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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 창을 통해 본 복음

by 은총가득 2020. 12. 12.


베드로전서의 창을 통해 본 복음

 

오늘 새벽, 교회에서 묵상했던 말씀이 베드로전서다. 베드로전서를 살펴보면 복음이란 단어가 3회 나타나고 있다(벧전 1:25, 4:6, 17). 그 가운데 주목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
(벧전1: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가 전한 복음으로 지칭하고 있는 “이 말씀”은 무엇일까? “이 말씀”이 지칭하고 있는 것은

(벧전1:23)“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적으로 넓게 본다면 성경말씀 전체를 지칭하고 있으며, 핵심적으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요1:1-3).

 

따라서 베드로를 통해서 증거되는 복음이란

성경 전체임과 함께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필자는 이해하며 믿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 분으로서 이 땅에 오신 그 자체가 복된 좋은 소식인 복음이다.
(눅1:45)“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눅2:10-11)“(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그 자체가 복음이다.
 

(벧전1: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다. 동시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으로 기독교의 두 바퀴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실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세워진 종교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이며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십자가 복음의 중요성을 다음의 고백에서 밝히고 있다.
(고전2: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 사건과 함께 바울은 분명히 부활 복음의 중요성과 확실성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증거하고 있다.
(고전15:12-14)“(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분명 십자가의 복음과 부활 복음이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외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떠나가신 이후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신 강림의 사건도 우리들에게는 복음이며, 또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다는 그 약속의 소식이 복음이다. 그 시기를 일반적으로 종말론이라고 표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종말론의 복음이라는 표현보다는 소망의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약속하신 그 말씀을 믿으면서 소망가운데 기다렸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말씀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다.
(계22:20)“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필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 복음이며, 부활 사건만 복음이라고 하기보다는 예수님의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는 복음이라고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며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왜곡된 시각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는 부활은 부활이 아니며 반대로 부활 없는 십자가의 죽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거짓된 복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 복음이나 부활 복음을 부인하는 그 자체도 문제를 가진 시각일 것이다.

십자가가 담고 있는 의미에는 죽음, 고난, 희생, 단절, 실패, 비어냄, 절망, 슬픔 등이 있다고 한다면 부활에는 다시 살아남, 소성함, 생명, 소망, 기쁨, 잘됨 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요12: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에서 죽는다는 것은 십자가로 표상 한다면 열매는 부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부활) 것은 땅에 떨어져 죽을(십자가) 때에야 이루어질 수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죽지 않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희생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잘 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거짓복음이라고 피력한다. 치유만을 강조하고, 회복만을 강조하고, 잘 사는 것을 강조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심리나 욕구를 이용하여 복음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럴듯 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늘의 신령한 복음이 아니라 땅의 복음이며 거짓된 복음으로 대표적인 것이 기복신앙이 있으며, 그리고 번영신학 속에 담겨진 왜곡된 복음이라고 본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마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0: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따라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껍데기 부활이다. 죽음이나 고난 없는 부활도 가짜 부활신앙이다.

 

이에 참된 믿음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갈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의 귀결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분에게 있다. 그리고 참 믿음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질 때에 그분 안에서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이것이 복음에 핵심으로 다시 오시는 그분을 소망 가운데 속히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인 것이다.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전해 듣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건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할 것인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구원받는 사람이 되게 하고자 하고 있다.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밥을 요리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영양소가 무엇일까? 부족한 영양소는 무엇일까를 신경 써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편식을 시킨다면 영적으로도 병들게 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거나 연약한 신앙인이 되게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상황과 시대를 고려해야 한다. 믿음의 대상도 고려해야 한다. 건강한 신앙인으로 양육하기 위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주어야 하는 중에 영적으로 건강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골고루 영양가 있는 만나의 양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중요하며 우리들에게 필요한 모든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말씀을 편향되지 말고 골고루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에 부족한 부분이 십자가 복음이라면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하며 더 전해야 한다. 부활의 복음이 부족하다면 예수님의 부활 복음을 더 강조하여 전하여야 한다. 올바른 구원의 신앙을 위하여서라면 종말론이 담겨진 소망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싶다. 다만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만, 우리 교회에서만 참복음이 있다고 하면서 전유물처럼 여기며 유혹하는 자들은 조심해야 할 것이며 참된 복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을 찾아 바르게 전파해야 할 것이다.

 

이제 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서를 통해서 살펴보면 어떤 말씀이 많이 나타날까? 그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더 많이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어떤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은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부활보다는, 죽음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십자가 사건을 더 많이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묵상한 베드로전서 전체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보다는 십자가와 연관된 단어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6)“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1:7)“불로 연단하여도”, (1:10)“그 받으실 고난과”, (1:19)“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1:20)“죽은 자 가운데서”, (2: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2:20)“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2: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4: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4:12)“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4: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4: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4: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4:19)“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어떤 분이 전하는 말을 직접 들었다. 그것은 교회력에 따라서 40일 동안 십자가와 고난을 강조하지만 부활은 부활절 하루만 증거함으로 40대 1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너무 십자가 복음만을 강조하니 이제는 부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한편으로는 편향된 생각이라고 필자는 본다. 왜냐하면 교회력을 통해서만 보아도 사순절은 고난주간 포함하여 6주간이지만 부활절 기간은 부활절 이후 7주간으로 더 기간이 길다. 또한 매주일은 부활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축제일로서 부활과 연관된 날이다.

문제는 치우쳐서 전하거나 전하지 않는 사람의 책임일 것이다. 또한 한 쪽에 치우쳐서 교인들이 필요하거나 달콤한 복음의 말씀만을 전한다면 그것은 인본주의 자의 자세일 것이다. 다만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서 전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다음에서 말씀하신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수1:7)“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제 필자를 포함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 시대에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며 어떤 말씀을 전해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내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되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사명자의 자세라고 본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 전달자의 사명을 감당했으면 한다.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891

 

베드로전서(1장) 공부하기

 

 

제1과 택하심을 받은 나그네(베드로전서 1:1-2)

성경은 66권이 합쳐져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가르쳐준다.(물론 성령님의 인도 속에) 이 말씀은 66권 중 일부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도 없고, 알아도 편중될 위험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안에도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씀(은혜)과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율법)이 다 들어있지만 우리가 성경 중에서 갈라디아서만 읽는다면 아무래도 은혜를 깊이 깨닫는 반면 바른 삶의 내용과 중요성을 충분히 알지 못할 위험이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골고루 알고 묵상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 중에도 은혜와 율법이 특별히 잘 조화된 책이 있다. 베드로전서이다. 물론 베드로전서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비교적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유익하다. 주요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 있는 식품과 같다.(바나나? 쌀이나 시금치와 비교) 베드로전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소망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마도 베드로전서가 새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세상의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돕기 위해 쓴 책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소망이 우리에게 힘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도 베드로전서를 통해 균형 잡힌 신앙과 신앙생활의 힘을 얻기 바란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한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베드로는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이다. 왜 이런 소개를 하는가? 베드로전서의 말씀으로 각처에 흩어진 성도들을 권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베드로를 소개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은 없을까? 베드로는 당시에 교회의 최고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른 경력이나 지위를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도라고만 소개한다. 요즈음으로 하면 총회장, 노회장, 박사 등의 호칭을 쓰지 않고 목사라는 칭호만 쓴 것과 비슷하다.(박사표시 가운 때문에 논란이 생긴 교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위는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라는 직분에 있다. 필요한 훈련을 받고 박사 가운을 입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말씀에 권위를 더해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사람만 진정한 말씀의 권위를 가진다.(도올과 아동부교사?) 하나님이 말씀을 성경으로 계시해주셨기 때문에 성경에 맞는 말씀만 권위를 가진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다운 삶의 모습이 말씀전파의 권위를 준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5-16)

사도의 권위는 심부름 받은 일에만 있다. 심부름 받지 않은 일에는 아무런 권위도 없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면 안 된다. 그러나 베드로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말을 할 때는 아무런 특별한 권위가 없다. 오늘날 교회의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모습만으로는 아무 권위도 없다. 그래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 다른 성도를 존중하고 높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시키신 일은 권위를 가지고 해야 한다. 다른 성도들도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런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입어야 하고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지역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전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역은 다 지금의 소아시아 지역이다.(아시아는 대륙이 아니라 로마의 주) 그러나 본문의 나그네라는 말은 지상의 고향을 떠나 여러 곳에 흩어진 나그네라는 뜻이 아니라 천국 본향을 떠나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그네로 살고 있다. 이곳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다. 영원히 살 곳도 아니다.

나그네는 어떻게 사는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산다. 고향에 갈 준비를 하며 산다.(팔레스틴 회복 전 유대인들이 현금화가 용이한 생업) 그 나라에서 잘 살기 위해 고향에 갈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에서는 지금 죽 한 그릇을 위해 남은 인생의 장자권을 버렸다. 하물며 이생에서 몇 십 년 좋은 것을 누리겠다고 내세의 천국을 포기할 수 있는가? 이생의 삶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사람은 인생이 나그네라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나그네는 괴롭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관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생각해보라. 둘째, 시민권이 없어서 충분히 보호되거나 권리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주민은 주의 시설 사용에 큰 혜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나라 국민이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관습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보호되는 것은 자기 본국의 힘에 따라 달라진다.(강대국 시민들의 거만한 모습?)

천국의 시민이라면 이 세상에서 관습이 달라 괴롭기는 해도 보호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 나라의 세력은 온 세상에 충만히 뻗어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나그네라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빈국에 가면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게 고맙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이런 자부심과 천국의 소망을 되새기면 힘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나는 교회에서 받은 직분만으로 사역에 자신이 있습니까, 세상적인 다른 모습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다른 사역자를 볼 때는 어떻습니까?
3. 내가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천국 소망이 부러움을 없애줍니까?
4. 교회의 직분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명 받지 못한 사역, 믿음의 상실, 등)
5.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일하는 사역자가 되도록, 천국 소망 속에 힘찬 신앙생활을 하도록,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2과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1-2 )

베드로전서는 소망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고난을 이기고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돕는다. 이를 위해 우리를 나그네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천국이 본국이고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천국시민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려면 관습이 다르고 세상권세의 보호를 받지 못해 힘든 점도 있다. 하지만 천국권세의 보호를 받고 내세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더욱이 베드로는 신자들의 위치를 나그네라는 표현만이 아니라 더 구체적이고 정확한 표현으로 알려주며 격려해준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도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이다.

1. 성부하나님은 신자들을 미리 아시고 선택해주셨다. 이것은 예지예정이 아니다. 예지예정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예수님을 믿고 선하게 살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아시고 선택해주셨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의 모습에 구원이 달린 것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를 무시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민대생이 한명회를 사위로 선택한 것과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을 남편으로 선택한 것을 비교해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안다는 것은 친밀한 교제를 의미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존귀하게 세워주셨다는 뜻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5) 하나님의 선택은 철저히 은혜의 선택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2. 예수님은 보혈로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성부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본문은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라고 가르쳐준다. 이 두 가지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 순종하는 것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피 뿌림을 얻는 것도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는 것이다.

1)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는 목적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선택하시고 좋은 것을 주신다. 바로 죄 용서와 구원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 이 모습은 뜨겁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를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시는 정말 우리가 아무리 부족해도 변치 않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예수님의 모습은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내주겠다. 내 모든 것을 내놓고라도 너를 구원하고야 말겠다.”

2)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은 구원의 길을 가기 위해서이다. 구원은 예수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받지만 받은 구원을 지키려면 예수님께 순종해야 한다. 사실 믿는 상태라면 순종한다. 그래서 산 믿음은 행함이 있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순종은 못해도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믿고 또한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려고 애쓰며 사는 것이다. 구원의 삶은 지난 죄를 용서받고(치료약) 앞으로 죄에서 멀어지며(예방약) 사는 것이다. 죄 용서를 받았으니 죄 짓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사탄의 유혹이다.(방탕주의의 유혹) 우리는 순종을 위해서도 선택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고 순종하게 하시는가? 성령님의 역사로 하신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피 뿌림의 은혜를 입을 수도 없고 순종할 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만들려면 세상과 다르게 변화시키셔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뜻이다. 세상과 다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세상과 다르게 만들어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세상의 과학적인 생각, 합리적인 생각으로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세상과 달라져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예측과 전혀 다르다.(성품, 환경, 등) 여기서도 성령님이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등학교 동창들의 변화)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예수님께 순종하게 만드신다.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하려면 세상 사람들과 달라져야 한다. 세상에서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 하면 예수님께 순종할 수 없다. 우리가 세상과는 달리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려면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을 수 있는가? 찬양과 말씀과 기도가 특히 중요다. 예수님 승천 후 성도들은 기도와 찬양 중에 성령님을 받고(눅 24:53; 행 1:14), 고넬료 가족은 말씀을 듣다가 성령님을 받는다.(행 10:44)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고 있다. 성부하나님은 우리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사랑하고 계셨고 예수님을 보내 우리를 자녀로 만들어주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믿음과 순종으로 구원받게 하신다. 이 사랑을 깊이 깨닫고 항상 믿음을 지키기 바란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전도하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했거나 전도할 엄두도 못낸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과 관계없이 선택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3. 나는 신앙생활에서 순종의 삶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내가 순종하기 어려운 것을 몇 가지 말씀해주십시오.(교회의 직분과 사역, 가난한 이웃 섬김, 등)
4. 내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을 찾아보십시오.(신앙적인 생각, 교회생활, 사회생활, 등)
5.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전도대상자들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3과 살아 있는 소망이 우리를 살려줍니다 (베드로전서 1:3-5)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단순히 사도로 설명한 모습, 성도들을 나그네로 표현한 모습,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설명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돕는다. 그리고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격려한다. 당시에 가장 흔한 인사는 건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은혜와 평강을 구한다. 왜 그럴까? 은혜가 더 좋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축복으로 만들지만 건강이나 세상적인 축복은 그것만 주고 그 밖의 문제는 해결해주지 못한다.(건강으로 행복?)

은혜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그냥 주시는 유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은혜 속에 살고 있는데도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가? 그렇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은혜 베풀어주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도 은혜를 깨닫게 된다. 은혜를 받는 것과 은혜를 깨닫는 것 중에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그것을 깨달으면 주님을 사랑하며 더 큰 은혜를 받고 깨닫지 못하면 감사와 사랑과 순종은 줄어들고 원망이 많아지며 은혜도 멈추게 된다.

평강은 온전한 것이다. 개인의 몸과 마음과 영이 상처 없이 온전한 것이다. 공동체에 소외된 사람 없이 모두가 서로 사랑하며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다. 이 평강도 은혜에서 온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걱정이 없어지고 마음에 평강이 온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이웃을 사랑하여 인간관계에 평강이 온다. 은혜로 축복을 받으면 삶에 평강이 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은혜와 평강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온갖 축복으로 나타났는데 그 핵심이 영생을 주신 것이다. 영생은 그냥 끝없이 사는 게 아니라 지극한 행복 속에 영원히 사는 것이다. 왜 주셨는가? 많은 긍휼 때문에 주셨다. 죄 속에서 파멸의 길을 가는 우리를 사랑하여 불쌍히 여기고 주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주셨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주셨다.

베드로는 앞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피 뿌림(십자가 은혜)으로 알려줬는데 여기서는 부활로 알려준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만이 아니라 부활까지 포함해서 나타난 것이다. 부활하지 않는 분의 죽음은 대속과 구원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예수님이 부활로 죽음을 이기셔서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단,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영생을 얻는데 이것이 부활을 통해 완성된다.

베드로는 이것을 산 소망이라고 한다. 산 소망이 무슨 뜻인가? 두 가지 뜻이 있다.
1) 살아 있는 소망이라는 뜻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으며 하늘에 예비 된 영생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죽은 소망은 무엇인가? 영생이 없는 단순히 세상에서만 좋은 것을 누리는 소망이다. 출세? 건강? 소아마비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 아이가 건강 때문에 더 불행해진다면? 영생의 소망이기에 말할 수 없이 값진 것이다.
2) 살려주는 소망이라는 뜻이다.(예: exciting game) 헬라어 동사는 행동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본문은 계속적인 동작을 보여준다.(예: 두드리라) 산 소망은 한 번만 살려주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살려주는 소망이다. 영생의 소망은 우리를 계속해서 소생시킨다. 사람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은 소망이 있을 때까지이다. 소망이 없어지면 포기한다. 칭찬이 좋은 것도 소망을 주기 때문이다. 초행길을 갈 때 목적지에 도달할 소망이 있으면 계속 가고, 없으면 그 길을 버린다. 길이 애매해서 계속 갈지 말지 고민할 때 계속 가게 해주는 게 있다. 이정표이다. 이정표를 보고 소망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세상에서 나그네로 지내며 본향인 천국으로 간다. 이를 위해서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데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이 길로 가면 최고의 축복인 영생을 얻는다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소망이 신앙생활에 힘을 줌으로써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다.(주를 앙모하는 자....) 베드로는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통해 격려한 후 여기서는 소망의 위대한 모습을 통해 격려하는 것이다.

