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나그네들에게(베드로전서 )
[ 성경묵상 ]
1장 요약 ; 베드로는 소아시아 여러 지역 교회들에게 종말에 얻게 될 영화로운 유업을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1:1-2 ; 저자 베드로의 인사말이다. 당시에 소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때문에 베드로는 먼저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삼위 일체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은 자들'임을 밝히고 있다. - 출처 ; 아가페 큰글성경
사도 베드로는 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교회와 성도에게 그들이 얼마나 귀하고 존귀한 존재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그들을 구원하고 택하신 분이 다름 아닌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 질문 1 ] 베드로는 편지를 받는 성도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가?(1절)
베드로는 지금의 터키 지역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로마가 통치하고 헬라 문화가 지배하던 지역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 땅의 나그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다보면 갈등도 생기고 어려움도 당할 것이다. 세상의 문화가 낯설고 불편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우리가 속한 문화가 더 편하고 좋아 보인다. 이 곳에서 안주하고 싶은 우리들이다. 나그네임을 한 시라도 잊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가 되도록 하자.
[ 질문 2 ] 성도의 구원을 위해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인가?(2절)
성도의 구원은 삼위 하나님께서 총동원되어 이루신 일이다. 인간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그에게 맞게 성령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고, 마지막으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를 뿌려 주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성도로 부름을 받은 것은 보통 일이 아닌 특별한 일이다.
전 우주의 주인이시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삼위 하나님이 함께 동역하셔서 부족한 나를 불러 주시어 자녀로 삼아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비록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평안한 마음을 갖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 속에서
[ 성경대조 및 주해 ]
1. [개역개정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 표준새번역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 공동번역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가빠도기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 KJV 흠정역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두루 흩어진 나그네
[ NIV ] Peter, an apostle of Jesus Christ, To Gods elect, strangers in the world, scattered throughout Pontus, Galatia, Cappadocia, Asia and Bithynia,
[ KJV ] Peter, an apostle of Jesus Christ, to the strangers scattered throughout Pontus, Galatia, Cappadocia, Asia, and Bithynia,
아시아는 에베소를 중심으로 버가모, 사데 등 일곱 교회가 있던 에게 해 연안 지방 일부를 가리킨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즉 ‘마데테스’라는 표현 대신에 ‘사도’ 즉 ‘아포스톨로스’라고 밝힌 이유는 베드로가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기록한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을 따라 그리스도의 대행자로서 기록한 것이란 사실을 밝히고자 공적 성격을 지닌 용어를 사용하였다.
수신자는 현재의 터키 타우루스 산맥의 북쪽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과거에 극한 방탕에 빠져 생활하던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변화 받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다.
본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고향이며(행 18:2), 북편은 흑해, 동편은 클키스, 남편은 아르메니아, 서편은 할리스 강으로 되어 있다. 바울이 이 곳에 전도할려고 했으나 성령이 길을 막아 발길을 돌렸던 지역으로(행 16:7), 다른 복음 전도자를 통해 전도를 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A.D. 111년 중 그곳에 휼륭하게 확립된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가 지역적인 반대를 뛰어나게 잘 처리하여 주변의 농촌 지역들까지 그리스도교를 확장하였다고 한다(Pliny, Ep. 10. 96). 본 서신이 교회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라디아’는 본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 주의 중간에 위치한 주로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보낸 곳이다.
‘아시아’는 무시아, 리디아, 카리아, 브루기아 등으로 구성된 지역으로 초대 교회 당시 왕성한 성장을 보였던 곳으로 에베소가 그 중심지이다.
‘비두니아’는 본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과거 바울이 전도하고자 하였으나 성령께서 그 길을 막았던 곳이기도 하다(행 16:7).
베드로는 수신자를 '흩어진 나그네'라고 칭하였다.
'흩어진'이란 용어는 구약적 의미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아니라 / 어느 한 곳에 모여 있지 못하고 여러 지역에 각각 거주하고 있는 유대 출신 및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 즉 본래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각각 거주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흩어진 자’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들은 나아가 ‘나그네들’이었다. ‘나그네’를 NIV는 ‘세상에서 낯선 자들(strangers in the world)’로, NASB는 ‘외인으로 거주하고 있는 자들(those who reside as aliens)’로 번역하였다. 즉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에서 낯선 자들, 이 세상에서 잠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로 규정한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그리스도인들을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올 것을 찾는 자들’로 묘사하였고(히 13: 14), 사도 바울 역시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들’로 지칭하였다(빌 3:20).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닌 장차 나타날 영원한 도성을 인생의 궁극적 정착지로 삼아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과 같지 않은 낯설고 이상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다.
베드로는 본서 4:4에서 “너희가 저회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라고 말함으로써 본서의 독자들이 이 세상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철저한 천국의 순례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본서의 독자들은 이름만 나그네가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가 나그네 삶인 것을 주변 불신자들에게 증거하며 살았던 것이다.
2. [개역개정 ]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표준새번역 ]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미리 아심을 따라 여러분을 택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의 피로 정결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 공동번역 ] 여러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미리 세우신 계획에 따라 뽑혀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분의 피로 죄가 씻겨진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빕니다.
[ KJV 흠정역 ]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을 통해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에 이르도록 선택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을지어다.
[ NIV ] who have been chosen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through the sanctifying work of the Spirit, for obedience to Jesus Christ and sprinkling by his blood: Grace and peace be yours in abundance.
[ KJV ] Elect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through sanctification of the Spirit, unto obedience and sprinkling of the blood of Jesus Christ: Grace unto you, and peace, be multiplied.
2절에서 베드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협력 사역을 수행하신 사실을 간략하게 진술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 미리 아신 예정에 따라 선택하신 자들을 / 성령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을 통하여 / 성자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깨끗하게 씻기시고 그에게 복종케 하심으로써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미리 아심'이란 하나님의 豫知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계획, 결정, 의지를 포함하는 豫定까지도 포함하는 단어이다. 성도의 택함 받음과 구원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결과임을 나타낸다.
성부 하나님의 예정으로 인한 선택이 성령의 사역을 통해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심'은 이미 구원받은 자가 그의 삶에 있어서 거룩하게 되어가는 성화적 측면이 아닌 / 죄와 사망으로부터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분리의 측면을 나타낸다. 성령은 사람들을 구분하여 천국의 부르심에 맞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A. M. Stibbs).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 순종을 가능케 하며 그의 피로 뿌립을 얻도록 효과적으로 역사하신다.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를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함과 피뿌림을 위하여’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의 피로 뿌림을 받도록 하기 위해 NASB, that you may obey Jesus Christ and be sprinkled with His blood)'라는 의미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 중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말한다.
‘순종함’은 ‘아래에서 들음’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이는 겸허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삶 가운데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피뿌림’이란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뿌림으로써 속죄의 의식을 행했던 것(레 16:12-16)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은 자라야만 하나님과의 새 언약에 참예하여 그 언약의 혜택을 누렬 수 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목적은 /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과 그의 피로 속죄함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베드로가 당시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본 서신을 보내는 목적은 / 당시 불 같은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또 그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승화시켜야 할 것인지를 깨 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신앙의 모텔이자 고난 극복의 이상적 모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지표를 제시하였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는 베드로가 독자들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축복 기도이다. 여기에서 ‘더욱 많을지어다’는 ‘늘리다’, ‘증가시키다’라는 의미의 부정 과거 수동태 희구법이다.
희구법은 현재에는 결여되어 있는 것들이 장차는 이루어지도록 희망을 표시할 때 쓰인다. 이러한 회구법의 의미를 감안해 본다면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박해에 직면해 있는 성도들에게 더욱 증가되어서 그들이 지금은 비록 그 박해의 두려움과 근심 상황 속에 있지만 장차는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표현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적 수동태로서, 은혜와 평강을 가득 차게하고 증가시킬 수 있는 주체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마 24:12 ; 행 6:7 ; 7:17 ; 9:31 ; 12:24 ; 벧후 1:2 ; 유 1:2). 그렇기에 신적 수동태가 사용된 이 희구법은 실현 가능성의 면에서 보통의 희구법의 결과와는 다르게 마치 하나의 확실한 약속과 같은 분명한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표현 속에 ‘평강’을 비는 유대인의 전통적 문안 인사의 요소나 ‘은혜’를 비는 헬라인의 문안 인사가 담겨져 있지만 본문의 상황에서는 단순한 문안 인사의 차원을 넘어선다.
바울 서신에서의 바울의 인사법과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문법상 바울의 인사는 ‘간구’ 형식으로 표현(롬 1:7 ; 고전 1:3 ; 고후 1:2)된 반면에 베드로의 인사는 ‘수동태 희구’ 형식으로 표현되어 그 강도가 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전체에 대해 목자적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간구하나 /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하도록 간구하고 있다(Michaels).
[ 복있는사람, 2018년 9,10월호 ]
Ⅰ. 수신자들에 대한 언급과 인사말 1:1,2
1. 본 서신의 저자(1)
〔1〕 이름으로서의 베드로라고 언급되어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그의 믿음에 대한 칭찬으로서 반석을 의미하는 베드로라는 별칭을 주셨다.
〔2〕 직책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언급되어 있다. 사도란 기독교 안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1) 베드로는 그 자신이 사도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가진 체 하는 것은 위선이다. 아울러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은혜를 잊는 태도이다.
(2) 그는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그의 정당한 이유와 의무로서 그의 사도적 기능을 언급하고 있다.
2. 수신자들에 대한 언급(1,2)
〔1〕 그들의 외적 상태로 언급함: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1절).
현재 그들의 형편은 가난했으며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의 선한 종들을 고초를 겪었던 동안에 자기들의 본토를 떠나 사방에 흩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선한 사람들의 가치는 결코 그들의 현재의 외적 상태에 의해서 평가 되어져서는 안된다.
〔2〕 그들의 영적 상태로 언급함.
1) 여기서 베드로는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 이라고 부른다.
선택함은 직무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특별한 특권들을 누리는 것이나 영원한 구원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선택에 대하여 살펴 보자. ① 이 선택은 ' 하나님의 미리아심을 따라' 되어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리 아심'은 다음 두 가지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첫째, 단순한 예지, 통찰, 혹은 이해로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식별력을 뜻한다. 이는 마치 수학자가 일월식이있게 될 때를 확실히 아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러한 예지가 결코 어떤 일을 일어나게 한 동기가 되지는 못한다. 둘째, '미리 아심'은 때때로 계획, 정하심, 승낙 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예견되었을 뿐 아니라 20절에 나타나는데로 미리 정하여졌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본문에 적용시켜보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획, 정하심, 그리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②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는 말에 아버지라는 말이 덧붙혀져 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이에 있어서 선택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며, 화목케 하심은 아들이, 그리고, 거룩하게 하심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2) 그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모든 선택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하심을 받아야 하며 예수의 피에 의해서 의롭게 되어져야 한다. 여기서 성화는 순종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되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의무를 하나님 앞에서 수행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곧 성령이시다. 순종함과. 이 낱말은 패역한 죄인들을 다시 순종 가운데로 가져 다 주기 위한 성화의 목적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22절의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가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3)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여기에 율법 아래에서의 전형적인 피 뿌림에 대한 명확한 암시가 나타나 있다. 숭고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충족케 한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피는 흘려졌을 뿐 아니라 택하심을 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또한 뿌려져야만 하며 전달되어져야만 한다. 영생의 목적으로 택하심을 입은 모든 자들은 또한 순종이라는 방법으로 택하심을 받았다. 만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피 뿌림을 엊지 못 한다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참된 순종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3. 인사말(2)
베드로가 그들에게 바란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었다. 은혜란 곧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으로서 그것의 모든 특유한 효력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평강이란 온갖 종류의 평강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함께한 평강, 즉 우리 자신의 양심으로 느끼는 평강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 축복들과 관련한 베드로의 기도 혹은 간구는 그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란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것들이 그들에게 계속되고 증가되고 온전케 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은 곧 은혜와 평강이며 그것들의 증가이다. 참된 은혜가 없는 것에는 결코 평강이 있을 수 없다. 먼저는 은혜이고 그 다음이 평강이다. 은혜 없는 평강은 단지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잠시 동안 실제적인 평강이 없는 곳일지라도 은혜는 진실로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때 고뇌 가운데 계셨었다. 은혜와 평강이 처음 주어질 때 뿐 아니라 그것들이 증가되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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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4, 성도가 얻는 시련 중의 산 소망(베드로전서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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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중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권면(베드로전서 1:1-12)
[출처] 시련 중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권면(베드로전서 1:1-12)|작성자 청지기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는 1장 1-12절은 도입부로서 격려의 내용을 담고 있다.
