살아갈 때 성도는 버릴 것과 사모할 것을 잘 구분하고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는 성도의 삶에 성장과 성숙이라는 생명의 씨앗이 심기고 발아되어 자라가는 과정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명의 잉태와 자라감은 버리고 사모하는 것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3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이 말씀은 시편 34:8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인용할 때 다윗이 처해져 있는 상황과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 즉 나그네와 순례자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의 삶이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34편에서 다윗이 어떤 의미로 이 말씀, 즉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일단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것은 삼상 21:10~15절입니다.
사울이 시기와 질투에 이성을 빼앗기고 사탄의 도구가 되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아왔던 다윗은 이유 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의 살의에 처절한 도망자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점점 다윗은 벼랑 끝에 몰리게 되고 위태한 상황들은 계속해서 다윗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다윗 도망자가 되어 첫 번째로 찾아간 사람은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이었습니다. 다윗이 가장 먼저 놉으로 간 이유는 아마 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으로 자신의 피신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으려고 했던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갑작스럽게 시작된 도망자 인생에 필요한 양식을 구해야 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제는 분명하게 사울과 대적해야 하는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기에 뭔가 무기도 필요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놉으로 가장 먼저 간 것입니다.
거기서 제사장이 먹는 진설병을 먹고 칼을 얻었지만, 다윗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삼상 21:10절은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다고 말합니다. '가드'(Gath)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5:8)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였던 기억을 잊어버린 것입니까? 사실 '가드'는 엘라 골짜기 입구에 있는 블레셋 국경의 첫 번째 도시로서, 이방 국가로서는 가장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이런 판단을 한 것입니까? 아마 다윗은 소년에서 이제는 변해 천부장이 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블레셋 족속의 가장 큰 적인 이스라엘의 사울로부터 쫓겨 다니는 도망자가 된 자신을 블레셋 사람들이 정치적 망명으로 환영할 수도 있다는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다윗의 가드 행은 그의 두려움의 크기를 말해줍니다.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습니까?
그러나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을 보자마자 알아보았을 뿐 아니라 그 땅의 왕 다윗이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이 부른 노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블레셋 사람들은 가드의 지역 군주였던 아기스처럼 다윗을 지역의 왕으로 인식했던 듯이 보입니다.
다시 12절은 다윗의 두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히 두려워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떨쳐 나갔던 소년 다윗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엽기적인 행동이 시작됩니다.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면서 생명을 이어가려는 다윗에게서 우리는 두려움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황폐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가드 사람들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고대 중근동에서는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감으로써 미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친 사람과 만나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다윗은 이 점을 이용하여 위태한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입니다.
아기스 왕의 반응을 보십시오.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그럽니다. 위기가 지나가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친 짓은 때때로 황홀경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선지자의 괴기한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왕하 9:11; 렘 29:26; 호 9:7). 따라서 아기스 왕은 자기 민족 중에서 황홀경에 빠져들어 가 이교적(異敎的) 예언을 하곤 하는 예언자들을 많이 보아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더욱이 이런 추측은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라는 아기스 왕의 언급에 의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아기스 앞을 피한 다윗은 아둘람 굴로 도망하고 맙니다.
그런데요? 다윗은 이렇게 미친 척을 하면서 비참하게 도망쳐 아둘람 굴에 이른 형편을 비참함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보았습니까?
시편 34:4~7절입니다. 4절에서 간구하매 응답하시고, 6절에 부르짖으매 내게 응답하셨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미친 척을 하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록 미친 척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극단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에서 나온 후에 비참함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다시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유 없이 쫓겨 다니며 삶과 죽음의 외줄 타기를 하는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뒷날 놉에 있었던 제사장들이 학살을 당하는 장면은 다윗이 절망감까지 들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울의 이 시기 질투는 이렇게 맹목적으로 잘못된 권력을 휘두르게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생명이 경각 간에 달린 상황, 더구나 블레셋 가드의 왕이었던 아기스가 마음만 먹으면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갑자기 그들이 나온 것은 다윗과 함께했던 소수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과 아비멜렉을 피하여 도망한 후 아둘람 굴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로 내려온 `그의 동료들'입니다. 그때 그에게 모여든 자들은 그의 동료뿐 아니라 환난 겪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삼상 22:1, 2). 그들이 그 두려움과 위기의 상황에서 여호와를 앙망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얼굴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광채를 입었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얼굴이 수심이 없고 오히려 빛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인해서 광채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초청한 내용이 시편 34:8~14절입니다.
8-10절은 맛보아 알라고 초청합니다. 맛보아 아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맛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제대로 깨닫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야다가 아닙니다. ‘라아’라는 이 히브리어는 경험하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맛보아 안다는 말은 다윗처럼 여호와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체험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이 바로 마카리오스입니다. 다윗이 기도를 통해 체험했던 것은 바로 이 행복, 기쁨, 감사였습니다. 그렇게 극단적인 어려움 가운데서 미친 척까지 하면서 구원받은 후에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한 것입니까? 복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맛보아 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이 시편은 얼마나 믿음의 찬양입니까? 생각하기에 따라서 너무 비참하고 절망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초청합니다. 너희도 상황에 지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을 맛보아 알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모든 것이 채워져서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입니까? 오늘 시편의 문맥에서는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맛보아 알게 될 때 누리를 복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자는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비유입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을 다시 세상적인 관점으로 읽으면 이 시편의 문맥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모든 좋은 것은 문맥상 복입니다. 다윗이 누렸던 기쁨과 감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지금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이라고 말할 때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지금 다윗의 상황과 흩어져 있는 나그네의 상황이 일치한다고 본 것입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으로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나그네와 순례자입니다. 도망자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런 고난 가운데 그를 견딜 수 있게 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습니까? 그는 주께 피했습니다.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를 경외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주의 선하심을 맛보는 유일무이한 길은 썩지 않고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갓난아이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 그렇게 살고 그렇게 성장함으로써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인자하심을 어디서 맛보아야 합니까? 말씀을 통해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봐야 합니다. 갓난아이가 엄마 젖을 사모하는 것은 그 젖에 담긴 사랑을 맛봤기 때문인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 비방의 고통을 당할 때도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며 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을 때 나를 양육하신 하나님의 그 따뜻한 손길을 체험한 사람은 모든 악덕을 버리고, 순전하고, 성도에게 가장 신령한 젖인 말씀을 따라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체험하였다면, 구원에 이르기까지 나를 인도하시고, 나와 함께 하실 그분을 바라보면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새로운 삶을 본문은 두 가지로 말하는데, 버릴 것과 사모할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
1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그럽니다.
왜 버려야 할 목록들이 이런 것들일까요?
왜냐하면, 벧전 1:22절에 의하면, 진리를 순종함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미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 즉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소속의 변화입니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마치 이사할 때 그동안 묵었던 것들을 다 버리는 것처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을 성장과 성숙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보면서 재미있는 것은 어린 시절에 그렇게 목숨처럼 좋아하고, 끌어안고 살던 것들을 나이가 들면서 자기 스스로 버린다는 것입니다, 딱지, 구슬, 로봇, 장난감, 인형들, 연예인 사진 등등이 그렇습니다. 이 말은 성장과 성숙하면서 중요한 것들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난 성도가 영적 성장을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은 주로 인격적인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모든 악독”입니다. 악독은 카키아(kakiva)로 악한 생각을 의미합니다. 질적으로 부패한 것을 의미합니다. 빵에 핀 곰팡이처럼, 또는 썩은 음식처럼, 저질적이고, 덕스럽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남을 해치려는 의도에서 쓰는 악행과 불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만”이란 말은 헬라어로 돌로스(dovlo")입니다. 옛 성경에는 “궤휼(詭譎)이라고 번역합니다. 속일 궤(詭), 속일 휼(譎) 입니다. 교묘하고 간사스러움,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음흉한 속셈을 갖고 간계와 술책을 부리거나, 함정을 파고, 낚시로 치면 가짜 미끼 같은 것입니다. 목적달성을 위해 거짓되고 간사한 말을 하는 속임수이고, 그 속에 남을 해치려는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외식”은 휘포크리시스(uJpovkrisi")입니다. 이 말은 배우가 쓰는 가면이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다르게 속으로는 다른 생각, 다른 꿍꿍이, 다른 짓거리를 하는 이중적인 태도로 겉치레란 뜻입니다. 말과 행동, 생각과 말, 보이는 생활과 속 생활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안 그런 척, 그런 척하는 것입니다. 또는 겉만 번지르르한 허풍이나 과시도 여기에 속합니다.
“시기”는 프흐도노스(fqovno")입니다. 이 말은 마음에 있는 질투를 의미합니다. 질투로 생각이 병들고, 감정과 의지도 삐뚤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며, 방해하고,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고 누리는 성도는 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의 산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방하는 말” 카타랄리아(katalaliav)는 아래에서와 말이 합쳐져서 다른 사람의 명예나 인격을 손상하는 말, 헐뜯고, 비난하고, 악담하며, 중상모략하는 말을 아래에서, 즉 뒤에서 하는 것입니다. 벧전 1장 마지막에 그리스도인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가족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런 악독, 기만,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아름다운 교제가 파괴되고, 신앙인격의 성숙이 저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형태의 악독, 기만, 외식, 시기 질투, 비방을 버려야 합니다.