소망은 분명히 얻을 수 있어야 강력한 소망이 된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얻기 어려우면 소망이 약해진다.(반드시 10배를 받는 복권과 로또복권 중에서?)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강력한 산 소망이 된다. 우리의 소망이 왜 분명한가?
1)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거듭나게 해주셔서 얻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우리 거듭남의 근거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확실한 것이다. 우리는 자꾸 변하므로 우리 모습을 근거로 거듭난다면 우리 소망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듭나게 해주시므로 우리 소망은 확실한 것이다.
2)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히 목적지에 갈 수 있다. 우리가 이정표를 봐도 자신 있게 길을 갈 수 있지만 길과 차를 잘 아는 사람이 동승하고 있으면 더욱 자신 있게 길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길을 인도하고 보호해주신다면 우리의 소망이 얼마나 확실하겠는가? 그래서 오늘 본문 첫 부분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하는 것이다. 산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 진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며 순종하고 헌신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참 신앙생활이며 구원의 길인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사람들에게 많이 하는 인사말은 어떤 것입니까? 베드로가 한 인사말을 생각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더 좋은 인사말을 찾아보십시오.
3. 성경 말씀 중에 나에게 가장 큰 평강을 주는 말씀을 소개해주십시오. 찬송가나 복음송가 중에서도 찾아보십시오.
4. 오늘 배운 ‘살려주는 소망’을 나의 말로 정리해보십시오.
5. 우리가 산 소망으로 항상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속한 자치기관의 부흥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4과 근심은 잠깐입니다 (베드로전서 1:6-9)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을 때 어디서 힘을 얻고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첫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소망에서 얻는다. 물론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믿음의 내용은 소망이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얻는다. 사랑은 소망이 없어도 믿음을 지키게 해준다.(죽을 줄 알면서도 사랑하면 동행한다) 하지만 사람은 이기적이어서 사랑 때문에 믿음을 지키기보다 소망 때문에 지키는 경우가 더 많다. 예수님도 믿음을 지키라고 하실 때 소망으로 격려하신 것을 보라. 소망이 믿음을 지켜주기 때문에 산 소망(살려주는 소망)인 것이다. 그러면 소망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더 큰 힘을 얻을까? 우리는 지난 주 본문에서 두 가지를 배웠다.

1) 소망의 내용이 클수록 큰 힘을 얻는다. 고난 후에 받을 돈이 많을수록 더 잘 견디지 않는가?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소망이니 가장 큰 힘을 얻는다.

2)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클수록 큰 힘을 얻는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고 있어 소망의 성취가 확실하다. 그래서 큰 힘을 얻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소망으로 힘을 얻게 되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번호는 계속해서 매김)

3) 고난이 속히 끝난다고 믿을수록 잘 견딘다. 길이 막혔다고 돌아가는 사람은 길이 곧 뚫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난이 빨리 끝난다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6절은 우리의 고난이 빨리 끝날 것이라고 한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이 말씀은 시험이 잠깐만 근심을 준다는 뜻이다. 우리의 어려움은 영원히 계속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 끄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시험이 너무 힘들지 않게 만들어주신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은 고난이 너무 힘들지 않도록 적절한 시기에 멈추게 해주시거나 극복하게 해주신다. 이 소망이 고난을 이길 힘을 주는 것이다.
   
4) 고난이 큰 유익을 줄수록 큰 힘을 얻는다. 앞의 세 가지는 고난을 이겨낸 후에 소망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사막을 지나가는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는 게 이런 경우이다. 그러나 4)번은 고난 자체가 소망을 이루는 데 유익을 주는 경우이다. 운동선수가 힘든 훈련을 받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더 힘든 훈련을 받을수록 더 실력 있는 선수가 된다는 소망이 있으면 훈련의 고난을 기쁘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7절을 보라.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여기서 믿음의 확실함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6절의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 믿음이 확실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6절의 시험을 통해 믿음이 연단을 받아 더욱 순수하고 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6-7절이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도 그것은 곧 끝날 것이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며 아울러 그 어려움을 이겨냄으로써 믿음이 증명되어 우리가 큰 상급 받게 된다는 것이다.

고난은 믿음을 연단시키는 도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반드시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조절해주신다. 헬스클럽에서는 전문 트레이너가 회원의 형편에 맞게 운동기구의 무게와 운동시간을 정해준다. 운동으로 몸을 해치지 않고 더욱 건강하게 해주기 위해서이다. 하나님도 이렇게 조절해주셔서 고난을 유익으로 만들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 본문은 이렇게 믿음이 연단되는 것을 금보다 더 귀하다고 가르쳐준다. 믿음이 금보다 귀하기 때문에 믿음을 연단하는 고난도 금보다 귀한 것이다. 금메달이 1년의 쾌락보다 귀하다면 1년의 훈련도 1년의 쾌락보다 귀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려움을 이기고 믿음을 지킨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시련을 이겨내고 신앙생활을 잘 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8절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사랑한다. 그래서 더 큰 칭찬을 받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이들이 왜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본문에는 두 가지 구원의 모습이 나타난다. 첫째, 재림 때 얻을 완성된 영생의 구원이다.(7절) 둘째,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미 얻은 구원이다.(9절) 후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아 세상의 악과 해를 이기며 사는 축복이다. 우리는 이런 내세의 소망으로 믿음을 지키고 또한 현세에서 누리는 구원의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을 지켜서 결국 완성된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 중에 한 가지를 말씀해주십시오. 내 생각에 이것이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오늘 말씀에 비춰 희망적인 생각을 말씀해주십시오.
3. 내가 겪은 고난이 나의 신앙과 인격에 유익이 된 경험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4. 우리교회에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헌신적으로 끝까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쓸 것 같은 사람을 몇 분 말씀해주십시오. 이분들이 왜 이렇게 할까요?
5. 우리의 어려움이 속히 극복되고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을 줄 것이라는 소망 속에 시련을 잘 이겨내도록, 교회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5과 얼마나 귀한 구원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베드로전서 1:10-12)

어떤 글을 보니까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버리느냐도 중요하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버릴 것을 잘 버리면 해야 할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나무는 가지를 치고, 조난당한 배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을 바다에 버리지 않는가? 그러면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가? 귀하지 않은 것을 버려야 한다. 귀한 것은 절대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귀한 것은 어떤 것인가? 큰 유익을 주면서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은 금보다 더 유익하지만 금이 더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귀하다. 그리고 사랑이 들어 있으면 귀하다. 아무것도 아닌 물건도 사랑하는 사람이 주면 지극히 귀한 물건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무엇인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영생과 이생의 축복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구원의 축복이 구하기 어렵고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것이라면 가장 귀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된다. 이게 쉬운 일인가? 언뜻 보면 아주 쉬운 일 같지만 사실은 몹시 어렵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과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시고 또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게 아무 때나 일어나는 일인가? 본문은 이것이 엄청난 사건이라고 가르쳐준다.
   1) 이 구원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오랫동안 준비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으로 선택해주셨다.(2절: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도 계획하셨다.(11절: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을 미리 지시하셨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준비하게 하여 구원에 대해 예언하게 하셨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공들인 것이므로 쉬운 게 아니다.
   2) 선지자들이 자기 힘으로 살펴보고 예언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가르쳐주셔서 예언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예언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3) 그런데 이 구원은 선지자들도 맛보지 못했고 심지어 아브라함도 맛보지 못했다. 물론 선지자들과 아브라함도 구원을 얻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눅 13:28) 그러나 우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누리거나 내세의 소망을 바라보며 기쁨 속에 살지는 못했다.
   4) 이 구원은 사도들이 성령님의 감동 속에 자기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다. 한국교회만 보더라도 많은 선교사들이 자기의 안락을 포기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며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 이게 돌처럼 세상에 널려진 일인가? 얼마나 귀한 일인가?
   5) 우리의 구원은 천사들까지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천사들이 무엇이 아쉽겠는가? 그런데도 이 구원을 보고 싶어 한 것이다. 천사가 왜 보고 싶어 했을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하나님이 간절히 이루고 싶어 하시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2) 천사보다 더 귀한 존재가 되는 놀라운 구원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이렇게 볼 때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가?

2. 이 구원이 우리에게 적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잘 믿어지지 않는다.
   2) 믿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3) 불리할 때 믿음을 버렸다가 다시 믿으면 될 것 같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정말 믿고 있으면 믿음을 버리기가 쉽지 않고(수많은 순교자들) 믿음을 버린 사람이 다시 믿음을 가지는 게 쉽지 않다. 더욱이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믿음을 버린 동안 죽으면 다시 믿고 구원받을 기회를 놓친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지극히 귀한 것이다.

더욱이 이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것이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이고, 선지자들이 많은 수고를 했지만 자기들은 맛보지 못하고 우리를 위해 수고한 것이고, 사도들도 목숨을 걸고 우리를 위해 전해준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가지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주신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귀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이 구원을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목숨보다 더 귀하게 지켜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손해를 무릅쓰고 주일을 지키며(주일을 지키는 직장을 얻기 위해 노력한 집사),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수고한 사람들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3. 오늘 한국사회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기 어려운 점과 쉬운 점을 각각 몇 가지씩 찾아보십시오.
4. 내가 아주 귀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을 때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5.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고 믿음을 잘 지키도록, 우리교회의 부흥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6과 마음의 허리를 동이십시오 (베드로전서 1:13-22)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종살이가 너무 괴로워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간구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해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육적인 구원보다 영적인 구원에 초점을 두신다. 왜냐하면 영적인 구원은 영과 육을 구원으로 인도하지만 육적인 구원은 영의 구원을 주지 못하고 결국 영과 육이 파멸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도 영적인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신다.(육적 고통)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죄를 짓고 징계를 받고 하면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이던 사람들은 워낙 악에 젖어 있어 있어서 그 훈련으로도 고쳐지지 않아 결국 두 사람 외에는 모두 광야에서 파멸 당한다. 그러면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은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이 죄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났다. 1. 우상숭배. 2.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

1. 우상숭배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제1계명 어김) 둘째, 하나님을 섬기는데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제2계명 어김) 그런데 광야에서 주로 문제가 된 것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긴 것이다.(말년에는 다른 신 문제도 커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없을 때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도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1) 영광의 하나님을 비천한 피조물의 모습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모독이 된다.(졸업앨범에 내 사진 대신 개 사진?) 2) 우상만 섬기고 영이신 진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우상을 잘 관리하면 축복?) 3) 우상을 지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지배하려고 하게 된다.(우상을 소지하면 하나님이 나와 동행?)

2.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고 반역이다.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성인을 다 멸하기로 결정하신 것도 가나안 정탐 후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이다. 이것만 봐도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바로 출애굽의 모습에 비춰 우리의 바른 신앙생활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 13절에서 허리를 동이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12:11의 모습과 같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허리를 동이는 것은 단단히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 허리를 동이고 준비해야 하는가?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전에 천로역정을 보고 구원받는 게 너무 어렵게 그려졌다고 비판했으나 나중에는 공감하게 됨)

가나안을 향해 광야를 지나가는 모습이 본향인 천국을 향해 나그네 길을 가는 인생과 비슷하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7절) 그래서 교회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천국을 향해 가는 인생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그러면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어떤 모습과 같은가? 이전 세상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과 같다.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가나안땅의 소망을 바로 보고 또한 꼭 얻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도 이전 세상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천국의 소망을 바로 보고 또한 꼭 얻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13절) 이것을 본문은 근신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근신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정신을 뺏기지 않고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 것들 때문에 정신을 잃지 않고 바른 정신으로 소망을 바라보며 성취를 믿는 것이다.

세상에서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게 무엇인가? 욕심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14절)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세상의 사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1) 저질스러운 방탕의 쾌락 2) 약간 고급스러운 쾌락: 고상한 취미생활도 거기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면 방탕과 마찬가지이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8)(운동을 즐기면서 교회에서 멀어진 중직자) 3)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 여기에 빠지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버렸는데 교회에 와서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교회의 이권과 직분의 명예) 허리를 동이고 나그네 길을 잘 가라는 것은 이런 세상적인 욕심을 그리워하며 그리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다.(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 과거 세상의 쾌락이 그리울 때가 있는가?)

본문은 이를 위해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친다. 거룩에는 존재적 거룩과 윤리적 거룩이 있다. 1) 존재적 거룩은 세상과 존재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상 사람들과 존재적으로 다르다. 2) 윤리적 거룩은 삶의 모습이 세상과 다른 것이다. 세상 삶의 모습은 어떤가? 이기적이다. 인간은 이기적으로 생각하자 선악과를 먹었고, 먹은 후에 더욱 이기적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나 다른 사람의 유익은 무시하고 내 이익만 챙긴다. 이와 다르려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고(하나님 사랑)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이웃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이웃 사랑). 거룩하게 사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바라보는 데서 나온다. 근신해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우상숭배는 미신적인 신앙형태를 가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숭배나 미신적으로 섬기는 경우가 있습니까?(어떤 물건이나 행위를 의지?)
3. 내가 교회에 나가거나 개인적인 경건시간을 가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과거에 하던 것 중 끊은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그것을 다시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왜 그런 것 같습니까?
5. 우리가 참 신자로서 거룩하게 살며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7과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1:13-22)

사람은 여러 가지 정체를 가지고 산다. 그 중에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같은 사람도 아들 앞에서는 점잖게 행동하고 예비군복을 입으면 함부로 행동한다. 왜 그런가? 아들 앞에서는 자기가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예비군복을 입으면 자기가 예비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수많은 정체 중에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을까? 사장, 아버지, 어머니, 광주시민, 집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면 행동에 어떤 특징이 나타나야 할까? 사랑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요약하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전서는 하나님 자녀의 특징으로 거룩을 강조한다. 그러면 거룩과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거룩은 세상과 다르다는 뜻이고 거룩에는 존재적 거룩과 윤리적 거룩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존재적으로 세상과 달리 거룩하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예배)한다. 윤리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세상과 달리 거룩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삶으로 거룩해야 한다. 거룩한 삶은 사랑의 삶이다.(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오늘 본문도 거룩하라고 한 후에 거룩해졌으면(영혼이 세상과 달리 깨끗해졌으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르쳐준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5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2절) 그리고 본문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돕기 위해 세 가지를 강조한다.

1.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적 거룩(전능, 선하심, 등)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그리고 윤리적 거룩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두 가지 행동을 하게 된다. 하나는 하나님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최선을 다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중에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17절에서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하는 것이 이런 뜻이다.

사람이 행동하도록 힘을 주는 중요한 요소는 감정이다. 좋아하면 힘차게 일하고 싫어하면 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면 사람이 어떤 일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싫어할까? 일 시킨 사람을 사랑하거나, 일이 좋거나, 일에 대한 상급이 있으면 좋아한다. 반대로 일 시킨 사람을 싫어하거나, 일이 싫거나, 일에 대한 벌이 있으면 싫어한다.(당근과 채찍)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게 좋거나(기쁨, 보람), 하나님 뜻대로 살 때 상급을 받으면 힘차게 하나님 뜻대로 산다. 반대로 하나님 뜻을 어길 때 벌을 받아도 하나님 뜻대로 산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다.(병사는 자기 장군을 적장보다 더 두려워해야 적과 싸운다: 손자가 궁녀를 강병으로 만듬)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뜻대로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거룩한 사랑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다르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시지만, 동시에 우리가 바르게 살도록 도우신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을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정의롭다. 억울한 사람을 사랑하여 억압하는 자를 물리치신다. 억압하는 자를 사랑하여 바른 사람이 되도록 고통으로 고쳐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2.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우리 속을 아는 분, 절대 속일 수 없는 분을 두려워한다.(운동선수는 약물검사를 두려워한다: 벤 존슨은 한국의 검사력을 무시하여 약물 사용?) 그래서 이런 분의 말을 잘 듣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시다.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밖에 없다. 마음과 은밀한 언행까지 거룩해져야 한다.