1,2절에는 본서의 송 · 수신자 표기 및 흩어진 성도들에 대한 문안 인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 3-12절에는 구원받은 성도의 산 소망으로 인한 저자의 찬송 및 시련 중의 성도의 기쁨과 신약 성도의 구원의 신비에 대해 진술되고 있다.
본서는 네로의 대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인 A.D.64년경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기록된 서신이다. 베드로는 한때 바울의 선교 동역자였던 실루아노의 대필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핍박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옥 같은 메시지를 써 보냈던 것이다.
본서의 수신자들은 당시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그들은 1세기 초대 교회 당시 어디에서나 겪어야 했던 박해 아래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었다. 시간적으로도 폭군 네로 황제(A.D. 54-68)가 로마에서 대화재를 일으켜 그 죄목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으로서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갖은 비방과 인격 모독과 일터에서의 해고와 폭행, 심지어는 죽임까지도 당하는 온갖 박해 가운데 있었다.
베드로는 이러한 성도들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서 곳곳에서 그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강한 소망에의 권면을 주고 있다. 즉 1:6,7을 비롯해서 3:13-17 ; 4: 2,19 ; 5:9 등 대략 네 번에 걸쳐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고 있던 박해를 언급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죽음으로써 고난의 본을 보이시고 영광스럽게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기뻐하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셨다면, 그를 믿는 성도들 역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리스도께서 고난 뒤에 얻은 동일한 영광을 성도들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소망이 고난을 이기게 하는 비결이 될 것이란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결국(벧전 1:1~12절)
1. 베드로전서는
우리는 오늘부터 베드로전서를 묵상하게 됩니다. 야고보서를 다시 정리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 전후서도 공동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공동서신의 특징은 세상 속의 교회입니다. 특히 로마라고 하는 당대의 괴물과 같은 세상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가가 공동서신의 관심입니다.
즉 베드로전서를 포함한 공동서신의 주제가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공통된 주제가 고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A. D 64년 7월 19일 네로가 자신의 시흥을 돋우기 위해서 로마에 불을 놓고는 그 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씌웠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네로의 박해를 시작으로 70년에는 로마의 팔레스틴 점령과 함께 성전이 파괴됩니다. 그 이후로 도미티안(81~96년)은 국내에 따로 국가를 세운다는 이유로 박해했습니다. 트라얀(97~117)은 사회생활에 부조화된다고 박해를 했습니다. 하드리안은(117~138년)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해서 박해를 가했습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161~180)는 질병과 흉년을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셉티머스 세베루스(205~211)는 자신의 포악무도한 성품을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막시너미스(235~238)는 지진 사고를 이유로 박했습니다. 데시우스(240~251)는 기독교 때문에 나라가 가난해진다고 박해했습니다. 바렐리안(253~260)은 질병과 흉년을 이유로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데오클레시안의 박해까지 온갖 이유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했습니다. 이런 박해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은 고난은 오히려 더욱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고난은 오히려 교회를 더욱 교회 되게 만들었습니다. 고난은 많은 믿음의 영웅들을 낳았으며 그 고난 가운데 교회는 더욱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의 가장 어두운 터널은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중세 기독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난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자양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베드로전서가 쓰인 시점은 네로가 미쳐가기 시작하고 박해의 조짐이 무르익어 가던 6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63년에서 68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분위기를 보면 지금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66년에 네로는 그 광기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68년에 폐위됩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계속되는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 교회는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긴 고난의 터널 앞에 서 있는 성도들에게 어떻게 고난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기록한 이 서신은 얼마나 중요한 서신입니까?
마침 우리는 코로나 19라고 하는 유례없는 바이러스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초대교회의 고난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초대교회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본문을 읽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어 감에 있어서 고난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우리가 받은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아버지의 미리 아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주목하고 3절과 4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과 유업을 잇게 하심에 주목합니다.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과 유업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베드로 사도는 구원과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을 얻음이라고 강조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난의 시대를 견디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며 그 믿음이 하늘에 간직한 유업을 상속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고난의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살펴서 전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적어도 세 편의 설교로 했던 부분입니다. 다소 길더라도 차분히 읽어가시면 도움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인사말과 맺음말을 빼면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1:2~2:10 절로 택하신 교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즉 성도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 가운데서 성도가 어떤 신분,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즉 택함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2:11~3:22 절까지로 여행자로서의 교회입니다. 이 땅에서 순례자와 나그네로 존재해야 하는 교회의 숙명을 이야기합니다. 세 번째 부분은 4:1절에서 5:11 절까지로 흩어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1절과 2절은 이런 내용을 모두 담고 있는 핵심입니다.
우리는 2:11 절을 살피는 것으로 베드로전서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그럽니다. 여기서 핵심은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표현했던 내용을 다시 확대한 것입니다.
흩어진 나그네(1~2절)
우선 1:1~12절까지의 구조를 간단히 정리해 봅니다. 1~2절은 인사입니다. 인사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성령이 거룩하게 하셔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순종함과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5절까지는 산 소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산 소망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거듭나게 하신 성도의 신분으로 시작합니다. 이 신분은 산 소망과 유업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미 얻은 구원과 하늘에 간직한 소망으로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너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6~7절은 ?그러므로?로 연결되면서 시련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련은 3~5절에서 설명한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고난이라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시련의 때를 믿음으로 잘 견디는 믿음이 금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8~12절까지는 믿음과 구원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믿음의 결국이 영혼 구원을 얻음이라고 선포함으로 고난의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구원, 즉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 시간을 믿음으로 견디고 이긴 구원에 관하여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 전해주었는데 이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13절에 ?그러므로?가 등장하고 있는 것에서 13절 이하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13절 이하가 적용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앞부분, 즉 12절까지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소망과 기업 그리고 믿음에 관한 교리적 설명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논리적 전개를 하고 있기에 무식한 베드로가 이렇게 논리적인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가 베드로의 저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정신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외적인 조건과 그 사람의 내적 성숙을 같이 취급하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어도 많은 책을 읽고 글쓰기 연습을 많이 하면 얼마든지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학력이라는 틀에 가두어 놓고 초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곧 당신은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것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만연되어있는 좋지 않은 풍조입니다.
어쨌든 베드로전서가 베드로의 저작이라는 것에는 별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체가 대단히 논리적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받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공동서신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이미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살피고 지나왔습니다만 주님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열심히 모이고 가르치는 일에 힘쓰기는 했지만 흩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박해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이들을 뿔뿔이 흩어 놓습니다. 특히 스데반의 일로 교회에 큰 박해가 나서 사도 외에는 전부 흩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 집사의 전도 이야기, 안디옥교회 개척 이야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그렇게 흩어진 소아시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베드로는 아시아 지역에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서 볼 단어가 있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비관적인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은 2:11 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그럽니다. 여기서 나그네와 행인은 물론 지금 이들의 상황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핍박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삶의 근거지를 잃고 흩어져 있는 이들은 영락없는 나그네와 행인이었습니다. 갑자기 삶의 근거지를 개척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좀 더 이차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나그네요,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망각함으로 자꾸만 욕심을 내게 되고 땅의 창고에 쌓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의 창고에 쌓고 싶어 하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길어야 100년을 살다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이 땅이 영원할 것처럼 부지런히 땅의 창고에 쌓고 세습에 열을 올리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은 나그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많은 짐을 가지면 곤란합니다. 나그네는 이 땅에서 영원히 머물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뜻하는 말 파레피데모스(parepivdhmo")는 외국인을 말합니다. 여기가, 이 세상이 우리가 머물 영원한 나라가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 하나님 나라가 성도가 머물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입니다.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비록 이 땅,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천국의 언얼ㄹ 사용하고, 천국 법의 지배를 받으며, 천국의 문화와 천국 백성다운 말과 행동,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신분에 관한 말씀이 바로 2절입니다. 따라서 1절과 2절은 베드로전서 전체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신분(2절)
그런데요? 베드로 사도는 1절에서 세상에서 초라한 나그네이지만 2절에서는 전혀 다른 신분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2절에는 성도의 신분을 설명하기 위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다 등장합니다. 따라서 비록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 불법 체류자와 같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런 신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2절은 그런 세상에서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첫 번째 단추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 땅의 성도, 즉 교회를 미리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고, 그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며 예수 믿는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존재라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라고 할 때 프로그노시스(provgnwsi")라는 말은 여기와 사도행전 2:23 절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행 2:23 절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심을 따라 내어준 바 되었거늘” 그럽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부르시고 중생케 하신다고 구원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고 설명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절대로 우연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이신 일도 절대로 우연이나 마귀의 뜻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미리 아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입니다.
두 번째 주목할 것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고 할 때는 전치사 카타(kata;)가 사용되었지만,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고 할 때 ‘성령의’에는 “ejn aJgiasmw pneuvmato"”라고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 안에서’, 또는 ‘성령으로써’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즉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미리 아신 뜻을 이루시는 방법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성령의 인치심, 혹은 성령을 보증금으로 주셨다는 표현들을 배운 바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살도록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존재할 때 교회의 정체성은 거룩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교회 되도록 부르시고 중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로 부르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병도 낫고 방언도 할 수 있지만, 죄에서 돌이키는 참된 회개와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성령의 온전한 역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 됨은 진정한 표지는 거룩함입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은 총괄적인 표현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셨고 지금도 성결하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 1:2절에서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는 성령께서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1:12 절에서는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2:5절에서는 살아 있는 성전으로 지어 가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4:14 절에서는 영광의 영으로 장차 성도들을 영광스럽게 만드실 ‘영광의 영’으로 존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세상에서 존재하는 교회의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존재해야 하는 교회의 숙명이 있습니다. 거룩은 이 세상에 사는 흩어져 있는 교회의 사명이자, 숙명입니다. 거룩함을 잃은 교회는 세상에 밟히는 소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신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은 다른 번역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성령의 부르시고 중생케 하시는 은혜가 어떻게 순종과 연결되는 것입니까? 새 번역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미리 아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 주셔서, 여러분은 순종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는 것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쉬운 성경도 읽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전에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통해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분께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럽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의 은혜가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 즉 십자가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미리 아신 대로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하여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분의 피로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구원의 첫 번째 측면은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측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즉 고난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구원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 그분의 고난과 승리의 길, 죽으심과 부활의 길,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순례의 길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피 흘림이라고 하지 않고 피 뿌림이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그래도 피 흘리심으로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분명하게 구약 제사에서 피 뿌리는 그림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피 뿌림이라는 표현에 가장 가까운 말씀은 출 24:7~8절입니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도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는 것과 피 뿌림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광야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 사도가 그냥 피 흘림이라고 하지 않고 피 뿌림이라는 구약적 언어를 사용한 것은 지금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 즉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하는 교회가 근본적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교회와 같다는 것입니다. 피 뿌림과 함께 1:13 절의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표현도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의 그림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은 사도 바울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여정을 표현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고난 당하는 교회가 걸어가야 하는 광야 교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이지만 2절에 그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이방인, 나그네일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마리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그 성령의 역사로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세상 가운데서
그래서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선명하게 제시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신분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라는 사실입니다. 외국인이요 이방인입니다. 시민권이 없습니다. 둘째,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는 나그네요 외국인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천국 시민권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부르시고 중생케 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셨습니다. 훈련의 광야에서는 순종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이 세상은 늘 훈련의 광야입니다. 우리는 그 세상에서 나그네와 순례자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이 유한하다는 신앙고백이며, 그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현실적인 자각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 때문에 나그네와 순례자로 살아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심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고 거룩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 광야교회에서 우리 삶은 순종과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로마의 박해에 신음하며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마리아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왕 같은 제사장이며 성도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2. 믿음의 결국(3~9절)
우리는 앞서 교회가 이 땅에서 나그네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국적이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하나님의 마리아심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 그리고 순종함과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특히 피 뿌림이라는 구약적 용어는 나그네로서의 교회가 근본적으로 광야 교회와 같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광야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순종입니다. 사실 이 본문은 세 번의 설교를 했던 본문입니다. 따라서 설명이 다소 자세하고 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잘 잃어두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3~9절에서 베드로 사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7 절에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여정을 담았던 것처럼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을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산 소망과 믿음의 결국이라는 표현입니다. 특히 5절에서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불에 녹아 없어질 금보다 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미와 아직의 기간을 믿음으로 견뎌낸다는 개념이 3~9절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받을 구원을 산 소망이라고 표현하고 지금 이루어지는 현재 적인 구원을 보호와 연단이라는 개념 속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미와 아직, 즉 믿음의 결국에 영생을 얻는 신앙을 위해 몇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이후에 바로 영원한 천국으로 이주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런 우리의 삶을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는 탁월한 개념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바로 그런 세상에서의 삶에 주목합니다.