사모해야 할 것
그리고 2절은 사모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이 본문에서 이상한 것은 1절과 2절이 균형이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1절에 악덕의 목록이 나왔으면 2절은 당연히 참된 성도의 덕목, 즉 선함, 정직, 진실, 배려, 격려의 말 등이 나와야 맞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사람의 덕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먹음으로 자라는 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먹으며, 말씀으로 성장하고, 말씀의 사람이 되면, 세상의 악덕들을 벗어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먹고, 성장하면, 더는 어린 시절의 옷들이 몸에 맞지 않기 때문에 못 입는 것처럼, 성도가 말씀을 먹고 자라면, 어울리지 않는 악덕들을 옷 입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가 먹고 자란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하고, 썩지 않는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은 하나님 말씀을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순전한’이라는 말 아돌론(άδολον)은 1절의 벗어버려야 할 기만 돌로스(δολος)와 반대되는 순전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거짓되고,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참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젖이라는 말 로기콘 갈라(λογικόν γάλα)는 로고스와 연결해서 말씀의 젖으로(KJV, NASB) 번역하거나 신령한 젖으로 번역하지만(NIV, 개역개정), ‘어떤 것의 속성에 합당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앞에서 갓난아기라는 표현과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태어난 성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성장 이유식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벧전 1:22절에서도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따라서 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하나님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그것을 날마다 섭취하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가르침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삼아야 하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젖을 먹듯이 먹고, 성장해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실천해야만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모한다는 표현입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에피포데오(ejpipoqevw)인데 이 말은 ‘사랑에 빠지다’, ‘혹은 갖기를 소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전치사 에피와 동경하다라는 말 포데오의 합성어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성도는 어린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해야 합니다. 그게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길을 잃지 않고 지치지 않고 천성을 향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지도이며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는 구원도 역시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의 지배를 받습니다. 온갖 잘못된 타락한 성품들을 버리는 것도 역시 말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버려야 할 것과 사모해야 할 것을 잘 묵상하면서 3절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있다면, 구원받은 성도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 거룩한 제사장(4~8절)
베드로전서 2장은 그 내용상 1~10절. 11~12절. 13~25절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10절은 성도의 개인 신앙생활 자세에 관한 일련의 교훈들을 기록한 1:13~2:10까지의 결론 부분입니다. 1:13~25절에서 구원받은 성도, 즉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진 성도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깨어 근신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고,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특히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말씀의 사람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권면의 결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건물의 비유를 들어 예수께서 산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처럼 개개인 성도들도 산 돌로서 함께 연합하여 신령한 집,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敎會)를 이루어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3~8절). 이렇게 신령한 집을 이루기 위해 성도 개개인은 성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과 같이 사람들에게서 버린 바 되셨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하나님에 의해 귀하게 여김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 개개인의 성도들도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멸시 천대를 받는 고난에 처하게 되지만 결국 성화의 과정을 통해 거룩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의 삶을 제사장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성도의 신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여기 “예수께 나아가”라는 말이 원문에는 프로스 혼(πρός ‘όν)입니다. ‘바로 그분에게로’라는 의미입니다. 3절에서 “주의 선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라고 한 다음에 바로 그분에게 나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누굽니까? 베드로 사도는 끊임없이 예수가 누구인가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산 소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에(4절)“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산돌”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셔서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6절에서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에서 따온 것입니다. 시편 118:22절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6, 7, 8절에서 사 28:16절과 시편 118:22, 사 8:14절을 인용해서 돌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돌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구원이라는 건축물에 모퉁이 돌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과 구원의 근거를 모퉁잇돌이고,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짓고 있었는데, 갑자기 중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집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집을 그대로 짓는다면, 기울어진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각 벽돌 층의 코너에 쐐기 모양의 받침, 즉 모퉁이 돌을 단단히 쌓고, 이 모퉁이 돌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벽돌을 끼워 넣어서 서로 균형을 잡으면서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퉁이 돌이라는 말의 핵심적 설명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집의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인 성도는 예수라는 모퉁잇돌 위에 집을 지어야만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모퉁잇돌은 기초석이기 때문에 기초가 불안하면 건물이 불안하고, 기초가 확고하면 건물이 확고한 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라는 반석의 확고함과 불변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반석이신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들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5절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5절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럽니다.
“너희도”라는 말은 4절에 말한 예수님을 이어서 우리가 누군가를 말하는 본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연결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성도는 산 돌이신 바로 그 예수님께 “나아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세워지고 있다는 이 중요한 개념은 사도 바울에게도 베드로 사도에게도, 성화의 여정 속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너무 중요한 개념입니다.
원래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 중에 임재하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신다는 표시로서 성막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에 임재하시느냐?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에게만 임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성전은 죄를 범한 사람이 와서 속죄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에 나타난다고 하냐면, 지성소 안의 법궤 위, 속죄 소 위, 두 그룹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백성을 만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속죄소 혹은 시은 좌입니다. 바로 그 시은 좌에 뿌려진 피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은 바로 그 예수라는 산돌에 나아와서 “너희도” 성전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령한 집”이라는 말은 오이코스 프뉴마티코스(οίκος πνευματικός)입니다. 성령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성전은 예배당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집인 너희,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엡 2:20~22절에서는 우리가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성전, 즉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어 간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처소가 되어간다는 표현을 오늘 본문에서는 “세워지고”라는 진행형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지만, 한편 우리가 함께 성령의 집으로 세워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 즉 지금 우리가 구원받아 살아가고 있는 삶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성도가 세상에 존재할 때 그의 신분은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무가치하고, 쓸모없다고 비난하고, 버림받는 존재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시 118:22~23절은 이것을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이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존재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즉 교회에게 세상을 중보 하는 제사장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감사하고, 황송하게도 세상의 제사장은 오직 저와 여러분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우리이고, 세상의 악을 막아서는 것도 우리이며, 세상 구원의 통로요, 중보자가 우리들이라고 하신 것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도는 아무리 못났어도 세상을 위한 제사장이라는 정체성과 사명을 가진 존재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이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제사장이라는 말은 교회 안에서 목사에게 사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를 포함하는 모든 성도들은 제사장으로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를 바라보면서 함께 힘을 합쳐서 세상 속에서 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대적하는 세상에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직분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확신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6~8절은 복음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에 부딪힌 자들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6절과 8절은 7절을 중심으로 대조적인 내용입니다.
6절입니다. 사 28:16절의 인용입니다. 시온에 둔 한 돌, 곧 시험한 돌,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을 믿는 자는 다급하게 되지 않는다를 인용해서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8절은 사 8:14절의 걸려 넘어지는 반석, 함정과 올무가 되실 분을 인용해서 부딪히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이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사이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버린 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초점은 하나의 돌이 어떤 사람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석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서 넘어졌는데, 알고 보니까 그 돌이 반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그들은 어째서 걸려 넘어졌을까요? 8절을 보면, 이럽니다. “…….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에 부딪힌 사람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면, 결국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오직 현세만 생각하고, 물질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가치관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삶에 당장 아무런 의미도 없는 종교적인 인물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냐고 반문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이고, 열심도 있고, 헌금도 하고, 세례를 받고, 집사, 장로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예수님을 보배로운 분으로 믿는가? 그 생활 신념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참으로 예수님을 보배롭게 여긴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과 예수를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단지 영접 기도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통치를 받지 않는 자는 교회를 다니고, 직분을 가졌어도 예수님이 반석이 아니라, 늘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될 것입니다.
8절에서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는 말 에테떼산(έτέθησανα)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회개할 수 없도록 이미 정해놓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완악함이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과 부딪혀서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빛이 오면 어둠이 드러나는 것처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빛 아래에서 모든 사물은 다 자기 모습을 감출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빛에 속한 것들은 빛으로 나오고, 그렇지 않은 어둠에 속한 것들은 숨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의 아들들이고,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특권을 포기하지 맙시다. 이 복음의 말씀 앞에서 세상은 더욱 세상으로 드러날 것이지만, 우리는 더욱 성도답게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은 더욱 세상다워질 것입니다.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헛된 일에 미쳐갈 것입니다. 악인은 더욱 악인으로 드러날 것이며, 세상은 더욱 하나님을 반역하고, 진리를 대적하며, 더욱 어둠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성도(교회)는 더욱 성도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나라에 속한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다르고, 목적지가 다르고,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상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도다워지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신분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는 성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신분의식에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3.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생활(9~10절)
너희가 전에는(10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9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앞에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 돌이신 예수를 버린 돌로 취급하는 삶은 그 예수가 그들에게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10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럽니다.
우리의 전과 현재를 계속해서 비교하는데, 이것은 9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 즉 탁월하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라는 면에서 탁월하시고, 하나님은 전에는 백성이 아닌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에서 탁월하시며, 하나님은 긍휼을 얻지 못하던, 즉 구원받을 자격이 없던 나에게 긍휼을 베푸신 분으로서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백성 아닌 자, 즉 내 자식이 아닌 자를 내 자녀로 입적시켜주는 긍휼입니다. 어디에서도 긍휼을 얻을 수가 없었던 죄인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용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탁월하심 즉, 아름다운 덕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덕을 선포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덕, 탁월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은 4가지 신분을 말하고 있는 것이 9절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신분과 사명입니다. 왜냐면 신분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고, 사명을 감당하려면 반드시 그 신분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나는 평신도”라고 말하면서 성도로서 가져야 할 삶의 자세를 게을리하거나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묵상은 신학생들의 몫이 아니라 성도들의 몫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거룩한 제사장인 우리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신분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신분의식을 갖느냐에 따라 삶은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비록 흩어진 나그네로 살지만 이런 신분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신분은 9절 하반 절에서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에 걸려 있습니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즉 우리를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이유가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선포하게 한다는 말이 주동사인데, 그 의미는 다른 모든 것들 성도의 신분들은 바로 이것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혹은 선전하는 것입니다.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덕이라고 할 때 그 덕은 아레테(ajrethv)로 탁월함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겸손, 순결과 같은 도덕적 우수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긍휼을 의미합니다. 10절에서 긍휼을 얻은 자라는 표현은 바로 아름다운 덕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하고 선포하고 선전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땅에서 평생 추구해야 할 신령한 제사입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1) 택하신 족속
자,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고 전해야 하는 우리의 신분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할 우리의 신분은 택하신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택하신 족속”은 게노스 에크렉톤(gevno" ejklektovn)입니다. 게노스, 즉 족속이라는 말은 혈통적으로 한 족속이라는 말이고, 뿌리, 기원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흩어진 나그네로 고난 중에 있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성도들을 향해서 뿌리와 기원이 같고, 혈통적으로도 한 혈통에 속한 족속이라고 한다는 것은 놀라운 표현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아무리 돈이 많고, 세상 지위가 높은 사람, 배운 학문이 많은 사람이라도 돈 없고, 지위가 낮으며, 배운 것도 적은 사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피로 거듭나서 한 혈통에 속한 자가 되었고, 같은 뿌리를 가진 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 믿는 자들의 혈통은 가문이 아니라, 보혈이며,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형제고, 한 족보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다른 혈통이나 족보는 없습니다.
2) 왕 같은 제사장
두 번째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 말씀은 제대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여기 “왕 같은”이란 표현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basivleion iJeravteuma)는 왕의 거처인데, 왕 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즉 제사장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왕실 근위대를 Royal guard라고 하는데, 그래서 왕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 만약, 왕실 근위대가 왕처럼 굴면 그때는 즉각, 왕에게 반역으로 몰려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 같은” 이 아니고, “왕에게 속한”이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 같은 이라는 말은 성질에 있어서 왕다움이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당당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앞서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원래 출 19:6절에서 온 것입니다. 70인 경은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로 번역했고, 그것을 한글 성경은 제사장 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단어를 베드로전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왕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나라가 왕이고 왕이 나라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왕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이제부터 그분의 제사장, 즉 왕의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들은 일제히 왕의 제사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 번역, 쉬운 성경, 현대어 성경이 모두 말입니다.