본문은 하나님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하는데 외모와 행위가 다른가? 본문에서 행위는 단수이다. 그래서 행위를 본다는 말씀은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하나로 보며 기본적인 자세를 본다는 뜻이다. 중심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열매가 각각의 행동이 아니라 기본자세인 것과도 비슷하다. 이에 반해 외모는 기본적인 자세나 중심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나 모습이다. 거룩하라고 하니까 거룩한 마음으로 사는 게 아니라 거룩하게 보이는 행동만 하거나(기도, 예배참여, 봉사, 섬김, 등) 거룩한 사람들이 가진 모습과 칭호만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교회직분, 업적자랑, 등)

3.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세상의 나그네이기 때문에 세상과 달리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도 있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도 있다. 다 된 것처럼 방심하는 사람은 무엇을 보고 그럴까? 외모(행동, 업적, 직분)를 보고 그런다. 중심과 기본자세를 보는 사람은 끝까지 조심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천국 환상: 천국문 바로 앞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함정)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사회생활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정체성이나 직분을 말씀해주십시오. 그것을 생각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됩니까?
3. 하나님이 나에게 철저히 바른 삶을 바라신다는 말씀에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4. 내가 신앙생활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외모(경건생활, 봉사업적, 교회직분, 등)를 말씀해주십시오. 오늘 말씀을 나눈 후 이런 외모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5.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마음과 은밀한 언행까지 거룩해지도록, 한국교회가 거룩해지도록,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8과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18-25)

바리새인은 원래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한 사람들이지만 율법주의적인 사고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사람들을 정죄했다. 그리고 외형적인 업적을 중시하다 보니까 위선적인 행동을 많이 했다. 그래서 백성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탈무드에는 바리새인을 7 종류로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1) 조금 있다가 형: 선행을 미뤄두는 사람 2) 멍든 형: 악을 안 보려고 눈을 감고 가다가 다친 사람 3) 어깨 형: 선행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자랑하는 사람 4) 곱사등이 형: 겸손한 체하는 사람 5) 계산 형: 자기의 선행과 악행을 계산하며 행동하는 사람 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형: 하나님이 두려워서 바르게 사는 사람 7)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 하나님을 사랑하여 바르게 사는 사람. 백성들은 이 중에 진짜 바리새인은 7)이라고 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기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만 사랑만으로는 바로 살기 어려워서 두려움도 필요한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17절에서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가르친 후 18절부터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며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한다. 이를 위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도와주고, 더욱 구원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가? 이 구원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으로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금이나 은 같은 것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바침으로써 받는다. 이보다 귀한 것이 있을까? 이렇게 값진 것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두 가지를 알려준다. 1) 이 구원은 진짜 구원이고 정말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 좋은 것이 비싸다. 가짜와 진짜 중에 진짜가 비싸다. 그래서 가짜를 진짜로 속이려면 가격을 올리지 않는가? 2) 이 구원을 유의해서 관리해야 한다. 귀한 것을 어떻게 함부로 굴릴 수 있는가? 그러면 자연히 구원받은 자답게 살려고 노력하며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천하게 다루는가? 전도를 마치 구걸이나 시시한 물건을 강매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신자도 그렇다. 예배나 봉사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구원의 길을 가기 위해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나 봉사를 인심 쓰는 것처럼 참여한다면 구원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구원의 가치를 백만분의 일만 알아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감추인 보화 비유)

본문은 구원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우선 구원은 금이나 은보다 더 귀한 것으로 얻은 것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시간적인 준비를 보여준다. 구원은 창세 이전부터 예비되었다가 말세를 맞아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것이다. 참고로 말세는 예수님의 재림 때를 가리키거나(하나님 나라의 완성)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를 가리킨다.(구원사역의 완성) 여기서는 초림 때를 의미한다. 어쨌든 이것은 구원이 얼마나 오랫동안 예비된 것인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십자가 은혜와 부활과 영광을 보여주며 믿음과 소망을 말해준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21절)

그리고 다시 우리의 삶에 대한 교훈을 주는데 그것은 사랑의 삶이다. 특히 본문에서 재미있는 것은 21절에서 믿음과 소망을 말한 후 22절에서 사랑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내용이다.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도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지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본문은 믿음과 소망에서 나온 사랑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거짓 없는 사랑이다. 거짓된 사랑은 어떤 것인가? 본심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사랑하는 체하는 것이다. 왜 사랑하는 체할까?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이다.(체면, 보상, 관계, 등) 거짓 사랑은 자기 이권에 따라 사람을 차별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내 유익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 사랑의 마음이 없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하며 행동하는 것은 부족한 사랑이기는 해도 거짓 사랑은 아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피차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피차 사랑하는 것은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서 차별 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특히 성도들도 교회지도자에게 특별대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은 내 몸처럼, 혹은 내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 거짓 사랑은 이기적이고 자기 목숨을 이웃보다 아끼기 때문에 절대 이웃을 뜨겁게 사랑할 수 없다.

베드로전서 1장은 지금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보여줬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해 바른 신앙의 모습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가르쳐준다. 이를 위해서는 진실한 사랑과 나아가서는 뜨거운 사랑이 필요하다고 가르쳐준다. 앞으로 베드로전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거룩한 삶의 길을 가르쳐줄 것이다. 우리는 1장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2장부터 나오는 구체적인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구원을 공짜로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구원이 말할 수 없이 비싼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3. 거짓이 없는 사랑을 보신 적이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4. 우리교회 성도들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 교회에 어떤 모습이 나타날 것 같습니까? 구체적으로 몇 가지 찾아보십시오.
5. 우리가 구원의 가치를 더 많이 깨닫고 구원을 지키기 위해 애쓰도록, 우리교회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도록,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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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악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3)

본문의 구조는 이렇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라. 그것은 이렇게 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앞의 내용 때문에 이렇게 하라는 것이고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생긴다는 뜻이다. 앞의 어떤 내용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하는가? 성도들이 거듭났기 때문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1:23) 결과는 무엇인가? 구원에 이른다.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2) 그러니까 우리도 거듭났으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가지이다. 악한 삶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악한 삶을 버릴 때 중요한 것은 악한 습관을 버리는 것이다. 신령한 젖은 영적인 양식도 되고 말씀의 양식도 된다. 우리는 말씀으로 영적 은혜 입는 것을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둘은 동시에 하는 게 좋지만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악한 습관을 버리는 게 먼저이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악을 버리지 않고 말씀과 은혜만 사모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악을 버리지 않으면 은혜 받기 어렵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악한 생각이 가득하면 신령한 젖을 사모할 수 없다. 악을 생각하는 사람은 악한 것을 구할 수밖에 없다. 신령한 젖을 구하는 것 같아도 진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사모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악한 삶을 충족시켜주는 방법으로 그것을 사모할 뿐이다.
   2) 속에 악한 것이 가득하면 신령한 젖을 받아들일 수 없다.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들어 있어도 말씀에서 은혜 받기 어려운데 악한 마음이 가득하면 어떻게 은혜를 받겠는가? 교회에 대해 불만, 교인에 대한 증오심, 등이 있으면 신령한 젖을 얻기 어렵다.

그래서 악한 습관과 생각을 버리지 않고 신령한 젖만 구하면 신앙생활을 수십 년 해도 영적인 은혜를 입지 못하고 신앙이 자라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은혜를 사모한다고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면 교회에서 중직을 맡기도 한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이런 사람은 자신만 망하는 게 아니라 남들도 망하게 한다. 남들이 이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거나 이들을 보고 잘못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모든 악독을 버려야 한다. 악독은 악의 총칭이다. 악은 모두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버려야 할 네 가지 행동이 나온다.
   1) 기만: 기만은 거짓이다. 예수님의 입에는 거짓이 없다.(벧전 2:22) 사탄에게 거짓이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거짓말하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사탄의 종이다. 사람이 왜 거짓말을 하는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자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시는데 하나님께 잘못 보이면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외식: 외식은 위선이다. 마음에도 없이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일종의 거짓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외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외식은 거짓이므로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예수님도 얼마나 외식을 싫어하셨는가. 단, 마음에 없어도 이웃을 위해 절제하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사랑이다.(미숙한 사랑) 우리는 위선과 절제를 구별해야 한다. 악한 마음을 솔직하게 다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을 절제해서 선한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 단, 자기가 진짜 그렇게 선한 척해서는 안 된다. 겸손히 자기는 악하지만 노력할 뿐이고 주님의 은혜로 이런 절제라도 한다고 해야 한다.
   3) 시기: 시기는 남에게 이기려는 경쟁심으로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경쟁심이 생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남을 경계하지 않아 경쟁심이 생기지 않는다. 교회에서 시기심을 버리려면 하나님의 영광만 추구하면 된다. 바울은 자기를 괴롭히려고 열심히 전도하는 대적자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 1:18)
   4) 비방하는 말: 남을 깎아내리는 말이다. 말은 행동이 될 때도 있고(위험을 알려주는 말) 행동이 안 될 때도 있다(헛맹세). 비방하는 말은 강력한 행동이다. 말은 생각만큼 쉽고 행동만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한 마디 말로 사람을 죽이거나(마타도어: 소를 죽이는 마지막 투우사, 흑색선전의 뜻이 됨) 중상을 입힐 수 있다.(30초 비방이 30년 마음의 상처) 비방의 말이 무서운 것은 몹시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경쟁심 때문에 남이 비방당하는 말을 즐겨 듣는다. 비방은 거짓, 시기, 위선(앞에서는 칭찬, 뒤에서는 비방)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비방 대신 해야 할 말은 칭찬과 격려이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 경쟁(경쟁 유발 칭찬?), 위선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갓난아기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기는 오직 젖만 사모한다. 어른처럼 쾌락적인 음식을 찾지 않는다. 그리고 사정없이 사모한다. 젖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의 은혜, 영적인 은혜를 이렇게 몰입해서 사정없이 사모하면 신앙이 성장할 것이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절)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이미 은혜로 거듭난 사람은 더 큰 은혜를 사모하기 전에 악한 습관 버리는 것을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3. 내가 우리교회와 교우들을 비방하거나 칭찬한다면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4. 내가 말씀의 은혜와 영적인 은혜를 갓난아기처럼 사모했던 경험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물질적인 축복을 그렇게 사모했던 경험도 말씀해주십시오.
5. 우리가 모든 악독을 버리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신앙이 더욱 성장하도록, 교회의 영적 성장과 양적 부흥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0과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4-10)

비스마르크가 공을 세운 병사에게 훈장을 주려고 하다가 장난 끼가 발동하여 훈장 대신 100마르크를 받는 게 어떤지 물었다. 병사는 훈장이 돈으로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 물었고 비스마르크는 3마르크 정도라고 했다. 병사는 훈장과 97마르크를 받고 싶다고 했다. 비스마르크는 병사의 기지에 감탄하며 그렇게 주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장난을 해서 생긴 일이지 실제로 병사가 100마르크를 받고 3마르크로 훈장을 사려고 하면 살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의 부귀와 천국의 영생 중 어느 것을 받겠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병사처럼 대답하지 않을까? 그게 가능할까? 영생은 믿음으로 간다. 믿음은 돈이나 시간을 조금 하나님께 바치는 게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생명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이렇게 살면 불행해지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 속에 살며 필요한 축복은 누린다. 더욱이 하나님 뜻에 따라 이웃에게 덕을 끼치며 보람된 삶을 살고, 천국의 소망 속에 기쁨이 넘치며, 나중에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 내 욕심을 채우지는 못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습이 이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버림 받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산돌이 되는 참 복을 누리셨다.(4-5절) 우리도 예수님처럼 산돌이 되어야 한다. 또 이것을 알아야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 수 있다.

당시 성도들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았다. 그러면 이런 염려를 할 위험이 있다. “혹시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은 아닌가?”(선교 방해?) 본문은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서 그런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단, 거룩한 삶으로 고난을 받아야지 악한 행동으로 고난을 받으면 안 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벧전 2:19-20)

우리는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1. 다른 성도들과 함께 세워져야 한다. 집은 재료도 좋고 재료들의 결합도 좋아야 튼튼하다. 벽돌 하나는 쉽게 굴러다니지만 튼튼한 집에 결합된 벽돌은 그렇지 않다. 우리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 오래 전에 성도들 중에 이상한 모습이 많아 내가 잘못된 것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존경하던 목사를 찾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신앙의 안정을 되찾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물처럼 만드셨다. 다른 성도들과 협력하여 우리 자신을 세워가야 한다. 그리고 결속된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물의 양이 많아야 불을 끄지 않는가?

2. 산돌은 자기도 살아있고 남도 살리는 돌이다. 이것은 거룩한 제사장의 모습이다. 거룩한 삶으로 자기도 살고, 제사장의 역할로 남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한다. 제사장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섬길지 생각한다.(목사도? C목사의 경험) 그런데 사실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6:33과 같다. 제사장은 거룩하게 살 뿐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도에도 헌신해야 한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렇게 제사장적인 삶을 사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이들은 믿음 때문에 많은 비방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떻게 승리하셨는가? 예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로서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나중에 심판자가 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 성도들을 비난하고 박해하는 자들은 다 파멸되고 성도들은 영광을 받을 것이다.

본문은 이것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 유명한 말씀을 해준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성도들만 이런 지위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과 달리 거룩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살면 진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는가? 염려하지 말라.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겪는 것이다. 남들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는가? 시험에 들지 말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도록 선택된 사람들이다. 나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며 세상과 다르게 살라.

본문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원어에 더 가까운 뜻은 왕의 제사장이다. 온 세상 왕이신 하나님이 쓰시는 제사장이다. 이것은 우리의 권세를 보여준다. 세상에서 두려울 게 없다. 제사장답게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도 비슷한 뜻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한다. 우리는 이제 지위가 완전히 바뀌고(하나님 백성) 받는 사랑(하나님 긍휼)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이 바뀌어야 하겠는가?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덕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나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행복이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3. 벽돌은 혼자 있을 때보다 건물에 포함되어 있어야 튼튼합니다. 건물의 힘에 도움을 받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와 교우들에게서 신앙의 도움을 얼마나 받습니까?
4. 내가 온 세상 왕이신 하나님이 쓰시는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말씀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5.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며 이웃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제사장의 삶을 살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1과 비난을 이기는 비결 (베드로전서 2:11-12)

선교사들이 광주에 들어와 양림동에 자리를 잡고 선교활동을 하자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특히 한센병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하니까 반대가 더 심해졌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반대가 수그러들었다. 지금도 양림동에 기독교인이 많다. 이것은 교회가 박해를 이겨내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선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박해를 이겨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역사로 이겨내는 것이다.
2.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1) 말로 우리의 입장을 잘 설명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오해를 풀어주고,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해주고, 우리를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2) 행동으로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1) 기적을 행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보여준다.
       (2) 선을 행하여 좋은 인상을 받는다. 의로운 삶과 사랑의 삶을 보여준다.
이것은 서로 분리되는 게 아니라 함께 일어나기도 한다. 기적으로 선행을 할 수도 있고 말로 선행을 할 수도 있다.(위로와 격려의 말) 기도가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기적과 선행을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본문은 이 중에 선을 행하여 박해를 이겨내라는 가르침이다. 선을 행하는 삶은 사랑의 삶인데 베드로전서에서는 거룩한 삶으로 많이 표현한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 앞에서는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은 거류민과 나그네 같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상 시민이 아니라면 이 세상 시민과 다른 삶(거룩한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 타국에서 지낼 때 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는다.(총리지명자: “총리 될 줄 알았으면 아들 국적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국적은 더 그렇다.)