산 소망과 기업(3, 4절)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갈 때 그 삶을 지탱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결국이라고 할 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한 마디로 부활의 산 소망과 영원한 기업에 대한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음의 결국은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는 최종적인 구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성도는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
3절은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나그네로서의 교회가 이미 시작된 구원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의 미리 아심,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시작되었습니다. 즉 교회의 시작은 철저하게 삼위 하나님의 역사로부터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고난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교회를 향해 찬송하라고 초청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찬송하라는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나그네로서 교회가 찬송해야 하는 이유는 성도가 가진 소망 때문입니다. 어떤 소망입니까? 부활의 산 소망입니다. 3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럽니다.
먼저 주목할 단어는 긍휼입니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을 괄호로 묶으면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중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우리를 성령이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이라는 특별한 단어를 통해 속량하시는 은혜가 구약의 광야 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피 뿌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지불되셔서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 마치 구약의 어린 양이 대신 피를 흘려 그 피를 뿌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광야 교회에서 지속적인 여행을 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 다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부활의 산 소망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거듭난 우리가 어떤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까? 우리도 그 예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그 소망의 이름은 산 소망입니다.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지금 믿음의 결국에 이르는 여정에서 살아서 꿈틀거려 삶을 찬송으로 인도하는 소망입니다.
지금 교회는 나그네로서 세상 가운데 고난과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믿음의 결국에 이르도록 우리를 붙잡아주는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산 소망과 함께 또 하나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이 기업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다는 표현들은 모두가 세상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들입니다. 썩는다는 것은 그것이 죽음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더럽다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거룩과 의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쇠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기업으로 받을 나라, 우리가 가진 산 소망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 믿으면 복받고 범사에 잘되고 성공합니다.”라는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간직해 두고 계신 기업입니다. 그런데 여기 간직해 두고 계신다는 말은 완료 형입니다. 교회가 받을 유산은 이미 준비되어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살아 있는 소망이라는 것은 이미 예비 되어 있는 것을 상속받을 계약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요? 기업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본래 약속의 땅이 가나안과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은 하나님과 동일시되거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시 16:5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그럽니다. 또 단 12:13 절에서는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그럽니다. 여기서 네 몫은 기업을 의미합니다.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 상속받을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기업이 “영생”(막 10:17; 딛 3:7절),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롬 8:17 절),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엡 5:5절), 구원(히 1:14절)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믿음의 결국에 상속받게 될 기업은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하는 지상의 땅이 아닌 ‘하늘의 기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결국에 이르도록 우리를 붙잡아주는 두 가지 믿음의 원천이 부활의 산 소망과 영원한 기업을 상속받게 될 것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정리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이 땅에서 견디고 이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보호와 연단(5~9절)
그렇다면 그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있는 교회가 현재를 살아갈 때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까? 5절은 무엇입니까?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성도들이 장차 받을 기업을 하늘에 간직하시고 이제는 그 기업을 상속받을 성도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원인 방법, 결과가 모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택하셔서 영원한 기업의 상속자로 삼은 사람들은 이 험한 세상에서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여기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할 때 헬라어는 프루루메누스(frouroumevnou")로 군사용어입니다.이 말은 본래 적의 공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 안에 만든 요새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도의 기업을 빼앗으려고 하는 원수들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실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호하심의 목적은 성도들의 완전한 구원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 어떤 구원입니까?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지만 그 최종 완성이 말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즉 우리의 현재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바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여정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그 여정을 우리는 나그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향해 여행하는 순례자요 나그네입니다.
그런데요? 이 여정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도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절대적인 통로는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국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이라는 말은 텔로스(tevlo")입니다. 이 말은 끝, 마지막, 목표, 혹은 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믿음의 끝이며 목적입니다. 그 끝에 부활이 산 소망이 있고 기업을 상속받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현재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가지 시험으로(6~7절)
자 여기까지 하고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산 소망, 기업을 잇게 되는 것, 보호해 주시는 것, 다 누가 하시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6절에는 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 어떻다는 것입니까? 지금 나그네들의 현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지만 크게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생이 내가 계획하고 설계한 대로 잘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성도들은 너무 자주 이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에 순종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정작 계획하고 방향을 정하고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자신이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오류지만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종착지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곳에 가본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부르신 분만 아시고 인도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의 풀무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목적지를 정하고 내가 계획하고 가다 보면 길을 잃게 되고 방황하게 되고 시험에 들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즉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제부터 내 인생이 내가 정한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방향, 하나님께서 정한 목적지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적지도 방향도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억울한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가야 할지 한 번도 가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방법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십자가의 복음, 그 낮아짐의 방식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길이며 좋은 성도가 되는 길입니다. 아멘.
그런데요?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런 나그네 여정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시험과 고난이 면제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함께 하지만 그것이 성도에게 아무런 고난이 없거나 시련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6절에는 그 시련의 시간을 잠깐이라고 표현합니다. 올리곤 아르티(ojlivgon a[rti)라는 이 말은 그야말로 지금 잠시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요한 계시록 12장에서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된 여자가 광야에서 천이백육십일을 양육 받는다고 말씀하면서 그 여자, 즉 교회가 고난당하는 시간을 한때 두 때 반 때의 짧은 시간으로 표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기도 응답으로 속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신앙이 아니라 그렇게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과 연단을 통해 자신이 변화되는 신앙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기적이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변화된 인격과 삶, 성품과 윤리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시험과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을 연단이라고 표현합니다. 연단이라는 말 도키마조(dokimavzw)는 검증을 거쳐 진짜임을 확인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시련도 아니고 유혹도 아닙니다. 어떤 돌 속에 들어 있는 금을 정련하기 위해, 그 돌을 불 속에 넣어 결국 금이 있음을 증명하고, 더불어 그 금만을 응충해 내는 과정입니다. 진짜라는 것이 확인되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연단을 통해서, 시련을 통해서만 그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단한 믿음을 베드로 사도는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다른 번역을 보겠습니다. 새 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공동번역도 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잘 이해하셨습니까? 성도의 연단은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국인 것입니다. 하루 이틀 믿음으로 살다가 그만둘 수 없는 길입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출석하다가 너무 쉽게 자리를 내주고 띄엄띄엄 믿음을 잃어가는 성도를 볼 때입니다. 시험과 유혹 앞에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게 불러 연단하여 없어질 금보다 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게을러서 타협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결국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끝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지도하는 지도자들의 끝을 주목해서 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제의 기쁨(8~9절)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이 땅에 임한 천국에서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성도가 누리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8~9절에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는 사랑입니다. 연단을 통해서 검증된 진짜 믿음의 특징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두 단어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나그네와 순례자, 외국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성도를 지탱해 주는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8절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나니” 그럽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보지 못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만난 예수입니다. 그 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성령이 거룩하게 하셔서 그 복음을 아멘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로 순종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요 1:16절을 기억해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럽니다. 믿음은 곧 영접입니다. 영접이란 교제요, 사귐이면 동행입니다. 그래서 이미 임한 천국에 들어온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가운데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단은 그런 예수,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보지는 못했지만, 말씀 속에서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만나게 하시고 만지게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기쁨을 동반합니다. 이미 이 땅에 임한 천국에서 믿음의 연단을 극복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바로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는 말씀이 현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임한 천국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라고 선포하면서 시작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9절을 읽어 보십시오. “믿음의 결국 곧 영혼 구원을 받음이라.” 그럽니다. 마태복음 20:1~16절은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처음 아침 여섯 시에 들어간 사람과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그다음부터는 은혜가 적용됩니다. 상당하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결론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천국은 아침 여섯 시에 들어간 사람이나 오후 다섯 시에 드러간 사람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입니다. 천국이면 충분한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누구에게나 영혼 구원입니다. 그게 믿음의 결국입니다. 이 땅에서 일찍 예수를 믿어 수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쳐 천국에 간 사람이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영접한 십자가의 한 강도나 똑같이 영혼 구원입니다. 그게 믿음의 결국입니다.
그렇지만 일찍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연단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먼저 된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 사람에게 이 땅에 임한 천국은 그만큼 풍성하고 다채로운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와 순례자로 살아갈 때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업, 즉 영혼 구원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임하지 않은 완성된 천국과 이미 임한 천국 사이에 살고있는 나그네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이 연단의 시간이며 시험과 유혹이 있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굳게 믿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결국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오늘도 부활의 산 소망과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굳게 믿고 믿음의 연단에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연단 시간은 기쁨과 사랑의 교제 시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믿음의 결국이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견디고 승리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아멘.
3. 너희를 위한 복음(10~12절)
성도로 살아가는 삶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있습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지금 당하는 고난을 이겨야 한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을 얻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오늘이라 일컫는 시간을 믿음으로 이겨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나그네의 삶이 메마르고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임한 천국의 삶은 비록 치열한 영적 전쟁 가운데 있지만 매일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 기쁨은 물론 부활의 산 소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9절의 영혼 구원을 받음은 미래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이 말은 구원을 지금도 얻어가면서라는 의미입니다. 얻는다는 말이 무엇인가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다는 의미를 전해주지만, 베드로 사도는 처음부터 이 구원이 선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9절의 구원은 현재 적인 구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금 구원을 누리고 기쁨과 사랑 가운데 사랑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결국 영혼 구원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미래적 전망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적인 구원을 말씀하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바로 그 현재 적인 구원, 지금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절대적인 것이 말씀을 꿀 송이처럼 달게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 적인 구원을 풍성하게 합니다. 특별히 집을 건축하고 견고하게 하고 보석들로 채운다는 잠언 기자의 말씀은 현재 적 구원을 풍성하게 하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걸어가야 하는 이 좁은 문 좁은 길을 기쁨으로 사랑으로 소망으로 채우는 것은 말씀으로 우리 신앙을 건축하고 견고하게 하고 마음을 채우는 일인 것입니다.
선지자들이(10~11절)
10~12절은 바로 그 말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럽니다.
핵심은 이 구원에 대해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펴서 증언한 것은 바로 12절에 너희를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로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펴서 전한 말씀이 바로 우리가 꿀 송이처럼 달게 먹어야 할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10절의 이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앞서 설명한 지금 누리는 구원과 장차 상속받게 될 영원한 기업으로서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다른 측면에서 성도들에게 임할 은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져오는 은혜의 복음, 즉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성도의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네비게이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이 우리로하여금 길을 잃지 않도록, 길을 잘못들었을 때는 책망으로 바르게 함으로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도록 세워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 이 말씀에 관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간절히 찾고 또 샅샅이 뒤져 알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연구하여’라는 말은 엑세제테산(ejxhrauvnhsan)으로 성경을 연구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또한, 부지런히 살폈다는 말도 샅샅이 뒤졌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계시의 부분이 서로 어떻게 상관되는지를 살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들도 기도와 묵상을 통해 자기들에게 주신 계시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여정에서 이 땅에 임한 천국의 기쁨을 더 많이 맛보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은 잠언 24:3~4절 말씀처럼 집을 건축하고 견고하게 하며 보화로 가득하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찰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의 여정에서 우리의 목적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여정에 지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여정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에 오는 영광, 십자가의 길이 여행길의 지도입니다. 세상에 뿌리내리고 세상과 함께하고자 하는 교회는 세상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르신 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따르는 것에 절대적인 것이 바로 말씀을 연구하고 살피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고난과 영광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11절을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럽니다.
