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의 산책

예레미야 24장 무화과 두 광주리/ 주석

by 은총가득 2020. 11. 24.

렘 24: 1-7

* 주전 597년에 예루살렘에 이방 군대가 처음으로 들어온n뒤에 성읍n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붙잡혀 간 사람들을 하나님이 멸망시킨 죄인들로 여기고(겔 11:1-11) 교만하게 깔보았다. 그러나 사로잡혀 간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곧 그들은 백성n중에 가장 좋은n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은 지키시고 돌아보아 주시려 한다는 것이다(렘 29: 4-14).

 

4. 만군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 만군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말씀이니라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14. 이것은 여호와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절의 약속은 31: 31-34에서도 자세히 말씀신다. 

 

새 언약

31. 여호와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따라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큰 교훈을 얻게 된다.


 

예레미야 24장 주석

 

=====24:1

1-3절에는 무화과의 환상이 나오고, 4절이하에는 이 환상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이어진다. 본문의 환상은 그 내용면에서 암 8:1-3의 '여름 실과 환상'과 유사하다.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 이 환상에 대한 설명이 시작되기 전에 우선 역사적 연대를 나타내는 어구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구문상 괄호로 묶어두어야 할부분이며, 그 연대가 명확하게 지시되어 있다. 이 연대에 따르면 이 환상은 B.C.597년이후에 주어진 것이다. 여고냐는 다른 곳에서는 고니야라고도 불렀으며, 또한 왕명(王名)으로는 여호야긴으로 불렀다.

 

=====24:2,3

성전 앞에 놓여 있는 무화과 두 광주리 중 하나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들어 있었고 다른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들어있었다.이 광주리들이 성전 앞에 놓여 있다는 점을 중시하여, 어떤 학자들은 이를 성전 제단에 바쳐진 예물(Graf) 혹은 여호와께 드리는 수확의 맏물등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사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환상에 대한 묘사인 까닭에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 이해함이 나을 듯하다(Delitzsch). 그렇다면 이 무화과들은 여호와께 나아오는 유다 백성들을 상징하며, 좋은 무화과란 여호와께서 인정해주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자들로서 여기서는 포로로 잡혀가는 자들을 지칭하고 있다(5절).

 

=====24:4,5

본문은 여호와께서 포로로 이미 붙잡혀 간 자들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풀고자 하심을 보여주신다. 그들은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여호와의 자비를 구하며 회개할 것이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선한 존재들로 보신다는 것이다(Clarke).

물론 이들에게 회개하는 심령을 주시는 분도 바로 여호와시다(7절). 이제 미래는 그들에게 있다.

한편B.C. 597년에 바벨론으로 옮겨진 자들은 이 나라의 지도층이었으며, 핵심되는 인사들이었다(왕하 24:14-17).

이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거부하였으나, 막상 그 예언이성취되는 것을 경험하자 많은 이들이 뉘우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반면에 끝까지 유다땅에 남아 있던 자들은 예레미야에 대한 적대감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그는 이 기간 곧 B.C. 597-586년 사이에 심각한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Thompson).

 

=====24:6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세우고', '헐고', '심고', '뽑는다'는 동사들은 1:10에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본서에서 계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12:14-17;31:27, 28). 이들동사들은 심판과 회복이라는 이중적 주제의 메세지에 주로 등장하고 있으며,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에서는 그의 설교의 핵심을 가리키는 내용으로 쓰였다(1:10). 물론 그의설교의 대부분은 심판 선포에 할애되었으나 군데군데에 회복과 갱신의 메세지도 나타나고 있다.