거룩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1절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한다. 여기서 제어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정당한 욕구가 아니라 영혼을 거스르는 정욕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고 싶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몸에 해로운 음식을 먹고 싶은 욕심은 절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영혼에 해로운 욕심은 절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먹고 싶은 음식이 몸에 해로울 때가 많은 것처럼(과자의 유혹, BR 창시자 단명) 우리가 하고 싶은 일 중에도 영혼에 해로운 것이 많다. 그래서 이런 정욕에 대한 제어가 필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정욕을 제어할 수 있는가? 자기의 형편을 알고 정욕이 자기에게 가져다줄 결과를 알면 제어할 수 있다. 동료들과 술 먹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도 술 때문에 간이 나빠졌다는 판정을 받으면 술을 멀리하게 된다. 중요한 경기를 앞둔 선수는 음식도 절제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정욕을 제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정욕을 제어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교회를 비난하는 것을 그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교회를 오해했거나 혹은 고의적으로 네 가지 비난을 했다. 1) 간음한다는 것이다. 카타콤에서 남녀회중이 모였기 때문이다. 2) 살인의식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성찬식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3) 로마의 반역자라는 것이다.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4) 자기들을(세상 사람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싫어했다. 베드로전서 당시 교회가 받은 박해는 폭력에 의해 해를 당한 것이라기보다 말로 비난을 받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교회는 말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사도행전이 기록된 목적 중에 하나도 교회가 사회에 해를 끼치는 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글로 설명) 교회 지도자들도 교회에 대한 변호를 많이 하였다. 이렇게 말로 설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더 강력한 방법은 성도들이 선하게 삶으로써 그 비난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행은 논쟁이나 법적투쟁보다 더 유용한 방법이다. 심지어 이단들마저도 위기를 맞이하면 선행을 많이 해서 자기들에게 쏠리는 비난을 모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도 세상에서 비난받을 때가 있는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우리는 교리 때문에 비난받을 수도 있고 악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서 비난받을 수도 있다. 이때 비난을 피하려면 그들을 따르지 말고 선행에서 그들보다 우월해지며 선행으로 그들에게 유익을 끼쳐야 한다. 믿음을 버리면 오히려 더 큰 조롱거리가 된다.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렘 1:17) 소신을 버리면 칭찬이 아니라 조롱이 온다.(H 목사) 반면에 믿음을 지키고 선하게 살면 우리를 악하다고 비난하던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한다.

언제 이렇게 되는가? 하나님이 오시는 날. 이날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가실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시면(우리 선행을 보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2) 최후 심판 때: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도 최후 심판 때에는 우리 선행을 비난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행실을 선하게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13부터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면 비난을 받지만 더욱 그리고 끝까지 거룩하게 살면 그 비난을 이겨낼 수 있다.(신앙생활의 역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교회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3. 교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오해로 인한 것입니까, 우리의 부족함 때문입니까?
4. 한국교회가 세상의 존경을 받기 위해 시급히 해야 할 선행을 몇 가지 찾아보십시오. (성도 개인이 해야 할 선행, 교회가 해야 할 선행)
5. 우리가 거룩한 삶으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막고 오히려 그들을 변화시키도록, 우리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2과 준법이 신앙의 척도입니다 (베드로전서 2:13-17)

한 장로님 아들이 안수집사로 임직을 하게 되면 아버지가 뭐라고 할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제 항존직분자가 되었으니 정말 안수집사답게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한다.” 아들도 안수집사답게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안수집사답게 사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 부분에서는 잘 하겠지만 모르는 부분에서는 잘 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술을 끊는 게 안수집사답다고 생각하면 술을 끊을 것이다. 그러나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은 안수집사다운 것과 관계없다고 생각하면 교통법규는 지키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해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면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교회 성도들이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성도들이 바르게 살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신자다운 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믿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며 열심히 교회에 나온다. 그러나 사회생활은 변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교회에 잘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회에서 바르게 사는 것은 신앙생활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말씀만 들어서는 안 된다.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교회에 잘 나올 뿐 아니라 사회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바르게 사는 게 어떤 것인지도 배워야 한다.

바른 삶에 대해 많은 성도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두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악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교회에 나가야 한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므로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교회에 나가 죄를 용서받는 게 중요하다. 이런 생각 때문에 성도들이 교회에는 열심히 나가지만 바르게 살지는 못하는 것이다.
   2) 신앙생활을 잘하면 부자가 된다. 그러니까 부자가 된 것은 신앙생활을 잘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이다. 성도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악한 방법으로라도 돈만 벌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죄 용서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믿는 자는 순종하며 바르게 산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부자가 되는 게 아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보라. 신앙생활에 대한 축복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본문 앞에서는 비난을 막기 위해 선을 행하라고 했는데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게 선한 삶인지 가르쳐준다. 특히 본문은 사회제도를 잘 따르고 정치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단, 정치지도자들은 선을 이루는 자들이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13-14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막 12:17)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면 안 된다. 하나님을 거역하며 세상제도를 따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회제도를 잘 따라야 한다. 준법이 바른 신앙생활의 원리인 것이다.(언더우드 선교사의 국경을 넘은 세례)

왜 법을 지켜야 하는가? 이웃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려면 이웃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신자는 법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특히 본문이 쓰일 당시에 교회가 받은 중요한 비방 중에 하나가 국가의 반역자라는 것이었다. 이런 비방을 막으려면 더욱 법을 잘 지켜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도로교통법을 어기는 것은 생명과 인권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쉽게 어길 수 있는가? 한 TV 프로에서 장애인 부부가 한 밤중에 교통신호를 지켜 온 국민이 감동한 적이 있다.(교회 차량의 새벽 난폭운전?) 다른 법도 마찬가지이다. 반독재 운동을 하며 대통령을 많이 비판해서 반국가적이라고 지목받았던 목사님이 미국에 집회를 다녀오며 달러를 많이 남겨왔다. 그때는 달러를 몰래 가지고 나가던 시절이라 감시하던 기관원들이 이것을 보고 반국가적이라는 말을 삼가게 되었다.

우리는 준법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베드로전서만 이렇게 가르치는 게 아니다. 로마서도 12장부터 바른 삶에 대해 가르치는데 먼저 12:1-2에서 바르게 살라고 포괄적으로 가르친 후 12:3부터는 바른 교회생활에 대해 가르치고 13:1-7에서는 사회제도를 잘 지키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신자들과의 약속은 잘 지켜야 하고 불신자들과의 약속은 어겨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사회법도 잘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법을 잘 지켜야 하지만 교회적으로는 더욱 잘 지켜야 한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법을 어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교회는 이웃의 유익을 위해 자기 권리도 희생해야 할 텐데 법을 어기며 특혜를 누려서야 되겠는가? 혹시 특정국의 선교를 위해서는 부득이 법을 어겨야 할 경우가 있겠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우리는 준법을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본문이 가르쳐주는 대로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 자유는 방종을 위한 자유가 아니라 세상의 방종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이다. 남들이 욕심과 염려로 악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 때 그런 악을 거부하고 바르게 살며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자유인 것이다.

세상의 법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약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봐야 할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법을 어길 수 있는가?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이웃을 사랑하면 법을 지키게 된다는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3. 예수님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지만 남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려고 세금을 내신 적이 있습니다.(마 17:24-27) 여기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까?
4. 성도들이 사회에서 악을 행하는 중요한 이유는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 삶의 분야에 이런 모습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5.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회제도와 법을 잘 지키도록,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3과 직장생활도 신앙의 척도입니다 (베드로전서 2:18-25)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과 축복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1) 성경을 읽어야 한다. 음식을 먹어야 몸에 유익한 것과 같다. 2) 성경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오해하면 모르는 것만 못하다. 이단을 보라. 불신자보다 복음을 더 강하게 거부하지 않는가? 3) 성경의 의미를 바로 적용해야 한다.(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성경을 바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1) 그 말씀을 누가 했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셨다. 이 말씀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처럼 제삼자이면서 가르치는 입장의 사람이 해야 한다. 2) 그 말씀을 누구에게 했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피해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가해자가 자기보호의 구실로 삼으려고 이용해서는 안 된다.(교회에 오는 도둑들의 생각?)

오늘 본문도 이것을 잘 이해하며 읽어야 한다. 본문은 근로자와 사용자 중에 누구에게 주신 말씀인가? 근로자이다.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이 말씀대로 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절) 사실 오늘 본문은 사환에게 주신 말씀인데 사환은 당시에 집안일을 보던 노예를 의미한다.

당시의 노예들 중에 주인보다 학식이나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특히 그리스인들은 학식과 상업능력이 뛰어났는데 이들이 로마에 패해 노예가 된 경우가 많았다. 이런 노예들 중에는 능력에 따라 주인으로부터 수당을 받아 자기 재산을 불리고 그 돈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이들이 사보타주를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사보타주: 맡은 일을 하는 척하면서 제대로 하지 않아 능률을 떨어뜨리거나 심지어 기구들을 망가뜨리는 행위) 그러나 여전히 노예이기 때문에 주인의 모멸이나 박해를 당할 위험이 있었다.

본문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내용은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다. 선한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악한 주인에게도 잘하라는 것이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때까지도 화내거나 저주하거나 사보타주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일을 잘 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모든 제도를 지키라는 지난 주의 교훈과도 잘 통한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난해한 모습이 있다. 1) 노예제도를 인정하라는 것인가? 실제로 미국의 노예시대에 다음 말씀이 노예주를 위해 오용되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 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하지만 이 말씀은 노예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주인에게는 어떤 말씀을 주시는가?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4:1) 성도들은 노예로 취급하지 말고 형제로 취급하라고 한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몬 1:16)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이렇게 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딤전 6:2)

그런데 노예제도는 왜 파괴하지 않았는가? 당시 상황에 적합한 선교를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 6:1) 이것은 예수님이 일시적으로 이방인 선교를 금하고 여인에게 사도의 직분을 주지 않으신 것과 같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이것이 성경적인 개혁의 중요한 원리이다. 우리는 잘못된 제도를 고쳐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원칙적으로 사랑과 희생이 투쟁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누룩이 반죽을 부풀리는 것 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악한 사회에 들어가 속에서부터 조용히 변화시키는 것이지 외적인 폭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요시야의 종교개혁은 내적 변화 없는 제도적 변화여서 실패/ 전도와 헌금은 어떻게 하는가?)

2) 악한 주인에게 순종하면 정의는 어떻게 되는가? 악한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은 악한 명령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도 사랑과 온유로 대하라는 것이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외편도 돌려대라는 말씀과 같은 뜻이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며 하나님의 정의에 맡기라는 뜻이다. 선을 행하고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문자적으로 ‘은혜’) 일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칭찬과 은혜를 받는 길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의인의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절) 아울러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바르게 살게 되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절)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의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의롭게 살아야 하고, 아울러 우리가 이렇게 살면 예수님의 경우처럼 우리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의롭게 살아 사회에 정의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지금 우리나라의 노사문제에 대한 나의 평가와 바람직한 모습을 말씀해주십시오.
3. 지금 우리사회에서 꼭 고치고 싶은 모습을 몇 가지 말씀해주십시오. 이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한국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4. 내가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몇 가지 말씀해주십시오.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겠습니까?
5. 우리가 직장과 사회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며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4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비결 (베드로전서 3:1-7)

결혼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신 축복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그러나 결혼은 고통도 준다.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 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신자와 신자의 결혼(신앙관 차이, 교회 선택), 신자와 불신자의 결혼, 불신자와 불신자의 결혼(성격, 가치관의 차이), 모두 쉽지 않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 현대 사이에는 문화나 관습의 차이가 있어 현대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성경에는 일시적인 교훈도 있다. 이런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우상파괴: 그대로 따르기보다 정신을 알고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해서 성경의 교훈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성경의 교훈을 너무 쉽게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며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결혼에도 나타나는데 두 가지 모습이 중요하다.
   1) 불신자와의 결혼에 관대하다. 한 목사님 딸이 불신자와 선을 봤다. 목사님이 성품을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자와의 결혼은 피하는 게 좋다.(특별한 소명은 제외: 삼손[삿 14:1-4], 호세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4a) 이 말씀은 불신자로 인해 삶에 큰 영향을 받을 만큼 가까운 결합은 피하라는 뜻이다.(결혼, 동업) 결혼한 후에 전도하려고 하지 말고 전도한 후에 결혼하라.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전 7:13)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전 7:15a) 이런 말씀은 결혼 후에 믿게 된 경우에 대한 교훈이다.
   2) 부부의 역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한다. 이런 교훈을 옛날의 남존여비 사상에서 나온 교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1절a) 물론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당시 상황과 문맥을 알고 본래의 메시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함부로 옛날 교훈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본문을 보고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거나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아내에게 주는 말씀을 남편이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근로자에게 주신 말씀을 사용자가 오용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성경은 노예도 성실히 일하라고 하지만 주인도 노예를 형제처럼 대하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부부에 대한 교훈도 이와 비슷하다.(여전도회 헌신예배 설교 후?) 그래서 본문만 보고 거부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교회가 비방 받지 않고(비방을 막기 위해 선행하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라) 선교의 열매가 맺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선 아내가 이렇게 해야 남편이 감동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다른 이웃들까지 복음을 잘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아내가 비천해지면 선교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하면 남편과 많은 이웃의 선교에 큰 유익이 되는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이 심한 집안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밤을 사다주며 이것을 매일 저녁 10개씩 삶아서 어머니에게 드리면 어머니가 비대해져 빨리 돌아가신다고 했다. 며느리는 기뻐하며 매일 저녁 정성껏 삶아드렸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점점 며느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몇 달 후 며느리가 남편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는 밤을 드리지 않겠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너무 좋아졌기 때문이다.

본문은 아내에게 외모로 치장하지 말고 마음을 온유하고 안정하게 하라고 한다. 온유는 부드럽게 양보하는 모습이다.(쿠션, 전기담요) 안정한 것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이것은 다투는 것을 싫어하고 비방하거나 공격하지 않는 모습이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19) 이게 남존여비 사회에서만 그런가? 그러니 아내가 바가지를 긁거나 이 사람 저 사람 비방하면 어떻게 선교가 되겠는가? 아내가 남편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이고 남편이 원하는 것은 존경받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남자는 예쁜 여인 이상으로 존경해주는 여인에게 유혹받기 쉽다고 한다. 이것은 신문에 난 것이지만 사실이다. 성경도 이렇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너(하와)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개역) 그래서 아내가 남편을 존경할 때 가정에 화평과 선교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선을 행하고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정에 어려움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여전히 남편을 존중하며 사랑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비방하는 것은 대부분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이다. 재물, 자녀, 건강, 등에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온유와 안정으로 남편을 존중하며 함께 기도로 이겨나가야 한다.

물론 우리는 여인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본문을 오용하여 여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본문은 아내의 권리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미덕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내는 본문이 여인의 권리를 해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의 딸답게 이런 미덕을 갖춰야 한다. 그러면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다. 가족은 평등하지만 서로 투쟁하며 하향평준화가 되지 말고 서로 존중하며 상향평준화가 되어야 한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신앙의 문제로 가족들과 갈등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믿는 가족과? 불신 가족과?)
3. “남편을 왕으로 섬기면 나는 왕비가 되고, 남편을 종처럼 부리면 나는 (   )이 된다.”에서 (  )를 채워보십시오. 이 말에서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4.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 남편과 아내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을 각각 다섯 가지씩 조원들이 함께 찾아보십시오.(출석부에 끼워 제출해주십시오.)
5. 우리가 진실한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미덕을 갖춰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5과 가정생활을 잘못하면 기도가 막힙니다 (베드로전서 3:1-7)

세상에는 부당한 차별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가난해서 받는 차별, 피부색 때문에 받는 차별, 여성이기에 받는 차별일 것이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 이런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신학적인 운동이 일어났을 정도이다. 해방신학 혹은 민중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물론 이런 신학운동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교리와 실천의 혼동: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실천이고 예수님을 구속자가 아니라 계급투쟁가로 보는 것은 교리이다.)

여성차별을 생각해보자. 서양에서는 여성이 대접을 잘 받는가? 아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서양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것이 인형을 아끼는 것과 비슷하게 보인다. 서양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것 같아도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게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이다.(기사도의 여성존중?)(여권운동도 서구에서 발생했다.)

베드로전서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철저히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 방법으로 두 가지를 가르친다. 강한 사람들은 사회관습을 넘어서 약한 사람들을 철저히 존중해주라고 한다. 반면에 약한 사람들은 사회관습 이상으로 강한 사람들을 잘 섬기라고 한다. 그래서 세상을 감동시키라는 것이다. 본문 앞의 두 문단에서는 노예가 주인을, 아내가 남편을 잘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오늘 본문 7절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당시에는 남편이 권력층이었다. 그래서 이 교훈은 모든 권력층에게 가르쳐주는 신앙생활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권력층은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의 약한 형편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잘 대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상당히 어렵다. 사람은 남을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고난이 주는 유익한 점 중에 하나가 약한 자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징기스칸: 장군은 너무 강하면 안 된다. 병사를 이해하지 못해 리더십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남을 이해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쳐준다. 그것은 지식을 따르는 것이다. 어떤 지식인가?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알던 당대의 세상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성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주는가?