이 부분은 다른 번역들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새 번역입니다. “누구에게 또는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그들이 연구할 때에, 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에게 닥칠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드러내 주셨습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예언자들이 그 일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일어날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을 때에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쉬운 성경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예언자들과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있을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도대체 그 일이 언제 있게 될지, 그리고 그 때에 이 세상은 어떻게 될지 그들은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핵심부터 말하자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살핀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때 가장 구체적인 지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 목적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부활의 산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러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난의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에 올 영광이라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들을 그것을 본적도 경험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관해서 미리 증언하고 상고했습니다. 상고했다는 말은 조사하고, 시험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에 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2절 말씀에 의하면 우리를 위해서, 신약시대 성도들을 위해서 알린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과 영광 받으심에 대한 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서 본 절에서는 10절의 ‘너희에게 임할 은혜’란 말과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구약 시대로부터 유대인들에게 ‘고난당하시는 메시아’ 사상은 거치는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고난당하는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하였음에도(시 16:10, 11. 22; 사 42장, 53장)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옛 영광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르실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영광의 메시아’만을 기다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부활 전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베드로는 주의 고난당하심을 만류하다가 주님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마 16:22, 23). 감사하게도 우리는 바로 이 부분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마태복음 23장 이하는 전부 그리스도의 고난과 제자들의 엇갈린 시선이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 대제사장들, 사두개인 무리의 적개심입니다. 그들은 이런 고난당하는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은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고 영광중에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의 교리는 초대교회 당시 복음 전파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베드로(행 3:11-26)와 바울(행 17:3; 26:23)의 설교에서도 반영되어 나타납니다.
행 3:18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같이 이루셨느니라.” 아멘.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역사를 재해석하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오순절 설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영적인 눈이 떠졌을 때 구약 선지자들의 그 열심과 노력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선지자들은 그들이 어렴풋이 식별했던 구원의 실현을 스스로 목격하게 되기를 열망했을 것입니다. 눅 10:2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럽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들의 활동을 ‘섬긴바’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연구를 통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을 섬긴 것입니다. 즉 구약 모든 계시는 신약의 계시와 관련하여 섬기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너희를 위한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입니다. 이 복음이 무엇입니까? 11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순례자와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 생명의 복음을 지도로 삼고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서 치우침 없는 걸음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생명의 복음을 우리도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매일 그 말씀이 우리 삶을 지배하도록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상징되었던 유대인들처럼 종교적 행위들, 외식들로 경건을 가장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기막힌 신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분명한 두 가지 확신을 줍니다. 첫째는 우리를 위한 말씀을 우리도 연구하고 살펴야 한다는 당위성입니다. 둘째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 땅에 임한 천국의 여정에서 우리가 기쁘고 감사하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길이지만 기쁨이 있고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역동적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죽지 못해 가는 길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로 가는 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나그네들에게 그 길을 치우침 없는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지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살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록해 놓은 말씀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했던 바로 그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때로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 끝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비록 좁은 문 좁은 길이지만 이 길에도 기쁨이 있고 위로가 있고 소망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이 땅에 임한 천국은 가짜가 아닙니다. 비록 이 땅에 살아도 천국 백성답게 살아간다면 전부는 아니라도 천국의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그리스도의 고난, 낮아지심, 겸손이라는 지도의 안내를 받아 살아갈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본받아 살아가는 삶에는 기쁨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있습니다. 그것도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이 우리에게 있고 나누고 베풀고 섬길 때 찾아오는 천국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쁘게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에는 지도가 항상 지참되어야 합니다. 그 지도는 바로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지도를 가지고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살피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할 일입니다. 아멘.
휴! 엄청난 분량입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믿음은 고난의 시대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견디는 것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구원은 현재적 구원뿐만 아니라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시대를 믿음으로 견뎌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다 보니 이런 믿음이 더욱 귀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시대적인 어려움 앞에 굴복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출처 ; 블로거 '꾸준함의 능력
벧전1:13-25
[ 성경묵상 ]
[ 질문 1 ] 왜 베드로는 장차 있을 심판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는가?(17절)
13절의 "그러므로" 이후의 내용은 이 놀라운 구원을 누리는 성도가 마땅히 살아가야 할 태도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마음의 허리를 동여야 한다(13절). 이스라엘 옷은 허리를 제대로 동이지 않으면 행동이 불편하다. 그래서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첫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준비하여 음식을 먹고 출애굽을 준비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출 12:11). 이 땅의 문화에 취해 하나님이 떠나라고 할 때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나그네의 삶을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언제든지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둘째,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14-16절). 모든 행실에 하나님을 닮아 거룩해야 한다. 이 땅의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두려움으로 지내어야 한다(17절). 종말에 심판이 있을 것을 잊으면 삶이 흐트러지고 타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들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 질문 2 ] 대조되는 두 개념의 짝들(유한한 것과 영원한 것)을 본문에서 찾아보라.(18-19절, 23-25절)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 썩어질 씨와 썩지 아니할 씨 / 풀과 꽃을 주의 말씀
[ 질문 3 ] 창세 전부터 알려지셨고, 성도를 위해 이 말세에도 알려지신 그분은 누구이신가?(20절)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지만, 말세에 우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된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허리를 동이고'란 긴 의복을 벨트 안으로 밀어 넣는 모습을 뜻한다. 그러면 다리를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출 12:11(70인역)에서 유대인들이 애굽을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자세와 일치하며, 다가올 중요한 일에 대한 '준비의 자세'를 나타낸다.
본절을 시작하는 접속사 ‘그러므로’는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본문이 앞선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앞선 12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복음을 받았으므로 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바로 이와 같은 복음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위한 권고 및 그 필연적 이유가 13-21절에 걸쳐 진술되고 있다.
베드로는 복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먼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명한다. 여기에서 ‘동이고’는 ‘(여행 등의 출발을 위해) 의복을 허리띠로 조이고 단단히 태세를 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잠 31:17 ; 빌 2:1) ‘아나존뉘미’의 명령 분사로서 명령의 의미를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허리를 동이고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은 것처럼(출 12:11) 급한 일을 당할 때를 대비하는 경계 태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허리가 아닌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매사에 긴장된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즉 주위의 핍박과 혼란한 상황으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흔들리거나, 혹 사단이 활동할 여지를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항상 깨어 있는 삶으로 재림의 그 날을 향해 달음질해야 한다.
‘근신하여’는 ‘술 취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명령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 항상 권고나 충고 또는 훈계를 할 때에 사용된다(살전 5:6,8 ; 벧전 4:7 ; 5:8 ; 딤후 4:5). 즉 이 말은 ‘동이고’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당하는 수신자들의 영적 자세를 당부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고, 세속적 욕구로부터 자기를 지키며, 영적 나태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는 정신적인 자세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를 공동 번역은 ‘여러분에게 내려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십시오’라고 번역했다. 공동 번역이 한글 개역 성경과 번역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 것은 ‘텔레이오스’를 ‘온전히’가 아닌 ‘끝까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KJV도 역시 ‘끝까지(to the end)’로 번역하여 소망하기를 인생의 종말 때까지,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치지 말아야 함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과 NASB는 ‘완전히(completely)’라는 의미로 번역하여 소망하되 조금도 빈틈없이, 혹은 체념이나 낙담의 정신을 완전히 배제한 채 순수하게 소망을 지니라는 측면을 부각시켰다. 이 두 가지 표현이 의미상의 차이를 갖기는 하지만 ‘텔레이오스’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으므로 실상 본문에서는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끝까지 소망하되, 또한 그 소망이 온전하여야 함을 모두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소망의 대상은 ‘은혜’에 해당하는 ‘카린’이다. 원형 ‘카리스’는 자기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나타내 보이시는 기쁨과 호의와 은총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본문에서는 ‘말세에 나타 내기로 예비하신 구원’(5절)과 동의어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J.N.D. Kelly).
‘나타나실 때에’라는 표현 ‘엔 아포칼휩세이’는 눈에 보이지 않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계시되어 드러나실 때(at the revelation)를 의미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지칭한다(Alford, Bengel, Kelly). 베드로는 환난의 도가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말하고 그 날이 되면 모든 환난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여러분이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전에 알지 못할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베드로는 14절에서 수신자들의 구원받기 이전 상태와 이후의 현재 신분을 대조하면서 과거를 단절하고 현재의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그들은 복음을 받기 전에 무지하여 각종 더러운 욕망들을 추구하며 살았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그분의 자녀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순종하는 자식으로서 ~해서는 안된 다’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한글 개역 성경이 ‘~처럼’으로 번역한 접속사 ‘호스’는 자격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로서’라는 의미이다. KJV, NASB, NIV 등 권위 있는 영역본들이 모두 ‘순종하는 자녀로서(As obedient children)’라고 번역하였고, 공동 번역은 ‘잘 순종하는 자녀로서 하나님께 복종하십시오’라고 그 의미를 확장하여 번역하였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본 서신을 받을 당시에는 이미 순종하는 자녀의 신분이었으나 과거에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욕들을 쫓는 삶을 살았던 자들이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사욕들을 쫓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을 때 행한 것임을 말해 준다.
베드로는 지금 수신자들에게 그리스 도인이 되었을 때에 갖추어야 할 실천적인 요구로서 그런 욕망들을 따르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그들이 당시 무슨 괴악한 죄악에 잠겨 있어서 그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기를 힘쓰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여기에서 ‘거룩’이라는 것은 어떤 의식상(ritual)의 정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지금 유대인들이 지키던 유전, 즉 먹기 전에 손을 부지런히 씻거나 시장에서 돌아와서 반드시 물을 뿌리고 먹거나 그 외에도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관례(막 7:3,4) 등에 관하여 거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함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영적 · 도덕적 성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쫓던 사욕에 가득 찬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내면적이거나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입어서 정결(거룩)하게 된’ 존재론적인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거룩을 일상적인 삶의 행동과 연관된 ‘행실’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서 세상 속에서 윤리를 실행하는 실천적인 면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클레벤트(Clement of Rome)의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거룩함과 일치되게 하자”라는 말은 본절의 핵심을 잘 드러내준다.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세상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소유와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부여하셨다. 이에 따라 예루살램(사 48:1,2), 시온산과 그 위에 세워진 성전(사 64:10), 그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출 19:5,6 ; 민 15:40 ; 신 7:6 ; 26:19) 등이 거룩하다고 칭함을 받았다.
이와 같이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신약 시대에도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빌 2:13). 이 역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그분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타락과 부패로 가득 찬 세상이므로(18절 ; 2:9 ; 4:3,4) 그런 세상에서부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따라 더욱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얻게 된 거룩함을 더럽혀서는 안되고, 모든 부정한 것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도록 하며, 그 행위를 거룩함과 일치시켜야 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할 것을 명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리고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신분과 같은 외적 조건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를 따라 편견 없이 판단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택함받은 민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서 눈감아 주신 분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에도 영적 자녀라는 특권을 내세워 자기 멋대로 방자하게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 역시 그들의 잘못을 눈감고 지나치지 않으실 것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를 공동 번역은 ‘공정하게’로 의역했으며, NASB와 NIV도 마찬가지이다(impartially). 판단함에 있어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분, 조건 등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이는 오직 판단을 위해 세워져 있는 엄정한 법적 기준, 혹은 진리에만 입각하여 공평 무사한 태도를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분 자신이 진리이고 모든 선악의 절대 기준이신 하나님은 어떤 선입견으로 인해 판단을 흐리는 분이 아니며, 판단받는 자의 외적 조건으로 인해 오류를 범하는 분이 아니다. 그는 오직 각자의 내적 인격과 성품에서 표현되어 나오는 행위를 따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다(롬 2:16).