 

=====24:7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 여호와께서는 특별한 섭리를 그들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며, 그들은 본토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본절 내용은 신 30:1 -10에 나타난 약속,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추방당할지라도 다시금 회개하면 새롭게 회복될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로 볼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내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언약을 갱신하실 것임을 암시한다(Clarke). 또한 그들은 '전심으로'(* - , 베칼 레브) 그에게로 돌아올 것인데, 이러한 전인적인 돌이킴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에 의해 누차 강조된 바이다(29:13;31:33;겔 36:26,27;37:13, 14, 27 28;슥 13:9 등).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심판이란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새로운 시작이 임하고 있음을 알리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포로중에 있던자들과 B.C. 586년 이후의 사람들은 이런 메세지에 굉장한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24:8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 '악하여 먹을 수 없는 무화과'는 이 땅에 남아 있거나 애굽에 거주하는 자들에 비유되고 있다. 우리는 백성들이언제 애굽으로 도망쳤는지에 관한 충분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친애굽들은 여호아하스가 B.C. 609년 그곳으로 잡혀갔을 때 함께 건너가 그곳에 거주했을 수도있을 것이며(왕하 23:34), 아니면 여호야김이 느부갓네살의 봉신이 되었을 때(B.C. 609년경) 또는 느부갓네살이 B.C. 597년에 유다를 침공했을 때 애굽으로 피신했을 수도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기록이 잇는 것은 보다 후대에 일군의 유다인들이 애굽으로 달아났던 사실에 관한 언급이다(43, 44장).

 

=====24:9,10

여호와의 뜻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유다 땅에 남거나 애굽으로 피신하기를 원하는자들은 더욱더 마음이 완악해져서 회복 불가능의 상태에 처한 가운데 파멸당하고 만다는 예언이다.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 이들 중에 많은 자들은 갈대아인들과벌이는 전쟁의 칼과 기근으로 쓰러지게 될 것이다. 먼저 포로로 잡혀 간 자들은 훗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중에 잡혀가는 이들은 먼저의 사건에서 교훈을 받고 돌이켜야 마땅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전보다 더욱더 마음을 굳게 하고 완악 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중에 대부분은 결코 귀환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이방 민족들과 뒤섞이게 되었을 것이다.

 


예레미야 24장



Ⅰ. 무화과 나무의 환상과 그 의미 24:1-10

이 짤막한 장은 같은 섭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다른 긴 장들을 수월하게 해석하도록 도와 준다. 다시 말하여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재난에 처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유익을 가져오도록 예정되어 있으며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손 안에 있는 훈계의 회초리와 같다는 것이다.
(1) 이 설교가 행해진 시기는 여고냐가 포로된 얼마 뒤이었다(1절). 여고냐는 경시당하는 '천한 파기'였다. 그러나 그와 함께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는 에스겔과 같이 매우 귀한 자들도 있었다(겔1:12). '유다 방백들' 중 많은 수가 포로로 끌려갔다. 백성들 가운데서는 단지 '목공들과 철공들'만이 강제로 끌려갔었다. 이는 갈대아인들이 그러한 직종의 사람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점성가들과 천문 관측자들은 대단히 많았지만 철공들과 목공들은 크게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렇게 끌려간 백성들 가운데에는 많은 선량한 자들이 있었다. 이것을 예레미야 선지는 마음 아파하고 있는 반면에 어떤 자들은 그렇게 포로 신세가 된 자들을 모욕하며 의기양양해 하였다.


(2) 예레미야는 환상을 보는데, 사로잡힌 자들에 대한 구별이 이 환상을 통하여 그의 마음 속에 나타난다. 그는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았다. 이는 하나님의 영예를 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적인 자비를 부여해 주심으로써, 아울러 계획되어 있는 현세적인 자비도 허락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7절). 그들은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모든 계시와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것보다도, 바벨론에서 그의 섭리를 통하여 그를 훨씬 더 잘 알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약속되고 있다. "나를 아는 머리가 아니라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되리라고 약속하시며 책임지신다. 그가 우리를 돌이키시면 우리는 돌아서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을 배역했던 자가 만일 진정으로 그에게로 돌아온다면, 그는 다른 하나님의 백성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언약의 온갖 특권과 위안을 값없이 받게 된다.