1)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하나님은 남성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것은 아버지의 이미지가 하나님의 이미지에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치려고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하면 안 된다.(이미지 왜곡, 하나님 오해) 하나님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백인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잘못이다.(예수님을 흑인이라고 해도 곤란)

2) 부부는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한 몸의 지체 중에 더 잘난 게 있는가?(사슴의 뿔과 다리?) 한 몸 안에서는 다 평등하다. 서로 자기 역할을 하며 협력할 때 모두가 행복해진다.

3) 결혼은 일부일처제이다.(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한 사람씩 만드셨다) 그래서 간음은 무서운 죄이다. 십계명에서도 살인 다음으로 나온다. 그리고 간음죄는 남녀에게 동등하다.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우리나라 간통죄 논란)

4) 아내는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다.(벧전 3:7) 이것은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b) 이것은 선입관, 관습, 체질적으로 장벽이 있다는 뜻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어떤 분야에서 열등하다는 선입관이 있다.(하버드대학 총장이 여성은 수학, 과학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했다가 사임) 가사 돌보는 일을 많이 하는 문제, 임신의 문제(교육전도사의 경험), 등이 여성의 활동에 장벽이 된다. 이런 모습 때문에 여성이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는 것이다. 남편은 이런 형편을 알고 더욱 존중하고 보살펴야 한다.

5)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사람이다. 영생을 함께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만큼 평등한 것은 없다. 평소에 아무리 잘 대해줘도 유산을 다르게 주면 불공평하다. 여성은 남성과 똑 같은 유업을 받는다. 남녀가 완전히 평등하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남편은 이렇게 아내가 자기와 동등하면서도 사역의 모습, 체질, 관습, 등의 여건에 의해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잘 대해줘야 한다. 공평하려면 약한 사람을 잘 대해줘야 한다. 추위를 타는 사람에게 옷을 더 주는 게 공평하다.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4b-25) 우리는 사랑으로 이렇게 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 경고의 말씀을 준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3:7b) 기도가 막히면 죽는다. 산소공급선이 막힌 것과 같다.(머구리, 잠수부) 아내를 박대할 정도가 아니라 이렇게 잘 이해하고 귀하게 대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인종차별, 빈부차별이 나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남녀의 성차별도 나쁘지 않습니까? 우리사회에 흔한 성차별의 예를 들어보십시오.
3.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 남편이 가정에서 바꿔야 할 태도나 행동을 구체적으로 찾아보십시오.
4. 요즈음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뒤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 우리 가정의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도와서 화목하고 영적으로 건강한 가정이 되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6과 이런 교회가 복을 받습니다 (베드로전서 3:8-12)

지금까지 살펴본 베드로전서의 중요한 내용을 정리해본다. 1) 산 소망을 강조한다. 2) 거룩한 삶을 강조한다. 3)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 우리도 구원받고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막아 선교에도 유익하다. 세상에서 바르게 사는 것은 교회생활보다 더 중요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b) 그러나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교회생활부터 먼저 해야 한다.(악한 습관을 버리고 교회에 나오는가, 교회부터 나오고 악한 습관을 버리는가?) 왜냐하면 교회생활을 통해 악한 습관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버릴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성에 있어서는 세상에서 바르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위급한 사람 돕기 위해 교회 결석)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처음에는 포괄적으로 준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14-15)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2:1) 그러다가 2:13부터 좀더 구체적으로 주는데 이것이 사회생활에 대한 교훈이다. 1) 사회의 규범을 지키라.(2:13-17. 일반적인 사회생활) 2) 사환들은 성실히 일하라.(2:18-25, 직장생활) 3) 남편과 아내의 바른 자세.(3:1-7, 가정생활)

그리고 3:8부터 교회생활에 대한 교훈을 준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3:8) 이것은 생활 전반에 대한 교훈이지만 교회생활이 특별히 강조된 것이다.(밑줄 참조) 이 교훈이 사회생활에 대한 교훈보다 나중에 나온 것도 사회생활이 교회생활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당시처럼 교회가 사회에서 비난을 받을 때는 더욱 그렇다. 오늘의 교회는 어떤 형편인가?

그러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마음을 같이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목표가 같아야 한다. 목표가 다르면 절대 같은 마음이 안 된다. 이때 큰 목표와 작은 목표가 다 같아야 한다. 큰 목표는 다 같이 교회발전이어도, 작은 목표가 양적 성장과 질적 성숙으로 나뉜다면 충돌이 생긴다. 그리고 방법도 같아야 한다. 질적 성숙을 목표로 세워도 방법이 기도회와 성경공부로 나뉘면 하나가 되지 못한다. 단, 사명이 서로 다른 것과 마음이 나뉜 것은 구별해야 한다. 성경공부를 하기로 해도 장소 준비, 조원 연락, 간식 준비, 등으로 사명은 나뉜다. 사탄과의 전투에서 공격지점과 작전은 통일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대와 병과별로 전투의 사명은 다른 것이다.    2) 체휼해야 한다. 문자적으로는 아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포괄적으로 생각하면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것이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이성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체휼하는 것은 감성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정치인이 함께하는 것은 마음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정치이념이 달라지면 헤어진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하는 것은 체휼하기 때문이다. 정치이념이 달라도 헤어지지 않는다. 교회는 이 둘에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3) 형제사랑이 필요하다. 형제사랑은 공평한 사랑이다. 세상에서는 능력이나 지위에 따라 차별된 사랑을 한다. 그러나 형제간에는 이런 차별이 없다. 성도들은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업적이나 직분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 차별당하는 자는 교회를 떠날 위험이 있고, 차별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떠날 위험이 있다.(업적과 직분의 독) 교회의 직분은 효율적 사역을 위한 사명 분담일 뿐이다.
   4)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 단어는 민망히 여긴다는 단어에 좋은 마음이라는 뜻이 덧붙은 단어이다. 민망히 여긴다는 단어는 내장에서 나온 말로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의미한다.(원숭이의 단장과 유사) 애간장이 녹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5)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 자주 생각해본 것이라 오늘은 특별한 모습 한 가지만 생각해본다. 교회에서 겸손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눌리던 사람이 교회의 평등을 빌미로 교회에서 권세를 잡으려고 할 때 겸손해지지 않고 문제가 생긴다.(이것은 이민교회에 흔한 모습인데 어느 교회에나 나타날 수 있다)
   6)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오히려 복을 빌어주라고 한다. 앞의 5가지는 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모습인데 6번째 것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는 모습이다. 이것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1) 강한 자와 약한 자의 화목이 중요하다. (2) 특히 교회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게 더 중요하다. 앞에서 약자(사환과 아내)가 강자를 섬기는 모습을 더 많이 말한 것은 세상의 관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야 세상의 비방을 막고 선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모습을 더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원래 성도들은 공평한데 공평하려면 강자가 더 많이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약자가 섬기는 모습이 강조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7) 말을 조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악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11절) 악한 말은 진실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함을 보라) 둘째,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을 말하지 말고”(11절) 거짓말은 유익할 것 같아도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은 결국 해가 된다. 교회는 정말 말이 많은 곳이다. 중직자일수록 말을 조심하라. 특히 화평을 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거나 ‘체휼하지’ 못하는 말을 피해야 한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갖출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우리교회 성도들이 마음을 같이 하는 목표와 같이 하지 못하는 목표를 찾아보십시오.
3. 나는 우리교회 성도들과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족이나 세상 친구들과 비교할 때 어떤지 말씀해주십시오.
4. 교회에서 들은 말 중에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 말을 몇 가지 소개해주십시오. 나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된 말도 몇 가지 소개해주십시오.
5. 우리가 이성과 감성에서 하나가 되고 겸손히 서로 섬겨 귀하고 복된 교회를 이루도록, 나라와 세계의 평강을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7과 고난을 이기는 믿음 (베드로전서 3:13-16)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어려움을 겪어보면 알 수 있다. 어려울 때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는 사람이 좋은 친구이다. 믿음도 이와 비슷하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이 나오는데 대부분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다. 어려움에서 믿음을 지키면 어떻게 되는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1) 이 세상 어려움을 극복하고 축복을 누린다. 2) 이 세상 어려움은 그대로 당하나 믿음을 잃지 않고 영생의 축복을 누린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35b)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3-38)

이렇게 진정한 신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다. 단, 어려움을 이기고 축복을 받는 경우도 있고 어려움 속에서 인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둘 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면 고난 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켜야 하는가? 본문이 이것을 가르쳐준다.

본문 13절은 먼저 선을 행하면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이 있다. 1) 우리가 꾸준히 선을 행하면 악한 사람도 감동을 받아 우리를 덜 해치게 된다. 2) 우리가 선을 행할 때 해치려고 하는 존재는 사탄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보호하신다. 그래서 궁극적인 해는 당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고난은 당할 수 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러나 선을 행하여 받는 고난은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해와 고난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본문 14a) 의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는 기회이다. 그래서 복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세상에서도 고난을 겪어야 진급이 빠르다.(군인, 교사)

우리가 이것을 알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14b) 여기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1)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보다 강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 2)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의 박해(권력)나 비방(이목)을 두려워한다. 그러면 시험에 빠진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박해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억하면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비방은 사람들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더 귀하게 여기면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반면에 사람 앞에서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시험에 들게 된다. 교인들 앞에서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도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라. 외식, 경쟁, 과장, 거짓, 사람의 명예 도둑질, 하나님의 영광 도둑질, 등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거룩한 분으로 믿어야 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15a) 이 말씀은 내가 주님을 모시고 거룩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주님을 거룩한 분으로 모시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거룩한(구별된) 분, 다른 인간과는 전혀 다른 분으로 믿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이 주시는 진정한 소망을 바라보며 세상의 고난을 이길 수 있다. 예수님은 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과 다른 거룩한 예수님은 부인하고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찾으려고 노력한다.(성경을 재구성하며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 유추) 종교다원주의자들도 예수님만 구원자라는 것을 부인하므로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예수님을 거룩한 분으로 믿을 수 없을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1) 인간의 칭찬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과 현대 신학자들이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보는 상황에서 인간의 칭찬을 추구하면 예수님을 거룩한 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뒤쳐진 신앙으로 치부된다) 2) 예수님의 거룩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서 위인의 가르침이나 행동만 보고 감동을 받으면 예수님을 위인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죄 용서와 기적의 능력을 체험하면 거룩한 분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전에 살펴본 대로 우선 선한 삶으로 그들의 비난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교리로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특히 그들은 우리가 그들처럼 살지 않는 것을 비방한다. 이에 대해 중요한 답변은 우리의 소망을 알려주는 것이다. 소망이 우리의 믿음과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소망이 다르면 삶이 달라진다.(문학가가 되려는 사람과 운동선수가 되려는 사람의 삶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 소망의 답변을 할 때도 선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에 대한 겸손과 경외심이며 동시에 묻는 사람을 존중하는 존경심이다. 우리는 불신자와 싸우기 위해 답변하는 게 아니다. 불신자에게 은혜를 나눠주려는 것이다.(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하다가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들만 구원받는다고 잘난 체한다.”는 비난을 받은 경험)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믿음을 지켜서 세상의 고난을 극복하고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과 믿음을 지켰으나 고난을 그대로 당한 사람의 예를 찾아보십시오.(성경이나 주위 인물 중에서)
3. 예수님이 세상의 위인들과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몇 가지씩 찾아보십시오.
4.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구들이 나에게 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고 세상 쾌락을 멀리 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5. 우리가 예수님을 거룩하게 모시고 산 소망 속에 모든 고난을 이기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18과 신자는 선한 양심으로 삽니다 (베드로선서 3:17-22)

먼저 앞 문단의 내용을 되새겨본다. 1) 선을 행하면 해를 당하지 않는다. 2) 선행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은 해가 되지 않고 복이 된다. 3)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온유와 두려움으로 산 소망을 말해주라. 4) 선한 양심을 가져서 비방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16절) 이중에 4)는 지난 주에 살펴보지 못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온다.

오늘 본문은 우선 앞 문단의 주제 중 2)를 다시 말해준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17절)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살도록 격려해준다. 예수님이 고난의 삶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고난의 삶을 사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고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신 고난을 말한다. 2)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고난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고난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십자가는 사형도구이며 고문도구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의 욕심, 자아, 편안함, 고집, 등을 다 포기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항상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본문도 이 두 가지 고난을 가르쳐준다. 1) 우리에게 선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고 하면서(17절) 그 다음에 예수님도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은(18절) 예수님이 선을 위해 고난 받으신 것을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2) 예수님이 의인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속죄의 고난이다.(18절) 이 중에 본문은 본받아야 할 고난이 강조되어 있다.(문맥이 보여주는 선행의 주제, 22절에서 예수님이 고난 후에 영광 받으신 것을 강조하는 모습, 20-21절에서 바른 삶을 강조하는 모습, 등)

예수님이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후 어떻게 되셨는가?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도 천국의 영광을 얻으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우리 자신이 천국의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우리가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믿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고난은 우리를 연단하여 신앙이 성장하게 해준다. 그래서 더욱 믿음을 잘 지키게 되는 것이다.(‘훈련 때의 땀 한 방울은 전투 때의 피 한 방울과 같다’)

그리고 우리도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이웃을 구원하게 된다. 물론 우리가 남의 죄를 대속해주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고난을 감수하며 의를 행하면(양보, 원수사랑, 등)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고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부흥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모습이 두 가지 있다. 1) 축복을 약속해준 것이다. 60-70년대에 나라가 산업화되면서 많은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와서 어렵게 살았다. 이 때 하나님의 물질적인 축복을 약속하여 교회가 부흥하였다.(S교회) 2) 고난을 받은 것이다. 70-80년대에 군사독재로 백성이 고통을 당할 때 사회정의를 위해 고난을 받아 교회가 부흥하였다.(C교회)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 신앙생활의 모범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1) 예수님은 죽으신 3일 동안 무엇을 하셨을까? 2)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본문 19-20절이 이에 대한 답을 주는가?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 말씀은 심히 어려운 구절이다. 여러 해석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예수님이 죽으신 동안 영으로 지옥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자들에게도 어떻게든지 은혜 받을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단,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지옥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부자가 지상에서 성경을 알고 구원받을 기회를 가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기회가 있다고 해도 지상에서 복음을 몰랐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이 맞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 판결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혹시 이 해석이 맞아도 지옥에서 회개할 영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선교를 강조하신 것 아니겠는가?

이 본문은 노아 시대에 구원받은 자가 적다는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구원의 삶을 살려면 얼마나 남달리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끝으로 본문은 노아가 물을 통과하여 구원받은 것을 세례와 연결시킨다. 우리도 세례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는 죄 씻음이 아니라 선한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세례가 죄 씻음이라면 우리는 죄 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른다. 세례가 계속해서 죄를 씻어주기 때문이다.(세탁이 보장되면 마음 놓고 옷을 더럽힌다?) 그러나 세례가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 죄를 멀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세례가 용서의 은혜만 입는 게 아니라 선한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라는 말씀은 예배도 그렇다는 뜻입니다. 예배가 내 신앙생활에서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3. 노아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이 극소수였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4. 내가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에서 선을 위해 당해야 할 고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5.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의를 위한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해내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베드로전서(4,5장) 공부

 

 

제19과 죄의 천적은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 4:1-6)

뱀이나 거미는 해롭게 보이지만 사실은 이로운 동물이다. 해로운 동물의 천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뱀이나 거미가 기분 나쁘다고 몰살시키면 큰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삶에 가장 해로운 게 무엇일까? 죄이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축복을 그치게 만든다. 죄는 죄책감과 죄과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켜 마음의 평안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실제의 삶에도 징계가 임하여 큰 해를 당하게 만든다. 더욱이 영원한 파멸에 빠지게 만든다. 죄는 우리에게 가장 해로운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죄를 제거해야 한다. 어떻게 죄를 제거할 수 있는가?