특히 여기서 ‘행위’에 해당하는 ‘에르곤’ 이 단수라는 사실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선하거나 악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의미이며, 이에 따른 엄정한 판단이 주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행위는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으며 한 사람의 일생은 많은 선과 많은 악으로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이 되는 행위가 단수로 기록된 것은, 그 사람 행위가 근본적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 행위인지 혹은 죄악의 지배를 받는 행위인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도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결국 마지막 날 그의 행위는 의로운 것으로 판명되는 것이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네가 외국인으로서 사는 동안’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외국인으로서 지내야 하는 이 세상이었다면 역으로 돌아가야 할 본향 역시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본향에서 성도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본절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두려움을 가지고 통과하라’고 권고한다. 즉 ‘이 세상에서의 각 사람의 행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나그네 삶을 신중한 태도로 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행동이 본향에까지 연결됨을 강조하면서 비록 박해 가운데 놓인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육신은 죽이고 영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15,16절에서의 권고처럼 그분 앞에서 온전하고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촉구한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이제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알지만,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되지 않고,
성도들을 향해 거룩한 사람을 권고하는 이유를 15-17절에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제시한 후 18-21절에서 이어 계속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수신자들이 그들의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이 값으로 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나그네의 삶의 방탕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들을 구속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모독하는 처사이다.
'헛된 행실'이란 수신자인 성도가 회심하기 전에 이방 우상을 섬기던 허망한 삶의 모습을 가리킨다(futile way of life).
'망령되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기 이전의 우상숭배의 삶을 살았던 상태를 말한다.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되었습니다.
영어의 'not ~ but'의 용법과 같은 표현이다. 흠 없고 점 없다는 것은 완전 무결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예정되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선재성(Pre-existence)과 성육신(Incarnation)을 묘사하는 구절이다.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에게 영광을 주셨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세 번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18-20절에서 제시하고 있으며, 세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둔 자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는 자들, 곧 하나님과 연합된 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목적은 그러첨 성도들과 하나님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하나님과 연합된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 안에서 신실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그분께 신실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은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영혼을 정결하게 해서, 꾸밈없이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베드로는 외적 환난 중에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사랑을 뜨겁게 계속하라고 말하고 있다. 형제를 사랑하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최고도의 힘을 동반하여 뜨겁게 사랑하라고 하고 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여러분은 거듭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가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씨'란 일반적으로 식물의 씨앗, 또는 생명체의 정자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본문의 씨는 씨 그 자체가 아닌 '씨 뿌리는 것(the process of sowing)'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썩지 아니할 씨뿌림은 곧 복음 메시지의 선포이다. 죄인이 거듭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율법적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외부로부터 들어온 말씀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말씀이 살아있어서 인간의 전인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거듭나게 하였다는 의미이다.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선포된 말씀입니다.
나그네로 있을 때를(벧전 1:13~25절)
빌 2:12 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구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됩니다. 첫째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또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이신칭의 복음을 주창한 사람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사실에 관해서 누구보다도 강조하고 또 강조했던 분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사실 이 말씀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살아아 가는 성도의 생활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 역시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성도의 신분을 나그네라고 정의한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나그네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피 뿌림으로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요? 베드로 사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성도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라고 씁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썼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결국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 믿음의 결국이라는 말은 현재 진행형의 믿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와 믿음의 결국, 또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은 모두 현재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 즉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에 대해서 선지자들이 미리 연구하고 살펴서 우리에게 전해준 구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복음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려으이 도우심을 받아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에 여러 가지 시험으로 잠깐 근심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 ‘그러므로’에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그러므로’를 보면 다음 내용이 어떤 내용일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3절부터는 성도로서 어떻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권면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본문은 13~17절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18~21절에는 다시 구원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22~25절에는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지내라(13~17절).
13절의 ‘그러므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13절입니다.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그럽니다. 그런데 앞에 수식어가 여럿입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란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마지막 날에 결정적으로 성취하실 구원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 미래는 현재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현재를 포함하는 미래라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앞에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라는 표현들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를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상속받게 될 영광스러운 기업으로 향하는 나그넷길에서 성도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주신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여기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고 할 때 아나조사메노이(ajnazwsavmenoi)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긴 의복을 허리띠를 벌어서 졸라매는’이란 뜻으로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 표현은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허리를 동이고 유월절 어린 양의 고기를 먹은 사실(출 12:11)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은 죄 된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마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가졌던 자세와 같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매사에 긴장된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단지 감정이거나 의지적인 차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세계관, 가치관 생각과 판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은 영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미와 아직을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바라는 성도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근신하라는 말은 ‘네폰테스’(nhvfonte")로 ‘정신을 차린 상태’라는 뜻입니다. 자제(self-control)와 이에 따르는 정신의 맑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나그네로 살면서 박해를 당하는 성도가 가져야 할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딛 2:2에서는 ‘금주’(禁酒)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이 분명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읽어집니다. 명료한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허리를 동인다는 말은 영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고 근신한다는 것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우리에 부활의 몸을 입는 온전한 은혜를 주실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살아야 합니다. 근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조금 마음을 놓으면 은혜에서 멀어져 근신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14절에서 전에 알지 못할 때 따르던 사욕을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다른 번역으로 읽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새 번역 성경입니다.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그럽니다. 베드로 사도는 앞에서 교회를 “택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썩어가고 더럽고 쇠해가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셔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에 속하게 하신 것입니다(1:4절).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주셔서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자녀”라고 쓴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죄와 죽음을 이긴 부활 생명이 그 속에 숨 쉬는 자녀 된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친아버지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을 닮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다른 길을 가고 다른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의 수식어가 순종하는 자식처럼입니다. 14절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갖추어야 할 실천적 요구들이 나옵니다. 즉 순종(14절) 거룩(15절) 경외(17절) 성도 상호 간의 사랑(22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순종하는 자식’은 전통적인 히브리식 표현법으로(삼하 12:5; 사 57:4; 엡 2:3; 5:8) ‘순종의 자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순종의 자식’이라는 말은 성도들의 본질적 속성이 순종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두 번째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잘못된 탐욕과 습성으로부터 결별하여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할 때 행하던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의 자식처럼 진리의 복음에 순종하는 삶을 매일매일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무지’(無知)라는 말과 ‘사욕’(私愈)을 밀접히 연관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로 보아 무지는 불 신앙의 원인으로 소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욕’이라는 말에피뒤미아(ejpiqumiva)은 엄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려 죄 가운데 빠지게 하는 타락한 인간의 욕망으로, 이것은 이방인의 특성인 도덕적 퇴폐함을 가리 킵니다. 본받지 말라는 말은 로마서 12:2절에 사용된 그 유명한 표현입니다. conform이라고 번역되었던 이 말은 순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내면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메타모르포오’(metamorfovw), 즉 변화를 받으라고 했던 표현과 대조되는 외면적인 닮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받지 말고’라는 말은 때로 ‘유행을 따라가지 말고’(not fashioning)로 번역되기도 합니다(KJV). 그러므로 이 말은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세상으로부터 오는 탐욕과 사욕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도의 삶이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속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녀처럼 올바른 방향을 향해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사욕을 따르지 않고 세상을 따르지 않기는커녕,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을 따라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처럼 살아야 합니다. 과거와 결별해야 합니다. 세상 정신을 쫓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무엇을 따를 것인가에 있습니다. 사욕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따를 것인가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15~16절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레 11:44; 19:2; 20:7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노력은 이전의 사욕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데 들여져야 합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거룩하게 되어 가라는 명령형으로 된 주동사 게네떼테(genhvqhte)에 있습니다.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달라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달라져야 합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온전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은 훈련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라고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깨끗하게 합니까?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고 말씀합니다. ‘구체적인 행실’ 안에서 요구되는 죄로부터의 해방과 도덕적인 순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전인적인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삶의 시간들을 모든 행실, 즉 모든 생활에서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믿음에 합당한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모나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은 빛된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나타나야 합니다.
마지막은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럽니다.
새 번역 성경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럽니다. 문제의 핵심은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입니다. 그 기간이 말세입니다.
외모로 보지 않는다는 말씀은 우리의 외모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키가 크고 작다거나,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다거나, 학력이 높고 낮다거나, 돈이 많고 적은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성경의 일관된 사상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행 10:34 절에는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행 10:34)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꾸 하나님 앞에 내 의와 공로를 내세우려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요? 문제가 되는 것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행위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상은 특히 마 25장의 종말 강화에서 두드러집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실 때 기준이 뭡니까? 바로 그들의 행위입니다.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라는 말씀이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는 말씀은 모두 행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순종의 삶을 살아가면서 과거 사욕을 따르던 삶을 청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모두 행위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믿음으로 살았느냐 아니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라고 할 때 ‘행위’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곤’은 단수입니다. 이 말은 사람은 행위가 선하든지 악하든지 하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는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적인 의미는 나그네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이 삶에서 좋은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은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두려워하고 확신 없는 삶을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입니다.
나그네의 시기, 이미와 아직의 시기, 말세의 시간을 방탕하고 거룩하지 못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말씀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다고 느낍니다. 말세,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까지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처럼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곧 심판이 시행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내야 합니다. 살아가야 합니다.
대속의 은혜(18~21절)
오늘 말씀은 가운데 22절을 중심으로 앞쪽, 즉 18~21절에는 대속함을 받은 은혜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뒤쪽 23~25절은 거듭남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그래서 대속함을 받은 나그네, 거듭난 나그네는 이 땅에서 뜨겁게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의 교훈들과 연결해 보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 말세의 시간을 두려움을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근신하고 두려움에 빠져 지내는 시간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를 힘 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임한 천국을 살만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자, 그렇다면 18~21절까지 대속의 은혜에 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8절은 “너희가 알거니와” 그럽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물론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들이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헛된 행실이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우상 숭배를 말하는 데 쓰였을 뿐만 아니라(행 14:15), 70인 역(LXX)에서는 살아계시고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과는 대조적인 이교도들의 우상들에 적용되거나 혹은 하나님을 결코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변절한 자들에게 경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레 17:7; 대하 11:15; 렘 8:19). 어쨌든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기 이전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조상이 물려준”이라는 표현 때문에 유대인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여기서 ‘헛된’이란 ‘공허한’이란 뜻으로 이는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성도들의 삶이 내용이 없고 무의미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따르던 사욕을 본받지 말라는 14절 말씀은 예수 믿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헛된 행실 역시 사욕을 따르던 삶을 의미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잘못된 삶에서의 구원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런 헛되고 공허한 삶에서 대속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속’이라는 말 ‘앨뤼트로데테’(ejlutrwvqhte)는 본래 전쟁 포로나 노예에게 그의 자유를 사주기 위해 지불 되었던 돈에 대한 전문 용어인 ‘뤼트론’(lutrovn)에서 온 말로,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지불하신 값을 의미합니다. 눅 24:21 절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할 때 속량이 바로 뤼트론입니다. 딛 2:14 절에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할 때도 뤼트론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노예 된 자들을 위해 그의 피로써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사서 참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 사도는 부연 설명하기를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노예의 구속에는 은금을 사용하였으나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구속에는 그러한 없어질 것으로는 할 수가 없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은혜, 피 흘리심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었음을 다시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19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아멘. 아멘.
여기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은 대속죄일의 어린 양이나, 아사셀 양 또는 유월절 어린 양,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한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등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림으로 대속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20절에서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그럽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예수가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되신 분이며, 대가 차매 나타나신 바 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때가 차매 성도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세 전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이라는 말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하셨다는 사도 요한의 증거를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리 알리신바’라는 말은 ‘미리 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프로기노스코’(proginwvskw)의 완료형 분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창세 천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되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계속적으로 계신 사실, 곧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타내신 바’라는 말 파네로덴토스(fanerwqevnto")는 부정과거 분사형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18~21절에 이르는 창세 전에 계획된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피를 흘리셔서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게 된 사실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그네 된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바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면 21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그네들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사는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락 역시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 대속의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지불되시고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소망이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나그네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도록 우리를 붙잡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23~25절)
23절에서는 대속이라는 표현 대신에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중생이라는 이 놀라운 표현은 사도 바울이 많이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아나겐나오(ajnagennavw)라는 이 말은 ‘다시 만들다.’, ‘다시 태어나다’, ‘새롭게 태어나다’ 등의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1:2절에서는 거듭남이라는 표현 대신 성령이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거듭남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1:3~4절에서는 거듭남을 성령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쉬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한다고 씁니다. 그것은 성도가 살아 있는 소망을 갖게 한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거듭남이 말씀으로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 말씀은 썩지 않고 거짓이 없는 말씀입니다.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3~4절에서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가 받을 유업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은 소망입니다. 그런데 23절에서는 이 모든 것이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거듭나게 하는 것도 말씀이고, 썩지 않는 것도 말씀입니다.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것도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씀만이 성도를 이 나그네된 세상에서 지켜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떠나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는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썩어지고, 더럽고 헛된 데로 빠져듭니다. 낙태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나와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태아가 언제부터 생명이냐는 것입니다. 낙태를 금지하는 법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낙태를 허용하는 법은 14주냐 22주냐로 다퉈야 합니다. 세상은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말씀이 있으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썩지 않고 살아 있고 영영히 거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세상의 특징과 반대입니다. 말씀은 교회가 장차 유업으로 받을 그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의 특징을 정확하게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에서 말씀은 ‘살아 있고’ 그럽니다. 존토스(zw'nto")라는 이 말은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썩지 않을 씨앗입니다. 영영히 거합니다. 메논토스(mevnonto")라는 이 말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말씀이 핵심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거듭나게 하고 말씀이 썩지 않는 하늘의 유업을 소유하게 합니다. 말씀 속에서 소망이 불붙듯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말씀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면 거듭납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면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바라고 사모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살아 있는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말씀을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등한히 합니다. 그러면서 자꾸 영적 침체에 빠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버리면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말씀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다시 벧전 1:24~2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럽니다.