현대어 성경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다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손수 택하신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하고 순결한 겨레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널리 찬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 “그러나 여러분은 다릅니다.”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뭐가 다르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왕의 제사장으로서 엄청난 명예와 신분과 그에 따르는 신령한 하늘의 복들을 이미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이 다릅니다. 그걸 아는 성도라면, 자기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왕의 제사장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으로 생각합니다. 기쁘게 감당하고, 감사하며 감당하고, 겸손하되, 비굴하지 않은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왕의 제사장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왕의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 사명은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중보하는 사명입니다. 중보의 사명이라는 것은 기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데서 나를 불러내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그분의 아름다운 덕 앞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나를 택하여 주신 그분 앞으로 그들을 인도해야 하는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제사장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는 제사장의 의복을 보면, 어깨에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견장을 차고, 가슴에도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흉패를 입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12지파가 아니라, 온 세상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교회요, 성도들입니다. 말하자면,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그 하나님이 아직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3) 거룩한 나라(9절)
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성도의 세 번째 신분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의 원형이 출 19:4~6절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출 19:3절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서 말하자, 7, 8절에 백성들이 “우리가 다행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바로 이 사이에 들어있는 말씀이 4~6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냈는가를 말한 것입니다.
먼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한 것을 네가 봤다”라고 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태양신의 화신이라고 하는데, 독수리가 바로 왕을 보호하고 있는 벽화들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독수리는 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라는 말을 통해서 바로의 머리 위에 있는 그 독수리가 너희를 지키고, 보호하고, 인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독수리처럼 너희를 지키고, 보호, 인도한다는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 12:14 절 이하를 보면, “큰 독수리의 두 날개”로 교회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금 이것을 가지고 너희를 불러내신 목적이 뭐냐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 19:5, 6절을 보면, 그 목적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베드로전서가 거룩한 나라, 에쓰노스 하기온(e[qno" a{gion)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에쓰노스는 나라(nation)로 옮길 수도 있지만, 민족(ethnic)이 더 적절한 표현입니다. 이 말이 ethnic 즉 민족, 인종, multi-ethnic, 다민족의 어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룩한 나라나 백성이 아니라, 거룩한 민족입니다. 국가, 나라, 백성이라는 것은 정치체계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다양한 민족들과 출신들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은 백성이나 나라보다 훨씬 더 동질성, 예를 들면 같은 혈통, 언어, 문화, 관습, 전통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즉 성도를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다양한 이방 민족 출신들도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민족 공동체로서 다양성을 강조하는 말인 국가, 백성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 거룩한 민족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별하셔서 거룩하게 하신 새로운 민족이라는 의미로 거룩한 백성, 즉 거룩한 민족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라고 하고 거룩한 민족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민족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 된 민족입니다. 세상과 다르게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민족입니다.
이 거룩한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나누는 일입니다. 벧전 2:5~8절에서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간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교제가 필수적입니다. 지어져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표현입니다. 다시 9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럽니다.
여기 “소유가 된 백성” 라오스 에이스 페리포이에신(lao;" eij" πperipoivhsin)은 특별한, 가치가 있는 백성을 의미합니다. 여기 페리포에이신이라는 말은 암소라는 말, 페쿠스(πεκυς)에서 나와서 여러 마리 소의 값에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그의 소유라고 번역한 것은 옛날에는 돈이 아니라, 소가 가장 값진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마리 소가 아니라, 수십 마리 소 떼와 맞먹는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그렇다는 말입니까?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로운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미 온 세상, 땅과 바다, 들과 산, 모든 사람과 민족들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지만, 하나님은 그중에서 특별한 사람들을 자기의 소유로 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었고, 신약에서는 교회, 즉 성도인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 원형인 출 19:5~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것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소유이지만, 죄를 지은 세상은 하나님을 떠났으므로, 이제 그중에서 너를 택하여 내 소유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때 “내 소유”라는 말이 쎄귤라, 즉 보배, 보석을 의미합니다. 세상도 하나님의 것이지만, 너는 그중에서 나의 보배이고, 보석이며, 신부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신 7:6~8절에서 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그럽니다. 여기서 성민이라는 말은 암 카도쉬 입니다. 직역하면 거룩한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자기 기업의 백성”이 바로 출애굽기 내 소유, 써큘라(보배)이고, 베드로전서의 보배로운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신분의식을 가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결국, 왕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거룩한 나라로서 성도의 삶의 중심은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왕의 제사장이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로 거류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너희는 나의 보배로운 백성이며 왕의 제사장이라는 신분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신분의식이 중요한 것은 왕의 제사장이 이 땅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왕의 제사장이며 소유된 백성이며 거룩한 나라, 거룩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민족입니다.
우리는 다 왕의 제사장을 거룩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으로 형제와 자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배롭게 여기시는 백성입니다. 보석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왕의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휴! 오늘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줄이고 줄여보지만, 여전히 길기만 합니다. 너무 중요한 표현들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묵상은 분명합니다.
자, 다시 3절입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아멘. 아멘.
맛보았으면 버릴 것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거룩한 제사장, 왕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악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할 것 ( 2:1-3 )
〔1〕 악한 것을 버리라.
1) 버려야 할 죄악들 :
악독 ; 뿌리 깊게 자리잡힌 격분으로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를 입히도록 하기까지 존속되는 것이다.
궤휼 ; 이는 곧 말로 속이는 것을 뜻한다.
외식 ; 복수로 되어있는 이 말은 모든 위선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시기 ;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에 대해서 불쾌해 하는 것이다.
비방하는 말 ; 다른 사람을 반대하여 말하거나 헐뜯는 것을 의미한다.
2)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좋지 못한 죄들에 대해서 경계하며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성화되었지만 아직도 시험 가운데 빠지기 쉽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가장 훌륭한 봉사들이라 할지라도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성실치 못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 할 것이며 우리에게도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버려져야 할 죄가 버려지지 않을 때 그 죄는 우리의 영적 유익과 지속적인 평안을 방해할 것이다.
〔2〕 현명한 의사처럼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들의 영적인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지시해 주고 있다.
이는 그들로 그것에 의해서 자라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권고된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강렬하게 사모하라는 것이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 ; 이는 사람들에 의한 것을 말한다.
갓난아이들 같이 ; 새로 태어난 생명은 그에 합당한 음식이 필요하다. 유아들은 보통, 젖을 사모한다. 그것을 사모하는 그들의 열심은 때로는 대단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모함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 이는 그것에 의해 그들이 자라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한 애정과 사모는 사람들의 거듭난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 지혜가 자라나고 은혜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바라는 바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그것이 처음 발견한 상태대로 버려두지 않는다.
〔3〕 베드로는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한 논지를 덧붙이고 있다(3절).
그는 의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음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 대해서 매우 자비로우시다. 그는 그 자신 안에 충만한 은혜를 가지고 계시다. 우리의 구속자의 자비하심은 그것을 경험으로 직접 맛봄으로써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멀리에 있는 것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을 수는 있지만 맛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자비하심을 경험적으로 맛보려면 믿음에 의해서 그와 연합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경우는 이 생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보는 것이라고 하겠다.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 ( 2:4-12 )
〔1〕 사도는 산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1)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의 강대함과 영속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의 종들에게 그가 그들이 세워질 토대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돌로 불리어지고 있다.
그는 그 자신 안에 영생을 가지고 계신 산 돌이시다. 그가 하나님과 인간에게서 받은 평판과 존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는 버림을 받았으나 하나님께로부터는 택하심을 입었다. 예수에게 나아와(4절).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먼저 그와 결합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에 가까와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소망과 행복의 초석이 되신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사악한 세상에 의해서 버림을 당하셨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이셨으며 또한 가치에 있어서도 보배로운 분이셨다. 이 자비로우신 구주로부터 긍휼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그에게 나아가야 하며 또한 나아감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다 할지라도 우리의 행할 바로서 헛된 바램이 아니라 참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2)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를 기초로 해서 세운 상층부에 대해서 말해 간다(6절).
베드로는 여기서 이들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법규를 권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인의 성전보다도 더욱 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그것은 산 성전인 것이다. 그 기초가 되신 그리스도는 산 돌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산 돌들이며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린다.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영적 생활의 원리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들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집이다. 이 집은 매일 세워지는 것이다. 그 집의 모든 부분은 항상 개량되어가며 그 전체는 새로운 구성원들이 증가되어감으로써 전 시대에 걸쳐서 보충된다.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이 거룩한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하며 또 드릴 것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가장 신령한 제사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헌납을 그리스도께 가져와야 하며 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2〕 베드로는 이사야 28:16의 말씀으로부터 자신이 그리스도를 산 돌로 단언한 것을 더욱 확고하게 하고 있다.
사도들은 성경을 인용함에 있어서 성경의 말씀보다는 그 의미를 더 고수하였다. 성경의 참된 의미가 성경 말씀으로보다는 다른 것으로 더 정확하고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성경의 증거에 의지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규범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가운데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에게 주신 기사는 우리들의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한 돌을…'(사 28:16).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신령한 건축을 위해서 두신 요긴한 모퉁이 돌이시다. 모퉁이 돌은 건축물과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그 건축물을 받쳐 주고 연합시켜 주며 장식해 주는 돌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한 교회 즉 그의 신령한 집에 대해서 그와 같은 분이시다.
〔3〕 베드로는 7절에서 중요한 추론을 끌어내고 있다.
그는 믿는 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는 너희는 그로부터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며 영원히 그를 자랑하며 그로 인해 기뻐할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대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모퉁이의 머릿돌 되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선지자의 증거로부터 추론을 끌어내고 있다. 선지자는 명백하게 그와 같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에서부터 불가피하게 그런한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말했다. 신실한 사역자의 임무, 곧 일반적인 진리를 성도들의 특수한 조건과 상태에 적용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선지자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해서(6절) 그것은 개별적으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도들에게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들은 결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이 다소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확고한 믿음은 전혀 가지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건축자들이 되어야 할 자들이 종종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겪으시는 가장 악한 원수들이 되곤 한다. 외식된 자들이 허위와 가장 원수된 자들의 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수행해 가실 것이다.
〔4〕 베드로는 돌의 비유를 계속 견지하면서 더욱 상세한 묘사를 덧붙이고 있다(8절).
그 말씀은 이사야8:13, 14에서부터 취해지고 있다.
1) 건축자들, 즉 대제사장들은 그를 버렸으며 사람들은 그들을 좇았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불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힌 바 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교훈에 부딪혔으며 그의 교훈의 정결성에 부딪혔다. 즉 구원의 주관자가 되시는 복되신 예수께서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죄와 파멸의 원인이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반석되신 그에게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상당한 특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9절). 유대인들은 그들의 옛날의 특권들을 지나치게 귀중히 여겼다.
① 베드로는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며(7,8절),
순종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참된 특권도 잃어 버리지 않게 될 뿐 아니라 계속해서 '택하신 존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9절).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택하신 족속이다. 즉 그들 모두는 한 가계를 이루고 있으며, 일반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사람들인 것이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의 종들은 죄와 죄인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신성하게 정한 바 된 자들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받으실만한 신령한 봉사와 헌납들을 바치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누구이든간에 거룩한 한 나라를 이루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영예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고귀함과 덕성들은 그들에게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그들의 처음 상태는 지독한 어두움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두움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덕행들로, 자기들을 부르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②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들의 처음 상태와 현재 상태를 비교해 보도록 권하고 있다.