죄를 제거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1) 지은 죄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므로 죄를 해결하려면 벌을 받아야 한다. 법을 어기고 도망 다니던 사람도 벌을 받고 나면 떳떳한 시민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벌을 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벌을 받으면 완전히 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벌을 죄 없는 다른 분이 대신 받아줘야 한다. 이것을 해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이 내 죄를 용서받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죄를 용서받으면 우리는 죄책감에 빠지지 말고 앞으로 죄를 멀리하면 된다.
   2) 앞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죄의 세력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후에 죄에 젖어버려서 자신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 이것도 예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도록 고쳐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고쳐주셨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의 죄에 젖은 모습이 치유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죄를 제거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연약하여 자꾸 죄를 짓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돕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다. 본문 1절이 이것을 가르쳐준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고난을 받으면 죄를 그치게 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고난을 받는 것이 죄를 그친 증거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도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게 해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고난을 통해 거룩한 사람으로 성숙되며 죄에서 멀어진다. 여기에는 두 가지 고난이 있다. 1) 징계의 고난이다. 징계는 잘못을 제거하는 데 크게 유익하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 우리의 영적 성장도 비슷하다. 우리는 징계의 고난을 통해 죄에서 멀어지고 훌륭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2) 훈련의 고난이다. 잘못이 없지만 고난을 통해 믿음을 굳세게 만들어 죄를 이겨내게 해주는 것이다. 어떤 집사님: “하나님이 어떤 축복을 주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시나?” 이 집사님은 고난 후에 축복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믿음이 자라 큰 고난도 이겨내는 것이다.

우리가 고난 받는다는 사실이 죄를 멀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포로들을 고문하면서 한 사람만 고문하지 않으면 그는 반역자로 지목된다. 고난 받는 것이 죄를 멀리한 증거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 4:4) 성도들이 악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들의 악행을 살펴보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여기서 ‘방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마을’이라는 단어에서 온 말이다. 마을 잔치가 그렇게 방탕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마을 잔치에는 네 가지가 모습이 있었다. 1) 우상에게 제사했다. 2) 술에 취하여 방탕한 잔치를 벌였다. 3) 잔치 뒤에 음행이 따랐다. 4) 로마를 대적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래서 본문이 피하라고 하는 악행은 우상숭배, 술과 방탕, 음행, 폭동인 것이다.

우리사회의 우상숭배는 어떤가? 돼지머리 고사, 사주팔자, 관상, 손금, 등은 민족의 전통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우상숭배이다.(하나님 외의 영적 존재 섭리 인정) 종교다원주의도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를 폭동으로 몰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본문은 폭동을 거부한다. 우리사회의 음란도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음란문제는 해외성매매나 이혼율이 세계 최고수준에 이른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술은 일인당 술 소비량이 세계 2위 수준이다. 폭동의 문제는 어떤가? 지금은 우리나라에 폭동이 많다고 볼 수 없지만 우리가 단체행동이 강한 나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해방 후 좌우대립, 매년의 노동투쟁, 월드컵 응원, 등) 이것은 선동의 위험이 크다는 위험을 알려준다. 성도들은 폭력적 선동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선한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려는 시험을 극복해야 한다.(산상설교)

6절의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는 말씀은 3:19와 연결된 내용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이것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뜻일 수도 있고, 단순히 죽기 전에 믿은 사람들이 지금 몸은 심판을 받아 죽었지만 영적으로는 살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본문이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선을 행하라는 것을 가르치므로 본문의 문맥에는 후자가 더 잘 맞는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이 우리 죄를 제거하고 우리를 죄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죄의 천적이다. 고난은 해롭게 보이지만 사실은 유익한 것이다.(하나님의 자녀에게)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우리교회 예배당에 있는 십자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혹시 십자가를 보며 용서의 기쁨이 아니라 죄를 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3. 죄 때문에 징계를 받고(징계의 고난) 죄를 멀리하게 된 경험이 있습니까?
4. 우상숭배, 술과 방탕, 음란, 폭동 중에 우리사회에서 걱정되는 모습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성도들과 교회가 어떻게 하면 사회에 도움이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5.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이 죄를 제거해주는 축복임을 알고 고난 속에서도 신앙의 유익을 얻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20과 한 주일 후에 종말이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베드로전서 4:7-11)

성도들에게 한 주일 후에 종말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니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답이 나왔다. ‘죄를 회개하고, 이웃과 화해하고, 전도 못한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마지막 시간은 교회에 나와서 찬양하다가 종말을 맞이하겠다.’ 불신자들에게 물으니까 못해본 것들을 하겠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여행, 식사, 등) 신자들에게서는 이런 것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다를까? 소망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신자는 내세에 소망을 두고 있으나 불신자는 현세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것이다.


이 질문을 한 후에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왜 지금은 종말을 앞둔 사람처럼 살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종말이 곧 온다고 생각하며 미래를 전혀 준비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그러나 종말을 생각하며 회개, 화해, 전도, 등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서 예수님도 종말에 대한 긴박감을 주신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긴박감을 알려주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면 종말을 예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7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것은 딴 데 정신을 잃지 말고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정신인가? 신앙의 정신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것을 피해야 한다. 앞 문단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우상숭배, 술과 방탕, 음란, 폭동을 들었다. 이런 것들은 자기가 하나님 대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줄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 방법은 예배, 말씀, 찬양, 기도, 등이 있는데 본문은 이 중에 기도를 강조한다. 기도는 우선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가까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른 기도도 중요하다. 바른 기도는 자기의 욕심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참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에 따라 살게 된다.

2. 사랑해야 한다.(8절)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 뜻대로 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문은 9-11절에서 사랑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 그런데 왜 사랑해야 하는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이다. 종말을 맞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죄를 용서받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주기도에도 나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용서를 지키는 길이 이웃을 사랑하며 용서하는 것이다.(10,000달란트 탕감 받은 종)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씀은 세 가지 뜻이 있다. 1) 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내 죄를 용서받는다. 2) 내가 이웃을 사랑하면 이웃을 용서해준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아들이 며느리에게 잘해주면 경우, 사위가 딸에게 잘해주는 경우?) 3) 공동체의 죄가 적어진다.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죄 적은 교회가 된다.

3. 서로 대접해야 한다.(9절) 이것은 나그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는 것 같은 실제적인 대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사회에서는 정신적인 대접이 물질적인 대접 못지않게 중요하므로 여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원망 없이 대접하는 것이다. 즉, 사랑으로 대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도움이 된다. 1) 내가 대접하는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라.(양과 염소 비유) 2)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고 생각하라.(10-11절) 3) 특정인이 과중하게 일하지 않도록 일을 나눠서 하라.(일이 과중하면 원망) 그러려면 섬기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의례히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능력도 필요하다. 무능한데 일을 맡기기는 어렵다. 그래서 훈련도 받고, 성령님의 은사도 받아야 한다.

4.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10-11절) 마태복음 25장은 종말을 예비하는 세 가지 자세를 가르쳐준다. 1) 믿음의 자리를 지키라.(열 처녀 비유) 2)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라.(달란트 비유) 3) 이웃을 사랑하라.(양과 염소 비유) 오늘 본문도 이것을 가르쳐주는데 믿음, 사랑, 사명의 순서로 가르쳐준다. 본문은 사명 감당을 위해 세 가지를 가르쳐준다. 1) 은사를 받으면 봉사하라. 은사를 받고도 봉사하지 않으면 악한 종이다. 은사는 그 자체가 사명이다. 은사가 있는데 봉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봉사하라고 권하는 것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구원과 축복의 길을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은사에 따라 섬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 이것은 다른 사명을 맡겨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기 사명에 충성해야 하듯이 자기 은사에 따라 섬겨야 한다. 남과 경쟁하지 말고 자기 은사에 자존감을 가지고 남과 협력해야 한다.(다른 과의 전문의와 잘 협력하는 의사를 찾은 환자) 3)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자기의 영광을 구하거나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라.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더욱 잘 섬길 수 있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한 주일 후에 타국으로 이민을 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에 비춰 종말을 예비하는 자세를 생각해보십시오.(이민 준비의 여러 모습들)
3. 나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줄 정도로 교우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4. 나는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은사에 따라 사명을 잘 감당하는 편입니까?(성실히, 겸손히, 자존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5. 우리가 바른 믿음으로 기도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종말을 잘 예비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21과 부끄러운 일과 자랑스러운 일 (베드로전서 4:12-19)

오래 전에 영국에서 큰 돈을 습득하여 주인에게 전해준 사람이 많은 전화와 편지를 받았는데 그 중 90%가 “너는 바보다.”라는 내용이었다. 불의한 이득을 포기했는데 욕을 먹은 것이다. 반면에 많은 사람이 불법으로 이득 얻은 것을 자랑한다.(학생은 부정행위, 운전자는 과속, 등) 세상의 윤리를 지켜도 욕을 먹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고난을 받는다.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마 5:30)는 말씀도 악을 버리면 얼마나 큰 고통이 오는지를 암시한다.


여기에는 최소한 세 가지 고통이 따른다. 1) 손을 찍을 때의 고통이다. 담배를 끊는 것 자체가 힘들다.(아버지의 흡연으로 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도 담배 끊기가 어렵다) 과속이나 부정행위를 중지하는 것도 힘들다. 이런 것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지 염려가 되어 결단을 망설이게 된다. 2) 손 없이 사는 게 불편하다. 과속에 익숙한 사람이 규정 속도를 지키려면 답답하다. 뇌물로 해결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그것 없이 살려면 불편하다. 3) 조롱과 비방을 받게 된다. 비정상이거나 무능하다고 낙인찍힌다. 그래서 소외당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 성도들이 당한 대표적인 고난이 사회의 조롱과 비방이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조롱과 비방이 얼마나 무서운지 본문은 불시험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불시험은 무서운 시험이라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불로 연단하는 것 같이 우리를 강인하게 만들어주는 축복의 훈련이라는 뜻도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그래서 성도들은 이런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4:13a)

운동경기에서 상대팀 응원단이 가장 많이 야유하는 사람은 상대팀에서 잘하는 선수인가, 못하는 선수인가? 잘하는 선수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조롱과 비방을 많이 받는 사람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비방과 조롱 속에서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행으로 비방을 받아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벧전 4:15) 우리가 받는 비난은 믿음 때문에 받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벧전 4:16)

한국교회는 어떤가? 진리의 교리 때문에 비난받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며 당당하게 진리를 지켜야 한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다. 인기투표도 아니고 여론조사도 아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진리를 거부한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진리를 거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비방하는 말 때문에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a)

그러나 한국교회가 악행 때문에 비난받는 경우도 많다. 사회의 악행에 성도들이 연루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성도들의 일반적인 악행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해볼 수 있으므로 오늘은 악행 중에 ‘남의 일을 간섭하는’ 모습을 좀더 살펴본다. 전도를 해보면 교회 다니다가 상처를 받아서 안 다니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특별히 강하게 전도를 거부한다. 이런 사람들이 어디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았을까? 기존교인들이 쓸데없는 말 때문이다.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것은 자격도 없으면서 감독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한 성도가 실수를 하면 그것을 감독하고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른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 여전히 그를 내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면서 잘못을 고치도록 권해야 한다. 이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반면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 앞에서 그 성도를 비방하는 것이다. 비방이 아니라도 덮어줘야 할 것을 드러내어 말하면 쓸데없는 간섭이 된다.(걱정해주는 척하며, 기도해주자고 하며 남의 치부를 말하는 모습) 교회에 이런 모습이 특히 많다고 한다.(다른 성도가 나의 은밀한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옮긴 사람)

교회적으로 사회의 구체적인 정책에 간섭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교회는 사회의 정의를 무너뜨리는 모습에 대해서는 경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의 효율성에 대해서는 성도들 사이에도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마치 어떤 것이 신앙의 절대가치를 지닌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개인의 의견으로 말하는 것은 좋으나 교회의 이름으로 말할 때는 신앙의 확고한 가치만 주장하는 게 바람직하다.(환경, 생태계, 교육방법, 등)

끝으로 베드로는 격려와 경고의 말씀을 준다.(17-18절) 이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 이런 고난을 통해 구원이 온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멸망당할 때는 얼마나 큰 고통을 받겠느냐는 것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우리를 격려한다. 1) 믿는 자들이 결코 쉽게 구원을 성취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고난이 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난을 극복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2) 불신자는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지금 불신자의 길이 편해 보여도 절대 그들을 따르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구원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며 구원의 성취를 소망해야 하는 것이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세상에서 악행을 통해 이익 얻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교회 안에서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3. 나는 교회에서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4. 현재 우리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교회의 이름으로 말한다면 어떤 내용의 말을 하는 게 좋겠습니까?(쇠고기파동, 촛불집회, 정치권 인사문제, 등)
5. 우리가 악행으로 비난받지는 말고 참된 믿음으로 비난받을 때는 담대히 이겨내며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22과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십시오 (베드로전서 5:1-6)

우리의 신앙생활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이다(가정 포함). 이 둘 중에 어느 게 더 중요할까? 단순히 말하기는 어렵다. 사실 교회생활을 잘해야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 이 두 가지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시간적인 순서로는 교회생활이 더 먼저이지만 중요성으로는 사회생활이 더 중요하다.(“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래서 항상 둘 다 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베드로전서는 두 가지에 대한 교훈을 다 주지만 당시에 성도들이 세상에서 비방 받는 경우가 많아 바른 삶으로 그것을 극복하라는 사회생활의 교훈을 많이 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교회생활에 대한 교훈이다. 교회생활이 바로 되지 않으면 세상에서 바르게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생활에 대한 교훈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사랑과 사명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물론 이 두 가지도 분리될 수 없으나 외형적인 모습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구별해서 살펴본다. 오늘 본문은 이 둘 중에 무엇을 가르치는가? 외형적으로는 장로들에게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는 사랑이다. 그러니까 본문은 사랑으로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교훈인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본문은 베드로가 자기와 같은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씀인데 베드로의 위상을 볼 때 이 말씀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직분자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러나 그 교훈의 내용은 모든 직분자에게 해당된다. 이 교훈에서 베드로는 먼저 겸손한 모습을 두 가지 보여준다.
   1) “나는 (너희와) 함께 장로된 자요” 베드로의 외적 위상은 지교회의 장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지방의 작은 교회 목사를 대하는 서울 큰 교회의 제직) 그러나 베드로는 우월한 자로 훈계하는 게 아니라 동역자로 권고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장로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며 결단하도록 돕고 있다.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 성도들을 존중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내 것을 남의 것보다 더 아낀다. 그러나 남의 것이라도 왕의 것이라면 특별히 존중하며 아낄 것이다. 이렇게 성도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높이는 모습도 베드로의 겸손이며 장로들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모습이다. 이렇게 교훈 받을 준비를 시킨 후에 본격적인 교훈을 준다.

1. 성도들을 섬기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양을 친다는 것은 양이 잘 되도록 보살피는 것이다. 성도들의 영적 육적 유익을 위해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남의 양이라고 생각하면 억지로 하고 내 양이라고 생각하면 자원해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양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원해서 하면서도 하나님 뜻대로 한다. 소유의식은 없으나 주인의식은 있는 것이다. 그 양의 주인인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하는 대표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체면 때문이다. “항존직이 안 할 수도 없고....” 자원해서 한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억지로 한 사람은 자랑한다. 그러면 교만해지고 남을 정죄한다. 이것은 하지 않은 것보다 더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2.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해야 한다. 돈을 위해 교회를 섬기지 말라. 사례비를 받는 것은 괜찮다. 그만큼 교회 일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9:13) 그러나 돈을 목적으로 사역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돈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섬기게 되는 이유는 대체로 욕심과 염려 때문이다. 내세의 소망과 현세의 소망(하나님의 도우신다는 믿음)으로 욕심과 염려를 이겨야 한다. 돈을 추구하면 성도들을 차별한다.(부자에게만 관심, 인정을 쓰는 성도에게만 친절) 심지어 교회사업을 통해 개인적인 이권을 추구한다.(교회 일에서 리베이트가 생기면 교회재정으로 환입하라.) 명예를 추구해도 성도들을 차별한다.(교회권력자에게만 관심) 선거운동을 한다.(이것만 없어져도 교회가 상당히 교회다워질 것이다.)

3.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본이 되라. 지도자는 성경과 교회의 사정을 많이 안다. 많은 업적이 있기 때문에 발언권도 존중받는다. 그러나 그래도 주장하는 자세를 하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사역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해야 한다.(벧전 4:11) 그러면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따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주장하는 자세는 사라지고 본이 되는 모습만 보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겸손이 필요하다.