그리고 사 40:6~8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그럽니다. 이 말씀은 장차 포로가 돼서 흩어진 이스라엘의 해방을 예언하며 위로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사 40:8절에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에서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 즉 언젠가는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회복하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포로로 끌려간 곳의 비참함과 절망 속에서 그 언약의 말씀을 굳게 붙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말씀이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풀이고, 꽃입니까? 6절을 보면, 모든 육체가 풀이고, 그 육체의 아름다움이 꽃입니다. 7절에서 그것들이 시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끌고 가서 종으로 삼은 앗수르와 바벨론 같은 이방 나라의 영광이 ‘풀과 꽃의 영광’처럼 시든다는 선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인생을 거기에다 다 걸고 살아가는 것들, 즉 세상이 내세우는 자랑들, 세상의 매력들, 부와 아름다움과 지위, 학식, 재능, 경력, 가문, 힘과 권력, 배경 들은 결국 풀의 꽃과 같이 한순간에 시들어 버릴 허무한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벧전 1:25 절은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 즉 복음,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은 무상한 인생에 의미를 주고, 허무한 비관론에 한 줄기 빛이 되는 것입니다.
풀의 꽃과 같은 인생에 생명과 영원성을 부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 말씀, 즉 복음입니다. 그것이 포로가 되어서 흩어진 나그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 복음의 말씀, 즉 예수님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아멘.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반드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타국에 흩어져 있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이사야 선지자는 먼저 미래에 위로의 때, 회복의 때,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지는 그 날을 바라보고 노래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40장입니다.
사 40:1~2절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그러면서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우리는 여기 외치는 자의 소리가 세례요한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했고 주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바로 이 말씀은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사야 40:6~8절을 인용하면서 그 썩지 않고 살았고 영영히 거하는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은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로 인해 거룩함을 입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 그 교회를 탄생시킨 복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그것만이 능력이고, 그것만이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고, 풀의 꽃과 같은 허무한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소유하는 길이라고 말씀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썩지 않고, 살았고, 영영히 거하는 말씀’ 이사야가 붙들었던 그 “영영히 서는 말씀”은 예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 즉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앗수르도, 바벨론도 한때 세계를 제패하며 위용을 자랑했고,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될 만큼 강력했지만, 지금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 강력한 나라들은 풀이나, 꽃의 영광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이 없이 신실해서 그들이 보고 듣는 대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출처 ; 이웃 블로거 '꾸준함의 능력'
Ⅴ. 근신과 거룩함과 형제 사랑에 대한 권고 1:13-23
〔1〕 베드로는 그들에게 근신할 것을 권고한다.
1)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13절).
이는 "너희 마음의 허리, 곧 너희 마음의 활력과 힘으로 너희 의무를 힘서 다하도록 하라. 너희를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너희 자신을 해방시키고 굳은 각오로 계속해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라"라는 말이다. 근신하라. 이는 "너희 모든 영적 위험과 대적들에 대해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며 모든 일에 있어서 온순하고 절제하라"는 말이다. 즉 "실제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소신에 있어서도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라"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바르게 지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일 지라도 근신하는 일에 힘쓸 필요가 있다. 은혜의 상태 가운데 들어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임무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더 큰 은혜를 바라며 힘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온전히 바라며 우리의 허리를 동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자신을 일깨우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활기있게 전념할 수 있어야 한다.
2)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14절).
이것은 그들의 현재 상태, 즉 순종하는 자신의 상태와 이전의 사욕과 무지를 좇아 살았던 상태를 고찰함으로서 그들에게 거룩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자신들의 자녀됨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이전에 사욕과 무지의 때가 있었다. 회심한 사람들은 그들의 이전 상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3)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5, 16절).
이와 같이 성도가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은 강한 어조로 명해지고 있으며, 세 가지 근거 즉,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와, '기록하였으되'로 나타난 그의 명하심, 그리고 그의 모범으로부터 강하게 요처되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온갖 축복을 소유할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은 엄격한 의무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은총들은 거룩할 것을 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도 해 주는 것이다. 완전한 거룩은 전 그리스도인의 바램이자 의무이다. 그것의 범위는 전반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며, 벗이든 적이든 상관 없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모든 행실에 있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모든 교제와 행사에 있어서 늘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거룩의 표본으로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결코 하나님과 같이 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닮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숙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를 수 있는 최상의 거룩함에 나아가도록 요구한다.
4)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17절).
우리는 이땅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거룩한 확신과 그를 심판자로서 두려워하는 경외함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대로 판단하시지 않으신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로운 동정심으로 사람들을 특별 대우하시지 않으시며 오직 그들의 행위대로 사람들을 판단하신다.
5) 베드로는 두 번째 논지를 덧붙여 말해간다(18절).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상기시키고 있다.
① 그들은 아버지께 드려진 속량으로 구원함을 받았다.
② 그들의 구원함을 위해서 치뤄진 대가가 무엇이었는가.
③ 그들이 어디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것인가. (그들은 이상의 사실들을 알았으며 결코 모르는체 가장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받은 사실을 생각함으로써 거룩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속적이고 힘있는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금이나 은이나 혹은 이 세상에 썩어질 어떤 것으로도 단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 그것들은 썩어질 것들로서, 썩지 아니하며 멸하지 아니할 영혼을 결코 구원하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인간 구원의 대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가장 고귀한 피를 흘리신 목적은 우리를 이후의 영원한 비참한 상태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망령된 행실에서부터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드러난 악행 뿐 아니라 우리의 행실의 공허와 무익함 역시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인간의 행실은 그것이 가장 망령된 행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의 옹호를 위해서 고전적 유풍이나 관습 그리고 전통으로 변명을 하려고 한다. 고전적 유풍이 결코 진리의 어떤 규범이 될수는 없다.
6) 구속자와 구속을 받은 양자 간에 모두 관계된 것들에 대해 언급한다(20,21절).
① 구속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더욱 상세하게 묘사되어지고 있다.
㉠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였다. 이러한 예고는 의지의 행위나 있어질 일의 결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그는 '말세에 그들을 위하여 나타내신 바된 자'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바 구속자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이 일은 신약과 복음의 마지막 때에 되어졌다. 만일 너희가 그를 믿는다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 그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로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영광을 주셨으며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자기의 아들됨을 온 세상에 알리셨고 창세전에 그가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그 영광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② 또한 구속을 받은 자들이 그들의 믿음과 소망에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21절).
③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는 영원전부터 있어온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러한 은혜를 나타내시기 오래 전에 이미 그들에 대한 특별한 은총의 뜻을 가지고 계셨다. 이전 세대가 누렸던 것과 비교해 볼 때 말세 때의 복은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감사와 봉사는 그러한 은총에 합당한 것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2〕 베드로는 그들에게 형제 사랑을 권고한다.
1) 그는 복음이 이미 그들로 하여금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도록'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다(22절).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22절)'가 그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을 정결케 하는 위대한 도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들으나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결코 깨끗함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의 영혼을 깨끗케 하는 큰 동인이 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노력하도록 고무시키시며 또 성과를 거두도록 하신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 자신들의 영혼을 깨끗케 했으며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먼저 반드시 깨끗게 되어야 비로소 서로 거짓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랑도 깨끗한 마음에서 나오지 아니하고서는 있을 수 없다.
2)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의 영적 관계를 숙고함으로써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해야 함을 더욱 역설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자들이다. 그들은 서로 새롭고도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들은 신생에 의해서 서로 형제가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두 번 태어나는 것은 첫 번 것보다 훨씬 바람직한 것이며 탁월한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인 출생에 의해서 사람의 자녀가 되며, 영적인 거듭남에 의해서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된다. 태어날 때부터 형제인 자들은 서로 사랑으로 매이게 되나 영적으로 형제의 관계에 있는 자들은 그 의무가 배가 되어진다.
Ⅵ. 하나님 말씀의 영원성 1:24,25
베드로는 이제 우리 앞에 자연인의 덧없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어떤 것도 그를 견실한 실체적 존재로 만들 수 없다. 이는 오직 썩지 아니할씨,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자만이 가능하다. 이 말씀은 복음 전파 가운데서 우리 앞에 매일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상의 번영과 영광 중에 있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마르고 시들며 죽어가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인간의 재능, 아름다움, 용맹, 강인함, 부귀, 영예 이 모든 것은 풀의 꽃과 같아서 곧 시들어 죽고 마는 것이다. 이 없어져 버릴 피조물에게 견고하고 썩지 아니할 것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간직케 하는 것이다. 이는 이것이 그를 영원토록 보존할 것이며 그와 함께 영원토록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벧전-5, 본론 - 성도의 신분, 고난에 대한 바른 인식, 굳건한 믿음과 생활(베드로전서 1:13-4:19)베드로전서는 외부에서 오는 여러 가지 시련에 직면한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격려의 서신(the Epistle of Encouragement)’이다.
이러한 전체적 내용과 목적을 염두에 두고서 본 서신의 내용 구조를 살펴보자면 크게 1:1-12의 도입부, 1:13-4:19의 본론부, 5:1-14의 종결부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 본 서신의 본론부인 1:13-4:19은 성도의 신분과 고난에 대한 바른 인식에 근거한 굳건한 믿음과 생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러한 본론부는 다시 1:13-3:12까지와 3:13-4:19까지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전반부 1:13-3:12은 거룩한 삶의 필연성 인식 및 실천적 권면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은 내용상 다시 1:13-2:10과 2:11-3:12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1:13-2:10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의 정체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2:11-3:12은 성도들의 거룩한 삶에 대한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의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성도의 정체성과 거룩한 삶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전자는 후자의 근거이자 원리로 제시되고 있다.
이를 문맥을 따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첫 문단인 1:13-21에서 베드로는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권고하면서, 그 권면의 근거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 성도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심을 제시한다.
이어 1:22-2:3에서는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씨로 거듭난 자로서 거짓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기에, 더욱 뜨거운 형제 사랑을 나누기를 권면한다.
이어 2:4-10에서는 성도들의 영적 신분을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하여 세워져 가는 ‘신령한 집’ 및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 된 백성’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께 속한 성도 공동체의 거룩한 특성을 인상 깊게 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2:11-18에서 베드로는, 성도들은 이방 세계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나그네들(holy strangers)’로서 선한 행실에 힘쓰며 인간 사회의 각종 제도에 순복할 것을 권면한다.
이어 2:19-25에서는 만일 성도들이 선을 행하는 중에 고난을 당하게 된다면 그러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임을 밝힌 후, 죄 없으신 분으로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것을 격려한다.