이전에 그들은 백성이 아니었으며 긍휼을 입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긍휼을 입은 자들이 되었다.
〔5〕 베드로는 그들에게 육체의 정욕을 주의하도록 경계시키고 있다(11절).
그는 그 의무가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문제에 대해서 최상의 관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11절). 그 의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이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육체의 정욕을 피해야 하였다.
(1)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존중 : 그들은 '사랑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2) 세상에서 그들의 상태 : 그들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지나가는 나라의 정욕에 빠져 자신들이 지나가는 나라의 정욕에 빠져 자신들의 행로를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3) 죄가 사람에게 끼치는 큰 해 : 죄가 사람에게 큰 해를 끼치는 이유는 그것이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것' 이기 때문이다. 온갖 죄 가운데서 '육체의 정욕'만큼 영혼에 해를 주는 것은 없다.
〔6〕 베드로는 더 나아가 그들에게 선한 행실을 권고한다.
그들은 그들의 숙적들이 될 뿐 아니라, '악행하는 자들'이라고 끊임없이 그들을 비방하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살았다. 12절의 말씀은 곧 다음과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선한 행실은 그들의 입을 닫게 해 줄 뿐 아니라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는 수단이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선한 행실에 있어서 너희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것을 보게 될 때 너희에게 돌아서게 될 것이다. 선한 행실로써 너희 자신을 변호하라. 이것이 그들을 확신시키는 방법이다 복음이 그들에게 이르고 좋은 효과를 거두게 될 때 선한 행실은 그들의 개종을 고무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악한 행실은 그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베드로전서 2:9-10) - 주해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은 ‘만인 제사장직’의 근거가 된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다. 베드로는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분적인 특권에 대해 네 가지로 언급한다.
성도의 영광된 특권을 보여주는 이 구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출 19:5,6 말씀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시내산 언약을 맺으시면서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다. 그리고 그 조건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의 피 언약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사상이 나타나 있다(엡 2:8-10),
베드로가 명시하는 성도로서 지니게 된 네 가지 특권 중에서 첫번째는 ‘택하신 족속’이다.
사 43:20에서도 이와 동일한 표현이 사용된다. 여기서 ‘족속’으로 번역된 ‘게노스’는 '가문, 혈통’이라는 의미를 사이다. 그리고 ‘택하신’으로 번역된 ‘에클렉톤’은 신약 성경에서는 오직 종교적인 의미로만 사용된다. 이 형용사는 하나님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정(눅 23:35 ; 벧전 2:4,6), 천사들의 선정(딤전 5:21),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선정(마 24:22 ; 막 13:27 ; 롬 16:13)을 말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택하신 족속’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었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 또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족속이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육체의 혈통에 의해 누리는 특권은 존재하지 않고, 모퉁이 돌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연합된 자들만이 새롭게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택하신 족속이 곧 저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특권을 동일하게 누리게 되는 ‘영적 이스라엘’인 것이다.
성도들이 가진 두번째 특권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번역된 ‘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에서 ‘바실레이온’은 ‘왕의’, ‘왕족의’, ‘왕자다운’이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이다. 또한 ‘히에라튜마’는 제사장 개인을 지칭하는 ‘히에류스’와 달리 ‘제사장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왕 같은 제사장들’은 ‘왕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직’이나 혹은 ‘왕의 존귀를 부여받은 제사장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왕인 동시에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있는 이러한 존귀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살렘의 왕이면서도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던 멜기세덱(창 14:17-20)에게서도 이러한 면모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성도들이 이러한 영예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왕 같은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및 성령 외에 어느 누구, 어느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영적 지위를 누린다.
둘째,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예배자로 살아간다.
셋째,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보이는 자들로 살아간다.
이처럼 신약 성도는 구약의 제사장이나 왕조차도 누리지 못한 왕과 제사장의 지위를 함께 가지는 영예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들이 가진 세번째 특권은 ‘거룩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거룩한 나라’에 해당하는 ‘에드노스 하기온’이라는 표현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구별된 백성 이스라엘을 지칭하던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지칭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였다는 것은 성도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별되고 정결한 백성들로 살아야 했던 것처럼 구별된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거룩한’에 해당하는 ‘하기온’이 ‘속된 것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놓인’, ‘구별되고 성별된’이라는 기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이를 더욱 분명히 한다.
성도들이 가진 네번째 특권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표현은 출 19:5와 더불어 신 7:6이나 말 3:17에도 동일하게 나온다. 여기에서 ‘그의 소유’에 해당하는 ‘페리포이에신’은 ‘획득(obtaining)’ 과 ‘보존(preservation)’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단어 ‘페리포이에시스’의 목적격이다. 신약 5회 용례 중 엡 1:14 ; 살전 5:9 ; 살후 2:14에서는 ‘얻다’라는 의미로, 히 10:39에서는 ‘구원함 혹은 보존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고, 심판 날까지 보존하여 지키신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라는 말 3:17 말씀은 하나님께서 곧 신약 시대에 성도를 그렇게 삼으실 것이라는 예언인 것으로 보인다(Kelly, Michaels).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하고 소중한 백성이었던 것처럼 이제 신약 시대에는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그 대가로 지불하셔야만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가 그 대가로 지불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의 소유된 그 특권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필요한 모든 영적 자원들을 아낌없이 주실 것이다(롬 8:32).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처럼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들에게 특권들을 부여하셨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곧 그것은 성도들을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자들로 삼기 위함이다.
사도 바울은 구원에 대한 교리를 진술하는 엡 2:8-10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지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가 예비하신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와 유사하게 사도 베드로 역시 본절에서 시내산 언약 체결시 선포되었던 출 19:5,6을 신약 성도와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러한 엄청난 특권을 주신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 목적은 한마디로 ‘삶과 말을 통한 복음 전파’이다.
본문에서 ‘아름다운 덕을’에 해당하는 ‘아레타스’는 ‘탁월’, ‘덕스러운 태도’, ‘미덕’ 등을 의미하는 ‘아레테’의 목적격 복수형이다. 칠십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사 43:21에서 ‘찬송’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NASB는 이 ‘아레타스’ 를 ‘탁월함들(excellencies)’로, KJV와 NIV는 ‘찬양들(praises)’로 번역하였고, 공동 번역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속죄의 죽음을 죽게 하시고 부활 승천케 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그의 모든 일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성도들이 선전해야 하는 ‘아름다운 덕’은 한마디로 ‘복음(the Gospel)’ 인 것이다.
또한 ‘선전하게’에 해당하는 ‘엑상게일레테’ 원형 ‘엑상겔로’는 문자적으로 ‘입 밖으로 발설하다’, ‘널리 선언하다’, ‘선포함으로써 알리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복음을 그의 소유된 백성들이 입을 벌려 널리 선포하도록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전도는 필수이며 의무이다.
과거 하나님은 이 역할을 이스라엘에게 부여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에 빠져서 민족적 배타주의와 교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초로 해서 ‘영적 이스라엘’이 된 성도들에게 과거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모든 특권을 부여하면서 더불어 그들이 강당하기로 예정된 일들을 맡기셨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이러한 특권이 결코 한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전유물처럼 사용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파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딤후 4:2). 이것이 성도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의도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구원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어두움에서 끌어내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는지를 묵상하면서 세상 가운데 증인되는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많은 다른 이유가 있겠으나 복음 전도보다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은 없다(마 28:18-20).
베드로가 성도의 복음 전파의 사명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름다운 덕’의 주체를 단순히 ‘하나님’으로 표현하지 않고 ‘성도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라는 긴 수식구로 표현한 것은 깊은 의미가 었다. 즉 이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은 곧 죄인을 그 비참한 본래의 자리에서 불러내신 후에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관한 것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본문에서 ‘어두운’에 해당하는 명사 ‘스코투스’는 번역 그대로 ‘어두움’, ‘흑암’이라는 의미이며, 좀더 구체적으로는 허물과 죄로 인한 영적 사망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 과거 죄악 가운데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옛 본성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진노받을 삶을 살았었다(엡 2:1-3). 하나님은 바로 그와 같은 상태에 있던 자들을 당신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하심으로써 빛 가운데로 불러내신 것이다.
그런데 그 빛은 보통 빛이 아니라 ‘기이한’ 빛이다. 여기서 ‘기이한’에 해당하는 ‘다우마스톤’의 원형 ‘다우마스토스’는 놀랍고 신비스러우며 보통 인간의 경험과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을 나타낸다(마 21:42 ; 막 12:11 ; 요 9:30 ; 벧전 2:9 ; 계 15:1,3).
여기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토 다우마스톤 아우투 포스’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현실적이고 실존적 측면으로서 거듭나 거룩한 삶을 사는 영적 상태이다. 곧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나기 전 어두움에 속해 하나님을 등진 삶을 살았었다는 사실에 대한 대조적 상황을 보여준다. 어두움에서 살 때에 그들은 거듭난 이후의 영적 삶에 대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요 1:5 ; 3:19,20). 그런 측면에서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은 그 이전의 관점에서 볼 때, 또한 여전히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를 따라 사는 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기이한 빛에 둘러싸인 삶인 것이다.
둘째, 내세적이고 종말론적 측면으로서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딤전 6:16)의 존재 영역이다.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자는 모두 그곳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전혀 거리낌없이 살아 게 된다(고전 13:12 ; 계 21:3). 장차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게 될 그곳은 여전히 인간적 지식과 이성으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다.
'아름다운 덕'을 헬라 철학에서는 '사회가 고귀하게 여기는 성품의 종류'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탁월하신 능력을 드러내심'으로 이해했다(참조, 사 43:21, 70인역). 베드로는 하나님의 탁월하시고 능하신 행동 자체와 이에 대한 찬양, 둘 다를 의도했다고 본다.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여러분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분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본절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그리 스도인들의 신분에 대하여 호 1:6,9,10 ; 2:23을 인용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상태와 그 이후의 상태를 두 가지로 나누어 비교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영어의 not-but 용법을 연이어 사용하여 과거의 부정적 상태와 병확히 대조되는 현재의 긍정적 상태를 강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라고 언급 한다. 여기서 ‘백성’이라고 번역된 ‘라오스’는 어떤 제도적 국가라는 전제 없이 ‘부족’, ‘인종’, ‘인구’, ‘사람들’, ‘군중’(마 4:23 ; 26:5 ; 27:64 ; 막 11:32; 14:2) 등을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며(행 15:14)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를 묘사할 때 쓰이기도 한다. 이처럼 ‘라오스’라는 명사는 ‘국적 불명의 백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단어가 굳이 ‘하나님의’라는 수식어가 없이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 혹은 교회’를 지칭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라는 구절이 ‘전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백성이 아니었지만’ 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는 거듭 나오는 ‘라오스’라는 명사 앞에 ‘하나님의’라는 수식어를 한 번만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특별한 차이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반복을 회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베드로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수신자들에게 그들이 전에는 하나님과 하등의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중생하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얻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때에 그들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 매여 있었고(1:18),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였지만(4:3)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 로는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졌다.