그리고 본문은 장로의 상대가 되는 평신도들에게도 겸손을 권한다. 평신도는 지도자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그 지도를 잘 받아야 한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함부로 거부해서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젊은 성도들이 당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사람의 판단력은 지극히 부족하다. 지금은 내가 확실히 맞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평신도는 우선 지도자의 견해를 더 존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나님이 직분을 그렇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자도 항상 겸손해야 바른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도자나 평신도나 교회 전체나 오직 겸손할 때 높여주신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에서 내가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내가 하는 교회사역을 말씀해주십시오. 그것이 나에게 축복입니까, 부담입니까? 나는 사역을 하면 생색을 냅니까(다른 사람 정죄), 감사하며 만족합니까?
3. 내가 교회를 섬기며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그것이 더러운 이득을 구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십시오.
4. 내가 겸손해지기 어려운 분야는 어떤 곳입니까?(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 어려운 곳)
5. 우리가 억지로나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나 주장하는 자세로 섬기지 않고 겸손히 서로 섬기도록, 우리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

 

 

제23과 잠시 고난 후에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7-14)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가 처음에 성도들에게 뭐라고 축복했는가?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1:2)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은혜와 평강을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b) 교만하면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 겸손해야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다. 사실 하나님과의 평강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데 겸손히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자만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니까 겸손한 자만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것이다. 또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야 은혜와 평강을 얻는다. 사람은 겸손해야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은혜를 입을 수 있다. 또 교만하면 다툼이 일어나지만 겸손하면 평화로워진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잠 13:10a) 목사들 모임에서 한 목사가 중직자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어렵다고 하자 경험 많은 목사가 말했다. “목사가 안 죽어서 그래.” 목사와 중직자들이 겸손하면 교회는 평강을 얻는다. 사람은 겸손한 자와 싸우지 않는다.(겸손무적? 인자무적?)

이렇게 겸손히 주님을 믿으면 나타나는 모습 중에 하나가 염려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어린 아이는 살림걱정을 하지 않는다. 부모님께 다 맡겼기 때문이다. 염려를 주님께 맡기면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얻는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절) 이 말씀은 박해를 받던 당시 성도들에게 특별히 적합한 말씀이다. 겸손한 자는 박해 속에서도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은혜와 평강을 얻는다.(하나님과의 평강, 마음의 평강)

염려가 있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박해, 염려, 유혹이 대표적인 시험거리이다. 염려는 문자적으로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마음이 나뉘는데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스를 잠그고 나왔는지 염려하기 시작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사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의 일을 잘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염려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는가? 병이 났을 때 의사에게 맡기면 염려를 덜지만 의사가 믿음직하지 않으면 다시 염려가 생긴다.(맹장수술대에서 뛰어내려온 맹구) 그러나 하나님께는 염려를 맡길 수 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돌보시기 때문이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 후에 8-9절의 말씀을 주는 것이다. 근신하라는 것은 다른 것에 정신을 뺏기지 않고 제 정신을 차리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이 염려나 쾌락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이 염려하게 하는 것밖에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사탄은 직접 우리를 해칠 수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 일시적인 고난만 줄 뿐이다. 사탄이 주는 것은 해가 아니라 염려이다. 그런데 염려에 빠지면 믿음을 지키지 못해 진짜 해를 입는 것이다.(천로역정의 두 사자/ TV의 구미호: 해를 끼치지 못하나 두려워하면 활동이 위축된다) 우리가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근신하며 위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정직, 헌신, 희생, 등)

베드로는 이것을 이렇게 가르쳐준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9a절) 사탄은 우리가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기만 하면 물리칠 수 있다. 야고보서 4:7b는 이것을 이렇게 가르쳐준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자꾸 약해지는 데 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을 굳건하게 할 수 있을까?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면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할까? 두 가지 말씀이 중요하다. 1) 다른 성도들도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이다.(9b절) 엘리야가 낙심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엘리야처럼 믿음을 지킨 사람이 7,000명 있다는 것이었다. 동료가 있다는 것을 알면 염려를 이길 수 있다. 2) 소망을 바라보는 것이다.(10절) 소망이 염려를 이기고 믿음을 지키게 해주기 때문에 산 소망인 것이다. 이 소망의 내용은 우리의 고난은 잠깐이요 받을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과 하나님이 반드시 이 소망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사말을 하는데 여기에도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다. 1) 베드로는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문안한다고 한다.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한다. 이 말은 당시 지도적인 교회인 로마교회와 오지의 교회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규모나 장소나 구성원에 따라 우열이 생기는 게 아니다. 2) 내 아들 마가라고 한다. 이것은 형제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친밀한 모습이다.(교회 세습 논쟁 때 세습 지지자가 바울이 아들 같은 디모데를 후계자로 삼았다고 해서, 그렇게 친 아들이 아니라 동역자나 후배가 아들처럼 사랑을 받으며 후임자가 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고 한 적이 있다)

토의문제

1. 오늘 말씀이나 베드로전서 성경공부 전체에서 느낀 점을 자유롭게 나누십시오.
2. 쓸데없는 염려로 시간과 힘을 낭비한 경험이 있습니까?(랭크의 수요일 염려상자)
3.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에서 올바른 염려를 찾아보십시오.
4. “세상의 염려는 인간의 교만과 욕심에서 온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염려를 이겨내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해주십시오.
5.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도록, 교회와 나라를 위해, 조원들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오.<오덕호>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 장)

 

믿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말씀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하옵시고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  *  --

사람은 누구에게나 한두가지 남모를 고민이 있고,
시련이 있고,고통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사도 바울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분도
고민과 고통이 있었는데
어느 성도인들 시련과 근심, 고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고통이라는 것 없이는 아무런
시작도 없고 아무런 끝도 없는 것이다. 인생은 다른 이의
고통 속에서 낳고,내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통과 근심, 시련 자체가
은혜와 복일 수 는 없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시련과 근심,
고통도 믿음으로 받으면 복과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조개는 자기 속으로
들어온 모래알 때문에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합니다.이 아픔을 이겨내려고 단단한 피막을 형성합니다.

 

이 아픔, 쓰라린
상처를 자신의 진액으로
품고 감쌀 때 비로소 세상에서 값진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성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토록 진주같이 값진 믿음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상처를 믿음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쓰라린 아픔과 고통의 상처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껴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진주와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 베드로 사도 당시 처럼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신앙생활을 핍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금도 신앙생활을 힘들게 만드는 사탄의 수단은 여전합니다.

 

오랫동안 불치의 병을 앓거나 사업에 실패를
하거나 직장을 잃거나 모략과 중상을 당해 억울하거나
믿음이 상처를 입어 하늘을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잇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상처를
믿음의 품에 안고 품을 때 진주 같은 믿음이 형성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1.  택하심 받은 자들에게 문안함.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
 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전서 1 :1-2)  

 

AD 64년 경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를 받아 로마 통치 아래 있던  성도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방은 소아시아 지방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시아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난
나그네요, 진정한 고향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는 나그네들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이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아시고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택하시고  불러 피를 뿌려서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1 :3-4)

 

현재 성도들은 많은 고난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들을 인간적으로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들이 거듭나기 전에는
죽은 소망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썩고 더럽고 쇠하는 세상을 소망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고난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듭난
후에 고난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 나라에 산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썩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그들이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 나라는 가난을 벗어나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되면 행복한 복지 사회가 도래
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자 과소비,
사치, 향락 산업이 번창하게 되고 아울러 살인, 강도, 강간,
인신매매, 조직 폭력 등 각종 흉악 범죄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며 절망케 하며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의 삶에 늘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순수하고
진실되게 합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부요케 하고 확신에 넘치는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합니다.

 


2.  믿음의 시련.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1 :5-7)

 

성도들은
말세에 예비하신
구원을 받게 됩니다.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주십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받을 때 사단의
시험이 많습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불신을 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성도들이
이 세상만 생각하면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생각하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성도들은
여러가지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네로의 박해는 그들을 잠깐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시험을 인하여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이런 시험이 불로
연단하여 만든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의 연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 :8-9)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보지 못했으나.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깊은 행복에 젖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을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 :10-12)

 

베드로는 그들이 믿음으로 받을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말씀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복음을 연구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살폈습니다.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부활의 영광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예수님을 연구하여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보기를 원했던 예수님을 성도들은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후에
태어난 성도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거듭난 성도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3.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
 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베드로전서 1 :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으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야 합니다.
'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는
이 말씀은 나태하고 해이하거나 정신
없이 살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태도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흐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 :14-16)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순종하는 자녀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알지
못했던 때 좇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을 본 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모든 면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불순종적이고 불결한
삶을 살았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은 세상의 더러운
죄악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도 말도 행위도 다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4.  구별된 자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 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 :17-19)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
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섬기는 우리들이 되었으니
나그네와 같은 세상 생활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향은 영광의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불순종과 불결의
죄악들만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즉 참된 신성을 가지신 그 분의 보배로운 피값으로만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귀한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5.  피차 사랑하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1 :20-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해
나타내신 바 되셨습니다. '이 말세'는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시대로 표현되었습니다.

 

구약 4천년의 역사가 지나고 이제 마지막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는 예정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참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 사역을 이루신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셔서 부활의 영광을
주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땅에 있는
사람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
 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 :22-23)

 

'진리'는 복음을 가리킴니다.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복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일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우리의
죄악된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고
그 깨끗해진 마음으로 거짓이 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다운 삶입니다.
예수님도 '서로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참 성도들은 이미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있겠지만, 우리는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영원히 있는 말씀으로 되었습니다.

 

중생의 새 생명은 죽지 않는 생명이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된 생명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실제로 거룩한 순종과 뜨거운 사랑으로 계속 나타나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 :24-25)

 

우리가 전한 복음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육체와 그 모든 영광과 비교됩니다.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지듯이,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이 쇠하여지고
그 모든 영광은 오래지 않아 풀의 꽃과 같이 다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육체와 그 모든 영광에 대조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쇠하여지고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은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의 새 생명도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따라서 여기에 근거한
성도들의 거룩하고 사랑하는 삶은 결코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들 조상 때로부터 물려받은
망령되고 허탄한 행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고 다음어서 거룩하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우리 모두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어떤 고난
어떤 환경에 처했을 지라도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며 장차 주어질 영광으로
인도해 가시는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고 알아가는 우리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에 간직해 놓으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되도록 역사 하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명품 인생  명품 신앙.

                             (베드로전서 2 장 )

  

 

 

 

성경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주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  *  --

세상은 예수님께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롭게 된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소망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죄에서 건져주실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죄에서 건짐 받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보다 더 큰 은혜임을 아는 것이 새롭게 된 마음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진리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에
마음이 끌리고 그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성령에 의해 마음이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이 소망 두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게 된 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전혀
반대로 흘러갑니다. 가난한  열 가정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은 교회에 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자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교회에 지장이 많겠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야 말로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것을 쓸모없다고 버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지 않고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라면
세상이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자라고 해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지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명품 인생 명품 신앙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1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라.
.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2 :1)

 

성도들은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옛사람의 상징들이며 마귀적인 성질들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이런 죄성들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이런 악들에 떨어질 수
있으나. 그러나 성도들은 마땅히 이런 악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 :2)

 

갓난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일입니다.
아기들은 이렇게 엄마의 젖을 잘 먹을 때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는 말은 '거짓 없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단 사설들, 인본주의적 생각들이나 말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흥미만을 위주한 예화나 이야기들과 구별시킨 말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의 바른 교훈을 늘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는 성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에베소 4 :13)

 

우리는 주 안에서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 성장의 정상적 방법은 순수한 성경 말씀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후서 3 :16-17)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다 장차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베드로잔사 2 :3)
                           

'주의 인자하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과 은혜와 인자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자,
죄 없는 자,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마땅한 것입니다.

 


2.  거룩한 제사장.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베드로전서 2 :4)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의로운 자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시고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배이십니다.
또한 그는 보배로운 산 돌이십니다. '산 돌'이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베드로전서 2 :5)

 

우리도 산 돌같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신령한
집'이라는 말씀은 성도들이 모여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를 돌들로 지은 건물에 비유한 것이다. '신령한' 집이라는
말씀은 교회가 단순히 물질적인  건물이나 육체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 곧 성령의 전인 것을 나타냅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신령한 집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 2 :21-22)

 

신약 교회는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세계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교회입니다.
지금도 이 영적 교회의 건축 소리가 온 세계 곳곳에서 들려집니다.

 

이 영적 건축, 한 명의 영혼 구원을 통해
벽돌 한 장이 쌓여가는 이 건축은 물질적
예배당 건축보다 수천배 더 큰 의미가 있고 더 중요한 건축입니다.

 

우리 모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이 영적 건축, 곧 전도의 일을 크게 여기고 이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들을 드려야 합니다. 그 신령한
제사란 우리의 의롭고 착하고 거룩한 삶, 헌신과 봉사의 삶입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2 :6-8)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버린 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많은 이들이 그 돌에 부딪혀 넘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열심히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중적입니다.

 

그가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셨으나, 다른 이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정하셨습니다.
죄 가운데서 멸망받을 자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3.  불러내신 뜻.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 :9)

 

그러나 우리에게는
웬 은혜요 웬 사랑인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받은 것은 인생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족속이 되었고. 선택받은 증거는 진실한 믿음과 회개와 순종입니다.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성도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는 높은 특권이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부정과 불법으로 가득한 나라,
속이고 속으며 죽이고 죽는 나라, 음란하고 부도덕한 나라,
슬픔과 탄식과 고통이 가득한 나라, 죽음과 절망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의의 나라,
진리의 나라,사랑의 나라, 평강의 나라, 기쁨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성도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셨던지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귀한 보배들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것은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이 안전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그 기이한 은혜와 사랑과 의와
지혜와 능력을 마땅히 찬송하며 증거하고 선전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전서 2 :10)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했었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얻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전서 2 :11)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판단을 받아 내세에서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고 인간에게는 돌아갈 영원한 처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인생은 내세를 준비할 것이다. 내세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가운데 정신 없이 살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믿는 자답게, 성도답게 사는 것입니다.
 
육신적 욕망들은 바로 죄악된
욕망들입니다. 거기에서 음란과 방탕이 나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짓지 않고 바르게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 :12)

 

성도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선하게 살아 감으로써 그들에게 바른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악한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면 그것이 세상에 빛이
되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날 그들이 깨닫고
성도들에게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 :16).

 


5.  믿는 자들과 세상.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
 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 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베드로전서 2 :13-14)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선한 삶은 여러 면에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우리가 왕과 그의 보낸 방백들
즉 관리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세속 사회의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뜻 때문에 인간의 제도들에 순종해야 합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2 :15)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성도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하지만, 성도가 범사에 선하게 처신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에게 아무런 바난할 말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스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베드로전서 2 :16)

 

성도는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완전한 의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귀한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 일, 즉 악을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일에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합니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베드로전서 2 :17)

 

성도들의 선한 삶은 세상에서의 인간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주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만일 주께서 그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다면, 우리는 그를 얼마나 존중해야 하겠습니까? 

 

또 베드로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라고 교훈했습니다.
왕을 공경하라는 교훈은 사실상 10계명 중 제5계명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 속에는 가정에서 부모님에 대한
공경 뿐 아니라, 교회에서 장로들에 대한 존경,  노인들에
대한 공경,학교에서 선생들에 대한 존경, 직장에서 상사들에
대한 존경,나라에서 대통령이나 관리들에 대한 존경 등을 포함합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베드로전서 2 :18)

 

 베드로는 구원받은 종들에게도 선한 삶을 교훈합니다.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종들은 주인들을 조금 두려워
하지 말고 범사에 두려워하고 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종들은 또한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만
순종할 것이 아니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전서 2 :19-20)

 

베드로는 말하기를, 종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 주인에게 매를 맞으면 칭찬받을 것이 없지만,
그가 선하게 행함에도 불구하고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고난과
슬픔을 잘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라는 말은 '
이렇게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과 슬픔을
다 보고 계시고 다 판단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6.  돌아온 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2 :21)

 

성도들은 이런 고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을 당하는 삶--그것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입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 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 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 :22-24)

 

우리 구주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
하지 않으셨고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습니다.

 

그는 마침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죄의 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전서 2 :25)

 

우리는 과거에 길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황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인도, 그의 간섭, 그의 보호,그의 돌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모두 진리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믿음으로 받아들여 모든 악독과 거짓과 
외식하는 행위와 남을 시기하고 비방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거룩한 신앙 인격이 자라도록
힘쓰는 우리들의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거룩한 제사장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나를 돌아보고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 가를 살피는 우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발 걸 음.