이어 3:1-7에서는 비록 남편이 불신자일 경우라 할지라도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 하며, 또 남편은 더욱 연약한 그릇인 아내를 귀하게 여길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마지막 3:8-12에서는 성도 상호간 및 사회적 인간 관계 속에서 악을 멀리하고 사랑과 선행 및 화평을 추구할 것을 권면함으로써 거룩한 삶에 대한 실천적 권면들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다루는 1:13-3:12까지의 전반부에 이어 후반부인 3:13-4:19에서는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앞서 도입부 및 본론부 전반부에서 시련의 문제를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여기서는 고난 극복을 위한 성도의 인식과 자세에 대해 보다 심층적 차원에서 교훈을 제시하고 있 다.
후반부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첫 문단인 3:13-22에서는 성도들이 이방 사 회 속에서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은 의를 위한 고난이며, 그러한 고난은 악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과는 달리 성도들에게 유익하며 복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성도들에 앞서서 이미 의를 위한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 4:1-6에서는 성도들 역시 육체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고난의 모범을 보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무장할 것을, 4:7-11에서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깨어 기도하며 열심히 사랑하고 또한 받은 은사를 따라 선한 청지기로서 봉사하는 삶에 힘쓸 것을 권면한다.
그리고 4:12-19에서는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상의 권면에서, 성도는 비록 이방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육체의 정욕을 쫓는 이방인들의 삶과는 달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와 근거는 성도들의 신분적 정체성(正體性)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도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공동체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들이 세상 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을 쫓아 살 수는 없다. 달리 말하면, 성도는 땅에 발을 디딘 존재로서 주변의 이방 이웃들과 어울려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서도 이방 이웃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룩한 나그네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 세계 속에서 이방인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와 관련해 베드로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성도들에게 이방인 중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쫓아 선한 행실에 힘쓸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2:11,12,20 ; 3:16,17). 또한 비록 이방인들의 제도라 할지라도, 인간 사회의 각종 제도에 순복하도록 교훈한다. 이는 곧 성도가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도 상호간 및 이방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선을 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도가 거룩한 나그네로서 이 땅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사회나 국가의 제도를 거부하고 이방인들을 터부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성도의 거룩한 삶은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며 오히려 복을 비는 것과 같이, 이방인들과의 공존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선한 행실’에 힘쓰는 것이다.
물론 이방 세계 속에서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고난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다면, 그러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며(2:20 ; 3:17), 그리고 성도의 선한 행실을 통해서 결국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2:12). 이는 교회 안에는 성도가 많지만 교회 밖에서 거룩한 삶으로써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를 발견하기 힘든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성경묵상 ]
[ 질문 1 ] 인내를 통한 믿음이 금보다 귀한 이유는 무엇인가?(7절)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 질문 2 ] 눈으로 보지 못하는 예수님을 믿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8절)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기뻐하고 있는 이유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 질문 3 ]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연구할 때 깨닫게 하신 분은 누구신가?(10-11절)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연구하는 선지자들에게 깨닫게 해 주셨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1,2절에서 베드로는 발신자 표기와 수신자 표기 및 흩어진 성도들에 대한 문안 인사를 했다. 이에 이어 3,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성도에게 산 소망을 주시고, 또 하늘에 간직하신 기업을 잇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한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본서를 기록한 후 1년 6개월 내지 2년이 채 안되어 순교를 했다고 전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순교를 당할 처지에 놓인 베드로나 박해에 직면해 있는 수신자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찬송한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약속과 천국이라는 본향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 이들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이 찬양을 하지 못할 상황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바로 거기에서부터 구속 사역이 시작되었다(딛 3:5). 하나님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원수들을 자기 기업을 상속할 아들로 삼으신 것이다.
‘산 소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재림 후 이루어질 천국의 지복 상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이 불 같은 고난, 용광로 같은 시련의 한복판에 살아가야 하면서도 내적 기쁨과 신앙의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소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의 십자가와 부활의 전과정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신 것이다.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리고 여러분을 위하여 썩지 않고, 더러워 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의 몫으로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소망’을 ‘산’이라는 현재 분사로 수식하여 '산 소망'이라고 표현한 베드로는, ‘기업’을 '산'과 유사한 세 개의 형용사로 수식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 세 개의 형용사는 모두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두사 ‘아’로 시작하는 합성어로서 부정의 의미를 선명하게 눈에 띄게 한다. 즉 이는 천국 기업과 달리 이 세상의 기업은 썩으며, 더럽고, 쇠하는 반면 천국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이 장차 상속하게 될 천국이라는 기업은 이 세상 기업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이 기업으로 받았던 가나안 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이 세상 기업들은 뜻하지 않은 재해나 사건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사라질 수 있지만, 성도가 받을 영적 기업은 그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영원 무궁토록 시들지 않는 견고한 자태를 유지하는 기업이 바로 성도들에게 상속될 천국 기업이다.
하나님은 ‘산 소망’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주기 위해 성도를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기업’이란 ‘소유물’ 혹은 ‘유산’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자본을 투자하여 일으킨 산업으로서의 기업이 아니라 부친으로부터 상속 받는 유산으로서의 기업을 말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뒤에 나오는 동사 ‘간직하신 것이라’와 연결되는데 이 동사의원형 ‘테레오’가 ‘(미래 혹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떼어두다, 비축하다, 예약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것을 고려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하늘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도 아니하는 유산을 따로 떼어놓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 ‘유산’이라고 하면 약속의 땅이었던 ‘가나안’과 동동시되었지만(시 15:4 ; 19:10) 베드로는 이 유산의 개념을 이처럼 하늘에 속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결국 ‘산 소망’은 미래적이며 내세적인 것이다. 현세의 박해 앞에 서 있는 베드로나 성도들에게 있어 그들이 영원한 유산을 받게 된다는 것은 엄청난 희망을 갖게 해 준다.
구약 이스라엘이 기업으로 받은 땅은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 황폐해지고 또 우상 숭배를 비롯한 각종 죄악으로 더러워졌지만, 성도를 위해 하늘에 예비된 유산은 외부의 그 어떤 침해도 받지 않고 내적인 죄로 인해 오염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유산을 잃어버릴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
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성도에게 상속될 기업이 천국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4절)은 그것을 상속할 성도가 그것을 받을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박해에 직면해 있는 성도들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말해 준다.
본문에서 ‘보호하심을 입다’는 군사 용어로서 본래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시 안에 만든 요새와 관련된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달려드는 원수들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이 능력으로 보호하실 것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산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났을 뿐 아니라(3절) 하늘의 유산도 받게 되고(4절), 말세에 나타날 최종적인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는 자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벽한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5절).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함을 받게 되는 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성도들의 믿음이다. 즉 하나님께서 후사(後嗣)로서 택하신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세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능력 아래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 아래 승리하게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믿음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신실성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확고 부동한 신뢰를 말한다. 그러므로 베드로 서신의 수신자나 오늘날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팔이 짧아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정작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도가 종국적으로 얻을 완전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주어진다.
‘말세에’란 인류 역사의 끝인 ‘마지막 날’을 지칭한다. 신약 성경 중 한글 개역 성경에서 ‘말세에’라는 표현은 본절을 포함해 모두 6회 나온다(행 2:17 ; 딤후 3:1 ; 약 5:3 ; 벧전 1:5,20 ; 벧후 3:3). 이중에서 4회(행 2:17 ; 딤후 3:1 ; 약 5:3 ; 벧후 3:3)는 ‘끝’, ‘종말’을 의미하는 ‘에스카토스’가 모두 ‘날(day)’을 의미하는 ‘헤메라’의 복수형과 함께 쓰여서 ‘날들의 끝’을 나타내는 반면, 본절에서는 ‘에스카토스’가 고정된 일정한 시간이나 결정적 시점이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 ‘카이로스’와 함께 쓰여서 '정해진 시간의 끝’이라는 보다 강렬한 의미를 나타낸다. 즉 ‘말세’라는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 관계되는 인류 역사의 끝이란 시점 그 자체를 지칭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나타내기로’는 베일에 덮여 감취어 있던 것을 열어젖혀 보이는 것을 나타낸다. 구원이 말세에 열어젖혀 보이도록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구원의 진정한 실체가 그 때까지는 가리워져 있어서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만약 그 구원의 실체가 어펀 것인지 현세에 명백하고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사람이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실체를 두 눈으로 보지 못하면서도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써 그 보지 못하는 구원을 마치 보는 것처럼 따라가는 자들이다(히 11:1).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치 보는 것같이 하여 인내함으로써 출애굽했던 모세와 같은 자들(히 11:27)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세상 끝에 그 진정한 실체를 드러내 보일 구원의 영광은 현세의 언어로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신비롭고 엄청난 것임에 틀림없다(롬 8:17 ; 고전 2:9).
'말세'란 문맥에서 미래에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미래의 영광을 현재의 소망과 연결시켜 환란 가운데 있는 독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그러므로 지금 잠시동안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슬픔에 빠져 있더라도, 이것을 기뻐하십시오.
성도들이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가운데서도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받는 산 소망을 주셨을 뿐더러 현재 가운데서도 보호하시며 구원의 최종 단계인 말세에는 완전한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본향이 아닌 이 세상에 잠시 체류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갖가지 시험들이 있음을 말한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는 ‘여러 가지 색깔의’, ‘다채로운’, ‘형형색색의’라는 의미이다. 아름다운 그림이 수놓아져 있는 자수판의 뒷면에 여러 색의 실들이 어지럽게 얽히고 설켜 있는 것처럼 성도의 삶에도 수많은 다양한 시험들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당시 본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닥쳤던 시험들은 이방 불신자들의 비방과 욕설, 해고와 폭행, 심지어 살인까지 포함된 견디기 힘든 것들이었다. 베드로는 비록 하나님께서 믿음의 연단을 위해 성도들에게 시련을 주시지만 그것이 성도들에게 시험이 되고 그것 때문에 잠깐 근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3-5절의 내용들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크게 기뻐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시련 앞에서 근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히 12:11) 성도들이 장차 누릴 영원한 영광을 생각할 때 시련은 잠깐이요, 그 시련 중에도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며,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은 내세에까지 미치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롬 8:18).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구원'(9절)을 확실하게 보장받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결코 낙망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시련을 통해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되고, 장차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게 된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차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이란 말은 금이 불을 통해 정련되어 순수한 금을 얻을 수 있듯이, 성도는 박해를 통해 단련된다는 것을 비유한 표현이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토 도키미온 휘몬 테스 피스테오스 데 도키마조메 누)는 한글 개역 성경상으로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기가 어렵다. 공동 번역은 이를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연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라고 보다 상세하고도 명쾌하게 번역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단어는 ‘시련’으로 번역된 명사 ‘도키미온’과 ‘연단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동사의 분사형 ‘도키 마조메누’이다. 여기서 이 두 명사와 분사의 어근은 동일하며, 금 · 은 등의 광석이나 동전 등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불로 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어근에는 불에 집어넣는 시련과 그 시련 속에서 가치가 입증되었다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황금에 비유하고 있다. 황금은 본래 자연 상태에서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돌 속에 소량 섞여 존재한다. 금광에서 채굴된 금이 섞인 돌을 용광로에 집어넣게 되면 거기에서 순금이 분리되어 나온다. 즉 자연 상태의 금광석에서 순금을 채취해 내는 과정 가운데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뜨거운 용광로에서의 제련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그들을 불 같은 시련의 도가니에 집어넣으신다. 생명도 없고, 또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황금도 순금으로 나오기 위해 불로 연단을 받아야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이 정금같이 나오기 위해 불 같은 시련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시련은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해 주는 참으로 귀한 시련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련을 통과해서 깨끗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단련된 성도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을 언급하면서 수신자들에게 모든 시험을 이겨나갈 것을 독려하고 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볼 수 없으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불 같은 시련 속에서 잠깐 근심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고 산 소망과 하늘에 간직된 기업을 생각하면서 크게 기뻐하는 삶을 살았던 것처럼, 역시 비록 이전에 만난 적이 없고 현재에도 보지 못하는 주님이지만 바로 그분을 인하여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 그 자체로 기뻐하는 자들이었다.
‘말할 수 없는’이란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즉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곧 성도가 누리는 즐거움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표현하는 형용사이다.