둘째로 베드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전에는 긍휼을 받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긍휼을 얻은’이라고 번역된 ‘엘레에멘테스’는 ‘긍휼을 베풀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엘레에오’의 부정 과거 수동태 분사로서 이전에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긍휼을 오랫동안 얻지 못한 채로 살아왔지만 단회적인 회개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은 박해 가운데 놓인 지금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 때에 긍극적인 구원까지도 얻을 수 있다.
한편, 과거의 상태와 달리 지금 이 놀라운 축복을 받은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답게, 또한 그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답게 살아가야 한다. 다시 과거 긍휼을 얻지 못하던 상태로 떨어져서는 안되고, 오히려 긍흘을 얻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긍홀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축복의 자리로 이끌어야 한다. 베드로는 본 서신의 수신자들의 신앙을 염려하는 목회자의 간절한 심정으로 이와 같은 암시를 주었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성도의 생활 자세(베드로전서 2:11-17)
[ 성경묵상 ]
1:13-2:10 ;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의 정체성 -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성도 / 거룩한 삶에 대한 원론적 교훈 제시
2:11-3:12 ;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을 사회의 여러 영역 속에서 어떻게 적용하여야 할지에 대한 실천적 교훈 / 하늘의 소망을 품은 거룩한 나그네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실제 생활에 대한 교훈
본문(2:11-18) ; 이방인 중에서의 선한 행실(11-12절) 및 지역 사회의 각종 제도에 대한 순복(13-17절)을 권면한 내용
2:11-25 ; 거룩한 나그네로서 살아가야 할 성도들의 생활 자세 / 1. 선한 행실을 가질 것. 2. 세속 제도에 대해 순복할 것. 3. 선행 중에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함으로 감수할 것
[ 질문 1 ]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 성도가 누구와 같다고 표현했는가?(11절)
성도는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다. 이런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것은 부도덕한 정욕의 문화를 삼가고, 선을 행하는 일이다. 정욕의 문화를 삼가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겠지만 본인을 지킬 수 있고, 선을 행하면 사람들의 비난을 차단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 질문 2 ] 제도와 왕에게 순종하되 '주를 위하여'라는 단서를 둔 이유는 무엇인가?(13절)
성도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땅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칼뱅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유한 종이며, 섬기는 자유인"이다. 그래서 주님의 종으로 이 땅의 권세자들의 말도 듣고 법도 지켜야 한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하였다고 악을 행하는 데 힘을 쏟지 말아야 한다.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16절). 아울러 하나님을 경외하고 왕을 공경해야 한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적인 욕정을 멀리하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 주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된 성도들이 상호간에 부르던 정겨운 호칭 / 기독교가 사랑의 공동체임을 잘 보여주는 호칭
'거류민(한글개역, 나그네)' ; 이방 땅에서 '장기 거주'하는 외국인 / 집을 떠나 사는 자
'나그네(한글개역, 행인)' ; '단기 거주'하거나 '지나가는 여행자' / 어떤 곳에 정착하여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옮겨 다시는 자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 ; 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하였으나 이 세상을 통과해 지나가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낱말 / 본향을 하늘에 두고 이 땅에서 외인이 되어 살아가는 성도
육체의 정욕 ; 하나님 밖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인간의 세속적인 욕구나 욕망들 /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인간 본능 / 거듭난 영혼의 의지와 투쟁하는 육감적인 욕망
교훈 ;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 새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옛 자아가 완 전히 사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옛 자아와 새로운 생명이 동시에 존재하며, 그 둘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려고 끊임없이 투쟁한다(갈 5:16,17). 이러한 갈등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갈등이 없는 비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큰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고, 영혼은 육체의 정욕을 거슬러 싸우므로 성도의 마음은 항상 영적 전쟁이다. 성도는 그 전쟁에서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육체의 정욕을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의 생활을 끊지 말아야 한다.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을 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11절의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내적인 모습 ; 거룩한 삶의 소극적 측면의 삶
12절의 외형적인 선행의 모습 ; 한 차원 더 진일보한 적극적 측면의 거룩한 삶
선한 일을 보시는 날(한글개역, 권고하시는 날) ;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그 날 /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면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본서가 쓰여진 A.D.1세기 당시의 시대적 상황
로마인들을 비롯한 헬라인들은 성도들끼리만 공동체를 이루어 성례전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오해하여 끔찍한 행악자 집단이라고 비방하곤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남녀가 함께 모여 근친 상간을 일삼으며, 사람의 고기를 먹고, 동물의 피를 먹는 집단이라고 비난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추행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라고 말한다(Ann. XV. 44). 그러나 트라얀 황제(A.D. 98-117년) 당시 비두니아(Bithynia)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는 그리스도인을 잡아다 가두고 모질게 고문해도 그러한 범죄를 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서 당황했다고 한다(A. M. Stibbs).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더 이상 헬라 사회의 관습에 참여하지 않자 그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이방인들은 계속해서 그들을 온갖 중상 모략으로 비방하였다(벧전 4:3,4).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로마 황제의 박해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임을 감안한다면 그 로마 황제의 권위에 순복하라는 베드로의 말은 비상식적 혹은 비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더구나 당시의 황제는 역사상 가장 잔인한 왕으로 평가받는 네로(A. D. 54-68)가 아닌가? 그러나 베드로는 그처럼 행동해야 할 근거를 ‘주를 위하여’라는 표현을 통해서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면 ‘주를 위하여’라는 표현을 통해서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를 위하여’라는 표 현 속에는 바로 인간의 창조물이라고 여길 수 있는 제도가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주님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제도에 순복하는 것이 곧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모든 섭리에 순복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
주를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모든 제도에 순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제도는 인간들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는 ‘질서’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A. Sand).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총독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하려고, 왕이 보낸 이들입니다.
총독 ; 당시의 로마 황제에 의해 소아시아를 비롯한 식민지에 파송된 관리 / 로마 황제가 세운 제도를 순복하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인 것처럼 하나님이 로마 황제를 통해 보낸 방백들도 인간 영역에서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자들이기에 순복해야 한다.
교훈 ; 만약에 그 위정자들이 권위를 잘못 사용한다면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순복해야 하는가?
우선적으로는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바르지 못한 권위자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할지라도 그 권위를 세우신 하나님 때문에 잘못된 권위자에게라도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주께서 ‘권고하시는 날’(벧전 2:12)에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방편이 될 수가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 이유가 우리 자신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간에 하나님의 선한 덕이 우리를 통해서 이방 세상 가운데로 알려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2:9). 이 경우에 하나님 께서는 그러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현실 세계에서도 위로하시겠지만, 마지막 날에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평강과 기쁨으로 위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 순복하라고 권면(13,14절)하신 이유 /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 ; 선한 일을 하여 어리석은 자의 무식한 말을 막는 것
교훈 ;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라는 누명을 씌워 비난했던(12절) 일과 같튼 상황이 도래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에게 맞서 변론을 할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시대의 성도들처럼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선행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비방이나 험담 또는 박해를 잠잠케 할 뿐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복음의 진가를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악을 가리는데'에서 '가린다'는 '덮음'이라는 뜻이며, 교회와 성도의 죄를 가리는 데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오용하는 잘못을 범치 말라는 뜻이다.
교훈 ; 불신자들의 악한 행동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분노할 수 있고 물리적인 힘을 사용해서 맞대항하는 행동을 내보일 자유도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유를 구실로 악한 일을 행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곧 주 안에서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나름대로 행동할 자유가 분명히 있지만, 그 자유가 복음 전도에 방해가 되는 악한 행동까지도 허용하는 방종이 되어서는 안되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자유조차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신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십시오.
베드로는 네 가지 찬탄할만한 가르침으로, 13-16절의 권면 내용을 결론 내렸다(17절).
(1) 뭇사람을 공경하며(17절) ;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마땅히 공경해야 할 것이 주어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멸시받아서는 안되며 악한 자들도 공경받아야 하되 그들의 사악함 때문으로가 아니라 다른 어떤 특질 때문으로 공경 받아야 한다.
(2) 형제를 사랑하며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형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 가장 높은 경외감으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부족하게 되면 다른 새의무는 결코 행해질 수 없다.
(4) 왕을 공경하라.
[ 복있는사람, 2018년 9,10월호 ]
백성들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의무(13-17)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에 있어서 소문난 개혁자 들이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소란케 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행정 관리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규범을 정해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1〕 요구된 의무는 순복이었다(13절).
〔2〕 순복해야 할 사람들과 대상들(13,14절) :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에 순복해야 했다. 행정 관직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이다. 또한 이것은 모든 족속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일반적인 규범이며 확립된 정부의 형태를 이루게 했다. 그리고 특수한 것으로 '위에 있는 왕이나 왕의 보냄을 받은 방백에게' 순복해야 했다.
〔3〕 이러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이유(15,16절)
1) 그 이유는 인간의 유익을 위해 행정 관리를 정하신 주를 위해서이다.
2) 그 이유는 행정관의 직무의 목적과 임무에서 나타난다. 즉 행정관의 직무는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신앙은 시민을 위한 정부에 대해서 최고의 지지를 보낸다. 행정관이 자신의 의무를 가장 잘 수행하는 방법과 세상을 개선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징벌과 포상을 잘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은 행정 관리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이는 선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바 이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불합리한 비난을 막기 위해서 스스로 힘써 처신해야 한다.
4)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영적 특성 :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자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자유한 것인가? 이는 결코 의무나, 행정 관리들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자유케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은 사람들로부터 자유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4〕 베드로는 네 가지 찬탄할만한 가르침으로 글을 맺고 있다(17절).
(1) 뭇사람을 공경하며(17절) ;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마땅히 공경해야 할 것이 주어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멸시받아서는 안되며 악한 자들도 공경받아야 하되 그들의 사악함 때문으로가 아니라 다른 어떤 특질 때문으로 공경 받아야 한다.
(2) 형제를 사랑하며 ;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형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 가장 높은 경외감으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부족하게 되면 다른 새의무는 결코 행해질 수 없다.
(4) 왕을 공경하라.
출처 ; 메튜헨리 주석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벧전 2:18-20)
[ 설교 ]
본문 10절을 보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라고 하였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이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선을 행함으로 인해 받는 고난을 참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불평부터 먼저 하는 경향이 있다. 왜 선을 행하는데 어려움이 당하는지 몰라 불평하게 된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참으려고 하지 않는다.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학교 현장을 살펴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요즘 학교 현장은 학생이 행복한 교육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학생이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렵고 힘든 공부를 하는 것은 하지 않고, 편하게 노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학교 현장에서 '신나게 공부하고 주인답게 행동하는 어린이를 기른다'는 목표를 갖고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공부가 신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힘든다고 한다. 그러나 신이 나는 시점은 일이나 공부를 할 때 신이 나는 것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있어도 그것을 참고 이겨내어 자신이 세워놓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신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면 신나게 활동하지 않는다. 어려움이 있으면 어려운 일을 하게 한 사람들을 찾아 불평하거나 원망한다. 또한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기도 한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난을 즐거워하며 참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을 살펴 보면, 악을 행하는 것도 아닌 선을 행하는 데 어려움을 당한다고 한다. 고난까지 당한다고 한다. 그래도 참아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라고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로, 주인들에게 범사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아야 한다.