2) 나쁜 무화과의 교훈이 나온다.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은 교만하며 안전을 확신하고 있었다(겔 11;3). 많은 자들이 저희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도피처를 찾아 애굽으로 피신하였는데, 그들은 그곳에서조차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행동을 하였으면서도 스스로 현명하게 행동하였노라고 장담하였다. 이제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을 그렇게 경멸하며 바라보던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되고 있다.
① 이미 포로로 끌려간 자들은 한 나라에 정착하여 서로 교제하는 낙을 누리는 반면에 이들은 뿔뿔이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질' 것이다.
② 포로된 자들은 저희의 유익을 위하여 잡혀간 것인 반면에 이들은 '환난을 당하기' 위하여 모든 나라들에 흩어질 것이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그들을 완강하게 굳어지게 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도록 만들 것이며 오히려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할 것이다.
③ 저들은 역경 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될 터이나, 이들은 온 인류에게 버림받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로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9절).
④ 저들은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반면에, 이들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될 것이며 고향 땅을 결코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⑤ 저들에게는 보다 좋은 시절이 예비되어 있었으나 이들에게는 보다 나쁜 시기가 예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느 곳으로 흩어지든지 간에 '칼과 기근과 염병'이 뒤이어 보내질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로마인들에 의한 유대인들의 마지막 멸절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는 것인 듯하다. 그때에 의뢰했던 자들은 보살핌을 받았으나, 불신으로 완강하게 버텼던 자들은 모든 나라 중에 흩어져서 '조롱과 저주'를 받았다.


포로가 된 여호야김 왕(열왕기 하 24:1-7)

 

우리는 구약 성경의 역사와 예언에 있어서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한 인물의 이름을 여기서 처음으로 대하게 된다. 그 이름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이다(1절). 그 이름의 뜻은 황금의 머리란 뜻이다. 그는 세력 있는 왕이었고,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의 땅에는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그가 예루살렘 멸망과 유대인의 포로 사건에 개입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름이 성서에 기록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Ⅰ. 그는 여호야김에게 공물을 받았고, 3년 간 속국 상태로 붙들어 두었다(1절).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김의 재위 제4년 때 통치하기 시작했다. 여호야김 재위 8년에는 느브갓네살이 여호야김을 포로로 잡아갔지만,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그에게 자유를 회복시켜 주었다. 3년 간은 그 약속이 지켜졌으나, 그 다음에는 아마 애굽 왕의 도움을 받을 희망으로 느브갓네살을 배반했다. 만약에 그가 자기 하나님을 그토록 섬겼더라면, 그는 바벨론 왕의 종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일과 "열방들의 왕을 섬기는 일" 과의 차이점을 알려 주셨다(대하 12:8). 만약 여호야김이 자기의 노예적인 위치에 만족하고 자기가 한 약속을 지켰더라면, 그의 처지가 그토록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 왕에게 반역함으로써 그는 스스로 더 어려운 곤경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Ⅱ. 여호야김이 반역하자, 느브갓네살 왕은 그를 대적해서 그 나라를 멸하기 위해 자기의 군대를 보냈다. 즉 갈대아 부대와 아람 부대, 모압 부대, 그리고 암몬 자손의 부대 등인데, 이 나라들도 모두 바벨론 왕을 섬기며 그에게 공물을 바쳐 왔다(2절). 이들은 모두 동시에 기용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들의 오랜 적개심을 발로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그들이 바벨론 왕의 파송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왕 중의 왕이신 분의 명령을 받고 있다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그(여호야김)를 대적하여" 이 모든 부대를 "보내셨다" 고 했다. 그리고 나서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 바" (3절)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더라면 느브갓네살의 명령만으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다를 괴롭혀서 고통을 당하게 하는 데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1. 므낫세의 죄악을 벌하시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삼 사대에서" 벌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혹시 회개하는지를 알아보시기 위해서, 그들을 벌하기 전에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그들을 개혁하려는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옛날로 돌아가 과거의 우상 숭배를 다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옛 습관으로 옷을 갈아 입게 되었으니, 옛 심판을 다시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쌓아두시고" "그의 곳간에다 봉인하셨던" 바를 다시 꺼내 놓으신 것이다(신 32:34; 욥 14:17). 또한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은 유다를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셨고, 온 세상에 "시간이 죄악의 형벌을 없어지게는 못한다" 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집행 유예는 결코 용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다 알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므낫세가 행한 모든 악행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특히 "그가 흘렸던 무죄한 자들의 피" 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중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증인들과 예배자들의 피" 였을 것이다. "여호와는" 그런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 그렇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다만 성령을 거역하는 불경죄 외에도 또 있다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용서란 현세적 형벌에 대한 용서를 뜻한다. 므낫세는 회개했다. 그러므로 그가 범죄한 종교적 박해나 살인죄는 당연히 용서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닥쳐 올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제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죄들은 민족적인 죄악들이었으므로, 그 나라가 책임을 져야 하며, 민족적 심판은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마 당시에 생존해 있는 자들 중에는 그같은 범행에 협력했던 자도 있었을 것이다. 예레미야 22장 7절에 나타난 바대로 당시의 왕도 또한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죄악을 범했던 것이다. 살인죄란 하나님을 얼마나 분노케 하는 죄악이며, 얼마나 큰 소리로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그 복수를) 울부짖는 죄악인가를 깨닫자. 민족들이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인하여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 선조들의 죄악을 얼마나 애통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자.