‘영광스러운'은 ‘영화로움으로 이미 가득 차 있는’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성도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화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가운데서 나오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존재들이다. 수신자들은 바로 그러한 기쁨으로 즐거워 하고 있었다. 이는 곧 그들이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는 표지였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것은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구속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써 이미 구원의 반열에 올랐지만(3절) 그 구원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인 미래에 이루어진다(4절). 현재는 그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다(5절).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현재의 시험 중에서도 기뻐하면서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 결과로서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될 뿐 아니라 현재에서도 그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은 육체를 배제한 영만의 구원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구원으로서 영과 육이 연합된 참 존재적 구원, 곧 육체적 죽음을 초월하여 영육간의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예언자들이 이 구원을 추구하고 연구하였으며, 그들은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예언하였습니다.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들은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올 영광을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예언자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일들은 이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 일들은 천사들도 보고 싶어합니다.
‘살펴보기를’은 ‘~을 조사하거나 들여다보기 위해 몸을 굽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천사들이 신약 성도들의 구원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잘 보기 위해 실제로 노력하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는 구원의 신비가 하나님을 수종하는 천사들조차도 알기 힘든 오묘한 것임을 드러내준다.
그런데 천사들에게조차 감추어진 그 비밀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이 실현됨으로써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고전 2:6-8 ; 엡 3:1-13). 이 사실은 복음을 받은 우리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얼마나 큰 특권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도, 천사들도 누리지 못한 것을 우리는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남으로써 산 소망이 있게 하신 것에 감사함 ( 1:3-5 )
〔1〕 이어서 베드로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간다.
1) 수행되어야 할 의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2) 이러한 찬양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서 묘사되어지고 있다.
즉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한 분에 대해서 그의 세 직무를 나타내는 세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즉 우주적인 왕으로서 주라고 했고, 제사장 혹은 구주로서 예수라고 했으며 선지자로서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3)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많으신 긍휼'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특별히 그 사실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결과인 뛰어난 산 소망의 은총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 소망은 산 소망일 뿐 아니라 영속적인 소망으로서 견고한 기초,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나쁜 상황에 처하여 있어도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하거나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와 우리의 봉사들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받아들여지겠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상의 축복들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 때문으로 여긴다. 세상의 모든 악은 사람의 죄로부터 나타나는 것이지만 모든 선은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거듭남은 영생의 산 소망을 낳는다. 새롭게 영적 출생을 한 자들은 새롭게 영적 소망으로 출생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산 소망이 라고 하는 탁월성을 지니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영생의 소망은 그 사람을 살아있게 해주며, 일깨워 주고, 붙들어 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는 소망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의 거짓된 소망은 헛된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다. 위선자와 그의 소망은 헛된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다. 위선자와 그의 소망은 함께 소멸되며 없어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은 곧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근거가 되며 기초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양떼들간의 뗄 수 없는 연합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양떼된 자들은 머리되신 그의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나게 된다.
〔2〕 베드로는 기업이라는 말로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얻게 될 생명을 묘사해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잃었던 것과는 전혀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좋은 새 기업으로 그들이 거듭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하늘나라에 예비된 고귀한 기업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1) 의심할 바 없이 하늘나라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기업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의 은사들을 주시지만 기업은 오직 자녀에게만 주신다. 이 기업은 우리가 값 주고 산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 아버지의 선물인 것이다. 즉 우리의 공로의 대가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인 것이다.
2) 이 기업의 비교할 수 없는 탁월성: 그 기업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그 점에 있어서는 그 조성자와 같은 성질을 지닌다. 부패란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변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변화도 없고 끝도 없다. 즉 하늘에 있는 장막은 영원한 것이다. 이 기업은 더럽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는 죄와 비참함이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쇠하지 아니하며 언제나 그 향기와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또한 그 기업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 그것은 저 세상에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다. 그 기업이 누구를 위해서 간직되어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들의 특성에 의해서 묘사되고 있다. 즉 그들은 '산 소망을 얻도록 거듭난 자들'인 것이다.
〔3〕 베드로는 그들이 도중에 혹시 넘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약간의 의혹과 불안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온갖 해로운 시험들로부터 그들이 보호하심을 받게 되었다고 대답하고 있다.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자들은 틀림없이 안전하게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약속받은 축복은 곧 보호하심이다. 너희가…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리고 그 보호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보호하심을 입기 위해서 우리가 가지는 수단은 곧 우리 자신의 믿음과 주의이다. 또한 우리가 보호하심을 받는 목적은 구원이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것의 끝과 결말을 확실히 보게 될 때는 말세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현 상태는 위험과 구원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정복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생한 자들이 영생에까지 보존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보호하심을 입는다는 사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사람의 노력과 주의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은혜의 상태를 거쳐 영광의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특효약이다. 이 구원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것'이다. 즉 구원은 성도들을 위해서 하늘나라에 준비되어 있으며 간직되어 있다. 그러나 구원은 비록 예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현재에는 여전히 구원을 기업으로 받게 될 사람들에게조차 상당히 감추어져 있으며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말세에 완전하게 나타날 것이다. 생명과 불멸이 복음에 의해서 이제 빛 가운데 드러났다. 그러나 이 생명은 임종시에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게 될 것이며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구원으로 인한 기쁨 ( 1:6-9 )
그러므로. 사도는 '그러므로'라고 말함으로써 성도들의 현재 상태의 탁월함과 장래에 대한 그들의 숭고한 기대에 관하여 자신이 앞서 말한 내용을 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6절).
〔1〕 근심 가운데 있던 성도들을 안심케 하는 것들이 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크게 기뻐 할만한 어떤 일을 항상 가지고 있다. 선한 그리스도인의 주된 기쁨은 크게 가치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보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많은 시험들로 인해서 큰 시험이며 시련인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좀처럼 하나로 오지 않고 여러 가지가 제각기 다른 측면에서 오게 되며 그 결과 큰 낙심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의 환난과 근심은 잠시일 뿐이다. 환난이 잠간이라는 사실은 그것으로 인한 낙담을 훨씬 줄게 한다. 큰 낙심은 종종 그리스도인의 유익에 필요하기도 하다. '너희가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가 그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괴롭히시지 않으시며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사려를 가지시고 행하신다. 낙심케 하는 이 고난들은 필요할 때 외에는 결코 우리에게 오지 않으며 필요 이상으로 결코 오래 머물지도 아니한다.
〔2〕 베드로는 성도들의 환난의 목적과 그 환난 아래서 그들이 기뻐하게 되는 근거를 말해 간다(7절).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환난은 그들의 믿음의 시련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괴롭게 하시는 것은 그들을 파멸케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연단시키시기 위해서이다. 이 시련은 주로 믿음에 대해서 있어지는데 이는 이 믿음의 시련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모든 것의 시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다. 만일 믿음이 서게 된다면 다른 모든 것들도 굳게 서게 될 것이다. 연단받은 믿음은 금보다 더욱 귀한 것이다. 여기에 믿음과 금이 동시에 비교되고 있다. 금은 모든 금속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덕목 중에서 믿음이 그러하다. 즉 그것은 영혼이 하늘나라에 이르게 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연단은 금의 연단보다 더욱 귀한 것이다. 금은 불 속에서 연단 받으므로 증가되거나 더해지지 않으며 오히려 줄어든다. 그러나 믿음은 많은 환난에 부딪침으로 굳게 서게 되며 더욱 증가된다. 금은 결국엔 없어지게 된다. 없어질 금이라는 말이 그것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믿음의 시련은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다. 만일 연단받은 믿음이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하는 것이라면 비록 환난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시련을 겪게 된다 할지라도 금보다 귀한 것이니만큼 이 믿음을 권유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나실 것이다. 시련은 곧 끝나게 될 것이며 영광과 존귀와 칭찬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
〔3〕 베드로는 특별히 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
1) 믿음의 대상의 탁월하심: 그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이다(8절).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존재를 믿는 것과(이는 마귀들도 믿는 바이다) 그를 인격적으로 믿는 것과는 별개이다.
2) 사랑과 기쁨이라고 하는 그들의 믿음의 두 귀중한 산물 혹은 결과: 특히 이 기쁨은 위에 표현되어 있는대로 매우 큰 것이다.
① 감각은 느낄 수 있는 것으로 현재적인 것과 친숙하며 이성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원리인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한층 높이 올라간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
② 참된 믿음은 결코 믿음 자체로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사랑을 낳는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으므로 그에 대해 신실한 사랑을 가진다.
③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는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있다.
그것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최상의 발견은 그것을 경험함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영광의 충만, 곧 하늘나라의 영광의 충만이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기쁨 가운데는 하늘 나라와 장래의 영광이 풍성히 들어있다. 그들의 믿음의 근심된 것들을 몰아내며 기뻐할만한 최상의 이유들을 가져다 준다. 이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매우 기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그들이 매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9절). 그들이 받은 축복을 보도록 하자. 그것은 여기서 믿음의 구원에서 끝이 나게 된다. 영혼의 구원은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구한 상급이자 그들이 목표했던 것으로 그것은 매일 매일 그들에게 더욱더 가까와졌다.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매일 그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이다. 신자들은 거룩함과 하늘에 속한 마음을 소유함으로 하늘나라의 시작을 가졌다. 그들은 세상에서 잃어 버리는 편에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에게 그들이 받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즉, 비록 그들이 보다 못한 유익은 잃고 있지만 그들은 시종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의 복락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만일 전자를 올바르게 구한다면 우리는 후자에도 이르게 될 것이다.
선지자가 예언한 구원 ( 1:10-12 )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자신일 말한 것에 대한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 선지자들의 선례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1. 이것을 부지런히 살폈던 사람들(10)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영감받은 자들로 선지자들이었다.
2. 그들이 살핀 내용(10)
그것은 '구원과 너희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들은 빛과 은혜와 위로의 영화로운 시대를 미리 내다 보았으며, 이것은 선지자들과 의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시대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보고 듣는 것을 바라게 만들었다.
3. 그들의 연구의 태도(10)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이말은 바닥을 파서 흙 뿐만 아니라 암석까지라도 뚫어서 광석을 캐내는 광부들을 연상케 하는 강하고도 힘있는 표현이다. 이들 경건한 선지자들은 그처럼 열정적으로 알고자 힘썼으며, 자신들의 연구에 부지런했다. 그들이 영감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그들의 부지런한 연구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가르침은 가장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연구되고 찬양되어 왔다. 이 큰 구원과 그것을 가져다 준 은혜에 대해서 잘 아는 자들은 그것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필 수 있어야 한다.
4. 옛 선지자들이 주로 연구한 특별한 내용(11)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연구의 주제였다.
〔1〕 예수의 낮아지심과 죽으심, 그리고 잇달아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결과들: 이것에 대한 연구는 그들에게 복음 전체를 보게 해 주었다.
〔2〕 의심할바 없이 이들 경건한 선지자들은 인자의 시대를 보기를 열망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목적에 대해서 어떤 것을 알려 주는 한 그 성취의 때에 몰두하였다. 그 시대의 특성에 대해서 또한 엄격히 고찰되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본으로부터, 영광을 얻게 되기 전에 봉사와 고난의 때가 있게 된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베드로에게 있어서도 그러했다. 따라서 그 제자는 그의 주보다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5. 그들의 연구가 성취됨으로 결실을 맺음(12)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평온하게 하시기 위하여 만족할만한 계시를 주셨다. 그들은 이러한 일들이 자기들의 시대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라는 말씀이 그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전혀 오류가 없으신 성령의 지시하심 가운데서 온 세상에 알릴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우리는 세 부류의 탐구자들을 보게 된다.
(1) 그것을 '부지런히 살펴 본 선지자들'.
(2) 모든 예언을 살펴 보고 그것들의 성취를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을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알린 사도들.
(3) 이 문제들을 가장 주의 깊게 들여다 보는 천사들. 그리스도에 대해서 부지런히 알고자 힘 쓰는 자는 반드시 좋은 성과로 응답받을 것이다.
가장 경건하고 훌륭한 사람들일지라도 때때로 그들의 정당하고 경건한 요구가 거절당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에 따라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자신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이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였다. 자신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들은 시종일관 철저하게 지속되고 있다. 즉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은 동일하신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복음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것의 성과는 그의 역사와 축복에 달려 있다. 이 복음의 비밀들은 매우 영화로운 것이었으므로 복된 천사들조차도 그것들을 살펴 보기를 원하였다.
츌처 ; 메튜헨리 주석 : 작성자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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