셋째로, 선을 행하고 받는 고난을 참아야 한다.
[ 성경묵상 ]
요셉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다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았다. 그리하여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
다윗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죽임으로 인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는 억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이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였다. 그 결과 그는 마침내 이스라엘 장로들의 기름 부음 받은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형통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아무 어려움도 없이 순조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여도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형통한 축복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다. 그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본을 보여 주셨다. 이는 우리들도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다(2:21).
이처럼 선을 행하고도 참은 자들의 삶은 아름답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상전들에게 순복해야 할 이유 :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 가야 하는 성도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 제도에 순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 베드로는, 이어 사회에서 가장 낮은 신분에 속한 이들에게 자신들의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성도들을 ‘하나님의 종’(16절)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도 연결된다. 즉 아무리 낮은 차원에 있는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16절)는 삶의 기본원칙 안에서 각자 자신의 주인들에게 순복해야한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8절)고 격려하고 있다. 종의 위치가 사회 구조 가운데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범사에 두려워함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하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종들은 주인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인들에게 순복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 가운데는 관용한 이들도 있지만 까다로운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노예의 신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주인에게 순복해야한다. 이울러 이러한 공경심은 주인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우러나와야 한다.
이에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19,20절)"고 말한다. 심지어 주인에게 애매한 대우를 받거나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선을 행해야 하는데, 이는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고 죄를 지어 주인에게 매를 맞는다는 것은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종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된다. 이러한 윤리적인 교훈은 성도들의 신분이 사회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든지 모든 일에 있어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자세로 상전들을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절)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 누구에게도 속함이 없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고 하나님께 순복하셨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사회 제도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셨으며 친히 고난을 인내하시는 모범을 보이셨다. 때문에 베드로는그리스도의 모범에 근거하여 성도들이 인내로써 고난을 견뎌 낼 작정으로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있다(]. Calvin).
애매하게 고난을 당히는 것보다 더 부당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을지라도 성도들이 자신의 눈을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돌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베드로는 고난을 인내하는 모범을 보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 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22,23절).
성도들이 고난을 인내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의 성향은 자신이 해를 받게 되면 즉시 보복할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일체의 보복을 배제하셨던 사실을 모범으로 삼고 성도들은 조용히 고난을 참아야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마음에 고삐를 매어서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원수를 갚는 일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다. 때문에 악인들의 비난과 폭력을 인내로써 견뎌 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이 없다면 불경건한 지들의 뜻에 복종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하나님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베드로는 고난을 인내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훨씬 더 풍성한 열매를 공급하신다는 점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절)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인내의 본을 보이셨으며, 성도들을 구속하시고 생명으로 복귀시키셨기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 굳게 결속되었고 마땅히 기쁨으로 그의 본을 따라야 할 것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은 자신들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목적을 이 땅에서 성취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가리켜 베드로는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절)고 말하고 있다. 성도들의 구원은 우리 영혼의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오는 것을 함의한다.
예전에 우리는 그분의 손으로 지음받은 그분의 소유였지만 죄로 인해 잃어진 자들이 되었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돌보시는 손길 안으로 돌아왔으며 영원히 안전한 보장을 받는 위치에 서 있게 되었다(MacDonald). 이 사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순복하여야 하며, 그러한 삶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인 위치에서 상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은 상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구현해 낼 수 있게 된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하인 여러분, 가장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본절에는 두 부류의 대조적인 사회 계층이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사환’과 ‘주인’이다.
먼저 ‘사환들’로 번역된 ‘오이케타이’는 문자적으로는 ‘집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로서, 일반적으로 ‘종’을 의미하는 ‘둘로스’ 보다는 제한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이며, 한 집안에서 거주하며 주인의 권위 아래서 집안 일을 돌보아주는 ‘가정에 속한 하인’(마 24:45 ; 눅 16:13 ; 행 10:17 ; 롬 14:4)을 나타낸다.
특별히 본서에서 베드로가 사환들에게는 명령을 내리면서 주인들에게는 그 어떤 권면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쓴 골로새서의 경우(골 3:22-4:1)와 다르다. 이로 보아 바울 서신의 수신자들 가운데는 종들과 더불어 주인들도 꽤 있었을 것이나 베드로 서신의 수신자들은 상당수가 가정에 속한 하인들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주인들’로 번역된 ‘데스포테스’는 ‘소유주’ 혹은 ‘지배자(군주)’를 의미한다. 고대 헬라 세계에서 ‘데스포테스’는 신분을 나타내는 사회학적인 용어로서 노예들을 위한 규칙서에서도 나타난다. 그 규칙서에서 ‘데스포테스’는 노예와 대비하여 주인을 가리키는 데 쓰인 용어이다. 본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된 집안 하인들은 자기 자신을 주인들에게 두려워하는 태도로 복종시켜야 할 것을(딛 2:9) 명령한다. 이 명령은 주인들을 모든 공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들로 여겨야 한다(딤전 6:1)는 바울의 견해와도 유사하다. 그런데 바울은 이 경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만약에 그 주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면 그리스도인 된 종들은 그들을 훨씬 더 열성적으로 섬겨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 노예들은 자신의 주인들이 신앙 안에서 한 지체된 형제이기 때문에 복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들처럼 그리스도와 연합된 형제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불신 주인보다 더 깎듯이, 그리고 충성되게 그 주인을 섬겨야 한다고 권면한 것이다(딤전 6:2).
이와 더불어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인에 대한 사환들의 순복의 자세를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두려워함’으로 번역된 ‘포보’의 원형 ‘포보스’는 앞선 17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세를 말하면서 사용된 ‘두려워하며’에 해당하는 ‘포베이스데’와 그 어근이 같다. 이처럼 본절에서 주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주인에 대한 사환의 순복 역시 인간 주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주인에게 주인으로서 권위를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에게 순복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기독교 윤리의 근원적 출발점은 하나님께 있다.
사환들이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까다로운 주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너회들이 어렵겠지만’이라는 단서조차 없이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 하는 것과 동일한 자세로 순종하라고 명한다.
여기에서 ‘까다로운 자들’에 해당하는 ‘스콜리오이스’의 원형 ‘스콜리오스’는 본래 길이 구부러진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눅 3:5). 이것이 비유적으로 쓰이면 ‘비풀어진’, ‘패역한’, ‘공정치 못한’, ‘심술궂은’이라는 의미가 된다. 행 2:40과 빌 2:15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를 지칭하면서 ‘패역한’과 ‘어그러진’이란 의미로 각각 쓰였다.
이러한 용례를 통해서 볼 때 본문의 ‘스콜리오이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서 정직성과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며, 약자에 대해서 안하 무인격인 그런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제도가 박해를 가져다주는 경우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그것에 순복해야 하는 것처럼 베드로는 이와 같은 주인들에게도 사환들이 순복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성품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주님의 아름다운 덕이 세상 가운데 널리 전해지게 될 것이다. 이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의 행동의 원칙이 그 시대가 노예 제도를 용인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할 것으로 요청되지 않고 주님 때문에 그처럼 행하라고 요청되었음을 상기할 때, 오늘날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입장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11-18절에서 베드로는 성도는 마땅히 이방인 중에서도 선한 행실을 유지하며 각종 제도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순복의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19-25절에서 베드로는 이러한 선행을 하는 중에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며 그러한 때에 고난을 인내함으로 감수할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모범으로서 애매한 고난을 참으신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그런데 선행 중에 당하는 고난을 감수하라는 이와 같은 권면은 앞선 18절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이 이유 접속사 ‘가르’로 시작되는 문장으로서 18절의 이유 구문 인데서도 잘 밝혀진다. 즉 본절은 까다로운 주인들에게까지 순복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자들이 주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는 것이 아름답기 때문임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부당하게’라고 번역이 되는 ‘아디코스’는 부정 불변사 ‘아’와 ‘공의’(행 28:4)란 의미의 명사 ‘디케’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공의가 상실된’ 즉 ‘불공정하게’, ‘부당하게’란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
또한 ‘고난을 받아도’라고 번역된 ‘파스콘’은 ‘(고통, 변화, 시련 따위를) 받다, 당하다, 경험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파스코’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 현재 분사형은 부당하게 고통을 겪는 것이 지속적으로 진행중인 일임을 알게 해준다.
그러므로 본절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8절에서 ‘까다로운 주인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인 노예들이 감수해야 되는 부당한 고난’과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인 노예들에게 ‘하나님을 생각하며 슬픔을 참으라’고 권고한다. 여기서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의식을 통해서’ 혹은 ‘하나님을 의식해서(NIV)’, ‘하나님을 잊지 않음으로써(RSV)’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문자적인 의미들은 이들이 당하는 고통과 시련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또한 그분께서 그 고통받는 현장 가운데 임재해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비뚤어지고 불의한 주인 아래에서 부당하게 겪는 고통이나 시련의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심판자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갖고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이상 세상의 기본적인 방침들을 존중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땅에 몸담고 살아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하나님 나라 시민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선행 중에 당하는 고난을 참는 것이 아름답다라고 평가한다. 여기서 ‘아름다우나’에 해당하는 ‘카리스’는 ‘은혜’라는 의미이며, 20절에도 동일하게 쓰였다. 여기 이 두 구절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J.N.D Kelly), 눅 6:32-34를 보면 이 단어가 세 번이나 ‘칭찬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한다거나, 받기를 바라고 빌려준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문맥이다. 즉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이나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용례를 고려할 때 본절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식함으로써 그 슬픔을 참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시고 그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게 할 만한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란 사실이 이 단어 ‘차리스’ 가운데 내포되어 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는 19절 및 본절 하반절에 둘러싸여 있는 구절로서 두 구절의 대조적인 의미를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죄가 있어’와 ‘매를 맞고’에 해당하는 두 단어는 모두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죄를 짓고 그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응당한 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사환들 자신이 과오 즉 죄를 범해서 주인으로부터 매를 계속적으로 맞으면서도 참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한다.
여기에서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번역된 ‘클레오스’는 ‘평판’, ‘위신’, ‘영광’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죄가 있어 매를 맞는 자들은 오히려 불명예를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당시 노예들 중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주인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고통을 애써 참음으로써 동료 노예들에게 자신의 강인함을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한 태도는 그 노예 자신에게 영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치와 말거리가 될 뿐임을 지적한다.