                                   (베드로전서 3 장 )

 

  

 

열 가지, 진리를 듣는 것보다 들은 한 가지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천한 진리가 바로 자신의 삶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  *  --

그리스도의 복음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며 십자가를 향해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늘의 문이 열립니다.

 

주님께서는 보답을 받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주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그 값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소유된 자로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실한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도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이고,
주님을 바라보고 섬기는 종으로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괜히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이나 하게하고
기도하면 병이나 낫게 해주기 위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힘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시려고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루실 것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은혜의 모습이 증거되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의
실천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아내된 자들아-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베드로전서 3 :1)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중요한 한 목적은
복음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불신 남편이라도 아내의 언어가
아니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아내들의 말로
구원하기 힘든 남편들이 그의 행위로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로 안되면 행위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이웃 사람들을 말로 구원하기 어려울 때
우리의 선한 행위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게 힘써야 할 것입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베드로전서 3 :2)

 

남편을 구원시킬
아내의 행위는 무슨 행위를 말하는가?
그것은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남편을 두려워함을 다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을 주인과 같이
생각하여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
모든 도덕 생활에서 순결하고 흠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음란한 세상 속에서 성적으로 순결하고 단정한 것을 가리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배려이자 남편의 역할과 은사에 대한 존중을 뜻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베드로전서 3 :3)

 

여성도들이 외적인 단장에
지나치게 치중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합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천국과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 :4)

 

여성도의 단장은 내면적이어야 합니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사람의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킵니다.
여성도의 내면적 인격은 온유한 심령으로 단장되어야 합니다.

 

몸은 세월이 갈수록 쇠하여지지만,
이러한 고상한 인격성은 그 성질상 썩지 않고
없어지지 않음으로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단장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단장, 곧 고상한 인격성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3 :5-6)

 

베드로의 교훈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여성도의 이러한 덕은 예전부터 경건한 여성도들이 가졌던 덕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변하는
인간 도덕과 풍습에 따라 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성들은 다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고 이러한 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였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그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도 만일 여성도들이
사라처럼 선을 행하고 놀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라의 딸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남편된 자들아-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3 :7)

 

이제 남편들에 대한 교훈입니다.
남편들이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첫째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과 한 인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의 시작이며. 결혼의 목적은
남자가 외롭지 않도록 돕는 아내와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자녀 출산을 위함입니다. 창세기 1:27,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 :27-28참조)

 

셋째는 음행의 방지를 위함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7 :1-2)

 

결혼의 의무는 사랑과 순종입니다.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에베소 5 :25)

 

남편들은 아내들을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알고
사랑해야  하며, 특히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무조건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따뜻한
한 마디의 말과 얼굴 표정과 행위에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낍니다. 

 

아내들은 생명의 은혜, 즉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입니다. 아내들은
세상에서만 아는 관계가 아니고 천국에까지 같이 갈 반려자들입니다.

 

물론 천국에서는
부부로서의 짝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영원한 동료들입니다.

 

남편들이 이렇게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고
그들을 귀히 여길 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3.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베드로전서 3 :8)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는 '다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를 향해 선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은 생각의 일치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같아야
우리의 말도 우리의 행동도
같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분열은 생각의 다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심과 사욕을 버리고 상대방을 바르게 이해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생각을 같이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에 대해
멸시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아니고 가능한 한
그를 이해하려 하고 불쌍히 여기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교훈은 우리 주님 자신의 교훈이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 :44)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베드로전서 3 :10)

 

인간 세상에
죽음은 죄 때문에
왔고 그것은 어둡고 슬픈 사실이며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천국의 복된 날들을 약속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일들을 확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놀라운 약속의 세계를
바랄진대,거기에 합당한 자들답게 이 세상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베드로전서 3 :11)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 즉
마음에 평안과 기쁨, 격려와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또 성도는 서로 간의 화평을 구하며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
즉 성도는 악과 거짓을 버리고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 :14)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3 :12)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그가 연약할 때 격려하시고,
낙심할 때 위로하시고, 위험할 때 지키시고 도우시며,
 범죄할 때 근심하시고 책망하시는 그의 관심과 돌보심이십니다.

 

또 주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십니다. 의인이 감사할 때나 회개할 때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간구를 잘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낯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악한 행위들을 보시고 판단 하시고
기억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이
풍성하지만,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엄위하시고 두려운 분이십니다.

 


4.  고난의 유익.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베드로전서 3 :13)

 

예수 믿는 자들은 선을 본받는 자들,
곧 선하게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양심이 있는 자들은 그런 우리를 잘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베드로전서 3 :14)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도 우리를 핍박하고 해치려 하는 악한 자들이 있습니다. .

 

성도가 의롭고 선하게 살다가
당하는 고난은 화가 아니고 복입니다. 자신이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지만,
의롭고 선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확실한 약속과 보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 :15)

 

하나님을 주님으로 혹은 주님을
하나님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주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혹은 주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으로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셨습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천국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바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라는 것은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연약성과 죄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3 :16)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 :35)

 

우리가 사악과 거짓과 음탕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악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선과 진실과 거룩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선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말과 행위를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마침내 핍박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저들의 악한 비난이 마침내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베드로전서 3 :17)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고난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베드로전서 3 :18)

 

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습니다.

 

'한 번'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그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목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습니다. 

 

의인이신 예수님이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하나님께 인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심이 불의한 자에게는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베드로전서 3 :19)

 

예수님의 몸이 무덤에
있을 때 그 영혼은 지옥에 가서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다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영은,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이 아니라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베드로전서 3 :20)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20년간 심판을 유보하셨습니다.

 

그 동안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그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그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 수에 들어 있기를 원하며 그 수에 든 것을 감사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베드로전서 3 :21)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세례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죄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합니다.
물론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부족하고 연약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세례가'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응답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 하느니라"
                                   (베드로전서 3 :22)

 

고난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십니다.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에게
순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누리시는 우주적 왕권,영계와 물질계에 행사하시는 왕권을 나타냅니다.

 

 

종말을 사는 지혜  

                                                    (베드로전서 4 장)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들 되게 하옵소서.
                    --  *  --

흔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성령을
받았으면 죄를 범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육체의 더러움을 자신에게서
잘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입었고 성령을
입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고 더러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이고, 새롭게 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베드로 사도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으로 말합니다. 선한 양심은 성령이 함께하는 양심을 뜻합니다.

 

나같이 불의한 자를 위해
주님이 죽으셨고, 주님이 다시
사심으로 죽은 내가 다시 살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선한 양심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된 양심입니다.
이 선한 양심은 나를 살리신 은혜만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선한 양심은
사람의 정욕을
좇아 사는 것을 거부합니다. 은혜가 귀하기에 은혜만 좇게 됩니다.

 

이것이 새 생명을 얻은 증거이고
 그 마음이 노아의 물로써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

 

종말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세상 끝날을
의미합니다. 그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천사도 아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 때나 지금이나
요구 되는 것은 종말론적인 긴장을
늦추지 말고 하루 하루를 진실되고 거룩하게 사는 일입니다.

 

이것이 곧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자세요
신랑을 맞이 할 채비를 하는 신부의 준비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1.  육체의 남은 때.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
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베드로전서 4 :1)

 

우리도 선을 위해 고난받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미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죄와 상관 없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를 버리고 오직 의와 선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받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죄를 만드는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사람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 4 :22-24)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베드로번서 4 :3)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이방인의
뜻을 좇아 죄악된 생활을 한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의 삶에 이끌리고 거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지난 날의
죄악된 삶으로 족합니다. 그 죄악된 삶도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의 낙을 누리며
살지 말아야 하며 더 이상 죄악된 삶에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베드로전서 4 :4)

 

성도가 세상 친구들과 같이 극한 방탕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를 이상히 여기며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친구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베드로전서 4 :5)

 

예수님은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심판주이십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 :1-2)

 

의인과 악인은 마지막 날 다 부활하여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심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들의 죄들을 다 직접적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전서 4 :6)

 

사람은 육신의 죽음으로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죽은 자들에게도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죽었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 영이 영생의 생명이므로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로는 사람들이
받는 것처럼 심판을 받아 죽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즉 구원받게 하려 함입니다.

 


2.  마지막 때가 가까운 때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전서 4 :7)

 

이 세상의 만물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
하신 때가 시작이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심판하시는 때가 끝입니다.

 

예수께서는 '추수 때'
곧 세상 끝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날입니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신지 4천년이 지난
신약시대의 초에 사도들은 그 때 벌써 세상 종말이 왔다고 말했습니다.

 

신약시대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시대입니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올바른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근신하지 못하는 삶이란 세상의 일과 쾌락에 빠져 있는 삶입니다.

 

만일 직장이나 사업의 일 때문에
육신적 취미와 쾌락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근신하지 못하는 삶이 됩니다.

우리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에베소 5 :16-17) 

 

"무엇보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전서 4 :8)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의 종말이 가까움을
생각하면서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바울 사도도 참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 :13)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베드로전서 4 :9)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우리는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해야 합니다.

 

대접한다는 말은 서로를 향해 마음으로나
말로 너그럽게 대하는 것을 말하며 상대방이 아프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시간으로나 물질로 돕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대접하는 것은
받을 것을 예상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고 그냥 베푸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접하는 자는
계산적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을 위하지
않을 때라도 속상해 하지 않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베드로전서 4 :10)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재능과 건강과 재물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처한 가정 환경이나 사회 환경도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것인양 우리 마음대로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들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서로의 유익, 곧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것들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드리는 심정으로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베드로전서 4 :11)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하고 봉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것같이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범사에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3.  고난 받는 자의 복.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베드로전서 4 :12)

 

성도들에게는 시련하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금광석을 제련하는 용광로의 불과 같은 고통스런 시련들입니다.

 

용광로에 넣어진 금광석에서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마침내
순금이 나오듯이, 성도들이 당하는 불시험들은 성도들의 죄악성과
죄악된 습관들, 그리고 불성실하고 게으른 연약성을 다 제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인격,
즉 경건하고 거룩하며 충성되고
의롭고 선하고 온유 겸손하고 진실한 인격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 :13)

 

성도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은 2천년 전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들은
성도들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고 의로우셨으나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의의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 줄 알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즉 그가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기쁨도
슬픔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슬픔이 나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이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베드로전서 4 :14)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우리는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그 이유로 '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들 위에 계심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임이 확인된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욕할 때 그들 위에 계신 성령에 대해서도 비난하고 욕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과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므로 성도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베드로전서 4 :15-16)

 

성도들은 살인하거나
도적질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남의 일의 참견자가 되어서 고난을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당할 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베드로전서 4 :17-18)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
곧 교회 안에서 심판이 시작될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고난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도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나 정죄의 심판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의 심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5 :24)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베드로전서 4 :19)

 

성도의 고난은 아무리 불 같은 시험일지라도
성도를 단련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고난 중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또 하나의 태도는, 끝까지 선을 행하는 자로서
처신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므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큰 소리로 말씀하시기를,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베드로전서 5 장)

 

  지팡이가 무겁다고
시각 장애인이 지팡이를 버리고 가겠습니까?
좀 힘들어도 믿음을 버리고 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맙시다.
                                   --  *  --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누구든 상관없이 모든 신자는 교회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한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
신자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를 하나님의
양무리라고 말하는 것은 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권력을 휘드르던 사람들이
그 권력에 의해 쫒겨 나는가 하면
돈의 힘을 과시 하던 사람들이 돈 때문에 무너지고 있습니다.

 

권력도,돈도,과학도,학문도 인간의 삶을
보다 더 편리하게 만드는 수단은 될 수 있으나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하거나 온전케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워 온전케 되셨습니다.
불완전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력 없는
교수가 훌륭하고 실력 있는 제자를 키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온전케 만드실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모시면 개인이 온전한 새 사람이 됩니다.

 

부부도
온전한 부부가 되고
가정이 온전해지고 교회가 온전해지고 세상이 온전하게 됩니다.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말씀을 지키며 살려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1.  고난의 증인.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베드로전서 5 :1)

 

'너희'와 '장로들'은 구별됩니다.
'너희'는 일반 성도들을 가리키고,
'장로들'은 그들 가운데서 감독자로 세움받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영광에 참예할 자라고 증거합니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또 사도들은 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기도 하였고
또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영광의 부활에 참예할 자들이었습니다.

이 땅의 진실한 모든 성도들이 다 그 영광에 참예할 자들입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 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베드로전서 5 :2)

 

양 무리를 치는 목양(牧羊)의 일은 교회의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목양 혹은 목회는
담임목사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고 장로들에게도 맡겨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감독 혹은 장로라고 부르는 직분에는 교회
헌법이 표현한 대로 두 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설교와 치리의 일을
겸하여 가진 목사요 다른 하나는 치리의 일만을 행하는 장로입니다.

 

장로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때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무슨 선한 일이라도
억지로,마지못해서,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한 일들 중에 가장 귀한
일인 이 목양의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장로들은 이 직무를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봉사는 항상 순수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은 가능하면 교회 재정에 직접 관계하지 말고 또 만일
재정에 관계할 때는 돈 계산에 있어서 정확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장로의 직분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동기와 준비된 마음이 필요합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전서 5 :3)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사람이 교인들의 대표자가 되고 인도하는 직분을 가질 때
다른 이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가지고 권위 의식을 가지고 대하기
쉬우나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악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점에 대해 벌써 교훈하여두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0 :26-27)

 

장로들은
일반 교인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가지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베드로전서 5 :4)

 

목자장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재림의 날에 그는 충성된 종들에게 영광의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2.  겸손하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전서 5 :5)

 

베드로는 장로들에 대한 권면과
더불어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을 하였습니다.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은 일반 교인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입니다.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세 가지의 권면을 했습니다.첫째는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둘째는 서로에게 순복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복종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며
그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일치단합된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다.

 

셋째는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잠언의 말씀대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 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인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는 자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장로들에게 순복할 수 있고 또 서로에게 순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베드로전서 5 :6)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이십니다.
그가 세우면 세워질 것이고 그가 파하면 파해질 것입니다.
그가 높이면 높아질 것이고 그가 낮추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그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높이 들어 쓰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들을 결코 쓰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5 :7)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염려거리가 아주 없을 수는 없습니다. .
인생에게는 심리적,정신적,육체적,물질적 염려거리가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며
친히 우리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십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날마다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모든 염려를 다 그에게 맡겨버려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베드로전서 5 :8-9)

 

마귀는 실제로 존재하는 영입니다.
마귀의 성격은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대적합니다.

 

그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적합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에
떨어지고 낙심하고 좌절하며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마귀는 악합니다. 그는 우는 사자같이
성도들을 삼키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줌으로써 그들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질병으로, 또 어떤 때는 가난으로,
또 다른 때는 가정적, 사회적 환난으로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마귀는  활동적이고.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공격할 대상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은
우리가 게으르거나 욕심을 품거나 세상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 하고 도리어 마귀를 대적해야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려면, 성경 읽기와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 :10-11)

 

성도들은 세상에서 마귀의 시험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은혜가 풍성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한 천국에 비교해 볼 때, 성도들이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간 고난'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길어도 100년을 넘지 못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를 남김 없이,
다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것입니다.

 


3.  은혜에 굳게 서라.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베드로전서 5 :12)

 

실루아노는 바울의 협력전도자이던 실라를 가리킵니다.

 

실루아노는 베드로전서가 보내졌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의 성도들에게
신실한 형제로 인정받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는 지금 베드로를 위해 이 서신을
대필(代筆)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루아노는
바울의 협력자이었던 동시에 또한 베드로의 협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인물이 된 셈입니다. 

 

베드로는
또한 자신이
증거하고 권면한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성도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확신 가운데서도 그는 또 그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고 격려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는 하나님의 말씀들도 또 듣고 또 음미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베드로전서 5 :13-14)

 

바벨론에 있는 교회(신약 성경에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 아니면 바벨론에 교회-복음이 널리
퍼져 바벨론에까지 교회가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가는 바울에게도 협력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베드로에게도 그러하였고 베드로에게 '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일치된 진리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와 이 신앙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이 진리와 신앙 안에서 일치된 기독교를 확증하고 혹은 회복
시키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고 후대에 전수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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