 

이로써 하나님은 예언의 성취를 의도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바로 "여호와께서 그의 종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서" 된 일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가 땅에 떨어지기보다는, 유다가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사라지게 되고"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이다. 죄인들이 회개하여 막지 않는다면, 경고도 약속처럼 확실히 실현되고 말 것이다.

 

Ⅲ. 애굽 왕도 역시 바벨론 왕에게 정복당했다. 바벨론 왕이 그 나라의 대부분을 점령해 버렸다(7절). 아주 근래에 바로는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있었다(23:33). 그러나 이제는 그 자신이 몰락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거나 동맹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 아무런 조처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감히 "자기 나라에서 나올 수도" 없었다. 그후 그는 시드기야 왕에게 어떤 구조를 줄려고 시도했었으나,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렘 37:7).

 

Ⅳ. 여호야김은 자기의 나라가 황폐하게 되고, 자기 자신도 이제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됨을 알고는, 괴로워하던 나머지(아마 그런 것 같다) 한창 나이에 죽었다(6절). 그래서 "여호야김은 그의 열조와 함께 잠들었다." 그러나 그가 "그들과 함께 장사되었다" 하는 말은 없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분명히 성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그가 그의 아버지 때처럼 애곡을 받지도 못할 것이요,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여" (렘 22:18, 19), 그의 시체는 버림을 받으리라고 했었다(렘 36:30).


포로가 된 여호야긴 왕(열왕기 하 24:8-20)

본문은 여호야긴 왕의 "통치" 역사이다. 그러나 슬프다! 그것은 여호야긴 왕의 "유배" 의 역사에 불과했도다(겔 1:2 참조). 그는 왕관으로 나아갔으나, 그것을 머리에 쓰는 명예를 갖지 못하고 그것을 잃어버리는 수치만을 당했다. Ideo tantum venrt, ut exiet-" 그는 단지 퇴장을 위하여 들어왔다."

 

Ⅰ. 그의 통치는 짧았고,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그는 불과 3개월을 통치하고는 제거되어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갔다. 아마 그의 아버지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호야긴처럼, 무너지고 있는 집, 몰락하고 있는 왕좌로 나아가는 젊은 왕은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그 낳은 아들을 자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의 어리석음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하며, 자신의 비참 이외에는 자기 자식에게 아무 것도 남겨 주지 못하는 아버지는 얼마나 비정한 사람인가!