반면에 사환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으로부터 부당한 고난이 계속될 때 그것을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으로 참는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임을 강조한다. 사회적인 신분이 종이라고 해도 그가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자신의 주인에게 속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그들이 행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는 결국 자신의 궁극적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 가치가 가려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분의 종이다. 그러므로 자신 앞에 아무리 어려운 시험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을 항상 눈앞에 모신 듯한 자세로 그분이 칭찬하실 만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릴 만한 일들을 선택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따뜻한 사역자(베드로전서 3:8~12)
성경 : 벧전 3:8~12
설교 : 따뜻한 사역자 (조성국 목사 - 고신대 교목실장)
본문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Finally, [be ye] all of one mind, having compassion one of another, love as brethren, [be] pitiful, [be] courteous:
Finally, (be) ye all likeminded, compassionate, loving as brethren, tenderhearted, humbleminded:
8 Finally, all of you, have unity of spirit, sympathy, love of the brethren, a tender heart and a humble mind.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9 Not rendering evil for evil, or railing for railing: but contrariwise blessing; knowing that ye are thereunto called, that ye should inherit a blessing.
9 not rendering evil for evil, or reviling for reviling; but contrariwise blessing; for hereunto were ye called, that ye should inherit a blessing.
9 Do not return evil for evil or reviling for reviling; but on the contrary bless, for to this you have been called, that you may obtain a blessing.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0 For he that will love life, and see good days, let him refrain his tongue from evil, and his lips that they speak no guile:
10 For, He that would love life, And see good days, Let him refrain his tongue from evil, And his lips that they speak no guile:
10 For "He that would love life and see good days, let him keep his tongue from evil and his lips from speaking guile;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1 Let him eschew evil, and do good; let him seek peace, and ensue it.
11 And let him turn away from evil, and do good; Let him seek peace, and pursue it.
11 let him turn away from evil and do right; let him seek peace and pursue it.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2 For the eyes of the Lord [are] over the righteous, and his ears [are open] unto their prayers: but the face of the Lord [is] against them that do evil.
12 For the eyes of the Lord are upon the righteous, And his ears unto their supplication: But the face of the Lord is upon them that do evil.
12 For the eyes of the Lord are upon the righteous, and his ears are open to their prayer. But the face of the Lord is against those that do evil."
설교 요약
1. 본문 선정 배경은 다음 3가지이다.
1-1. 국제시장 영화의 주인공인 덕수의 생애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마음이 여리고 따뜻하다. 그러나 밖으로 나타난 표정은 경직되어 있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불쌍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거울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은 남에게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
1-2. 윤평준의 칼럼에 화병을 부르는 우리 사회라는 주제의 글을 읽었다. 우리나라는 화병이 가득한 사람들로 가득찬 불공평한 사회이다. 울혈사회라고 표현하였다.
1-3. 한국갤럽종교연구소의 비종교인들의 종교에 대한 호감도 조사 결과가 불교 25%, 천주교 18%, 개신교 10%로 나타난 것을 보았다. 개신교에 대한 선호도도 낮지만 신자의 수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교인들도 사랑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
2. 이러한 배경에서 성도의 따뜻함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밖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모습이 따뜻해야 함이 필요하다.
3. 따뜻한 사역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4. 8절의 말씀을 요약하여 한 가지로 표현하면 따뜻함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동정심, 사랑, 긍휼 이 3가지 덕목은 우리들 마음의 따뜻함으로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 마음을 같이해야 한다.
5. 8절의 '마지막으로'라는 말에는 '결론적으로'라는 뜻이 축약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6. 9절에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다.
7. 복을 받기 위해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8. 12절에 구약 성경 시편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인자의 눈은 따뜻한 사람을 향하시고, 귀를 기울여 따뜻한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
9. 기독교 복음 사역의 핵심이다.
10. 따뜻함의 대상은 첫째는 가까운 사람들(부모와 배우자)이다. 둘째는 자녀이다. 셋째는 교회 공동체이다. 넷째는 약자이다.
11. 가까운 사람을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질시하고 미워하며 원수로 지내는 경우가 너무 많은 현실이다.
12. 따뜻한 사회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유교 사상때문이다. 아랫사람에게는 의무이고 윗사람에게는 선택사항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13. 두번째,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원리가 거래이기 때문이다. 따뜻함을 거래하고 있다. 거래 개념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14. 윗사람이 먼저, 거래의 개념을 떠나서 복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15. 자신은 덕수처럼 자신은 모르지만 남의 눈에는 경직되어 보인다.
16. 약자에게 따뜻함을 보여야 하는데, 높은 기준은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약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따지기를 좋아하는 기독교인으로 비추어질 때가 많다.
17. 성공한 사람 곁에 있고 싶어 하고, 부한 사람, 강자 곁에 있고 싶어하는 습성이 있다. 기독교인은 일반 사회인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따뜻함을 보여야 한다.
18. 동정하며, 사랑하며, 불쌍히 여김의 대상은 강자보다 약자이다.
19. 마태복음 25장 31~46절을 보면, 특히 46절에는 약자에게 따뜻하게 한 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며,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0. 교회도, 교인도, 사회인도 약자를 무시하거나, 약자로부터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약자의 분노를 사는 일을 행해서는 안된다. 갑질하지 말고, 종업원들의 분노를 사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약자에게 따뜻하게 행하면 교회가 사회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다.
21. 체온이 따뜻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복음은 생명이며 따뜻함이다. 건강한 사람은 따뜻함을 실천하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감정의 명령이 아닌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사역자
벧전-3, 베드로전서 메시지 요약
1. 성도들이 간직한 하늘의 산 소망
베드로전서는 시련 가운데에 처한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임에도 하나님께 대한 감격적인 찬송으로 시작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거듭나게 하사 썩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하늘의 산 소망을 주신 것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간직한 하늘의 소망(heavenly hope)은 땅의 소망(earthly hope)과 다르다 땅에 속한 소망은 결국 썩고 쇠하고 마는 ‘죽은’ 소망이지만, 하늘의 소망은 썩지도 쇠하지도 않는 영원한 ‘산’ 소망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성도가 간직한 하늘의 산 소망이야말로 진정 시련 중에서도 감격적인 찬송을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2. 시련 중에서 누리는 성도의 기쁨
베드로전서는 성도가 시련 중에 기뻐할 근거와 이유가 무엇인지 보여주며, 또 시련 중에 적극 기뻐할 것을 권면한다(1:6,8 ; 4:12,13). 세상 사람들은 시련 중에서는 기뻐하지 않으며 기뻐할 이유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성도는 시련 중에도 기뻐할 수 있으며 또 기뻐해야 한다. 성도는 시련이 앗아갈 수 없는 영혼의 구원을 얻은 자이며, 또 믿음의 시련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서(4:12) 성도는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7).
3. 성도의 신분적 정체성 및 거룩한 나그네의 삶
본 서신은 성도는 비록 이방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육체의 정욕을 쫓는 이방인들의 삶과는 달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교훈한다. 그리고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와 근거는 성도들의 신분적 정체성(正體性)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즉 성도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공동체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들이 세상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과 같을 수는 없다. 달리 말하면, 성도는 이방 세계 속에서 이방인들과 어울려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서도 거룩한 삶으로써 구별되어야 할 ‘거룩한 나그네들(holy strangers)’인 것이다.
4. 성도간의 진실한 사랑과 겸손
본 서신은 거듭나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이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1:22 ; 4:8),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불쌍히 여기고 체휼하며(3:8), 그리고 피차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5:5,6) 권면하고 있다. 사랑과 겸손은 동일한 말씀의 씨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서로에 대한 당연한 자세이다. 그리고 성도간의 뜨거운 사랑은 시련의 때를 이길 수 있는 커다란 힘과 위로임에 틀림없다.
5. 이방 사회 속에서의 선한 행실의 중요성
베드로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성도들에게 이방인 중에 살면서 선한 행실에 힘쓸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2:11,12,20 ; 3:16,17). 또한 비록 세속에 속한 인간들의 제도라 할지라도, 인간 사회의 각종 제도에 순복하도록 교훈한다(2:13,14). 성도가 거룩한 나그네로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사회나 국가의 제도를 거부하고 불신자들을 터부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복을 비는 것과 같이, 불신자들과의 공존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선한 행실’에 힘쓰는 것이다. 성도가 비록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2:20 ; 3:17). 그리고 성도의 선한 행실을 통해서 결국 불신자들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때가 올 것이다(2:12).
6. 고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세
본 서신은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고난의 증인이었던(5:1) 베드로가, 고난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기록한 서신이다. 따라서 본 서신에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에 대해 어떤 인식과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적절한 교훈이 담겨 있다.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있어 고난은 힘겹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그러했을 것처럼, 본 서신을 깊이 읽고 묵상한다면 고난에 처한 성도들은 충분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며, 또한 고난에 대해 새로운 인식과 자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7. 교회 지도자들의 목양 자세
베드로는 본 서신에서 장로들이 고난에 처해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어떤 자세로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즉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때, 첫째, 부득이함이 아닌 자원함으로, 둘째, 더러운 이(利)가 아닌 즐거운 뜻으로, 셋째,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본을 보이는 자세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목양의 사명을 첫째, 감사하는 마음으로, 둘째, 사리 사욕의 목적이 아닌 섬기는 마음으로, 셋째, 권위와 통제의 방법보다는 본을 보이는 방법으로 수행하라고 하는 것이다. 장로들에 대한 이러한 지침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의 사역 자세에 대한 교훈으로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자신에게 맡겨진 성도를 감당하는 지도자는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벧전-2, 베드로전서의 내용 구조
베드로전서는 여러 가지 시련에 직면한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격려의 서신(the Epist1e of Encouragement)’이다.
이러한 전체적 내용과 목적을 염두에 두고서 본 서신의 내용 구조를 살펴보자면 크게 1:1-12의 도입부, 1:13-4:19의 본론부, 5:1-14의 종결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본 서신의 도입부인 1:1-12에서는 성도의 ‘산 소망(the living hope)’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 저자 베드로는 소아시아 일대에 흩어진 성도들에 대한 간략한 문안 인사를 전한 후,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사 하늘의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격적인 찬송을 올려드린다. 그리고 성도는 비록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넘치는 구원의 은혜로 인하여 시련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성도들은 넘치는 구원의 은혜와 하늘의 산 소망을 가진 자라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베드로는 시련에 처한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서신의 본론부인 1:13-4:19에서는 성도의 신분과 고난에 대한 바른 인식에 근거한 굳센 믿음과 생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러한 중반부는 다시 1:13-3:12과 3:13-4: 19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1:13-3:12은 거룩한 삶의 필연성 인식 및 실천적 권면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내용상 다시 1:13-2:10과 2:11-3:12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1:13-2:10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성도의 정체성을 제시하고 있다. 성도의 정체성과 거룩한 삶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곧 전자는 후자의 근거이자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베드로는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고하면서. 그 권면의 근거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 성도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임을 제시한다. 또한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씨로 거듭난 자로서 거짓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기에, 더욱 뜨거운 형제 사랑을 나눌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성도들의 영적 신분을 그리스도를 모퉁이돌로 하여 세워져 가는 ‘신령한 집’ 및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께 속한 성도 공동체의 거룩한 특성을 인상 깊게 제시하고 있다.
1:13-2:10이 성도들의 정체성을 제시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원리적인 차원에서 권면하였다면, 2:11-3:12은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성도들의 거룩한 삶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방 세계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나그네들(holy strangers)’로서 선한 행실에 힘쓰며 인간 사회의 각종 제도에 순복할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선행 중에 고난을 당하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감수하도록 격려한다. 또한 비록 남편이 불신자일 경우라 할지라도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며, 또 남편은 아내를 귀하게 여길 것을 권면한다. 이어 성도 상호간 및 사회적 인간 관계 속에서 사랑과 선행을 추구할 것을 권면함으로써 거룩한 삶에 대한 실천적 권면들을 마무리하고 있다.
다음으로 3:13-4:19에서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앞서 도입부 및 1:13-3:12에서 성도의 시련의 문제를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여기서는 고난 극복을 위한 성도의 자세를 보다 심층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먼저 베드로는 성도들이 이방 사회 속에서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의를 위한 고난이며 복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의를 위한 고난의 본을 보이셨기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할 것을 권면한다. 그리하여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끝으로 종결부 5:1-14에서는 여러 부류의 성도들을 향한 겸손과 인내에 대한 권면을 다루고 있다.
먼저, 5:1-6에서 베드로는 교회 지도자들인 장로들의 목양(牧羊) 자세 및 성도 상호간의 겸손의 자세에 대한 교훈을 제시한다. 이는 문맥상 곧 큰 고난에 직면할 때 교회가 공동체적 차원에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교훈한다고 할 수 있다.
이어 5:7-15에서 베드로는 마귀를 대적하라고 함으로써 고난에 대처하는 문제는 고난을 통해 성도를 넘어뜨리려 하는 마귀와의 영적 차원의 싸움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또한 고난은 본 서신의 수신자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당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특히 서신 말미의 진술은 본 서신 전체의 기록 목적을 집약한 것으로서 인상적이다. 즉 베드로는 고난 및 고난에서의 보호가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며 이러한 은혜에 굳게 설 것을 결론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5:12).
이처럼 본 서신은 고난에 대한 성도의 인식과 자세에 대해 마지막으로 강조한 다음, 간략한 문안 인사와 축도로써 종결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묵상 ]
22::18-25 ; 초대 교회 시대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노예 신분으로 있었다. 당시의 노예 제도는 비인간적인 제도로서, 마땅히 폐지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제도가 존속해 있는 한 그리스도인 노예들은 믿음과 선행으로 많은 고난들을 인내해야 했다. 그것은 곧 고난의 종으로 사셨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아가페 큰글성경
직장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고난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꾸중을 듣고도, 자신의 잘못은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 시키는 경우가 많다. 직장 바깥에서 자신의 허물은 덮어놓고 상관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지적하는 자들도 많다. 이러한 형태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 사도 베드로는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 질문 1 ] 까다로운 자들에게 부당한 일을 당할 때 성도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18-20절)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한다(18절). 선하고 관용이 많은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주인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사환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잘못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알더라도 감춘다. 자신들의 상관이 성질이 까다롭고 고약하다고 한다. 죄의 유무와 관계 없이, 애매한 고난이든 아니든 참아야 한다. 고난이 올 때마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생각함으로 참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20절).
[ 질문 2 ] 성도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하는가?(21-25절)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 본을 보였다. 우리도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다(21절).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는 죄도 없으시고, 거짓말도 하지 않으셨고, 욕을 당했지만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고, 고난을 당하셨지만 위협하지 않으셨다(22-23절).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다 맡기셨다. 그런 후에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다(24절).
양은 길을 잘 잃는다. 그래서 목자가 필요하다. 길을 잃었다면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분의 고난 당하심을 보고 본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워진다.
링겔만 효과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하인 여러분, 가장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까다로운 자' ; 신체적으로 종들을 학대하거나 도는 임금 지불과 노동환경과 일 자체에 대한 기대에 있어서 마음이 비뚤어지고 부정직한 주인을 말한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환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으로부터 부당한 고난이 계속될 때 그것을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으로 참는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임을 강조한다. 사회적인 신분이 종이라고 해도 그가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자신의 주인에게 속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그들이 행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는 결국 자신의 궁극적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 가치가 가려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그분의 종이다. 그러므로 자신 앞에 아무리 어려운 시험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을 항상 눈앞에 모신 듯한 자세로 그분이 칭찬하실 만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릴 만한 일들을 선택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그는 죄를 지은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 ; 예수님은 자신과 모든 상황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셨다. 신자들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힘으로만 고난을 견디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 모든 동기들을 살피시고, 모든 인간의 배후에 있는 동기들을 아시는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는 우리 죄를 그의 몸에 몸소 지시고,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구약의 희생 제사에서처럼 제물로 드려진 동물에 제사장이 안수할 때에 죄를 지은 사람의 죄가 희생 제물에게로 옮겨지면서 그 죄가 깨끗이 제거되었듯이, 죄 범한 모든 사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그에게로 옮겨지고 우리의 죄는 깨끗하게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사함의 은총을 경험한 성도들은 더 이상 범죄하는 생활을 하지 않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할 것이다.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전에는 여러분이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이, 목자이시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 성도들이라면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보호하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쁜 소식은 고난과 박해에 직면해 있는 베드로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을 것
특별한 지시들 ( 2:13-25 )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반드시 선해야 한다.
1. 백성들의 경우(13-17)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에 있어서 소문난 개혁자 들이었을 뿐 아니라 나라를 소란케 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행정 관리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규범을 정해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1〕 요구된 의무는 순복이었다.
〔2〕 순복해야 할 사람들과 대상들 :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에 순복해야 했다. 행정 관직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이다. 또한 이것은 모든 족속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일반적인 규범이며 확립된 정부의 형태를 이루게 했다. 그리고 특수한 것으로 '위에 있는 왕이나 왕의 보냄을 받은 방백에게' 순복해야 했다.
〔3〕 이러한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이유.
1) 그 이유는 인간의 유익을 위해 행정 관리를 정하신 주를 위해서이다.
2) 그 이유는 행정관의 직무의 목적과 임무에서 나타난다.
즉 행정관의 직무는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신앙은 시민을 위한 정부에 대해서 최고의 지지를 보낸다. 행정관이 자신의 의무를 가장 잘 수행하는 방법과 세상을 개선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징벌과 포상을 잘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은 행정 관리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이는 선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바 이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장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불합리한 비난을 막기 위해서 스스로 힘써 처신해야 한다.
4)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영적 특성 :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자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자유한 것인가? 이는 결코 의무나, 행정 관리들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자유케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은 사람들로부터 자유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4〕 베드로는 네 가지 찬탄할만한 가르침으로 글을 맺고 있다.
(1) 웃사람을 공경하며(17절).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마땅히 공경해야 할 것이 주어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멸시받아서는 안되며 악한 자들도 공경받아야 하되 그들의 사악함 때문으로가 아니라 다른 어떤 특질 때문으로 공경 받아야 한다.
(2) 형제를 사랑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형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3)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가장 높은 경외감으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부족하게 되면 다른 새의무는 결코 행해질 수 없다.
(4) 왕을 공경하라.
2. 종들의 경우(18-25)
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믿지 아니하는 잔인한 상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도는 '사환들아 순복하라'고 말한다.
〔1〕 베드로는 그들에게 '순복할 것'을 명한다.
그것도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악하고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할 것을 명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의 죄악된 비행이 다른 쪽의 죄악된 처신을 결코 정당화 해 주지는 못한다. 종은 비록 그 상전이 죄악되고 까다롭다 할지라도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어야 한다. 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들과 아랫 사람들에게 온유하며 관용을 베푸는 자들이다.
〔2〕 베드로는 그들에게 순복할 것에 대해서 조리있게 말해 간다.
1) 만일 그들이 부당하게 고난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역경을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것이 될 것이다(19,20절).
세상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만큼 비참한 상태란 없다. 아무리 비참한 가운데 처한 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가장 양심적인 사람들이 가장 큰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절). 이런 류의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칭찬받을 만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자들이다. 마땅히 고난 당하는 자들은 인내로서 견뎌야만 한다.
2) 그리스도인 종들이 부당한 고난 가운데서 참아야 할 것을 격려해 주는 더 큰 이유(21절) :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그리스도께서 본이 되신 것에서 취해지고 있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당하는 자들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을 각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즉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고난 당하셨다(24절).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사실은 우리가 세상에서 직면하게 되는 가장 부당하고 지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를 잠잠케 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어떻게 죄인된 우리가 후세에 말할 수 없는 축복들을 만들어 주는 이 생의 가벼운 환난들에 순복하지 않겠는가?
〔3〕 그리스도께서 순복과 인내의 본을 보이신 것이 여기에 서술되어 있다.
(1) 그리스도께서는 부당하게 고난 받으셨다(22절). 그의 행위에 있어서 뿐 아니라 그의 말도 모두 신실했으며 의롭고 옳았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인내로 고난 받으셨다(23절). 죄에 대해서 분개한다고 해서 그것이 범한 죄를 정당화 시켜줄 수는 결코 없다. 죄에 대한 변명은 결코 중요치 않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는 보다 강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단지 고난 아래서 참는 것의 본이기 위해서만 계획되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 베드로는 여기서 그 죽으심의 더 영화로운 계획과 결과에 대해서 덧붙여 말해 간다.
친히. 이는 고난 받는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으로 "몸소"라는 말이다. '친히'라는 표현은 그를 다른 짐승의 피를 드린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과 구분짓기 위해 강조하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가 당하신 고난들은 책찍에 맞으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 얼마나 비참하고 굴욕적인 형벌이었는가! 그가 고난 당하신 이유를 보도록 하자. 우리죄를 담당하셨으니(24절).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 그는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것이다. 마치 속죄 염소가 상징적으로 사람들의 죄를 머리에 지고 멀리 내몰림을 당하여 그 죄를 단번에 담당하시고 세상 죄를 없이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의 열매는 곧 우리의 성화와 칭의이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은 것이다.
〔5〕 그들의 이전 상태와 현재 상태의 차이점(25절).
(1) 인간의 죄: 그는 깃을 잃게 되었다. 이는 인간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2) 인간의 비참: 그는 목자와 양떼들로부터 떠나 길을 잃게 된 것이다.
(3) 개종함으로 이러한 상태로부터 회복됨 : 이는 자신의 양떼를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참된 목자가 되시며 가장 부지런히 살피시는 지도자, 감독 혹은 영혼의 감독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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