그러나 이 젊은 왕은 자기가 자기의 열조의 죄로 인하여 정당한 징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입증할 수 있을 때까지 오래도록 살았다. 그 이유는, 그가 열조의 전철을 밟았기 때문이다(9절). 그 열조가 행했던 바와 같이,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고 했다. 즉 그는 그 저주의 상속을 중단시키거나 왕관에게 붙어 내려온 짐(transit cum onere-짐은 왕관과 함께 물려진다)을 덜기 위한 조처를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열조들의 죄악도 바로 그의 죄악으로 치부되고 만 것이다.

 

Ⅱ. 여호야긴이 정권을 잡은 바로 그때부터 그와 그의 족속과 그리고 그 백성에게 재난이 내렸는데, 그것도 매우 가혹한 재난이었다.

 

1.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에 의해서 포위되었다(10, 11절). 그는 유다를 파괴하려고 자기의 군대를 보낸 적이 있다(2절).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직접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신 28:49). 즉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너를 치러 한 민족을 오게 하시리니, 그 용모가 흉악하며, (먼저는) 네 토지의 소산을 먹고 (다음에는) 전국(全國)에서 너를 애워쌀 것이다" 는 말씀이다.

 

2. 여호야긴은 즉시 무조건 항복을 했다. 바벨론 왕이 몸소 그 성을 치러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당시 그의 이름은 이미 매우 무서운 공포를 주었다-여호야긴은 담판을 제의하고 그에게로 갔다(12절). 여호야긴이 만일 하나님과 화해를 구하고, 이와 비슷한 경우에 히스기야가 행했던 그 방법을 취했더라면, 바벨론 왕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나아가 용감하고 영예롭게 저항하여 마침내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한 사람이 천 명을 능히 징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신앙과 경건심이 없었으므로, 역시 인간다운, 군인다운, 그리고 왕다운 결단력도 없었던 것이다. 그와 왕족들, 그의 어머니와 아내들, 그의 종들과 방백들은 전쟁 포로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그들이 죄의 종이 된 결말이었다.

 

3. 느브갓네살은 교회와 국가의 내폐고를 약탈했다. 즉 두 곳의 금은을 가져갔다(13절). 그리하여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20:17). 즉 "너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리라" 는 말씀이다. 느브갓네살은, 솔로몬이 만들어서, 낡은 그릇이 못쓰게 되면 쓰려고 보관해 두었던 성전 그릇들까지도 산산조각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본 후, 그 그릇들을 자기가 사용하려고 보관했었다. 벨사살 왕이 성전 그릇으로 술을 먹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단 5:2, 3)

 

4. 그는 예루살렘을 약화시키려고, 그 대부분의 주민들을 데려갔다. 그것은 자기의 지배권을 실제로 확고히 하며, 그들의 반란을 방지하며, 자기의 재산을 늘이고 일손을 덜기 위한 조처이기도 했다. 이보다 8년 전, 즉 느브갓네살 재위 제1년이며 여호야김 재위 제3년에도 유배되어 간 자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이 있었다(단 1:1, 6 참조). 그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이 결국 잘한 일이라는 것이 판명되자, 이 교활한 왕은 욕심이 생겼다.

(1) 그래서 그는 그 젊은 왕은 물론이요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15절). 그 왕은 37년 동안 죄수노릇을 한 사실을 볼 수 있다(25:27-29).

(2) 그리고 여호야긴 왕의 중요 자리에 있던 자들도 끌고 갔다. 즉 관리들이었는데, "그들은 재물을 지켰으나 그것이 자기에게 해가 된" 자들이요(전 5:13), 그 원수들에게 그들을 먼저 먹으려는 유혹을 준 자들이 되었다.

(3) 모든 군인들을 끌고 갔다. 즉 "힘센 용사들" (14절)과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 (15절)과 그리고 "싸움에 능하고 강한 모든 용사들" 을 잡아갔다(16절). 이들도 자기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복자는 그들에게 자기들의 나라를 방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그들을 데려다가 그의 일을 시켰던 것이다.

(4) 전쟁 무기를 만들던 모든 기술자들과 대장장이들이 끌려갔다. 느브갓네살은 그들을 데려감으로써, 사실상은 블레셋 사람들의 정략대로(삼상 13:19), 예루살렘을 무장해제시켰다.

이렇게 끌려간 포로들 중에는 에스겔 예언자(겔 1:1, 2)와 모르드개(에 2:6)가 있었다. 그리고 이 여호야긴 왕은 또한 "여고냐" (대상 3:16)라고도 불리웠는데, (그의 포로가 예언되었던 예레미야 22장 24절에서는) 경멸조로 "고냐" 라고 불리웠다.

 

Ⅲ. 바벨론 왕은 여호야긴의 대리로 그 후계자를 지명했다. 하나님은 그가 무자(無子)하다고 기록했다(렘 22:30). 그러므로 그의 삼촌이 그 정부를 위임받게 된다. 바벨론 왕은 요시야의 아들 맛타니야를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그가 바벨론 왕 자신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본인과 온 세상에 알게 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바꾸어서 "시드기야" 라고 불렀다(17절).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저희가 왕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다" 고 책망하셨었다(호 8:4). 그리고 그것을 벌하기 위하여 바벨론 왕이 그들의 왕을 세우게 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고 주장하던 그 자유를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다. 바벨론 왕이 그에게 주었던 그 이름은 "여호와의 정의" 를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멸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영화롭게 되리라는 한 조짐이었다.

 

1. 이 시드기야가 얼마나 불평했는가를 보라. 그의 직계 선왕 3명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그들의 발자취를 밟지 않아야겠다는 경고를 받았어야 옳았겠지만, 그도 다른 왕들처럼 "악한 일을 행했다" (19절).

 

2. 그가 얼마나 우둔했는지를 보라. 신앙을 잃게 되자, 그의 선왕이 용기를 잃었듯이, 그는 지혜를 잃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조공을 바치던 "바벨론 왕을 배반했기" 때문이다(20절). 그리하여 그는 전혀 대항할 수 없는 자를 격노케 했다. 만일 그가 계속해서 바벨론 왕에게 충성했더라면, 그가 그를 잘 보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대의 어리석은 일이었고, 그의 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유다)을 당신 앞에서 쫓아내시게 된" 그 진노에서 연유된 일이었다. 한 민족의 정책을 맡은 자가 어리석게 행동하여 그 나라의 참된 이익에 거슬러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나님이 신실한 자의 말을 제하시며, 노인들의 총명을 제거하시고, "또한 공공의 평화에 속한 것들을 그들의 눈에서 감추시는" 것은 바로 그 백성의 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멸망하시려는 자들을 우선 바보가 되게 하신다.


 

 

좋은 무화과 광주리(24,1~7)

 

이 비전은 여호야킨이 끌려간 bc 597년과 나라가 아주 멸망한 bc 587년 사이에 받은 환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무화과가 가득 담긴 광주리 두개를 보여주셨는데 하나는 좋은 무화과였고

다른 하나는 먹을 수 없는 나쁜 무화과였습니다(1~4절)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빌론으로 내쫓은 유다 포로들을 이 좋은 무화과처럼 좋게 보아주겠다

나는 그들이 잘 되게 눈길을 주고 그들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그들을 세우고 부수지 않겠으며 그들을 심

뽑지 않겠다"((5~7절)

 

이순간 파멸의 먹구름이 유다 위에 드리웠지만 언젠가는 나님이 유다를 다시 세우시고 심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

님이 자기 백성을 재건하는데 사용하실 거룩한 씨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예언자의 비난을 받기는 했

지만 좋은 무화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가 된 것은 그들의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주님임을 알아보는 마음을 주겠다. 리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것이다 그들이 온전한 마음으로 나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7절)<가져온 글>

 

 

'구약의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도서 서론 및 1-2장 주석  (0) 2020.11.28
모세의 지팡이  (0) 2020.11.28
예레미야 17장 주석  (0) 2020.11.24
십계명[Ten Commandmeents]  (0) 2020.11.02
성전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 모세의 종말  (0) 2020.10.29